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5 - 아나키 / 아나키즘 / 아나키스트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5
페터 크리스티안 루츠.크리스티안 마이어 지음, 송재우 옮김 / 푸른역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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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2. '아나키' 개념의 역사적 변천 과정


"용어상으로 엄격하게 이해하자면 이 말은 항상 군사적인 지도자 없음이란 뜻이며, 집정관이 없는 상태와 마찬가지 의미에 결부되었다. 이 밖에 고전시대와 그 직후에는 사실상 지도나 지배가 없는 상태에서 나오게 된 속박 없음과 방종이라는 단지 막연한 의미에서 우선적으로 사용되었고, 혹은 곧바로 불순종이라는 의미와 경우에 따라서는 결과적으로 혼란한 일반적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의 변환은 아마도 구체적으로 〈지도자 없는〉 집단의 행동 방식인 〈민중의 무법지배〉라고 표현하는 거칠고 시끄럽게 소속감이 없는 군중의 상태나 혹은 〈무법 상황에 빠진 해군들〉이라고 표현되는, 해군들의 뻔뻔스럽게 통제되지 않은 상태를 빗댄 것이리라." "폴리스와 연관되어서도 이 낱말은 〈속박이 없음〉, 〈방종〉, 〈무질서〉란 막연한 의미에서 사용되었으며, 실제로 아이스퀼로스와 플라톤도 사용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번 사용하였다."(16-7)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정치체제 이론의 틀 내에서 '아나키'를 최초로 명확하게 언급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마키아벨리도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라는 세 가지 〈좋은〉 형태의 지배를 언급했다. 〈좋은 것들은 이 세 가지이고, 나쁜 것은 또 다른 세 가지인데, 이들은 앞의 세 가지에 좌우되며 각각 비슷해서 매우 쉽게 다른 것으로 바뀐다. 왜냐하면 군주제는 쉽게 전제정이 되며 귀족정은 과두제가, 민주정은 쉽게 아나키로 바뀌기 대문이다.〉 이처럼 마키아벨리에게서 민주정이 아나키를 만든다는 표현이 명확하게 발견된다." "보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완성된 형태의 공화국 이전 단계로 지배가 없는 〈국가civitas〉를 앞에 두는 것이 옳은지를 묻는다. 보댕은 이것을 거부하고, 법과 지배가 없어서 결국에는 주권자가 없는 이러한 상태를 〈아나르키아anarchia〉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의미의 확산을 통해서 '아나키'는 (모든 법적인 통치권력의 반대 개념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차원으로 나아가게 된다."(27-8)


"18세기에는 아나키 개념이 폭정과 새롭게 연결되었다. '폭정Despotie'이 '폭정적' 및 '포악한'과 함께 이미 홉스를 통해서 당시 정치적 논의에 도입되었으며, 아나키 개념의 수용은 나중에야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관에서 순환 모형의 새로운 변형이 제시되었다. 아나키는 폭정/압제정을 만들고, 폭정/압제정은 아나키를 생성한다. 이와 함께 아나키와 폭정은 서로 비교되고 평가되었다. 어쨌든 실제적 기능과 연관하여, 특히 그 논란의 정점에는 폭정은 아나키보다 좋다/나쁘다, 혹은 양쪽이 동일하다가 있다. 이러한 연관이 사라지게 된 19세기와 달리 '아나키'는 끊임없이 폭정/압제정과의 직접적 연관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의 동일성은 그 부정적 절대성으로부터 나왔다. 양자는 〈자유〉와 〈질서〉에 대립되었다. 아나키나 폭정은 법과 질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질서 없는 자유는 압제를 부르는 방종이며, 자유 없는 질서는 아나키로 몰락하는 노예 상태이다.〉"(34)


"18세기 후반에 '아나키'는 무엇보다도 계몽철학자들과 저술가들에 의해서 긍정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1778년 《독일백과사전》의 샤이데만텔 및 아델룽은 아나키를 사회 형태로 최초로 부각시켰다. 클뤼겔과 쥐스티처럼 영국의 공리주의자와 유사하게 이들은 사실 항상 사회적 행복이라는 이상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아나키'는 이제─보댕과 유사하게─〈평등하고 불평등한 사회가 서로 구별되듯이 국가에 대립적인 사태이다.〉 국가 이전의 사회와 국가 사회는 아나키와 국가처럼 대립적으로 존재하였다." "브로크하우스의 1814년의 《초기 백과사전》은 정치체제의 개념으로 '아나키'와 가족, 공동체, 사회에 연관된 사회적 범주로서 '아나키' 사이의 결합을 담고 있다. '아나키'는 〈공동체적인 통체 형태를 가지지 않는─그리고 이와 함께 권세, 계층, 폭력이 없는─하나의 민족 단체Volksverein〉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정의의 설명에서 비로소 '아나키'가 〈무질서와 해체〉의 상태로 특징지워졌다."(43-5)


3. 18~19세기에 전개된 '아나키' 개념의 영역 확대


"이미 프랑스혁명 이전의 여러 가지 사건에서 시작된 아나키 개념의 역사화 과정은 1790년대에 절정으로 치달았다." "'아나키'가 〈과도기〉 혹은 〈특정한 상태〉라는 생각은 점차 줄어들었고, 이제는 〈자연적 사회〉에서 자유의 행복한 장소로도 받아들여졌으며, 이에 더하여 당파적 개념,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무기, 투쟁의 개념이 되었다." "역사철학적 시각에서 아나키의 직접적 정치화와 함께 먼저 프랑스에서, 이어서 독일에서 '아나키스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나타났다. 정치적 일상의 투쟁에서 여러 정치적·사회적 집단들이 서로 상대방을 〈아나키스트〉로 불렀다. 그리하여 1800년 이후에 아나키스트란 1790년대의 일상적 투쟁이 바래고 난 뒤에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 물론 나중의 공산주의자에 의해서 점차적으로 부르주아적 사회에서 지위와 세력으로 성장하지 않은 국외자, 사회적 가장자리 집단으로 불렸다. '아나키스트' 개념은 사회적으로 국외자 집단의 자기인식이라는 기능을 맡게 되었다."(52-3)


"괴레스는 아나키를 완성된 정부 형태로 정의하였다. 〈야만의 상태에서부터 사회로의 첫 발걸음이 이러한 문화로 넘어가는 것이라면, 압제적 정부 형태에서 대의적 정부 형태로 옮겨가는 것은 두 번째 발걸음이다. 이로부터 순수하게 민주정적인 정부 형태는 세 번째 옮겨감이며, 여기에서 아나키로 가는 것은 최종적으로 마지막 옮겨감이다.〉" "여기서 '아나키'는 말 그대로 지배 없음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초험철학에 와서야 비로소 아나키 개념이 절대적 자유가 되었다. 〈·····자유는 상상의 첫 번째 조건이며, 순수 오성의 마지막 목적이며, 오성은 보다 높은 것에서부터 유한한 것에 영향을 미치며, 목적은 가상을 없애거나 유한한 것을 없앤다. 이러한 목적에 도달하게 되는 만큼 이것은 우리를 자유로 인도한다. 자유의 개념에 따른 사회는 아나키로 존재하게 되며─사람들은 이런 사회를 신의 나라, 혹은 황금의 시대라고 부를 것이리라. 본질적은 것은 물론 아나키여야 한다.〉"(59-60)


"아나키와 폭정의 근본적인 분리는 흥미롭게도 결국 국가학에서부터 도입되었다. 크리스티안 다니엘 포스는 1797년에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개념에 대한 올바른 규정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혁명의 전체 기간 동안에 결코 아나키가 발생하지 않았다. 항상 공동체로부터 인정된 최고 권력이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였고 영향을 행사하였으며····· 공동체로부터 인정된 권력이라는 얼굴을 가진 악의적인 권력의 소유자로부터 강탈을 당하고, 살해되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아무도 권력 행사자 측의 사람에 대해서나 잘못 사용된 최고 권력의 행사자로부터 자신의 삶이 안전하지 않으므로, 아마 여기에는 전제정치와 같은 것이 있었더라도 결코 아나키는 없었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아나키와 폭정/전제정치의 구분은 결국 프루동과 모제스 헤스에게 나타나는 확실히 긍정적 정치체제 형태로 아나키의 규정을 위한 전단계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리가 이 시대의 일반적 사회 의식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64-5)


"헤겔은 아나키가 지배의 타락 형태라는 특별한 표현 방식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독일의 정치체제론》이라는 초기 저작에서 헤겔은 집중적으로 당시의 독일이 하나의 '국가'인가라는 물음에 몰두하였다. '국가'에 대한 상대 개념은 당시 그에게 '아나키'였고, 강한 표현으로는 〈개방적 아나키offene Anarchie〉였다." "(하나의) 상태로서 '아나키'에 관한 전통적 의미와 함께 보수적 반동이 생겨났다. 보수주의자 폰 데어 마르비츠는 아나키를 〈지위와 귀족의 말살 후에 또는 군주의 권력을〉 부수는 〈완전한 아나키〉로, 그리고 폭정과 유사한 〈비국가〉로 보았다." "'진보', '폭동의 정신', 〈민족국가〉는 메테르니히와 그의 이데올로그가 싫어한 것이다." "따라서 메테르니히는 벨기에, 폴란드, 이탈리아에서 7월혁명의 발발 이후에 자유주의적이며 혁명적인 세력과 연관하여 〈아나키스트적인 패거리Faktion〉에 대해서 말했는데, 스위스의 젊은 독일인들은 그가 보기에 〈아나키의 반사회적 분자들〉이었다."(70-2)


4. '아나키' 개념의 확산과 반발


"프루동은 '아나키' 개념을 그의 투쟁적 저술인 《소유란 무엇인가?》(1840)에서 건드렸다. 〈인간이 평등 안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것처럼, 사회는 아나키 안에서 질서를 추구한다.〉 여기에서 그는─인간과는 무관한 최후의 진리로서─정의와 평등을 〈수학적 진리〉와 비교했다. 그의 유작 《수첩Carnets》에까지 일관하는 '아나키'의 긍정적인 의미 내용을 그는 '아나키'의 전래적인 부정적 정의와 대립시켰다. 〈아나키는 군주, 주인의 부재이며, 이것이 우리가 매일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정부의 형식이다. 인간을 규칙으로, 인간의 의지를 법률로 간주하는 고질적 습관이 우리를 혼돈의 표현이자 무질서의 만연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프루동에 따르면, 〈자유는 그것이 의지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직 법률의 권위, 곧 필연성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아나키이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조직적이다.〉"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프루동은 아주 솔직하게 표현한다. 〈아나키는····· 하나의 정부 형태나 정치체제이다.〉"(95-6)


"프랑스혁명 후 수십 년간 아나키 개념은 모제스 헤스를 통하여 마지막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다시금 모든 풍부한 혁명적 및 혁명 이후의 의미 내용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헤스는 한편으로는 확실히 프루동을 넘어서서 모든 권위와 계급을 지양하는 것으로서 아나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의 긍정적 위치로서 아나키를 찾아냈다. 〈무신론과 공산주의라는 양쪽의 현상이 되돌아가게끔 아나키는 사회적 삶에서처럼 정신적인 삶에서 모든 지배의 부정이며, 모든 규정의 단적인 말살로 먼저 나타나며, 이와 함께 모든 현실의 단적인 말살로 나타난다.〉" "그는 〈·····모든 공산주의와 무신론, 모든 아나키·····〉라고 말하면서 아나키와 동일하게 보았던 이 시대의 위대한, 다시금 화해되어야 하는 힘인 무신론과 공산주의를 아나키로 환원시켰다. 이에 상응하여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가 같은 차원에서 언급되었다. 헤스는 프랑스혁명으로 절대적-역사적 새로운 시작이 제시된 것으로 보았다."(98-9)


"1830년 이래로, 특히 1848년 이래로 자유주의자·보수주의자·혁명주의자는 아나키와 아나키즘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였으며, 확고해지는 부르주아 사회의 진행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성적 긍정성의 원리에 정착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서 거의 모든 책임전가의 수단은 정당화되었다. 그리하여 1848년 독일가톨릭연맹 독일국민회의는 〈잘못 이해된 자유 개념의 표현이 독일의 많은 지역에서 아나키적 운동을 자극〉하였다는 점을 경고하였다. 아나키는 이제 〈국가에 대한 범죄, 대역죄, 반란〉으로, 또한 〈비정상, 사회적 관계의 결함〉으로 공공연히 비난받았다. 이 세기의 초엽부터 형성된 이와 같은 평가절하는 확대된 정치체제 개념의 틀 속에서 계획되었다.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실행하는 권력이 중지되거나, 법이 압력을 행사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이 방해받고 추락하기 때문에 아나키는 국가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100-1)


5.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스스로 '아나키즘적'이라고 일컫는 여러 운동이 분류될 수 있지만 국제적 운동으로서 아나키즘과 아나키-노동조합운동의 역사는 1866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자협회의 제1차 정식 회의에서 시작한다. 마르크스와 특히 〈쥐라연맹〉에 모인 바쿠닌 추종자 사이의 모든 내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1872년 〈모든 사회주의자는 아나키를 이렇게 이해한다〉라고 설명했다. 〈일단 프롤레타리아적 운동의 목적인 계급 철폐가 이루어지면 국가의 지배가 사라진다.〉 그는 물론 동일한 〈개인적 통신〉에서 아나키스트를 인터내셔널의 〈분열자〉로 표현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거의 모든 순간에 아나키즘을 모든 조직의 적, 아나키스트를 〈카오스의 친구〉, 부르주아의 개인주의적 유산으로 단정짓고, 그들로부터 〈실제적 사회주의자〉의 모든 특성을 박탈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카우츠키, 투라티, 플레하노프는 이 점에서 그들을 따랐다."(109-10)


"마르크스주의자와 반대로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이를테면 악셀로드,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이 〈민중 속에서 탄생〉되었고, 여기에서부터 그 창조적 이념이 얻어진다고 강조한다. 〈세계 사회주의의 거대한 가족grande Famille du socialisme universel〉이라는 모든 선서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아나키스트 크루아제가 〈아나키는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런데 조직은 최종적 결과의 측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늘 다소간 제한하게 된다. 따라서 아나키는 모든 항구적 체계에 반대한다〉라고 외쳤다." "여기서 개념사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아나키스트'라는 낱말이 1870년대 이래로 부르주아-보수주의 진영에서 나와서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운동, 조합주의적-아나키즘적 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고─이에 대한 반응으로─이로부터 자기 지칭을 위해서 일단 항상 새로운 차별화와 변화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110-1)


6. 전망


"1870~80년대 사전에서 '아나키'는 흔히 〈국가의 결여된 통치권력Gewalt des Staates〉과 함께 대조되었다.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이러한 연관성을 반영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국가(통치)〉와 〈아나키〉를 대조시켰다. 게오르크 짐멜은 자신의 《사회학》에서 '아나키'를 〈뿌리 없음〉과 〈확고한 삶의 감정의 결여〉와 동일시하였다." "1918년 이후에 짐멜은 '아나키' 개념의 소진, 그 임의성과 혼돈 가능성을 이렇게 분석하였다. 〈저런 모든 개별성에는····· 확고함이 바로 경직성, 고정성, 고루함과 같다. 그 본질은 순수한 동요이며, 공허함의 충족, 자극의 최대화, 지적 광채가 언제나 유혹하는 곳으로 저항 없이 흘러가며, 이러한 가치의 동일화를 요구한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들은 모두 다른 쪽에 설 수 있다. 이들이 반동적인지 혹은 혁명적인지, 자유로운 정신인지 혹은 가톨릭적인지, 권위적인지 혹은 아나키적이 되는지는 결국 상황에 좌우되지 내부에서부터의 필연이 아니다.〉"(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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