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전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상구 외 옮김 / 청아출판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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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1949년의 위기


1949년 1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건국 후 첫 소련 방문을 준비 중이었다. 두 사람은 군사동맹조약인 북소우호조약의 체결을 원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소련군 철수 후에 안보를 확보한다는 목적 외에 북한이 행동에 나설 경우 소련의 지원을 확보하려는 속셈도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소련 측은 군사적 상호원조조항을 담은 이 내용을 경계하며 조약 체결을 거부했다.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는 것을 우려했다. 바로 이때 한반도에서는 남측이 38선을 넘어 북측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티코프 대사는 소련 정부가 북한 경비여단에 무기를 제공하기로 이미 결정했음에도, 소련군 연해군관구沿海軍管區는 누차에 걸친 재촉에도 보내지 않은 채 선박이 배정되면 2월 말에는 제공할 수 있다는 변명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북한군 1개 사단과 1개 여단의 편성이 끝났는데도 소련이 약속한 무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며 몰로토프의 개입을 요청했다. 28-30)


2월 8일, 이승만이 케네스 로얄Kenneth C. Royall 미 육군 장관에게 맨 처음 꺼낸 말은 38선의 한국 경찰에게 라이플총을 지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구 일본군 병사였던 한국인이 15만~20만 명이나 되므로 마음만 먹으면 한국군을 6주 안에 10만 명까지 증강할 수 있으며, 북한 측은 사기 면에서 문제가 있으니 남이 공격하면 북한군 대부분이 남에 투항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승만은 “군대를 증강하고 장비와 무기를 공급해 단시일 내에 북한으로 북진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존 무초John J. Muccio 주한 미국 대사가 북한과 평화적으로 교섭할 기회가 있는 한 “그러한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라며 반대했다. 로얄 장관은 미 전투부대가 한국에 있는 이상 북진은 있을 수 없으므로 대통령의 발언은 미군의 즉각적인 전면 철수를 요구하는 것과 진배없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승만은 고문단을 늘려 주고 추가 무기 공급을 “합리적 양”으로 보증해 준다면 즉각 철수해도 말리지 않겠다고 맞받아쳤다. 31)


사태를 가장 걱정한 쪽은 모스크바였다.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극도의 불안감을 느낀 것 같다. 미군 철수 후 벌어질 사태에 대한 불안과 경계는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은 극동의 소련군 당국도 갖고 있었다. 2월 9일 돌연 태평양함대 공군 사령관 세르빈Serbin 소장이 평양에 도착해 소련군 참모본부의 지시에 따라 전투기 연대의 원산 복귀를 위한 교섭을 제의했다. 철수 전에 사용하던 기지는 조선인민군 제2사단이 사용 중이었다. 그곳을 비워 달라는 요구였다. 시티코프는 모스크바의 이러한 결정에 반대했다. 미군이 한창 철수 중인 시점에 소련군 부대가 북한으로 복귀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스탈린은 미군의 한국 철수에 확실하게 제동을 걸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한국군의 북한 공격을 견제하려 했다고 짐작된다. 반면 시티코프가 반대한 배경에는 북한 지도부의 거센 반발이 존재했을 것이다. 김일성 등에게는 미군 철수야말로 지상 최대의 목표였고 그 역행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31-2)


1949년 6월 29일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이 시기 미 육군부는 국무부에 미군 철수와 북의 남침 가능성에 관한 문서를 제출했다. 육군부는 5월 30일 현재 한국군의 병력은 71,086명, 연안경비대 5,450명, 국가경찰 50,434명으로 총 126,970명이며, 북한군은 인민군 46,000명, 경찰 및 기타 56,350명으로 총 102,350명으로 추정했다. 문서는 다섯 가지 옵션을 검토한 다음, 위기가 발생한 경우 유엔의 제재 결의를 확보해 다른 가맹국과 함께 미군이 경찰 행동을 개시하는 옵션 C가 가장 무난하다고 제안했다.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미군이 출동하는 안이나, 트루먼 독트린을 한국에 확대 적용하는 안에 관해서는 “한국은 미국에 있어 전략적 가치가 희박한 지역으로, 한국에서 미군이 군사력을 행사하는 것은 세계정세의 잠재성과 미국이 현재 보유한 군사력에 비해 과중한 국제적 의무들을 안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현명하지 않으며 비현실적이다”라는 참모본부의 결론을 토대로 소극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50)


마침 8월 4일 옹진반도에서는 북한 인민군이 옹진읍 방향으로 38선을 돌파해 맹렬한 포격을 가해 한국군 2개 중대를 전멸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옹진 전투는 김일성 등의 강경한 태도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7월 말 조선인으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이 북한에 들어와 조선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으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8월에는 제164사단도 들어와 인민군 제5사단(사단장 이덕산李德山, 본명 김창덕金昌德)으로 재편됐다. 그 결과 북의 병력은 단숨에 5개 사단으로 증강됐다. 전투 경험이 있는 2만 8천 명의 용사가 도착한 것이다. 정예부대를 얻어 기세가 오른 김일성과 박헌영은 8월 12~14일 무력 해방의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시티코프 대사가 “공격은 남이 북을 선제공격한 때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자 김일성은 38선은 미군이 남아 있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미군은 이미 떠났으니 38선이라는 장애물도 사라졌다고 반박했다. 51-3)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 정책 실현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지 못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앞을 내다보면서 공식 석상에서 꾸준히 ‘북진통일’을 언급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가 12월 23일에 제출된 <NSC 48/1> 문서를 승인했으며 29일에는 트루먼이 승인했다. 이 문서는 현재 아시아의 최대 위협을 소련으로 적시하고 소련의 팽창을 “봉쇄하고 가능한 선에서 축소”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아시아의 연안 도서 연쇄 라인the Asian off-shore island chain’ 유지, 일본·필리핀·오키나와의 확보를 주장했다. 특히 “일본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라며 일본이 소련 블록에 편입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135 즉 한국과 타이완의 위상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소련 또한 중국 혁명은 지지했음에도, 그리고 미국의 일본 단독 점령에 도전하겠다고 결정하고서도 한반도에 대해서는 북한의 무력통일 염원을 1949년 연말까지는 계속 거부했다. 63-5)


제2장. 개전으로 향하는 북한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Dean G. Acheson 미 국무부 장관이 그 유명한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을 했다. 미국이 그은 ‘불후퇴 방위선’ 안에 알류샨 열도, 일본 본토, 오키나와, 필리핀을 포함시키고 한국은 타이완과 함께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커밍스는 애치슨의 연설에는 상대를 끌어들일 의도가 있었으나 북한 측은 이 연설을 ‘청신호’가 켜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명림은 커밍스의 북한 측 분석에 기본적으로 동의했고, 한국 측에서도 ‘불후퇴 방위선’ 밖에 놓였으니 항의하겠다는 판단이 없었다는 것을 논증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박헌영은 미군의 참전을 상정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북한이 행동에 나선들 미국의 참전은 없을 거라 판단했으며 기껏해야 미국이 일본군을 파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김일성 등은 애초에 이 연설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미국의 행동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스탈린은 애치슨의 연설이 미국의 불개입을 시사한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72)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 준비를 위장하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6월 2일 김일성은 조국전선 아래에서 즉각적인 평화통일을 이룩하자고 촉구했다. 7일에는 조국전선이 평화통일 방안의 실현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1950년 8월에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거듭 제의하면서 이를 협의하기 위해 남북 정당 단체의 대표자회의를 6월 중순에 해주나 개성에서 열자고 촉구했다. 나아가 6월 10일 평양방송은 한국에 붙잡혀 있는 남로당의 김삼룡金三龍과 이주하李舟河를 평양에 억류된 조만식曺晩植과 상호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6월 11일 조국전선의 사절 세 사람이 38선을 넘어 한국의 반정부당파와의 접촉을 시도하다가 체포됐다. 이날 한국 정부는 조국전선의 총선거 제안을 거절한다고 발표했다. 6월 12일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의 주최로 회의가 열려 김일성과 각 사단장, 사단 참모장, 포병사령관이 회합했다. 이날 사단장급에 개전 방침이 처음으로 설명됐다. 이 단계에서 실전 훈련이 시작됐다. 85-6)


사람들의 관심은 오랫동안 미국이 북한의 동태를 포착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방관했는지에 집중됐다. 알았지만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미군 철수 후 한국에 남은 정보 수집기관인 KLO는 북한의 군비 증강, 38선 부근의 변화를 포착하고 있었다. 5월 10일의 첩보원 보고를 토대로 작성된 <KLO 보고 518호>가 가장 포괄적이었다. 1949년 8월에 중국에서 2개 사단이 북한으로 들어왔으며, 같은 해 12월에 3개 사단이 추가로 들어와 인민군에 편입되어 현재 7개 사단으로 늘어났고 향후 13개 사단으로 증강될 듯하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의 병력은 7개 사단이며 추가로 3개 사단이 준비된 것을 볼 때 첩보원의 정보는 규모 면에서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 극동군 총사령부 G-2는 한국 병력의 2배 수준이 아니면 북한이 침공할 리 없다고 평가했다. 기상 여건은 4, 5월이 적절하다고 지적했으나 1월 이후의 침공설을 열거한 것은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위험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90-1)


1950년에 들어 북한은 개전 준비에 온 힘을 쏟은 데 반해 한국은 일종의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새해 벽두부터 큰 문제로 부상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이 공격해 오면 북진통일의 기회가 생길 거라고 보았다. 또한 5월로 예정되어 있던 국회의원 선거를 연기할 생각이었다. 4월 들어 애치슨 미 국무부 장관은 3일에 이 대통령에게 각서를 보내 인플레이션 극복을 위한 근본적인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경제 협력 원조 계획을 재검토하겠다고 압박했고 국회의원 선거 연기에 반대했다. 한미 간에 긴장이 고조됐다. 이때 이 대통령은 이범석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이윤영李允榮을 지명했으나 4월 6일 국회에서 4표 차로 부결되고 말았다. 이에 국방부 장관 신성모가 국무총리까지 임시 겸임하게 됐다. 이범석으로는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고 판단해 신성모를 총리 대행으로 앉혀 한미 관계의 개선을 꾀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못을 박은 이상 국회의원 선거를 연기할 수는 없었다. 93-4)


한편, 당시 한국군 수뇌의 행동은 기묘했다. 채병덕 신임 참모총장은 4월 22일 군 수뇌부 인사를 단행하고 백선엽을 제5사단장에서 제1사단장으로, 유승렬을 제1사단장에서 제3사단장으로, 이응준李應俊을 제5사단장으로, 김백일을 제3사단장에서 육군본부 참모부장으로 이동시켰다. 이 이동은 특별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5, 6월 위기설이 공공연히 나돌고, 5월 13일에는 채병덕 본인이 5월 30일에 북의 공격이 예상된다고 발표한 상황에서 곧바로 6월 10일 군 수뇌부 이동을 다시금 단행한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이다. 38선에 배치된 제8사단의 사단장은 이형근李亨根에서 이성가李成佳로, 제7사단의 사단장은 이준식李俊植에서 유재흥劉載興으로, 제6사단의 사단장은 신상철申尙澈에서 김종오金鍾五로 전원 교체됐다. 결과적으로 능력 있는 군인을 임명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신임 사단장의 입장에서는 부임 후 담당 지역을 한 차례 시찰하기도 전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95-6)


제3장. 북한군의 공격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오전 4시 40분 북한군은 38선상의 모든 지점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북한군의 공격 당시 한국군은 경계 태세를 푼 상태로 허를 찔렸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군은 기껏해야 옹진반도에 수도사단 제17연대(연대장 백인엽), 개성에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동두천 방면에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 춘천 방면에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동해안에 제8사단 제10연대와 제21연대, 즉 3개 사단과 3개 연대, 총 12개 연대만이 38선 남쪽을 지키고 있었다. 나머지 3개 사단은 대전, 대구, 광주와 남부에 배치되어 있었다. 북한군 7개 사단, 21개 연대가 전격 공격을 감행했으니 병력은 한국의 2배에 달했던 셈이다. 더욱이 한국군에는 전차가 1대도 없었던 데 반해 북한군은 제105전차여단, 258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군이 버티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26일 오후 1시 의정부가 함락되자 서울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 이 대통령은 27일 새벽 서울을 탈출했다. 98, 101-2)


6월 29일 저녁에 열린 워싱턴의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는 맥아더에게 38선 이북을 목표로 한 공군 작전 확대와 부산-진해에 한정된 미 지상군의 투입을 지시하는 명령을 결정했다. 다음 작전을 결정한 이는 29일 도쿄 하네다에서 수원으로 날아가 전황을 시찰하고 돌아온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한국군에는 반격 능력이 전혀 없으며 추가로 돌파당한다는 중대한 위험에 처해 있다. 적의 진격이 계속된다면 공화국의 붕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라고 진단하고, 현재의 전선을 지키고 나아가 반격하기 위해서는 미 지상군의 투입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즉시 1개 연대 전투단을 투입하고 2개 사단으로 증강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었다. 30일 아침에 열린 백악관 회의에서 대통령의 결단이 승인되어 맥아더에게 1개 연대 전투단과 지휘하의 지상군을 사용할 권한이 부여됐다. 북한에 대한 해상 봉쇄도 결정됐다. 이때 미군의 전면적인 출격이 결정된 것이다. 109)


일본 전 국토는 점차 한국전쟁의 기지로 변모해 갔다. 해상보안청, 국철, 선박, 지자체, 일본적십자사의 간호부 등이 후방 지원에 동원됐다. 그러나 이는 자발적인 정책이 아니라 의무로 강요된 것이었고 점령군의 명령에 복종한 것에 불과했다. 그 결과 일본이 한국전쟁에 실질적으로 참전하면서도 일본 정부는 끝까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일본 국민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독특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7월 18일 맥아더는 거듭 서한을 보내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의 무기한 정지 처분을 내렸다. 7월 24일 GHQ 민정국Government Section의 잭 네이피어Jack P. Napier 공직심사과장이 신문·방송사의 경영자들을 모아 놓고 ‘레드 퍼지red purge’ 방침을 내비쳤다. 그에 따라 7월 28일 중앙의 8개 신문사에서 공산당원과 그 동조자로 지목된 직원 총 336명이 해고됐고, 8월 말까지 전국 50개사에서 704명이 해고됐다. 그 후 추방은 일반 민간기업과 관청으로 확대되어 연말까지 약 1만 3천 명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117)


한국전쟁 개전 소식에 가장 순수하게 기뻐한 것은 타이완의 중화민국 정부였다. 1950년 5월 타이완 주재 미국 대사 로버트 스트롱Robert C. Strong은 6~7월에 중공이 타이완을 침공할 거라고 보고했다. 국무부 역시 사태의 타개를 바라며 이달 전해진 반反장제스 쿠데타 계획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장제스 정권이 더 나은 정권으로 교체된다면 미국이 지원할 명분도 생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미국인이 고른 후보자는 후스胡適와 쑨리런孫立人이었는데 모두 주인공 역할을 거절했다. 러스크가 후스에게 마지막으로 설득을 시도한 것은 6월 23일이었다. 6월 26일 장제스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격려의 전보를 보냈고, 27일에는 천청陳誠 행정원장이 담화를 발표해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같은 날 워싱턴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제7함대의 타이완해협 파견 성명을 발표하자 타이완 정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기대를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17-8)


그런데 미군이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은 계속해서 진격했다. 한국 정부는 남쪽으로 더 밀려났고 인민군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7월 26일 진주를 지키기 위해 하동고개로 향하던 미 제29연대 1개 대대가 인민군의 매복 공격으로 궤멸당했다. 이때 수행했던 전 한국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이 전사했다. 당연히 인민군 측에도 희생은 있었다. 7월 초순에 전우를 대신해 12사단장으로 임명된 최춘국崔春國이 7월 30일 지뢰를 밟아 전사했다. 이어서 강건 총참모장이 대전 점령 직후에 금강 기슭에서 지뢰를 건드려 전사했다. 중요한 것은 7월 20일까지 미 공군이 북한 공군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는 점이다. 개전 당시 북한 공군은 보유한 전투기 132대를 이용해 서울을 공습했으나 미 공군의 반격으로 다수의 북한 전투기가 지상에서 파괴됐다. 이로써 미 공군은 이 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했고 이후 단 한 번도 빼앗기지 않았다. 이는 점차 전쟁의 추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123)


8월 15일 임시 수도 대구에서 광복절 행사를 거행한 한국 정부는 17일 이곳에서 철수해 부산으로 도망쳤다. 한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동쪽으로 후퇴해 대구까지 아우르는 최종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곳에 미군 제25사단, 제24사단, 제1기병사단과 본국에서 도착한 제2사단, 그리고 한국군 제1, 제6, 제8, 수도, 제3사단이 진을 쳤다. 이곳에서 한미군은 한 달간 대치전을 버텨 냈다. 그사이 공군의 공격은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대치 중이던 북한군을 향한 융단 폭격이 펼쳐졌다. 한미군은 그간 병력을 증강하고 무기를 현대화했다. 병력 총수는 8월 14만 1,808명에서 9월 1일에는 미군 8만 6,655명, 한국군 9만 1,696명, 영국군 1,578명으로 총 17만 9,929명으로 늘었다. 커밍스는 이 무렵 미군의 전차 대수는 북한군이 보유한 대수의 5배에 달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인민군이 한미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8월 말 공산 측에서는 문자 그대로 비관적인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128)


보급로가 거의 다 파괴되고 미 공군의 끊임없는 공격에 노출되어 있던 북의 인민군은 승리를 위해 서둘러야 했다. 하루를 잃는 것은 패배로 가는 지름길과 다름없었다. 이에 인민군은 김일성의 명령 아래 최후의 총공격을 시작했다. 제1군단은 8월 31일부터, 제2군단은 9월 2일부터 낙동강 방어선 돌파를 위한 결전에 나선 것이다. 맹공을 당한 미군 제2, 제25사단은 공군에 폭격 지원을 요청했다. 9월 1일 제5공군의 전투폭격기가 두 사단이 지키는 전선을 따라 167차례 출격하여 공대지空對地 공격을 실시했다. 9월 2일에도 B-29 폭격기 25대가 김천, 거창, 진주를 폭격했고 두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300차례나 출격했다. 그 결과 두 사단은 끝까지 버텨 냈다. 이즈음 미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박 260척, 병력 7만 명이 투입된 인천 상륙 작전은 9월 15일에 개시됐다. 새벽에 제1진이 월미도에 상륙했고 저녁이 될 때를 기려 만조 무렵에 제2진이 다른 해안에 상륙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134-5)


9월 27일 한미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9월 29일 맥아더와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환도식이 거행됐다. 식이 끝난 후 이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한국군이 적을 추격하여 38선을 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맥아더는 북한에 항복 권고를 했으니 이틀 정도 기다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다음 날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즉시 북진하라고 명령했다. 인천에 상륙한 미군이 진격하면서 북한과의 교신과 보급이 끊긴 인민군은 완전히 붕괴해 퇴각했다. 남쪽에 있던 조선인민군 중 통솔력이 약한 부대는 괴멸됐고 방호산의 제6사단 같은 단련된 부대는 조직을 지키면서 태백산맥을 따라 북쪽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10월 21일의 당 정치위원회 결정으로 군대 안에 노동당 조직을 설치하기로 정한 것은 만주파 군대라는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인민군에 대해 당의 통제를 일원적으로 확립하는 단초가 됐다. 이는 인민군의 재건, 재편 과정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된다. 138, 142, 144)


제4장. 한미군의 북진과 중국군 참전


10월 1일 맥아더는 본국 정부와 상의한 후 방송을 통해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그리고 전쟁 포로들과 민간인 억류자들을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10월 2일 맥아더는 유엔군 전 부대에 일반명령을 내렸다. “6월 27일의 유엔 안보리 결의 조항에 따르면 우리가 군사 작전을 전개하는 곳은 군사적 필요와 한반도의 국제적 경계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따라서 소위 38선은 우리 군의 군사적 운용 측면에서 고려할 요소가 아니다. 적을 완전히 패배시키기 위해 귀하의 부대는 그 경계를 …… 언제든지 넘어도 좋다. 적이 10월 1일의 나의 메시지에서 정한 항복 조건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우리 군은 적군이 한반도의 어느 곳에 있든지 찾아내 괴멸시킬 것이다.” 이로써 한국군의 북진은 추인됐다. 맥아더는 미 제10군단에 서울 지역에서 방향을 틀어 부산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해로를 이용해 원산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한국군 제1군단은 홀로 맹렬히 진격해 원산으로 향했다. 148)


10월 2일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한 날, 중공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한국전쟁 참전 문제를 논의했다. 마오쩌둥이 중국 참전의 반대급부로 소련으로부터 얻어 내려 한 것은 미국의 중국 본토 공격 방어전에 소련이 참전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소련은 애당초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라 공군을 파견할 의무가 있었으나, 그렇게 했다가는 미소 세계전쟁으로 비화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스탈린은 그러한 사태를 무조건 피하고 싶었다. 미국이 전쟁을 확대하여 중국을 공격한다면 소련은 조약상의 의무에 따라 중국을 위해 참전할 것이며, 중소가 힘을 합친다면 미국에 승리할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이는 스탈린의 진심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스탈린에게는 미국과 싸울 생각이 없었으며 한국전쟁이 중국 본토로 확대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소련도 함께 싸우겠다는 표현은 중국의 참전을 독려하기 위한 공수표였다. 10월 7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의견에 동의해 파병 결정을 내렸다고 스탈린에게 알렸다. 150-1, 154)


중국인민지원군은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 방면에서 한국군 제1사단과 맞닥뜨리면서 첫 번째 전투가 시작됐다. 펑더화이는 서둘러 진형을 구축하고 11월 1일 전투 명령을 내렸다. 예상치 못한 중공군 대군의 공격으로 한미군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서부에서는 덕천, 개천, 안주 부근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이 제1차 전역[戰役, 전쟁 상황에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실시하는 일련의 연관된 대규모 군사 작전 - 역자 주]은 11월 4일에 종결됐다. 이때 마오쩌둥은 지원군 병력을 추가 증강했다. 제9병단의 제20군, 26군, 27군의 3개 군 12개 사단이 파견되어 11월 7일부터 19일까지 지안, 린장臨江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총병력은 30개 사단, 약 38만 명을 헤아렸다. 제9병단에는 장진호長津湖 방면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매복 공격을 전개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11월 25, 26일 지원군은 역으로 먼저 제2차 전역을 개시했다. 한미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166-7)


12월 5일 미군은 평양을 포기했다. 우선 제8군이 대동강 남쪽 기슭으로 이동했다. “시내 곳곳에서 12월 5일 오전 7시 30분까지 불을 질렀다. 이때 후위경비부대가 대동강의 마지막 다리를 파괴하고 강 하구 지역에서 마지막 파괴 작전을 시작했다.” 진남포에서는 이미 12월 2일부터 철수가 시작되어 전차상륙함, 일본의 상선, 미 해군의 병력 화물 수송선, 한국의 범선 100여 척이 부상자, 죄수, 평양에서 반출할 화물, 약 3만 명의 피란민을 싣고 철수했다. 운반이 여의치 않은 물자와 항만시설은 파괴했다.117 그 후 부대는 38선을 향해 퇴각했다. 동부에서는 제10군단이 12월 8일 자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흥남에서 철수했다. 군인 10만 5천 명, 차량 1만 8천 대, 화물 35만 톤, 피란민 8만 6천 명을 수송했다. 남은 폭약, 폭탄, 가솔린은 흥남 시가와 항만시설 파괴에 사용됐다. 미군에게 평양과 흥남은 적의 도시에 불과했고 적에게는 무엇 하나 건네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69)


12월 22일 펑더화이는 제3차 전역 명령을 내렸다. 제42, 66군을 좌종대左縱隊로 춘천 서북쪽에 집결시키고 제38, 39, 40, 50군을 우종대右縱隊로 서울 방향으로 전진시켰다. 인민군 제5, 2군단에는 동해안 쪽을 맡겼다. 공격 구역 안에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집중시킨 뒤 31일에 공격을 개시했다. 미군 측은 워커 제8군 사령관이 12월 22일 지프와 트럭의 충돌 사고로 사망한 이후 매슈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가 후임으로 임명되어 지휘를 맡았다. 리지웨이는 1951년 1월 1일 서울 철수를 명령했다. 1월 4일 한강의 마지막 다리가 폭파됐다. 이날 서울은 또다시 점령당했다. 이번 점령자는 북중 연합군이었다. 서울 점령 후 북위 37도선 지점까지 진출한 시점에서 1월 7일 펑더화이는 진격 중지를 명령했다. 이렇게 제3차 전역이 끝났다. 펑더화이가 다시금 진격을 멈춘 까닭은 미군 측이 남하를 유도하여 인천 상륙 작전의 재현을 획책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78)


요시다 총리는 12월 16일 국회가 자연 휴회에 들어가기에 앞서 열린 비밀의원총회에서 민주당 총재 아시다의 거국일치 내각 제안은 “일본의 현 사태에 부합하지 않는 언동”이라면서 한국전쟁이 별로 위험하지 않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세간에는 한반도 문제가 중대한 국면에 들어섰고 제3차 세계대전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 듯하나 전쟁이 그리 쉽게 일어날 리가 없다. 사태는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 중공이 최후에 승리를 거둘 일도, 조선동란이 영원히 이어질 일도 없을 것이다. 적절한 지점에서 타결될 것이다.” 요시다는 28일 기자단과 만난 자리에서도 “큰일 났다며 난리 법석을 피우다가 대동아전쟁이 일어났다”라고 비꼬면서 위기의식을 부채질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헌법의 정신을 지킬 생각이며 경솔하게 재군비 문제를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요시다의 구상은 미국에 의한 안전보장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길은 그야말로 미일안보조약을 향해 열려 있었다. 180-1)


북중군의 제4차 전역은 2월 11일에 시작됐다. 이날 동부 전선에서 북중군은 횡성을 목표로 반격에 나섰다. 한국군 제8사단은 괴멸됐고 북중군은 횡성을 점령한 후 원주를 향해 전진했다. 양군 간의 격돌은 16일까지 이어졌다. 한미군은 원주를 사수했다. 원주를 코앞에 두고 북중군은 기동방어전 태세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20일 한미군의 반격 작전인 ‘킬러 작전Operation Killer’이 시작됐다. 북중군은 퇴각했다. 2월 20일 베이징으로 귀환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을 설득했다. 마오쩌둥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3월 초순 동부 전선에서 전개된 유엔군의 ‘킬러 작전’이 종료됐고, 북중군은 횡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3월 7일 서부 전선에서 유엔군의 ‘리퍼 작전Operation Ripper’이 시작되어 북중군은 결국 서울을 포기해야 했다. 3월 말 북중군은 거의 모든 전선에서 38선 이북으로 쫓겨 올라갔다. 더는 만회하지 못한 상태로 4월 21일 제4차 전역은 종료됐다. 이렇게 미중 전쟁의 승패는 무승부로 끝났다. 188-9)


제5장. 정전회담을 하면서 하는 전쟁


유엔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회복하고 38선에 근접했을 때, 미국 정부는 또다시 정전회담을 촉구하는 대통령 성명을 준비했다. 1951년 4월 5일 공화당 하원의원 조셉 마틴Joseph W. Martin이 의회 연설에서 맥아더로부터 받은 3월 20일 자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에서 맥아더는 “이곳 아시아는 공산주의 음모가들이 세계 정복을 목표로 하는 승부를 위해 선택한 곳이라는 사실”, “만약 우리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의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유럽의 멸망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부 사람들”을 비난했다. 맥아더가 공공연하게 정부를 비판하자 트루먼은 4월 11일 맥아더 해임을 발표했다. 미국의 방침은 아시아에서의 대립을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며, 미국은 정전을 하고 재침략 방지 대책을 세워 평화를 달성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맥아더의 후임에는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임명됐다. 미국은 정전협상을 위한 계기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이따금 평화를 제안한 소련에 기대를 걸었다. 191)


마오쩌둥이 ‘최후의 전역’이라고 부르며 한반도에서 미군을 몰아내려 했던 제5차 전역은 맥아더 해임 하루 뒤인 4월 22일에 시작됐다. 미 공군은 서부 전선에서 38선을 다시 돌파해 임진강을 건너는 북중군을 상대로 23일 새벽부터 1,100차례 출격해 공격했다. 조선인민군 제1군단, 중국인민지원군 제19병단의 64군, 65군, 63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도 서울 북쪽에 있는 북악산까지 전진했다. 그 동쪽에서는 제3병단, 제9병단의 8개 군이 38선을 돌파하여 서울 방면으로 압력을 가했다. 잠시 대치한 끝에 5월 16일 동부 전선 소양강 남쪽 지구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제3병단, 제9병단, 조선인민군 제3, 제5, 제2군단이 공격에 나섰다. 5일간의 밤낮 연속 공격으로 전선을 남쪽으로 상당히 밀어 내렸지만, 거기서 모든 힘을 다 썼다. 5월 19, 20일에는 야간에 출동한 B-29가 공격을 위해 집결한 북중군을 유도탄으로 폭격하여 공격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5월 21일 펑더화이는 전역을 수습하라고 명령했다. 192)


5월 17일 미국 상원에서 한국전쟁 정전 결의가 채택됐고, 5월 19일 《프라우다》는 이를 보도했다. 미국 국무부는 미국 정책에 대한 비판자로 알려져 있던 케넌에게 미국의 메시지를 소련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겼다. 케넌은 5월 31일 비밀리에 소련의 유엔 대표 말리크와 만나 미국의 정전에 대한 의지를 전달했다. 모스크바는 이 사실을 베이징에는 알리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전쟁은 지금부터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소섬멸전 단계로, 곧 대섬멸전 단계로 나아갈 거라고 했다. 패배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주장으로도 보인다. 중요한 것은 미군을 북한으로 끌어들여 거기서 작게나마 확실하게 무너뜨리자는 제안이다. 이에 스탈린은 즉각 반응했다. 5월 29일 그는 마오쩌둥의 계획이 “나에게는 위험해 보인다. 그런 계획은 한두 번은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미군은 아주 쉽게 그런 계획을 간파할 것이다”라고 했다. 스탈린은 언제나 마오쩌둥의 의견에 찬성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전면 반대했다. 199-200)


가오강과 김일성은 두 사람은 6월 13일 스탈린과 회담했다. 회담에 동행한 통역 스저는 김일성과 가오강의 답변이 혼란스러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전투 중단, 정전, 강화(화해), 휴전, 평화조약” 등의 단어를 혼란스럽게 사용하자 스탈린이 어구의 의미를 설명하고 “당신들의 의도, 소망, 요구는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했다. “중국과 북한 측은 우리의 희망은 정전”이라고 대답했다. 스탈린이 정리하기를, “정전은 상당히 긴 기간의 군사행동 중단이지만, 양측은 여전히 교전 상태에 있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언제든지 다시 싸울 수 있으므로 이는 평화의 국면이 아니다”라고 했다. 김일성과 가오강은 그러한 의미의 정전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이다. 스탈린은 두 사람을 상대로 정전협상을 개시해야 할 필요성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과 중국의 합의를 이끌어 낸 뒤, 말리크 유엔 소련 대사는 6월 23일 미국 방송에 출연해 한반도에서의 정전협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202-4)


한반도의 정전회담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됐지만, 미국과 중국 양측이 자신들의 입장을 고집한 결과, 회담은 좌초됐다. 8월 22일 중국·북한 측은 협상 중단을 선언하고 회의장을 떠났다. 한편, 7월 28일 이승만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한국인은 분할선이 계속되는 것을 우리 국민에 대한 죽음의 명령서로 간주하고” 있다며 군사분계선 합의에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전회담 중단은 그야말로 원하던 일이었다. 이승만의 통일론은 박헌영과 김일성의 통일론이기도 했다. 박헌영은 1951년 2월까지만 해도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겸임했으나, 이후 소련계 김재욱金宰旭과 교체됐다. 그는 대남 공작 재건에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정전회담을 하면서도 전쟁을 계속하고 남부 해방을 위한 공작을 계속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따라서 그가 이승만의 주장을 들었다면 공감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북한이 이승만의 반反정전회담 캠페인을 비난하지 않는 것에 초조해했다. 210-3)


정전회담이 시작된 뒤에도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1951년 7월 26일부터 미군 제2사단은 5일간 동부 전선의 조선인민군 제2군단을 공격했다. 강원도 인제에서 북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미군이 ‘펀치볼Punch Bowl’이라고 이름 붙인 오래된 분화구가 있다. 그 주위의 깎아지른 능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이 계속됐다. 미군이 1179고지라 부른 최대의 능선인 대우산大愚山을 미군이 점령했다. 중국군이 지키고 있던 서쪽 능선은 ‘피의 능선Bloody Ridge’이라고 불렸다. 더욱 격렬한 공방전이 계속된 곳은 중부의 ‘철의 삼각지대’라고 불린 금화, 철원, 평강을 잇는 지대였다. 8월 18일부터는 미군 3개 사단이 인민군 3개 군단을 상대로 하계夏季 공세를 시작했다. 정전회담이 중단된 후인 9월 1일부터는 다시 공세가 시작돼 9월 18일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은 진지와 진지 사이에 폭 0.8~1미터, 깊이 1미터, 지표까지 2~3미터의 터널을 만들고 완강하게 응전했다. 221)


결정적으로 정전회담의 교착상태를 초래한 것은 포로 문제였다. 미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한 후 북한군이 패주할 때 대량의 투항자가 나왔다. 그 수는 1950년 10월까지 10만 4천 명에 달했다. 중국군 포로는 1951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개된 제5차 전역에서 대거 발생했다. 1만 5천 명이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50~70%는 옛 국민당군의 장병이었다고 한다. 이들을 도운 것이 타이완에서 보낸 수용소 요원들이었다. 미국 측 자료에 따르면 이들 요원은 미군 민간정보교육국Civil Intelligence and Education, CIE 프로그램에 따라 포로들에게 반공 민주 선전을 했다. 이 요원들은 종종 반공파 포로와 제휴하여 1951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타이완으로 송환해 달라는 청원서에 서명하도록 포로들을 설득하거나 물리적인 압력을 행사했다. 제네바협약 118조의 규정에 포로는 신속히 송환해야 한다고 되어 있지만, 이 상식적인 견해가 항복한 후 협력자가 된 포로를 공산 측에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트루먼의 뜻에 밀렸다. 227-8)


제6장. 3년째의 전쟁


휴전회담이 포로 문제로 교착된 상황에서 1952년 5월 세 번째 유엔군 사령관으로 마크 클라크Mark W. Clark가 취임했다. 그의 취임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반란으로 수용소 사령관 프랜시스 도드Francis T. Dodd 준장이 반란자의 인질이 된 사건이 계기가 됐다. 포로 문제에 대한 타협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신임 사령관은 북한에 대한 폭격을 강화하여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먼저 5월 13일 극동공군 사령관 오토 웨이랜드Otto P. Weyland는 클라크에게 평양 폭격의 허가를 요구했고, 이 공습 작전에 ‘압력 펌프 작전Operation Pressure Pump’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6월 16일 클라크가 이를 승인하자, 6월 23일 미 공군과 해군항공대는 수풍발전소[水豊發電所, 평안북도 삭주군 수풍면에 있는 북한 최대의 수력발전소 - 역자 주], 부전강赴戰江 제3, 제4발전소와 장진강長津江 제3, 제4발전소 등을 폭격했다. 공격당한 수력발전소 13곳 가운데 11곳은 완전히 파괴됐다. 북한은 전력의 90%를 상실했다. 239)


7월 4일에는 안둥에서 동북쪽으로 5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북한 군사대학을 폭격했고, 8일에는 강계와 구누리 사이의 철교, 그리고 장진강 제1, 제2발전소를 폭격했다. 7월 11일에는 평양 폭격이 이루어졌다. 제7함대 항공모함의 함재기, 제5공군기, 한국 공군기가 주간에 3차례 공격하고, 밤이 되면 요코타와 가데나에서 B-29 54대가 출격해 폭격했다. 1,254회 출격은 한국전쟁에서 최대의 공습이었다. 2만 3천 갤런의 네이팜탄이 투하됐다. 미국의 폭격은 북한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수풍댐이 공격받은 후에도 7월 4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에서 “상대방이 조선 정전협상에서 전환을 꾀하려고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약간의 징후가 나타났지만, 그럼에도 적이 협상을 연기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평정심을 보였다. 반면 김일성은 7월 16일 스탈린에게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전보를 보냈지만, 여기에는 김일성에게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고통이라는 인식이 드러나 있다. 240-3)


7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전부터 의혹을 가지고 있던 이종찬 참모총장을 해임하고 백선엽 제2군단장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이종찬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7월 28일 비상계엄령이 해제됐다. 군법회의는 공산주의 음모에 관련된 국회의원 7명의 기소를 취하했다. 사형이 선언됐던 서민호 의원은 재심 결과 8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완화 조치를 한 후,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를 시행한다고 공시했다. 8월 5일 선거에서 이승만은 유효 투표 703만 표 가운데 523만 표를 획득하여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말할 것도 없이 선거 관여는 있었지만, 이 결과는 그의 권력 기반이 결정적으로 강화됐음을 보여 줬다. 게다가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로는 이범석이 지명됐는데, 이승만은 선거에 관여해 무소속의 함태영咸台永을 당선시켰다. 이범석을 내친 것이다. 선거 후에는 이범석의 족청(옛 조선민족청년단)계를 자유당에서 배제시키고 자유당을 철저하게 이승만 당으로 만들어 나갔다. 250)


2년 넘게 스탈린은 크렘린에서 마오쩌둥, 김일성과 함께 한국전쟁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아시아에서의 혁명적 투기는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결정에 근거한 행위로, 그의 실패이고 그의 패배였다. 스탈린은 낙담하지 않고 빨리 마무리하고 전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실패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배신을 근거로 해서만 설명할 수 있었다. 필자는 스탈린이 이 시기 어느 시점에 김일성과 방학세에게 박헌영에 대한 의혹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가설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할 새로운 자료는 없다. 그러나 1952년 9월 저우언라이에게 내린 스탈린의 ‘지시’가 필자의 추측에 힘을 실어 준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교해 본 직후에 저우언라이에게 잠입한 스파이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당과 정부에 영국과 미국의 앞잡이가 침투해 있다면, 북한의 당과 정부에도 미국의 앞잡이가 침투해 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263)


1953년 새해가 되자 제5차 전원회의 결정의 실천, 종파주의분자의 적발, 비판 캠페인이 요구됐다. 박정애가 《노동신문》 1월 5일 호에 게재한 <김일성 동지가 제기한 당의 조직적, 사상적 강화를 위한 투쟁은 각 당 기관, 당 단체, 당 지도간부, 당원의 전투적 강령>이라는 글이 그 시작이었다. 소련에서의 유대인 의사단 사건 적발이 북한에서는 1월 18일에 보도됐다. 《노동신문》 1월 26일 호는 사설에서 수령의 요구에 부응하자며 더욱 나사를 조였다. 사회안전상 방학세는 2월 5일 《노동신문》에 <반反간첩 투쟁을 전 인민적 운동으로 추진하자>라는 글을 발표하고, 반종파주의 투쟁을 반간첩 투쟁과 연계하자는 방향을 제시했다. (박헌영과 친분이 있는) 리승엽, 조일명, 임화, 박승원, 이강국, 이원조, 맹종호 등은 해방 전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전향한 과거가 있었다. 그랬기에 미군의 스파이가 됐을 것이라고 추궁했다. 소련계 사회안전부 예심처장 주광무朱光武가 진두지휘하여 이들을 고문하고 원하는 진술을 받아냈다. 265-6)


한편 스탈린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평화 공존”을 말하면서 “조선전쟁을 끝내는 문제에 대해 아이젠하워와 협력하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이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게재됐다. 그리고 26일 소련 국내에도, 중국에도 이 메시지가 보도됐다. 스탈린은 분명하게 한국전쟁을 끝내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미국의 새 대통령에게 보냈으며, 이를 러시아인과 중국인 모두 알게 된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한반도와 관련한 스탈린의 마지막 조치는 김일성이 요청한 차관 상환 연기에 관한 것이었다. 1951년 11월 14일 ‘소련-북한협정’에 따라 북한에 제공된 물자 구매를 위한 차관의 변제는 1952년부터 북한이 물자를 인도하는 것으로 실행돼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는데, 김일성이 라주바예프 대사에게 군사행동 종료 후로 미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스탈린은 연기를 인정했다. 그런 취지를 담은 각료회의 명령안이 수상 스탈린의 이름으로 기안됐다. 스탈린은 군사행동의 종료가 멀지 않았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268-70)


제7장. 정전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었다. 그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으로 정전협상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통설은 잘못된 것이다. 스탈린 자신이 이미 전쟁을 끝내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중국에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 북한에서는 3월 3일 당 전체에 스탈린의 위독한 상황에 대한 통보가 있었다. 스탈린의 죽음은 김일성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3월 9일 추도식이 열렸다. 김두봉, 박창옥, 부수상 홍명희, 민족보위상 최용건이 추도사를 했다. 박헌영도 참석했는데, 추도식이 끝난 직후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김일성은 전쟁을 끝낼 체제를 완성했다. 중국에서 스탈린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저우언라이였다. 스탈린의 후계자들은 노골적으로 정전을 서두르라고 저우언라이를 압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소련 측이 포로 문제에 대한 방침의 전환을 요구했다면, 저우언라이가 이를 수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272)


3월 26일 귀국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에게 모스크바에서 협의한 내용을 보고했다. 《저우언라이 연보周恩來年譜》에는 이때 “중국 정부가 취해야 할 방침과 행동을 확정했다”라고 되어 있다. 마오쩌둥이 마침내 포로 문제에 대해 양보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3월 28일 중국 주도로 작성된 클라크 제안에 대한 회답을 김일성과 펑더화이의 이름으로 보냈다. 부상병 포로 교환에 동의한다, 이 문제의 합리적 해결은 포로 문제 전체의 순리적 해결과 한반도 정전 달성을 이끌어 내야 한다, 판문점에서의 회담을 즉시 재개하자는 내용이었다. 소련의 특사 쿠즈네초프와 수행원 페도렌코가 평양에 도착한 것은 3월 29일이었다. 특사는 김일성에게 소련 정부의 서한을 전달했다. “우리의 설명을 듣고 김일성은 크게 흥분했다. 그는 좋은 소식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쁘다며 문서를 꼼꼼히 검토하고 나서 회담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김일성이 흥분한 것은 이로써 바라던 즉각적인 정전이 가까워졌다는 기쁨 때문일 것이다. 273-4)


정전회담 재개를 가로막은 마지막 장애물이 제거된 후 클로즈업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저항이었다. 직접 선거로 재선된 대통령의 저항은 전에 없이 강고한 것이었다. 정전협상이 실질적으로 진전되기 시작한 4월,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반대 움직임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4월 8일 양유찬 주미 한국 대사는 덜레스 장관에게 이 대통령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전 조건 5가지를 제시했다. 그것은 (1) 한반도의 재통일, (2) 중공군의 철수, (3) 북한군의 무장해제, (4) 제3국이 북한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의 금지, (5) 대한민국의 주권 존중 및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그 목소리의 존중이었다. 이는 정전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이승만의 우려에는 근거가 있었다. 미국은 정전 반대, 전쟁 속행 주장을 처음부터 논외로 여겼고, 한미 간 안전보장조약 체결도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일본-류큐-필리핀을 방위선으로 하는 전략을 유지한 국방부가 반대하고 있었다. 276-7)


5월 13일 미국 대표는 판문점에서 공산 측이 제안한 8개 항목 가운데 많은 부분을 “협상의 기초로” 받아들이면서 귀환하지 않은 북한 포로를 정전협정 발효일에 즉시 석방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중국과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과 북한은 이날부터 제1차 하계 반격 전역을 개시했고, 14일에는 곧바로 미국의 즉각적인 석방안을 거절했다. 5월 25일 정전회담에서 해리슨 수석대표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 내용은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성된 송환위원회에 인도한다, 송환위원회의 병력은 인도군만으로 하며 인도가 위원장을 맡고, 그사이에 양측 대표가 포로와 접촉하여 송환 희망을 확인한다, 90일이 지나면 면접은 끝내고 120일 후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6월 4일 공산 측은 5월 25일의 미국 측 제안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회답했다. 드디어 정전의 시기가 다가왔다. 이제 정전은 확정적이었다. 279, 281)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6월 6일 보낸 편지에서 한반도 통일을 위한 투쟁을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 수단으로 추구할 때가 됐다면서, 정전 후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경제 원조와 병력 증강에 협력하겠다고 제안했다. 더불어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승만은 이에 대해, 6월 9일 제8군 사령관 테일러에게 4가지 요구사항의 요점을 전달했다. (1) 정치 토의의 합리적인 기한은 60일이 바람직하다, (2) 미국과의 상호안보조약, (3)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확대 편성, (4) 인도 및 공산국 대표의 입국 거부였다. 이승만은 6월 17일 아이젠하워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그것[상호방위조약]이 정전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 효력은 거의 제로가 될 것”이라며 정전 움직임에 강력히 항의했다. 이는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무모한 행위의 동기에 대한 사전 설명이었다. 6월 17일 심야부터 18일 아침까지 부산, 마산 등 4곳의 포로수용소에서 북한인 포로 2만 5천 명이 일방적으로 석방된 것이다. 282-3)


그동안 북한에서는 박헌영파, 옛 남로당 관계자 체포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었다. 체포된 주중 대사 권오직을 대신해 베이징에는 대리대사로 만주파 서철徐哲이 파견됐다.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6월 만주파 김일이 중앙위원회 서기로 임명됐다. 체포된 남로당계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미군의 스파이였고 반反김일성 쿠데타를 획책했다는 사건의 줄거리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3년 7월 2일 소련계 일인자 허가이가 자살했다. 허가이는 당무에서는 제외된 채 부수상직만 맡고 있었는데, 그에 대해 새로운 비판이 제기됐다. 아마 허가이에게도 체포된 박헌영 그룹 멤버들의 자백 조서가 전해졌을 것이다. 허가이는 분명히 아직 그 사건에 말려들지는 않았었지만, 앞으로 사건이 어떻게 확대될지 모른다고 느꼈을 것이다. 더욱이 소련에서 온 소련계가 그에 대한 비판에 동조하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이 소련의 신임을 잃었다고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허가이는 소련으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90)


스탈린 사후 말렌코프에 이어 지위가 상승한 부수상, 내무상 베리야는 4월 4일 크렘린 의사단 사건은 꾸며낸 것이라고 발표하도록 했다. 무고한 자에게 죄를 인정하게 한 것은 고문에 의한 것임이 시사됐다. 이틀 뒤 《프라우다》 논설은 국가보안상 이그나티예프S. D. Ignat’ev를 비판하면서 직접 수사 책임자인 미하일 류민Mikhail D. Ryumin 전 차관의 체포 사실을 밝혔다. 베리야의 ‘개혁파식’ 활동이 흐루쇼프와 말렌코프에게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킨 결과, 이들은 6월 26일 베리야 제거에 나섰고 7월 10일 베리야 체포가 발표됐다. 베리야는 미국과 영국의 스파이로 지목됐다. 이 발표는 전형적인 스탈린 방식이었기 때문에 4월의 새로운 바람과의 정합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공산당의 이인자인 베리야가 미국과 영국의 스파이라고 발표된 것은 박헌영파나 이토 리쓰를 미국과 일본의 앞잡이라고 낙인을 찍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활용하기 좋은 재료였다. 290-1)


7월 24일 정전회담에서 현시점의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하여 정전하기로 합의됐다. 이날 이승만은 덜레스에게 서한을 보내 정전이 임박한 이 시기에 “우리 정부의 태도를 결정하기 전에” 확실히 해 놓고 싶다며, 정치회담이 90일 이내에 실패하면 중국군을 몰아낼 군사행동에 미국은 동참해 줄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군사행동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해 줄 것인지를 물었다. 깜짝 놀란 덜레스는 마지막 설득을 시도했다. 결국 이승만은 집요하게 자기주장을 한 결과, 미국이 앞으로 한국의 안전보장을 약속하게 하는 데 완전히 성공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20분 판문점에서 해리슨과 남일이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둘 다 말이 없었다. 남일은 서명한 후 해리슨과 악수하지 않은 채 시계를 보고 그대로 떠났다. 조인에 따라 12시간 후 정전이 이뤄지게 됐다. 정전 명령은 남쪽에서는 클라크의 이름으로, 북쪽에서는 김일성과 펑더화이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292)


정전 이후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리승엽 등 북한의 남로당계 인사들에 대한 재판이다. 8월 3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신속히 진행돼 8월 6일에 벌써 판결이 나왔다. 리승엽, 조일명, 임화, 박승원, 이강국, 배철, 백형복白亨福, 조용복趙鏞福, 맹종호, 설정식薛貞植 등 10명에게 사형, 윤순달, 이원조에게 각각 징역 15년과 12년이 선고됐다. “반당·반국가 파괴분자”로 단죄를 받고 당에서 제명된 사람은 주영하, 장시우, 박헌영, 김오성(金午星, 전 문화선전성 부상), 안기성安基成, 김광수(金光洙, 경공업성 부상), 김응빈(전 금강정치학원 원장), 권오직 등 8명이다. 그 밖에 남로당계 중앙위원 구재수具在洙, 이천진李天鎭, 조복례趙福礼, 이주상李周祥 등 4명이 해임됐다. 15명의 중앙상임위원회 위원이 선정됐고 김일성, 김두봉, 박정애, 박창옥, 김일 등 5명으로 중앙정치위원회가 구성됐다. 김일성이 위원장이 됐고 박정애, 박창옥, 김일이 부위원장이 됐다. 김일성은 정부, 군, 당을 완전히 장악했다. 297-8)


정전협정에 따르면, 군사분계선에서 남북으로 2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DMZ를 설치하고 이곳을 군사정전위원회가 관리하기로 했다. 정전협정은 제4조에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해 양측 군 사령관은 양측 관계 각국 정부에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발효된 후 3개월 이내에 각각 임명된 대표에 의해 더 높은 수준의 양측 정치회의를 개최하고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 군대를 철수하는 문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 제반 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할 것”을 규정했다. 또한 제5조의 62항에서는 “이 정전협정의 조항은 상호 수용할 수 있는 수정과 추가 또는 양측 간의 정치적 수준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절한 협정 규정에 따라 명확히 정지될 때까지는 계속해서 효력을 갖는다”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정치회의에서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절한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체결되지 않는 한 정전 체제가 계속되는 것이었다. 301)


제8장. 한국전쟁 후 동북아시아


북한도, 남한도 통일을 위해 전쟁을 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거의 원래의 분할선인 38선 부근에서 전쟁이 중단됐다. 군사분계선은 서부에서는 38선 아래로 내려가 개성 지구, 옹진반도 등이 북측에 포함됐다. 동부에서는 38선 위로 올라가 철원군의 남쪽 반, 양구군, 인제군, 고성군 등이 남측에 들어갔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은 거의 같다고 해도 좋다. 전쟁이 남긴 것은 파괴의 상처는 한반도 전역을 뒤덮었지만, 미국에게 공중 폭격을 당한 북한의 피해는 더 엄청났다. 평양은 모든 것이 파괴되어 전쟁 전의 기억을 더듬을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폐허에서 되살아난 도시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사망자 수는 정확히는 모른다. 남북 합해서 300만~40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931년 만주 침략부터 1945년 패전까지 발생한 일본의 사망자 수 300만 명을 넘는 수치다. 1949년 6월 1일 남북의 총인구가 2,865만 명이었으니, 사망자는 10%가 넘는다. 304)


정통성을 다투는 두 국가의 분열과 대립은 더욱 격렬해졌다. 통일을 위한 전쟁이 실패한 결과, 통일은 한없이 멀어진 것으로 보였다. 미국은 한미상호안보조약을 맺고 한국의 안보를 책임지겠다고 밝혔다. 미군은 한국에 주둔했고, 미군 사령관은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한국군의 지휘권도 가졌다. 거기에는 18개 사단 63만 명의 병력을 가진 한국군의 북진을 억제하려는 의도도 작용했다. 북한은 많은 인구를 잃었고 국토는 완전히 파괴됐기에 재건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지금까지의 사회와 문화 전통이 파괴됐고 사회주의화를 기조로 한 개혁이 철저히 진행됐다. 중국인민지원군도 북한에 머물렀으나 1958년 3차례에 걸쳐 25만 명이 완전히 철수했다. 북한은 1961년 중국과 상호 방위 협력을 약속하는 북중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 소련도, 중국도 또다시 북한이 남진하는 것을 인정할 생각이 없었고 북한은 남진할 능력이 없었다. 북한의 병력은 이후 오랫동안 한국군을 훨씬 밑돌았다. 305)


피에르파올리는 한국전쟁이 미국 국가와 사회에 미친 영향을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학자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대외 정책에서 한국전쟁의 충격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대평가되지 않는다. …… 한국전쟁 이전에는 IMF, 마셜 플랜Marshall Plan, GATT, NATO조차 소련에 대한 군사적 봉쇄보다 경제적, 정치적 봉쇄를 중시했다. 북한의 침입 쇼크와 미국의 한반도 개입 결단은 봉쇄의 군사화로 이어졌고,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는 에피소드 식이라도 지속적인 군사화를 가져왔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와 베트남 사태에 결정적으로 개입하게 됐다.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에 대한 군사적 개입도 시작됐다. 1949년 4월 미국은 캐나다, 유럽의 10개국과 함께 북대서양조약에 조인하고 NATO를 만들고 있었다. 서독의 재군비를 촉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피에르파올리는 한국전쟁이 불러온 공포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던 서독의 재군비, NATO 가입이 가능해졌다고 지적했다. 305-6)


한국전쟁은 말 그대로 스탈린의 전쟁이었다. 스탈린은 크렘린 안에서 한국전쟁 총감독을 맡았다. 그의 지휘하에 소련은 북한군과 중국군에게 대금 지불은 일정 기간 뒤로 미룬 채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는 후방 기지, 병기 생산 공장이 됐다. 게다가 소련 공군은 한반도 상공에서 직접 미국 공군과 전쟁을 했다. 하늘의 전쟁은 전무후무한 미소의 전쟁이었다. 또한 소련은 유럽에서 강해지고 있는 NATO에 맞서 동유럽 국가에 대한 군사 원조, 무기 제공, 소련군 배치에도 새로운 노력을 기울였다. 소련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을 통해 완전히 적을 의식하고, 감지하고, 결정적인 전쟁을 예감하고, 그야말로 완전히 무장한 군사 국가로 변모했다. 다만 이 전쟁은 스탈린의 전쟁, 그 자신의 반미 전쟁이었다. 정권 구성원들, 심지어 국민도 거기서 소외됐다. 이는 스탈린이 정권 구성원 대부분과 대립하고 국민과도 거리를 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전 전날 밤 스탈린이 사망하자 후계자들은 평화 공존 정책으로 전환했다. 307-9)


미국과 중국의 전쟁은 양국의 “군사, 정치, 경제, 외교의 전면적인 힘겨루기”였는데, 무승부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막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에는 희생이 큰 전쟁이었지만, 미국과 대등하게 싸운 혁명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완전한 위상을 확립했다. 그리고 미군과 싸운 중국인민지원군은 “현대전 단련”을 받아 현대전을 치를 수 있는 정규군으로 성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전쟁에서 많은 것을 얻은 예외적인 승리자였다고 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 중국은 한국전쟁 때의 총력전 경험을 바탕으로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농업 협동화 등 소련형 사회주의 변혁을 추진해 국가사회주의 토대를 마련했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미국이 타이완해협에 군사적으로 개입한 결과, 중국은 타이완을 무력으로 해방시키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관심이 집중된 사이에 티베트에 군대를 파병했고, 1951년 9월에는 힘을 사용해 티베트를 자치구로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309)


패전 후 일본 국민의 반전, 반군 감정은 강했고 헌법 9조 규정과는 친화적이었다. 그러나 비무장 일본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연합국의 중심인 미국이 중국과 옛 식민지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인 사태는 헌법 9조의 현실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시다 총리는 국민 정서를 중시해 전쟁 협력을 주체적으로는 하지 않고, 미 점령군의 명령에는 무제한으로 따른다는 방침에 따라 전 국토를 미군 기지로 제공했다. 그리고 일본은 경무장만 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맺어 미군에 기지를 제공한 대가로 안전보장을 확보한다는 새로운 평화 국가의 길을 선택했다. 혁신 세력은 국민의 심정을 대변해 헌법 9조를 옹호하고 적극적인 전쟁 협력과 재군비에는 반대했다. 그리고 소련과 중국이 빠진 강화 및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했다. 요시다 정부와 혁신적 반대파의 독특한 결합으로 자위 재군비 노선은 배제되고 헌법 9조, 경무장, 미일안보조약이라는 삼위일체 체제가 확립됐다.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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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의 설계자들 - 1945년 스탈린과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 메디치 WEA 총서 8
하세가와 쓰요시 지음, 한승동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머리말 최후를 향한 경쟁


이 책은 태평양전쟁 종결 문제를 미국, 일본, 소련의 3국 관계라는 국제적인 관점에서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것은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서브플롯sub plot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대일對日전쟁을 수행하면서 전개된 스탈린과 트루먼 간의 복잡한 각축이다. 스탈린과 트루먼의 관계는 상호 불신감에 의해 좌우됐다. 양쪽 모두 상대가 얄타밀약을 파기하지 않을까 하는 지독한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두 번째 서브플롯은 뒤엉킨 일본과 소련 간의 관계 검증이다. 종전에 이르기까지 몇 개월간, 일본 정부는 필사적으로 소련이 중립적 지위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고, 또 그 바탕 위에서 소련의 중재를 통한 전쟁종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소련은 일본 정부의 이런 접근을 이용해 몰래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세 번째 서브플롯은, 일본 정부 내의 화평파와 계전파 사이의 목숨을 건 각축이다. 두 파 간 싸움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국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7-8)


1장 암투의 서막: 3국 관계와 태평양전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소련, 미국 세 나라는 기묘한 삼각구도를 이루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소련의 중립이 필요했다. 소련도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 전력을 다하려면 일본의 중립이 필요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소련의 관계는 역사가 조지 알렉산더 렌센George Alexander Lensen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기묘한 중립’이었다. 소련은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과 전쟁 상태에 있었고 일본은 소련의 동맹국이면서 독일의 적인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상선을 이용해 무기대여법에 근거한 무기와 전쟁물자를 태평양을 경유해 수송하고 있었다. 그 무기의 일부는 소련을 통해 중국으로 운반됐다. 일본을 공습한 미국의 많은 비행사가 소련 영토로 몸을 피했다. 일본과 소련 사이에 존재한 중립은 따라서 취약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양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 준수됐으나 그 필요성이 사라지면 바로 파기될 운명이었다. 34-5)


1943년 10월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과 소련의 협력이 전환점을 맞은 시점이다. 10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외무장관회의는 유럽의 제2전선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는데, 그 회의에서 소련이 처음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암시한 것은 아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던 전쟁의 귀추와 관련해서도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헐 국무장관은 스탈린이 “동맹국이 독일을 패배시킨 뒤 소련은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해 대일 전쟁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명확하게, 아무 망설임도 없이” 약속했다며 희희낙락했다. 모스크바 외무장관회의가 끝나자 연합국은 상호협력을 다짐하는 4개국 모스크바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 제5절은 연합국이 서로 협력해서 회원국들과 함께 안전보장의 새로운 시스템이 구축될 때까지 필요에 따라 “회원국 국가들의 이름으로 공동행동을 한다”는 것을 명기했다. 이 조항은 1945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미소 사이에 중요한 쟁점이 된다. 39-40)


1941년 12월의 로좁스키 보고, 1944년 1월의 마이스키 보고, 1944년 7월의 말리크 보고에는 소련의 대일 정책에 관한 공통된 논리가 관철돼 있다. 그것은 안전보장상의 필요성에서 소련이 태평양으로의 출구를 확보하는 것이 제1의 목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남사할린의 반환과 쿠릴열도 점거가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이들 보고서에서 소련의 영토 요구 원칙은 역사상의 정당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련의 안전보장상의 요청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스탈린 또한 소련의 영토 요구는 역사적 정당성이 아니라 안전보장상의 요청에 따라야 한다는 외교인민위원회 고관의 의견에 찬동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을 회피하는 게 유리하다는 의견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이 시의심 가득찬 독재자는 그 영토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평화조약을 통한 연합국의 동의에 기대는 건 위험하며 무력으로 점거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42)


전쟁은 연합국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스탈린은 참전을 미끼로 동맹국으로부터 얼마나 유리한 조건을 끌어낼 것인지를 궁리하고 있었으며, 미국의 대일 전쟁 작전이 마침내 확정돼가고 있던 그때 일본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도조의 실각은 종전을 모색하는 극비계획의 개시와 때를 같이했다. 8월 말에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은 발병을 구실 삼아 해군성 교육국장 자리에 있던 심복 다카기 소키치 해군소장을 한직인 군령부 출사出仕 겸 해군대학교 연구부 부원으로 강등했다. 해당 조치의 진짜 노림수는 다카기에게 전쟁종결 극비계획을 세우도록 하는 데 있었다. 다카기는 육군성의 마쓰타니 세이松谷誠 대령, 기도 내대신의 비서인 마쓰다이라 야스마사松平康昌, 시게미쓰 외상의 비서관이던 가세 도시카즈加瀨俊一와 긴밀히 연락하면서 종전 공작 입안에 착수했다. 다카기 그룹은 종전으로 가는 유일한 방안은, 최종적으로는 천황의 칙령에 의한 종전 결단을 군과 정부에 강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44)


일본이 종전을 받아들이기 위한 구체적인 조건으로 다카기는 “황실의 안태安泰와 국체의 호지護持”를 가장 중대한 조건으로 들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카기가 ‘황실의 안태’와 ‘국체의 호지’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는 점이다. 황실의 안태가 국체의 호지와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종전 마지막 단계에서 큰 쟁점이 된다는 점을 여기서 유의해야 한다. 다른 조건으로는 민주주의의 실시와 군벌정치 청산, 내정불간섭, 국민의 경제적 생존 보장, 비점령, 전쟁범죄자의 자주적 처리, 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 등을 들었다. 다카기는 민주주의의 도입이 국체에 저촉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카기 소키치는 아직 소수이고 또 정리된 주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전쟁종결을 바라는, 잠재적으로는 중요한 그룹을 대표했다. 다카기는 그 단계에서는 국체를 유지하는 최선의 길이 미국과의 교섭에 있다고 믿었다. 일본의 화평론자와 그루로 대표되는 미국의 일본 전문가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46)


얄타에서 3거두회담이 열리고 있던 1945년 2월 14일, 고노에는 천황을 배알하고 상주했다. 고노에는 상주문에서 느닷없이 처음부터 “패전은 유감이지만 아주 빠른 시일 안에 맞게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아룁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패전은 우리 국체에 손실을 가져다줄 것인데, 영국, 미국의 여론은 아직 국체의 변혁까지 요구하진 않고 있습니다. ··· 따라서 패전 그 자체는 국체상 걱정하실 필요는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체호지 원칙보다 가장 걱정해야 할 일은 패전보다도 패전에 이어 일어날 수 있는 공산혁명입니다.” 고노에는 또 소련이 유럽에서 친소정권 수립을 꾀하고 있는데, 이런 기도가 아시아에서도 추진될 게 분명하며 “소련이 곧 일본의 재생(재건)에 간섭해올 위험이 크다”고 논하면서 좌익분자와 군부 내의 혁신운동이 결합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군을 숙청하고 화평 조건을 다진 뒤 영국, 미국과 교섭해서 전쟁종결을 추진하면서 국체 유지를 꾀한다는 게 고노에의 생각이었다. 53)


2장 새로운 과제: 종전을 향한 공방이 시작되다


1945년 4월 5일 모스크바에서는 몰로토프가 사토 대사에게 소련은 중립조약을 이행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통고했다. 소련 정부는 중립조약에 속박당하지 않고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조약을 즉시 그 자리에서 파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3조는 조약 기한이 끝나기 1년 전에 한쪽이 다른 쪽에 조약 파기 통고를 하더라도 조약은 만기가 될 때까지 유효하다고 명기돼 있었다. 게다가 조약 파기를 통고한다면 일본이 소련의 의도를 알게 돼 소련에 대해 선제공격을 가해올 위험마저 있었다. 따라서 소련 정부는 파기 통고를 하더라도 일본이 여전히 조약이 유효하다고 믿게 만들어야 했다. 사토 대사는 조약의 제3조 규정을 인용하면서 5년간의 유효기간이 만기가 될 때까지 조약은 유효하다고 응수했다. 대사의 역습에 몰로토프는  앞서 밝힌 입장을 “오해가 있었다”며 뒤집고는, 소련 정부도 제3조에 비춰 조약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언명했다. 몰로토프는 잠시 ‘전략적 기만’ 방책을 구사했던 것이다. 63-4)


사토는 소련이 “중립조약을 폐기하고 곧바로 대일전에 가담하겠다는 결의를 갖고 있지 않는 한, 단순한 조약 파기는 하나의 ‘제스처’에 그칠 뿐” 미국과 영국은 그로부터 아무런 실질적인 이득도 보지 못하며, 유럽의 분쟁에서 소련이 자기주장을 밀어붙인다면 처음의 우호적 만족감이 실망으로 바뀌어 삼국 간에 마찰을 증대시킬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토는 몰로토프의 발언으로 보건대, 현 상황에서 소련이 대일 관계 단절, 또는 대일 선전포고까지 몰고 가는 일은 없을 것으로 예측했다. 사토 대사가 중립조약 파기 통고 뒤 바로 상신한 분석은 그 뒤 외무성 대소 정책의 골간을 짜는 토대가 됐다. 그것은 소련과 미국, 영국 사이에는 근본적인 이해의 대립이 있고, 그 대립은 소련이 대일 관계를 단절하고 선전포고를 하는 데까지 돌진하지 않는 한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따라서 극동에서도 소련과 미국, 영국 간의 이해 대립을 이용해서 소련의 중립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65-6)


일본의 화평파가 겁을 내면서 전쟁종결 가능성을 찾고 있을 때, 무조건 항복은 재검토돼야 한다는 의견이 트루먼 정권의 최고지도자들 사이에서 제기됐다. 그 선두에 선 이는 포레스털 해군장관이었다. 5월 8일, 예순한 살 생일날 트루먼은 독일 항복 보고를 받았다.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어 독일에 대한 전승을 축하하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 마지막 부분에 극동에서의 전쟁에 관한 언급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무조건 항복’에 “육해군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다. 둘째는 ‘무조건 항복’은 일본 민족의 섬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 위정자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천황제에 대해 트루먼 성명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일본 위정자들은 예민하게도 그 차이에 주목하긴 했지만, 트루먼 성명에 대해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성명에서는 국체와 천황의 지위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8-90)


그루는 무조건 항복을 수정하자는 캠페인을 집요하게 벌였다. 5월 28일, 그루는 일본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면서 “전쟁 목적에 맞는 근본적인 원칙은 아무것도 희생해선 안 된다는 것”이며, 특히 “일본의 전쟁 수단을 파괴하고, 일본이 다시 이런 수단을 생산할 능력을 파괴한다”는 미국의 목적이 관철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은 최후의 한 사람마저 없어질 때까지 싸움을 계속할 광신적인 민족이다. 따라서 “우리의 원칙과 목적을 어떤 형태로도 희생하지 말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 조건을 받아들여 쉽게 항복하도록 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그는 탄원했다. 그루는 천황제의 유지가 아니라 일본인이 선택하는 정치체제를 허용하라고 주장했다. 그는 히로히토를 포함한 천황은 800년에 걸쳐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며 지금의 천황은 물론 미국에 대해 선전을 포고했으니 책임을 면할 수 없지만, 군의 지배자가 제거된다면 황위를 유지하는 제도는 평화적 일본을 건설하기 위한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00)


스탈린에겐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무서운 속도로 대일본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사이에 미국한테서는 얄타조약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다는 공통의 방침을 확인하고, 쌍방이 예정돼 있는 3거두회담에서 일본에 대한 공동의 최후통첩에 대해 합의한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스탈린에게는 단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전쟁이 소련이 참가할 때까지 계속될 것인가 하는 우려였다. 스탈린은 나아가 일본이 소련의 참전 전에 항복해버릴지도 모른다며 걱정했다. 미국에 무조건 항복 요구를 관철하도록 장려한 것도 소련이 대일 전쟁 준비를 완료할 때까지 일본이 전쟁을 계속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동시에 일본이 소련의 참전을 막을 수 있다고 믿도록 일본을 속이려 했다. 스탈린은 일본 쪽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104)


3장 결정의 시간: 전쟁의 길과 평화의 길


6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1개월 반은 이른바 결정의 시기였다. 도쿄에서는 오키나와의 패전 뒤 화평파가 마침내 소련을 통해 전쟁을 종결할 구체적인 조치를 취했다. 모스크바에서는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정치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인다는 결정을 내렸다. 워싱턴에서는 태평양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여러 기관이 각기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잠정위원회는 일본에 대해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했고, 대통령은 일본 본토상륙 작전을 승인했으며, 국무부와 육군부, 해군부 대표자로 구성된 합동위원회는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 원안을 작성했다. 6월 6일, 스팀슨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최초의 원폭이 일본에 투하될 때까지 소련에는 어떤 정보도 주지 말 것, 그 뒤에는 소련 쪽의 정치적 양보를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이 정보를 주어야 한다고 트루먼에게 조언했다. 트루먼은 자신도 완전히 같은 생각이라면서, 특히 “이것은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만주 문제의 해결에 적합하다”고 대답했다. 109-10)


일본의 화평파가 소련의 알선에 의한 종전 공작을 비밀리에 모색하기로 결정하고 있을 무렵, 트루먼 정권 내부의 유력한 정책결정자들은 일본 내부의 온건파가 조기 종전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무조건 항복 요구를 어떻게든 수정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6월 16일, 그루는 대통령에게 보낸 각서에서 “천황의 지위 보장과 천황 히로히토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게 하겠다는 것, 그것이 일본이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일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런 조건을 명확하게 해서 무조건 항복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 한 일본이 전쟁을 끝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먼이 무조건 항복 내용을 명확히 밝히자는 권고를 꺼리면서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았던 이유는 대통령 자신에게 진주만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의 희생을 최소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청도 고려해야만 했다. 이 두 가지 요청 사이에서 트루먼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119-20)


한편, 천황은 어전회의에서 채택된 ‘기본대강’의 결론(본토 결전)과 시시각각 악화되는 전쟁 판세 사이의 모순에 고통스러워했다. 6월 9일 오전, 천황은 만주를 시찰하고 돌아온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의 상주上奏를 받았다. 우메즈의 보고는 만주, 중국에 있는 병력이 여덟 개 사단밖에 안 되고 탄약 보유량은 대회전 1회분 정도밖에 없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천황은 내지(본토)의 부대는 관동군보다 훨씬 더 열악하기 때문에 싸울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같은 날, 기도는 “명예 있는 강화講和”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시안’을 천황에게 설명했다. 천황은 이를 승인하고 즉각 착수하라고 명했다. 6월 12일 국내의 군관구, 부대, 병기창 등을 시찰하고 귀경한 하세가와 기요시 해군대장은 조악한 무기, 무기 부족, 병사들의 훈련 부족을 기탄없이 지적했다. 하세가와 보고는 마침내 천황에게 본토결전을 단념하게 만든 최초의 사인이 됐다. 천황은 ‘일격화평론’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123)


6월 22일, 최고위 여섯 명은 천황을 배알하기 위해 황거로 갔다.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그 어전회의는 의제가 사전에 제시돼 있지 않았다. 천황은 앞선 어전회의의 결정에 따라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국 수습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다. 우메즈, 하세가와의 보고를 들은 천황이 화평으로 기울었음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천황이 직접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소련의 알선을 통해 전쟁종결을 꾀한다는 안이 최고위 여섯 명의 승인을 얻은 뒤 천황은 그 결정을 신속하게 실행에 옮기라고 얘기하고 어소로 들어갔다. 6월 8일에는 전쟁을 끝까지 계속하기로 결정해놓고 6월 22일에는 소련을 중개자로 세워 전쟁종결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화평파는 이제 일본이 종전을 향한 결정적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해석했다. 요나이는 다카기에게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앞으로 2·26사건과 같은 군의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127-8)


일본은 소련의 중개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가세 도시카즈에 따르면, 소련에 대한 접근은 미국, 영국과 교섭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미국, 영국과의 직접 교섭은 군부의 반대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으므로 우회로가 필요했다. 전후의 회고록에서 가세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 또는 그에 가까운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기도가 소련을 통해서 좀 더 “명예로운 평화”를 얻어내려 한 것은 애초에 없는 것을 달라고 생떼를 쓴 거나 같다고 했다. 사토는 가세와는 달리 소련과의 교섭으로는 어떤 긍정적인 결과도 얻어낼 게 없다면서 모스크바에 접근하는 것 자체에 반대했다. 그래도 사토와 가세는 나았다. 도고, 기도, 그리고 천황 자신은 모스크바의 알선을 통해 일본은 무조건 항복 이외의 더 나은 조건, 특히 천황제를 어떻게든 잔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기도 시안의 핵심이기도 했다. 실로 모스크바의 알선은 일본의 위정자들에게 가혹한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게 해준 아편이었다. 132-3)


6월 하순은 소련에도 결정적인 시기였다. 6월 26일과 27일 이틀간 소련공산당 정치국, 정부, 군의 합동회의가 열려 만주의 일본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8월에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참모본부는 3개 전선이 동시에 만주 중부를 겨냥해서 침공하는 작전을 제안했고, 이 작전이 채택됐다. 대일 참전은 이미 스탈린과 스탈린 주변의 소수 지도자들만이 아는 비밀이 아니라 소련 정부, 공산당, 군의 정식 방침으로 승인받았던 것이다. 그 회의에서 군사행동의 작전 범위가 토의됐다. 소련 군사작전의 최대 목적은 얄타밀약에서 약속받은 영토, 즉 만주, 남사할린, 쿠릴열도를 점거하는 데 있었다. 나아가 북부 조선의 점거는 일본군의 도주로를 봉쇄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간주됐다.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렙스키 원수는 국가방위인민위원회 부위원 바실레프 소장이라는 가짜 이름으로 7월 5일에 (러시아 남동부) 치타에 도착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극동의 거대한 전쟁 기계가 작동하려 하고 있었다. 138-9)


4장 전쟁의 분기점: 포츠담에 모인 세 정상


7월 17일의 스탈린-트루먼 회담 내용을 보면 트루먼에게 소련의 참전은 전쟁을 종결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었고, 오히려 일종의 보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루먼이 스탈린의 제안을 다이너마이트로 보고, 이에 대해 자신도 다이너마이트를 갖고 있다고 얘기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트루먼은 스탈린을 맹우盟友로서 대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항복이라는 목표에 누가 먼저 도달하는지를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소련이 일본을 8월 중반에 공격할 의도를 트루먼이 환영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스탈린은 도쿄와 모스크바 사이에는 어떤 거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미국과 중국을 앞질러 일본과 소련이 뒷거래를 할 가능성을 부정했다. 이는 트루먼과 번스가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바이기도 하다. 외교 요소가 배제됨으로써 문제는 간단해졌다. 8월 15일이라는, 스탈린이 얘기한 공격 일시는 미국의 정책결정자에게 하나의 확실한 시간을 제시한 셈이 됐다. 164)


만일 소련이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일본을 항복시킬 필요가 있다면 공격은 그 전에 이뤄져야 한다. 유일한 불확정적 요소는 원폭이었다. 트루먼에겐 원폭을 대소 외교의 무기로 사용할 의도는 없었다는 역사가의 주장이 있지만, 거꾸로 소련 요소가 트루먼의 원폭투하 결정과 무관했다고 논하기는 지극히 곤란하다. 소련의 전쟁 개시 일시를 알았던 트루먼은 소련이 전쟁에 참가하기 전인 8월 초에 원폭을 투하하는 것이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스탈린은 트루먼과의 첫 회담에서 소련 참전 계획을 털어놨을까? 가장 개연성이 큰 답은, 스탈린이 너무 서두르고 있었다는 해석이다. 스탈린은 미국, 영국으로부터 전쟁에 참가해달라는 권유를 받아내야만 했다. 스탈린은 얄타에서 루스벨트가 그랬던 것처럼 포츠담에 온 트루먼도 소련의 참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행동했다. 그는 트루먼이 소련의 참전을 되도록 막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164-5)


원폭은 일본에 대해 8월 첫 주에 실전에 사용될 것이었다. 트루먼은 소련이 8월 중순에 전쟁을 개시할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으므로 원폭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투하해야 한다. 하지만 트루먼은 원폭을 투하하기 전에 일본에 대해 최후통첩을 ‘발사’해야만 했다. 그 시기는 7월 25일부터 8월 1일까지의 짧은 시간이었다. 트루먼이 “빠르게 진행된 일정에 몹시 기뻐했다”는 것도 그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 배경에는 타이밍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며, 모든 것이 트루먼과 번스가 작성한 시간표대로 움직였다. 일본이 포츠담선언이라는 형태로 발표된 최후통첩을 거부했기 때문에 트루먼이 어쩔 수 없이 원폭투하를 결정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전후에 트루먼과 스팀슨 자신들이 주장해서 미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이지만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원폭투하 결정은 포츠담선언이 발표되기 이전에 이뤄졌으며, 오히려 포츠담선언이 원폭투하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표됐다. 180-1)


7월 24일, 트루먼은 포츠담선언의 최종적인 원문을 승인하면서 이를 헐리 대사에게 전보로 보내 일각도 지체하지 말고 장제스의 서명을 받도록 훈령을 내렸다. 처칠은 25일 런던을 출발하기 전에 이미 트루먼에게 승인하겠다고 했다. 26일 저녁 트루먼은 장제스의 승인을 받았다. 오후 7시에 “모든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으나 천황의 운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포츠담선언 사본이 기자단에 전달됐다. 포츠담선언이 발표될 때까지 소련은 이를 까맣게 몰랐다. 일본 정부는 포츠담선언에 스탈린의 서명이 없다는 사실에 맨 먼저 주목했다. 그 때문에 일본 정부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해서 항복하기보다 소련의 중개를 통해 전쟁을 종결하겠다는 종래의 정책을 지속했다. 스탈린이 필사적으로 공동선언에 참가하려던 시도는 비참한 실패로 끝났으나, 그 실패가 오히려 일본이 한층 더 소련의 알선을 믿고 의지하는 정책을 계속하게 만든, 굴러온 호박과 같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189-91)


7월 2일에 시작돼 포츠담회담 직전까지 계속 이어졌음에도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포츠담회담 뒤에 재개된 중소 교섭은 미소 양국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7월 23일 트루먼은 헐리 대사를 통해 장제스에게 “얄타밀약의 이행”을 권고했다. 7월 28일에는 중국이 얄타밀약에서 결정된 조항에서 벗어나는 조약을 체결하려는 데에 대해 경고했다. 트루먼과 번스의 중국 정부에 대한 집요한 압력은 얼핏 보기엔 두 사람이 얄타밀약에 집착했다는 쪽으로 해석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얄타밀약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이에 저항하려는 중국 정부에 억지로 합의하도록 강요한 배후에는 트루먼과 번스의 숨겨진 동기가 있었다. 트루먼과 번스는 중국 정부가 완강하게 얄타조약의 중국 관련 조항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중소의 의견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해 트루먼과 번스는 중소 교섭을 재개하게 해서 시간을 벌면서 원폭이 투하될 때까지 소련의 참전을 늦추는 책략을 꾸몄던 것이다. 204-6)


5장 원자폭탄과 소련의 참전


8월 7일의 <프라우다>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에 대해 아무것도 보도하지 않았다. 8월 8일에 비로소 4면 마지막 단에 트루먼의 성명을 논평을 붙여서 소개했다. <프라우다>의 침묵은 소련의 지도자가 원폭투하 소식에 충격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원폭투하는 소련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됐다. 먼저 그것은 소련의 참전 이전에 소련을 빼놓고 일본을 항복케 하려는 의도라고 스탈린은 해석했다. 다음에 그것은 원폭이라는 무서운 채찍을 손에 들고 소련을 외교정책으로 굴복시키려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원폭투하 뉴스를 들은 스탈린은 곧 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스탈린은 바실렙스키에게 공격 개시 일시를 48시간 앞당겨 8월 9일 0시(자바이칼 시간,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8월 8일 오후 6시)로 설정하라고 명령했다. 스탈린은 또 7일 오후 10시에 중국 대표단과의 교섭을 시작할 것이라고 통고했다. 중국 대표단은 도착 뒤 첫 회담까지 겨우 몇 시간의 여유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서두르고 있었다. 225-6)


8월 7일의 스탈린-쑹쯔원 교섭은 스탈린의 대일 접근에서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외몽고, 뤼순, 다롄에서의 특별한 권익을 스탈린이 집요하게 주장한 이유는 일본이 전쟁 뒤 다시 일어나 소련에 위협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대가는 당연히 소련에 주어져야 하는 것인데, 다만 얄타조약에서 정한 중국과의 조약 체결이라는 선결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그 대가를 희생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스탈린은 소련이 만주에 진격하더라도 미국과 중국은 그 행동을 얄타조약에 대한 위반이라고 항의하진 않을 것이라고 최종적으로 판단했다. 미국과 중국은 소련의 만주 공격을 탓하다가는 소련이 국민당 정부를 중국 유일의 정통 정부로 지지하는 자세를 바꿔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소련이 만주 깊숙이 공격해 들어간다 하더라도 미국도, 중국도 이를 탓하지 못하고 결국 소련의 군사행동을 승인할 것이라 생각한 스탈린의 판단은 정확했다. 228)


8월 9일 이른 아침, 외무성의 수뇌 4인(도고, 마쓰모토, 안도, 시부사와)은 아자부 히로오에 있는 도고의 사택에 모였다. 외무성 수뇌는 즉각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전쟁을 종결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데에 동의했다. 그리고 포츠담선언 수락에 대해서는 황실의 안태라는 단 하나의 조건만을 내걸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천황에 대한 연합국의 반감을 고려해서 이 조건을 조건으로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츠담선언 수락은 황실의 지위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이해 아래”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기로 했다. 도고가 포츠담선언 수락으로 전쟁을 종결하려고 여러 방면으로 사전 조정을 하고 있을 때, 천황도 종전의 때가 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날 일본 지도자들의 행동을 보면 소련 참전이 화평파에 미친 영향은 원폭의 영향보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이 참전하고 나서 비로소 화평파 지도자들은 포츠담선언 수락을 기초로 해서 전쟁을 종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236-8)


8월 9일 오전 11시 2분(일본 시간)에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황거 내 어문고에서 오후 4시 35분부터 5시 20분까지 진행된 기도와 천황의 회담은 일본이 항복 쪽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과정에서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진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천황이 오후 3시가 지날 때까지는 포츠담선언 수락에 네 가지 조건을 붙이는 쪽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이 회담 뒤에 한 가지 조건으로 의견을 바꾼 사실은 분명하다. 증거는 없으나 기도가 세 가지 조건을 철회하고 한 가지 조건만으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자고 제안한 것에 대해 천황이 저항 의향을 표시했을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또 천황이 실제로 정책을 결정하는 ‘성단’에 의한 종전 방식에 주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천황은 시게미쓰와 기도가 주장하는 논리에 동의했다. 아마도 그 방식이야말로 국체를 호지할 유일한 수단임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249)


# 네 가지 조건 : 천황제, 무장해제, 전쟁범죄자, 보장점령(휴전이나 항복 조건의 이행을 강제하기 위해 상대국의 영토 일부 혹은 전부를 점령하는 것. 포츠담선언 7항에 일본 영토의 보장점령에 관한 조항이 있다.)


어전회의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곧바로 회의를 최고전쟁지도회의로 바꿔 열고 천황의 성단을 승인하는 결의를 했다. 천황은 자신의 의사를 정부가 받아들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10일 오전 3시에 각의가 다시 열렸고, 천황의 성단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때 아나미는 스즈키와 요나이에게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그 조건이란, 만일 연합국이 천황의 국가통치 대권을 인정하는 조건을 거부한다면 그들도 전쟁 계속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 조건이 국체의 호지와 밀접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스즈키와 요나이는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들 자신이 광의의 국체 정의를 인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메즈는 오전 3시에 참모본부로 돌아가 가와베에게 어전회의 결과를 알려주었다. 천황의 군에 대한 공격은 우메즈와 가와베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천황이 군을 버린 것이다. 전날의 의기충천한 기술과는 대조적으로 이날의 가와베는 일기에 “오호, 만사휴의”라고 썼다. 258)


# 만사휴의萬事休矣, 모든 일이 끝났다는 뜻으로 가망 없는 절망을 가리키는 표현.


6장 일본의 무조건 항복 수락


8월 10일 오전 7시 30분, 미국의 단파방송은 <도메이 통신>으로부터 모스 부호를 수신했다. 이는 일본 정부의 정식 회답은 아니었지만 트루먼이 원폭투하일로부터 애타게 기다리던 정보였다. 번스는 벤저민 코언, 두먼, 밸런타인과 함께 일본 정부에 보낼 회답 초안을 작성했다. 밸런타인과 두먼은 항복문서에 천황의 서명이 필요하다는 원안에 반대했으나 번스는 그 반대의견을 거부했다. 대통령은 일본의 조건부 회답에 대해 그것은 천황이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교묘한 속임수라면서 어떤 양보도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번스 회답의 주요한 내용은 1항과 4항에 담겨 있었다. 1항은 “항복한 때로부터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종속된다”고 돼 있었고, 4항은 “궁극적인 일본의 국가체제는 일본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한 의사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라고 돼 있었다. 번스 회답은 천황의 지위 유지를 배제하지 않았으나 천황과 황실의 운명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263, 266-7)


미소의 일본 점령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소련에 보낸 번스 회답은 “항복한 때로부터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에게 종속된다”고 규정했다. “연합국 최고사령관”이라는 명칭은 잘 선택된 표현이었다. 포레스털에 따르면,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미국이 이 특별한 과제를 자기 손에 쥐고, 독일에서 우리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공동책임이라는 형태를 명확하게 피하기 위해 ‘최고사령부’가 아니라 ‘최고사령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소련 정부는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복수의 사령관을 임명하자고 제안하면서, 미국 정부의 의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해리먼은 곧바로 그 제안은 “완전히 논외의 문제”라며 일축했다. 이후 페트로프는 스탈린이 몰로토프의 제안에 들어 있던 “합의한다”는 표현을 “협의한다”로 바꾸고 싶다고 전했다. 해리먼은 이 수정안도 단호하게 거부했다. 소련 정부는 물러섰다. 번스 회답은 영국, 중국, 소련의 승인을 받았다. 273-4)


두 번째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국내 사정과 세계 현상을 생각하면 더 이상 전쟁을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체에 대해서 번스 회답은 “악의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 요는 국민 전체의 신념과 각오의 문제이니만큼 이쯤에서 저쪽의 회답을 수락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천황은 삼국간섭 때 메이지 천황의 고충을 떠올리는 듯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장래의 회복을 기대하려 한다”고 했으며, 또 그 결정이 그때까지 전장에서 전사하고 내지에서도 전상을 당하고, 전재를 당한 국민, 특히 육해군 장병들을 동요시킬지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스스로 마이크 앞에 서서 국민에게 호소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참례했던 참석자들은 모두 울었다. 스즈키가 일어나 성단을 내려달라며 번거롭게 한 것을 사죄하고 천황의 퇴석을 권했다. 훌쩍이고 또 통곡하는 가운데 천황은 자리를 물러났다. 종전의 성단이 내려졌다. 8월 14일 정오였다. 288-9)


8월 15일 오전 7시 21분에 일본방송협회의 아나운서가 천황이 12시에 직접 국민에게 성명을 낭독할 것이라고 전했다. 황후궁 사무소에 감춰져 있던 녹음반은 11시 전에 방송국에 도착했다. 정오에 내지의 국민과 외지의 일본인 및 군대가 라디오 앞에 모여들었다. 기미가요가 연주된 뒤 천황의 육성이 종전조서를 낭독했다. 워싱턴 시간으로 8월 14일 오후 3시에 번스는 도쿄에서 베를린으로 보낸 일본 정부의 포츠담선언 수락 전보의 암호해독문을 받았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4시 5분에 번스는 베른에서 걸려온 전화를 통해 일본 정부의 정식 회답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번스는 곧 베빈, 해리먼, 헐리에게 연락해서 7시에, 4개국 수도에서 동시에 일본 항복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6시에 워싱턴의 소련대사관에서도 소련 정부가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정식 회답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천황의 포츠담선언 수락은 스탈린이 일본에 대해 새로운 공격을 개시하는 단초가 됐다. 297-9)


7장 8월의 폭풍: 일본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바실렙스키는 8월 14일 천황 성명은 단지 무조건 항복의 일반적 선언이며, 일본군에게 군사행동을 중지하라고 한 명령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일본군에 대한 공격작전을 계속하라”고 명했다. 소련의 군사행동은 미국 정부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소련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으로 확인된 만주와 남사할린에 대해서는 이미 체념하고 있었으나, 다롄과 조선 남부, 쿠릴, 북중국 등의 전략적인 지역에 대한 귀속은 여전히 중요한 관심사였다. 미국 정부의 과제는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가장 중대한 목표를 이들 전략적 지역에 대한 소련의 팽창과 균형을 취하면서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천황이 8월 15일 종전조서를 라디오로 방송했다고는 하나 일본군이 항복하려면 대본영이 휴전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그러나 휴전 명령은 8월 17일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 이틀간의 지연이 소련군에게는 얄타에서 약속받은 영토를 물리적 지배하에 둔다는 극동에서의 군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절호의 구실을 제공했다. 303)


얄타조약은 소련의 참전 대가로 쿠릴이 소련에 ‘인도된다’고 규정했으나, 그 쿠릴에 대한 엄밀한 정의는 내려져 있지 않았다. 포츠담회담 당시 공동군사회의에서 소련 참모본부와 미국의 통합참모본부는 쿠릴열도가 북단의 4개 섬을 제외하고 미국의 군사행동 범위라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소련은 오호츠크해를 공동 군사행동 범위로 인정받음으로써 쿠릴에 관여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스탈린은 쿠릴 작전을 수행할 때 미국이 어떻게 반응할지 살피면서 동시에 되도록 신속하게 점거해야 하는 미묘한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일본의 제5방면군이 쿠릴의 북쪽 끝 섬들의 방위가 홋카이도와 혼슈의 방위를 위해 불가결한 것으로 봤듯이, 소련의 지도자도 이들 섬을 점거하는 것이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출입구를 확보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항복 직전의 일본 상황을 보고 틀림없이 즉시 쿠릴 작전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308-9)


# 쿠릴열도에 대한 소련군의 점령작전은 9월 2일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뒤에도 5일까지 이어졌다. 그리하여 미군이 한반도에 처음 상륙한 9월 8일, 소련은 미국과 합의한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38도선 이북의 한반도 북부를 비롯한 모든 점령 예정지에 대한 작전을 이미 완료한 뒤였다.


스탈린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단 한 사람이며, 그가 맥아더라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했으나 소련이 점거한 영토에서 맥아더의 권위를 인정할 의사는 갖고 있지 않았다. 8월 15일, 맥아더는 모스크바의 딘을 통해 소련 참모본부에 점령지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공격적 행동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훈령’을 보냈다. 맥아더의 도를 넘은 명령은 즉각 안토노프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안토노프는 16일 딘에게 답했다. 〈극동의 일본군에 대해 소련군이 군사행동을 계속할지 중지할지는 소련군 총사령관만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다.〉 헐은 안토노프가 회답에서 미소 간의 오해를 지적한 부분을 인정했다. 통합참모본부는 소련과 분쟁이 일어나는 걸 바라지 않았다. 마셜은 맥아더와 딘 두 사람에게 맥아더의 첫 훈령을 발송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으며 그것은 훈령이 아니라 단지 정보로서 보낸 것이라는 결정을 전달했다. 이 건에서만큼은 소련이 짖어대자 미국이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314)


그러나 미국 지도자들은 쿠릴보다 만주와 조선에서 소련의 군사행동 쪽을 걱정하고 있었다. 8월 10일부터 11일에 걸친 회의 결과 본스틸과 딘 러스크 소령에게 조선에서 미소 군사행동 범위를 결정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매클로이는 두 사람에게 미군이 도달 가능한 범위 내에서 “될 수 있는 한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벽에 걸려 있던 작은 극동 지도를 보면서 본스틸은 미군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보다는 좀 더 북쪽이지만, 북위 38도선이 서울을 남쪽에 두고 대체로 조선을 양분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경계선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8월 15일, 트루먼은 애틀리, 스탈린, 장제스에게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해, 또한 지방에서의 군사충돌을 피하기 위해 아시아 대륙 해안지역에 해군과 공군을 사용하겠다”고 통고했다. 그 통고는 일반명령 1호에서 규정된 경계선을 넘어 중국, 만주,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대륙의 해안선에서 군사행동을 취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316)


미국 정부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소련의 만주 점령으로 소련군과 중국공산당 세력이 협력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해리먼은 스탈린이 “옌안(延安, 중국공산당)과 몽골 인민공화국을 몰래 부추겨서 장제스와 미국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그 토대 위에서 “소련이 점령한 만주와 조선에 우호적인 독립국을 수립”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미국의 우려와 달리 스탈린은 중국의 국내문제에 간섭할 의도가 없었다. 스탈린은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정통정부로 인정했다. 8월 18일에 스탈린이 만주의 소련군 사령관에게 명한 것은, 장제스가 임명한 중국 관헌이 국민당의 국기를 내거는 것을 인정하고, 국민당의 질서 회복 노력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명령은 소련군이 확보한 모든 식량, 연료, 무기, 자동차, 기타 재산은 소련군에 속한다는 지시도 담고 있었다. 스탈린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아직 사회주의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지 않았고, 따라서 가능한 한 착취해야 할 대상이었다. 325-6)


맺음말 가지 않은 길


전후 일본에서 쇼와昭和 천황은 일본 국가와 일본 국민을 구한 구세주로 여겨져왔다. 일본의 종전에 천황이 수행한 역할은 확실히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종결지어 일본 국가를 구하고 국민을 구하는 것이 천황의 뜻이었다는 주장은 천황제를 구하기 위해 천황의 자기희생 정신을 강조한, 기도를 비롯한 이들의 의식적인 증언이었다. 고노에도 그랬고 황실 가운데서도, 또는 그루처럼 천황제 유지를 옹호한 미국의 일본 전문가 사이에서도 쇼와 천황은 ‘쇼와’가 의미하는 계몽적인 평화와는 거리가 멀며, 동란으로 가득 찬 쇼와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전쟁종결 뒤에 퇴위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아나미의 자결이 일본제국 육군의 죽음을 의미한 것처럼 쇼와 천황의 퇴위는 쇼와 시대와의 단호한 결별에 보탬이 됐을 것이다. 쇼와 천황이 퇴위하지 않고 그 지위에 머문 것은 일본의 전쟁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고 일본이 과거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방해한 커다란 요인이 됐다. 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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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전쟁 1939-1945 - 편지와 일기에 담긴 2차대전, 전쟁범죄와 폭격, 그리고 내면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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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독일에서 살던 유대인들에게 전쟁은 물론 홀로코스트로 경험되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사태를 정반대 방향에서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문제는 전쟁이었다. 그들은 따라서 제노사이드를 전쟁이 배경이 되어 벌어진 사건으로 이해했다. 똑같은 사건을 완전히 다르게 바라본 것이다. 그 두 가지 시각은 물론 유대인들과 독일인들 사이에 엄존하는 권력과 선택의 불평등이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 문제성이야말로 내가 이 책에서 2차대전 독일사를 서술하면서 채택한 접근 방법이다. 역사가들은 흔히 대량 학살의 작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홀로코스트가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했는지 논의했다. 그와 달리 나는 독일인들이 학살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지식을 어떻게 자아에 통합했는지 논의하고자 한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제노사이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면서 그로부터 어떻게 영향받았는가? 달리 표현하자면, 전쟁은 제노사이드에 대한 그들의 지각을 어떻게 형성했는가?"(31)


"'이것이냐 저것이냐', '사느냐 죽느냐', '모든 것을 얻거나 잃거나', '승리 아니면 파멸'이란 마니교적 이분법의 은유는 독일인들의 수사학에서 역사적으로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1차대전 패배 이후 히틀러의 핵심 이념을 구성한 은유였고, 빌헬름 2세가 1914년 8월 6일에 '독일 인민에게 전하는 선언'을 발표한 이래 1차대전 선전의 관용어였다. 그러나 1930년대 히틀러 국가가 인기를 누린 것은 종말론적 관점 때문이 아니었다. 전쟁의 초반에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사회가 종말론적 사고방식을 수용한 것이야말로 2차대전 후반기에 독일인들에게 발생한 결정적 변화였다! 독일의 운명이 패배 쪽으로 기울자, 극단적인 이분법이 평범한 상식으로 변했다. 연합군의 '테러 공격'은 사느냐 죽느냐의 위기의식을 낳았다."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위해 싸웠던 것은 그들 모두가 나치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독일인들이 끝까지 싸운 것은, 그들이 전쟁의 가혹함을 정면으로 겪었기에 그리고 전쟁이 생산해낸 종말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32)


"1939년 가을 서부에서 전투의 개시를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 일부는 생각했다. '지금 판을 정리하는 게 낫다. 그러면 또다시 전쟁을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다.' 독일의 학동들은 몇 세대 동안 프랑스가 '세습적인 적'이지만 본능적이고 감정적으로 진짜 문제는 러시아라고 배웠다. 1890년부터 심지어 야당 사민당조차 독일이 러시아의 공격을 받는다면 동방의 그 야만으로부터 나라를 방어할 것이라고 맹세했었다." "1914년 8월 러시아가 동프로이센을 침공하자, 러시아 전쟁은 끝까지 싸워서 다음 세대가 또다시 겪지 않아도 되도록 해야 한다고, 1914년에 독일인들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914~1917년에 동부전선에서 싸웠던 퇴역군인들로부터 막 학교를 졸업한 젊은 병사를 거쳐 아직 집에 있는 십대 청소년들에 이르기까지, 독일인들은 2차 대전을 나치 체제와 동일시했던 것이 아니라 세대를 가로지르는 가족적 책임으로 간주했다. 그것이 그들의 애국주의의 가장 강력한 토대였다."(46-7)


제1부 방어전: 1939년 9월~1940년 봄


제1장 독일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전쟁 


"1914년 8월과 달리 1939년 9월 1일에는 애국 행진이나 대중 집회 같은 것이 없었다. 길거리는 무섭도록 조용했다. 예비군들은 집합 장소에 가서 신고를 했고 민간인들은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1차대전의 재앙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공포는 역력했다." "추후 6년 동안 독일의 모든 달력과 일기장에 전쟁 개시일로 인쇄된 날짜는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한 1939년 9월 3일이었다." "이레네와 에른스트는 특별한 정치적 의견을 나타내지 않았다. 클레퍼와 호젠펠트와 퇴퍼빈은 나치운동의 일부, 특히 반종교적인 부류를 역겨워했다. 그들은 모두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다른 독일인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영국과 프랑스와 전쟁을 해야 하는가? 그럴 가치가 있다고 느끼던 독일인은 소수였다. 고지 프랑켄 지방의 한 보고서 그해 여름의 여론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단치히와 회랑 문제를 해결할 방법에 대한 여론의 답은 여전히 똑같다. 독일에 편입? 예스. 전쟁을 통하여? 노.'"(60, 64-5)


"독일 언론은 1939년 8월 중순에 국경지대의 독일인 혈통들이 폴란드 내륙의 '강제수용소'로 대규모로 이송되었다고 보도했고, 개전 직후에는 전쟁이 독일인 혈통들에 대한 일련의 대량 학살을 촉발시켰으며, 희생자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라고 보도했다. 독일 영화관의 〈주간뉴스〉는 독일인 혈통들이 학살당하는 시각 자료를 보여주었고, 체포된 폴란드 병사들과 '비정규 전투원들'은 독일인 혈통들을 절멸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범죄적으로 타락한 '하등인간'이라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1943년 봄에 괴벨스가─딱 한 번─소련의 더 큰 테러를 부각하기 위하여 독일 여론을 폴란드인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몰고 가려 했을 때, 그는 1939년의 기억과 충돌하게 된다. 독일인 독자들은 폴란드인들에 의해 독일인 6만 명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설혹 소련 비밀경찰NKVD이 살인자들이라고 해도 왜 우리가 폴란드인들을 동정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선전부는 여론의 동정심까지 조작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79-81)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는 독일인들에게 더이상 주제가 되지 못했다. 히틀러가 바르샤바에서 승리한 독일 군대를 치하하고 2주일이 지난 시점, 교회가 축하의 종을 울리고 1주일이 지난 1939년 10월 중순에 망명 사민당의 한 지하 요원은 '폴란드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라고 보도했다. 독일인들에게 문제는 이제 평화였다. 폴란드를 둘러싼 갈등이 폴란드 해체로 해결된 만큼, 서구 열강과의 평화가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다시 솟았던 것이다. 10월 6일 히틀러가 제국의회에서 연설했다. CBS의 베를린 특파원 윌리엄 샤이러는 이렇게 적었다. 〈그가 1936년 라인란트 진군 이후 정복 때마다 제국의회 연단에서 했던 말과 똑같았다. 이번이 최소 다섯번째다. 그는 언제나처럼 똑같이 진지하게 말했지만, 만일 당신이 어느 독일인에게 바깥 세계는 이미 쓰라린 경험을 한 탓에 과거에 주었던 신뢰를 더이상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모든 독일인이 경악할 것이다.〉"(83-4)


제2장 대오의 균열을 막아라 


"괴벨스가 1933년 집권 직후 독일 라디오 방송국에 하달한 첫 번째 계고는 다음과 같다. '방송의 최고 규칙은 지루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모든 것 위에 놓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지루함을 방송하지 마십시오. 매일 저녁 요란한 행진곡을 방송하는 것이 민족 정부에게 봉사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1936년 3월 나치 제국방송지도자 하다모프스키는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의 프라임타임에 그동안 선호되던 '대작' 대신 만인을 겨냥한 가벼운 음악회, 버라이어티쇼, 댄스음악을 방송하도록 했다. 1939년 청취자 선호도 조사는 새로운 포맷이 모든 계층에게 환영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전문직과 지식인들조차 고전음악보다 대중음악을 선호했다. 1939년 10월 1일 방송국이 새로운 프라임타임 쇼 〈독일군을 위한 리퀘스트 콘서트〉를 선보였다. 쇼는 곧 정규 프로그램이 되었다. 신청 사연은 전쟁으로 떨어져야 했던 커플들에게 공적인 친밀성의 순간을 공유하도록 해주었다."(108-9)


"그해 말 예술이 예술을 모방했다. 최초의 블록버스터 전쟁영화 〈리퀘스트 콘서트〉가 제작된 것이다. 방송 진행자 하인츠 괴데케는 영화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했다. 영황에서 그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만났다가 헤어진 연인이 재회하도록 도와주는 진행자 역할을 맡았다." "2천만 혹은 2,500만 명이 그 영화를 보았다. 그때까지 독일 영화 최대의 관람객이었다. 라디오 쇼는 그보다도 성공적이었다. 나라의 거의 절반이 방송을 들었다." "정보국은 방송이 '민족공동체를 수천 번이나 경험하도록 했다'며 열광했다. 그런 것이야말로 나치가 찾던 자석이었다. 모든 개인적 이기심이 강렬한 민족 감정 속에 녹아 없어지는 감정적 통일의 순간, 그러나 역설적으로 방송이든 영화든, 〈리퀘스트 콘서트〉는 친밀한 관계의 사적인 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사랑과 가족이라는 사적인 관계가 애국심의 중핵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나치는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강력하지만 가장 예측하기 힘든 감정인 사랑을 동원했던 것이다."(111-2)


제3장 극단의 조치들 


"군법 재판관들은 1939년 8월 16일 동원령과 함께 효력이 발생한 '전시특별형법'을 적용했다. 그 법은 '군대 사기 저해 행위'의 표준 형량을 사형으로 정했다. 법 해석자들은 특히 '종파 집단과 평화주의자들'을 겨냥했다. 그 법에는 복종의 의무가  '양심에 따를 의무'에 선행한다고 적시되어 있었다. 또한 법에는 모든 신병에게 요구된 지도자 히틀러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 맹세를 거부한 병사들에 대한 처벌이 포함되어 있었고, 군인으로서 의무 불이행이 '탈영'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판사들 일부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비전투 병과에서 군복무를 이행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 대부분은 거부했다. 또한 중간에라도 신앙을 포기하면 감옥형을 유예받을 수 있었다. 그런 경우에도 시민권 박탈은 취소되지 않아서, 병사들은 지뢰를 제거하는 등의 위험한 작업을 담당하는 처벌 부대에 배치되었다. 군복무 거부자의 자식은 탁아 기관에 넘겨졌고, 가족의 업체와 주택은 강매되었다."(116-7)


"민족적 개신교의 독일 구원론은 1918년의 '그the' 재앙을 극복하려던 반자유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문화의 한 판본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역사의 순환성에 입각하면서도, 실패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순환의 경로에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핵심적인 정치적 이념─바이마르 민주주의, 자유주의, 평화주의, 사회주의, 유대인, 패전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 대한 거부─은 변치 않았다. 1939년의 새로운 전쟁은 그들이 1918년에 대하여 생각했던 모든 것을 소환했다. 핵심은 독일의 구원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 즉 지난 전쟁에서 범했던 오류를 이번 전쟁에서는 피해야 한다는 일반화된 신념이 전쟁 초부터 독일 엘리트들이 치명적인 폭력을 가할 자세를 갖추었던 것을 설명해준다. 그것은 전쟁에서 가해진 가장 극단적인 폭력이 언제나 가장 과격한 혹은 가장 나치다운 기관의 행동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설명해준다."(123-4)


"전쟁이 독일 국내에서 촉발한 가장 과격하고 폭력적인 테러는 가장 외진 곳에서 비밀리에 발생했다. 요양원의 정신병 환자들이 전쟁 동안 학살된 것이다. 작전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마찬가지로 개전 즉시 시작되었다. 학살은 1945년 5월 전쟁의 끝날까지 이어져서, 총 21만, 6,400명이 살해되었다. 이는 나치가 살해한 〈독일〉 유대인보다도 많은 숫자다. 살인 행위의 주체는 폴란드에서 인종 정책을 주도한 힘러의 제국보안청과 같이 특수하게 나치적인 기관이 아니었다. 작전의 주체는 보건행정과 지방행정에 근무하는 평범한 의사들과 공무원들이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처형과 달리 장애인 학살은 공개되지 않았다. 작전에 참여한 핵심 인물들이 법적 뒷받침을 요구했지만 처음에는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불러와 브란트가 히틀러에게 '은혜로운 죽음Gnadentod'을 허용한다는 문장 한 개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는 그후 비밀 살인을 허용하는 문서에 다시는 자기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130-2)


제2부 유럽의 주인: 1940년 5월~1941년 여름


제4장 진격 


"1940년 5월 10일 서부전선 전투가 시작된 이래 국내의 독일인들은 라디오를 끄지 않았다. 친위대 정보국은 교대근무를 일찍 마친 사람들도 밤 12시의 독일군 발표를 듣기 위해 기다린다고 보고했다. 독일군이 '도버해협까지 진격해서 적의 대군을 포위했다는 소식이 사람들의 긴장을 최고도로 끌어올렸고, 사람들은 그 흥분을 모든 곳에 전했다.' 프랑스가 곧 무너지고 영국 침공이 뒤따를 것이라는 추측이 만발했다. '이번에는 영국도 자기 땅에서 전쟁을 경험해야 한다'는 소망이 자주 표출되었다. 독일인들이 선전부가 내보내던 독일군 발표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친위대 정보국이 전황 발표를 외국 라디오 청취에 대한 완벽한 해독제로 간주할 정도였다. 괴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언론에 히틀러가 전체 작전을 개별적인 세부 행동까지 계획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딱 하나뿐이었다. 서부 독일의 여러 도시에 적군 공군기들의 폭격 경보가 계속 울렸고, 그것은 적에게 보복하라는 요구를 자극했다."(150-1)


"독일 방송기자와 카메라맨들은 벨기에와 프랑스 전쟁 뉴스영화를 연속해서 제작했다. 독일 관객들은 영상에서 본 프랑스군의 서아프리카 병사들에게서 호러와 역겨움을 느꼈다.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이 저런 짐승들을 우리에게 풀어놓다니 악마가 그들을 데려가리!' '저들은 문명화된 민족의 수치다. 영국과 프랑스를 영원히 타락시킨 것이 바로 저것이다!' 전형적인 외침들이었다. 라이헨베르크의 여자들은 '유색' 얼굴을 보고 무서움에 마비되는 듯했다고, 스크린에 독일군 병사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독일군은 흑인 병사들에 대한 보복작전과 병행해서 프랑스군이 1923년에 독일 라인란트를 점령했을 때 식민지 흑인 부대가 독일 여성들을 얼마나 성적으로 착취했는지 끊임없이 상기시켰고, 독일군의 폭력을 그 기억에 대한 보상인 듯이 선전했다. 독일군이 2차대전에서 비교적 '깨끗하게' 행동했던 서부전선에서도 그들의 인종주의적 폭력만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153, 158-9)


"독일 학생들은 1920년대 내내 프랑스를 '세습적인 적'으로 간주하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제 독일이 그 적을 신화 속의 괴물처럼 제압한 것이다." "관객들은 뉴스 영상 속에서 히틀러가 나라 전체의 우레 같은 박수와 '하일 히틀러' 인사로 환영받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히틀러가 장군들과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서 경외의 침묵 속에 마음을 가라앉혔고, 히틀러가 전선 근처에서 차를 타고 포로들 무리를 지나가는 장면에서는 그의 안전을 걱정했으며, 히틀러가 차 안으로 들어가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일인들은 영국이 아직 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었고 또 물자 부족과 '거물들'의 착복을─잠깐─잊었다. 그들의 희열은 '그the 지도자'에게 꽂혔다. 이제 그들은 새로 찍은 히틀러의 사진을 얻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그의 어록에 대하여 애지중지 토론했다. 1930년대 초 나치 돌격대와 공산주의자들 간의 가투가 그렇게나 자주 벌어지던 터프한 노동계급 구역들도 마침내 항복했다."(159-60)


"(독일인들이 보기에) 세계제국 영국은 나치가 독일을 그렇게 되도록 만들기 원하는 나라였다. '인류'를 방어하고 있다는 영국의 주장을 '위선'과 '거짓'으로 역공하는 작업은 나치의 기이한 반제국주의를 낳았다. 장대한 서사 영화 〈옴 크뤼거〉는 보어전쟁을 아프리카인의 시각에서 이야기한다. 영화는 독일이 런던을 비롯한 영국 항구들을 여전히 공습하던 1941년 4월에 개봉되어 최고의 박스오피스를 기록한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영화는 보어인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수용했던 강제수용소에서 절정에 달한다. 쫓기던 한 남자가 수용소 가시철망 너머의 아내와 대화하자, 난폭한 수용소장─윈스턴 처칠과 똑 닮은 소장─이 그 남자를 체포하여 수용소의 모든 여자들과 아이들 앞에서 목매달아 죽인다. 여자들과 아이들의 아우성이 높아지자 소장은 군부대를 동원하여 발포한다. 그것은 나치 독일이 보여준 유일한 수용소 학살 장면이었다. 독일 관객들은 보어인 희생자들에게 공감했다."(181)


제5장 승자와 패자 


"'집'과 '전선'을 오가던 편지는 진통제였다. 남편과 아내는 자신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쓰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핵심이었다. 편지의 역할은 모든 것이 온전하다는 것, 아무것도 변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성교는 포르노 음화와 비슷하게 생생하게 그려졌다. 따라서 공간적 분리는 불안과 질투를 일으켰다. 남자든 여자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성적 억제의 문화에 젖어서 성교에 관하여 쓰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성적 부정不貞에 대한 공포만큼은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사실 매춘은 정복자 독일 병사가 유럽을 가로지른 모든 곳에 함께 있었다. 독일 야전사령부는 병사들이 '타락한' 프랑스 여성으로부터 성병이 감염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독일군 병사들이 하녀, 청소부, 세탁부, 웨이트리스, 바 여종업원, 미용사, 집 여주인, 목욕탕 여종업원, 속기사, 점원, 여타의 아는 여성들과 성적 모험을 벌이고 그래서 프랑스 당국이 이를 억제하려 하면, 독일군 당국은 불쾌하게 반응했다."(188-9)


"나치 독일은 소비재가 현저히 부족했다. 국내총생산의 20%가 군수에 할당되었고, 그 비율은 곧 1/3로 증가했다. 국내 수요의 억제는 높은 저축률로 이어졌고, 국민들의 예금은 정부의 규제적 관리에 의하여 조용히 전쟁 준비로 돌려졌다. 나치 정부는 그 덕분에 1차대전의 특징이었던, 국민들에게 전쟁채권의 구입을 호소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독일 소비자 입장에서 1940년은 마법처럼 노다지를 줍던 해였다. 독일의 마르크화가 독일군이 점령한 모든 나라에서 고의로 절상되었다. 자연스럽게 독일군 병사들에게 물건값이 내려갔다. 그래서 독일 가족이 국내에서 살 수 없던 물건들을 주둔지에서 마음껏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40년 10월 헤르만 괴링이 독일군 병사, 그리하여 독일 소비자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가 '모피, 보석, 카펫, 비단, 사치품' 구입에 대한 제한 조치를 해제한 것이다. 괴링은 승리한 점령군 부대의 병사들은 해당 지역의 민간인들과 똑같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선언했다."(195-6)


"바르텔란트는 식민 사업, 즉 '재-게르만화'의 모델 지역이었다. 모두 61만 9천 명의 폴란드인이 한스 프랑크가 지배하는 '총독령 폴란드'로 '재이주'되었다. 독일인들이 이주해오도록 공간을 비워놓기 위해서였다. 그 폴란드인들 중에서 약 43만 5천 명이 바르텔란트 출신이었다." "바르텔란트에서 스물여덟 살의 리젤로테에게 깊은 인상을 준 사람들은 제국노동봉사단 의무의 일환으로 이주민들을 돕기 위해서 독일에서 온 소녀들과 여대생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소녀들은 폴란드인 농장에서 폴란드인들을 어렵게 끌어내고 짐을 싸도록 하는 일을 도왔다. 노동봉사대 소속의 열여덟 살 소녀들은 번번히 친위대 남성들 옆에 그들과 동수同數로 배치되어 이주 작전에 투입되었다. 일부는 기차역에서 독일인 이주민을 환영했고, 다른 일부는 친위대원들이 폴란드인들을 끌어내는 것을 보조했으며, 폴란드 여성들을 감시하여 그들이 새로 들어올 독일인들을 위하여 자기 집을 말끔하게 청소하고 떠나게 했다."(201-3)


제3부 1812년의 그림자: 1941년 여름~1942년 3월


제6장 독일의 십자군 전쟁 


"1941년 6월 23일 월요일 친위대 정보국은 전국 어디서나 독일인들이 소련전에 대하여 보인 첫 반응은 '완전한 경악'이었다고 기록했다. 스탈린과의 전쟁이 바로 그 시점에 발발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두 나라 간에 새로운 합의가 이루어졌고, 조만간 스탈린이 베를린을 방문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로운 현실에 놀랄 만큼 빠르게 적응했다. 전쟁이 선언된 첫날 오후와 저녁의 많은 보고서들은 '사람들이 정부가 러시아의 '배반 행위'에 대하여 군사력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대응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강조했다. 일부는 동부에서의 전쟁이 영국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미국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히 여자들은 독일인 병사들의 목숨을 걱정했고, 독일 전쟁포로들이 소련의 '아시아적 방법들'로 고통받을 것을 강조했다."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전쟁은 삼가는 투로 지지했던 많은 가톨릭 주교들은, 소련 침공을 '신을 모르는 볼셰비즘'에 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축성했다."(241-3)


"로베르트는 전쟁을 증오했다. 그가 마리아에게 보낸 편지에는 동료들이 민간에 불을 지른 것과 포로들을 학살한 것이 적혀 있지 않다. 그는 일기에는 그 일들을 적어놓았다." "그러나 전쟁을 혐오하면 할수록 이번에는 정말 끝장을 보아야 한다는 확신이 굳어졌다. 그는 두 살배기 아들이 러시아에서 싸우는 세번째 세대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라이니가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 와야 하는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 돼!' 로베르트는 마리아에게 썼다." "그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랑을 품고 있는 그들의 초월적인 사랑'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마리아를 안심시켰다. 그 끔찍한 전쟁 행위는 로베르트 R과 같은 남자들을 불안케 하는 동시에 전쟁에 대한 헌신을 강화했다. 이번에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병사들과 가족들은 자신을 나치 정권이 아니라 전쟁과 동일시했다. 세대를 넘어서는 책임과 동일시했다. 그것이 그들이 갖고 있던 애국주의의 가장 강력한 토대였다."(265-6)


"독일군의 키이우 봉쇄는 독일 농업식량부 차관 헤르베르트 바케가 소련전의 일부로 1940년 12월에 고안해놓은 '기아 계획'의 일부였다. 바케는 우크라이나 남부의 비옥한 '흑토'에서 생산된 엄청난 곡물을 독일로 보내기 위하여 우크라이나의 북부와 도시들을 모두 아사시킬 작정이었다. 그 계획은 소련 침공이 시작되기 7주일 전인 1941년 5월 2일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계획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그 나라에서 반출하면 수천만 명이 아사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1941년 8월 30일 러시아혁명의 요람이요 소련의 제2도시인 레닌그라드로 가는 마지막 철로가 므라에서 끊겼다." "제18군 병참부가 상부에게 레닌그라드가 항복하면 군대의 식량을 그 도시를 먹이는 데 사용해도 되는지 가이드라인을 요청했다. 독일군 병참사령관 에두아르드 바그너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답했다. '조국에서 출발하는 모든 차량의 식량은 그만큼 조국의 식량을 줄인 것입니다. 러시아인들은 굶어죽는 것이 낫습니다.'"(272-4)


제7장 첫 패배 


"겨울철 후퇴는 동부전선 독일군을 공통의 문화에 묶었다. 바로 대량 학살의 문화였다." "히틀러가 1941년 12월 21일 독일군에게 '초토화' 작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내리기 전에 이미 초토화는 후퇴하는 독일군의 공통된 행동이었다." "독일군은 생사의 위기를 맞이하여 극단적 폭력의 영구화로 대응했다. 병사가 독일제국 어느 지역에서 충원되었든, 그들이 몸담았던 민간 환경이 나치즘에 적대적이었든 우호적이었든, 차이가 없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고르게 섞인 루르 노동계급 출신의 제253보병사단은 농촌 출신들이 징집된, 좀더 나치화된 사단들과 똑같은 변화 과정을 겪었다. 후퇴는 분노와 공포를 뒤섞고 또 강화했다. 자신의 차량과 총과 중장비들이 파괴되고 그토록 어렵게 점령했던 영토를 포기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분노, 겨울에 훨씬 유연하게 대응하는 소련군의 능력에 대한 충격, 후퇴할 안전한 전선을 보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폭력 원칙을 강화했다."(303-5)


"안톤 브란트후버의 가족들이 그의 탈영을 지지하지 않은 것은 2차대전에 독일군 병사들의 탈영이 대량으로 발생하지 않은 것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2차대전에 동맹국 군대에서 탈영이 대량으로 발생한 예들, 1943년의 이탈리아 병사들,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와 룩셈부르크와 알자스에서 징집된 병사들, 그리고 1943~1944년 보스니아 무장 친위대 병사들의 탈영은 모두 그곳의 시민사회가 탈영한 병사들을 흡수하고 숨겨주고, 그래서 군 당국을 상대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든 곳들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심장부에서는 전쟁의 마지막 몇 주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탈영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치 테러 기구가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기관들이 비교적 고립된 개인들을 타깃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성심과 애국심은 나치 정권이 부과하던 외적인 요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일 시민사회의 모든 층위에서 반복되고, 부모와 아내와 연인의 강력한 1차적 호소에서 되풀이된 격률이었다."(313)


"전선과 고향집의 엄청난 생활 격차는 가족 간의 감정적 결속을 해치지 않았다. 정반대로 집은 그 모든 특권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문제들과 씨름하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집은 전선의 삶을 견뎌내도록 해주었다. 헬무트의 어머니는 하녀 없이 겨우내 집안일을 꾸려야 했을 때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럴 때는 러시아에 있는 너를 생각하고, 인간이 해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한단다. 나는 이 멋지고 따뜻한 집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거잖니.' 그녀의 조카 라인하르트가 얇은 얾은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빠졌을 때, 그녀는 전선의 아들과 동료들은 '물에 잠기고도 불을 쬘 수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헬무트가 2층 부엌에 만들어놓은 화학 실험실이 라인하르트와 그의 어린 아들 루돌프에 의해 엉망이 된 사고에 대하여 쓴 편지는 그 어떤 애국주의 선전보다도 고향과 집에 대한 헬무트의 감정적 결속을 굳게 해주었다. 헬무트 파울루스는 그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는 병사였다."(320)


제4부 교착상태: 1942년 초~1943년 3월


제8장 비밀의 공유 


"유대인에 대한 조치들 중에서 최초의 가장 극적인 조치는 1941년 9월 1일의 명령, 즉 다섯 살 이상의 모든 유대인에게 겉옷 왼쪽 가슴에 노란색 '다윗의 별'을 부착하도록 한 명령이었다." "유대인의 별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인 혈통들이 미국에서 하켄크로이츠 배지를 달아야 한다는 루머는 두 나라가 전쟁에 돌입하기 전에 나타났다." "독일인들이 미국의 독일인 혈통들은 겉옷에 하켄크로이츠를 달도록 강요되었다고 상상하기 시작하자, 독일에서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조치들이 그리 독특하게 보이지 않았다. 독일인들의 생각으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는 진작부터 진행되어온 것이기도 했다." "1941년 가을 독일인들은 (워싱턴과 런던의 유력한 권력자들인) 유대인들이 어떻게 독일에 대한 보복을 지휘하고 있는지 상상하고 있었다. 그 보복이란 것이 아직 실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상상하고 있었다. 다윗의 별이 도입되고 3개월 만에 독일은 미국과 공식 전쟁에 돌입한다."(339-42)


"슈바벤의 농촌 마을로부터 한때 좌파적이었던 함부르크에 이르기까지, 독일인들은 이송 유대인들이 남긴 재산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로비했고 경매에도 참여했다. 1941년부터 1945년 사이에 함부르크에서만 유대인 가구와 가사도구 최소 3만 점이 경매장의 망치 소리와 함께 판매되었다. 가구 한 점당 응찰자가 족히 10명은 됐다. 함부르크 베델 구의 독일인 노동계급 부녀자들은 커피, 보석류, 고가구, 카펫을 사들였고, 그 일부를 되팔기도 했다. 게슈타포가 유대인 재산을 판매하여 도이체방크 계좌에 입금한 액수는 1943년 초까지 720만 마르크에 달했다. 독일 여성들이 구입한 모피 코트에는 원소유자의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같은 지역 출신이었기에 원소유자가 누구인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언론은 경매를 공고하면서 판매대에 오른 물건이 유대인의 물건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남긴 주택은 지역 나치 기관원 혹은 아직은 소수였던 폭격 맞은 독일인 가족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졌다."(346-7)


"1941년 가을 괴벨스가 '민족동지들'에게 유대인의 낙인과 이송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도록 만들고자 할 때, 그는 그 문제가 공적인 이슈로 전환되면 미디어가 토론과 반대의 공간을 창출하게 된다는 점을 인식했다. 괴벨스의 해법은 반유대인 캠페인의 톤을 낮추는 것이었다." "토론보다는 풍문과 암시를 통하여 인민이 학살을 묵인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마저 침묵하자,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 어떤 명시적이고 공적인 도덕적 추론이 봉쇄되었다." "유대인의 경우에는 임박한 죽음이 전쟁의 나머지 모든 측면에 대한 이해를 규정했다. 독일인들의 경우에는 전쟁이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응을 규정했다. 저널리스트 파울하인츠 반첸은 유대인들에 대한 태도가 경화된 것을 1941~1942년 겨울 동부전선을 집어삼킨 위기 탓으로 돌렸다. 그들을 분리한 것은 사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관점이었고, 그 관점은 권력의 막대한 비대칭성─그리고 공감의 비대칭성을 특징으로 했다."(367-9)


제9장 유럽의 약탈 


"1941~1942년 가을에 바케가 구상한 정복지 약탈 계획은 독일 민간인들을 결핍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1942년 4월 6일 배급량이 심하게, 그것도 모든 범주에서 삭감되었다. 나치 지도부는 1916~1917년의 '순무의 겨울'과 1918년 '등에 칼을 맞은 것'을 직선으로 결합했기에, 식량 부족은 그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위기였다." "농민들이 그들의 생산 할당량을 충족시키고 또 암시장에서 거래할 잉여를 충분히 생산했다는 사실은, 농업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는 친위대 정보국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농업식품부는 그 전략을 거부했다. 그들은 고정된 가격과 할당 쿼터를 1차대전에 난무했던 인플레이션과 도시의 기근을 피할 수 있는 보장책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경찰과 법원은 농촌에 광범하게 나타난 온건한 암시장을 용인하면서 작은 불법 경제를 묵인했고, 그렇게 용인된 불법 경제가 공식 할당량을 충족시키는 한 그것은 증산을 자극하는 인센티브가 되었다."(399, 407)


"한 경제사가는 나치 독일이 강제수용소 재소자들 중에서 노동에 투입할 노동자들을 지속적으로 '선별'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기아 배급만 제공한 것을 두고 그 원리를 '스톡이 아닌 플로우'로 정리했다. 노동력을 저장하지 않고 일정 기간 투입한 뒤 버리는 양상을 개념화한 것이다. 1942년에 시작된 배급 위기에서 그 원리가 전쟁포로와 외국인 '자원' 노동자를 가리지 않고 동유럽 출신의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었다. 사망자가 엄청나게 발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노동자를 보다 경제적인 방식으로 선별하고 노동력 소모를 합리화하는 방법이 고안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고지 슐레지엔 석탄그룹 의장 귄터 팔켄한은 자신이 소유한 프슈치나광산의 '동유럽' 노동자들에게 '수행 능력에 따른 배급' 체계를 도입했다. 기준에 못 미치는 노동자의 음식을 빼앗아 기준을 초과한 노동자에게 먹였던 것이다. 사회적 다윈주의의 그 식인 판본이 슐레지엔 광산 지대 전체로 확산되었고, 점차 독일 군수산업의 표준이 되어갔다."(421-2)


제10장 전사자에게 쓰는 편지 


"소련군의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스탈린그라드 소식은 독일에 갈수록 적게 전해졌다. 예컨대 1943년 1월 10일에 독일군은 단지 '지역적인 기습 공격들'만 보도했다. 그러다가 나흘 뒤에 갑자기 '스탈린그라드 지역에서 벌어진 영웅적인 치열한 전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괴벨스는 제6군이 소련군과 대결함으로써 코카서스의 독일 군부대들을 보호했다면서, 그들의 영웅주의와 희생을 찬양했다. 보도의 색깔이 바뀐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괴벨스는 패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히틀러를 설득하여 '영웅적 서사'를 준비했던 것이다. 1943년 1월 30일 나치 집권 1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 연설에서 괴링은 제6군 병사들을 독일사 속의 영웅들, 전설 속의 니벨룽겐과 동고트족으로 시작하여 1914년에 랑게마르크에서 싸웠던 대학생 자원병들, 그리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페르시아의 '인간떼'에 맞선 스파르타의 300 전사들과 연결시켰다. 괴링의 연설은 (계승된 전통인) 영웅적 죽음 숭배의 절정이었다."(467-8)


"그러나 괴벨스와 괴링이 조심스럽게 제작해낸 '영웅 서사'는 전례 없는 파탄을 초래했다. 독일인들은 그 막대한 패배를 받아들일 감정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뉘른베르크처럼 많은 자식이 스탈린그라드에 가 있던 도시들은 거의 발작했다. 사람들은 히틀러가 1942년 11월 8일의 연설에서 스탈린그라드가 사실상 정복되었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던 것을 기억했다. 독일 전역에서 사람들이 극심한 충격과 슬픔과 분노를 터뜨렸다." "다만 사람들은 아직도 그 패배의 전략적 의미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 독일인들에게는 제6군 전체가 망실된 그 패배가 하찮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일부에게는 전쟁이 이제 결정적으로 독일에 불리한 전쟁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였다. 괴벨스는 김나지움 교육을 받은 이상주의적인 청소년들에게 호소력을 지닌 언어가 국민 전체에게는 생생한 신화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탈린그라드는 나치 정권이 신화화한 최초의 패배요 마지막 패배였다."(471-2)


제5부 독일에 도착한 전쟁: 1943년 3월~1944년 여름


제11장 폭격과 복수 


"1943년 당시 독일인들을 지배한 것은 나치 지도부에 대한 격렬한 적대감이 아니었다. 그해 봄에 도르트문트와 에센을 순방했을 때 괴벨스는 군수 노동자들에게 영국군 공습에 '복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강당이 떠나가도록 박수쳤다. 그들이 표출한 것은 나치에게 적대감이라기보다는 공습의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는 소망이었다. 사람들은 낙관적인 순간에는 영국에게 이자를 더해서 복수하는 것을 상상했고, 비관적인 순간에는 폭탄이 어디든 다른 곳에 떨어지기를 소원했다. 스위스 영사에 따르면, 1943년 3월 초 베를린이 최대의 폭격을 당하자 쾰른 사람들은 그 소식에서 '안도감과 심지어 기쁨'을 느꼈다." "1943년 6월 5일 괴벨스는 베를린 스포츠궁전 연설에서 영국인들에게 가혹한 복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언론이 가공할 만한 신무기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고, 괴벨스의 약속은 전쟁의 나머지 기간 내내 독일인들의 희망을 조율하는 핵심축이 되었다. '복수의 시간은 올 것이다!'"(495-6)


"그러나 물리적 쇼크에 이어 심리적 쇼크가 닥치자 비타협적인 전투 언어를 수용하려는 사람이 크게 감소했다. 스위스 영사 프란츠-루돌프 폰 바이스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깊은 무기력, 일반화된 무관심, 평화에 대한 소망'으로 정리했다." "라인과 루르의 도시민들은 아직도 괴벨스가 약속했던 처절한 복수에 대하여 말은 했지만 1943년 5월과 6월에 가졌던 희망과 기대는 더이상 없었다. 적어도 쾰른시 주민들은 복수가 그들을 구해줄 것이라고 더는 믿지 않았다. 도르트문트, 보훔, 하겐 같은 도시의 주민들의 공포는 정점에 달했다. 그들 역시 복수가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거의 믿지 않았다." "가톨릭 주교들이 사람들의 복수 강박을 밀어낼 수 없던 것과 똑같이, 독일인들의 공포와 무기력을 집단적인 저항 의지로 변모시키려던 나치당의 노력도 헛수고였다." "영국과 독일 중에서 누가 먼저 민간인을 폭격했느냐는 1940년의 논란은 이미 과거였다. 긴급한 문제는 독일이 폭격에 대항할 힘이 있느냐의 여부였다."(504-6)


"사람들은 누누이 폭격을 1938년 11월의 포그롬과 연결했다. 동유럽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관한 루머로 흠뻑 젖어 있던 사회로서는 이상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포그롬은 많은 사람이 직접 목격하고 독일 전역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유대인에 대한 마지막 공격이었다. 이제 일부 장소에 그 포그롬과 폭격의 직접적인 결합이 가시화되기도 했다. 그때까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독일의 책임과 죄악을 인정하는 모습이 1943년 늦여름과 가을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 양상은 폭격을 맞지 않은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 "재앙과도 같은 공중전의 패배가 독일이 복수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한 달 전 희망을 '유대인의 복수'에 대한 공포로 전환시킨 것이다. 독일 전체에서 그렇게 유대인의 복수에 대하여 말하면서 독일인들은 그때까지 절반쯤 숨겨져 있던 어떤 것을 무심결에 드러냈다. 유대인의 절멸에 대한 나치의 추상적인 언어가 글자 그대로 실행되었다는 것을 독일인 대중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527-8)


제12장 버티기 


"피란민을 '보내는 지역'과 '받는 지역' 사이에 '유기적인 연대'가 부족했던 것은 나치의 '민족공동체' 이상과 어긋나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전쟁중에 제기된 대부분의 사회적 항의는 당국을 직접 겨냥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체로 당국이 개입하여 그들이 보기에 부당하게 처신하고 있는 다른 범주의 '민족동지들'을 제자리에 놓아주기를 원했다." "독일인들은 진정, 불평, 밀고를 통하여 당국을 내부의 갈등 안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국가가 '공정한' 해법을 부과하기를 기대했다. 그들의 그러한 행동 패턴이 나치의 '민족공동체' 주장에 일정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이다. 민족공동체 이념이 개인적인 주장을 펼칠 틀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나치 선전의 웅장한 주장은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지만, 가족적 결속, 교회 회중, 전문인 네트워크, 우정은 여전히 작동했다. 공동주택, 교외, 촌락에 기초한 커뮤니티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직접적인 일상의 커뮤니티를 더욱 의식했다."(565-6)


"1944년 봄이 되자 함부르크 폭격 이후의 쇼크와 패닉은 사라졌다. 폭격과 유대인 정책의 상호적 가속화를 역전시키고자 하는 소망, 유대인 학살을 없었던 일로 만들면 폭격은 멈추리라는 소망도 사라졌다. 폭격이 12달 동안 지속되자, 공습은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사실이 되었고 폭격의 '유대적인' 성격은 공식이 되었다." "히페리온의 '운명의 노래'를 듣거나 윙거를 읽는 것은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해주었고 몽상 속으로 물러나게 해주었다. 그곳에서 독자들은─잠시─내려놓고 자신만의 내적인 도덕적 힘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그렇듯 전쟁의 현실을 서정적인 추상과 문학 정전의 베일 뒤에 숨기는 것은 '비정치적인 독일인들'이 나치 글쟁이들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를 재주조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독일인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도덕적·정치적 선택들과 대면하도록 할 가능성도 봉쇄했다. 그들은 그 선택과 대면하는 대신 문화유산을 헤집으면서 그 부담을 감당하고자 했다."(580-2)


제13장 빌린 시간 


"독일군은 후퇴하면서 모든 것을 불태웠다. 귀중한 시간과 폭탄을 파괴 작업에 아낌없이 투입했다. 후퇴하는 독일군을 방어하는 임무에 투입된 빌리 레제는 '죄의식으로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1942~1943년의 파괴 작업을 훨씬 능가하는 초토화 작전에 몸서리를 쳤다. 레제는 촌락과 도시가 '불과 연기의 폐허 사막'으로 무인지대로 바뀌는 것을 볼 때마다 술을 퍼마셨다. 그러나 동시에 레제는 썼다. 한밤중에 불타는 마을들의 선線이 '신비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나의 오랜 취향은 역설, 그래서 나는 전쟁을 미학적 문제라고 칭했다.' 병사들은 마을에서는 식량을 약탈하고 독일인 상점에서는 그곳에 반입된 새로운 군복과 술과 담배를 빼앗았다. 그들은 후퇴 작전을 먹고 마시는 광란의 잔치로 만들었다. 병사들은 '전쟁과 평화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연설'을 하고, 멜랑콜리에 젖어 향수를 말하고, 연애를 걱정했다. 레제와 병사들은 우마차 트럭을 타고 고멜을 향하여 서쪽으로 가는 동안 트럭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584)


"1944년 봄은 비교적 조용했다. 1년여 만에 처음으로 폭격이 전쟁과 관련된 대화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폭격의 자리는 적의 침공에 대한 예측이 차지했다. 독일인들의 기대는 높았다. 공격의 시간과 장소는 연합군이 정하겠지만, 그들은 결국 바다로 밀려날 것이요, 그러면 연합군이 1944년에 또 한번의 유럽 침공을 감핼할 수는 없으리라. 연합군의 침공은 오히려 독일이 전쟁의 주도권을 다시 확보하여 형세를 역전시킬 가장 확실한 기회가 될 것이다. 연합군이 유럽 대륙으로 '유인'되기만 하면, 영국군과 미군은 1940년에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패배했던 똑같은 장소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독일 도시의 폭격에 대한 적절한 응답일 것이다. 1944년의 가장 큰 불안은 연합군이 미끼를 물지 않고 장기적인 소모전을 지속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영불해협에서 벌어질 다가오는 대결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의 이면은 무제한 지속되는 공중 공격을 버텨낼 능력에 대한 불편한 비관이었던 것이다."(585)


제6부 완전한 패배: 1944년 여름~1945년 5월


제14장 참호가 된 나라 


"베를린-첼렌도르프에 사는 페터 스퇼텐의 아버지는 '발키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자신이 받은 충격을 아들에게 간결하게 표현했다. '어떻게 그들은 그렇게 전선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일기에 자신의 생각을 보다 길게 적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이미 패배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구해낼 수 있는 것, 구해낼 수 있는 듯 보이는 것을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일은 ······ 오직 내전과 지적 분열로 이어질 수 있을 뿐이고 등에 칼을 맞았다는 또하나의 전설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뉘른베르크로부터 올라온 친위대 정보국 보고서에 따르면 나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오직 지도자만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으며, 그의 죽음은 카오스와 내전을 일으킬 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쾨닉스베르크와 베를린의 길거리와 상점에서 여자들은 히틀러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하나님, 지도자를 살려주시어 감사합니다'가 전형적인 안도의 표현이었다."(627-8)


"졸링겐 고등학교 교사 출신의 퇴퍼빈은 유대인 학살을 혐오했지만, 다른 많은 보수적 개신교들과 마찬가지로 (서유럽 민주주의를 부패시킨) '세계 유대인'을 독일의 적에 포함시켰다. 더욱이 퇴퍼빈은 많은 고위 독일군 사령관들과 한 가지 근본적인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모든 1차대전 퇴역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1918년의 혁명적 해체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44년 10월에 독일군의 최전선이 다시 안정되자, 그는 일기에 자랑스럽게 적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봉기의 기미는 아직 멀다!' 퇴퍼빈은 전쟁 내내 히틀러의 지도력에 의심을 표출했지만 1944년 11월 초 그는 자인했다. '히틀러가 인민이 기도하던 신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지면 분명해질수록 나는 그를 지지해야 한다고 느낀다.' 독일의 대의에 대한 인민의 충성을 우려할수록 그는 오히려 히틀러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히틀러가 메시아적 구세주가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다른 누가 독일을 구할 것인가."(635)


"히틀러에 대한 독일인 개개인의 믿음은 1930년대는 물론 1940년대에도 그의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를 공유하느냐, 혹은 전쟁은 위대한 민족의 정신적 필연성이라는 그의 전쟁관을 공유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았다. 정반대로 나치즘이 가장 성공적이고 인민적일 때는 평화와 번영과 손쉬운 승리를 약속할 때였다. 독일인들로 하여금 '승리 아니면 절멸'이라는 히틀러의 종말론적 관점을 공유하도록 만들었던 것은 1943년의 폭격과 1944년의 패배였다. 독일인들이 자신이 민족을 방어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던 1944년 가을에 동료들에 대한 밀고가 정점에 달했고, 나치당에 입당하려는 한바탕 소동도 작게나마 일어났다. 비록 나치당 지도자들이 과거보다 더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들이 조국전선의 방어에 실패한 것에 자극받은 일반인들이 스스로 주도권을 발휘했다. 자신을 나치로 간주하지 않던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나치 윤리의 도덕적 폭력성을 주입한 것은 나치 정권의 성공이 아닌 실패였다."(641)


제15장 붕괴 


"1944년 가을에 다시 한번 고조되었던 독일인들의 민족적 연대는 연합군의 공격력 앞에서 산산조각났다. 나라의 붕괴는 '지역적' 충성심을 강화했다. 그것은 보다 큰 '공동체적 운명'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빼앗아갔다." "연합군이 지역별로 독일에 입성한 것이 가족과 향토Heimat를 나라Reich와 국민Volk보다 상위에 놓는 것을 완성했다." "자기희생과 민족적 연대의 구호가 최종적으로 소진되었다. 독일 민족국가는 독일에 진입한 4대 강국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전쟁 마지막 기간의 자기 해체에 의해서도 파괴되었다. 물론 패전은 독일의 민족주의를 파괴하지 않았다. 배타적인 증오심은 그리 쉽게 삭제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의 긍정적 의미, 민족적 대의에 사회적인 노력을 동원하고 자기희생을 촉발하는 능력은 소멸되었다. 루르의 노동자들이 1943년에 폭탄이 자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떨어지기를 바랐던 것처럼, 1945년 1월에 전쟁이 독일 안으로 들어오자 모두가 각자 알아서 전쟁을 피하려 했다."(667-8)


"국제 여론, 특히 영국과 미국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던 독일 선전부의 시도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아이젠하워 사령부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저널리스트들은 드레스덴이 '테러 폭격'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단어는 영국과 미국이 공적으로 한사코 거부하던 용어였다─처칠은 사석에서는 그 단어를 사용했다. 영국 언론은 그 말실수를 보도하지 말라는 당국의 요구에 따랐다. 그러나 미국의 AP통신이 보도했고, 그 보도는 '광역 폭격'의 윤리성 논쟁을 촉발했다. 1945년 3월 6일에는 노동당 의원 리터드 스콕스가 자신이 개별적으로 확보한 드레스덴 정보를 하원 질의에서 늘어놓았다. 그렇게 하여 독일 선전부의 선전이 공식 기록에 올랐다. 1945년 3월 28일 처칠이 공공의 압력에 굴복하여 독일 도시에 대한 폭격을 중단시켰다. 폭격 외에는 영국이 독일에 대항할 효과적인 무기가 전무하던 과거에는 영국 폭격사령부의 영웅주의가 찬사를 받았다. 이제 지배적인 것은 윤리적 선을 넘었다는 불편한 감정이었다."(689-90)


제16장 종말 


"방어할 것이 적어질수록 명령은 가혹해졌다. 카이텔, 보어만, 힘러는 군대, 당직자, 친위대에게 모든 구역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항복하자는 모든 제안을 거부했다. 힘러는 자국민에게는 집단적 보복을 가하지 않는다는 과거의 원칙을 버렸다. 그는 친위대에게 '백기를 걸어놓은 집'의 모든 남자를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서부에서는 독일군이 마인강과 도나우강으로 철수함에 따라, 도시와 마을의 운명이 각 지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되었다. 운명은 군사령관, 나치당 지도자, 여타의 공무원들, 때로는 지역민들이 누구냐에 따라 달랐다. 뷔르템베르크의 슈배비쉬 그뮌트에서는 미군이 1945년 4월 20일에 진입하기 직전에 나치당 지도자와 군사령관이 남자 두 명을 처형했다. 인근 슈투트가르트에서는 명사들이 뷔르템베르크 나치 지구당위원장을 우회하여 시장을 설득하였고, 그에 따라 슈투트가르트 시장이 독일군 부대와 비밀협상을 벌인 끝에 도시를 미군에게 평화적으로 넘겨주었다."(734-5)


"5월 18일 클렘퍼러 부부는 빅토르의 유대인의 별과 유대인 신분증, 그리고 그가 박해받은 유명 교수라는 지역 미군 당국의 보증서를 지니고 운터베른바흐를 떠났다. 그들은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고 뮌헨 교외까지 갔다. 뮌헨의 모든 것이 6주일 전보다 혼란스러웠다. 토요일 오후 천둥 치는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도시의 흰색 파편들이 마치 최후심판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잠잘 곳과 음식을 찾으며 걸었고, 새로운 국경을 넘어서 소련 점령지구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들은 드레스덴 외곽의 집과 빅토르의 교수직을 되찾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빅토르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민주주의를 희미하게 의식하면서, 해방이 패전과 얼마나 비슷하게 느껴지는지 쓰라리게 성찰했다. '신기한 내면의 갈등. 나는 제3제국의 행동대원들에 대한 신의 복수가 기쁘다. ······ 그러나 승자와 복수자들이 자기들이 지옥처럼 파괴해놓은 도시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이 끔찍하다.'"(751-2)


에필로그: 심연을 건너서 


"친위대 정보국은 1945년 3월 말에 작성한 마지막 보고서에서 패배주의가 어느 정도 확산되었는지 점검했다. 정보국이 발견한 것은 나치가 늘 두려워하던 혁명적 경향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긋나버린 신뢰에 대한 깊은 실망, 비탄과 낙담과 원한과 분노의 감정, 특히 전쟁에서 희생과 노동 외에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의 울분'이었다. 독일인들의 첫번째 반응은 반역이기보다 자기연민이었다. 사람들이 자주 입에 올리던 경구는 '우리는 이런 재앙에 끌려들어갈 그런 사람이 아니다'였다. 그러한 정서는 반反나치라기보다 자기정당화다.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전쟁의 과정에 대한 모든 책임에서 자신을 면제시켰고', '전쟁과 정치에 대하여 책임질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죄'의 문제는 최악의 재앙을 이끈 자들에게 전가되었다. 괴벨스가 〈제국〉의 논설들에서 전쟁의 모든 위기에도 불구하고 나치 지도부를 믿어달라고 요구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민족의 패배에 대한 책임이 어디 있는지는 명확했다."(754)


"1945년에 들어서조차 독일인들은 그들의 죄를 전혀 다른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하나는 패전의 책임에 관한 것, 즉 독일의 '재앙'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독일의 '민족공동체' 내부의 자기연민의 말들로서, 바로 친위대 정보국이 전쟁 마지막 몇 주일 동안 탐지해낸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독일의 전쟁범죄에 대한 도덕적 결산의 문제로서, 그것은 승리한 연합군이 자신들에게 강요하리라고 예상했던 것이었다." "점령 당국이 추진한 '재교육'에 어떤 입장을 취했건 무관하게, 제3제국의 후계 국가인 서독, 동독, 오스트리아가 1949년에 창설되었을 때 그 모든 나라에서 독일이 희생자였다는 감정이 독일에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을 압도했다. 죽음, 실향, 추방, 기아는 많은 독일 민간인들로 하여금 패전과 점령 몇 년을 전쟁 자체보다 훨씬 나빴던 것으로 바라보게 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고통의 감내를 정당화하거나 보상해달라고 호소할 위대한 민족적 대의가 없었다."(757-8)


"1950년 10월 26일 서독 의회가 소련 내 독일군 전쟁포로 기념일 행사를 진행했다. 연방총리 콘라트 아데나워가 질문했다. '역사에서 수백만 명이 그토록 차갑고 무정하게 고통과 불행을 선고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가 말한 것은 유대인 학살이 아니라 소련에 수감되어 있던 독일군 전쟁포로였다." "서독 당국은 소련군 모델 수용소를 만들어놓고 특별 여행을 조직했다. 독일인들은 철도망과 감시탑을 둘러보고 수용소 마당과 영안실을 관람했다. 수용소 마당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나뉜 사람들은 독일인 남녀였고, 임시 영안실에 쌓인 것은 독일인 시체였으며, 시체가 구덩이에 무더기로 묻히기 전에 뽑힌 금니는 독일인의 금니였다. 서독 정부가 1950년대에 전쟁포로들의 고통과 독일인 추방민의 수난사를 모아서 수십 권짜리 책으로 발간하고 유포하는 동안, 독일인들 대부분은 유대인 제노사이드에 대해 침묵했고, 유대인들이 겪는 고통의 세부 사항은 어느덧 독일인들 고통 이야기 속의 세부 사항으로 뒤바뀌어 있었다."(768-70)


"교회는 나치당과 나치 대중조직이 금지된 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향력을 누렸다. 1946년 3월 처칠의 '철의 장막' 연설 뒤 2주일 내에 서부 지역의 가톨릭 주교들이 연합군의 탈나치화 작업 및 점령정책의 근간을 서슴지 않고 공격했다. 프링스 추기경은 '집단적인 죄를 인민 전체게 부과하고 인민을 그 기준에 따라 대우하는 것은 신의 권리를 찬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울 알트하우스 역시 지도적인 개신교 신학자로서 '죄'의 문제를 논한 짧은 논설을 발표했다." "그는 전쟁범죄와 그 결과들이 인간 본성의 표출에 불과하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내 민족 어딘가에서, 그렇다, 인류의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악은 인간의 영혼, 모든 시대 모든 곳의 영혼과 똑같은 인간 영혼 속의 똑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특정한 행위들을 추상적이고 보편적이고 무시간적인 죄의식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그 행위들의 악을 재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뿐이라는 결론에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771-4)


"동부 독일이 '집단 범죄'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은 서부 독일보다 훨씬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당국은 동독인들에게 1947년부터 전사자추모일에 '히틀러 도당'에 의해 착취되고 전장으로 보내진 '파시즘의 희생자들'을 기리도록 했다. 그 영웅적인 '반파쇼 레지스탕스'에서 태어난 것이 사회주의 독일이라는 것이었다. 비록 평화로운 재건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목표가 감상적이고 또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언어는 희생, 재탄생, 낙관주의, 집단적 노력 등 과장된 개념들로 구축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나라의 목표가 나치 '민족공동체' 수사와 비슷한 울림을 주었다." "오스트리아는 국민들을 더욱 빠르게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전환시켰다. 1945년 4월 27일을 독일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날로 선언했다. 1938년 3월 독일에 병합된 오스트리아가 민족사회주의 침략의 '첫번째 희생자'였다는 것이다. 1955년에는 연합국들이 비동맹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을 주권국으로 승인했고, 그로써 오스트리아 신화는 봉인되었다."(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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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법률가들 - 법은 어떻게 독재를 옹호하는가
헤린더 파우어-스투더 지음, 박경선 옮김 / 진실의힘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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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론


"나치의 법이론은 형식주의와 실증주의를 배격하고 '공동체의 통합', '명예', '인종적 동질성', '인종적 평등' 같은 실체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법의 실질적 개념을 선호했다. 개인의 권리는 군주와 신민의 적대적 관계에서 비롯된 잔재로 취급되며 저만치 밀려났다. 신뢰에 기초한 지도자Führer와 민족공동체의 단단한 결속관계와 무관하다는 이유였다. '독일적인 것'과 '독일법'이 나치 법이론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빌헬름 코블리츠는 나치당의 1920년도 강령 제19항이 이미 로마법을 독일 공동체법Gemeinrecht으로 대체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상기시킨다. 로마법은 〈유물론적 세계질서에 복무〉해 왔지만 독일의 공동체법은 일상을 규제받는 당사자들인 민족동지Volksgenossen의 도덕감정이나 정의감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다. 코블리츠는 이런 방식으로 법과 도덕 간의 대립이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익은 사익보다 앞선다〉라는 원칙에 따라 법은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대신 공동체를 육성해야 했다."(20-1)


"히틀러의 생각들, 즉 『나의 투쟁』과 여러 연설에서 길게 늘어놓았던 장광설을 규범적 언어로 옮기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치 법이론가들은 필요한 규범적 틀을 제공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법률가들은 고전적인 정치철학을 근거 삼아, 총통의 포괄적 권위는 그가 집단적 의지를 개인 인격으로 체화한 것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루소의 『사회계약론』 속 주권(일반의지)의 토대를 그대로 되풀이했다. 물론 이들은 루소의 의도가 민주정 형태는 아니라 해도 공화정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을 〈너무 개인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이를 규범적으로 좀 더 넓게 해석하려 했다. 헌법학자 에른스트 루돌프 후버는 〈총통은 (존재질서Seinsordnung에 실질적 토대를 둔) '인민Volk'의 객관적 의지를 지닌 자〉로서 〈자기 내면에 민족주의적völkisch 집단의지를 형성함으로써 제각각인 모든 소망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인민의 전체성을 구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5-6)


"민족사회주의가 모든 시민의 삶을 통제하려는 것은 계몽철학적 기본원리와 충돌했다. 이는 민족사회주의 법사상가들이 칸트의 정치철학 및 법철학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을 설명해 준다. 결국, 칸트가 법과 윤리를 구분한 것은 법적 권위를 시민의 윤리적 태도로까지 확장하는 민족사회주의 국가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나치 법률가들이 칸트의 정치철학에 기댈 수는 없는데도 특정 개념들─선의지, 무조건적인 의무, 정언명령 등─만 맥락에서 벗어난 채로 끌어다 쓰면서 윤리에 관한 고찰을 도구로 이용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윤리적 의무는 행복이나 효용성 극대화 같은 목적과 별개로 유효하다는 칸트의 주장도 당연히 잘못 해석되고 말았다. 민족사회주의 수사rhetoric는 윤리적 의무가 그 자체로um ihrer selbst willen 유효하다는 칸트의 사상을, 당사자의 동의나 정당한 이유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의무로 간단히 바꿔버렸다."(28-9)


2장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제3제국으로


"'독재조항Diktatur-Artikel'이라고도 불리는 바이마르헌법 제48조 제1항은 대통령이 필요 시 특정 주가 헌법적으로나 법적으로 제국에 부여된 임무를 이행하도록 군대를 배치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제2항에서는 공공질서와 안전이 훼손되거나 위험에 처할 경우 제국 대통령이 이를 회복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를 규정했다. 대통령은 군사력 지원을 요청할 권리 외에도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와 자유의 보호를 보장하는 헌법 조항들을 폐지할 권한이 있다." "이토록 광범위한 집행권한을 부여하는 법조항이 어떻게 의회민주주의 헌법에 파고들었을까? 첫째,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음을 감안할 때, 헌법 초안 작성자들의 당초 목적은 파괴적일 수 있는 극우파와 급진좌파의 영향력에 맞서 공화국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둘째, 헌법위원회의 구성원 중 일부는 제국 의회가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며 필요한 개혁을 방해할 것을 우려했다. 특히 막스 베버는 대통령을 의회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세우자고 역설했다."(47-8)


"당시 기본적인 논리는 이랬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은 '민의'에 의해 승인과 지지를 받았다. 반면, 정부 내각은 정당들을 대표하여 전략적으로 정치적 협상을 벌인 결과물이기 때문에 대통령만큼 정당성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정치적 타협에 의존했던 반면 제국의 대통령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은 입장이었다. 따라서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통합과 안정의 상징이었으나, 정부는 갈등으로 점철된 의회의 힘겨루기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반영하는 존재였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두 주요 정치기관의 규범적 토대에 대한 이런 견해는 보수우파 진영에서 두드러졌다. 대통령에 대한 헌법의 광범위한 권력 보장에다 위계적 국가에 대한 독일 내의 폭넓은 지지까지 결합하여 권위주의가 부상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눈에 띄는 점은 민족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필수적이었던 일부 주요 조치들이 정당한 헌법적 규범에 근거했다는 사실이다."(49)


"1919년 4월부터 6월까지 석 달 동안 에베르트 제국 대통령은 작센 및 독일 북부에서 공산주의 쿠데타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무려 일곱 차례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에베르트는 제48조를 대대적으로 활용한 데 이어 입법권을 의회에서 내각으로 이양하는 「수권법Enabling Acts」으로 정치와 경제를 안정시키려 했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총 8개의 「수권법」이 통과되었다. 처음에 제48조 제2항은 정치적 불안과 격변을 억제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23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는 사이 '입법독재'나 다름없는 대통령의 입법활동이 의회입법을 대체하자 대통령과 의회 사이에서 권력의 추가 대통령 쪽으로 기울어버리는 상황이 됐다. 1925년은 바이마르공화국 제1기가 종말을 고한 해였다. 그해 2월 에베르트가 사망했고, 뒤이어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성향이자 반反공화주의 입장으로 유명한 육군 원수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사민당 후보를 제쳤다."(49-50)


"1932년 7월 20일, 프란츠 폰 파펜 제국 총리는 오토 브라운 총리가 이끌던 프로이센 내각을 해체하고 프로이센을 연방 전권위원 치하로 복속시켰다. 파펜이 보인 과감한 행보의 법적 근거는 제국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승인한 긴급명령이었다." "파펜의 조치에 대해 프로이센주 정부는 법치를 따르는 동시에, 통상적으로 제국과 개별 주 사이에 분쟁 조율을 담당하던 라이프치히 법원(국사재판소)에 해당 문제를 가져가는 것으로 대응했다." "1932년 10월 25일, 국사재판소는 '프로이센 대對 제국' 구도에서 프로이센 정부는 제국에 대한 의무를 위반한 바 없으나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다고(즉 제48조 제1항이 아니라 제2항을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했다. 이 같은 판결은 프로이센 정부의 권한을 제국에 이양하는 것도, 프로이센 총리 및 각료들을 파펜이 해임한 것도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프로이센 경찰력을 장악하려는 조치는 제48조 제2항에 부합한다고 판결했다."(52-4)


"국사재판소의 결정은 당시 대표적인 법이론가인 카를 슈미트와 한스 켈젠의 논쟁으로도 이어졌다. 슈미트는 국사재판소의 법적 절차에서 제국 측 변호를 맡아 프로이센주를 상대로 한 제국의 조치를 옹호했다." "슈미트가 추론한 핵심은 헌법은 대통령에게 긴급명령을 실행할 권리를 부여하며, 이 경우 대통령은 그저 자신의 헌법적 권력을 사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배경 안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정말로 대통령의 결정을 정당화할 만했느냐는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경우 힌덴부르크가 제48조를 동원한 것이 과연 헌법에서 제48조를 적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 상황에 해당했는가이다. 슈미트는 대통령은 긴급조치에 대한 헌법적 권한을 지닐 뿐 아니라 헌법의 수호자 역할도 담당하므로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정치적 재량에 달린,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결정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같은 의문을 무마하려 했다."(54-6)


"슈미트의 주장에 반대한 켈젠은 제국 대 프로이센의 문제를 민주주의적 「바이마르헌법」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켈젠이 보기에 대통령은 헌법의 범위 안에서 움직여야 하며, 여기에는 헌법의 기본적인 규범 원칙을 존중하는 것도 포함된다. 따라서 그는 제국의 대통령이 헌법의 수호자로서 특수한 지위를 누린다는 슈미트의 가정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힌덴부르크의 명령을 평가할 결정적 기준은 '제48조를 발동하기 위한 헌법적 요건이 충족되었는가'라고 생각했다. 켈젠이 비판한 지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제국 대통령의 명령은 위헌적이었고, 국사재판소인 라이프치히 법원의 판결에 일관성이 없었으며, 법원 판결의 결함은 상당 부분 제도적 실패─바이마르 내 헌법재판소의 부재─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켈젠은 헌법 사법권(관할권)의 열성적인 옹호자였다. 그는 삼권분립이 명확히 이루어진,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국가에는 헌법재판소가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았다."(59-61)


3장 총통국가


"나치 법이론가들은 히틀러의 정치적 쿠데타를 '합법적 혁명'으로 규정하여 혁명적 동력과 법적 정합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려 했다. 이들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여러 차례 있었던 긴급명령에 의한 통치와의 연속성을 지적하며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것은 적법하다고 주장했다." "나치 정권은 「바이마르헌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거나 제국의 대통령을 축출하지는 않았지만, 「수권법」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권력을 장악할 형식을 갖춘 것만은 분명했다. 카를 슈미트는 〈오늘날의 국가를 구속할 수 있는 어떤 토대도, 한계도, 그 어떤 중요한 해석도 폐위된 옛시대로부터 나올 수 없다〉라고 인정했다." "('헌법적 의미의 혁명'을 언급했던) 울리히 쇼이너는 합법적 혁명은 세 가지를 포함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민운동Volksbewegung, 전통적 법질서와의 단절, 국가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건하는 새로운 정치원칙이었다. 쇼이너는 〈진정한 혁명〉인 나치의 장악이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고 주장했다."(73-5)


"민족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요소는 인민공동체, 또는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였다. 메시지는 단순했다. 민족 구성원들은 오직 공동체적 질서 안에서만 적절한 사회적 지위와 윤리적 삶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쇼이너는 민족사회주의 법질서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보다 〈국가의 필수재, 명예, 국민 건강, 관습, 전통〉을 수호하는 데 역점을 둔다고 봤다. 국가에 맞선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의무가 지상 최고의 가치였다. 소위 지도자 원칙Führerprinzip─나치 독일의 조직 원리로 〈지도자의 말씀이 모든 성문법에 우선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외에도, 민족공동체 원칙Volksgemeinschaftsprinzip이 법의 원천 즉 법원Rechtsquelle, 法原이 되었다." "민족공동체라는 개념이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한, 이는 온갖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그 위에 투사하기 좋은 배경이 되었다. 민족사회주의의 인종 독트린은 신화적 공동체의 가장 암울한 이데올로기를 나타낸 것이었다."(77, 81)


"카를 슈미트는 1932년 작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전체국가total state'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다. 그는 전체국가는 19세기 자유주의 '중립국neutral state'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모든 사회 영역을 아우르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므로 전체국가는 전 국가적 통제로부터 특정 영역들(슈미트는 경제를 비롯하여 종교, 문화, 교육을 언급했다)은 제외해 주는 중립성이라는 자유주의 원칙을 폐기했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대한 적절한 개념은 정치적인 것이 전제되었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즉, 모든 정치적 행동의 근원─은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도덕의 바탕이 '선과 악'의 개념이고 경제의 토대는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의 범주이듯, '친구'와 '적'은 정치 영역의 구성요소였다. 슈미트는 이런 기본 개념들은 〈구체적인 실존주의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국가의 전체적 통일성을 상대화하지 않고 정치 영역의 내적 역동을 표현한 개념이었다."(82-3)


"법 이론가 오토 쾰로이터는 전체국가total state와 전체주의 국가totalitarian state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이어서, 전체국가의 권한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할 것이라고 보았다. 쾰로이터는 민족사회주의 정치체계를 권위주의 국가의 형태로 이해하고자 했다." "쾰로이터가 말한 권위주의 국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신의 이익과 자유를 우선시할 수 없는 〈공동체 윤리〉에 뿌리를 두었다. 반면에, 권위주의 국가는 정부가 국민의 요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을 위해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쾰로이터가 보기에 민족사회주의 국가는 이러한 기준을 충족했다. 정치적 힘이 공동체의 이익에 봉사하므로 총통의 권력은 단순한 지배와 폭정 수준을 초월했다. 그는 전체국가와 대조적으로 〈권위주의 국가의 본질은 국민의 신뢰를 받은 국가권력의 존재에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진정한 리더십의 증표는 총통의 의지가 곧 국민의 의지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된다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86-7)


"민족공동체 원칙은 지도자 원칙에 이은 두 번째 법의 원천이었다. 지도자 원칙이 공동체 원칙보다 우선하는지 아니면 동등한지라는 난제에 봉착하면, 나치 법률가들은 총통에게는 무엇이 인민에게 최선이고 어떻게 하면 독일의 연속성과 번영을 보장할지 정확히 알아내는 인식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문제를 회피했다. 즉 총통은 인민의 의지에 대한 직접적인 발현이며, 더 나아가 인민의 의지와 동일체라는 주장이었다." "총통의 절대적 권위를 이런 방식으로 옹호한 것은 나치 국가에 통제 메커니즘이 부재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직접적인 결과였다. '민족'의 질서에 대한 온전한 통찰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 정치적 리더십은 스스로 좋고 옳다고 판단한 것을 명령하게 됐다. 총통의 명령과 지시는 마음 깊은 곳의 충성심과 윤리적 헌신으로 복종해야 하는 법규나 마찬가지였다. 나치 이데올로기는 법적 의무와 윤리적 의무를 뒤섞어 버렸다. 이 왜곡된 규범 속에서 윤리, 법, 정치가 한데 맞물렸다."(102-3)


4장 민족사회주의 형법


"나치 체제에서 형법은 민족공동체의 순수성과 정권이 가진 불가침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범죄자들'을 겨냥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 법사상가들(저명한 대학교수 및 법무부 소속의 고위공직자 등) 사이에서는 바이마르공화국의 자유주의적 형법을 민족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부합하는 체계로 어떻게 대체할 것인지에 대해 격론이 벌어졌다. 다시 말해, 이들은 법률뿐 아니라 민족공동체에 대한 충성 의무를 위반한 경우까지도 처벌할 수 있도록 형법을 수정할 방법을 찾았다. 1930년대 중반부터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의도' 중심의will-based 형법이 민족사회주의 세계관에 가장 잘 부합하리라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런 법에서는 범죄자의 범행이라는 실제 결과보다는 범죄 의도가 책임과 죄책을 판단하는 데 결정적이다. 따라서 앞으로 형법은 행위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범죄자의 신념과 태도에도 초점을 맞춰야 했다."(106)


"그럼에도 정권은 법률가들의 정치적 굴종에 보답하지 않았다. 1939년 12월 중순 히틀러는 법무부가 새롭게 마련한 형법 초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이로써 6년에 걸친 대대적인 형법 정비작업은 무산되었다. 히틀러가 법적 규제에 대해 미적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1939년 9월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자신의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어떤 규범적 규제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경향은 더 강해졌다. 명확히 구체화된 법적 규범과 법령을 인정한다면 나치 정권이 형사 사법권을 장악하는 데 제동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윤리적 규범과 법적 규범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나치 국가의 강압적 권력은 더 확대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 개인의 양심에 규제를 맡겼던 윤리적 의무는 이제 법적 의무가 되었고, 민족공동체에 대한 윤리적 의무를 위반한 것은 법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같은 윤리적 의무와 법적 의무의 통합은 윤리적 품위와 진실성, 범죄성 사이의 경계를 흐려놓았다."(108-9)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형법은 시민들이 특정 행위가 불러오는 부정적 결과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처벌은 법에서 잘못되었다고 명확히 정의한 행위에 대한 대응이다. 처벌은 나쁜 것이지만,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복수는 물론이고 보복과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보복과 복수는 증오와 분노의 감정에 매여있으므로, 신뢰할 만한 형사 사법권의 안정적인 지침이 되기 어렵다. 그러나 나치 법이론가들에 따르면 보복은 형법의 핵심이었다. 나치 국가의 대표적인 형법학자인 에드문트 메츠거는 처벌의 본질과 목적을 구분했다. 처벌의 본질은 정당한 보복 대응이라고 규정하면서도, 그 목적은 민족공동체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것이라고 했다. 메츠거는 보복 또한 예방적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보복은 형을 선고받은 개인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사회 전체에 대해서는 교육적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치 국가의 형법 정책은 민족공동체 내에서 증오와 복수의 정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114-7)


"법의 도덕화는 충실, 충성, 명예 같은 특성이 형법 속에 스며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몇몇 나치 법이론가들은 명예처벌Ehrenstrafe을 재도입하는 데 찬성했다. 킬대학 형법학 교수인 게오르크 담은 이 같은 명예처벌은 형법을 〈범죄에 맞서 싸울 합리적 기법〉으로 보는 관점과 〈법의 영역에 개인 차원을 초월한 존엄까지 포함하여 민족의 삶이라는 전체 맥락 속에 통합하는〉 관점으로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적 원칙에 따르면 〈법은 단지 시민의 외적 공존을 규제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로 나타나는 법적 행동에만 관심을 둔다. 범죄자의 신념Gesinnungen은 상관하지 않는다. 국가는 권리를 박탈할 수 있지만 명예를 박탈할 수는 없으며 내적 신념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과 윤리, 형법과 민족에 대한 인식Volksanschauung이 함께 자라는〉 법 체계 속에서는 명예처벌을 없앨 수 없다. 실제 각 공동체는 구성원의 충성과 명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120-1)


"나치 법이론가들은 자유주의적 형법의 주요 원칙, 즉 어떤 행위를 처벌하려면 범행 발생 시점에 처벌 가능하다고 법적으로 공표된 경우에 한한다는 원칙을 거부했다. 사법권한의 자의적 행사에 맞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 없으면 범죄도 없고, 처벌도 없다nullum crimen, nulla poena sine lege'는 이 죄형법정주의 원칙을 나치 법학자들은 〈범죄자의 대헌장Magna Carta〉이라고 비난했다. 법률상의 허점이나 법안의 불안전함을 근거로 범죄자에게 처벌을 피할 여지를 준다는 것이었다. 법학자 카를 셰퍼는 자유주의적 준칙이 판사의 자유 재량에 족쇄가 되어 판사를 한낱 〈분류 기계Subsumtionsmaschine〉로 전락시킨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나치 법학자들은 '법 없으면 범죄도 없고, 처벌도 없다'를 '처벌 없는 범죄는 없다nullum crimen sine poena'로 대체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식으로 각 범죄마다 법으로 규정된 범행이 성립하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처벌과 속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123)


5장 인종주의적 입법


"민족사회주의에 동조한 법이론가들은 놀라울 정도로 나치의 인종 독트린을 수용했다. 수많은 법률 해설자료에서 '인종'을 〈전형적인 신체적 특색과 정신적 특징에 의해 여타 인간 집단과 구분되는 인간들의 집단〉으로 규정한 귄터의 정의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이런 차이가 동질성Artgleichleit과 이질성Artfremdheit 간의 경계를 결정했으며, 이는 결국 법적 권리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됐다." "쾰로이터는 국가의 토대와 통치에 대한 자신의 구상이 가져올 극단적인 결과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리더십은 동질적 인간 십단을 상호보완적으로 조직하고 적의 세력을 저지하며 때에 따라서는 말살할 수도 있는 힘이다. 즉, 모든 리더십은 내적 질서를 생성하고 자체적인 힘을 사용해 방해 세력을 퇴치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이 법률가들은 인종적-생물학적 요인을 범죄와 직접 연관 짓기도 했다. 범죄 예방은 독일 공동체에 대한 인종적 보호를 수반했다."(163-5)


"나치 법률가들은 사실is과 당위ought의 이분법을 단순한 법실증주의의 구성 개념에 불과하다고 맹비난하면서 그 문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법실증주의는 민족적 법사상의 기본 전제들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논지는 분명했다. 주어진 민족의 생활질서, 즉 존재의 법칙에서 출발하는 민족중심적 법학에서 경험과 규범의 영역이 융합되어 사실/당위의 차이는 소멸되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인 것과 규범적인 것의 이 같은 통일은 법이론가들이 인종 개념을 활용할 때 재량권을 부여했다. 나치 사상가들은 '사실'과 '당위'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은 채 경험적 차원에서 규범적 차원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도움이 되면 두 차원을 쉽게 뒤섞어버렸다. 이들 사고방식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자연과학적' 전제로부터 규범적 결론과 의무적 명제를 도출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용되는 것이었다. 이런 전략은 이후 통과된 인종주의 법에 사이비과학적 근거를 부여했다."(167-8)


"론 L. 풀러는 『법의 도덕성』에서 법의 8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즉, 법체계는 (임시 방편의 결정이 아닌) 일반 규칙들로 구성되어야 하고, 이 규칙은 일반에 공개되어야 하며,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너무 자주 바뀌지 않아야) 하고, 모순되지 않아야 하며, 따를 수 있어야 하고, 소급 적용되어서는 안 되며, 공표된 규칙과 실제 집행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 영향을 직접 받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법적 규범의 공표와 투명성은, 풀러가 생각한 법질서로서의 자격을 갖춘 규칙 체계의 핵심 요건이었다. 제3제국의 인종 정책이 전개되고 급진화된 과정, 특히 공표된 법에서 비밀스런 산업 수준의 대량학살 계획으로 전환한 것은 풀러가 제시한 조건이 적절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불가능성이 가져온 결과는 주목할만하다. 모든 규정을 공개해야 한다는 그 간단한 요건이 나치 정권이 최악의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190-1)


6장 경찰법


"제3제국 초기에 경찰권력은 1933년 2월 28일 자 「제국의회 화재 법령」에서 비상시에 허용한 특별조치를 기반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차츰 경찰의 주요 기능을 총통국가를 건설하고 수호하는 일로 규정하면서 결국 행정집행 권한을 광범위하게 해석하는 데─실정법으로 규제할 수 없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나치 경찰법 전문가였던 발터 하멜은 경찰은 〈모두가 민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민족의 가치Volkswerte를 유지하고 창출하는 역할을 준수하는지 확인〉할 임무를 띤 〈공동체의 수호자〉로서 기능해야 한다고 보았다." "경찰을 국가권력의 비이성적이고 정의하기 힘든 측면과 결부하는 이런 수사rhetoric는 힘러가 경찰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만드는 것을 뒷받침했다. 게다가 나치 법률가들은, 포괄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정확히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준비가 되어있는 국가를 지지하면서도 경찰이 더 이상 그런 권리 침해를 막지 않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202-4)


"3차 「게슈타포법」의 초안 작성자이자 게슈타포의 법률 자문이었던 베르너 베스트는 〈인종주의적 총통국가에서 정치경찰의 사상과 정신〉을 정의하면서 경찰의 임무를 인종 위생과 연결하기도 했다. 〈[정치경찰은] 각 질병의 증상을 시의적절하게 인식하고 파기의 원인균이 내부의 부식에 의해 생겨났는지, 아니면 외부로부터 의도적으로 독이 주입된 것인지 확인하여 적절치 못한 것은 뭐든 제거함[으로써] [···] 독일 정치체의 위생을 신중하게 감독하는 기관이다.〉 베스트의 저술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현혹된 나치 친위대 법률가의 토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경찰법에 관한 당대의 공식적인 주요 해설이었다. 실제로, 1940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독일경찰』은 개인주의적-인도주의적 국가(개인들 간의 합의 의지 개념 고안)와 민족국가를 구분했고, 이는 경찰의 지침서가 됐다. 그가 보기에 경찰은 〈분열과 파괴에 맞서 민족적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질서 및 안보 서비스〉에 해당했다."(206-7)


"나치 국가에는 성문화된 경찰법이 없었다. 고정된 법체계 안에서 경찰권력의 범위를 규정했다면 독재정권의 정치적 야욕을 제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치 법률가가 초안을 작성한 유일한 법이었던 「게슈타포법」에는 행정 관료체계로부터 정치경찰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이들을 강화하려는 계산만이 담겨있었다. 나치의 법 관련 저술들은 전통적 규범의 경계를 넘어서는 행위에 대한 이론적인 자양분이 되었다." "그럼에도 행정 관료체계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총통의 의지라는, 사실상 개인화된 이 형태가 국가 행정보다 우선했지만, 행정부는 나치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전통적인 법적 안정성이라는 중요한 연속성을 제공했다." "베스트는 경찰이 나치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통적인 형태의 합법성을 초월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당성 유지를 위해 관료국가Beamtenstaat와 최소한의 유대관계는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할 만큼 나치 국가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214, 217-8)


7장 나치 친위대의 사법관할권


"1939년 10월 17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나치 친위대와 경찰사법권은 무장친위대원, 친위대 특무대원, 참전 경찰부대원의 범죄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게 되었다. 보통 군사법원은 나치 친위대원의 정치적 사고방식과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아서 그들을 재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힘러가 나치 친위대 내부에 특별 사법체계를 만든 것은 단지 무장친위대원들과 나치 친위대 특무대원들을 국방군의 군사법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법을 나치 친위대 사법체계의 수중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제3제국 권력구조 안에서 나치 친위대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역사학자 제임스 바인가르트너의 표현에 따르면 나치 친위대 판사는 〈전통적인 판사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처신해야 했다. 법조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며, 이상적으로는 법조문보다도 (나치 친위대 정신에 부합하는) 원칙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투사이자 교육자여야 했다.〉"(224-6)


"나치 형법이론의 변화─의도 중심의 형법, 범죄자 유형론 승인, 유추 허용 등─는 모두 나치 친위대 사법체계에 뚜렷이 영향을 미쳤다. 나치 친위대 판사들은 법과 도덕의 통일과 함께 나치 친위대 정신에 따라 사건을 판결했다." "나치 친위대 판사 노르베르트 폴이 보기에 피고인이 판사에게 주는 인상은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데 중대한 요소였다. 그는 심지어 〈법령보다도 피고인의 인격이 정의 구현을 좌우한다〉라고 주장하며 법령보다 인격을 우선시할 정도였다." "거기서 한층 더 나아간 폴은 개별 범죄자 유형의 구체적인 특색((주취자, 상습절도범, 살인범 등)에 초점을 맞춘 범죄학적 접근과 달리, 규범적 접근은 소속 집단의 일반적 특징에 비추어 범죄자를 평가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는 형을 선고할 때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편견이 작동하도록 문을 활짝 연 셈이 되었다. 폴이 범죄자 유형론을 너무 광범위하게 인정하는 바람에 일부 나치 법률가들조차 이를 법률 지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229-31)


"나치 친위대 사법권의 도덕률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이하게 변형된 도덕률의 문제는 그 개념들이 굉장히 익숙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 도덕률을 구성하는 각종 원칙과 덕목─정직, 품위, 신뢰성, 청렴, 충성, 충실─은 사회적·법적 배경으로부터 추출된 것으로, 도덕에 대해 왜곡되지 않은 우리의 이해에 속한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치 체제는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기준을 재해석했다. 실제로 품위, 명예, 강직함, 충성, 출실 같이 수용 가능한 개념을 법치사회의 전통적 도덕에 의해 금지된 것으로 재정의하는 등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개념을 왜곡했다. 그렇게 도덕 질서를 변형시킨 나치 국가, 특히 나치 친위대는 윤리적 의무가 무제한적 전쟁,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 살인과도 혼동되는 규범 세계를 창조했다. 이 같은 새로운 규범 세계는 완전한 무도덕주의나 무한한 범죄의 세계가 아니라, 범죄행위와 살인이 윤리적 의무와 요건에 부합하는 것과 같은 전복된 질서였다."(244-5)


8장 민족사회주의가 추진한 법의 도덕화


"제3제국은 시민들을 완전히 통제하려는 전체주의 국가였다. 정치적 권위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을 규제하려는 포괄적 가치체계다. 그러므로 전체주의 국가는 모든 사회영역에 스며들어 말 그대로 시민의 '좋은 삶'을 정의함으로써 개인의 자율을 제한한다. 나치의 규범적 포부는 존 롤스가 말한 완전히 포괄적인 도덕적·정치적 독트린, 즉 〈상세하게 설명된 하나의 체계 안에 모든 가치와 덕목을 포함하는〉 규범적 질서였다. 그러므로 〈완전히 포괄적인 독트린〉은 절대진리에 대한 근본주의적 주장, 즉 무엇이 참이고 선한지에 대한 국가의 관점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이다." "법규범과 윤리규범의 차이를 없애면서 나치 국가의 권한은 외적 자유의 영역뿐 아니라 내적 자유의 영역─즉, 개인의 윤리적 가치, 신념, 태도의 영역─에까지 미쳤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출입을 (마땅히) 금지하던 규범적 영토를 이제 국가가 침범한 것이다."(253-5)


"나치 법률가들의 법에 대한 관점은 얼핏 자연법 이론과 일치하는 듯 보인다. 자연법을 지지하는 쪽은 법과 도덕의 긴밀한 연결을 적극 옹호하면서, 정의와 도덕은 법에 필수적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자연법 이론가들은 법을 한낱 전체주의 정권의 수단으로 전락시킬 개념을 전파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들이 법과 도덕의 긴밀한 연결을 강조한 것은 법의 이데올로기적 악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 같이 우리는 도덕과 법의 경계를 지우거나 그 거리를 좁히려는 모든 시도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다 해도 회의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시도는 행위자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두 규범 영역의 분리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과 법이 규제하는 영역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들은 각기 다른 규범적 원칙을 따른다. 단순히 법과 도덕의 일치만을 추구하는 것은 나치의 법체계에서 발견된 종류의 왜곡을 바로잡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다."(275)


"그렇다면 나치 이론가들이 법과 도덕의 통합을 지지하고 민족사회주의가 법을 도덕화한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일까? 한가지 답변은 나치 이론가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된 도덕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 외에 딱히 심오한 결론이 없다는 것이다." "나치 체제는 도덕적 원칙, 규칙, 덕목에 대해 자체적으로 해석했다. 특히 그런 왜곡된 도덕은 나치 친위대 등 이데올로기 중심의 나치 조직에 파고들었다. 하인리히 힘러는 '정직과 진실함, '용감, 충성, 용기'라는 덕목과, '재산의 신성함', '남자다운 규율이라는 규칙'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해되고 실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선전했다." "나치 법체계가 도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한 것을 보면 도덕은 법치의 구성 조건을 규정하는 근원으로 기능할 때 법체계를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매개변수로서의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법치의 요건을 준수하는지의 여부가 온전한 법질서인지를 규정한다."(2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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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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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종말의 시작


제27장 신질서 


"신질서Neuordnung는 나치가 지배하는 유럽에서 독일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착취하고, 주민들을 독일인 지배인종의 노예로 삼고, 〈바람직하지 않은 부류〉─유대인이지만 동방의 숱한 슬라브인, 특히 지식인층까지 포함해─를 절멸시키려는 질서였다. 유대인과 슬라브인은 열등인간Untermenschen이었다. 히틀러가 보기에 그들은 생존할 권리가 없었고, 기껏해야 슬라브인 일부가 독일인 주인의 노예로서 논밭과 광산에서 뼈빠지게 일하는 데 필요할 뿐이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바르샤바 같은 동방의 대도시들을 영원히 지워버릴 뿐 아니라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을 비롯한 슬라브인의 문화를 근절하고 그들에게 정식 교육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동방의 번창하는 공장들을 해체해 독일로 옮기고, 주민들은 독일인을 위해 식량을 생산하도록 농업에만 종사시키고 그들 몫으로는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의 식량만 지급할 계획이었다. 유럽 자체는 나치 지도부가 말했듯이 〈유대인이 없는〉 곳이 되어야 했다."(1611-2)


"('유대인 절멸'을 의미하는) 〈최종 해결〉이라는 표현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나치 간부들의 어휘와 문서에서 점점 더 빈번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이 무해해 보이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의 실제 의미를 서로에게 일깨우는 고통을 피하려 했던 듯하고, 어쩌면 언젠가 죄증이 되는 문서가 드러나더라도 이 표현으로 자신들의 죄를 얼마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최종 해결〉을 위한 성과를 가장 많이 거둔 곳은 30개 남짓한 주요 강제수용소가 아니라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였다.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절멸수용소는 네 개의 거대한 가스실과 인접한 소각장을 갖추어 살해 및 매장 능력에서 다른 절멸수용소들─모두 폴란드에 있었던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에 크게 앞선 아우슈비츠였다. 리가, 빌뉴스, 민스크, 커우너스, 리비우에도 별도의 작은 절멸수용소들이 있었지만, 독가스가 아닌 총격으로 살했다는 점에서 주요 절멸수용소들과 구별되었다."(1655-6, 1661-2)


"절멸수용소의 가스실 자체와 인접한 소각장은 근거리에서 볼 때 전혀 불길한 장소로 보이지 않았다. 그곳의 용도가 무엇인지 밖에서 보고 알아내기란 불가능했다. 그 주변에는 잘 가꾼 잔디밭과 꽃밭이 있었고, 입구의 표지에는 그저 〈목욕실〉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한 유대인들은 모든 수용소의 관례대로 단순히 이를 잡기 위해 목욕을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감미로운 음악까지 들려주었다! 경음악 악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생존자가 기억하듯이, 수감자들 중에서 〈모두 흰색 블라우스와 감청색 치마를 입은 어리고 예쁜 소녀들〉로 오케스트라를 꾸렸다. 잠시 후 치클론 B가 살포될 가스실로 들어갈 이들을 선별하는 동안, 이 독특한 합주단은 〈유쾌한 과부〉나 〈호프만 이야기〉의 즐거운 곡들을 연주했다. 베토벤의 장중하고 침울한 곡은 전혀 들려주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여정은 빈과 파리의 오페레타 못지않게 명랑하고 쾌활한 분위기 속에 이어졌다."(1665-6)


제28장 무솔리니의 실각 


"한때 북아프리카에서 막강했던 추축국 군대의 잔존 병력을 1943년 5월 초 튀니지에서 생포한 아이젠하워 장군의 영국-미국 군대는 뒤이어 이탈리아 본토를 겨냥할 것이 확실했다. 병든 몸의 무솔리니는 미몽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겁을 먹었다. 패배주의가 이탈리아 국민과 군대 사이에 만연했다." "디노 그란디, 주세페 보타이, 그리고 치아노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의 반두체 지도부는 1939년 12월 이래 열리지 않았던 파시즘 대평의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대평회의는 1943년 7월 24일에서 25일에 걸친 밤에 소집되었고, 무솔리니는 독재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국가를 재앙으로 이끈 실책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대평의회는 19표 대 8표로 민주적 의회를 갖춘 입헌군주정의 복원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또한 군 통수권 전체를 국왕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두체는 7월 25일 저녁에 왕궁에 불려갔다가 그 자리에서 총리직 해임을 통보받고 불명예스럽게 실각했다."(1707, 1710)


"1943년 9월 초의 두 사건이 총통의 계획을 발동시켰다. 9월 3일 연합군이 이탈리아 남단에 상륙했고, 9월 8일 이탈리아와 서방 열강의 휴전협정(9월 3일 비밀리에 체결)이 공표되었다. 하루이틀 동안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에서 독일군의 상황은 극히 위태로웠다. 그러나 연합군 사령부는 이탈리아의 동서 해안 거의 어디서나 상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완전한 제해권을 활용하지도 않았고, 독일 측이 우려한 압도적인 제공권을 활용하지도 않았다." "이탈리아군 사단들을 거의 총 한 발 쏘지 않고 포위하고 무장해제했을 때 독일군은 안도했다. 이것은 독일군이 로마를 쉽게 장악할 수 있고 당분간 나폴리까지 확보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독일군은 자국을 위해 무기를 생산할 공장들이 있는 북부 공업 지역을 포함해 이탈리아의 3분의 2를 손에 넣었다. 마치 기적처럼 히틀러의 수명은 다시 연장되었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이탈하자 히틀러는 속이 아렸다."(1716-9)


"1943년 7월 5일, 히틀러는 소련군을 상대로 이번 전쟁에서 마지막이 될 대규모 공세를 개시했다. 독일 육군의 정예 병력─신형 티거 중전차로 무장한 무려 17개 기갑사단을 포함하는 약 50만 명─이 쿠르스크 서쪽의 넓은 소련군 돌출부로 달려들었다. 히틀러는 이 '성채 작전'으로 소련군의 정예인 100만 병력─저번 겨울에 스탈린그라드와 돈 강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던 바로 그 병력─을 에워싸는 데 더해 돈 강까지, 어쩌면 볼가 강까지 밀어붙인 뒤 남동쪽에서 북진해 모스크바를 함락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소련군은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다. 7월 22일경 기갑전력에서 전차의 절반을 잃은 독일군은 완전히 멈추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력 우위를 확신한 소련군은 7월 중순 쿠르스크 북쪽 오렐의 독일군 돌출부를 역으로 공격해 금세 전선을 돌파했다. 이것은 2차대전에서 소련군의 첫 번째 하계 공세였으며, 이 순간부터 붉은군대는 끝까지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1726)


"1943년에 히틀러의 운세를 꺾고 전세가 역전되었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더 있었다. 바로 대서양 전투 패배와 독일 본토 상공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격화되는 치열한 공중전이었다. 1942년에 독일 잠수함들은 대부분 영국이나 지중해로 향하던 연합국 선박 625만 톤을 격침했는데, 이는 서방 조선소들의 손실 보충 능력을 한참 상회하는 톤수였다. 그러나 1943년부터 연합군은 기술 개선, 이를테면 장거리 항공기와 항공모함, 그리고 적 잠수함에 발각되기 전에 먼저 적함을 탐지하는 레이더를 장비한 수상함 등에 힘입어 U보트에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독일 국민이 현대전의 공포를 실감한 것도 이 기간이었다─각자의 집 문간에서 실감했다. 영국 항공기가 야간에, 미국 항공기가 주간에 투하하는 폭탄이 이제 독일인의 집을, 독일인이 일하는 사무실과 공장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괴벨스가 일기에서 밝혔듯이, 영국과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가장 크게 손상된 것은 독일의 주택과 국민의 사기였다."(1727-31)


제29장 연합군의 서유럽 침공과 히틀러 살해 시도 


"베를린에서 슈타우펜베르크와 그 동지들은 마침내 계획을 완성했다. 공동 작전의 암호명은 '발퀴레Walküre'였다. 이는 적절한 명칭이었는데, 스칸디나비아-독일 신화에서 발퀴레는 고대 전장의 상공을 맴돌다가 죽어야 할 자들을 고르는, 아름답지만 무서운 처녀들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죽어야 할 인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퍽 아이러니하게도 카나리스 제독은 실각하기 전에 발퀴레 아이디어를 하나의 보안 계획으로, 즉 베를린과 그 밖의 대도시들에서 고되게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수백만 명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국내예비군─신체 건강한 군인들은 거의 모두가 전선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이 이들 대도시에 대한 치안 조치를 취하도록 한다는 계획으로 꾸며서 히틀러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발퀴레는 군부 음모자들에게 완벽한 위장막, 즉 히틀러를 암살하자마자 국내예비군으로 베를린, 빈, 뮌헨, 쾰른 등지를 장악하기 위한 계획을 대놓고 세울 수 있도록 해주는 위장막이 되었다."(1770-1)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에 성공하자 베를린 음모단은 큰 혼란에 빠졌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연합군이 1944년에 상륙을 시도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설령 시도하더라도 실패할 확률이 반반이라고 믿었다. 그는 상륙 실패를 바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토록 많은 출혈로 대가를 치른 후라면 미국과 영국 정부가 서부에서 새로운 반나치 정부와 강화를 교섭하는 데 더 열의를 보일 테고 그럴 경우 더 좋은 조건을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크는 이제 반나치 반란에 성공한다 해도 적군의 독일 점령을 피할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전쟁을 끝내 더 이상의 인명 손실과 조국의 파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또한 강화를 성사시키면 소련군이 독일을 짓밟고 볼셰비키화하는 사태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거사를 통해 나치 독일 외에 〈또다른 독일〉이 있음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었다.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전선은 당장 행동에 나서도록 음모단을 재촉했다."(1784-5)


"7월 19일 오후, 슈타우펜베르크는 라스텐부르크로 호출되었다. 와해 중인 동부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국내예비군 측에서 급히 훈련시키고 있는 새로운 국민척탄병Volksgrenadier 사단들의 상황에 관해 히틀러에게 보고하라는 지시였다. 이튿날 7월 20일 오후 1시에 총통 본부의 첫 일일 회의에서 보고할 예정이었다." "정확히 오후 12시 42분, 폭탄이 터졌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이후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가 나중에 말했듯이, 병영은 마치 155밀리 포탄에 직격당한 것처럼 굉음과 함께 연기와 화염을 내뿜으며 박살이 났다. 시체들이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파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흥분한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실에 있던 전원이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슈타우펜베르크의 확신과는 반대로, 히틀러는 피살되지 않았다. 브란트 대령이 견고한 참나무 받침대의 바깥쪽으로 서류가방을 옮겨놓은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히틀러의 목숨을 구했다."(1794, 1801-4)


"오후 9시 직후, 좌절한 음모단은 총통이 늦은 밤에 독일 국민에게 직접 방송할 것이라는 독일방송국의 발표를 듣고서 말문이 턱 막혔다. 몇 분 후 (반란 가담에서 반란 진압으로 돌아선) 레머 소령─이제 대령─에게 운명적인 용무를 맡겼던 베를린 방위군 사령관 하제 장군이 체포되었고, 친위대의 지지를 받는 나치 장군 라이네케가 베를린 내 모든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넘겨받았으며 이제는 벤틀러슈트라세 기습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라스텐부르크─거사가 벌어진 히틀러의 '늑대굴'─의 정력적인 대응 조치, 레머를 설득하고 라디오를 활용하겠다는 괴벨스의 기민한 판단, 베를린 친위대의 집결, 벤틀레슈트라세 반란파의 믿기 어려운 혼란과 무대책 등으로 인해 음모단과 한배를 타려던 찰나의, 혹은 이미 한배를 탄 상당수 장교들이 마음을 고쳐먹었다."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여 처음부터 음모단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 결과로 체포된 프롬 장군은 이제 기운을 냈다."(1823-4)


"반란 반대파들은 베크, 회프너,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 헤프텐, 메르츠를 프롬의 빈 집무실로 몰아넣었고, 잠시 후 프롬이 권총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프롬은 음모단을 제거하고 그들의 흔적을 지울 뿐 아니라─비록 음모에 적극 관여하기를 거부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음모를 알고서 암살자들을 숨겨주고 그들이 계획을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반란을 진압한 주역으로서 히틀러의 환심을 사기로 금세 마음먹었다. 나치 폭력배들의 세계에서는 너무 늦은 결심이었지만 프롬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프롬은 〈총통의 이름으로〉 〈군사재판〉을 요청했고(그가 요청했다는 증거는 없다) 네 장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고 알렸다. 〈참모장 메르츠 대령, 올브리히트 장군, 이제 나로서는 이름을 모르는 이 대령[슈타우펜베르크], 그리고 이 중위[헤프텐].〉" "아래의 중정에서 군용차의 등화관제용 덮개가 씌워진 전조등이 희미하게 앞쪽을 비추는 가운데 네 장교는 총살대에 의해 금세 처리되었다."(1825-7)


"반란이 실패한 것은 그저 육군과 민간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 중 일부가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서툴렀고, 프롬과 클루게의 성격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고, 고비마다 음모단에 불운이 덮쳤기 때문이 아니다. 반란이 진압된 것은 장성이든 민간인이든 이 대국을 운영한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리고 제복을 입었든 안 입었든 독일 국민의 대다수가 혁명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전쟁의 비탄과 패전 뒤 외국에 점령당할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들은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스스로 초래한 독일과 유럽의 퇴화를 견뎌내지 못한 국가사회주의를 그들은 여전히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지지했으며, 여전히 아돌프 히틀러를 국가의 구원자로 보았다. 〈[훗날 구데리안이 씀] 당시 독일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아돌프 히틀러를 믿었고, 만약에 그가 죽었다면 전쟁을 유리하게 종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암살자가 제거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이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1850-1)


제6부 제3제국의 몰락


제30장 독일 정복 


"전선 전역에서 미군─북부의 영국군과 캐나다군─은 소모전을 벌여 안 그래도 약해져가는 방어군을 갉아먹고 있었다. 히틀러는 계속 수세를 취해서는 심판의 시간만 늦출 뿐임을 깨달았다. 그의 열에 들뜬 마음속에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대담하고 창의적인 계획이 떠올랐다. 타격을 가해 미 제3군과 제1군을 갈라놓고, 안트베르펜까지 진출해 아이젠하워로부터 주요 보급항을 빼앗고, 벨기에-네덜란드 국경을 따라 영국군과 캐나다군을 밀어붙인다는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그런 공세를 통해 영미군을 완파하여 독일 서부 국경의 위협을 제거하는 동시에 소련군을 다시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소련군은 발칸에서는 여전히 진격하고 있었지만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서는 10월부터 비스와 강에 멈춰 있었다. 서부 공세는 지난 1940년에 대규모 돌파를 개시했던 곳이자 독일 정보기관이 파악하기로 미군의 약한 4개 보병사단만이 방어하는 아르덴을 통해 신속하게 감행할 계획이었다."(1863)


"그러나 아르덴에서 약체 4개 사단이 괴멸된 뒤 미 제1군의 흩어진 부대들은 임시변통으로 완강히 저항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었고, 돌파된 전선의 북쪽 측면과 남쪽 측면인 몬샤우와 바스토뉴를 단호히 사수하여 히틀러의 군대가 좁은 돌출부를 지나도록 만들었다. 미군의 바스토뉴 방어가 독일군의 운명을 결정했다." "아르덴에서 공세를 지속할 병력도, 알자스에서 공격에 나설 병력도 부족하다는 장군들의 항변에 히틀러는 귀를 닫았다. 〈나는 이 일을 11년간 해왔지만 ··· 모든 것이 완전하게 준비되었다는 보고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 여러분은 결코 완전하게 준비되지 않는다. 명백히 그렇다.〉 히틀러는 말하고 또 말했다.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이 회의 속기록의 길이로 판단하건대, 몇 시간 동안 말했다. 〈문제는 ··· 과연 독일에 존속할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파멸할 것인가다. ···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독일 국민은 파멸할 것이다.〉 그런 다음 로마의 역사와 프로이센 7년 전쟁의 역사를 한참 논했다."(1868-70)


"비록 발칸은 빼앗기고 있었지만, 폴란드의 비스와 강과 동프로이센에서 독일군이 10월부터 굳세게 버티는 중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더?" "히틀러가 동부전선에서 〈지금처럼 강력한 예비 병력을 보유했던 적이 없다〉라고 주장하자 구데리안은 〈동부전선은 카드로 만든 집과 같습니다. 전선의 한 지점이 뚫리면 나머지 전체가 붕괴될 것입니다〉라고 대꾸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1945년 1월 12일, 이반 코네프의 소련 집단군이 바르샤바 남쪽 비스와 강 상류 바라노프의 교두보에서 빠져나와 슐레지엔으로 향했다. 더 북쪽에서는 주코프 휘하 병력이 바르샤바 북쪽과 남쪽에서 비스와 강을 건너 1월 17일 이 도시를 함락했다. 더 북쪽에서는 소련 2개 군이 동프로이센의 절반을 짓밟고 단치히 만으로 돌격했다. 이것은 2차대전을 통틀어 소련군의 최대 공세였다. 스탈린은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만 기갑전력의 비중이 놀랍도록 높은 180개 사단을 투입했다. 막을 도리가 없었다."(1873-5)


"1월 27일 오후, 주코프의 병력이 베를린에서 160킬로미터 떨어진 오데르 강을 도하한 날, 이제 베를린 총리 관저로 이전했고 전쟁 종결 때까지 장소를 바꾸지 않은 총통 본부에서 흥미로운 대응 조치를 취했다. 25일, 절박한 구데리안은 리벤트로프를 찾아가 나머지 독일군이 동부의 소련군에 집중해서 대적할 수 있도록 당장 서부에서의 휴전을 강구할 것을 촉구했다. 외무장관은 곧장 히틀러에게 일러바쳤고, 총통은 당일 저녁 구데리안을 질책하며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힐난했다. 동부의 재앙에 충격을 받은 히틀러, 괴링, 요들은 서방 측에 휴전을 요청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세 사람은 서방 연합국이 볼셰비키 승리의 결과를 우려하여 한달음에 달려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방을 겨냥한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독일 측 설계자들은 결국 영국군과 미군이 독일군에 합세해 소련 침공군을 물리치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터였다."(1876-7)


"3월 19일, 히틀러는 독일 내 모든 상점뿐 아니라 모든 군사·산업·운송·통신 시설까지 온전한 상태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파괴하라는 일반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은 〈이에 반하는 모든 지령은 무효다〉라는 단언으로 끝맺었다. 독일을 광대한 황무지로 만들어야 했다."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 지면 민족도 사라질 것이다. 이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국민이 가장 원초적으로 존속하기 위해 필요할 법한 기반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그런 것들을 파괴해버리는 편이 더 낫다. 이 국가는 약한 국가로 판명날 것이고, 미래는 오로지 강한 동부 국가[소련]의 것일 테니까. 게다가 뛰어난 자들이 살해되었으니 전후에는 열등한 자들만 남을 것이다.〉" "독일 국민이 최종 파국을 면한 것은, 그런 대규모 파괴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든 연합군의 신속한 진격 외에도, 슈페어와 다수의 장교들이 히틀러의 명령을 (마침내!) 정면으로 거슬렀기 때문이다."(1885-7)


제31장 신들의 황혼: 제3제국의 마지막 나날 


"히틀러는 몸이 엉망인 데다 소련군이 베를린에 근접하고 서방 연합군이 독일 본토를 장악하여 이제 처참한 최후가 목전에 닥친 상황임에도, 총통은, 그리고 괴벨스를 비롯해 가장 광적인 소수의 추종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기적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4월 초 날씨 좋은 저녁에 괴벨스는 자리에 앉아 히틀러에게 총통의 애독서 중 하나인 토머스 칼라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역사》를 읽어주었다. 괴벨스가 낭독한 장은 7년 전쟁 중 가장 암담했던 시절, 대왕이 진퇴유곡에 빠졌다고 생각해 각료들에게 만약 2월 15일까지 운수가 나아지지 않으면 포기하고 독약을 마시겠다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역사의 이 시기를 고른 것은 확실히 적절했으며 괴벨스는 틀림없이 한껏 극적인 방식으로 낭독했을 것이다. 총통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라고 괴벨스는 크로지크에게 말했고, 후자는 이 감동적인 장면을 일기에 적어 우리에게 전해주었다."(1893-4)


"그렇게 영국인이 쓴 책에서 기운을 얻은 두 사람은 힘러의 잡다한 '연구' 부서들에서 서류철에 보관 중이던 두 가지 별자리점 결과를 가져오도록 했다. 하나는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집권하던 날 작성한 총통의 별자리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1918년 11월 9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일에 어느 이름 모를 점성술사가 작성한 공화국의 별자리점이었다. 괴벨스는 두 통의 놀라운 문서를 재검토한 결과를 크로지크에게 알렸다.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으니, 두 별자리점 모두 1939년에 전쟁 발발, 1941년까지 승리, 뒤이어 일련의 전세 역전, 1945년 초기 몇 달 동안, 특히 4월 초순의 가장 심한 반격을 예상했습니다. 4월 하순에 우리는 일시적인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그 후로 8월까지 정체기일 테고 그달에 강화를 맺을 것입니다. 뒤이어 3년은 독일에 힘겨운 시절일 테지만, 1948년부터 독일은 부흥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은 4월 12일, 미군이 데사우와 베를린 사이 아우토반에 나타났다."(1894-5)


"4월 29일 새벽에 구술로 작성한 유언장에서 나치사령관은 맨 마지막까지 본인의 성격에 충실했다. 위대한 승리는 본인 덕분이었다. 패배와 최종 실패는 다른 사람들, 그들의 〈불충과 배반〉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고별사를 읊었다─이 미치광이 천재의 일생에서 기록된 마지막 말이었다. 〈이 전쟁에서 독일 국민의 노력과 희생이 너무도 위대했기에 나는 그것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렇더라도 독일 국민을 위해 동방 영토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마지막 문장은 《나의 투쟁》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독일 국민을 위해 〈동방 영토〉를 획득해야 한다는 집념으로 정계 생활을 시작했던 히틀러는 생의 끝자락에도 그 집념에 매달렸다. 독일인 수백만 명이 죽고, 독일 가옥 수백만 채가 폭격에 무너지고, 심지어 독일 국가마저 파괴되었음에도, 히틀러는 슬라브인에게서 동방 영토를 빼앗는다는 묵표가 (도덕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튜턴족의 헛된 꿈이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1931-2)


"1차대전 패전 이후 1918년에 카이저는 달아났고 군주정은 허물어졌으나 국가를 지탱하던 기존의 다른 제도들은 남아 있었고,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부가 그 기능을 이어갔으며, 독일 육군과 참모본부의 중핵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45년 봄에 제3제국은 그야말로 소멸해버렸다." "아돌프 히틀러의 바보짓─그리고 그를 너무도 맹목적으로, 너무도 열렬하게 추종한 독일인 자신의 바보짓─탓에 그 지경이 되었다. 다만 그해 가을 독일로 돌아간 나는 히틀러에게 분개하는 정서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그리고 땅이 있었다. 사람들은 멍한 상태로 피를 흘리고 배를 곯았으며, 겨울이 찾아오자 폭격으로 그들의 집이 된 오두막에서 누더기로 몸을 감싸고 바들바들 떨었다. 히틀러는 다른 수많은 민족들을 말살하려 했고 전쟁에서 패하자 결국 자기네 민족까지 말살하려 했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독일 민족은 말살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3제국은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1946-7)


맺음말


"뉘르베르크의 피고석에 오른 21명 중 7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헤스, 레더, 풍크는 종신형, 슈페어와 시라흐는 20년형, 노이라트는 15년형, 되니츠는 10년형이었다. 나머지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샤흐트와 파펜, 프리체는 석방되었다. 세 사람 모두 독일의 탈나치화 법정에서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받긴 했지만, 결국 아주 짧게 복역하는 데 그쳤다. 1946년 10월 16일 오후 1시 11분, 리벤트로프가 뉘른베르크 감옥 처형실에서 교수대에 올라갔고, 짧은 간격으로 카이텔, 칼텐브루너, 로젠베르크, 프랑크, 프리크, 슈트라이허, 자이스-잉크바르크, 자우켈, 요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헤르만 괴링은 없었다. 그는 교수형 집행인을 속였다. 감방으로 몰래 들여온 독약 약병을 자기 차례가 오기 두 시간 전에 삼켰다. 총통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후계를 놓고 경쟁한 하인리히 힘러와 마찬가지로, 괴링은 막판에 이승을 떠나는 방법을 선택하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과 함께 결딴을 낸 그 세상을."(19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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