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제1장 농부들은 이야기한다 : 마더 구스 이야기의 의미


# 빨강 모자 소녀 이야기 : 엄마의 심부름으로 할머니에게 빵과 우유를 가져가던 소녀는 숲속에서 늑대를 만난다. 늑대는 소녀의 행선지를 물어보고 길을 가로질러 할머니 집에 먼저 도착한 후, 할머니를 죽인 뒤 그 피는 병에 담고 살은 썰어서 접시 위에 놓았다. 그리고 할머니의 잠옷을 입고 침대 속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늑대는 집에 도착한 소녀에게 천장의 고기와 포도주(할머니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한다. 소녀는 그것을 다 먹고 나서, 이불 속에 있는 할머니의 손톱과 이빨이 왜 이렇게 크고 날카롭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늑대는 "너를 잘 먹기 위해서란다, 얘야."라고 말하고 소녀를 잡아먹었다.


"정치사와 같은 인습적인 장르에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을 요구하는 장르인 망탈리테의 역사에서 정확성이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적합한 것일지도 모른다. 세계관은 정치적 사건과 같은 방식으로 연도를 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덜 '사실적'인 것은 아니다. 실제의 세계에 대한 상식적인 관념으로 들어가는 예비 단계의 정신적 배열이 없이 정치학은 발생할 수 없다. 상식은 그 자체로서 실재를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며 그것은 문화마다 다르다. 상식은 어떤 집단적 상상력을 임의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 질서 내에서의 경험의 공통적 근거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구체제하에서 농민들이 세계를 보았던 방식을 재구성하려면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것은 무엇인가, 그들 마을의 일상 생활 속에서 그들이 함께 나누었던 경험은 무엇이었는가를 물음으로써 시작하여야 한다."(43)


"마을의 차원에서 역사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주 제도와 생존을 위한 경제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흙에 몸을 굽히고는 원시적인 농사 기술 때문에 몸을 세울 기회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금 징수는 마을 내부에 균열의 틈바구니를 열었고 부채는 피해를 가중시켰다. 가난한 사람들은 보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빌리는 일이 빈번히 있었다. 그 사람들은 '마을의 장닭 coqs du village'이라고 불리던 몇 안 되는 비교적 부유한 자들로서 시장에 잉여 곡물을 팔고 가축을 키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노동자로 고용할 수 있을 정도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빚에 의한 노역 때문에 부유한 농민들은 영주나 교회의 십일조 징수자들만큼이나 증오의 대상이었다. 증오, 선망, 이익의 상충은 농민 사회를 관통하고 있었다. 마을은 결코 행복하고 조화로운 공동 사회 Gemeinschaft가 아니었다. 46-7)


"먹는가 못 먹는가, 그것이 일상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민담에서도 농민들이 당면하던 문제였다. 이것은 대단히 많은 이야기에서, 때로는 사악한 계모라는 주제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구체제의 난롯가에서 특수한 반향을 울렸을 것임이 확실하다." 따라서, "요술 막대기, 반지, 혹은 초자연적인 은인이 생겼을 때 농민 주인공에게 처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언제나 음식이다."(55-6) "농민들에 일상 생활 속에서 소송, 장원의 세금에 대한 속임, 밀렵 등으로 부유하고 권세 높은 사람들을 속이려 하듯 환상 속에서도 그들을 속임으로써 만족감을 얻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 속에서 공화주의의 맹아를 찾는다는 것은 허황된 일일 것이다.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왕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꿈은 구체제의 도덕적 기반에 도전한다는 것과는 거의 무관하다."(92-3) 속임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야 하는 '작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다."(95)


# 다양하게 변주되는 민담들 : 영혼을 노리는 악마를 속여 양껏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얻어내거나, 위험을 눈치챈 빨강 모자 소녀가 늑대를 기만하고 탈출한다거나, 왕을 속이거나 곤란에 빠지게 하여 공주를 차지하는 등의 이야기들


제2장 노동자들은 폭동한다 : 생-세브랭 가의 고양이 학살


고양이 대학살에서 "우리가 웃음거리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산업화 이전 유럽의 노동자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거리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다." 그 거리를 인식하는 것이 문화 연구의 출발점인데, "왜냐하면 인류학자들은 낯선 문화에 침투하려는 시도에 있어서 최고의 입구는 그것이 가장 불투명하게 보이는 지점이라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115) "콩타는 그 사건을 노동자와 '부르주아' 사이의 운명의 불균형, 즉 일·음식·잠이라는 삶의 기본적 요소에 있어서의 불균형에 대한 언급이라는 컨텍스트 속에 위치시켰다. 그러한 부당한 처사는 견습공들의 경우에 특히 극악했다. 그들은 동물처럼 취급되었던 반면, 동물들은 그들의 머리 위로 올라가 그 소년들이 차지했어야 하는 자리인 주인의 식탁으로 승진되었다. 견습공들이 가장 혹사당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텍스트는 고양이를 살해한 것이 노동자들 전체에 퍼져 있던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였던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116-7)


확실히 '부르주아'는 "다른 문화권에 소속되었는데 그 문화권은 무엇보다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규정된다."(122) 반면 18세기 직공들은 "게으르고,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하고, 신뢰할 수 없다는 공통적인 가정" 아래 취급되는 '물건' 같은 신세에 놓여 있었다.(120) 그렇다면 왜 하필 고양이인가? 폭동과도 같은 환락이 허용되는 기간인 사육제 때 젊은이들은 규범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서 사회적 경계를 시험했고, 그의 일환으로 고양이를 고문하고 처형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양이는 6월 24일 하지에 거행되었던 세례 요한 성인의 축일에도 등장했다. 군중들은 모닥불을 피워 그 위를 뛰어 넘고 주위에서 춤을 추며 그해의 남은 기간 동안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으려는 희망에서 마법적인 힘을 지녔다는 물체를 불 속에 던져넣었다. 이때 즐겨 던지던 것이 고양이로서 자루 속에 넣어 묶거나 끈에 매달아 늘어뜨리거나 말뚝에 묶여 태워졌다."(123-4)


# 고양이가 상징하는 의미

1. 마녀로 변신하거나 악마와 관련된 주술적인 힘

2. 가정에서 발동되는 (여)주인과의 일체감

3. 성적 은어


불완전하게나마 부르주아의 착취를 상징하는 고양이가 저지른 죄는 "견습공들에게 혹사를 시키고 제대로 먹이지 않은 죄, 죄인들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사치 속에서 살았던 죄, 한두 세대 전에 혹은 인쇄업의 출발시에 존재하였던 초기의 '공화국' 속에서 주인들이 하였다고 전해지듯이 일꾼들과 같이 일하고 먹는 대신에 인쇄소에서 물러나 임금 노동자로 인쇄소를 채우려고 하였던 죄 등이다." "확실히 그들은 인격 모독을 느꼈고 죽임의 항연 속에 그것을 폭발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분노를 축적하였다. 반세기 후에 파리의 직공들도 같은 방식으로 폭동을 일으켜 무차별의 학살과 즉석의 인민재판을 결합시켰다. 고양이 학살을 프랑스 혁명의 9월 학살의 예행 연습으로 보는 것은 어리석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고양이 학살이 상징의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폭력성의 분출은 민중 봉기를 시사하였다."(142-3)


"고양이는 그들의 목적에 완전하게 부합되었다. (안주인이 키우는 고양이인) 그리스의 등뼈를 강타함으로써 그들은 주인의 아내를 마녀이자 동시에 음란한 여자라고 부른 것이었고 동시에 주인을 속고 있는 남편인 바보로 만들었다. 이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전달된 환유적 모욕이었고 그것이 성공한 이유는 고양이가 부르주아의 생활 방식에서 편애받았기 때문이었다. 동물을 학대하는 것이 '부르주아'에게 낯선 것이었던 만큼 애완 동물을 키운다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낯선 일이었다. 이리하여 병존할 수 없는 감수성 사이에서 함정에 빠진 고양이는 양측 세계 모두에서 최악을 맛보았던 것이다."(147) 다만 이러한 장난은 19세기말에 프롤레타리아트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대체적으로 상징적인 단계에 국한"되었던 바, 인쇄공들은 "동지회를 조직하고, 파업을 감행하고, 때로는 임금 인상을 강요하였지만 (여전히) 부르주아에게 복종하고 있었다."(148)


제3장 한 부르주아는 그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 텍스트로서의 도시


<1768년에 만든 몽펠리에 시의 상태와 설명>을 쓴 그는 "한편으로는 귀족과, 다른 한편으로는 평민들과 자신을 구분하였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기 주장에 공개적으로 집착하며 매페이지마다 확인되고 있는 그의 공감대는 도시 사회의 중간 범위 어디엔가 그를 위치시킨다. 즉 그는 의사·법률가·행정가·금리 생활자 등 대부분의 지방 도시에서 인텔리겐치아를 형성하였던 자들에 동조하였다. 이 사람들은 '구체제의 부르주아'에 속한다. 그들은 18세기적인 의미에서 부르주아였고 그 당시의 사전은 부르주아를 단지 '도시의 시민'이라고 정의하였을 뿐이다."(164) 몽펠리에 대행진은 여전히 귀족 계급에게 귀속되는 "도시 사회의 집합적인 질서를 표현하였다. 이것은 도로 위에서 펼쳐졌던 진술이었고 그것을 통하여 도시는 그 자체를 그 자체에게 내보였다. 그리고 때로는 신에게도 내보였다. 왜냐하면 몽펠리에가 한발이나 기근에 시달릴 때에도 행진은 벌어졌기 때문이다."(173-4)


"행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장소를 부여하였던 반면 상인들을 위한 장소는 별로 없었고 제조업자를 위한 장소는 전혀 없었다. 또한 인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였던 거의 모든 장인·일용 노동자·하인들도 배제되었다. 그리고 여섯 명 중 한 명 꼴로 존재하던 신교도들도 제외되었다." "행진자들의 존엄성은 행진자들과 길가에 늘어선 세수하지 않은 일반 구경꾼들 사이에 그어진 구분보다는 (성직자·귀족·평민으로) 행진 대열 내에서 그어진 구분에서 발생하였다. 인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몽펠리에에서도 인간의 신분homo hierarchicus은 사회의 양극화라기보다는 단편화를 통하여 번성하였다. 계급으로 구분되는 대신에 사회적 질서는 세분화된 정도의 존엄성을 따라 구경꾼들을 통하여 파문쳤다." "제외와 포함은 경계 설정이라는 동일한 과정에 속하며 그것은 길거리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일어났던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경계는 실행됨으로써 그 힘을 획득하였다."(177-9)


"<설명서>의 후반부는 구조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반부에서 휩쓸고 지나갔던 행진에 대조되는 몽펠리에의 견실한 주택 하나를 연상시킨다. 부르주아는 이 건물에서 본층을 차지하면서 귀족을 '귀족의 층piano nobile'에서 상층 꼭대기로 밀어올렸던 반면 평민들은 계단 밑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신분의 언어는 존엄성의 언어만큼이나 전근대적이었다. 우리의 저자는 일련의 구식 범주를 사용하였고 그것에서 구식의 의미를 제거하고 재배열하여 19세기에야 공개리에 출현하게 될 사회적 질서와 흡사한 모습을 전달하게 하였다. 그 사회란 옛 귀족과 신흥 부자의 혼합체에 의해 지배되는 '명사들'의 사회로서, 그 사회의 근본적인 동인은 부富였지만 그 부는 산업혁명이 아니라 토지·관직·금리·무역 같은 전통적인 원천으로부터 파생되었던 발자크식의 사회였다."(181-2) 


<설명서>의 저자는 '부르주아 신분'을 귀족과 평민 사이에 위치시키면서, 그 단절면에 대해 밀접한 경계를 유지했다. 즉 부르주아의 지위를 "소극적으로, 즉 적대적인 이웃 신분과 관련하여 정의했다."(184) 그가 진정으로 경악한 지점은 "평민의 '부르주아화'였다. 제2신분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제3신분과의 접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민들의 사악성을 네 개의 항목으로 요약했다. 1) 그들은 가장 작은 기회라도 생기면 고용주를 기만하고 속인다. 2) 그들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적이 없었다. 3) 그들은 방탕의 기회를 포착하기만 하면 일손을 놓는다. 4) 그들은 부채를 쌓고 결코 상환하지 않는다."(188) "평민들은 그 자체로서도 악이었지만 그들의 신분을 벗어나게 된다면 사회 질서 전체에 대한 위협이었다. 사회의 단층면은 신분·지위·집단·계급, 또는 모든 종류의 단체가 만나는 접합선을 따라 이어졌다. 따라서 우리의 저자는 가능한 모든 지점마다 경계선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195)


'점잖고 행실이 좋은 정직한 사람'이라는 이상은 <설명서>의 여러 지점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것은 귀족주의적인 17세기 관념의 고상함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1768년에 이르면 이것은 부르주아적인 색채를 획득한다." "신사와 부르주아라는 두 용어는 몰리에르의 시대처럼 웃기는 모순이 더 이상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귀족의, 다른 한편으로는 장인의 옆에 서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어떠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부르주아 신사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개발하였다. 부유하고, 잘 먹고, 깔끔하게 입고, 취향에 맞는 물건에 둘러싸여 있고, 자신의 쓸모에 대해 확신하며 자신의 철학이 굳건한 그는 새로운 도시성에 기뻐한다. "행복한 자는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다"라고 우리의 저자는 결론하였다. 그 결론은 식량 무료 배급을 받으려는 줄이나 구빈원이나 정신병원이나 교수대를 참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의 추구를 선도하였던 사람들, 즉 제2신분의 '정직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었다."(200-1)


제4장 한 경찰 수사관은 그의 명부를 분류한다 : 문필 공화국의 해부


요즘 말로 하면 반체제 인사를 관리하던 데므리는 보고서를 기안하면서 오늘날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문학적 감수성과 관료적 질서의 결합을 보여준다. 그것은 저자들의 종교적·정치적 견해의 성격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들 문체의 품격에 대해서도 많은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226)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데므리는 "문필 공화국의 법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가 감시하던 사람들의 경력 속에서 그 법칙이 작용하는 것을 관찰하였다." 가령 드 베르니 원장 신부의 경우를 보면 데므리는 "가족 관계, 후견 관계, '보호제'의 그물망 속에 그를 위치시켰는데 그 단어는 중심적 용어로서 보고서 전반에 걸쳐 나오고 있다. 군주와 왕비에서부터 싸구려 팸플릿 작가에 이르기까지 경찰 명부 속의 모든 인물들은 보호를 찾고 받고 베풀었다." "이것이 그 체제가 움직이던 방식이었다. 경찰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원리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전제로 받아들였다."(235-6)


"문인들의 존엄성과 그들 소명의 고결성은 이미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하나의 중요 주제로 등장하지만, 데므리의 보고서에서는 그러한 주제를 찾을 수 없다. 비록 경찰은 한 작가를 보면 그를 알아보고 그를 데므리의 명부에 포함시킴으로써 다른 프랑스 사람들과 다르게 분류하였지만, 그들은 작가가 하나의 직업 혹은 사회 속에서의 지위를 지녔다고 말하지 않았다." "작가는 아직 현대적인 형태를 취하지도, 보호자에게서 자유롭지도, 문필 시장에 동화되지도, 한 직업에 전념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경찰은 작가를 어떤 인습적인 범주에도 위치시키지 못하였다." 데므리는 종종 작가들을 최저 한계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소년들garcons'이라고 지칭했는데, 이것은 "경찰 명부에 '신분이 없는 사람들gens sans etat'이라고 등장하였던 사람들, 그늘 속에 있던 현대 지식인들의 선구자들, 즉 위상을 정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위상을 정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246-7)


데므리가 궁극적으로 수호하고자 했던 "파벌이나 가신 집단이 비방을 받았다면 그것은 국가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궁정 정치의 체제 속에서 인격은 원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고 개인의 신용은 잘 씌어진 팸플릿에 의하여 침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상범을 다루는 경찰 작업은 팸플릿 작가들을 잡아내고 비방이 인쇄되어 나타난 형태를 가리키는 중상libelles을 억제하는 문제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252) "데므리는 혁명을 예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필 공화국을 수사하면서 그는 적대적인 대중 여론의 물결에 더욱더 나약하게 노출된 왕국을 보았다. 후견인이 바뀌어가며 정신廷臣들이 부침하던 당시에 팸플릿 작가들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그 체제에 대한 존경을 잠식시켰다. 그리고 위험은 모든 곳에 숨어 있었다."(255) 데므리는 무신론이 왕의 권위를 침해한다고 믿었고, 그가 보기에 디드로나 달랑베르 같은 자유사상가들은 중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제5장 철학자들은 지식의 나무를 다듬는다 : <백과전서>의 인식론적 전략


"분류 정리를 한다는 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다. 사과quadrivium가 아니라 삼과trivium로 분류된 과목이나 '경성硬性' 과학이 아니라 '연성軟性' 과학으로 분류된 과목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시들지 모른다. 잘못된 서가에 꽂힌 책은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 인간 이하라고 규정된 적은 절멸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회적 행위는 도서관의 도서 목록이나 조직 도표나 대학의 학과처럼 명확하게 다듬어졌건 아니건 분류의 도식에 의해 결정된 경계를 따라 흐른다."(272) "디드로의 <백과전서>의 서두에 있는 도해, 즉 베이컨과 체임버스에게서 이끌어낸 유명한 지식의 나무는 새롭고 과감한 것을 제시하였다. 기존 체계 내에서 학문들이 어떻게 변경될 수 있는지를 보이는 대신에, 이것은 신성하다고 사람들이 주장하던 것의 대부분을 학문의 세계에서 배제시킴으로써 알려진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를 설정하려는 시도를 표명하였다."(274)


"종교를 철학에 종속시킴으로써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종교를 효과적으로 탈기독교화시켰다. 물론 그들은 정통을 지키고 있음을 공언하였다. 신은 '신성한 역사' 속에 스스로를 계시하였다고 그들은 기록하였다." 백과전서파의 전제는 "경건한 것처럼 들리지만 결론에서는 신학을 이성에 종속시키려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이단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마치 감각적 인식을 쌓아올려 보다 복합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으로 만들어내면 신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던 것처럼 그들은 로크류의 방식으로 이성을 묘사하였다." "베이컨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신성한 학문'을 '인간적 학문'이나 정신의 능력과는 상관 없는 다른 나무에 위치시켰다. 이렇듯 베이컨은 실지로 계시 신학과 자연 신학을 위하여 두 개의 지식의 나무를 상정하였던 반면 백과전서파는 계시 신학과 자연 신학을 합쳐 단일한 나무에 올려놓고 그 양자를 이성에 종속시켰다."(284-5)


"<예비 논고>의 마지막에서 달랑베르는 자신의 동료 계몽 사상가들을 문인 중의 극치, 뉴턴과 로크의 후예라고 찬양함으로써 '백과전서파'와 '계몽사상가'라는 용어가 의미론적 영역에서 '학자', '현학가', '지성인'과 같은 용어들을 압도하게 되는 의미의 변천에 기여하였다." "<예비 논고>의 부분들은 단일한 전략을 수행하기 위하여 서로 맞물려 있다. 이것은 옛부터의 학문의 여왕을 왕좌에서 내려오게 하고 그 자리로 철학을 격상시켰다. 그러므로 현대판의 <신학 대전>은 중립적인 정보 편찬물과는 거리가 멀게 지식을 형상화하여 그것을 성직자에게서 빼앗아 계몽 사상에 동참하는 지식인들의 손 안에 넣어주었다. 이러한 전략의 궁극적인 승리는 19세기 중에 교육의 대중화와 현대적 학문 분야의 출현과 함께 도래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중요한 과업은 백과전서파가 지식은 권력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지식의 세계 지도를 그림으로써 지식을 정복하려고 하였던 1750년대에 이루어졌다."(295-6)


제6장 독자들은 루소에 반응한다 : 낭만적 감수성 만들기


계몽 사상가들은 세계를 지도화하여 독자들의 정신에 새로운 세계관을 각인시키고자 했다. 그렇다면 18세기 프랑스에서 독서란 무엇이었을까? "18세기에 책은 손으로 만들어졌다. 종이는 낱장마다 개별적으로 정교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졌기 때문에 같은 책 속에서도 페이지마다 달랐다. 각 글자·단어·행이 저마다 장인이 개성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는 솜씨에 따라 만들어졌다. 책은 낱권마다 자체의 특성을 지니는 개체였다." "독자는 활자의 도안을 살피고 간격을 조사하고 안팎의 인쇄면이 일치하는가를 검토하고 주형을 평가하고 인쇄의 균등성을 검사하곤 하였다. 그는 우리가 한 잔의 와인을 음미하듯 책의 표본을 조사했다. 왜냐하면 그는 종이 위에 있는 것이 주는 인상을 바라보았지 단순하게 그것을 가로질러 그 의미에 도달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책의 물리적인 성질을 완전하게 자기 것으로 만든 후에야 그는 정좌하고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316)


당대에 유행한 <독해 선집>과 <강의의 원리>를 저술한 비아르에게 이해란 단어의 정복을 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텍스트의 "의미는 문법이나 구조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의미론적 단위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아르는 마치 텍스트의 이해는 저절로 생기는 것처럼 단어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319) "루소는 독자들을 텍스트 속으로 안내하여 자신의 수사법으로 그들의 방향을 정해주고 그들이 어떤 역할을 맡도록 만들었다. 루소는 독자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시도하기까지 하였고 독서를 통하여 그들의 내적 삶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인습적인 문학과의 결별을 요구하였다. 이야기의 뒤에 숨어버리고 볼테르의 방식대로 등장인물들을 인형극의 인형처럼 줄로 조종하는 대신에 루소는 자신을 자신의 저작 속에 던져넣었고 독자들도 똑같이 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변형시켰다."(323)


루소식의 독서는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혁신시켜 낭만주의로의 길을 열게 될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16~17세기에 만연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독서법, 즉 신의 말씀을 제삼자의 개입 없이 흡수하기 위한 독서법을 부활시킬 것이었다." "칼뱅파이건 얀센파이건 경건파이건 이전 종교의 독서와 루소식의 독서를 구분시켰던 것은 가장 의심스러운 형태의 문학인 소설을 마치 성경을 읽듯이 읽으라는 요청이었다."(329-30) "이런 종류의 독서는 믿음의 비약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겪으면서 어떤 식으로건 고통을 받았음이 확실하고 그것을 엮어서 문학을 초월하는 진리로 만들어냈을 저자에 대한 믿음이었다. 궁극적으로 루소 소설의 힘은 그 자신의 개성의 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프로메테우스로서의 저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출발시켰고 그것은 19세기 멀리까지 지속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엘로이즈>에서 그는 장면 뒤에 숨는 대신 무대의 전면으로 걸어나왔다. 331)


"가장 세련된 학자들, 혹은 볼테르나 그림처럼 정확성에 까다로운 사람들은 <신엘로이즈>의 문체가 과장적이고 주제는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 모든 계층의 평범한 독자들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들은 울었고, 질식하였고, 격노했고, 자신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더 잘 살자고 결심했고, 흉금을 털어놓고 더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루소에게 편지하여 가슴 속을 털어놓았다."(342) "1761년 <신엘로이즈>에 의하여 일어났던 눈물의 홍수는 또 다른 하나의 전낭만주의적 감상의 파도라고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새로운 수사학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 독자와 작가는 각기 텍스트에서 상정된 이상적인 모습을 취하면서 인쇄된 글을 넘어서 교류하였다. 장-자크는 자신을 올바로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열어놓았고 그의 독자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일상적인 실존의 불완전성을 넘어 격상되었다고 느꼈다."(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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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가 사는 시대와 장소를 말해 주고, 우리가 사용하는 요리 및 식사 도구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것을 들려준다. 사람들은 현대를 '기술의 시대'라고 말한다. 보통은 컴퓨터가 여기저기 널렸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그 나름의 기술이 있다. 그 기술이 꼭 미래주의적일 필요는 없다. 포크도 냄비도 단순한 계량컵도 기술이다. 어떤 도구는 단순히 먹는 즐거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쓰인다. 그러나 요리 도구가 중차대한 생존의 문제일 때도 있다. 약 1만 년 전 냄비가 없었던 시절의 유골들을 보면, 치아가 몽땅 빠진 사람이 성인기까지 살아남은 예는 하나도 없었다. 씹기는 필수불가결한 기술이었다. 씹지 못하면 굶었다. 그러나 토기가 발명되자, 선조들은 죽이나 수프처럼 씹지 않고 마셔도 될 만큼 걸쭉한 혼합물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이가 하나도 없는 성인의 유골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냄비가 그들을 살렸다."(15)


"냄비는 먹을 수 있는 재료의 폭을 엄청나게 넓혔다. 냄비가 없을 때는 유독하거나 소화하기 힘들었던 식물들이 몇 시간 끓이게 되고부터는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바뀌었다. 냄비는 단순한 가열에서 요리로의 도약을 뜻한다."(29) "도공陶工은 무정형의 질척한 점토에 물을 타고, 다른 재료를 섞고, 형태를 잡은 뒤, 불로 구워서 영구적인 형상으로 굳힌다. 이것은 돌, 나무, 뼈를 깎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창조 작업이다." "도기陶器 제작과정에는 마술적인 측면이 있으며 실제로 초기 도공들은 공동체에서 샤먼의 역할도 겸하곤 했다."(38) "점토 단지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범위를 엄청나게 넓혔다. 그 현상은 '포리지'라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단지는 농경이라는 새로운 과학(역시 약 1만 년 전에 등장했다)과 합심하여 인류의 식단을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점토 단지를 쓰면 밀, 옥수수, 쌀처럼 조만간 세계 인류의 주식이 될 녹말성 곡물의 낟알들을 쉽게 끓일 수 있었다."(41)


# 냄비 이전의 요리법

1. 갑각류나 조개류의 껍질, 대나무 등을 이용한다. (크기와 모양의 한계가 뚜렷)

2. 창자에 고기를 담아 끓인다.

※ 뜨거운 돌을 물에 넣어 물을 끓인 후 음식을 익힌다.


"금속 가마솥은 토기에 비해서 실용적인 이점이 많았다. 가마솥은 모래나 재로 박박 씻을 수 있지만 유약을 칠하지 않은 토기는 그럴 수 없으므로 미세한 구멍 속에 이전 음식의 자취가 남기 마련이었다. 또한 금속은 점토보다 열을 잘 전달하므로 음식을 효율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큰 장점은 불에 바로 올려도 열 충격으로 갈라지거나 이가 빠질 염려가 없었다는 점이다."(44) 18세기 이후 구리가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영국에서는 구리 팬이 널리 사용되었다. "구리는 훌륭한 열 전도체이다. 냄비와 팬에 쓰이는 금속 중 구리보다 더 열 전도율이 높은 물질은 은뿐이다. 그러나 순수한 구리는 산성 음식과 닿으면 독성물질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리 조리 기구에 중성 주석을 얇게 입혔지만, 시간이 흐르면 주석이 닳아서 밑의 구리가 드러났다. 18, 19세기 요리책에는 "정기적으로 팬에 다시 주석을 입혀라"는 조언이 자주 등장한다."(60)


"칼과 음식의 이야기는 점점 더 날카롭고 강하게 변한 절단 도구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가 그 연장의 위태로운 폭력성을 어떻게 관리했는가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77) "중세와 르네상스 유럽에서 사람들은 어디든 자기 칼을 가지고 다녔고, 식사할 때 그것을 꺼내 썼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용 식사용 칼을 칼집에 담아 허리띠에 매달고 다녔다. 남자의 허리띠에 매달린 칼은 적을 방어하는 데에는 물론이거니와 음식을 자르는 데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칼은 요즘의 손목시계처럼 도구인 동시에 의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남의 칫솔로 이를 닦지 않듯이 당시에는 남의 칼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손목시계처럼 습관적으로 차고 다녔기 때문에 아예 몸의 일부가 되어, 종종 차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6세기의 문헌('성 베네딕투스의 계율')은 수도사들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허리띠에서 칼을 풀라고 상기시킨다. 자다가 자기 칼에 찔리면 안 되니까."(81)


"최초의 금속 칼은 청동기시대(기원전 약 3000~700년)에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청동은 아주 날카롭게 벼리기에는 너무 부드러워서 칼날로서는 불량한 재질이다. 청동으로 좋은 칼을 만들기 어려웠다는 점은 청동기시대에도 석기 절단 도구가 계속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철기시대야말로 최초의 진정한 칼의 시대였다." "그러나 부엌칼의 재료로서는 철도 이상적이지 않았다. 청동보다는 단단해도 쉽게 녹이 슬어서 음식 맛을 버렸다. 아주 날카롭게 날을 세우기가 어렵다는 문제도 여전했다. 위대한 돌파구는 강철이었다." "강철이란 철에 탄소를 소량 섞은 것이다. 무게로 따져서 0.2~2퍼센트 사이로 섞는다. 적은 양이지만 그것이 차이를 빚는다. 강철이 날카롭게 벼려질 만큼 단단하면서도 갈리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단단하지는 않은 것은 강철 속 탄소 덕분이다."(83-4)


"중국인이 무쇠를 알게 된 것은 기원전 500년경이었다. 무쇠는 청동보다 싸게 생산할 수 있었고, 큼직한 금속에 나무 손잡이를 단 칼을 만들 수 있었다. 중국 부엌칼은 무엇보다도 검소한 농민 문화의 산물이었다. 사람들은 그 칼로 재료를 작게 썰어서 한 접시에서 모든 재료의 맛이 어우러지게 했다. 재료를 작게 썰면 이동식 화로와 같은 불 위에서 더 빨리 익었다. 중국 부엌칼은 모든 재료를 작게 썰고 재빨리 익히고 낭비하지 않음으로써 부족한 연료를 최대한 활용하게끔 하는 절약의 도구였다."(89) 중국 부엌칼의 또다른 중요한 능력은 먹는 사람이 칼질할 필요가 없게 해주는 점이다. 중국에서 식사용 나이프는 불필요할뿐더러 조금 역겨운 것으로 간주된다. 식탁에서 음식을 써는 것은 푸주한의 일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부엌에서 칼이 제 역할을 다했다면 먹는 사람은 균일한 음식 조각들을 젓가락으로 집기만 하면 된다. 부엌칼과 젓가락은 완벽한 공생관계이다. 부엌칼로 썰고, 젓가락으로 먹는다."(91)


"유럽에서 칼질의 최고봉은 요리사가 아니라 궁정의 카버(carver)가 수행했다. 카버는 신사숙녀의 식탁에서 고기를 썰어주는 직업이었다. 중국 부엌칼은 모든 날재료를 가급적 비슷한 모양으로 썰었지만, 중세 카버는 이미 조리된 음식을 다루었다. 통째 로스팅된 동물을 종류마다 특수한 칼로 특수한 방식으로 썬 뒤 특수한 소스와 함께 내놓는 것이 카버의 일이었다." "카버가 따르는 규칙은 상징과 신호의 세계였다. 동물마다 고유한 논리가 있으며 해체도 그에 따라야 했다. 카빙(carving) 칼은 사냥 무기와 연관성이 있었다. 카빙의 요점은 사냥 전리품을 엄격한 위계에 따라 해체함으로써 그 동물이 잡힌 사냥터 주인의 위세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카버가 가장 유념할 일은 영주가 연골, 껍질, 깃털 등 소화가 어려운 부분을 먹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 부분을 도려내는 것 외에는 카버가 음식을 더 썰어주거나 하지 않았다. 영주에게도 전용 나이프가 있었으므로 직접 고기를 썰어 먹었다."(92-3)


"로스팅은 가장 오래된 조리법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로스팅은 날재료를 불에 직접 넣는 것에 불과하다." "로스팅 기술은 건축 기술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농업보다도 오래되었다. 끓이는 데에 쓸 토기의 발명, 굽는 데에 쓸 오븐의 발명보다는 200만 년 가까이 앞선다." "음식을 익히면 대체로 소화가 더 쉬워지고 영양소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인류는 익힌 음식을 발견함으로써 뇌 성장에 투입할 잉여 에너지를 얻었다."(111-2) "영국인이 로스트 비프를 편애한 것은 기본적으로 취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자원의 문제이기도 했다. 영국 요리사가 커다란 동물을 커다란 불꽃으로 굽기로 결정한 데에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영국에 땔나무가 풍성했던 탓도 있었다." "영국의 로스트 비프는 울창한 삼림지를 반영했고, 가축을 놓아 먹일 풍성한 초지를 반영했다. 영국인은 맹렬하게 타는 불길로 동물을 통째 구우면서 고기가 입맛에 맞게 익을 때까지 마음껏 장작을 던져넣을 수 있었다."(119-20)


"불꽃에는 온갖 위험과 매연이 따랐지만, 그래도 그것은 가정의 상징이었다. 1830년대 미국에 스토브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불을 감추는) 그 물건을 미워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이면 영국도 미국도 폐쇄형 레인지, 즉 '키치너(kitchener)'가 중산층 부엌에서 첫손가락에 꼽는 필수품이 되었다. 요리사는 불꽃 대신 기구를 중심에 두고 부엌을 조직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폐쇄형 레인지의 갑작스런 인기는 단순히 유행에 따른 현상만은 아니었다. 산업혁명의 재료인 석탄과 철이 이끈 현상이기도 했다. 요리용 스토브가 갑자기 유행한 것은 사람들이 럼퍼드의 글을 읽고 개방형 화덕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 아니라 시장에 값싼 무쇠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특허품 레인지는 철물업자의 꿈이었다. 거대한 철 덩어리에 갖가지 철제 부속품까지 딸려 방출할 기회였으니까. 새 모델이 연달아 등장하는 현상은 보너스였다."(134-6)


"가스 레인지는 석탄 레인지에 비해서 더 깨끗하고 쾌적하고 쌌다. 한 추정에 따르면, (19세기) 당시 중산층 가정이 지출한 요리용 석탄 비용은 하루에 약 7페니에서 1실링이었던 데에 비해 가스는 약 2.5페니였다. 그러나 가스의 진정한 매력은 일거리가 준다는 점이었다." "아침을 준비하는 것 같은 간단한 일도 옛 방식에 비해서 '시간과 주의'가 훨씬 덜 들었다."(140) "전자 레인지는 로스팅을 할 수 없고 빵도 구울 수 없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일을 다 해내는 조리 기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로스팅을 못 한다'고 전자 레인지를 비난하는 것은 너무 뜨거워서 커스터드를 만들 수 없다고 빵 굽는 오븐을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자 레인지의 진정한 단점은 기구 자체가 아니라 사용방식이다. 전자 레인지는 안타깝게도 전후 간편식의 시대에 시장에 등장했다. 1989년 영국 시장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자 레인지의 가장 흔한 용도는 조리가 아니라 '다시 데우기'였다."(147)


"훌륭한 요리는 정밀한 화학 작업이다. 정말 훌륭한 식사와 그저 그런 식사의 차이는 불과 30초와 소금 4분의 1 티스푼에 달렸을 수도 있다. 레시피는 요리를 재현 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재현 가능성은 어떤 실험을 다른 독립된 연구자가 정확하게 반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요리사의 작업 환경에는 과학자가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외래 변수들이 존재한다. 불안정한 오븐 온도, 교체된 재료, 손님들의 입맛이 각양각색이라는 점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153-4) 재료에 따라 측정값이 들쑥날쑥한 "미국의 컵 계량법은 도량형의 역사라는 큰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과거에는 명료한 측정 표준의 부재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그리고 컵 계량법은 더 폭넓은 체계에 포함되는 한 요소였는데, 그 환경에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지라고 할 만했다. 오늘날의 혼란은 모두 중세 영국에서 기인했다."(159)


"18세기 말, 중세 도량형의 혼돈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다양하게 등장했다. 프랑스에서는 혁명 이후 1790년대부터 미터법이 정착되었다. 미터는 북극점과 남극점을 잇는 가상의 선, 즉 자오선의 길이를 측정한 과학자들의 탐험 결과에 바탕을 둔 단위였다. 1미터는 자오선의 100만분의 1로 정의되었다." "1795년 제르미날 18일의 법은 리터, 그램, 미터라는 새로운 단위를 공포했다." "한편 영국은 1824년에 행동에 나섰다. 이 시점에서 프랑스의 선례를 쫓아 완벽한 미터법을 추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불과 얼마 전에 전쟁을 마친 적국이었으니까." 새 영국식 갤런은 "정해진 온도와 압력에서 물 10파운드가 차지하는 부피"로 정의되었다. 1836년 미국 의회는 "새 영국식 갤런을 도입하는 대신 옛 체계에서 가장 많이 쓰였던 두 갤런을 고수하기로 했다. 건량에는 윈체스터(혹은 옥수수) 갤런을, 액량에는 퀸앤(혹은 포두주) 갤런을 쓰는 방식이었다."(160-2)


# 영국은 공식적으로 1969년 미터법 국가에 합류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미터법을 채택하지 않은 세 나라 중 하나이다. (나머지 둘은 라이베리아와 미얀마)


"시간 단위는 공통의 지식에 의존했다. 사람들은 성당에서 기도를 소리 내어 읊었기 때문에 기도를 어떤 빠르기로 암송해야 하는지 누구나 잘 알았다. "주기도문을 세 번 외울 동안 소스를 끓이면서 저어라", "주기도문을 세 번 외울 동안 육수를 졸여라"라고 하면 다들 무슨 뜻인지 알았다." "시간은 기도로 쟀다면, 온도는 통증으로 쟀다. 오븐의 열을 확인하려면 손을 안에 넣었다." 또는 "흰 종잇조각을 오븐 바닥에 놓았을 때 종이가 띠는 색깔로 파악했다. 종이 한 조각을 오븐에 넣고 문을 닫는다. 종이에 불이 붙으면 너무 뜨거운 것이다. 10분 뒤에 또 한 조각 넣는다. 타지 않고 까맣게 그을리면 그래도 여전히 너무 뜨거운 것이다. 또 10분 뒤에 세 번째 조각을 넣는다. 불붙지 않고 갈색으로 그을리면, 이제 고온에 굽는 작은 패스트리에 글레이즈를 입히기에 알맞은 시점이었다. 그것을 '진갈색 종이 열'이라고 불렀다." "이런 우왕좌왕은 20세기에 온도계가 내장된 오븐이 등장하면서 일거에 사라졌다."(176-7)


"근대 이전에는 많이 가공한 음식이야말로 노력이 많이 들어간 음식이었다. 교황과 왕, 황제와 귀족은 많이 씹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절구로 곱게 간 페이스트를 기대했다. 부잣집 부엌에서는 패스트리와 파스타를 훤히 비쳐 보일 때까지(즉 누군가의 팔이 아플 때까지) 얇게 밀었다. 소스는 점점 더 고운 체와 천으로 여러 번 걸렸다. 밀가루도 조리와 리넨으로 걸렸다. 견과는 먼지처럼 잘게 빻은 뒤 고운 설탕과 함께 비스킷을 구웠다." "훗날 르네상스 시대에는 음식 가공이 일종의 연금술로 간주되었다. 물질을 거르고 거르고 또 걸러서 재료의 정수 혹은 핵심만 남기겠다는 욕구였다. 그러나 우리는 갈고 빻는 기술을 살펴볼 때, 산업사회 이전 노동의 문제와 그 패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부자들은 정제한 음식에 많은 노동이 수반되는 것을 알면서도─지쳐 떨어지는 사람의 수로 판단한다─감내하고 선호했다기보다, 오히려 많은 노동이 수반되기 때문에 선호했다."(192-3)


"거품기 광품은 미국의 요리 역사에서 공기를 잔뜩 주입한 달콤한 요리가 점잖은 식탁에 오른 시기와 맞물렸다." 스노, 케이크, 머핀, 와플, 머랭 등 "이런 음식에는 모두 공기를 잔뜩 불어넣은 달걀이 쓰였다. 크림화한 노른자, 솜털처럼 부풀린 흰자. 주부의 평판은 그런 요리가 성공적으로 부푸느냐에 좌우되곤 했다. 도버든 다른 종류든 거품기를 써서 폭신하게 부풀린 케이크는 주부의 평판을 부풀렸다."(209) "미국의 거품기 열풍은 한낱 허깨비였다. 그것은 노동을 덜어주는 기구가 아니었다. (구식 거품기인) 프렌치 휩이 대부분의 특허품보다도 팔을 더 적게 쓰면서 같은 일을 해냈으니까. 그것은 노동과 시간을 덜어준다는 망상에 가까웠다. 피로에 대한 치료제가 아니라 위약僞藥을 제공했다." "거품기 열풍의 진정한 의미는 따로 있었다. 마침내 요리사들이 지친 팔에 저항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팔은 전기 믹서가 등장하고서야 쉴 수 있었다."(211-2)


"숟가락은 그것을 둘러싼 문화를 비추는 거울이다. 세상에는 포크를 주로 쓰는 문화도 있고 젓가락을 주로 쓰는 문화도 있지만,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문화는 없다. 그러므로 다양한 숟가락 형태는 여러 문화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준다."(231) "나이프, 포크, 숟가락 사용법은 예절이라는 더 넓은 문화와 관습에의 순응이라는 더 큰 문명의 일부였다. 틀린 포크를 쓴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는 있었다. 요컨대,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식기 사용법의 유행은 빠르게 바뀌었고, 한때 관습이었던 행동이 10년 뒤에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변하곤 했기 때문이다."(237-8) "포크는 17세기까지도 이상한 물건으로 인식되었는데, 이탈리아만은 예외였다. 왜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지역보다 앞서 포크를 채택했을까?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파스타."(241)


"젓가락이 중국 전역에서 보편적인 식사법이 된 것은 대충 한나라(기원전 206~기원후 220) 때였다."(246) 일본에는 "젓가락 공유에 대한 터부도 있다. 전통 신앙인 신토神道에서는 무엇이 되었든 부정하고 불결한 것을 꺼린다. 남의 입에 들어갔던 물건에는 씻으면 사라지는 세균만이 아니라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그 사람의 일부가 묻어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모르는 사람의 젓가락을 쓰는 것은 설령 깨끗하게 씻었더라도 영적으로 불결한 행위이다." "와리바시, 즉 싸구려 나무로 만들어서 손님이 직접 반으로 갈라 쓰는 일회용 젓가락의 유행은 그 점에서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와리바시는 식사 기술의 수용이 간혹 기능보다 문화에 좌우된다는 명제에 대한 좋은 예이다." "나이프와 포크의 문화, 그리고 젓가락의 문화는 언뜻 느끼기보다는 공통점이 많다. 두 문화는 함께 식사할 때 내심 상대를 '야만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도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제3의 집단을 멸시한다는 점에서 한마음이다."(249-51)


"냉장고는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여러 기술의 집합체였고, 그 덕분에 식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탄생했다. 냉장고는 단순히 사소한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서 뭔가를 차게 식히는 도구로도 쓰였지만 동시에 음식을 안전하게 보존하여 더 오래 더 먼 곳에서도 먹을 수 있게 하는 기술이었다. 냉장고는 음식이 일상에 끼어드는 방식을, 즉 우리가 음식을 구하고 조리하고 먹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냉장고가 있으면 요리사는 당장 먹어치울 수 없는 음식을 식초에 담그거나 소금에 절이거나 캔에 밀봉할 필요가 없었다. 냉장고는 부자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도 음식 섭취의 엄격한 계절성을 잊게 했다. 냉장고는 음식의 종류를 바꾸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전역의 사람들이 연중 신선한 고기, 우유, 채소를 먹게 되었다. 냉장고는 음식을 구입하는 방식도 바꾸었다. 냉장고가 없으면 슈퍼마켓도 없고, '주 1회 쇼핑'도 없고, 비상시에 대비해 냉동실에 음식을 쟁여둘 일도 없다."(263-4)


"최첨단 부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장비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현대적 주방에 진열된 가장 큰 기술은 부엌이라는 공간 자체임을 잊는다. 개별 부엌 도구는 오래된 것이 많다. 폼페이에도 우리의 것과 비슷한 냄비, 팬, 깔때기, 체, 칼, 절구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부엌과 비슷한 것은 없었다.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에 대부분의 가정에는 요리용으로 따로 마련된 방이 없었다."(314) "20세기의 위대한 변화는 새로운 중산층 부엌의 탄생이었다. 직접 요리도 하고 먹기도 할 사람들을 위한 부엌이 탄생한 것이다." "켈로그는 부엌이 온 가족의 행복을 낳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부엌은 가정의 중심이었다. 요즘 우리에게는 이 말이 너무나 자명하게 느껴져서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기조차 어렵다. 음식은 늘 삶에 필요한 요소였지만, 음식을 만드는 방은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야 현재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늘 요리를 해왔지만, '이상적인 주방'의 개념은 상당히 현대적인 발명품이다."(319-20)


실용적인 부엌 설계법은 1940년대에 쇠퇴하고 "이상적 주방은 사람들이 평소에 영위하는 생활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부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척하게 해주는 부엌으로 바뀌었다."(324) 그러나 "아무리 빈틈없이 설계된 현대적인 부엌이라도 그곳에서 우리는 과거의 도구와 기법에 의지한다. 웍으로 오징어와 채소를 볶을 때, 혹은 호리병 모양의 호박인 버터넛스쿼시와 홍고추를 넣은 링귀네를 만들기 위해서 반짝거리는 집게를 쥘 때, 당신은 불의 변형력을 이용하여 재료를 더 맛있게 만든다는 아주아주 오래된 활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요리는 단순한 재료의 혼합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기술이 만든 결과물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식사에 들어간 재료가 하나 더 있다. 애초에 요리를 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부엌은 우리가 요리할 때에만 생기를 띤다. 기술의 진정한 추진력은 그것을 사용하려는 욕망이다."(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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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민중사 2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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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가운데 급진주의 작가 랜돌프 본은 "전쟁은 국가의 건강한 상태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유럽 국가들이 1914년에 전쟁을 시작함에 따라, 각국 정부는 번창하고 애국심이 꽃을 피웠으며 계급투쟁은 잠잠해졌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젊은이들이 종종 100미터의 땅이나 한 줄의 진지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죽어갔다. 아직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있던 미국에서는 국가의 건강에 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가 성장하고 있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어디에나 있는 듯 보였다. 계급갈등은 격렬했다."(11) 1914년 미국은 경제불황에 시달렸지만 1915년에 이르면 연합국(대부분 영국)의 군수품 주문이 경제를 자극하면서 1917년 4월까지 20억 달러 이상의 상품이 연합국에 팔려 나갔다. 호프스테터의 말처럼, "미국은 전쟁과 번영의 숙명적인 결합 속에서 연합국들과 이해를 같이하게 됐다."(16)


미국의 선전포고를 "미국 국민에 대한 범죄"라고 규정한 사회당은 1917년 지방선거에서 선전과 애국심의 물결에 맞서 20~30퍼센트에 달하는 득표율을 올리며 분전했지만, "1920년대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진정된 것처럼 보였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파괴됐고 사회당은 분열됐다. 파업은 무력으로 분쇄됐고 경제는 대중의 반란을 방지하기에 충분한 딱 그만큼의 사람들에게만 호전되고 있었다. 1920년대에 연방의회는 이민 할당수를 설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위험하고 불온한 이민자의 물결(1900~1920년 사이에 1,400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민 할당제는 앵글로색슨족에 유리하고 흑인과 황인종을 배제했으며 라틴계, 슬라브족, 유대인의 이민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KKK단이 1920년대에 부활되어 북부로 확산됐다. 1924년에 이르러 KKK단은 45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게 됐다. 어디서나 벌어지는 폭도의 폭력과 인종적 증오 앞에서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무기력해 보였다."(51)


대공황 극복의 임무를 부여받고 1933년 대통령에 당선된 루즈벨트의 개혁은 앞선 입법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개혁은 위기를 극복하고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재조직하는 동시에 루즈벨트 행정부 초기에 성장한 심상치 않은 자생적인 반란─소작농과 실업자들의 조직화, 자조self-help 운동, 몇몇 도시에서 벌어진 총파업─을 저지한다는 두 가지 절박한 필요를 충족시켜야 했다." 체제 자체를 수호하기 위해 제정된 "전국부흥법National Recovery Act(NRA)은 경영자와 노동자, 정부가 동의한 일련의 규약에 의해 물가와 임금을 고정시키고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경제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신임 행정부가 초기 몇 달 사이에 설치했던 또 다른 기구인 농업조정청Agricultural Adjustment Administration(AAA)은 농업을 조직화하려는 시도였다. 전국부흥법이 거대기업을 선호한 것처럼 농업조정청은 대농들에게 유리했다."(68-70)


"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Tenessee Valley Authority(TVA)는 이례적으로 정부가 산업에 손댄─홍수를 조절하고 테네시 강 유역에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정부 소유의 댐과 수력발전소 망을 구축했다─것이었다.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공사는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소비자들에게 값싼 전력을 공급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사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도 했다. 그러나 뉴딜의 경제 조직화의 주된 목표는 경제를 안정화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목표는 반란이 현실적인 혁명으로 전환되지 않기에 충분할 만큼 하층계급들을 돕는 것이었다."(70) "전국노동관계위원회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를 설립하도록 한 1935년의 와그너법안Wagner Act이 통과된 것은 노동자 소요에 직면해 체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의 파업 물결(주로 사업장이나 공공시설에 들어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앉아 있는 연좌파업 전술을 구사)은 그런 필요성을 더욱 가중시켰다."(84)


제2차 대전 기간 동안 제정된 미국의 여러 정책 가운데 하나는 파시즘의 복사판에 가까운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1942년 2월에 대통령령 9066호에 조용히 서명함으로써 영장이나 기소절차, 심문과정 없이도 태평양 연안지역의 모든 일본계 미국인─11만 명의 남자, 여자, 어린이─을 체포해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소개疏開시키고 내륙의 수용소로 이송해 감옥과 동일한 조건 아래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군에 부여했다."(112) "애국심과 전쟁 승리에 대한 전면적인 헌신이라는 압도적인 분위기가 넘쳐났고 미국노동연맹과 산업별조직회의가 무파업서약no-strike pledge까지 했지만, 기업의 이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데 반해 임금은 동결되는 데 좌절한 이 나라의 많은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전쟁 기간에 1만 4,000회의 파업이 벌어져 총 677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어떤 시기보다도 더 많은 수치였다."(114)


"전쟁이 통제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사실은 여러 정부가 체득한 오래된 교훈이었다. GE 회장 찰스 E. 윌슨은 전시의 경제 상황에 너무나 만족한 나머지 "영구전시경제Permanent war economy"를 위한 기업과 군부의 지속적인 동맹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전쟁 직후, 전쟁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동원해제와 군비축소에 찬성하는 듯이 보이자 트루먼 행정부(루즈벨트는 1945년 4월에 사망했다)는 위기와 냉전의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 소련과의 경쟁은 현실이었다."(127-8) "전후 10년 동안 미국은─혁명 억압을 목표로 하는 대외정책을 지지할 수 없었던 급진주의자들은 배제하면서─냉전과 반공 정책을 둘러싸고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공화당과 민주당의 국민적 합의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0년대, 자유주의-보수주의 합의의 형성을 가속화시킨 사태가 벌어졌다─트루먼이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채 벌인 한국전쟁이 그것이었다."(130-2)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위스콘신 출신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는 트루먼보다 훨씬 더 나갈 수 있었다."(135) "1950년에 공화당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나 '공산주의 전선'임이 드러난 조직을 등록시키기 위한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을 발의했을 때, 자유주의적 상원의원들은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1947년에 트루먼은 충성에 관한 대통령령을 반포, 법무부로 하여금 "전체주의나 파시즘, 공산주의, 정부전복의 성격을 갖거나 ····· 위헌적인 수단으로 미국의 정부형태를 바꾸려 하는 것으로" 확인된 조직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했다." 국가적인 반공 분위기를 고조시킨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50년 여름에 있었던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이설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기소였다."(138-9) "혁명적인 정부─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아니면 반反유나이티드 사 정부든─를 저지하거나 전복시킨다는 민주당-공화당, 자유주의-보수주의 합의는 1961년에 쿠바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150)


# 피그스 만 침공


한편 "1954년에 대법원은 1890년대 이래 고수해 왔던 '분리되지만 평등하다'라는 원칙을 깨뜨렸다.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공립학교에서의 인종분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련의 사건을 대법원에까지 가져왔고, '브라운대 교육위원회 사건Brown v. Board of Education'에서 이제 대법원은 초등학교 학생의 인종분리가 "열등감을 만들어 ····· 학생들의 머리와 가슴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언급했다."(171) 1955년 말, 앨라배마의 주도 먼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가 시내버스 승차거부 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정부의 탄압과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먼고메리의 흑인들은 승차거부를 계속했고, 1956년 11월, 대법원은 현지 버스 노선의 인종분리가 불법이라고 판결했다."(173) "1965년 존슨 대통령과 의회는 훨씬 더 강력한 투표권법Voting Rights Law을 발의, 통과시켜 이번에는 연방정부가 현장에서 유권자 등록과 투표의 권리를 보호하도록 했다."(184)


# 흑인 민권 운동

1. 앉아있기 운동sit-ins : 식당의 백인 전용 좌석에 앉기

2. 자유승차단Freedom Rides’ 운동 : 버스를 타고 남부 전역을 돌면서 인종분리 관행에 도전하려고 시도


"1946년 10월에 프랑스가 베트남 북부의 항구도시 하이퐁Haiphong을 폭격함으로써 누가 베트남을 통치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베트남독립동맹운동과 프랑스 사이에 8년간 이어질 전쟁이 시작됐다."(210) 그러나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프랑스가 1954년 결국 철수하자 "미국은 베트남의 통일을 저지하고 남베트남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안정시키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미국은 얼마 전까지도 뉴저지에 살고 있던 응오딘디엠Ngo Dinh Diem이라는 전직 베트남 관리를 국가수반으로 앉히고 예정된 통일선거를 실시하지 말라고 부추겼다. 1954년 초에 열린 미 합참회의 비망록은, 정보부의 평가에 따르면 "자유선거에 기반을 둔 해결이 이루어지면 연합3국(Associated States,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제네바회담으로 만들어진 인도차이나의 세 지역)을 공산주의의 수중에 빼앗기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언급했다."(212)


"1968년 가을, 리처드 닉슨이 베트남에서 손을 떼겠다고 약속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닉슨은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1972년 2월에 이르면 15만 명도 안 되는 병력만이 남게 됐다. 그러나 폭격은 계속됐다. 닉슨의 정책은 '베트남화Vietnamization'─사이공 정부가 미국의 자금과 공군력을 이용해서 베트남 지상병력으로 전쟁을 계속 이어나간다는 정책─였다. 닉슨은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가장 평판이 나쁜 측면, 즉 이국만리의 땅에서 미군 병사들이 교전을 벌이는 상황만을 종식시켰던 것이다."(231-2) "반전운동은 닉슨 대통령이 캄보디아 침공을 명령한 1970년 봄에 정점에 달했다. 그해 5월 4일, 오하이오 주 켄트 주립대학에서 학생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위해 모여들자, 주 방위군이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학생 4명이 살해됐다. 한 명은 평생불구가 됐다. 400개 대학 학생들이 이에 항의해 동맹휴업을 벌였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학생 총파업이었다."(244-5)


여성 운동에서는 낙태가 주된 쟁점이었다. "1968년과 1970년 사이에 20여개 주에서 낙태를 금지하는 법률을 폐지하기 위한 법적 투쟁이 시작됐고, 정부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론은 점점 강력해졌다." "마침내 1973년 초에 대법원은, 각 주는 임신 마지막 3개월 동안에만 낙태를 금지시킬 수 있으며, 4에서 6개월일 때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낙태를 규제할 수 있고, 임신 3개월까지는 임산부와 의사가 결정권을 갖는다고 판결했다(로 대 웨이드 판결Roe v. Wade, 도 대 볼튼 판결Doe v. Bolton)."(279) "1960년대의 여성운동이 미친 가장 심대한 효과는 흔히 전국 곳곳의 가정에서 모인 '여성집단들'에서 이루어진 '의식고양consciousness raising'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열등함에 대한 거부, 자기에 대한 확신, 자매애의 결속, 어머니와 딸의 새로운 유대 등을 뜻했다."(281)


1970년대 초반, 체제는 지배능력을 잃은 듯 보였다. "정부와 기업들에 대해 이처럼 전국적으로 적대감이 팽배한 이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5만 5,000명의 사상자와 도덕적 수치, 정부의 거짓말과 잔학행위를 드러낸 베트남 전쟁 때문이었다. 이에 더해 '워터게이트'라는 단 한 단어로 알려지게 되면서─미국 역사상 초유의 일인─1974년 8월의 리처드 닉슨의 대통령직 사임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낳은 추문으로 인해 닉슨 행정부가 정치적 망신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331-3) "닉슨은 제거하되 체제는 유지하라는 구호가 제기됐다." "포드가 대통령에 오른 뒤 처음 한 일 가운데 하나는 닉슨을 사면함으로써 혹 있을지도 모르는 형사처벌로부터 그를 보호해준 것이었다." "워터게이트 침입사건 같은 기괴한 장난은 (미디어에서) 충분히 다루어졌지만, 현재진행형인 사례들─미라이 학살, 캄보디아에 대한 비밀 폭격, 연방수사국과 중앙정보국의 활동 등─은 최대한 스쳐 지나가듯 보도됐다."(340)


"체제는 1975년에 복잡한 공고화 과정을 겪었다. 이 과정에는 (캄보디아에 억류된 미국 선박을 구출한다는 빌미로 군사작전에 나섰던) 매이어게스 호 사건처럼 국내외에서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과거 방식의 군사행동이 포함됐다. 또한 환멸을 느낀 대중들에게 체제가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교정할 수 있다는 만족감을 줄 필요도 있었다. 공개적인 조사를 통해 특정한 범인들을 찾아내는 한편 체제 자체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전형적인 방법이었다."(352) "헌팅턴은 "미국이 세계질서 체제의 헤게모니 강대국이었던" 사반세기가 종언을 고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았다. 그는 '민주주의의 과잉'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대에 대해 바람직한 한계들"을 제시했다. 헌팅턴은 이 모든 것을 미국의 미래에 극히 중요한 한 조직에 보고하고 있었다. 삼각위원회는 1973년 초에 데이비드 록펠러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조직한 기구였다."(361-2)


"레이건의 승리와 8년 뒤 조지 부시의 당선은 카터 집권기의 희미한 자유주의조차도 갖고 있지 않은 기존 체제의 또 다른 부분이 국가를 책임지게 됨을 뜻했다." "10여 년 간의 레이건-부시 집권기는 온건한 자유주의를 결코 넘어서지 않았던 연방 사법부를 압도적으로 보수적인 기관으로 변화시켰다. 1991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레이건과 부시는 837명의 연방 판사 가운데 절반 이상을 교체했고, 대법원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수의 우익 판사를 임명했다." "레이건-부시 시기에 렌퀴스트의 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약화시키고, 사형을 부활시키며, 경찰의 권한에 대해 피구금자의 권리를 축소하고 연방의 지원을 받는 가족계획 병원의 의사들이 여성들에게 낙태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가로막는 등의 일련의 판결을 내렸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립학교 교육비를 부담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교육은 '기본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383-4)


"1986년에 베이루트에서 발간되는 한 잡지에 실린 기사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이 이란에 무기를 판매했고, 그 대가로 이란은 레바논의 과격파 회교도들에 의해 억류되어 있던 인질을 석방하기로 약속했으며, 미국은 이 무기 판매로 생긴 수익금을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에 제공, 무기를 구입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란-콘트라 스캔들 전체가 미국의 기존 체제가 갖고 있던 이중적인 방어선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가 됐다. 첫 번째 방어선은 진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만약 진실이 폭로될 경우 두 번째 방어선은 조사는 하되 너무 깊숙이 조사하지는 않는 것이다. 언론은 사건을 공표하기는 하지만 문제의 핵심에까지 다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백악관 참모진은 레이건과 부시의 관련성을 용의주도하게 은폐했다. 이것은 고위 관리가 부하직원들을 방패막이 삼아 자신의 관련성을 그럴듯하게 부인할 수 있는 정부의 익숙한 수단인 '그럴듯한 부인plausible denial'을 생생하게 보여준 사례였다."(403-5)


"미국의 권력이 여전히 전 세계에 뻗치기를 바랐던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를 괴롭힌 것은 바로 베트남 전쟁의 유산─절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그것은 끔찍한 비극일 뿐만 아니라 싸우지 말았어야 했던 전쟁이라고 느낀 것─이었다." "대통령에 오른 부시는 이른바 베트남 증후군─지배체제가 바라는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극복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부시는 1991년 1월 중순에 이라크에 대한 공중전을 개시하면서 전국적인 반전운동이 전개되기 전에 신속하게 전쟁을 끝낼 수 있도록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했다."(458-9) "1989년에 소비에트 블록이 해체된 뒤 미국에서는 국방예산에서 수십억 달러를 절감해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위한 사회복지에 사용하자는 '평화 배당금'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페르시아 만 전쟁은 정부가 그런 논의를 저지하는 손쉬운 구실이 됐다." 부시 행정부의 한 각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담에게 빚을 진 셈이다. 그는 우리를 평화 배당금으로부터 구해줬다."(469)


클린턴은 자신이 '법과 질서'의 문제에 관해 강경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부단히 애썼다. "하원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고 클린턴 역시 열렬히 지지한 1996년의 '범죄 법안Crime Bill'은 범죄문제에 대해 예방이 아니라 처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법안은 사형을 모든 종류의 형사범죄로 확대시켰으며 교도소 신축에 80억 달러를 할당했다."(504) "양대 정당은 불법적인 이민자뿐만 아니라 합법적인 이민자에 대해서도 복지혜택(식품교환권, 노인 및 장애인 수당)을 박탈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클린턴 역시 이에 서명했다." 1996년 초, 의회와 대통령이 힘을 합쳐 통과시킨 '테러방지와 효율적 사형집행에 관한 법Antiterrorism and Effective Death Penalty Act'은 언제 어떤 범죄를 저질렀든 간에 유죄판결을 받은 이민자를 추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법은 토박이 미국인인 티모시 맥베이가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 청사를 폭파한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통과되었다.(505-6)


"클린턴 행정부의 대외경제정책은 '시장경제'와 '민영화'에 강조점을 뒀다. 그 결과 구 소비에트권 국민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비효율적이고 억압적인 과거 정권 치하에서 받아 왔던 사회복지를 박탈당한 채 이른바 '자유'경제에서 혼자 힘으로 삶을 꾸려 나가야 했다." "'자유무역'의 구호는 클린턴 행정부의 핵심 목표가 됐고, 의회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합세한 가운데 멕시코와의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NAFTA)을 통과시켰다." "자유무역을 지지한다는 미국의 주장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미국 정부는 기업의 이익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인 '국익'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에 종종 무역에 간섭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멕시코의 토마토 재배업자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가로막기까지 했다. 자유무역의 원칙을 훨씬 더 극악무도하게 위반한 사례 가운데 하나로 미국이 이라크나 쿠바에 대한 식품과 의약품의 수송을 허용하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520-1)


2001년 9·11 사태가 벌어지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즉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을 숨겨주는 나라들을 똑같이 다룰 것입니다." "의회는 헌법이 요구하는 선전포고 없이 군사행동에 착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시에게 부여하는 결의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하원에서는 단 한 명─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캘리포니아 출신 바버라 리─만이 반대표를 던졌다."(552-3) 곧이어 "의회에서 통과된 '미국애국자법'은 단순한 혐의만으로도 기소 없이, 그리고 헌법에 규정된 정당한 법 절차에 따른 권리 없이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법무부에 부여했다. 이 법에 따르면 국무장관은 어떤 집단이든 '테러리스트'로 지정할 수 있으며, 그런 조직의 성원이거나 자금을 제공한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 추방할 수 있었다."(5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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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7-0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긴 리뷰 잘 읽었습니다. 다음주에 노동자 연대에서 맑시즘 개최하는데, 거기 북카페에서 이 책 살까합니다. ㅎㅎㅎㅎ 개인적으로 하워드 진을 존경합니다. 미국의 리영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nana35 2018-07-09 13:59   좋아요 0 | URL
직접 읽어 보시면 훨씬 풍부한 내용을 알게 되실 겁니다.
즐거운 공부하세요.

NamGiKim 2018-07-09 11:10   좋아요 0 | URL
맑시즘 끝나고 난 뒤 꼭 읽어야겠습니다.

NamGiKim 2018-08-11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na님께서 쓰신 서평이 제 서평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nana35 2018-08-11 20: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미국민중사 1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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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인디언들의 땅을 강탈했다.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총독 존 윈스럽은 이 지역이 법적으로 '공지空地'라고 선포함으로써 인디언의 땅을 취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땅을 '정복'하지 않았으므로 땅에 대한 '자연권'만 보유할 뿐 '시민권'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자연권'은 법적 효력이 없었다. 청교도들은 또한 성경 시편 2장 8절의 구절에 호소했다. "내게 청하여라. 뭇 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너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그리고 무력으로 그 땅을 빼앗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로마서 13장 2절을 들춰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39) "공간, 즉 땅에 대한 욕구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욕구였다. 그러나 땅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쟁이 지배하는 역사의 야만기에서 이런 인간적인 욕구는 종족 전체를 살육하는 것으로 전환됐다."(43)


"버지니아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옥수수와 수출용 담배를 재배하기 위해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제 막 담배를 경작하는 법을 알아내어 1617년에 영국으로 첫 화물을 보내게 된 때였다. 흑인 노예가 답이었다."(58) "아프리카 각국에는 노예제가 존재했고, 때로는 유럽인들이 이를 근거로 들어 자신들의 노예무역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데이비드슨이 지적하듯이, 아프리카의 '노예'는 유럽의 농노에 더 가까웠다." "이들은 가혹한 노역을 해야 했지만 아메리카로 끌려간 노예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누렸고 노예선과 아메리카 대농장의 인간 가축들과는 전혀 달랐다." "아메리카 노예제를 역사상 가장 잔인한 형태의 노예제로 만든 두 가지 요소가 아프리카에는 없었다. 첫째는 자본주의적 농업에서 기인하는 끝없는 이윤을 향한 광란이다. 둘째는 피부색에 따라 백인은 주인, 흑인은 노예라고 가차없이 구분하고 인종적 증오심을 이용함으로써 노예를 인간 이하의 지위로 떨어뜨린 것이었다."(62-3)


"노예소유주들은 노동력 공급과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복잡하고 강력한 통제체제를 발전시켰다." "노예들은 규율을 배웠으며, '자신의 분수를 알고', 검은색을 종속의 징표로 보며, 주인의 힘을 경외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를 버리고 주인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이라 인식하도록 자신이 열등하다는 사고를 끊임없이 주입받았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된 노동 규율을 부과하고, 노예 가족을 해체시키고, 종교를 통해 마음을 달래주었다. 또한 노예들을 밭에서 일하는 노예와 그보다 조금 더 특권을 누리는 가내노예로 나눔으로써 그들 사이의 연대감을 파괴했다. 마지막으로 법률의 힘과 감독의 직접적인 힘을 통해 태형, 단근질, 수족절단, 사형에 처하는 방법이 필요했다."(77) "새로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흑인반란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식민지 초기에 흑인 노예만큼이나 나쁜 대우를 받고 있던 백인 계약 하인들이 흑인 노예와 손을 맞잡는 일이었다.(80)


"식민지 기간에 북아메리카 해안으로 온 이주민의 절반 이상이 하인이었다. 17세기에는 대부분 영국인이었고 18세기에는 아일랜드인과 독일인이었다. 하인들이 자유를 찾아 달아나거나 계약기간을 끝마치게 됨에 따라 점차 노예가 그들을 대신하게 됐지만, 1755년까지도 여전히 백인 하인이 메릴랜드 인구의 10퍼센트를 차지했다."(97) 식민지 관리당국은 백인 빈민들의 계급적 분노를 해소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즉 동부 해안지대의 비옥한 땅을 독점함으로써 땅 없는 백인들을 서부 변경으로 보내 인디언과 충돌시키고 해안지대의 부자들을 위해 인디언 문제에 대한 완충 역할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며, 한편으로 정부의 보호에 더욱 의존하게 만든 것이다." "엘리트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인디언과 전쟁을 벌여 백인의 지지를 얻고 가난한 백인들을 인디언과 맞서게 만들어, 있을 수 있는 계급 충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더 나았다."(108-9)


"에드먼드 모건은 버지니아 노예제에 관한 주의 깊은 연구에 근거해 인종주의를 흑백 간의 '자연적' 차이가 아니라, 계급적 멸시에서 기인하는 것, 즉 통제를 위한 현실적 장치로 보고 있다." "식민지들이 성장함에 따라, 아메리카 역사를 통틀어 엘리트의 끊임없는 지배를 위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 또 다른 통제기제가 있었다. 큰 부자 및 극빈층과 나란히 소농장주, 독립자영농, 도시 장인들이 성장했고, 이들은 상인 및 농장주들에게 힘을 더해 주는 대가로 작은 보수를 받으면서 백인 극빈층, 흑인 노예, 변경의 인디언 등에 대한 튼튼한 완충 지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런 충성을 물질적 이익보다 훨씬 강력한 무언가로 묶어두기 위해서 1760년대와 1770년대에 지배계급은 놀랄 만큼 유용한 도구를 찾아냈다. 그 도구는 곧 자유와 평등이라는 언어였고, 이를 통해 노예제나 불평등을 종식시키지 않은 채로도 영국에 맞서 혁명전쟁을 수행하기에도 충분할 정도의 백인들을 결속할 수 있었다."(113-4)


# 지배 체제 : 1단계 - 이간질(백인 하인과 흑인 노예), 2단계 - 완충지대(인디언과 이주민, 이주민과 중산층), 3단계 - 이데올로기(자유와 평등)


영국과 식민지 도시의 갈등 속에서 "식민지 도시의 숙련기능공들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었다. 즉 선거구민이 자신들의 대표자를 점검할 수 있도록 하는 대표의회의 공개회합, 입법의사당의 공공방청, 호명투표의 공표 등을 요구했다."(122) 혁명운동 지도층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중요한 전투는 대부분 북부에서 벌어졌으며, 이곳 도시들에서 식민지 지도자들 아래의 백인 주민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지도자들은 숙련기능공을 설득해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숙련기능공들은 일종의 중간계급으로 영국 제조업자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영국에 대항한 싸움에 이해관계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대對프랑스전쟁에 뒤이은 위기에서 일자리를 잃고 굶주리고 있던 가난한 대중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은 영국에 대항하는 이런 군중의 에너지를 이용하려 하면서도 군중이 자신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도록 에너지를 억누르고자 했다."(126-7)


"로열 나인Loyal Nine이라 불린 보스턴의 정치집단은 1765년 8월 인지세법에 항의하는 행진을 조직했다." 이들은 시위대가 인지담당관의 재산 일부를 파괴하며 흥분한 모습을 보이자 자체 무장순찰대를 창설하고 군중들과 선을 그었다. "압도적인 저항 때문에 인지세법이 철회되자 보수파 지도자들은 폭도들과 관계를 끊었다."(128) 곧이어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지자 "영국 의회는 탄압법Coercive Act을 제정, 매사추세츠에서 사실상 계엄령을 실시하면서 식민지 정부를 해체하고 보스턴 항구를 폐쇄했으며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자 이에 반대하는 읍민회의와 대중집회가 열렸다." "보스턴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교신위원회들은 이 집회를 환영했으나 사유재산을 파괴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자유의 아들들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은 코네티컷의 밀퍼드에서처럼 무법상태를 "가장 혐오한다"고 공언했으며, 애너폴리스에서처럼 "공공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경향이 있는 모든 폭동과 불법집회"에 반대했다."(131-2)


1776년 출간된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은 애국적 정서를 모든 계급에게 고무하는 언어를 감동적으로 서술했다. 페인은 상, 하원제를 비난하고 전체 인민을 대표하는 하나의 대의체를 주장하여, 상류층의 우려를 사기도 했지만 "일단 혁명이 진행되자, 하층계급 민중들의 군중행동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점점 더 분명히 했다." "훗날 페인은 헌법 채택을 둘러싼 논쟁 기간 동안 다시 한 번 강력한 중앙정부를 선호하는 도시 장인들을 대표하게 됐다. 페인은 그런 정부가 어느 정도 큰 공동의 이해를 대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혁명이 단합된 민중을 위한 것이라는 신화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135-6) 1776년 독립선언서에 명기된 "정부에 대한 인민 통제, 반란과 혁명의 권리, 정치적 폭정과 경제적 속박 및 군사적 공격에 대한 분노의 언어는 대다수 식민지인을 결속시키고 상호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영국에 반기를 들도록 설득하기에 매우 적합한 언어였다."(138-9)


"영국과의 군사적 충돌 그 자체가 당대의 모든 것을 지배함으로써 다른 문제들을 왜소화시켰고, 사회적으로 중요했던 하나의 싸움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편을 택하게 만들었으며, 독립에 대한 관심이 전혀 분명하지 않은 혁명의 편으로 사람들을 몰아댔다. 지배 엘리트들은 세대를 거치면서─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전쟁이 내부의 문제로부터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사실을 배운 듯하다."(150) 도망간 영국파에게 "몰수한 토지는 혁명의 지도자들에게 이중의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분배됐다. 지도자들과 그 친구들은 부자가 됐고, 새 정부에 대한 폭넓은 지지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소농민에게도 약간의 토지가 분배됐다. 실제로 이것이 곧 새로운 국가가 과거와는 다른 특징이 됐다. 광대한 부를 소유하게 된 이 나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유한 지배계급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며, 동시에 부자와 무산자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중간계급을 충분히 창출할 수 있었다."(158)


찰스 비어드는 <헌법의 경제적 해석>에서 "1787년에 필라델피아에 모였던 55명의 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사고를 언급함으로써 부자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정부를 직접 장악하거나 법률을 제정한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헌법에 적용했다." "그리하여 비어드는 헌법 제정자들의 대부분이 강력한 연방정부를 수립하는 데 어느 정도 직접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음을 알아냈다. 제조업자는 보호관세를, 금융업자는 채무 상황에서 지폐 사용의 중단을, 토지 투기업자는 인디언 토지를 침범할 경우에 보호를, 노예소유주는 노예 반란이나 탈주를 방지할 수 있는 연방의 보장을, 채권소유자는 채권 상환을 위해 전국적 과세를 통해 돈을 조달할 수 있는 정부를 요구하거나 원했다. 비어드는 네 개의 집단, 즉 노예, 계약 하인, 여성, 무산자들은 제헌회의Constitution Convention에 대표를 보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제헌회의는 이들 집단의 이해를 반영하지 않았다."(169)


"<연방주의론> 10호에서 제임스 매디슨은 당파 간 분쟁에 시달리는 사회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의정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쟁은 '여러 불평등한 재산의 분배'에서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재산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는 사회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형성해 왔다." 매디슨의 말에 따르면, 문제는 부의 불평등으로부터 오는 당파간 투쟁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매디슨은 모든 결정을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내림으로써 소수파를 통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179) "헌법은 남부 노예소유주의 이해와 북부 화폐소득자의 이해를 조정한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13개 주를 하나의 거대한 상업시장으로 통합하려는 목적에서 북부의 대표자들은 주간州間 통상을 규제하는 법을 원했으며, 그런 법률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연방의회의 다수표만 획득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남부는 노예무역을 불법화하기 전에 20년의 유예기간을 두는 대가로 이에 동의했다."(181)


인디언들은 때로 마을을 불태우기 전에 온정적으로 말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무력으로만 다루어졌다. 그러나 "독립 전쟁으로 약화된 워싱턴의 민병대는 인디언을 물리칠 수 없었다. 정찰부대가 차례로 분쇄 당하자 워싱턴은 회유책을 쓰려고 했다. 전쟁장관 헨리 녹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디언이 먼저 거주하고 있으므로 땅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1791년 토머스 제퍼슨은 국경 안에 사는 인디언들은 해치지 않을 것이며, 정부는 인디언 땅을 잠식하려고 하는 백인 정착민들을 이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준주를 사들여 영토 규모가 두 배로 되자─이로써 서쪽 국경이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미시시피 강을 건너 로키 산맥까지 확장됐다─제퍼슨은 인디언들이 좀더 좁은 지역에 정착해 농사를 짓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연방의회에 제안했다. 또한 백인과 교역을 시켜 부채를 지게끔 하고 이 부채를 땅으로 상환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228-9)


이러한 상황은 앤드루 잭슨이 1814년의 말편자만곡부전투Battle of Horseshoe Bend에서 대승을 거두어 국민적 영웅이 된 후 바뀌었다. "1814년에 잭슨이 크리크족과 맺은 협정은 새롭고 중대한 사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협정은 인디언들에게 토지에 대한 개인소유권을 부여함으로써 인디언을 서로 분열시키고 토지의 공동소유제를 파괴했으며 일부는 땅으로 매수하고 나머지는 무시해 버렸다─서구 자본주의의 정신을 특징짓는 경쟁과 묵계를 도입한 것이다."(232) "잭슨은 플로리다가 탈주 노예와 약탈을 일삼는 인디언들의 은신처라고 주장하면서 습격을 시작했다. 잭슨의 말에 따르면 플로리다는 미국의 방위에 없어서는 안 될 지역이었다. 이것은 근대 정복전쟁의 고전적인 서문이 된 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1818년의 세미놀 전쟁Seminole War으로 미국은 플로리다를 획득하게 됐다. 학교 교실의 지도에는 "1819년 플로리다 매입Florida Purchase"라고 고상하게 표기되어 있다."(233-4)


"잭슨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주에서 자신들의 영토에 거주하는 인디언에 대해 주의 통치권을 확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이들 법률을 통해 인디언들은 법적 단위로서의 부족이 폐지되고, 부족회의가 불법화되고, 추장의 권한이 사라졌으며, 민병대 및 주세州稅의 의무를 지게 됐지만 투표권 및 소송권,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권리는 갖지 못했다. 인디언 영토는 분할되어 주에서 실시하는 추첨에 의해 분배됐다. 백인들은 인디언 땅에 정착하도록 장려됐다."(239) "1828년에 서부 체로키족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연방정부는 새로운 영토(체로키족이 강제로 쫓겨난 서부의 황량한 땅)를 "미국의 가장 확고한 보증하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 영구적인 고향"이라고 발표했다."(245) 인디언을 서부로 몰아내는 가차없는 이 거짓말의 향연은 훗날 눈물의 행렬Trail of Tears이라고 알려진 1838년 10월 1일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1850년에 통과된 탈주노예법Fugitive Slave Act은 멕시코 전쟁으로 얻은 영토(특히 캘리포니아)를 자유주nonslave state로 연방에 편입시키는 대가로 남부 주들에게 양보한 것이었다. 탈주노예법으로 인해 노예주들이 전에 노예였던 사람을 되찾거나 탈주 노예라고 지목한 흑인들을 그냥 잡아가는 일이 용이해졌다."(319) "노예무역을 종식시키는 법률의 시행에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면서 탈주 노예를 노예 신분으로 되돌리도록 규정한 법령은 엄격하게 시행한 것은 다름 아닌 연방정부였다. 앤드루 잭슨 행정부하에서 남부와 합작해 노예폐지론 간행물이 남부주들로 반입되지 못하게 한 것 역시 연방정부였다. 1857년에 노예 드레드 스코트는 인간이 아니라 재산이므로 자유를 위해 소송할 수 없다고 선고한 것 또한 다름 아닌 합중국 대법원이었다." "연방정부는 백인들이 지배하는 조건에 한해서만, 북부 산업 엘리트들이 정치, 경제적으로 필요로 할 때에만 노예제를 종식시킬 생각이었다."(330)


"산업의 요구와 신생 공화당의 정치적 야망, 인도주의의 미사여구를 완벽하게 결합시킨 인물은 다름 아닌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330) 링컨은 1861년 3월의 취임연설에서 남부와 탈퇴한 주들을 회유했다. "나는 남부 주들에 존재하는 노예제도에 대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섭할 의사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내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없으며 또 그렇게 할 의향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넉 달째 이어지면서 프레먼트 장군이 미주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에 저항하는 노예주인들의 노예는 자유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자, 링컨은 이 훈령을 철회했다. 링컨은 메릴랜드, 켄터키, 미주리, 델라웨어 등 4개 노예주를 연방에 묶어두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전쟁이 점점 격화되면서 사상자가 급증하고, 승리에 대한 절망감이 고조되고, 노예폐지론자들의 비판이 링컨을 떠받치는 너덜너덜한 연합세력을 갈가리 찢어 버릴 태세를 보이자, 링컨은 그제서야 비로소 노예제를 반대하는 행동에 착수했다."(333)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흑인들은 링컨 재임 당시 부통령을 역임했고 전쟁 막바지에 링컨이 암살당한 뒤 대통령에 오른 앤드루 존슨에 의해 여러 해 동안 방해를 받았다. 존슨은 흑인들을 돕는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흑인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음으로써 남부연합 주들의 연방 복귀를 수월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복귀한 남부 주들에서 존슨 재임 기간 동안 '흑인단속법black codes'을 실시했는데, 이는 해방된 노예들을 여전히 대농장에서 일하는 농노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349-50) "북부에서 흑인들의 예속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고의 혁명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남북전쟁이 끝났을 당시, 북부 24개 주 가운데 19개 주가 흑인의 투표권을 허용하지 않았다. 1900년까지 모든 남부 주가 새로운 헌법과 법령을 통해 흑인에 대한 공민권 박탈과 분리를 법제화했다."(364)


기술 발전과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사업이 늘어나면서 투자의 안정성이 필요해지자 1850년대 중반에는 가격협정과 기업합병이 빈번했다. "투자 위험을 최소화하는 또 다른 방법은 정부로 하여금 알렉산더 해밀턴과 제1차 대륙회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역할, 즉 기업의 이익을 돕는 역할을 확실히 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각종 교과서는 당시를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가득 채우고 있으나, 남북전쟁 전야에 있어서 국가 운영자들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노예제 반대 운동이 아니라 돈과 이윤에 있었다."(384-5) 1830년대에 이미 "펜실베이니아를 비롯한 주에서 10시간 노동법이 등장했지만, 이 법들은 고용주가 피고용자와 서면계약을 통해 노동시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 시기의 법률은 계약에 대한 강력한 보호장치를 발전시키고 있었으며, 노동계약은 대등한 양자 간의 자발적인 합의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었다."(393-4)


"남북 전쟁에서 1900년에 이르는 동안 증기와 전기가 인력의 자리를 차지했고, 철이 목재를, 강철이 철을 대체했다." "이 모든 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과 기계를 만들어 내는 천재적인 발명가와 새로운 기업의 유능한 조직자, 또는 관리자가 필요했으며 또한 토지와 광물이 풍부한 국토, 고되고 비위생적이며 위험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엄청난 인력이 필요했다. 유럽과 중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새로운 노동력을 형성했다." "몇몇 백만장자는 무일푼에서 출발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1870년대 섬유, 철도, 강철 회사의 중역 303명의 출신에 관한 한 연구를 보면 90퍼센트가 중간계급이나 상류계급 집안 출신이었다. '거지에서 부자로'라는 호레이쇼 앨저식 이야기는 소수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실이었지만, 대부분은 신화, 즉 통제를 위해 유용한 신화였다."(437-9) 대표적인 사례로 "1900년에 이르면 모건은 전국 철도의 절반인 16만 킬로미터의 철도를 장악했다."(442)


상호 이해관계로 엮인 독점산업들의 과도한 담합을 저지하기 위해 1890년에 셔먼 반트러스트법Sherman Anti-Trust Act이 제정되었으나, "1895년 대법원은 셔먼 반트러스트법이 무해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이 법을 해석했다. 대법원은 제당 산업의 독점이 통상상의 독점이 아니라 제조상의 독점이며, 따라서 셔먼 반트러스트법을 통해 연방의회의 규제를 받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미국 정부 대 E. C. 나이트 사 판결). 대법원은 또한 셔먼 반트러스트법은 주간州間 파업(1894년의 철도파업)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데, 이런 파업이 통상을 제약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대법원은 고소득에 대해 높은 세율을 적용하려는 연방의회의 작은 시도를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그 뒤 몇 년간 대법원은 셔먼 반트러스트법은 통상을 제약하는 '불합리한' 결합만을 금지한다고 말하며 스탠더드 석유회사와 아메리칸 담배회사의 독점을 파괴하지 않았다."(448)


"운디드니 학살이 있었던 1890년, 인구조사국은 내륙 국경 설정이 완료됐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팽창을 본성으로 하는 이윤 체제는 이미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507) 1898년 2월 아바나 항구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메인Maine 호가 원인불명의 폭발로 침몰하자 "매킨리와 산업계 모두 스페인을 쿠바에서 몰아낸다는 자신들의 목표가 전쟁을 통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으며, 그에 수반되는 부수적 목표, 즉 쿠바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 확보 역시 쿠바 반란자들의 손에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개입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519) "훗날 미 국무장관 존 헤이가 '눈부신 작은 전쟁splendid little war'이라 부른 전쟁에서 스페인 군대는 석 달 만에 패했다. 미군은 쿠바 반란군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스페인이 항복했을 때, 어떤 쿠바인도 항복조건을 협의하거나 항복문서에 서명할 수 없었다."(526)


전쟁이 끝나자 미국 자본이 대거 쿠바에 상륙했다. "1901년 당시 쿠바 광물 수출량의 최소한 80퍼센트가 미국의 수중에 장악됐고 그 대부분을 베슬리엄 철강회사가 차지했다."(528) "스페인-미국 전쟁은 미국이 수많은 나라를 직접 병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쿠바에 인접한 카리브 해의 스페인령 푸에르토리코가 미군에 의해 접수됐다. 거리상 태평양 전체의 3분의 1이나 떨어져 있는 섬으로, 이미 미국 선교사와 파인애플 대농장 소유주들이 침투해 미국 관리들이 "수확할 일만 남은 다 익은 배"라고 묘사한 하와이 제도는 1898년 7월 상하 양원 합동 결의안으로 병합됐다. 비슷한 무렵에 일본으로 가는 길목인 하와이 서쪽 3,70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웨이크Wake 섬도 점령됐다. 그리고 필리핀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태평양의 스페인령 괌 역시 접수됐다. 1898년 12월에 스페인과 조인한 강화조약으로 미국은 2,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괌,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등을 공식적으로 넘겨받았다."(531)


한편 국내적으로는 체제 안정을 기하고 민중 봉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1900~1920년대가 '혁신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새로운 법안들이 통과됐다는 점에 있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행정부 아래 육류검사법Meat Inspect Act, 철도와 송유관을 규제하기 위한 헵번법Hepburn Act, 순정식품의약품법Pure Food and Drug Act 등이 통과됐다. 테프트 행정부에서는 만-엘킨스법Mann-Elkins Act으로 전화 및 전신 체계를 주간통상위원회의 규제 아래 뒀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기에는 독점의 성장을 통제하기 위해 연방통상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를 창설하고 전국의 통화와 은행체제를 규제하기 위해 연방지불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을 도입했다. 테프트 행정부는 누진소득세를 허용하는 헌법 수정조항 16조와 원래의 헌법이 규정하는 대로 주의회의 간접선거 대신 일반투표로 직접 상원의원을 선출하도록 하는 헌법 수정조항 17조를 제안했다."(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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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7-0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인데, 좋은 서평을 써주시니 읽고싶은 마음이 더 생깁니다.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역사라는 학문을 어느 특정집단이나 당시 주류였던 관점에서 벗어나, 민중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인듯 합니다.

nana35 2018-07-02 12:43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신다니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전자책] 분열하는 제국 - 11개의 미국, 그 라이벌들의 각축전
콜린 우다드 지음, 정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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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륙의 "유럽 문화는 동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 제국 군인과 선교사들에 의해 남쪽에서부터 전파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 하위문화는 대서양의 코드 곶 해안이나 체서피크 남쪽 지역이 아니라 뉴멕시코 북부의 건조한 고원과 콜로라도 남부에서 시작됐다. 1595년 엘 노르테에 정착한 이래 지금까지 줄곧 자신들만의 문화를 간직한 채 사는 스페인계 미국인은 19~20세기가 되어서야 뒤늦게 이 지역에 진출한 멕시코계 미국인을 자신들과 한 덩어리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매우 큰 불쾌감을 느낀다."(38-9) 교황에게 남반구 세계를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도덕적 명령'을 받은 "스페인 국왕은 아즈텍과 마야 제국을 손쉽게 정복한 후 은이 잔뜩 매장된 산맥과 금광을 발견하자 신이 단순히 자기편인 것을 넘어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심판의 날'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 제국Universal monarchy'을 건설할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말라는 계시를 내린 것이라 믿었다."(43)


"엘 노르테는 자체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고 선거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지역 군사령관이 총독 역할을 대행했고, 지역 협의회나 의회 같은 민주적인 제도는 전무했다. 샌타페이, 샌안토니오, 투손, 몬테레이 같은 몇 안 되는 도시에서조차 의회는 부유층 올리가키들oligarchy의 전유물이었다. 1700년대 말에는 그마저도 기능이 거의 마비됐고, 시정 운영은 지역 군 장교들의 손에 넘어갔다. 일반 주민들은 그들의 생계를 돌봐줄 지역 후원자patron나 기득권층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충성을 바쳐야 했다. 후원자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과부, 고아, 병약자들을 돌봤다. 또 종교 행사나 교회활동에 자금을 지원했다. 농장 일꾼들은 이에 복종하고 따랐다. 마치 중세 시대의 농노제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시스템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엘 노르테 지역의 정치,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47-8)


# 엘 노르테El Norte의 출발

1. 개신교를 적대한 스페인의 영향으로 양키덤, 애팔래치아,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와 적대 감정

2. 스페인이 에너지와 자원을 종교 전쟁에 탕진하면서 평균 이하의 빈곤 지역으로 전락

3. 열렬한 개종 과정에서 인디언과 스페인인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급증하여 인종 차별 의식 약화


뉴프랑스 지역에 정착한 "당시 사람들은 숲에서 사는 사람을 나무꾼(혹은 모피상)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원주민 문화와 가치관에 부분적으로 동화된 1세대 이주민들이었다. 그들의 자식은 프랑스인이면서 동시에 미크맥, 몽타니에, 휴런 족의 후손이기도 했다. 이들은 메티스metis(캐나다 프랑스인과 북미 원주민 사이의 혼혈)라는 새로운 인종을 형성했다. 메티스는 스페인의 메스티소와는 달리, 유럽 정착민 문화만큼이나 원주민 문화에도 편안함을 느꼈다. 모피상들은 유목민이나 수렵인들처럼 자유와 독립을 누릴 수 있는 자신들의 삶을 자랑스러워했다." "뉴프랑스에서 평등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구대륙의 봉건제를 압도하면서 점점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인디언을 동화시키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메티스 사회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그 사회는 프랑스적인 요소만큼이나 북미 원주민들의 가치관과 문화가 많이 반영된 사회였다."(63-4)


# 뉴프랑스New France : 행정구역으로 독립하려는 퀘벡 주가 포함된 지역으로 앙시앵 레짐 시절의 프랑스 북부 소작농 민속 문화와 북미 동북부의 토착 원주민 문화가 결합하여 형성했다.


"타이드워터는 애초부터 소수의 가진 자와 다수의 없는 자들로 구성된 사회였다. 피라미드의 맨 위에 군림한 부유한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타이드워터의 경제, 정치를 빠르게 장악해갔다."(71-2) "타이드워터에서 권력은 세습됐다. 주요 가문들은 영국과 미국, 양쪽 모두에서 혼맥으로 얽혔다. 그중에서도 특히 버지니아 일대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서로 모두 친인척 관계였다. 식민지의 상원, 대법원, 행정 내각 역할을 한 것은 물론 토지의 분배까지 관장했던 버지니아 왕실 의회Royal Council는 1724년 의회의 모든 멤버가 혈연이나 결혼으로 얽힌 상태였다."(79) "타이드워터의 젠트리가 받아들였던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공화정을 모델로 한 '전통적인' 공화주의였다." "고대 라틴사회의 계몽 정치철학인 리베르타스Libertas에서 파생된 자유 개념은 양키덤과 미들랜드의 정치철학에 영향을 미친 게르만 사회의 프라이하이트(Freiheit, 자유)에서 파생된 프리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80-1)


#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자유 vs 천부인권으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유


# 타이드워터Tidewater : 영국 남부 젠트리의 후손들이 세운 사회로 권위와 전통을 중시하고 대중의 정치 참여에 우호적이지 않다. 헌법에 귀족적인 요소들(가령, 대선 선거인단 제도)을 첨가했다. 토머스 제퍼슨이나 조지 워싱턴, 제임스 매디슨이 타이드워터 출신이다.


"청교도들은 미 대륙에 영국 시골 마을의 삶을 옮겨심고 싶어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세우고 싶어했던 사회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장 칼뱅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개신교 신정사회, 즉 종교적 유토피아였다. 그들은 뉴잉글랜드의 황무지에 새로운 시온을 건설하고자 했다."(84) "양키덤 초기 정착민의 절반 가량은 영국 제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한 이스트 앵글리아(영국 동남부) 출신이었다. 이스트 앵글리아에 속하는 7개 카운티는 영국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심지였고 교육 수준도 높아서 중산층이 빠르게 증가하는 곳이었다. 또 전제정치에 굴하지 않은 오랜 저항의 역사를 자랑했다." "이들은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향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황무지의 불확실성을 선택했다. 가족 단위로 온 사람이 70퍼센트를 차지했기 때문에 성별, 연령 비율이 다른 국민이 세운 사회보다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86-7)


1624년 네덜란드인들이 정착한 뉴네덜란드는 비록 작은 마을이었지만 "그때부터 이미 북미의 어떤 지역과도 달랐다. 모피 교역소로 출발한 이 도시는 사회를 어떻게 단결시킬 것인지, 혹은 어떤 사회적 모델을 지향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모두 거세된, 그저 상업적인 목적에만 충실한 곳이었다. 도시의 행정은 글로벌 기업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의 관할 아래 놓였고, 실제로 처음 몇십 년 동안은 서인도 회사가 공식적으로 뉴네덜란드를 통치했다. 양키덤과 타이드워터 사이에 위치한 이 도시는 양쪽 모두가 이용하는 화물 집산지가 됐다."(96) 관용을 중시하는 네덜란드인들은 "다양성을 축복이라 여겼던 것이 아니라 그저 '참고 견딘' 것이었다. 샹플랭의 고향인 생통주 마을 사람들처럼, 네덜란드인들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유럽의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외에 더 좋은 대안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103)


디프사우스를 형성한 사람들은 "역사가 좀더 오래된 식민지인 서인도 제도 바베이도스를 세운 자들의 아들과 손자들이었다. 바베이도스는 영국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하면서도 가장 잔인한 사회였다. 그들은 찰스턴에서 영국 지방 영주와 같은 삶을 누리고자 한 것도 아니고, 종교적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 시대에도 악명이 높았을 만큼 비인간적이었던 서인도 노예국가 제도를 이곳에 확장시키려 했다." "디프사우스는 애초부터 부와 권력이 철저히 불공평하게 나뉜 사회였다. 소수 지배층이 공권력을 등에 업고 테러적 수단을 동원해 모든 이의 복종을 강요하는 곳이었다."(119-20) "디프사우스는 군사화된 사회인 데다 카스트 구조로 이뤄져 권력에 대한 복종 문화가 강했다. 그뿐 아니라 매우 공격적인 팽창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이기도 했다. 농장주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저지대에서 비슷한 지형을 가진 해안가 위아래로 영토를 넓혀나갔다."(130)


"1680년대에 형성된 미들랜드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뒤섞인 관용적인 사회였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평범한 서민층 가족들이 사회의 주를 이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내버려두는 것뿐이었다. 그 후 300여 년 동안 미들랜드의 문화는 계속 서쪽으로 뻗어나가 필라델피아 주변과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미국 중부를 휩쓸었다. 미들랜드인들은 매우 중요한 특징을 가진 국민이다. 북미 대륙에서 가장 일반적이면서 표준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중요한 정치적 국면에서 종종 킹메이커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들이다." 미들랜드의 주요 구성원들인 "퀘이커교는 폭력과 전쟁을 강하게 거부하고 평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퀘이커는 이 같은 교리를 너무나 경직되게 엄격히 적용한 나머지 반세기 후인 1690년대에 미들랜드에서는 영원히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133-5)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마지막 국민인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인들은 등장하자마자 가장 골칫덩이 같은 존재가 됐다. 영국의 국경 분쟁 지대에서 이주해온 그들은 미들랜드 산간에 씨족을 기반으로 한 전사 문화Warrior culture를 퍼뜨렸다. 미들랜드,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의 변방에 정착한 이들은 행정, 군사, 인디언 정책에 대한 기존 지배 세력의 독점적 통제력을 산산이 깨버린 주체이기도 하다." "상시적인 격변과 불안정한 일상에 시달린 국경지대인들은 (씨족끼리 뭉쳐 서로를 의지하면서) 칼뱅주의에 입각한 장로회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신의 선택을 받은 자가 됐다. 보혈의 피로 정화되어 성경이 약속한 주의 나라 백성이 되었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진노한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았다. 모든 외부 세력을 불신하는 국경지대인들은 개인의 자유와 명예를 중요시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기를 들었다."(146-7)


"1775-1782년에 벌어진 독립 투쟁은 표현, 종교,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대우받는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미국인'들이 힘을 합쳐 싸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각 식민지의 문화적 특성, 권력을 지배하는 자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느슨한 군사적 동맹을 맺어 함께 싸운, 매우 보수적인 행동의 발로였다. 반란에 동참한 식민지들은 결코 하나의 공화국을 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영제국이 미 대륙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식민지를 섣불리 일원화시키려 하자, 공동의 위협에 대항해 일시적인 연합을 형성했을 뿐이다."(162) "그러나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식민지들이 합의한 영국으로의 수출 금지 조치가 발효될 무렵, 양키의 공동묘지에는 이미 영국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의 시신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미국 독립 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177-8)


# 각 공동체들의 반응

1. 양키덤 : 종교의 자유와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대표들을 소집하고, 혁명군을 조직하는 등 가장 적극적으로 대영 투쟁

2. 타이드워터 :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조지 메이슨, 조지 워싱턴 등 피드먼트에 사는 젠틀맨들이 애팔래치아 너머의 잠재력을 보고 대영 투쟁에 합류

3.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 자유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적대한다는 신념에서 독립파에 합류

4. 미들랜드 : 평화적 해결 추구. 독립이 호전적인 팽창주의 세력의 힘을 키울 것으로 보고 영국의 지배에 반대하지 않음

5. 뉴네덜란드 : 뉴욕이 완전히 양키들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한 왕당파의 근거지 역할

6. 디프사우스 : 농장주들의 특권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항의하는 영국상품 보이콧 운동에 만족. 노예반란 우려


"양키들은 지금까지 지켜온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앞으로도 자신들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치권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투표로 선출된 대표들이 운영하는 지역 정부(주가 아니라 마을 단위로 세워진 정부), 사회 중심에 있는 청교도 교회, 앵글로색슨으로서 폭압에서 벗어나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로울 권리, '신의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180-1) "양키덤이 자유를 위한 혁명의 근거지였다면, 뉴네덜란드는 독립을 반대하는 왕당파와 영국군을 위한 근거지로서 정확히 정반대 역할을 했다." "이들은 여느 주변 식민지와 달리 주권을 수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뉴네덜란드는 한 번도 주권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뉴네덜란드인들은 뉴욕이 영국에서 독립하고, 양키의 수중에 넘어가면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종교적 관용과 문화적 다양성이 훼손될 가능성을 우려했다.(182-3)


"양키덤을 제외한 상당수 영국 식민지들이 독립에 대해 양면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면, 그들은 대체 어떻게 독립을 하게 된 것일까? 첫째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독립을 간절히 바랐던 타이드워터 젠트리의 적극적인 동참, 그리고 둘째는 자신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는 누구와도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던 펜실베이니아, 캐롤라이나, 조지아 지역의 애팔래치아인들이었다. 외떨어진 산간지역에 위치한 데다, 가난하고, 하나의 정부로 통합되지도 않았던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는 독립 전쟁에서 가장 복잡한 변수였다. 외부의 간섭을 받기 싫어했던 국경지대인들은 '혁명'을 핑계 삼아 판을 뒤엎고자 했다."(192) "소수의 '왕당파' 국경지대인들은 영국군이 그들의 적인 디프사우스 농장주의 적이기 때문에 영국 편에 섰다. 반면 다른 산간지대 마을에서는 영국을 더 큰 압제자로 여겼다. 결국 국경지대인들은 농장주와의 싸움에 더해 같은 국경지대인끼리도 내전을 겪게 됐다."(194)


"전쟁이 시작될 무렵, 식민지 사이에 구축된 협의체는 외교 기구인 '대륙 의회'뿐이었다. 대륙 의회는 기본적으로 참여국 과반수의 찬성을 통해서만 결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국제 조약 기구였다. 결의안을 이행하지 않는 회원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회원을 군사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는 한,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대륙 의회는 군사적 제재는 물론 영국의 위협에 더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지금의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비슷한 성격의 연합군을 창설했다. 그것이 바로 '대륙군Continental Army'이다. 그들은 수많은 입씨름을 거친 끝에 대륙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군사적 역량을 강화할 필요성이 커지고, 더 중요하게는 회원국 간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조약기구에 훨씬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국 최초의 헌법인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은 이러한 두려움 속에서 탄생했다."(198-200)


"식민지 지도자들은 전쟁에 사람을 동원하기 위해 영국과의 전쟁을 독재 및 압제와의 싸움으로 포장했다. 그들은 평민들에게 민병대에 합류하고 대규모 회합에 참석해 지도자들이 설명하는 결의안을 열렬히 지지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행동대를 구성해 결의안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곤봉이나 노로 구타하거나 뜨거운 타르를 끼얹은 후 온몸에 깃털을 붙이는 공개 처벌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과정은 오히려 평민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민주주의에 관한 글을 쓰거나 읽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토머스 페인이 쓴 <상식>과 1776년 미국의 독립 선언은 이러한 열망에 불을 댕겼다." "하층민들이 통제 불능이 되어간다는 우려가 높아지자 각 지역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훨씬 더 강한 연대를 맺어 각 지역의 독립하려는 움직임과 민의를 수시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게 됐다."(204-5)


"미국 헌법은 결국 서로 경쟁관계인 국민 사이에서 벌어진 골치 아픈 타협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타이드워터의 젠트리와 디프사우스로부터 평범한 시민의 직접 투표가 아니라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는 강력한 대통령제를 물려받았다. 뉴네덜란드는 양심과 표현,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권리 장전을 물려주었다. 오늘날 미국이 영국식 의회 모델을 따라 강력한 단일 국가를 형성하지 않은 것은 남부의 폭정과 양키의 간섭에 대항할 수 있도록 각 주의 주권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한 미들랜드 때문이다. 양키는 인구 비례대로 의석을 배정하기 원했던 타이드워터와 디프사우스를 상대로 싸워 이겨서 작은 주들도 상원에서 동등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양키는 또한 의석을 배분하기 위해 인구를 셀 때 노예는 5분의 3만 포함하도록 절충안을 내고 이를 밀어붙였다. 투표권이 없는 노예들은 대표될 수 없으므로, 의원 수를 배정할 때 이 점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양키의 논리였다."(208-9)


"타이드워터와 디프사우스를 제외한 다른 식민지 사람들의 상당수는 (1789년) 헌법이 반혁명적이며 교모하게 민주주의를 억압한다고 여겼다. 또 소수의 지역 엘리트와 신흥 은행가, 금융 투기꾼, 그리고 같은 인종과 문화를 가진 국민에게 아무런 충성심도 없는 지주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켜줄 뿐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존경받는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 같은 목적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거를 치르지 않는 의원인 상원을 높이 평가했다. "건방진 민주주의를 억제하고"(알렉산더 헤밀턴), "민주주의의 어리석음과 불안정함을 막아줄 수 있는"(에드먼드 랜돌프) 제도였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의 불편함을 막기 위해 연방 선거구는 클수록 좋다"(제임스 매디슨)고 생각했다. 메디슨은 직접 민주주의에 유리한 소규모 집단은 파벌이 생겨나기 쉬우므로, 어리석은 이들이 쉽게 다수를 정하지 못하도록 선거구가 클수록 바람직하다고 여겼다."(220)


"뉴잉글랜드가 서부 진출에 박차를 가한 이유는 토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뉴잉글랜드는 당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였다. 좋은 토지는 이미 임자가 있었고, 개척할 땅이 빙식氷蝕 지형인 동부 메인 변두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식 세대 앞에 놓인 미래는 암울하기만 했다. 이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도 뉴욕 국경을 넘어 펜실베이니아 북부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다."(241) "양키는 자신들의 이주 여정을 1600년대 초 뉴잉글랜드 선조들이 종교 사역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바라봤다. 1787년 매사추세츠 입스위치에서 머스킹엄 밸리로 향한 첫 이주민들은 네덜란드를 떠나던 필그림 파더스처럼 예배당 앞에서 퍼레이드를 벌인 후 성직자들의 고별사를 받으며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하이오 강 하류에서 탈 작은 배를 만든 후 '서부의 메이플라워호'라는 이름을 붙였다."(244)


뉴잉글랜드인이 '서북부 영토'의 북쪽을 거쳐 서부로 진출하는 동안, 미들랜드인들은 중앙 중서부로 쏟아져 나갔다. "양키처럼 미들랜드도 유럽이나 동부 연안에서 이곳으로 올 때 가족 단위로 이웃사촌들과 함께 이주해왔다. 그러나 양키들과 달리 그들은 주 전체는커녕 이웃 마을 공동체를 동화시키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델라웨어 밸리처럼 각 마을은 민족별로 형성되곤 했지만, 카운티 전체로 놓고 보면 다문화적인 성향을 띠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독일인들은 전반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고, 기술을 보유한 장인이었으며 농업 지식이 풍부했다." "미국에 개척의 광풍이 불어닥칠 때도 독일인들은 가족과 여러 세대에 걸쳐 같은 땅을 경작하면서, 안정되고 영구적인 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렇게 한곳에 뿌리를 내린 생활 덕분에 독일인들은 미들랜드, 더 나아가 미국의 중서부 문화에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됐다."(259-60)


"국경지대인들은 최초로 애팔래치아 산맥 너머까지 진출한 사람들이었고, 미국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인디언의 영토까지 파고들어갔다. 그들은 대륙 의회가 서북부 영토를 편입시키고 그곳에 살던 인디언을 정복하기 오래전부터 트랜실베이니아나 프랭클린 국가 같은 자신들만의 정부를 세웠다."(262) "이들은 숲과 빈터 사이에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뒤늦게야 도시를 형성했고, 공공 투자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어디에서나 지방세는 매우 낮았고 학교와 도서관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도시 정부는 거의 없거나 극히 드물었다."(264) "중서부 애팔래치아인의 개인주의적 자유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는 간섭하기 좋아하는 양키들이었다. 그 결과, 국경지대인들이 장악한 지역은 19세기부터 민권운동 시대에 이르는 동안 내내 디프사우스가 이끄는 민주당의 견고한 지지층이 됐다."(268)


"1820년 전까지 대륙의 동남부를 지배한 세력은 타이드워터였다. 식민지 시대와 초기 공화국 시절,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은 버지니아였다. 타이드워터 젠트리는 애팔래치아가 가져가야 할 의석수를 박탈한 덕에 그 지역은 물론 나라 전체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들은 미국의 초기 대통령 5명 중 4명을 배출했고, 독립선언문과 1789년 헌법 제정에 지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웃한 디프사우스보다 넓고, 훨씬 더 부자이며, 더욱더 발달한 타이드워터는 '남부'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영국 전원 지역의 개화된 젠트리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던 타이드워터의 엘리트들은 노예의 존재를 유감스러워했고, 그것이 서서히 사라질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타이드워터는 1820~1830년대에 빠르게 팽창하는 디프사우스에게 힘과 영향력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세력 역전은 타이드워터를 부양하던 담배 플랜테이션이 쇠퇴하고, 디프사우스의 목화 플랜테이션이 성황을 이루면서 발생한 일이었다.(277-8)


엘 노르테인들은 1821년에 독립한 멕시코가 극심한 경제 파탄으로 중앙 정부 역할을 방기하자, 숭숭 뚫린 국경을 넘어 텍사스로 대규모 불법 이민을 감행했다. "멕시코 법은 앵글로-아메리칸의 이주를 까다롭게 규제했지만, 새로운 정착민을 간절히 필요로 했던 텍사스 관료들은 이를 못 본 척했다."(291) "이주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텍사스 동부 내커도치스의 마을을 향해 북쪽으로 여행하던 한 멕시코 장군은 어느 순간 자신이 완전히 낯선 외국 문화권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샌안토니오에서 내커도치스로 가다보면 거리에 비례해 멕시코의 영향력이 점점 감소하다가, 종국에는 멕시코 문화가 아예 소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상관에게 보고했다." "멕시코 중앙 정부는 디프사우스 이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텍사스가 미국에 병합될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앞장서서 반란을 이끈 사람들은 멕시코 북부인인 노르테뇨, 자신들이었다."(292-3)


"1850년, 자유 주州에 정착한 외국인 이주민의 숫자는 노예 주州보다 8배가 더 많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키덤, 미들랜드, 뉴네덜란드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점점 늘어나면서 이들이 하원에서 차지하는 의석수도 계속 증가했다. 양키가 장악한 레프트코스트는 디프사우스를 더욱 사면초가로 몰아넣었다. 연방정부는 디프사우스의 바람과 달리 카리브해 지역 점령을 거부한 반면, 캘리포니아와 오리건, 워싱턴이 미연방에 자유 주州로 합류하는 것을 승인했다. 1860년, 디프사우스와 타이드워터의 지도자들은 연방정부를 둘러싼 힘겨루기에서 자신들이 밀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850년대에 미국인들 중에 "양키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노예제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 앞에서 눈을 감으려고만 했다. 결국 세상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노예제가 일으키는 도덕적 문제들을 무시할 수 없었던 양키들이 노예 해방운동의 중심이 됐다."(313-4)


# 레프트 코스트The Left Coast : 뉴잉글랜드의 상인, 선교사, 벌목꾼 무리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출신의 농부, 채굴업자, 가죽 무역상 등이 정착한 지역. 개인의 성취를 중요시하고, 정부를 신뢰하며 사회 개혁을 추구한다.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시애틀, 밴쿠버 등)


186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양키덤의 지지를 받은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가장 먼저 연방에서 탈퇴했다. 취임식이 열리기도 전에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텍사스 등 디프사우스가 장악한 주州들이 줄줄이 탈퇴에 합류했다." "만약 디프사우스 연합이 (연방정부의) 요새나 구호 선박을 먼저 공격할 경우 디프사우스 편에 서기로 한 애팔래치아, 미들랜드, 뉴네덜란드의 지지자들은 등을 돌릴 공산이 컸다." "남부연합의 국무장관인 리처드 래더스는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북부를 몰아간다면 분리주의자들은 협상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남부연합의)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전쟁이 시작되면 애팔래치아, 미들랜드, 뉴네덜란드가 남부 편에 설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래더스의 충고를 무시했다. 그리고 이는 북미 역사상 최악의 오판 중 하나가 된다."(320-1)


디프사우스는 백인 우월주의에 찬성하는 애팔래치아가 남부연합 편에 설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양키보다 농장주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더 위협한다고 여겼다. 결국 남부연합은 1865년에 패배했다. 그러나 패전 후에도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 남부연합 애팔래치아인은 "양키의 개혁에 단호히 저항했고, '재건' 지역의 백인들은 1876년 북부군이 철수하자 모든 개혁 조치를 무효로 만들었다. 양키 공립학교들은 폐지됐고, 양키가 강제로 도입한 헌법은 다시 쓰였다. 백인 우월주의가 되살아나면서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내고 '문맹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 등 흑인의 투표권을 빼앗기 위한 각종 장치가 부활했다. KKK 단원들은 공직에 출마하거나 예전의 카스트 제도에서 벗어난 일을 한 '건방진' 흑인들을 살해했다. 전쟁과 점령 기간을 거친 후에도 디프사우스와 타이드워터는 그들의 문화적 근본을 고스란히 유지했고, 앞으로 다가올 세기에 또 다른 문화적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331-2)


"파웨스트는 민족적 지역 문화가 아니라 외부 수요에 따라 정체성이 형성된 독특한 지역이다. 환경적 요인이 정착민의 문화적 특징을 압도한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유로-아메리카는 암석 채굴, 철도, 텔레그래프, 개틀링 기관총, 가시철조망, 수력발전 댐 등 자본집약적인 기술을 이용해 이 지역의 환경적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기술을 도입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가진 세력은 일찌감치 동부에 식민지를 형성한 국민과 연방정부뿐이었고, 결국 파웨스트는 이들의 내부 식민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파웨스트인들은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것에 지금도 깊이 분노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지금 상황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정책을 지지한다."(336) "다른 지역은 보통 정착촌이 형성된 후 철로가 놓이고 수요에 따라 노선이 확장됐지만, 파웨스트 대부분 지역에서는 철로가 먼저 놓이고 그다음에 정착촌이 형성됐다. 기업들은 정착민을 끌어오려고 엄청난 돈을 홍보에 쏟아부었다."(340)


# 파 웨스트The Far West : 미국에서 유일하게 기후와 지정학적 요인이 민족성을 압도하는 광활한 황야 지대. 끊임없이 연방정부에 손을 벌리면서도 자신들을 내부 식민지 취급하는 정부를 향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 (애리조나 북부, 노스웨스트, 다코다, 네브레스카, 캔자스 서부, 아이다호, 몬태나, 콜로라도, 유타, 네바다 등)


"남북전쟁 당시 북부 편에서 남부연합에 맞서 싸웠던 애팔래치아까지 결과적으로 딕시연합에 합류한 것은 전쟁이 끝난 후 양키가 주도한 재건 사업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디프사우스와 타이드워터는 그들의 제도와 인종 카스트가 위협 받게 되자, 당시 유일하게 자신들의 수중에 남아 있던 시민 조직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을 펼쳐나갔다. 그 조직은 바로 교회였다. 남부 지역의 여러 교파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복음주의 교회는 전쟁 전의 사회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남부 침례교 등 복음주의 교회들은 양키덤의 교파와 달리,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내면적 개신교'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는 북부 지역의 '공공적 개신교'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북부의 점령에 강력히 반발한 강경주의자들이 스스로를 '구원자Redeemers'라고 부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1877년 북부군의 철군은 (이들 지역에서) '구원Redemption'이라 불렸다."(362-3)


# 상실된 대의Lost Cause : 남부 독립을 위해 벌인 전쟁은 정의를 지키고자 고난과 맞서 싸운 것이라는 주장


"양키덤과 뉴네덜란드, 미들랜드의 공공적 개신교도들은 미신과 다를 바 없는 비이성적 신앙과 미국의 가치에 어긋나는 독재적인 성향을 지닌 남부인은 지옥에 떨어져도 시원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리주의자들은 1930~1940년대에 성경 모임과 기독교 대학, 복음 라디오 방송국을 확대해나가면서 조직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0년대가 되자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원리주의자의 숫자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반면 사람들의 신앙을 약화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종교와 주 정부를 분리하려 했을 뿐인 주류 개신교는 성도의 숫자가 감소하면서 탄력을 잃어갔다. 그 결과, 세속주의 노력 또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후 시대에 번영을 거듭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있던 미국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전면적인 문화 전쟁의 조짐이 조용히 들끓고 있었고, 이는 1960년대에 마침내 폭발하게 된다."(373)


"이 기간에 북부와 남부는 각자 자신만의 또 다른 내전을 치러야 했다. 딕시연합에서는 분리 정책과 카스트 제도에 반발한 흑인들이 투쟁에 나섰고, 북부동맹의 4개 국민은 새로운 세대가 이끄는 문화적 저항에 직면했다. 두 사건 모두 각 지역의 기존 체제에 반발한 자들이 일으킨 내부적 현상이었지만, 양측은 곧 상대방의 사건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먼저, 남부에서 일어난 흑인 민권운동에 북부의 개입은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북부는 타이드워터, 애팔래치아, 특히 디프사우스의 인종 카스트 제도를 강제로 폐지하기 위해 연방정부의 권한과 군사력을 동원했다. 반면 딕시연합은 레프트코스트, 뉴네덜란드, 양키덤에서 일어난 신세대의 '반란'인 60년대 문화 혁명에 반대하며 이에 개입하고자 했다." "이 두 개의 닮은꼴 반란에서 비롯된 서로를 향한 분노는 북미 국민 사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고, 합의점과 상호 수용 가능한 해결책을 찾으려던 21세기 초의 노력을 무위로 만들었다."(374-5)


"민권운동과 60년대 문화운동 후 딕시연합은 낮은 세금과 느슨한 규제, 노조 약화 등을 장점으로 부각시켜 국외와 국내 기업을 남부로 끌어들였다. 양키와 미들랜드의 제조업은 남부 지역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북미의 양키 자동차 산업은 1990~2000년대에 거의 붕괴했지만 디프사우스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에 있는 외국 자동차 공장은 예전 남부의 섬유·목재 산업처럼 승승장구했다. 일각에서는 '신新남부연합'이 미국을 서유럽과 동북아시아의 고학력 사회에 종속된 "저임금 수출 공장"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혁신적 연구는 교육과 이성주의를 강조했던 북부의 지식 클러스터에 집중돼 있다.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은 모두 레프트코스트 도시에 몰려 있다. 그전에 보스턴에는 양키 고속도로로 알려진 루트 128을 중심으로 최초의 '실리콘밸리'가 있다."(388)


"북부동맹과 딕시연합이 서로 꿈쩍도 안 한 채 양극단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면, 역학 구도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해답은 미들랜드, 엘 노르테, 파웨스트, 이 세 개의 '부동층' 국민에게서 찾아야 한다. 두 개의 슈퍼파워 연합 중 누구도 최소 2개 이상의 부동층 국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미국 정부를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다. 1877~1933년 북부동맹은 파웨스트와 미들랜드의 지원 덕에 연방을 장악했다. 1980~2008년 딕시의 영향력과 지배력이 증가한 것은 파웨스트와 미들랜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데다 베리 골드워터,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같은 엘 노르테 출신의 보수적인 앵글로를 대통령으로 밀었던 덕분이다. 어느 한쪽도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을 때 다수당이라도 되고 싶다면 이들과의 연합은 필수적이었다."(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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