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를 생각하다 - 식탁의 역사
비 윌슨 지음, 김명남 옮김 / 까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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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가 사는 시대와 장소를 말해 주고, 우리가 사용하는 요리 및 식사 도구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것을 들려준다. 사람들은 현대를 '기술의 시대'라고 말한다. 보통은 컴퓨터가 여기저기 널렸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그 나름의 기술이 있다. 그 기술이 꼭 미래주의적일 필요는 없다. 포크도 냄비도 단순한 계량컵도 기술이다. 어떤 도구는 단순히 먹는 즐거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쓰인다. 그러나 요리 도구가 중차대한 생존의 문제일 때도 있다. 약 1만 년 전 냄비가 없었던 시절의 유골들을 보면, 치아가 몽땅 빠진 사람이 성인기까지 살아남은 예는 하나도 없었다. 씹기는 필수불가결한 기술이었다. 씹지 못하면 굶었다. 그러나 토기가 발명되자, 선조들은 죽이나 수프처럼 씹지 않고 마셔도 될 만큼 걸쭉한 혼합물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이가 하나도 없는 성인의 유골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냄비가 그들을 살렸다."(15)


"냄비는 먹을 수 있는 재료의 폭을 엄청나게 넓혔다. 냄비가 없을 때는 유독하거나 소화하기 힘들었던 식물들이 몇 시간 끓이게 되고부터는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바뀌었다. 냄비는 단순한 가열에서 요리로의 도약을 뜻한다."(29) "도공陶工은 무정형의 질척한 점토에 물을 타고, 다른 재료를 섞고, 형태를 잡은 뒤, 불로 구워서 영구적인 형상으로 굳힌다. 이것은 돌, 나무, 뼈를 깎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창조 작업이다." "도기陶器 제작과정에는 마술적인 측면이 있으며 실제로 초기 도공들은 공동체에서 샤먼의 역할도 겸하곤 했다."(38) "점토 단지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범위를 엄청나게 넓혔다. 그 현상은 '포리지'라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단지는 농경이라는 새로운 과학(역시 약 1만 년 전에 등장했다)과 합심하여 인류의 식단을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점토 단지를 쓰면 밀, 옥수수, 쌀처럼 조만간 세계 인류의 주식이 될 녹말성 곡물의 낟알들을 쉽게 끓일 수 있었다."(41)


# 냄비 이전의 요리법

1. 갑각류나 조개류의 껍질, 대나무 등을 이용한다. (크기와 모양의 한계가 뚜렷)

2. 창자에 고기를 담아 끓인다.

※ 뜨거운 돌을 물에 넣어 물을 끓인 후 음식을 익힌다.


"금속 가마솥은 토기에 비해서 실용적인 이점이 많았다. 가마솥은 모래나 재로 박박 씻을 수 있지만 유약을 칠하지 않은 토기는 그럴 수 없으므로 미세한 구멍 속에 이전 음식의 자취가 남기 마련이었다. 또한 금속은 점토보다 열을 잘 전달하므로 음식을 효율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큰 장점은 불에 바로 올려도 열 충격으로 갈라지거나 이가 빠질 염려가 없었다는 점이다."(44) 18세기 이후 구리가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영국에서는 구리 팬이 널리 사용되었다. "구리는 훌륭한 열 전도체이다. 냄비와 팬에 쓰이는 금속 중 구리보다 더 열 전도율이 높은 물질은 은뿐이다. 그러나 순수한 구리는 산성 음식과 닿으면 독성물질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리 조리 기구에 중성 주석을 얇게 입혔지만, 시간이 흐르면 주석이 닳아서 밑의 구리가 드러났다. 18, 19세기 요리책에는 "정기적으로 팬에 다시 주석을 입혀라"는 조언이 자주 등장한다."(60)


"칼과 음식의 이야기는 점점 더 날카롭고 강하게 변한 절단 도구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가 그 연장의 위태로운 폭력성을 어떻게 관리했는가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77) "중세와 르네상스 유럽에서 사람들은 어디든 자기 칼을 가지고 다녔고, 식사할 때 그것을 꺼내 썼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용 식사용 칼을 칼집에 담아 허리띠에 매달고 다녔다. 남자의 허리띠에 매달린 칼은 적을 방어하는 데에는 물론이거니와 음식을 자르는 데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칼은 요즘의 손목시계처럼 도구인 동시에 의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남의 칫솔로 이를 닦지 않듯이 당시에는 남의 칼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손목시계처럼 습관적으로 차고 다녔기 때문에 아예 몸의 일부가 되어, 종종 차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6세기의 문헌('성 베네딕투스의 계율')은 수도사들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허리띠에서 칼을 풀라고 상기시킨다. 자다가 자기 칼에 찔리면 안 되니까."(81)


"최초의 금속 칼은 청동기시대(기원전 약 3000~700년)에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청동은 아주 날카롭게 벼리기에는 너무 부드러워서 칼날로서는 불량한 재질이다. 청동으로 좋은 칼을 만들기 어려웠다는 점은 청동기시대에도 석기 절단 도구가 계속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철기시대야말로 최초의 진정한 칼의 시대였다." "그러나 부엌칼의 재료로서는 철도 이상적이지 않았다. 청동보다는 단단해도 쉽게 녹이 슬어서 음식 맛을 버렸다. 아주 날카롭게 날을 세우기가 어렵다는 문제도 여전했다. 위대한 돌파구는 강철이었다." "강철이란 철에 탄소를 소량 섞은 것이다. 무게로 따져서 0.2~2퍼센트 사이로 섞는다. 적은 양이지만 그것이 차이를 빚는다. 강철이 날카롭게 벼려질 만큼 단단하면서도 갈리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단단하지는 않은 것은 강철 속 탄소 덕분이다."(83-4)


"중국인이 무쇠를 알게 된 것은 기원전 500년경이었다. 무쇠는 청동보다 싸게 생산할 수 있었고, 큼직한 금속에 나무 손잡이를 단 칼을 만들 수 있었다. 중국 부엌칼은 무엇보다도 검소한 농민 문화의 산물이었다. 사람들은 그 칼로 재료를 작게 썰어서 한 접시에서 모든 재료의 맛이 어우러지게 했다. 재료를 작게 썰면 이동식 화로와 같은 불 위에서 더 빨리 익었다. 중국 부엌칼은 모든 재료를 작게 썰고 재빨리 익히고 낭비하지 않음으로써 부족한 연료를 최대한 활용하게끔 하는 절약의 도구였다."(89) 중국 부엌칼의 또다른 중요한 능력은 먹는 사람이 칼질할 필요가 없게 해주는 점이다. 중국에서 식사용 나이프는 불필요할뿐더러 조금 역겨운 것으로 간주된다. 식탁에서 음식을 써는 것은 푸주한의 일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부엌에서 칼이 제 역할을 다했다면 먹는 사람은 균일한 음식 조각들을 젓가락으로 집기만 하면 된다. 부엌칼과 젓가락은 완벽한 공생관계이다. 부엌칼로 썰고, 젓가락으로 먹는다."(91)


"유럽에서 칼질의 최고봉은 요리사가 아니라 궁정의 카버(carver)가 수행했다. 카버는 신사숙녀의 식탁에서 고기를 썰어주는 직업이었다. 중국 부엌칼은 모든 날재료를 가급적 비슷한 모양으로 썰었지만, 중세 카버는 이미 조리된 음식을 다루었다. 통째 로스팅된 동물을 종류마다 특수한 칼로 특수한 방식으로 썬 뒤 특수한 소스와 함께 내놓는 것이 카버의 일이었다." "카버가 따르는 규칙은 상징과 신호의 세계였다. 동물마다 고유한 논리가 있으며 해체도 그에 따라야 했다. 카빙(carving) 칼은 사냥 무기와 연관성이 있었다. 카빙의 요점은 사냥 전리품을 엄격한 위계에 따라 해체함으로써 그 동물이 잡힌 사냥터 주인의 위세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카버가 가장 유념할 일은 영주가 연골, 껍질, 깃털 등 소화가 어려운 부분을 먹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 부분을 도려내는 것 외에는 카버가 음식을 더 썰어주거나 하지 않았다. 영주에게도 전용 나이프가 있었으므로 직접 고기를 썰어 먹었다."(92-3)


"로스팅은 가장 오래된 조리법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로스팅은 날재료를 불에 직접 넣는 것에 불과하다." "로스팅 기술은 건축 기술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농업보다도 오래되었다. 끓이는 데에 쓸 토기의 발명, 굽는 데에 쓸 오븐의 발명보다는 200만 년 가까이 앞선다." "음식을 익히면 대체로 소화가 더 쉬워지고 영양소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인류는 익힌 음식을 발견함으로써 뇌 성장에 투입할 잉여 에너지를 얻었다."(111-2) "영국인이 로스트 비프를 편애한 것은 기본적으로 취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자원의 문제이기도 했다. 영국 요리사가 커다란 동물을 커다란 불꽃으로 굽기로 결정한 데에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영국에 땔나무가 풍성했던 탓도 있었다." "영국의 로스트 비프는 울창한 삼림지를 반영했고, 가축을 놓아 먹일 풍성한 초지를 반영했다. 영국인은 맹렬하게 타는 불길로 동물을 통째 구우면서 고기가 입맛에 맞게 익을 때까지 마음껏 장작을 던져넣을 수 있었다."(119-20)


"불꽃에는 온갖 위험과 매연이 따랐지만, 그래도 그것은 가정의 상징이었다. 1830년대 미국에 스토브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불을 감추는) 그 물건을 미워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이면 영국도 미국도 폐쇄형 레인지, 즉 '키치너(kitchener)'가 중산층 부엌에서 첫손가락에 꼽는 필수품이 되었다. 요리사는 불꽃 대신 기구를 중심에 두고 부엌을 조직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폐쇄형 레인지의 갑작스런 인기는 단순히 유행에 따른 현상만은 아니었다. 산업혁명의 재료인 석탄과 철이 이끈 현상이기도 했다. 요리용 스토브가 갑자기 유행한 것은 사람들이 럼퍼드의 글을 읽고 개방형 화덕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 아니라 시장에 값싼 무쇠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특허품 레인지는 철물업자의 꿈이었다. 거대한 철 덩어리에 갖가지 철제 부속품까지 딸려 방출할 기회였으니까. 새 모델이 연달아 등장하는 현상은 보너스였다."(134-6)


"가스 레인지는 석탄 레인지에 비해서 더 깨끗하고 쾌적하고 쌌다. 한 추정에 따르면, (19세기) 당시 중산층 가정이 지출한 요리용 석탄 비용은 하루에 약 7페니에서 1실링이었던 데에 비해 가스는 약 2.5페니였다. 그러나 가스의 진정한 매력은 일거리가 준다는 점이었다." "아침을 준비하는 것 같은 간단한 일도 옛 방식에 비해서 '시간과 주의'가 훨씬 덜 들었다."(140) "전자 레인지는 로스팅을 할 수 없고 빵도 구울 수 없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일을 다 해내는 조리 기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로스팅을 못 한다'고 전자 레인지를 비난하는 것은 너무 뜨거워서 커스터드를 만들 수 없다고 빵 굽는 오븐을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자 레인지의 진정한 단점은 기구 자체가 아니라 사용방식이다. 전자 레인지는 안타깝게도 전후 간편식의 시대에 시장에 등장했다. 1989년 영국 시장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자 레인지의 가장 흔한 용도는 조리가 아니라 '다시 데우기'였다."(147)


"훌륭한 요리는 정밀한 화학 작업이다. 정말 훌륭한 식사와 그저 그런 식사의 차이는 불과 30초와 소금 4분의 1 티스푼에 달렸을 수도 있다. 레시피는 요리를 재현 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재현 가능성은 어떤 실험을 다른 독립된 연구자가 정확하게 반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요리사의 작업 환경에는 과학자가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외래 변수들이 존재한다. 불안정한 오븐 온도, 교체된 재료, 손님들의 입맛이 각양각색이라는 점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153-4) 재료에 따라 측정값이 들쑥날쑥한 "미국의 컵 계량법은 도량형의 역사라는 큰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과거에는 명료한 측정 표준의 부재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그리고 컵 계량법은 더 폭넓은 체계에 포함되는 한 요소였는데, 그 환경에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지라고 할 만했다. 오늘날의 혼란은 모두 중세 영국에서 기인했다."(159)


"18세기 말, 중세 도량형의 혼돈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다양하게 등장했다. 프랑스에서는 혁명 이후 1790년대부터 미터법이 정착되었다. 미터는 북극점과 남극점을 잇는 가상의 선, 즉 자오선의 길이를 측정한 과학자들의 탐험 결과에 바탕을 둔 단위였다. 1미터는 자오선의 100만분의 1로 정의되었다." "1795년 제르미날 18일의 법은 리터, 그램, 미터라는 새로운 단위를 공포했다." "한편 영국은 1824년에 행동에 나섰다. 이 시점에서 프랑스의 선례를 쫓아 완벽한 미터법을 추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불과 얼마 전에 전쟁을 마친 적국이었으니까." 새 영국식 갤런은 "정해진 온도와 압력에서 물 10파운드가 차지하는 부피"로 정의되었다. 1836년 미국 의회는 "새 영국식 갤런을 도입하는 대신 옛 체계에서 가장 많이 쓰였던 두 갤런을 고수하기로 했다. 건량에는 윈체스터(혹은 옥수수) 갤런을, 액량에는 퀸앤(혹은 포두주) 갤런을 쓰는 방식이었다."(160-2)


# 영국은 공식적으로 1969년 미터법 국가에 합류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미터법을 채택하지 않은 세 나라 중 하나이다. (나머지 둘은 라이베리아와 미얀마)


"시간 단위는 공통의 지식에 의존했다. 사람들은 성당에서 기도를 소리 내어 읊었기 때문에 기도를 어떤 빠르기로 암송해야 하는지 누구나 잘 알았다. "주기도문을 세 번 외울 동안 소스를 끓이면서 저어라", "주기도문을 세 번 외울 동안 육수를 졸여라"라고 하면 다들 무슨 뜻인지 알았다." "시간은 기도로 쟀다면, 온도는 통증으로 쟀다. 오븐의 열을 확인하려면 손을 안에 넣었다." 또는 "흰 종잇조각을 오븐 바닥에 놓았을 때 종이가 띠는 색깔로 파악했다. 종이 한 조각을 오븐에 넣고 문을 닫는다. 종이에 불이 붙으면 너무 뜨거운 것이다. 10분 뒤에 또 한 조각 넣는다. 타지 않고 까맣게 그을리면 그래도 여전히 너무 뜨거운 것이다. 또 10분 뒤에 세 번째 조각을 넣는다. 불붙지 않고 갈색으로 그을리면, 이제 고온에 굽는 작은 패스트리에 글레이즈를 입히기에 알맞은 시점이었다. 그것을 '진갈색 종이 열'이라고 불렀다." "이런 우왕좌왕은 20세기에 온도계가 내장된 오븐이 등장하면서 일거에 사라졌다."(176-7)


"근대 이전에는 많이 가공한 음식이야말로 노력이 많이 들어간 음식이었다. 교황과 왕, 황제와 귀족은 많이 씹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절구로 곱게 간 페이스트를 기대했다. 부잣집 부엌에서는 패스트리와 파스타를 훤히 비쳐 보일 때까지(즉 누군가의 팔이 아플 때까지) 얇게 밀었다. 소스는 점점 더 고운 체와 천으로 여러 번 걸렸다. 밀가루도 조리와 리넨으로 걸렸다. 견과는 먼지처럼 잘게 빻은 뒤 고운 설탕과 함께 비스킷을 구웠다." "훗날 르네상스 시대에는 음식 가공이 일종의 연금술로 간주되었다. 물질을 거르고 거르고 또 걸러서 재료의 정수 혹은 핵심만 남기겠다는 욕구였다. 그러나 우리는 갈고 빻는 기술을 살펴볼 때, 산업사회 이전 노동의 문제와 그 패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부자들은 정제한 음식에 많은 노동이 수반되는 것을 알면서도─지쳐 떨어지는 사람의 수로 판단한다─감내하고 선호했다기보다, 오히려 많은 노동이 수반되기 때문에 선호했다."(192-3)


"거품기 광품은 미국의 요리 역사에서 공기를 잔뜩 주입한 달콤한 요리가 점잖은 식탁에 오른 시기와 맞물렸다." 스노, 케이크, 머핀, 와플, 머랭 등 "이런 음식에는 모두 공기를 잔뜩 불어넣은 달걀이 쓰였다. 크림화한 노른자, 솜털처럼 부풀린 흰자. 주부의 평판은 그런 요리가 성공적으로 부푸느냐에 좌우되곤 했다. 도버든 다른 종류든 거품기를 써서 폭신하게 부풀린 케이크는 주부의 평판을 부풀렸다."(209) "미국의 거품기 열풍은 한낱 허깨비였다. 그것은 노동을 덜어주는 기구가 아니었다. (구식 거품기인) 프렌치 휩이 대부분의 특허품보다도 팔을 더 적게 쓰면서 같은 일을 해냈으니까. 그것은 노동과 시간을 덜어준다는 망상에 가까웠다. 피로에 대한 치료제가 아니라 위약僞藥을 제공했다." "거품기 열풍의 진정한 의미는 따로 있었다. 마침내 요리사들이 지친 팔에 저항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팔은 전기 믹서가 등장하고서야 쉴 수 있었다."(211-2)


"숟가락은 그것을 둘러싼 문화를 비추는 거울이다. 세상에는 포크를 주로 쓰는 문화도 있고 젓가락을 주로 쓰는 문화도 있지만,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문화는 없다. 그러므로 다양한 숟가락 형태는 여러 문화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준다."(231) "나이프, 포크, 숟가락 사용법은 예절이라는 더 넓은 문화와 관습에의 순응이라는 더 큰 문명의 일부였다. 틀린 포크를 쓴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는 있었다. 요컨대,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식기 사용법의 유행은 빠르게 바뀌었고, 한때 관습이었던 행동이 10년 뒤에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변하곤 했기 때문이다."(237-8) "포크는 17세기까지도 이상한 물건으로 인식되었는데, 이탈리아만은 예외였다. 왜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지역보다 앞서 포크를 채택했을까?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파스타."(241)


"젓가락이 중국 전역에서 보편적인 식사법이 된 것은 대충 한나라(기원전 206~기원후 220) 때였다."(246) 일본에는 "젓가락 공유에 대한 터부도 있다. 전통 신앙인 신토神道에서는 무엇이 되었든 부정하고 불결한 것을 꺼린다. 남의 입에 들어갔던 물건에는 씻으면 사라지는 세균만이 아니라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그 사람의 일부가 묻어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모르는 사람의 젓가락을 쓰는 것은 설령 깨끗하게 씻었더라도 영적으로 불결한 행위이다." "와리바시, 즉 싸구려 나무로 만들어서 손님이 직접 반으로 갈라 쓰는 일회용 젓가락의 유행은 그 점에서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와리바시는 식사 기술의 수용이 간혹 기능보다 문화에 좌우된다는 명제에 대한 좋은 예이다." "나이프와 포크의 문화, 그리고 젓가락의 문화는 언뜻 느끼기보다는 공통점이 많다. 두 문화는 함께 식사할 때 내심 상대를 '야만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도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제3의 집단을 멸시한다는 점에서 한마음이다."(249-51)


"냉장고는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여러 기술의 집합체였고, 그 덕분에 식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탄생했다. 냉장고는 단순히 사소한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서 뭔가를 차게 식히는 도구로도 쓰였지만 동시에 음식을 안전하게 보존하여 더 오래 더 먼 곳에서도 먹을 수 있게 하는 기술이었다. 냉장고는 음식이 일상에 끼어드는 방식을, 즉 우리가 음식을 구하고 조리하고 먹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냉장고가 있으면 요리사는 당장 먹어치울 수 없는 음식을 식초에 담그거나 소금에 절이거나 캔에 밀봉할 필요가 없었다. 냉장고는 부자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도 음식 섭취의 엄격한 계절성을 잊게 했다. 냉장고는 음식의 종류를 바꾸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전역의 사람들이 연중 신선한 고기, 우유, 채소를 먹게 되었다. 냉장고는 음식을 구입하는 방식도 바꾸었다. 냉장고가 없으면 슈퍼마켓도 없고, '주 1회 쇼핑'도 없고, 비상시에 대비해 냉동실에 음식을 쟁여둘 일도 없다."(263-4)


"최첨단 부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장비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현대적 주방에 진열된 가장 큰 기술은 부엌이라는 공간 자체임을 잊는다. 개별 부엌 도구는 오래된 것이 많다. 폼페이에도 우리의 것과 비슷한 냄비, 팬, 깔때기, 체, 칼, 절구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부엌과 비슷한 것은 없었다.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에 대부분의 가정에는 요리용으로 따로 마련된 방이 없었다."(314) "20세기의 위대한 변화는 새로운 중산층 부엌의 탄생이었다. 직접 요리도 하고 먹기도 할 사람들을 위한 부엌이 탄생한 것이다." "켈로그는 부엌이 온 가족의 행복을 낳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부엌은 가정의 중심이었다. 요즘 우리에게는 이 말이 너무나 자명하게 느껴져서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기조차 어렵다. 음식은 늘 삶에 필요한 요소였지만, 음식을 만드는 방은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야 현재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늘 요리를 해왔지만, '이상적인 주방'의 개념은 상당히 현대적인 발명품이다."(319-20)


실용적인 부엌 설계법은 1940년대에 쇠퇴하고 "이상적 주방은 사람들이 평소에 영위하는 생활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부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척하게 해주는 부엌으로 바뀌었다."(324) 그러나 "아무리 빈틈없이 설계된 현대적인 부엌이라도 그곳에서 우리는 과거의 도구와 기법에 의지한다. 웍으로 오징어와 채소를 볶을 때, 혹은 호리병 모양의 호박인 버터넛스쿼시와 홍고추를 넣은 링귀네를 만들기 위해서 반짝거리는 집게를 쥘 때, 당신은 불의 변형력을 이용하여 재료를 더 맛있게 만든다는 아주아주 오래된 활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요리는 단순한 재료의 혼합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기술이 만든 결과물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식사에 들어간 재료가 하나 더 있다. 애초에 요리를 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부엌은 우리가 요리할 때에만 생기를 띤다. 기술의 진정한 추진력은 그것을 사용하려는 욕망이다."(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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