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조선과 일본
조경달 지음, 최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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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조선 왕조와 일본


"일군만민 체제에서는 공론이나 직소가 중요한 언로였고, 건국 당초부터 중시되었다. 유교적 민본주의에서 정치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국왕이나 관료, 사족이었고, 백성은 정치의 객체일 뿐이었지만 그 대신 백성의 이의 신청은 확고하게 인정되었다." "유교적 민본주의는 그 외에도 권농교화, 진휼부조, 평균분배 등을 그 구체적 내용으로 하였다. 그리고 유교적 민본주의의 기초에는 농본주의가 있어 순박한 농부로 살아가는 것을 통속 도덕적으로 교화하였다. 백성은 먹을 것을 생산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재난에 처했을 때에는 인정(仁政)을 받을 권리를 가졌다. 민본인 이상 백성을 나라보다도 중시하였고, 민중들의 상호 부조도 장려하였다. 부민은 빈민을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였다. 양반은 유교적 민본주의를 내면화한 존재로 간주되었고, 민중 구제는 양반의 당연한 책무였다. 이러한 민본주의의 양상은 자연스럽게 평균주의를 이상으로 만들고, 균전사상(均田思想)을 배태하였다."(25-6)


"확실히 유교적 통치 방법은 근세 일본에서도 채용되었다. 근세 일본에서는 인정(仁政)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한 공의(公儀)와의 은뢰 관계(恩賴關係), 즉 〈백성 성립〉의 논리가 있었고, 교유(敎諭)를 축으로 하는 유교적 정치 문화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다이묘를 목민관으로 파악하는 논의도 있었다. 유교적 교양을 쌓는 것은 무사(武士)의 당연한 소양이었고, 유교 교육을 근간으로 하는 번교(藩校)가 18세기 끝 무렵부터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그러나 근세 일본에서 〈무위(武威)〉가 막번 체제 최대의 기반이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민본주의에 의해 형성되는 목민 의식이 있었지만, 엄격한 법치 사상과 〈구원〉에 의한 인정주의가 양립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유학자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라이 하쿠세키나 구마자와 반잔 등에게서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유학자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다."(30-1)


# 유교 이데올로기는 조선에서는 통치 원리 자체였지만, 일본에서는 통치 수단의 하나에 불과했다.


"〈정한征韓〉 사상은 메이지 시기에 들어 갑자기 대두한 것이 아니다. 조선 멸시관을 전제로 하면서 18세기가 끝날 무렵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하야시 시헤이는 조선을 일관되게 일본에 복속하였던 나라로 간주하였는데, 조선을 향한 침략을 노골적으로 언명한 선구자는 사토 노부히로였다. 그는 〈만주〉를 시작으로 하여 몽고, 조선을 침공하고, 결국 중국 본토로의 침략을 몽상하였다. 서서히 다가오는 〈서구의 충격〉에 대항하여 대륙 팽창의 방책을 제창한 것이다. 이러한 정략은 하시모토 사나이나 요시다 쇼인이 계승하였는데, 근대 일본의 팽창주의를 생각하는 선상에서 중요한 인물은 쇼인이다. 그는 〈취하기 쉬운 조선, 만주, 지나를 무력으로 평정하고, 교역에서 러시아에 잃어버린 것을 조선과 만주에서 토지로 보상받아야 한다〉라고 하여 장래 러시아에게 빼앗길 부(富)의 대체 보상으로 조선을 시작으로 한 대륙 침공을 구상하였다."(42)


"근세 일본에서는 불교나 신도(神道)도 유교와 병존하면서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고, 난학(蘭學)마저도 허용되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지켜야 할 절대적인 〈도〉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구의 충격〉이라는 위협에 대항하기 위하여 지켜내야 할 무언가를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국체〉였다. 〈국체〉란 미토 번사 아이자와 세이시사이가 쓴 『신론(新論)』(1825)에서 처음으로 정의를 내린 용어이다. 거기서 국체란 ① 천황의 일계(一系) 지배, ② 천황과 억조(만민)의 친밀성 ③ 억조의 자발적이고 끊임없는 봉공심(奉公心)이라고 하는 세 가지 요소를 주축으로 하는 국가 권력으로 설명하였다. 여기에 심취한 자가 쇼인이었다. 그는 〈국체〉론적 입장에서 『맹자』를 독자적으로 해석하였고, 거기에 기초하여 조슈 번의 대유(大儒) 야마가타 다이카와 논쟁을 벌였다. 쇼인의 입장은 〈도〉와 〈국가〉를 확연하게 분리하여 〈도〉 위에 〈국가〉를 위치시키는 것이었다."(43)


"메이지 유신으로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1869년 1월 31일, 신정부는 쓰시마를 통하여 왕정복고 사실을 조선에 고지하였는데, 그 서계(書契, 조일 간의 외교 문서)가 일방적으로 구례(舊例)를 배척한 것이었고, 〈황(皇)〉이라든가 〈칙(勅)〉과 같은 문자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조선 국왕을 격하하고 천황을 그 상위에 두는 것과 같은 문서였다. 조선은 이 서계의 수리를 당연히 거부하였다. 여기서 국교가 사실상 단절되었고, 근세에 곡절이 있었으나 꾸준히 구축되어 왔던 선린 관계가 단절되었다. 신정부는 조선이 이 서계를 거부할 것을 확신하면서 사절을 파견하였다. 기도 다카요시는 사절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조선이 이제까지 천황에게 조공해 오지 않았다는 점을 〈무례〉하다고 비난하면서, 조선이 복종하지 않을 때에는 〈신주(神州, 즉 일본)의 위엄을 펼칠 것〉을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건의하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은 애초부터 침략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44-5)


2장 조선의 개항


"(개항 과정에서) 숭문(崇文)의 나라임을 자부하는 조선이 도리어 무위의 나라임을 자부하는 일본 이상으로 완강히 저항했다는 점은 양국 문명 의식의 차이와 크게 관련된다." "이항로는 성현의 〈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존망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행위라 하여 유교 문명의 절대적인 수호를 준렬하게 설파하였다. 이 점은 현실의 조선 왕조가 존귀한 것은 〈도〉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실천을 포기한다면 그러한 왕조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국체〉 사상과는 전혀 달랐다. 일본에서는 〈국체〉 사상의 대두를 통해 〈국가〉가 절대화되었기 때문에 〈도〉는 부차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서구화로의 전환이 용이할 수 있었다. 서구에 대한 철저한 항전은 〈국가〉를 멸망시키는 것일 뿐이다. 서구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인식하자마자 존양론(尊攘論)이 개국론으로 급격하게 전환하였던 비밀이 여기에 있다."(59-61)


1875년 9월 20일부터 28일까지 운요호가 강화도에 출몰해 조선 관민을 도발한 사건은 "마실 물을 구하려고 초지진으로 향하던 차에 불의의 공격을 받았다는 식으로 날조되었다. 운요호의 강화도 접근은 명백하게 〈만국공법〉을 위반한 것이었는데, 마실 물의 보급이라면 〈만국공법〉에서 인정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운요호는 최초부터 조선군을 도발하였고, 반격을 시도하면서 영해를 침범했다." "일본 정부는 강화도 사건을 절호의 구실로 하여 일거에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실현하려 했다. 운요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 측에 잘못을 덮어씌워 조약을 체결하려는 계산이었다." "1876년 2월 10일, 구로다 일행은 군함 6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나타났고, 병력이 4000명이라 했다. 페리의 사례를 모방하려 한 위압 외교였다. 다음날부터 진행된 회담에서, 조선 측의 접견대신 신헌과 부관 윤자승은 〈만국공법〉에 대하여 아무런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고, 조약이 무엇인지도 몰랐다."(65-7)


# 2월 26일 조일수호조규 조인


3장 개항과 임오군란


"조선 정부는 이홍장의 중개로 미국과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조약 교섭의 임무에 나선 이는 박규수의 제자 김윤식이었다. 그는 근대 병기의 제조 학습을 목적으로 한 유학생 38명을 인솔하는 영선사의 임무를 가지고 1881년 11월 17일 이홍장이 있는 톈진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임무였고, 보다 중요한 임무는 미국과의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이었다. 위정척사파가 우세하였던 조선에서는 조약 교섭에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톈진에는 미국 정부의 명령을 받은 해군 제독 슈펠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섭에서 가장 논란이 된 내용은 청국의 종주권을 조약문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홍장은 〈속방〉 규정을 고집하였는데, 김윤식도 거기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이것은 청국의 〈속방〉이더라도 조선은 내정과 외교에 대해서는 〈자주〉라고 하는 의식을 이홍장과 김윤식이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81)


# 슈펠트의 반대로 〈속방〉 규정 명문화 무산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은 박정양, 조준영, 엄세영, 강문형, 민종묵, 이헌영, 어윤중, 홍영식 등 12명의 조사(朝士)와 27명의 수행원, 기타 2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수행원 가운데 유길준과 유정수는 게이오기주쿠에, 윤치호는 도진샤에 유학하였다. 조선 최초의 유학생이었다. 조사시찰단은 메이지 일본이 실시하였던 이와쿠라 사절단과 성격이 유사했다. 구미로 직접 향하기에는 자금과 시간, 어느 쪽으로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손쉬운 일본을 선택했다. 조사들은 각각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와쿠라 사절단이 서구 지향을 강하게 하고 귀국한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조사들은 일본이 〈부국강병〉을 달성해 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으나, 산업화의 추진 과정에서 누적된 국채 때문에 국가재정이 파탄 났다고 보아 메이지 유신을 반드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반면, 김옥균은 일본을 모델로 한 조선의 근대화와 대국화를 꿈꾸었다.(83-4)


민비의 실각과 대원군의 재등장, 청국의 개입과 대원군의 청국 억류 등 일련의 사태를 야기한 "임오군란에 대한 일본의 여론 동향은 어떠했을까? 우선 정부의 강경한 대조선 정책에 곧바로 응하듯이 관권파 신문인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일본의 피해를 크게 부풀려서 조선에 대한 적개심을 부채질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재하는 「지지 신보」는 청국에 대한 대항을 의식하여 충분한 육해군 병력의 출병을 호소함과 동시에, 군사적 충돌을 개시할 각오로 배상금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후쿠자와는 이제까지 동양 맹주론을 주장하여 조선이나 중국을 문명적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커다란 변절의 첫걸음이었다. 이 시기, 임오군란과 관련된 니시키에(錦繪)가 매우 많이 팔렸는데, 그것들은 하나부사 공사 일행의 탈출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하여 일본 민중의 조선에 대한 적개심을 한층 더 조장하였다. 그에 따라 헌금이나 종군 청원을 제출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91)


4장 갑신정변과 조선의 중립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 개화파가 지향한 것은 서구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 〈만국공법〉 체제로의 일원적 진입을 꾀하고, 종주권을 강화한 청국으로부터의 완전 이탈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국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단시일 안에 서구화를 달성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매우 좋은 모델이었다. 거기에는 〈아시아의 프랑스〉를 지향하려 한 김옥균에게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국 지향 노선도 일부 보인다." "그러나 김옥균에게는 다른 한편으로 아시아주의적 연대 사상도 있었다." "애초부터 조선에서는 〈부국강병〉은 권력주의적 패도(覇道)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어서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전통이 존재하였다. 그것을 대신하여 주창한 것이 〈자강〉이었다. 〈자강〉이란 민본을 기초로 두고 내정과 유교적 교화의 충실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국강병〉이 패도인 데 비하여 왕도라고 할 것이다."(106-7)


"급진개화파에게는 우민관도 강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본래 유교적 민본주의라는 것은 민을 위한 정치를 주장하면서도, 민을 정치의 주체로 둔다는 발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민평등의 사상은 개화파의 아버지인 박규수에 의하여 열렸으나, 구체적 실천의 차원이 되면 엘리트적 사(士)의 자각을 가진 개화파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갑신정변이 왜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라는 형태를 취하고, 더욱이 일본에게 전면적으로 의존하려 했는가, 그 본질은 전적으로 개화파의 우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개화파 정권의 붕괴에는 한성 민중의 공격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민중 사이에서는 국왕을 폐위한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민중은 계속해서 왕궁이나 공사관을 둘러싸고 일본인이나 개화파에게 투석이나 폭행을 가했다. 민중을 신뢰하지 않고 외국을 신뢰한 개화파 정권은 민중에 의해 타도되었다. 민중의 이반은 개화파 정권 붕괴의 결정적 요인이었다."(107-8)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시기, 일본의 자유 민권 운동은 중대한 위기에 처했다. 급진파는 계속해서 과격 사건을 일으켰고, 그것을 통제할 수 없었던 자유당은 1884년 10월에 해산했다. 갑신정변은 그러한 궁지를 타개할 한 줄기 빛이었다. 민권파의 신문은 들고 일어나 대청 강경론을 전개하여 1885년 1월 18일과 30일에는 도쿄와 오사카에서 각각 학생, 청년과 장사 등에 의한 지사 운동회와 반청 데모가 일어났다." "1885년 11월 23일 오이 겐타로나 고바야시 구스오가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오사카 사건은 자유 민권 운동이 국권론으로 크게 선회한 내부 사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사건은 구 자유당원들이 무력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민씨 정권을 타도하려 한 계획이 발각된 것이었다. 그러나 개화파에 대한 연대라고 말하였지만 사실은 침체한 자유 민권 운동의 활기를 살려내기 위해서 사건을 바깥에서 꾸민 것에 불과했다. 조선 문제를 이용하려 했을 때, 민권론을 국권론으로 쉽게 전환하였다."(109)


5장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


"갑오농민전쟁은 근대 조선 역사상 획기적인 민중 운동이었다. 그것은 유교적 민본주의의 정치 문화를 배경으로, 무력적으로 중개 세력을 배제하고, 일군만민의 논리에 호소하여 민중적 요구를 실현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반년도 채우지 못한 기간이었지만 민중 자치를 실행하였던 것은 조선 역사상 그때까지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일군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상황이 출현하는 가운데 민중은 농민군 간부의 지도를 이탈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지향하였다. 농민 전쟁의 전 과정에서 책임을 지려 했던 전봉준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바였다. 그러나 민중은 자신들이 그리던 유토피아를 자율적으로 실현하려 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개혁이 설령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국왕은 반드시 그것을 용서해 주리라는 낙관론에 취해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충군애국〉 사상과 의병 의식을 가지고 궐기했던 전봉준과, 유토피아의 실현을 서두른 민중 사이에는 분명히 의식의 괴리가 있었다."(148-9)


"갑오개혁은 갑오농민전쟁에서 나타난 농민의 제반 요구를 국정 전반에 걸친 근대적 여러 개혁을 통하여 응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 재정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실현은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급격한 〈위로부터〉의 개혁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영세한 농업이나 상공업에 대한 개혁,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도리어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도 농민은 소농 회귀적인 토지 정책을 바라고 있었는데, 갑오개혁 정권은 지주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거기에 일절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또한 조세 금납화는 농민이 더욱 더 상품 화폐 경제에 편입되어 몰락의 길을 가속화하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농민들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중은 갑오개혁 정권과는 반대로 반근대적 지향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개혁이 일본의 간섭 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근대화와 침략을 겹쳐 보이게 만들어 반일·반개화의 기운을 한층 고조시켰다."(152-3)


6장 대한제국의 시대


"고종은 칭제(稱帝) 상소를 받아들이면서 〈6군(천자의 군대)과 만민의 바람〉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따른다는 수사를 구사하였다. 공론 중시는 유교적 민본주의의 기본이었고, 고종은 이제까지의 유교적 정치 문화를 존중하면서 칭제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고종은 일군만민 사상이 성숙하였고, 갑오농민전쟁에서 정점에 도달하였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조 신원 운동이나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대처도 당초에는 철저히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선무공작이나 회유공작을 실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종은 홍범14조의 발포 다음 날에 낸 칙령 제14호에서 〈군주가 자주를 하려고 하더라도 백성에게 의지하여야 하며, 나라가 독립하려고 하더라도 백성과 함께해야 한다. 너희 서민들은 마음을 하나로 하여 다만 나라를 사랑하고, 그 기운을 같이하여 오직 군주를 사랑하라〉라고 하여 〈충군애국〉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165)


"이리하여 조선은 대한제국이 되었다. 그 국제가 바로 1899년 8월에 공포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이다. 이것은 겨우 전체 9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문장에 불과하나, 대한제국이 〈자주독립의 제국〉이며, 그 정치는 〈만세불변의 전제 정치〉로, 황제는 〈무한의 군권〉을 갖는다고 선포하였다. 황제는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관리 임명권, 외교권, 은사권 등 모든 권력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국제는 결코 헌법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국가의 이념이나 신민의 권리·의무, 끝으로는 관권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대한제국은 〈구본신참(舊本新參)〉을 표방하였고, 오히려 유교와 민본주의는 국가의 원리였다. 이미 신민의 생명 재산에 대한 보호에 대해서는 홍범14조와 칙령 제14호에 명기되어 있었다. 대한국국제는 단지 민본주의 이념을 당연하다는 듯이 실천하며, 한없이 자애로워야 하는 황제의 권능을 명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167)


"독립협회에 대한 조삼모사식의 대응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종은 대원군에게서 물려받은 책사적 일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매우 경솔하고 사려가 부족하였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너무나 정실(情實)적인 인사는 총애와 경질을 반복하였고, 때로 믿기 어려운 사건까지도 일으켰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이권을 도모한다면서 그때까지 총애하던 전 역관 김홍륙을 유배에 처하자 원한을 사 1898년 9월 11일 만수성절(황제의 탄생일)의 커피에 아편이 들어갔던 것이다. 이때 고종은 무사하였으나, 황태자 척(拓)은 그 후 평생 병약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일군만민의 정치라고 하는 것은 현명한 군주를 전제로 하는데, 그것은 부단한 인격적 도야와 신하와 변함없는 신뢰 관계를 구축한 위에서 비로소 성립한다. 그것은 단순한 독재와는 구별되는 이상주의적 군주 정치이다. 고종에게 군주라는 자리는 짐이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었고, 그 점은 노회한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와의 대치 속에서 분명해졌다."(187)


7장 러일전쟁하의 조선


"양국이 결정적 대립을 맞이한 것은 1903년에 들어서다. 러시아는 같은 해 4월 이행하기로 되어 있던 만주로부터의 제2기 철수를 실행하지 않고, 도리어 만주 지배를 강화하려 하였다. 더욱이 5월경부터 압록강 조선 측 하구에 있는 용암포의 토지를 매수하여 건물들을 건축하고, 삼림 사업을 개시하려 하였다. 러시아가 조선 전역으로의 본격적인 진출을 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용암포로의 진출은 일본의 만주 진출에 대한 방어선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삼국 간섭 이후 〈와신상담〉을 구호로 삼아 온 일본에서는 관민 모두에게 개전의 열기가 비등해 있었고, 조선에 대한 군사적 지배의 달성을 열망하고 있었다." "2월 4일 어전 회의에서 개전이 결정되자, 8일 연합 함대가 뤼순 항 바깥의 러시아 함대에 선제공격을 가했다. 그보다 앞선 6일, 일본은 조선의 진해만과 부산, 마산의 전신국을 군사 점령하였다. 러일전쟁도 청일전쟁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군사 행동이 선행되었던 것이다."(199-200)


# 한일의정서 조인(1904.2) 이후 조선의 상황

1. 군율 체제의 성립 : 군용 시설 훼손, 치안 방해 행위를 가혹하게 처벌하고 집회·결사·언론·출판 행위를 단속(식민지 무단 통치의 원형)

2. 군용지 수용 : 필요 면적의 16배 이르는 토지를 헐값에 군용지와 철도 부지로 강제 수용

3. 인부 징용 : 촌락을 연대 책임으로 묶어 철도 부설 인부를 강제 징용(식민지 총력전 체제기 강제 연행의 원형)

4. 화폐 정리 : 한국의 화폐 발행권을 강탈하고 오사카 조폐국에서 제조한 신화폐를 본위 화폐로 확정


"(각지에서 속출하는) 민란 가운데 유달리 주목되는 것은 9월 경기도 시흥에서 일어난 민란이었다. 이 민란은 군수 박우양이 일본인과 협력하여 인부의 차출과 그에 관련한 비용을 군민에게 부과한 일을 단초로 하여 발생하였다. 군민은 전통적인 민란의 규칙에 따라 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군수가 일본인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일본인 인부 7~8명을 관아로 데려왔을 무렵 군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일본인 두 명을 살해하고, 네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군수와 그의 아들까지도 살해하였다. 왕명을 받은 군수는 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민란의 규칙이었다. 그것은 유교적 민본주의라고 하는 정치 문화를 전제로 하여 성립해 있는, 정부와 민중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이 규칙이 깨졌다는 것은 중대한 사태를 의미했다." "다만 동학 이단파와 같은 강력한 구심력을 가진 세력이 존재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민중의 싸움은 산발적, 한정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219-20)


8장 식민지화와 국권회복운동


"1905년 11월 18일, 보호조약의 체결로 한국에는 통감부가 설치되고 통감이 파견되었다. 한성, 평양, 부산, 인천, 목포, 군산 등의 요지나 개항장에는 이사청을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종래의 영사관 업무를 담당함과 동시에 조약 의무 이행의 명목하에 지방 시정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초대 통감으로 취임한 자는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는 1905년 12월 21일 임명되었고, 통감부는 한국 외부(外部)를 청사로 삼아 1906년 2월 1일 개청하였다. 통감은 천황에게 직속하였고, 한국 외교를 감리 지휘하는 권한을 가졌다. 또 황제를 내알(內謁)하여 정무의 소통을 꾀하였고, 정부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부의 중요 관직에는 보임(補任) 추천을 실시하여 한국 시정에 대하여 권고를 할 수 있었다. 더욱이 통감은 한국 주차군을 지휘하는 권한을 가졌다." "이리하여 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내정권조차 반쯤 박탈당한 상태가 되었다."(229-30)


"의병 운동이나 국채 보상 운동이 고조되는 한편으로, 고종은 밀사 외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헤이그 밀사 활동이 1907년 6월 29일 이토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격노했다. 7월 3일 이토는 고종을 알현하여 그 행위를 〈음험〉한 것이라고 힐책하였고, 전쟁 선포나 마찬가지라고 윽박질렀다. 이어서 총리대신 이완용에게도 마찬가지로 협박하며 고종의 양위를 다그쳤다. 일진회 송병준은 양위하지 않는다면 자결하든가, 천황에게 직접 사죄하든가, 아니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고종을 다그쳤다. 결국 7월 20일 양위식을 거행하였고, 황태자 척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바로 순종(純宗)이었다." "이토는 다음 단계의 정책을 즉석에서 실행에 옮겼다.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 협약으로 일본은 통감에 의한 내정 지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법령 제정과 행정 시행, 관리 임면 등은 통감의 동의가 필요하게 되었다."(242-4)


9장 한국 병합


"순종의 순행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한성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통감을 사임할 뜻을 굳힌 이토에게 1909년 4월 10일 수상 가쓰라 다로와 외상 고무라 주타로가 방문하여 한국 병합안을 제시하자, 이토는 군말 없이 병합안을 승인했다. 이토는 6월 14일 통감을 사임하였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건」과 「대한시설대강」을 각의에서 결정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 병합을 실시하기로 했다." "명성에 신경 쓴 이토는 1908년 말 무렵부터 통감 사임을 넌지시 말하고 있었는데, 순종의 순행 실패로 일본의 조선 지배가 합의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통감 사임만이 아니라 병합도 용인하였던 것이다. 애초부터 보호국이든, 자치 식민지든, 병합 일체화든 조선이 일본의 완전 식민지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토는 지배 비용이 든다는 점과 국제적으로 무단한 행위라는 인상을 준다는 데 신경 썼던 것에 불과했다."(275-6)


"외상 고무라 주타로는 1910년 2월 「한국 병합에 관한 건」과 「대한시설대강」을 각국에 통지하였다. 그리고 동맹국인 영국에 대하여 6월 3일 관세 자주권이 없는 조선에서 관세를 당분간 현행대로 할 것을 조건으로, 병합에 대한 승인을 얻었다. 미국은 만주의 문호 개방을 호소하는 가운데 일본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있었으나, 만주에서 강고한 이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러시아로부터 협력을 얻어낼 수 있다면 침묵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일본의 간도 진출에 일시적으로 불신을 품고 있었는데, 문호 개방을 제창하면서 실제로는 만주로의 경제적 진출을 꾀하는 미국에게 한층 더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7월 4일 제2차 러일협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미국에 대항한다는 취지에서 〈분계선〉을 경계로 하여 각각 〈특수 이익〉을 인정하여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정이었다. 이제 한국 병합은 언제라도 감행할 준비가 끝났다."(287-8)


"1910년 5월 30일 병약한 소네 아라스케를 대신하여 육군 대장이며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제3대 통감이 되었다. 6월 3일 각의에서 조선에는 당분간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천황에 직속하는 총독이 대권으로 통치한다는 「병합 후 한국에 대한 시정 방침」을 결정하였다. 새로운 지배 기구는 통감부를 대신하여 총독부라고 불렀고, 데라우치는 초대 총독으로 결정되었다." "데라우치가 병합의 결행에 착수한 것은 8월 16일이다. 이날 데라우치는 이완용을 관저로 불러 병합안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그 형식은 〈합의의 조약〉이어야만 한다고 했다. 보호국이라는 것은 자치 혹은 독립을 부여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병합이라는 말은 거기에 반하는 정책으로서 국제적으로 일본의 면목을 지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합〉이라는 말은 대등한 일체화의 어감을 갖는 〈합방〉이나 〈합병〉과는 달랐다. 한국 폐멸까지도 완곡하게 의미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고안한 것이었다."(288-9)


#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 조인(1910.8.22) 및 공포(8.29)


"한국병합조약의 체결은 조선 사회에 그때까지의 조약과 비교하자면 사실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또 황제 환상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생활주의로 살아가는 민중에게 선정이나마 베풀어 준다면 지배자의 변경은 감수할 수 있었다. 민중의 내셔널리즘은 오히려 다분히 시원적이었다." "병합조약과 동시에 조선귀족령을 실시하여 76명의 조선인이 귀족에 포함되었다. 한규설과 유길준을 비롯한 6명이 작위 수여를 거부했다." "순국자는 전국적으로 줄을 이었다. 양반 유생 9,811명에게는 경로금이 지급되었고, 효자 등 향촌의 모범자에게는 포상을 수여하였다. 또 대사면을 실시하여 부정을 한 지방 관료도 그 죄를 용서받았다. 그리고 일반 민중에 대해서는 미납 세금을 면제하였고, 추수에 한하여 지세를 5분의 4로 감면하였다. 더욱이 13도에는 국탕금 1700만 엔을 지출하여 진휼이나 교육 보조금 등에 충당하였다. 이렇게 성대한 대접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의 진수성찬과 같은 것이었다."(2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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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길 2021-03-06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연구하심에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 인간 이봉창 이야기
배경식 지음 / 너머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3·1운동 당시 이봉창은 무라타 약국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봉창이 3·1운동에 관해서 언급한 것은 1932년 9월 16일에 있은 첫 공판 때뿐이다. 일본인 관선변호사가 "그것을 듣고 어떤 소감을 가졌는가"라고 묻자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이처럼 이봉창은 3·1운동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무엇 때문에 그러한 운동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으며, 직접 참여하지 않고 방관자로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다면 왜 이봉창은 3·1운동이나 민족운동과 아무런 상관없이 성장했을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식민의 아픔을 느낄 수 없었던 가정환경이다." 이봉창의 아버지 이진구는 식민지배와 약탈에 필요한 건축 수요 및 이주 일본인들을 위한 주택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한일합방 이전 시기부터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을 영위하면서 큰 재산을 모았다. "이봉창이 민족운동과 무관하게 자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용산의 지역적 특징을 들 수 있다."(35) 


"이봉창이 어린 시절을 보낸 용산 일대는 '조선 내 일본'으로 불릴 정도로 일본의 각종 군사시설과 운수, 통신 기관이 밀집된 식민통치의 심장부였다. 용산은 경성 시가지의 외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에 전차 노선이 들어오고, 상수도도 제일 먼저 설치되는 등 도시개발 과정에서 막대한 특혜를 누렸다." "이러한 주변 환경은 이봉창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봉창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을 접하면서 다른 조선인보다 빨리 일본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조선인의 일본어 해독능력은 1913년에 0.61%였던 것이 10년이 지난 1923년에도 1.81%에 불과했을 정도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이 드물었다." "이봉창은 일본인 상점에 취직하여 일본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면서 일본어에 더 능숙하게 되었고, 그것은 또한 그가 나중에 일본행을 결심할 수 있었던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36-7)


일본으로 가기 전의 이봉창의 행적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일은 1925년 10월에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최초의 근대적인 인구센서스인 간이국세조사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한 것이다. "간이국세조사위원이 '명예직'이었다는 것은 총독부의 정책에 협력하고 있던 조선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뒤에 유명한 친일파가 된 이들의 상당수가 관직 경력에 '국세조사위원' 항목을 자랑스럽게 적어넣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시 국세조사위원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적어도 일정한 사회적 지위와 총독부의 식민정책에 대한 동의 등이 인정되어야만 선발되었던 것이다." "이봉창이 국세조사위원으로 활동하여 총독으로부터 상금과 함께 나무잔까지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에 불만을 품고 용산역 근무를 그만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의 식민정책에 협조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65-7)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업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자 "이봉창은 조선인으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자책했다. '내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그쪽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결코 그쪽이 나쁜 것이 아니라 부탁하는 내가 나쁜 것이다. 유치한 것이다. 내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보통사람처럼 얼굴을 내민 것이 잘못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이봉창은 자신이 비참해졌다. 그러면서도 이런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인간인데도 똑같이 대접해 주지 않는다. 나도 일본인임에 틀림없다. 신일본인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이봉창이 조선인이기 때문에 거절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조선인이 아니라 '신일본인'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조선인으로서 차별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할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안정된 직장을 구해 평범한 인간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80-1)


"1926년 12월 25일, 몸이 약해 병으로 고생하던 다이쇼(大正) 천황이 사망하자 오랫동안 섭정을 해오던 히로히토가 도쿄 궁성에서 조견례를 갖고 천황에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대례, 곧 공식적으로 천황에 즉위하는 행사는 다이쇼의 복상이 끝나는 1928년 11월 10일에 교토 고쇼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이봉창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왕의 얼굴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란 것을 처음 깨달았다." 아마가자키 출장소 공작계의 상용인부로 일을 나가는 동안 능숙한 일본어 실력과 성실한 작업 태도를 인정받아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생활이 안정되자 이봉창은 천황의 얼굴을 봐야만 제대로 된 진짜 일본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자신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노동자이지만 돈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천황의 얼굴을 보겠다고 다짐했다."(93-4)


그러나 정작 즉위식날 검문에서 소지하고 있던 한글 편지 때문에 유치장에 갇힌 신세가 되자 "이봉창은 자신을 '불행한 인간'이라고 체념하면서,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을 유치장에 집어넣는 '얄궂은 세상'을 원망했다. 그럴수록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조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런 압박과 차별을 받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이봉창이 당시 느꼈던 분노와 절망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책할수록 더 깊은 절망에 빠질 뿐이었다. 결국 이봉창은 자신이 조선인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98) "유치장에 갇혀 있는 동안 이봉창은 취조를 받거나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이봉창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봉창은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서 처음으로 조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막연한 생각에 불과했다."(100-1)


"이봉창은 오사카에서 조선인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쓰루하시에서 생활하면서도 (정신적 안식처가 되어주는) 모든 것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는 진짜 일본인처럼 행동한다면 일본인들에게 차별대우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인과의 교제를 완전히 끊었다. 쓰루하시를 비롯하여 오사카에는 친구들도 많이 살고 있었지만 이봉창은 그들을 만나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봉창은 오사카에 살고 있는 사랑하는 조카딸 은임과의 연락도 끊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정책은 결코 이봉창의 그러한 '소박한 열망'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105-7) "결국 이봉창은 불경기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민하던 상황에서 상해에 가면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그곳에서는 조선인이라는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떳떳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생각을 품고 상해행을 결심했다. 이봉창이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서 들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119)


1931년 1월 초순 임시정부 사무실을 방문한 이봉창을 눈여겨본 김구는 며칠 뒤 "이봉창이 묵고 있는 여관을 찾아가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제 나이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생 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봉창의 이 말에 김구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때서야 김구는 이봉창이 의기남아로서 살신성인할 큰 뜻을 품고 상해로 건너와서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김구는 이봉창의 위대한 인생관을 듣고 감동의 눈물이 벅차오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봉창은 겸손한 마음으로 나라 일에 몸바칠 수 있도록 지도해 달라고 김구에게 청했다. 김구는 쾌히 승낙했다."(129)


"이봉창이 도쿄로 떠난 1931년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암흑의 시기'였다. 3·1운동 직후의 혁명적인 열기와 독립의 희망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22~23년을 넘어서면서 국제정세가 점차 안정되고 일본이 승승장구하면서 기대와 달리 독립의 희망은 점점 멀어졌다. 그럴수록 독립운동가들의 이탈은 늘어났다. 그리하여 192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부여잡고 견뎌야만 하는 긴긴 절망의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특히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직전인 1929년과 1930년 무렵은 뚜렷한 독립운동의 성과가 없었던 가장 힘든 시기였다." "특히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이 그 여세를 몰아 만주 전체를 장악하고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이 건설되면서 독립운동 최대의 근거지였던 만주에서의 무장투쟁도 어렵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 최고조에 이르렀던 국내의 대중투쟁도 현격히 줄어들었다."(185-6)


"(천황 폭살을 시도한) 이봉창은 결정적인 실수 두 가지를 범했다. 우선 천황의 행차코스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은 거사 당일 천황의 이동코스를 제대로 알지 못해 시간을 놓치고 당황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실수는 천황에 대한 정보를 전혀 입수하지 않은 것이다. 천황의 사진은 물론이요 천황이 야외행차를 할 때에 행렬의 어디쯤에서 움직이는지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지 않았다." "천황 폭살이라는 엄청난 거사를 오로지 이봉창에게만 일임한 김구의 잘못도 있었다. 김구 자신이 일본 사정에 어두웠고, 이봉창을 도와줄 동지 한 명 없이 혼자 파견했다. 물론 당시의 임시정부 형편으로 이봉창을 도와줄 인물을 함께 일본에 파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봉창 한 명을 도쿄로 보내는 여비를 마련하는 데도 반 년 이상이 걸렸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김구는 도쿄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이봉창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김구의 결정적인 실수였다."(211)


# 1932년 1월 8일 거사 실행 그리고 실패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일본의 천황을 죽이려고 시도한 적은 딱 두 번뿐이었다. 첫번째는 이봉창 이전에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가 계획단계에서 발각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무정부주의자 박열의 경우이고, 두번째가 이봉창의 경우이다. 물론 1924년 1월에 의열단원 김지섭이 천황이 사는 고쿄의 궁성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니주바시에 폭탄을 투척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천황의 폭살을 직접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239) "김구가 테러리즘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승승장구하면서 독립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들어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못했을 때였다. 그때 김구는 실력양성이나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조직이나 자금도 부족한 상황에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일대 타격을 가해 꺼져가는 독립운동의 불씨를 다시 살릴 방법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테러리즘이었다."(243)


"비록 이봉창 의거는 실패했지만 동경의거를 통해 김구와 임시정부는 재기에 성공했다. 한동안 임시정부에 냉담했던 미주 동포들이 다시 뜨거운 성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동경사건을 보고) 찾아온 청년들에게 김구는 제2, 제3의 동경의거의 임무를 주어 적지로 침투시켰다. 유진식과 이덕주에게는 조선총독 암살을, 최흥식·유상근·이성원·이성발 등 4명에게는 관동군사령관, 관동청장관, 남만철도 총재 등 만주침략의 원흉을 폭살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각각 국내와 만주로 파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홍구공원 야채시장에서 채소장수를 하던 또 한 청년이 김구를 찾아왔다." "그가 바로 "장부가 한번 집을 나가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고향을 떠나 상해에 와 있던 윤봉길이었다." "이봉창의 희생으로 인해 꺼져가던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다시 불길을 당긴 것은 매우 중요한 공적이라 할 수 있다."(2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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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러일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 - 동아시아 50년전쟁 다시 보기
하라 아키라 지음, 김연옥 옮김 / 살림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 메이지·다이쇼·전전 쇼와 시대의 전쟁


보신전쟁(1868-69) → 세이난전쟁(1877) → 청일전쟁(1894-95) → 의화단전쟁(1900) → 러일전쟁(1904-05) → 1차 세계대전 → 만주사변(1931) → 중일전쟁(1937) → 아시아·태평양전쟁(1941)


제1장 청일전쟁 : 제1차 조선전쟁


"폐번치현 직후인 1871년에 일본은 청국과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은 상호 간에 영사 재판권을 인정하는 등 일본이 처음으로 외국과 맺은 '대등'한 조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국과 일본이 대등하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조선에 대한 일본의 입장이 유리해지는 것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청일수호조규 체결 이전에 일본과 조선의 관계에서 주의해야 할 사건이 있습니다. 1868년 일본은 왕정복고를 알리는 국서를 조선에 보냈는데, 조선이 국서를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스스로를 '황皇' 혹은 '칙勅'이라는 문자를 사용해서 국서를 보냈는데,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종주국인 청국 황제뿐이었습니다. 만약 일본이 '황皇'을 사용하게 된다면, '왕王'으로 칭하고 있는 조선이 일본보다 격이 내려가는 셈이 됩니다." "이에 더해 1873년 부산 왜관에 일본을 모욕하는 내용을 게시한 사건은 훗날 유수정부가 논쟁하던 '정한론'의 빌미가 됩니다."(59-60)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조선왕궁을 점령한 일은 "단순한 '정변'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일본과 조선 사이에 벌어진 전쟁 행위였습니다. 청일전쟁 개시 직전에 사실상 '조일朝日전쟁'이 일어났던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7월 25일 일본 함대가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합니다. 이때 훗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되는 도고 헤이하치로가 청나라 병사를 태운 영국 선적 화물선 고승호高陞號를 격침하라고 지시합니다. 청일전쟁 선전포고 직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제법상으로 논란을 일으켰고 외교적으로도 크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불문에 부쳐지지만 국제관계상 매우 위태위태한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이 조선에 최후통첩장을 내민 7월 20일 직전인 7월 16일에 일본과 영국 간에 매우 중요한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바로 (치외법권 철폐와 관세 자주권 일부를 회복하면서 서구와 맺은 불평등조약을 시정하는 첫걸음이 된) 영일통상항해조약입니다."(69-70)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도 언급했지만, 청일전쟁 개시와 조약개정은 사실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영일통상항해조약이 7월 16일에 조인되고 그 직후인 7월 20일에 일본이 조선에 대해 최후통첩을 했다는 점입니다. 즉 영국과 조약개정 합의가 이루어지기 직전 상황이었는데 성사되자마자 조선 내정에 간섭해 23일 왕궁을 점령하고, 25일에는 풍도해전을 치르고, 29일에는 육상에서 일본군이 충남 천안 성환읍에서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고, 30일에는 아산에 있던 청국 군대를 공격해 평양으로 패주敗走시킵니다. 이후 8월 1일에 청나라에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당시에는 선전포고를 한 후에 전투를 개시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8월 1일 선전포고를 한 시점부터 청일전쟁을 다루려 한다면 많은 것을 놓쳐버리는 셈이 되므로 이 전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76)


"1895년 4월 17일에 체결된 청일강화조약 제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는 문구로 시작해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물貢物 헌납이나 전례典禮 등은 앞으로 일절 폐지할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 부여한 제일 큰 목적은 한반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 확보에 있었으므로 제1조에 조선이 '독립 자주'국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기입한 것입니다." "강화조약 중 특히 중요한 것이 제6조 제4항인데, 이 조항은 청나라 안에서 일본인이 공장을 지어도 좋으며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해도 좋다는 권리(자본수출권)였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여러 열강이 좀처럼 얻어내지 못한 자본수출권을 일본이 따낸 것은 구미 열강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준 셈이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것을 일본이 구미제국에게 준 '경제적 뇌물'로 비평하기도 했습니다." "이 조항 때문에 이후 청나라는 여러 열강의 세력권 설정에서 경쟁의 무대가 됩니다."(81-3)


"청일전쟁 후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얻은 배상금 약 3억엔 중 1억 8,000만 엔을 육군과 해군을 확장하는 비용으로 썼습니다. 나머지는 제강소製鋼所를 설치하거나 철도 부설비·전화 설치비로 사용하는 등 청일전쟁 후 '전후경영'이라는 명목으로 군비중심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한편 방대한 배상금을 떠안게 된 청국은 자력으로는 지불할 수 없어 열강으로부터 빌린 외채로 지불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타이완 정복전쟁으로 타이완이라는 식민지를 얻으면서 제국주의 국가 대열의 끝자락에 합류하는 데 성공합니다. 반면 청국은 금융·외교적으로 종속국, 반半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이렇듯 두 나라가 정반대 방향으로 운명이 갈리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청일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3국간섭으로 일본이 포기한 랴오둥 반도의 뤼순·다롄을 조차租借하고, 독일은 산둥 반도의 자우저우만을 조차했으며, 영국은 6월에 주룽 반도를, 7월에 웨이하이웨이를 조차했습니다."(90-1)


"후세인의 관점에서 메이지 천황은 메이지 1년부터 군주로 군림한 것처럼 생각되기 일쑤이지만, 당시 서민들의 대부분은 쇼군 가문은 알아도 천황에 대해서는 여전히 "천자天子라는 존재가 있는 듯"하다는 정도로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청일전쟁을 통해 국민의식이라는 것이 서서히 서민들 속에도 싹트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국가인 일본이 이웃대국인 청나라와 싸우며 자신들의 나라에는 천황이라는 위대한 분이 계시다, 그전까지만 해도 제일 위대한 사람은 그 지역의 영주라고 여겨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더 위대한 천황이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청일전쟁 즈음에 '대일본제국의 국민'이라는 표현을 거쳐 "처음으로 사람들 사이에 '국민'의식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그것이 서서히 정착되어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청일전쟁에 의해 일본에 '국민'이 탄생하고 천황의 권위도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101)


제2장 러일전쟁 : 제2차 조선전쟁


"의화단전쟁의 8개국 연합군(일본·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미국) 가운데 대활약을 한 것은 일본군이었습니다. 청국과 인접한 곳에 있으며 신속하게 군대를 파견할 수 있었던 일본은 열강 군대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1900년 10월 열국列國 공사가 모여 의화단전쟁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논의하는 제1차 회의가 열립니다. 청국에 대한 강화조건을 제시한 이듬해인 1901년 4월에 열국은 4억 5,000만 냥의 배상금을 청국에 요구했습니다. 청국도 이를 수락했습니다. 배상금은 39년간 분할 지불하며, 다구 포대를 철거하고, 베이징 공사관 지구에 군대를 주둔시켜도 좋다는 승인을 받습니다. 일본에 배당된 배상금은 3,479만 냥이었습니다. 참고로 이때 각국 군대 주둔을 허락한 것이 훗날 중일전쟁의 방아쇠가 되는 루거우차오 사건의 원인遠因이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중국 파견' 근거가 된 것은 이때 열국이 얻어낸 베이징의 군대 주둔 항목이었습니다."(107-9)


# 제1차 영일동맹 성립(1902.1) : 일본을 이용하여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했던 영국의 의도


"1904년 2월 10일 러일전쟁을 선전포고한 날로부터 2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인 2월 23일,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하기' 위해 군사상 필요한 지역을 일본이 접수해 사용할 것을 승인하는 내용이 포함된 「한일의정서」를 한국에 들이밀었습니다. 그러고는 개전 후인 5월 말에 '제국의 대한對韓 방침'을 결정, 한국의 군사·외교·재정·교통·통신 등을 일본의 감독하에 둘 것을 정합니다.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고 일본인 혹은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 고문·외교 고문을 둘 것, 한국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때에는 일본과 반드시 사전에 협의할 것 등을 용인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인 이른바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2개월 후인 1905년 11월에는 '제2차 한일협약'에 강제적으로 조인하게 해 한국에 통감을 두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에 임명합니다. 즉 일본은 러일전쟁 시기에 한국 지배를 사실상 거의 확정시켰던 것입니다."(113-4)


"러일전쟁은 군사사적軍事史的으로는 육전에서 랴오양 전투·사허 전투·펑톈 전투를 벌였지만 전혀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군이 퇴각하면 일본정부는 국민에게 "이겼다. 이겼다"고 계속 선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개별 전투의 실태는 일본육군이 러시아육군에게 명백하게 이겼다고 볼 수 없었고, 언제 역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겨우겨우 '무승부'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일본해군도 러시아해군 극동의 두 거점인 뤼순과 블라디보스토크를 봉쇄하려는 작전을 펼쳤지만 이 역시 계획대로 순조롭게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육군 측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간신히 뤼순을 공략했던 것입니다." "러일전쟁은 이른바 '상처투성이의 무승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동해해전에서 이긴 일본이 강화조정을 미국에 먼저 의뢰했고, 강화조건도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던 것을 봐도 명확히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122-4)


"러일강화조약 제1조는 의례적인 조항으로 실질적인 조항은 제2조부터입니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군사상·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가짐'을 인정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 역시 한국에 관한 조항이었는데,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의 첫 번째 전쟁 목적은 한국을 확보하는 것이었음을 이 조항이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제5조에서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의 조차권을 일본에 양도할 것을, 제6조에서는 청국의 승인을 전제로 창춘·뤼순 간 철도를 일본에 양도할 것을 규정했습니다. 이들 조항은 훗날 남만주철도, 즉 만철滿鐵이 됩니다. 제9조에서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이른바 남쪽 가라후토 섬을 러시아가 일본에 양도할 것을 규정했습니다. 포츠머스 조약의 주요 항목은 이것이 전부였고 배상금 항목은 아예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강화조약을 성립시켜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었던 것입니다."(125-6)


제3장 한국병합과 21개조 요구


"1909년 7월 6일 일본정부는 각의에서 사법과 감옥 사무를 일본에 위탁하게 하는 등 한국병합방침을 결정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0월에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조약이 조인되고 1주일 뒤인 8월 29일에는 조약이 공포와 함께 즉시 시행되고 메이지 천황은 「한국병합조서韓國倂合詔書」를 발포합니다." "일본은 한국병합 직전인 7월 4일 러시아와 '제2차 러일협약'을 맺어 만주에서 얻는 특수이익을 서로 존중해주고 군사동맹조치를 취하자고 확인합니다. 러일전쟁 결과 기존의 만주와 한국 사이에 있던 러시아와 일본의 권익 분계선이 좀 더 북쪽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남만주와 북만주를 사이에 두고 선을 긋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즉 일본은 한국에 대해 자유 재량권을 얻은 셈이 되어 다른 제국주의 열강도 공공연하게 또는 묵인하는 형태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했습니다."(169-71)


# 신해혁명(1911.10) 봉기 - 청나라 선통제 퇴위(1912.1.1) - 메이지 천황 사망(1912.7.30), 다이쇼 시대 개막


영일동맹을 근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은 1915년 1월 18일 중국 공사 히오키를 앞세워 당시 중립을 선언하고 있던 중국 위안스카이袁世凱 대총통에게 [총]5호로 구성된 「21개조 요구서」를 제출합니다. "제1호의 요구는 일본이 독일에서 뺏은 산둥 성 권익에 관한 조약이고 제2호는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에 관한 조약입니다. 이것은 '남만동몽南滿東蒙조약'이라고도 불립니다. 제2호의 요구는 뤼순·다롄의 조차, 남만주·안평 철도의 기한을 각각 다시 99년씩 연장할 것, 일본의 자본수출권과 광산채굴권 취득, 타국으로부터 자금을 공급받거나 차관 제공을 받을 때 일본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정치·재정·군사 고문이 필요한 경우는 사전에 일본과 협의할 것, 창춘에서 지린 구간의 철도 경영 관리를 99년간 일본에 위임할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이중 제1호와 제2호가 일본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항목들이어서 모두 '조약안'으로 되어 있습니다."(197-9)


중국 측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 내용이 제5호였습니다. "제5호의 첫 번째 항목은 중국정부의 정치·재정·군사 고문을 일본인으로 삼을 것, 두 번째 항목은 중국의 병원·사원·학교의 토지소유권을 일본에 인정할 것, 세 번째 항목은 경찰은 중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한다는 것이며, 네 번째 항목은 무기 창고의 설치를, 다섯 번째 항목은 여러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게 준다는 것을, 여섯 번째 항목은 푸젠 성에 외국 자본을 도입할 경우 제일 먼저 일본에 협의할 것을, 일곱 번째 항목에서는 중국에서 일본인의 불교 포교권을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이상의 요약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21개조 요구는 상당히 노골적인 형태로 중국에 대한 일본의 권익을 요구한 것입니다.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에 열강의 아시아에 대한 관여가 적어질 수밖에 없는 절호의 찬스를 노려, 일본은 아주 다양한 요구를 중국에게 들이밀었습니다."(200-1)


"이후 중국에서 항의활동이 활발해집니다. 상하이에서는 '국민대일對日동지회'가 결성되어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퍼집니다.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배일운동을 단속하는 대총통령을 발표하지만 운동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중국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데는 일본의 군사적 위협뿐만 아니라 서양 열강의 권고도 일정 부분 작용했습니다. '유럽 대전' 중이던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은 중국에게 일본과의 무력충돌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결국 중국은 5월 9일, 제5호를 삭제한 나머지 전부를 일본의 요구대로 승인합니다. 이후 5월 9일이라는 날은 중국에서는 '국치國恥 기념일'로 중국인들이 마음에 뼈아프게 새겨지게 됩니다. 훗날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했던 7월 7일, 1931년 '만주사변'이 개시되었던 9월 18일 등도 국치기념일에 포함됩니다. 국치기념일은 중화민국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에는 없습니다."(203-5)


제4장 세계대전 : 그 영향


전후 각국의 군비 경쟁이 치열해지자 군축을 목적으로 1921년 11월부터 개최된 워싱턴 회의는 "국제질서 차원뿐만 아니라 일본 입장에서도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먼저 회의 개최지가 '세계대전'의 강화회의가 열렸던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바뀐 점이 상징적입니다. 이때부터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국제회의를 여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워싱턴 회의에서는 해군군축조약 이외에 미국·영국·프랑스·일본의 4개국 간에 태평양 섬 지역에 관한 '4개국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약의 제4조 규정에 의해 1902년부터 지속되어오던 영일동맹도 여기서 끝을 맺습니다. 이 시점부터 일본은 영국이라는 동맹국을 잃고 해도海圖 없는 항해를 하게 됩니다. 의화단전쟁에서 벌인 활약으로 대영제국의 '주니어 파트너'로 자리매김한 이래 영국을 방패막 삼아 국제적인 지위 향상을 꾀해오던 일본의 20년 세월은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223)


"일본은 '대전경기大戰景氣'로 경기가 활성화되었지만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른바 '휴전 쇼크'로 인해 주가가 폭락합니다. 그런데 1919년 후반부터는 주가가 다시 상승해 대전 기간을 웃도는 맹렬한 '열광적 호경기'에 돌입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흔히 말하는 '버블'인데, 거품이 꺼지는 것도 빨라서 이듬해 1920년 3월 15일 주식 대폭락을 계기로 '전후공황'이 일본사회를 엄습해옵니다. 이때 대전 중에 크게 이익을 본 회사나 이류·삼류 재벌 등의 대부분이 휘청거리게 되고 기업이 도산하며 은행 고객이 대규모로 예금을 찾아가려는 '뱅크런bank run' 소동이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전후공황'의 원인은 전쟁을 끝낸 열강들이 해외수출을 늘리려는 정책을 폄으로써 대전 중에 이른바 '어부지리'로 이익을 내고 있던 일본에 대한 수출이 감소한 것과, 대전시기부터 계속되어 오던 과잉생산과 '버블'의 반동에 따른 것이었습니다."(233-4)


# 간토 대지진 발생(1923.9.1)


"1929년 10월 24일 월가의 주가 대폭락은 바로 일본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남미·북미 및 동유럽·북유럽을 돌아 이듬해 1930년 7월에 생사 가격이 대폭락하는 형태로 세계공황의 영향을 일본도 받게 됩니다." "사업 축소, 연이은 도산, 실업자 급증, 노동쟁의 발생 등 전체적으로 '쇼와 공황'으로 불리던 이 공황은 이때까지 일본이 경험한 공황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세계 다른 나라의 상황도 살펴보면 미국에서 발생한 공황은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 유럽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독일은 '세계대전'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미국의 투자에 의존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공황으로 인해 미국에서 투자를 끊자 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힙니다." "독일에서는 실업자의 불만이나 배상금 부담에 대한 원망이 치솟아 선거에서 나치스 당이 제1당이 되고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수상에 취임합니다. 이로써 이상적이라 일컬어지던 바이마르 헌법이 짓밟히는 형국을 맞이합니다."(244-5)


# 불황과 테러, 우경화의 결합


종장終章 다음 세계대전 : 그 징조


"1941년 11월 5일 어전회의에서 일본은 '대동아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태평양전쟁 개전의 길로 나아갑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전 문제를 생각할 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일본은 공습과 원폭으로 미국에게 졌다고 착각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은 중국에게도 졌습니다. 이 점은 패전 당시 중국대륙에 남아 있던 일본육군병력이 105만 명 이상이었던 것을 봐도 분명합니다. '지나사변'이 '대동아전쟁' 중에도 계속되고 있었다는 점도 제대로 이해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1945년 아시아 태평양전쟁 종결 조칙이 발표되기까지의 역사를 후지무라 미치오는 그의 명저 『청일전쟁』에서 이미 '중일 50년전쟁'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저도 후지무라의 견해에 동의하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과 중국을 포함시켜서 평가하자면 이 반세기를 '동아시아 50년전쟁' 시대라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2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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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 푸른역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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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본 사람들이 청일전쟁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치른 전쟁이었다고 배웠을 것이다. 청일전쟁의 목적을 나라 안팎에 밝힌 선전조칙(宣戰詔勅)에도 "조선은 (일본)제국이 처음에 가르치고 이끌어 열국의 대열에 들게 만든 독립된 나라다. 그런데도 청나라는 조선을 속방이라고 칭하여 음으로 양으로 그 내정에 간섭하니·····제국이 솔선해서 제 독립국의 대열에 들게 한 '조선의 지위'와 '그것을 표시하는 조약'을 업신여기는 청조 중국의 잘못된 욕망 때문에 일본은 부득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청일전쟁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여기는 일본과, '속국'이라고 여기는 청나라가 벌인 전쟁으로, 조선을 '속국'이라고 한 청조 중국은 '야만국'이며 일본은 '문명국'이다. 청일전쟁은 '야만'과 '문명'의 전쟁이었다고 곧 떠들썩하게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처음 행사한 무력은 다름아닌 그 독립을 위해 싸운다던 조선의 왕궁을 향해서였다."(59-60)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자유민권운동이 쇠퇴하면서 중국에 대한 적대적인 강경론이 우세해지고 있었다. 청일전쟁 발발 10년 전인 1884년 일본의 후원을 받은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서울에 주둔한 중국 군대에게 격파되어 실패로 끝났고, 김옥균 등은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중국에 대한 적대감과 일본의 국권확장 주장이 국민들 사이에서도 급속히 퍼졌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탈아론(脫亞論)'을 외친 것도 갑신정변 다음해의 일이다. 더구나 청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894년 3월 김옥균이 상해에서 조선의 자객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청에 대한 일본의 적대감정은 한층 높아갔다. 따라서 조선의 농민반란을 이유로 일본군이 출병하자 여론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신문도 적극적으로 전쟁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은 구미 열강의 (간섭) 움직임이었다."(61)


"그래서 조선주재 일본공사 오토리 케이스케가 생각해 낸 방법이, 청한 종속문제를 끄집어 낼 것이 아니라 조선 정부에게 터무니없이 무리한 난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즉 1876년 조선 정부가 일본과 맺은 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서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로서·····"라고 약속한 것을 들어, 지금 청조 중국의 군대가 "속방을 보호한다"라는 이유로 주둔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다. 조선은 청국의 속국인가 독립국인가, 독립국이라면 청국군을 국외로 몰아내야 하며, 조선에 그럴 힘이 없다면 일본군이 대신해서 몰아낼 것이므로 조선 정부는 일본에게 '청군 구축'을 의뢰하는 공식 문서를 보내라며 정부를 압박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미 7월 12일 청조 중국에 대한 영국의 조정 공작이 실패하자 전쟁을 시작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19일 대본영(大本營)도 조선에 있는 일본군에게 "청국군이 늘어나면 스스로 결단을 내리도록 하라"며 개전을 허가하였다. 조선왕궁점령은 이렇게 해서 계획되었다."(62-3)


'공간전사'인 《메이지 이십칠팔년 일청전사》 제1권은 조선 국왕이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충돌로 서로 사격하게 되어 국왕에게 걱정을 끼친 것을 사죄하고, '국왕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보도는 사건 직후부터 일본은 물론 나라 안팎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일청전사》 초안에 분명히 나타난 바와 같이 국왕은 일본군에게 협박당하고 있었으며, 국왕을 지키고 있었던 이들은 조선 병사들이었다. 더욱이 이 위급한 때에 국왕측은 '외무독판이 지금 오토리 공사에게 가서 담판 중이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 문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며 일본병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야마구치 대대장은 "문안에 있는 조선 병사의 무기를 인도하면 응할 것이다"라고 대답했지만, 국왕측이 듣지 않자 '칼을 빼들고 군대를 지휘하고 질타하여 일본병을 문안으로 돌입'시키려고 했던 것이다."(76-7)


"일본군이 왕궁을 점령한 7월 23일 오전 11시에 국왕의 부친인 대원군 이하응이 일본군 보병 제11연대 제6중대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왕궁으로 들어왔다. 일본측은 왕비인 민비 일족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대원군을 추대하여 민씨 일족을 정권에서 배제하려고 했다." "일본 공사관의 스기무라 후카시 서기관은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는 대원군에게 "일본 정부의 이번 거사는 실로 의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일이 성사된 다음 조선국의 땅을 한 치도 빼앗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을 전했다. 어떻게 하든지 대원군을 끌어내서 민씨 일족을 궁정에서 몰아내고, 국왕을 일본 지배하에 두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조선왕궁점령의 최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마지못해 요청에 응하여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왕궁으로 들어간 것이 오전 11시였다. 이어서 오토리 공사도 궁전으로 들어와 조선 정부는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83-4)


"조선 출병 이후 군사 관련 보도는 도쿄 발은 물론, 현지 보도도 일본 정부와 군의 엄중한 관리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일본 국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렇게 걸러진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언론 기관은 신문지조례를 비롯하여 여러 법률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 파병 직후부터는 군사에 관한 기사 게재에 대한 내무성 경보국의 '주의 구두전달'(6월 5일)이 있었고, 또 육군성 제9호·해군성령 제3호(모두 6월 7일) 등에 의해 엄중하게 통제되었다. 〈오사카아사히 신문〉의 기사 가운데 "이상 전보 세 개 중 23일 발은 모두 그날 접수했지만 즉각 독자에게 보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든가,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의 "위 확실한 보도는 육군성 검열필"이라는 기록은 그 같은 통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 내무성과 육군성·해군성 등은 단순한 통제뿐 아니라 '꾸민 이야기'를 흘려 정보를 조작하기도 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사실인 듯이 보도한 7월 25일자 기사는 그 같은 정보 조작의 한 예다."(128-9)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에서는 "미국과 싸운 일은 잘못되었지만, 청일·러일전쟁까지는 좋았다"라고 하는 역사관이 지배적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책임에 대해서도, 그 주요한 책임은 일본의 군부, 특히 육군에 있으며, 그 군인들이 "위대했던 메이지 시대 선배들의 작업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쪽에는 군도(軍刀)를 차고 위압을 가하는 거친 군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국가의 앞날을 우려하여 고뇌하는 자유롭고 합리주의적인 시민들이 있는 듯한 역사 인식, 그리고 양심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힘이 없는 후자의 사람들이 군인 집단에 맞서 힘으로 지탱하지 못해 굴복하는 가운데 전쟁을 향한 길이 준비되고 있었다는 역사 인식이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단지 천황과 그의 측근 그리고 일본의 보수 정치가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들조차 이와 비슷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현실에서 자주 경험한다."(161-2)


"오늘날까지도 "일본은 청일·러일전쟁 무렵까지는 국제법을 잘 지켰다"는 목소리는 일본에서 끊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한층 목청을 돋우기까지 하고 있다. 시바 료타로가 죽고 나서, ('좋은 시대 메이지'로 대표되는) '시바 사관'을 찬미하는 소리가 한층 더 높아진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다." "시바는 정체와 부패로 얼룩진 조선 왕조와 비교하여 일본의 '메이지를 찬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시바가 죽은 후 일본의 저널리즘이 조잡하고도 일방적으로 '시바 찬가'를 선전할 때, '메이지 찬미'와 극에 위치한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 사실 그리고 그에 저항했던 조선과 중국의 민족적 각성의 역사는 일본인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 현대사상의 동향은 청일·러일전쟁 승리라는 그늘 뒤에서 일본이 조선과 중국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그리고 조선과 중국에서는 이러한 침략과 패배에 대항하여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애써 감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167-8)


청일전쟁의 선전조칙(詔勅)이 나온 지 채 열흘도 되기 전에 육해군 참모회의에서 남방 작전 구상이 논의된다. "그곳에는 '동아의 평화를 교란할 염려가 있는 영국'을 견제하려면 영국의 '화심을 안고 있는 홍콩'을 제압할 수 있는 팽호도의 영유가 꼭 필요하고, 팽호도의 안전을 위해서는 '타이완을 병유'하지 않으면 안 되며, 다시 마음껏 '구주 열국'과 경쟁하여 '동아시아에서 자웅을 다투기' 위해, 기회를 틈타 필리핀을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상까지 있었다. 필리핀 점령까지 구상한 이 같은 논의가 참모들 사이에서 오간 것으로 당시 정부의 대외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청일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일본군의 중추에서 이러한 논의가 거듭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무적 황군의 신화'가 생기고, 비합리적인 전략으로 내달린 태평양전쟁으로의 길이 청일·러일 두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172-3)


"'무적 황군의 신화', 비합리적인 전략 포로의 학대 등 태평양전쟁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타락한 일본군의 모습을 보며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청일·러일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일본의 침략을 받아 전장이 됐던 조선과 중국의 입장을 고려하는 관점이 거의 무(無)에 가깝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군과 일본 정부 지도자는 물론 저널리즘과 일반 국민여론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조선인과 중국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일본 정부와 일본군은 그들의 저항에 어떻게 반응했는가와 같은 문제에 대한 고려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점이 훗날 무모한 침략과 조선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국민에 대한 학대로 이어진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을 당했던 조선으로서는 그 나라 군대가 다시 몰려와 나라의 상징인 왕궁을 점령했으니, 조선의 관야에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는가. 조선 민족의 눈으로 그 일을 목격한다면 사건의 중대성을 자연히 알 수 있을 터이다."(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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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배신 - 착한 유전자는 어째서 살인 기계로 변했는가
리 골드먼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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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인류를 생존시킨 네 가지 형질의 비밀


1장 우리 몸은 어떻게 지금처럼 프로그래밍되었을까


"DNA의 양은 각 염색체에 따라 다르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각각 32억 쌍씩 받아 모두 합치면 64억 쌍의 뉴클레오티드(DNA를 구성하는 단위 분자)가 포개어 합쳐져 이중 나선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64억 쌍은 보통 '염기쌍'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누군지를 규정하는 단어(유전자, 즉 유전 형질을 발현시키는 인자)를 이루는 글자들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우리의 염색체 DNA에는 거기에 호응하는 RNA를 위한 암호를 가진 약 2만 1000개의 유전자가 들어있다. 또 RNA에는 우리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데 꼭 필요한 특정 단백질을 만드는 암호가 들어 있다. 놀랍게도 이 2만 1000개의 유전자는 우리가 가진 염색체 DNA의 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또 다른 75퍼센트 DNA에 들어있는 1만 8000개의 유전자는) 단백질 암호화 유전자를 활성화 또는 억제하거나 단백질 기능 자체를 제어하는 신호를 보내는 기능을 한다. 나머지 20퍼센트 정도의 DNA는 아직 그 기능이 밝혀지지 않은 정크DNA이다."(31-2)


"우리는 뇌를 사용해 환경에 대단한 변화를, 그것도 이전에는 예측조차 할 수 없었던 속도와 방향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반면에 세대가 흘러도 이전 세대의 DNA를 '복사기로 복사하듯' 완벽하게 반복하도록 만들어진 우리 신체는 계속해서 느린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우리의 유전자가 현대의 변화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계산은 간단하다. 1000명 중 1명이 가지고 있는 유전적 돌연변이가 10세대(약 200년), 즉 산업 혁명이 시작된 뒤부터 지금까지 기간 만에 인구 전체에 퍼지려면 생존에 엄청나게 유익한 돌연변이여야 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유전자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지닌 사람이 자손을 가질 확률이 30배 이상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우리 모두가 전례 없는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상황뿐이다. 예를 들어 인류 전체가 HIV에 감염되었는데 치료할 방법이 전혀 없는 그런 시나리오 같은 것 말이다."(65)


2장 굶주림, 음식 그리고 비만과 당뇨라는 현대병


"지구상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부터 인간은 몸에 필요한 열량을 제공하는 음식을 간절히 원했다. 우리는 많은 양의 음식을 섭취할 능력이 있어서, 음식이 풍부할 때 과식을 해서라도 남은 열량을 지방으로 축적해 다음에 찾아올 기근을 이겨낼 수 있다. 또 다양한 음식을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로 바꿀 능력도 갖추고 있다. 굶주림은 개인뿐 아니라 생물 종 전체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기에 우리의 본능과 인체 내 조절 장치는 전부 과식을 해서라도 당장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흡수하는 쪽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기울어 있다. 인체는 손에 넣을 수 있는 음식이 늘 넘쳐나는 상황을 예상해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않다. 특히 사냥이나 채집을 하면서 엄청난 열량을 소비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음식은 아예 계산에 들어 있지도 않다. 그 결과 꾸준한 식량 공급이 확산되면서 비만과 당뇨병 같은 문제도 함께 확산되기 시작했다."(72)


"배가 고프다는 것은 시상하부가 알려 주고, 배가 부르다는 것은 장에서 보내는 피드백이 알려 준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음식을 먹도록 만드는 것은 시상하부도 장도 아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은 바로 미각(입맛)이다. 미각은 혀에 있는 세포 기관인 미뢰(맛봉오리)에서 시작된다. 우리 혀 표면에는 수천 개의 미뢰가 자리 잡고 있다. 혀 뒤쪽 골진 곳, 혀 양쪽 가장자리, 그리고 입천장까지 모두 이 미뢰가 깔려 있다. 미뢰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맛을 감지하기 때문에, 혀끝으로만 뭔가를 핥는 것은 제대로 된 맛을 다 느끼기에 적당한 방법이 아니다. 포도주 감정가들이 포도주 한 모금을 입 전체에 굴려 혀와 입천장에 모두 닿도록 하는 것은 그저 잘난 척하려는 게 아니라 근거 있는 행동이다." "놀랍게도 어떤 유형의 맛에 특화된 미각 센서들 각각은 그것들이 어느 곳에 위치해 있든 상관없이 모두 뇌의 정해진 부분─단맛 센터, 감칠만 센터, 짠맛 센터, 쓴맛 센터, 신맛 센터─으로 정확히 메시지를 보낸다."(92)


"건강한 사람이 살찌기보다 살빼기가 실제로 더 어려운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살이 빠지면서 필요한 열량도 줄어든다. 인체는 체중의 1퍼센트가 감소할 때마다 20칼로리를 덜 소모하게 된다. 둘째, 거기에 더해 체중이 감소할 때, 얼마나 살이 쪘는지에 상관없이 입맛을 돋우는 적어도 일곱 가지의 서로 다른 호르몬과 분자의 분비가 상승한다. 이런 물질의 분비는 한번 높아지면 그 수준에서 몇 년 동안 지속된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생존하는 데는 아주 유용한 형질이었지만 살을 빼려는 현대인에게는 커다란 장애물이다. 이전보다 열량이 덜 필요한데 더 배가 고파지면 원래 체중이 얼마냐에 상관없이 살빼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 셋째, 체중을 유지하려는 이러한 신체 내부의 요인을 생각하면, 애초에 살이 찌지 않도록 하는 쪽이 한번 쪘다 빼는 쪽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133)


"항상 불확실한 식량 공급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몸은 반복되는 아사의 위협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진화했다. 우리의 미뢰는 열량 밀도가 높은 지방, 당, 단백질을 원하도록 만들어졌다. 소장과 대장은 섭취한 음식, 특히 원래 형태에서 분해되어야 하는 음식에서 영양소를 최대한 흡수한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가능할 때마다 과식을 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어서 장래에 있을지 모르는 식량 부족에 대비해 지방을 저장한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너무 뚱뚱해지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무거운 사람은 가볍고 건강한 사람보다 같은 일을 하는 데 열량을 더 많이 소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만이 되기 쉬운 유전적 성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유행병처럼 퍼진 비만이 전 세계 인류의 게놈에 갑자기 변화가 와서 생긴 현상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간단히 말해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열량을 섭취하는 대신 운동은 덜 한다는 것이다."(154-5)


# 구석기 식사 목록에 없는 것들 : 동물 유제품, 곡물, 정제 설탕, 정제 식물성 기름, 알코올 


3장 물, 소금 그리고 고혈압이라는 현대병


"물을 충분히 마시지 않으면 탈수 증상이 나타나고 혈압이 떨어진다." "탈수가 되면 90퍼센트가 물로 이루어진 액체 성분인 혈장이 줄어들어 전체 혈액량이 감소한다. 처음에는 혈액량이 줄고 혈류 속도가 감소하는 것을 상쇄하기 위해 동맥이 좁아진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덜 나오면 수압을 유지하기 위해 호스 끝에 달린 노즐의 구멍을 좁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면 그렇게 유지하는 압력마저 떨어진다. 혈압이 떨어지면 우리는 현기증이 나거나 기절하며, 낮은 혈압으로 인해 뇌와 다른 중요 기관들로 충분한 양의 혈액이 공급되지 않으면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 "그런데 우리는 순수한 물만으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소변과 땀으로 소금도 잃기 때문에 염분을 섭취해야 한다. 신장은 몸안이 너무 싱겁거나 짜지 않도록 불필요한 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동시에 적절한 양의 소금을 배출한다. 한편 소금은 필요한 물, 또는 소량의 여유분 물을 몸속에 비축하도록 돕는다."(166-7)


"견줄 데 없이 월등한 땀 흘리는 능력은 인간이 끈기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다. 격렬한 육체 활동 중에 더 정상적인 또는 정상에 가까운 체온을 유지하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 몸이 땀을 분비하면 피부 표면에 맺힌 물을 증발시키기 위해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에너지는 몸에서 열의 형태로 배출이 되므로 체온이 식는다." "땀을 흘리는 것이 인간에게 이토록 중요하므로 우리는 다른 포유류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을 마셔야 한다. 탈수증과 저혈압은 무척 위험할 수 있어 우리 조상들은 이 문제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리고 앞으로 흘릴 땀을 대비한 커다란 물탱크가 몸 자체에 없으므로 인체는 뇌, 폐, 간, 부신 등에서 나오는 각종 호르몬의 도움으로 약간의 잉여 수분(그리고 거기에 항상 따르는 소금)을 몸 전체에 고루 분산해 보유한다." "또 신장을 제어해 소금과 물이 부족할 때는 보존하고 너무 많으면 배출하도록 한다."(173-5)


"몸에 물이 부족해지면 신장으로 들어가는 혈액의 양이 줄어들고, 그러면 신장은 체내 염도를 정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적정 비율의 나트륨과 물을 몸속에 보존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데, 그 결과 신장에서 만들어지는 소변의 양이 줄어든다. 경미한 탈수 현상이 생겼을 경우 우리는 소변을 통한 수분 배출을 하루에 1쿼트(약 0.95리터) 이하로 줄여 몸속에 지니고 있으며 독이 될 폐기 물질을 배출할 수 있을 정도로만 소변을 만든다. 몸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면 동맥과 정맥의 근육들이 수축하는 방법으로 적절한 혈압을 유지해 혈액량이 줄어도 심장으로 돌아가는 피의 양을 증가시킨다. 한편 심장은 더 힘차고 빨리 박동해 줄어든 혈액이 더 빨리 몸을 순환하도록 한다." "나트륨과 물의 경우 과잉 보호가 주는 유리함은 간단하다. (몸에 나트륨과 물이 부족해서) 혈압이 너무 낮아지면 우리는 기절하거나 죽는다."(180-1)


"동맥이 점점 경화되는 현상은 두 가지 원인 때문에 벌어진다. 첫번째는 혈액이 흐르는 혈관 안쪽의 얇은 층에 주로 콜레스테롤로 이루어진 지방 플라크plaque가 엉겨 붙으면서 표면이 딱딱해지는 경우다." "모든 동맥에는 작은 근육들이 한 겹 들어 있어서 수축과 이완 작용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동맥 경화의 두 번째 원인이다. 이 근육들이 수축하면 동맥은 혈액의 흐름에 더 크게 저항하고 이 때문에 혈압이 높아진다. 이러한 수축 작용은 탈수증이 생겼을 때 혈압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능이다. 그런데 혈압이 약간이라도 높아지면 이 근육층은 또 다른 이유로 수축한다. 늘어난 압력으로 인해 너무 많은 혈액이 중요 장기에 쏟아져 들어가 손상을 초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처럼 현대인의 고혈압 중 약 95퍼센트는 '본태성本態性 고혈압'으로 분류된다. 이 용어는 나트륨 조절 장치(나트륨을 보존하거나 동맥을 수축하는 일을 맡은 호르몬)가 잘못 맞춰져서 생긴 고혈압을 가리킨다."(203-4)


4장 위험, 기억, 두려움 그리고 불안과 우울증이라는 현대병


"스트레스는 뇌하수체를 자극해 신장 가까이 위치한 부신에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을 분비하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아드레날린이 대량 분비되면 맥박 수와 혈압이 증가하고 정신이 더 바짝 나서 싸우거나 도망할 준비를 재빨리 갖출 수 있다. 생리 작용에 따라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자연적으로 분비되면, 우리는 정신이 더 기민해지고, 몸속에 소금을 보존하고, 감염에 맞서 싸울 능력이 더 강해진다." "스트레스는 우리 세포 내의 칼슘 조절 장치를 손상시킬 수 있다. 심장, 근육, 뇌 등을 이루는 세포의 칼슘 조절 장치가 손상되면 망가진 자동차 엔진에서 기름이 새듯 세포에서 칼슘이 새어 나온다. 칼슘 조절 장치는 뇌가 기본적인 투쟁/도피 반응을 일으키는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스트레스로 손상이 가면 학습과 기억에 문제가 생긴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우리는 생각을 명료하게 하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릴 확률이 높아진다─그로 인해 스트레스가 더욱 쌓여서 악순환에 들어간다."(245-6)


"잠재적 위험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을 과대 평가함으로써 부적응 과민 반응과 부작용을 경험하듯, 우리는 실제로 직면하는 위험에 대해서도 과민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해결 불가능한 상황이나 이길 수 없는 도전에 부닥쳤을 경우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생존에 가장 유리한 전략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결과로 나타나는 부작용인 낮은 자존감은 사회적 과잉 위축과 지나친 슬픔을 초래할 수 있다. 구석기 시대에는 슬픈 감정이 더 강한 적으로부터 살해당하는 것을 방지하는 순종적인 태도의 일부를 이루는 유용한 방어 기제였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슬픔은 육체적 대립 상황과는 관련이 없는 다양한 상실로 인해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슬픔은 어떤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일시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슬픈 감정이 2주일 이상 계속되면 '우울증'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울증은 인류가 타고난 심리적 생존 본능이 낳은 가장 심각한 부작용이다."(250-1)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되 미치게 하지만 않는다면 기억에 기초한 두려운 감정은 적절하고 유용하다. 그러나 과도한 스트레스가 쥐의 뇌에 과민 반응을 촉발하듯,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일상 활동만으로도 과도한 공포의 원인이 된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트라우마를 준 사건을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끊임없는 두려움에 대한 반응 탓에 보통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두려움 반응을 주로 관장하는 물질인 가스트린 방출 펩티드의 수치도 낮은 경향이 있다. 또 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기억을 검색해 다시 꺼내는 대뇌 측두엽의 해마를 비롯한 뇌의 특정 부분들의 크기가 작아져 있다. 이러한 뇌 구조 변화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인지 결과인지 아직 모르지만, 이 사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뇌의 생리학적·해부학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다."(255-6)


"현대인이 타인에게 살해당하기보다 자기 손에 죽을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구석기 시대 조상들을 보호했던 두려움과 불안, 순종적 태도가 안전한 세상에서 사는 우리에게 너무 과도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현대 문명 사회의 규범에 따른 경쟁에서는 상대방은 죽이고 자신이 죽는 것은 피하는 일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 돈, 자원, 위상을 얻기 위해 경쟁하지만 현대 사회의 이런 경쟁이 생사를 가르는 투쟁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의 20만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서로를 죽일 더 나은 방법을 개발하고 죽음을 면하는 더 나은 방어 전략을 세우는 진정한 의미의 '군비 경쟁'을 해 왔다. 좋은 소식은 방어 쪽이 이기고 있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경쟁이 방어 쪽으로 너무 유리하게 기울어 살해당하지 않으려는 방어 기제가 불안과 우울증을 유발해 원래 피하려 했던 폭력 자체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288-9)


5장 출혈, 응고 그리고 심장 질환과 뇌졸증이라는 현대병


"혈액 응고 신속 대응 체계에는 서로 독립적이지만 깊이 연관된 두 가지 경로가 있다. 하나는 혈소판에 기초한 체계다. 혈소판은 평소에는 혈액 속을 떠돌다가 혈관 안쪽 세포 방어벽에 손상이 가면 노출되는 특정 수용체에 자석처럼 재빨리 가서 붙는다. 각 혈소판은 노출된 수용체와 결합되면서 유인 물질을 분비해 다른 혈소판들에게 동맥이나 정맥에 난 구멍을 막는 전투에 신속하게 참가하도록 독려한다." "철분 부족형 빈혈이 생기면 흔히 혈소판 수치가 정상 수준 이상으로 증가한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낮아져 더 이상 많은 피를 잃으면 안 될 때 혈소판이 자연스럽게 증가해 출혈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두 번재 혈액 응고 경로는 열 가지가 넘는 혈액 응고 단백질이 도미노처럼 연쇄 반응을 일으켜 일종의 섬유 그물망을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이 그물망은 혈관 벽에 난 더 큰 상처를 때우는 동시에 혈소판들이 와서 쌓일 수 있는 기본 구조물 역할을 한다."(306-7)


"우리가 섭취한 지방은 소장에서 흡수된다. 지질이라고 부르는 이 지방은 수용성이 아니기 때문에 혈장에서 바로 녹지 않고 지질 단백질이라고 부르는 수용성 물질에 실려 이동한다." "(동맥 벽에) 침착된 콜레스테롤의 양은 우리가 먹는 포화 지방의 양에 달려 있다. 포화 지방을 운반하기 위해 간에서 지질 단백질을 만들 때 쓰이는 재료가 바로 LDL 콜레스테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레스테롤 수치는 혈액 내 지방량을 감지하는 기능을 하는 간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된다." "지질 단백질을 과잉 생산하는 경향은 아마 구석기 시대에는 중요한 기능이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어쩌다가 한번씩 한꺼번에 많은 양의 식사를 해서 흡수한 지방을 저장해 핏속에서 돌리다가 먹을 것이 충분치 않을 때 바로 쓸 수 있는 원료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지질 단백질 운반 용기를 많이 만들어 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 몸은 필요한 양보다 너무 많은 지질 단백질과 나쁜 콜레스테롤을 만들어 내고 있다."(322-4)


"콜레스테롤과 기타 지질이 동맥 안쪽 벽, 특히 관상 동맥(심장 동맥) 안쪽 벽에 축적되면 혈관이 좁아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완전히 막히는 일은 드물다. 대신 이 지방질 침전물은 표면 플라크를 형성한다. 이 플라크는 쉽게 균열되거나 파열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세포 한 겹으로 이루어진 동맥 안쪽 보호막을 손상시켜 그 아래 동맥 조직을 노출시킨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동맥은 원래 계획에 따라 행동을 개시한다─혈소판과 응고 단백질을 불러들여 상처를 복구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에 따라 생긴 혈전은 손상이 간 곳을 메울 뿐 아니라 피가 동맥 하류 쪽으로 흐르는 것을 부분적으로, 때로는 전적으로 막아 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세포 한 겹짜리 동맥 보호막에 난 흠집 때문에 피를 많이 흘려 죽지는 않겠지만, 혈전 때문에 피의 흐름이 막혀 혈액 공급을 받지 못한 기관의 세포들이 죽을 수도 있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326)


"인체의 혈액 응고를 관장하는 조절 장치가 미세 조정 끝에 고정되었던 구석기 시대에는 수천 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장거리 자동차, 비행기 여행으로 인해 생긴 다리 정맥의 혈전이 폐로 옮아가 목숨을 앗아갈 가능성은 너무나 먼 일이었다. 아울러 식생활과 신체 활동의 변화, 혈압 등으로 동맥이 좁아지고 혈전이 생길 확률이 높아져 심장 마비와 뇌졸중을 야기하는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예측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피의 응고 기능이 필요하다. 심각한 부상뿐 아니라 분만과 일상 생활에서 생기는 자잘한 상처로 목숨을 잃지 않으려면 없어서는 안 될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혈과 응고 사이를 미세 조정해 자연이 결정한 균형은 현대인 입장에서는 응고 쪽으로 너무 치우친 셈이 되었다. 오늘날 미국에서 출혈로 인한 모든 사망보다 과도한 응고로 인한 사망이 네 배 이상 많고 심장 마비와 뇌졸중이 4대 사망 원인에 포함된 것은 이 때문이다."(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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