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러일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 - 동아시아 50년전쟁 다시 보기
하라 아키라 지음, 김연옥 옮김 / 살림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 메이지·다이쇼·전전 쇼와 시대의 전쟁


보신전쟁(1868-69) → 세이난전쟁(1877) → 청일전쟁(1894-95) → 의화단전쟁(1900) → 러일전쟁(1904-05) → 1차 세계대전 → 만주사변(1931) → 중일전쟁(1937) → 아시아·태평양전쟁(1941)


제1장 청일전쟁 : 제1차 조선전쟁


"폐번치현 직후인 1871년에 일본은 청국과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은 상호 간에 영사 재판권을 인정하는 등 일본이 처음으로 외국과 맺은 '대등'한 조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국과 일본이 대등하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조선에 대한 일본의 입장이 유리해지는 것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청일수호조규 체결 이전에 일본과 조선의 관계에서 주의해야 할 사건이 있습니다. 1868년 일본은 왕정복고를 알리는 국서를 조선에 보냈는데, 조선이 국서를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스스로를 '황皇' 혹은 '칙勅'이라는 문자를 사용해서 국서를 보냈는데,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종주국인 청국 황제뿐이었습니다. 만약 일본이 '황皇'을 사용하게 된다면, '왕王'으로 칭하고 있는 조선이 일본보다 격이 내려가는 셈이 됩니다." "이에 더해 1873년 부산 왜관에 일본을 모욕하는 내용을 게시한 사건은 훗날 유수정부가 논쟁하던 '정한론'의 빌미가 됩니다."(59-60)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조선왕궁을 점령한 일은 "단순한 '정변'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일본과 조선 사이에 벌어진 전쟁 행위였습니다. 청일전쟁 개시 직전에 사실상 '조일朝日전쟁'이 일어났던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7월 25일 일본 함대가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합니다. 이때 훗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되는 도고 헤이하치로가 청나라 병사를 태운 영국 선적 화물선 고승호高陞號를 격침하라고 지시합니다. 청일전쟁 선전포고 직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제법상으로 논란을 일으켰고 외교적으로도 크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불문에 부쳐지지만 국제관계상 매우 위태위태한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이 조선에 최후통첩장을 내민 7월 20일 직전인 7월 16일에 일본과 영국 간에 매우 중요한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바로 (치외법권 철폐와 관세 자주권 일부를 회복하면서 서구와 맺은 불평등조약을 시정하는 첫걸음이 된) 영일통상항해조약입니다."(69-70)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도 언급했지만, 청일전쟁 개시와 조약개정은 사실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영일통상항해조약이 7월 16일에 조인되고 그 직후인 7월 20일에 일본이 조선에 대해 최후통첩을 했다는 점입니다. 즉 영국과 조약개정 합의가 이루어지기 직전 상황이었는데 성사되자마자 조선 내정에 간섭해 23일 왕궁을 점령하고, 25일에는 풍도해전을 치르고, 29일에는 육상에서 일본군이 충남 천안 성환읍에서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고, 30일에는 아산에 있던 청국 군대를 공격해 평양으로 패주敗走시킵니다. 이후 8월 1일에 청나라에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당시에는 선전포고를 한 후에 전투를 개시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8월 1일 선전포고를 한 시점부터 청일전쟁을 다루려 한다면 많은 것을 놓쳐버리는 셈이 되므로 이 전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76)


"1895년 4월 17일에 체결된 청일강화조약 제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는 문구로 시작해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물貢物 헌납이나 전례典禮 등은 앞으로 일절 폐지할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 부여한 제일 큰 목적은 한반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 확보에 있었으므로 제1조에 조선이 '독립 자주'국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기입한 것입니다." "강화조약 중 특히 중요한 것이 제6조 제4항인데, 이 조항은 청나라 안에서 일본인이 공장을 지어도 좋으며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해도 좋다는 권리(자본수출권)였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여러 열강이 좀처럼 얻어내지 못한 자본수출권을 일본이 따낸 것은 구미 열강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준 셈이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것을 일본이 구미제국에게 준 '경제적 뇌물'로 비평하기도 했습니다." "이 조항 때문에 이후 청나라는 여러 열강의 세력권 설정에서 경쟁의 무대가 됩니다."(81-3)


"청일전쟁 후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얻은 배상금 약 3억엔 중 1억 8,000만 엔을 육군과 해군을 확장하는 비용으로 썼습니다. 나머지는 제강소製鋼所를 설치하거나 철도 부설비·전화 설치비로 사용하는 등 청일전쟁 후 '전후경영'이라는 명목으로 군비중심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한편 방대한 배상금을 떠안게 된 청국은 자력으로는 지불할 수 없어 열강으로부터 빌린 외채로 지불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타이완 정복전쟁으로 타이완이라는 식민지를 얻으면서 제국주의 국가 대열의 끝자락에 합류하는 데 성공합니다. 반면 청국은 금융·외교적으로 종속국, 반半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이렇듯 두 나라가 정반대 방향으로 운명이 갈리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청일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3국간섭으로 일본이 포기한 랴오둥 반도의 뤼순·다롄을 조차租借하고, 독일은 산둥 반도의 자우저우만을 조차했으며, 영국은 6월에 주룽 반도를, 7월에 웨이하이웨이를 조차했습니다."(90-1)


"후세인의 관점에서 메이지 천황은 메이지 1년부터 군주로 군림한 것처럼 생각되기 일쑤이지만, 당시 서민들의 대부분은 쇼군 가문은 알아도 천황에 대해서는 여전히 "천자天子라는 존재가 있는 듯"하다는 정도로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청일전쟁을 통해 국민의식이라는 것이 서서히 서민들 속에도 싹트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국가인 일본이 이웃대국인 청나라와 싸우며 자신들의 나라에는 천황이라는 위대한 분이 계시다, 그전까지만 해도 제일 위대한 사람은 그 지역의 영주라고 여겨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더 위대한 천황이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청일전쟁 즈음에 '대일본제국의 국민'이라는 표현을 거쳐 "처음으로 사람들 사이에 '국민'의식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그것이 서서히 정착되어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청일전쟁에 의해 일본에 '국민'이 탄생하고 천황의 권위도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101)


제2장 러일전쟁 : 제2차 조선전쟁


"의화단전쟁의 8개국 연합군(일본·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미국) 가운데 대활약을 한 것은 일본군이었습니다. 청국과 인접한 곳에 있으며 신속하게 군대를 파견할 수 있었던 일본은 열강 군대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1900년 10월 열국列國 공사가 모여 의화단전쟁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논의하는 제1차 회의가 열립니다. 청국에 대한 강화조건을 제시한 이듬해인 1901년 4월에 열국은 4억 5,000만 냥의 배상금을 청국에 요구했습니다. 청국도 이를 수락했습니다. 배상금은 39년간 분할 지불하며, 다구 포대를 철거하고, 베이징 공사관 지구에 군대를 주둔시켜도 좋다는 승인을 받습니다. 일본에 배당된 배상금은 3,479만 냥이었습니다. 참고로 이때 각국 군대 주둔을 허락한 것이 훗날 중일전쟁의 방아쇠가 되는 루거우차오 사건의 원인遠因이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중국 파견' 근거가 된 것은 이때 열국이 얻어낸 베이징의 군대 주둔 항목이었습니다."(107-9)


# 제1차 영일동맹 성립(1902.1) : 일본을 이용하여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했던 영국의 의도


"1904년 2월 10일 러일전쟁을 선전포고한 날로부터 2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인 2월 23일,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하기' 위해 군사상 필요한 지역을 일본이 접수해 사용할 것을 승인하는 내용이 포함된 「한일의정서」를 한국에 들이밀었습니다. 그러고는 개전 후인 5월 말에 '제국의 대한對韓 방침'을 결정, 한국의 군사·외교·재정·교통·통신 등을 일본의 감독하에 둘 것을 정합니다.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고 일본인 혹은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 고문·외교 고문을 둘 것, 한국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때에는 일본과 반드시 사전에 협의할 것 등을 용인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인 이른바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2개월 후인 1905년 11월에는 '제2차 한일협약'에 강제적으로 조인하게 해 한국에 통감을 두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에 임명합니다. 즉 일본은 러일전쟁 시기에 한국 지배를 사실상 거의 확정시켰던 것입니다."(113-4)


"러일전쟁은 군사사적軍事史的으로는 육전에서 랴오양 전투·사허 전투·펑톈 전투를 벌였지만 전혀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군이 퇴각하면 일본정부는 국민에게 "이겼다. 이겼다"고 계속 선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개별 전투의 실태는 일본육군이 러시아육군에게 명백하게 이겼다고 볼 수 없었고, 언제 역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겨우겨우 '무승부'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일본해군도 러시아해군 극동의 두 거점인 뤼순과 블라디보스토크를 봉쇄하려는 작전을 펼쳤지만 이 역시 계획대로 순조롭게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육군 측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간신히 뤼순을 공략했던 것입니다." "러일전쟁은 이른바 '상처투성이의 무승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동해해전에서 이긴 일본이 강화조정을 미국에 먼저 의뢰했고, 강화조건도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던 것을 봐도 명확히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122-4)


"러일강화조약 제1조는 의례적인 조항으로 실질적인 조항은 제2조부터입니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군사상·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가짐'을 인정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 역시 한국에 관한 조항이었는데,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의 첫 번째 전쟁 목적은 한국을 확보하는 것이었음을 이 조항이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제5조에서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의 조차권을 일본에 양도할 것을, 제6조에서는 청국의 승인을 전제로 창춘·뤼순 간 철도를 일본에 양도할 것을 규정했습니다. 이들 조항은 훗날 남만주철도, 즉 만철滿鐵이 됩니다. 제9조에서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이른바 남쪽 가라후토 섬을 러시아가 일본에 양도할 것을 규정했습니다. 포츠머스 조약의 주요 항목은 이것이 전부였고 배상금 항목은 아예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강화조약을 성립시켜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었던 것입니다."(125-6)


제3장 한국병합과 21개조 요구


"1909년 7월 6일 일본정부는 각의에서 사법과 감옥 사무를 일본에 위탁하게 하는 등 한국병합방침을 결정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0월에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조약이 조인되고 1주일 뒤인 8월 29일에는 조약이 공포와 함께 즉시 시행되고 메이지 천황은 「한국병합조서韓國倂合詔書」를 발포합니다." "일본은 한국병합 직전인 7월 4일 러시아와 '제2차 러일협약'을 맺어 만주에서 얻는 특수이익을 서로 존중해주고 군사동맹조치를 취하자고 확인합니다. 러일전쟁 결과 기존의 만주와 한국 사이에 있던 러시아와 일본의 권익 분계선이 좀 더 북쪽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남만주와 북만주를 사이에 두고 선을 긋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즉 일본은 한국에 대해 자유 재량권을 얻은 셈이 되어 다른 제국주의 열강도 공공연하게 또는 묵인하는 형태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했습니다."(169-71)


# 신해혁명(1911.10) 봉기 - 청나라 선통제 퇴위(1912.1.1) - 메이지 천황 사망(1912.7.30), 다이쇼 시대 개막


영일동맹을 근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은 1915년 1월 18일 중국 공사 히오키를 앞세워 당시 중립을 선언하고 있던 중국 위안스카이袁世凱 대총통에게 [총]5호로 구성된 「21개조 요구서」를 제출합니다. "제1호의 요구는 일본이 독일에서 뺏은 산둥 성 권익에 관한 조약이고 제2호는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에 관한 조약입니다. 이것은 '남만동몽南滿東蒙조약'이라고도 불립니다. 제2호의 요구는 뤼순·다롄의 조차, 남만주·안평 철도의 기한을 각각 다시 99년씩 연장할 것, 일본의 자본수출권과 광산채굴권 취득, 타국으로부터 자금을 공급받거나 차관 제공을 받을 때 일본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정치·재정·군사 고문이 필요한 경우는 사전에 일본과 협의할 것, 창춘에서 지린 구간의 철도 경영 관리를 99년간 일본에 위임할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이중 제1호와 제2호가 일본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항목들이어서 모두 '조약안'으로 되어 있습니다."(197-9)


중국 측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 내용이 제5호였습니다. "제5호의 첫 번째 항목은 중국정부의 정치·재정·군사 고문을 일본인으로 삼을 것, 두 번째 항목은 중국의 병원·사원·학교의 토지소유권을 일본에 인정할 것, 세 번째 항목은 경찰은 중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한다는 것이며, 네 번째 항목은 무기 창고의 설치를, 다섯 번째 항목은 여러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게 준다는 것을, 여섯 번째 항목은 푸젠 성에 외국 자본을 도입할 경우 제일 먼저 일본에 협의할 것을, 일곱 번째 항목에서는 중국에서 일본인의 불교 포교권을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이상의 요약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21개조 요구는 상당히 노골적인 형태로 중국에 대한 일본의 권익을 요구한 것입니다.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에 열강의 아시아에 대한 관여가 적어질 수밖에 없는 절호의 찬스를 노려, 일본은 아주 다양한 요구를 중국에게 들이밀었습니다."(200-1)


"이후 중국에서 항의활동이 활발해집니다. 상하이에서는 '국민대일對日동지회'가 결성되어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퍼집니다.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배일운동을 단속하는 대총통령을 발표하지만 운동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중국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데는 일본의 군사적 위협뿐만 아니라 서양 열강의 권고도 일정 부분 작용했습니다. '유럽 대전' 중이던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은 중국에게 일본과의 무력충돌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결국 중국은 5월 9일, 제5호를 삭제한 나머지 전부를 일본의 요구대로 승인합니다. 이후 5월 9일이라는 날은 중국에서는 '국치國恥 기념일'로 중국인들이 마음에 뼈아프게 새겨지게 됩니다. 훗날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했던 7월 7일, 1931년 '만주사변'이 개시되었던 9월 18일 등도 국치기념일에 포함됩니다. 국치기념일은 중화민국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에는 없습니다."(203-5)


제4장 세계대전 : 그 영향


전후 각국의 군비 경쟁이 치열해지자 군축을 목적으로 1921년 11월부터 개최된 워싱턴 회의는 "국제질서 차원뿐만 아니라 일본 입장에서도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먼저 회의 개최지가 '세계대전'의 강화회의가 열렸던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바뀐 점이 상징적입니다. 이때부터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국제회의를 여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워싱턴 회의에서는 해군군축조약 이외에 미국·영국·프랑스·일본의 4개국 간에 태평양 섬 지역에 관한 '4개국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약의 제4조 규정에 의해 1902년부터 지속되어오던 영일동맹도 여기서 끝을 맺습니다. 이 시점부터 일본은 영국이라는 동맹국을 잃고 해도海圖 없는 항해를 하게 됩니다. 의화단전쟁에서 벌인 활약으로 대영제국의 '주니어 파트너'로 자리매김한 이래 영국을 방패막 삼아 국제적인 지위 향상을 꾀해오던 일본의 20년 세월은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223)


"일본은 '대전경기大戰景氣'로 경기가 활성화되었지만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른바 '휴전 쇼크'로 인해 주가가 폭락합니다. 그런데 1919년 후반부터는 주가가 다시 상승해 대전 기간을 웃도는 맹렬한 '열광적 호경기'에 돌입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흔히 말하는 '버블'인데, 거품이 꺼지는 것도 빨라서 이듬해 1920년 3월 15일 주식 대폭락을 계기로 '전후공황'이 일본사회를 엄습해옵니다. 이때 대전 중에 크게 이익을 본 회사나 이류·삼류 재벌 등의 대부분이 휘청거리게 되고 기업이 도산하며 은행 고객이 대규모로 예금을 찾아가려는 '뱅크런bank run' 소동이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전후공황'의 원인은 전쟁을 끝낸 열강들이 해외수출을 늘리려는 정책을 폄으로써 대전 중에 이른바 '어부지리'로 이익을 내고 있던 일본에 대한 수출이 감소한 것과, 대전시기부터 계속되어 오던 과잉생산과 '버블'의 반동에 따른 것이었습니다."(233-4)


# 간토 대지진 발생(1923.9.1)


"1929년 10월 24일 월가의 주가 대폭락은 바로 일본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남미·북미 및 동유럽·북유럽을 돌아 이듬해 1930년 7월에 생사 가격이 대폭락하는 형태로 세계공황의 영향을 일본도 받게 됩니다." "사업 축소, 연이은 도산, 실업자 급증, 노동쟁의 발생 등 전체적으로 '쇼와 공황'으로 불리던 이 공황은 이때까지 일본이 경험한 공황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세계 다른 나라의 상황도 살펴보면 미국에서 발생한 공황은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 유럽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독일은 '세계대전'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미국의 투자에 의존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공황으로 인해 미국에서 투자를 끊자 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힙니다." "독일에서는 실업자의 불만이나 배상금 부담에 대한 원망이 치솟아 선거에서 나치스 당이 제1당이 되고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수상에 취임합니다. 이로써 이상적이라 일컬어지던 바이마르 헌법이 짓밟히는 형국을 맞이합니다."(244-5)


# 불황과 테러, 우경화의 결합


종장終章 다음 세계대전 : 그 징조


"1941년 11월 5일 어전회의에서 일본은 '대동아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태평양전쟁 개전의 길로 나아갑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전 문제를 생각할 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일본은 공습과 원폭으로 미국에게 졌다고 착각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은 중국에게도 졌습니다. 이 점은 패전 당시 중국대륙에 남아 있던 일본육군병력이 105만 명 이상이었던 것을 봐도 분명합니다. '지나사변'이 '대동아전쟁' 중에도 계속되고 있었다는 점도 제대로 이해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1945년 아시아 태평양전쟁 종결 조칙이 발표되기까지의 역사를 후지무라 미치오는 그의 명저 『청일전쟁』에서 이미 '중일 50년전쟁'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저도 후지무라의 견해에 동의하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과 중국을 포함시켜서 평가하자면 이 반세기를 '동아시아 50년전쟁' 시대라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2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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