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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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뜻하지 않은 재앙, 패전


"패전은 반세기 동안 아시아를 호령한 일본제국에 총체적 균열을 가져왔다. 좀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것은 그동안 애써 감춰왔거나 제국의 논리로 강제 봉합되었던 일본인 사회 내부의 잠재된 불신과 갈등이 패전을 계기로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특히 비상시국을 맞아 사리사욕과 개인의 보신만을 추구하는 사회 지도층의 낯 뜨거운 행태는 결국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또한 그것은 오랜 기간 해외의 일본인 사회를 하나로 묶어낸 제국의 이념과 가치관을 급속도로 무너뜨렸다. 지도력과 상호 신뢰의 붕괴는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위기감과 피해 의식을 고조시켰고, 급기야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치닫게 만들어 곳곳에서 일본인 공동체의 해체를 촉진했다. 이제 '나만 살겠다'는 원초적 본능만 남은 조선의 일본인들에게 천황의 백성으로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정체되고 균질화된 제국의 일본인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22-3)


해방 직후에 경찰서·주재소·행정관서 및 각 지역의 신사를 겨냥한 공격이 빈발했는데, 특이하게도 일본인보다 조선인 피해자가 훨씬 더 많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행정조직 말단의 조선인을 이용해 대민 지배를 꾀해온 총독부의 통치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집단행동은 때로는 치밀한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방 후 약 1주일 사이에 나타난 폭행·습격 등의 사태는 그동안 봉인되었던 조선인의 해묵은 감정이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한꺼번에 표출된 사건이었다. 이 시기에 벌어진 사건은 갑작스레 맛본 해방감에서 나온 비이성적 행동이기도 하지만 조선인의 가장 솔직한 속내가 드러난, 즉 양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 결과 식민 지배 말기 전시체제 속에서 먹을거리와 물자를 공출하고 해외의 군수공장·탄광·전쟁터 등으로 사람들을 징발할 때 앞장서며 악역을 맡았던 조선인들이 지난날의 죗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26)


"재류 일본인들이 느낀 생경한 공포는,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조선·조선인에 대한 총체적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직업적으로 조선인 사회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첩보·정보계 관료나 한반도에 대자본을 투자한 기업의 간부 등 극소수 인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인은 사실상 조선인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이런 경향은 식민 지배 초기에 수많은 조선인의 저항을 경험한 1세대와 달리 '문화통치' 시기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식민자 2세의 경우에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조선을 타지로 인식하기보다는 본래부터 일본 본토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3·1운동 이후로) 패전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한반도 안에서만큼은 집단적 저항을 피부로 감지할 수 없었다. 조선의 일본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일상의 평화로 받아들였고, 조선인들을 자신의 일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관심 밖의 존재로 치부했다."(26-7)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대혼란과 위기 속에서 더없는 기회를 포착하는 집단이 으레 등장하기 마련이다. 금융기관에서 너나없이 인출해간 돈이 시중에 풀리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이른바 패전 특수를 노린 환전상이 나타났다." "환전상은 대개 일본 현지의 브로커나 그곳에서 돌아오는 조선인들로부터 일화日貨를 조달했으며, 이렇게 마련한 일화로 귀환하려는 일본인들이 인출한 조선은행권을 바꿔주었다. 이들 환전상은 조선은행권이 대량 인출된 시점에서는 일화를 비싼 값에 일본인들에게 팔았다. 또 일본인들이 본토로 거의 돌아가 일화 수요가 급감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해외에서 돌아온 조선인들에게 조선은행권을 비싸게 파는 환치기 수법으로 재차 이익을 챙겼다. 이뿐만 아니라 그런 식으로 모은 돈을 가지고 일본인 재산을 헐값에 매수하거나 한일 양 지역 사이의 밀수에 관여함으로써 이중 삼중으로 이익을 극대화했다."(35-6)


"짧은 기간이었지만 패전 후 약 1주일은 일본인 집단 내부의 다양한 차이가 드러난 시공간이었다. 평소에 조선인들로부터 원성을 사 그야말로 생명에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진작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또 본토에 생활 기반을 두고 있거나 조선에 미련이 없는 사람들은 대개 이른 시기에 돌아가려고 했다. 그리고 어차피 돌아가야 한다면 가급적 일찍 돌아가야만 늦게 온 사람들보다 정착 과정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한 자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뭐든지 먼저 하는 사람이 위험부담도 크지만 기회도 많은 법이라고 믿었다. 반면에 조선을 떠나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뿌리 내리고 정착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끝까지 남을 궁리를 했다. 패전 후 경성의 일본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인지 이리저리 복잡한 경우의 수를 따져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본인이 만든 낯익은 '경성'의 모습은 어느새 이질적인 조선인의 '서울'로 변해가고 있었다."(46-7)


2 사면초가에 처한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가 제일 우려하는 부분은 일본인들의 무더기 예금 인출로 발생할 수 있는 금융기관의 부도 사태였다. 만일 패전이 초래한 집단의 위기감 속에서 금융기관마저 부도에 처한다면 총독부의 행정력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패전 후 1주일 사이에 많은 일본인이 현금에 집착하게 되면서 각 은행에는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상황이 전국적으로 지속될 경우 앞으로 1주일 안에 조선의 각 은행이 폐점할 것으로 예측했다." "한편 일본 정부도 1945년 8월 17일 시마즈가 대장대신에 취임하면서 본토로 돌아오는 일본인들에 대한 현금 지불, 외환 송금에 대한 현금 지불 한도액, 외지 예금 처리 방안 등을 비로소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쟁점은 조선에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지 않되, 예금 인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통화 증발增發(화폐발행량을 늘리는 것)과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 방지책에 관한 것이었다."(65-7)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모라토리움 카드를 버렸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식민지에서 발생한 경제적 위기의 여파를 차단하기 위해 만주와 조선에서 각기 통용되고 있던 다롄은행권과 조선은행권을 새로이 조달하는 것이었다. "비상수단을 동원해 화폐를 조달한 결과, 조선은행 발행고는 1945년 3월에 35억 엔이던 것이 8월 15일 현재 49억 엔, 10월 18일 현재 88억 엔까지 늘어났다. 바로 이 돈이 청산자금으로 일컬어지는, 조선군과 조선총독부 등 각 식민기구와 일본인이 귀환하면서 발행한 자기방어적 화폐이다. 조선은행 기록에 따르면 이 돈은 제대군인의 귀환 여비 등 군 퇴각 비용, 관리의 퇴직수당과 귀환 여비, 그리고 각 회사의 퇴직금과 해산수당 등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의도적 지출'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돈이 향후 남한 사회에 심각한 경제 교란을 초래했으며, 그중 상당한 금액이 점령군을 상대로 한 접대비 명목으로 불투명하게 사용되었다."(67-8)


"194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경성의 일본인 유력자를 불러 향후 대책을 논의하며 패전 후 총독부의 통치력 저하에 따른 고충을 토로했다. 그는 현재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있는 조선군도 곧 점령군이 진주함에 따라 무력화될 것이므로 이에 대비해 민간 조직이 나서서 일본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1945년 8~9월에 걸쳐 경성·부산·인천을 비롯해 전국에 37개의 세화회가 결성되었고,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한반도 거주 일본인의 원호 활동을 개시했다." 세화회는 애초에 민간 기부금을 모집해 설립하려고 했지만 모금 성과가 부진하자 "총독부에서 1,000만 엔, 은행과 회사에서 400만 엔, 그리고 9월 초 조선군사령부가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남은 돈 400만 엔 가량을 지원받고서야 겨우 발족할 수 있었다. 즉 모라토리움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에서 발행하여 조달한 화폐, 곧 청산자금 중에서 약 1,800만 엔이 일본인 세화회로 흘러들어갔다."(73)


3 잔류와 귀환의 갈림길에 선 일본인들


"한국 병합과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종교를 통해 지원한 어용 기독교 세력인 경성YMCA는 일본이 패망한 지 2주일 만에 조선어 강좌를 부활시켰다." 조선어 강사를 맡은 오쿠야마 센조의 스승이 "몽골어·조선어·일어 등 동양어 비교 연구의 권위자였던 가나자와 쇼사부로이다. 가나자와는 언어학과 한일 양국의 고대 지명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법은 물론이고 일상 회화까지 능통했던 오쿠야마의 조선어 강좌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수강생을 모집하자마자 희망자가 정원을 넘어서는 바람에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학급을 증설해야 했을 정도였다." "꽤 오랫동안 조선어를 배우지 않았던, 혹은 배울 필요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일본인들이 조선어 강좌로 몰려든 사실은 패전 후에도 조선에 잔류하고자 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조선 잔류의 희망을 품었던 일본인들의 꿈은 곧 물거품이 되고 만다."(81-3)


# 미군정의 집단 송환 방침(일본인 총철퇴령, 1946.1.23)


"1945년 10월 민간인 송환이 막 시작될 무렵, 서울 도심에는 왜노소탕본부倭奴昭蕩本部라는 단체의 명의로 '일본인들은 빨리 집을 내놓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선전문이 돌기 시작했다." "'왜노 소탕'이란 말 속에는 좀 더 복잡한 감정이 깔려 있었다. 즉 해방 후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일본인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새로운 문제가 계속 생겨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더 팍팍해지고 있다는 현실적인 불만과 실존적인 고민이 한데 섞여 있었다. 제일 먼저 사회문제로 부각된 사안은 주택 부족이었다. 이것은 식민지 시기 민족 차별적인 주택 정책으로 인해 일본인과 조선인의 주택 보급률 편차가 크게 확대된 상황에서 해방 후 해외 귀환자가 급속히 증가하자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일본인이 조선에 남아 각종 물자를 횡령하거나 밀반출하는 것도 큰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일본인들이 귀환 국면에서 저지른 물자의 횡령과 반출로 인한 피해는 일반 서민이 감당할 몫으로 고스란히 전가되고 말았다."(97-99)


4 억류·압송·탈출의 극한 체험


"1946년 1월 초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북한 일본인의 남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군 장교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소련군 관계자는 상부로부터 일본인 송환에 관한 지시를 받은 적이 없지만, 일본인들을 그대로 돌려보내기에는 '매우 귀중한 노동력'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것은 거류 일본인에 관한 미소 양국 점령군의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즉 일본의 GHQ와 주한 미군의 가장 큰 사명은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분리하여 다시는 미국을 상대로 일본이 무모하게 도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군의 일본인 송환정책은 군사적 관점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분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신분에 따라 순차적으로 돌려보냈다는 점에서 계획 송환이고, 궁극적으로는 모두 돌려보냈다는 점에서 일괄 송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소련군의 정책은 일괄 '이동 금지' 후 필요에 따른 선별적 '활용과 방치'였다고 볼 수 있다."(114)


"만주와 북한 지역은 소련의 전후 복구를 위한 노동력과 설비·기계를 제공하는 노다지로 인식되었다. 특히 만주 지역의 경우 잠재적으로 소련을 위협할 수 있는 전시 산업을 파괴함으로써 군사적 안정을 꾀하고, 동시에 이들 시설을 전리품으로 반출해 감으로써 소련 국내의 산업 생산력을 제고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만주 철군을 거부하며 각종 시설을 반출하는 데 주력했다." "전투를 통해 입북한 소련군이 보기에 일본군 포로는 더 없는 인적자원이었다. 더욱이 고급 기술을 연마한 엔지니어 그룹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미국 측이 1945년 11월부터 북한을 비롯한 소련 점령지의 일본인 송환에 대해 협의를 요청했음에도 소련 측이 한사코 거부해온 주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일본인에 대한 이 같은 인식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처음부터 일본인들을 본토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116-7)


"과거 일본인들은 조선인에게 정체성·위생·근면의 잣대를 들이대며 근대화·문명화된 일본인이라는 우월감을 바탕으로 집단적 자기 정체성을 공유해왔다. 하지만 종전을 계기로 그러한 허상 아래 복류하던 균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 균열은 해외 일본인 내부에서만 끝나지 않았고, 본토인과 해외 귀환자 사이에 더욱 큰 파장으로 전개되었다. 남한의 일본인보다 불쌍한 북한의 일본인, 북한의 일본인 중에서도 제일 불쌍한 만주 피난민이라는 등식은 하카타 등 일본 귀환황에 도착하는 순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본토인 입장에서 외지에서 돌아오는 모두가 자신의 삶을 더욱더 어렵게 만드는 민폐 집단일 뿐이었다. 단적인 예로 해외 일본인들은 점령군으로부터 '선량한 처자'를 지키기 위해 게이샤와 창기들을 위안대로 삼고자 했으나, 본토에 도착한 순간 결국 모든 부녀자는 외지에서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134-5)


5 뒤집어진 세상을 원망하며


"북한의 일본인들은 대략 1945년 9월부터 이른바 '근로봉사'라는 명목으로 무상 노동, 즉 집단 사역에 징발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세 달이 지나자 출역자들은 일당 5~7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으로는 충분한 호구책이 될 수 없었다. 그마저도 없으면 연명이 불가능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결과 별다른 수입도 없는 일본인들은 9월에 동결된 자신의 예금 중 매월 인출이 허가된 약간의 생활비와 요행히 접수를 면한 은닉 현금, 그리고 소지품 밀매 등을 통해 근근이 생활했다. 그러다보니 1945년 12월에서 1946년 1월을 고비로 돈을 벌어올 남성이 없는 가정, 패전 초기에 여러 번 강제 이사를 당한 가정, 숨겨둔 재산을 도난당한 가정이 제일 먼저 파탄에 이르기 시작했다." 이 무렵 무임 노동의 유상화 등 일련의 제제가 완화되자 "빈곤에 처한 군인·경찰 가정의 부녀자를 비롯하여 생활난에 허덕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경영하는 이발소, 여관, 목욕탕 등에서 잡일을 하기 시작했다."(162-4)


"북한의 일본인들이 1946년 봄부터 대거 남하한 데는 '여기서 또 한 번의 겨울을 지낸다면 일본인 전체가 몰살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기본적으로 작용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한 외적인 요인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탈출을 묵인한 소련 점령 당국의 태도 변화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소련은 이 시기 북한과 만주 등 점령지에서 생산 설비를 반출하려는 애초의 점령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으므로 비교적 일본인 송환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1946년 겨울을 지나면서 북한 정계 역시 사실상 김일성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정권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 일반의 여론도 점차 일본인 송환을 요구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점령 초기 조선인들은 해방의 열기 속에서 일본인에 대한 당국의 제재 조치를 환영했다. 그러나 1945년 겨울을 지나며 서서히 당국의 방침을 비판하며 하루빨리 일본인들을 돌려보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183-4)


# 일본인 송환 주장

1. 동정론 : 권력자들은 애초에 다 빠져나가고 약자들만 남아있는 상황이므로 돌려보내야 한다.

2. 무용론 : 식량과 주택 문제 등이 악화되는 와중에 일본인까지 챙길 수 없으니 돌려보내야 한다.


6 모국 일본의 배신


"귀환자·제대군인·소개민은 전후 일본의 열등 국민으로 전락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해외 귀환자는 본토인의 뿌리 깊은 편견으로 인해 혼처를 찾기가 더욱 어려웠다.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여성의 경우는 이미 조선에 있을 때부터 본토인과의 결혼이 쉽지 않았다. 본토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조선에 살던 일본인 남성조차도 "혈통을 믿을 수 없다, 가정적이지 않다, 본토의 시부모를 모실 줄 모른다"는 이유로 조선 태생 여성을 신부로 맞아들이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전 후에는 (조선 태생 일본인 여성을 '불량한 말괄량이'라고 싸잡아 매도하는) 선입견 위에, 본토인에게 민폐만 끼치는 '귀환자(히키아게샤)'라는 또 다른 차별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게다가 소련 점령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점령군의 각종 폭행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실제로 피해자들이 본토로 돌아온 후 혼혈아를 출산함으로써 해외 귀환 여성은 정조마저 잃은 집단으로 매도되었다."(190-1)


"민폐 집단이라는 '사회적 낙인'과 귀환자라는 '주홍글씨'는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 마음속에 한동안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1957년 미요시 아키라가 작성한 논문에서 주목해 볼 대목은 "본토 귀환 이래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는가?"라는 질문에, "너희들은 외지에서 호사를 누릴 만큼 누렸으니 조금 힘들게 사는 것도 당연하다"는 본토인의 따가운 시선을 꼽는 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이다." "즉 패전으로 인해 이들을 구호할 여력이 없었던 일본의 객관적 상황,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 민간인조차도 침략주의자로 오해하거나, 단지 식민지에서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질시하던 본토인들의 정서에서 이런 인식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귀환자들이 식민지에서 누렸던 온갖 특권과 풍요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냉대·배척·경계·질시 등 귀환자에 대한 본토인의 정서와 태도가 복합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198-200)


"일본 정부는 '전쟁 피해의 균분'이라는 국민 통합의 대원칙이 무너질 경우에 감수해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안고 이들 각 집단의 불만을 그때그때 무마하는 선에서 전후 보상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일본 정부가 보상에 대한 국가책임 문제를 명기하지 않고 최대한 보상 액수를 낮추려고 한 것도 바로 여타 전쟁 피해자 집단으로부터 형평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막고자 한 정치적 고려 때문이었다. 특히 해외 귀환자들에게 특별교부금이 지급된 시기는 이들이 일본에 돌아온 지 무려 20여 년이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대상자 중 50세 이상의 65%, 35~49세의 32%가 이미 사망한 뒤였다. 일본 정부가 1980년대 말부터 한국을 비롯한 구 식민지 출신자가 제기하는 소송에 대해 이른바 '국가무답책國家無答責'을 비롯해 '개인 청구권의 부인', '시효' 등 옹색한 이유를 들어 시간을 끌면서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을 회피해온 법리적 태도는 이미 30년 전부터 자국민을 상대로 무수히 활용되었던 것이다."(210-1)


# 국가무답책國家無答責 : 1945년 이전 국가의 권력 행사로 인한 개인의 손해에 대해서는 국가가 책임질 법적 근거가 없다는 논리


"어쨌든 해외 귀환자들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 정부로부터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이들이 입은 객관적 피해에 대한 보상 개념이 아니라, 전후 일본 정부의 다양한 '필요와 지향'이 녹아든 담론적 성격이 강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재정 상태로는 어차피 공적자금을 통한 구제가 어려웠던 상황이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달래고 사회 일반의 도움을 이끌어내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제각기 다른 피해와 보상을 주장하는 여러 집단의 요구를 무마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새로운 국민국가의 국민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도 무언가 공통의 화두가 필요했다. '전쟁 피해자'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하여 전 사회적으로 유포되었다. 귀환자들은 피해자 집단으로서 정부의 공인을 받았지만 정부의 형식적인 지원과 본토인의 계속되는 냉대와 멸시 속에서 자신이 떠나온 식민지와 돌아온 조국에서 이중의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211)


7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른 기억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구 일본인 부동산의 부정 매매는 명의조작 등의 방법을 통해 계속 이루어졌으며, 이른바 뒷돈으로 10만 원이라는 '공정가격'이 상식화되었을 정도로 투기 행위가 일반화되었다. 이같은 투기는 남한의 주택 시장을 연쇄적으로 교란했다. 일본인 주택을 중심으로 시작된 투기붐은 조선인 주택까지 번져 집값은 날로 치솟았다. 그 영향은 심지어 도시 빈민과 해외 귀환자 등 최하층에까지 파급되어 방공호 한 칸도 2,000~3,000원의 세를 내야만 가까스로 얻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군정 초기에 자유 매매를 허가함으로써 더욱 악화된 식량난은 1948년 유령인구 색출에 관계당국이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에도 쌀을 매개로 한 밀수가 계속됨으로써 개선될 기미가 없었다." "해방 초기부터 국내의 의식 있는 인사들이 일본인 재산 매매 금지를 강력히 요구한 것도 이 문제가 사회적 부의 분배 문제와 직결될 뿐만 아니라 사회 체질 자체를 왜곡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238-9)


"일본인 재산을 바라보는 사회 지도층의 기본 시각은, 이것이 향후 건국의 경제적 기초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또한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할 재산이라는 것이었다." "산업 시설의 해체·산매·반출 등은 결국 공업 생산의 저하와 그에 따른 노동자의 대량 실업, 그리고 임금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해외 귀환자의 대량 유입으로 실업률이 급상승했으므로 노동자의 생활을 더욱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은 공장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회사나 공장을 집단 관리·운영함으로써 사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해방 후 조선인 노동자들이 자주관리운동에 나선 것도 궁극적으로는 생산 시설의 조업 재개를 통해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일본인들의 재산 처분과 밀항을 도와 한몫 챙긴 조선인이 있었는가 하면 각 지역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요 항구를 돌며 밀항하는 일본인을 직접 단속하고자 했다."(253-4)


"일본인이 처분한 재산은 관재인의 지위를 요행히 얻은 극소수에게 돌아갔고, 생산 시설의 파괴 및 물자의 투매와 폐기는 인플레를 부채질했으며, 물자 부족을 초래하여 밀수업자들을 창궐케 했다. 그 결과 대다수의 서민들은 초인적 내핍을 강요당한 반면, 모리배나 간상배로 통치되던 신흥 집단은 재력을 바탕으로 사회 각계에 손을 뻗쳐 온갖 비리를 저지름으로써 해방 당시 대다수가 지향하던 건강한 사회·국가 실현에 걸림돌이 되었다. 이러한 폐해는 결국 남아 있던 일본인들에 대한 '추방론'·'응징론'으로 확산되어갔다. 이제 조선인에게 일본인 송환 문제는, 억압과 착취의 원흉이니 마땅히 이 땅에서 추방해야 한다거나 혹은 해방이 되었으니 당연히 물러가야 한다는 식의 관념적 차원을 넘어, 그들로 인해 당장 자신의 일자리·먹을거리·잠자리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현실의 문제로 다가왔다. 조선인에게 일본인의 마지막 모습은 그들이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딜 때와 마찬가지로 살상과 파괴로 점철되었다."(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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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국가가 역사를 쓸 때, 역사가 태어날 때


"제국주의 일본의 경제력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일이 왜 중요한가 하면, '세계공황-열강의 경제 블록화-일본의 경제 블록화-실패-무력에 의한 경제 침략'이라는 공식으로는 식민지와 일본의 관계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50) "경제적 측면에서 확인해보면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 타이완, 조선 등은 영국·프랑스와 그들의 식민지의 관계보다 훨씬 밀접했습니다. 지배받는 쪽에서 보면 이는 옴짝달싹할 수 없이 종속된 위계적 관계였겠지요. 한국 등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경험한 국가들의 역사의식이 서구의 식민 지배를 경험한 국가와 다른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호리 교수는 타이완보다도 조선이 훨씬 더 일본제국에 포섭되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현재 일본에 대한 한국과 타이완의 인식이 다른 요인의 하나가 경제적 종속의 강도에서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데이터는 전후 식민지 국가의 역사인식의 근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하지요."(53)


# 본국-식민지 무역 비중(1937년, %, 수입/수출)

1. 영국-인도 : 33.2 / 39.0

2. 프랑스-인도차이나 : 55.2 / 53.4

3. 일본-타이완 : 92.5 / 83.3

4. 일본-조선 : 87.4 / 85.0


2장 선택을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 리튼 보고서


만주사변 발발 직후인 1931년 9월 21일 국민당이 일본의 군사행동을 국제연맹에 제소하자 국제연맹은 같은해 12월에 리튼조사단을 파견합니다. "일본이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건국까지 이미 엄청난 돈을 썼는데 만주국 건국을 없던 일로 하다니, 허용할 수 없어'라고 했다면 그리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리튼이 만난 많은 일본인은 러일전쟁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당시 일본인 대부분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지 못했다면 중국 동북부는 중국에서 떨어져나가 러시아 땅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리튼은 일본인들에게 '경제적 이익에 관해 당신이 한 말을 인정합니다'라고 말했죠. 이 말은 곧 중국이 조약을 지키지 않아 일본이 경제적 이익을 지킬 수 없었음을 인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리튼은 '일본의 권익은 잘 알고 있지만 이번에 일본이 한 행동은 인정할 수 없다. 일본도 세계의 길을 받아들여라. 아직 늦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98-9)


"리튼 보고서는 '① 만주사변은 일본의 자위 행위가 아니다. ② 만주국은 민족자결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③ 다만 중국의 경제적 보이콧은 국민당이 지휘한 일이다'라고 결론 내렸습니다."(107-8) "'일본군의 행동은 자위로 인정할 수 없다. 만주국은 지역민의 자발적인 욕구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라고 일본을 비판하면서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태도를 침략 행위로 정의하지 않은 부분에서 리튼의 정치적 노련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만주사변은 일본이 국제연맹규약을 위반하고 타국을 침략한 사건이다'라고 써도 됐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일본을 규탄한다면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으로 활동해온 일본이 연맹을 탈퇴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중일 간에 더 광범위한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 상하이와 홍콩에 거점을 둔 영국의 무역이 위태로워집니다. 일본을 쓸데없이 자극해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지요."(110)


"일본 언론들에서는 정식 보고서를 앞두고 '리튼 보고서는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방송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에 예상과 달리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이 나왔으니 당연히 소동이 일어났지요. 리튼 보고서의 번역본이 공개된 1932년 10월 3일, 신문은 굉장히 과감한 제목을 뽑았습니다. 「보고서 곳곳 일본이 용인할 수 없는 서술, 만주 정책 부정으로 일관」이라고 씁니다. 일본은 '리튼 보고서가 내린 세 가지 결론 중 두 가지에 동의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관동군의 군사행동은 자위권의 발동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본은 "이는 자위권 행사이다. 이 부분은 양보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 현재의 만주국은 순수하고 자발적인 독립활동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만주국은 현지 중국인과 만주족의 민족자결로 탄생한 국가라고 말이지요."(124)


일본은 관동군의 반발도 걱정해야 했습니다. "관동군 입장에서는 '소련의 이익을 고려하라'는 (리튼의)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지요.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원군으로 온 조선군(관동군과 마찬가지로 당시 일본이 점령했던 조선에 주둔하던 상설군) 일부를 포함한 일본 측 군대가 만철의 부속 영지로 혹은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주사변이 모략으로 시작됐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일본 군대가 만철선 아래로 철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관동군 입장에서는 자위적 조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왜 안 되느냐고 반발하겠지요. 리튼 보고서에는 만주 지역의 안전 보장을 위해 특별헌병대를 만든다고 적혀 있고, 또 이런 군대의 훈련에 일본 측 전문가와 고문의 참가를 인정하고 있지만 관동군은 이 조건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만주에서 철군하게 되면 국방을 포기했다는 국민의 분노가 폭발할 것이 뻔했습니다."(135-6)


"1941년 4월부터 11월까지 이루어진 미일교섭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코델 헐이 리튼과 거의 똑같은 말을 합니다. 만약 일본이 중국과 선린우호, 주권 및 영토의 상호 존중에 관한 원칙을 인정한다면 미국은 중국에게 일본과의 전투를 종결하고 평화 회복을 위한 교섭에 임하라고 촉구하겠다고요. 그리고 태평양 지역의 경제활동에 관해서는 경제의 보전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천연자원의 무차별 균점(이익과 혜택을 평등하게 받는 일)을 받을 수 있게 협력하겠다고도 말했습니다. 블록 경제가 아닌 통상의 무차별적 허용,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자유로운 권한을 서로 인정하자는 제안입니다." "세계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세계의 길을 부정하고 식민지를 제국 내의 블록으로 재편하면서 경제를 운용하는 길을 취할 것인가, 일본은 식민지를 블록으로 재편해 경제를 운용하는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미국은 '세계의 길'을 일본에게 제시했고 그 답으로 전쟁을 돌려받았습니다."(167-8)


3장 군사동맹이란 무엇인가 - 20일 만에 맺어진 삼국군사동맹


# 군사동맹의 3요소

1. 가상적국 설정

2. 의무 범위(참전의무 등) 설정

3. 점령하고 통치하고자 하는 세력권 설정


"군사동맹을 맺는 이유는 상대를 위협하고 그 행동을 제한하는 기능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상대가 겁을 먹지 않으면 동맹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1939년 8월 23일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된 지 겨우 이틀 만인 8월 25일 영국과 프랑스는 서쪽으로 밀고 들어올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폴란드와 상호원조조약을 맺었습니다. 독일과 영국은 서로를 억지하려고 동맹조약의 존재를 상대에게 과시했지만 독일은 그러한 위협에 굴하지 않고 폴란드를 침공했으며 전쟁은 결국 유럽을 휩쓰는 대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즉 상대를 억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자극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억지라는 것은 사실상 상상 속의 산물에 불과할 때가, 그래서 감정에 좌우될 때가 많습니다. 동맹은 겉보기에는 위기에 대처하는 현실적인 조치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상대국의 적의만을 증폭시키는 구조를 필연적으로 지닙니다."(190-1)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년간 일본은 중립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1940년 9월 3일 영미방위협정이 체결된 직후) 독일군이 영국 본토에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영국 본토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쯤이면 아마 독일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을 듯합니다. 그때 독일은 일본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특별사절을 파견합니다. 바로 하인리히 게오르그 스타머입니다. 스타머는 1943년부터 1945년 5월 독일이 패배하는 시점까지 주일대사를 맡은 인물입니다. 스타머는 1940년 9월 7일 도쿄에 도착했고 9일부터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마쓰오카 요스케의 저택에서 교섭을 시작합니다. 19일 어전회의 결정, 26일 추밀원 본회의를 거쳐 27일에는 베를린에서 삼국 대표의 조인식이 열렸습니다. 20일 만에 조약이 체결된 것입니다(1902년 제1차 영일동맹은 본격적인 교섭 개시 후 조인까지 3개월이 걸렸습니다). 삼국동맹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빠르게 체결됐습니다."(203-4)


동맹 조문에 명기된 "일본이 '대동아'에서 이루고자 하는 신질서 이념과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이루고자 하는 이념이 똑같을 리가 없습니다. 동상이몽의 동맹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어렵지요. 이를테면 팔굉일우라는 말을 연상시키는 듯한 전문을 독일이 정말로 인정했을까요. 신국神國 일본이라는 발상은 나치 독일의 세계관과는 모순되는 것이었으므로 독일이 전문을 성실하게 봤다면 도저히 조인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마침 독일은 런던에 맹렬한 폭격을 시작했고 영국은 흔들리고 있었지요. 그런 때에 일본과 동맹을 맺으면 미국을 견제해 찍소리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억지 효과를 발휘할 동맹을 한시라도 빨리 맺고 싶어 했습니다. 20일간의 속전속결 결과가 조문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신질서에 관한 삼국의 일치점도 없으며 대동아의 범위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삼국동맹은 그런 조약이었지요."(225-6)


동맹을 맺으면서 "일본이 준비했던 비밀양해사항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의 '생존권 범위'인데요. 그 욕심이 대단합니다. 대동아 지역(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태평양제도, 타이, 영국령 말레이, 영국령 보르네오, 네덜란드령 동인도, 버마) 이외에 일본의 괴뢰국가였던 만주국, 마찬가지로 왕자오밍이 이끄는 괴뢰정부인 난징국민정부가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일본은 구 독일령 남양군도도 일본의 생존권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비밀양해사양의 두 번째는 영국과 미국을 향한 무력행사를 일본이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겉으로 명확히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세세한 조건을 갖다 붙였습니다. "중일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영국과 미국에게 무력행사를 하지 않을 것이며 무력행사는 국내외 제반 정세가 특히 유리한 때와 국제정세의 추이가 이미 일각의 유예도 허용치 않는 상황이 됐을 때에 한한다"고 했습니다."(229)


"삼국동맹을 맺으면 영·미와의 대립은 불가피해집니다. 삼국동맹을 맺지 않으면 일본의 전쟁 상대국은 중국뿐이므로 앞으로도 중일전쟁을 직접 수행하는 육군이 주장하는 비율대로 예산 분배가 이루어질 게 뻔합니다." "(50억 대 20억으로 육군이 해군의 2.5배를 점유하는) 육군과 해군의 군사비 비율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서든 중일전쟁을 축소하고 소련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해군의 바람이었습니다. 일·독·이 삼국군사동맹을 맺게 되면 영·미와의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이 위험한 동맹을 맺으려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해군은 육군이 소련, 중국과 화평을 해준다면 남쪽을 향한 군비 확장으로 눈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보았지요. 해군이 독일이 중재하는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며 삼국동맹 찬성 쪽으로 기울어간 배경에는 군사 예산을 둘러싼 육군과 해군의 오랜 대립이 있었습니다."(251-2)


4장 일본이 전쟁에 진 이유는 무엇일까 - 미일교섭의 함의


"미국이 1941년 4월, 미일교섭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는 대답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벌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939년 9월부터 이어진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영국 편에, 영국에 망명정부를 둔 폴란드와 네덜란드, 벨기에 편에 서 있었음은 명백합니다. 다만 미국 국민은 연합국 국민을 동정하기는 하지만 전쟁은 정말 싫다는 생각이 매우 강했습니다. 이 시기의 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영국에 군수물자를 (유상으로) 원조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동시에 88퍼센트는 직접 참전에는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미일교섭이 시작되기 한 달 전인 1941년 3월, 대통령이 발안한 무기대여법이 통과되면서 사태가 급변합니다. 무기대여법은 미국이 영국에게 무기와 물자를 무상으로 보내주고 전쟁이 끝난 뒤에 달러가 아닌 현물로 돌려받는다는 구상입니다."(277-8)


"영국은 상선을 군함이 호위하는 호송선단 방식으로 미국에서 무기와 물자를 운반해 왔는데요. 그 배들이 독일 잠수함 유보트에 무수히 희생됐습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애써서 무기를 대여했는데 대서양을 건너지도 못하고 바다에 처박혀서는 곤란하겠죠. 그래서 경비와 순찰을 담당하는 미국의 해군초계부대를 대서양에 배치하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중했던 루스벨트도 드디어 4월 15일 대서양 해군초계부대의 경계 수역을 그린란드와 아조레스제도를 포함한 아프리카와 브라질의 중간선 서측까지 확대하는 데에 동의합니다. 미국 해군초계부대는 영국 배를 독일의 잠수함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선단 호위는 할 수 없지만 독일 잠수함의 위치를 미국 해군과 영국에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 대서양에서 초계활동을 하려면 태평양에 두었던 미국 함대 가운데 일부를 대서양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 방면에서는 당분간 미일 대립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지요."(280-1)


"일본은 이대로 있다가는 삼국동맹이 발동되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삼국동맹의 제3조는 미국이 독일·이탈리아·일본 가운데 어느 한 국가를 '공격'했을 때 '삼국은 모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방법을 다해 상호 원조'한다고 했지요." "미국이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독일·이탈리아·일본을 '공격'한 것이 되는지 일본은 무척이나 불안했습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영국을 원조하기 시작한 가운데, 이를테면 미국의 구축함이 독일 잠수함을 공격하면서 교전이 시작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미국의 영국 원조가 일본을 미국과의 교섭 테이블에 앉도록 재촉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독일의 허가를 얻어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 등을 손에 넣고 대동아를 일본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기 위한 시간을 벌고 싶었다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궁내성, 외무성, 대장성 일부 등의 친영미파뿐만 아니라 뜻밖에도 육군과 해군 모두가 한목소리로 미일교섭에 찬성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282-3)


미일교섭 세 번째 항목은 중일 관계 개선책과 미국의 관여에 관한 내용입니다. "어째서 미일교섭에서 가장 자세히 작성된 항목이 중일전쟁의 해결책일가요. 물론 삼국동맹의 적용 등이 두 번째 항목에 자세히 나와 있기는 하지만요. 여기서 일본이 미일교섭을 시작하고 싶어 한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옵니다. 중국과의 화평입니다. 장제스가 모처럼 마음을 열었을 때 일본은 자신들의 괴뢰정권인 왕자오밍 정권과의 조약 체결 기한을 우려해 장제스의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왕자오밍 정권을 정식 승인해버렸습니다. 이를 계기로 독일이 중재했던 중일화평은 실패로 끝났죠. 해군은 이쯤에서 육군이 주로 담당하던 중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군사비를 좀 더 확보하고 싶었지요. 그래서 중일전쟁 개전 이후 중국에 도의적 관심을 기울여왔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화평을 권고하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296)


"1941년 7월 2일 어전회의에서 제국국책요강이 결정된 배경에는 (6월 22일 전격적으로 시작된 독소전에 발맞추어) 북진론을 주장하는 마쓰오카와 참모본부, 이에 맞서고픈 군령부, 해군성, 육군성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마쓰오카와 참모본부에 대항하기 위해 군령부 등이 '대영미전도 불사한다'라는 문구를 집어넣어 육군이 소련을 공격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육군은 관동군 특종 연습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소련군 붕괴에 대비해 소련 국경과 가까운 만주국 북부에 군대를 진격시킵니다. 일본 국내의 2개 사단에 더해 만주·조선에 있던 14개 사단을 전시 편제로 증원한 16개 사단을 배치해 경계에 돌입합니다. 이에 따라 관동군의 병력은 70만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그러나 1941년 7월 일본이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추진하자 미국은 전면 금수와 자산 동결이라는 조치를 취했고 남방에서의 긴장감이 고조되자 육군은 결국 8월에 소련 공격을 단념합니다."(326-7)


재무장관 모겐소와 육군장관 스팀슨 같은 대일 강경론자들은 "경제 약소국 일본에게 경제적 압박을 가하면 미국에게 전쟁을 걸어올 리 없다고 여겼습니다. 모겐소는 일본은 '점토로 만든 발을 한 거인'이므로 경제 제재를 하면 굴복할 거라고 봤지요." "코델 헐을 비롯한 국무성의 주류는 다른 생각을 가졌습니다. 광범위한 금수 조치는 일본이 극동에서 벌이는 행동을 정당화하는 절호의 구실을 제공하리라는 것을요. 미국이 전면 금수 조치를 취하면 일본이 무력행사라는 방아쇠를 당기게 된다는 것을 국무성은 자각했습니다. 미국은 태평양에 배치할 함대가 다 정비될 때까지, 대서양에서의 초계와 호위가 제대로 될 때까지는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은 도쿄의 미국대사관과 국무성 간의 외교전부를 꽤 정확하게 해독했기 때문에 미국이 금수에 관해서는 신중한 대응을 해온 경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지나치게 낙관적인 예측을 하고 말았지요."(332-3)


"(지배층의 여론 조작에 휘말려 타도 영미 구호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들은 만주사변은 중국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만약 반反영미 정서가 뿌리 깊은 국민에게 갑자기 영국, 미국과 사이좋게 지내려 한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오자키는 분석했습니다. 오자키가 민중의 반영미 정서와 그렇게 흐르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한편 위정자가 떠안은 고민도 함께 거론하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비록 지배층이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려 서둘러 굴복의 합리성을 찾아내 보여준다 해도'라는 부분입니다. 시원시원하고 군더더기 없는 묘사입니다. 지배층이 이제 와서 일본의 경제적 약세를 자각하고 영미에 굴복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임을 시인한다 하더라도 대중은 이를 들어줄 귀를 가지지 않았고 전쟁에 패배한 이후가 아니라면 국민은 굴복이 올바른 선택이었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굉장히 암울한 전망을 내놓습니다."(352)


# 오자키 호쓰미 : 소련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와 함께 활동했던 언론인으로 1941년 10월 15일에 검거되었고, 1944년 11월 7일 국방보안법, 군기보호법,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민중이 왜 가장 강경한 곳으로, 천황도 두려워했던 세력의 의견에 이끌려가고 말았을까요. 그 애절함에 누구나 충격을 받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한 하나의 지혜는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에게 천황은 수신수업 시간에 배우는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 속의 등장인물입니다. 진짜 고대 역사상의 천황에 관해 사료를 통해 배우는 것은 구제 고교(일본에서 고등학교령에 의해 세워져 1950년까지 존재했던 교육기관)에 들어가고 난 뒤입니다. 이때서야 비로소 중국 사료 등도 이용하면서 비판적으로 고대사를 배울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의 비율은 100명에 한 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정직한 교육이 정말 중요합니다. 최적해最適解라는 표현을 쓰는데요(수많은 선택지를 비교해 가장 적절한 답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국민은 그것을 고를 수 없었습니다. 교섭을 타결하는 편이 훨씬 좋았지요. 하지만 이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민중이 없었습니다."(367-8)


"1941년 미일교섭은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10년이 흐른 뒤에 일어났습니다.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 사이도 10년이었습니다. 후자의 10년 사이에는 우치무라 간조 등 청일전쟁을 일본의 성전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전쟁 이후 일본의 정책을 보며 러일전쟁에 반대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미일교섭 과정에서 고노에 메시지가 신문에 게재되었을 때 아, 이건 '세계의 길'이며 고노에는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일반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정보가 공개되었다면 달랐겠지요." "고노에를 위협하는 사람들이 전단지에서 적어놓았던 말은 믿기 힘들 정도로 과격하고 비논리적입니다. 이 차이를 피부로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후세에는 바로 지금, 현재가 거울鏡이 될 것입니다." "역사가 거울이라는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배우는 일은 자연스럽게 미래를 만드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배우는 것이지요."(3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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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가토 요코 지음, 윤현명 외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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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일본 근현대사를 생각하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서 주권·사회계약에 대한 공격, 다시 말해 상대국의 헌법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 〈전쟁 및 전쟁상태론〉, 루소


"통수권 독립이라는 발상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야마가타는 세이난전쟁 이듬해인 1878년 8월 근위포병대가 급료에 대한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킨 것을 보았고, 당시 자유민권운동이 사회에 퍼지고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야마가타는 1897년 스스로 참모본부장에 취임해 군령軍令에 관한 사항은 오로지 참모본부장이 관리한다는 규칙을 제정했습니다. 야마가타는 자유민권운동의 영향이 군대에 미치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세이난전쟁의 교훈을 살려 군대 명령권자와 정치 지도자를 분리하는 것이 국가의 안전을 위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대규모 반란을 막기 위해 그러한 분리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통수권 독립은 결과적으로 인류의 역사를 불행하게 만들었는데, "통수권 독립으로 일본 군부는 정치 지도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고, 이것이 더욱 전쟁을 부추겼기 때문입니다."(70-1)


1장 청일전쟁 - '침략·피침략'을 넘어 봐야 할 것


"1880년대에 이홍장은 중국군의 근대적 개혁을 추진합니다. 또 1881년에는 신장 지역의 평정에 힘썼습니다. 중국의 서부 신장에 이리伊犁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권이지만 청의 지배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야쿠브 베그가 새로운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러자 청 정부는 신속하게 군대를 보내 이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질서 회복을 도모하는 한편, 러시아와는 영토 일부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이리조약'을 맺었습니다. 이홍장의 무력 대응이 효과를 거둔 셈입니다. 이홍장의 단호한 결단력을 본 열강은 '오! 중국이 변했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중국이 만만찮은 상대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청은 조선을 대하는 태도마저 바꾸었습니다. 그때까지 청의 조선 관련 정책은 '예부禮部'가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이홍장은 1881년 조선과 안남을 자신이 직접 담당할 수 있게 제도를 고쳤습니다."(98-9)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脫亞論'은 톈진조약(1885.4) 이전에 쓰였습니다. 역사가 반노 준지는 후쿠자와가 "우리 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만한 여유가 없다"라고 한 것은 '개화파에 대한 지원을 통해 조선에 진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일종의 패배 선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웃 나라는 조선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지나와 조선을 대하는 방법도 이웃 나라임을 고려해 특별히 대하는 것이 아닌, 서양인이 그들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면 된다"라고 한 것은 '이제는 전쟁으로 청을 친 다음 조선 진출을 달성하는 수밖에 없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요컨대 후쿠자와의 '탈아론'은 서구 열강의 아시아 분할이 임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대를 포기하고 조선과 중국을 저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 진출은 조선 내부의 개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중국을 친 다음 무력을 통해 실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05-6)


"빈 대학 정치경제학 교수였던 슈타인은 이토 히로부미가 유럽을 방문했을 때 이토에게 메이지헌법의 기둥이 되는 권력분립의 기본 구조, 국가가 행하는 사회정책의 필요성 등을 가르쳐주었습니다."(107) "슈타인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는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을 설명했습니다. 주권이 미치는 국토의 범위가 '주권선'이고 그 국토의 존망에 관계되는 외국의 상태가 '이익선'인데, 조선을 중립국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이익선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조선을 즉시 점령할 필요는 없다. 스위스나 벨기에 또는 수에즈운하처럼 조선을 중립국으로 두는 것에 대해 영국·러시아·청·독일·프랑스 등의 승인을 받으면 된다.' 이것이 슈타인의 조언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논의에는 '중국 대신 일본이 조선의 중립을 보장한다. 담보擔保한다'는 논리가 등장합니다. 담보는 무력과 같은 실력으로 특정한 상태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두 사람의 만남에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 것입니다. 1889년 6월의 일입니다."(111-2)


"요시노 사쿠조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교수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이념적 기초를 만든 사람입니다." "요시노의 제자 오카 요시타케는 요시노 못지않게 뛰어난 인물로,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부 해군과 함께 미국을 통한 화평을 극비리에 추진하던 도쿄대학 법학부 교수 그룹 중의 한 명입니다." "오카는 일본의 민권파가 개인주의·자유주의 사상이 약한 것은 메이지 초기부터 국권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만약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없다면 상황에 따라 사람은 국가가 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근대 일본에서는 민권파나 반정부세력이라 할지라도 외교·군사에 관해서는 후쿠자와나 야마가타와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불평등조약 아래 근대 국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민주의 이상 이전에 '먼저 국권을 확립하자'는 '합리주의'가 부각됐던 것입니다."(116-7)


"후쿠자와 유키치는 '민당은 의회에서 중의원 의원의 8할을 차지하기 때문에 정부의 법률안, 예산안 통과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민당은 정부에 대해서 번벌정부, 전제정부라는 비판밖에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시 정부에는 조슈·사쓰마·도사·히젠이라는 네 개의 번 세력이 있었고, 이들이 정부 요직을 독점했습니다. 그 때문에 민당인 자유당이나 개진당 소속 사람은 아무리 돈이 있고 우수해도 번벌정부의 내부로 파고들 수 없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타이완을 식민지로 획득했습니다. 태평양전쟁 종결 시점을 기준으로 타이완 총독부에는 4만 3870명의 일본인 관료가 있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입니다. 그래서 후쿠자와가 "지금이야말로 민당은 새로운 식민지를 획득하고, 거기서 지금껏 얻지 못했던 관료직을 얻어라"라고 했던 것이지요. 이것이 자유당을 포함한 민당이 청일전쟁을 그다지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124-6)


2장 러일전쟁 - 조선이냐 만주냐, 그것이 문제로다


"먼저 제국주의 시대의 전쟁의 '효용'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러일전쟁의 효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해서 간신히 이겼습니다. 그 결과 서구 열강에 대사관을 둘 수 있는 나라가 됐습니다. 당시에는 강대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나라는 대사관을 둘 수 없었습니다. 대사관 대신 공사관만을 두었지요. 영국 주재 일본공사관이 대사관으로 승격된 것은 1905년 12월의 일입니다.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이 같은 해 9월에 맺어졌으니 국가의 격이 확 달라진 셈입니다. 이처럼 당시의 국제 관계는 실로 엄격한 상하 관계였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불평등조약 개정 등 당면의 국가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러일전쟁 5년 뒤에 이루어진 1910년의 한일합병입니다. 이는 섬나라 일본이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획득한 타이완과 펑후제도가 섬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149-51)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커다란 희생을 치렀습니다. 뤼순전투에서만도 다수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 사회에는 '일본은 20만 명의 희생과 20억 엔의 돈으로 만주를 획득했다'는 말이 널리 퍼졌습니다. 실제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러일전쟁 4년 뒤인 1909년 〈제2대청정책淸政策〉이라는 의견서에서 '20억 엔의 자재와 20만 명의 사상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 후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도 "20억 엔의 자재와 20만 명의 영령으로 획득한 만주의 권익을 지켜라"와 같은 슬로건이 등장합니다. 만주의 권익을 둘러싸고 중국과 대립했던 쇼와 시기에도 일본인은 러일전쟁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주사변의 근저에는 러일전쟁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 간의 기억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1930년대에 본격화된 일본의 침략전쟁의 뿌리는 러일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156-7)


# 1898년 러시아가 시모노세키조약의 배상금을 지원하는 담보로 중국에게 뤼순과 다롄을 얻으면서 랴오둥반도 남쪽에 부동항 확보 → 극동 지역의 군사력 운용폭 확대 : 일본에게는 악몽 같은 상황


"러시아가 만주를 잠식해 들어가던 1903년 10월경, 극동 총독에 임명된 베조브라조프는 황제를 잘 설득했습니다. '철도를 만드는 것보다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한국을 차지하면 돈이 들지 않습니다. 일본은 별 것 아닙니다'라는 식이었지요. 그는 '한국 또는 한반도를 차지하면 랴오둥반도의 뤼순·다례 항구를 지킬 수도 있다. 중둥 철도 남쪽 지선의 끝자락에 있는 뤼순·다롄을 방위하기 위해 육지에서 철도를 부설해 마을을 건설하는 것은 돈이 많이 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들이지 않고 뤼순·다롄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다 쪽, 즉 한반도를 잡아두는 편이 비용이 싸다. 일본이 진짜로 전쟁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청일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일전쟁에는 여기에 또 다른 문제가 추가됐군요. '철도 부설과 도시 건설에 필요한 비용을 싸게 하는 것'과 '극동의 바다에 해군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각각 경제 및 안전보장 문제와 연결됩니다."(173-4)


"어째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항할 때 한국 문제를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일본은 러일전쟁을 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돈을 빌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문제로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돈을 빌려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어? 이미 한국 문제로 청일전쟁 때 싸우지 않았나요?"라고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일본의 한국 확보는 미국과 영국에 관심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요? "남부의 목화로 만든 무명(면)을 수출하고 싶지요? 콩을 세계적으로 상품화하고 싶지 않나요?"라고 말하면 됩니다. 이렇게 수출 시장으로서 만주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결국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러시아에 맞서면서도, 서구 열강을 향해서는 만주의 문호 개방을 위해 러시아와 맞서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서구 열강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구 열강에 비해 늦게 '제국'이 된 일본으로서는 주변의 지원이 절실했습니다."(181-2)


"8만 4000명이라는 엄청난 전사자를 낳았지만, 러일전쟁 승리 덕분에 일본은 러일협상에서 요구했던 것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우세한 이익'이 포츠머스조약에서 '탁월한 이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청일전쟁 때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의 나라'라는 표현이 이제는 '정치·군사 및 경제적인 탁월한 이익'으로 바뀌었습니다." "〈제3조 : 러시아제국 정부는 청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또는 기회균등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일체의 영토상 이익 또는 우선적·전속적인 양여를 만주에서 얻을 수 없음을 선언한다.〉 그전까지는 러시아가 중국의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을 점령함으로써 다른 나라는 만주에서 배제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각국이 평등하게 만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 영국 그리고 전쟁 중 러시아를 원조했던 독일, 프랑스도 포함됩니다. "자, 제국주의 국가 여러분! 어서 오세요"하고 중국 동북부의 문을 활짝 연 셈입니다. 이것이 러일전쟁이었습니다."(188)


3장 제1차 세계대전 - 일본이 느꼈던 주관적인 좌절감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이 호전적인 국가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미일관계가 어색할 즈음 일본은 독일이 서태평양의 섬을 지배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마리아나, 팔라우, 캐롤라인, 마셜 등의 미크로네시아 지역은 미국이 태평양을 횡단해 동양으로 올 때의 길목에 있습니다. 일본은 이런 섬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가토 다카아키 외상은 영일동맹을 내세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고 했습니다. 동맹국을 돕는다는 명분이었지요. 당시 영국은 일본의 개입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가토 외상은 영일동맹 협약 전반의 이익을 방호한다는 명목으로 참전을 강행했습니다. 영국이 대서양에서 안심하고 싸우는 동안 일본 해군은 1914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독일령 섬, 즉 남양군도를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마셜제도의 잴루잇, 캐롤라인제도의 포나페·트루크·야프, 마리아나제도의 사이판 등지에 해군기지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일본이 점령한 것입니다."(210-1)


남양군도 다음으로 일본이 노린 곳은 중국 산둥성의 권익입니다. "칭다오와 자오지 철도를 차지하면 일본은 유사시에 산둥반도의 자오저우만·칭다오에 상륙한 다음, 철도를 통해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난까지 손쉽게 진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철도를 따라 톈진, 베이징까지 금방 북상이 가능합니다. 그전에는 베이징에 도달하려면 우선 한반도의 인천에 상륙하고, 거기서 다시 철도로 만주의 안둥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펑톈·진저우·산하이관을 넘어서 톈진·베이징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중국의 심장부를 달리는 가장 좋은 철도는 영국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독일령을 빼앗음으로써 영국 이외에는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중요한 철도를 손에 넣은 것입니다. 사실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베이징을 공략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나라는 그때까지 없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육해군 공동 작전을 수행했는데, 이제는 중국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해졌습니다."(216-7)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과 미국·영국·프랑스 간에 벌어진 격론은 일본이 차지한 독일령 산둥반도의 권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격론의 핵심은 산둥반도를 바로 중국에 돌려줘야 하느냐, 아니면 일본이 패전국 독일로부터 정식으로 수령한 다음 적절한 시기에 중국에 반환해야 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하라 내각과 정우회는 파리에서 있었던 외교상의 문제를 전부 이전 정권인 제2차 오쿠마 내각과 헌정회, 그리고 가토 외상의 책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에도 계속 조명되어 왜곡된 기억을 낳게 했습니다. 이전 정권의 잘못으로 일본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부당하게 비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서구 국가가 중국에 동조해서 일본을 부당하게 비난했다는 이미지는 일본의 우익에 의해 확대되고 재생산됐습니다. 민간 우익으로 유명한 기타 잇키는 산둥 문제를 둘러싼 격론에 대해 일본이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배척됐다고 평가했습니다."(238-9)


"파리강화회의에서 채택된 베르사유강화조약의 제156조부터 제158조를 보면 "산둥의 권익은 일본의 것이 된다"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요구가 전부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외교가 실패했고 다른 연합국이 일본을 따돌렸다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객관적으로 당시의 일본은 권익을 챙겼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정치·경제 문제보다 의식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가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일본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느낀 위기감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 의회가 한국의 3·1운동을 언급하면서 일본의 가혹한 식민 지배를 비판하고 그런 일본과 타협한 윌슨 대통령을 비난하자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은 감정의 상처가 되어, 깊고 무겁게 남았습니다. 1930년대 이후 그 상처는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265-7)


4장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 일본의 자멸과 중국의 역할


"만주사변 발발 이전에 도쿄제국대학 학생들이 만몽 문제에 대해 무력행사를 해야 한다고 답했던 것을 되새겨봅시다. 무려 9할에 가까운 사람이 무력행사에 찬성했습니다. 이는 당시의 일본인이 만몽 문제를 일본의 주권에 대한 위협 혹은 일본 사회의 기본 원리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중의원 의원인 마쓰오카는 1930년 12월에 개회한 통상회의에서 의원으로서 첫 연설을 했습니다. 이때 그 유명한 "만몽은 우리 나라의 생명선이다"라는 말을 했지요. 이때는 만주사변 발발 9개월 전으로, 당시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의 외상 시데하라 기주로가 미국·영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협조 외교를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협조 외교를 비판하는 마쓰오카의 주장은 "첫째 경제적·군사적으로 만몽은 일본의 생명선이라는 것, 둘째 일본 국민의 요구는 "생물로서의 최소한의 생존권"이라는 것이었습니다."(286-7)


"일본에서는 '생명선'·'생존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그렇다면 그 특수 권익의 실태는 어땠을까요?" "1926년의 통계에서, 만철과 일본 정부의 투자를 합하면 61퍼센트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법인 기업이 31퍼센트인데, 여기에는 만철로부터 유입된 자본 약 3억 700만 엔이 포함돼 있습니다. 따라서 약 3억 700만 엔을 만철의 것으로 계산하면 만철과 일본 정부의 대만몽 투자 비율은 무려 약 85퍼센트가 됩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운수업 외에도 정부로부터 광업 및 철도 부속지 사업을 넘겨받아 관리하는 회사입니다. "결국 만몽에 대한 투자는 대부분 국가 관련 투자였습니다. 따라서 국민으로부터 비판이 제기되기 어려운 구조였지요. 미국이나 영국처럼 사기업의 투자가 활발했다면 기업인의 비판이 정책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 관련 지분이 85퍼센트에 달하는 상황에서 만몽에 대한 정책은 국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300-1)


"만주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은 양자 간 논의를 주장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이 뚜렷해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독일 정부의 배상금 지불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만으로도 영국은 충분히 바빴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관동군과 일본이 아주 심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 한, 일본을 통해서 동아시아의 질서를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대일 융화'라는 말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해서는 "타인만을 상대하지 말고 자기 본분을 다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잔혹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연맹은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그 유명한 '리튼 조사단'입니다. 관동군과 일본이 아주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 한, 일본에 유리한 보고서를 작성할 준비가 된 조사단이었습니다."(316-7)


"리튼 조사단은 일본이 '(장쉐량 정권에 의한 동북 3성의) 무법 상태로 인해 다른 어떤 국가보다 더 많이 힘들었다'고 인정했습니다. 또 중국이 국민당의 지시 아래 일본 상품을 불법적으로 '보이콧'했다고 했습니다." "만약 일본이 만주에서 경제적 권익만을 노렸다면 리튼 조사단의 결론에 만족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 특히 일본 군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일단 보고서는 일본의 행동을 국제연맹 규약 위반 또는 부전조약 위반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9월 18일의 군사행동을 합법적인 자위 조치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또 만주사변 이후 1932년 3월에 독립을 선언한 '만주국'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습니다. 만주국이 국민의 독립 요구에 따라, 즉 민족자결의 결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일본 관동군의 힘을 배경에 두고 만들어진 국가라고 명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이 만주 지역의 '중국적 특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만주가 중국 땅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318-9)


강경 발언을 거듭하면서도 내심 중국의 타협 요청을 기다리던 "우치다 외상의 계획을 망친 것은 쇼와 전전기에 항상 말썽을 일으켰던 문제아, 바로 육군이었습니다. 1933년 2월 육군은 만주국의 남쪽,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는 중국의 러허성을 침공했습니다. 사실 작전은 현지군의 독단이나 폭주가 아니었습니다. 각의를 거쳐 결정된 작전을 천황 자신이 1개월 전에 재가裁可한 것입니다." "일본은 만주국을 국가로 승인하면서 1932년 9월 15일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가 그것입니다. 일만의정서는 일본과 만주국 쌍방은 한쪽의 영토·치안에 대한 위협을 다른 한쪽에 대한 안녕·존립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공동으로 방위에 임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의 개입은 조약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만주국 내에 일본군이 주둔한다'는 이런 엉터리 조문을 강요한 것 자체가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가임을 잘 보여줍니다."(331-2)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만들고 북만주까지 만주국의 영토로 편입했지만 육군은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소련이 다시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대비책이 있었을까요? 육군은 만주국과 소련이 국경 지대에서 소련군을 효율적으로 격퇴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주국의 서쪽이며 만리장성 이남인 화베이 지역에 주목했습니다. 그곳에 안전한 장소를 만들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육군은 엄연한 중국 영토인 화베이 지역을 일본의 영향 아래 둔 다음, 그곳 비행장에 일본군 전투기를 배치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 다음, 별도의 정치·경제권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육군이 1935년 무렵에 추진했던 '화베이 분리 공작'입니다. 이것으로 일본은 중국과 결정적으로 대립하게 됐습니다. 중국 정부 내도 대일유화파가 있었지만, 화베이 지역을 분리하려는 일본 육군을 보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343-4)


# 중국 정치가들의 예견

1. 후스 : 2~3년 간 중국이 일본의 공세를 홀로 버텨내면 소련과 미국의 개입을 이끌어 낼 수 있다.

2. 왕자오밍 : 그렇게 일본을 상대로 힘을 소진하면 중국은 공산화될 것이다.


5장 태평양전쟁 - 전사한 장소를 알려줄 수 없었던 나라


"일본은 미국과 일본의 절대적인 격차를 국민에게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질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야마토 정신이라고 하면서 국력 차이를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위기를 강조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361) "당시의 중국통 다케우치는 중일전쟁은 내키지 않는 전쟁이었지만, 태평양전쟁은 강대국인 미국·영국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약자를 괴롭히는 전쟁이 아니라 밝은 전쟁이라는 감회를 말했습니다. 다케우치의 글에는 전쟁을 '상쾌한 기분'으로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요코하마 시내 다카시마역의 역무원 고하세 사부로는 개전 당일 일기에 "역장에게서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이미 우리는 어제까지의 나태한 기분에서 벗어났다. 있어야 할 곳에 안착된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썼습니다. 전쟁이 시작됐다는 말을 듣고 어제까지의 느긋한 기분이 아니라, 안착된 기분이 들었다는 내용입니다."(364-5)


"육군성과 해군은 (독소전쟁 발발 이후 두드러진) 외무성과 참모본부의 북진론을 견제하기 위해 움직였고, 그 방책으로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주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1941년 7월 2일의 어전회의에서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결정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미국의 반응입니다. 육군성과 해군은 일본이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주를 한다고 해도 미국이 강력한 보복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곳은 프랑스령이기 때문에 미국의 권익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모본부 전쟁반에서 기록한 일지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에서 멈춘다면, 미국의 금수禁輸는 없다고 확신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단행하자 미국은 신속하게 대응했습니다. 7월 25일에는 미국 내 자산을 동결했고, 8월 1일에는 대일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했습니다."(392-3)


"왜 미국은 그토록 신속하게 반응했을까요? 미국은 독일군 300만 명의 공격을 받고 있는 소련이 10월까지 전선을 유지하고 버티면 이듬해 봄까지는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련에는 동장군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초 모스크바까지 진격한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무너뜨릴 수 없었던 이유도 혹독한 겨울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1942년 봄까지 소련이 버텨낸다면 소련에 무기를 제공할 수 있을 만큼 미국의 무기 생산량이 증가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1941년 9월 28일 미국과 영국은 소련과 협정을 맺고 소련에 군수물자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두 나라는 어쨌든 소련이 1942년 봄까지 전선을 지탱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1941년 여름, 소련의 힘을 북돋울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던 것입니다. 결국 미국은 일본의 남진에 강력한 보복 조치를 취함으로써 소련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일본을 걱정하지 말고 독일과의 싸움에 전념하라고 말입니다."(393-4)


국가의 안전에 대해 고심한 미즈노 히로노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일본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다. 우리 나라는 주요 물자의 8할을 외국에 의존하기 때문에 통상 관계의 유지는 생명줄과도 같다. 외국과의 통상 관계는 일본이 비리와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유지될 것이다. 현대의 전쟁은 반드시 지구전·경제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물자가 부족하고 기술이 저열하며, 주요 수출 품목은 생필품이 아닌 생사다. 전쟁에서 일본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셈이다. 따라서 일본은 무력전에는 이겨도 지구전·경제전에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은 전쟁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탄압받았고, 국민도 그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의 관심사는 지구전은 불가능하니 독일과 함께 소련을 협공할 것인가,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 상대를 선제공격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옮겨갔습니다. 이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일본이 선택한 것은 후자였습니다."(411-3)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대개 수동형으로 표현합니다. 즉 죽은 일본인도 '피해자'라는 뉘앙스인데, 이것은 많은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피해'의 이미지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와테현에서처럼 전체 전사자의 9할이 1944년부터 패전까지의 1년 반 동안에 발생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9할의 전사자는 머나먼 전장에서 죽은 셈입니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나라는 유족에게 그 병사가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려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위령慰靈에 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감안할 때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즉 레이테든, 과다카날이든 정글에서 죽은 사랑하는 아들의 뼈를 수습하지 않으면 부모로서 마음이 편치 않고, 또 하늘의 도리에도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서는 엄청난 수의 전사자와 어우러져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피해'의 이미지로 느끼도록 만들었습니다."(421-4)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피해의 이미지로 느끼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만주에 얽힌 국민적인 기억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해외에 있던 일본인 민간인은 321만 명이었습니다. 여기에 육해군 군인이 대략 367만 명이었는데, 이 둘을 합치면 688만 명의 일본인이 해외에 있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688만 명 중에 200만 명이 만주에 있었습니다. 그 200만 명 중에 소련 침공 후 사망한 사람이 모두 24만 5400명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수입니다. 사망자와 귀국하지 못한 고아나 부인 등을 제외하고 많은 일본인이 만주에서 철수했습니다. 패전 당시 일본은 총인구의 8.7퍼센트가 철수를 경험했습니다." "확실히 만주로부터의 철수 체험은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피해와 고통이 강조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화를 낳은 근본 원인은 일본 정부의 정책에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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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군대 - 병사의 눈으로 본 근대일본 일본근대 스펙트럼 3
요시다 유타카 지음, 최혜주 옮김 / 논형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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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장 근대사회의 형성과 군대


# 일본 군대가 사회 풍속에 미친 영향

1. 신체(동작)의 규율화 : 걸음걸이 교정, 군대식 체조 도입, 시간 준수(시계 보급)

2. 언어의 표준화 시도 : 미진한 효과

3. 양복(군복)과 구두(군화) 복장 : 모범 사례로서의 천황

4. 식생활 개선 : 육식/빵식 확대(각기병 격감), 스튜나 카레류

5. 지역사회 연계 : 각지에서 청년단과 재향군인회 조직/활동

6. 그외 : 기차 탑승 경험, 병영에서 의자와 침대 생활 등


2장 군대의 민중적 기반


# 기층민중에게 비춰진 일본 군대

1. 징병검사 : 인생의례의 장이자 한 명의 남자로 재탄생하는 순간

2. 입·퇴영 의식 거행 : 지역민들이 입대자/제대자를 송영/환영하는 의식

3. 복종과 평등성의 조합 : 계급 외에 가문·직업·빈부의 차가 없고 평등한 의식주 생활

4. 능력주의 : 특기를 갖고 노력한 자(신체적 능력 중요)에게 정당한 보상 지급

5. 사회적 상승 통로 : 지역사회에서 '훈장'으로 통하는 상등병 진급과 하사관/소위후보자 지원 열망

※ '양병(良兵)' 공급지로서의 농촌

6. 그외 :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전파자 양성(주로, 고등소학교 졸업 수준의 학력자들)


3장 총력전의 시대로


"군사 관료기구의 존재 양상이라는 면에서 보았을 때, 일본의 군대는 독특한 정·군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독자적인 정치세력인 군부가 존재했다." "이미 1900년 육해군성 관제의 개정에 의해 확립한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육해군 대신의 임용자격을 현역의 대·중장으로 한정하는 제도─등이 있었는데, 러일전쟁 후인 1907년 '군령' 제정과 '제국국방방침'의 책정에 의해 제도적인 틀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 이 가운데 '군령'은 군사에 관한 칙령(법률과 병행하는 법령의 한 형식)을 천황의 친서(親署)와 육해군 대신의 부서(副署)만으로 공포하는 것이 가능하게 정하였다. 일반 칙령의 경우는 의회의 동의는 필요하지 않지만, 수상의 부서가 필요했다. 즉, 군령의 제정은 새로운 형식의 법령을 독자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육해군이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128-9)


"군부의 성립을 나타내는 제2의 지표는 대략 이 시기에 전문적인 군사 관료층의 형성이 완성된 것을 들 수 있다. 건설기의 육해군 군사 관료 중에는 근대적인 정규 군사교육을 받지 않은 자도 많고, 또 청일전쟁 이전 단계까지는 '전수방위'(專守防衛)적인 성격이 강한 군비 구상을 가진 반주류파가 육해군의 내부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육군의 경우, 1889년 월요회 사건(장교의 자주적인 군사연구회인 월요회가 육군대신에 의해 해산된 사건) 등을 계기로,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중심으로 한 조슈벌의 패권 확립과 함께 반주류파가 일소되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대학교에서 막료 교육을 받은 군사 관료층이 점차로 대두한다. 그리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육군대학교 출신의 막료층이 육군성이나 참모본부의 요직을 독점하게 되어 막료 출신자에 의한 일원적인 인사 구성이 실현되어 군사 관료가구가 확립됐다."(129-30)


# 러일전쟁 이후 확립된 일본군의 독자적인 사상

1. 과학적 합리성을 결한 정신주의

2. 경직된 공격 제일주의와 보병의 총검돌격만능론

3. 극단적인 전군 획일주의

※ 제1차 세계대전 연구를 바탕으로 제정된 '전투강요초안'(1926)에서 '정신적 위력'과 '물적 위력'의 균형을 고려하는 논의 제기


"정치적 측면에서 군부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상황과 정면으로 적대하지 않고 지배질서의 재편성에 도움이 되는 범위 안에서 데모크라시 상황에 적응하여 정당내각이나 보통선거를 용인하였다. 다음으로 군사적 측면에서 군 근대화를 위한 대규모 군개혁으로 우가키 군축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가키 군축은 단순한 군축이 아니고, 군축이란 형태를 취한 군비의 근대화였다." 우가키 군축과 더불어 국민동원 정책이 차례로 실현되었다. "하나는 1926년 공포된 청년훈련소령에 의해 설치된 청년훈련소이다. 이곳에서는 만 16세부터 20세까지의 청년 남자를 대상으로 군사훈련이나 공민교육 등의 청년 훈련을 행하였다. 청년훈련소는 1935년 청년학교로 개조된다. 또 하나는 1925년 육군현역 장교 학교배속령의 공포에 따라 실현된 학교 교련이다. 이에 따라 중학교 상당 이상의 학교에 현역 장교가 배속되어 군사 교련이 시작되었다."(139-41)


"제1차 호헌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1913년 '군부대신의 현역 무관제'를 약간 수정하여 육해군 대신의 임용자격을 예비·후비역 장관으로 확대하는 형태로 군제 개혁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예비·후비역 장관이 대신에 임용된 사례는 전혀 없었고, 1918년에 성립한 하라 다카시 내각의 다카하시 고레키요 장상이 주장한 유명한 '참모본부 폐지론'도 군사 관료의 강경한 반발을 일으키는 결과로 끝나버렸다. 또한 육군과 해군이 각각 '대원수'로서의 천황에게 직속하는 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군과 해군의 분립 및 대립도 심각했다. 통일된 군사전략과 종합적인 군비 확충계획을 결여한 채로 육·해군이 제각기 자기의 조직적인 이해를 체현하는 군비 확충계획을 위해 광분하는 일본 군부의 뿌리 깊은 체질은 이 시기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한층 더 심각한 문제는 군대의 정통성 근거를 '천황의 군대'에서 구하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다시 보기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162-4)


# 군인칙유(1882) : 메이지 천황이 내린 훈계의 말들로 군인들에게 천황이 친히 이끄는 군대의 구성원이라는 엘리트의식을 심어주고, 상관의 명령을 천황의 명령과 동일시하여 절대화하고 있다.


4장 15년 전쟁과 병사


당대의 사회상황을 무규율적인 도시문명의 확산과 농촌사회의 쇠퇴로 파악하는 견해가 널리 퍼져가는 가운데 "'국가혁신'을 요구하는 청년 장교와 중견 막료층의 기대를 받으며 1931년 12월 아라키 사다오 중장이 육군대신에 취임하여 군부에 의한 정치 개입을 본격화하였다. 아라키는 정신주의적이고 황실지상주의적인 육군 장교 그룹인 '황도파'의 중추적인 구성원이었다." "군부의 정치 개입은 비분강개형의 국사적(國士的)인 군인을 많이 만들어낸 군의 근대화에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되었다. 실제로 용병사상에서도 1926년 제정된 전투강요 초안에 보인 일종의 합리적 발상은 1928년 제정된 보병조전, 통수강령, 1929년 제정된 전투강요 등에서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어 다시 정신주의가 강조되어갔다. 이러한 중에 일본의 군대는 천황이 친히 이끄는 군대(황군)라는 자기인식이 강조된 것도 '15년 전쟁' 시기의 커다란 특징이다."(173-4)


# 15년 전쟁 : 만주사변(1931.9.18)부터 태평양전쟁 패전(1945.8.15)까지의 기간


"이때는 황군의식과 정신주의가 고창되는 가운데 다이쇼기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군 개혁이 차례로 부정되어간 시기이기도 했다. 군 개혁에 대한 최대의 부정은 1934년 군대 내무서의 개정일 것이다. 〈쇼와 9년 군대내무서 개정이유서〉에 의하면, "우리 국군은 천황 친솔의 군대로 그 사명을 관철할 각오를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명징하게 하여, 장병이 함께 군의 본의에 기초하여 거상(居常, 평소의 뜻)과 성유(聖諭, 천황의 가르침)를 받들어 그 본무에 정진할 것"이 중시되었다." "구체적인 개정에서 중요한 것은, 부조리한 취급을 받은 경우 상관에게 상신할 수 있는 권리를 정한 제11항과 제12항이 삭제된 사실이다." "제10항("자기에 대한 타인의 취급이 부조리하다고 생각될 때는 찬찬히 순서를 거쳐 그것을 사건 관계자의 바로 위 소속 부대장에게 상신함을 방해하지 않음")이 삭제된 1943년부터는 위법적인 상관 명령에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하는 생각이 공공연하게 부정되었다."(179-80)


# 절대 복종의 대표적인 사례 : 황도파 쿠데타(1936.2.26)


현역, 제1·2보충역, 사실상의 면역인 제2국민병역 중에서 "현역병으로 입영한 자는 2년간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뒤 5년 4개월간 예비역으로 편입되며 계속해서 10년간 후비역에 편제된다. 이들 예비·후비역병은 평상시에는 생업에 근무하지만, 유사시에는 필요에 따라 군대에 소집되어 전쟁터에 보내진다. 또 보충병역은 현역병의 소요인원을 초과했기 때문에 현역병으로 징집되지 않은 자가 복무하는 병역으로, 전시 병사의 소모를 보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군은 현역병 중심의 동원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군 중앙은 현역병으로 군대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보충병역을 신뢰하지 않아 현역·예비역·후비역 병사들에게 의존하려고 했다. 더욱이 대소전(對蘇戰)을 준비하기 위해 현역병 중심의 정예사단을 준비시켜두지 않으면 안 되었던 때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후비역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특설사단이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다."(199)


"예비·후비역 병사는 연령도 높고 가정을 가진 기혼자가 많다. 이른바 '장래의 염려'를 끊지 못하고 생활을 질질 끌면서 전장에 동원되어온 사람들이다. 그런 만큼 체력도 떨어지고 전의도 결코 높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각 부대에서는 "전쟁에서 병사는 젊을수록 정신력이 있다. 예비역이나 후비역은 전투기술은 우수해도 연령이나 기타 관계상 정신력이 박약한 감이 있다. 오히려 미교육이라도 젊은층을 우수하다고 할 만큼 지휘가 용이하다"라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미교육병이라도 보충병역의 젊은 병사 쪽이 낫다는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군 중앙의 대세가 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예비·후비역병에게 모순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쟁 목적이 불명확한 채로 전쟁이 장기화하는 데 따라 그들은 자포자기적 충동에 몰려 군기를 근저로부터 흔드는 존재가 되어갔다."(201)


# 상관의 명령 불복종, 폭행과 협박, 강간과 약탈 범죄 증가


"군 간부가 전장에서 만행을 단속하는 것에 열심이 아니었던 하나의 배경에는 다카다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너무 지나치게 엄격하면 도리어 우려할 만한 결과를 초래한다"라는 의구심이 있었다. 즉 군 간부의 입장에서는 병사의 가슴 답답한 불만이나 노여움이 상관에 대한 범죄 등의 형태를 취하고 군대 안의 질서 그 자체를 향해 폭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방지를 위해 전장에서 다소의 비행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뿌리 깊었던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하극상이란 필경 익명의 무책임한 힘의 비합리적인 폭발이고, 그것은 밑으로부터의 힘이 공공연히 조직화되지 않는 사회에서만 일어난다. 그것은 이른바 도착적인 데모크라시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중국의 민중에 대한 수많은 만행은 군 간부의 입장에서 보면, 밑으로부터의 비합리적인 격정의 폭발에 대한 일종의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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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 현대성의 형성-문화연구 10
김진송 지음 / 현실문화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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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현대를 바라보는 눈


"현대 혹은 모던이라는 말은 1920년대 이전부터 사용되었지만 익숙한 유행어로 정착하게 된 것은 1920~30년대에 들어서였다. 물론 1920~30년대에 꽤 널리 쓰였던 현대 혹은 모던이라는 말들 또한 지금 우리가 말하려는 '현대'와 동의어는 아니다. 예를 들면 '모던'은 그 자체로 모던풍 즉 현대적인 스타일을 말하는 유행어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걸이나 뽀이, 룸펜, 인테리, 빠 등등 서양말의 다발을 묶을 수 있는, 어떤 경향성을 말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현대성을 역사상의 한 시대로 고려하는 것보다 일종의 태도로 생각해보려 한다면, 1930년대의 '모던'은 서구적인 삶의 패턴을 지향하려는 의식적인 태도이자 행동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당시의 현대란 '동시대' 그리고 '바깥쪽'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현대라는 말은 적어도 시간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조선에서 공간적으로는 부재하는 이율배반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새로운 단어였다."(23-5)


"개조와 개발, 개혁과 혁신, 문명과 진보라는 용어는 개항 이후 지식인 사회에서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으며, 개화된 세계가 만들어낸 문화 속에서 살고자 하는 문화주의와 문화생활은 삶의 새로운 가치로 떠올랐다. 지식인들은 사회의 개조, 가족의 개조, 교육의 개조, 여자의 개조, 인간의 개조, 민족의 개조를 지상과제로 삼았으며 봉건적인 유습이 남아있는 모든 제도와 가치를 '개조'를 통해서 개조하려고 했다. 개조는 열강의 침탈에서 오는 위기감과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잇는 유일한 대안이었으며 문명진보된 세상으로 향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런 측면과 함께 봉건에 대한 결별을 보다 분명하게 실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주의의 등장에 의한 것이었다. 내셔널리즘은 서구중심의 현대적 프로젝트에 대항하는 경계 밖의 유일한 대안으로 등장했으며 이를 통해서 현대사회로의 진입을 꿈꿀 수 있는 이데올로기였다."(31-2)


이성을 향한 무한한 신뢰로 대표되는 모던 프로젝트가 구축한 "문명에 대한 회의 혹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서구의 관념론이 계몽기의 조선에서 개조론으로 등장했을 때, 조선의 모던 프로젝트는 방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특히 서구의 현대화 과정과 조선의 경우를 등가로 놓았을 때 개조론은 매우 곤혹스러운 논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일련의 계몽주의적 프로젝트가 실현되지 않은 조선으로서 산업화와 문명에 대한 회의론적 태도는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그 결과 엉뚱하게 현대화의 논리는 정신주의적이고 관념적인 개조의 논리로 빠져들어갔으며 이런 정신적 '개조'가 식민지배에 부합되면서 곧 뒤틀린 현대화의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현대적 문명이라는 물질적 토대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그 토대를 위한 경제적 프로젝트들이 실현되기 시작할 무렵에 물질에 대한 회의론에 바탕을 둔 정신적 개조의 사고들은 현대로 진입하는 과정 자체를 관념적으로 몰고갔다."(34-5)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사상과 함께 서구의 모더니즘의 여러 움직임들이 다시 한번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다시 현대를 지칭할 수 있는 말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바로 '신흥新興'이라는 말이었다." "신흥이라는 말이 현대를 지칭하는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소비에트 노동자혁명에서처럼 전혀 다른 차원의 현대화 프로젝트가 가능하다는 의식이 지식인들의 사고 속에 자리잡으면서 사회주의 사상이 퍼진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신흥은 막연한 모던의 환상과 반봉건의 계몽적 의식이 아니라 문명이나 개조나 문화가 이룰 수 있는 사회적 정체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반발과 역동의 진보적인 인식이었다. 관념적 개조론과 교양주의적 문화주의에 의한 조선의 계몽적 사고들이 사회의 체제와 구조에 대한 인식의 결여라는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면 신흥사상은 이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듯 보였다."(38-40)


"(1920년대 말에 이르면) 이제 개조라는 말은 점차 사라지고 문화라는 말도 더이상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새롭게 등장한 '모던'이란 말에는 개조와 문화가 지니고 있던 계몽주의적인 무게가 더이상 실려있지 않았다. 식민지가 점점 뿌리깊게 자리잡힐수록 한편으로 그 상황에 반발하는 민족주의적인 의식이 깊어갔지만, 더 어찌해볼 수 없는 일상의 현실은 계몽적인 힘을 점점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현대는 이제 계몽주의자의 엄숙한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 속의 발랄한 모더니스트를 통해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라는 거대한 사회문화적 흐름이 계몽적인 의식이나 독점화된 문화적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이 시기로부터 우리는 낯설지 않은 '현대인'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때의 모던은 굳세게 지향해야 할 의지로서가 아니라 경박하고 자유분방하며 천박스러운 유행으로 등장한다."(42)


2장 물질과 과학의 시대


"발전모델로서 서구, 동시대적인 보편성으로서 세계화, 자본의 궁극 원리로서 물질적 평등성을 반영하는 이러한 패러다임은 곧 현대적인 삶의 궁극적 가치지향점이었으며 이는 물질로 보장되는 행복과 이익을 향한 자본주의 유토피아의 순조로운 출발인 듯이 보였다. 따라서 새로운 상품과 소비체계에는 현대적 삶의 가치지향점을 보다 분명히 밝혀놓는 문구를 반드시 삽입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물질에 대한 경험은 엄격한 제한을 받았다. 현대적인 삶의 가치를 보장하는 물질은 자본을 위해 생산되며 자본을 위해 창안되고 발달한다. 따라서 돈이 없는 자들에게 신문물이 주는 풍요와 유토피아는 옆에서 보는 환상일 뿐이었다. '오락'과 '이익'을 주는 물건은 자본을 소유한 자에게만 가져다 주는 '사회 봉사'였으며 새로운 세계가 가져다준 물질적 평등의 세계는 물질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만 한정되었다."(74-5)


"새로운 물질과 물건의 유입은 물질의 정통성을 대체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이 전혀 새로운 현상이었을 때 문화를 재조직하는 경향을 강하게 띤다. '양깡깽이'를 연주하고 건반을 두드리는 음악이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다른 한편으로 문화적 이질감을 배제한 채 '새로움만을 즐기는 것'에 대한 비아냥거림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기존의 문화적 전통과 어울릴 수 없는 이물감은 문화적으로 이원화된 구조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서구화된 문화 혹은 이질적인 물건과 그를 둘러싼 새로운 사회적 구조는 계급적인 갈등이 필연적이었다. 새로운 것은 늘 상층 부르주아들에게 우선 열려 있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이를 재생산하고 소비하는 새로운 구조가 이른바 '문화계'를 장악하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문화예술의 엘리트화와 함께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단절된 '계'를 형성하였다. 물질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문화에 대한 계급적인 분절과 이에 따른 문화적 괴리를 가져온 것이다."(79-80)


3장 지식인, 룸펜과 데카당


"현대가 문을 열면서 지식인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낡은 사상과 문화를 대체하면서 사회 곳곳에 변화를 가져올 의식과 사상들을 풀어놓는 것이 새로운 지식인의 역할이었다. 봉건적인 지식인으로서의 '선비'는 어느덧 사라지고 새로운 문화를 흡수한 '인텔리겐차'들이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들의 겉모습은 민족주의자, 문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모더니스트 등등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지만 그 이면에는 현대주의자로서의 공통적인 정서가 있었다. 새로운 지식인들은 일본이나 중국 혹은 서구를 통해 신식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보고 배운 것을 조선을 향해 외치면서 이 땅의 선지자로 등장했다. 새로운 지식인들은 조선이 피폐한 문명과 낙후된 경제, 봉건적인 정치에서 벗어나 진보된 문명을 받아들이고 개조와 개혁을 통해 강건해지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서구와 강대국의 문화와 철학적인 기조를 수용하고 이를 조선에 접목시키려 했다."(112)


"현대로의 이행기 그리고 식민지 시기의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된 열패감은 점차 지식인을 자기 스스로의 개인적 좌절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구한말과 1910년대까지의 계몽주의적인 목소리는 한편으로 계속되고 있었지만 지식인으로서의 한계는 '박제화된 천재' 의식으로 토로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지식인들은 자신을 짓누르는 봉건적 삶과 현대화된 자신의 의식과의 괴리를 가장 먼저 체험했던 이들이었다. 그 모순이 가장 먼저 표출된 것은 당연하게도 그의 집안, 매일 몸으로 부딪는 아내에 관한 것이었다. 신소설을 썼던 이해조가 구식결혼한 아내를 버리고, 유학을 하면서 얻은 신사고를 신식여성(일본여성)과 재혼하는 것으로 가장 먼저 적용시켰듯이 봉건을 상징하는 구식여성을 버리고 신식여성과 연애하는 것은 전형적인 전환기 지식인의 갈등의 표상이었다." "봉건과 현대의 갈등은 지식인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집안에서부터 균열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회와의 균열로 이어졌다."(116-7)


"식민지 지식인들은 딜레탕트, 데카당으로 자신의 입지를 삼았고, '룸펜'으로서의 생활에 자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식인인 그들은 '민간사업民間事業이래야 십지十指를 굴屈하지 못하는(열 손가락을 꼽지 못하는)' 조선에서 '팔자에 타고난 룸펜'이었으며, 따라서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어찌해볼 수 있는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것은, 가난하지만 궂은 일은 할 수 없다는 지조였지만 그들이 표현한 대로 '무위도식, 무기력, 무정견無正見' 속에서 타인에게 기생하려는 의존적인 경향성까지 보인다. 이들 룸펜들은 가난 속에서 자족하고 자위하는 삶의 방식을 하나의 '낭만'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룸펜의 낭만은 그 자체가 지식인 문화로 재빨리 이해되고 흡수되었다. 바로 룸펜문화라고 할 수 있는 독특한 정서가 시작된 셈이었다. 룸펜문화가 싹트던 때가 1930년 전후였으니, 1970년대 말까지로 잡아도 물경 50년간을 지식인 사회는 데카당을 그들의 전유물로 인식했다."(122-3)


4장 유행과 대중문화의 형성


"대중문화의 존재는 사회의 지배방식을 뒤바꿔 놓는다. 대중매체의 전면적인 확산은 매체를 통한 문화적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대중들의 잠재되어 있는 '욕망의 설득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의지나 신념이 아니라 욕망의 정서와 감정이 분출되는 식민시기 유행가나 영화들이 민족과 역사와 독립을 외쳤을 것이라는 상상은 당연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대중문화는 역사가 묻어 있을 뿐 역사를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중들의 저항과 반발의 역사는 소멸하는 듯이 보인다. 이제 식민지라는 역사의 굴레 속에서 대중은 또 하나의 질곡을 더하게 되었다. 그것은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요구되는 투쟁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으며 그런 세태에 떠밀려 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가 시작되는 식민지 조선에서 대중문화의 본질은 비극적이며 외래의존적이며 무저항적이며 감각적이며 퇴폐적일 수 있다."(152-3)


"1920~30년대 대중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아마 영화일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이미지에 대한 강한 호기심으로 대중들의 미의식을 바꿔놓는 데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영화에 의해 촉발된 대중들의 문화적 삶의 변화는 단순히 전통문화에 대한 상실감이라거나 서구문화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라는 비판의 잣대를 넘어서고 있었다."(160) "1926년 나운규가 〈아리랑〉으로 '나운규의 시대'를 열면서 영화는 이제 대중들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벗어나 대중의 정서와 미의식을 장악하는 가장 강력한 대중문화로 부상했다. 외국 영화가 대거 수입되면서 영화는 도시적인 일상의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서양 영화의 상영은 서구화된 육체, 성에 대한 개방적 관심을 포함한 도시적 삶의 모든 양식을 변모시켰다. 1930년대 모던 걸과 모던 보이의 등장에 영화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없었다."(163)


"유행은 대중을 전제하고 자본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의 대중적 행동양식이다. 대중들로 하여금 '복제'에 의한 '차별화'를 가능케하는 도시의 일상은 누구도 비켜가지 못하고 휩쓸리는 수많은 물결들을 만들어낸다. 단발이 삶의 의미를 송두리째 앗아가는 정체성의 위기를 주었던 때로부터, 봉건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차이화로서 기능하고 새로운 가치를 표상하는 상징으로서 복제되기 시작할 때부터, 유행은 삶의 스타일로서 자리잡았다. 구체적으로 표상되는 유행이 반드시 가치지향점을 지닌 현상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행이 스타일 그 자체로 향유될 때 유행의 메커니즘은 완성된다." "유행을 무지몽매한 대중들의 부박한 휩쓸림으로 보는 당대의 시각은 본격적으로 이질적인 문화가 일상으로 퍼지기 시작한 1920년대 무렵에도 보편적인 것이었다. 특히 사회주의이론을 흡수한 식자들에게 유행은 자본주의적 상술에 의해 등장한 것이기에 더 부정적인 시각이 작동하였다."(169-70)


5장 신식 여성의 등장


"신식 교육을 받았던 남성들이 새로운 가치관과 함께 그들에게 손해볼 것 없던 봉건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음에 비하여, 신식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봉건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을지라도 그것과 완벽히 결별하지 않으면 수용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대부분 신식 남성들은 가부장적인 제도의 혜택으로 유학과 신문물의 세례를 받았으며, 자신의 새로운 가치를 사회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서로 상충되고 충돌하는 현실적인 제약들을 감당해야 했다." "여성들 역시 이와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새로운 선택은 여성이라는 이유때문에 남성들보다 훨씬 많은 주목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어정쩡한 선택에서 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결정에 분명한 가치를 결합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들이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였을 때는 남성들처럼 신구의 양면을 절충하기보다는 어느 한쪽을 분명히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야 하는 '당찬 여성'이 되었다."(204-6)


"여성해방의 시각을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공격의 수단으로 적용하는 것은 신여성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던 사회관이기도 했다. 따라서 신여성들의 사회관은 때로 반사회적이고 파괴적일만큼 대담했다. 이런 사고는 특히 1920년대 사회주의사상이 유입되면서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인식과 현존하는 사회부조리에 대한 혁명적 전복의식이 팽배해지면서 더욱 커져갔다. 사회주의적 접근은 여성해방을 바라보는 시각에 좀더 정치하고 구조적인 접근을 가능케 했지만, 사회주의이론이 일상 속에서 상투화될 때는 모든 것을 생산조건의 모순과 계급적 대립에 원인을 두는 상식적 결론에 머무르곤 했다." " 이 시기의 다른 모든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사상은 기존의 관념주의적 개조론이나 혹은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 사상과 혼재되어 그 자체로 수미일관한 이론적 체계를 지니고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213-4)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글은 일상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맞물려 있는 현대화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 대한 중대한 몇가지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첫째는 기생과 다방 마담 등을 포함한 새로운 인간군들이 지녔던 첨예한 현대적 의식과 행동을 알 수 있으며, 둘째는 현대화를 향한 투쟁의 대상이 봉건왕족이나 보수적 권력이 아닌 식민통치자였다는 비참한 현실을 읽을 수 있으며, 셋째는 현대화의 준거가 분명히 서구(혹은 일본)에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 글은 조선사회가 본격적으로 대중사회로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급격한 변화의 중심에 서 있던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알려준다. 그들은 현대적인 사고와 실천이 봉건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제약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풀어주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일상 속에서 현대를 체험하고 현대문화를 형성하던 일군의 여성들은 바로 기생과 새로운 대중문화 생산자들이었다."(222)


6장 도시의 꿈과 도시의 삶


"봉건적인 왕권중심의 사회구조에 걸맞는 서울의 공간배치는 현대화의 이정표가 박히는 곳마다 뒤틀리고 확장되었다. 본래 한양 도성의 공간배치는 동서축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배치는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일반 백성을 효과적으로 통합하고 포섭하는 공간이었다. 현대화 과정에서 무너진 봉건적인 공간은 성곽 허물기와 남북축 간선도로의 확장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성곽은 도시를 폐쇄적으로 만들어 지켜내는 봉건사회의 단적인 흔적이다. 성곽허물기는 바로 '도성'이라는 봉건 도읍이 '도시'라는 근대로 변모하기 위한 허물벗음이었지만 그것은 곧바로 공간이 지녔던 권위의 해체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도로를 중심으로 한 도시공간의 재편은 도시 안에서 사람들의 속도를 인간적인 것에서 기계적인 것으로 바꾸어 버렸으며 전차에 이어, 도시와 도시를 연걸하는 빠른 운송수단인 기차도 1900년에 한강철교가 세워짐에 따라 서울과 인천을 가로지르게 된다."(247-9)


"(쇼윈도로 대표되는) 도시적인 물질들이 주는 신선하고 충격적인 경험들은 '근대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졌고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특히 도시를 수놓는 네온사인이 처음 등장했을 때, 갑자기 등장한 호화로운 도시의 불빛에 사람들이 꼬여들었고 거기서 느끼는 문화적 충격 또한 적지 않았다." "도시의 새로운 공간은 물론 상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공간을 형성하고 장악하는 방식 또한 도시화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도시적 공간은 일상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일상의 이탈적 공간으로 형성된다. 예를 들면 주거를 위한 주택공간의 변화는 매우 느리지만 상점이나 술집의 공간 변화는 매우 빠르다. 새로운 공간이 도시에 들어서면 도시의 일상이 변화하며 일상의 삶 또한 그에 따라 변하게 되는데, 곧 도시적 공간은 일상에서의 일탈을 일상화시키는 공간을 형성하며 도시적 삶은 일상에서의 일탈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된다."(257-9)


# 카페 : 공개화된 성적 서비스의 공간이자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모이는 장소


7장 현대적 인간의 탄생


"자유연애의 사상이 만연하고 이로 인해 서구화된 인간관계의 변화를 예고하면서 가치관의 갈등은 극심해졌지만 그것은 현대화 과정에서 서구화된 육체와 자본주의적 성을 정착시키는 자연스런 단계였다." "그러나 도덕적 가치의 변화는 서구적 '자유연애'의 만연과 일본식 '성문화'의 확산과 함께 일상을 조직하는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에도 틈입되고 있었으며 성과 육체에 대한 폭넓은 상업적 관심은 이미 시작되었다. 자본주의적 경제의 변화가 가장 빠르게 나타나는 것은 일상에서 소비재의 변화이다. 욕망을 중심으로 한 소비사회는 경제적인 구조의 문제 이전에 의식의 재빠른 변화를 요구하며 욕망으로 일상이 재조직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면서 일상의 욕구를 재조직하는 광고가 가장 먼저 일상에 끼어들고, 상품을 매개로 인간의 욕망을 상품화하는 행위들어 점차 늘어간다. 성의 상품화는 필연적으로 상품의 대량생산과 맞물려 등장한다."(291-3)


양 극단을 지양하는 과도기적 상황 아래에서 "서구문화의 유입과 함께 (늘어나던) 성적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새로운 가치로 받아들였던 것이 사회주의적인 시각에서의 성이었다." "성의 해방은 성의 평등을 전제한 것으로 그것이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연애관이었다. 혁명적 연애관은 봉건적인 성의식에서 해방되고 부르주아적인 퇴폐적 성의식을 견제하는 역할로 자리잡았지만 이러한 사회주의적 연애관에 대한 이해조차 실상은 자유주의적 연애관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사회적 변혁을 위한 활동 속에서 성 행동은 생물학적인 성적 욕구에 의해 충족되는 건조하고 단순한 행위일 뿐이다. '연애감정'에 의한 사랑이란 부르주아의 사치일 뿐이라는 극단적 표현에 표면적으로는 찬동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성 해방의 한 방향을 열어준 이런 가치관은 사회주의가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전유되었던 것과 함께 '찰라적 성관계'에 일종의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해주는 것이기도 했다."(296-8)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은 자본주의적인 병폐의 결과로 치부되었지만, 그와 함께 이들이 기존의 가치와 권위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 심한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비난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외양과 태도뿐 아니라 반사회적인 행동양식에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 미미하지만 '근대 도시생활에 부댓기는 피로한 신경의 소유자들에게서 유일한 위안인 모던식 생활의 일체의 것을 박탈하는 것은 확실히 가혹한 일일 것'이라는 시각 또한 존재했다. 현대로 진입하는 도시생활 자체가 피폐한 정신과 피곤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으며 거기서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현대적 인간군이며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인간형일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도시적 삶과 현대적인 일상 속에서 그들은 물질로 향유된 새로운 정신을 배태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아름다운 도시의 무지개'라고 부른 박팔양의 시각은 사뭇 긍정적이기까지 하다."(317)


"1930년대 서구의 문화가 '모던이즘'으로 불리며 퍼지고 있을 때 봉건적인 삶의 양식은 변하고 있었고, 현대적인 일상의 풍속이 그 자리를 메우면서 어느덧 현대적인 의식의 변화까지 가져오게 되었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삶은 분명 변모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삶의 가치들 그리고 그것이 표상하는 체계들을 굴절시켰다." 「모던심청전」에서 묘사되는 "꿈결에 보는 오색채운은 더이상 '영롱'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루미네이션'으로 빛난다. 등장하는 선녀는 학을 타고 내려오되 더이상 트레머리와 날개옷을 갖춰입은 달덩이 미인이 아니다. 서구문화에 대한 동경과 서구인에 대한 관심으로 등장하는 선녀(삽화)는 젖가슴과 배꼽이 드러난 반라의 파리여인이다." "이제 이러한 신화가 창조되는 곳은 성황당이거나 칠성당이 아니며 신을 매개하는 무당집도 아니다. 새로운 신은 바로 안방의 담벼락에 붙어있는 신문지의 광고를 통해 등장한다."(3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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