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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쟁까지 -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와 세계의 길 사이에서
가토 요코 지음, 양지연 옮김 / 사계절 / 2018년 9월
평점 :
1장 국가가 역사를 쓸 때, 역사가 태어날 때
"제국주의 일본의 경제력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일이 왜 중요한가 하면, '세계공황-열강의 경제 블록화-일본의 경제 블록화-실패-무력에 의한 경제 침략'이라는 공식으로는 식민지와 일본의 관계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50) "경제적 측면에서 확인해보면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 타이완, 조선 등은 영국·프랑스와 그들의 식민지의 관계보다 훨씬 밀접했습니다. 지배받는 쪽에서 보면 이는 옴짝달싹할 수 없이 종속된 위계적 관계였겠지요. 한국 등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경험한 국가들의 역사의식이 서구의 식민 지배를 경험한 국가와 다른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호리 교수는 타이완보다도 조선이 훨씬 더 일본제국에 포섭되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현재 일본에 대한 한국과 타이완의 인식이 다른 요인의 하나가 경제적 종속의 강도에서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데이터는 전후 식민지 국가의 역사인식의 근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하지요."(53)
# 본국-식민지 무역 비중(1937년, %, 수입/수출)
1. 영국-인도 : 33.2 / 39.0
2. 프랑스-인도차이나 : 55.2 / 53.4
3. 일본-타이완 : 92.5 / 83.3
4. 일본-조선 : 87.4 / 85.0
2장 선택을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 리튼 보고서
만주사변 발발 직후인 1931년 9월 21일 국민당이 일본의 군사행동을 국제연맹에 제소하자 국제연맹은 같은해 12월에 리튼조사단을 파견합니다. "일본이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건국까지 이미 엄청난 돈을 썼는데 만주국 건국을 없던 일로 하다니, 허용할 수 없어'라고 했다면 그리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리튼이 만난 많은 일본인은 러일전쟁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당시 일본인 대부분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지 못했다면 중국 동북부는 중국에서 떨어져나가 러시아 땅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리튼은 일본인들에게 '경제적 이익에 관해 당신이 한 말을 인정합니다'라고 말했죠. 이 말은 곧 중국이 조약을 지키지 않아 일본이 경제적 이익을 지킬 수 없었음을 인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리튼은 '일본의 권익은 잘 알고 있지만 이번에 일본이 한 행동은 인정할 수 없다. 일본도 세계의 길을 받아들여라. 아직 늦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98-9)
"리튼 보고서는 '① 만주사변은 일본의 자위 행위가 아니다. ② 만주국은 민족자결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③ 다만 중국의 경제적 보이콧은 국민당이 지휘한 일이다'라고 결론 내렸습니다."(107-8) "'일본군의 행동은 자위로 인정할 수 없다. 만주국은 지역민의 자발적인 욕구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라고 일본을 비판하면서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태도를 침략 행위로 정의하지 않은 부분에서 리튼의 정치적 노련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만주사변은 일본이 국제연맹규약을 위반하고 타국을 침략한 사건이다'라고 써도 됐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일본을 규탄한다면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으로 활동해온 일본이 연맹을 탈퇴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중일 간에 더 광범위한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 상하이와 홍콩에 거점을 둔 영국의 무역이 위태로워집니다. 일본을 쓸데없이 자극해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지요."(110)
"일본 언론들에서는 정식 보고서를 앞두고 '리튼 보고서는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방송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에 예상과 달리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이 나왔으니 당연히 소동이 일어났지요. 리튼 보고서의 번역본이 공개된 1932년 10월 3일, 신문은 굉장히 과감한 제목을 뽑았습니다. 「보고서 곳곳 일본이 용인할 수 없는 서술, 만주 정책 부정으로 일관」이라고 씁니다. 일본은 '리튼 보고서가 내린 세 가지 결론 중 두 가지에 동의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관동군의 군사행동은 자위권의 발동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본은 "이는 자위권 행사이다. 이 부분은 양보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 현재의 만주국은 순수하고 자발적인 독립활동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만주국은 현지 중국인과 만주족의 민족자결로 탄생한 국가라고 말이지요."(124)
일본은 관동군의 반발도 걱정해야 했습니다. "관동군 입장에서는 '소련의 이익을 고려하라'는 (리튼의)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지요.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원군으로 온 조선군(관동군과 마찬가지로 당시 일본이 점령했던 조선에 주둔하던 상설군) 일부를 포함한 일본 측 군대가 만철의 부속 영지로 혹은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주사변이 모략으로 시작됐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일본 군대가 만철선 아래로 철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관동군 입장에서는 자위적 조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왜 안 되느냐고 반발하겠지요. 리튼 보고서에는 만주 지역의 안전 보장을 위해 특별헌병대를 만든다고 적혀 있고, 또 이런 군대의 훈련에 일본 측 전문가와 고문의 참가를 인정하고 있지만 관동군은 이 조건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만주에서 철군하게 되면 국방을 포기했다는 국민의 분노가 폭발할 것이 뻔했습니다."(135-6)
"1941년 4월부터 11월까지 이루어진 미일교섭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코델 헐이 리튼과 거의 똑같은 말을 합니다. 만약 일본이 중국과 선린우호, 주권 및 영토의 상호 존중에 관한 원칙을 인정한다면 미국은 중국에게 일본과의 전투를 종결하고 평화 회복을 위한 교섭에 임하라고 촉구하겠다고요. 그리고 태평양 지역의 경제활동에 관해서는 경제의 보전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천연자원의 무차별 균점(이익과 혜택을 평등하게 받는 일)을 받을 수 있게 협력하겠다고도 말했습니다. 블록 경제가 아닌 통상의 무차별적 허용,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자유로운 권한을 서로 인정하자는 제안입니다." "세계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세계의 길을 부정하고 식민지를 제국 내의 블록으로 재편하면서 경제를 운용하는 길을 취할 것인가, 일본은 식민지를 블록으로 재편해 경제를 운용하는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미국은 '세계의 길'을 일본에게 제시했고 그 답으로 전쟁을 돌려받았습니다."(167-8)
3장 군사동맹이란 무엇인가 - 20일 만에 맺어진 삼국군사동맹
# 군사동맹의 3요소
1. 가상적국 설정
2. 의무 범위(참전의무 등) 설정
3. 점령하고 통치하고자 하는 세력권 설정
"군사동맹을 맺는 이유는 상대를 위협하고 그 행동을 제한하는 기능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상대가 겁을 먹지 않으면 동맹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1939년 8월 23일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된 지 겨우 이틀 만인 8월 25일 영국과 프랑스는 서쪽으로 밀고 들어올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폴란드와 상호원조조약을 맺었습니다. 독일과 영국은 서로를 억지하려고 동맹조약의 존재를 상대에게 과시했지만 독일은 그러한 위협에 굴하지 않고 폴란드를 침공했으며 전쟁은 결국 유럽을 휩쓰는 대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즉 상대를 억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자극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억지라는 것은 사실상 상상 속의 산물에 불과할 때가, 그래서 감정에 좌우될 때가 많습니다. 동맹은 겉보기에는 위기에 대처하는 현실적인 조치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상대국의 적의만을 증폭시키는 구조를 필연적으로 지닙니다."(190-1)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년간 일본은 중립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1940년 9월 3일 영미방위협정이 체결된 직후) 독일군이 영국 본토에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영국 본토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쯤이면 아마 독일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을 듯합니다. 그때 독일은 일본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특별사절을 파견합니다. 바로 하인리히 게오르그 스타머입니다. 스타머는 1943년부터 1945년 5월 독일이 패배하는 시점까지 주일대사를 맡은 인물입니다. 스타머는 1940년 9월 7일 도쿄에 도착했고 9일부터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마쓰오카 요스케의 저택에서 교섭을 시작합니다. 19일 어전회의 결정, 26일 추밀원 본회의를 거쳐 27일에는 베를린에서 삼국 대표의 조인식이 열렸습니다. 20일 만에 조약이 체결된 것입니다(1902년 제1차 영일동맹은 본격적인 교섭 개시 후 조인까지 3개월이 걸렸습니다). 삼국동맹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빠르게 체결됐습니다."(203-4)
동맹 조문에 명기된 "일본이 '대동아'에서 이루고자 하는 신질서 이념과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이루고자 하는 이념이 똑같을 리가 없습니다. 동상이몽의 동맹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어렵지요. 이를테면 팔굉일우라는 말을 연상시키는 듯한 전문을 독일이 정말로 인정했을까요. 신국神國 일본이라는 발상은 나치 독일의 세계관과는 모순되는 것이었으므로 독일이 전문을 성실하게 봤다면 도저히 조인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마침 독일은 런던에 맹렬한 폭격을 시작했고 영국은 흔들리고 있었지요. 그런 때에 일본과 동맹을 맺으면 미국을 견제해 찍소리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억지 효과를 발휘할 동맹을 한시라도 빨리 맺고 싶어 했습니다. 20일간의 속전속결 결과가 조문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신질서에 관한 삼국의 일치점도 없으며 대동아의 범위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삼국동맹은 그런 조약이었지요."(225-6)
동맹을 맺으면서 "일본이 준비했던 비밀양해사항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의 '생존권 범위'인데요. 그 욕심이 대단합니다. 대동아 지역(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태평양제도, 타이, 영국령 말레이, 영국령 보르네오, 네덜란드령 동인도, 버마) 이외에 일본의 괴뢰국가였던 만주국, 마찬가지로 왕자오밍이 이끄는 괴뢰정부인 난징국민정부가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일본은 구 독일령 남양군도도 일본의 생존권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비밀양해사양의 두 번째는 영국과 미국을 향한 무력행사를 일본이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겉으로 명확히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세세한 조건을 갖다 붙였습니다. "중일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영국과 미국에게 무력행사를 하지 않을 것이며 무력행사는 국내외 제반 정세가 특히 유리한 때와 국제정세의 추이가 이미 일각의 유예도 허용치 않는 상황이 됐을 때에 한한다"고 했습니다."(229)
"삼국동맹을 맺으면 영·미와의 대립은 불가피해집니다. 삼국동맹을 맺지 않으면 일본의 전쟁 상대국은 중국뿐이므로 앞으로도 중일전쟁을 직접 수행하는 육군이 주장하는 비율대로 예산 분배가 이루어질 게 뻔합니다." "(50억 대 20억으로 육군이 해군의 2.5배를 점유하는) 육군과 해군의 군사비 비율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서든 중일전쟁을 축소하고 소련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해군의 바람이었습니다. 일·독·이 삼국군사동맹을 맺게 되면 영·미와의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이 위험한 동맹을 맺으려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해군은 육군이 소련, 중국과 화평을 해준다면 남쪽을 향한 군비 확장으로 눈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보았지요. 해군이 독일이 중재하는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며 삼국동맹 찬성 쪽으로 기울어간 배경에는 군사 예산을 둘러싼 육군과 해군의 오랜 대립이 있었습니다."(251-2)
4장 일본이 전쟁에 진 이유는 무엇일까 - 미일교섭의 함의
"미국이 1941년 4월, 미일교섭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는 대답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벌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939년 9월부터 이어진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영국 편에, 영국에 망명정부를 둔 폴란드와 네덜란드, 벨기에 편에 서 있었음은 명백합니다. 다만 미국 국민은 연합국 국민을 동정하기는 하지만 전쟁은 정말 싫다는 생각이 매우 강했습니다. 이 시기의 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영국에 군수물자를 (유상으로) 원조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동시에 88퍼센트는 직접 참전에는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미일교섭이 시작되기 한 달 전인 1941년 3월, 대통령이 발안한 무기대여법이 통과되면서 사태가 급변합니다. 무기대여법은 미국이 영국에게 무기와 물자를 무상으로 보내주고 전쟁이 끝난 뒤에 달러가 아닌 현물로 돌려받는다는 구상입니다."(277-8)
"영국은 상선을 군함이 호위하는 호송선단 방식으로 미국에서 무기와 물자를 운반해 왔는데요. 그 배들이 독일 잠수함 유보트에 무수히 희생됐습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애써서 무기를 대여했는데 대서양을 건너지도 못하고 바다에 처박혀서는 곤란하겠죠. 그래서 경비와 순찰을 담당하는 미국의 해군초계부대를 대서양에 배치하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중했던 루스벨트도 드디어 4월 15일 대서양 해군초계부대의 경계 수역을 그린란드와 아조레스제도를 포함한 아프리카와 브라질의 중간선 서측까지 확대하는 데에 동의합니다. 미국 해군초계부대는 영국 배를 독일의 잠수함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선단 호위는 할 수 없지만 독일 잠수함의 위치를 미국 해군과 영국에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 대서양에서 초계활동을 하려면 태평양에 두었던 미국 함대 가운데 일부를 대서양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 방면에서는 당분간 미일 대립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지요."(280-1)
"일본은 이대로 있다가는 삼국동맹이 발동되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삼국동맹의 제3조는 미국이 독일·이탈리아·일본 가운데 어느 한 국가를 '공격'했을 때 '삼국은 모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방법을 다해 상호 원조'한다고 했지요." "미국이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독일·이탈리아·일본을 '공격'한 것이 되는지 일본은 무척이나 불안했습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영국을 원조하기 시작한 가운데, 이를테면 미국의 구축함이 독일 잠수함을 공격하면서 교전이 시작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미국의 영국 원조가 일본을 미국과의 교섭 테이블에 앉도록 재촉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독일의 허가를 얻어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 등을 손에 넣고 대동아를 일본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기 위한 시간을 벌고 싶었다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궁내성, 외무성, 대장성 일부 등의 친영미파뿐만 아니라 뜻밖에도 육군과 해군 모두가 한목소리로 미일교섭에 찬성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282-3)
미일교섭 세 번째 항목은 중일 관계 개선책과 미국의 관여에 관한 내용입니다. "어째서 미일교섭에서 가장 자세히 작성된 항목이 중일전쟁의 해결책일가요. 물론 삼국동맹의 적용 등이 두 번째 항목에 자세히 나와 있기는 하지만요. 여기서 일본이 미일교섭을 시작하고 싶어 한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옵니다. 중국과의 화평입니다. 장제스가 모처럼 마음을 열었을 때 일본은 자신들의 괴뢰정권인 왕자오밍 정권과의 조약 체결 기한을 우려해 장제스의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왕자오밍 정권을 정식 승인해버렸습니다. 이를 계기로 독일이 중재했던 중일화평은 실패로 끝났죠. 해군은 이쯤에서 육군이 주로 담당하던 중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군사비를 좀 더 확보하고 싶었지요. 그래서 중일전쟁 개전 이후 중국에 도의적 관심을 기울여왔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화평을 권고하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296)
"1941년 7월 2일 어전회의에서 제국국책요강이 결정된 배경에는 (6월 22일 전격적으로 시작된 독소전에 발맞추어) 북진론을 주장하는 마쓰오카와 참모본부, 이에 맞서고픈 군령부, 해군성, 육군성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마쓰오카와 참모본부에 대항하기 위해 군령부 등이 '대영미전도 불사한다'라는 문구를 집어넣어 육군이 소련을 공격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육군은 관동군 특종 연습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소련군 붕괴에 대비해 소련 국경과 가까운 만주국 북부에 군대를 진격시킵니다. 일본 국내의 2개 사단에 더해 만주·조선에 있던 14개 사단을 전시 편제로 증원한 16개 사단을 배치해 경계에 돌입합니다. 이에 따라 관동군의 병력은 70만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그러나 1941년 7월 일본이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추진하자 미국은 전면 금수와 자산 동결이라는 조치를 취했고 남방에서의 긴장감이 고조되자 육군은 결국 8월에 소련 공격을 단념합니다."(326-7)
재무장관 모겐소와 육군장관 스팀슨 같은 대일 강경론자들은 "경제 약소국 일본에게 경제적 압박을 가하면 미국에게 전쟁을 걸어올 리 없다고 여겼습니다. 모겐소는 일본은 '점토로 만든 발을 한 거인'이므로 경제 제재를 하면 굴복할 거라고 봤지요." "코델 헐을 비롯한 국무성의 주류는 다른 생각을 가졌습니다. 광범위한 금수 조치는 일본이 극동에서 벌이는 행동을 정당화하는 절호의 구실을 제공하리라는 것을요. 미국이 전면 금수 조치를 취하면 일본이 무력행사라는 방아쇠를 당기게 된다는 것을 국무성은 자각했습니다. 미국은 태평양에 배치할 함대가 다 정비될 때까지, 대서양에서의 초계와 호위가 제대로 될 때까지는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은 도쿄의 미국대사관과 국무성 간의 외교전부를 꽤 정확하게 해독했기 때문에 미국이 금수에 관해서는 신중한 대응을 해온 경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지나치게 낙관적인 예측을 하고 말았지요."(332-3)
"(지배층의 여론 조작에 휘말려 타도 영미 구호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들은 만주사변은 중국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만약 반反영미 정서가 뿌리 깊은 국민에게 갑자기 영국, 미국과 사이좋게 지내려 한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오자키는 분석했습니다. 오자키가 민중의 반영미 정서와 그렇게 흐르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한편 위정자가 떠안은 고민도 함께 거론하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비록 지배층이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려 서둘러 굴복의 합리성을 찾아내 보여준다 해도'라는 부분입니다. 시원시원하고 군더더기 없는 묘사입니다. 지배층이 이제 와서 일본의 경제적 약세를 자각하고 영미에 굴복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임을 시인한다 하더라도 대중은 이를 들어줄 귀를 가지지 않았고 전쟁에 패배한 이후가 아니라면 국민은 굴복이 올바른 선택이었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굉장히 암울한 전망을 내놓습니다."(352)
# 오자키 호쓰미 : 소련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와 함께 활동했던 언론인으로 1941년 10월 15일에 검거되었고, 1944년 11월 7일 국방보안법, 군기보호법,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민중이 왜 가장 강경한 곳으로, 천황도 두려워했던 세력의 의견에 이끌려가고 말았을까요. 그 애절함에 누구나 충격을 받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한 하나의 지혜는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에게 천황은 수신수업 시간에 배우는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 속의 등장인물입니다. 진짜 고대 역사상의 천황에 관해 사료를 통해 배우는 것은 구제 고교(일본에서 고등학교령에 의해 세워져 1950년까지 존재했던 교육기관)에 들어가고 난 뒤입니다. 이때서야 비로소 중국 사료 등도 이용하면서 비판적으로 고대사를 배울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의 비율은 100명에 한 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정직한 교육이 정말 중요합니다. 최적해最適解라는 표현을 쓰는데요(수많은 선택지를 비교해 가장 적절한 답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국민은 그것을 고를 수 없었습니다. 교섭을 타결하는 편이 훨씬 좋았지요. 하지만 이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민중이 없었습니다."(367-8)
"1941년 미일교섭은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10년이 흐른 뒤에 일어났습니다.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 사이도 10년이었습니다. 후자의 10년 사이에는 우치무라 간조 등 청일전쟁을 일본의 성전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전쟁 이후 일본의 정책을 보며 러일전쟁에 반대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미일교섭 과정에서 고노에 메시지가 신문에 게재되었을 때 아, 이건 '세계의 길'이며 고노에는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일반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정보가 공개되었다면 달랐겠지요." "고노에를 위협하는 사람들이 전단지에서 적어놓았던 말은 믿기 힘들 정도로 과격하고 비논리적입니다. 이 차이를 피부로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후세에는 바로 지금, 현재가 거울鏡이 될 것입니다." "역사가 거울이라는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배우는 일은 자연스럽게 미래를 만드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배우는 것이지요."(3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