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유신 사무라이 박정희 - 낭만과 폭력의 한일 유신사
홍대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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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어떤 죽음에 붙이는 조사(弔詞)


이 책의 주인공은 ‘유신’이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한국의 ‘10월 유신’에 붙는 바로 그 유신이다. 유신은 일본열도에서 태어난 하나의 정념(情念)이다. 이 정념은 야수가 되고 괴물로 진화했으며, 급기야 거대한 괴수로 자라나 무차별한 파괴를 자행하며 파멸로 치달았다. 일본이 벌인 여러 전쟁과 침략은 그 벼락부자 같은 일본의 번영과 함께 모두 ‘유신’의 결과물이다. 유신은 두 방의 핵폭탄과 함께 죽은 듯 보였으나,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박정희와 청년 장교들과 함께 부활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유신 지사 김재규에 의해 사멸한다. 자기 파괴적 운명을 갖고 태어난 유신에게 사멸은 곧 완성이었다. 공교롭게도, 하지만 유신 자신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가장 낭만적인 죽음이었다. 이 모든 사연을 하나의 이야기로 품기 위해, 나는 유신이라는 맹목적인 괴수의 일생을 연대기로 풀며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를 넘나들어야 했다. 그것은 죽음을 탐미한 낭만과 폭력의 역사였다. 11-2)


1장 씨앗: 바람이여, 흉포해져라


13세기 일본의 전쟁 풍경은 ‘명예전쟁’의 형태에 가까웠다. 중세 일본의 전투는 ‘나노리(名乗り)’로 시작되었다. 전투를 치루기 전 무사가 자신의 이름과 신분, 족보를 상대에게 외치는 의식이다. ‘지금까지 3승 1패’ 식으로 자신의 전투 이력을 공개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싸움은 정당하며, 상대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전투에 임하는 명분을 밝힌다. 먼저 나노리를 한 장수는 상대가 자신의 나노리를 들어주었으므로 이번에는 상대가 나노리를 끝낼 때까지 기다려주어야만 했다. 의식이 끝나면 예법에 따라 싸움은 둘 중 하나로 전개된다. 하나는 대장끼리 1:1로 싸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원한 군사 모두가 다 함께 싸우는 것이다. 둘 모두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활만 사용했다. 엄밀히 말해 전투가 아니라 궁술 대결이었다. 중세 일본의 전투는 전투라기보다는 궁술과 예법, 세 과시가 어우러진 ‘활동’이었다. 이런 군대가 세계 최강의 여몽연합군을 만났을 때 벌어질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15-6)


그러나 일본의 무사집단을 차례로 휩쓸어버린 여몽연합군은 의외의 복병을 만나 자신들도 휩쓸려버렸다. 바로 일본인들이 신의 바람, 가미카제라 부르는 태풍에 의해서다. 1차 원정에서 원정군의 함대를 쓸어버린 태풍은 7년 후 2차 원정에서도 기적처럼 나타나 연합군을 쓸어버렸다. 이로써 또 하나의 관념이 탄생하였다. 몽골의 세계정복 관념이 결과적으로 일본인에게 선사한 관념은 바로 안과 밖을 나누고 ‘안’과 ‘우리’를 절대적으로 신성시하는 것이었다. 밖에서 안을 공격하는 건 사악한 행위며, 이는 결국 하늘의 응징을 받을 것이다. 일본에는 천황가의 혈통이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는 뜻의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말이 있다. 만세일계가 유전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이 말은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독립적이고도 단순한 신화의 구조를 보여준다. 만세일계는 본질적으로 한 가문의 혈통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일본은 계속해서 일본이었으며, 다른 존재였던 적이 없다.’는 선언이다. 16-7)


여몽연합군에 맞선 일본 무사들은 용감했지만 죽기 위해 싸우는 수준이었다. 용맹은 비극이 되었고, 다시 이 비극은 가미카제에 의해 낭만이 되었다. 열심히 싸우고 열심히 죽은 결과 하늘이 도와주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제사의 구조다. 세상에서 가장 탐미적인 인신공양이다. 선조들은 진심을 다해 싸우다 죽기를 반복하며 인신공양의 기우제를 지냈고, 인간들의 낭만적 죽음에 하늘은 가미카제로 응답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끝없이 자살적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전쟁수행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온 국민이 미군에 저항하다 죽겠다는 일명 ‘1억 옥쇄’는 전술이 아니라 거대한 제사 계획이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멸망을 향해 가는 행위였지만 결과는 이미 하늘의 일이었던 것이다. 가미카제를 통해 일본인들의 관념 속에서, 일본은 하늘이 지켜주는 ‘신토(神土)’임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신토를 침략한 대륙세력 특히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반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괴수가 되었다. 17)


2장 잉태: 초대받지 않은 손님


기술적 수준에서만 따진다면, 동아시아는 역사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서양을 앞선 데다, 뒤쳐진 분야가 있을 때도 곧바로 따라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이다. 근대 서양의 힘은 공장에서 똑같은 기술적 수준의 물건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었던 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대량생산 공정끼리 맞물려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표준화’라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함선을 예로 들면 어떤 함선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의 유무보다는 정확히 같은 기능과 신뢰성 그리고 규격을 갖춘 함선을 얼마나 쉽게 뽑아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기술 자체보다 기술의 결과를 어떻게 내놓는지가 핵심인 것이다. 사회구조와 경제체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핵심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런데 불행히도 19세기 동아시아 3국(한중일)은 서양의 기술 자체에만 시선이 사로잡혔다. 19세기 서양 문물의 뛰어남에 충격을 받은 동아시아 3국은 한자만 다를 뿐 정확히 같은 뜻을 지닌 단어를 되뇌었다. 29-30)


#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여몽연합군에 이은 두 번째 고질라는 흑선(黑船)이었다. 1853년, 페리 제독(1794-1858)이 이끄는 4척의 증기선 군함이 에도 막부의 본거지에서 가까운 우라가, 현재의 요코스카 앞바다에 나타나 개항(開港)을 요구했다. 사실 막부는 미 해군이 나타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막부는 침착하게 적당히 시간을 끌고 되돌려보냈다. 다음 해 페리 제독이 이번에는 9척의 흑선을 이끌고 왔을 때 막부는 순순히 굴복했다. 막부가 미국의 무력시위에 순응한 이유는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외려 국제적인 감각이 있어서였다. 막부는 1차 아편전쟁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어차피 9척의 흑선을 물리친다고 해도 그다음이 문제였다. 서구 열강은 그냥 물러서는 법이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이번에도 일본 민중이 막부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작 9척의 배에 백기를 든 사실이 알려지면서 막부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마 막부도 그 정도의 반감이 일어날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31)


사무라이들은 막부가 일본에 전쟁 없는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기에 불편해도 그간의 억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막부가 자격을 상실한 이상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에 더해 또 한 사람이 크게 분노했다. 바로 고메이 천황이다. 천황은 오히려 일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반대로 일본의 자연물인 천황은, 자신의 인격과도 같은 일본이 허락 없이 외국에 개방되는 사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사무라이는 윗사람을 섬기고 윗사람은 더 높은 권력자를 섬긴다. 충(忠)의 최종 기착지는 쇼군이었다. 그런데 쇼군보다 더 높은 천황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더군다나 천황폐하께서도 쇼군에 분노하고 있다면! 그래서 사무라이들은 순식간에 토막(討幕), 막부를 토벌한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을 수 있었다. 하급 사무라이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 천황을 받들어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들불처럼 일어났다. 32-3)


3장 탄생: 신성한 타락


사쓰마는 어느 정도의 전투역량을 가진 작은 병영국가였다. 1863년 8월, 사쓰마와 영국 간에 벌어진 사쓰에이전쟁은 영어로 ‘Bombardment of Kagoshima(가고시마 포격전)’이다. (여기서 영국 함대의 후퇴로 간신히 거둔) 사쓰마의 ‘승전’은 모순적이다. 이익을 위해 승리했다기보다는 승리를 위해 파멸적인 피해를 감수했다. 천황의 인정과 승리 자체라는 추상적인 영광을 얻은 대가로 사무라이와 주민들은 전후 복구에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복구가 끝난 뒤에도 희생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다음의 더 큰 승리를 위해 더 강해져야 하므로 더 많은 비용과 노동을 투입하면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가치만 남는다. 물론 가치를 위해 사대부가 목숨을 버릴 수도 있고 민중이 헌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실적 결과를 위한 가치여야 한다. 가치 자체만을 위한 가치는 현실을 파괴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성립된 일본제국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일이다. 42)


사쓰마에서 영국과 갈등이 높아지던 1863년 6월, 조슈에서도 서양세력을 상대로 무력 갈등이 일어났다. 6월 25일,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다 잠시 정박한 미국 상선 펨브로크 호(Pembroke)에 조슈 번의 군함과 해안포대가 갑자기 대포를 쏘기 시작한 것이다. 조슈의 번사들이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실력행사를 통해 일본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면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비교적 평등한 조약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어서였다. 무력 갈등은 곧 시모노세키전쟁이 되었다. 서구 열강의 강력한 힘을 확인했음에도 조슈 번사들은 여러 부대들을 새로 창설하고 투쟁 일변도로 맞섰다. 조슈 번이 서양 군대에 점령당하는 지경에 이르자, 번사들은 이웃한 번인 고쿠라(小倉) 번에 쳐들어갔다. 그리고는 고쿠라 번의 일부를 점령해 그곳에서 해안포대를 쌓아 다시 저항했다. 후퇴 없이 오직 직진만 하는 의지는 대단했지만 전황을 바꾸기는 불가능했다. 조슈는 시모노세키전쟁에서 참패했다. 43)


막말(幕末)에서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이바라키현에 해당하는 미토(水戶) 번의 역할은 지대하다. 미토 번사들 역시 조슈와 사쓰마 번사들처럼 가치투쟁에 자신들의 목숨을 아낌없이 몰아넣었다. 정작 유신 정부가 수립되자 미토 번은 단 한 명의 정부 요인밖에 배출할 수 없었다. 실력 있는 번사들이 모두 죽은 후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을 때,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했다. 그 모든 무모함과 과격함은 결국 옳았다. 일본은 옳은 나라이므로 이제 밖/세계를 상대로, 즉 청나라와 러시아, 미국에 싸움을 걸어야 한다. ‘상대가 강대한 데도 불구하고/옳은’ 전쟁이므로 싸운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에는 ‘상대가 강대한 만큼 무모한 전쟁이므로/옳다’는 무서운 관념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살아남지 못해 지워진 미토 번 대신 어쨌든 살아남아 역사에 길이 남은 죠슈와 사쓰마의 운명은 이후 일본이 겪은 폭주의 경로와 그 결과를 예고하는 불길한 징후로 남았다. 46-7)


수많은 지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했더니 유신이라는 선물이 주어졌다. 여기서 소위 ‘지사 문화’라는 게 생긴다. 자신의 신념과 대의에 따라 목숨을 거는 행위를 존경하는 문화다. 선과 악으로 이루어진 윤리적 세계관에서 ‘나’는 올바름을 위해서 싸운다. 이때 ‘나’의 적은 올바를 수 없다. 그는 악이다. 만약 적을 인정하면 나는 싸움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투쟁을 그만두던가, 상대편을 인정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정의가 아니면 불의이기 때문이다. 미학적 세계관에서 ‘나’의 올바름은 상대적이다. 나는 나의 올바름을, 적은 그의 올바름을 위해 싸우고 죽는다. 이런 죽음은 탐미적이다. 적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아름다우면 된다. 마초적이고 생사에 초탈하면 인정해 마땅하며 감동하게 된다. ‘큰 정의’나 ‘작은 불의’ 따윈 없다. 뜻이 크거나 작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기개, 패기, 혈기, 기세 등의 말로 표현된다. 미학적 세계관은 올바름이 아니라 멋스러움을 추구한다. 52-4)


4장 팽창: 전쟁중독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스스로도 무모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은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청일전쟁에 동원된 중국군은 사실 군벌인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이 소유한 사병이었다. 사기와 훈련도에서 일본군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홍장은 자기 사병의 희생을 염려했다. 사병이 희생을 치르면 중국 내 다른 군벌들과의 경쟁에서 불리해질 뿐이다. 그래서 청군은 소극적으로 싸우며 여차하면 후퇴를 거듭했다. 바꿔 말하면, 그렇게 싸워도 일본을 이길 거라고 계산했다. 이홍장의 계산이 틀린 것만도 아니다. 일본군은 평양 전투에서 식량과 탄약을 모두 소진했다. 조슈 출신 장교들은 천황폐하의 황군은 후퇴도 항복도 할 수 없다며 최후의 자살 돌격을 준비했다. 바로 그 순간 청군이 항복했다. 일본군의 모습을 본 청군은 저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군대가 식량도 탄약도 모두 떨어졌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무모함이 상식의 선을 넘으면, 거꾸로 상식이 속아 넘어가는 법이다. 68)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의 함대는 21세기의 핵잠수함과 다르다. 필요할 때마다 육지에 배를 대고 석탄을 공급받지 않으면 배는 그저 바다를 표류하는 비싼 고철이 되고 만다. 전투력이라는 것은 사시사철 필요할 때 언제든 발휘할 수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함대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1년 내내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이 필요하다. 당시 러시아제국은 영국과 함께 세계의 2강이었다. 충분한 부동항을 확보하지 않고는,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발트함대도 영국에 대적할 수 없다. 영국이 ‘세계 최강’의 함대가 활동할 수 있도록 조건을 허락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반도는 부동항이 넘치는 곳이다. 러시아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동항 후보지는 한반도 남해였다. 일본에서는 러시아를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이 다른 상식적인 논의를 짓눌러버렸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청일전쟁의 승리가 선사한 관념이었다. ‘일본인은 불리하기 때문에 모든 불리함을 극복하고 이길 것’이라는 논증이 되고 마는 것이다. 71)


애초에 패전하고 배상금을 물어야 할 때는, 상대가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어서다. 일본은 이겼다. 그러나 이기기만 했다. 모든 역량을 소진하고 껍데기만 남은 일본은 러시아에 대포 한 발 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러시아라고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러시아는 받아내고 싶은 게 있으면 다시 쳐들어와서 실력으로 받아내라고 일본에 큰소리쳤다. 결국 일본은 배상금 없는 전후처리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올랐다. 이기기만 하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받고 삶에 숨통이 트일 거라고 기대했던 일본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마침 전사자의 시체와 팔다리를 잃은 부상병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군인들의 영웅적인 희생으로 얻은 결과를 무능한 정치인들이 망쳤다는 여론이 대세가 되었다. 도시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일본 내각은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대거 사임한 자리를 군인들이 채웠다. 결과적으로 군부의 힘이 더 강해지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일어났다. 80)


이미 일본 경제는 프로파간다로 수습할 수 없을 지경으로 붕괴한 채였다. 일본에 남은 운명은 좋아 봐야 국가 부도 사태였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쓰시마 해전을 주의 깊게 관찰한 영국은 미래 해전을 위해서는 한 단계 발달한 형태의 군함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드레드노트(Dreadnought)급 군함이다. 자금과 역량이 풍부한 서구 열강이 드레드노트급 개발 경쟁에 뛰어들자 일본이 그때껏 피눈물을 흘려가며 손에 넣은 모든 전함은 구식이 되고 말았다. 기껏 무수한 풍파를 겪으며 러시아를 꺾는 열강의 지위에 오른 일본은, 드레드노트의 시대가 오면서 순식간에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아무것도 없는 공백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이미 폭력의 트랙을 질주하던 일본은 관성대로 드레드노트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인간인 이상 더는 견딜 수 없었고, 러일전쟁을 통해 내부적으로 파멸해온 일본 역시 비참한 몰락이 예정돼 있었다. 기적이 없는 한 일본과 유신은 끝장이었다. 80)


5장 폭주: 정결한 세계를 지키는 야만


1913년 당시 일본의 총리는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権兵衛, 1852- 1933)다.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나 사쓰에이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전형적인 유신 지사였다. 조슈 번사보다 합리적인 경향이 있는 사쓰마 번사답게 그는 문민주의자였다(어디까지나 조슈의 관점에서다). 그가 속한 사쓰마-해군 세력에 의해 일본이 ‘나약하게 타락하는’ 모습을, 조슈 번벌은 앉아서 지켜볼 수 없었다. 사쓰마를 막기 위해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가 나섰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조일수호조약으로 한반도와 인연을 맺은 정치가이자 외교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5-1915) 등과 함께 ‘조슈의 3대 인물’에 꼽히는데, 특히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제국 군국주의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유명하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해군과 지멘스 사이의 비리(해군이 말도 안 되는 높은 가격에 드레드노트 관련 제품을 구입하면, 매출액의 15% 가량을 일본 해군에 상납한다)를 독일 정부에 일러바쳤다. 93-4)


일본은 드레드노트 하나에만 국가 재정의 30%를 쏟아붓고 있었다. 현재 일본의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은 1%가 조금 넘는 수준이며, 그나마 1%의 벽도 수십 년 만에 간신히 깨졌다.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병영국가인 북한의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이 23% 수준이다. 1913년 당시 일본인의 삶의 질은 드레드노트라는 괴물에 잔혹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해군과 외국 자본의 협잡이 드러난 것이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그런데 조슈의 예상보다 더 분노하고 말았다. 조슈 번벌은 사쓰마가 퇴진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탈환하는 정도까지만 국민이 분노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일본 민중은 길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은 물론이고 국회의사당에까지 쳐들어갔다. 일본 민중은 사쓰마는 물론 조슈까지 포함한 번벌 세력 전체를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 지멘스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는 문민정부가 출범했으며, 최초로 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이어진 십수 년간의 시기를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른다. 94)


여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한국인은 구시대를 청산할 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속담처럼 문자 그대로 뒤집어 엎어버린다. 한국인은 확실한 변화가 아닌 것을 개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김영삼이 하나회를 단박에 소멸시켜 군부를 청산해버린 데에는 그의 개인적인 성품도 큰 몫을 했지만, 결국은 그러한 과단성을 한국인들이 지지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일본은 다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문민통치가 군부통치에 근소한 판정승을 거둔 상태다. 더 냉정하게 진실을 말하자면, ‘군부가 어쩔 수 없이 문민 세력의 존재를 용인해주는 상태’다. 당시의 일본에서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 같은 사무라이 출신 군인이 일본 총리나 조선 총독이 되어도, 조슈와 사쓰마 번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데모크라시’로 불릴 수 있었다. 실제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일본 정치의 막후로 정계를 주름잡았다. 군부정치라는 간판을 내려 보이지 않는 곳에 잘 비치해두었을 뿐이다. 95)


두 번의 국제전과 드레드노트에 혈액과 장기까지 팔아치운 일본은 중환자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정도로 건강을 회복할 상태가 못 됐다. 여전히 일본은 장기적으로 멸망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계속된 우연적 행운이 이번에도 갑자기 불어닥쳤다.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다. 일본은 훗날 비슷한 행운을 한국전쟁을 통해 한 번 더 누리는데, 두 번 모두 세계 1류 국가로 일어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차대전 당시 미국산 공산품은 21세기 초반인 현재의 기준으로 중국제 정도의 위상을 지녔다. 일본 제품에 대한 신뢰성은 지금의 베트남제 정도였다. 양쪽 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유럽에 막대한 무역 흑자를 기록하며 일본은 되살아났다. 아니 부활한 정도가 아니라 다시 태어났다. 일본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화려한 변신에 성공했다. 1차대전이 끝나고 나면 남의 전쟁으로 우뚝 선 두 나라,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 지배권을 놓고 대결하는 시대가 온다. 97-8)


1923년, 모든 것을 집어삼킬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일본제국의 번벌 세력은 관동대지진이라는 기회를 틈타 ‘내부의 적’을 설정해 제국주의에 반항적이던 일본 국민을 결집하는 데 단번에 성공했다. 일본 군부에 있어 재일 조선인은, 히틀러에게 있어 독일에 사는 유대인과 같은 의미의 땔감이었다. 일제 군부는 자신들이 도취한 유신의 정념에 일반 국민을 포섭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폭력의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다. 관동대지진 2년 후 1925년, 유신은 군국주의 일본의 틀을 완성한다. 치안유지법을 통해서다. 치안유지법은 한국의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의 아버지다.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수습한다는 핑계로 실행된 치안유지법의 핵심은 두 가지다. 감히 천황제의 신성함을 의심하지 말 것 그리고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지 말 것이다(사회주의를 탄압하기 위한 명목이었다). 천황은 다시 절대적인 군 통수권자가 되어 군부가 자행하는 모든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마법의 장치가 되었다. 102)


6장 광기: 순수의 시대


유신의 폭주로 인해 실행된 치안유지법은 아이러니해 보인다. 이 법이 발효된 후부터 약속이나 한 듯 젊은 군인들이 무력을 동원해 쿠데타와 하극상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보면 쿠데타, 항명, 기타 다양한 폭력사고는 치안유지법으로 억압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치안유지법이 오히려 폭력투쟁의 에너지를 조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치안유지법은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법의 근거로 삼는다. 즉, 천황에 대한 마음만 진심이라면, 어떤 행동도 인정받는다는 논리가 숨어 있다. 비록 죽음으로 대가를 치를지언정 결기 자체는 존중받는 ‘지사’의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이다. 천황의 신성함은 절대적 진리가 되었으므로, 치안유지법 실행 이후의 폭력은 ‘내가 천황폐하를 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순수성 투쟁’의 증거로써만 가치 있게 되었다. 천황을 사랑하는 한 어떤 짓도 할 수 있으며, 폭력에 천황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유신의 광기는 중국 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06)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다. 만주사변은 결과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에 와서 ‘용의주도’하게 설계되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건을 기획한 사람은 단 세 명의 관동군 장교였으며, 상부의 명령도 없이 제멋대로 저질렀을 뿐이다. 만주사변으로 확대된 9월 18일의 류탸오후(柳条湖)사건의 계획은 이렇다. 1928년 6월 4일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1883-1955)가 주도한 황고둔(皇姑屯)사건으로 아버지 장쭤린을 잃은 장쉐량이 식식거리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국민당과 손을 잡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전쟁에 목마른 관동군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그들은 관동군이 치안을 담당한 남만주철도의 선로가 폭발한다면 장쉐량의 짓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동북군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으니 관동군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승리가 모든 과정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래서 주동자들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철로를 폭파해버렸다. 112)


관동군은 다음 해인 1932년 2월 만주를 완전히 장악했다. 일본은 생각하지도 못한 싼값에 덜컥 만주를 손에 쥐었다.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주동자들은 국가적 영웅이 되어 파격 승진했다. 사실 이제까지 조선과 대만은 들인 노력에 비해서 그렇게 돈이 되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조선인들의 고혈을 짜내긴 했지만, 식민지에 저지르는 악행에 비해서는 수지 타산이 좋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말도 잘 듣지 않고 쓸데없이 똑똑했다. 같은 한자 문명권 안에서 오랫동안 공존했기에 백인 통치자가 손쉽게 다루는 흑인이나 인디오보다 훨씬 골치 아픈 상대였다. 일본이 부러워하는 ‘식민지다운 식민지’는 남아프리카나 브라질, 인도처럼 광대하고 풍요로운 먹잇감이었다. 만주를 차지해 ‘식민지 갈증’이 단박에 해소된 일본이 만주사변 주동자들을 두둔하고 추켜세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젊은 군인들 사이에 결과는 하늘에게 맡기고 일단 무력을 휘두르고 보자는 과격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114-5)


일본의 군국주의가 완전무결하게 완성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건이 더 필요했다. 1936년 벌어진 2·26사건이다. 이 사건의 정신적 배경에는 기타 잇키(北一輝, 1883-1937)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1920년대부터 황도파 청년들의 사상적 스승 노릇을 했다. 아시아의 수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기타 잇키 역시 신해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는 신해혁명을 지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중국 현지에서 혁명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의 본명은 기타 데루지로(北輝次郞)였는데,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식 이름인 잇키(一輝)로 개명했다. 이 이름은 한편으로 민중 봉기를 뜻하는 일본어 잇키(一揆)와 발음이 같다. 그의 개명은 혁명가 쑨원의 호(號)가 일본식 이름인 중산(中山;나카야마)인 것과 쌍을 이룬다. 중국인인 쑨원은 일본에서 근대화를, 일본인인 기타 잇키는 중국에서 혁명을 꿈꾸는 법을 배웠다. 그는 열혈 청년들과 장교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일본 정치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18)


황도파 장교들은 어려서부터 천황제일주의를 교육받았다. 천황에 대한 충성심은 흔들림 없었지만, 일본의 현실에 대해서는 분노했다. 당시 일본은 농촌의 인구가 도시보다 많았다. 순혈이 되지 못하는 대부분의 장교들은 농촌 출신이었다. 그들은 농촌에서 지주나 사족(士族, 사무라이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에서 일반 농민의 아들, 도시의 노동계층 자제로 구성된 사병들에게 일본 민중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모순적인지 전해 들었다. 일본 민중의 삶은 엉망이었다. 사병의 부모들은 고된 노동에도 굶기 일쑤였고 자라면서 누이가 팔려가는 모습을 본 경우도 허다했다. 이들은 일본제국을 뿌리부터 뜯어고치기 위해 기타 잇키의 지령에 따라 약 1,500명으로 구성된 ‘결기(決起, 떨쳐 일어남)부대’를 결성했다. 그들의 목표는 메이지 유신보다 순수한 ‘쇼와 유신’ 그리고 ‘존황토막(尊皇討幕, 천황을 받들고 막부를 토벌함)’을 대신한 ‘존황토간(尊皇討奸, 천황을 받들고 간신을 토벌함)’이었다. 119)


2·26사건을 오해하면 안 된다. 직관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아무리 일본이 총칼을 들고 일어난 젊은 혈기를 참아주는 지사 문화에 젖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2·26사건처럼 과격한 행동은 도무지 참고 넘어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상은 반대다. 과격한 세력을 더 과격한 세력이 진압하고 일본을 완전히 거머쥔 사건이다. 그 바탕에는 순수성 투쟁이 있다. 통제파는 황도파와 경쟁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 자신도 순수해져야 했다. 순수함의 결론은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였다. 일본을 위해 전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 일본이 존재하는 체제다. 황도파의 사상이 사회주의적 파시즘이라면 통제파의 그것은 순수한 파시즘이었다. 관동군이 된 황도파 장교들은 만주군 소속 조선인들에게 기타 잇키의 사상과 2·26사건을 열심히 설명했다. 실패한 거사는 그들에게 낭만적인 전설이 되었다. 전설을 전해 들은 조선인 중에는 훗날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도 있었다. 120-1)


1937년 7월 7일 발발한 중일전쟁은 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으로 시작된다. 그 유명한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 1888-1966)는 독단적으로 부대를 이끌고 관할지를 넘어 루거우차오를 무단 점거했다. 그로부터 4년 후, 스기야마 하지메는 쇼와 천황에게 어째서 아직도 중국이 정복되지 않았느냐는 질책을 들었다. 그렇게 유신은 중일전쟁, 아니 죽음의 길로 홀린 듯 빠져들었다. 태생부터 자살적인 유신의 숙명이었다.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돈과 자원이 필요했다.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을 점령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태평양 지배권을 놓고 미국과 싸워야 했다. 일본은 전쟁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지’하거나 ‘확대’하기 위해 또 전쟁을 시작했다. 그 종착역은 필연적 죽음이었으므로, 이제 유신 자체가 된 일본은 죽음을 짝사랑하기 시작한다. 옥쇄, 반자이 돌격, 가미카제는 모두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123)


7장 임종: 덴노 헤이카 반자이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도 많다. 일본은 점과 선을 확보할 수 있었을 뿐 면은 차지할 수 없었다. 점은 도시, 선은 도로와 철도다. 그러나 진짜 중국은 강산과 농경지 그리고 농민이었다. 장제스와 국민당은 공산당에게 배운 수법을 일본군에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바로 게릴라전이었다. 일본은 늪에 빠졌다. 이 경우 일반적인 집단이라면 어떻게 늪에서 빠져나올지를 고민하지만, 일본은 어떡하면 늪에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갈까를 궁리했다. 그렇게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이 시행된다. 국가총동원법은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국가가 통제하는 법이다. 이 법을 무기로 일본 군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껏 처분할 수 있었으며, 노동쟁의를 포함해 모든 쟁의가 부정되었다. 이때 나온 슬로건이 거국일치(擧國一致, 온 나라가 하나로 뭉침), 진충보국(盡忠保國, 충성을 다해 나라를 지킴)이다. 국가총동원법 아래에서 일본과 식민지 민중들은 진액까지 짜이고 말았다. 129)


1941년, 평균 연령 33세인 일본 최고의 인재 35명이 선발되어 총리실 산하로 집결했다. 이들의 모임을 ‘총력전 연구소’라 불렀다. 총력전 연구소는 여름 내내 미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가정 하에 모든 상황과 가능성을 고려하여 전쟁 결과를 예측했다. 몇 번을 계산해도 결론은 명백했다. 일본은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했던 도조 히데키는 젊은이들을 훈시했다. 〈연구에 대한 제군들의 노고가 크지만 실제 전쟁이란 것은 책상머리 회의와는 다르다. 러일전쟁도 모두 우리가 질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승리했다. 전쟁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제군들은 그 의외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천황이 납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전쟁이 결정되었다. 이 전쟁은 일본 육군의 입장에서 부르는 말로는 ‘남방작전’으로, 동남아시아 육지 점령전을 뜻한다. 해군 중심으로 보자면 미국과의 태평양 제해권 싸움인 ‘태평양전쟁’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는 결국 태평양전쟁에 수렴된다. 134-5)


일본은 홍콩, 인도차이나, 필리핀, 동인도제도, 버마를 모조리 쓸어 담으며 일단은 빈집털이에 성공했다. 현지 주민들은 처음에 일본을 환영했다. 환호성을 지른 곳도 있었고, 조용히 관찰한 지역도 일본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적으로 돌아섰다. 일본은 공짜로 얻은 유리한 전쟁 환경을 스스로 걷어차고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특히 필리핀에서 큰 곤란을 겪었다. 필리핀 전역은 일본군과 미군을 합쳐 문자 그대로 백만대군이 뒤얽혀 싸운 초대형 전장이다. 여기서 일본은 최소 30만 이상, 최대 52만 명 이하의 전사자를 낳았다. 태평양전쟁 전사자 수의 절반 이상이 필리핀의 산악과 정글에서 죽고 말았다. 일본을 끝장낸 것은 필리핀을 떠나며 “나는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고 한 약속을 지킨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휘하의 미군이지만, 그때까지 일본군을 붙잡고 괴롭힌 건 ‘처음엔 일본군을 환영한’ 현지인 게릴라였다. 137-9)


미군의 일본 본토공격작전의 이름은 무시무시하다. 바로 ‘몰락작전(Operation Downfall)’이다. 미군 총인원 백만 명 이상이 책정되었다. 여기에 소련, 영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중화민국, 뉴질랜드가 연합군으로 참전할 예정이었다. 일본이 ‘외지(外地)’에서 저지른 악행이 모든 것을 정당화했다. 일본 열도에 그 어떤 공격을 퍼부어도 도덕적인 문제가 없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일본군은 치치지마(父島)에서 미군 포로를 미식과 여흥을 위해 잡아먹기도 했는데,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죽어야 할 일본인의 수는 소리 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대본영도 전쟁에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면 항복하면 된다. 하지만 미국이 몰락작전을 수립할 즈음, 일본은 탐미적인 몰락을 꿈꿨다. 조종사와 전투기가 적함을 들이받아 자폭하는 ‘가미카제 특공’이 실시되었다. 다시금 전쟁은 제사가 되었다. 도미나가 교지는 가미카제 특공이 출격할 때면 조종사들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제군들은 이미 신’이라며 찬사를 바쳤다. 147-8)


일본은 가미카제가 통한다고 느끼자 아예 가미카제 전용기인 츠루기(劍, 검)를 생산했다. 이외에 1인용 인간 자폭어뢰 가이텐(回天, 회천), 인간 자폭로켓탄 오우카(桜花, 앵화), 자폭보트 신요(震洋, 진양), 인간 자폭잠수부 후큐류(伏龍, 복룡) 등 인신공양 제사용품들이 쏟아져나왔다. 일본의 공업생산력은 완전히 붕괴한 후라서, 일회용 자폭 병기 이상을 만들기도 힘들었다. 도조 히데키는 ‘1억 총옥쇄’를 부르짖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참으로 불길하게도, 1억이란 숫자엔 조선인까지 포함돼 있었다. 도조 히데키가 입에 담은 ‘죽창’은 진심이었다. 일본은 ‘본토결전(本土決戰)’ 전에 이미 사기그릇 수류탄, 유리병 수류탄을 만들어 사용했다. 금속 제련은 비용이 많이 드는 탓이었다.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학교의 책걸상을 잘라 만든 15세기 기술 수준의 화승총*, 13세기 구조의 원시적인 로켓을 제작했다. 기원전부터 사용되던 투석기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학생들에게 죽창을 사용한 창술 훈련을 시켰다. 148-9)


* 금속제 책걸상 다리를 총구로 사용했으며, 총몸과 개머리판은 책걸상의 목재로 충당했다.


일본은 미군정(GHQ)의 통치하에 들어섰다. 그런데 항복 직후의 일본에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일본은, 국가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미군을 위한 위안소(慰安所)를 설치했다. 55,000여 명의 여성이 모집되어 미군의 성욕 해소를 위해 일했다. 직관적으로 보면 더없이 비굴해 보인다. 맥아더는 위안소를 역겨워해 ‘민주주의의 이상에 방해된다.’며 폐쇄해버렸다. 어째서 일본은 자발적으로 자국 여성을 점령군에게 바쳤는가. 이는 사실 마지막 ‘전투 행위’다. 일본은 자국 군대가 그랬으므로, 미군 역시 일본 여성을 집단강간할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인에게 일본 여성의 자궁은 일본의 자연물이다. 미군 위안부는 나머지 여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방어선’이다. 그들의 자궁은 본토를 지키는 옥쇄이면서, 반자이 돌격이나 가미카제 특공을 감행하는 ‘병정’이었다. 남자 군인의 목숨과 여성 자궁의 순결함을 1 대 1로 치환하면 위안소 운영의 ‘관념적 실체’를 명징하게 이해할 수 있다. 150-1)


8장 부활: 윤리적 세계와 미학적 세계


1946년 5월 8일,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가 미군 수송선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름은 박정희(朴正熙, 1917-1979). 그는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한 1945년까지 관동군 장교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였지만 조선인 박정희로 되돌아왔다.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박성빈과 백남의 사이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초대 부통령 이시영, 2대 부통령 김성수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 이들은 조선인으로 태어나 대한제국의 근대화 시도를 목격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민족 정체성을 재확인했고, 최종적으로 한국인이 되었다. 이승만과 이시영, 김성수에게 일제강점기는 자신의 생애 안에 걸린 액자다. 반면 박정희는 태어날 때부터 국적이 일본제국이었다. 민족사(史)가 아닌 개인의 삶을 기준 삼으면 엄밀히 말해 박정희에게 광복(光復, 빛이 돌아옴)은 광복이 아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나라를 되찾지 않았다. 기존의 체제가 사라지고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154)


박정희는 태생적으로 윤리적인 세계가 아니라 탐미적 세계의 일원이었다. 박정희는 음악에 대한 감각이 예민했으며, 군사독재자라는 살벌한 이미지를 걷어내고 그의 문장을 곱씹으면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기조가 흐름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일본 영웅들의 전기를 읽고 열광했다. 나중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일대기에 푹 빠졌다. 하지만 과거의 이야기보다 더 그를 사로잡은 것은 눈앞의 매력적인 존재들이었다. 박정희는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구미에서 야외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고 매료되었다. 일본군은 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강력하고 조직적인 집단이었다. 그들의 복장, 무기, 일사불란한 제식이 미학적 인간으로 자신을 단련한 소년에게 얼마나 인상적이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박정희 같은 인물형은 유행에 민감하다. 일본제국 체제에서 그 무엇보다 빛나는 유행은 군대였다. 그는 본국의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독자 행동한 관동군이 동아시아의 슈퍼스타로 박수갈채를 받는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 157-8)


박정희가 중위 계급을 달고 나서 불과 한 달 후, 일본 천황이 미국에 항복했다. 관동군은 해산되었고 박정희는 조선인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향했다. 한국광복군을 위시한 항일투사들이 만주군 출신 조선인을 공개적으로 모집했다. 전쟁이고 항일이고 다 끝난 마당에 어째서 만주군 장교까지 필요로 했는지 의아해 보이지만, 많은 인원이 함께 모여 안전하게 귀국하는 일은 의외로 섬세하고 치밀한 군사작전에 가까웠다. 그런 만큼 산만한 인원을 효과적으로 통솔할 인재들이 필요했다. 만주군 출신 조선인에 대한 광복군의 시각을 짧게 정리하면 아마도 ‘좀 재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 민족의 일원이자 유능한 인력’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광복군 중대장이 되었다. 광복군 병사들을 일제식으로 강압적으로 통제하다가 상급자에게 욕을 먹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만약 광복군이 조선인 일제 군관을 민족반역자라고 생각했다면 총으로 쏴 죽이면 그만이다. 그들은 그저 직업인으로 평가받았다. 162)


일제강점기 말기 대부분의 조선인 일제 군관들의 계급적 배경은 빈농이었다. 그들은 친일 지주를 비롯해 구체제 기득권에 대한 불타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 나는 ‘조선 대 일본’, ‘민족 대 반민족’으로 구분되는 전통적인 진영논리에 한 가지 주제를 더하겠다. 그것은 ‘계급’이다. 식민지 조선 내부의 계급갈등을 빼놓고는 역사적 인물들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박정희를 포함한 조선인 만주군 장교들은 계급적 배경으로는 사회주의자면서 정치적으로는 군국주의자인 묘한 집단으로 해방정국에 스며들었다. 빈농의 자식이 아니었다면, 박정희는 기타 잇키를 사상적 스승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2·26사건에서 결기부대가 구원하고자 했던 이들은 시골의 비참한 농민이었다. 물론 구원의 방식은 자의적이고, 폭력적이며, 강압적이다. 그리고 자기 파멸적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사회주의자인가, 군국주의자인가? 욕망의 화신인가? 모두 아니다. 박정희의 복합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단어, 그것은 ‘유신’이다. 165-6)


1960년에는 3·15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전국이 민주화 열기로 들끓게 되자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군인들은 혼란을 틈타 군사반란으로 이승만을 몰아내기로 결의했다. 거사일은 5월 8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5월 8일보다 4월 19일이 먼저였다. 박정희는 다시 숨을 죽였다. 여론을 관찰하던 박정희는 1961년 4·19일로 다시 쿠데타 날짜를 잡았다. 그는 민주화 혁명 1주년에 다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날 것으로 확신했다. 계획대로 현실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점은 ‘유신’의 특징이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병력을 시위 군중 속에 뒤섞어놓았다가 일시에 조직적으로 움직여 정부와 주요 시설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혁명 1주년, 거리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박정희는 당황했다. 이미 군대 내에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소문이 잔뜩 퍼졌다. 이 소문은 정치권에도 돌고 있었다. 돌아오기엔 너무나 먼 강을 건넜다. 게다가 5월 말 박정희는 예편될 예정이었다. 박정희는 마지막 기회에 모든 것을 걸었다. 169-70)


5·16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사적으로 특이한 쿠데타다. 해방된 지 15년 이상이 지난 상태였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신생 독립국이 되었다. 국민은 발전 없이 정체만 되어 있는 나라의 현실에 질린 상태였다. 엄밀히 말해 정체가 아니라 퇴보였다. 부패와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다. 정치권도 쿠데타 소문을 뻔히 들었지만 어찌해야 할지 몰랐고, 어떤 면에서는 담담히 반란을 기다렸다. 국민도 은근히 군대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미국 국무부의 〈팔리(Farley) 보고서〉는 장면 정부가 같은 해 4월을 넘기지 못하리라 예측했고, 심지어 공산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서술했다. 박정희가 실패해도 다음, 그다음이 예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쿠데타 당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5·16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당시 유행했던 짧은 문장으로 모두 설명된다. 〈올 것이 왔다.〉 그러나 쿠데타만 오지는 않았다. 군화 소리와 함께, 유신이 돌아왔다. 170)


9장 절정: 최고의 사랑, 완전한 사육


한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자주 간과되는 사실이 있다. 박정희는 군사력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엄연히 투표를 통해 국민에게 권력을 승인받았다. 박정희는 ‘만주군 출신의 쿠데타 수괴’였는데도 일반 국민은 물론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자들에게까지 지지받았다. 지지하지 않는 이들도 최소한 쿠데타가 불가피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인정받은 것은 박정희의 행위지, 박정희 자신은 아니었다.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사회악 척결은 민중에게 선명한 프로파간다로 다가왔다. 옳지 않은 대신 매혹적이다. 박정희는 이를 ‘구악일소(舊惡一掃, 나쁜 옛것을 모조리 쓸어버림)’라고 이름 지었다. 구악일소는 일본의 우파 정치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가 1957년 총리로 취임하면서 주창한 ‘삼악척결(三惡剔抉)’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삼악은 부정부패, 가난, 폭력을 말한다. 삼악척결 역시 일본 내에서 유행어가 될 정도로 반향이 컸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쌍을 이룬다. 172-3)


박정희는 성공을 이어나가기 위해 기시 노부스케가 필요했다. 경제발전 때문이다. 경제성장에 대한 박정희의 욕망을 쿠데타로 차지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간단히 평가할 수는 없다. 이 책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유신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박정희가 그 자신의 표현으로는 ‘민족중흥(民族中興, 민족이 다시 일어남)’, 구체적으로는 한국인이 가난을 벗어던지고 잘살게 되는 일에 ‘나름의 사명감’이 있었다는 사실은 양보하지 않겠다. 이것이 20세기 신생 독립국의 수많은 독재자와 박정희의 차이점이다. 물론 나라를 망친 타국의 독재자들도 ‘나름의 애국심’은 투철했을 것이다. 대체로 독립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난 이들이니 말이다. 그런데 박정희의 애국심은 두 가지 의미에서 다르다. 첫째, 민생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었던 한국인이 ‘대체로 잘 먹고 잘사는 상태’가 그의 확고한 목표였다. 둘째, 결과주의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도 정당화된다는 믿음이다. 173-4)


박정희는 모순된 인물이 아니다. 일제 체제에서는 성공한 황국 신민(국적)이자 자랑스러운 조선인(민족 정체성)이 되면 된다. 마찬가지로 독립국이라는 조건이 주어진 상태라면 성공한 나라를 만드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박정희의 세계 속에서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변경을 넘어 해외로의 웅비는 고사하고 한 치의 앞마저 내다보지를 못하고 항시 중국, 일본, 러시아의 강압 속에 숨 막히는 질식 생활을 영위하여 온 우리 민족이었다. (…)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세계로 웅비하는 일대 선진국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좌절한다면 위의 지적대로 중국, 일본, 러시아의 3대 대국(大國)의 각축 속에 휘말려 또다시 그들의 속국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음을 통감하게 된다.〉 그가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독재자이면서, 아마도 역사상 유일하게 ‘반민족 행위에 가담했으면서도 민족의 성공에 가장 진심이었던’ 특이한 독재자였다는 사실에 불쾌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사실은 사실이다. 176-7)


박정희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반일감정, 민족주의, 애국주의를 깊숙이 심어놓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는 일본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유신과 만주국은 일본이 아니니까. 설사 일본을 좋아했어도 상관없다. 그는 반일감정이 한국인의 경쟁심을 부추기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활용했다. 내적 구조가 유신과 만주국, 관동군의 방식이어도 상관없다. 그는 철저하게 기능적인 ‘결과주의자’다. 사무라이들의 폭주로 탄생한 유신의 관념에서 조선 문인들의 붕당정치, 즉 ‘말싸움’은 한심하다. 언쟁은 절차적 정당성을 지닐지언정 아름답지도 확실하지도 않다. 박정희는 민주국가의 당연한 조건인 의회정치를 그가 혐오한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그래서 의회를 탄압했으며 본인이 창당한 공화당마저 억눌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탄압한 일제 군부와 다를 바 없다. 박정희는 진정성을 가지고 유신으로 노예가 되었던 한민족을 유신의 방식으로 번영시키려고 했다. 185)


이제 국민의 눈에는 민주주의와 미국식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기능이 추가된, 김대중이라는 신상품의 성능이 더 좋아 보였다. 박정희는 천황에 대한 사랑으로 천황을 납치하려고 한 조슈 번사들처럼, 국민을 위해 국민을 납치하려고 했다. 자신의 통치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만 국민은 모른다. 그렇다면 국민을 사육해야 한다. 그저 그런 사육은 억압일 뿐이다. 박정희에게 ‘완전한 사육’은 ‘사랑’이었다. 오늘날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김대중을 정직하게 이겼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으며 기존의 헌법을 정지했다. 일명 ‘10월 유신(維新)’이다. 12월, 일본제국 헌법의 직계 후배인 유신 헌법이 발효되었다. 일본제국 헌법에서 천황을 유신 체제로 바꾸고, 천황에 대한 불충을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번역하면 그대로 유신 헌법이 된다. 유신정권은 전쟁 말기 일본처럼 파멸을 향해 치달아갔다. 그 종말의 날짜는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189)


10장 완성: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다


김재규가 일제식 공교육을 받은 1930년대에 이미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실종되었고, 노기 마레스케는 진정한 우국지사로 숭앙받았다. 노기 마레스케를 기리는 신사는 전쟁 프로파간다 시설로 신성하게 취급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도 ‘노기 신사’를 세웠다. 김재규는 노기 마레스케를 깊이 흠모했다. 인간의 정체성은 어느 편을 들고, 누구를 적대시하는가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같은 편과 적을 나누는지가 고유한 정체성에 가깝다. 김재규를 만든 성장기에서 유년기가 한학과 김문기라면, 청소년기는 유신과 노기 마레스케였다. 김재규는 일본의 군국주의자일지언정 나라와 주군에 충성한 방식에 있어서는 노기 마레스케처럼 살고 죽기를 꿈꾸었다. 그의 이상적 남성상인 김문기와 노기 마레스케에겐 공통점이 있다. 현란한 죽음의 이미지다. 김문기는 세조에게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능지처사되었다. 일제의 교육관에서 가장 추앙받는 요소를, 일제의 교육을 받은 김재규 역시 사랑했던 것이다. 193)


이종찬(1916-1983)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군 내에서도 엘리트로 분류되었다. 이종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릴 수 있지만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에 관한 용감한 결정으로 좋은 선례를 남긴 바 있다. 1952년 7월, 이승만은 전쟁 도중 전방의 부대를 끌어들여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라남·북도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7월 4일에 공포 분위기 속에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이승만의 병력 동원 재촉이 이어지자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은 “군의 본질과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고 의식·무의식을 막론하고 정치에 관여하여 경거망동하는 자가 있다면 건군 역사상 불식할 수 없는 일대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훈령을 전체 육군에 하달하면서 이승만에 맞서고 곧 군에서 추방되었다. 이종찬은 일본군이었을 때에는 일본제국 헌법을, 국군일 때에는 대한민국 헌법을 따르는 헌정주의자였다. 김재규 역시 이종찬을 따라 헌정주의자가 되었다. 195-6)


5·16이 일어났을 때 김재규는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고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 때문에 박정희가 한국의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김재규는 혁명군 사령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결론이 정해진 조사를 받았음에도 김재규는 무죄 방면되었다. 정말로 비리 혐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재규가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선 박정희는 갑자기 그를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했다. 최고 권력자가 자신을 중신(重臣, 중요한 신하)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박정희에 깊이 충성토록 만들었다. 그는 박정희와 군신(君臣)관계를 맺은 것이다. 박정희의 선택은 성공했다. 김재규는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호남비료 공장 건설을 예정보다 1년 단축해 완공하는 데 성공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명령을 훌륭하게 완수한 김재규를 기업가나 정치인으로 키우고 싶었지만, 김재규는 다시 군에 복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박정희는 아쉬웠겠지만, 김재규가 욕망을 절제하는 모습 때문에 그를 더 사랑하게 됐다. 196-7)


김재규는 3군단장으로 있다가 10월 유신을 맞게 된다. 박정희는 3성 장군인 채로 김재규를 전역시켰다. 김재규는 끝까지 군에 남아 진정으로 제2의 한국전쟁의 선봉장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주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소속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유신정우회는 일본제국의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를 모델로 했다. 입헌정우회는 법적으로는 정당이지만 실제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만들고 이토 히로부미가 계승한 조슈 파벌의 핵심적 권력 단체였다. 유신정우회는 자동적으로 국회 의석의 1/3을 차지했는데, 누가 정우회의 일원이 될지는 박정희 개인이 결정했다. 유신정우회는 스스로의 존재 목적을 ‘유신 수호’라고 밝히고 출범했다. 김재규는 자신을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수호하는 군인으로 인식해왔다. 스승(이종찬)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은 유신에 반대하면서도 주군의 명령에 따라 몸은 유정회 의원이 되었다. 그의 세계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200)


10·26사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김재규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꼭 차지철을 집어넣는 실수를 범한다. 차지철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리자 권력욕 반, 충동 반으로 사건을 저질렀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김재규에게 차지철은 주군의 몸에 들러붙어 건강을 악화시키는 기생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979년의 김재규는 죽음을 꿈꾸기 시작했다. 10·26사건을 일으키기 약 3개월 전, 김재규는 장준하의 아들에게 이제 곧 큰일이 벌어질 테니 한국을 떠나 있으라고 일러두었다. 박정희와 김재규 모두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민주주의가 산업화의 다음 단계로 도래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민주적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불러올 방법이 없었다. 김재규는 유신의 세계를 살아왔다. 자신의 세계관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끝내야 한다. 아버지와 스승과 주군의 충돌을 ‘하나의 사랑’으로 합치하는 유일한 길, 그것은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202-4)


김재규의 목표에는 자신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체포된 후부터 갑자기 의연해졌다. 어차피 사형이 예정되어 있었다. 민주화 진영에서도 김재규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으로, 종교계를 시작으로 김재규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종교계의 입김으로 민주화 투쟁에 몸담던 인권변호사들이 김재규를 변호하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다음 독재자가 되기 위한 권력욕에 휩싸여 주인을 문 권력의 개’를 변호하는 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김재규를 접하고 그의 진심에 놀랐고, 나중에는 존경하게 되었다. 그중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를 존경하면서도 문득문득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그는 ‘확실히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분이 맞긴 하구나.’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김재규로부터 ‘앗사리(あっさり, 깨끗한/시원한)한 태도’라는 표현과 ‘목숨을 초개(草芥, 지푸라기)와 같이 버리는 생사관’에 대해 여러 번 들었다고 전한다. 207)


김재규가 민주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멀리 엇나간 발언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987년 6월항쟁에서 국민이 전두환을 상대로 승리하게 된 요인에 김재규의 총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을 쓰는 지금, 김재규는 반역자로도 불리지만 동시에 의사(義士)로도 불린다. 그러나 나는 확언한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 지사이며, 최후의 유신 지사다. 유신의 완성에는 마지막 마침표 한 점이 필요했다. 그것은 김재규의 죽음이다. 1980년 5월 23일, 그는 다음날 사형이 집행될 것을 확신하고 유언을 남겼다. “나는 즐겁게 갑니다.” 1980년 5월 24일 아침. 김재규는 찬물로 몸을 씻고 새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 식사를 거르며 몸속까지 깨끗이 정돈했다. 오전 7시, 사형집행 직전 김재규는 마지막 질문을 받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그는 대답했다. “없다.” 모든 것은 무(無)로 되돌아갔다. 유신의 역사가 끝났다. 209)


후기: 유신의 제단


박물관에 있는 해시계가 가치 있는 이유는 스마트폰보다 성능이 좋아서가 아니다. 해시계는 박물관을 나와 현실에서 사용하려는 순간 무가치해진다. 유물은 유물로, 폐허는 폐허로 대해야 한다. 나는 유신의 제단에 꽃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물을 던지며 욕할 생각도 없다. 대신 오래된 정원을 폐허로 놔둔 채 거닐고 싶다. 한밤중의 폐허 위로 별빛이 내릴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별처럼 지상의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별이 빛나는 이유는 거기에 정말로 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로부터 던져진 것이기에 현재의 틀에 과거를 끼워 맞추면 현재까지 뒤틀린다. 실체는 파도에 떠밀려온 잔해가 아니라 바다 자체에 있다. 역사란 살았다가 죽고, 시신이었다가 지상의 풀들이 자라나게 하는 거름이 되는 순환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각자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라는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품어야 현재를 미래에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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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사람이 사라진다 - 새로 쓰는 대한민국 인구와 노동의 미래
이철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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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안개 속에 싸인, 가리어진 길


"최근 발표된 2023년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의 중위 전망이 실현되는 경우, 한국의 인구는 2072년까지 약 30%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한 국가의 인구는 어느 정도 규모면 충분할까? 경제학이나 경제지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부존자원, 자본량, 기술수준 등이 주어져 있을 때 1인당 소득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인구 규모로 '최적 인구'를 정의한다. 이론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 크기를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목표로 하는 바를 1인당 소득이 아닌 국민의 종합적인 후생으로 설정한다면, 최적 인구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향후 60년 이내에 인구가 3,500만 명으로 감소할 수 있다는 장래 인구 전망에서 더 우려되는 부분은 3,500만이라는 '규모'보다 60년 이내라는 기간이 나타내는 '속도'이다." "빠른 속도로 인구가 감소하면, 특정한 인구 규모에 맞추어진 한 국가의 여러 시스템에 심각한 불균형이 발생하고, 이로 말미암아 막대한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26-30)


"한 국가의 각종 제도는 대체로 매년 태어나는 인구 규모를 고려하여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예컨대 공적연금제도가 태동할 때 연금의 기여율과 소득대체율은 장래의 특정한 연령별 인구수를 가정하여 결정되었다. 산부인과와 소아청소년과 병원과 의사 수, 보육시설과 학교의 교사 수, 군대의 징집 인원과 총 병력 규모, 특정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의 공급량 등도 나이에 따른 인구 규모와 무관할 수 없다." "노동시장도 인구구조 변화가 초래하는 불균형 문제를 비켜 가지 못할 것이다. 일정한 나이를 넘어서면 평균적인 생산성이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인구구조 변화로 인한 실질적인 노동 투입량의 감소 규모는 더 클 수 있다. 인구변화는 직종 혹은 산업 간 노동 수급 불균형을 불러올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각 부문에 취업해 있는 사람들의 나이, 학력, 숙련도 등이 다르고, 이질적인 성격의 인력은 서로 쉽게 대체되기 어렵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34-5)


2장 인구변화는 노동인구절벽으로 이어질까?


"현대의 노동시장에서 생산연령인구(15~64세 인구) 규모는 일하는 사람의 수를 어림잡을 수 있는 유용한 지표이다. 하지만 생산연령인구는 실제 노동인구와 상당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생산연령인구 가운데 (학생이나 조기 은퇴자를 제외한) 일부만이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인구변화가 노동인구 규모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전망하기 위해 생산연령인구보다 경제활동인구의 변화를 살펴보는 편이 타당하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 중위 전망이 실현되는 경우, 전체 경제활동인구 규모는 2022년 약 2,938만 명에서 2072년 1,635만 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현재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유지되는 경우, 노동인구가 향후 50년 동안 현재의 약 56%로 감소할 것임을 보여준다. 매우 빠른 감소이지만 적어도 15~64세 생산연령인구의 감소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느린 감소 추세이다. 그리고 15년 후인 2030년대 후반까지는 그다지 큰 폭의 감소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48, 52)


"한국은 서구 선진국과 비교할 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매우 압축적으로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경험했다는 특징을 나타낸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현재 한국에는 부모와 자식 세대는 물론이고 불과 10년 터울의 선배와 후배 사이에도 평균적인 건강과 인적자본 수준이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고령층에 진입하는 세대는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의 혜택에 힘입어 과거와 현재의 고령자에 비해 더 건강하고 생산적인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국에서 인구 고령화가 가져올 미래의 변화를 전망할 때, 나이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효과, 즉 나이 효과(age effect)뿐만 아니라 태어난 시기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효과, 즉 코호트 효과(cohort effect)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통상적인 가정을 대입하면 인구 고령화의 부정적인 영향이 과대평가될 수 있다." "여기에 고령층에 진입하는 출생 코호트의 교육 수준 개선은 노동인구의 고령화로 말미암은 생산성 감소를 어느 정도 완화할 것이다."(57, 60)


3장 인구변화로 일할 사람이 부족해질까?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장기적으로 꾸준히 높아졌지만 비교 대상으로 설정한 다른 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스웨덴,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북서부 유럽 국가들에 비해 20~30%p나 낮고, 이웃 국가인 일본에 비해서도 줄곧 10%p 낮게 유지되었다. 한국이 장차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다른 국가들의 경험을 따라가리란 보장은 없지만, 지난 40년간 추세와 여성 고용을 증진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고려할 때 앞으로 더 높아질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장년여성 경제활동참가율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현재 비교 대상이 된 국가 가운데 한국보다 참가율이 낮은 국가는 프랑스뿐이다. 과거에는 전통적으로 조기퇴직 경향이 강했던 영국과 독일 같은 국가들이 200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보다 낮은 참가율을 보였으나, 현재는 한국을 앞지르고 있다. 일본 장년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도 한국보다 월등하게 높다."(68-70)


"현재의 한국은 노동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노동시간당 부가가치로 정의한 노동생산성 지표에서 2022년 한국은 OECD 38개국 중 33위로 하위권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빠르게 개선될 수 있을까?" "먼저 여성의 생산성 변화 가능성을 살펴보자. 임금을 생산성 지표로 볼 때, 한국 여성 취업자의 생산성은 남성에 비해 낮으며, 이러한 여성의 불리함은 다른 국가보다 훨씬 더 크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이에 관한 연구들은 노동시장에서 한국 여성들이 직면하는 여러 가지 불리함, 특히 결혼이나 출산으로 발생하는 불리함을 심각한 성별 임금격차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렇게 볼 때, 일과 생활의 균형을 이루고 일터에서 여성이 직면하는 불리함을 없앨 수 있는 정책(보육 지원, 노동조건 개선, 각종 차별 금지 등)은 여성 고용을 확대하는 데 긍정적일 뿐만 아니라 여성이 가진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75-9)


"한국의 빈곤율이 아동과 청년층에서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낮지만 50대를 넘어서며 빠르게 높아져 고령층에 이르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인다. 그렇다면 왜 50대 중반을 넘기면서 임금으로 측정한 노동생산성이 빠르게 감소할까?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많은 사람이 50대에 접어들면서 가장 오랜 기간 일해온 주된 일자리를 떠난다는 것이다. 능력이 뛰어나거나 운이 좋은 소수의 퇴직자는 이전 직장과 비슷한 일자리를 얻어서 높은 급여를 받으며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다수는 이전보다 질이 낮은 일자리 혹은 해오던 일과 관련이 적은 직종에 재취업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나이 들어도 건강과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교육, 훈련, 건강관리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전직 및 재취업 지원 시스템을 강화하여 개인의 역량과 선호에 맞는 일자리 이동을 쉽게 만든다면, 고령자의 고용이 확대될 뿐만 아니라 생산성도 높아질 수 있다."(79-82)


4장 인구변화로 노동시장에 어떤 불균형이 발생할까?


"앞으로 노동시장에서 나이 든 인력은 늘어나는 반면 젊은 취업자는 줄어든다. 그런데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은 인적자본의 특성과 노동시장에서 주로 맡는 일의 성격이 다르다. 각 일자리가 필요로 하는 인력의 유형도 다르다. 주로 젊은 인력에 의존하는 일자리도 있고 나이 든 사람에게 적합한 일자리도 있다. 따라서 노동인구의 나이 구성이 빠르게 바뀌면 인력 수급에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 "보건업, 음식점 및 주점업, 기타 전문·과학 및 기술 서비스업, 스포츠 및 오락 관련 서비스업 같은 업종은 20대와 30대 초반의 젊은 노동인력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농림업, 광업, 부동산업, 운송업 같은 업종에는 젊은 노동인력이 상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인구구조 변화로 젊은 노동인력 비중이 줄어들면 이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산업의 노동 공급이 더 폭으로 감소할 것이다. 반면에 나이 든 취업자가 계속 일할 수 있는 부문에서는 인구 고령화로 인한 노동 공급 감소 효과가 상대적으로 작을 것이다."(100-2)


"2031년까지 인구변화로 노동 공급이 가장 많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산업은 육상운송 및 파이프라인운송업으로, 그 감소 규모는 3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직별 공사업과 자동차를 제외한 소매업에서는 20만 명 이상, 음식점 및 주점업과 농림업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노동 공급 감소가 예상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부동산업, 공공행정·국방·사회보장·국제기관·외국기관, 사회복지서비스업, 교육서비스업 등에서는 노동 공급이 오히려 10만 명 이상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직업별로 보면, 운전 및 운송 관련직에서는 약 26만 명의 노동인력 감소가 예상된다. 조리 및 음식 서비스직, 운송 관련 단순 노무직, 제조 관련 단순 노무직, 건설 및 채굴 관련 기능직 등에서도 10만 명 이상의 노동력 감소가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교육 전문가 및 관련직, 법률·행정·경영·금융 전문가 및 관련직, 경영 및 회계 관련 사무직 등의 직종에서는 인구변화로 오히려 노동 공급이 10만 명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105-8)


# 이상의 결과는 다른 조건이 변하지 않을 때 인구변화가 각 부문의 노동공급을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킬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실제 취업자 변화를 예측해주지는 않는다. 가령, 사회복지서비스업은 인구변화로 노동 공급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보다 훨씬 가파르게 노동 수요가 증가하면서 가까운 장래에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5장 누가 우리를 치료하고 돌볼 것인가?


"인구변화로 인한 전반적인 의료서비스 수요 증가는 장차 이 분야의 수급 불균형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의료서비스 수급 불균형 문제의 핵심은 의사 수의 부족 문제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다른 의료인력이나 시설·장비에 비해 한국의 의사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 한의사를 포함한 한국의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6명으로 OECD 평균인 3.7명보다 훨씬 적고, 2.5명인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낮다. 반면 한국의 인구 1,000명당 병상, MRI, CT 수는 OECD 평균보다 훨씬 높다. 둘째, 의료서비스를 구성하는 다른 인적·물적 투입 요소에 비해 의사의 공급이 매우 경직적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의 신규 의사 수는 의대 정원에 의해 결정되는데, 2000년 3,507명이었던 의대 정원은 2006년까지 3,058명으로 감축된 후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의료인력 시장에 의사에 대한 수요가 늘더라도 이것이 공급 증가로 이어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130-2)


"전체 의사 인력의 수급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면 그것으로 충분할까? 의사는 비교적 동질적인 직업군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다양한 전문 과목이 있으며, 다른 과목 의사는 이질적인 지식과 숙련을 보유한다. 특히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분야의 치료는 해당 분야의 전문의만 담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사 인력에 대한 총량적인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더라도 전문 과목 간 수급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 인구변화는 전체 의료서비스뿐 아니라 전문 과목별 서비스 수급에도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된다. 인구변화로 인한 의료서비스 수요 변화가 전문 과목에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출생아 수 감소는 산부인과를 찾는 임산부 수를 줄일 것이다. 또한 아동·청소년 수가 점점 줄면서 이들이 많이 방문하는 소아청소년과나 이비인후과 환자도 감소할 것이다. 반면 고령자가 많이 걸리는 각종 만성질환을 주로 다루는 신경과, 신경외과, 외과, 흉부외과 등을 찾는 환자는 빠르게 증가할 것이다."(136-8)


"인구 및 가구 구조 변화로 인해 가까운 장래에 고령자에 대한 돌봄서비스 수요는 매우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돌봄이 필요한 노인 가운데 공식 돌봄을 받는 노인의 비중은 매우 낮고 어떤 돌봄도 받지 못하는 고령자 비율이 3분의 1에 달한다. 이런 여건을 고려할 때, 고령자에 대한 공식돌봄서비스 수요는 전체 수요에 비해 더 빠르게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저출산 추이가 이어지면 아동 수는 장기적으로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고 이에 따라 맞벌이 가구 비중이 높아지면서 보육시설 돌봄과 개인 양육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증가할 개연성이 크다." "심각한 전문 과목별 의사 인력 수급 불균형이 예상되는 의료 분야에 비해서는 덜하겠지만, 돌봄서비스에서도 돌봄 유형 간 불균형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다양한 유형의 돌봄서비스를 담당할 인력이 서로 완전하게 대체적이지 않다면 어느 정도의 유형 간 수급 불균형 문제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152-3)


6장 일터에서 젊은이가 사라진다


"청년 경제활동인구 감소는 일반적인 노동인력 감소와는 사뭇 의미가 다르다. 이는 최근 학교교육을 받아서 현재의 노동시장이 필요로 하는 최신의 지식과 숙련을 보유한 노동인력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학습 능력, 적응력, 지리적·사회적 이동성이 높은 집단의 비중이 축소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청년인력 감소는 같은 규모의 평균적인 노동인구 감소보다 노동시장에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노동시장의 기본 기능은 특정한 인적자본을 가진 노동력을 동원하여 해당 인력이 필요한 부문 혹은 지역에 탄력적으로 재배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력의 동원과 재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면 각 개인은 자신이 가장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개별 산업의 경쟁력과 국민경제 전체의 성장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노동의 이동성은 새로운 산업과 지역의 성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169-70)


"청년인력 감소가 노동시장에 일으킬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첫째, 교육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이는 교육 시스템을 개선해 노동시장 수요에 잘 부합하는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현재 약 60만 명의 청년이 맡고 있는 역할을 그 절반 혹은 3분의 1 규모의 청년이 해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둘째, 노동시장 개혁이 필요하다. 이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훈련 프로그램 개선을 통해 다른 부문 및 유형의 인력 사이 대체 가능성을 높이고, 청년인력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다른 인구집단의 고용을 확대하는 방안이다." "인구변화가 노동시장에 불러올 충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줄어드는 청년 가운데 누구 한 사람도 '낭비'되지 않도록 고등교육을 제도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선호와 여건에 따른 선택과 진로 변경의 기회를 거듭 제공함으로써 이들의 역량을 전 생애에 걸쳐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너그러운 교육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178-9, 182)


"청년인력 감소가 가져올 인력 수급 불균형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부문 간, 직장 간 이동이 효율적이고 탄력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동시장을 좀 더 유연하게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줄어드는 청년인력이 이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일자리로 재배치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육과 훈련을 강화하여 다른 유형의 인력이 서로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하는 정책도 필요하다." "출생아 수가 40만 명대로 떨어진 200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본격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면서 젊은 신규 취업자가 빠르게 감소하면 기업은 더 이상 신규 채용에 의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청년인력 감소로 말미암아, 이미 중소기업이 오래전부터 경험하고 있는 신규 인력 확보의 어려움은 점차 중견기업을 거쳐 대기업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노동시장 변화에 대응하여, 기업은 기존 직원의 재교육·훈련이나 타 분야 출신 인력의 채용과 교육 등을 통해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는 노력을 늘려야 할 것이다."(182-3)


7장 노인을 위한 나라, 노인이 없는 사회


"미래의 고령인구는 그 수가 많아질 뿐, 현재의 고령자와 별반 다르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미래의 고령자는 현재의 고령자와는 여러모로 다를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의 압축적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을 고려할 때, 일찍 태어난 현재의 고령자보다 늦게 태어난 미래의 고령자가 평균적으로 더 건강하고 더 높은 수준의 인적자본을 보유할 가능성이 크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교육수준의 개선일 것이다." "65세 이상 대졸 인구는 상대적으로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집단이 될 것이다. 대졸 고령인구는 현재 전체 인구의 5% 미만이지만, 2072년이 되면 15세 이상 인구의 약 3분의 1이 65세 이상 대졸자로 구성될 것이다. 여기에 55~64세 대졸 인구를 포함하면 50년 후에는 대학을 졸업한 55세 이상 장년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전망이다." "이처럼 미래의 고령인구는 현재의 고령인구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아질 것이고, 고학령 고령인력은 전체 노동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192-7)


"게다가 미래의 고령자는 현재의 고령자보다 더 건강할 것이다. 그리고 건강상태 개선은 학력 신장과는 별도의 경로로 이들의 생산성을 높일 것이다.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이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고학력자는 일반적으로 저학력자보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위험한 행위를 덜 하며 건강과 관련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또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의료기술을 더 잘 이해하고 의료서비스를 더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도 하다." "건강 개선에 힘입어 미래의 고령자는 더 오래, 더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 악화는 중년을 넘긴 노동자가 일을 그만두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각종 질환과 건강 악화는 중고령자의 고용뿐만 아니라 임금에 반영된 생산성을 낮추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건강이 더 나아지는 미래 고령인구는 현재의 고용인구에 비해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아지고 생산성이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197-8)


# 한국 노동시장에서 정년 연장이 효과적인 방안이 아닌 이유

1. 향후 10~20년은 노동력 총량이 부족하지 않으므로 모든 유형의 고령자의 양적 확대는 필요하지 않다.

2. 심각한 노동력 부족이 예상되는 산업(사회복지서비스 등)은 대체로 정년의 의미가 크지 않은 업종들이다.

3. 정년 연장으로 장년층 고용 확대가 예상되는 산업과 청년인력이 급감하는 부문이 그다지 겹치지 않는다.

4. 인력 부족 문제는 중소기업에서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정년연장의 혜택은 주로 대기업 중심이다.

5. 정년 연장은 '평균'을 고려하여 추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파워 시니어를 충분히 잘 활용하기 어렵다.


"산업과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고 노동시장에 파워 시니어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장차 고령인구가 생산 역량을 충분하게 발휘할 수 있게 하려면 고령 친화적인(age-friendly) 작업환경과 노동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미국의 한 연구는 고령자가 선호하는 일자리 특성으로 높은 자율성과 유연성, 낮은 스트레스와 신체적·인지적 난이도, 재택근무 가능성 등을 제시하였다. 또한 고령자가 이러한 성격의 일을 하기 위해 상당한 정도의 임금을 포기할 의사가 있음도 보였다." "흥미로운 결과는 여성과 젊은 고학력자의 고용도 고령 친화적인 일자리의 증가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젊은 세대도 자율성과 유연성이 높은 일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감지된다. 미래에는 이 세대가 고령층에 진입한다. 따라서 일자리를 고령 친화적으로 바꾸는 작업은 베이비 붐 이후 세대, 더 나아가 지금의 젊은 세대가 나이 든 후에도 생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218-20)


8장 ‘이민자의 나라’가 우리의 미래일까?


"한국에는 어떤 특성의 외국인이 유입되고 있고 주로 어떤 부문에 취업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2018년부터 2022년까지의 통계청 '이민자 체류 실태 및 고용조사' 원자료를 이용하여 근래 외국인과 내국인의 특성을 비교하였다." "근래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은 내국인과 비교하여 평균적으로 약 7년 정도 젊고, 대졸 이상 학력 비율이 절반 수준이었으며, 남성 비중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외국인 취업자는 내국인 취업자와 비교해 시간당 임금이 약 25% 낮았고 근로시간이 약 18% 길었다. 유배우자 비율과 상용직 비율은 내외국인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이 결과는 외국인이 평균적으로 젊지만 교육수준이난 시간당 임금에 반영된 생산성 면에서 내국인에 뒤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들 중 전문인력 비자를 받아서 들어온 외국인은 전체의 5% 미만에 불과하다. 이처럼 지금은 외국인의 절대 다수가 비전문인력 및 이와 가까운 체류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235-6)


"미래에 한국 노동시장이 필요로 할 외국인력은 과거와 현재의 수요를 충족시켜준 외국인력과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장래의 노동력 부족 부문은 외국인력 집중도가 높은 부문과 그다지 잘 부합하지 않는다. 가까운 장래에 노동력 부족이 가장 심각하리라 예상되는 5개 산업은 사회복지서비스업, 음식점 및 주점업, 전문직별 공사업, 육상운송 및 파이프라인운송업, 소매업(자동차 제외) 등이다. 반면 현재 외국인력은 주로 일부 제조업, 건설업, 숙박 및 음식점업, 농업 등에 집중되고 있다. 장래의 심각한 인력 부족 사태를 경고한 의료 및 돌봄 분야도 간병인 같은 일부 직종을 제외하고는 외국인력 집중도가 낮다." "이처럼 현재와 같은 외국인력 도입 시스템은 인구변화가 초래할 장래의 노동 수급 불균형 문제 대응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인구변화의 충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노동시장의 여건과 수요에 부합하는 새로운 외국인력 도입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241, 244)


# 외국인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 개선책

1. 숙련 유형 및 수준에 따라 명확하게 구분된 비자체계 수립(현재는 전문인력과 비전문인력으로 단순 이분화)

2. 국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숙련을 보유한 외국인력을 국외에서부터 식별하고 채용할 수 있는 시스템 도입

3. 비전문 외국인력을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부문으로 배분(필요한 사업체 위주로 배정점수제 개선)

4. 외국인력의 이동성을 제약하고 노동환경 개선을 저해하는 외국인 비전문인력의 고용주 변경 제약 완화

5.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인 유학생은 젊고 학력이 높고 해당 국가의 문화에 더 익숙하므로 적극적으로 영입

6.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육과 훈련을 병행하여 국내 노동시장 동화를 촉진함으로써 최대의 생산 역량 유도

7. 숙련도가 높은 외국인력이 한국에 더 오래 머물며 일할 수 있는 환경 조성(배우자 취업, 자녀 교육 지원 등)


"현재까지의 외국인 정책은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면 외국인력이 탄력적으로 공급될 것임을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인구변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외국인으로 채워야 한다는 주장 역시 과거에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줄곧 한국에 오려는 외국인이 충분히 많을 것임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몇 가지 사정을 고려할 때 이러한 가정이 현실과 크게 어긋날 가능성이 있다. 첫째, 한국과 주된 이민 송출국을 공유하는 나라들이 적극적으로 외국인을 유치하려는 정책적 노력을 강화하면서 외국인력 확보를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강화되고 있다." "둘째, 한국에 인력을 보내고 있는 국가들이 경제발전을 경험하면서 장기적으로 인력 송출국에서 인력 수입국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 "셋째, 한국에 인력을 송출하는 국가들의 인구변화도 이 국가들이 인력 송출국에서 인력 수입국으로 전환하는 시기를 앞당길 것이다. 여기에 한국의 상대적 임금 우위가 감소하면 외국인력을 확보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258-60)


"그렇다면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첫째, 한국을 외국인이 선호하는 국가로 만들 필요가 있다. 임금 우위만으로 외국인력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오래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 이외의 조건들을 매력적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임금을 지급할 때, 굳이 한국을 택할 이유를 제공해야 한다. 우선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국제사회 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외국인 권익과 인권을 보호하는 것을 외국인 정책의 기본적인 제약 조건으로 설정해야 한다. 이는 도덕적 책무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위신을 지키고 장기적으로 우수 외국인력을 유치할 수 있는 기반이기도 하다." "둘째, 외국인력 도입을 인구문제 해소의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는 태도를 버리는 편이 좋다." "모든 고통을 깨끗하게 없애면서 부작용도 없는 마법의 약은 없다. 먼 훗날까지 지속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인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현재의 고통과 비용을 감내하는 길이 더 현명할 것이다."(261-3)


9장 아직 정해지지 않은 인구변화의 미래를 위해


"인구변화의 미래에 적합한 사회의 비전을 모색하는 작업은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의 지혜를 모아도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연구 결과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몇 가지 내용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사람을 보는 사회'이다. 나이, 성별, 출신지, 외모 등 겉으로 드러나는 부수적 특성이 아닌 역량, 성과, 경력, 잠재력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여 누구를 어떤 자리에 어떤 조건으로 쓸지 결정하는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는 '사람에게 맞추는 사회'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역량과 선호에 맞추어 적합한 일을 적당한 만큼 할 수 있는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셋째는 '기회를 주는 사회'이다. 대학 입학이나 취업에서 자신과 맞지 않는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거듭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마지막은 '사람을 보호하는 사회'이다. 인구변화에 잘 대응할 수 있는 사회는 이동성이 높은 사회이다. 사회안전망이 잘 갖추어질 때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한 모험에 나설 것이다."(272-4)


"정책 우선순위는 먼저 인구변화로 특정한 형태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발생하는 시기를 고려해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예컨대 부문 및 유형 간 노동 수급 불균형 문제는 총량적인 노동력 부족 문제보다 더 가까운 장래에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전체 노동인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는 정책보다는 미시적인 노동시장 불균형을 완화할 수 있는 정책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인구변화의 충격이 다가오는 사안도 사회적 합의와 제도 개혁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한발 앞선 대응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앞으로 4~5년 후부터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년인력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이해당사자들 간 잠재적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나 필요한 법과 제도를 고치는 정치적 과정의 험난함을 고려할 때, 교육혁신과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하는 일은 지금 시작해도 결코 이르지 않다."(277-8)


"저출산 완화 정책에 대한 한 갈래의 비판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는데도 합계출산율이 높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 정책의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책의 효과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없었을 경우 나타났을 결과를 합리적으로 추정해야 한다." "다른 요인들의 영향을 최대한 제거하고 적절한 지표를 이용하여 분석한 연구들은 현금지원, 보육의 질 개선과 보육비 지원, 육아휴직 지원 등의 정책이 출산율을 높이는 데 어느 정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른 갈래의 비판은 출산율을 높이는 것이 어차피 불가능하니 저출산·고령화 추이를 미래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비하는 노력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인구문제의 핵심은 출생아 수 감소 자체보다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사실이다. 출생아 수 감소 추이를 반전시키지 못해도 그 속도를 늦출 수 있다면 인구변화의 충격을 완화하고 대응 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281-3)


"인구문제는 여러 면에서 금융위기, 안보위기, 감염병 위기 등 다른 국가적 위기와는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첫째, 인구변화의 속도는 상대적으로 느리다.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우리나라의 출생아 수 감소도 해가 바뀌어야 비로소 체감된다. 그리고 인구문제에 대응한 정책의 효과 역시 장기간에 걸쳐 느리게 나타난다. 둘째, 다수의 국민에게 인구문제는 당장 절실한 나의 문제가 아니다. 훗날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여겨지기 쉽다. 셋째, 인구변화의 영향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인구가 줄면 오히려 삶의 질이 개선되리라는 의견도 있다. 넷째, 인구문제는 다양한 분야와 정부 기관의 업무영역에 걸쳐 있다." "인구변화에 대한 대응은 마라톤에 가깝다. 해결을 위해 애쓴 사람이 그 자리에서 결실을 얻고 공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과 국민의 삶을 어렵게 만들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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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21세기 국제질서 맥락으로 이해하기 - 패권 전환기 속 대한민국의 미래
정하늘 지음 / 국제법질서연구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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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흔히들 ‘세계화globalization’라 불리는 범세계적 통합이 지금의 수준까지 이뤄진 시기는 인류 역사상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이러한 세계적 통합은 사실 현행 국제질서의 산물이다. UN, WTO, IMF, OE­CD, SWI­FT, UCP, ISO, IS­DS…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이런 영문 약어들은 국제사회에서 운용되는 다양한 체제와 제도를 상징한다. 국제사회의 여러 체제regime는 국가 간의 합의나 동의, 협력으로 구성된다. 체제 안에 조직된 제도institution는 회원국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국제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에 의해 주로 관리된다. 세계의 통합은 국제적인 체제와 제도, 기관을 중심으로 지난 30여 년간 세계화가 꾸준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세계의 통합은 최근 몇 년 사이 느려지거나 멈추었고, 심지어 여러 방면에서 후퇴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누렸던 것과 같은 통합된 세상이 향후 수십 년간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 이유는 오늘날 국제질서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23)


제2장 패권의 역사, 그리고 질서의 진화


오늘날의 국제질서는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세계패권국인 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질서라고 해서 일극적一極的, unipolar 국제질서라 불리기도 한다.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현상 변경 세력은 미국이 주도하는 일극체제uni­po­la­ri­ty를 다극체제mul­ti­po­la­ri­ty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국제사회의 일극체제를 다극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은 미국이란 유일 패권국이 주도하는 시대를 끝내고 복수 또는 다수의 강대국이 선도하는 국제질서를 구현하겠다는 의미다. 현실적인 국제질서는 이처럼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힘’의 숫자에 의해 좌우된다. 그런데 현행 국제질서에는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힘의 숫자와 무관한 명칭도 붙어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라는 이름이 그것이다. 이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아직도 국제사회의 대세적 질서로 남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일극적 패권이 쇠퇴함에 따라 자유주의 국제질서도 함께 훼손되고 있다. 29)


제3장 팍스 아메리카나와 자유주의 국제질서


미국이 주도해온 오늘날의 국제질서에서 국제사회의 통합은 경제 분야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뒀다. 상품과 서비스의 이동은 유사 이래 가장 자유로운 상태가 됐다. GATT 체제의 후신後身으로 1995년 출범한 WTO 체제는 회원국 간 관세장벽과 서비스무역 장벽을 대거 철폐했을 뿐 아니라 모든 회원국을 상호 간에, 그리고 자국민보다 차별하지 않을 공통된 의무까지 부과함으로써 느슨하게나마 세계 경제공동체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현대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권리 중 하나인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는 국제규범도 다수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WTO 협정(그중 T­RI­PS 협정)은 저작권co­py­ri­ght, 저작인접권re­l­at­ed ri­ght­s, 상표권t­ra­de­ma­rk, 특허권pa­te­nt­s, 산업디자인in­du­st­ri­al de­si­gn, 지리적 표시geo­gra­phi­cal in­di­ca­ti­on 등 다양한 지적재산권을 광범위하게 보호하고 있다. WTO 협정의 영향으로 세계 각국의 지재권 관련 규정들도 많이 유사해졌다. 국제 거래에서의 예측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 97)


경제 및 기술 분야에서 국제교류가 효율적으로 이뤄지는데 필요한 국제표준in­ter­na­tio­nal s­ta­nd­a­rd이 자리 잡은 지도 오래되었다. 여러 기준들 가운데 공인되어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기술적 기준을 ‘표준’이라고 한다. 현재 대다수 국가는 상품, 서비스, 과학, 기술, 산업 등 방대한 분야에 있어 자체적으로 사용되는 표준을 갖추고 있는데, 각국의 표준은 국제표준화기구“ISO”,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등 관련 국제기구가 보급한 국제표준과 연동되어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국제교류를 가능케 한다. 자본의 이동도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으로 자유화된 상태다. IMF와 세계은행은 각국의 통화cur­ren­cy 흐름을 감독하고 국경을 넘어 이뤄지는 투자cross-bor­der in­ve­st­me­nt를 촉진한다. 오늘날 국제금융은 전 세계 대부분의 은행이 가입한 국제은행간통신망“SW­I­FT,” 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과 같은 국제금융시스템을 통해 신속하게 이뤄지고 있다. 97-8)


계약법, 회사법, 금융법, 경쟁법 등 국제 거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각국의 경제법들은 적어도 주요 원칙에 있어서 만큼은 유사해졌다. 그러다 보니 ‘국제물품매매계약에 관한 유엔협약“CISG”, U­ni­t­ed Na­ti­on­s Con­ven­ti­on on Con­tr­a­ct­s f­or th­e In­ter­na­tio­nal Sa­le of Go­od­s’이 규율하는 상품거래뿐 아니라 기업 인수합병M&A 등과 같이 투자유치국의 고유 법제에 구속되는 투자거래조차 큰 틀에서 대동소이해졌다. 범용성 있는 영문 템플릿tem­pla­te에 개별 거래에 따른 특유사항들만을 반영하여 수정한 국제계약서에 기초하여 투자거래를 진행하는 사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국제 거래에서 발생한 분쟁은 당사자들의 국내 법원에서 소송으로 해결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국제중재in­ter­na­tio­nal ar­bi­tra­ti­on라는 사적 절차를 통한 해결이 선호된다. 중재판정부가 내린 판정은 뉴욕협약이라는 다자조약에 의해 전 세계 168개국에서 집행력이 담보된다. 그 결과 국제 거래에 대한 진입장벽이 획기적으로 낮아졌다. 98-9)


제4장 미·중 패권 경쟁의 시대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함으로써 사실상 전 세계를 새로운 시장으로 얻게 되었다. 모든 WTO 회원국은 중국산 상품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거나 철폐에 가까운 수준으로 낮추어야 했고,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중국산 상품을 자국산 또는 제3국산 상품에 비해 차별하지 않을 의무를 부담하게 됐다.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을 통해 생산된 저가의 중국산 상품은 곧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WTO 가입은 중국의 수출시장을 더욱 늘리고, 수출 장벽을 더욱 낮추고, 중국산에 대한 차별대우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 외에도 다른 거대한 혜택을 제공했다. 막대한 규모의 외국인 투자가 그것이었다. 중국의 상품시장과 주요 서비스 시장이 중국의 WTO 가입의정서Ac­ce­ss­i­on P­ro­to­co­l에 따라 외국인 투자자에게 개방되자 거대한 내수시장을 노리고 전 세계에서 외국인 투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WTO에 가입한 중국은 가입 원년인 2001년을 기점으로 문자 그대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39)


중국의 대외정책이 뚜렷하게 패권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2010년경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배경이 얽혀 있으나, 크게 세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다. 금융위기를 통해 미국의 쇠락을 확인하고, 또 세계가 중국에 손을 벌리는 모습을 보며 중국인과 중국 정부는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유교적 천하 질서. 즉 중국이 유일 대국으로서 중원에 자리 잡고 변방의 소국들이 이를 지지하는, 중국을 정점으로 한 위계적 국제질서를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대안으로 내세우기 시작한 시점도 대략 이 무렵이다. 두 번째는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된 해가 바로 2010년이란 점이다. G2로 올라선 직후에도 중국의 경제 규모는 미국의 40%를 밑도는 수준이었지만, 대다수 전문가는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WTO 체제는 여전히 굳건했고, 중국은 다자무역체제 최대의 수혜자로 계속 남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140)


마지막 세 번째는 남중국해를 둘러싼 군사적 균형이 2010년을 기점으로 결정적인 전환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2010년, 드디어 대함탄두미사일an­ti​-sh­ip bal­li­s­t­ic mis­si­le 둥펑东风 21D“DF-21”가 실전 배치되었다. 그러자 상황은 근본적으로 뒤바뀌었다. 중국은 DF-21을 중심으로 미 항모전단의 중국 근해 접근을 차단하는 소위 ‘반反접근·지역 거부 전략’“A2​/AD”, an­ti​-ac­ce­ss, ar­ea de­ni­al을 수립했다. A2​/AD 전략의 골자는 전역戰域 내에서 미 해군과의 무력 충돌 발생 시 대함탄도미사일을 쏟아부어 항모전단을 일제히 타격함과 동시에 인민해방군의 해군력과 공군력을 전력 전개하는 것이다. A2/AD 우산 아래서 중국 인민해방군과 미 제7함대가 총력으로 격돌할 때의 결과는 예측이 어렵지만, 적어도 미 항모전단의 일방적인 공격 앞에 중국이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은 끝났다고 보아도 좋다. A2/AD가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큼은 미국이 자랑하는 항모전단은 더 이상 무적이 아니게 된 것이다. 140-1)


중국은 남중국해의 90%에 달하는 수역에 대해 자국의 역사적 종주권을 주장하는 소위 구단선九段線, Ni­ne Da­sh Li­ne이란 해상경계선을 선포한 상태다. 구단선은 대만을 통째로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루나이가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EEZ,” Ex­clu­si­ve E­co­no­mi­c Zo­ne을 대부분 잠식한다. 구단선이 인정되면 남중국해에서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루나이는 EEZ를 사실상 전부 박탈당하게 된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주장에 강하게 반발했다. 2013년 필리핀은 유엔해양법협약에 근거하여 네덜란드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 규정에 따라 설치된 중재판정부에 중국 구단선의 국제법적 효력을 판단해 달라고 제소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중국은 재판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심리 과정에 불참했다. 대신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2014년부터 인공섬을 만들고 석유 시추장비를 설치하여 주변국과의 긴장 수위를 더욱 높였다. 141-2) 


GATT 시절 미국이 자국 시장과 산업 보호를 위해 활용한 안전장치는 반덤핑관세an­ti​-du­mp­ing du­ty, 상계관세co­un­ter­va­il­ing du­ty, 세이프가드 조치sa­fe­g­ua­rd m­ea­su­re로 대표되는 무역구제조치trad­e re­me­dy m­ea­su­re와 수출자율규제“VER,” vol­un­ta­ry ex­po­rt re­st­ra­i­nt였다. 반덤핑관세나 상계관세는 부당한 덤핑이나 보조금의 혜택을 받아 저가로 수입되는 외국 상품으로 인해 관련 국내 산업이 피해를 봤을 때 부과하는 보호관세이고, 세이프가드 조치는 국내 산업에 특히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보호조치다. 이러한 무역구제조치는 저가 수입품으로부터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데 유용한 방어 수단이다. 한편 VER은 수출국이 특정 상품의 수출물량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다. 다만 ‘자율’이란 명칭이 무색하게 물량 제한은 수출국과 수입국 간에 양자 협상을 통해 합의된 물량으로 정해지는 게 보통이었다. VER은 미국이 자국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최강의 도구였다. 147)


1980년대에 들어 미국의 주력 산업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진화하고, IT산업의 발전으로 해외시장에서 자국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할 유인이 커지면서 미국은 한층 진보된 다자무역체제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다. 1940년대에 만들어진 GA­TT로는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과 진화하는 국제경제 관계를 규율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서비스무역 자유화와 범세계적인 지적재산권 보호, 기술 장벽 철폐 등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미국도 무언가를 내놓아야만 했다. 미국의 상품시장을 지키는 안전장치였던 무역구제조치와 VER이 대표적인 협상 대상이 됐다. 그렇게 미국과 개도국 간에 이루어진 타협의 결과물이 신생 WTO 협정의 주요 뼈대를 구성했다. 반덤핑관세 및 상계관세 부과와 관련해 GA­TT보다 훨씬 빡빡한 요건들을 부과한 반덤핑협정 및 보조금협정이 채택됐다. 또한 세이프가드 협정의 채택으로 VER이 원천적으로 금지됐다. 미국으로선 위급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던 VER을 빼앗긴 셈이다. 147)


WTO 체제가 출범하고 미국은 서비스무역과 지적재산권이 중요한 첨단 산업 분야에서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제조업 산업의 쇠락은 가속되었다. 자연히 미국은 무역구제제도를 활용해 자국 제조 산업의 보호에 나섰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미국이 수입 상품에 적용한 각종 무역구제 조치에 대해 WTO 재판부가 번번히 위법하다는 판정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GA­TT와 WTO의 차이는 단순히 규범의 종류와 범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효성 있는 분쟁 해결 수단이 부재했던 GA­TT와 달리 WTO의 분쟁해결절차는 국제공법 관계에서 가장 강력한 집행력을 담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WTO 재판부가 내린 일련의 판정들은 미국이 WTO 협정을 체결하면서 무역구제제도와 관련해 가졌던 기대를 근본적으로 저버렸다. 미국은 반덤핑과 상계관세와 관련된 피소된 WTO 분쟁에서 높은 확률로 패소했고, 특히 세이프가드와 관련해 피소된 WTO 분쟁에서는 2021년 이전까지 모든 사건에서 패소했다. 148)


WTO의 권능 아래, 약육강식이라 여겨졌던 국제사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법치주의가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서는 황폐화하는 자국 제조 산업과 부상하는 중국을 지켜보는 미국의 인내심이 말라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미국인의 정서는 이미 2010년대 중반에 보호무역주의로 전환되었고, 여기에 트럼프가 적극적으로 편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후보로 내세운 공화당의 정강정책이 무역정책에서의 ‘A­me­ri­ca F­ir­st’를 선언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당시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내세운 민주당의 정강정책도 보호무역주의를 선언하고 있었다. WTO의 최종심을 담당하는 상소기구가 공식적으로 마비된 것은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였지만, 미국이 상소기구에 새로운 재판관이 임명되는 것을 저지하기 시작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6년부터였다. 149)


GA­TT와 WTO 협정에는 소위 ‘안보 예외Security Exception’란 조항이 있다. 조치국이 자국의 중요한 안보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취하는 조치에 대해서는 WTO 협정상의 의무가 적용되지 않도록 한 예외 조항이다. 하지만 WTO 회원국들이 안보예외를 남용하여 WTO 협정에 따른 정당한 책임을 회피하기 시작하면 WTO 체제가 형해화될 수도 있다. 그래서 WTO가 출범한 이후에는 조치국이 안보 예외를 이유로 자국의 WTO 협정 위반을 정당화한 사례는 2016년 이전까지 단 한 건도 등장하지 않았다. 국제무역에서 안보와 경제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은 2017년도에 트럼프 행정부가 철강·알루미늄 산업에 대한 안보 예외 보호조치를 채택하면서부터였다. 이때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무역확장법 제232조에 따른 보호조치를 채택하였는데, 소위 ‘제232조’라 불리는 이 조치 역시 WTO 출범 이전까지는 활발히 사용됐었으나 WTO 출범 이후 약 20년간은 사용되지 않은 조치였다. 155-6)


G2로 성장한 중국의 굴기는 미국이 깔아놓은 자유무역질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바, 현재 미국은 중국을 꺾기 위해 WTO 다자무역체제를 비롯해 스스로 설계한 여러 국제체제와 국제제도를 변경하거나 훼손하고 있다. 이러한 대응은 미국의 연성적 세계 패권의 근간이 되던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훼손함으로써 세계 패권의 약화 또는 해체를 가속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미국은 세계 패권 유지에 집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탈냉전기 미국이 누린 세계 패권이란 처음부터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에서의 한시적 현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국과 다른 나라 간에 한때 현격했던 기술격차도 계속 유지될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술의 평준화가 이뤄지면, 거대한 잠재력을 지닌 강대국들이 사방에서 준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장은 동아시아에서 지역 패권 구축을 노리는 중국과 유라시아에서 지역 패권 구축을 노리는 러시아가 문제지만, 머지않아 인도가 인도양에서 지역 패권 구축을 시도할 것이다. 183-4)


때마침 미국의 국내 정치 상황도 세계 패권의 포기를 종용하고 있다. 미국이 자유무역질서를 유지하는 동안 금융자본과 다국적기업은 국경을 초월해 성장하였으나 국내 제조 산업은 황폐해졌다. 중산층이 줄어들고 부의 편중이 심화했다. 세계화로 큰 피해를 본 미국 내 제조업 노동자의 불만은 임계점을 넘은 지 오래다. 중국과의 패권 경쟁이 도래함에 따라 해외로 이전했던 공급망을 미국으로 리쇼어링할 정책적 필요성까지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전통적인 고립주의가 다시 힘을 얻으면서 ‘세계의 경찰’ 노릇을 중단하라는 정치적 요구가 대두되고 있다.  미국의 국력은 모든 영역에서 소진됐고 영향력은 쇠퇴했다. 어차피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면 허망한 세계 패권과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키느라 국력을 소모하는 것은 미국에 있어 현명한 선택지가 아닐 수 있다. 미국은 현재 진행 중인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더라도 팍스 아메리카나를 복원하려 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184)


제5장 우크라이나와 대만해협


대만해협은 미·중 패권 경쟁의 잠재적 승부처가 되고 있다. 2023년 1월, 미국의 전략국제연구센터CS­IS는 그때까지 업데이트된 자료를 바탕으로 총 24차례의 워게임을 실시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시나리오에서 미국과 대만, 일본의 연합군은 항공모함 2척과 대형 전투함 20여 척, 전투기 100여 대를 잃는 등 엄청난 손실을 보고서야 중국해군을 괴멸시키고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결과가 도출됐다. 큰 손실을 봤다는 점 외에도, 미군과 대만군에 더해 일본군까지 참전하고서야 위와 같은 결과를 얻어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실제 전쟁에서 일본 자위대가 참전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반면 2023년 5월 중국이 실시한 워게임에서는 인민해방군이 총 24발의 극초음속 미사일을 사용해 미국의 제럴드 포드 항모전단을 격침하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중국의 극초음속 미사일은 미 해군의 대공 방위시스템을 상대로 80%에 달하는 돌파·명중률을 보였고, 항모와 대형군함을 3발 이내의 명중 타격으로 침몰시켰다고 한다. 221)


만일 미국이 대만해협을 포기하면 중국의 세력권은 제1 도련선을 따라 남중국해 전역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 경우 중국은 남중국해에 선포한 구단선 내 해역 전체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구단선의 지척에는 말라카해협이 있다. 전 세계 해상 운송물량의 20%가 통과하는 말라카해협은 파나마 운하, 수에즈 운하와 함께 세계 3대 해상 운송로로 손꼽힌다. 말라카해협까지 통제하게 된다면 중국은 동북아와 중동·아프리카, 유럽을 잇는 최적의 항로를 틀어쥐게 될 것이다. 그다음 차례는 제2 도련선이다. 제2 도련선의 궤적을 따라 일본과 필리핀을 넘어 괌에까지 중국의 세력권이 팽창하면 서태평양 전역이 중국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다음 목표는 남태평양이 될 것이다. 만약 중국의 해양 패권이 제3 도련선까지 확장된다면, 중국은 하와이 앞바다까지 세력권을 넓힘으로써 미국과 진정으로 태평양을 양분하는 거대 제국이 될 수 있다. 222)


반대로 미국으로선 중국의 세력권이 아예 제1 도련선까지도 확장되지 못하도록 틀어막는 것이 최선이다. 중국의 해군력이 남중국해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억누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다름 아닌 중국이 알려주었다. 대함미사일을 주축으로 한 중국의 A2​/AD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미 해군의 항모전단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미국도 남중국해를 포위한 미사일망을 구축할 수 있다면, 앞으로 중국해군이 더욱 많은 항모전단을 꾸리게 되더라도 남중국해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남중국해를 포위한 미사일망은 유사시 중국 본토에 설치된 미사일 전력을 타격하여 A2​/AD 우산을 훼손하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2019년 미국은, 1987년에 구소련과 체결한 중거리핵전력조약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에서 탈퇴했다. 이는 중국을 상대로 신형 미사일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되었다. 222-3)


현재 미국과 미국의 동맹 세력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의 무력 충돌이 발생할 시 동원할 수 있는 육상 미사일 전력을 차근차근 확보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2020년 오키나와 본섬에 미사일 전력을 배치할 계획을 발표한 이래 규슈九州와 대만 사이에 펼쳐진 난세이南西 제도에 미사일 기지를 대거 설치·확장하고 있다. 난세이 제도는 오키나와 남서쪽 300킬로미터로부터 대만 북동쪽 150킬로미터 지점까지 늘어선 약 2천 5백여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그야말로 중국의 동중국해 진출을 막아서는 천연 해상요새이다. 중국의 제1 도련선과 구단선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해양주권 역시 심각하게 침해하는바, 미국은 동남아 국가들도 남중국해의 대중국 미사일 체계에 포섭하고자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미국이 괌, 오키나와, 필리핀, 난세이 제도 등에 소재한 기지들에 대함미사일들을 대거 배치하면 중국이 계획대로 2035년까지 6척의 항공모함을 확보하더라도 남중국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될 가능성은 희박해질 것이다. 223-4)


한편 미국은 그 외에도 다양한 대중국 봉쇄계획을 수립하여 착실히 실행하고 있다. 오늘날 미군은 항모전단 일변도의 전투 수행 방식에서 탈피해 해군과 공군, 각종 육상 무기체계와 사이버 전력, 드론 등 모든 전략자산을 유기적으로 운용해 적을 격퇴하는 소위 다중영역작전mul­ti​-do­ma­in o­pe­ra­ti­on 역량을 실시간으로 함양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육·해·공을 망라하는 대규모 무인 드론 군단을 건설해 중국군을 정량적으로 압도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최첨단 스텔스 전투함이 기함으로서 다수의 무인 드론 함정들을 통솔하는 속칭 ‘유령 함대’의 도입도 가속화하고 있다. A2​/AD에 맞서 미 해군이 생존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미 항모전단이 갖춘 현재의 대응체계로도 중국의 최첨단 극초음속 미사일을 종말 단계에서 요격할 수 있다는 평가가 존재하지만, 여하튼 미군은 MD 능력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224-5)


미 해군은 노후화된 기존 함정을 순차적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기 때문에 2027년까지는 함선의 숫자가 오히려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 대신 2027년 이후에는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동맹국의 전력이 강화되기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만일 중국이 승부수를 던진다면 그 시점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현대화와 대만 통일 준비가 갖춰지는 시점과, 미국과 일본의 남중국해 대중국 대응 전력이 완성될 시점 사이의 매우 짧은 기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 기회의 창은 2027년을 전후하여 몇 년 동안만 열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2027년이 시진핑 주석의 3번째 임기가 끝나는 시점이란 점도 중요하다. 미·중 간에 무력 충돌 위기는 쇠퇴하는 기존 패권국이 신흥 강대국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쟁을 벌이는 소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아닌, 패권국을 추격할 가망이 없어진 신흥 강대국이 도전을 위한 ‘기회의 창’이 닫히기 전에 다급히 승부수를 띄우는, 소위 ‘전성기 함정’에 의해 발생할 거라는 전망이 지난 2021년에 나온 바 있다. 227-8)


제6장 패권국이 없는 세계


많은 사람이 미국의 탈선은 트럼프라는 비주류 대통령에 한정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본질적 성격은 봉쇄전략이나 다자주의, 자유주의보다 훨씬 오랫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이었던 고립주의i­so­la­ti­on­i­sm에 입각한 시각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각종 행보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그저 자기파괴 행위에 불과했지만, 고립주의적인 관점에서는 합리성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고립주의 정책이란 가능한 모든 국제문제로부터 거리를 두고, 국제기구나 동맹과의 관계 또한 최대한 느슨하게 가져가며, 관세와 같은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해 외부에 대한 경제 의존도 또한 가급적 낮추는 대외정책을 의미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 보라.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의 여러 대외정책 기조와 매우 유사하지 않은가? 트럼프는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처음으로 등장한 고립주의자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세계대전 이전에는 미국의 거의 모든 대통령이 고립주의자였다. 246)


고립주의로 전환한다고 해서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처럼 외국의 사정에 마냥 무관심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바다를 면한 지역 패권국이 등장하면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미국이 보장해온 항행의 자유가 훼손될 수 있기에, 세계 패권을 내려놓은 다음에라도 미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패권국이 다른 지역에서 등장하지 못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다만 미국은 잠재적 지역 패권국과 직접 맞서기보다는 해당 지역의 다른 강대국에 힘을 실어주는 균형 전략ba­lan­c­ing을 통해 지역 패권국의 등장을 억누르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역내 패권국의 등장을 막기 위해 미국의 균형 전략에 기꺼이 협력할 것이다. 문제는 잠재적 패권국이 너무나 강해져서 간접적인 개입만으로는 지역 패권국으로의 부상을 견제할 수 없는 경우다. 잠재적 지역 패권국을 억누르기 위해 미국이 직접 나서 경합해야만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세계 패권을 내려놓은 미국은 과연 어디까지 개입하려 들 것인가? 250) 


미국이 탈냉전기에 가졌던 사활적 이해 중 상당수는 2023년 현재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2022년도 미국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는 중국과 러시아 등의 도발 행위를 억제하는 것이 미국의 사활적 이해에 해당한다고 적시했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 또한 미국의 사활적 이해에 해당한다고 적시했다. 요컨대 중국과 러시아의 부상을 막는 것이 미국의 사활적 이해에 해당함을 밝힌 셈이다. 그런데 중·러를 억제하여 현상 유지를 달성하는 것이 사활적 이해라고 강조하면서도, 무력 충돌에까지는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명시적인 단서를 달아 모호함을 남겼다. 즉, 2022년도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사활적 이해에 대한 위협이 반드시 무력 개입을 담보한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과 러시아 등의 도발 행위나 인도·태평양 지역의 자유와 안전을 해치는 행위 등은 오늘날 미국에 있어 실존적 위협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251-2)


영미동맹은 현존하는 가장 강대한 동맹 세력이다. 영미동맹의 다섯 개 국가(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차지한 영토는 전 세계 육지 전체 면적의 20%에 육박하고, 경제 규모도 전 세계 GDP의 30%를 훌쩍 넘는다. 미국이 포함된 영미동맹의 군사력은 단연 세계 최강이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농업목축 생산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최다 규모의 부존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리튬·니켈·코발트·구리 등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핵심 광물도 풍부하다. 대륙 규모의 국가가 셋이나 포함된 영미동맹은 지리적으로는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다로 연결되어 있고, 바로 그 바다를 지배하고 있다. 영미동맹은 미·중 패권 경쟁에서 미국이 활용할 수 있는 최강의 동맹자산이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영미동맹은 미·중 패권 경쟁이 본격적인 신냉전으로 비화하더라도 확고하게 미국의 편에 설 것이고, 설사 미국이 완전한 고립주의로 돌아서더라도 마지막까지 동맹 세력으로 남을 것이다 258)


일본은 서태평양과 남중국해, 그리고 남태평양에 중국의 해양 패권이 건설되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1905년부터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한 1942년까지 서태평양의 해양 패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팽창을 저지할 의지와 역량을 가진 유일한 나라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조공 체계에 진정으로 복속된 적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 일본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중국에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는다. 중국을 미국과 동급으로 보지도 않는다. 2021년 4월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미국과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일본을 견제하고자 모테기 도시미쓰 당시 외무상에 “대국 대결에 휘말리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2022년 11월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과 일본 양국은 모두가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있어 중요한 책임이 있는 대국”이라며 일본이 중국과 동등한 대국임을 강조했다. 262-3)


2022년 6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NATO 정상회의에서는 NATO 설립 이후 7번째로 채택된 전략개념인 마드리드 전략개념이 등장했다. 1999년에 개최된 NATO 정상회의에서는 탈냉전기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유화책을 채택한 워싱턴 전략개념이 채택됐었고, 이에 따라 미국과 유럽은 중국의 WTO 가입을 지원하여 오늘날의 중국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마드리드 전략개념에서 NATO는 러시아를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위협”으로, 중국을 유럽과 대서양의 안보는 물론이고 NATO 동맹국의 방어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체계적 도전sys­te­mi­c cha­ll­en­ge”으로 정의했다. 특히 중국과의 경쟁을 자유·인권·민주주의·법의 지배에 도전하는 야망 및 강압적 정책과의 대결이라 규정한 뒤, 중국에 맞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수호할 것이라 결론 내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쏘아 올린 공이 유럽이 자유주의 진영의 일원으로서 미·중 패권 경쟁에서 중국에 대항하게 되는 결과로 귀결된 것이다. 270-1)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미국의 세계 패권이 위협받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란이 연대하는 상황을 꼽았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해협 위기는 지엽적으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대만과 중국 사이에 발생한 지역 문제이지만, 세계적인 관점에서는 미국의 지정학적 봉쇄망을 돌파하기 위한 두 나라의 노력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와 대만해협이 각각 돌파되면 두 나라는 그만큼 지역 패권국 등극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크라이나와 대만해협은 패권의 관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 반미연대의 또 다른 축인 이란은 중·러처럼 미국의 세계 패권을 직접 겨냥하지는 않지만, 중동에서 미국의 패권을 해체하고 나아가 중동의 맹주가 되길 원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이들 세 나라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276)


브레진스키는 중국-러시아-이란의 삼각 연대는 냉전기의 공산권과는 달리 이념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고충com­ple­men­ta­ry g­rie­van­ce’으로 뭉친 연대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 실제로 러시아와 중국은 지정학적 경쟁국이고,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지역에서만큼은 러시아와 이란도 지정학적 경쟁국이다. 중국과 이란 간의 협력관계도 중국이 일대일로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국의 세계 패권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서로 연대할 필요와 유인이 있다. 오랫동안 미국의 제재에 억눌린 이란에 있어 중국·러시아와의 연대는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방구와 같다.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서방의 전면 제재에 노출된 상황에서 중국과 이란의 지원이 없으면 버티기 어렵다. 중국 또한 러시아, 이란과 연대하지 않으면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승산을 기대할 수 없다. 즉, 반미연대란 순수하게 이해관계로 결속된 세 나라 간의 전략적 연대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278)


이란의 잠재력과 지정학적 입지가 아무리 중요해도 반미연대의 핵심은 결국 중국과 러시아다. 반미연대의 결속력을 결정하는 것 또한 이 두 나라의 연대일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연대는 미국을 상대로 한 패권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한은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초강대국의 협력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세계 패권이 유지되는 동안에만 상수로 남을 수 있다. 언젠가 미국과의 패권 경쟁이 끝난 이후에는 연대할 목적을 상실한 중국과 러시아는 서로 대립하게 될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는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두 나라가 온전히 협력하는 데에도 장애로 작용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소련이 나치 독일에 맞서 연합전선을 펼치면서도 막후에서는 전후 예정된 패권 경쟁에 대비했던 것처럼, 당장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는 두 나라 역시 미국의 세계 패권이 약해질수록 협력을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상이몽을 꾸게 될 수 있다. 283-5)


중간 지대에 속한 글로벌 사우스에 있어 오늘날의 세계는 기회의 장이다. 패권 경쟁이 심화할수록 미국과 반미연대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글로벌 사우스를 회유하거나 협력을 강화할 필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아직 인건비가 높지 않은 글로벌 사우스는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을 대체할 만한 생산공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받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사우스의 입지를 키운 가장 중요한 요인은 누가 뭐래도 자원이다. 4차 산업혁명의 중추 산업을 위한 각종 원재료와 광물의 공급처로서 오늘날 글로벌 사우스의 입지는 절대적이다. 세계화 시대에는 언제 어디서든 가장 저렴한 가격에 각종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영 간 갈등이 고조되면서 자원 확보에도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를 비롯한 자원 부국엔 기회인 셈이다. 21세기의 지정학적 다툼은 글로벌 사우스와 어떠한 협력관계를 구축하느냐에 따라 유불리有不利가 정해질 가능성이 높다. 292-3)


그간 글로벌 사우스 국가에 있어 자원은 양날의 검이었다. 자원 덕택에 기초적인 경제를 꾸릴 수 있었던 측면도 있지만, 자원 때문에 착취의 표적이 된 역사도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열강의 식민지로서 말 그대로 약탈 되었고, 세계화 시대에는 다국적기업에 헐값으로 자원을 넘기거나 값싼 노동력을 착취당하기도 했다. 자원 부국일수록 경제발전이 저조한 현상을 일컫는 소위 ‘자원의 저주pa­ra­d­ox of pl­en­ty’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부패한 권력층과 결탁한 외세의 착취도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오늘날 인도네시아는 중장기적으로는 니켈의 1, 2차 가공을 넘어 ‘전기차 배터리 허브’가 되겠다는 목표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인도네시아뿐이 아니다. 지난 3차례의 산업혁명을 거치며 선진국과 다국적기업에 호된 맛을 본 글로벌 사우스는 패권 전환기를 맞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뇌리에 박힌 쓰라린 과거의 기억은 오늘날 ‘자원 민족주의’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296-7)


현재 동남아를 위협하는 중국발發 안보 위협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중국이 동아시아 최대의 수원水原인 티베트의 수자원을 통제하면서 발생한 문제다. 중국은 마오쩌둥 이래 남부의 풍부한 수자원을 북부로 끌어다 쓰는 소위 ‘남수북조南水北調’ 정책을 채택하고 치수治水에 힘쓰고 있다. 티베트에서 발원해 베트남·태국·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를 관통하는, 동남아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길이 4천 8백 킬로미터의 메콩강도 예외는 아니다. 다른 하나의 위협은 중국의 해양 팽창주의다. 남중국해를 중국의 내해內海로 만들고자 하는 중국의 야심은 동남아에 있어 거대한 위협이다. 중국은 동남아 국가 중 친중 성향이 강한 캄보디아와 맺은 비밀 협정을 통해 베트남과 태국에 인접한 레암 해군기지를 넘겨받는 등, 남중국해 포위망을 날로 공고히 하고 있다. 아직은 중국이 대만해협을 넘지 못하였기에 당면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대만해협이 무너지면 구단선은 곧바로 동남아 국가들의 실존적 위기로 부상할 것이다. 302)


2023년 2월, 시진핑 주석은 중국이 사우디·UAE 등과 협력을 강화하는 데 불만을 품고 중국대사를 초치했던 이란의 라이시 대통령을 베이징에 초대했다. 그리고 다음 달인 2023년 3월 10일, 중국이 이란과 사우디 사이를 중재해 양국 간에 국교 정상화를 끌어냈다는 놀라운 소식이 외교가를 휩쓸었다. 이란과 사우디가 국교 정상화에 합의한 다음 날 중국 외교부는 중동의 안전과 안정을 촉진하는 역할을 중국이 담당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두 나라 간의 평화가 “지속 가능하다면 환영한다”라는 애매한 코멘트를 내놓았다. 얼마 후 중국 수출입은행이 사우디와의 무역대금 결제를 위한 첫 위안화 대출을 실시하면서 ‘페트로 달러’ 체제에 대한 중국의 도전이 본격화됐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같은 달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이 주도하는 안보 협의체인 SCO에도 가입했다. 적어도 사우디가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반미연대에 맞서지는 않겠단 입장을 명백히 밝힌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행보였다. 31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쭉 미국 편에 섰던 GCC 계열 중동 국가들이 미국의 동맹 대열에서 이탈하여 다른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 기조를 같이하기 시작한 데는 복잡다기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셰일 혁명 이후 ‘탈중동’을 정책 방향으로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에서 발을 빼는 미국의 대전략이 바뀌지 않는 한, 불안을 느낀 중동 국가의 이탈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를 의식한 미국도 탈중동 행보에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미국이 과거와 같은 수준으로 중동에 계속 관여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는 시대가 됐다. 사우디와 GCC 계열 국가들은 앞으로도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오랫동안 친미 국가였던 수니파 산유국들의 그러한 행보는 단기적으로는 반미연대에 치우친 행보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 다만 사우디아라비아나 GCC 계열 국가가 반미연대의 일원으로서 미국과 대립하게 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312-3)


21세기 인도의 패권 미래가 장밋빛인 가장 큰 이유는 그 지리적 위치다. 수에즈 운하를 통한 홍해-아덴만 항로이든, 반미연대가 건설 중인 남북 국제교통회랑(페르시아만-오만만)이든 모두가 아라비아해를 통해 인도의 서쪽 바다에서 합류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물류는 이 둘 중 하나를 거치게 되므로, 인도 앞바다를 지나지 않을 수 없다. 수에즈를 통하지 않는 아프리카 동부 지역과 아시아와의 무역 역시 인도 앞바다를 통하는 것이 보통이다. 인도의 영향력은 동쪽 벵골만과 버마해를 넘어 아시아로 통하는 관문인 말라카해협까지 뻗어있다. 인도의 영토에 속하는 약 1천 4백여 개의 섬들 가운데 거의 6백여 개의 섬이 말라카해협과 이어지는 벵골만과 안다만해에 산개해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동남아시아 및 동아시아와 연결하는 모든 항로가 사실상 인도 앞바다를 지나는 것이다. 거기에 남아시아나 중동, 동아프리카에는 굴기하는 인도에 위협이 될만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321)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 미국-일본-인도-호주 간 일반협의체였던 ‘쿼드’를 전략협의체로 승격하고 IPEF의 발족을 계획하던 미국은 IPEF와 쿼드에서 인도가 중요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인도의 셈법은 미국이 바라던 것과는 달랐다. 인도는 ‘미국의 카드’가 아닌 ‘카드 플레이어’로서 독자적인 미래 패권을 추구한다. 인도양과 남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은 미국과 공유하지만, 그저 미국의 꼭두각시가 되어 중국을 전면적으로 적대할 실익은 없다. 인도는 쿼드의 안보적 색채가 강해지는 데 거부감을 나타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도 인도는 UN 차원에서 이뤄진 러시아 규탄 결의에서 기권했다. 동서냉전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비동맹 전통을 유지하며 양측 모두로부터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워낙에 전략적 가치가 높은 인도와의 협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인도 역시 중국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 이상 미국과의 협력은 필요했다. 323)


다만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할 전략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뿌리 깊은 비동맹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뀔 가능성은 높지 않다. 냉전기 인도가 고수했던 소위 ‘비연대n­on​-a­li­gn­me­nt’ 정책은 탈냉전기와 패권 전환기에 들어서 소위 ‘다중연대mul­ti​-a­li­gn­me­nt’ 정책으로 발전했다. 한마디로 모든 나라와 필요한 협력을 해서 이득을 얻겠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2022년 9월 인도는 러시아가 주도한 군사훈련인 보스토크-2022 훈련에 참여했다. 패권 전환기를 맞아 인도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의 안보 위협에 맞서고 세계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했던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는 미국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도가 인도양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세계 패권 역시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당장은 미국과 손잡고 중국에 맞서겠지만, 경제·군사적 성장이 충분히 무르익으면 인도는 인도양의 지역 패권국으로 등극하기 위한 독자적인 행보를 개시할 것이다. 324-5)


튀르키예가 잠재적 패권국이라 하면 의아할 수 있다. 튀르키예는 큰 나라이지만 중국이나 인도 같은 대국은 아니다. 국토 크기가 세계에서 30위권 밖이고, 인구는 8천만이 넘어 충분하지만 특별하지는 않다. GDP는 20위권, 군사력은 10위권이다. 그러나 절대적 힘의 우위가 필요한 세계 패권과 달리, 지역 패권국이 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패권을 조성하기에 얼마나 유리한 역내 환경이 갖춰져 있는지이다. 아나톨리아반도와 발칸반도에 걸쳐 있으며,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째로 품은 이스탄불의 입지는 독보적이다. 유럽의 공산품과 러시아·중앙아시아의 에너지, 우크라이나·러시아의 곡물은 발칸반도와 흑해, 캅카스, 중동, 지중해를 죄다 육로와 해로로 연결하는 아나톨리아반도를 거쳐 운송된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한창일 때 대한민국이 동아시아에서 지향했던 ‘중심축 국가pi­vot s­ta­te.’ 그것이 튀르키예에 있어선 지리적 선물이나 다름이 없다. 325-6)


패권 전환기를 맞아 튀르키예가 역내 패권을 노릴 수 있게 된 것은 주변국의 형편 덕도 크다. 사기적인 판도를 가졌던 소련이 건재하던 시절 튀르키예는 미군의 전진기지에 불과했었다. 당시에는 튀르키예와 동쪽 국경을 마주한 캅카스 3국도 소련이었고, 흑해 너머도 전부 소련이었다. 튀르키예는 패권국은커녕 중심축도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냉전 종식과 함께 소련이 무너지고 캅카스 지역에는 약소국이 세워졌다. 흑해 너머에는 우크라이나가 등장했다. 튀르키예에 비해 약세였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보기는 어려웠던 시리아와 이라크는 문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고, 강대국 이란도 장기간에 걸친 미국의 제재로 천천히 약화 되어갔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마지막 남은 지역 강대국인 러시아조차 크게 약해진 상태다. 러시아가 (미국이 관여를 줄인) 중동에 다시금 강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회복하기 전까지는 튀르키예가 중심축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나라인 셈이다. 326)


제7장 남은 21세기의 국제질서


현재 미국과 서방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라는 명칭 대신 ‘규칙 기반 국제질서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규칙 기반 국제질서는 국제법에 따른 ‘법의 지배’를 국제사회에 구현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오늘날 미국이 주창하는 규칙 기반 국제질서에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가장 중요한 기둥인 자유무역주의가 포함되지 않는다.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규범에 기초하는 이상, 규범의 창설과 집행의 근간이 되는 다자주의는 전제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아래서 만들어진 국제규범과 국제제도는 처음부터 국가들의 의견대립을 조율하여 협력으로 이끄는, ‘다자주의’라는 메커니즘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은 21세기에는 국제법의 구속력bi­nd­ing po­wer이나 강제력en­for­c­ing po­wer보다 국제사회의 자발적 존중과 준수에 기초한 규범력nor­ma­ti­ve po­wer이 중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342-3)


오직 규칙 기반 국제질서만이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오늘날 국제사회에 만들어 놓은 체제와 제도를 온전히 계승하는 게 가능하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주창하는 다극적 국제질서는 사실상 힘의 역학관계만을 의미하는 다극체제일 뿐, 현대적인 관점에서의 ‘국제질서’라고 부르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극체제 또는 다극적 국제질서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자주의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극체제의 복원은 소수의 나라를 제외한 대다수 글로벌 사우스도 선호할 수 없다. 미국 및 서방이 갖는 자유 및 인권에 대한 시각을 공유하지 않는다 해도, 남은 21세기에 글로벌 사우스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권 존중 원칙과 개방된 세계시장, 그리고 다자주의에 따른 국제협력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유럽도 미·중 패권 경쟁의 다른 영역에서는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하더라도, 차기 국제질서를 결정하는 싸움에서는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채택되도록 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345-6)


대다수 국가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미래는 패권 전환기 이후에도 국제사회에 다자주의가 유지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바로 미국의 세계 패권이 해체된 후에도 지역 패권국이 등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 패권국, 특히 권위주의 패권국은 자국의 세력범위에 속한 나라들을 복속시켜 종속국으로 만들 것이다. 또한 지역 패권국의 등장은 다른 모든 강대국에 지역 패권을 추구할 유인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패권국이 다자주의를 시스템적으로 강제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국제정치는 자연히 강대국 본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독자적인 행보를 걸을 만한 국력을 갖지 못한 국가들은 비슷한 이해관계와 지정학적 입지를 공유하는 동류 국가끼리 짝지어 세력을 형성하려 시도할 것이다. 즉, 남은 21세기의 다자주의는 지금보다 훨씬 느슨해질 것이고,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국가와 세력 간에 중첩적인 소다자주의가 범람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349)


소다자체제가 추후 다른 세력에 맞서기 위한 배타적 동맹체제로 발전할 위험도 있다. 동일한 목적을 놓고 서로 다른 세력이 각기 소다자체제를 결성할 때, 소다자체제 간에 이해관계가 상충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기 때문이다. 다자주의가 기본인 세계에서는 이러한 마찰을 비교적 수월하게 조정할 수 있겠지만 세력균형과 세력다툼이 대세인 세계에서는 사소한 마찰이라도 세력 간 갈등으로 비화할 위험이 있다. 그 경우 소다자체제의 당사국들은 배타적인 동맹체제로 결속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동맹체제의 등장은 갈등이 충돌로 비화할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도 위험하지만, 다자주의를 통한 범세계적 통합을 어렵게 만든다는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다자주의는 남은 21세기 동안 활발히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다자주의를 통한 문제 해결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는 소다자체제의 한계와 위험성에 주의하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라도 국제협력을 추구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350-1)


핵무기나 WMD 확산 방지, 기후변화 대응, 인공지능 규제, 우주 개발 등은 오직 다자주의를 통해서만 대응할 수 있는 문제의 예시에 지나지 않는다. 변화의 속도가 날로 빨라질 남은 21세기에 인류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종류의 도전에 수없이 직면할 것이고, 개중에는 다자주의가 아니고서는 극복할 수 없는 도전도 상당할 것이다. 다자주의에 기초한 오늘날의 국제질서는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통해 얻은 교훈 위에, 냉전 시대 이후 쌓은 세계화의 이력이 더해져 만들어졌다. 이 질서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보완하고 보강하여 더욱 진보시켜야 할 일이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로 되돌아가서는 결코 아니 될 것이다. 이미 인류는 근대 이전의 법칙에 따라서는 ‘종으로써 생존할 수 없는’ 지점까지 와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다자주의는 인류가 자초한 수많은 문제점에 대응하고 또 인류가 인류로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자리매김하게 될지도 모른다. 354)


제8장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


중국과 미국 모두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원하지만, 각자가 바라는 영향력의 성격이나 수준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양자택일 상황에 내몰리면 결국 미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중국이나 러시아도 상식적으로 인정하는 바다. 다만 중국과 러시아가 대한민국에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편에서 미국에 맞서는 것도, 미국을 버리고 중립이 되라는 것도 아니다. 비록 한미동맹을 상수로 둘 수밖에 없더라도 그들의 핵심 이익이 걸린 사안에 있어서 만큼은 그들을 적대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로서도 대북 관계에 있어서는 미국·일본과 긴밀히 공조하되 대만해협 문제나 반도체 제재,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서는 한발 물러나 중국·러시아를 자극하지 않는 방안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사실 이는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이란 명목하에 대한민국이 지난 20여 년간 꾸준히 채택해온 대전략과 일맥상통한다. 문제는 미·중 갈등이 심화하면서 전략적 모호성이 통용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374-5)


경쟁국 간에 대립이 심화하는 상황이라면 전략적 모호성에도 위험이 따른다. 전략적으로 모호한 행보를 보이는 국가는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중 패권 경쟁의 시대에도 전략적 모호성이나 심지어 적극적인 이중헤징전략d­ou­ble hedging st­ra­te­gy을 채택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되는 나라도 있다. 인도나 튀르키예와 같이 양 진영 모두로부터 열렬한 구애를 받고, 어느 쪽으로부터도 불이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나라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다르다. 다른 모든 이유를 제쳐두더라도 북한이 있는 한 미국과 멀어질 수 없고, 마찬가지로 북한이 있는 한 중국·러시아를 적대시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북한과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만 있다면 가장 좋겠으나 그동안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노선을 바꾸지 않았고, 북한은 내부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대한민국을 상대로 도발을 감행할 것이다. 전략적 모호성은 지난 시기 대한민국의 발전과 안보를 도왔지만,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375)


패권 전환기에 대한민국의 대외정책은 크게 두 가지의 상호 대립하는 전략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전략 목표는 미국과 서방에 대한민국이 자유 진영의 일원이라는 신뢰를 확고히 심어주는 것이다. 즉, 대한민국이 권위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또는 북·중·러와 미·일 사이에서 이중헤징전략을 채택하려 한다는 의심이 들만한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 미국이 안보 문제와 경제 문제를 동전의 양면으로 취급하기 시작한 이상 미국에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인식되는 것은 재앙적일 수 있다. 현재 미국은 국가별 신뢰성과 필요성에 기초해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노력은 인도와 같이 중국을 대체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나라와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신뢰할 수 있는 나라를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재구축하는 양상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신뢰를 잃어 미국의 기술과 시스템, 공급망에서 배제되는 상황은 대한민국이 감당할 수 없다. 381-2)


두 번째 전략 목표는 중국과 러시아의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 것이다. 철저하게 현실주의적 세계관에 따라 움직이는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이 존재하는 이상 대한민국이 한미동맹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즉, 한미동맹을 이유로, 또는 미국과의 협력 강화를 위해 필요한 경우 중국이나 러시아와 일정 수준 대립하거나 대치하는 것은 중·러의 입장에서도 예상 범위 내의 행동이다.  한편 북한이란 이름의 레드라인은 중·러를 상대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도 북한이 대한민국에 있어 실존적 위협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이 중·러의 레드라인을 먼저 넘기 어려운 상황이란 점도 알고 있다. 사실 이는 국제사회에서는 상식에 가깝다. 그런 만큼 북한의 위협을 관리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핵심 이익이요, 같은 맥락에서 북한의 위협을 악화시키는 외부 세력의 행위는 대한민국의 레드라인을 넘는 행위라는 점을 국제사회에 체계적이면서도 엄중히 전파해야 한다. 383-4)


본격적인 신냉전이 시작되지 않은 이상 대한민국은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을 발휘할 수 있고, 또 발휘해야 한다. 속 시원한 ‘사이다’ 해답은 없다. 다만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위기를 모면하고 기회를 살리다 보면 시간이 흐르며 상황은 개선될 것이다. 일단 패권 전환기가 끝나면 여러 변수가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더 이상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순간이 오면 미국도 여유와 관대함을 되찾을 것이고, 중국도 21세기 중반까지 동아시아 패권을 차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모험심에 따라 준동하는 대신 장기 전략을 재검토하려 들 것이다. 반대로 이번 패권 경쟁에서 중국이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을 꺾어내면 큰 혼란이 발생하겠지만, 그때는 상황이 외려 단순해진다. 중국의 지역 패권을 인정하고 순응하는 길과 역내 국가들과 연합하여 중국에 직접 대항하는 길 중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84)


규칙 기반 국제질서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서방과 비서방, 자유 진영과 반미연대 등 대부분의 진영 사이에서 중계자 또는 연결자 역할을 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다자주의가 유지되는 국제질서에서라면 대한민국의 ‘연결자’ 위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여러 지역과 진영을 연결하고 중재할 수 있는 역량은 경제와 안보 양면에서 대한민국이 국제협력을 통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즉,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의 전략적 연결성st­ra­te­gi­c con­nec­ti­vi­ty을 배양하여야 한다. 과거에도 대한민국은 여러 진영을 잇는 중계자 또는 연결자 역할을 맡기 위해 노력했으나, 세계화와 자유무역주의로 전 세계가 통합되어 있던 시기에는 대한민국의 연결자적 가치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진영 간 균열이 깊어지는 패권 전환기 이후에는 대한민국의 연결자적 가치가 더욱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여러 진영과 다층적으로 연결되기에 충분할 만큼 개방될 필요가 있다. 386)


합리적으로 고려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대북 유화책이 소진된 이상 앞으로의 대북 정책은 현실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특히 북한의 지상과제가 체제 유지라는 점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냉정하게 인정해야 한다. 북한이 제대로 된 개혁개방에 자발적으로 나설 일은 아마도 없을 거란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북한의 개혁개방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체제가 위태로워지지 않을 수준으로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여건이 허락되면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재개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동포애나 인류애적 차원에서도 인도주의적 지원은 바람직하지만, 북한 정권을 무턱대고 고사나 붕괴 위기로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끝나고 북·중·러 연대가 현실이 된 이상 일각에서 선호하는 북한 봉쇄는 어차피 실현될 수 없다. 그러니 패권 전환기가 끝날 때까지는 한 손에는 억지력을, 다른 한 손에는 소통이란 끈을 쥔 채 상황관리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389-90)


만일 자유무역질서가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훼손되지 않고 쭉 이어졌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세계화 시대에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발판이 되어준 중국에 의해 꺾이게 되었을 수 있다. 중국은 가성비를 앞세워 GVC에서 대한민국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 뒤, 기술 발전을 거듭한 끝에 산업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대한민국을 추월하는 중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미·중 패권 경쟁은 어쩌면 대한민국 산업에 행운이 될 수도 있다. 자유무역질서가 막 훼손되기 시작할 무렵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는 점도 크다. 우수한 제조업 역량에 더해 문화콘텐츠 산업의 약진으로 세계시장에서 대한민국의 국가 이미지가 크게 제고되었고, 대한민국이 생산한 상품들의 브랜드가치도 동반 상승했다. 때마침 4차 산업혁명이 찾아온 것도 큰 기회다. 패권 전환기와 함께 찾아온 기술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더욱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과 서비스를 앞세워 오히려 선두그룹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라는 법도 없다. 392)


그러나 대한민국이 패권 전환기의 높고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내부의 단합이 필요하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현재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하지만 결여된 것은 사회적 갈등을 건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를 되찾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지만, 결국은 자유민주주의로부터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건설적인 토론과 승복, 합리적인 이견 조율, 그리고 도출된 결론이 모두에게 만족스럽지는 못하더라도 대승적인 타협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정치적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을 무턱대고 악마화하지 말고, 포퓰리즘과 분열주의적 정치를 하는 정치인을 강하게 배척하며,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사안별로 합리적인 비판과 지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중용적인 시민의식과 사회문화를 제고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대한민국이 당면한 가장 큰 숙제일 것이다. 393-5)


제9장 맺는말


대한민국의 안보는 동북아시아 정세에 종속되고, 동북아의 정세는 더욱 큰 국제질서와 직결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긴밀한 한미동맹과 대승적인 한일협력을 통해 동북아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안보 환경을 조성하는 한편,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도 소통과 교류의 끈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합리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글로벌 사우스와의 협력을 통해 시장과 인력, 자원을 확보하는 한편 기술우위를 추구하며 선진국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졌던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저문 이상, 통일을 위한 무조건적 노력에 앞서 북한과 평화롭게 공존할 방법을 우선 찾아내야 한다. 또한 장차 글로벌 사우스와 반미연대도 동의할 수 있는 성격의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구축하는 데 일조하면서, 필요시 유럽과 적극 공조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진영 간 연결자 역할을 하기 위해 필요한 개방성을 전략적으로 함양하고 다자주의를 강도 있게 활용해야 한다. 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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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변증법 - 경이로움의 징후들
프랑코 모레티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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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장 공포의 변증법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는 비슷한 삶을 산다. 둘은 상보적이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는 형상이다. 단일한 사회의 무시무시한 두 얼굴, 양 극단이다. 다시 말해 흉측하게 생긴 비참한 사람과 잔혹한 소유자, 즉 노동자와 자본가를 대변하는데, 〈사회 전체가 소유자들과 무소유의 노동자들이라는 두 계급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마르크스에게는 미래에 대한 과학적 예견(이자 미래 사회의 재조직화를 보장해주는 것)인 동시에 19세기 부르주아 문화의 종언에 대한 사전 경고였다. 공포문학은 바로 '분열된 사회의 공포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치유하려는 욕망에서 태어났다.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가 동시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물론 드물게나마 예외가 있긴 하다. 아무튼 그러면 위험이 너무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포문학은 일단 공포를 만들어낸 이상 그것을 제거하고 평화를 회복시켜야 한다. 깨진 균형을 회복하고, 역사를 멈출 수도 있다는 환상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20)


"소유 그 자체는 소비에는 무관심한 채 본성상 만족을 모르며 무제한적이다. 폴리도리의 흡혈귀는 여전히 그저 살아남으려는 가련한 목적을 위해 아가씨의 목을 조르려 유럽 전역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그저 그런 봉건 영주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대가 그의 편이 아니었으며, 그의 보수적인 욕망에도 맞지 않는다.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그와 반대로 지배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즉 런던을 정복하기 위해 금을 투자하는 합리적 기업가다. 그리고 이미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전 세계에, 즉 알프스에서 스코틀랜드까지, 동유럽에서 남극과 북극까지 파멸의 씨앗을 뿌린 바 있다. 그에 비하면 『오트란토 성』의 거대한 유령은 난쟁이처럼 보인다. 그는 단일한 장소에 갇혀 있다. 그리고 또 단 한 번밖에 나타날 수 없다. 그는 단지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일단 질서가 회복되면 영원히 침묵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의 괴물들은 영원히 살지도 모르며, 세계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가한다. 이 때문에 이들을 죽여 없애야 한다."(22)


"프롤레타리아와 마찬가지로 괴물에게도 이름과 개인적 정체성은 거부된다.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일 뿐이다. 그는 전적으로 창조자에게 속한다(마치 〈포드 회사 노동자〉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프롤레타리아와 마찬가지로 그는 '집단적이고 인공적인' 피조물이다. 자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만들어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온갖 것을 만들어내는 발명자─과학자로 '명상적'인 발견자─과학자인 윌튼과 누가 봐도 분명하게 갈등 관계에 있다. 그가 만들어낸 이 괴물 속에서 봉건적 관계가 무너지면서 도적질에 나서거나 가난과 죽음으로 내몰렸던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의 육신이 재통합되고 다시 생명을 얻는다. 오직 현대 과학─이 메타포는 〈어두운 악마의 맷돌들〉[블레이크의 시 『예루살렘』에 나오는 구절]을 가리킨다─만이 이들에게 미래를 제공할 수 있다. 과학이 이들을 다시 꿰매 붙이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주조하고 마침내 생명을 부여한다. '하지만 괴물이 눈을 뜨는 순간' 기겁해 뒷걸음친다."(23)


"공포문학은 주인공이 불안감을 자아내는 요소가 '자신 안'에 있다는, 즉 자신이 두려워하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프로이트가 묘사한 바 있는─의식에 부딪히는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 저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긴 악몽 속을 헤매다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지.〉 억압된 것은 이런 식으로 회귀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돌아올까? 광기로, 또는 단지 오직 '주변적'으로만 돌아오지는 않는다. 이러한 책들이 전달하려는 교훈은 미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자신에 대한 억압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즉 자신의 정신의 분열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 '괴물'을, '물질적인 것'을, '외적인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것이 열쇠다. 흡혈귀에 비하면 광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광기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광기는 자체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광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흡혈귀, 괴물, 미약이다."(52-3)


"사회의 유대를 깨는 사람은 누구나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문학이 축출하려는 진짜 위험이다. 심층적인 의미에서는 오히려 자유를 제한하는 이 문학은 통합된 사회, '유기적' 자본주의에 대한 욕망을 반영하고 촉구한다. 이것은 '변증법적' 관계들의 문학으로, 대립물들은 분리되어 갈등을 일으키는 대신 상대방과 동시에 기능하며 서로 강화시켜준다. 마르크스에게서는 자본과 임금노동 관계가 그러하다. 프로이트에게서는 초자아와 무의식의 관계가 그러하다. 스탕달에게서는 연인과 그가 '사랑'이라 부르는 '질병' 간의 유대가 그러하다. 프랑켄슈타인을 괴물과, 루시를 드라큘라와 묶는 관계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독자와 공포문학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작품이 무서울수록 그만큼 교화적이다. 굴욕을 강요할수록 그만큼 고상함을 가장한다. 더 많이 은폐할수록 그대로 드러낸다는 환상을 더 많이 불러일으킨다. '필요한' 것은 공포이다."(62)


2장 대일식 ― 주권의 세속화로서의 비극 형식


"우리에게 연극이라는 개념은 직접적으로 미학적 활동을 가리키지만 엘리자베스조 사람들에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적 관계들의 체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세상은 연극이며 우리는 단지 거기서 주어진 역할을 할 뿐이라는 이념은 봉건적인 '신분 사회'의 맥락에서만 진정 완벽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개인은 오직 사회적 '역할' 속의 '배우[행위자]'인 한에서만 '실존했다.' 사회는 오직 무대로서만, 그리고 삶은 오직 연기로서만 생각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 엄격하게 말해 실제적인 무대를 생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실제로 봉건 사회는 오직 종교적 형태의 연극[종교극]밖에 몰랐다. 영원히 규정된 역할을 계속 반복해서 연기하는 것 말이다. 무대의 재탄생은 오직 이 신분 사회를 구성하는 역할들이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정치적 유대의 견고함이 14세기의 장기 위기의 과정 속에서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일어날 수 있었다. 절대주의는 이 과정을 멈추려는 시도에서 유래했다."(87-8)


"셰익스피어의 장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자유와 사적 이익의 공간이 활짝 열리고 '인격'과 '기능' 사이의 격차가 생겨나자 무대로서의 세상이라는 이상이 얼마나 취약해졌는가를 냉정하게 조명해주는 데 있다. 인간 사회에 새로운 견고한 토대를 마련해주려면 '이익'이라는 이상을 위해 '충실[충성]'이라는 이상을 포기하고 사회적 유대를 봉건적 '맹세'로부터 자연법 철학의 '계약'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과 가치의 관계를 전도시킨 문화적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그리고 문학사에서 비극이 소설로 대체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보다 훨씬 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그러한 것을 읽어내 보려고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아마 그는 부르주아 문명의 여명을 선언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예시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와 반대로 그는 자신이 알던 유일한 규칙인 낡은 규칙을 준수한다면 세상은 그저 산산조각날 수밖에 없음을 가차 없이 입증했을 뿐이다."(106-7)


3장 호모 팔피탄스 ― 발자크의 소설들과 도시적 퍼스낼러티


"도시는 궁극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모든 구성요소의 가치와 의미가 물건들, 즉 다양하게 묘사되고 분류될 수 있는 존재들 형태로 결정화되는 공간적 실체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을, 시골 또는 인간이 거주하는 그 밖의 다른 어떤 형태에 대해서도 사실이다. 하지만 도시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것은 소설의 기법 속으로 도입될 것이다─은 도시의 공간적 구조(기본적으로는 집중)가 '이동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기능하는 데 있다. 너무나 당연히 공간적 이동성이지만 주로 '사회적' 이동성을 말한다. 성공과 몰락의 눈부신 속도는 발자크부터 모파상에 이르는 19세기 소설의 위대한 주제이다. 이것과 함께 도시는 현대 문학 속으로 들어와 말하자면 의무적인 맥락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히 물리적 장소로서의─따라서 묘사와 분류들의 지탱물로서의─도시가 한창 발전 중인 사회적 관계망으로서의, 따라서 서사적 시간성의 지탱물로서의 도시의 단순한 배경이 되기 때문에만 가능하다."(135)


"현대의 도시적 환경은 최초로 기형적인 것에 의존할 필요 없이 흥분되는 플롯을 창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거대한 자유방임적 도시의 기본 규칙은 '분류법의 부단한 변동'을 가속화시킨다는 기이한 특징을 갖고 있다." "분류법이 부단히 변동한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결과를 함축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예외적이고 혐오스럽다는 이중적 의미에서) 괴물 같은 것을 규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누가 가장 근접할까? 보트랭 또는 뉘싱겐? 아니면 라시티냑 또는 고리오?(그 밖에도 '괴물 같다'라는 개념은 이미 낭만주의 문화에 의해 의문시된 바 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전자보다 훨씬 더 큰 파급력을 미친 결과가 나오게 되는데,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더 이상 상징적 체계(괴물은 더 이상 준수되지 않는 분류법을 가리킨다. 모든 상징적 '법칙'이 산산조각난다), 따라서 재현된 삶의 '예외상태'가 아니게 된다. 예견 불가능성이 '일상적 삶'의 '일상적 관리' 속에 숨어들게 된 것이 그것을 대신한다."(140-1)


"발자크가 이례적으로 고안해낸 것은 젊은이의 삶은 무인도에 배가 좌초하지 않아도, 악마와의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아도, 살인을 위한 실물 크기의 인형을 만들지 않아도 흥미진진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연극평을 쓰고, 머리가 텅 빈 여배우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철석같은 의지를 결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도무지 믿음이라고는 가지 않는 친구들에 의해 행해지는 몇 푼의 아주 속물적인 투기, 약속어음에 대한 금융규제, 그리고 궁정이 나머지는 어떻게 처리해줄 것이다. 실제로 발자크와 함께 '세계의 산문'은 지루한 것이기를 그쳤다. 발자크의 플롯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연사체적─시간적─특징들을 부여한 것은 이제 막 시작된 자본주의의 바로 산문적인 사회적 관계들이었다. 주인공과 독자를 자극하기 위해 더 이상 여행에 나설 필요가 없게 되었다. 도시에 머무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여기서는 실제로 일상적 삶이 모험으로 변할 수 있었다─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반드시 그러해야 했다."(141)


4장 단서들


5장 유치원


6장 긴 작별인사 ―『율리시즈』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종말


"〈[『율리시즈』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랑을 나누고, 다투는 것을 본다. 사람들이 돈을 쫓는다. ······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생산적 활동은, 그것 없이는 이 모든 것이 불가능했을 활동의 표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이 소설에서는 노동자가 한 명도 없다. 그가 묘사하기로 선택하는 사회적 관계는 소비 관계이다.〉 위의 지적은 정확한 동시에 조야하다. 정확한 것은 바로 그것이 『율리시즈』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조야한 것은 조이스가 현실의 이러한 측면을 확대해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가 이 그림의 나머지는 모르거나 경멸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인 문화적 선택 때문에 그러하다." "조이스는 자신이 그처럼 기생적인 몰락에 너무나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영국의 지배계급에 어떤 종류의 '해법'이 아니라 단지 이 사회와 이 사회의 세계에 대한 흉측한 캐리커처를 제공할 뿐이다."(252-3)


"『율리시즈』에서 구현된 선택, 즉 소설의 시간을 하루 속으로 꽉꽉 눌러 넣는 것은 진정 급진적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 조이스는 우리에게 모든 날들이 동일하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루카치에게는 실망스럽게도─(장르로서의 소설의 기본적인 구조적 특징 중의 하나인) 역사적·문학적 '전망', 그리고 그와 함께 역사적 '진보'라는 이념을 완전히 파괴한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은 오직 영국의 위기의 특수성에 너무 몰두해 있어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조직화의 눈에 띄는 현상을 망각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우리의 당면 문제─소설 속의 '시간'─와 관련해 카프카를 조이스와 정반대 극에 놓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거의 전적으로 통시적 축을 따라 전개되며, 고립된 개인과 비인격적인 권력 장치 사이의 회복 불가능한 갈등을 핵심으로 하는데, 이것은 이미 20세기 자본주의 세계에 속한다. 카프카의 통시적인 플롯들의 결과 또한 모든 위안적 '전망'을 철저하게 파괴한다."(259) 


"추론을 좋아하는 자칭 '철학자'들에 대한 패러디인 블룸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상투어를 찾아낼 수 있다. 민족이라는 개념에서부터 남녀 간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아량에 대한 호소부터 사회적 프로그램들에 이르기까지 그는─자유주의의 정통 논리의 문자에 충실함으로써─자신이 영원히 접촉을 잃어버린 세계를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미 델라 볼페가 쓰듯이 『율리시즈』는 〈······ 우리의 인본주의적인 휴머니즘적 문명에 대한 정당화가 이제는 '생명을 잃은 상투어들'의 용어로 축소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문명의 요약이자 그에 대한 평가이다.〉 그리하여 조이스의 무자비한 풍자는 블룸을 겨냥하는데, 그를 통해 더 높은 것을 겨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이스의 아이러니는 독특한 갖는데, 그것은 동시대인인 토마스 만이 이해하고, 판단하고, 설파하려면 치러야 할 대가로 지적한 '초연함'은 전혀 갖지 않으며 반대로 해결 불가능한 모순의 체계 내부에서 유래한다."(273-4)


7장 『황무지』로부터 인공낙원으로


"『황무지』는 종종 〈모든 것을 포함한 작품〉으로 규정되어 왔다. 거의 모든 종류의 이질적 소재를 포함하고, 더 이상 '문체들'이나 수준을 구분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작품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조야한 변호론처럼 보인다. 『황무지』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달하는 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요소가 다소 '통상적인' 의미─이에 기초해서는 단지 그러한 요소들이 이질적이고, 상호관계를 결여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뿐이다─이외에도 이 시의 깊은 의미론적 구조─여기서는 반대로 완전히 '동질적이며 상호 연결되어' 있다─에서 유래하는 은유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황무지』에는 상이한 코드들에서 취한 요소들을 '동화시키는 것'을 허용해주는 코드가 존재한다. 이 시의 표면에 드러나는 '모든 것을 포함함'은 이처럼 심층에 자리 잡은 형식적 기법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본질적으로 '신화적 체계'로 기능한다."(300-1)


"신화적 체계의 사용은 엘리엇으로 하여금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분열을 치유하는 것을 겨냥한 시적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대신해 이 두 가지 것이 구분 불가능한 커뮤니케이션 및 지각 형태를 수립하는 것을 허용해준다. 그것은 또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준다. 즉 어떻게 세계의 이미지를 '의미의' 완전한 '내재성'이 주어지는 '구체적 총체성'으로 복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개인이 더 이상 경험적으로 주어진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자기 자신의 '이상들' 사이의 불일치─실제로는 기원에서부터ab origine 서로 관련된─를 지각하지 못하는 총체성 말이다." "한발 뒤로 돌아감으로써 신화는 문화가 더 이상 역사적 존재의 상징적 '중립성'─따라서 잠재적 무질서─과 관련해 단순한 상부구조가 아닐 수 있도록 보장해준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샅샅이 침투시켜 '의의'를 부여하며, 따라서 그러한 존재의 모든 표출을 인간화하는 가치 체계로 자신을 드러낸다."(302-3)


"하지만 신화가 원래의 순수성을 모두 간직한 채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20세기에 그것이 '재림'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터무니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화적 사고의 매력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 기획에 착수했을 때 엘리엇의 과제는 오직 신화적 구조의 요구들과 그것을 구성하는 '소재들' 사이의 모종의 타협으로만 나타날 수 있었다. 『황무지』의 아이러니─있을까 말까한 정도이다─는 정확히 신화적 기획의 순수성은 결코 완전히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는 데 있다. 『황무지』에서 사태는 오직 어느 정도까지만 부합한다. 모든 연결 관계가 미심쩍으며, 모든 상동성은 유사성으로 변형된다. 보들레르나 단테로부터의 저 특수한 인용구의 기능은 쉽게 '다른', 유사한 구에 의해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술집 여성과 타이피스트는 다른 많은 캐릭터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포에니 전쟁이나 엘리자베스조의 런던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변형될 수 있는 역사적 '사례들'이다."(316-7)


8장 미결정의 마력


"소수의 모더니즘적 상상력으로부터 시작해보자. 해부대 위에서 우연히 만난 우산과 재봉틀, 다다, 초현실주의, 파운드, 엘리엇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몇몇 사람들은 이 기본 유형에 대해 무수한 변주를 거듭해왔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정말 그렇게 전복적 이미지일까?"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의 삶」이라는 에세이에서, 도시 거주자의 주요한 심리적 문제는 〈급속도로 이미지들이 교체되면서 밀려오거나,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포착되는 내용의 변화가 급격하거나 밀려드는 인상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경우에 더 큰 부담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짐멜의 대도시인 이 전형적인 '모더니즘'적 텍스트에서 자극들은 위험할 수 있다. 그 충격으로부터 몸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단지 그것을 보지 않는 식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대 사회가 제공하고 제시해야 하는 것 중 최고의 것이기 때문이다. 소유해야 하는 물건들이고, 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들이고, 한번 겪어보고 싶은 매혹적인 상황이다."(336-8)


"그렇다면 보는 동시에 보지 말아야 하며, 받아들이는 동시에 거부해야 한다. 모순적인 곤경이다. 그리고 부르주아적 대도시에서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끼려면 외적 자극과 주체적 지각이 다소 특이한 속성들을 소유해야 한다. 먼저 자극의 경우 그것은 '의미를 갖기'보다는 '환기적'이어야 한다. 가능하면 최대한 확정적이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누구나 거기서 '뭔가를 찾을' 수 있도록 다수의 연상에 열려 있어야 한다─더 좋게는 그러한 다수성을 생산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의 저 핵심어, 즉 모호성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다른 한편 주체 쪽에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연상의 은하계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확정된 선택─광고에서의 특수한 대상의 선택이든 아니면 시의 독법에서의 의미론적 선택이든─을 행해 나가는 출발점이 아니라 '가능성들의 장'─이 장의 매력은 정확히 '현실(성)'으로의 환원 불가능성이 점점 더 증가하는 데 있다─으로서."(338)


9장 진리의 순간


"비극에서 진리와 위기가 상호 의존하는 것은 혁명적 정치의 고전적 수사학을 예견해준다. 소렐의 『폭력론』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를 청년 루카치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루카치에게서 경제적 위기는 정확히 자본주의의 진리의 순간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총체성이라는 핵심적 개념을 〈실천이라는 영역 자체에서 파악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변형시킨다. 그것은 일상생활을 탈물상화시키는 계기로 작동하며, 〈불가피한 운명을 향한〉 자본주의의 〈오이디푸스적인 진전〉을 가동시킨다. 슈미트의 『정치 신학』은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그것 말고는 완전히 상이한 이론적 틀 내에서 '위기'라는 개념에 인식론적 우월성을 부여한다." "이후, 슈미트는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정치와 비극의 연관성의 개념적 전거가 되었고, 이 비[애]극이라는 간판 아래 두 문화의 공모는 계속되었다. 니체와 하이데거가 좌파 지식인들의 문화적 지평을 지배하고 있는 정도를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360-2)


"그렇다면 좌파와 우파는 동일한 문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한다는 말인가? (소렐은 극좌파의 원형이자 반동이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나는 좌파가 '비극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한 좌파를 우파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진리의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전도되는 가운데 정치적 신화(학)들 중 (아마 가장) 모호한 것임이 드러난다.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좌파와 우파의 큰 차이는 무엇보다 시간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무게와 기억들, 현재의 끝없는 갈등, 그리고 미래의 기획과 희망들의 산물 말이다. 하지만 문화가 위기의 순간이라는 미신적 독특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 (루카치를 기억하라. 〈이러한 순간은 하나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것에 뒤이어,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생겨나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성은 수축되고 폐지될 것이다. 과거, 미래, 현재가 모두 사라질 것이며, 그것들과 함께 모든 중요한 정치적 규정들도 사라질 것이다."(362-3)


"그렇다면 이것은 좌파는 위기─공공연한 폭력, 혁명, 전쟁─의 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평으로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까? 그것은 요점이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혁명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거나 가치를 낳는 메커니즘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특정한 상황에서 주어진 일군의 가치들의 가능한 '결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위기의 순간을 진리의 '유일한' 순간으로서도 또 '유일한' 진리의 순간으로서도 간주하지 않는 좌파의 문화이다." "'위기'에 기반한 신념은 우리 시대의 정치 현상 중 가장 모호한 현상, 즉 좌익 테러리즘에 의해 논리적·실천적 결론에 이르고 있다. 좌파가 자신으로부터 제거해야 할 것은 멜로드라마와 공허함 사이의 바로 이처럼 불건전한 공모이다." "따라서 '결과'를 형이상학적으로 무시하거나 '예외'를 바로크적으로 즐겨서는 안 된다. '파국'을 진리의 원천으로 비극적으로 갈망해서는 안 된다."(363-4)


10장 문학적 진화에 대해


"라마르크에게서 진화는 일원론적인, 분리되지 않은 발달로, 적응이라는 단 하나의 원리가 선택과 변이를 주관한다. 그와 반대로 다윈에게서 그것은 이원론적 과정으로,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변이와 필연성에 의해 통제되는 선택 사이에서 회복할 길 없이 분열되어 있다. 인간의 역사를 라마르크적으로 파악하면, 그것은 분리되지 않은 발전으로, 여기서 문제들은 오직 해결책들이 주어졌을 때만 나타나며, 해결책들 또한 항상 명확하고 오인의 여지가 없는 형태로 주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는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바람직하지도 않은) 헤겔적 꿈처럼 보인다. 내가 그것을 다윈적 이원론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유물론을 위해서이다. 문학사를 두 개의 반쪽으로, 두 개의 분리된 단계로 나누는 이론으로 말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우연만이 작동하는데, 거기서는 수사학적 변이들이 생성된다. 그리고 사회적 필연성이 두 번째 단계를 주관하는데, 거기서는 변이들이 역사적으로 선택된다."(366-7)


"유럽적 규모에서 보면 18세기에 임의로 증식하던 소설 양식들은 (19세기 들어) '교양소설'이라는 (말하자면) 새로운 종의 국제적 성공에 의해 돌연 끝나게 된다. 그 이유는 새로운, 외부적 압력 때문이었다. 세기말에 일어난 소위 이중 혁명이 그것이다. 거의 100년 동안 유럽 사회는 쾌적하고, 거의 무제한의 서식지였다. 코젤렉의 『비평과 위기』에 따르면 사적 삶의 영역은 규정상 모든 종류의 재현에 열려 있었다. 하지만 20세기로의 전환기에 가능성들의 지평이 좁혀졌다. 산업과 정치의 격동이 유럽 문화에 동시에 작용해, 개인적 기대들의 영역을 다시 그리고 '역사 감각'과 모더니티의 가치에 대한 태도를 새로 규정할 것을 강요했다. 온갖 다양한 이유에서 교양소설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최적의 상징적 형식이었다. 그리고 교양소설은 실제로 살아남은 반면 교육소설과 성장소설, 예술가소설, 알레고리 소설, 서정 소설, 서한체 소설, 풍자 소설은 모두 문학적 삶을 위한 진짜 투쟁에서 사라졌다."(370-1)


"미시 진화적 사건에 초점을 맞춰보면, 모더니즘적 완벽성─극단적인 기법적 완벽성과 극단적인 의미론적 모호성을 한데 뒤섞은─은 실로 수수께끼 같으며, 그것의 존재는 진화론의 최대 난제였을 수도 있었을 것을 상기시킨다. 즉 다윈의 말을 빌리자면 〈완성도가 매우 높은 복잡한 기관〉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름 아니라 너무 완벽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자연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와 상충되는 기관을 말이다." "몇 년 전에 굴드와 브르바는 그러한 기관들을 '굴절 적응'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따라서 나는 두 사람의 용어를 빌려 모더니즘 시의 높은 형상성은 정확히 굴절 적응, 아마 모든 문학사 중 가장 매력적이고 성공적인 '목적의 변경'이라고 말할 것이다. 즉 낯설게 하기, 모순어법, 미결정 등의 효과를 특징으로 하는 높은 형상성은 실제로 모더니즘 시의 위대한 조직적 원리이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 이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그것의 발생에서 의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385-6)


# 굴절적응(屈折適應, exaptation). 진화과정에서 신체기관이 본래의 기능과 다르게 쓰이는 현상을 의미한다.


11장 영혼과 하피 ― 문학적 역사학의 목표와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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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분쟁 지역을 읽으면 세계가 보인다 - 국제정치 전문가 김준형의 세계 10대 분쟁 이야기
김준형 지음 / 날(도서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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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까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이전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일례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면, 수도 모스크바와 50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나토 회원국이 있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 여부는 자신들이 선택할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자기 나라 일부로 여깁니다. 그래서 전쟁이라고도 하지 않고 ‘특수 군사 작전’을 펼친 거라고 주장합니다. 형제 또는 러시아 일부로 여기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번 침공도 ‘버릇없는 동생’을 벌주려는 것이지 타국을 침공한 전쟁이 아니라고 합니다. 러시아는 미국에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금지하고 새로운 나토 회원국에 배치한 군대와 핵무기를 철수하라고 요구합니다. 또한 2014년에 체결한 민스크협정을 준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러시아의 요구를 전면 거부했고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도 나토 가입 의사를 철회하지 않아서 결국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14)


민스크협정은 벨라루스 수도인 민스크에서 돈바스Donbass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크라이나, 러시아, 러시아 분리주의 집단 간에 맺은 국제 협정이에요. 돈바스 전쟁이 일어난 배경은 이렇습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인 돈바스에서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죠. 우크라이나에서 분리하고 싶다는 겁니다. 돈바스 지역엔 러시아인이 많이 사는데 정부 정책에서 자신들이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꼈던 거예요.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이들을 진압하죠. 한동안 두 세력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민스크협정은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약속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돈바스의 자치권을 인정하기로 합니다. 이것이 협정 내용 중 핵심이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결국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면전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애초에 민스크협정을 충실히 이행했다면 전쟁까진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지적입니다. 미국은 이보다 더 큰 비판을 받고 있죠. 전쟁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으니까요. 15)


2장.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올까 :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 체제도 무너집니다.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죠.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그 결과물이 1993년에 맺은 ‘오슬로 협정’인데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주권 국가로 독립해 ‘국가 대 국가’로 공존하자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이른바 2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죠. 협상 장소가 노르웨이 오슬로여서 오슬로 협정으로 부르게 되었죠. 14차례 비밀 협상이 있었다고 하네요. 이스라엘은 건국을 했고 4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영토도 더 확장했기 때문에 오슬로 협정은 사실 이스라엘에게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하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치 정부를 세울 수 있게 허용하고 가자 지구 등 점령지도 돌려주라는 것이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더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투쟁을 하지 말고요. 2국가 해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를 돌려줘야 합니다. 25)


오슬로 협정으로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마침내 수립되었고,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 일부 지역에서 철수합니다. 아라파트 의장이 자치 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죠.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을 모두 축출하려는 강경파인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가 1996년에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죠. 팔레스타인도 2006년 총선에서 강경파 하마스가 압승합니다. 하마스 역시 근본적으로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을 모두 축출하고 싶어 합니다. 강 대 강이 맞서니, 합의는 힘을 잃고 분쟁만 살아남았습니다. 2국가 해법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측이 원하는 국경선과는 일치하지 않아 국경선 설정이 가장 큰 문제로 남았습니다. 팔레스타인은 1947년 유엔의 분할안대로 국경선이 정해지길 바라지만, 이스라엘은 더 많이 갖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국경선이 바뀔 때마다 그 안쪽에 유대인 정착촌을 계속 늘리는 속칭 알박기를 하고 있습니다. 26-7)


이스라엘 사회가 우경화된 가장 큰 원인은 인구 구성의 변화에 있다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건국 초에는 유럽 중동부 출신의 유대인 즉 아슈케나지Ashkenazi가 많았습니다. 아슈케나즈는 히브리어로 독일을 뜻하니, 아슈케나즈 유대인은 ‘독일 유대인’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금융, 무역업에 주로 종사했습니다. 건국 이후에는 이베리아반도 출신의 유대인 즉, 세파르디Sephardi가 대거 들어왔습니다. 세파르디는 히브리어로 스페인을 뜻하는 ‘세파라드’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세파르디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등 이베리아반도 지역에 주로 거주하던 유대인 집단을 말하죠.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하류층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삶의 기반이 팔레스타인 거주지와 겹쳤죠. 사회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이들은 진보 세력의 점령지 반환 정책에 반대합니다. 여기에 1991년 소련 붕괴 후 러시아계 유대인 70만 명까지 유입되면서 극우 세력이 더 강해졌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네타냐후의 장기 집권이죠. 29-30)


3장. 미국은 왜 아프가니스탄에 무관심해졌을까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치른 최초의 서구 열강은 영국입니다. 3차례나 전쟁을 벌였지만,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끝내 지배하지 못합니다. 2차 대전 이후 아프가니스탄 왕국(1926~1973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존재했던 왕국)은 중립을 표방합니다. 서구 근대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부동항을 포기하지 못한 소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조용히 실리를 추구해 나간 거죠. 아프가니스탄은 한동안 평화롭게 근대화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나갔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덜 방법으로 소련과 군사적으로 깊게 교류한 것이 문제가 되고 맙니다. 소련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아프가니스탄 군인들이 소련식 공산주의를 추구하며 세력을 형성한 것이죠. 이들의 반대편에는 부족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슬람이란 종교를 중심으로 뭉쳤고 서구화는 물론이고 소련식 공산주의에도 반발했습니다. 그 결과 소련의 영향을 받은 정부와 이에 반발하는 반정부 세력이 대립하게 됩니다. 33)


1978년 좌파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뒤를 이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죠. 부족들은 반발했고, 급기야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이른바 무자헤딘(Mujahideen, 성전에서 싸우는 전사)이라는 반정부군이 조직됩니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서막이었죠. 소련은 정권이 무너질 것을 우려해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에 쳐들어갑니다.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1979년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납니다. 소련은 긴장합니다. 소련의 남부 지역인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이슬람권 공화국들에서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날까 봐 겁을 먹은 거죠. 곧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무려 10년이나 이어집니다. 막대한 군사비에 소련 경제가 휘청입니다. 소련 붕괴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죠. 결국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곰의 덫The Bear Trap이라며 철수합니다. 그리고 1992년 4월, 탈레반 정부가 들어서죠. 33-4)


2001년 10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합니다. 알카에다를 보호한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죠. 두 달 만에 성공합니다. 탈레반이 쫓겨난 자리에 친미 정부를 세웁니다. 처음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할 때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국을 공격한 이들을 처단한다는 것에 세계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지속되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미국은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 내죠. 바로 북한을 필두로 몇몇 나라를 ‘악의 축’이라며 새로운 적으로 삼은 겁니다. 알카에다 같은 테러 조직과 악의 축 국가들은 세계 질서를 위협하니 세계 평화를 위해 앞으로도 이들에게 맞서겠다고 선포한 겁니다. 그런데 탈레반이 집요하게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계획이 틀어집니다. 결국 미국은 2021년 8월 도망치듯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합니다. 그러자 친미 정부의 대통령(아슈라프 가니)도 곧 탈레반에 항복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달아납니다. 20년 만에 탈레반은 정권을 되찾죠. 35)


4장. 대만은 왜 국기가 없을까 : 중국 —대만의 갈등


중국은 대만을 전쟁에 패한 장제스가 세운 괴뢰정부로, 대만은 중국을 쿠데타를 일으킨 공산당 세력으로 봅니다. 상대를 무력 통일의 대상으로 여기죠. 우려는 현실이 됩니다. 1954년 대만 해협의 진먼섬에서 중국과 대만이 무력 충돌을 했기 때문이죠. 진먼섬은 대만보다 중국에 더 가깝지만, 대만이 점령한 곳이었어요. 대만으로서는 최전선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더 밀려나지 않기 위해 이곳에 군대를 많이 파견했습니다. 이를 중국은 좌시하지 않았고요. 1955년 미국이 개입해 휴전 상태로 접어듭니다. 미국이 핵무기를 쓸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중국이 물러선 거죠. 이 사건으로 미국과 대만은 방위 조약을 맺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58년 중국은 미국과 서유럽이 중동에 시선을 돌린 틈을 타 다시 진먼섬을 공격합니다. 무려 50만 발의 포탄을 44일간 쏟아붓죠. 그 바람에 대만 해협 바닷길이 봉쇄되기까지 합니다. 극한의 대치 상황은 미국과 중국이 기습적으로 수교를 맺은 1979년에야 끝이 납니다. 42)


1970년대부터 데탕트 시대로 접어들죠. 대만은 이런 분위기가 영 마뜩잖습니다. 중국을 탈환할 날도 멀어 보이는데 자기편인 줄 알았던 미국까지 중국과 가까워졌으니 불쾌했습니다. 곧이어 이 감정은 깊은 배신감으로 변합니다. 1971년 미국이 유엔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로 선언했기 때문이죠. 물론 미국은 중국이 대표 국가가 되는 대신 대만은 일반 회원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완강히 반대했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대만은 화가 나서 유엔에서 탈퇴해 버립니다. 미국은 1972년 중국이 주장해 온 ‘하나의 중국’ 원칙에도 동의합니다. 하나의 중국이란 중국과 홍콩, 마카오, 대만은 나뉠 수 없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대만이 격하게 항의하자 미국은 결국 1978년 12월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합니다. 미국의 보복으로 인해 대만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에서 줄줄이 쫓겨나고 국제무대에서도 지워집니다. 43-4)


2025년 3월 현재까지 대만은 친미 성향인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이 집권하고 있습니다. 중국으로선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입니다. 차이잉원 전 총통은 2021년 10월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군이 대만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파장을 일으켰죠. 비공식적이었던 내용을 당국자가 처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즉각 반발했습니다. 대만은 중국의 영토니,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대만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제20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연설에서 중국은 평화통일을 지향하되 무력 사용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무력 행사 대상은 중국 통일에 간섭하는 ‘외부 세력’과 ‘일부 독립 세력’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한마디로 미국에 내정 간섭을 그만두라고 경고한 거죠. 하지만 미국은 시진핑이 계속 권력을 놓지 않을 것이고, 그 경우 대만은 무력 통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중국을 계속 자극하고 있습니다. 47-8)


5장. 중국군과 인도군은 왜 몸싸움을 벌였을까 : 중국—인도 분쟁


중국과 인도가 국경선을 놓고 본격적으로 갈등하기 시작한 건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해 점령하면서입니다. 유엔이 한국전쟁에 집중하는 틈을 타 마오쩌둥은 티베트를 기습해 손쉽게 점령해 버립니다. 건국 1년 만에 중국은 왜 서둘러 이런 전쟁을 벌였을까요? 윈난성·쓰촨성과 접한 티베트 지역이 혹시라도 인도 쪽으로 돌아서면 북서부의 신장·위구르 자치구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죠. 티베트는 중국 영토의 8분의 1에 해당할 만큼 영토가 넓을 뿐 아니라 청나라 때 조공을 바치던 나라니 자국 땅이란 생각이 기본적으로 있었죠. 티베트가 중국에 점령당하자 티베트 불교 수장인 달라이 라마와 추종자들은 1959년 인도로 망명합니다. 인도가 망명 정부를 받아들이자 중국은 분노합니다. 인도가 미국이나 영국 등 서유럽과 연대해 자신들을 압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티베트 망명 정부를 허락한 이후로 둘 사이가 급속히 나빠집니다. 그리고 1959년 가을부터 국경선을 놓고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죠. 55-6)


1962년에 두 나라는 크게 부딪칩니다. 중국이 맥마흔 라인McMahon Line에 근거해 인도 북서부 라다크 지역(악사이 친)과 북동부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지역을 자기네 땅으로 편입하려고 했거든요. 티베트는 오랫동안 청나라 지배를 받다 1914년에 독립합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후였죠. 독립 당시 인도를 실제로 지배했던 영국과 중화민국, 티베트가 그은 국경선이 맥마흔 라인입니다. 1962년 전쟁 이후에도 두 나라의 국경 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다만 대표적인 두 분쟁 지역을 하나씩 나누어 가짐으로써 참고 있는 중이죠. 인도는 아루나찰 프라데시를 갖고, 중국은 악사이 친을 갖는 식이었죠. 1996년에서야 두 나라는 가까스로 협정을 맺고 두 지역에 실질 통제선LAC, Line of Actual Control이라는 완충 지대를 설정했습니다. 실질 통제선은 국제법에 따르면, 확정된 국경선은 아닙니다. 양측이 군대를 배치하고 있으니 순찰 중 언제든지 무력 충돌로 확장될 위험이 있죠. 56-7)


중국은 1960년대만 해도 점령한 악사이 친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이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지금은 이 지역에 애면글면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대규모로 투자한 결과 이제는 신장·위구르를 활용해 파키스탄이나 중동과 교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죠. 객관적으로 보면 인도가 약간 불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 역시 조급하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심지어 인도 정부는 중국과의 갈등을 국내 정치에 활용합니다. 외부의 적, 그중에서도 중국처럼 큰 적이 존재하면 내부를 결집할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죠. 물론 중국도 인도와의 국경 분쟁을 국내 정치에 잘 활용합니다. 특히 민족주의가 통치 전략인 시진핑에게 국경 분쟁만큼 애국심을 고취하기 좋은 소재는 없으니까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양보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지지율만 떨어지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방법엔 관심이 없는 겁니다. 59-60)


6장. 이웃과 왜 싸우게 되었을까 : 인도 —파키스탄 카슈미르 분쟁


카슈미르 지역은 카슈미르 계곡을 중심으로 히말라야산맥과 피르 판잘Pir Panjal 산맥 사이에 위치한 고산 지대입니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지상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히말라야산맥을 비롯해서 관광 자원이 아주 많은 곳이죠. 무굴제국 때부터 유명한 관광지였습니다. 수자원이 풍부하고 땅도 비옥해 벼농사뿐 아니라 농작물 재배도 잘되는 데다 루비 등의 지하자원도 풍부하죠. 직조업도 발달해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캐시미어의 본고장이기도 합니다. 16~19세기 중반까지는 인도 최초의 통일 국가인 무굴제국의 땅이었죠. 무굴제국이 영국 식민지가 되면서 인도제국이 되었고요. 이후 인도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을 놓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무슬림)가 극심하게 갈등합니다. 그 결과 힌두교는 인도, 이슬람교는 파키스탄이란 국가로 나뉩니다. 카슈미르 지역도 인도 땅과 파키스탄 땅으로 나뉘고요. 훗날 인도령 일부인 악사이 친을 중국이 차지하면서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령, 파키스탄령, 중국령 3곳으로 나뉩니다. 64)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는 동안 의도적으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차이를 부각해 두 종교인들 간에 적대감을 품게 했고 이런 감정은 독립한 이후에도 사람들을 지배했죠.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의 가장 큰 원인은 이런 감정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영국은 분할 통치를 통해 이슬람 세력을 약화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힌두교 사람들을 지배층으로 편입시켰죠. 영국은 힌두교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슬람 세력도 동시에 지원합니다. 2차 대전 직후 영국은 인도를 떠나기로 했고 인도는 임시정부 수립을 놓고 갈등합니다. 간디는 “분단은 곧 인도를 생체로 해부하는 것”이라며 통일된 인도를 간절히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힌두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대표가 만나 담판을 벌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던 거죠. 이를 지켜보던 영국은 제 마음대로 1947년 8월 14~15일 이틀에 걸쳐 인도를 파키스탄과 인도,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 3국으로 분할해 버립니다. 65)


특히 벵골주와 펀자브주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습니다. 벵골주 서쪽과 펀자브주 동쪽은 인도, 그 반대편은 파키스탄이 되었으니까요. 이 중 펀자브주 국경 분쟁은 인접한 카슈미르 지역으로 확산됩니다. 영국에서 독립할 당시 카슈미르 지역의 대부분 주민은 이슬람교도였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자신들 땅이 무슬림이 많은 파키스탄에 속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카슈미르의 지배층은 힌두교도였습니다. 이들은 전체 인구의 20퍼센트에 불과했지만, 대다수 주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인도에 편입해 버립니다. 파키스탄은 반발했고, 이 문제로 1948년 인도와 전쟁을 벌입니다. 1949년 유엔의 중재로 전쟁이 중단되었고,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령(잠무 카슈미르Jammu and Kashmir와 라다크Ladakh 지역)과 파키스탄령(아자드 카슈미르Azad Kashmir와 길기트‒발티스탄Gilgit-Baltistan 지역)으로 나뉩니다. 여기에 중국이 끼어들면서 문제가 더 커지죠. 인도령을 침공해 악사이 친 지역을 점령해 버렸거든요. 66-7)


서벵골은 인도, 동벵골은 파키스탄 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동벵골 지방의 무슬림들이 동파키스탄을 세우긴 했지만, 정치적 실권은 모두 서파키스탄(오늘날의 파키스탄)이 장악했습니다. 1970년 태풍 피해로 동파키스탄 국토의 대부분이 수몰되고 50만여 명이 사망하자 동파키스탄인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이것은 동파키스탄의 독립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정부군이 이들을 탄압하자 많은 동파키스탄인이 인도로 넘어갑니다. 당시 인도는 이 난민들을 받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돕죠. 동파키스탄 정부와 인도 사이에 전쟁이 터집니다. 인도가 승리해 동파키스탄은 인도가 바라던 대로 1971년 2월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로 독립합니다. 1980년대 들어와서도 카슈미르 지역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은 계속 충돌합니다. 1999년에는 카르길Kargil 분쟁도 일어나죠. 두 나라는 2004년부터 평화의 길을 모색합니다. 잦은 전쟁과 무력 대치로 인해 서로 경제적인 타격만 입기 때문이죠. 67-8)


7장. 왜 쿠르드족은 국가를 세울 수 없었을까 : 튀르키예—쿠르드 분쟁


쿠르드족은 ‘국가 없는 최대 단일 민족’, ‘중동의 집시’로 불립니다. 튀르키예·이란·이라크·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 3천만여 명이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채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합니다. 중동에서 아랍인, 이란인, 튀르키예인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민족임은 분명하죠. 이 중 절반이 튀르키예에 삽니다. 쿠르드족은 인종, 역사적으로 이란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란계 산악 민족이죠. 그래서 이란과 접경 지역인 튀르키예 동부에 많이 거주합니다. 이곳을 주 투쟁 근거지로 삼고요. 역사에 처음 등장한 쿠르드족은 12세기에 제3차 십자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점령한 살라딘Saradin 이집트 술탄입니다. 살라딘은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해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에 대제국을 건설했죠. 1250년 아이유브 왕조가 망한 이후 쿠르드족은 셀주크제국과 그 후 들어선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쿠르드족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자치 지역이나 국가를 원하는 겁니다. 거주하는 국가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죠. 77-8)


1880년대 오스만제국 내 쿠르드 족장 셰이크 우베이둘라Sheikh Ubeydullah는 당시 이란(카자르 왕조)이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틈을 타 이란 서부의 쿠르드족을 규합해 들고일어납니다. 초반에는 이기다가 결국 오스만제국과 이란 연합군에 패합니다. 그럼에도 우베이둘라의 봉기는 이후 쿠르드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죠. 쿠르드족은 오스만제국이 1차 대전에서 패하자 독립을 다시 염원합니다. 1920년 연합국과 오스만제국이 체결한 세브르 조약을 보면, 쿠르드족에 자치권을 주기로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23년에 로잔 조약을 다시 체결합니다. 이 조약에서는 쿠르드족 얘기가 아예 빠지죠. 이렇게 된 것은 영국 탓입니다. 영국은 쿠르드족에게 주기로 했던 땅에 대규모 유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땅을 영국령으로 편입해 버립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연합국은 오스만제국이 해체된 후 쿠르드족이 세운 국가를 무효화해 버립니다. 78-9)


소련도 쿠르드족을 이용합니다. 2차 대전 직후 소련은 이란 북부를 점령하고 쿠르드족의 국가인 ‘마하바드 공화국’(1946년 1월 22일~1947년 3월 31일)을 세웁니다. 소련은 이란과 유리하게 협상하기 위해 잠시 도운 척했을 뿐이죠. 마하바드 공화국은 불과 1년여 뒤 소련이 이란과 협정을 맺고 철수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1972년 쿠르드족은 이라크에 자치 정부를 세울 수 있게 돕겠다는 이란과 미국의 약속을 믿고 이라크와 3년 동안 싸웁니다. 이 전쟁 역시 미국과 이란에 이용당한 경우입니다. 당시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친미 정부였고, 이라크와 국경 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라크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쿠르드족을 이용한 것이죠.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80년부터 이란과 전쟁 중이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쿠르드족이 이란을 도울 것을 염려해 1988년 안팔(Anfal, ‘성스러운 전쟁의 전리품’이란 뜻)이라는 비밀 작전을 펼칩니다. 쿠르드족을 화학무기로 학살하고 마을도 파괴해 버리죠. 80)


1920년대 초기에 튀르키예는 세속주의를 내세워 쿠르드족 고유의 언어, 의복 등을 금지합니다.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는 자국의 모든 민족이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도록 강제했고, 당연히 쿠르드어 사용을 금지했죠. 튀르키예가 세속주의를 내세우자 쿠르드족은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고 그 일환으로 1978년 PKK를 조직합니다. PKK는 쿠르드족 독립을 주장하며 테러를 일으키고 폭력 시위도 벌였습니다. 그로 인해 튀르키예에서 반쿠르드 감정이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2013년 튀르키예와 쿠르드족은 휴전 협정을 맺지만, 이후에도 무력 충돌은 계속됩니다. 튀르키예뿐만 아니라 대부분 나라가 쿠르드족이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자원이 많기 때문이에요.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유럽 국가와 인근 아랍 국가 등이 서로 그 자원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죠. 82)


8장. 시리아에서 전쟁은 끝난 걸까 : 시리아 내전


내전의 발단은 2011년 3월 시리아 남부의 작은 도시 다라Daraa에 사는 10대들이 학교 담벼락에 “의사 선생님, 이젠 당신 차례야”라고 쓴 사건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2007년 7월 집권한 바샤르를 말하죠. 안과 의사였거든요. 당시 중동에서는 2010년부터 튀니지를 시작으로 훗날 ‘아랍의 봄’이라 불린 민주화 운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독재 정권을 향해 시민들이 들고일어난 거죠. 아이들은 이번 차례는 시리아 독재자라고 썼던 겁니다. 경찰은 아이들을 체포했고, 배후를 밝히라며 혹독하게 고문합니다. 정부가 군용기, 탱크까지 동원해 시민들을 학살하자 군대 안에서도 반감을 품는 군인이 늘어납니다. 결국 이들은 정부군에 등을 돌리고 시민군에 합류하죠. 대표적인 사람이 공군 대령 리야드 알아사드Riad al-Assad입니다. 그는 탈영병과 시위대를 모아 시리아 자유군SFA, Syria Free Army을 만듭니다. 이제 반정부군도 무장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이죠. 그리고 민주화 운동은 내전으로 전환됩니다. 86-7)


그런데 내전이 묘하게 흘러갑니다. 아랍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파 분쟁으로 번진 거지요. 시아파와 수니파 분쟁으로 말입니다. 시리아는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수니파인데 집권층은 시아파였습니다. 지배받는 수니파가 지배하는 시아파에 맞서는 구도가 됐습니다. 이 때문에 시리아 내전은 민주화 운동과 종교 전쟁이 섞이는 성격을 띠게 됩니다. 아사드 정권은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이 돕고, 반정부군은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지원합니다. 여기에 아사드의 오랜 우방국 러시아까지 가세하죠. 수니파 테러 조직인 IS가 내전을 틈타 시리아 북동부를 점령하면서 반정부군 진영에 끼어들고요. 미국은 아랍의 민주화 운동 지원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시리아 반정부군 중 하나인 시리아 민주군SDF, Syria Democracy Force을 지원합니다. 미국이 SDF를 지원한 이유는 IS 때문입니다. 비록 IS가 시리아에선 반정부군 진영에 속해도 미국에게는 격퇴 대상이니 SDF를 이용해 물리치려고 한 것이죠. 87)


또 시리아 내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가가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입니다. 먼저 튀르키예가 시리아 내전에 개입한 가장 큰 이유는 쿠르드족을 견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2011년 7월부터 튀르키예는 반정부군 중 하나인 시리아 자유군SFA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죠. 그런데 2017년 트럼프가 시리아에서 완전히 발을 뺌으로써 쿠르드족과 SDF는 궁지에 몰리죠. 튀르키예는 미국과 러시아의 묵인 아래 쿠르드족을 공격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틈만 나면 시리아 정부군을 공격했습니다. 시리아가 헤즈볼라를 비롯한 반이스라엘 무장 조직들에게 거점을 제공하고 있었으니 반감이 늘 있었죠. 이런 데다 3차 중동 전쟁의 결과로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 정부군이 승리할 경우, 이곳이 위협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전이 길어지길 바랐겠죠. 전쟁에 참여한 모든 세력이 전부 약해지는 것을 최고의 시나리오로 생각했을 겁니다. 88)


러시아는 아사드 부자와 오래 동맹을 맺었고 이들에게 무기도 지원했습니다. 푸틴이 시리아 정부를 도운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러시아는 시리아의 타르투스항에 해군 기지를 두었습니다. 타르투스항은 러시아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갖고 싶어 한 부동항인 데다 중동과 지중해를 넘볼 수 있게 하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또한 시리아에서 반정부군이 정권을 잡을 경우 유럽으로 가스관을 연결할 가능성이 큰데, 이렇게 되면 러시아 ‒ 유럽의 가스 공급망이 타격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러시아는 아사드 정권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국제 사회에는 IS 격퇴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말이죠. 미국은 오바마 정부 이래 고립주의를 내세웠습니다. 이 때문에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에서 미국의 존재감은 약해지고 그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은 커졌습니다. 물론 미국과 서유럽이 시리아 내전에서 한발 물러난 데에는 IS 영향도 있습니다. 반정부군을 돕는 것이 IS를 키우는 꼴이 되기 때문이죠. 89-90)


9장. 군부가 계속 집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미얀마 내전


미얀마는 인구의 70퍼센트가 버마족이고 샨족·친족·몬족·카친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30퍼센트를 차지합니다. 서로 언어와 문화도 크게 달라 종족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미얀마는 1824년부터 1948년까지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1942년부터 45년까지는 일제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2차 대전에서 패한 일제가 물러난 뒤에 다시 영국이 지배했고요. 그러니까 미얀마는 거의 12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것이죠. 당시 미얀마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아웅산 장군은 독립 후 국가 재건을 준비하던 중에 반대 세력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그리고 아웅산이 주축이 돼 만든 정당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FL, Anti 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이 총선거에서 승리해 서구식 민주 정부가 들어서죠. 하지만 2차 대전 후 탄생한 대다수 신생 국가들처럼 민주주의를 제대로 정착시키지 못하고 소수민족끼리 갈등하면서 경제 혼란까지 겪습니다. 그러다 1962년 네윈Ne Win이 쿠데타를 일으켜 기나긴 군부 시대로 들어섭니다. 96)


네윈 군부는 1988년까지 26년간 집권합니다. 네윈은 주요 기업과 자원을 국유화해 시민의 몫을 착취하는 경제 구조를 만들었죠. 폐쇄적인 경제 정책 결과, 세계 경제에서 고립되고요. 당연한 귀결처럼 결국 경제는 무너지고, 지하경제와 암시장만 활성화됩니다. 독재와 경제난으로 국민의 분노는 점점 깊어졌죠. 마침내 1988년 8월 8일, ‘8888항쟁’이 일어납니다. 학생과 승려들을 주축으로 수많은 시민이 군부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합니다. 미얀마에서 일어난 첫 민주 항쟁이었죠. 하지만 군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대를 바꿔 가며 독재를 유지했죠. 8888항쟁 당시 정부는 저항하지 않는 시민들까지 무차별로 학살했습니다. 수천 명이 죽습니다. 군인이 자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항쟁 결과 네윈은 물러나지만, 군인들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쥐죠. 군부는 더 악랄해집니다. 아웅산수치도 집 밖으로 못 나오게 가택연금을 해 버리죠. 수치는 20여 년 만인 2010년에야 풀려납니다. 97-8)


2007년 8월 다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른바 ‘샤프란 혁명’이죠. 샤프란은 승복 색인데, 이 색을 떠올릴 정도로 승려들이 주축이 된 투쟁이었죠. 그도 그럴 것이 미얀마는 국민의 약 90퍼센트가 불교도입니다. 샤프란 혁명은 군부가 연료 판매 가격 보조금을 폐지하면서 일어났습니다. 군부가 연료의 유일한 공급자였는데, 보조금을 주지 않으면서 버스용 압축 천연가스 가격을 비롯해 가스 가격이 폭등한 것이죠. 시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군부도 한발 물러납니다. 2008년부터 자유선거를 실시합니다. 무늬만 자유선거지, 실제로는 부정선거였지요. 군부가 지지하는 통합단결발전당USDP, 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이 압승합니다. 하지만 군부도 국제 사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2008년 새 헌법을 만들죠. 대통령 간선제, 시장경제 체제, 정당제 민주주의 등을 표방합니다. 그런데 의회 의석의 25퍼센트를 군에 자동 할당하게 돼 있어 그 외의 내용은 사실 치장에 불과했습니다. 98)


아웅산수치는 2010년 연금에서 해제되었고, 2012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2015년 총선에서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이 과반이 넘는 의석을 차지합니다. 이번에는 웬일인지 군부가 이를 인정하고 정권을 이양합니다. 군은 2020년 11월 총선에서도 패배하자 다시 움직입니다. 수치는 군에 유리하게 돼 있던 헌법을 개정하려고 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의석의 25퍼센트를 군이 자동으로 갖게 돼 있기 때문이죠. 개헌안이 통과될 경우, 군의 영향력은 약해지겠죠. 그러자 2021년 2월 군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진보적인 인사들을 구금합니다. 쿠데타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할 뿐만 아니라 무자비하게 살해했습니다. 더는 평화 시위가 어려워지자 시민들은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시민들은 4번의 쿠데타를 겪으면서 군부를 끝낼 방법은 무장 투쟁밖에 없음을 인식한 것입니다. 99-100)


10장.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왜 학살자가 되었을까: 에티오피아 내전


에티오피아는 13세기부터 1974년까지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이었습니다. 황제를 중심으로 80개의 크고 작은 종족으로 이루어진 연방제 국가였죠. 각 종족은 자치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다 1974년 9월, 공산주의자인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제국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군부는 1987년 군정을 폐지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 공화국을 선포하죠. 제1대 대통령은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입니다. 그는 수많은 자국민을 학살했습니다. 무늬만 공화국이지 멩기스투 정권의 폭정은 계속됐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이들이 반정부군을 조직해 들고일어납니다. 멩기스투 정권은 1991년에 무너집니다. 2대 대통령은 대표적인 반정부군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 Ethiopian People’s Revolutionary Democratic Front 지도자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가 되었습니다. 멜레스 제나위 총리 시절엔 그가 소속된 티그라이 인민해방전선TPLF, Tigray People’s Liberation Front이 집권당이었습니다. 109-10)


2019년 12월 EPRDF는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새로운 조직인 번영당PB, Prosperity Party을 만듭니다. TPLF를 제하고 나머지 3개 정당만으로 꾸린 거죠. 왜 TPLF를 제외했을까요? 멜레스 제나위가 총리가 되면서 TPLF는 집권당이 됩니다. 이들이 정치를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멜레스 역시 독재자로 변질됩니다. TPLF는 멜레스가 2012년 사망하고 2018년 실각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독재를 합니다. 결국 총리(2대 총리 하일레마리암 데살렌)가 물러났고, 2018년 번영당을 주도한 아비 아머드 알리(Abiy Ahmed Ali, 오로모족 출신)가 3대 총리가 됩니다. 아비 총리는 TPLF를 배제했습니다. 그러자 TPLF가 들고일어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죠. 아비 총리는 국경을 두고 오랫동안 분쟁해 온 에리트레아를 설득해 평화 협정을 체결합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노벨평화상을 받지요. 하지만 TPLF 본거지인 티그라이주는 이 협상에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자기들 땅이었던 바드메Badme를 에리트레아로 넘겨주었기 때문이죠. 110-11)


정부와 TPLF 간의 갈등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폭발합니다. 아비 정부는 보건 안전을 위해 전국 지방선거를 연기하겠다고 선언했는데 TPLF가 반발하며 독자적인 선거를 치르겠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실제로 2020년 9월 티그라이주는 따로 선거를 치릅니다. 아비 정부는 티그라이주 정부를 불법 군사정부로 규정하고, 재정 지원을 끊는 맞불을 놓습니다. 인터넷과 전화까지 모두 차단해 티그라이족들을 고립시키죠. 그리고 11월 정부군을 투입해 티그라이주의 주도 메켈레Mekelle를 점령합니다. 이후로도 내전은 계속됩니다. 에티오피아는 2021년 5월 총선을 치르고, 석연찮지만 번영당이 압승해 아비 총리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합니다. 2022년 아비 정부와 TPLF는 내전 중단에 합의합니다. 하지만 티그라이족은 이후로도 계속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현재도 서로 죽고 죽이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111-2)


후기


심리학 개념 중에 ‘낯선 사람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친구나 가까운 지인보다는 오히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개인적인 고민을 더 쉽게 털어놓는 경향을 말합니다. 낯선 사람과는 관계 유지에 대한 부담이 없어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낯선 사람 효과는 분쟁이나 전쟁을 해결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분쟁 당사국들은 서로 적대하고 불신하기 때문에 아예 대화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때 제3의 중재자가 등장하면 대화의 물꼬가 트일 가능성이 커집니다. 당사국들이 공식적으로 말하기 힘든 조건들을 상대국에 대신 전하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으니까요. 이런 존재들을 피스메이커Peacemaker라고 하지요. 2024년 12월 타계한 미국 전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대표적입니다. 국제 사회는 이런 피스메이커들에게만 기댈 것이 아니라 분쟁이나 전쟁 등 국제 사회에서 문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결해 갈지 머리를 맞대야 할 것입니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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