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21세기 국제질서 맥락으로 이해하기 - 패권 전환기 속 대한민국의 미래
정하늘 지음 / 국제법질서연구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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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흔히들 ‘세계화globalization’라 불리는 범세계적 통합이 지금의 수준까지 이뤄진 시기는 인류 역사상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이러한 세계적 통합은 사실 현행 국제질서의 산물이다. UN, WTO, IMF, OE­CD, SWI­FT, UCP, ISO, IS­DS…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이런 영문 약어들은 국제사회에서 운용되는 다양한 체제와 제도를 상징한다. 국제사회의 여러 체제regime는 국가 간의 합의나 동의, 협력으로 구성된다. 체제 안에 조직된 제도institution는 회원국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국제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에 의해 주로 관리된다. 세계의 통합은 국제적인 체제와 제도, 기관을 중심으로 지난 30여 년간 세계화가 꾸준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세계의 통합은 최근 몇 년 사이 느려지거나 멈추었고, 심지어 여러 방면에서 후퇴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누렸던 것과 같은 통합된 세상이 향후 수십 년간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 이유는 오늘날 국제질서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23)


제2장 패권의 역사, 그리고 질서의 진화


오늘날의 국제질서는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세계패권국인 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질서라고 해서 일극적一極的, unipolar 국제질서라 불리기도 한다.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현상 변경 세력은 미국이 주도하는 일극체제uni­po­la­ri­ty를 다극체제mul­ti­po­la­ri­ty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국제사회의 일극체제를 다극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은 미국이란 유일 패권국이 주도하는 시대를 끝내고 복수 또는 다수의 강대국이 선도하는 국제질서를 구현하겠다는 의미다. 현실적인 국제질서는 이처럼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힘’의 숫자에 의해 좌우된다. 그런데 현행 국제질서에는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힘의 숫자와 무관한 명칭도 붙어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라는 이름이 그것이다. 이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아직도 국제사회의 대세적 질서로 남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일극적 패권이 쇠퇴함에 따라 자유주의 국제질서도 함께 훼손되고 있다. 29)


제3장 팍스 아메리카나와 자유주의 국제질서


미국이 주도해온 오늘날의 국제질서에서 국제사회의 통합은 경제 분야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뒀다. 상품과 서비스의 이동은 유사 이래 가장 자유로운 상태가 됐다. GATT 체제의 후신後身으로 1995년 출범한 WTO 체제는 회원국 간 관세장벽과 서비스무역 장벽을 대거 철폐했을 뿐 아니라 모든 회원국을 상호 간에, 그리고 자국민보다 차별하지 않을 공통된 의무까지 부과함으로써 느슨하게나마 세계 경제공동체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현대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권리 중 하나인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는 국제규범도 다수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WTO 협정(그중 T­RI­PS 협정)은 저작권co­py­ri­ght, 저작인접권re­l­at­ed ri­ght­s, 상표권t­ra­de­ma­rk, 특허권pa­te­nt­s, 산업디자인in­du­st­ri­al de­si­gn, 지리적 표시geo­gra­phi­cal in­di­ca­ti­on 등 다양한 지적재산권을 광범위하게 보호하고 있다. WTO 협정의 영향으로 세계 각국의 지재권 관련 규정들도 많이 유사해졌다. 국제 거래에서의 예측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 97)


경제 및 기술 분야에서 국제교류가 효율적으로 이뤄지는데 필요한 국제표준in­ter­na­tio­nal s­ta­nd­a­rd이 자리 잡은 지도 오래되었다. 여러 기준들 가운데 공인되어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기술적 기준을 ‘표준’이라고 한다. 현재 대다수 국가는 상품, 서비스, 과학, 기술, 산업 등 방대한 분야에 있어 자체적으로 사용되는 표준을 갖추고 있는데, 각국의 표준은 국제표준화기구“ISO”,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등 관련 국제기구가 보급한 국제표준과 연동되어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국제교류를 가능케 한다. 자본의 이동도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으로 자유화된 상태다. IMF와 세계은행은 각국의 통화cur­ren­cy 흐름을 감독하고 국경을 넘어 이뤄지는 투자cross-bor­der in­ve­st­me­nt를 촉진한다. 오늘날 국제금융은 전 세계 대부분의 은행이 가입한 국제은행간통신망“SW­I­FT,” 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과 같은 국제금융시스템을 통해 신속하게 이뤄지고 있다. 97-8)


계약법, 회사법, 금융법, 경쟁법 등 국제 거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각국의 경제법들은 적어도 주요 원칙에 있어서 만큼은 유사해졌다. 그러다 보니 ‘국제물품매매계약에 관한 유엔협약“CISG”, U­ni­t­ed Na­ti­on­s Con­ven­ti­on on Con­tr­a­ct­s f­or th­e In­ter­na­tio­nal Sa­le of Go­od­s’이 규율하는 상품거래뿐 아니라 기업 인수합병M&A 등과 같이 투자유치국의 고유 법제에 구속되는 투자거래조차 큰 틀에서 대동소이해졌다. 범용성 있는 영문 템플릿tem­pla­te에 개별 거래에 따른 특유사항들만을 반영하여 수정한 국제계약서에 기초하여 투자거래를 진행하는 사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국제 거래에서 발생한 분쟁은 당사자들의 국내 법원에서 소송으로 해결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국제중재in­ter­na­tio­nal ar­bi­tra­ti­on라는 사적 절차를 통한 해결이 선호된다. 중재판정부가 내린 판정은 뉴욕협약이라는 다자조약에 의해 전 세계 168개국에서 집행력이 담보된다. 그 결과 국제 거래에 대한 진입장벽이 획기적으로 낮아졌다. 98-9)


제4장 미·중 패권 경쟁의 시대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함으로써 사실상 전 세계를 새로운 시장으로 얻게 되었다. 모든 WTO 회원국은 중국산 상품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거나 철폐에 가까운 수준으로 낮추어야 했고,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중국산 상품을 자국산 또는 제3국산 상품에 비해 차별하지 않을 의무를 부담하게 됐다.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을 통해 생산된 저가의 중국산 상품은 곧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WTO 가입은 중국의 수출시장을 더욱 늘리고, 수출 장벽을 더욱 낮추고, 중국산에 대한 차별대우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 외에도 다른 거대한 혜택을 제공했다. 막대한 규모의 외국인 투자가 그것이었다. 중국의 상품시장과 주요 서비스 시장이 중국의 WTO 가입의정서Ac­ce­ss­i­on P­ro­to­co­l에 따라 외국인 투자자에게 개방되자 거대한 내수시장을 노리고 전 세계에서 외국인 투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WTO에 가입한 중국은 가입 원년인 2001년을 기점으로 문자 그대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39)


중국의 대외정책이 뚜렷하게 패권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2010년경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배경이 얽혀 있으나, 크게 세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다. 금융위기를 통해 미국의 쇠락을 확인하고, 또 세계가 중국에 손을 벌리는 모습을 보며 중국인과 중국 정부는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유교적 천하 질서. 즉 중국이 유일 대국으로서 중원에 자리 잡고 변방의 소국들이 이를 지지하는, 중국을 정점으로 한 위계적 국제질서를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대안으로 내세우기 시작한 시점도 대략 이 무렵이다. 두 번째는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된 해가 바로 2010년이란 점이다. G2로 올라선 직후에도 중국의 경제 규모는 미국의 40%를 밑도는 수준이었지만, 대다수 전문가는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WTO 체제는 여전히 굳건했고, 중국은 다자무역체제 최대의 수혜자로 계속 남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140)


마지막 세 번째는 남중국해를 둘러싼 군사적 균형이 2010년을 기점으로 결정적인 전환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2010년, 드디어 대함탄두미사일an­ti​-sh­ip bal­li­s­t­ic mis­si­le 둥펑东风 21D“DF-21”가 실전 배치되었다. 그러자 상황은 근본적으로 뒤바뀌었다. 중국은 DF-21을 중심으로 미 항모전단의 중국 근해 접근을 차단하는 소위 ‘반反접근·지역 거부 전략’“A2​/AD”, an­ti​-ac­ce­ss, ar­ea de­ni­al을 수립했다. A2​/AD 전략의 골자는 전역戰域 내에서 미 해군과의 무력 충돌 발생 시 대함탄도미사일을 쏟아부어 항모전단을 일제히 타격함과 동시에 인민해방군의 해군력과 공군력을 전력 전개하는 것이다. A2/AD 우산 아래서 중국 인민해방군과 미 제7함대가 총력으로 격돌할 때의 결과는 예측이 어렵지만, 적어도 미 항모전단의 일방적인 공격 앞에 중국이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은 끝났다고 보아도 좋다. A2/AD가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큼은 미국이 자랑하는 항모전단은 더 이상 무적이 아니게 된 것이다. 140-1)


중국은 남중국해의 90%에 달하는 수역에 대해 자국의 역사적 종주권을 주장하는 소위 구단선九段線, Ni­ne Da­sh Li­ne이란 해상경계선을 선포한 상태다. 구단선은 대만을 통째로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루나이가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EEZ,” Ex­clu­si­ve E­co­no­mi­c Zo­ne을 대부분 잠식한다. 구단선이 인정되면 남중국해에서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루나이는 EEZ를 사실상 전부 박탈당하게 된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주장에 강하게 반발했다. 2013년 필리핀은 유엔해양법협약에 근거하여 네덜란드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 규정에 따라 설치된 중재판정부에 중국 구단선의 국제법적 효력을 판단해 달라고 제소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중국은 재판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심리 과정에 불참했다. 대신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2014년부터 인공섬을 만들고 석유 시추장비를 설치하여 주변국과의 긴장 수위를 더욱 높였다. 141-2) 


GATT 시절 미국이 자국 시장과 산업 보호를 위해 활용한 안전장치는 반덤핑관세an­ti​-du­mp­ing du­ty, 상계관세co­un­ter­va­il­ing du­ty, 세이프가드 조치sa­fe­g­ua­rd m­ea­su­re로 대표되는 무역구제조치trad­e re­me­dy m­ea­su­re와 수출자율규제“VER,” vol­un­ta­ry ex­po­rt re­st­ra­i­nt였다. 반덤핑관세나 상계관세는 부당한 덤핑이나 보조금의 혜택을 받아 저가로 수입되는 외국 상품으로 인해 관련 국내 산업이 피해를 봤을 때 부과하는 보호관세이고, 세이프가드 조치는 국내 산업에 특히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보호조치다. 이러한 무역구제조치는 저가 수입품으로부터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데 유용한 방어 수단이다. 한편 VER은 수출국이 특정 상품의 수출물량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다. 다만 ‘자율’이란 명칭이 무색하게 물량 제한은 수출국과 수입국 간에 양자 협상을 통해 합의된 물량으로 정해지는 게 보통이었다. VER은 미국이 자국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최강의 도구였다. 147)


1980년대에 들어 미국의 주력 산업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진화하고, IT산업의 발전으로 해외시장에서 자국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할 유인이 커지면서 미국은 한층 진보된 다자무역체제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다. 1940년대에 만들어진 GA­TT로는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과 진화하는 국제경제 관계를 규율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서비스무역 자유화와 범세계적인 지적재산권 보호, 기술 장벽 철폐 등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미국도 무언가를 내놓아야만 했다. 미국의 상품시장을 지키는 안전장치였던 무역구제조치와 VER이 대표적인 협상 대상이 됐다. 그렇게 미국과 개도국 간에 이루어진 타협의 결과물이 신생 WTO 협정의 주요 뼈대를 구성했다. 반덤핑관세 및 상계관세 부과와 관련해 GA­TT보다 훨씬 빡빡한 요건들을 부과한 반덤핑협정 및 보조금협정이 채택됐다. 또한 세이프가드 협정의 채택으로 VER이 원천적으로 금지됐다. 미국으로선 위급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던 VER을 빼앗긴 셈이다. 147)


WTO 체제가 출범하고 미국은 서비스무역과 지적재산권이 중요한 첨단 산업 분야에서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제조업 산업의 쇠락은 가속되었다. 자연히 미국은 무역구제제도를 활용해 자국 제조 산업의 보호에 나섰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미국이 수입 상품에 적용한 각종 무역구제 조치에 대해 WTO 재판부가 번번히 위법하다는 판정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GA­TT와 WTO의 차이는 단순히 규범의 종류와 범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효성 있는 분쟁 해결 수단이 부재했던 GA­TT와 달리 WTO의 분쟁해결절차는 국제공법 관계에서 가장 강력한 집행력을 담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WTO 재판부가 내린 일련의 판정들은 미국이 WTO 협정을 체결하면서 무역구제제도와 관련해 가졌던 기대를 근본적으로 저버렸다. 미국은 반덤핑과 상계관세와 관련된 피소된 WTO 분쟁에서 높은 확률로 패소했고, 특히 세이프가드와 관련해 피소된 WTO 분쟁에서는 2021년 이전까지 모든 사건에서 패소했다. 148)


WTO의 권능 아래, 약육강식이라 여겨졌던 국제사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법치주의가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서는 황폐화하는 자국 제조 산업과 부상하는 중국을 지켜보는 미국의 인내심이 말라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미국인의 정서는 이미 2010년대 중반에 보호무역주의로 전환되었고, 여기에 트럼프가 적극적으로 편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후보로 내세운 공화당의 정강정책이 무역정책에서의 ‘A­me­ri­ca F­ir­st’를 선언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당시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내세운 민주당의 정강정책도 보호무역주의를 선언하고 있었다. WTO의 최종심을 담당하는 상소기구가 공식적으로 마비된 것은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였지만, 미국이 상소기구에 새로운 재판관이 임명되는 것을 저지하기 시작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6년부터였다. 149)


GA­TT와 WTO 협정에는 소위 ‘안보 예외Security Exception’란 조항이 있다. 조치국이 자국의 중요한 안보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취하는 조치에 대해서는 WTO 협정상의 의무가 적용되지 않도록 한 예외 조항이다. 하지만 WTO 회원국들이 안보예외를 남용하여 WTO 협정에 따른 정당한 책임을 회피하기 시작하면 WTO 체제가 형해화될 수도 있다. 그래서 WTO가 출범한 이후에는 조치국이 안보 예외를 이유로 자국의 WTO 협정 위반을 정당화한 사례는 2016년 이전까지 단 한 건도 등장하지 않았다. 국제무역에서 안보와 경제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은 2017년도에 트럼프 행정부가 철강·알루미늄 산업에 대한 안보 예외 보호조치를 채택하면서부터였다. 이때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무역확장법 제232조에 따른 보호조치를 채택하였는데, 소위 ‘제232조’라 불리는 이 조치 역시 WTO 출범 이전까지는 활발히 사용됐었으나 WTO 출범 이후 약 20년간은 사용되지 않은 조치였다. 155-6)


G2로 성장한 중국의 굴기는 미국이 깔아놓은 자유무역질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바, 현재 미국은 중국을 꺾기 위해 WTO 다자무역체제를 비롯해 스스로 설계한 여러 국제체제와 국제제도를 변경하거나 훼손하고 있다. 이러한 대응은 미국의 연성적 세계 패권의 근간이 되던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훼손함으로써 세계 패권의 약화 또는 해체를 가속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미국은 세계 패권 유지에 집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탈냉전기 미국이 누린 세계 패권이란 처음부터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에서의 한시적 현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국과 다른 나라 간에 한때 현격했던 기술격차도 계속 유지될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술의 평준화가 이뤄지면, 거대한 잠재력을 지닌 강대국들이 사방에서 준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장은 동아시아에서 지역 패권 구축을 노리는 중국과 유라시아에서 지역 패권 구축을 노리는 러시아가 문제지만, 머지않아 인도가 인도양에서 지역 패권 구축을 시도할 것이다. 183-4)


때마침 미국의 국내 정치 상황도 세계 패권의 포기를 종용하고 있다. 미국이 자유무역질서를 유지하는 동안 금융자본과 다국적기업은 국경을 초월해 성장하였으나 국내 제조 산업은 황폐해졌다. 중산층이 줄어들고 부의 편중이 심화했다. 세계화로 큰 피해를 본 미국 내 제조업 노동자의 불만은 임계점을 넘은 지 오래다. 중국과의 패권 경쟁이 도래함에 따라 해외로 이전했던 공급망을 미국으로 리쇼어링할 정책적 필요성까지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전통적인 고립주의가 다시 힘을 얻으면서 ‘세계의 경찰’ 노릇을 중단하라는 정치적 요구가 대두되고 있다.  미국의 국력은 모든 영역에서 소진됐고 영향력은 쇠퇴했다. 어차피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면 허망한 세계 패권과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키느라 국력을 소모하는 것은 미국에 있어 현명한 선택지가 아닐 수 있다. 미국은 현재 진행 중인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더라도 팍스 아메리카나를 복원하려 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184)


제5장 우크라이나와 대만해협


대만해협은 미·중 패권 경쟁의 잠재적 승부처가 되고 있다. 2023년 1월, 미국의 전략국제연구센터CS­IS는 그때까지 업데이트된 자료를 바탕으로 총 24차례의 워게임을 실시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시나리오에서 미국과 대만, 일본의 연합군은 항공모함 2척과 대형 전투함 20여 척, 전투기 100여 대를 잃는 등 엄청난 손실을 보고서야 중국해군을 괴멸시키고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결과가 도출됐다. 큰 손실을 봤다는 점 외에도, 미군과 대만군에 더해 일본군까지 참전하고서야 위와 같은 결과를 얻어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실제 전쟁에서 일본 자위대가 참전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반면 2023년 5월 중국이 실시한 워게임에서는 인민해방군이 총 24발의 극초음속 미사일을 사용해 미국의 제럴드 포드 항모전단을 격침하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중국의 극초음속 미사일은 미 해군의 대공 방위시스템을 상대로 80%에 달하는 돌파·명중률을 보였고, 항모와 대형군함을 3발 이내의 명중 타격으로 침몰시켰다고 한다. 221)


만일 미국이 대만해협을 포기하면 중국의 세력권은 제1 도련선을 따라 남중국해 전역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 경우 중국은 남중국해에 선포한 구단선 내 해역 전체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구단선의 지척에는 말라카해협이 있다. 전 세계 해상 운송물량의 20%가 통과하는 말라카해협은 파나마 운하, 수에즈 운하와 함께 세계 3대 해상 운송로로 손꼽힌다. 말라카해협까지 통제하게 된다면 중국은 동북아와 중동·아프리카, 유럽을 잇는 최적의 항로를 틀어쥐게 될 것이다. 그다음 차례는 제2 도련선이다. 제2 도련선의 궤적을 따라 일본과 필리핀을 넘어 괌에까지 중국의 세력권이 팽창하면 서태평양 전역이 중국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다음 목표는 남태평양이 될 것이다. 만약 중국의 해양 패권이 제3 도련선까지 확장된다면, 중국은 하와이 앞바다까지 세력권을 넓힘으로써 미국과 진정으로 태평양을 양분하는 거대 제국이 될 수 있다. 222)


반대로 미국으로선 중국의 세력권이 아예 제1 도련선까지도 확장되지 못하도록 틀어막는 것이 최선이다. 중국의 해군력이 남중국해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억누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다름 아닌 중국이 알려주었다. 대함미사일을 주축으로 한 중국의 A2​/AD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미 해군의 항모전단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미국도 남중국해를 포위한 미사일망을 구축할 수 있다면, 앞으로 중국해군이 더욱 많은 항모전단을 꾸리게 되더라도 남중국해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남중국해를 포위한 미사일망은 유사시 중국 본토에 설치된 미사일 전력을 타격하여 A2​/AD 우산을 훼손하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2019년 미국은, 1987년에 구소련과 체결한 중거리핵전력조약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에서 탈퇴했다. 이는 중국을 상대로 신형 미사일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되었다. 222-3)


현재 미국과 미국의 동맹 세력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의 무력 충돌이 발생할 시 동원할 수 있는 육상 미사일 전력을 차근차근 확보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2020년 오키나와 본섬에 미사일 전력을 배치할 계획을 발표한 이래 규슈九州와 대만 사이에 펼쳐진 난세이南西 제도에 미사일 기지를 대거 설치·확장하고 있다. 난세이 제도는 오키나와 남서쪽 300킬로미터로부터 대만 북동쪽 150킬로미터 지점까지 늘어선 약 2천 5백여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그야말로 중국의 동중국해 진출을 막아서는 천연 해상요새이다. 중국의 제1 도련선과 구단선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해양주권 역시 심각하게 침해하는바, 미국은 동남아 국가들도 남중국해의 대중국 미사일 체계에 포섭하고자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미국이 괌, 오키나와, 필리핀, 난세이 제도 등에 소재한 기지들에 대함미사일들을 대거 배치하면 중국이 계획대로 2035년까지 6척의 항공모함을 확보하더라도 남중국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될 가능성은 희박해질 것이다. 223-4)


한편 미국은 그 외에도 다양한 대중국 봉쇄계획을 수립하여 착실히 실행하고 있다. 오늘날 미군은 항모전단 일변도의 전투 수행 방식에서 탈피해 해군과 공군, 각종 육상 무기체계와 사이버 전력, 드론 등 모든 전략자산을 유기적으로 운용해 적을 격퇴하는 소위 다중영역작전mul­ti​-do­ma­in o­pe­ra­ti­on 역량을 실시간으로 함양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육·해·공을 망라하는 대규모 무인 드론 군단을 건설해 중국군을 정량적으로 압도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최첨단 스텔스 전투함이 기함으로서 다수의 무인 드론 함정들을 통솔하는 속칭 ‘유령 함대’의 도입도 가속화하고 있다. A2​/AD에 맞서 미 해군이 생존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미 항모전단이 갖춘 현재의 대응체계로도 중국의 최첨단 극초음속 미사일을 종말 단계에서 요격할 수 있다는 평가가 존재하지만, 여하튼 미군은 MD 능력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224-5)


미 해군은 노후화된 기존 함정을 순차적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기 때문에 2027년까지는 함선의 숫자가 오히려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 대신 2027년 이후에는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동맹국의 전력이 강화되기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만일 중국이 승부수를 던진다면 그 시점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현대화와 대만 통일 준비가 갖춰지는 시점과, 미국과 일본의 남중국해 대중국 대응 전력이 완성될 시점 사이의 매우 짧은 기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 기회의 창은 2027년을 전후하여 몇 년 동안만 열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2027년이 시진핑 주석의 3번째 임기가 끝나는 시점이란 점도 중요하다. 미·중 간에 무력 충돌 위기는 쇠퇴하는 기존 패권국이 신흥 강대국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쟁을 벌이는 소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아닌, 패권국을 추격할 가망이 없어진 신흥 강대국이 도전을 위한 ‘기회의 창’이 닫히기 전에 다급히 승부수를 띄우는, 소위 ‘전성기 함정’에 의해 발생할 거라는 전망이 지난 2021년에 나온 바 있다. 227-8)


제6장 패권국이 없는 세계


많은 사람이 미국의 탈선은 트럼프라는 비주류 대통령에 한정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본질적 성격은 봉쇄전략이나 다자주의, 자유주의보다 훨씬 오랫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이었던 고립주의i­so­la­ti­on­i­sm에 입각한 시각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각종 행보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그저 자기파괴 행위에 불과했지만, 고립주의적인 관점에서는 합리성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고립주의 정책이란 가능한 모든 국제문제로부터 거리를 두고, 국제기구나 동맹과의 관계 또한 최대한 느슨하게 가져가며, 관세와 같은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해 외부에 대한 경제 의존도 또한 가급적 낮추는 대외정책을 의미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 보라.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의 여러 대외정책 기조와 매우 유사하지 않은가? 트럼프는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처음으로 등장한 고립주의자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세계대전 이전에는 미국의 거의 모든 대통령이 고립주의자였다. 246)


고립주의로 전환한다고 해서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처럼 외국의 사정에 마냥 무관심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바다를 면한 지역 패권국이 등장하면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미국이 보장해온 항행의 자유가 훼손될 수 있기에, 세계 패권을 내려놓은 다음에라도 미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패권국이 다른 지역에서 등장하지 못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다만 미국은 잠재적 지역 패권국과 직접 맞서기보다는 해당 지역의 다른 강대국에 힘을 실어주는 균형 전략ba­lan­c­ing을 통해 지역 패권국의 등장을 억누르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역내 패권국의 등장을 막기 위해 미국의 균형 전략에 기꺼이 협력할 것이다. 문제는 잠재적 패권국이 너무나 강해져서 간접적인 개입만으로는 지역 패권국으로의 부상을 견제할 수 없는 경우다. 잠재적 지역 패권국을 억누르기 위해 미국이 직접 나서 경합해야만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세계 패권을 내려놓은 미국은 과연 어디까지 개입하려 들 것인가? 250) 


미국이 탈냉전기에 가졌던 사활적 이해 중 상당수는 2023년 현재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2022년도 미국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는 중국과 러시아 등의 도발 행위를 억제하는 것이 미국의 사활적 이해에 해당한다고 적시했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 또한 미국의 사활적 이해에 해당한다고 적시했다. 요컨대 중국과 러시아의 부상을 막는 것이 미국의 사활적 이해에 해당함을 밝힌 셈이다. 그런데 중·러를 억제하여 현상 유지를 달성하는 것이 사활적 이해라고 강조하면서도, 무력 충돌에까지는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명시적인 단서를 달아 모호함을 남겼다. 즉, 2022년도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사활적 이해에 대한 위협이 반드시 무력 개입을 담보한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과 러시아 등의 도발 행위나 인도·태평양 지역의 자유와 안전을 해치는 행위 등은 오늘날 미국에 있어 실존적 위협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251-2)


영미동맹은 현존하는 가장 강대한 동맹 세력이다. 영미동맹의 다섯 개 국가(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차지한 영토는 전 세계 육지 전체 면적의 20%에 육박하고, 경제 규모도 전 세계 GDP의 30%를 훌쩍 넘는다. 미국이 포함된 영미동맹의 군사력은 단연 세계 최강이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농업목축 생산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최다 규모의 부존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리튬·니켈·코발트·구리 등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핵심 광물도 풍부하다. 대륙 규모의 국가가 셋이나 포함된 영미동맹은 지리적으로는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다로 연결되어 있고, 바로 그 바다를 지배하고 있다. 영미동맹은 미·중 패권 경쟁에서 미국이 활용할 수 있는 최강의 동맹자산이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영미동맹은 미·중 패권 경쟁이 본격적인 신냉전으로 비화하더라도 확고하게 미국의 편에 설 것이고, 설사 미국이 완전한 고립주의로 돌아서더라도 마지막까지 동맹 세력으로 남을 것이다 258)


일본은 서태평양과 남중국해, 그리고 남태평양에 중국의 해양 패권이 건설되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1905년부터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한 1942년까지 서태평양의 해양 패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팽창을 저지할 의지와 역량을 가진 유일한 나라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조공 체계에 진정으로 복속된 적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 일본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중국에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는다. 중국을 미국과 동급으로 보지도 않는다. 2021년 4월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미국과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일본을 견제하고자 모테기 도시미쓰 당시 외무상에 “대국 대결에 휘말리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2022년 11월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과 일본 양국은 모두가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있어 중요한 책임이 있는 대국”이라며 일본이 중국과 동등한 대국임을 강조했다. 262-3)


2022년 6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NATO 정상회의에서는 NATO 설립 이후 7번째로 채택된 전략개념인 마드리드 전략개념이 등장했다. 1999년에 개최된 NATO 정상회의에서는 탈냉전기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유화책을 채택한 워싱턴 전략개념이 채택됐었고, 이에 따라 미국과 유럽은 중국의 WTO 가입을 지원하여 오늘날의 중국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마드리드 전략개념에서 NATO는 러시아를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위협”으로, 중국을 유럽과 대서양의 안보는 물론이고 NATO 동맹국의 방어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체계적 도전sys­te­mi­c cha­ll­en­ge”으로 정의했다. 특히 중국과의 경쟁을 자유·인권·민주주의·법의 지배에 도전하는 야망 및 강압적 정책과의 대결이라 규정한 뒤, 중국에 맞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수호할 것이라 결론 내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쏘아 올린 공이 유럽이 자유주의 진영의 일원으로서 미·중 패권 경쟁에서 중국에 대항하게 되는 결과로 귀결된 것이다. 270-1)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미국의 세계 패권이 위협받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란이 연대하는 상황을 꼽았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해협 위기는 지엽적으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대만과 중국 사이에 발생한 지역 문제이지만, 세계적인 관점에서는 미국의 지정학적 봉쇄망을 돌파하기 위한 두 나라의 노력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와 대만해협이 각각 돌파되면 두 나라는 그만큼 지역 패권국 등극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크라이나와 대만해협은 패권의 관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 반미연대의 또 다른 축인 이란은 중·러처럼 미국의 세계 패권을 직접 겨냥하지는 않지만, 중동에서 미국의 패권을 해체하고 나아가 중동의 맹주가 되길 원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이들 세 나라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276)


브레진스키는 중국-러시아-이란의 삼각 연대는 냉전기의 공산권과는 달리 이념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고충com­ple­men­ta­ry g­rie­van­ce’으로 뭉친 연대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 실제로 러시아와 중국은 지정학적 경쟁국이고,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지역에서만큼은 러시아와 이란도 지정학적 경쟁국이다. 중국과 이란 간의 협력관계도 중국이 일대일로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국의 세계 패권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서로 연대할 필요와 유인이 있다. 오랫동안 미국의 제재에 억눌린 이란에 있어 중국·러시아와의 연대는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방구와 같다.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서방의 전면 제재에 노출된 상황에서 중국과 이란의 지원이 없으면 버티기 어렵다. 중국 또한 러시아, 이란과 연대하지 않으면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승산을 기대할 수 없다. 즉, 반미연대란 순수하게 이해관계로 결속된 세 나라 간의 전략적 연대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278)


이란의 잠재력과 지정학적 입지가 아무리 중요해도 반미연대의 핵심은 결국 중국과 러시아다. 반미연대의 결속력을 결정하는 것 또한 이 두 나라의 연대일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연대는 미국을 상대로 한 패권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한은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초강대국의 협력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세계 패권이 유지되는 동안에만 상수로 남을 수 있다. 언젠가 미국과의 패권 경쟁이 끝난 이후에는 연대할 목적을 상실한 중국과 러시아는 서로 대립하게 될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는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두 나라가 온전히 협력하는 데에도 장애로 작용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소련이 나치 독일에 맞서 연합전선을 펼치면서도 막후에서는 전후 예정된 패권 경쟁에 대비했던 것처럼, 당장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는 두 나라 역시 미국의 세계 패권이 약해질수록 협력을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상이몽을 꾸게 될 수 있다. 283-5)


중간 지대에 속한 글로벌 사우스에 있어 오늘날의 세계는 기회의 장이다. 패권 경쟁이 심화할수록 미국과 반미연대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글로벌 사우스를 회유하거나 협력을 강화할 필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아직 인건비가 높지 않은 글로벌 사우스는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을 대체할 만한 생산공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받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사우스의 입지를 키운 가장 중요한 요인은 누가 뭐래도 자원이다. 4차 산업혁명의 중추 산업을 위한 각종 원재료와 광물의 공급처로서 오늘날 글로벌 사우스의 입지는 절대적이다. 세계화 시대에는 언제 어디서든 가장 저렴한 가격에 각종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영 간 갈등이 고조되면서 자원 확보에도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를 비롯한 자원 부국엔 기회인 셈이다. 21세기의 지정학적 다툼은 글로벌 사우스와 어떠한 협력관계를 구축하느냐에 따라 유불리有不利가 정해질 가능성이 높다. 292-3)


그간 글로벌 사우스 국가에 있어 자원은 양날의 검이었다. 자원 덕택에 기초적인 경제를 꾸릴 수 있었던 측면도 있지만, 자원 때문에 착취의 표적이 된 역사도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열강의 식민지로서 말 그대로 약탈 되었고, 세계화 시대에는 다국적기업에 헐값으로 자원을 넘기거나 값싼 노동력을 착취당하기도 했다. 자원 부국일수록 경제발전이 저조한 현상을 일컫는 소위 ‘자원의 저주pa­ra­d­ox of pl­en­ty’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부패한 권력층과 결탁한 외세의 착취도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오늘날 인도네시아는 중장기적으로는 니켈의 1, 2차 가공을 넘어 ‘전기차 배터리 허브’가 되겠다는 목표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인도네시아뿐이 아니다. 지난 3차례의 산업혁명을 거치며 선진국과 다국적기업에 호된 맛을 본 글로벌 사우스는 패권 전환기를 맞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뇌리에 박힌 쓰라린 과거의 기억은 오늘날 ‘자원 민족주의’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296-7)


현재 동남아를 위협하는 중국발發 안보 위협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중국이 동아시아 최대의 수원水原인 티베트의 수자원을 통제하면서 발생한 문제다. 중국은 마오쩌둥 이래 남부의 풍부한 수자원을 북부로 끌어다 쓰는 소위 ‘남수북조南水北調’ 정책을 채택하고 치수治水에 힘쓰고 있다. 티베트에서 발원해 베트남·태국·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를 관통하는, 동남아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길이 4천 8백 킬로미터의 메콩강도 예외는 아니다. 다른 하나의 위협은 중국의 해양 팽창주의다. 남중국해를 중국의 내해內海로 만들고자 하는 중국의 야심은 동남아에 있어 거대한 위협이다. 중국은 동남아 국가 중 친중 성향이 강한 캄보디아와 맺은 비밀 협정을 통해 베트남과 태국에 인접한 레암 해군기지를 넘겨받는 등, 남중국해 포위망을 날로 공고히 하고 있다. 아직은 중국이 대만해협을 넘지 못하였기에 당면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대만해협이 무너지면 구단선은 곧바로 동남아 국가들의 실존적 위기로 부상할 것이다. 302)


2023년 2월, 시진핑 주석은 중국이 사우디·UAE 등과 협력을 강화하는 데 불만을 품고 중국대사를 초치했던 이란의 라이시 대통령을 베이징에 초대했다. 그리고 다음 달인 2023년 3월 10일, 중국이 이란과 사우디 사이를 중재해 양국 간에 국교 정상화를 끌어냈다는 놀라운 소식이 외교가를 휩쓸었다. 이란과 사우디가 국교 정상화에 합의한 다음 날 중국 외교부는 중동의 안전과 안정을 촉진하는 역할을 중국이 담당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두 나라 간의 평화가 “지속 가능하다면 환영한다”라는 애매한 코멘트를 내놓았다. 얼마 후 중국 수출입은행이 사우디와의 무역대금 결제를 위한 첫 위안화 대출을 실시하면서 ‘페트로 달러’ 체제에 대한 중국의 도전이 본격화됐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같은 달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이 주도하는 안보 협의체인 SCO에도 가입했다. 적어도 사우디가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반미연대에 맞서지는 않겠단 입장을 명백히 밝힌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행보였다. 31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쭉 미국 편에 섰던 GCC 계열 중동 국가들이 미국의 동맹 대열에서 이탈하여 다른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 기조를 같이하기 시작한 데는 복잡다기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셰일 혁명 이후 ‘탈중동’을 정책 방향으로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에서 발을 빼는 미국의 대전략이 바뀌지 않는 한, 불안을 느낀 중동 국가의 이탈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를 의식한 미국도 탈중동 행보에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미국이 과거와 같은 수준으로 중동에 계속 관여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는 시대가 됐다. 사우디와 GCC 계열 국가들은 앞으로도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오랫동안 친미 국가였던 수니파 산유국들의 그러한 행보는 단기적으로는 반미연대에 치우친 행보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 다만 사우디아라비아나 GCC 계열 국가가 반미연대의 일원으로서 미국과 대립하게 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312-3)


21세기 인도의 패권 미래가 장밋빛인 가장 큰 이유는 그 지리적 위치다. 수에즈 운하를 통한 홍해-아덴만 항로이든, 반미연대가 건설 중인 남북 국제교통회랑(페르시아만-오만만)이든 모두가 아라비아해를 통해 인도의 서쪽 바다에서 합류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물류는 이 둘 중 하나를 거치게 되므로, 인도 앞바다를 지나지 않을 수 없다. 수에즈를 통하지 않는 아프리카 동부 지역과 아시아와의 무역 역시 인도 앞바다를 통하는 것이 보통이다. 인도의 영향력은 동쪽 벵골만과 버마해를 넘어 아시아로 통하는 관문인 말라카해협까지 뻗어있다. 인도의 영토에 속하는 약 1천 4백여 개의 섬들 가운데 거의 6백여 개의 섬이 말라카해협과 이어지는 벵골만과 안다만해에 산개해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동남아시아 및 동아시아와 연결하는 모든 항로가 사실상 인도 앞바다를 지나는 것이다. 거기에 남아시아나 중동, 동아프리카에는 굴기하는 인도에 위협이 될만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321)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 미국-일본-인도-호주 간 일반협의체였던 ‘쿼드’를 전략협의체로 승격하고 IPEF의 발족을 계획하던 미국은 IPEF와 쿼드에서 인도가 중요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인도의 셈법은 미국이 바라던 것과는 달랐다. 인도는 ‘미국의 카드’가 아닌 ‘카드 플레이어’로서 독자적인 미래 패권을 추구한다. 인도양과 남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은 미국과 공유하지만, 그저 미국의 꼭두각시가 되어 중국을 전면적으로 적대할 실익은 없다. 인도는 쿼드의 안보적 색채가 강해지는 데 거부감을 나타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도 인도는 UN 차원에서 이뤄진 러시아 규탄 결의에서 기권했다. 동서냉전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비동맹 전통을 유지하며 양측 모두로부터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워낙에 전략적 가치가 높은 인도와의 협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인도 역시 중국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 이상 미국과의 협력은 필요했다. 323)


다만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할 전략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뿌리 깊은 비동맹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뀔 가능성은 높지 않다. 냉전기 인도가 고수했던 소위 ‘비연대n­on​-a­li­gn­me­nt’ 정책은 탈냉전기와 패권 전환기에 들어서 소위 ‘다중연대mul­ti​-a­li­gn­me­nt’ 정책으로 발전했다. 한마디로 모든 나라와 필요한 협력을 해서 이득을 얻겠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2022년 9월 인도는 러시아가 주도한 군사훈련인 보스토크-2022 훈련에 참여했다. 패권 전환기를 맞아 인도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의 안보 위협에 맞서고 세계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했던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는 미국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도가 인도양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세계 패권 역시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당장은 미국과 손잡고 중국에 맞서겠지만, 경제·군사적 성장이 충분히 무르익으면 인도는 인도양의 지역 패권국으로 등극하기 위한 독자적인 행보를 개시할 것이다. 324-5)


튀르키예가 잠재적 패권국이라 하면 의아할 수 있다. 튀르키예는 큰 나라이지만 중국이나 인도 같은 대국은 아니다. 국토 크기가 세계에서 30위권 밖이고, 인구는 8천만이 넘어 충분하지만 특별하지는 않다. GDP는 20위권, 군사력은 10위권이다. 그러나 절대적 힘의 우위가 필요한 세계 패권과 달리, 지역 패권국이 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패권을 조성하기에 얼마나 유리한 역내 환경이 갖춰져 있는지이다. 아나톨리아반도와 발칸반도에 걸쳐 있으며,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째로 품은 이스탄불의 입지는 독보적이다. 유럽의 공산품과 러시아·중앙아시아의 에너지, 우크라이나·러시아의 곡물은 발칸반도와 흑해, 캅카스, 중동, 지중해를 죄다 육로와 해로로 연결하는 아나톨리아반도를 거쳐 운송된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한창일 때 대한민국이 동아시아에서 지향했던 ‘중심축 국가pi­vot s­ta­te.’ 그것이 튀르키예에 있어선 지리적 선물이나 다름이 없다. 325-6)


패권 전환기를 맞아 튀르키예가 역내 패권을 노릴 수 있게 된 것은 주변국의 형편 덕도 크다. 사기적인 판도를 가졌던 소련이 건재하던 시절 튀르키예는 미군의 전진기지에 불과했었다. 당시에는 튀르키예와 동쪽 국경을 마주한 캅카스 3국도 소련이었고, 흑해 너머도 전부 소련이었다. 튀르키예는 패권국은커녕 중심축도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냉전 종식과 함께 소련이 무너지고 캅카스 지역에는 약소국이 세워졌다. 흑해 너머에는 우크라이나가 등장했다. 튀르키예에 비해 약세였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보기는 어려웠던 시리아와 이라크는 문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고, 강대국 이란도 장기간에 걸친 미국의 제재로 천천히 약화 되어갔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마지막 남은 지역 강대국인 러시아조차 크게 약해진 상태다. 러시아가 (미국이 관여를 줄인) 중동에 다시금 강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회복하기 전까지는 튀르키예가 중심축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나라인 셈이다. 326)


제7장 남은 21세기의 국제질서


현재 미국과 서방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라는 명칭 대신 ‘규칙 기반 국제질서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규칙 기반 국제질서는 국제법에 따른 ‘법의 지배’를 국제사회에 구현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오늘날 미국이 주창하는 규칙 기반 국제질서에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가장 중요한 기둥인 자유무역주의가 포함되지 않는다.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규범에 기초하는 이상, 규범의 창설과 집행의 근간이 되는 다자주의는 전제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아래서 만들어진 국제규범과 국제제도는 처음부터 국가들의 의견대립을 조율하여 협력으로 이끄는, ‘다자주의’라는 메커니즘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은 21세기에는 국제법의 구속력bi­nd­ing po­wer이나 강제력en­for­c­ing po­wer보다 국제사회의 자발적 존중과 준수에 기초한 규범력nor­ma­ti­ve po­wer이 중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342-3)


오직 규칙 기반 국제질서만이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오늘날 국제사회에 만들어 놓은 체제와 제도를 온전히 계승하는 게 가능하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주창하는 다극적 국제질서는 사실상 힘의 역학관계만을 의미하는 다극체제일 뿐, 현대적인 관점에서의 ‘국제질서’라고 부르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극체제 또는 다극적 국제질서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자주의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극체제의 복원은 소수의 나라를 제외한 대다수 글로벌 사우스도 선호할 수 없다. 미국 및 서방이 갖는 자유 및 인권에 대한 시각을 공유하지 않는다 해도, 남은 21세기에 글로벌 사우스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권 존중 원칙과 개방된 세계시장, 그리고 다자주의에 따른 국제협력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유럽도 미·중 패권 경쟁의 다른 영역에서는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하더라도, 차기 국제질서를 결정하는 싸움에서는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채택되도록 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345-6)


대다수 국가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미래는 패권 전환기 이후에도 국제사회에 다자주의가 유지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바로 미국의 세계 패권이 해체된 후에도 지역 패권국이 등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 패권국, 특히 권위주의 패권국은 자국의 세력범위에 속한 나라들을 복속시켜 종속국으로 만들 것이다. 또한 지역 패권국의 등장은 다른 모든 강대국에 지역 패권을 추구할 유인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패권국이 다자주의를 시스템적으로 강제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국제정치는 자연히 강대국 본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독자적인 행보를 걸을 만한 국력을 갖지 못한 국가들은 비슷한 이해관계와 지정학적 입지를 공유하는 동류 국가끼리 짝지어 세력을 형성하려 시도할 것이다. 즉, 남은 21세기의 다자주의는 지금보다 훨씬 느슨해질 것이고,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국가와 세력 간에 중첩적인 소다자주의가 범람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349)


소다자체제가 추후 다른 세력에 맞서기 위한 배타적 동맹체제로 발전할 위험도 있다. 동일한 목적을 놓고 서로 다른 세력이 각기 소다자체제를 결성할 때, 소다자체제 간에 이해관계가 상충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기 때문이다. 다자주의가 기본인 세계에서는 이러한 마찰을 비교적 수월하게 조정할 수 있겠지만 세력균형과 세력다툼이 대세인 세계에서는 사소한 마찰이라도 세력 간 갈등으로 비화할 위험이 있다. 그 경우 소다자체제의 당사국들은 배타적인 동맹체제로 결속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동맹체제의 등장은 갈등이 충돌로 비화할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도 위험하지만, 다자주의를 통한 범세계적 통합을 어렵게 만든다는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다자주의는 남은 21세기 동안 활발히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다자주의를 통한 문제 해결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는 소다자체제의 한계와 위험성에 주의하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라도 국제협력을 추구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350-1)


핵무기나 WMD 확산 방지, 기후변화 대응, 인공지능 규제, 우주 개발 등은 오직 다자주의를 통해서만 대응할 수 있는 문제의 예시에 지나지 않는다. 변화의 속도가 날로 빨라질 남은 21세기에 인류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종류의 도전에 수없이 직면할 것이고, 개중에는 다자주의가 아니고서는 극복할 수 없는 도전도 상당할 것이다. 다자주의에 기초한 오늘날의 국제질서는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통해 얻은 교훈 위에, 냉전 시대 이후 쌓은 세계화의 이력이 더해져 만들어졌다. 이 질서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보완하고 보강하여 더욱 진보시켜야 할 일이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로 되돌아가서는 결코 아니 될 것이다. 이미 인류는 근대 이전의 법칙에 따라서는 ‘종으로써 생존할 수 없는’ 지점까지 와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다자주의는 인류가 자초한 수많은 문제점에 대응하고 또 인류가 인류로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자리매김하게 될지도 모른다. 354)


제8장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


중국과 미국 모두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원하지만, 각자가 바라는 영향력의 성격이나 수준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양자택일 상황에 내몰리면 결국 미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중국이나 러시아도 상식적으로 인정하는 바다. 다만 중국과 러시아가 대한민국에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편에서 미국에 맞서는 것도, 미국을 버리고 중립이 되라는 것도 아니다. 비록 한미동맹을 상수로 둘 수밖에 없더라도 그들의 핵심 이익이 걸린 사안에 있어서 만큼은 그들을 적대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로서도 대북 관계에 있어서는 미국·일본과 긴밀히 공조하되 대만해협 문제나 반도체 제재,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서는 한발 물러나 중국·러시아를 자극하지 않는 방안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사실 이는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이란 명목하에 대한민국이 지난 20여 년간 꾸준히 채택해온 대전략과 일맥상통한다. 문제는 미·중 갈등이 심화하면서 전략적 모호성이 통용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374-5)


경쟁국 간에 대립이 심화하는 상황이라면 전략적 모호성에도 위험이 따른다. 전략적으로 모호한 행보를 보이는 국가는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중 패권 경쟁의 시대에도 전략적 모호성이나 심지어 적극적인 이중헤징전략d­ou­ble hedging st­ra­te­gy을 채택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되는 나라도 있다. 인도나 튀르키예와 같이 양 진영 모두로부터 열렬한 구애를 받고, 어느 쪽으로부터도 불이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나라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다르다. 다른 모든 이유를 제쳐두더라도 북한이 있는 한 미국과 멀어질 수 없고, 마찬가지로 북한이 있는 한 중국·러시아를 적대시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북한과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만 있다면 가장 좋겠으나 그동안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노선을 바꾸지 않았고, 북한은 내부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대한민국을 상대로 도발을 감행할 것이다. 전략적 모호성은 지난 시기 대한민국의 발전과 안보를 도왔지만,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375)


패권 전환기에 대한민국의 대외정책은 크게 두 가지의 상호 대립하는 전략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전략 목표는 미국과 서방에 대한민국이 자유 진영의 일원이라는 신뢰를 확고히 심어주는 것이다. 즉, 대한민국이 권위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또는 북·중·러와 미·일 사이에서 이중헤징전략을 채택하려 한다는 의심이 들만한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 미국이 안보 문제와 경제 문제를 동전의 양면으로 취급하기 시작한 이상 미국에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인식되는 것은 재앙적일 수 있다. 현재 미국은 국가별 신뢰성과 필요성에 기초해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노력은 인도와 같이 중국을 대체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나라와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신뢰할 수 있는 나라를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재구축하는 양상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신뢰를 잃어 미국의 기술과 시스템, 공급망에서 배제되는 상황은 대한민국이 감당할 수 없다. 381-2)


두 번째 전략 목표는 중국과 러시아의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 것이다. 철저하게 현실주의적 세계관에 따라 움직이는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이 존재하는 이상 대한민국이 한미동맹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즉, 한미동맹을 이유로, 또는 미국과의 협력 강화를 위해 필요한 경우 중국이나 러시아와 일정 수준 대립하거나 대치하는 것은 중·러의 입장에서도 예상 범위 내의 행동이다.  한편 북한이란 이름의 레드라인은 중·러를 상대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도 북한이 대한민국에 있어 실존적 위협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이 중·러의 레드라인을 먼저 넘기 어려운 상황이란 점도 알고 있다. 사실 이는 국제사회에서는 상식에 가깝다. 그런 만큼 북한의 위협을 관리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핵심 이익이요, 같은 맥락에서 북한의 위협을 악화시키는 외부 세력의 행위는 대한민국의 레드라인을 넘는 행위라는 점을 국제사회에 체계적이면서도 엄중히 전파해야 한다. 383-4)


본격적인 신냉전이 시작되지 않은 이상 대한민국은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을 발휘할 수 있고, 또 발휘해야 한다. 속 시원한 ‘사이다’ 해답은 없다. 다만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위기를 모면하고 기회를 살리다 보면 시간이 흐르며 상황은 개선될 것이다. 일단 패권 전환기가 끝나면 여러 변수가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더 이상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순간이 오면 미국도 여유와 관대함을 되찾을 것이고, 중국도 21세기 중반까지 동아시아 패권을 차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모험심에 따라 준동하는 대신 장기 전략을 재검토하려 들 것이다. 반대로 이번 패권 경쟁에서 중국이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을 꺾어내면 큰 혼란이 발생하겠지만, 그때는 상황이 외려 단순해진다. 중국의 지역 패권을 인정하고 순응하는 길과 역내 국가들과 연합하여 중국에 직접 대항하는 길 중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84)


규칙 기반 국제질서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서방과 비서방, 자유 진영과 반미연대 등 대부분의 진영 사이에서 중계자 또는 연결자 역할을 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다자주의가 유지되는 국제질서에서라면 대한민국의 ‘연결자’ 위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여러 지역과 진영을 연결하고 중재할 수 있는 역량은 경제와 안보 양면에서 대한민국이 국제협력을 통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즉,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의 전략적 연결성st­ra­te­gi­c con­nec­ti­vi­ty을 배양하여야 한다. 과거에도 대한민국은 여러 진영을 잇는 중계자 또는 연결자 역할을 맡기 위해 노력했으나, 세계화와 자유무역주의로 전 세계가 통합되어 있던 시기에는 대한민국의 연결자적 가치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진영 간 균열이 깊어지는 패권 전환기 이후에는 대한민국의 연결자적 가치가 더욱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여러 진영과 다층적으로 연결되기에 충분할 만큼 개방될 필요가 있다. 386)


합리적으로 고려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대북 유화책이 소진된 이상 앞으로의 대북 정책은 현실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특히 북한의 지상과제가 체제 유지라는 점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냉정하게 인정해야 한다. 북한이 제대로 된 개혁개방에 자발적으로 나설 일은 아마도 없을 거란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북한의 개혁개방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체제가 위태로워지지 않을 수준으로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여건이 허락되면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재개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동포애나 인류애적 차원에서도 인도주의적 지원은 바람직하지만, 북한 정권을 무턱대고 고사나 붕괴 위기로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끝나고 북·중·러 연대가 현실이 된 이상 일각에서 선호하는 북한 봉쇄는 어차피 실현될 수 없다. 그러니 패권 전환기가 끝날 때까지는 한 손에는 억지력을, 다른 한 손에는 소통이란 끈을 쥔 채 상황관리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389-90)


만일 자유무역질서가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훼손되지 않고 쭉 이어졌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세계화 시대에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발판이 되어준 중국에 의해 꺾이게 되었을 수 있다. 중국은 가성비를 앞세워 GVC에서 대한민국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 뒤, 기술 발전을 거듭한 끝에 산업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대한민국을 추월하는 중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미·중 패권 경쟁은 어쩌면 대한민국 산업에 행운이 될 수도 있다. 자유무역질서가 막 훼손되기 시작할 무렵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는 점도 크다. 우수한 제조업 역량에 더해 문화콘텐츠 산업의 약진으로 세계시장에서 대한민국의 국가 이미지가 크게 제고되었고, 대한민국이 생산한 상품들의 브랜드가치도 동반 상승했다. 때마침 4차 산업혁명이 찾아온 것도 큰 기회다. 패권 전환기와 함께 찾아온 기술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더욱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과 서비스를 앞세워 오히려 선두그룹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라는 법도 없다. 392)


그러나 대한민국이 패권 전환기의 높고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내부의 단합이 필요하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현재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하지만 결여된 것은 사회적 갈등을 건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를 되찾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지만, 결국은 자유민주주의로부터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건설적인 토론과 승복, 합리적인 이견 조율, 그리고 도출된 결론이 모두에게 만족스럽지는 못하더라도 대승적인 타협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정치적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을 무턱대고 악마화하지 말고, 포퓰리즘과 분열주의적 정치를 하는 정치인을 강하게 배척하며,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사안별로 합리적인 비판과 지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중용적인 시민의식과 사회문화를 제고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대한민국이 당면한 가장 큰 숙제일 것이다. 393-5)


제9장 맺는말


대한민국의 안보는 동북아시아 정세에 종속되고, 동북아의 정세는 더욱 큰 국제질서와 직결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긴밀한 한미동맹과 대승적인 한일협력을 통해 동북아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안보 환경을 조성하는 한편,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도 소통과 교류의 끈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합리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글로벌 사우스와의 협력을 통해 시장과 인력, 자원을 확보하는 한편 기술우위를 추구하며 선진국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졌던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저문 이상, 통일을 위한 무조건적 노력에 앞서 북한과 평화롭게 공존할 방법을 우선 찾아내야 한다. 또한 장차 글로벌 사우스와 반미연대도 동의할 수 있는 성격의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구축하는 데 일조하면서, 필요시 유럽과 적극 공조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진영 간 연결자 역할을 하기 위해 필요한 개방성을 전략적으로 함양하고 다자주의를 강도 있게 활용해야 한다. 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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