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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변증법 - 경이로움의 징후들
프랑코 모레티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1장 공포의 변증법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는 비슷한 삶을 산다. 둘은 상보적이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는 형상이다. 단일한 사회의 무시무시한 두 얼굴, 양 극단이다. 다시 말해 흉측하게 생긴 비참한 사람과 잔혹한 소유자, 즉 노동자와 자본가를 대변하는데, 〈사회 전체가 소유자들과 무소유의 노동자들이라는 두 계급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마르크스에게는 미래에 대한 과학적 예견(이자 미래 사회의 재조직화를 보장해주는 것)인 동시에 19세기 부르주아 문화의 종언에 대한 사전 경고였다. 공포문학은 바로 '분열된 사회의 공포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치유하려는 욕망에서 태어났다.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가 동시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물론 드물게나마 예외가 있긴 하다. 아무튼 그러면 위험이 너무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포문학은 일단 공포를 만들어낸 이상 그것을 제거하고 평화를 회복시켜야 한다. 깨진 균형을 회복하고, 역사를 멈출 수도 있다는 환상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20)
"소유 그 자체는 소비에는 무관심한 채 본성상 만족을 모르며 무제한적이다. 폴리도리의 흡혈귀는 여전히 그저 살아남으려는 가련한 목적을 위해 아가씨의 목을 조르려 유럽 전역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그저 그런 봉건 영주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대가 그의 편이 아니었으며, 그의 보수적인 욕망에도 맞지 않는다.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그와 반대로 지배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즉 런던을 정복하기 위해 금을 투자하는 합리적 기업가다. 그리고 이미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전 세계에, 즉 알프스에서 스코틀랜드까지, 동유럽에서 남극과 북극까지 파멸의 씨앗을 뿌린 바 있다. 그에 비하면 『오트란토 성』의 거대한 유령은 난쟁이처럼 보인다. 그는 단일한 장소에 갇혀 있다. 그리고 또 단 한 번밖에 나타날 수 없다. 그는 단지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일단 질서가 회복되면 영원히 침묵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의 괴물들은 영원히 살지도 모르며, 세계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가한다. 이 때문에 이들을 죽여 없애야 한다."(22)
"프롤레타리아와 마찬가지로 괴물에게도 이름과 개인적 정체성은 거부된다.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일 뿐이다. 그는 전적으로 창조자에게 속한다(마치 〈포드 회사 노동자〉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프롤레타리아와 마찬가지로 그는 '집단적이고 인공적인' 피조물이다. 자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만들어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온갖 것을 만들어내는 발명자─과학자로 '명상적'인 발견자─과학자인 윌튼과 누가 봐도 분명하게 갈등 관계에 있다. 그가 만들어낸 이 괴물 속에서 봉건적 관계가 무너지면서 도적질에 나서거나 가난과 죽음으로 내몰렸던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의 육신이 재통합되고 다시 생명을 얻는다. 오직 현대 과학─이 메타포는 〈어두운 악마의 맷돌들〉[블레이크의 시 『예루살렘』에 나오는 구절]을 가리킨다─만이 이들에게 미래를 제공할 수 있다. 과학이 이들을 다시 꿰매 붙이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주조하고 마침내 생명을 부여한다. '하지만 괴물이 눈을 뜨는 순간' 기겁해 뒷걸음친다."(23)
"공포문학은 주인공이 불안감을 자아내는 요소가 '자신 안'에 있다는, 즉 자신이 두려워하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프로이트가 묘사한 바 있는─의식에 부딪히는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 저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긴 악몽 속을 헤매다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지.〉 억압된 것은 이런 식으로 회귀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돌아올까? 광기로, 또는 단지 오직 '주변적'으로만 돌아오지는 않는다. 이러한 책들이 전달하려는 교훈은 미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자신에 대한 억압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즉 자신의 정신의 분열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 '괴물'을, '물질적인 것'을, '외적인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것이 열쇠다. 흡혈귀에 비하면 광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광기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광기는 자체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광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흡혈귀, 괴물, 미약이다."(52-3)
"사회의 유대를 깨는 사람은 누구나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문학이 축출하려는 진짜 위험이다. 심층적인 의미에서는 오히려 자유를 제한하는 이 문학은 통합된 사회, '유기적' 자본주의에 대한 욕망을 반영하고 촉구한다. 이것은 '변증법적' 관계들의 문학으로, 대립물들은 분리되어 갈등을 일으키는 대신 상대방과 동시에 기능하며 서로 강화시켜준다. 마르크스에게서는 자본과 임금노동 관계가 그러하다. 프로이트에게서는 초자아와 무의식의 관계가 그러하다. 스탕달에게서는 연인과 그가 '사랑'이라 부르는 '질병' 간의 유대가 그러하다. 프랑켄슈타인을 괴물과, 루시를 드라큘라와 묶는 관계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독자와 공포문학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작품이 무서울수록 그만큼 교화적이다. 굴욕을 강요할수록 그만큼 고상함을 가장한다. 더 많이 은폐할수록 그대로 드러낸다는 환상을 더 많이 불러일으킨다. '필요한' 것은 공포이다."(62)
2장 대일식 ― 주권의 세속화로서의 비극 형식
"우리에게 연극이라는 개념은 직접적으로 미학적 활동을 가리키지만 엘리자베스조 사람들에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적 관계들의 체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세상은 연극이며 우리는 단지 거기서 주어진 역할을 할 뿐이라는 이념은 봉건적인 '신분 사회'의 맥락에서만 진정 완벽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개인은 오직 사회적 '역할' 속의 '배우[행위자]'인 한에서만 '실존했다.' 사회는 오직 무대로서만, 그리고 삶은 오직 연기로서만 생각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 엄격하게 말해 실제적인 무대를 생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실제로 봉건 사회는 오직 종교적 형태의 연극[종교극]밖에 몰랐다. 영원히 규정된 역할을 계속 반복해서 연기하는 것 말이다. 무대의 재탄생은 오직 이 신분 사회를 구성하는 역할들이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정치적 유대의 견고함이 14세기의 장기 위기의 과정 속에서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일어날 수 있었다. 절대주의는 이 과정을 멈추려는 시도에서 유래했다."(87-8)
"셰익스피어의 장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자유와 사적 이익의 공간이 활짝 열리고 '인격'과 '기능' 사이의 격차가 생겨나자 무대로서의 세상이라는 이상이 얼마나 취약해졌는가를 냉정하게 조명해주는 데 있다. 인간 사회에 새로운 견고한 토대를 마련해주려면 '이익'이라는 이상을 위해 '충실[충성]'이라는 이상을 포기하고 사회적 유대를 봉건적 '맹세'로부터 자연법 철학의 '계약'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과 가치의 관계를 전도시킨 문화적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그리고 문학사에서 비극이 소설로 대체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보다 훨씬 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그러한 것을 읽어내 보려고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아마 그는 부르주아 문명의 여명을 선언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예시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와 반대로 그는 자신이 알던 유일한 규칙인 낡은 규칙을 준수한다면 세상은 그저 산산조각날 수밖에 없음을 가차 없이 입증했을 뿐이다."(106-7)
3장 호모 팔피탄스 ― 발자크의 소설들과 도시적 퍼스낼러티
"도시는 궁극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모든 구성요소의 가치와 의미가 물건들, 즉 다양하게 묘사되고 분류될 수 있는 존재들 형태로 결정화되는 공간적 실체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을, 시골 또는 인간이 거주하는 그 밖의 다른 어떤 형태에 대해서도 사실이다. 하지만 도시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것은 소설의 기법 속으로 도입될 것이다─은 도시의 공간적 구조(기본적으로는 집중)가 '이동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기능하는 데 있다. 너무나 당연히 공간적 이동성이지만 주로 '사회적' 이동성을 말한다. 성공과 몰락의 눈부신 속도는 발자크부터 모파상에 이르는 19세기 소설의 위대한 주제이다. 이것과 함께 도시는 현대 문학 속으로 들어와 말하자면 의무적인 맥락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히 물리적 장소로서의─따라서 묘사와 분류들의 지탱물로서의─도시가 한창 발전 중인 사회적 관계망으로서의, 따라서 서사적 시간성의 지탱물로서의 도시의 단순한 배경이 되기 때문에만 가능하다."(135)
"현대의 도시적 환경은 최초로 기형적인 것에 의존할 필요 없이 흥분되는 플롯을 창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거대한 자유방임적 도시의 기본 규칙은 '분류법의 부단한 변동'을 가속화시킨다는 기이한 특징을 갖고 있다." "분류법이 부단히 변동한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결과를 함축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예외적이고 혐오스럽다는 이중적 의미에서) 괴물 같은 것을 규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누가 가장 근접할까? 보트랭 또는 뉘싱겐? 아니면 라시티냑 또는 고리오?(그 밖에도 '괴물 같다'라는 개념은 이미 낭만주의 문화에 의해 의문시된 바 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전자보다 훨씬 더 큰 파급력을 미친 결과가 나오게 되는데,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더 이상 상징적 체계(괴물은 더 이상 준수되지 않는 분류법을 가리킨다. 모든 상징적 '법칙'이 산산조각난다), 따라서 재현된 삶의 '예외상태'가 아니게 된다. 예견 불가능성이 '일상적 삶'의 '일상적 관리' 속에 숨어들게 된 것이 그것을 대신한다."(140-1)
"발자크가 이례적으로 고안해낸 것은 젊은이의 삶은 무인도에 배가 좌초하지 않아도, 악마와의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아도, 살인을 위한 실물 크기의 인형을 만들지 않아도 흥미진진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연극평을 쓰고, 머리가 텅 빈 여배우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철석같은 의지를 결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도무지 믿음이라고는 가지 않는 친구들에 의해 행해지는 몇 푼의 아주 속물적인 투기, 약속어음에 대한 금융규제, 그리고 궁정이 나머지는 어떻게 처리해줄 것이다. 실제로 발자크와 함께 '세계의 산문'은 지루한 것이기를 그쳤다. 발자크의 플롯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연사체적─시간적─특징들을 부여한 것은 이제 막 시작된 자본주의의 바로 산문적인 사회적 관계들이었다. 주인공과 독자를 자극하기 위해 더 이상 여행에 나설 필요가 없게 되었다. 도시에 머무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여기서는 실제로 일상적 삶이 모험으로 변할 수 있었다─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반드시 그러해야 했다."(141)
4장 단서들
5장 유치원
6장 긴 작별인사 ―『율리시즈』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종말
"〈[『율리시즈』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랑을 나누고, 다투는 것을 본다. 사람들이 돈을 쫓는다. ······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생산적 활동은, 그것 없이는 이 모든 것이 불가능했을 활동의 표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이 소설에서는 노동자가 한 명도 없다. 그가 묘사하기로 선택하는 사회적 관계는 소비 관계이다.〉 위의 지적은 정확한 동시에 조야하다. 정확한 것은 바로 그것이 『율리시즈』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조야한 것은 조이스가 현실의 이러한 측면을 확대해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가 이 그림의 나머지는 모르거나 경멸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인 문화적 선택 때문에 그러하다." "조이스는 자신이 그처럼 기생적인 몰락에 너무나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영국의 지배계급에 어떤 종류의 '해법'이 아니라 단지 이 사회와 이 사회의 세계에 대한 흉측한 캐리커처를 제공할 뿐이다."(252-3)
"『율리시즈』에서 구현된 선택, 즉 소설의 시간을 하루 속으로 꽉꽉 눌러 넣는 것은 진정 급진적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 조이스는 우리에게 모든 날들이 동일하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루카치에게는 실망스럽게도─(장르로서의 소설의 기본적인 구조적 특징 중의 하나인) 역사적·문학적 '전망', 그리고 그와 함께 역사적 '진보'라는 이념을 완전히 파괴한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은 오직 영국의 위기의 특수성에 너무 몰두해 있어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조직화의 눈에 띄는 현상을 망각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우리의 당면 문제─소설 속의 '시간'─와 관련해 카프카를 조이스와 정반대 극에 놓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거의 전적으로 통시적 축을 따라 전개되며, 고립된 개인과 비인격적인 권력 장치 사이의 회복 불가능한 갈등을 핵심으로 하는데, 이것은 이미 20세기 자본주의 세계에 속한다. 카프카의 통시적인 플롯들의 결과 또한 모든 위안적 '전망'을 철저하게 파괴한다."(259)
"추론을 좋아하는 자칭 '철학자'들에 대한 패러디인 블룸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상투어를 찾아낼 수 있다. 민족이라는 개념에서부터 남녀 간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아량에 대한 호소부터 사회적 프로그램들에 이르기까지 그는─자유주의의 정통 논리의 문자에 충실함으로써─자신이 영원히 접촉을 잃어버린 세계를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미 델라 볼페가 쓰듯이 『율리시즈』는 〈······ 우리의 인본주의적인 휴머니즘적 문명에 대한 정당화가 이제는 '생명을 잃은 상투어들'의 용어로 축소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문명의 요약이자 그에 대한 평가이다.〉 그리하여 조이스의 무자비한 풍자는 블룸을 겨냥하는데, 그를 통해 더 높은 것을 겨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이스의 아이러니는 독특한 갖는데, 그것은 동시대인인 토마스 만이 이해하고, 판단하고, 설파하려면 치러야 할 대가로 지적한 '초연함'은 전혀 갖지 않으며 반대로 해결 불가능한 모순의 체계 내부에서 유래한다."(273-4)
7장 『황무지』로부터 인공낙원으로
"『황무지』는 종종 〈모든 것을 포함한 작품〉으로 규정되어 왔다. 거의 모든 종류의 이질적 소재를 포함하고, 더 이상 '문체들'이나 수준을 구분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작품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조야한 변호론처럼 보인다. 『황무지』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달하는 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요소가 다소 '통상적인' 의미─이에 기초해서는 단지 그러한 요소들이 이질적이고, 상호관계를 결여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뿐이다─이외에도 이 시의 깊은 의미론적 구조─여기서는 반대로 완전히 '동질적이며 상호 연결되어' 있다─에서 유래하는 은유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황무지』에는 상이한 코드들에서 취한 요소들을 '동화시키는 것'을 허용해주는 코드가 존재한다. 이 시의 표면에 드러나는 '모든 것을 포함함'은 이처럼 심층에 자리 잡은 형식적 기법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본질적으로 '신화적 체계'로 기능한다."(300-1)
"신화적 체계의 사용은 엘리엇으로 하여금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분열을 치유하는 것을 겨냥한 시적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대신해 이 두 가지 것이 구분 불가능한 커뮤니케이션 및 지각 형태를 수립하는 것을 허용해준다. 그것은 또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준다. 즉 어떻게 세계의 이미지를 '의미의' 완전한 '내재성'이 주어지는 '구체적 총체성'으로 복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개인이 더 이상 경험적으로 주어진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자기 자신의 '이상들' 사이의 불일치─실제로는 기원에서부터ab origine 서로 관련된─를 지각하지 못하는 총체성 말이다." "한발 뒤로 돌아감으로써 신화는 문화가 더 이상 역사적 존재의 상징적 '중립성'─따라서 잠재적 무질서─과 관련해 단순한 상부구조가 아닐 수 있도록 보장해준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샅샅이 침투시켜 '의의'를 부여하며, 따라서 그러한 존재의 모든 표출을 인간화하는 가치 체계로 자신을 드러낸다."(302-3)
"하지만 신화가 원래의 순수성을 모두 간직한 채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20세기에 그것이 '재림'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터무니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화적 사고의 매력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 기획에 착수했을 때 엘리엇의 과제는 오직 신화적 구조의 요구들과 그것을 구성하는 '소재들' 사이의 모종의 타협으로만 나타날 수 있었다. 『황무지』의 아이러니─있을까 말까한 정도이다─는 정확히 신화적 기획의 순수성은 결코 완전히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는 데 있다. 『황무지』에서 사태는 오직 어느 정도까지만 부합한다. 모든 연결 관계가 미심쩍으며, 모든 상동성은 유사성으로 변형된다. 보들레르나 단테로부터의 저 특수한 인용구의 기능은 쉽게 '다른', 유사한 구에 의해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술집 여성과 타이피스트는 다른 많은 캐릭터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포에니 전쟁이나 엘리자베스조의 런던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변형될 수 있는 역사적 '사례들'이다."(316-7)
8장 미결정의 마력
"소수의 모더니즘적 상상력으로부터 시작해보자. 해부대 위에서 우연히 만난 우산과 재봉틀, 다다, 초현실주의, 파운드, 엘리엇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몇몇 사람들은 이 기본 유형에 대해 무수한 변주를 거듭해왔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정말 그렇게 전복적 이미지일까?"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의 삶」이라는 에세이에서, 도시 거주자의 주요한 심리적 문제는 〈급속도로 이미지들이 교체되면서 밀려오거나,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포착되는 내용의 변화가 급격하거나 밀려드는 인상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경우에 더 큰 부담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짐멜의 대도시인 이 전형적인 '모더니즘'적 텍스트에서 자극들은 위험할 수 있다. 그 충격으로부터 몸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단지 그것을 보지 않는 식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대 사회가 제공하고 제시해야 하는 것 중 최고의 것이기 때문이다. 소유해야 하는 물건들이고, 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들이고, 한번 겪어보고 싶은 매혹적인 상황이다."(336-8)
"그렇다면 보는 동시에 보지 말아야 하며, 받아들이는 동시에 거부해야 한다. 모순적인 곤경이다. 그리고 부르주아적 대도시에서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끼려면 외적 자극과 주체적 지각이 다소 특이한 속성들을 소유해야 한다. 먼저 자극의 경우 그것은 '의미를 갖기'보다는 '환기적'이어야 한다. 가능하면 최대한 확정적이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누구나 거기서 '뭔가를 찾을' 수 있도록 다수의 연상에 열려 있어야 한다─더 좋게는 그러한 다수성을 생산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의 저 핵심어, 즉 모호성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다른 한편 주체 쪽에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연상의 은하계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확정된 선택─광고에서의 특수한 대상의 선택이든 아니면 시의 독법에서의 의미론적 선택이든─을 행해 나가는 출발점이 아니라 '가능성들의 장'─이 장의 매력은 정확히 '현실(성)'으로의 환원 불가능성이 점점 더 증가하는 데 있다─으로서."(338)
9장 진리의 순간
"비극에서 진리와 위기가 상호 의존하는 것은 혁명적 정치의 고전적 수사학을 예견해준다. 소렐의 『폭력론』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를 청년 루카치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루카치에게서 경제적 위기는 정확히 자본주의의 진리의 순간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총체성이라는 핵심적 개념을 〈실천이라는 영역 자체에서 파악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변형시킨다. 그것은 일상생활을 탈물상화시키는 계기로 작동하며, 〈불가피한 운명을 향한〉 자본주의의 〈오이디푸스적인 진전〉을 가동시킨다. 슈미트의 『정치 신학』은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그것 말고는 완전히 상이한 이론적 틀 내에서 '위기'라는 개념에 인식론적 우월성을 부여한다." "이후, 슈미트는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정치와 비극의 연관성의 개념적 전거가 되었고, 이 비[애]극이라는 간판 아래 두 문화의 공모는 계속되었다. 니체와 하이데거가 좌파 지식인들의 문화적 지평을 지배하고 있는 정도를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360-2)
"그렇다면 좌파와 우파는 동일한 문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한다는 말인가? (소렐은 극좌파의 원형이자 반동이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나는 좌파가 '비극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한 좌파를 우파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진리의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전도되는 가운데 정치적 신화(학)들 중 (아마 가장) 모호한 것임이 드러난다.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좌파와 우파의 큰 차이는 무엇보다 시간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무게와 기억들, 현재의 끝없는 갈등, 그리고 미래의 기획과 희망들의 산물 말이다. 하지만 문화가 위기의 순간이라는 미신적 독특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 (루카치를 기억하라. 〈이러한 순간은 하나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것에 뒤이어,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생겨나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성은 수축되고 폐지될 것이다. 과거, 미래, 현재가 모두 사라질 것이며, 그것들과 함께 모든 중요한 정치적 규정들도 사라질 것이다."(362-3)
"그렇다면 이것은 좌파는 위기─공공연한 폭력, 혁명, 전쟁─의 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평으로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까? 그것은 요점이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혁명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거나 가치를 낳는 메커니즘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특정한 상황에서 주어진 일군의 가치들의 가능한 '결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위기의 순간을 진리의 '유일한' 순간으로서도 또 '유일한' 진리의 순간으로서도 간주하지 않는 좌파의 문화이다." "'위기'에 기반한 신념은 우리 시대의 정치 현상 중 가장 모호한 현상, 즉 좌익 테러리즘에 의해 논리적·실천적 결론에 이르고 있다. 좌파가 자신으로부터 제거해야 할 것은 멜로드라마와 공허함 사이의 바로 이처럼 불건전한 공모이다." "따라서 '결과'를 형이상학적으로 무시하거나 '예외'를 바로크적으로 즐겨서는 안 된다. '파국'을 진리의 원천으로 비극적으로 갈망해서는 안 된다."(363-4)
10장 문학적 진화에 대해
"라마르크에게서 진화는 일원론적인, 분리되지 않은 발달로, 적응이라는 단 하나의 원리가 선택과 변이를 주관한다. 그와 반대로 다윈에게서 그것은 이원론적 과정으로,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변이와 필연성에 의해 통제되는 선택 사이에서 회복할 길 없이 분열되어 있다. 인간의 역사를 라마르크적으로 파악하면, 그것은 분리되지 않은 발전으로, 여기서 문제들은 오직 해결책들이 주어졌을 때만 나타나며, 해결책들 또한 항상 명확하고 오인의 여지가 없는 형태로 주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는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바람직하지도 않은) 헤겔적 꿈처럼 보인다. 내가 그것을 다윈적 이원론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유물론을 위해서이다. 문학사를 두 개의 반쪽으로, 두 개의 분리된 단계로 나누는 이론으로 말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우연만이 작동하는데, 거기서는 수사학적 변이들이 생성된다. 그리고 사회적 필연성이 두 번째 단계를 주관하는데, 거기서는 변이들이 역사적으로 선택된다."(366-7)
"유럽적 규모에서 보면 18세기에 임의로 증식하던 소설 양식들은 (19세기 들어) '교양소설'이라는 (말하자면) 새로운 종의 국제적 성공에 의해 돌연 끝나게 된다. 그 이유는 새로운, 외부적 압력 때문이었다. 세기말에 일어난 소위 이중 혁명이 그것이다. 거의 100년 동안 유럽 사회는 쾌적하고, 거의 무제한의 서식지였다. 코젤렉의 『비평과 위기』에 따르면 사적 삶의 영역은 규정상 모든 종류의 재현에 열려 있었다. 하지만 20세기로의 전환기에 가능성들의 지평이 좁혀졌다. 산업과 정치의 격동이 유럽 문화에 동시에 작용해, 개인적 기대들의 영역을 다시 그리고 '역사 감각'과 모더니티의 가치에 대한 태도를 새로 규정할 것을 강요했다. 온갖 다양한 이유에서 교양소설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최적의 상징적 형식이었다. 그리고 교양소설은 실제로 살아남은 반면 교육소설과 성장소설, 예술가소설, 알레고리 소설, 서정 소설, 서한체 소설, 풍자 소설은 모두 문학적 삶을 위한 진짜 투쟁에서 사라졌다."(370-1)
"미시 진화적 사건에 초점을 맞춰보면, 모더니즘적 완벽성─극단적인 기법적 완벽성과 극단적인 의미론적 모호성을 한데 뒤섞은─은 실로 수수께끼 같으며, 그것의 존재는 진화론의 최대 난제였을 수도 있었을 것을 상기시킨다. 즉 다윈의 말을 빌리자면 〈완성도가 매우 높은 복잡한 기관〉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름 아니라 너무 완벽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자연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와 상충되는 기관을 말이다." "몇 년 전에 굴드와 브르바는 그러한 기관들을 '굴절 적응'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따라서 나는 두 사람의 용어를 빌려 모더니즘 시의 높은 형상성은 정확히 굴절 적응, 아마 모든 문학사 중 가장 매력적이고 성공적인 '목적의 변경'이라고 말할 것이다. 즉 낯설게 하기, 모순어법, 미결정 등의 효과를 특징으로 하는 높은 형상성은 실제로 모더니즘 시의 위대한 조직적 원리이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 이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그것의 발생에서 의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385-6)
# 굴절적응(屈折適應, exaptation). 진화과정에서 신체기관이 본래의 기능과 다르게 쓰이는 현상을 의미한다.
11장 영혼과 하피 ― 문학적 역사학의 목표와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