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유신 사무라이 박정희 - 낭만과 폭력의 한일 유신사
홍대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는 말: 어떤 죽음에 붙이는 조사(弔詞)


이 책의 주인공은 ‘유신’이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한국의 ‘10월 유신’에 붙는 바로 그 유신이다. 유신은 일본열도에서 태어난 하나의 정념(情念)이다. 이 정념은 야수가 되고 괴물로 진화했으며, 급기야 거대한 괴수로 자라나 무차별한 파괴를 자행하며 파멸로 치달았다. 일본이 벌인 여러 전쟁과 침략은 그 벼락부자 같은 일본의 번영과 함께 모두 ‘유신’의 결과물이다. 유신은 두 방의 핵폭탄과 함께 죽은 듯 보였으나,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박정희와 청년 장교들과 함께 부활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유신 지사 김재규에 의해 사멸한다. 자기 파괴적 운명을 갖고 태어난 유신에게 사멸은 곧 완성이었다. 공교롭게도, 하지만 유신 자신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가장 낭만적인 죽음이었다. 이 모든 사연을 하나의 이야기로 품기 위해, 나는 유신이라는 맹목적인 괴수의 일생을 연대기로 풀며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를 넘나들어야 했다. 그것은 죽음을 탐미한 낭만과 폭력의 역사였다. 11-2)


1장 씨앗: 바람이여, 흉포해져라


13세기 일본의 전쟁 풍경은 ‘명예전쟁’의 형태에 가까웠다. 중세 일본의 전투는 ‘나노리(名乗り)’로 시작되었다. 전투를 치루기 전 무사가 자신의 이름과 신분, 족보를 상대에게 외치는 의식이다. ‘지금까지 3승 1패’ 식으로 자신의 전투 이력을 공개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싸움은 정당하며, 상대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전투에 임하는 명분을 밝힌다. 먼저 나노리를 한 장수는 상대가 자신의 나노리를 들어주었으므로 이번에는 상대가 나노리를 끝낼 때까지 기다려주어야만 했다. 의식이 끝나면 예법에 따라 싸움은 둘 중 하나로 전개된다. 하나는 대장끼리 1:1로 싸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원한 군사 모두가 다 함께 싸우는 것이다. 둘 모두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활만 사용했다. 엄밀히 말해 전투가 아니라 궁술 대결이었다. 중세 일본의 전투는 전투라기보다는 궁술과 예법, 세 과시가 어우러진 ‘활동’이었다. 이런 군대가 세계 최강의 여몽연합군을 만났을 때 벌어질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15-6)


그러나 일본의 무사집단을 차례로 휩쓸어버린 여몽연합군은 의외의 복병을 만나 자신들도 휩쓸려버렸다. 바로 일본인들이 신의 바람, 가미카제라 부르는 태풍에 의해서다. 1차 원정에서 원정군의 함대를 쓸어버린 태풍은 7년 후 2차 원정에서도 기적처럼 나타나 연합군을 쓸어버렸다. 이로써 또 하나의 관념이 탄생하였다. 몽골의 세계정복 관념이 결과적으로 일본인에게 선사한 관념은 바로 안과 밖을 나누고 ‘안’과 ‘우리’를 절대적으로 신성시하는 것이었다. 밖에서 안을 공격하는 건 사악한 행위며, 이는 결국 하늘의 응징을 받을 것이다. 일본에는 천황가의 혈통이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는 뜻의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말이 있다. 만세일계가 유전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이 말은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독립적이고도 단순한 신화의 구조를 보여준다. 만세일계는 본질적으로 한 가문의 혈통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일본은 계속해서 일본이었으며, 다른 존재였던 적이 없다.’는 선언이다. 16-7)


여몽연합군에 맞선 일본 무사들은 용감했지만 죽기 위해 싸우는 수준이었다. 용맹은 비극이 되었고, 다시 이 비극은 가미카제에 의해 낭만이 되었다. 열심히 싸우고 열심히 죽은 결과 하늘이 도와주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제사의 구조다. 세상에서 가장 탐미적인 인신공양이다. 선조들은 진심을 다해 싸우다 죽기를 반복하며 인신공양의 기우제를 지냈고, 인간들의 낭만적 죽음에 하늘은 가미카제로 응답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끝없이 자살적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전쟁수행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온 국민이 미군에 저항하다 죽겠다는 일명 ‘1억 옥쇄’는 전술이 아니라 거대한 제사 계획이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멸망을 향해 가는 행위였지만 결과는 이미 하늘의 일이었던 것이다. 가미카제를 통해 일본인들의 관념 속에서, 일본은 하늘이 지켜주는 ‘신토(神土)’임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신토를 침략한 대륙세력 특히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반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괴수가 되었다. 17)


2장 잉태: 초대받지 않은 손님


기술적 수준에서만 따진다면, 동아시아는 역사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서양을 앞선 데다, 뒤쳐진 분야가 있을 때도 곧바로 따라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이다. 근대 서양의 힘은 공장에서 똑같은 기술적 수준의 물건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었던 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대량생산 공정끼리 맞물려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표준화’라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함선을 예로 들면 어떤 함선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의 유무보다는 정확히 같은 기능과 신뢰성 그리고 규격을 갖춘 함선을 얼마나 쉽게 뽑아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기술 자체보다 기술의 결과를 어떻게 내놓는지가 핵심인 것이다. 사회구조와 경제체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핵심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런데 불행히도 19세기 동아시아 3국(한중일)은 서양의 기술 자체에만 시선이 사로잡혔다. 19세기 서양 문물의 뛰어남에 충격을 받은 동아시아 3국은 한자만 다를 뿐 정확히 같은 뜻을 지닌 단어를 되뇌었다. 29-30)


#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여몽연합군에 이은 두 번째 고질라는 흑선(黑船)이었다. 1853년, 페리 제독(1794-1858)이 이끄는 4척의 증기선 군함이 에도 막부의 본거지에서 가까운 우라가, 현재의 요코스카 앞바다에 나타나 개항(開港)을 요구했다. 사실 막부는 미 해군이 나타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막부는 침착하게 적당히 시간을 끌고 되돌려보냈다. 다음 해 페리 제독이 이번에는 9척의 흑선을 이끌고 왔을 때 막부는 순순히 굴복했다. 막부가 미국의 무력시위에 순응한 이유는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외려 국제적인 감각이 있어서였다. 막부는 1차 아편전쟁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어차피 9척의 흑선을 물리친다고 해도 그다음이 문제였다. 서구 열강은 그냥 물러서는 법이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이번에도 일본 민중이 막부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작 9척의 배에 백기를 든 사실이 알려지면서 막부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마 막부도 그 정도의 반감이 일어날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31)


사무라이들은 막부가 일본에 전쟁 없는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기에 불편해도 그간의 억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막부가 자격을 상실한 이상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에 더해 또 한 사람이 크게 분노했다. 바로 고메이 천황이다. 천황은 오히려 일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반대로 일본의 자연물인 천황은, 자신의 인격과도 같은 일본이 허락 없이 외국에 개방되는 사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사무라이는 윗사람을 섬기고 윗사람은 더 높은 권력자를 섬긴다. 충(忠)의 최종 기착지는 쇼군이었다. 그런데 쇼군보다 더 높은 천황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더군다나 천황폐하께서도 쇼군에 분노하고 있다면! 그래서 사무라이들은 순식간에 토막(討幕), 막부를 토벌한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을 수 있었다. 하급 사무라이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 천황을 받들어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들불처럼 일어났다. 32-3)


3장 탄생: 신성한 타락


사쓰마는 어느 정도의 전투역량을 가진 작은 병영국가였다. 1863년 8월, 사쓰마와 영국 간에 벌어진 사쓰에이전쟁은 영어로 ‘Bombardment of Kagoshima(가고시마 포격전)’이다. (여기서 영국 함대의 후퇴로 간신히 거둔) 사쓰마의 ‘승전’은 모순적이다. 이익을 위해 승리했다기보다는 승리를 위해 파멸적인 피해를 감수했다. 천황의 인정과 승리 자체라는 추상적인 영광을 얻은 대가로 사무라이와 주민들은 전후 복구에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복구가 끝난 뒤에도 희생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다음의 더 큰 승리를 위해 더 강해져야 하므로 더 많은 비용과 노동을 투입하면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가치만 남는다. 물론 가치를 위해 사대부가 목숨을 버릴 수도 있고 민중이 헌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실적 결과를 위한 가치여야 한다. 가치 자체만을 위한 가치는 현실을 파괴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성립된 일본제국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일이다. 42)


사쓰마에서 영국과 갈등이 높아지던 1863년 6월, 조슈에서도 서양세력을 상대로 무력 갈등이 일어났다. 6월 25일,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다 잠시 정박한 미국 상선 펨브로크 호(Pembroke)에 조슈 번의 군함과 해안포대가 갑자기 대포를 쏘기 시작한 것이다. 조슈의 번사들이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실력행사를 통해 일본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면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비교적 평등한 조약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어서였다. 무력 갈등은 곧 시모노세키전쟁이 되었다. 서구 열강의 강력한 힘을 확인했음에도 조슈 번사들은 여러 부대들을 새로 창설하고 투쟁 일변도로 맞섰다. 조슈 번이 서양 군대에 점령당하는 지경에 이르자, 번사들은 이웃한 번인 고쿠라(小倉) 번에 쳐들어갔다. 그리고는 고쿠라 번의 일부를 점령해 그곳에서 해안포대를 쌓아 다시 저항했다. 후퇴 없이 오직 직진만 하는 의지는 대단했지만 전황을 바꾸기는 불가능했다. 조슈는 시모노세키전쟁에서 참패했다. 43)


막말(幕末)에서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이바라키현에 해당하는 미토(水戶) 번의 역할은 지대하다. 미토 번사들 역시 조슈와 사쓰마 번사들처럼 가치투쟁에 자신들의 목숨을 아낌없이 몰아넣었다. 정작 유신 정부가 수립되자 미토 번은 단 한 명의 정부 요인밖에 배출할 수 없었다. 실력 있는 번사들이 모두 죽은 후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을 때,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했다. 그 모든 무모함과 과격함은 결국 옳았다. 일본은 옳은 나라이므로 이제 밖/세계를 상대로, 즉 청나라와 러시아, 미국에 싸움을 걸어야 한다. ‘상대가 강대한 데도 불구하고/옳은’ 전쟁이므로 싸운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에는 ‘상대가 강대한 만큼 무모한 전쟁이므로/옳다’는 무서운 관념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살아남지 못해 지워진 미토 번 대신 어쨌든 살아남아 역사에 길이 남은 죠슈와 사쓰마의 운명은 이후 일본이 겪은 폭주의 경로와 그 결과를 예고하는 불길한 징후로 남았다. 46-7)


수많은 지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했더니 유신이라는 선물이 주어졌다. 여기서 소위 ‘지사 문화’라는 게 생긴다. 자신의 신념과 대의에 따라 목숨을 거는 행위를 존경하는 문화다. 선과 악으로 이루어진 윤리적 세계관에서 ‘나’는 올바름을 위해서 싸운다. 이때 ‘나’의 적은 올바를 수 없다. 그는 악이다. 만약 적을 인정하면 나는 싸움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투쟁을 그만두던가, 상대편을 인정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정의가 아니면 불의이기 때문이다. 미학적 세계관에서 ‘나’의 올바름은 상대적이다. 나는 나의 올바름을, 적은 그의 올바름을 위해 싸우고 죽는다. 이런 죽음은 탐미적이다. 적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아름다우면 된다. 마초적이고 생사에 초탈하면 인정해 마땅하며 감동하게 된다. ‘큰 정의’나 ‘작은 불의’ 따윈 없다. 뜻이 크거나 작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기개, 패기, 혈기, 기세 등의 말로 표현된다. 미학적 세계관은 올바름이 아니라 멋스러움을 추구한다. 52-4)


4장 팽창: 전쟁중독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스스로도 무모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은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청일전쟁에 동원된 중국군은 사실 군벌인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이 소유한 사병이었다. 사기와 훈련도에서 일본군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홍장은 자기 사병의 희생을 염려했다. 사병이 희생을 치르면 중국 내 다른 군벌들과의 경쟁에서 불리해질 뿐이다. 그래서 청군은 소극적으로 싸우며 여차하면 후퇴를 거듭했다. 바꿔 말하면, 그렇게 싸워도 일본을 이길 거라고 계산했다. 이홍장의 계산이 틀린 것만도 아니다. 일본군은 평양 전투에서 식량과 탄약을 모두 소진했다. 조슈 출신 장교들은 천황폐하의 황군은 후퇴도 항복도 할 수 없다며 최후의 자살 돌격을 준비했다. 바로 그 순간 청군이 항복했다. 일본군의 모습을 본 청군은 저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군대가 식량도 탄약도 모두 떨어졌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무모함이 상식의 선을 넘으면, 거꾸로 상식이 속아 넘어가는 법이다. 68)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의 함대는 21세기의 핵잠수함과 다르다. 필요할 때마다 육지에 배를 대고 석탄을 공급받지 않으면 배는 그저 바다를 표류하는 비싼 고철이 되고 만다. 전투력이라는 것은 사시사철 필요할 때 언제든 발휘할 수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함대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1년 내내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이 필요하다. 당시 러시아제국은 영국과 함께 세계의 2강이었다. 충분한 부동항을 확보하지 않고는,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발트함대도 영국에 대적할 수 없다. 영국이 ‘세계 최강’의 함대가 활동할 수 있도록 조건을 허락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반도는 부동항이 넘치는 곳이다. 러시아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동항 후보지는 한반도 남해였다. 일본에서는 러시아를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이 다른 상식적인 논의를 짓눌러버렸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청일전쟁의 승리가 선사한 관념이었다. ‘일본인은 불리하기 때문에 모든 불리함을 극복하고 이길 것’이라는 논증이 되고 마는 것이다. 71)


애초에 패전하고 배상금을 물어야 할 때는, 상대가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어서다. 일본은 이겼다. 그러나 이기기만 했다. 모든 역량을 소진하고 껍데기만 남은 일본은 러시아에 대포 한 발 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러시아라고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러시아는 받아내고 싶은 게 있으면 다시 쳐들어와서 실력으로 받아내라고 일본에 큰소리쳤다. 결국 일본은 배상금 없는 전후처리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올랐다. 이기기만 하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받고 삶에 숨통이 트일 거라고 기대했던 일본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마침 전사자의 시체와 팔다리를 잃은 부상병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군인들의 영웅적인 희생으로 얻은 결과를 무능한 정치인들이 망쳤다는 여론이 대세가 되었다. 도시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일본 내각은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대거 사임한 자리를 군인들이 채웠다. 결과적으로 군부의 힘이 더 강해지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일어났다. 80)


이미 일본 경제는 프로파간다로 수습할 수 없을 지경으로 붕괴한 채였다. 일본에 남은 운명은 좋아 봐야 국가 부도 사태였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쓰시마 해전을 주의 깊게 관찰한 영국은 미래 해전을 위해서는 한 단계 발달한 형태의 군함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드레드노트(Dreadnought)급 군함이다. 자금과 역량이 풍부한 서구 열강이 드레드노트급 개발 경쟁에 뛰어들자 일본이 그때껏 피눈물을 흘려가며 손에 넣은 모든 전함은 구식이 되고 말았다. 기껏 무수한 풍파를 겪으며 러시아를 꺾는 열강의 지위에 오른 일본은, 드레드노트의 시대가 오면서 순식간에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아무것도 없는 공백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이미 폭력의 트랙을 질주하던 일본은 관성대로 드레드노트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인간인 이상 더는 견딜 수 없었고, 러일전쟁을 통해 내부적으로 파멸해온 일본 역시 비참한 몰락이 예정돼 있었다. 기적이 없는 한 일본과 유신은 끝장이었다. 80)


5장 폭주: 정결한 세계를 지키는 야만


1913년 당시 일본의 총리는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権兵衛, 1852- 1933)다.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나 사쓰에이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전형적인 유신 지사였다. 조슈 번사보다 합리적인 경향이 있는 사쓰마 번사답게 그는 문민주의자였다(어디까지나 조슈의 관점에서다). 그가 속한 사쓰마-해군 세력에 의해 일본이 ‘나약하게 타락하는’ 모습을, 조슈 번벌은 앉아서 지켜볼 수 없었다. 사쓰마를 막기 위해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가 나섰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조일수호조약으로 한반도와 인연을 맺은 정치가이자 외교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5-1915) 등과 함께 ‘조슈의 3대 인물’에 꼽히는데, 특히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제국 군국주의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유명하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해군과 지멘스 사이의 비리(해군이 말도 안 되는 높은 가격에 드레드노트 관련 제품을 구입하면, 매출액의 15% 가량을 일본 해군에 상납한다)를 독일 정부에 일러바쳤다. 93-4)


일본은 드레드노트 하나에만 국가 재정의 30%를 쏟아붓고 있었다. 현재 일본의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은 1%가 조금 넘는 수준이며, 그나마 1%의 벽도 수십 년 만에 간신히 깨졌다.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병영국가인 북한의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이 23% 수준이다. 1913년 당시 일본인의 삶의 질은 드레드노트라는 괴물에 잔혹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해군과 외국 자본의 협잡이 드러난 것이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그런데 조슈의 예상보다 더 분노하고 말았다. 조슈 번벌은 사쓰마가 퇴진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탈환하는 정도까지만 국민이 분노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일본 민중은 길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은 물론이고 국회의사당에까지 쳐들어갔다. 일본 민중은 사쓰마는 물론 조슈까지 포함한 번벌 세력 전체를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 지멘스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는 문민정부가 출범했으며, 최초로 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이어진 십수 년간의 시기를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른다. 94)


여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한국인은 구시대를 청산할 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속담처럼 문자 그대로 뒤집어 엎어버린다. 한국인은 확실한 변화가 아닌 것을 개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김영삼이 하나회를 단박에 소멸시켜 군부를 청산해버린 데에는 그의 개인적인 성품도 큰 몫을 했지만, 결국은 그러한 과단성을 한국인들이 지지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일본은 다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문민통치가 군부통치에 근소한 판정승을 거둔 상태다. 더 냉정하게 진실을 말하자면, ‘군부가 어쩔 수 없이 문민 세력의 존재를 용인해주는 상태’다. 당시의 일본에서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 같은 사무라이 출신 군인이 일본 총리나 조선 총독이 되어도, 조슈와 사쓰마 번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데모크라시’로 불릴 수 있었다. 실제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일본 정치의 막후로 정계를 주름잡았다. 군부정치라는 간판을 내려 보이지 않는 곳에 잘 비치해두었을 뿐이다. 95)


두 번의 국제전과 드레드노트에 혈액과 장기까지 팔아치운 일본은 중환자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정도로 건강을 회복할 상태가 못 됐다. 여전히 일본은 장기적으로 멸망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계속된 우연적 행운이 이번에도 갑자기 불어닥쳤다.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다. 일본은 훗날 비슷한 행운을 한국전쟁을 통해 한 번 더 누리는데, 두 번 모두 세계 1류 국가로 일어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차대전 당시 미국산 공산품은 21세기 초반인 현재의 기준으로 중국제 정도의 위상을 지녔다. 일본 제품에 대한 신뢰성은 지금의 베트남제 정도였다. 양쪽 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유럽에 막대한 무역 흑자를 기록하며 일본은 되살아났다. 아니 부활한 정도가 아니라 다시 태어났다. 일본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화려한 변신에 성공했다. 1차대전이 끝나고 나면 남의 전쟁으로 우뚝 선 두 나라,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 지배권을 놓고 대결하는 시대가 온다. 97-8)


1923년, 모든 것을 집어삼킬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일본제국의 번벌 세력은 관동대지진이라는 기회를 틈타 ‘내부의 적’을 설정해 제국주의에 반항적이던 일본 국민을 결집하는 데 단번에 성공했다. 일본 군부에 있어 재일 조선인은, 히틀러에게 있어 독일에 사는 유대인과 같은 의미의 땔감이었다. 일제 군부는 자신들이 도취한 유신의 정념에 일반 국민을 포섭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폭력의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다. 관동대지진 2년 후 1925년, 유신은 군국주의 일본의 틀을 완성한다. 치안유지법을 통해서다. 치안유지법은 한국의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의 아버지다.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수습한다는 핑계로 실행된 치안유지법의 핵심은 두 가지다. 감히 천황제의 신성함을 의심하지 말 것 그리고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지 말 것이다(사회주의를 탄압하기 위한 명목이었다). 천황은 다시 절대적인 군 통수권자가 되어 군부가 자행하는 모든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마법의 장치가 되었다. 102)


6장 광기: 순수의 시대


유신의 폭주로 인해 실행된 치안유지법은 아이러니해 보인다. 이 법이 발효된 후부터 약속이나 한 듯 젊은 군인들이 무력을 동원해 쿠데타와 하극상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보면 쿠데타, 항명, 기타 다양한 폭력사고는 치안유지법으로 억압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치안유지법이 오히려 폭력투쟁의 에너지를 조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치안유지법은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법의 근거로 삼는다. 즉, 천황에 대한 마음만 진심이라면, 어떤 행동도 인정받는다는 논리가 숨어 있다. 비록 죽음으로 대가를 치를지언정 결기 자체는 존중받는 ‘지사’의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이다. 천황의 신성함은 절대적 진리가 되었으므로, 치안유지법 실행 이후의 폭력은 ‘내가 천황폐하를 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순수성 투쟁’의 증거로써만 가치 있게 되었다. 천황을 사랑하는 한 어떤 짓도 할 수 있으며, 폭력에 천황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유신의 광기는 중국 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06)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다. 만주사변은 결과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에 와서 ‘용의주도’하게 설계되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건을 기획한 사람은 단 세 명의 관동군 장교였으며, 상부의 명령도 없이 제멋대로 저질렀을 뿐이다. 만주사변으로 확대된 9월 18일의 류탸오후(柳条湖)사건의 계획은 이렇다. 1928년 6월 4일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1883-1955)가 주도한 황고둔(皇姑屯)사건으로 아버지 장쭤린을 잃은 장쉐량이 식식거리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국민당과 손을 잡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전쟁에 목마른 관동군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그들은 관동군이 치안을 담당한 남만주철도의 선로가 폭발한다면 장쉐량의 짓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동북군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으니 관동군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승리가 모든 과정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래서 주동자들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철로를 폭파해버렸다. 112)


관동군은 다음 해인 1932년 2월 만주를 완전히 장악했다. 일본은 생각하지도 못한 싼값에 덜컥 만주를 손에 쥐었다.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주동자들은 국가적 영웅이 되어 파격 승진했다. 사실 이제까지 조선과 대만은 들인 노력에 비해서 그렇게 돈이 되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조선인들의 고혈을 짜내긴 했지만, 식민지에 저지르는 악행에 비해서는 수지 타산이 좋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말도 잘 듣지 않고 쓸데없이 똑똑했다. 같은 한자 문명권 안에서 오랫동안 공존했기에 백인 통치자가 손쉽게 다루는 흑인이나 인디오보다 훨씬 골치 아픈 상대였다. 일본이 부러워하는 ‘식민지다운 식민지’는 남아프리카나 브라질, 인도처럼 광대하고 풍요로운 먹잇감이었다. 만주를 차지해 ‘식민지 갈증’이 단박에 해소된 일본이 만주사변 주동자들을 두둔하고 추켜세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젊은 군인들 사이에 결과는 하늘에게 맡기고 일단 무력을 휘두르고 보자는 과격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114-5)


일본의 군국주의가 완전무결하게 완성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건이 더 필요했다. 1936년 벌어진 2·26사건이다. 이 사건의 정신적 배경에는 기타 잇키(北一輝, 1883-1937)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1920년대부터 황도파 청년들의 사상적 스승 노릇을 했다. 아시아의 수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기타 잇키 역시 신해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는 신해혁명을 지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중국 현지에서 혁명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의 본명은 기타 데루지로(北輝次郞)였는데,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식 이름인 잇키(一輝)로 개명했다. 이 이름은 한편으로 민중 봉기를 뜻하는 일본어 잇키(一揆)와 발음이 같다. 그의 개명은 혁명가 쑨원의 호(號)가 일본식 이름인 중산(中山;나카야마)인 것과 쌍을 이룬다. 중국인인 쑨원은 일본에서 근대화를, 일본인인 기타 잇키는 중국에서 혁명을 꿈꾸는 법을 배웠다. 그는 열혈 청년들과 장교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일본 정치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18)


황도파 장교들은 어려서부터 천황제일주의를 교육받았다. 천황에 대한 충성심은 흔들림 없었지만, 일본의 현실에 대해서는 분노했다. 당시 일본은 농촌의 인구가 도시보다 많았다. 순혈이 되지 못하는 대부분의 장교들은 농촌 출신이었다. 그들은 농촌에서 지주나 사족(士族, 사무라이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에서 일반 농민의 아들, 도시의 노동계층 자제로 구성된 사병들에게 일본 민중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모순적인지 전해 들었다. 일본 민중의 삶은 엉망이었다. 사병의 부모들은 고된 노동에도 굶기 일쑤였고 자라면서 누이가 팔려가는 모습을 본 경우도 허다했다. 이들은 일본제국을 뿌리부터 뜯어고치기 위해 기타 잇키의 지령에 따라 약 1,500명으로 구성된 ‘결기(決起, 떨쳐 일어남)부대’를 결성했다. 그들의 목표는 메이지 유신보다 순수한 ‘쇼와 유신’ 그리고 ‘존황토막(尊皇討幕, 천황을 받들고 막부를 토벌함)’을 대신한 ‘존황토간(尊皇討奸, 천황을 받들고 간신을 토벌함)’이었다. 119)


2·26사건을 오해하면 안 된다. 직관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아무리 일본이 총칼을 들고 일어난 젊은 혈기를 참아주는 지사 문화에 젖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2·26사건처럼 과격한 행동은 도무지 참고 넘어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상은 반대다. 과격한 세력을 더 과격한 세력이 진압하고 일본을 완전히 거머쥔 사건이다. 그 바탕에는 순수성 투쟁이 있다. 통제파는 황도파와 경쟁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 자신도 순수해져야 했다. 순수함의 결론은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였다. 일본을 위해 전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 일본이 존재하는 체제다. 황도파의 사상이 사회주의적 파시즘이라면 통제파의 그것은 순수한 파시즘이었다. 관동군이 된 황도파 장교들은 만주군 소속 조선인들에게 기타 잇키의 사상과 2·26사건을 열심히 설명했다. 실패한 거사는 그들에게 낭만적인 전설이 되었다. 전설을 전해 들은 조선인 중에는 훗날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도 있었다. 120-1)


1937년 7월 7일 발발한 중일전쟁은 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으로 시작된다. 그 유명한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 1888-1966)는 독단적으로 부대를 이끌고 관할지를 넘어 루거우차오를 무단 점거했다. 그로부터 4년 후, 스기야마 하지메는 쇼와 천황에게 어째서 아직도 중국이 정복되지 않았느냐는 질책을 들었다. 그렇게 유신은 중일전쟁, 아니 죽음의 길로 홀린 듯 빠져들었다. 태생부터 자살적인 유신의 숙명이었다.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돈과 자원이 필요했다.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을 점령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태평양 지배권을 놓고 미국과 싸워야 했다. 일본은 전쟁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지’하거나 ‘확대’하기 위해 또 전쟁을 시작했다. 그 종착역은 필연적 죽음이었으므로, 이제 유신 자체가 된 일본은 죽음을 짝사랑하기 시작한다. 옥쇄, 반자이 돌격, 가미카제는 모두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123)


7장 임종: 덴노 헤이카 반자이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도 많다. 일본은 점과 선을 확보할 수 있었을 뿐 면은 차지할 수 없었다. 점은 도시, 선은 도로와 철도다. 그러나 진짜 중국은 강산과 농경지 그리고 농민이었다. 장제스와 국민당은 공산당에게 배운 수법을 일본군에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바로 게릴라전이었다. 일본은 늪에 빠졌다. 이 경우 일반적인 집단이라면 어떻게 늪에서 빠져나올지를 고민하지만, 일본은 어떡하면 늪에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갈까를 궁리했다. 그렇게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이 시행된다. 국가총동원법은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국가가 통제하는 법이다. 이 법을 무기로 일본 군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껏 처분할 수 있었으며, 노동쟁의를 포함해 모든 쟁의가 부정되었다. 이때 나온 슬로건이 거국일치(擧國一致, 온 나라가 하나로 뭉침), 진충보국(盡忠保國, 충성을 다해 나라를 지킴)이다. 국가총동원법 아래에서 일본과 식민지 민중들은 진액까지 짜이고 말았다. 129)


1941년, 평균 연령 33세인 일본 최고의 인재 35명이 선발되어 총리실 산하로 집결했다. 이들의 모임을 ‘총력전 연구소’라 불렀다. 총력전 연구소는 여름 내내 미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가정 하에 모든 상황과 가능성을 고려하여 전쟁 결과를 예측했다. 몇 번을 계산해도 결론은 명백했다. 일본은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했던 도조 히데키는 젊은이들을 훈시했다. 〈연구에 대한 제군들의 노고가 크지만 실제 전쟁이란 것은 책상머리 회의와는 다르다. 러일전쟁도 모두 우리가 질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승리했다. 전쟁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제군들은 그 의외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천황이 납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전쟁이 결정되었다. 이 전쟁은 일본 육군의 입장에서 부르는 말로는 ‘남방작전’으로, 동남아시아 육지 점령전을 뜻한다. 해군 중심으로 보자면 미국과의 태평양 제해권 싸움인 ‘태평양전쟁’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는 결국 태평양전쟁에 수렴된다. 134-5)


일본은 홍콩, 인도차이나, 필리핀, 동인도제도, 버마를 모조리 쓸어 담으며 일단은 빈집털이에 성공했다. 현지 주민들은 처음에 일본을 환영했다. 환호성을 지른 곳도 있었고, 조용히 관찰한 지역도 일본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적으로 돌아섰다. 일본은 공짜로 얻은 유리한 전쟁 환경을 스스로 걷어차고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특히 필리핀에서 큰 곤란을 겪었다. 필리핀 전역은 일본군과 미군을 합쳐 문자 그대로 백만대군이 뒤얽혀 싸운 초대형 전장이다. 여기서 일본은 최소 30만 이상, 최대 52만 명 이하의 전사자를 낳았다. 태평양전쟁 전사자 수의 절반 이상이 필리핀의 산악과 정글에서 죽고 말았다. 일본을 끝장낸 것은 필리핀을 떠나며 “나는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고 한 약속을 지킨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휘하의 미군이지만, 그때까지 일본군을 붙잡고 괴롭힌 건 ‘처음엔 일본군을 환영한’ 현지인 게릴라였다. 137-9)


미군의 일본 본토공격작전의 이름은 무시무시하다. 바로 ‘몰락작전(Operation Downfall)’이다. 미군 총인원 백만 명 이상이 책정되었다. 여기에 소련, 영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중화민국, 뉴질랜드가 연합군으로 참전할 예정이었다. 일본이 ‘외지(外地)’에서 저지른 악행이 모든 것을 정당화했다. 일본 열도에 그 어떤 공격을 퍼부어도 도덕적인 문제가 없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일본군은 치치지마(父島)에서 미군 포로를 미식과 여흥을 위해 잡아먹기도 했는데,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죽어야 할 일본인의 수는 소리 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대본영도 전쟁에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면 항복하면 된다. 하지만 미국이 몰락작전을 수립할 즈음, 일본은 탐미적인 몰락을 꿈꿨다. 조종사와 전투기가 적함을 들이받아 자폭하는 ‘가미카제 특공’이 실시되었다. 다시금 전쟁은 제사가 되었다. 도미나가 교지는 가미카제 특공이 출격할 때면 조종사들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제군들은 이미 신’이라며 찬사를 바쳤다. 147-8)


일본은 가미카제가 통한다고 느끼자 아예 가미카제 전용기인 츠루기(劍, 검)를 생산했다. 이외에 1인용 인간 자폭어뢰 가이텐(回天, 회천), 인간 자폭로켓탄 오우카(桜花, 앵화), 자폭보트 신요(震洋, 진양), 인간 자폭잠수부 후큐류(伏龍, 복룡) 등 인신공양 제사용품들이 쏟아져나왔다. 일본의 공업생산력은 완전히 붕괴한 후라서, 일회용 자폭 병기 이상을 만들기도 힘들었다. 도조 히데키는 ‘1억 총옥쇄’를 부르짖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참으로 불길하게도, 1억이란 숫자엔 조선인까지 포함돼 있었다. 도조 히데키가 입에 담은 ‘죽창’은 진심이었다. 일본은 ‘본토결전(本土決戰)’ 전에 이미 사기그릇 수류탄, 유리병 수류탄을 만들어 사용했다. 금속 제련은 비용이 많이 드는 탓이었다.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학교의 책걸상을 잘라 만든 15세기 기술 수준의 화승총*, 13세기 구조의 원시적인 로켓을 제작했다. 기원전부터 사용되던 투석기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학생들에게 죽창을 사용한 창술 훈련을 시켰다. 148-9)


* 금속제 책걸상 다리를 총구로 사용했으며, 총몸과 개머리판은 책걸상의 목재로 충당했다.


일본은 미군정(GHQ)의 통치하에 들어섰다. 그런데 항복 직후의 일본에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일본은, 국가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미군을 위한 위안소(慰安所)를 설치했다. 55,000여 명의 여성이 모집되어 미군의 성욕 해소를 위해 일했다. 직관적으로 보면 더없이 비굴해 보인다. 맥아더는 위안소를 역겨워해 ‘민주주의의 이상에 방해된다.’며 폐쇄해버렸다. 어째서 일본은 자발적으로 자국 여성을 점령군에게 바쳤는가. 이는 사실 마지막 ‘전투 행위’다. 일본은 자국 군대가 그랬으므로, 미군 역시 일본 여성을 집단강간할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인에게 일본 여성의 자궁은 일본의 자연물이다. 미군 위안부는 나머지 여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방어선’이다. 그들의 자궁은 본토를 지키는 옥쇄이면서, 반자이 돌격이나 가미카제 특공을 감행하는 ‘병정’이었다. 남자 군인의 목숨과 여성 자궁의 순결함을 1 대 1로 치환하면 위안소 운영의 ‘관념적 실체’를 명징하게 이해할 수 있다. 150-1)


8장 부활: 윤리적 세계와 미학적 세계


1946년 5월 8일,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가 미군 수송선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름은 박정희(朴正熙, 1917-1979). 그는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한 1945년까지 관동군 장교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였지만 조선인 박정희로 되돌아왔다.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박성빈과 백남의 사이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초대 부통령 이시영, 2대 부통령 김성수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 이들은 조선인으로 태어나 대한제국의 근대화 시도를 목격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민족 정체성을 재확인했고, 최종적으로 한국인이 되었다. 이승만과 이시영, 김성수에게 일제강점기는 자신의 생애 안에 걸린 액자다. 반면 박정희는 태어날 때부터 국적이 일본제국이었다. 민족사(史)가 아닌 개인의 삶을 기준 삼으면 엄밀히 말해 박정희에게 광복(光復, 빛이 돌아옴)은 광복이 아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나라를 되찾지 않았다. 기존의 체제가 사라지고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154)


박정희는 태생적으로 윤리적인 세계가 아니라 탐미적 세계의 일원이었다. 박정희는 음악에 대한 감각이 예민했으며, 군사독재자라는 살벌한 이미지를 걷어내고 그의 문장을 곱씹으면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기조가 흐름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일본 영웅들의 전기를 읽고 열광했다. 나중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일대기에 푹 빠졌다. 하지만 과거의 이야기보다 더 그를 사로잡은 것은 눈앞의 매력적인 존재들이었다. 박정희는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구미에서 야외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고 매료되었다. 일본군은 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강력하고 조직적인 집단이었다. 그들의 복장, 무기, 일사불란한 제식이 미학적 인간으로 자신을 단련한 소년에게 얼마나 인상적이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박정희 같은 인물형은 유행에 민감하다. 일본제국 체제에서 그 무엇보다 빛나는 유행은 군대였다. 그는 본국의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독자 행동한 관동군이 동아시아의 슈퍼스타로 박수갈채를 받는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 157-8)


박정희가 중위 계급을 달고 나서 불과 한 달 후, 일본 천황이 미국에 항복했다. 관동군은 해산되었고 박정희는 조선인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향했다. 한국광복군을 위시한 항일투사들이 만주군 출신 조선인을 공개적으로 모집했다. 전쟁이고 항일이고 다 끝난 마당에 어째서 만주군 장교까지 필요로 했는지 의아해 보이지만, 많은 인원이 함께 모여 안전하게 귀국하는 일은 의외로 섬세하고 치밀한 군사작전에 가까웠다. 그런 만큼 산만한 인원을 효과적으로 통솔할 인재들이 필요했다. 만주군 출신 조선인에 대한 광복군의 시각을 짧게 정리하면 아마도 ‘좀 재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 민족의 일원이자 유능한 인력’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광복군 중대장이 되었다. 광복군 병사들을 일제식으로 강압적으로 통제하다가 상급자에게 욕을 먹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만약 광복군이 조선인 일제 군관을 민족반역자라고 생각했다면 총으로 쏴 죽이면 그만이다. 그들은 그저 직업인으로 평가받았다. 162)


일제강점기 말기 대부분의 조선인 일제 군관들의 계급적 배경은 빈농이었다. 그들은 친일 지주를 비롯해 구체제 기득권에 대한 불타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 나는 ‘조선 대 일본’, ‘민족 대 반민족’으로 구분되는 전통적인 진영논리에 한 가지 주제를 더하겠다. 그것은 ‘계급’이다. 식민지 조선 내부의 계급갈등을 빼놓고는 역사적 인물들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박정희를 포함한 조선인 만주군 장교들은 계급적 배경으로는 사회주의자면서 정치적으로는 군국주의자인 묘한 집단으로 해방정국에 스며들었다. 빈농의 자식이 아니었다면, 박정희는 기타 잇키를 사상적 스승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2·26사건에서 결기부대가 구원하고자 했던 이들은 시골의 비참한 농민이었다. 물론 구원의 방식은 자의적이고, 폭력적이며, 강압적이다. 그리고 자기 파멸적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사회주의자인가, 군국주의자인가? 욕망의 화신인가? 모두 아니다. 박정희의 복합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단어, 그것은 ‘유신’이다. 165-6)


1960년에는 3·15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전국이 민주화 열기로 들끓게 되자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군인들은 혼란을 틈타 군사반란으로 이승만을 몰아내기로 결의했다. 거사일은 5월 8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5월 8일보다 4월 19일이 먼저였다. 박정희는 다시 숨을 죽였다. 여론을 관찰하던 박정희는 1961년 4·19일로 다시 쿠데타 날짜를 잡았다. 그는 민주화 혁명 1주년에 다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날 것으로 확신했다. 계획대로 현실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점은 ‘유신’의 특징이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병력을 시위 군중 속에 뒤섞어놓았다가 일시에 조직적으로 움직여 정부와 주요 시설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혁명 1주년, 거리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박정희는 당황했다. 이미 군대 내에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소문이 잔뜩 퍼졌다. 이 소문은 정치권에도 돌고 있었다. 돌아오기엔 너무나 먼 강을 건넜다. 게다가 5월 말 박정희는 예편될 예정이었다. 박정희는 마지막 기회에 모든 것을 걸었다. 169-70)


5·16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사적으로 특이한 쿠데타다. 해방된 지 15년 이상이 지난 상태였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신생 독립국이 되었다. 국민은 발전 없이 정체만 되어 있는 나라의 현실에 질린 상태였다. 엄밀히 말해 정체가 아니라 퇴보였다. 부패와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다. 정치권도 쿠데타 소문을 뻔히 들었지만 어찌해야 할지 몰랐고, 어떤 면에서는 담담히 반란을 기다렸다. 국민도 은근히 군대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미국 국무부의 〈팔리(Farley) 보고서〉는 장면 정부가 같은 해 4월을 넘기지 못하리라 예측했고, 심지어 공산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서술했다. 박정희가 실패해도 다음, 그다음이 예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쿠데타 당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5·16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당시 유행했던 짧은 문장으로 모두 설명된다. 〈올 것이 왔다.〉 그러나 쿠데타만 오지는 않았다. 군화 소리와 함께, 유신이 돌아왔다. 170)


9장 절정: 최고의 사랑, 완전한 사육


한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자주 간과되는 사실이 있다. 박정희는 군사력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엄연히 투표를 통해 국민에게 권력을 승인받았다. 박정희는 ‘만주군 출신의 쿠데타 수괴’였는데도 일반 국민은 물론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자들에게까지 지지받았다. 지지하지 않는 이들도 최소한 쿠데타가 불가피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인정받은 것은 박정희의 행위지, 박정희 자신은 아니었다.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사회악 척결은 민중에게 선명한 프로파간다로 다가왔다. 옳지 않은 대신 매혹적이다. 박정희는 이를 ‘구악일소(舊惡一掃, 나쁜 옛것을 모조리 쓸어버림)’라고 이름 지었다. 구악일소는 일본의 우파 정치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가 1957년 총리로 취임하면서 주창한 ‘삼악척결(三惡剔抉)’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삼악은 부정부패, 가난, 폭력을 말한다. 삼악척결 역시 일본 내에서 유행어가 될 정도로 반향이 컸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쌍을 이룬다. 172-3)


박정희는 성공을 이어나가기 위해 기시 노부스케가 필요했다. 경제발전 때문이다. 경제성장에 대한 박정희의 욕망을 쿠데타로 차지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간단히 평가할 수는 없다. 이 책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유신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박정희가 그 자신의 표현으로는 ‘민족중흥(民族中興, 민족이 다시 일어남)’, 구체적으로는 한국인이 가난을 벗어던지고 잘살게 되는 일에 ‘나름의 사명감’이 있었다는 사실은 양보하지 않겠다. 이것이 20세기 신생 독립국의 수많은 독재자와 박정희의 차이점이다. 물론 나라를 망친 타국의 독재자들도 ‘나름의 애국심’은 투철했을 것이다. 대체로 독립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난 이들이니 말이다. 그런데 박정희의 애국심은 두 가지 의미에서 다르다. 첫째, 민생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었던 한국인이 ‘대체로 잘 먹고 잘사는 상태’가 그의 확고한 목표였다. 둘째, 결과주의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도 정당화된다는 믿음이다. 173-4)


박정희는 모순된 인물이 아니다. 일제 체제에서는 성공한 황국 신민(국적)이자 자랑스러운 조선인(민족 정체성)이 되면 된다. 마찬가지로 독립국이라는 조건이 주어진 상태라면 성공한 나라를 만드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박정희의 세계 속에서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변경을 넘어 해외로의 웅비는 고사하고 한 치의 앞마저 내다보지를 못하고 항시 중국, 일본, 러시아의 강압 속에 숨 막히는 질식 생활을 영위하여 온 우리 민족이었다. (…)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세계로 웅비하는 일대 선진국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좌절한다면 위의 지적대로 중국, 일본, 러시아의 3대 대국(大國)의 각축 속에 휘말려 또다시 그들의 속국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음을 통감하게 된다.〉 그가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독재자이면서, 아마도 역사상 유일하게 ‘반민족 행위에 가담했으면서도 민족의 성공에 가장 진심이었던’ 특이한 독재자였다는 사실에 불쾌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사실은 사실이다. 176-7)


박정희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반일감정, 민족주의, 애국주의를 깊숙이 심어놓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는 일본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유신과 만주국은 일본이 아니니까. 설사 일본을 좋아했어도 상관없다. 그는 반일감정이 한국인의 경쟁심을 부추기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활용했다. 내적 구조가 유신과 만주국, 관동군의 방식이어도 상관없다. 그는 철저하게 기능적인 ‘결과주의자’다. 사무라이들의 폭주로 탄생한 유신의 관념에서 조선 문인들의 붕당정치, 즉 ‘말싸움’은 한심하다. 언쟁은 절차적 정당성을 지닐지언정 아름답지도 확실하지도 않다. 박정희는 민주국가의 당연한 조건인 의회정치를 그가 혐오한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그래서 의회를 탄압했으며 본인이 창당한 공화당마저 억눌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탄압한 일제 군부와 다를 바 없다. 박정희는 진정성을 가지고 유신으로 노예가 되었던 한민족을 유신의 방식으로 번영시키려고 했다. 185)


이제 국민의 눈에는 민주주의와 미국식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기능이 추가된, 김대중이라는 신상품의 성능이 더 좋아 보였다. 박정희는 천황에 대한 사랑으로 천황을 납치하려고 한 조슈 번사들처럼, 국민을 위해 국민을 납치하려고 했다. 자신의 통치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만 국민은 모른다. 그렇다면 국민을 사육해야 한다. 그저 그런 사육은 억압일 뿐이다. 박정희에게 ‘완전한 사육’은 ‘사랑’이었다. 오늘날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김대중을 정직하게 이겼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으며 기존의 헌법을 정지했다. 일명 ‘10월 유신(維新)’이다. 12월, 일본제국 헌법의 직계 후배인 유신 헌법이 발효되었다. 일본제국 헌법에서 천황을 유신 체제로 바꾸고, 천황에 대한 불충을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번역하면 그대로 유신 헌법이 된다. 유신정권은 전쟁 말기 일본처럼 파멸을 향해 치달아갔다. 그 종말의 날짜는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189)


10장 완성: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다


김재규가 일제식 공교육을 받은 1930년대에 이미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실종되었고, 노기 마레스케는 진정한 우국지사로 숭앙받았다. 노기 마레스케를 기리는 신사는 전쟁 프로파간다 시설로 신성하게 취급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도 ‘노기 신사’를 세웠다. 김재규는 노기 마레스케를 깊이 흠모했다. 인간의 정체성은 어느 편을 들고, 누구를 적대시하는가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같은 편과 적을 나누는지가 고유한 정체성에 가깝다. 김재규를 만든 성장기에서 유년기가 한학과 김문기라면, 청소년기는 유신과 노기 마레스케였다. 김재규는 일본의 군국주의자일지언정 나라와 주군에 충성한 방식에 있어서는 노기 마레스케처럼 살고 죽기를 꿈꾸었다. 그의 이상적 남성상인 김문기와 노기 마레스케에겐 공통점이 있다. 현란한 죽음의 이미지다. 김문기는 세조에게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능지처사되었다. 일제의 교육관에서 가장 추앙받는 요소를, 일제의 교육을 받은 김재규 역시 사랑했던 것이다. 193)


이종찬(1916-1983)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군 내에서도 엘리트로 분류되었다. 이종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릴 수 있지만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에 관한 용감한 결정으로 좋은 선례를 남긴 바 있다. 1952년 7월, 이승만은 전쟁 도중 전방의 부대를 끌어들여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라남·북도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7월 4일에 공포 분위기 속에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이승만의 병력 동원 재촉이 이어지자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은 “군의 본질과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고 의식·무의식을 막론하고 정치에 관여하여 경거망동하는 자가 있다면 건군 역사상 불식할 수 없는 일대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훈령을 전체 육군에 하달하면서 이승만에 맞서고 곧 군에서 추방되었다. 이종찬은 일본군이었을 때에는 일본제국 헌법을, 국군일 때에는 대한민국 헌법을 따르는 헌정주의자였다. 김재규 역시 이종찬을 따라 헌정주의자가 되었다. 195-6)


5·16이 일어났을 때 김재규는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고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 때문에 박정희가 한국의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김재규는 혁명군 사령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결론이 정해진 조사를 받았음에도 김재규는 무죄 방면되었다. 정말로 비리 혐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재규가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선 박정희는 갑자기 그를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했다. 최고 권력자가 자신을 중신(重臣, 중요한 신하)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박정희에 깊이 충성토록 만들었다. 그는 박정희와 군신(君臣)관계를 맺은 것이다. 박정희의 선택은 성공했다. 김재규는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호남비료 공장 건설을 예정보다 1년 단축해 완공하는 데 성공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명령을 훌륭하게 완수한 김재규를 기업가나 정치인으로 키우고 싶었지만, 김재규는 다시 군에 복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박정희는 아쉬웠겠지만, 김재규가 욕망을 절제하는 모습 때문에 그를 더 사랑하게 됐다. 196-7)


김재규는 3군단장으로 있다가 10월 유신을 맞게 된다. 박정희는 3성 장군인 채로 김재규를 전역시켰다. 김재규는 끝까지 군에 남아 진정으로 제2의 한국전쟁의 선봉장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주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소속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유신정우회는 일본제국의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를 모델로 했다. 입헌정우회는 법적으로는 정당이지만 실제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만들고 이토 히로부미가 계승한 조슈 파벌의 핵심적 권력 단체였다. 유신정우회는 자동적으로 국회 의석의 1/3을 차지했는데, 누가 정우회의 일원이 될지는 박정희 개인이 결정했다. 유신정우회는 스스로의 존재 목적을 ‘유신 수호’라고 밝히고 출범했다. 김재규는 자신을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수호하는 군인으로 인식해왔다. 스승(이종찬)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은 유신에 반대하면서도 주군의 명령에 따라 몸은 유정회 의원이 되었다. 그의 세계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200)


10·26사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김재규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꼭 차지철을 집어넣는 실수를 범한다. 차지철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리자 권력욕 반, 충동 반으로 사건을 저질렀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김재규에게 차지철은 주군의 몸에 들러붙어 건강을 악화시키는 기생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979년의 김재규는 죽음을 꿈꾸기 시작했다. 10·26사건을 일으키기 약 3개월 전, 김재규는 장준하의 아들에게 이제 곧 큰일이 벌어질 테니 한국을 떠나 있으라고 일러두었다. 박정희와 김재규 모두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민주주의가 산업화의 다음 단계로 도래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민주적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불러올 방법이 없었다. 김재규는 유신의 세계를 살아왔다. 자신의 세계관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끝내야 한다. 아버지와 스승과 주군의 충돌을 ‘하나의 사랑’으로 합치하는 유일한 길, 그것은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202-4)


김재규의 목표에는 자신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체포된 후부터 갑자기 의연해졌다. 어차피 사형이 예정되어 있었다. 민주화 진영에서도 김재규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으로, 종교계를 시작으로 김재규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종교계의 입김으로 민주화 투쟁에 몸담던 인권변호사들이 김재규를 변호하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다음 독재자가 되기 위한 권력욕에 휩싸여 주인을 문 권력의 개’를 변호하는 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김재규를 접하고 그의 진심에 놀랐고, 나중에는 존경하게 되었다. 그중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를 존경하면서도 문득문득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그는 ‘확실히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분이 맞긴 하구나.’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김재규로부터 ‘앗사리(あっさり, 깨끗한/시원한)한 태도’라는 표현과 ‘목숨을 초개(草芥, 지푸라기)와 같이 버리는 생사관’에 대해 여러 번 들었다고 전한다. 207)


김재규가 민주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멀리 엇나간 발언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987년 6월항쟁에서 국민이 전두환을 상대로 승리하게 된 요인에 김재규의 총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을 쓰는 지금, 김재규는 반역자로도 불리지만 동시에 의사(義士)로도 불린다. 그러나 나는 확언한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 지사이며, 최후의 유신 지사다. 유신의 완성에는 마지막 마침표 한 점이 필요했다. 그것은 김재규의 죽음이다. 1980년 5월 23일, 그는 다음날 사형이 집행될 것을 확신하고 유언을 남겼다. “나는 즐겁게 갑니다.” 1980년 5월 24일 아침. 김재규는 찬물로 몸을 씻고 새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 식사를 거르며 몸속까지 깨끗이 정돈했다. 오전 7시, 사형집행 직전 김재규는 마지막 질문을 받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그는 대답했다. “없다.” 모든 것은 무(無)로 되돌아갔다. 유신의 역사가 끝났다. 209)


후기: 유신의 제단


박물관에 있는 해시계가 가치 있는 이유는 스마트폰보다 성능이 좋아서가 아니다. 해시계는 박물관을 나와 현실에서 사용하려는 순간 무가치해진다. 유물은 유물로, 폐허는 폐허로 대해야 한다. 나는 유신의 제단에 꽃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물을 던지며 욕할 생각도 없다. 대신 오래된 정원을 폐허로 놔둔 채 거닐고 싶다. 한밤중의 폐허 위로 별빛이 내릴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별처럼 지상의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별이 빛나는 이유는 거기에 정말로 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로부터 던져진 것이기에 현재의 틀에 과거를 끼워 맞추면 현재까지 뒤틀린다. 실체는 파도에 떠밀려온 잔해가 아니라 바다 자체에 있다. 역사란 살았다가 죽고, 시신이었다가 지상의 풀들이 자라나게 하는 거름이 되는 순환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각자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라는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품어야 현재를 미래에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21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