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
노마 히데키 지음, 김진아.김기연.박수진 옮김 / 돌베개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객체를 본뜬 형태만으로는 그림문자일 수는 있어도 문자가 될 수는 없다. 형태가 객체를 상기시킬 뿐, 말은 개재介在되지 않기 때문이다. 객체를 본뜬 형태는 객체를 일컫는 언어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비로소 문자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한자의 가장 원초적인 메커니즘인 <상형>에서는, <형形>이 <음音>을 불러일으키고, 그 <음>은 <주체 안에서 상기되는 객체>인 <의意>를 불러일으킨다. <형>도 <상기되는 객체인 의>를 떠올리게 하고, 그 <의>는 그 뜻을 일컫는 <음>을 불러일으킨다. 한자의 이러한 <형음의> 트라이앵글이야말로 언어음이 문자가 되는, 즉 <말해진 언어>가 <쓰여진 언어>로 태어나는 결정적인 메커니즘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한국에서도 천여 년에 걸쳐 소중히 간직해 왔던, <상형>을 핵심으로 한 이 <육서의 원리>와 <형음의> 통일체라는 시스템에 결별을 고하였다."(88-9)


# 음소(音素, phoneme) : 단어의 의미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언어음의 최소 단위. 가령, '말/달/날/살'에서는 'ㅁ/ㄷ/ㄴ/ㅅ'이 음소이고, '말/물'에서는 'ㅏ/ㅜ'이 음소이다.


"<음소>를 탐구하는 언어학의 분야는 <음운론>(phonology)이라 불리며, 언어음 자체의 발음법이나 물리적 성질 등을 연구하는 <음성학>(phonetics)으로부터 독립했다." "문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언어의 모든 음소를 확정하고, 각각의 음소에 하나씩 자모字母로서의 형태를 할당해 주면 된다. 문자의 평면에서 서로 다른 자모는 음의 평면에서도 다른 소리가 되며, 그것이 각각의 의미를 구별해 주는 것이다. 놀랍게도 15세기의 <훈민정음>은 언어학이 20세기가 되어서야 마침내 조우한 <음소>라는 개념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한편, 발음하는 단위로 언어음을 나누면 <음절音節>이라는 단위를 추출할 수 있다. 한국어로 예를 들면 '어머니'라는 단어는 한국어 모어화자라면 모두 '어·머·니'라는 3개 단위로 분절하여 발음한다. 아무도 '엄·언·이'처럼은 발음하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어·머·니'라는 3개의 단위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이 <음절>이다."(144)


"<정음>은 언어음을 내는 사람의 음성기관의 모양을 <상형>했다. 왜? 다름 아닌 그 <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요컨대 <정음>은 <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 발생론적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형태>를 찾고, 보이는 형태로 <상형>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형태로 <상형>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창제자들은 <정음>의 근원, <음>이 <형태>를 얻는 근원을 그렇게 규정하고 그렇게 선언하고 있다."(158) "소쉬르는 언어의 근본원리로서 <선조성線條性>을 제2원리로, <자의성恣意性>을 제1원리로 보고 있다. 언어음이 나타내는 의미와 소리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없으며, 이는 순전히 자의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유일한 예외가 오노마토페이다. 개 짖는 소리는 '왕왕', '멍멍', '바우와우', '바우바우' 등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언어의 음과 의미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오노마토페를 제외하면. 그리고 문자와 음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훈민정음>을 제외하면."(160-1)


# 오노마토페 : 의성의태어


"『훈민정음』은 종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終聲(종성)은 復用初聲(부용초성)하니라.' 종성은 다시 초성을 사용한다." "먼저 음절의 첫 자음 또는 제로 자음, 즉 초성을 분리한다. 이것은 중국 음운학이 이미 한 일이다. 성모聲母(initial)가 그것이다. 단 중국 음운학은 여기에 게슈탈트(형태)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런 다음 남은 부분 중에서 모음마저 떼어내지 않으면 종성은 단위로서 추출할 수 없다. 모음과 종성을 추출하는 음성학적 차원의 관찰과, 그것을 음소로 다루는 음운론적 차원의 사고가 없다면, 종성은 추출할 수 없고, 하물며 그 종성에 게슈탈트를 부여할 수도 없다." "종성자모로 초성자모를 사용한다는 이러한 생각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정음>의 창제자들은 이론 무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성이 종성이 되고 종성이 초성이 되는 것은, 음이 양이 되고 양이 다시 음이 되는 이치에 근거한다는 식으로 말이다."(167-8)


# <게슈탈트> = <형태> = 개개의 요소로 환원해서는 얻을 수 없는, 지각상知覺上의 총체로서 통합된 모양


라틴문자나 키릴문자와 달리 "<정음>에서 자모는 아직 하나의 <글자>가 아니다. 자모는 설명을 위해 자모 자체를 표기할 때 이외에는 그것만으로 쓰여지는 일은 없다. 자모는 어디까지나 글자를 구성하기 위한 유닛일 뿐이다. <자모≠글자>, 요컨대 자모는 원자原子요, 글자는 분자分子이다. 이들 자모의 유닛을 조합해서 하나의 글자 유닛을 완성한 후 사용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음이 하나의 자모인 <단음문자單音文字>라는 성격과, 하나의 음절이 하나의 글자라는 <음절문자音節文字>의 성격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문자체계가 완성된다. <단음=음절문자> 시스템의 성립이다." "<훈민정음>은 음의 평면을 다시 <음소의 평면>과 <음절의 평면>이라는 두 개의 층으로 계층화하여 바라보고 있다. 음의 평면을 두 개의 층으로 계층화한다. 그 계층화는 문자의 평면에서도 게슈탈트상으로 두 가지 층위를 구별하는 동시에 통합하는 표기 시스템이다."(179-80)


"음의 최소 차원에 있는 음소에 하나의 자모를 부여하고, 음소가 합쳐진, 음의 더 고차원적 레벨인 음절에, 자모의 결합체로서 하나의 글자를 부여한다. <음소=자모>를 조합해서 <음절=글자>를 만든다. 이런 방식으로 <단음=음소>의 배열을 나타냄과 동시에 음절이라는 단위의 <외부 경계>뿐 아니라 음절의 <내부 구조>도 나타낸다. 'ㅂ'p, 'ㅏ'a, 'ㅁ'm과 같은 단음문자 유닛(음소의 평면)과, '밤'pam과 같은 음절문자 유닛(음절의 평면)이 음소와 음절 각각의 층에서 <형태>로서 위치를 차지한다. 동시에 <음소의 평면>과 <음절의 평면> 두 가지 층의 표현 방법 면에서도, 그 두 층을 꿰뚫는 단음문자 유닛만으로 두 층의 <형태>가 성립하는 경제적인 구조이다. 게슈탈트로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ㄱ', 'ㄴ', 'ㅏ', 'ㅗ' 등 단음문자 유닛뿐이며, 음절 유닛을 나타낼 별도의 게슈탈트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181)


"<음>을 해석하고 여기에 <문자>라는 형태를 부여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국 음운학에서는 음의 높낮이인 <성조>까지 '운모'韻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모음이니 자음이니 하지만 실제로 <음>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음에는 <높낮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음의 높낮이>는, 언어에 따라서는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 버리는 기능을 한다. 현대 베이징어에서는 음절 내부에 있는 음의 고저가 단어의 의미를 구별한다. 그것이 성조이다."(191) 15세기 한국어에서 "고저 악센트는 중국어의 성조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용어를 써서 '평성'平聲, '거성'去聲, '상성'上聲으로 구별된다." "<정음>은 이런 악센트의 구별을 문자의 좌측에 점을 찍음으로써 형상화하였다. 해례본에 이르기를, '무릇 글자는 반드시 합쳐서 소리를 낸다. 왼쪽에 점을 하나 찍으면 거성이요, 점을 두 개 찍으면 상성, 점이 없으면 평성이다'라고 하였다. 이 점은 오늘날 <방점傍點>이라고 불린다."(196)


# 첫 자음 : 성모聲母 / 나머지 요소 : 운모韻母


# 평성 : 가장 낮은 음 / 거성 : 가장 높은 음 / 상성 : 처음은 낮고 나중은 높은 음


"언어학에서는 의미를 가지는(실현할 수 있는) 언어음의 최소 단위를 <형태소形態素>(morpheme)라고 한다." "영어의 'playing'과 'dancing'에서 {play}와 {dance}는 어휘적인 형태소이고, {-ing}은 문법적인 기능을 하는 형태소이다."(203) "<정음>은 <초성+중성+종성>을 하나의 <형태>상의 단위로 묶는 입체적인 구조로, 음소의 평면과 음절의 평면 그리고 형태음운론의 평면이라는 세 가지 층을 통합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 방법 중에서 선택이 가능하다."(211) "문자체계가 형태음운론적인 표기를 채용한다는 것은, 문자가 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문자의 <형태>가 의미와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즉 '밥'이라는 <정음>의 한 글자가 나타내는 단위가 음절인 동시에 형태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명 음을 표현하던 글자가 언제부터인지 형태소를 나타내는 글자가 되고, 사실상 단어를 나타내는 글자라는 성격까지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221)


# <정음>의 3층 구조

1 [음운론의 평면] ㅂ ㅏ ㅁ ㅣ(pami)

2 [음절구조론의 평면] 바 미

3 [형태음운론의 평면] 밤 이


# 형태음운론적 표기 : 음의 평면에서 음절 구조의 변용(종성의 초성화)이 일어나더라도 형태소를 만드는 음의 <형태>를 문자의 평면에서도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표기법


최만리가 상소문에 쓴 "<용음합자用音合字>는 <음을 사용하여 글자로 합친다> 혹은 <음을 이용하여 글자를 만든다>, <음에 의거하여 글자를 합친다> 정도로 풀이하면 좋을 것이다. 요컨대 음으로써 글자를 만드는, 즉 음을 나타내는 자모字母를 조립해 문자를 만든다는 그런 방법은 모두 옛 사적事績을 어기는 것이며 옛부터 지금까지 어디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용음합자>라는 것은 예부터 지구상의 어디에도 없었다. <정음>처럼 완성된 형태로서의 형태음운론적인 알파벳 시스템은 중국 대륙에도 없었고 지중해에도 없었다." "<정음>의 사상을 <용음합자>라는 간결한 구절로 파악하고 있는 최만리의 안목은 정확하다. 최만리와 사대부들은 단순히 사대주의 사상 때문에 <정음>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름 아닌 <용음합자>라는 사고방식 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의 형태뿐만 아니라 문자를 만들어 내는 시스템 자체를 향한 이의이다."(240-1)


# 用音合字 盡反於古 (음에 의거하여 글자를 합치는 것은 모두 옛것을 거스르는 일이옵니다.)


"<정음>은 세포여야 하는 하는 문자를 분자分子 단위로 해체해 버린다. 나아가 분자는 원자原子로 해체된다. 당연히, 분자는 음절이고 원자는 음소이다. 의미가 되는 세포를 분해해 나간다. 분자로, 원자로. 『훈민정음』은 "글자는 반드시 합쳐져서 음을 이룬다"는 소리를 하고 있다. "글자는 반드시 합쳐져서 음을 이룬다"니? <문자=한자>란 유기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음을 이룬다. 문자란 합치거나 떼어내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음>은 살아 있는 유기체인 문자가 무기적인 요소(element)로 해체되어 있질 않은가. 그런 일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최만리를 비롯한 사람들은 이렇게도 생각했을 것이다. 쓰여진 역사가 존재한 이래, 우리는 그러한 세포를 단위로 살아왔다. <사고思考>란 그러한 세포를 단위로 생각하는 것이고, <쓰는 것>이란 그러한 세포를 살아 움직이는 몸으로 키우는 것이다." "성리학의 에크리튀르야말로 그 궁극적인 형태인 것이다."(244)


# 에크리튀르 = <쓰는 것> <쓰여진 것> <쓰여진 지知>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의 이러한 한자한문 원리주의에 대응해,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파의 이데올로그인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 후서後序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有天地自然之聲이면 則必有天地自然之文이니라" (천지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다.) 이 땅에 <글>이 있음은 이 땅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 황제를 초월한 <천지 자연>이며 이 땅에 이 땅의 에크리튀르가 있는 것은 천지 자연의 이치이다."(247) "그리고는 괄목할 만한 다음의 언설에 이른다. "雖風聲鶴戾와 鷄鳴狗吠도 皆可得而書矣니라" (바람 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의 울음소리, 개가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써서 나타낼 수 있다.) 온갖 살아 있는 것의 <소리>를 쓰기, 한자한문이 쓸 수 없었던 조선어의 오노마토페를 <정음>이 쓰기. 그것은 <정음>의 창제자들에게는 한자한문을 뛰어넘기 위한 결정적인 목표였을 것이다."(251-2)


"<말해진 언어>와 <쓰여진 언어>가 있다. <말해진 언어>는 <쓰여진 언어>보다 앞서 실현되는 것이다. <말해진 언어>가 <쓰여진 언어>가 될 때, <음>의 모든 리얼리티는 사라진다. <쓰여진 언어>에는 말하는 속도도, 강약도, 높낮이도, 인토네이션도 없다." "<말해진 언어>는 언어 그 자체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상호 작용 안에서 만들어진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두 가지 선율로써 생기는 듯한 대위법對位法적 구조를 보여 준다. <말해진 언어>는 결코 한 사람의 발화의 연속으로서만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쓰여진 언어>는 그러한 대위법적인 구조를 상실하는 반면, 시각적인, 그리고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때로는 촉각적이기도 한 <텍스트라는 쓰여진 총체>가 하나하나의 말을 규정하고 제약하고 하나하나의 말이 <텍스트라는 쓰여진 총체>를 만드는 양상을 보인다. <말해진 언어>와 <쓰여진 언어>의 차이를 묻는 것은 언어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258-9)


『용비어천가』 2장에 이르러 우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전면적 <정음> 에크리튀르의 탄생을 본다. "한자漢字를 한 글자도 포함하지 않은 텍스트, 한자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왕조의 송가頌歌를 소리 높여 부르는 서사시의 한 장, 단어의 리스트가 아니라, 내적인 연결과 동적인 전개를 가지는 문장(sentence)이자 글(text)인 <쓰여진 언어>. 그곳에서 <나·랏:말싸·미> 약동한다. "소리에 따랐기에 음은 칠조七調에 맞는다." 방점傍點으로 나타나는 선율과 함께 조선어로 연주되는, <바람에 흔들림 없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깊은 물>이라는 음양의 암유暗喩는 우리 누구나가 지금 처음으로 체험하는, 한국어의 청초하고도 힘이 넘치는 선율이다. 천년의 시간을 겪으며 한자한문에 가려졌던 이 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지금 샘물과 같이 넘쳐 솟아나는 이 땅의 말인 것이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일찍이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한국어의 <쓰여진 언어>였다."(264)


# 『용비어천가』 2장 : 한자를 한 글자도 포함하지 않은 텍스트를 형성한 <정음> 에크리튀르의 탄생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후서後序에서 "모양의 본떴으되 자字는 고전古篆을 따랐다" (象形而字倣古篆)라고 했다. <정음>은, 발음되는 모양을 본뜨고 글자는 고전(옛 전서)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만리는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 전문篆文을 본떴을지라도 음音으로써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어긋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전문篆文이란 중국 전국시대의 전서인 대전大篆과 그것을 간략화한 진秦나라의 소전小篆을 총칭한 것으로, 사실상 소전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실린 <정음>의 자획字劃이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과 비교할 때 전서와 비슷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字倣古篆' 즉 '글자는 고전을 본떴다'라는 언급에 관해서는, 문자의 게슈탈트를 전서에서 가져왔다기보다는 한 획 한 획의 자획에 대해 전서를 본떴다는 편이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혹은, 널리 한자의 고체古體를 총괄하여 대표적으로 '고전'을 들었을지도 모른다."(321-2)


"서양 인쇄술에서는 로마자 'I'의 처음과 끝 부분에 들어가는 장식을 <세리프serif>라고 한다. 로마자 극한의 서체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비문에서는 이 세리프가 형태상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세리프가 없는 서체를 상세리프sans serif라고 부른다. '세리프 없음'이라는 뜻이다. 일본에서 '고싯쿠'Gothic체라는 것은, 이렇게 장식 없이 직선으로 이루어진 상세리프 계통의 서체를 말한다. 이 명칭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고딕체'라고 불린다. 정음의 자획은, 전서와 비슷하다고는 하나 붓으로 생기는 돌기가 없는, 거의 완전한 상세리프체 즉 고딕체이다. 기필起筆도 종필終筆도 없어─기필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직선이기에─붓으로 쓸 수 있는 모양이 아니다. 전서는 붓으로 쓰는 서체인 데 비해 정음의 자획은 완전히 붓 쓰기를 거부한 형태이다. 갈고리나 삐침도 부정하고, 두 글자 이상을 이어서 쓰는 <연면連綿>도 부정한다."(326-7)


"붓에 의한 선은 정신성과 지知, 끊임없는 수련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형태> 역시 정신성이나 끊임없는 수련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것이 한반도의 문자사를 관통하는 원리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한자는 마치 살아 있는 세포와 같은 존재였다. 한자의 <형태> 역시 살아 있는 정신성을 묻는 것이었으며, 인간의 눈과 손에 의한 수련을 묻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묻는 <형태>이다. 이에 비해 정음은 그 세포를 음절이라는 분자로, 그리고 음소라는 원자로 해체하였다. 정음의 구조 자체가 그런 로지컬한 지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논리적인 지에 걸맞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가 요구된다. 정음의 <지>는 원자인 자모를 조합하여 완성되는 분자 구조로서, 나아가 텍스트 속에서 움직이는 동적인 분자구조로서 출현하였다. 그것은 한자의 정신성과 결별하고 정음 <형태> 자체에 새로운 <지>를 당당히 각인한 일이었다."(331-2)


# 궁체 : 신체성을 얻은 정음의 아름다움


"문자란,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의 결과물이다. 로제타스톤이든 광개토대왕비든, 파피루스든, 갑골이든, 서적이든, 그것이 단편斷片이든 전체든, 문자란 항상 어떤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자란 항상 과거에 이야기된 역사, 히스토리에Historie이다. 문자란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자에게, 이야기된 무엇인가를 과거에 이야기된 것으로 읽게끔 한다. 이에 비해 『훈민정음』이라는 책은, 그것을 펼쳐 읽는 이에게 문자의 탄생이라는 원초原初 그 자체를 만나게 하는 장치이다. 문자를 읽는 이에게 <읽기>라는 언어장言語場에서 그 문자 자신의 원초를 경험하게 하는 장치이다. 물론 『훈민정음』 역시 과거의 책이며, 과거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 책을 <읽는> 순간 그곳에 나타나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이야기된 역사는 아니다. <음이 문자가 된다>는, <말이 문자가 된다>는 원초가 항상 읽는 이 자신에게 <지금 이곳에서> 사건으로서 생겨나는(geschehen) 역사, 즉 게쉬히테Geschichte이다."(356-7)


# 한글 발전의 시대구분(이윤재, 1933)

1. 정음시대(창제기) : 세종 28년(1446)~성종 대까지 50년간

2. 언문시대(침체기) : 연산군 대~고종 30년(1893)까지 400여 년간

3. 국문시대(부흥기) : 갑오개혁~경술년(1910)까지 17년간

4. 한글시대(정리기) : 주시경의 한글운동~현재까지 20여 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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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민주주의
최경봉 지음 / 책과함께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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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언어와 문자는 해당 공동체 구성원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회생활의 도구이기에 언어와 문자의 선택과 유지에는 구성원의 합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국어정책과 국어 인식에서 민주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한글이 공용 문자로 쓰인 뒤에도 한글은 여러 번 그 모습을 바꾸었다. 모아쓴 글자(한)를 풀어쓴 적(ㅎㅏㄴ)도 있었고,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쓴 적(ㅇㅍ)도 있었고, 소리 나는 대로 쓴 적(사람이 → 사라미)도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가 대중의 호응을 얻어 현재까지 이어진 경우는 드물다. 새로운 시도가 성공했다면 한글 표기가 간편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관습을 고려하지 않고 진행한 개혁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문자의 선택이 역사적 선택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관습의 힘과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그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적 원칙이다."(16)


"동경어를 표준으로 삼은 표준어 정책은 지방분권적 봉건국가였던 일본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민국가를 이루고자 했던 근대 일본의 열망이 표준어 정책에 투영되면서 표준어 정책은 국민정신의 함양을 목적으로 강력하게 진행되었고, 이는 곧 새로운 국어를 정립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조선의 표준어 정립 과정은 이미 유일하게 존재하는 공통어를 공식화하는 일에 가까웠다. 따라서 서울말을 표준어로 공식화하는 일은 설득과 투쟁의 문제라기보다는 교육과 보급의 문제였다." "이처럼 표준을 정하는 일이 막연한 상황에서 '대체로 쓰이는 말'과 '중류 사회의 말'이라는 기준은 '규칙에 맞는 표현' 혹은 '바른 본'이 대신하게 되었다. 언어의 표준화 사업이 바람직한 말을 찾아 중류 계층에게 걸맞은 말을 건설한다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바람직한 말을 익힌다는 것은 표준어를 권리로 인식하기보다는 의무로 인식하게 하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44-5)


"조선어사전 편찬회가 결성되던 1929년 민족문화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에게 조선어의 표준을 정하는 것은 조선 문화의 사활을 결정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조선의 문화가 향상되지 못한 것이 모두 언어의 표준을 마련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은 그들에게 조선어의 표준화가 얼마나 절박한 일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표준어 사정안은 민족어사전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의 한 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1936년 10월 28일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한 시점을 계기로 조선어학회의 대중 집회가 금지되었고, 조선총독부의 국어 상용화 정책이 더욱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표준어 제정의 역사적 의미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공용어로서의 표준어를 정립하고자 한 노력은 더 큰 억압을 불러왔지만, 억압 속에서 강화된 절박감은 우리말 사전을 완성하는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편찬된 사전은 해방 후 우리의 국어생활을 이끄는 기준이 되었다."(53-4)


"대부분의 근대 민족국가는 순수한 모국어를 국어로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언어 정화 운동을 국가사업으로 진행하였다. 방언을 제약하면서 표준어를 확립하였고, 이와 함께 철자와 문법을 정비하면서 이상적인 언어 모델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규범에 어긋나는 표현은 국어의 순수성을 해치는 옳지 못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때 순수한 국어를 지향하는 것은 언어 규범의 통일성을 중시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와 민족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풍조와 맞물려 외래어를 배척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처럼 외래어를 배척하는 언어 정화 운동이 시작되고 국가주의 교육이 등장하면서, 언어는 교섭과 변화를 통해 발전해가는 것이고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이 소홀히 인식되었다. 그리고 언어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을 국가 정체성 유지와 관련지으면서 외래어 문제는 언어 규범의 문제라기보다 도덕과 이념의 문제가 되었다."(98)


"한국적 어문민족주의는 식민지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역사성 때문에 어문민족주의는 해방 이후 국어정책과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외래어가 폭넓게 쓰이는 현실과 별도로 우리의 외래어관이 서구나 일본에 비해 더 폐쇄적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외래어 의식의 특이성은 외래어에 대한 저항의식에서 나타난다. 가장 특이한 점은 외래어의 기원에 따라 이를 대하는 의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어 표현과 일본 한자어는 사용하는 이의 무지를 질타하거나 고루함을 비판하는 예시로 사용되곤 하지만, 서구 외래어는 현학적인 또는 과시적인 표현 태도를 비판하는 예시로 자주 사용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언어순혈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을 경우 국어 속 한자어를 외래어로 보고, 한자어의 존재를 중국 문화에 대한 종속으로 판단하기도 한다."(102)


"우리의 근대의식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탈중화(脫中華)'를 모토로 했다는 점이다. 이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도 마찬가지였는데, 동아시아 중세 질서가 중화주의를 근간으로 했기 때문이다. 근대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문화적으로는 한자 문화로부터의 독립을 내세우게 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정치·문화적 독립에 대한 열망은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문화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문화운동은 다른 어떤 문화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 고유의 것을 찾고자 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의 신문물을 받아들여 새롭게 우리 문화를 건설하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근대 국어 운동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러한 흐름에서는 서구 외래어보다 한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외래어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국어 순화의 결과를 왜곡시키기도 한다."(111)


"관례를 떠나 현지 발음대로 외래어를 표기하자는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찬반이 팽팽히 맞선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러한 주장이 공감을 얻는 이유는 실용성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변하는 글로벌 시대에 효율성과 실용성 면에서 뒤떨어져 있음에도 관습이나 전통에 매달려 필요한 변화를 과감히 실천 못하면 퇴보나 제자리걸음밖에 안 된다"(이익훈, <어륀지 발음 옳다>)라는 일갈에 '오렌지는 국어, 어륀지는 영어', '국어정책의 주체성' 따위의 말은 초라한 변명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효율성과 실용성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이들의 '실용주의'는 특정 계층의 편리와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말하는 '실용'과 '효율'은 '관습'을 부정하고 '경쟁'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실용주의자들은 대중들의 낯설어함과 곤혹스러움을 개의치 않는다. '일반인들이 낯설어하고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선점한다는 것은 더 큰 권력을 쥘 수 있는 토대가 된다."(153-4)


"근대의 특징 중 하나는 민족어가 생활의 언어에서 정치, 경제, 학술의 언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민족어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이어진 것은 민족어의 역할을 생활 언어로 국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근대 민족어의 탄생은 민족어의 역할 확대를 의미했다. 따라서 민족어를 유지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민족어가 정치, 경제, 학술의 언어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는 일본어 상용 정책에 맞서 민족어 운동을 전개한 선조들도 뻐저리게 느꼈던 문제다." "규범을 강조하고, 표준어를 완고하게 고수하려는 조선어학회의 태도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융통성이 없는 근대주의자의 모습이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어를 국어인 일본어와 같은 반열에 올리려는 의욕적인 민족주의자의 모습이다. 일제의 일본어 상용 정책이 심화되면서 조선어의 위상이 추락하는 현실에서 조선어의 규범화를 위해 노력했던 이들은 이런 점에서 선각자였다."(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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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최경봉.시정곤.박영준 지음 / 책과함께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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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년(세종 2) 세종은 집현전을 확대 개편해 왕실 연구기관이자 국왕의 자문기관으로 키웠다. 이는 집현전의 주 임무가 왕에게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경연經筵과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書筵이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유교 국가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했던 세종은 문신 가운데 젊고 유능한 인재를 선발해 집현전 학사로 삼아 강론에 참여시켰으며 국가적으로 중요한 서적을 편찬하게 했고 일부 학사에게는 사관史官의 일을 겸하게도 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학술만을 오로지 일로 삼아 종신토록 계속하라"고 당부하면서 여러 특혜를 베풀었다. 예를 들어 국가에서 책이 나오면 가장 먼저 집현전 학사들이 볼 수 있게 했고, 연구를 돕기 위해 많은 서적을 구입해 집현전에 보관케 했다. 또한 재주 있는 소장 학사에게는 집현전의 업무에서 벗어나 오로지 독서만 할 수 있도록 휴가를 주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베풀기도 했다."(29)


"1444년 2월 16일자 실록 기사를 보면, 세종은 집현전 교리 최항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라 명하고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왕자들이 이 일을 감독하고 관리하게 했다. 한글과 관련해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내린 최초의 공식적인 지시였다."(32) "한글이 세종 25년(1443)에 창제되고 나서도 새 문자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새 문자의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나서 과연 무엇을 했을까? 세종은 창제 다음해인 1444년 2월에 한자음에 관한 책인 운회를 번역하라고 명했고, 1445년 1월에 신숙주, 성삼문을 요동에 보내 한자음을 질의하도록 명했으며, 같은 해 4월에 권제, 정인지 등이 편찬해 올린 《용비어천가》의 간행을 명했다. 이 세 가지는 한글이 세상에 나온 이후 3년 동안에 일어난 일 중 언어학적으로 주목해야 할 사건이다."(38)


왜 세종은 한자음 정리 사업에 매진했던 것일까? "한자음 정리 사업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첫 번째가 옛부터 써오던 중국의 고대 한자음을 정리하는 것이다. 고대 한자음은 옛 한시를 지을 때 운을 맞추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세종은 《고금운회거요》와 같은 운서를 한글로 번역하도록 했다. 두 번째로는 당시 중국의 한자음, 즉 중국 명나라의 한자음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중국 사신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정확한 중국발음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사용하는 표준 한자음을 알아야 했다. 이를 위해 지은 것이 《홍무정운역훈》이다." "마지막으로 세종은 조선에서 사용하던 한자음의 표준을 만들고자 했다. 당시에 사용하던 현실 한자음을 정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당대와 고대를 망라하여 가장 이상적인 표준 한자음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중국의 송나라와 명나라 운서들을 모두 참조하여 세종 29년(1447)에 완성된 《동국정운》이 바로 그 결과로 나온 것이다."(43-4)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훈민정음》의 어지御旨는 세종의 자주의식을 논할 때 자주 거론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대목은 중국말과 우리말이 서로 다르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조선 한자음과 중국 한자음의 차이를 인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세종 당시에도 한글의 창제와 사용은 한자와 한문의 지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세종 또한 한 번도 한자와 한문의 권위를 부정한 적이 없었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국가는 한자의 음과 훈을 기록하고 자신의 모어母語를 기록할 수 있는 표음문자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국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기도 했다. 몽골, 만주, 말갈 등 중국 주변 민족들이 한문을 사용하면서도 고유 문자를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글 창제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시작되었고, 한글의 위상 또한 이 맥락에서 결정되었다."(46-7)


"한글 창제의 정치적인 목적은 한글 창제 이전인 1434년 《삼강행실도》를 간행하고, 1442년 《용비어천가》의 편찬을 준비하기 시작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 핵심 이념인 충과 효를 강조한 《삼강행실도》와 왕권의 정당성을 강조한 《용비어천가》는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불교에서 유교로 국가의 이념이 바뀌었으니 바뀐 이념을 홍보해야 했으며, 왕씨에서 이씨로 왕조가 바뀌었으니 새 왕조의 정당성을 홍보해야 했다. 그런데 성공적인 홍보를 위해서는 홍보 책자의 내용을 탄탄히 하는 것도 필요했지만, 사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 이런 점에서 모든 백성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신문자 한글이 이 사업에 활용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세종 스스로도 《삼강행실도》를 쉬운 문자로 번역해 가르친다면 백성을 교화하기 쉬워진다는 논리로 한글 반포를 반대하는 신하들의 주장을 반박한 적이 있었다."(100)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한글의 역할은 한글이 사회 계층 간 의사소통을 도왔다는 데 있다." 《천자문》을 가르칠 때 교육 문자로 한글을 사용했듯이 한글은 양반 계층의 한문 학습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고, "한글로 상소를 올리거나 한글로 방을 붙임으로써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언로言路가 트이게 되었다는 사실은 한글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반들은 하층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한글이 필요했고, 하층민들은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한글이 필요했다. 또한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던 여성들과 사대부 남성 간의 소통에도 한글은 중요한 기능을 했다. 중전이나 대비가 신하에게 한글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신하들이 중전이나 대비에게 한글로 문서를 올리는 것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일반적인 일이었다. 한글은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사용자 수를 기준으로 할 때에는 한글이 한문보다 사용층이 더 두터웠던 문자라고 볼 수 있다."(49)


채수가 지은 《설공찬전》이 불온한 내용으로 탄압받은 때가 1511년인데, 이때는 "한글이 창제되고 불과 5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이는 새 문자가 창제된 후 50여 년이 지나서 일반 백성들이 한글 소설을 탐독할 정도로 한글이 널리 보급되고 빠르게 유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면 한글 소설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세책(貰冊, 전문적으로 책을 베껴쓴 다음 이를 대여해주고 돈을 받는 방식)과 방각(坊刻, 판매 목적으로 서방書坊 등에서 목판으로 판본을 만들어 대량으로 찍어내는 방식)이라는 새로운 유통 방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즉 한글 소설의 상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한글 소설을 빌려보거나 사고파는 방법이 없지 않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과 개인 간에 이루어진 거래였다. 이즈음 거리에서 소설을 읽어주면서 돈을 벌었던 이야기꾼(강담사講談師, 강독사講讀師)이 등장하기도 했다."(135)


"상업 출판과 한글 보급의 또 하나의 중요한 사례가 바로 천주교 교리서다. 1801년 정약종의 《주교요지》가 나왔을 때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였던 주문모 신부는 한글로 된 이 책이 특히 무식한 부녀자와 아이들에게 가치 있다고 생각해 이를 간행한 바 있다. 또한 1801년(순조 1) 100여 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당한 신유박해 당시 죄인을 심문하던 심문관이 "서민이라도 삼사십 권의 천주교 서적은 가지고 있으니 책을 숨긴 곳을 말하라"고 다그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초기 교회에서 한글 교리서의 출판과 유통이 상당히 활발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1864년에는 서울에 있는 두 곳의 목판 인쇄소에서 네 권의 교리서를 간행하기도 했다." "1881년 동학의 경전인 《용담유사》가 한글로 간행되었으니 서학이든 동학이든 모든 종교와 사상은 한글로 교리를 출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당시에 한글의 위력이 매우 컸으며, 한글의 대중적 보급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140-1)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 지배가 본격화하면서 일본어 상용화를 전제로 한 교육도 본격화됐다. 조선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의 교과서가 일본어로 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행정과 법률 관련 문서는 일본어로 된 문서를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일본어가 명실상부한 권력언어인 국어로 되고, 우리말은 피지배 민족의 언어로 그 위상이 급락하였다." "교육, 행정, 법률, 학술 등의 영역에서 밀려난 조선어는 금세 이류 언어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니 일본으로서는 굳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일본어를 강요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권력의 언어에서 밀려난 언어는 생활어로 쓰이다가 문명의 발달과 함께 도태된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교사들에게 "언어가 통하지 않아 목적 달성에 지장이 없도록 조선어를 습득하라"고 권했으며, 총독부 관리들에게는 조선어 습득을 장려하면서 총독부 관리와 경찰을 대상으로 조선어 급수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154)


"주시경은 《보중친목회보》(1910.6)에서 '國語'를 '한나라말', '國文'을 '한나라글'로 바꾸었는데, 이로부터 '한말'이란 말과 '한글'이란 말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한글'의 '한'은 대한제국의 '韓'과 일치한다. 다시 말해 한글은 곧 '대한제국의 글자'라는 말을 나타낸다." "주시경의 제자인 권덕규는 "韓文을 조선말로 그냥 읽어 '한글'이라 한 것이요, 韓文이라고 그냥 음대로 정음으로 쓰면 지나글 漢文과 음이 혼동될 혐의도 있어 이것도 피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는 한일병합 이후에도 한글이라는 명칭을 확산시키는 데 주력한다.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명칭을 '한글'이라고 한 것도 '한글'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고려할 때 대한제국의 어문 정책을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 본다면 당시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국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못하는 현실이지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한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을 수 있다."(244-5)


"1930년대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일본이 조선어를 용인하는 상황(이개언어병용정책)을 활용해 한글 강습 활동과 같은 대중사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조선어 사전 편찬, 철자법 및 표준어 제정 등 조선어 규범화 사업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이때 절대 다수의 조선인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문맹 상태에 있었던 현실은 조선어학회의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 "1938년 3차 교육령 이후 조선총독부의 언어 정책은 강제적인 국어 상용 정책으로 전환되었고, 그 이전에 이미 한글 강습과 같은 대중사업은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조선어학회는 1940년 10월에 1933년의 철자법 통일안을 개정한 '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간하고, 1940년 6월 로마자표기법과 외래어표기법을 제정하여, 이를 1941년 1월 《외래어표기법통일안》으로 출판하게 된다. 이는 어문 규범과 관련한 모든 사업을 완결했음을 의미한다."(159-60)


"근대 어문정리기에 우리 맞춤법을 기초했던 주시경과 같은 선각자들은 (본래의 단어 형태를 중시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의 표기법을 채택함으로써 형태상의 일관성을 중요시했던 세종의 손을 들어주었다." "1930년대 철자법 논쟁에서 형태주의 표기법을 채택한 조선어학회와 (발음을 중시한) 음소주의 표기법을 주장한 정음파의 대립은 일단 조선어학회의 승리로 마감된다. 이러한 갈등은 해방 이후에 다시 불붙기 시작한다. 이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음소주의 표기법의 필요성을 피력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의 철자법을 자신들의 철자법으로 개정했고, 이 철자법을 바탕으로 편찬한 사전을 온갖 어려움을 뚫고 편찬해 왔는데 조선어학회의 후신인 한글학회가 자신들의 철자법 원칙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명 한글파동이라고 불릴 만큼 당시 전 사회를 들끓게 만들었던 철자법 논쟁은 결국 한글학회의 승리로 끝난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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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 지음 / 푸른역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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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중국 전문가의 한국사 관전평


"한국 상고사 특히 고조선에 관한 문헌기록은 위만조선 멸망과정을 다룬 《사기》 <조선열전> 이전의 자료로 한정하면 정말 한줌에 불과할 정도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한 연대가 기원전 2세기 말~1세기 초 정도이니, 그 이전에 조선을 언급한 중국 측 기록은 글자수로 따지면 아마 100자 남짓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 위만조선 이전의 고조선사를 구축하는 작업은 기둥 몇 개만 가지고 큰 집을 지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고고학 자료 역시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 특정 자료를 민족이나 국가의 강역이나 활동 구역을 밝히는 증거로 활용하는 데는 큰 문제들이 따른다. 특정 고고학적 유물을 다른 족속들이 나누어 썼을 가능성뿐만 아니라 같은 족속이라도 다른 유물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고학적 자료를 민족의 구분에 활용하려는 시도는 문헌자료의 오용 못지않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고조선 연구에 한국 학자들이 남용하고 있는 비파형동검이 좋은 사례다."(222-3)


"기원전 2세기경 출간된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에는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수감 중에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주자 이를 부끄럽게 여긴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고,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전한다. 《상서대전》보다 약 50년 후 사마천 역시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1970년대 랴오닝성遼寧省의 서부 다링하大凌河 유역에서 "기자 일족과 연관될 수 있는 기후라는 명문이 새겨진 상 말기의 청동기가 상당량의 다른 상말주초商末周初 청동기들과 함께 이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따라서 기원전 11세기경 기자 조선동래설은 상당한 고고학적 근거를 갖게 된 셈이다. 문제는 기자의 조선 동래를 전하는 문헌기록과 고고학 자료 간에 연대 편차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고고학 자료에서는 기원전 11세기 그 족속의 이동 가능성을 볼 수는 있지만 문헌자료는 그보다 약 1000년 이후인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나 되어서야 그러한 인식이 존재한다."(224-6)


선진先秦시대 문헌에서 기자는 상의 마지막 왕에게 학대를 받았지만, 주의 무왕에게는 환대를 받은 현인 정도로 묘사될 뿐이며 조선과의 연관성은 언급되지 않는다. "기자와 조선의 연관성이 한대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과 함께 시간이 갈수록 기자 관련 이야기가 증폭되는 양상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상서대전》이나 《사기》가 단지 기자의 조선 이주와 분봉만을 전하는 반면에, 《한서》에는 조선을 교화시킨 문화적 영웅으로서 기자가 나타나고, 이어지는 《삼국지》에서는 40대를 존속한 조선의 통치가문으로서 기자조선 상이 정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1,400년 이후 조선 왕조에서 더욱 확대되어, 한민족의 시조로서 기자의 위치가 더욱 공고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후대의 문헌으로 갈수록 더욱 세밀하게 증폭되어 나타난다는 구제강(고힐강)의 '누층적累層的으로 조성된 고사古史'설과 맞아떨어져, 그 진위 여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229)


"따라서 기원전 11 세기 중엽 상 멸망 직후에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상서대전》과 《사기》 〈송미자세가〉에 언급된 고사의 신빙성 여부도 엄정하게 재검토되어야 한다. 물론 기자 조선동래설을 비판하는 학자들도 상말주초인 기원전 11세기 다링하 유역에서 기자 일족이 일시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은 부인하지 않듯이, 상 멸망 이후 기족을 비롯한 상의 귀족 세력들이 다링하 유역으로 이주했을 개연성은 있다. 이는 그 지역에서 발견된 다량의 상 후기 청동기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서주 전기 연나라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유리허琉璃河 유적지를 비롯한 연나라의 근거지에서도 기족 관련 청동기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다링하 유역과 가까운 연에 근거지를 둔 소공과 기자와의 인연이나 양 지역에서 모두 출토된 기후 명문을 지닌 청동기들 역시 기자 일족의 동북이주설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기자 일족이 도피해간 바로 그 지역에 과연 조선이라는 정치체가 존재하고 있었을까는 별개의 문제이다."(229-30)


"고조선에 관심을 가지는 유사역사가들이나 학자들까지도 그 연구에서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고조선의 원고성遠古性에 대한 선험적 믿음이다.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이나 혹은 기자조선 얘기처럼 기원전 11세기에라도 존재했다면, 그 후신인 위만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멸망했기 때문에 고조선은 최소한 2,000년 혹은 1,000년 이상 존속한 나라가 된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장기적으로 존재한 나라다." "역사상 존재한 한 정치체나 나라의 존재 여부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신빙성 있는 문헌 증거로 입증되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둘째, 고고학적으로 입증되는 실체일 텐데, 최소한 그 중심지로 추정될 만한 성곽이나 묘지 등의 존재가 적절한 편년編年과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중국 최초의 왕조로 알려진 전설상의 하夏나라와 그 유적지로 추정되는 기원전 얼리터우二里頭 유적과의 연관성은 그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230-1)


선진시대 문헌 중에 고조선의 존재를 입증하는 근거로 동원되는 "《관자》와 《전국책》은 기원전 1세기 말 유향劉向의 편집을 통해 현재의 형태로 전래되었고, 조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산해경》의 두 편 역시 한대에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관자》는 그 내용이나 어법이 전국시대 이전으로 소급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한 사람의 저작으로 보기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원형은 전국시대 제나라의 직하稷下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학자들이 당시 영웅화된 관중의 사상을 대변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진과 한나라 초기를 거치며 소실되었고 유향의 재편집 당시 많은 부분이 새롭게 추가되었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설사 백번 양보하여 《관자》 두 편에 나오는 내용의 신빙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헌으로 입증할 수 있는 조선의 최초 출현은 (환공과 관중이 활동했던 기원전 7세기로서)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기원전 11세기 중반과는 무려 400년의 차이가 존재한다."(233-4)


"기원전 211년 진의 통일 이후 《사기》 〈진시황본기〉에 진의 영토가 동쪽으로 조선에까지 이르렀다고 언급되어 있듯이 조선이 중국 동북방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마천은 또한 〈조선열전〉에서 기원전 194년 위만의 조선 왕위 찬탈 이후 조선의 급성장과 함께 1년을 끌어온 한 무제의 조선 정벌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선진시대의 학자들과 달리 한대 이래의 학자들에게는 요동의 동부나 한반도 서북부를 차지했을 조선이 오늘날 중국 동북부의 대표 세력으로 각인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대인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이용 가능한 고고학 자료를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곳의 대략적 위치(다링하 유역)에 대한 정보는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한 무제의 조선 정벌에 뒤이어 그 지역에 설치한 군현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까지 더해져 기자의 조선동래 고사는 더욱 정치하게 다듬어질 수 있었다."(235-7)


"중국 동북 지역의 역사를 자신들의 충성심에 따라 정치적 변신을 거듭한 요遼나라 때(907~1125) 변경 주민들의 시각을 통해 바라본 나오미 스텐든은 《속박되지 않은 충성심》에서 당시 중국 동북 지역에서 '중국'은 통합된 개체로서나 관념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았고, 문화적인 정체성이나 민족성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오직 지역 지도자들의 충성심이 정치적 추이를 결정하는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중세까지 이 지역을 단일한 민족이나 국가적 정체성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중국 동북 지역에서 중국의 부재가 지금부터 2,000~3,000여 년 전 그 지역을 아우르는 고조선의 존재를 보증해주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연원이라고 믿고 있는 고조선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했을 수 있지만 만주 지역은 고대 이래 청대까지도 다양한 세력이 이합집산하며 명멸한 곳이었다. 결코 민족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용광로였던 것이다."(2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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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비판 -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
이문영 / 역사비평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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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국사를 가문의 역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민족주의가 오랫동안 강조되어온 결과이다. 그리하여 고대의 일도 마치 어제 삼촌이 도둑 맞은 것처럼 여기면서 역사를 들여다본다. 로마의 멸망은 아무렇지도 않게 읽으면서, 고구려의 멸망은 할아버지네가 망한 양 분통을 터뜨리면서 읽는다. 그러다보니 유사역사를 믿는 사람들은 현재 한국사 교육에 극도의 저항심리를 느끼게 된다."(33) 가짜의 세계는 다양하다. 돈이 잘 벌릴 것 같아서 만들 수도 있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만들 수도 있고, 종교를 위해 만들 수도 있다. 공통점은 조작된 자료를 가지고 기존의 사실을 부정하면서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의 고약한 문제는 (객관적으로 자료를 검증하고 판정을 내리는) 심판관(역사학자) 자체가 오염되었다고 몰고 가는 데 있다. 유사역사학에서는 역사학자들을 친일파, 매국노, 식민사관 추종자로 비난하며 낙인을 찍고 있다."(37)


# 로버트 T. 캐롤의 유사역사학 정의

1. 신화·전설·모험담 그리고 이와 유사한 문학을 문자 그대로 사실로 수용

2. 고대 역사 문헌에 비판적·회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 명목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고대 사가의 주장에 대한 경험론적·논리적 반증을 외면

3. 절대로 확실한 것만이 '진실'이며, 절대로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무엇도 진실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회의적 개념에 집착

4. 자신의 의제에 맞는 것은 호의적으로 인용하고, 맞지 않는 문헌은 무시하거나 해석에서 제외하면서 고대 문헌을 선택적으로 사용

5. 의제에 들어맞기만 하면 그것이 진실일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진실이 되기에 충분조건이라고 간주

6. 인종적 편견이나 무신론, 자민족우월론 때문에, 또는 정치나 종교적 의제에 반대하기 때문에 자기들 주장을 억압하는 음모가 있다고 강조

7. 역사는 승자의 기록에 불과하기 때문에 역사학이란 엄정한 과학이 아니며, 그저 국가의 이익 또는 도덕에 봉사하면 된다고 주장


시카고대학 종교학과 교수인 브루스 링컨은 『신화 이론화하기』에서 "영국 태생의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 경이 1786년에 내놓은 유럽 언어들과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페르시아어의 관계와 공통 기원에 대한 가설이 어떤 파장을 끼쳤는지를 잘 보여준다. 존스의 이론은 게르만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찬란한 그리스·로마와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문화적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아리아족과 관련이 없는 유대인을 상정함으로써 독일인에게 유대인 박해의 근거를 만들어주었다. '인도-아리아 어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위에 '민족'이 덧씌워지면서 후일 나치가 이 신화를 이용해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대범죄를 저지를 계기가 착착 만들어져갔던 것이다. 유사역사학에서는 파미르 고원을 중요시한다. 파미르 고원에서 인류가 발생했다는 말도 흔히 한다. 그런 척박한 곳에서 생명체가 진화했다는 걸 믿는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다."(53)


"유럽 국가들이 언어를 통해 민족의 기원을 신비하게 채색하려 했던 것과 같은 일이 아시아에서도 일어났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우랄-알타이 어족'이라는 학설이 나오면서 동아시아에서도 같은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우랄-알타이가 아리아어나 셈어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은 이미 19세기때부터였다. 핀란드와 헝가리를 중심으로 '범투라니즘'이라는 운동이 일어난 적 있었다. 투라니즘은 이란 북동부의 투란 평원에서 나온 말로, 우랄-알타이 어족을 '투란 민족'이라는 이름하에 하나로 묶어내려는 이념이다. 투라니즘은 헝가리에서 19세기 초에 시작되었고 1914년 터키의 아타튀르크에 의해 제창되어 터키 민족주의에 이용되기도 했다. 우랄-알타이라는 거대한 영역을 포괄하는 공통의 조상 이야기는 인도-아리아어족의 상정이나 마찬가지로 근대국가 건설에 목마른 이들에게 호소하는 바가 있었다. 일본은 얼른 이 개념을 차용했다." "투라니즘은 일본제국의 대아시아주의와 결합하여 전파되었다."(65-6)


제국주의를 지향한 일본은 "아시아를 병합할 명분이 필요했다. 일본의 힘이 성장함에 따라 그들의 논리도 점차 제국주의화되었다. 시작은 동문동종론(同文同種論)이었다. 동일 문명인 한자 문화권에 들어 있는 아시아 인종이 뭉쳐 유럽 인종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사람들을 강력하게 이끄는 이론이 일본에 등장하게 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유사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혈통주의에 입각한 '아시아주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쥬신론' 또는 '대동이(大東夷)'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이 혈통주의 속에서 중국은 같은 혈통이 아니다. 당시 일본이 같은 혈통으로 간주한 종족은 일본, 한국, 몽골, 만주, 그리고 시베리아의 고아시아 인종들뿐이었다. 이 세력은 후일 '동이족'이라는 이상한 카테고리에 묶인다. 감히 동이족의 땅을 침략하는 러시아를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고, 결국 그들의 뜻대로 러일전쟁이 벌어졌다."(74-5)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했던 신채호는 "민족은 역사가 없으면 국민이 되기 힘들 뿐이지만, 역사는 민족이 없으면 아예 존재 자체가 말살된다고 말하고 있다. 민족과 역사에 대한 신채호의 인식은 그 유명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말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나(아)와 내가 아닌 남(비아) 사이의 관계(투쟁)로서 역사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초기의 신채호가 견지했던 이 역사관에는 큰 약점이 있었다. 아와 비아의 투쟁에서 패배한 민족은 어떻게 되는가? 그런 민족은 다른 민족에게 흡수되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신채호는 약자를 밟아버리는 사회진화론에 회의를 품었다. 그 결과 그는 1920년대부터 무정부주의자로 탈바꿈했다." "신채호는 이제 민족이 아닌 민중을 중시하고, 민중을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바라보게 되었다. 불행히도 그는 이런 인식 변화를 책으로 남기지 못한 채 1928년에 무정부주의운동 중 체포되었고 옥사했다."(86-7)


"광복 이후 한국에는 두 조류의 민족주의가 흐르고 있었다. 초대 문교부 장관(지금의 교육부 장관) 안호상으로 대표되는 극우적인 국수주의가 한 흐름이고, 4월혁명으로 촉발되어 터져 나온 제3세계적인 민족주의 흐름이 다른 하나다. 4월혁명으로부터 촉발된 민족주의적 흐름은 중립화 통일론과 같은 급진적 방식의 통일론을 불러왔는데, 이런 흐름은 5·16쿠데타로 일시 정지되고 만다.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군정 이양'이라는 자신의 약속을 저버린 박정희는 민주 세력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 첫 표출이 한일협정 반대운동, 이른바 6·3운동이었다." "문정창의 책은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그는 한일협정에 대해 탄식하면서도 정권에 대한 비판은 일절 입에 담지 않고, 그 분노를 엉뚱한 방향으로 쏟아냈다. 바로 역사학계를 향해서였다."(107-8)


"문정창은 역사학계를 매도하는 프레임을 짰고, 이후 유사역사학에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이용했다. 어떤 프레임인가?" 그것은 일부 사가史家들이 일본인 어용학자들의 술수에 넘어가, 단군조선의 실존을 부정하고 '단군신화설'로 격하했다는 주장이다. "문정창이 꺼낸 조선총독부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역사학계가 조선총독부 사관을 답습한다'고 공격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전상진은 『음모론의 시대』에서 음모론자들은 상대방을 악마화 한다고 말한다. 상대를 악마화 하면 설령 우리 편이 실수를 해도 그것을 상대방의 공작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고 자신들을 비판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세력은 악마가 된다." "문정창의 주장을 확산시킨 것은'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였다. 국사찾기협의회는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이 1975년에 설립했는데, 이 단체가 결성되면서 유사역사학이 달궈지기 시작했다."(111-2)


"안호상에게 '역사학계=식민사학'의 프레임이 나타나는 것은 1970년대 들어서다. 그는 늦어도 1973년에는 문정창을 만났으며, 1975년부터는 함께 행동했다. 또한 배달문화연구원을 운영하면서 유사역사가들과 정기 모임도 가졌다. 백제의 중국 동남부 점거, 낙랑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등의 주장에 학계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문교부를 상대로 '국정 국사 교과서의 국정 교재 사용금지 및 정사 편찬 특별기구 설치 등의 조치 시행 요구에 대한 불허 처분 취소청구의 소'를 제기했다. 이후 그는 1975년 10월 8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고 국사찾기운동을 시작한다. 당시 역사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회고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인사 중 한 명인 "월간 『자유』의 박창암은 퇴역 군인이다. 그는 만주군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서 중국 공산군인 팔로군 진압에 활약했던 인물이다. 뒤에 5·16 쿠데타에 참여하여 혁명검찰부장으로 서슬 퍼렇게 활동했다."(117-8)


"박정희의 사상적 지향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1968년 12월 5일의 '국민교육헌장' 제정이었다. 안호상은 초반에는 구정치인으로 박정희 정권의 홀대를 받았지만, 1968년에는 민족주의를 표면에 내세운 박정희 정권과 협력하여 국민교육헌장 선포에 관여했다. 국민교육헌장 제정 이후 박정희는 민족에 대한 열등감보다 민족의 긍정적 측면을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진다. 이런 변화의 흐름 중 하나가 1970년대에 일어난 이순신 영웅화 작업 등 외침에 저항한 '민족사 복원' 작업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특히 '화랑도'가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화랑을 부각한 사람은 이선근으로 알려져 있다. 이선근은 제4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역사학자이다. 그는 안호상과도 친했으며 안호상이 일민주의를 내세웠을 때 '일민'이라는 한자보다 우리말 '한겨레'를 쓰라고 권했을 정도였다. 이선근은 우익 단체인 '대동청년단'의 부단장이기도 했다."(136-7)


"식민사학 프레임의 등장에는 그 전까지 검인정이었던 한국사 교과서가 1974년에 국정교과서가 되었다는 사실이 배경으로 존재한다. 전 국민에게 동일한 역사관을 주입할 수 있는 통로가 된 국정교과서 체제는 유사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기에 최적의 체제였다." "유신이 실시된 1972년에 국사교육 강화 방안이 등장했고, 이 방안에서 민족 주체성 확립이 과제로 제시되었다. 1973년부터 국정교과서 발행을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그 표면적인 목표 중 하나가 식민사관의 극복이었다."(119) "안호상이 주창했던 일민주의도 한백성주의로 이름을 바꾼 채 계속 유지되었다. 당연히 한백성주의에서도 안호상은 핏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여러 종족이 섞인 나라는 혼혈이기 때문에 하나의 핏줄로 변할수록 더 나은 나라가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한다. 이승만 때 하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되풀이한 셈이다."(121)


'국사찾기협의회'의 주요 회원이자 『환단고기』의 번역서 『한단고기』를 내놓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임승국은 국가보안법으로 역사를 재단하자고 말하면서 전두환에게 꼬리를 쳤다. "대통령 각하의 의지 하나로 결정될 수 있는 국사 광복". 공권력으로 밀어붙이면 역사의 진리가 입증된다는 논리다. "임승국은 민족주의를 반공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았다.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도 국가안보(반공)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역사를 국가체제철학이라고 주장한다."(130) "그는 한국사를 다섯 개의 조국으로 구분하는데, 제1조국은 환인의 나라인 환국, 제2조국은 신시개천의 환웅의 나라, 제3조국은 단군왕검의 고조선, 제4조국은 부여→삼국→발해로 이어지며, 제5조국은 제5공화국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조선은 없다." "그가 조선을 덮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조선의 역사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는 수치스러운 역사는 숨겨야 한다고 주장한다."(132-3)


"『환단고기』는 그 첫마디부터 "우리 환국의 건국이 가장 오래되었다(吾桓建國最古)"라고 시작된다. 처음과 오래됨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또한 「삼성기전 하편」에서는 첫마디에 "인류의 조상은 나반이라 한다(人類之祖曰那般)"라고 적고, 이후 중국과의 대결에서 우리가 승리했다는 내용을 적어 중국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한다. 이 열등감 때문에 핏줄의 문제가 묘하게 꼬이고 말았다. 중국의 고대 신화·전설의 인물 대부분을 동이족, 즉 한민족의 일원으로 설정하다보니 중국사를 한국사로 할 수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조차 불분명해진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는 고려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역사를 기술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조선에 대한 멸시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의 역사에서도 금나라를 사대한 사실이나 몽고의 침략으로 결국 항복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고려사를 모르는 상태라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의 기술을 하고 있다."(172-3)


"『환단고기』 안에는 근대 이후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들이 나타난다. 위작이라는 증거 중 하나다. 이에 대한 유사역사학 측의 이른바 '반론'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이었다. ① 근대에 사용한 용어가 아니다. ② 가필이 있다고 해서 위서는 아니다. ①의 반론은 의미 없는 우기기일 뿐이다. ②의 반론은 사료비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환단고기』의 문제는 근대에 사용된 단어가 들어 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환단고기』 「삼성기」의 지은이라고 주장된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은 안함(安含), 노원(老元), 동중(董仲)을 잘못 읽은 것이다. 「삼성기」는 원래 『세조실록』에 나오는 책 이름이다." "조선시대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황해도 해주목 '고적' 조에 "수양산성을 안함, 원로, 동중 세 사람이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노원(老元)의 이름이 뒤집혀 원로(元老)가 되었는데, 한자는 동일하다. 이처럼 다른 책을 통해서도 『환단고기』가 위조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181-2)


"이유립은 기자조선을 사마천이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면서 기자를 극력 부인한다. 그가 이렇게 말한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단군의 고조선이 있고 기자가 와서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위만이 기자의 후예 준왕을 몰아내고 조선을 차지했다. 단군은 한민족의 시조이지만 기자나 위만은 '중국인'이다. 그가 보기에 중국인이 감히 한민족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피의 순수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이유립뿐만 아니라 유사역사가들의 공통된 의식이다. 국사찾기협의회의 일원인 임승국은 『한단고기』에서 "우리는 '하늘→하느→한'의 음운 법칙을 갖는 민족으로 '하늘님→하느님→한님'을 조상으로 모시는 민족신앙을 갖는 민족이다. 하느님의 피를 직접 유전으로 받아 곧 하느님으로 태어나는 백성이라는 천민신앙(天民信仰)은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우리의 믿음이다"라고 말했다. 순혈이 중요한 유사역사가의 입장에서 기자와 위만은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187-8)


# 기자조선의 빈자리를 채워넣은 한국사 : 『환단고기』


"『환단고기』 「삼성기」 상편에는 "한 신이 사백력(斯白力) 하늘에 있어 홀로 신이 되어 (···) 어느 날 동녀동남 800명을 흑수, 백산의 땅으로 내려보냈다"는 구절이 있다. 유사역사가들은 '사백력'이 시베리아라고 주장한다. '시베리아' 자체가 근대에 생긴 지명인데, 마치 고대에 비슷한 발음으로 불렸을 것처럼 만들어진 단어가 '사백력'이다. "동녀동남 800명을 흑수, 백산의 땅으로 내려보냈다"는데, 이 땅은 만주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흑수'는 흑룡강 '백산'은 백두산이라는 것이다. 즉, 이유립이 「삼성기」 상편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환인이 시베리아 땅에서 만주로 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티베트고원에서 산동반도까지 장악한) 배달국은 환국 다음에 환웅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이유립은 생산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제국이 어떻게 성립 가능한지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저 땅의 절반 이상이 농사도, 심지어 유목도 불가능한 동토의 땅이라는 사실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으리라."(213-5)


서거정이 편찬한 『동국통감』을 보면 "요임금 원년 갑진년설에 따라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요임금 25년 무진년으로 결정되었는데, 바로 이 해가 기원전 2333년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 중 하나는 명나라 건국과 조선 건국의 연도 차이가 25년이 나기 때문이다. 그 연도 차이에 맞춰 요와 단군의 간격도 벌려놓았던 것이다. 만일 요임금-고조선 동시 건국설을 따른다면 고조선의 건국년은 기원전 2357년이 된다. 2018년도 단기 4351년이 아니라 4375년이 될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에 언급된 『고기』에 근거해 요임금 50년 건국설을 따른다면 기원전 2308년이 된다." "『환단고기』와 같은 위서들은 (『동국통감』에서 확정된)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역사를 꾸며놓았다. 워낙 오랫동안 알아온 연대였기 때문에 고칠 생각을 못한 것이다. 『환단고기』 등이 실제로 과거의 책이 아니라는 간단한 증거라 할 수 있다."(254-5)


"이른바 '영토 순결주의'라는 게 있다. 우리 영토에는 일체 다른 민족의 '더러운' 손길이 닿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이 고대사에 투영되면 낙랑군이라는 '다른 민족의 더러운 손길'이 문제가 되고 만다. 그러나 유사역사학에서는 반대로 말한다. 사대주의와 식민사관 때문에 우리 역사를 축소시켜온 것이 한국 역사학계이고, 그 대표적인 예가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라는 주장이라는 것이다."(281) 문명은 흔적을 남긴다. "요서의 어디가 낙랑군이었다고 말하는데, 수백 년을 유지한 그곳에는 아무런 유적·유물이 없다. 그렇지만 그곳이 낙랑군이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들이 '식민사학의 수괴'라고 치를 떠는 이병도의 말을 인용해서 고고학보다 문헌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는 이병도 시절의 낡은 이야기일 뿐이다. 고고학의 눈부신 성과에 대항할 방법이 없자 꺼내든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평양에서는 엄청난 양의 낙랑군 유물과 유적이 나왔다."(283)


"근대에 와서 광개토왕비를 발견한 사람이 일본의 밀정 포병 대위 사코 가게아키(사코 가게노부)이기 때문에 비문 위조설도 광범위하게 퍼졌다." "광개토왕비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구절은 신묘년(391) 조의 기사로, 위조된 것이라는 주장도 이 기사 때문에 나왔다. 이 기사는 왜가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비문의 내용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광개토대왕이 병신년(396)부터 기해년(399)까지 백제를 토벌하고, 경자년(400)에는 신라를 도와 임나가야를 정벌했으며, 갑진년(404)에는 다시 백제와 손을 잡은 왜를 격멸했다는 내용이 신묘년 조 다음에 적혀 있다. 왜가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사실이라 해도 비문이 결국 이야기하는 바는 왜(일본)의 대패이다. 광개토왕비는 왜군의 패배, 그것도 대패가 기록된 비석이다. 오늘날 한·중·일 학계는 모두 신묘년 기사가 고구려의 허풍이 들어갔다고 보고 있다. 상대가 막강해야 쳐부순 맛이 난다는 거다."(342-4)


"일본 역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광개토왕비를 일본으로 가져갈 생각을 했다. 이 무렵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광개토왕비를 일본에 가져가려 한 이유는 그 비에 적힌 패배를 보고 일본 국민으로 하여금 분발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라토리는 패배를 직시하여 분발하자고 했지만,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연서(南淵書)』라는 위서가 등장한다. 견수사로 중국 수나라를 다녀오던 일본 사신 미나부치노 쇼안이 귀국하다가 광개토왕비를 보고 그 전문을 적어 온 책이 『남연서』라는 것이다. 『남연서』에 따르면 왜는 고구려에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결국 패배했다는 열등감이 위서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1943년 조선총독부는 각도 경찰부장에게 항일 기록이 새겨진 고비들을 폭파하도록 지시했다. 이 명령은 실제로 행해졌다. 남원의 황산대첩비도 지금은 복원해놓았지만 이때 부서졌다."(344-6)


1994년 「삼국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독자관측사실 검증」이라는 논문에서 "박창범은 초기 신라가 양자강 중류 지대에 있었으며 백제는 북경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같은 말을 하는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이 근거가 너무 박약한 터라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참에 "삼국이 중국 땅에 있었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주어졌으니 환호할 만도 했다." "박창범이 계산한 백제와 후한의 일식 관측 최적 위치를 보면 동일한 지역을 최적 관측지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박창범은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에 대해 단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책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는 후한의 최적 관측지 지도를 빼버렸다." "박창범 등의 주장은 기본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 일식은 범위가 아주 넓어서 관측할 수 있는 영역도 매우 크다. 이 영역이 겹치는 곳의 중심이 일식을 관측한 곳이라고 볼 수 없다. 특히 고대사의 경우 관측 기록, 즉 표본이 너무 적기 때문에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없다."(347-9)


유사역사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만주원류고』는 건륭제가 제작을 지시하고 검토한 책인데, "'부족' 조에서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백제, 신라, 말갈, 발해, 완안, 건주 순으로 숙신과 관련된 자료들을 열거한다. 책 제목 그대로 만주족의 원류를 파악하겠다고 쓴 책인데 여기에 부여, 삼한, 발해와 같은 한민족 국가들을 다 집어넣었다. 즉, 부여, 삼한, 발해를 여진족의 변방 부족으로 구성한 책이다. 언어와 음성적 유사성을 근거로 만주의 길림 지방이 신라의 계림이라고 말하는 등, 학문적 신빙성과는 거리가 먼 책이다. 『만주원류고』 '강역' 조에서도 부여, 삼한, 옥저, 백제, 신라, 발해까지 전부 만주에서 활동한 것으로 만들어 청나라의 전사(前史)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만주의 지배자였던 고구려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고구려를 빼놓은 왜곡된 역사책을 만들었는가? 만주 지역의 역사적 주인공은 여진족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361-2)


# 유사역사학자들이 우리나라 상고시대 지명들을 대부분 요동에 비정하고 있는 이유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은 흔히 "일본과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드는데 우리는 있는 역사도 챙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있는 역사'라 주장하는 것이 세계 학계에서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국수주의에 물든 유사역사학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몇몇 외국 학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반박하지만 그 절반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나머지는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의 오해와 오독의 결과에 불과하다. 부사년처럼 동북공정의 전초를 만든 학자의 이론을 가져와 단장취의하는 파렴치한 짓들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유사역사학은 역사학 자체를 오도하면서 역사 연구의 목적이 자국의 영광을 되살리는 것이라 현혹하고, 현재 시점에서 수치스러운 역사는 은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유도한다. 또한 한민족이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생각을 퍼뜨려 다른 나라 사람들을 깔보고 업신여기게 만든다. 이런 역사관을 가졌던 이들이 나치와 일본제국주의였다."(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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