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민중사 2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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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가운데 급진주의 작가 랜돌프 본은 "전쟁은 국가의 건강한 상태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유럽 국가들이 1914년에 전쟁을 시작함에 따라, 각국 정부는 번창하고 애국심이 꽃을 피웠으며 계급투쟁은 잠잠해졌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젊은이들이 종종 100미터의 땅이나 한 줄의 진지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죽어갔다. 아직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있던 미국에서는 국가의 건강에 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가 성장하고 있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어디에나 있는 듯 보였다. 계급갈등은 격렬했다."(11) 1914년 미국은 경제불황에 시달렸지만 1915년에 이르면 연합국(대부분 영국)의 군수품 주문이 경제를 자극하면서 1917년 4월까지 20억 달러 이상의 상품이 연합국에 팔려 나갔다. 호프스테터의 말처럼, "미국은 전쟁과 번영의 숙명적인 결합 속에서 연합국들과 이해를 같이하게 됐다."(16)


미국의 선전포고를 "미국 국민에 대한 범죄"라고 규정한 사회당은 1917년 지방선거에서 선전과 애국심의 물결에 맞서 20~30퍼센트에 달하는 득표율을 올리며 분전했지만, "1920년대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진정된 것처럼 보였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파괴됐고 사회당은 분열됐다. 파업은 무력으로 분쇄됐고 경제는 대중의 반란을 방지하기에 충분한 딱 그만큼의 사람들에게만 호전되고 있었다. 1920년대에 연방의회는 이민 할당수를 설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위험하고 불온한 이민자의 물결(1900~1920년 사이에 1,400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민 할당제는 앵글로색슨족에 유리하고 흑인과 황인종을 배제했으며 라틴계, 슬라브족, 유대인의 이민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KKK단이 1920년대에 부활되어 북부로 확산됐다. 1924년에 이르러 KKK단은 45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게 됐다. 어디서나 벌어지는 폭도의 폭력과 인종적 증오 앞에서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무기력해 보였다."(51)


대공황 극복의 임무를 부여받고 1933년 대통령에 당선된 루즈벨트의 개혁은 앞선 입법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개혁은 위기를 극복하고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재조직하는 동시에 루즈벨트 행정부 초기에 성장한 심상치 않은 자생적인 반란─소작농과 실업자들의 조직화, 자조self-help 운동, 몇몇 도시에서 벌어진 총파업─을 저지한다는 두 가지 절박한 필요를 충족시켜야 했다." 체제 자체를 수호하기 위해 제정된 "전국부흥법National Recovery Act(NRA)은 경영자와 노동자, 정부가 동의한 일련의 규약에 의해 물가와 임금을 고정시키고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경제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신임 행정부가 초기 몇 달 사이에 설치했던 또 다른 기구인 농업조정청Agricultural Adjustment Administration(AAA)은 농업을 조직화하려는 시도였다. 전국부흥법이 거대기업을 선호한 것처럼 농업조정청은 대농들에게 유리했다."(68-70)


"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Tenessee Valley Authority(TVA)는 이례적으로 정부가 산업에 손댄─홍수를 조절하고 테네시 강 유역에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정부 소유의 댐과 수력발전소 망을 구축했다─것이었다.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공사는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소비자들에게 값싼 전력을 공급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사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도 했다. 그러나 뉴딜의 경제 조직화의 주된 목표는 경제를 안정화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목표는 반란이 현실적인 혁명으로 전환되지 않기에 충분할 만큼 하층계급들을 돕는 것이었다."(70) "전국노동관계위원회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를 설립하도록 한 1935년의 와그너법안Wagner Act이 통과된 것은 노동자 소요에 직면해 체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의 파업 물결(주로 사업장이나 공공시설에 들어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앉아 있는 연좌파업 전술을 구사)은 그런 필요성을 더욱 가중시켰다."(84)


제2차 대전 기간 동안 제정된 미국의 여러 정책 가운데 하나는 파시즘의 복사판에 가까운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1942년 2월에 대통령령 9066호에 조용히 서명함으로써 영장이나 기소절차, 심문과정 없이도 태평양 연안지역의 모든 일본계 미국인─11만 명의 남자, 여자, 어린이─을 체포해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소개疏開시키고 내륙의 수용소로 이송해 감옥과 동일한 조건 아래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군에 부여했다."(112) "애국심과 전쟁 승리에 대한 전면적인 헌신이라는 압도적인 분위기가 넘쳐났고 미국노동연맹과 산업별조직회의가 무파업서약no-strike pledge까지 했지만, 기업의 이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데 반해 임금은 동결되는 데 좌절한 이 나라의 많은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전쟁 기간에 1만 4,000회의 파업이 벌어져 총 677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어떤 시기보다도 더 많은 수치였다."(114)


"전쟁이 통제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사실은 여러 정부가 체득한 오래된 교훈이었다. GE 회장 찰스 E. 윌슨은 전시의 경제 상황에 너무나 만족한 나머지 "영구전시경제Permanent war economy"를 위한 기업과 군부의 지속적인 동맹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전쟁 직후, 전쟁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동원해제와 군비축소에 찬성하는 듯이 보이자 트루먼 행정부(루즈벨트는 1945년 4월에 사망했다)는 위기와 냉전의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 소련과의 경쟁은 현실이었다."(127-8) "전후 10년 동안 미국은─혁명 억압을 목표로 하는 대외정책을 지지할 수 없었던 급진주의자들은 배제하면서─냉전과 반공 정책을 둘러싸고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공화당과 민주당의 국민적 합의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0년대, 자유주의-보수주의 합의의 형성을 가속화시킨 사태가 벌어졌다─트루먼이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채 벌인 한국전쟁이 그것이었다."(130-2)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위스콘신 출신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는 트루먼보다 훨씬 더 나갈 수 있었다."(135) "1950년에 공화당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나 '공산주의 전선'임이 드러난 조직을 등록시키기 위한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을 발의했을 때, 자유주의적 상원의원들은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1947년에 트루먼은 충성에 관한 대통령령을 반포, 법무부로 하여금 "전체주의나 파시즘, 공산주의, 정부전복의 성격을 갖거나 ····· 위헌적인 수단으로 미국의 정부형태를 바꾸려 하는 것으로" 확인된 조직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했다." 국가적인 반공 분위기를 고조시킨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50년 여름에 있었던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이설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기소였다."(138-9) "혁명적인 정부─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아니면 반反유나이티드 사 정부든─를 저지하거나 전복시킨다는 민주당-공화당, 자유주의-보수주의 합의는 1961년에 쿠바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150)


# 피그스 만 침공


한편 "1954년에 대법원은 1890년대 이래 고수해 왔던 '분리되지만 평등하다'라는 원칙을 깨뜨렸다.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공립학교에서의 인종분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련의 사건을 대법원에까지 가져왔고, '브라운대 교육위원회 사건Brown v. Board of Education'에서 이제 대법원은 초등학교 학생의 인종분리가 "열등감을 만들어 ····· 학생들의 머리와 가슴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언급했다."(171) 1955년 말, 앨라배마의 주도 먼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가 시내버스 승차거부 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정부의 탄압과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먼고메리의 흑인들은 승차거부를 계속했고, 1956년 11월, 대법원은 현지 버스 노선의 인종분리가 불법이라고 판결했다."(173) "1965년 존슨 대통령과 의회는 훨씬 더 강력한 투표권법Voting Rights Law을 발의, 통과시켜 이번에는 연방정부가 현장에서 유권자 등록과 투표의 권리를 보호하도록 했다."(184)


# 흑인 민권 운동

1. 앉아있기 운동sit-ins : 식당의 백인 전용 좌석에 앉기

2. 자유승차단Freedom Rides’ 운동 : 버스를 타고 남부 전역을 돌면서 인종분리 관행에 도전하려고 시도


"1946년 10월에 프랑스가 베트남 북부의 항구도시 하이퐁Haiphong을 폭격함으로써 누가 베트남을 통치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베트남독립동맹운동과 프랑스 사이에 8년간 이어질 전쟁이 시작됐다."(210) 그러나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프랑스가 1954년 결국 철수하자 "미국은 베트남의 통일을 저지하고 남베트남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안정시키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미국은 얼마 전까지도 뉴저지에 살고 있던 응오딘디엠Ngo Dinh Diem이라는 전직 베트남 관리를 국가수반으로 앉히고 예정된 통일선거를 실시하지 말라고 부추겼다. 1954년 초에 열린 미 합참회의 비망록은, 정보부의 평가에 따르면 "자유선거에 기반을 둔 해결이 이루어지면 연합3국(Associated States,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제네바회담으로 만들어진 인도차이나의 세 지역)을 공산주의의 수중에 빼앗기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언급했다."(212)


"1968년 가을, 리처드 닉슨이 베트남에서 손을 떼겠다고 약속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닉슨은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1972년 2월에 이르면 15만 명도 안 되는 병력만이 남게 됐다. 그러나 폭격은 계속됐다. 닉슨의 정책은 '베트남화Vietnamization'─사이공 정부가 미국의 자금과 공군력을 이용해서 베트남 지상병력으로 전쟁을 계속 이어나간다는 정책─였다. 닉슨은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가장 평판이 나쁜 측면, 즉 이국만리의 땅에서 미군 병사들이 교전을 벌이는 상황만을 종식시켰던 것이다."(231-2) "반전운동은 닉슨 대통령이 캄보디아 침공을 명령한 1970년 봄에 정점에 달했다. 그해 5월 4일, 오하이오 주 켄트 주립대학에서 학생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위해 모여들자, 주 방위군이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학생 4명이 살해됐다. 한 명은 평생불구가 됐다. 400개 대학 학생들이 이에 항의해 동맹휴업을 벌였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학생 총파업이었다."(244-5)


여성 운동에서는 낙태가 주된 쟁점이었다. "1968년과 1970년 사이에 20여개 주에서 낙태를 금지하는 법률을 폐지하기 위한 법적 투쟁이 시작됐고, 정부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론은 점점 강력해졌다." "마침내 1973년 초에 대법원은, 각 주는 임신 마지막 3개월 동안에만 낙태를 금지시킬 수 있으며, 4에서 6개월일 때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낙태를 규제할 수 있고, 임신 3개월까지는 임산부와 의사가 결정권을 갖는다고 판결했다(로 대 웨이드 판결Roe v. Wade, 도 대 볼튼 판결Doe v. Bolton)."(279) "1960년대의 여성운동이 미친 가장 심대한 효과는 흔히 전국 곳곳의 가정에서 모인 '여성집단들'에서 이루어진 '의식고양consciousness raising'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열등함에 대한 거부, 자기에 대한 확신, 자매애의 결속, 어머니와 딸의 새로운 유대 등을 뜻했다."(281)


1970년대 초반, 체제는 지배능력을 잃은 듯 보였다. "정부와 기업들에 대해 이처럼 전국적으로 적대감이 팽배한 이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5만 5,000명의 사상자와 도덕적 수치, 정부의 거짓말과 잔학행위를 드러낸 베트남 전쟁 때문이었다. 이에 더해 '워터게이트'라는 단 한 단어로 알려지게 되면서─미국 역사상 초유의 일인─1974년 8월의 리처드 닉슨의 대통령직 사임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낳은 추문으로 인해 닉슨 행정부가 정치적 망신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331-3) "닉슨은 제거하되 체제는 유지하라는 구호가 제기됐다." "포드가 대통령에 오른 뒤 처음 한 일 가운데 하나는 닉슨을 사면함으로써 혹 있을지도 모르는 형사처벌로부터 그를 보호해준 것이었다." "워터게이트 침입사건 같은 기괴한 장난은 (미디어에서) 충분히 다루어졌지만, 현재진행형인 사례들─미라이 학살, 캄보디아에 대한 비밀 폭격, 연방수사국과 중앙정보국의 활동 등─은 최대한 스쳐 지나가듯 보도됐다."(340)


"체제는 1975년에 복잡한 공고화 과정을 겪었다. 이 과정에는 (캄보디아에 억류된 미국 선박을 구출한다는 빌미로 군사작전에 나섰던) 매이어게스 호 사건처럼 국내외에서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과거 방식의 군사행동이 포함됐다. 또한 환멸을 느낀 대중들에게 체제가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교정할 수 있다는 만족감을 줄 필요도 있었다. 공개적인 조사를 통해 특정한 범인들을 찾아내는 한편 체제 자체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전형적인 방법이었다."(352) "헌팅턴은 "미국이 세계질서 체제의 헤게모니 강대국이었던" 사반세기가 종언을 고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았다. 그는 '민주주의의 과잉'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대에 대해 바람직한 한계들"을 제시했다. 헌팅턴은 이 모든 것을 미국의 미래에 극히 중요한 한 조직에 보고하고 있었다. 삼각위원회는 1973년 초에 데이비드 록펠러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조직한 기구였다."(361-2)


"레이건의 승리와 8년 뒤 조지 부시의 당선은 카터 집권기의 희미한 자유주의조차도 갖고 있지 않은 기존 체제의 또 다른 부분이 국가를 책임지게 됨을 뜻했다." "10여 년 간의 레이건-부시 집권기는 온건한 자유주의를 결코 넘어서지 않았던 연방 사법부를 압도적으로 보수적인 기관으로 변화시켰다. 1991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레이건과 부시는 837명의 연방 판사 가운데 절반 이상을 교체했고, 대법원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수의 우익 판사를 임명했다." "레이건-부시 시기에 렌퀴스트의 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약화시키고, 사형을 부활시키며, 경찰의 권한에 대해 피구금자의 권리를 축소하고 연방의 지원을 받는 가족계획 병원의 의사들이 여성들에게 낙태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가로막는 등의 일련의 판결을 내렸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립학교 교육비를 부담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교육은 '기본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383-4)


"1986년에 베이루트에서 발간되는 한 잡지에 실린 기사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이 이란에 무기를 판매했고, 그 대가로 이란은 레바논의 과격파 회교도들에 의해 억류되어 있던 인질을 석방하기로 약속했으며, 미국은 이 무기 판매로 생긴 수익금을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에 제공, 무기를 구입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란-콘트라 스캔들 전체가 미국의 기존 체제가 갖고 있던 이중적인 방어선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가 됐다. 첫 번째 방어선은 진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만약 진실이 폭로될 경우 두 번째 방어선은 조사는 하되 너무 깊숙이 조사하지는 않는 것이다. 언론은 사건을 공표하기는 하지만 문제의 핵심에까지 다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백악관 참모진은 레이건과 부시의 관련성을 용의주도하게 은폐했다. 이것은 고위 관리가 부하직원들을 방패막이 삼아 자신의 관련성을 그럴듯하게 부인할 수 있는 정부의 익숙한 수단인 '그럴듯한 부인plausible denial'을 생생하게 보여준 사례였다."(403-5)


"미국의 권력이 여전히 전 세계에 뻗치기를 바랐던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를 괴롭힌 것은 바로 베트남 전쟁의 유산─절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그것은 끔찍한 비극일 뿐만 아니라 싸우지 말았어야 했던 전쟁이라고 느낀 것─이었다." "대통령에 오른 부시는 이른바 베트남 증후군─지배체제가 바라는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극복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부시는 1991년 1월 중순에 이라크에 대한 공중전을 개시하면서 전국적인 반전운동이 전개되기 전에 신속하게 전쟁을 끝낼 수 있도록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했다."(458-9) "1989년에 소비에트 블록이 해체된 뒤 미국에서는 국방예산에서 수십억 달러를 절감해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위한 사회복지에 사용하자는 '평화 배당금'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페르시아 만 전쟁은 정부가 그런 논의를 저지하는 손쉬운 구실이 됐다." 부시 행정부의 한 각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담에게 빚을 진 셈이다. 그는 우리를 평화 배당금으로부터 구해줬다."(469)


클린턴은 자신이 '법과 질서'의 문제에 관해 강경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부단히 애썼다. "하원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고 클린턴 역시 열렬히 지지한 1996년의 '범죄 법안Crime Bill'은 범죄문제에 대해 예방이 아니라 처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법안은 사형을 모든 종류의 형사범죄로 확대시켰으며 교도소 신축에 80억 달러를 할당했다."(504) "양대 정당은 불법적인 이민자뿐만 아니라 합법적인 이민자에 대해서도 복지혜택(식품교환권, 노인 및 장애인 수당)을 박탈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클린턴 역시 이에 서명했다." 1996년 초, 의회와 대통령이 힘을 합쳐 통과시킨 '테러방지와 효율적 사형집행에 관한 법Antiterrorism and Effective Death Penalty Act'은 언제 어떤 범죄를 저질렀든 간에 유죄판결을 받은 이민자를 추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법은 토박이 미국인인 티모시 맥베이가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 청사를 폭파한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통과되었다.(505-6)


"클린턴 행정부의 대외경제정책은 '시장경제'와 '민영화'에 강조점을 뒀다. 그 결과 구 소비에트권 국민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비효율적이고 억압적인 과거 정권 치하에서 받아 왔던 사회복지를 박탈당한 채 이른바 '자유'경제에서 혼자 힘으로 삶을 꾸려 나가야 했다." "'자유무역'의 구호는 클린턴 행정부의 핵심 목표가 됐고, 의회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합세한 가운데 멕시코와의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NAFTA)을 통과시켰다." "자유무역을 지지한다는 미국의 주장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미국 정부는 기업의 이익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인 '국익'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에 종종 무역에 간섭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멕시코의 토마토 재배업자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가로막기까지 했다. 자유무역의 원칙을 훨씬 더 극악무도하게 위반한 사례 가운데 하나로 미국이 이라크나 쿠바에 대한 식품과 의약품의 수송을 허용하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520-1)


2001년 9·11 사태가 벌어지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즉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을 숨겨주는 나라들을 똑같이 다룰 것입니다." "의회는 헌법이 요구하는 선전포고 없이 군사행동에 착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시에게 부여하는 결의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하원에서는 단 한 명─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캘리포니아 출신 바버라 리─만이 반대표를 던졌다."(552-3) 곧이어 "의회에서 통과된 '미국애국자법'은 단순한 혐의만으로도 기소 없이, 그리고 헌법에 규정된 정당한 법 절차에 따른 권리 없이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법무부에 부여했다. 이 법에 따르면 국무장관은 어떤 집단이든 '테러리스트'로 지정할 수 있으며, 그런 조직의 성원이거나 자금을 제공한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 추방할 수 있었다."(5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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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7-0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긴 리뷰 잘 읽었습니다. 다음주에 노동자 연대에서 맑시즘 개최하는데, 거기 북카페에서 이 책 살까합니다. ㅎㅎㅎㅎ 개인적으로 하워드 진을 존경합니다. 미국의 리영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nana35 2018-07-09 13:59   좋아요 0 | URL
직접 읽어 보시면 훨씬 풍부한 내용을 알게 되실 겁니다.
즐거운 공부하세요.

NamGiKim 2018-07-09 11:10   좋아요 0 | URL
맑시즘 끝나고 난 뒤 꼭 읽어야겠습니다.

NamGiKim 2018-08-11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na님께서 쓰신 서평이 제 서평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nana35 2018-08-11 20: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미국민중사 1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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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인디언들의 땅을 강탈했다.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총독 존 윈스럽은 이 지역이 법적으로 '공지空地'라고 선포함으로써 인디언의 땅을 취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땅을 '정복'하지 않았으므로 땅에 대한 '자연권'만 보유할 뿐 '시민권'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자연권'은 법적 효력이 없었다. 청교도들은 또한 성경 시편 2장 8절의 구절에 호소했다. "내게 청하여라. 뭇 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너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그리고 무력으로 그 땅을 빼앗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로마서 13장 2절을 들춰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39) "공간, 즉 땅에 대한 욕구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욕구였다. 그러나 땅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쟁이 지배하는 역사의 야만기에서 이런 인간적인 욕구는 종족 전체를 살육하는 것으로 전환됐다."(43)


"버지니아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옥수수와 수출용 담배를 재배하기 위해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제 막 담배를 경작하는 법을 알아내어 1617년에 영국으로 첫 화물을 보내게 된 때였다. 흑인 노예가 답이었다."(58) "아프리카 각국에는 노예제가 존재했고, 때로는 유럽인들이 이를 근거로 들어 자신들의 노예무역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데이비드슨이 지적하듯이, 아프리카의 '노예'는 유럽의 농노에 더 가까웠다." "이들은 가혹한 노역을 해야 했지만 아메리카로 끌려간 노예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누렸고 노예선과 아메리카 대농장의 인간 가축들과는 전혀 달랐다." "아메리카 노예제를 역사상 가장 잔인한 형태의 노예제로 만든 두 가지 요소가 아프리카에는 없었다. 첫째는 자본주의적 농업에서 기인하는 끝없는 이윤을 향한 광란이다. 둘째는 피부색에 따라 백인은 주인, 흑인은 노예라고 가차없이 구분하고 인종적 증오심을 이용함으로써 노예를 인간 이하의 지위로 떨어뜨린 것이었다."(62-3)


"노예소유주들은 노동력 공급과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복잡하고 강력한 통제체제를 발전시켰다." "노예들은 규율을 배웠으며, '자신의 분수를 알고', 검은색을 종속의 징표로 보며, 주인의 힘을 경외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를 버리고 주인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이라 인식하도록 자신이 열등하다는 사고를 끊임없이 주입받았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된 노동 규율을 부과하고, 노예 가족을 해체시키고, 종교를 통해 마음을 달래주었다. 또한 노예들을 밭에서 일하는 노예와 그보다 조금 더 특권을 누리는 가내노예로 나눔으로써 그들 사이의 연대감을 파괴했다. 마지막으로 법률의 힘과 감독의 직접적인 힘을 통해 태형, 단근질, 수족절단, 사형에 처하는 방법이 필요했다."(77) "새로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흑인반란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식민지 초기에 흑인 노예만큼이나 나쁜 대우를 받고 있던 백인 계약 하인들이 흑인 노예와 손을 맞잡는 일이었다.(80)


"식민지 기간에 북아메리카 해안으로 온 이주민의 절반 이상이 하인이었다. 17세기에는 대부분 영국인이었고 18세기에는 아일랜드인과 독일인이었다. 하인들이 자유를 찾아 달아나거나 계약기간을 끝마치게 됨에 따라 점차 노예가 그들을 대신하게 됐지만, 1755년까지도 여전히 백인 하인이 메릴랜드 인구의 10퍼센트를 차지했다."(97) 식민지 관리당국은 백인 빈민들의 계급적 분노를 해소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즉 동부 해안지대의 비옥한 땅을 독점함으로써 땅 없는 백인들을 서부 변경으로 보내 인디언과 충돌시키고 해안지대의 부자들을 위해 인디언 문제에 대한 완충 역할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며, 한편으로 정부의 보호에 더욱 의존하게 만든 것이다." "엘리트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인디언과 전쟁을 벌여 백인의 지지를 얻고 가난한 백인들을 인디언과 맞서게 만들어, 있을 수 있는 계급 충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더 나았다."(108-9)


"에드먼드 모건은 버지니아 노예제에 관한 주의 깊은 연구에 근거해 인종주의를 흑백 간의 '자연적' 차이가 아니라, 계급적 멸시에서 기인하는 것, 즉 통제를 위한 현실적 장치로 보고 있다." "식민지들이 성장함에 따라, 아메리카 역사를 통틀어 엘리트의 끊임없는 지배를 위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 또 다른 통제기제가 있었다. 큰 부자 및 극빈층과 나란히 소농장주, 독립자영농, 도시 장인들이 성장했고, 이들은 상인 및 농장주들에게 힘을 더해 주는 대가로 작은 보수를 받으면서 백인 극빈층, 흑인 노예, 변경의 인디언 등에 대한 튼튼한 완충 지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런 충성을 물질적 이익보다 훨씬 강력한 무언가로 묶어두기 위해서 1760년대와 1770년대에 지배계급은 놀랄 만큼 유용한 도구를 찾아냈다. 그 도구는 곧 자유와 평등이라는 언어였고, 이를 통해 노예제나 불평등을 종식시키지 않은 채로도 영국에 맞서 혁명전쟁을 수행하기에도 충분할 정도의 백인들을 결속할 수 있었다."(113-4)


# 지배 체제 : 1단계 - 이간질(백인 하인과 흑인 노예), 2단계 - 완충지대(인디언과 이주민, 이주민과 중산층), 3단계 - 이데올로기(자유와 평등)


영국과 식민지 도시의 갈등 속에서 "식민지 도시의 숙련기능공들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었다. 즉 선거구민이 자신들의 대표자를 점검할 수 있도록 하는 대표의회의 공개회합, 입법의사당의 공공방청, 호명투표의 공표 등을 요구했다."(122) 혁명운동 지도층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중요한 전투는 대부분 북부에서 벌어졌으며, 이곳 도시들에서 식민지 지도자들 아래의 백인 주민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지도자들은 숙련기능공을 설득해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숙련기능공들은 일종의 중간계급으로 영국 제조업자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영국에 대항한 싸움에 이해관계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대對프랑스전쟁에 뒤이은 위기에서 일자리를 잃고 굶주리고 있던 가난한 대중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은 영국에 대항하는 이런 군중의 에너지를 이용하려 하면서도 군중이 자신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도록 에너지를 억누르고자 했다."(126-7)


"로열 나인Loyal Nine이라 불린 보스턴의 정치집단은 1765년 8월 인지세법에 항의하는 행진을 조직했다." 이들은 시위대가 인지담당관의 재산 일부를 파괴하며 흥분한 모습을 보이자 자체 무장순찰대를 창설하고 군중들과 선을 그었다. "압도적인 저항 때문에 인지세법이 철회되자 보수파 지도자들은 폭도들과 관계를 끊었다."(128) 곧이어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지자 "영국 의회는 탄압법Coercive Act을 제정, 매사추세츠에서 사실상 계엄령을 실시하면서 식민지 정부를 해체하고 보스턴 항구를 폐쇄했으며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자 이에 반대하는 읍민회의와 대중집회가 열렸다." "보스턴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교신위원회들은 이 집회를 환영했으나 사유재산을 파괴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자유의 아들들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은 코네티컷의 밀퍼드에서처럼 무법상태를 "가장 혐오한다"고 공언했으며, 애너폴리스에서처럼 "공공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경향이 있는 모든 폭동과 불법집회"에 반대했다."(131-2)


1776년 출간된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은 애국적 정서를 모든 계급에게 고무하는 언어를 감동적으로 서술했다. 페인은 상, 하원제를 비난하고 전체 인민을 대표하는 하나의 대의체를 주장하여, 상류층의 우려를 사기도 했지만 "일단 혁명이 진행되자, 하층계급 민중들의 군중행동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점점 더 분명히 했다." "훗날 페인은 헌법 채택을 둘러싼 논쟁 기간 동안 다시 한 번 강력한 중앙정부를 선호하는 도시 장인들을 대표하게 됐다. 페인은 그런 정부가 어느 정도 큰 공동의 이해를 대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혁명이 단합된 민중을 위한 것이라는 신화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135-6) 1776년 독립선언서에 명기된 "정부에 대한 인민 통제, 반란과 혁명의 권리, 정치적 폭정과 경제적 속박 및 군사적 공격에 대한 분노의 언어는 대다수 식민지인을 결속시키고 상호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영국에 반기를 들도록 설득하기에 매우 적합한 언어였다."(138-9)


"영국과의 군사적 충돌 그 자체가 당대의 모든 것을 지배함으로써 다른 문제들을 왜소화시켰고, 사회적으로 중요했던 하나의 싸움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편을 택하게 만들었으며, 독립에 대한 관심이 전혀 분명하지 않은 혁명의 편으로 사람들을 몰아댔다. 지배 엘리트들은 세대를 거치면서─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전쟁이 내부의 문제로부터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사실을 배운 듯하다."(150) 도망간 영국파에게 "몰수한 토지는 혁명의 지도자들에게 이중의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분배됐다. 지도자들과 그 친구들은 부자가 됐고, 새 정부에 대한 폭넓은 지지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소농민에게도 약간의 토지가 분배됐다. 실제로 이것이 곧 새로운 국가가 과거와는 다른 특징이 됐다. 광대한 부를 소유하게 된 이 나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유한 지배계급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며, 동시에 부자와 무산자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중간계급을 충분히 창출할 수 있었다."(158)


찰스 비어드는 <헌법의 경제적 해석>에서 "1787년에 필라델피아에 모였던 55명의 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사고를 언급함으로써 부자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정부를 직접 장악하거나 법률을 제정한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헌법에 적용했다." "그리하여 비어드는 헌법 제정자들의 대부분이 강력한 연방정부를 수립하는 데 어느 정도 직접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음을 알아냈다. 제조업자는 보호관세를, 금융업자는 채무 상황에서 지폐 사용의 중단을, 토지 투기업자는 인디언 토지를 침범할 경우에 보호를, 노예소유주는 노예 반란이나 탈주를 방지할 수 있는 연방의 보장을, 채권소유자는 채권 상환을 위해 전국적 과세를 통해 돈을 조달할 수 있는 정부를 요구하거나 원했다. 비어드는 네 개의 집단, 즉 노예, 계약 하인, 여성, 무산자들은 제헌회의Constitution Convention에 대표를 보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제헌회의는 이들 집단의 이해를 반영하지 않았다."(169)


"<연방주의론> 10호에서 제임스 매디슨은 당파 간 분쟁에 시달리는 사회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의정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쟁은 '여러 불평등한 재산의 분배'에서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재산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는 사회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형성해 왔다." 매디슨의 말에 따르면, 문제는 부의 불평등으로부터 오는 당파간 투쟁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매디슨은 모든 결정을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내림으로써 소수파를 통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179) "헌법은 남부 노예소유주의 이해와 북부 화폐소득자의 이해를 조정한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13개 주를 하나의 거대한 상업시장으로 통합하려는 목적에서 북부의 대표자들은 주간州間 통상을 규제하는 법을 원했으며, 그런 법률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연방의회의 다수표만 획득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남부는 노예무역을 불법화하기 전에 20년의 유예기간을 두는 대가로 이에 동의했다."(181)


인디언들은 때로 마을을 불태우기 전에 온정적으로 말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무력으로만 다루어졌다. 그러나 "독립 전쟁으로 약화된 워싱턴의 민병대는 인디언을 물리칠 수 없었다. 정찰부대가 차례로 분쇄 당하자 워싱턴은 회유책을 쓰려고 했다. 전쟁장관 헨리 녹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디언이 먼저 거주하고 있으므로 땅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1791년 토머스 제퍼슨은 국경 안에 사는 인디언들은 해치지 않을 것이며, 정부는 인디언 땅을 잠식하려고 하는 백인 정착민들을 이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준주를 사들여 영토 규모가 두 배로 되자─이로써 서쪽 국경이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미시시피 강을 건너 로키 산맥까지 확장됐다─제퍼슨은 인디언들이 좀더 좁은 지역에 정착해 농사를 짓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연방의회에 제안했다. 또한 백인과 교역을 시켜 부채를 지게끔 하고 이 부채를 땅으로 상환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228-9)


이러한 상황은 앤드루 잭슨이 1814년의 말편자만곡부전투Battle of Horseshoe Bend에서 대승을 거두어 국민적 영웅이 된 후 바뀌었다. "1814년에 잭슨이 크리크족과 맺은 협정은 새롭고 중대한 사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협정은 인디언들에게 토지에 대한 개인소유권을 부여함으로써 인디언을 서로 분열시키고 토지의 공동소유제를 파괴했으며 일부는 땅으로 매수하고 나머지는 무시해 버렸다─서구 자본주의의 정신을 특징짓는 경쟁과 묵계를 도입한 것이다."(232) "잭슨은 플로리다가 탈주 노예와 약탈을 일삼는 인디언들의 은신처라고 주장하면서 습격을 시작했다. 잭슨의 말에 따르면 플로리다는 미국의 방위에 없어서는 안 될 지역이었다. 이것은 근대 정복전쟁의 고전적인 서문이 된 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1818년의 세미놀 전쟁Seminole War으로 미국은 플로리다를 획득하게 됐다. 학교 교실의 지도에는 "1819년 플로리다 매입Florida Purchase"라고 고상하게 표기되어 있다."(233-4)


"잭슨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주에서 자신들의 영토에 거주하는 인디언에 대해 주의 통치권을 확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이들 법률을 통해 인디언들은 법적 단위로서의 부족이 폐지되고, 부족회의가 불법화되고, 추장의 권한이 사라졌으며, 민병대 및 주세州稅의 의무를 지게 됐지만 투표권 및 소송권,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권리는 갖지 못했다. 인디언 영토는 분할되어 주에서 실시하는 추첨에 의해 분배됐다. 백인들은 인디언 땅에 정착하도록 장려됐다."(239) "1828년에 서부 체로키족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연방정부는 새로운 영토(체로키족이 강제로 쫓겨난 서부의 황량한 땅)를 "미국의 가장 확고한 보증하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 영구적인 고향"이라고 발표했다."(245) 인디언을 서부로 몰아내는 가차없는 이 거짓말의 향연은 훗날 눈물의 행렬Trail of Tears이라고 알려진 1838년 10월 1일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1850년에 통과된 탈주노예법Fugitive Slave Act은 멕시코 전쟁으로 얻은 영토(특히 캘리포니아)를 자유주nonslave state로 연방에 편입시키는 대가로 남부 주들에게 양보한 것이었다. 탈주노예법으로 인해 노예주들이 전에 노예였던 사람을 되찾거나 탈주 노예라고 지목한 흑인들을 그냥 잡아가는 일이 용이해졌다."(319) "노예무역을 종식시키는 법률의 시행에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면서 탈주 노예를 노예 신분으로 되돌리도록 규정한 법령은 엄격하게 시행한 것은 다름 아닌 연방정부였다. 앤드루 잭슨 행정부하에서 남부와 합작해 노예폐지론 간행물이 남부주들로 반입되지 못하게 한 것 역시 연방정부였다. 1857년에 노예 드레드 스코트는 인간이 아니라 재산이므로 자유를 위해 소송할 수 없다고 선고한 것 또한 다름 아닌 합중국 대법원이었다." "연방정부는 백인들이 지배하는 조건에 한해서만, 북부 산업 엘리트들이 정치, 경제적으로 필요로 할 때에만 노예제를 종식시킬 생각이었다."(330)


"산업의 요구와 신생 공화당의 정치적 야망, 인도주의의 미사여구를 완벽하게 결합시킨 인물은 다름 아닌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330) 링컨은 1861년 3월의 취임연설에서 남부와 탈퇴한 주들을 회유했다. "나는 남부 주들에 존재하는 노예제도에 대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섭할 의사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내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없으며 또 그렇게 할 의향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넉 달째 이어지면서 프레먼트 장군이 미주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에 저항하는 노예주인들의 노예는 자유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자, 링컨은 이 훈령을 철회했다. 링컨은 메릴랜드, 켄터키, 미주리, 델라웨어 등 4개 노예주를 연방에 묶어두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전쟁이 점점 격화되면서 사상자가 급증하고, 승리에 대한 절망감이 고조되고, 노예폐지론자들의 비판이 링컨을 떠받치는 너덜너덜한 연합세력을 갈가리 찢어 버릴 태세를 보이자, 링컨은 그제서야 비로소 노예제를 반대하는 행동에 착수했다."(333)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흑인들은 링컨 재임 당시 부통령을 역임했고 전쟁 막바지에 링컨이 암살당한 뒤 대통령에 오른 앤드루 존슨에 의해 여러 해 동안 방해를 받았다. 존슨은 흑인들을 돕는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흑인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음으로써 남부연합 주들의 연방 복귀를 수월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복귀한 남부 주들에서 존슨 재임 기간 동안 '흑인단속법black codes'을 실시했는데, 이는 해방된 노예들을 여전히 대농장에서 일하는 농노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349-50) "북부에서 흑인들의 예속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고의 혁명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남북전쟁이 끝났을 당시, 북부 24개 주 가운데 19개 주가 흑인의 투표권을 허용하지 않았다. 1900년까지 모든 남부 주가 새로운 헌법과 법령을 통해 흑인에 대한 공민권 박탈과 분리를 법제화했다."(364)


기술 발전과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사업이 늘어나면서 투자의 안정성이 필요해지자 1850년대 중반에는 가격협정과 기업합병이 빈번했다. "투자 위험을 최소화하는 또 다른 방법은 정부로 하여금 알렉산더 해밀턴과 제1차 대륙회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역할, 즉 기업의 이익을 돕는 역할을 확실히 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각종 교과서는 당시를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가득 채우고 있으나, 남북전쟁 전야에 있어서 국가 운영자들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노예제 반대 운동이 아니라 돈과 이윤에 있었다."(384-5) 1830년대에 이미 "펜실베이니아를 비롯한 주에서 10시간 노동법이 등장했지만, 이 법들은 고용주가 피고용자와 서면계약을 통해 노동시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 시기의 법률은 계약에 대한 강력한 보호장치를 발전시키고 있었으며, 노동계약은 대등한 양자 간의 자발적인 합의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었다."(393-4)


"남북 전쟁에서 1900년에 이르는 동안 증기와 전기가 인력의 자리를 차지했고, 철이 목재를, 강철이 철을 대체했다." "이 모든 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과 기계를 만들어 내는 천재적인 발명가와 새로운 기업의 유능한 조직자, 또는 관리자가 필요했으며 또한 토지와 광물이 풍부한 국토, 고되고 비위생적이며 위험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엄청난 인력이 필요했다. 유럽과 중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새로운 노동력을 형성했다." "몇몇 백만장자는 무일푼에서 출발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1870년대 섬유, 철도, 강철 회사의 중역 303명의 출신에 관한 한 연구를 보면 90퍼센트가 중간계급이나 상류계급 집안 출신이었다. '거지에서 부자로'라는 호레이쇼 앨저식 이야기는 소수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실이었지만, 대부분은 신화, 즉 통제를 위해 유용한 신화였다."(437-9) 대표적인 사례로 "1900년에 이르면 모건은 전국 철도의 절반인 16만 킬로미터의 철도를 장악했다."(442)


상호 이해관계로 엮인 독점산업들의 과도한 담합을 저지하기 위해 1890년에 셔먼 반트러스트법Sherman Anti-Trust Act이 제정되었으나, "1895년 대법원은 셔먼 반트러스트법이 무해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이 법을 해석했다. 대법원은 제당 산업의 독점이 통상상의 독점이 아니라 제조상의 독점이며, 따라서 셔먼 반트러스트법을 통해 연방의회의 규제를 받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미국 정부 대 E. C. 나이트 사 판결). 대법원은 또한 셔먼 반트러스트법은 주간州間 파업(1894년의 철도파업)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데, 이런 파업이 통상을 제약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대법원은 고소득에 대해 높은 세율을 적용하려는 연방의회의 작은 시도를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그 뒤 몇 년간 대법원은 셔먼 반트러스트법은 통상을 제약하는 '불합리한' 결합만을 금지한다고 말하며 스탠더드 석유회사와 아메리칸 담배회사의 독점을 파괴하지 않았다."(448)


"운디드니 학살이 있었던 1890년, 인구조사국은 내륙 국경 설정이 완료됐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팽창을 본성으로 하는 이윤 체제는 이미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507) 1898년 2월 아바나 항구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메인Maine 호가 원인불명의 폭발로 침몰하자 "매킨리와 산업계 모두 스페인을 쿠바에서 몰아낸다는 자신들의 목표가 전쟁을 통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으며, 그에 수반되는 부수적 목표, 즉 쿠바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 확보 역시 쿠바 반란자들의 손에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개입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519) "훗날 미 국무장관 존 헤이가 '눈부신 작은 전쟁splendid little war'이라 부른 전쟁에서 스페인 군대는 석 달 만에 패했다. 미군은 쿠바 반란군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스페인이 항복했을 때, 어떤 쿠바인도 항복조건을 협의하거나 항복문서에 서명할 수 없었다."(526)


전쟁이 끝나자 미국 자본이 대거 쿠바에 상륙했다. "1901년 당시 쿠바 광물 수출량의 최소한 80퍼센트가 미국의 수중에 장악됐고 그 대부분을 베슬리엄 철강회사가 차지했다."(528) "스페인-미국 전쟁은 미국이 수많은 나라를 직접 병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쿠바에 인접한 카리브 해의 스페인령 푸에르토리코가 미군에 의해 접수됐다. 거리상 태평양 전체의 3분의 1이나 떨어져 있는 섬으로, 이미 미국 선교사와 파인애플 대농장 소유주들이 침투해 미국 관리들이 "수확할 일만 남은 다 익은 배"라고 묘사한 하와이 제도는 1898년 7월 상하 양원 합동 결의안으로 병합됐다. 비슷한 무렵에 일본으로 가는 길목인 하와이 서쪽 3,70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웨이크Wake 섬도 점령됐다. 그리고 필리핀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태평양의 스페인령 괌 역시 접수됐다. 1898년 12월에 스페인과 조인한 강화조약으로 미국은 2,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괌,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등을 공식적으로 넘겨받았다."(531)


한편 국내적으로는 체제 안정을 기하고 민중 봉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1900~1920년대가 '혁신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새로운 법안들이 통과됐다는 점에 있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행정부 아래 육류검사법Meat Inspect Act, 철도와 송유관을 규제하기 위한 헵번법Hepburn Act, 순정식품의약품법Pure Food and Drug Act 등이 통과됐다. 테프트 행정부에서는 만-엘킨스법Mann-Elkins Act으로 전화 및 전신 체계를 주간통상위원회의 규제 아래 뒀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기에는 독점의 성장을 통제하기 위해 연방통상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를 창설하고 전국의 통화와 은행체제를 규제하기 위해 연방지불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을 도입했다. 테프트 행정부는 누진소득세를 허용하는 헌법 수정조항 16조와 원래의 헌법이 규정하는 대로 주의회의 간접선거 대신 일반투표로 직접 상원의원을 선출하도록 하는 헌법 수정조항 17조를 제안했다."(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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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7-0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인데, 좋은 서평을 써주시니 읽고싶은 마음이 더 생깁니다.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역사라는 학문을 어느 특정집단이나 당시 주류였던 관점에서 벗어나, 민중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인듯 합니다.

nana35 2018-07-02 12:43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신다니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전자책] 분열하는 제국 - 11개의 미국, 그 라이벌들의 각축전
콜린 우다드 지음, 정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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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륙의 "유럽 문화는 동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 제국 군인과 선교사들에 의해 남쪽에서부터 전파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 하위문화는 대서양의 코드 곶 해안이나 체서피크 남쪽 지역이 아니라 뉴멕시코 북부의 건조한 고원과 콜로라도 남부에서 시작됐다. 1595년 엘 노르테에 정착한 이래 지금까지 줄곧 자신들만의 문화를 간직한 채 사는 스페인계 미국인은 19~20세기가 되어서야 뒤늦게 이 지역에 진출한 멕시코계 미국인을 자신들과 한 덩어리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매우 큰 불쾌감을 느낀다."(38-9) 교황에게 남반구 세계를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도덕적 명령'을 받은 "스페인 국왕은 아즈텍과 마야 제국을 손쉽게 정복한 후 은이 잔뜩 매장된 산맥과 금광을 발견하자 신이 단순히 자기편인 것을 넘어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심판의 날'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 제국Universal monarchy'을 건설할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말라는 계시를 내린 것이라 믿었다."(43)


"엘 노르테는 자체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고 선거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지역 군사령관이 총독 역할을 대행했고, 지역 협의회나 의회 같은 민주적인 제도는 전무했다. 샌타페이, 샌안토니오, 투손, 몬테레이 같은 몇 안 되는 도시에서조차 의회는 부유층 올리가키들oligarchy의 전유물이었다. 1700년대 말에는 그마저도 기능이 거의 마비됐고, 시정 운영은 지역 군 장교들의 손에 넘어갔다. 일반 주민들은 그들의 생계를 돌봐줄 지역 후원자patron나 기득권층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충성을 바쳐야 했다. 후원자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과부, 고아, 병약자들을 돌봤다. 또 종교 행사나 교회활동에 자금을 지원했다. 농장 일꾼들은 이에 복종하고 따랐다. 마치 중세 시대의 농노제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시스템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엘 노르테 지역의 정치,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47-8)


# 엘 노르테El Norte의 출발

1. 개신교를 적대한 스페인의 영향으로 양키덤, 애팔래치아,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와 적대 감정

2. 스페인이 에너지와 자원을 종교 전쟁에 탕진하면서 평균 이하의 빈곤 지역으로 전락

3. 열렬한 개종 과정에서 인디언과 스페인인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급증하여 인종 차별 의식 약화


뉴프랑스 지역에 정착한 "당시 사람들은 숲에서 사는 사람을 나무꾼(혹은 모피상)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원주민 문화와 가치관에 부분적으로 동화된 1세대 이주민들이었다. 그들의 자식은 프랑스인이면서 동시에 미크맥, 몽타니에, 휴런 족의 후손이기도 했다. 이들은 메티스metis(캐나다 프랑스인과 북미 원주민 사이의 혼혈)라는 새로운 인종을 형성했다. 메티스는 스페인의 메스티소와는 달리, 유럽 정착민 문화만큼이나 원주민 문화에도 편안함을 느꼈다. 모피상들은 유목민이나 수렵인들처럼 자유와 독립을 누릴 수 있는 자신들의 삶을 자랑스러워했다." "뉴프랑스에서 평등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구대륙의 봉건제를 압도하면서 점점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인디언을 동화시키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메티스 사회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그 사회는 프랑스적인 요소만큼이나 북미 원주민들의 가치관과 문화가 많이 반영된 사회였다."(63-4)


# 뉴프랑스New France : 행정구역으로 독립하려는 퀘벡 주가 포함된 지역으로 앙시앵 레짐 시절의 프랑스 북부 소작농 민속 문화와 북미 동북부의 토착 원주민 문화가 결합하여 형성했다.


"타이드워터는 애초부터 소수의 가진 자와 다수의 없는 자들로 구성된 사회였다. 피라미드의 맨 위에 군림한 부유한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타이드워터의 경제, 정치를 빠르게 장악해갔다."(71-2) "타이드워터에서 권력은 세습됐다. 주요 가문들은 영국과 미국, 양쪽 모두에서 혼맥으로 얽혔다. 그중에서도 특히 버지니아 일대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서로 모두 친인척 관계였다. 식민지의 상원, 대법원, 행정 내각 역할을 한 것은 물론 토지의 분배까지 관장했던 버지니아 왕실 의회Royal Council는 1724년 의회의 모든 멤버가 혈연이나 결혼으로 얽힌 상태였다."(79) "타이드워터의 젠트리가 받아들였던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공화정을 모델로 한 '전통적인' 공화주의였다." "고대 라틴사회의 계몽 정치철학인 리베르타스Libertas에서 파생된 자유 개념은 양키덤과 미들랜드의 정치철학에 영향을 미친 게르만 사회의 프라이하이트(Freiheit, 자유)에서 파생된 프리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80-1)


#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자유 vs 천부인권으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유


# 타이드워터Tidewater : 영국 남부 젠트리의 후손들이 세운 사회로 권위와 전통을 중시하고 대중의 정치 참여에 우호적이지 않다. 헌법에 귀족적인 요소들(가령, 대선 선거인단 제도)을 첨가했다. 토머스 제퍼슨이나 조지 워싱턴, 제임스 매디슨이 타이드워터 출신이다.


"청교도들은 미 대륙에 영국 시골 마을의 삶을 옮겨심고 싶어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세우고 싶어했던 사회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장 칼뱅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개신교 신정사회, 즉 종교적 유토피아였다. 그들은 뉴잉글랜드의 황무지에 새로운 시온을 건설하고자 했다."(84) "양키덤 초기 정착민의 절반 가량은 영국 제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한 이스트 앵글리아(영국 동남부) 출신이었다. 이스트 앵글리아에 속하는 7개 카운티는 영국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심지였고 교육 수준도 높아서 중산층이 빠르게 증가하는 곳이었다. 또 전제정치에 굴하지 않은 오랜 저항의 역사를 자랑했다." "이들은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향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황무지의 불확실성을 선택했다. 가족 단위로 온 사람이 70퍼센트를 차지했기 때문에 성별, 연령 비율이 다른 국민이 세운 사회보다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86-7)


1624년 네덜란드인들이 정착한 뉴네덜란드는 비록 작은 마을이었지만 "그때부터 이미 북미의 어떤 지역과도 달랐다. 모피 교역소로 출발한 이 도시는 사회를 어떻게 단결시킬 것인지, 혹은 어떤 사회적 모델을 지향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모두 거세된, 그저 상업적인 목적에만 충실한 곳이었다. 도시의 행정은 글로벌 기업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의 관할 아래 놓였고, 실제로 처음 몇십 년 동안은 서인도 회사가 공식적으로 뉴네덜란드를 통치했다. 양키덤과 타이드워터 사이에 위치한 이 도시는 양쪽 모두가 이용하는 화물 집산지가 됐다."(96) 관용을 중시하는 네덜란드인들은 "다양성을 축복이라 여겼던 것이 아니라 그저 '참고 견딘' 것이었다. 샹플랭의 고향인 생통주 마을 사람들처럼, 네덜란드인들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유럽의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외에 더 좋은 대안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103)


디프사우스를 형성한 사람들은 "역사가 좀더 오래된 식민지인 서인도 제도 바베이도스를 세운 자들의 아들과 손자들이었다. 바베이도스는 영국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하면서도 가장 잔인한 사회였다. 그들은 찰스턴에서 영국 지방 영주와 같은 삶을 누리고자 한 것도 아니고, 종교적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 시대에도 악명이 높았을 만큼 비인간적이었던 서인도 노예국가 제도를 이곳에 확장시키려 했다." "디프사우스는 애초부터 부와 권력이 철저히 불공평하게 나뉜 사회였다. 소수 지배층이 공권력을 등에 업고 테러적 수단을 동원해 모든 이의 복종을 강요하는 곳이었다."(119-20) "디프사우스는 군사화된 사회인 데다 카스트 구조로 이뤄져 권력에 대한 복종 문화가 강했다. 그뿐 아니라 매우 공격적인 팽창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이기도 했다. 농장주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저지대에서 비슷한 지형을 가진 해안가 위아래로 영토를 넓혀나갔다."(130)


"1680년대에 형성된 미들랜드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뒤섞인 관용적인 사회였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평범한 서민층 가족들이 사회의 주를 이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내버려두는 것뿐이었다. 그 후 300여 년 동안 미들랜드의 문화는 계속 서쪽으로 뻗어나가 필라델피아 주변과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미국 중부를 휩쓸었다. 미들랜드인들은 매우 중요한 특징을 가진 국민이다. 북미 대륙에서 가장 일반적이면서 표준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중요한 정치적 국면에서 종종 킹메이커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들이다." 미들랜드의 주요 구성원들인 "퀘이커교는 폭력과 전쟁을 강하게 거부하고 평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퀘이커는 이 같은 교리를 너무나 경직되게 엄격히 적용한 나머지 반세기 후인 1690년대에 미들랜드에서는 영원히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133-5)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마지막 국민인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인들은 등장하자마자 가장 골칫덩이 같은 존재가 됐다. 영국의 국경 분쟁 지대에서 이주해온 그들은 미들랜드 산간에 씨족을 기반으로 한 전사 문화Warrior culture를 퍼뜨렸다. 미들랜드,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의 변방에 정착한 이들은 행정, 군사, 인디언 정책에 대한 기존 지배 세력의 독점적 통제력을 산산이 깨버린 주체이기도 하다." "상시적인 격변과 불안정한 일상에 시달린 국경지대인들은 (씨족끼리 뭉쳐 서로를 의지하면서) 칼뱅주의에 입각한 장로회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신의 선택을 받은 자가 됐다. 보혈의 피로 정화되어 성경이 약속한 주의 나라 백성이 되었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진노한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았다. 모든 외부 세력을 불신하는 국경지대인들은 개인의 자유와 명예를 중요시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기를 들었다."(146-7)


"1775-1782년에 벌어진 독립 투쟁은 표현, 종교,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대우받는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미국인'들이 힘을 합쳐 싸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각 식민지의 문화적 특성, 권력을 지배하는 자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느슨한 군사적 동맹을 맺어 함께 싸운, 매우 보수적인 행동의 발로였다. 반란에 동참한 식민지들은 결코 하나의 공화국을 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영제국이 미 대륙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식민지를 섣불리 일원화시키려 하자, 공동의 위협에 대항해 일시적인 연합을 형성했을 뿐이다."(162) "그러나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식민지들이 합의한 영국으로의 수출 금지 조치가 발효될 무렵, 양키의 공동묘지에는 이미 영국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의 시신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미국 독립 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177-8)


# 각 공동체들의 반응

1. 양키덤 : 종교의 자유와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대표들을 소집하고, 혁명군을 조직하는 등 가장 적극적으로 대영 투쟁

2. 타이드워터 :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조지 메이슨, 조지 워싱턴 등 피드먼트에 사는 젠틀맨들이 애팔래치아 너머의 잠재력을 보고 대영 투쟁에 합류

3.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 자유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적대한다는 신념에서 독립파에 합류

4. 미들랜드 : 평화적 해결 추구. 독립이 호전적인 팽창주의 세력의 힘을 키울 것으로 보고 영국의 지배에 반대하지 않음

5. 뉴네덜란드 : 뉴욕이 완전히 양키들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한 왕당파의 근거지 역할

6. 디프사우스 : 농장주들의 특권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항의하는 영국상품 보이콧 운동에 만족. 노예반란 우려


"양키들은 지금까지 지켜온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앞으로도 자신들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치권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투표로 선출된 대표들이 운영하는 지역 정부(주가 아니라 마을 단위로 세워진 정부), 사회 중심에 있는 청교도 교회, 앵글로색슨으로서 폭압에서 벗어나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로울 권리, '신의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180-1) "양키덤이 자유를 위한 혁명의 근거지였다면, 뉴네덜란드는 독립을 반대하는 왕당파와 영국군을 위한 근거지로서 정확히 정반대 역할을 했다." "이들은 여느 주변 식민지와 달리 주권을 수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뉴네덜란드는 한 번도 주권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뉴네덜란드인들은 뉴욕이 영국에서 독립하고, 양키의 수중에 넘어가면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종교적 관용과 문화적 다양성이 훼손될 가능성을 우려했다.(182-3)


"양키덤을 제외한 상당수 영국 식민지들이 독립에 대해 양면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면, 그들은 대체 어떻게 독립을 하게 된 것일까? 첫째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독립을 간절히 바랐던 타이드워터 젠트리의 적극적인 동참, 그리고 둘째는 자신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는 누구와도 맞서 싸울 준비가 돼 있던 펜실베이니아, 캐롤라이나, 조지아 지역의 애팔래치아인들이었다. 외떨어진 산간지역에 위치한 데다, 가난하고, 하나의 정부로 통합되지도 않았던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는 독립 전쟁에서 가장 복잡한 변수였다. 외부의 간섭을 받기 싫어했던 국경지대인들은 '혁명'을 핑계 삼아 판을 뒤엎고자 했다."(192) "소수의 '왕당파' 국경지대인들은 영국군이 그들의 적인 디프사우스 농장주의 적이기 때문에 영국 편에 섰다. 반면 다른 산간지대 마을에서는 영국을 더 큰 압제자로 여겼다. 결국 국경지대인들은 농장주와의 싸움에 더해 같은 국경지대인끼리도 내전을 겪게 됐다."(194)


"전쟁이 시작될 무렵, 식민지 사이에 구축된 협의체는 외교 기구인 '대륙 의회'뿐이었다. 대륙 의회는 기본적으로 참여국 과반수의 찬성을 통해서만 결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국제 조약 기구였다. 결의안을 이행하지 않는 회원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회원을 군사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는 한,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대륙 의회는 군사적 제재는 물론 영국의 위협에 더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지금의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비슷한 성격의 연합군을 창설했다. 그것이 바로 '대륙군Continental Army'이다. 그들은 수많은 입씨름을 거친 끝에 대륙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군사적 역량을 강화할 필요성이 커지고, 더 중요하게는 회원국 간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조약기구에 훨씬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국 최초의 헌법인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은 이러한 두려움 속에서 탄생했다."(198-200)


"식민지 지도자들은 전쟁에 사람을 동원하기 위해 영국과의 전쟁을 독재 및 압제와의 싸움으로 포장했다. 그들은 평민들에게 민병대에 합류하고 대규모 회합에 참석해 지도자들이 설명하는 결의안을 열렬히 지지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행동대를 구성해 결의안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곤봉이나 노로 구타하거나 뜨거운 타르를 끼얹은 후 온몸에 깃털을 붙이는 공개 처벌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과정은 오히려 평민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민주주의에 관한 글을 쓰거나 읽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토머스 페인이 쓴 <상식>과 1776년 미국의 독립 선언은 이러한 열망에 불을 댕겼다." "하층민들이 통제 불능이 되어간다는 우려가 높아지자 각 지역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훨씬 더 강한 연대를 맺어 각 지역의 독립하려는 움직임과 민의를 수시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게 됐다."(204-5)


"미국 헌법은 결국 서로 경쟁관계인 국민 사이에서 벌어진 골치 아픈 타협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타이드워터의 젠트리와 디프사우스로부터 평범한 시민의 직접 투표가 아니라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는 강력한 대통령제를 물려받았다. 뉴네덜란드는 양심과 표현,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권리 장전을 물려주었다. 오늘날 미국이 영국식 의회 모델을 따라 강력한 단일 국가를 형성하지 않은 것은 남부의 폭정과 양키의 간섭에 대항할 수 있도록 각 주의 주권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한 미들랜드 때문이다. 양키는 인구 비례대로 의석을 배정하기 원했던 타이드워터와 디프사우스를 상대로 싸워 이겨서 작은 주들도 상원에서 동등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양키는 또한 의석을 배분하기 위해 인구를 셀 때 노예는 5분의 3만 포함하도록 절충안을 내고 이를 밀어붙였다. 투표권이 없는 노예들은 대표될 수 없으므로, 의원 수를 배정할 때 이 점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양키의 논리였다."(208-9)


"타이드워터와 디프사우스를 제외한 다른 식민지 사람들의 상당수는 (1789년) 헌법이 반혁명적이며 교모하게 민주주의를 억압한다고 여겼다. 또 소수의 지역 엘리트와 신흥 은행가, 금융 투기꾼, 그리고 같은 인종과 문화를 가진 국민에게 아무런 충성심도 없는 지주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켜줄 뿐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존경받는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 같은 목적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거를 치르지 않는 의원인 상원을 높이 평가했다. "건방진 민주주의를 억제하고"(알렉산더 헤밀턴), "민주주의의 어리석음과 불안정함을 막아줄 수 있는"(에드먼드 랜돌프) 제도였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의 불편함을 막기 위해 연방 선거구는 클수록 좋다"(제임스 매디슨)고 생각했다. 메디슨은 직접 민주주의에 유리한 소규모 집단은 파벌이 생겨나기 쉬우므로, 어리석은 이들이 쉽게 다수를 정하지 못하도록 선거구가 클수록 바람직하다고 여겼다."(220)


"뉴잉글랜드가 서부 진출에 박차를 가한 이유는 토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뉴잉글랜드는 당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였다. 좋은 토지는 이미 임자가 있었고, 개척할 땅이 빙식氷蝕 지형인 동부 메인 변두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식 세대 앞에 놓인 미래는 암울하기만 했다. 이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도 뉴욕 국경을 넘어 펜실베이니아 북부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다."(241) "양키는 자신들의 이주 여정을 1600년대 초 뉴잉글랜드 선조들이 종교 사역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바라봤다. 1787년 매사추세츠 입스위치에서 머스킹엄 밸리로 향한 첫 이주민들은 네덜란드를 떠나던 필그림 파더스처럼 예배당 앞에서 퍼레이드를 벌인 후 성직자들의 고별사를 받으며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하이오 강 하류에서 탈 작은 배를 만든 후 '서부의 메이플라워호'라는 이름을 붙였다."(244)


뉴잉글랜드인이 '서북부 영토'의 북쪽을 거쳐 서부로 진출하는 동안, 미들랜드인들은 중앙 중서부로 쏟아져 나갔다. "양키처럼 미들랜드도 유럽이나 동부 연안에서 이곳으로 올 때 가족 단위로 이웃사촌들과 함께 이주해왔다. 그러나 양키들과 달리 그들은 주 전체는커녕 이웃 마을 공동체를 동화시키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델라웨어 밸리처럼 각 마을은 민족별로 형성되곤 했지만, 카운티 전체로 놓고 보면 다문화적인 성향을 띠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독일인들은 전반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고, 기술을 보유한 장인이었으며 농업 지식이 풍부했다." "미국에 개척의 광풍이 불어닥칠 때도 독일인들은 가족과 여러 세대에 걸쳐 같은 땅을 경작하면서, 안정되고 영구적인 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렇게 한곳에 뿌리를 내린 생활 덕분에 독일인들은 미들랜드, 더 나아가 미국의 중서부 문화에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됐다."(259-60)


"국경지대인들은 최초로 애팔래치아 산맥 너머까지 진출한 사람들이었고, 미국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인디언의 영토까지 파고들어갔다. 그들은 대륙 의회가 서북부 영토를 편입시키고 그곳에 살던 인디언을 정복하기 오래전부터 트랜실베이니아나 프랭클린 국가 같은 자신들만의 정부를 세웠다."(262) "이들은 숲과 빈터 사이에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뒤늦게야 도시를 형성했고, 공공 투자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어디에서나 지방세는 매우 낮았고 학교와 도서관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도시 정부는 거의 없거나 극히 드물었다."(264) "중서부 애팔래치아인의 개인주의적 자유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는 간섭하기 좋아하는 양키들이었다. 그 결과, 국경지대인들이 장악한 지역은 19세기부터 민권운동 시대에 이르는 동안 내내 디프사우스가 이끄는 민주당의 견고한 지지층이 됐다."(268)


"1820년 전까지 대륙의 동남부를 지배한 세력은 타이드워터였다. 식민지 시대와 초기 공화국 시절,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은 버지니아였다. 타이드워터 젠트리는 애팔래치아가 가져가야 할 의석수를 박탈한 덕에 그 지역은 물론 나라 전체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들은 미국의 초기 대통령 5명 중 4명을 배출했고, 독립선언문과 1789년 헌법 제정에 지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웃한 디프사우스보다 넓고, 훨씬 더 부자이며, 더욱더 발달한 타이드워터는 '남부'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영국 전원 지역의 개화된 젠트리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던 타이드워터의 엘리트들은 노예의 존재를 유감스러워했고, 그것이 서서히 사라질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타이드워터는 1820~1830년대에 빠르게 팽창하는 디프사우스에게 힘과 영향력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세력 역전은 타이드워터를 부양하던 담배 플랜테이션이 쇠퇴하고, 디프사우스의 목화 플랜테이션이 성황을 이루면서 발생한 일이었다.(277-8)


엘 노르테인들은 1821년에 독립한 멕시코가 극심한 경제 파탄으로 중앙 정부 역할을 방기하자, 숭숭 뚫린 국경을 넘어 텍사스로 대규모 불법 이민을 감행했다. "멕시코 법은 앵글로-아메리칸의 이주를 까다롭게 규제했지만, 새로운 정착민을 간절히 필요로 했던 텍사스 관료들은 이를 못 본 척했다."(291) "이주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텍사스 동부 내커도치스의 마을을 향해 북쪽으로 여행하던 한 멕시코 장군은 어느 순간 자신이 완전히 낯선 외국 문화권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샌안토니오에서 내커도치스로 가다보면 거리에 비례해 멕시코의 영향력이 점점 감소하다가, 종국에는 멕시코 문화가 아예 소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상관에게 보고했다." "멕시코 중앙 정부는 디프사우스 이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텍사스가 미국에 병합될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앞장서서 반란을 이끈 사람들은 멕시코 북부인인 노르테뇨, 자신들이었다."(292-3)


"1850년, 자유 주州에 정착한 외국인 이주민의 숫자는 노예 주州보다 8배가 더 많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키덤, 미들랜드, 뉴네덜란드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점점 늘어나면서 이들이 하원에서 차지하는 의석수도 계속 증가했다. 양키가 장악한 레프트코스트는 디프사우스를 더욱 사면초가로 몰아넣었다. 연방정부는 디프사우스의 바람과 달리 카리브해 지역 점령을 거부한 반면, 캘리포니아와 오리건, 워싱턴이 미연방에 자유 주州로 합류하는 것을 승인했다. 1860년, 디프사우스와 타이드워터의 지도자들은 연방정부를 둘러싼 힘겨루기에서 자신들이 밀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850년대에 미국인들 중에 "양키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노예제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 앞에서 눈을 감으려고만 했다. 결국 세상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노예제가 일으키는 도덕적 문제들을 무시할 수 없었던 양키들이 노예 해방운동의 중심이 됐다."(313-4)


# 레프트 코스트The Left Coast : 뉴잉글랜드의 상인, 선교사, 벌목꾼 무리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 출신의 농부, 채굴업자, 가죽 무역상 등이 정착한 지역. 개인의 성취를 중요시하고, 정부를 신뢰하며 사회 개혁을 추구한다.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시애틀, 밴쿠버 등)


186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양키덤의 지지를 받은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가장 먼저 연방에서 탈퇴했다. 취임식이 열리기도 전에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텍사스 등 디프사우스가 장악한 주州들이 줄줄이 탈퇴에 합류했다." "만약 디프사우스 연합이 (연방정부의) 요새나 구호 선박을 먼저 공격할 경우 디프사우스 편에 서기로 한 애팔래치아, 미들랜드, 뉴네덜란드의 지지자들은 등을 돌릴 공산이 컸다." "남부연합의 국무장관인 리처드 래더스는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북부를 몰아간다면 분리주의자들은 협상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남부연합의)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전쟁이 시작되면 애팔래치아, 미들랜드, 뉴네덜란드가 남부 편에 설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래더스의 충고를 무시했다. 그리고 이는 북미 역사상 최악의 오판 중 하나가 된다."(320-1)


디프사우스는 백인 우월주의에 찬성하는 애팔래치아가 남부연합 편에 설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양키보다 농장주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더 위협한다고 여겼다. 결국 남부연합은 1865년에 패배했다. 그러나 패전 후에도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 남부연합 애팔래치아인은 "양키의 개혁에 단호히 저항했고, '재건' 지역의 백인들은 1876년 북부군이 철수하자 모든 개혁 조치를 무효로 만들었다. 양키 공립학교들은 폐지됐고, 양키가 강제로 도입한 헌법은 다시 쓰였다. 백인 우월주의가 되살아나면서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내고 '문맹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 등 흑인의 투표권을 빼앗기 위한 각종 장치가 부활했다. KKK 단원들은 공직에 출마하거나 예전의 카스트 제도에서 벗어난 일을 한 '건방진' 흑인들을 살해했다. 전쟁과 점령 기간을 거친 후에도 디프사우스와 타이드워터는 그들의 문화적 근본을 고스란히 유지했고, 앞으로 다가올 세기에 또 다른 문화적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331-2)


"파웨스트는 민족적 지역 문화가 아니라 외부 수요에 따라 정체성이 형성된 독특한 지역이다. 환경적 요인이 정착민의 문화적 특징을 압도한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유로-아메리카는 암석 채굴, 철도, 텔레그래프, 개틀링 기관총, 가시철조망, 수력발전 댐 등 자본집약적인 기술을 이용해 이 지역의 환경적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기술을 도입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가진 세력은 일찌감치 동부에 식민지를 형성한 국민과 연방정부뿐이었고, 결국 파웨스트는 이들의 내부 식민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파웨스트인들은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것에 지금도 깊이 분노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지금 상황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정책을 지지한다."(336) "다른 지역은 보통 정착촌이 형성된 후 철로가 놓이고 수요에 따라 노선이 확장됐지만, 파웨스트 대부분 지역에서는 철로가 먼저 놓이고 그다음에 정착촌이 형성됐다. 기업들은 정착민을 끌어오려고 엄청난 돈을 홍보에 쏟아부었다."(340)


# 파 웨스트The Far West : 미국에서 유일하게 기후와 지정학적 요인이 민족성을 압도하는 광활한 황야 지대. 끊임없이 연방정부에 손을 벌리면서도 자신들을 내부 식민지 취급하는 정부를 향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 (애리조나 북부, 노스웨스트, 다코다, 네브레스카, 캔자스 서부, 아이다호, 몬태나, 콜로라도, 유타, 네바다 등)


"남북전쟁 당시 북부 편에서 남부연합에 맞서 싸웠던 애팔래치아까지 결과적으로 딕시연합에 합류한 것은 전쟁이 끝난 후 양키가 주도한 재건 사업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디프사우스와 타이드워터는 그들의 제도와 인종 카스트가 위협 받게 되자, 당시 유일하게 자신들의 수중에 남아 있던 시민 조직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을 펼쳐나갔다. 그 조직은 바로 교회였다. 남부 지역의 여러 교파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복음주의 교회는 전쟁 전의 사회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남부 침례교 등 복음주의 교회들은 양키덤의 교파와 달리,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내면적 개신교'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는 북부 지역의 '공공적 개신교'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북부의 점령에 강력히 반발한 강경주의자들이 스스로를 '구원자Redeemers'라고 부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1877년 북부군의 철군은 (이들 지역에서) '구원Redemption'이라 불렸다."(362-3)


# 상실된 대의Lost Cause : 남부 독립을 위해 벌인 전쟁은 정의를 지키고자 고난과 맞서 싸운 것이라는 주장


"양키덤과 뉴네덜란드, 미들랜드의 공공적 개신교도들은 미신과 다를 바 없는 비이성적 신앙과 미국의 가치에 어긋나는 독재적인 성향을 지닌 남부인은 지옥에 떨어져도 시원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리주의자들은 1930~1940년대에 성경 모임과 기독교 대학, 복음 라디오 방송국을 확대해나가면서 조직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0년대가 되자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원리주의자의 숫자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반면 사람들의 신앙을 약화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종교와 주 정부를 분리하려 했을 뿐인 주류 개신교는 성도의 숫자가 감소하면서 탄력을 잃어갔다. 그 결과, 세속주의 노력 또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후 시대에 번영을 거듭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있던 미국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전면적인 문화 전쟁의 조짐이 조용히 들끓고 있었고, 이는 1960년대에 마침내 폭발하게 된다."(373)


"이 기간에 북부와 남부는 각자 자신만의 또 다른 내전을 치러야 했다. 딕시연합에서는 분리 정책과 카스트 제도에 반발한 흑인들이 투쟁에 나섰고, 북부동맹의 4개 국민은 새로운 세대가 이끄는 문화적 저항에 직면했다. 두 사건 모두 각 지역의 기존 체제에 반발한 자들이 일으킨 내부적 현상이었지만, 양측은 곧 상대방의 사건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먼저, 남부에서 일어난 흑인 민권운동에 북부의 개입은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북부는 타이드워터, 애팔래치아, 특히 디프사우스의 인종 카스트 제도를 강제로 폐지하기 위해 연방정부의 권한과 군사력을 동원했다. 반면 딕시연합은 레프트코스트, 뉴네덜란드, 양키덤에서 일어난 신세대의 '반란'인 60년대 문화 혁명에 반대하며 이에 개입하고자 했다." "이 두 개의 닮은꼴 반란에서 비롯된 서로를 향한 분노는 북미 국민 사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고, 합의점과 상호 수용 가능한 해결책을 찾으려던 21세기 초의 노력을 무위로 만들었다."(374-5)


"민권운동과 60년대 문화운동 후 딕시연합은 낮은 세금과 느슨한 규제, 노조 약화 등을 장점으로 부각시켜 국외와 국내 기업을 남부로 끌어들였다. 양키와 미들랜드의 제조업은 남부 지역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북미의 양키 자동차 산업은 1990~2000년대에 거의 붕괴했지만 디프사우스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에 있는 외국 자동차 공장은 예전 남부의 섬유·목재 산업처럼 승승장구했다. 일각에서는 '신新남부연합'이 미국을 서유럽과 동북아시아의 고학력 사회에 종속된 "저임금 수출 공장"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혁신적 연구는 교육과 이성주의를 강조했던 북부의 지식 클러스터에 집중돼 있다.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은 모두 레프트코스트 도시에 몰려 있다. 그전에 보스턴에는 양키 고속도로로 알려진 루트 128을 중심으로 최초의 '실리콘밸리'가 있다."(388)


"북부동맹과 딕시연합이 서로 꿈쩍도 안 한 채 양극단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면, 역학 구도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해답은 미들랜드, 엘 노르테, 파웨스트, 이 세 개의 '부동층' 국민에게서 찾아야 한다. 두 개의 슈퍼파워 연합 중 누구도 최소 2개 이상의 부동층 국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미국 정부를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다. 1877~1933년 북부동맹은 파웨스트와 미들랜드의 지원 덕에 연방을 장악했다. 1980~2008년 딕시의 영향력과 지배력이 증가한 것은 파웨스트와 미들랜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데다 베리 골드워터,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같은 엘 노르테 출신의 보수적인 앵글로를 대통령으로 밀었던 덕분이다. 어느 한쪽도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을 때 다수당이라도 되고 싶다면 이들과의 연합은 필수적이었다."(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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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한울공간환경 5
데이비드 하비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 제1장 현대문화 : 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 가는 길 요약


"보들레르(Baudelaire)는 1863년에 발표된 자신의 시론적 에세이 <근대생활을 그리는 화가>에서 '모더니티의 한쪽은 찰나적·일시적·우연적 측면이며 다른 한쪽은 영원불변한 측면'이라고 쓰고 있다."(26) "모던 생활이 실제 이처럼 찰나와 순간, 분절과 우연 따위의 감각들로 충만해 있다면 적지 않은 심층적 결과들이 초래된다. 우선 모더니티는 전前모던 사회질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과거조차도 전혀 존중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사물의 일회성으로 말미암아 그 어떠한 역사적 연속성도 보존될 수 없게 된다.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견되고 규정되어야 하는데, 이 소용돌이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논의에서 구사되는 어휘에도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모더니티는 그 이전의 모든 역사적 상황과의 가차 없는 단절을 뜻할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단절행위와 분절화 과정을 그 특성으로 삼는다."(28-9)


"베른슈타인이 (모더니티를 비판한) 베버의 전반적인 주장을 정리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베버는 계몽사상가들의 희망과 기대가 독설적·반어적인 환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과학의 발전, 합리성, 보편적 인류 자유 사이의 필연적이고도 튼튼한 연결을 계속 시도하였다. 그러나 가면을 벗기고서 들여다보면 계몽의 유산은 ··· 목적적·도구적 합리성이 승리하는 결과를 빚었다. 이러한 형태의 합리성은 경제구조, 법률, 관료행정, 심지어 예술까지를 포괄하는 사회적·문화적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감염시킨다. [목적적·도구적 합리성의] 성장은 보편적 자유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지 못하고 헤어날 길 없는 관료주의적 합리성의 '철창'을 만든다." 베버의 '냉철한 경고'가 계몽이성에 대한 사망선고라면, 계몽이성의 전제들에 대한 니체(Nietzsche)의 앞선 비판은 그것의 인과응보로 여겨져 마땅하다."(33)


보들레르의 정식으로 되돌아가 보면, "성공적인 근대 예술가란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것을 찾아낼 수 있고 '우리 시대의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미적 형태들'을 숙성시켜 '삶이라는 술에 담긴 쓰고도 자극적인 맛을 만들어낼 수 있는'(Baudelaire, 1984: 435) 이들이었다." 예술가나 건축가, 작가들은 "(혼돈의 수렁 속에서 영원불변한 것을) 표현할 묘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따라서 모더니즘은 그 시작부터 언어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즉 영속적 진리에 대한 특수한 재현양식을 찾는 데 매진했던 것이다." 이는 예술 전반을 '사회의 반영이라기보다 자기지시적 구성물(self-referential construct)'로 바꾸었으며, "제임스 조이스(J. Joice)나 프루스트(Proust) 같은 작가들이나 말라르메(Mallarme)나 아르공(Aragon) 같은 시인들, 마네(Manet)나 피사로(Pissarro), 잭슨 폴락(J. Pollock) 같은 화가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구성한 어휘 속에서 새로운 약호나 기호, 은유적 암시를 만들어내는 데 몰두했다."(39)


"모더니즘은 단지 시간과 시간의 일시적 속성을 모두 고정시킴으로써 영원함을 언급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영구적인 공간구조물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건축가들에게 이는 단순명쾌한 정리(定理)였다. 1920년대에 미스 반 데어 로에는 건축이란 '공간적 용어 속에 내포된 시대 의지'라고 했다." 다른 예술가들은 "이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몽타쥬·꼴라쥬 기법을 사용하였다. 상이한 시간(옛날 신문)과 공간(공통적인 대상의 사용)에서 추출된 상이한 효과들이 동시효과를 주기 위해 중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시성을 추구함으로써 모더니스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신들이 대하는 바로 그 상황의 막강함을 재차 확인함과 동시에 자기 예술의 설 자리로서 순간성과 일회성을 받아들였다."(40)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으로 "인간의 완전무결함에 대한 계몽적 확신이 사라져 버렸으니 모더니티에 적합한 새로운 신화를 찾는 일이 급선무가 되었다."(51)


"추상적 표현주의의 발흥과 함께 일어난 모더니즘의 탈정치화는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활용된 정치적·문화적 기성 형태들에 의해 포섭될 운명임을 역설적으로 예견한 것이었다."(59) 이제 모더니즘은 "몇몇 반동적이고도 '전통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혁명적 반명제로서 자신이 지녔던 호소력을 잃어버렸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1960년대의 다양한 대항문화, 반反모더니스트 운동들이 생겨났다. 기업이나 국가, 기타 제도화된 권력 등 거대한 단일체를 이룬 세력들(관료화된 정당이나 노동조합도 포함)이 만들어 놓은 기술적, 관료적 합리성은 '과학적'이라는 미명 아래 서슴 없이 압제를 휘두르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대항문화들은 독특한 '신좌파' 정치를 통해 반反전체주의적 입장이나 반反전통, 일상생활 비판을 포용함으로써 개별적인 자아실현 영역을 개척했다."(60)


# 분야별 포스트모던 현상

1.건축 : 대규모 계획도시에서 꼴라쥬 같은 다원적 공간으로 변모

2.소설 : 인식론 중심(복합적이면서도 단일한 실체의 의미 추구)에서 존재론 우위(서로 다른 주체들이 공존하고 충돌하는 상호 관계 조명)로 변모

3.철학 : 추상적 이성에 대한 철저한 반항과 보편적 인간해방과 관련한 모든 프로젝트 거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놀라운 점은 "보들레르의 모더니티 개념 가운데 한쪽 측면, 즉 순간성, 분절성, 불연속, 혼돈을 전면 수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 사실에 대한 대응은 {보들레르와 달리}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사실에 맞대응해 넘어서고자 애쓰지 않으며, 심지어 그 배후에 깔린 '영원불변'한 요소들을 밝혀보고자 하지도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마치 그것이 전부인 듯 '분절성과 변화의 무질서한 흐름' 속에서 헤엄치며 심지어 이에 탐닉한다."(68) 푸코(Foucault)나 리오타르(Lyotard)의 경우처럼, 메타언어나 메타서사, 또한 메타이론이 존재한다는 생각들을 단호히 배격하고, "모든 그룹이 자신 고유의 목소리로 자신들을 대변한 권리를 갖는다는 생각, 그리고 그러한 목소리가 신뢰성이 깃든 적법한 것이 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필수적이다."(72-3)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매우 상이한 이론들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모더니스트들은 언급되는 것(기의 또는 '메시지')과 언급하는 방법(기표 또는 '미디어') 사이에 튼튼하고도 뚜렷한 관계가 있다고 가정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이것을 '끊임없이 쪼개어져서 새로운 조합으로 다시 뭉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해체주의'─1960년대 말 데리다(Derrida)의 마틴 하이데거(M. Heidegger) 읽기로부터 시작된 운동─는 바로 이 대목에서 포스트모던 사고방식에 대한 강력한 자극으로서 등장한다. 해체주의는 철학적 입장이라기보다는 텍스트에 대한 사고법이자 '독서법'이다."(74) 이들이 보기에 "텍스트와 의미의 영원한 상호교차는 우리의 통제영역 밖에서 벌어지므로 힘들여 텍스트를 정복하고자 함은 부질없는 일이다. 언어는 우리 내부에서 유통되고 있다."(76)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듯 세상에 대한 그 어떠한 통일적 재현도 기대될 수 없다면, 또는 세계를 끊임없이 변동하는 파편들로 묘사하지 않고 그것을 연관과 차이로 가득찬 총체로 묘사할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세계에 대해 일관된 방식으로 행위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간단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즉 일관된 재현이나 행위가 억압적이거나 환상적일 따름이므로(그에 따라 자기소모적, 자기배제적일 운명이므로), 우리는 결코 어떠한 총론적 프로젝트에도 매달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듀이(Dewey)류의 실용주의가 유일한 행위철학으로 떠오르게 된다."(77) 포스트모던 사상에서 "우리는 더 이상 개인들이 고전적 맑시즘의 주장처럼 소외되어 있다고 볼 수가 없다. 소외되었다는 말에는 소외의 대상이 될 자아에 대한 의식이 분절적이지 않고 일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미리 상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80)


이와 같은 "시간적 질서의 붕괴로 말미암아 과거가 특이한 방식으로 다루어지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보의 개념을 잃어버리는 과정에서 역사적 연속성이나 그에 대한 기억까지 모두 폐기해 버리며, 동시에 역사를 훔치고 거기서 현재의 모습이라 여겨지는 것들이라면 모두 집어삼킨다."(82) 이제 "역사가들에게 남는 유일한 역할은, 푸코가 주장했듯이, 과거를 쫓는 고고학자가 되는 일이다. 즉 보르헤스가 그의 소설에서 그러했듯이 땅을 뒤져 역사의 유물을 찾고 그것들을 차례차례로 박물관에 모으는 일이다. 철학을 통해 몇몇 불변의 인식론적 문제제기 틀을 설정해볼 수 있으리란 기대를 공격하면서 로티(Rorty, 1979: 371)도 비슷한 주장을 편다. 곧 하나의 문화 속에서 오가는 엇갈린 대화들의 불협화음 속에서 철학자가 맡는 유일한 역할이란, '여러 견해들에 대한 한 가지 견해를 가지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무언가에 대해 오직 하나의 견해만을 인정하는 입장을 비난하는 일'이다."(84)


"모더니즘은 근대화라는 특수한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모더니티의 조건들에 대한 미학적 대응으로서, 불안정하게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개념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발흥을 적절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근대화의 본질을 파악해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포스트모더니즘이 변함없는 근대화 과정에 대한 하나의 또다른 대응인지, 아니면 이른바 '탈산업' 사회 또는 심지어 '탈자본주의' 사회의 일종을 지향하여 근대화의 본질 그 자체가 급격히 변동한 것을 반영하거나 혹은 그 징조를 보여주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132)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 권력인 "화폐는 정치 및 경제적인 것들을 순수한 지배권력 관계의 정치경제로 결합시킨다. 화페와 상품이라는 가장 공통적이고도 구체적인 어휘들은 모든 사람들을 동일한 시장평가 체계로 묶고, 그에 따라 객관적으로 자리잡은 사회적 결속체계를 통하여 사회적 삶의 재상산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이야말로 시장자본주의의 보편적 기반을 이루는 것들이다."(136)


"시장 거래에 동참하려면 생산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소외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일정한 분업 또한 미리 가정되어야 한다. 그 결과 개인 경험의 산물로부터 개인이 소외되고 사회적 업무들이 분절화되고 생산과정의 주관적 의미가 시장에서의 객관적인 제품 평가와 분리된다. 고도로 조직화된 기술적·사회적 분업은 비록 자본주의에만 고유한 것은 아닐지라도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기본원리 가운데 하나이다." 아울러 "노동이 임노동으로 바뀐 것은 '노동 생산물로부터 노동의 분리, 객관적 노동조건들로부터 주관적 노동력의 분리'를 뜻한다. 이는 아주 색다른 유형의 시장 거래가 생겨났음을 말해준다. 노동력을 구매해야 하는 자본가들의 경우 필연적으로 노동력을 도구적으로 다루게 된다. 노동자는 전인(全人 : whole person)이 아니라 '일손'으로 여겨진다. 노동이 단지 생산의 한 '요인'으로만 취급되는 것이다(이 물상화에 주목하라)."(137-9)


"모더니즘의 역사 전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운동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연속성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속에 일어난 특정 종류의 위기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즉 보들레르 정식 가운데 분절적이고 순간적이고 혼돈된 측면(맑스는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총체의 일부임을 훌륭하게 분석하고 있다)을 강조하고 영원불변한 것을 사유하고 재현하거나 표현하는 방법에 관한 모든 특정한 처방에 대해 깊은 회의를 보이는 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현대 세계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수단 노릇을 하는 분절화나 불협화음을 수용하라고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한껏 즐기라고 말한다. 그들이 마주치게 되는 모든 형태의 견해들을 해체하고 비합법으로 내모는 데 집착한 나머지, 그들은 합리적 근거를 갖춘 행동이라곤 전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자신들의 타당성 주장을 스스로 비난할 수밖에 없다."(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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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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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세기가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위협에 지배되었다는 가정은 옳지만,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20세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자유주의가 조만간 승리하리라는 것은 그 시대의 사태 전개를 봐서는 정말로 예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20세기를 생각한다>, 토니 주트, p.490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이론은 계급대립에 대한 실증적 연구나 프롤레타리아의 근본성격에 대한 정치투사로서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관찰을 하거나 정치투사적 경험을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사명, 즉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그 계급적 존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구성하는 역사적 사명을 발견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이 사실에 대해 자주 강조했다. 프롤레테르들을 실증적으로 관찰한다 하더라도 결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사명을 알 수 없다. 반대로 프롤레테르들의 계급적 사명을 이해할 때 그들의 진실한 존재를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프롤레테르들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얼마나 의식을 갖고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른 식으로 말해, 프롤레타리아 존재는 프롤레테르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선험적이다. 프롤레타리아 존재로 인해 프롤레테르들은 올바른 계급노선을 선험적으로 보장받는다."(15)


# 프롤레테르 :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개개인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이론은 기독교와 헤겔철학, 과학주의가 통합된 사상이며, 그 중에서도 중심축은 헤겔철학이다. 헤겔철학에서 "역사는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 시간이 끝나는 곳에서 신의 통치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신은 자신들의 선험적 작업의 의미를 여전히 이해 못하는 역사적 인간들을 매개로 자신의 도래를 완성해간다. 그런데 이 역사적 인간들에 대해 신의 작업은 선험적인 변증법을 통해 완성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인간들의 의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크스 변증법의 모태를 알아본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헤겔의 변증법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간직한다. 개인들의 의식에서 독립해 존재하는 역사의 의미, 그리고 개인들이 역사로부터 무엇을 얻건 그들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역사의 의미,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그 의미는 헤겔처럼 "허황된 모습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팔과 다리로 실현될 것이다."(18-9)


"마르크스가 (필연성과 실존성의 연결 고리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었던 까닭은 프롤레타리아는 구성원 개인이 모든 존재가 될 능력을 갖고 있다는 명제와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할 필연성을 갖고 있다는 명제가 동일한 층위의 명제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철학적 층위에 속한다. 마르크스가 헤겔철학을 차용해 만들어낸 프롤레타리아의 이상理想으로부터 도출되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세계와 역사의 원천으로서 자신을 의식하는 '노동'을 실천할 보편적 가능성의 존재다. 반대로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할 필연성을 갖고 있다는 명제는 프롤레타리아화化의 역사적 과정에 대하 분석으로부터 도출되었다(혹은 그러한 분석으로부터 도출되는 명제이기를 바란다). 사실상, 이 분석으로는 앞의 철학적 전제를 정립할 수 없다."(31-2) "마르크스는 전문기술을 지닌 다양한 노동자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이상을 지닌 프롤레테르의 모습을 보았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35)


"계급적 존재로서 프롤레테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는 노동력을 지닌 다른 인간과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로서 착취를 당하지만, 또한 바로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다시 말해, 그 자신과 완전히 동일하게 전적으로 소외된 타자들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타자'이기 때문에─다른 모든 프롤레테르들과 힘을 합해 착취자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은 '자본'의 권력과 정대칭의 관계에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자본에 대해 소외되어 있고 자본의 공무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프롤레테르도 그 동일한 '자본'을 "집단적으로 소유하게" 될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소외될 것이다."(47-9) "따라서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화한 노동자는 사회를 위해서만 노동한다. 그는 추상적 보편노동의 순수한 제공자이고, 결과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순수한 소비자다."(50)


"이제는 완전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는 노동과 관계 맺지 않는다. 노동은 완전하게 규격화되었고, 무기체적 과정이 되었다. 노동자는 스스로 진행되는 작업을 보조하고 이것에 자신을 맞춘다. 그는 더 이상 작업을 하지 않는다. 노동이 노동자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노동에 대해 무관심하다. 월말에 임금이 나오는데, 중요한 일이 있다면 이것뿐이다." "이런 원한어린 태도가 '자신의' 일을 하는 프롤레테르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다. 그들은 수동적인 프롤레테르를 원했을까? 그렇다면 프롤레테르는 수동적으로 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그는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한 수동성으로부터, 이 수동성을 강요한 사람들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프롤레테르에게서 수동적인 능동성을 원했다. 그런데 그는 능동적인 수동성을 가질 것이다."(52-3)


"프롤레테르들은 자신들의 완전한 헐벗음을 내면화하며 부르주아 세계의 폐허 위에서 보편적 프롤레타리아 사회를 이루어내는 대신, 자신들의 완전한 의존성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책임질 것을 요구하기 위해 헐벗음을 내면화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급적 요구가 이런 식으로 대중적 요구로 바뀌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계급적 요구는 (원자화되고 서로간의 연결성이 없는 프롤레테르들로 구성된) 대중의 소비에 대한 요구로 바뀌고, 이 경우 프롤레테르들은 사회로부터, 다시 말하면 권력으로부터, 현실적으로 다시 말하면 국가기관으로부터 그들이 갖거나 창조하기 불가능한 것을 받고자 한다. 이때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권력의 지위에 자신들의 대표자를 앉히기 위한 대중적 행위로 축소된다."(54-5)


"따라서 자신들이 국가에 의지하는 만큼, 역으로 국가도 노동자들에 대해 의무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가 노동계급에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그 계급에 대해 모든 의무를 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국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도 노동계급이 절대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차지해야 하는데, 이렇게 실제로는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책임지고 있다. 노동계급과 국가권력 사이에 놓인 모든 장벽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고, 계속 이렇게 된다면 상황은 다루기 쉬울 것이다. 곧 지금까지 존재해온 정치적 중개, 그람시가 말한 의미의 시민사회 고유의 제도, 자율적인 사회적 관계와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은 독점자본주의에 의해 이미 모든 현실성을 상실했다."(57-8)


"노동자들의 권력에 대한 생각, 혁명적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포스트-테일러리즘 시대에 그 생각들이 부여받던 의미와는 매우 다른 실제적인 의미를 갖는다. 권력의 지위에 오르는 일을 목표로 삼았던 그 노동계급은 비참하고, 탄압받고, 무지하고, 일정하고 안정된 거처나 직업이 없던 민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소유한 전통·엘리트층·문화·조직 때문에 노동민중 한가운데서나 일반적 의미의 사회 내에서 헤게모니를 쥘 잠재성이 있던 계층이었다. 이 계층에게는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 부르주아지의 자리를 빼앗은 다음 국가를 경영할 지위에 앉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노동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 즉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기생계급인 부르주아지, 그 탄압적 기구의 존재로 인해 부르주아지가 민중의 궐기를 우습게 보는 국가를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66-7)


"생산조직의 자율성을 파괴시킨 그 기술적 전문화·경제적 집중화 과정이 노동자들의 자율성의 원천인 예능적 기술을 파괴시켰다. 테일러리즘으로 인해, 생산에 필요한 노동자들의 위계와 질서의 자리에 공장의 지휘부에서 고안하고 강제한 경영자 중심의 위계와 질서가 들어앉았다. 치열한 투쟁의 과정들을 거친 다음 예능적 기술의 노동자들은 제거되고, '생산의 하사관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비록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지만 고용주 측에 속하게 됐다. 즉 그들은 지도부에서 교육 받고 선별된 다음, 다른 노동자들을 지도하고 감시할 권력을 부여받았다. 생산작업은 자율성이나 기술적 권력이 없는 원자화된 노동자들로 구성된 대중에 의해서만 수행됐다. 이런 대중에게 생산에 대한 "권력을 쟁취한다"는 사상은 의미가 없다. 적어도 오늘날의 공장에서는 의미가 없다."(69-70)


"권력의 정당성을 이루는 토대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자본주의 사회의 해결되지 않는 커다란 문제 중 하나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따른다면, 항상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지배적 위치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능력주의의 존재를 전제하고, 이 능력주의는 권력 관계들이 매우 유연하고 쉽게 변화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따라서 사회는 물적으로나 제도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더라도, 사회 내의 이런 유동성을 막아서는 안 된다. 어제의 승자가 오늘, 그보다 더 능력있는 사람이 있다면, 대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현 상태를 유지하려 하지 않는 권력, 자신의 권력을 특정인에게 위임하려 하지 않는 권력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상, 권력은 지배적 지위를 독점한다는 것이고, 지배적 지위는 필연적으로 특권화되고 희소성을 갖는 경향이 있다. 이런 지위들 중의 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이 그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84-5)


대다수가 지배적 지위를 추구하지만, "사람들이 갖게 될 모든 지위는 이 지위에 필요한 자질과 함께,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지배적 제도의 경화증은 권력의 관료화와 더불어서 발생한다.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위해 권력을 획득할 수 없다. 그는 단지 매우 작은 권력이 부여되어 있는 지위들 중의 한 지위에 오르기를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더 이상 권력을 소유하지 않고, 권력의 지위들이 인간들을 소유한다. 더 이상 '자아'의 개성을 확장할 능력을 갖고 있는 개인들이 자신들에 맞추어 그 지위들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 지위들이 지위를 점하는 인간들을 맞추어 가공해낸다." "이 변화는 개인 자본가가 익명적 집단, 기업가가 '은행', 고용주가 '자본'과 그 공무원들(곧 경영자들)에 의해 대체된 시기부터 현실에 뿌리내렸다. 모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휘·경영 기관이 이윤창출과 자본유통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구조화되었다."(86-7)


"프롤레타리아는 구성적으로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비록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들이 '자본'에 의해 설치되어 있던 지배기구를 장악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자본의 지배와 유사한 것을 재생산할 것이고, 이어서 그들 스스로가 기능적 부르주아지가 될 것이다. 지배기구 내에서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이 점하던 자리를 차지하며 그 계급을 축출할 수 없다. 그러한 시도를 하는 계급은 권력을 이양받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지위를 이어받을 따름이다."(99-100) 사회적 생산의 토대가 되는 업무를 담당하는 "기능적 권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배관계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곧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떠맡는 것과 같다. 지배관계를 제거할 유일한 가능성은 곧 권력과 지배를 분리시키고 시민사회·정치권·국가 각각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해, 기능적 권력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전에 정해진 한정된 자리를 그 기능적 권력에 부여하는 데 있다."(101)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노동은 더 이상 노동자의 고유한 행위가 아니다." "노동자는 더 이상 "자신의" 노동에, 생산과정 내 자신의 역할에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다. 모든 일이 그를 제외한 채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 자체는 노동자와 마주해 그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어떤 일정량의 물화物化된 행위다." 따라서 노동자가 "노동 가운데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노동의 주인이 되고, 노동을 위해 권력을 정복하는 일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노동의 본성·내용·필요성·방식들을 부정하며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만이 문제다. 그런데 노동을 거부한다는 것은 또한 노동운동의 전통적 전략과 그 조직적 형식들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곧 노동자로서 권력을 정복할 필요가 더 이상 없는 대신, 노동자로서 기능하지 않을 권력을 정복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권력이 문제가 된다. 계급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107-8)


"노동계급과 달리, 이 비非계급은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나지도 않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의 낙인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계급은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해, 그리고 새로운 생산기술들의 영향력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들의 해체로 생겨났다. 따라서 마르크스를 따를 때 노동계급이 지니고 있어야 하는 부정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부정성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해 근본화됐다." "실제로 이 비계급은 노동의 소멸과정에 따라 생산현장을 떠나게 된 사람들 혹은 지적 노동의 산업화(즉 자동화와 정보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일자리를 얻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실제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지속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완전하거나 부분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임시직의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노동, 곧 노동의 존엄·가치화·사회적 효용·욕망에 토대를 두었던 구舊사회가 해체되며 나타난 산물이다."(108-9)


"그들에게서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노동계급이나 다른 어떤 계급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라는 명칭에서도, 아니면 이와 대칭선상에 있는 '실업자'라는 명칭에서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이 신新프롤레테르는 은행·관공서·청소서비스업체·공장 등 어디에서 일하건, 무차별한 직무에 일시적으로 고용되어 있는 비노동자다. 그는 "아무 일이든" 하고, 또한 "아무나" 그를 대신해서 그 일을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생산관계를 매개로 사회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사회의 전반에 자리한 생산기구가 '노동'을 만들어내고, 우연적이고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개인들에게 우연적인 형식으로 그 노동을 강요한다." "젊은 마르크스가 모든 특수한 형식으로부터 해방된 보편적 가능성을 그 안에서 보았던 프롤레테르는 오늘날에는 기구들의 보편화된 능력에 대항하는 특수한 개인성일 뿐이다."(113-4)


"타율성 영역은 개인들의 생활과 사회의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프로그램화하고 계획화해 가장 효율적으로, 곧 가장 적은 노력과 자원을 들여 생산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자율성 영역에서는 개인들이 경제영역 바깥에서 혼자서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든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데, 이 상품과 서비스는 생활에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욕망과 취향과 상상력에 따라 만드는 것이다."(156) "사회공간을 (사회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비인격적인 일을 하는) 타율성의 영역과 (모든 것이 진행될 수 있는) 자율성의 영역으로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조직하더라도 두 영역이 어떤 경우든 서로에 대해 닫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평범화된 노동들로 구성된 사회화된 섹터의 존재를 통해 각자가 공동체의 협소한 공간을 벗어날 수 있고, 공동체가 자급자족적 경향 때문에 폐쇄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165-6)


"사회적으로 결정된 노동을 없앤다 하더라도, 혹은 각자가 객관적으로 필요한 모든 일의 완수규칙을 내면화하도록 설정했던 외부적 의무들을 폐기한다 하더라도 해방은 생겨나지 않는다. 반대로 해방은 필연성의 영역이 타율적인 일들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타율적인 일들의 기술적 요구사항들은 도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정확한 규칙을 정해 그 일들을 특정 사회공간 내로 한정시키는 데 있다. 필연성의 영역과 자율성의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 후자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기 위한 조건이다."(168) "필연성의 영역을 축소하는 일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물적으로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량만을 축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일은 또한 직접적인 생산이 필요로 하는 외부의 비경제 시스템과 국가의 활동들을 축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축소는 생산기구 자체와 이 생산기구가 결정하는 노동의 분할이 조정될 때만 가능하다."(170)


"후기산업사회의 사회주의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국가의 철폐가 아니라 지배의 철폐다. '법'과 지배, 국가기구와 지배기구는 지금껏 항상 혼동되어 왔지만, 분리되어야 할 것들이다. 실제로 국가기구들은 모든 지배의 원천도 그 최종동기도 아니다. 그 기구들 자체는 지배의 사회관계 때문에(한 계급의 전 사회에 대한 지배 때문에) 존재하고,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지배양식에 자신들의 고유한 지배양식을 추가하며 그 사회관계를 연장하고 강화한다. 국가기구들에 의한 사회의 지배는 자본이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집중화를 통해 지배함으로써 생겨난 결과이자, 그 지배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지배기구를 걷어내면 나타나는 "국가는 협업과 중앙적 규제 수단들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끝으로 국가는 자율성 영역의 확장을 위해 스스로의 권력과 고유 영역을 축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186-7)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역사의 종말로서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세계 공산주의, 전 지구적 민주주의, 천년왕국 등 종류만 다를 뿐이다.

...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안내자로서보다는 신념과 정치적 행동의 견인차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과거의 도그마가 더는 우리에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처음부터 거대한 속임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재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의 종언을 "환상의 종언"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 분석은 추도사가 아니다. 1945년 직후에 사람들은 전체주의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했다. 악마에 사로잡힌 광기 어린 한 독재자가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었던 정치적 병리 현상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 대륙이 받은 상처를 그저 몇몇 정신 나간 인간들의 소행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으며, 그 상처가 남긴 정신적 외상이 히틀러나 스탈린의 정신세계 속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좋건 싫건 간에 파시즘과 나치즘 모두 대중 정치·산업화·사회 질서라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했다. 자유민주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나쁜 과거를 내던지고 시간의 망각 속에 묻어버리면서 과거에 좋았던 것만을 우리의 유산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

유럽에서 자유주의는 여러 가치 체계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다른 것들도 존재한다. 유럽의 20세기는 이들 가치 체계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 대한 이야기다. 


<암흑의 대륙>, 마크 마조워, pp.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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