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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 국가자본주의론의 분석
토니 클리프 지음, 정성진 옮김 / 책갈피 / 2011년 11월
평점 :
발달된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볼셰비키의 장담은 국가의 생존이라는 당위 아래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 걸맞는 산업 체제를 구축하는 데 역점을 두고 방향을 선회했다. 5개년 계획 아래 "거대한 공업화 드라이브가 시작되자 (전문경영자와 노동자 공장위원회 그리고 당세포가 한께 산업 경영에 참여하는) 트로이카 체제는 더는 용인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존재 자체가 자본축적의 필요에 노동자들을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을 방해할 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8년 2월에 최고경제평의회는 '공업 기업의 행정·기술·경영 담당자들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기본 법규'라는 제목이 붙은 문서를 공표했다. 이것은 트로이카 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경영자의 무제한 통제권을 완전히 확립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1935년에 발간된 한 소련 경제법 교과서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1인 경영은 사회주의 경제의 가장 중요한 조직 원리다."(13-4)
스탈린주의자들은 나치와 마찬가지로 대중을 통제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성과급을 이용했다. "5개년계획이 도입된 이후, 성과급에 따라 임금을 받는 공업 노동자 비율이 매우 급격히 증가했다. 1930년에 그 비율은 전체 노동자의 29퍼센트였는데, 1931년에는 65퍼센트로, 1932년에는 68퍼센트로 증가했다. 1934년에는 모든 공업 노동자의 거의 4분의 3이 이른바 '사회주의 경쟁'에 참가하고 있었다."(21) 과도한 목표치 할당을 막기 위해 "원래는 (생산) 기준량이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기준량을 점검하는 제도가 있었다. 1936년에 그 제도의 폐지는 정부가 노동자 간의 '자유'경쟁을 아주 가혹하게 실시하기로 결정했음을 명백히 보여줬다. 그리고 당연히 스타하노프상을 받은 노동자들은 그 과정에서 강력한 도구였다." 레닌은 테일러 시스템을 '기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로 규정했지만, 스탈린주의자들은 "테일러의 견해와 방법은 무조건 진보적"이라는 말로 자본주의적 착취 방식을 옹호했다.(24)
스탈린 체제 노동법의 의의는 다음의 말 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 "사기업이 허용된 신경제정책NEP 시기보다 노동자의 법적 지위는 더 악화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노동자가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모든 통로(입법·사법·행정 기관과 노동조합)가 소련에서는 산업 노동의 주된 고용주(정부)의 기관이다. 현 소련 노동법의 또 다른 특징은 수많은 벌칙 조항이다. 노동법은 대부분 형법이다."(29) "1922년의 노동법은 특히 과중하고 비위생적인 생산노동과 지하작업에 여성(과 아동)의 고용을 금지했다. 1923년 11월 14일 노동인민위원부와 최고경제평의회가 공포한 행정명령은 10러시아파운드(4.1킬로그램)를 초과하는 짐을 나르거나 움직이는 작업을 하는 직종에 여성을 고용하는 것을 완전히 금지했다. 최고 40러시아파운드의 짐 운반은 노동시간의 3분의 1을 넘지 않을 때만 허락됐다. 오늘날(1940년대) 이러한 보호 장치들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29)
# 노동계급 억압 기제들
1. 임금 관련 교섭을 일절 배제하는 단체협약
2. 노동계급의 원자화 : 성과급 제도를 이용하여 대중 통제
3. 법적 자유 부정 : 근무지 이전의 자유 박탈, 근무 태만 처벌 강화(해고 요건 완화), 공장 책임자가 식량과 기타 생활필수품 통제, 파업 금지
"소련 정부가 대규모 노예노동에 의존한 것은, 서유럽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과 비교해 인력보다 자본이 상대적으로 훨씬 부족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소련에는 아주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시해야만 자유 노동자나 심지어 반半자유 노동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매우 힘든 작업들(예컨대, 북극 지방에서 하는 작업)도 많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노예노동은, 생산성이 극히 낮은데도, 이런 경우에 유일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장 값싼 방법이다."(36) 강제 노동에 의존한 자본의 축적 뒤에 빈곤이 축적되고 있었다는 유력한 증거가 바로 부족하고 낙후된 주택 공급 상태이다. "5개년계획들 시기에 건설된 주택은 매우 원시적이었다. 예컨대, 1935년에 건설된 모든 도시 주택 가운데 32퍼센트가 상수도 공급이 되지 않았고, 38퍼센트가 하수도 시설이 없었으며, 92.7퍼센트가 가스 공급이 되지 않았고, 54.7퍼센트가 중앙난방 설비를 갖추지 못했다."(47-8)
농업 집산화 아래 국가는 의무납입액(조세)을 부과하고, 농기계 및 제분소 이용 대금을 거두어 농민을 수탈했다. "의무납입은 그 명칭과 달리 실제로는 현물세인데, 왜냐하면 [국가가] 콜호스(집단농장)에 지급하는 가격이 극히 낮기 때문이다. 1935년에 귀리의 의무납입 가격은 킬로그램당 4~6코페이카였는데, 정부는 귀리를 킬로그램당 55~100코페이카의 소매가격으로 되팔고 있었다." 밀가루의 가격차는 무려 100배가 넘었다. "둘째, 국가는 기계 트랙터 스테이션(MTS)이 제공한 서비스의 대가로 상당량의 생산물을 현물로 받는다. MTS는 농업 설비의 독점 공급권이 있으므로 그 설비를 이용한 대가로 고율의 사용료를 징수할 수 있다."(55-6) "결국 집산화는 공업 발전의 필요를 위해 농산물을 '해방'시키고, 농민을 자신의 생산수단에서 '해방'시키고, 농민의 일부를 공업 노동력의 예비군으로 바꾸고 나머지 농민을 부분 노동자, 부분 농민, 콜호스의 부분 농노로 바꾸는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60)
1930년 이래 자본 투자와 국방비를 대부분 충당한 거래세는 "영국의 물품세[구매세]와 비슷한데, 상품을 제조할 때 부과되고, 정부가 농민에게서 농산물을 수매할 때도 부과된다. 거래세는 상품 가격에 포함되고, 그래서 소비자가 전액 부담하게 된다. 거래세는 거의 농산물과 소비재 산업에만 부과된다." "거래세가 판매 가격에 부가되지 않고 그것에 미리 포함되므로, 예컨대 50퍼센트의 거래세는 상품 가격을 실제로 100퍼센트 인상시키는 것이고, 75퍼센트의 거래세는 300퍼센트, 90퍼센트의 거래세는 실제 가격의 아홉 배를 결국 인상시키는 것이다."(62) 소비부문에서 자본을 가혹하게 수탈한 "간접세이자 역진세인 거래세는 애초의 볼셰비키당 강령과 완전히 모순된다. 볼셰비키의 최소강령, 즉 자본주의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상정된 강령조차 '모든 간접세 폐지, 소득과 상속에 대한 누진세 확립'을 요구했다."(65)
국가 소유가 곧 전 인민의 재산이라는 이념이 허울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국영기업·집단농장·협동조합 재산의 보호와 사회주의적 소유제도에 관하여"라는 1932년 8월 7일의 법령에 잘 나타난다. 이 법령에 따르면, "국가와 콜호스와 협동조합에 속하는 재산이나 철로와 수로를 훔친 자는 전 재산 몰수와 함께 총살형에 처할 수 있었다. 정상을 참작할 수 있는 경우에도 형벌은 최하 10년형과 전재산 몰수였다. 스탈린은 이 법을 "혁명적 합법성의 기초"라고 불렀다."(66) 임금 평등 정책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되었다. 혁명 초기인 1918년 3월, 레닌은 "모든 직종과 부문에서 모든 임금과 봉급의 점진적 평준화를 지지한다고 재차 선언했다. 레닌은 전문가들에게는 약간의 예외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했는데, 이는 전문가들이 부족하거나 그들이 노동자 국가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상황에서는, 그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73)
"'승리한 사회주의'라는 기치 아래 시작된 5개년계획과 더불어 볼셰비키의 평등주의 전통이 모두 무너졌다. 스탈린은 "우라브닐로프카[평등주의의 남용]는 농민적 사고방식, 모든 재화의 평등 분배 심리, 원시적인 농민 '공산주의' 심리가 그 기원이다. 우라브닐로프카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와 공통점이 전혀 없다"고 선언하면서 공격을 주도해 나갔다." "당원의 소득에 제한을 두었던 조항은 1929년에 완화됐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폐지됐다."(77) "소득 격차는 상속재산의 크기에서도 커다란 차이를 가져왔다. 혁명 초기에는 1918년 4월 27일자 포고령에 따라 1만 루블 이상의 상속재산은 모두 몰수됐다. 이와 같은 조처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 요구 중 하나로, 모든 상속권의 폐지를 제안한 <공산당 선언>의 정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몇 년 후 그 법은 완전히 바뀌었고, 1929년에 이르면 이미 1000루블 이하부터 50만 루블 이상의 상속세 과표가 존재하고 있었다."(84)
계획경제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은 중개인 집단의 출현이다. "그들은 자원이 남는 공장과 부족한 공장을 알아내어, 당국이 정한 가격과 어긋나는 조건으로 공장 간 물물교환 협정을 주선하는 일로 먹고산다." "같은 종류의 또 다른 예는 식량 배급을 맡으면서 특히 전시에 번창한 콜호스 시장인데, 그것은 사실상 '암시장'이었다. 완전히 불법이지만, 원료·기계 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수수료를 챙기는 톨카치tolkach, 자재공급 촉진자의 출현도 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기업장에게는 없는 권한, 즉 원료와 기계 등을 획득할 때 발휘할 수 있는 블라트blat, 즉 개인적 영향력이 매우 중요해진 것도 이러한 상황에서였다."(97-8) " 관료의 부실 경영과 소련 공업의 대약진 사이에 긴밀한 변증법적 통일이 존재한다. 소련의 낙후한 생산력, 생산력의 급속한 성장을 향한 거대한 드라이브,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축적에 대한 소비의 종속만이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출현을 설명해 줄 수 있다."(101)
"혁명 후 곧 다수의 볼셰비키 이론가들, 특히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는 공업에서 생산된 잉여만으로는 자본축적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왜냐하면 특히 "승리한 그 순간부터 노동계급은 자본가가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노동계급 자신의 노동력, 건강, 노동조건 등의 문제를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적 축적의 속도를 늦추는 결정적 장애로서, 자본주의적 공업 발전의 첫 시기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장애다." 프레오브라젠스키는 '사회주의 축적'(이것은 사회주의 경제 부문 자체에서 잉여생산물이 생산된 결과로 생산수단이 증가하는 것을 뜻한다)에 반대하여 '사회주의적 시초 축적'을 주장했다. 그것은 "국유 부문(우클라드)의 외부에 존재하는 원천에서 주로 획득되는 물질적 자원을 국가의 수중에 축적하는 것"을 뜻했다." 여기서 "국유부문의 외부에 존재하는 원천"이란 바로 농업이었다.(150)
"소련에서는 국가가 고용주이고, 관료는 단지 경영자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소유 기능과 경영 기능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형식적으로만 그렇다. 근본적으로 소유권은 집합체인 관료의 수중에 있다. 즉, 관료의 국가에 귀속되어 있는 것이다."(187) 그래서 잉여가치의 축적 과정을 "관리하는 관료는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채우는 것을 간과하지 않으며, 관료가 소비하는 잉여가치의 양은 절대적으로 증가한다. 이 두 과정은 대중에 대한 착취율이 계속 증대할 경우에만, 그리고 자본의 새로운 원천이 계속 발견될 경우에만 지속될 수 있다(그래서 소련 농민을 강탈한 시초 축적 과정이나 동유럽 각국을 약탈하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189) 스탈린 체제의 관료는 경제적 역동성의 절정에서 지배계급으로 변모했다. "따라서 실제로 국가를 '소유'한 채 (자본) 축적 과정을 통제하는 소련 관료는 자본의 인격화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86)
# 관료적 국가자본주의Bureaucratic State Capital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