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술의 사회사 - 초기 아메리카에서 20세기 미국까지, 세상을 바꾼 기술들
루스 슈워츠 코완 지음, 김명진 옮김 / 궁리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미국 기술의 독특한 특성, 다시 말해 그것을 영국, 일본, 캐나다, 멕시코, 혹은 그 외 다른 나라의 기술과 구별해주는 요소들은 북미대륙의 지리가 갖는 남다른 특성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 유래한 것이다. 오늘날 미국 본토라고 불리는 북미대륙의 이 특정한 부분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조작해왔고 또 적응해온 자연환경이다. 이는 또한 태평양에서 대서양에 걸쳐 세 가지 기후 지대(아열대, 온대, 아한대)를 횡단하며, 최소 열두 개의 매우 다른 생태 지역을 포괄하는 대단히 광활한 땅이기도 하다."(23) "사람들은 이처럼 지리가 각기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발전시킨 문화와 기술도 서로 크게 달랐다. 새로운 환경은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스스로를 부양하고 먹고 살 수 있도록 오래된 도구들을 변형할 기회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우리가 이들을 한데 뭉뚱그려 하나의 일반적 용어(인디언)로 부르는 오류를 저지르긴 하지만, 각각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은 사실상 고유한 존재였다."(25-6)


# 지역별 특성

1. 건조한 남서부 : 진흙벽돌로 집을 짓고, 토기를 빚었으며 면화로 옷을 짜 입었다.

2. 태평양 해안지역 : 다양한 목공도구를 이용하여 판잣집을 지었고, 물고기를 잡아 먹었다. 북서부 지역은 다양한 야생 열매를 보존, 섭취하였다.

3. 평원과 대초원 : 유목생활을 하면서 버팔로를 사냥했다. 동물 가죽을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

4. 동부해안 평원과 애팔래치아 고지대 : 삼림을 파괴하지 않고 적정한 수준에서 나무제품을 활용했고, 비옥한 토양에서 농경생활을 했다.


"유럽 이주자들은 영구적인 집을 만들려고 애썼고, 땅을 개간하기 위해 힘든 악전고투를 하면서 농장을 영구히 비옥하게 유지하려고 했다. 원주민들은 그런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떤 땅에서 수확이 빈약하면 그 땅을 포기했고 자연상태로 되돌아가도록 내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상품을 축적하고 집, 울타리, 쟁기 같은 물건에 집착하는 것은 그들에게 어리석음의 극치로 보였다." "무엇보다 유럽인이 지닌 습관 중에 땅뙈기를 개인이나 그 자손에게 영구히 줘버리는, 즉 땅을 소유하는 것만큼 기이해 보이거나 많은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일도 없었을 것이다." "원주민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일한 땅에서 나는 생산물을 소유했지만 땅 그 자체를 소유하지는 않았다. 원주민 가족은 어떤 주어진 땅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거나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떤 영토의 일부를 팔고 사거나 기증하거나 제한을 두는 일에 대해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34-5)


"유럽인들은 대서양을 건너 이주하면서 이전까지 삶에서 의지해왔던 숙련기술자들의 네트워크에서 단절되었다. 가장 가까운 물레나 바늘제조공이 5,000킬로미터나─그리고 가는 데 몇 달이 걸리는 곳에─떨어져 있는데, 바늘이 부러지거나 실이 떨어지면 어땠을지 한번 상상해보라."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 기본적인 생존 기술을 배워야 했다. 그것도 도착하자마자 바로 배워야 했다." 그런 배움 중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초기 이주자들은 그들이 그토록 빨리 불공평하게 몰아내버린 원주민들로부터 미분화되고 미특화된 방식으로 사는 법의 미덕을 배웠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람이 수많은 기술에 능해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어느 한 분야의 대가는 못 되더라도 온갖 기술을 다룰 수 있는 팔방미인이 되어야 했다. 그들은 그러한 지식과 기술을 자식에게 물려주었고, 이후 '양키의 창의성'(Yankee ingenuity) 문화라고 불리게 된 것을 만들어냈다."(40-1)


"1750년경에 식민지 경제의 80퍼센트는 농업이었고, 식민지에 거주하는 모든 성인 인구의 90퍼센트는 1년에 적어도 일부 기간에는 농사를 지었다. 18세기 말에 탄생한 신생국가는 진정 농부들의 국가였다." 이러한 농업적 기원이 미국문화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널리 공유된 관념 속에 반영되어 있는데, "그러한 신화 중 하나는 '자족성(self-sufficiency)'의 신화이다." 미국사 교과서를 거의 아무거나 들춰봐도 식민지 시기의 자족적 농부에 관한 얘기를 읽을 수 있다. 스스로를 부양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빵, 육류, 옷감, 장작─을 생산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결코 아무것도 구입할 필요가 없었던 사람 말이다. 어떤 독립기념일 연설을 들어봐도 우리 조상의 '독립적' 삶에 관한 얘기를 들을 가능성이 높다." "기술사는 우리에게 자족성의 신화가 (공동체적 정체성의 느낌을 북돋아준다는 긍정적 의미와 사실이 아닌 이야기라는 부정적 의미의 두 가지 모두에서) 신화임을 가르쳐준다."(62-3)


"혼합농업이나 자급농업에 종사하는 평균적인 농장가족이 이처럼 상대적으로 검소한 생활수준이라도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노동으로 영위하려 했다면, 수많은 도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사과술 압착기와 쟁기, 직기와 써레, 마구와 물레, 칼과 양초 만드는 틀 등이 그런 도구들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단순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값비싼 물건들이었다." "비용뿐만 아니라 자족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수많은 일손, 비범한 수준의 기술이 필요했다." 실제 수행에 몇 시간,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달이라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숙련도의 부족보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일들 중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숙련이 부족하면 종종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은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자족적인 농업과 그에 따르는 생활수준에 매혹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은,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82-4)


물물교환 경제를 보완한 것은 "식민지 도로를 따라 다니던 떠돌이 기술자들이었다. 그들은 농장 가정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도구를 제공해주었다." "농장에 사는 남녀들은 온갖 일에 능한 팔방미인이었는지 모르지만, 기회가 되기만 하면 어떤 일에 특화한 사람에게 자신들의 일 중 일부를 맡기는 쪽을 분명히 선호했다."(86) "경제적 독립성, 다른 말로 하자면 가정의 완전한 자족성은 대단히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자족적 농업의 가치를 마음속 깊이 믿고 있었다. 헌법의 기틀을 다진 사람으로서 그는 소농의 이해관계가 존중받고 자족성의 문화가 미국의 정치과정에 확실히 자리잡을 수 있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떤 정치적 묘안도─대의제 의회도, 강력한 주정부도, 선거권을 토지소유자에게만 국한시킨 조치도─제퍼슨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사회, 즉 진정으로 독립적인 소농들의 국가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당대의 기술시스템은 그런 도전을 감당할 수 없었다."(87)


"18세기 중엽이 되면 거의 모든 도시에서 수력으로 가동되는 제조소가 적어도 하나 이상 있었다."(105) "제조소 건설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인 제조소기술자(millwright)들은 당대에 가장 기계적 숙련이 높은 기술자들이었을 것이다."(107) "많은 지역사회에서 제조소는 교회, 학교, 법원이 들어서는 것보다 앞서 건설되었다. 제조업자들이 이민에 관심을 갖도록 온갖 종류의 특별한 유인책들이 마련되었다." "한 버몬트 사람의 말을 빌리면, 제조소가 없는 것은 "문명화된 삶의 존재와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제분소가 있으면 개척가족은 먹을 곡물을 직접 갈아야 하는 노동에서 해방되었고, 제재소가 있으면 집을 지을 때 목재를 준비하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제혁소, 소모소, 축융소는 모두 식민지인들이 값싸고 오래가는 옷감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한 옷감은 빵을 만드는 곡물이나 지붕에 올리는 판자와 마찬가지로 안락함과 생존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물품이었다."(109-10)


# 제조소의 종류

1. 제분소 : 곡물을 빻아주는 곳

2. 제재소 : 통나무를 판자로 만들어주는 곳

3. 소모소 : 새로 깎아낸 양털이 뒤얽힌 것을 풀어주는 곳

4. 축융소 : 젖은 천을 두들겨 오그라들게 하는 곳

5. 제혁소 : 가죽 제품을 유연하게 만드는 떡갈나무 껍질을 빻는 곳


"도시장인들은 자신의 부가 상인들의 부와 마찬가지로 토지소유의 정치가 아닌 교역의 정치에 매여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식민지인과 달랐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토지가격과 토지에 붙는 세금을 걱정했다면, 숙련기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수출 할당량과 수입관세, 신용협약, 통화의 안정성에 대해 우려했다. 1760년 이후에 모국과 식민지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었다."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장인들 역시 1763년 이후 국왕 조지 3세가 식민지 무역에 대해 더 많은 통제권을 행사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하려고 도입했던 "통화법(1764년, 식민지 의회가 발행한 지폐의 가치를 평가절하한)과 인지세법(1764년,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문서에 드는 비용을 증가시킨)에 의해 사업에 제한을 받았다. 타운센드 관세(1767년)가 제정되자 상인들은 수입된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 조직에 나섰고, 식민지의 숙련기술자들은 나름의 이해관계에 따라 불매운동을 지지했다."(122)


# 식민지 해방의 결과 : 중상주의 정책의 철폐와 신생국가의 산업기술 발전 토대 마련


"에번스가 제분과정을 좀더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개발한 기계들은 19세기 전반기 제분업의 성장과 산업화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다." "식민지 시기에는 숙련노동력이 부족했고, 건국 이후 초기 수십 년 동안에도 이 문제는 계속되었다. 토지가격이 계속해서 저렴한 상황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많은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기보다는 자기 땅에서 일하는 편을 더 선호했다. 노동이 희소해지면 값은 비싸지며, 이는 노동절감 장치가 수익을 증가시켜줌을 의미했다. 이는 왜 그토록 많은 미국산업들이 점차 기계화의 길을 걸어갔는지의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134-5) "개선된 생산재들은 경제에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를 미쳤다. 생산재들은 여러 방식으로 쓰였기 때문에 여러 증폭 효과를 가져왔다." 곡물 엘리베이터는 밀가루 생산비용을 낮췄고, 증기기관은 운송비용을 낮췄다. 가격 인하가 초래한 "수요 증가는 제분업자들이 시설을 확충하도록 자극했다. 이것이 바로 승수효과이다."(139-40)


# 에번스의 대표적인 발명품 : 곡물을 운반하는 '곡물 엘리베이터'와 곡물가루를 체로 걸러내는 '호퍼보이'


조면기를 최초로 발명했지만 생산과 유지보수가 간편하다는 이유로 복제품이 난무해 수익을 얻지 못한 경험은 "휘트니에게 소중한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발명은 어렵지만, 개발은 그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었다. 밀가루를 빻거나 방아쇠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내기 위해서는 창조성과 창의력이 요구된다. 발명에서 수익을 얻어내거나 실제로 새로운 장치를 생산해내기 위해서는 끈기, 참을성, 정치적 안목, 그리고 많은 돈이 필요하다. 어떤 종류의 돈이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선불로 주어지는 돈─때때로 투자자본이라고 불리는─이 있어야 한다. 뭔가를 내다 팔 준비가 되기 전에 여러 달, 여러 해 동안 사업을 지탱하려면 말이다. 일라이 휘트니는 연방정부가 선불로 돈을 줄 수 있는 극소수의 잠재적 원천 중 하나라는 사실을 간파하는 기지를 발휘했고, 아울러 19세기 초에 연방정부가 무기제조업자들로부터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정치적 안목도 갖추고 있었다."(146-7)


# 휘트니가 정의한 미국식 생산 체계

1. 신속성 :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기계화

2. 균일성 : 대량 생산된 제품의 동일성

3. 정확성 : 정확한 명세에 따라 생산한 호환 가능한 부품


"휘트니가 꿈꾸었고 그의 뒤를 이은 수십 명의 제조업자들이 이뤄낸 새로운 생산방법은 독특한 미국적 특성을 갖고 있었다." "병기창에서건 시계공장에서건 간에, 기본적 요소는 언제나 동일했다. 상대적으로 미숙련된 노동자들이 특수목적 동력 기계류와 표준화된 척도를 사용해서 대단히 높은 수요(소비재의 경우)나 대단히 정확한 수준(군사무기의 경우)에 맞추기 위해 특수하게 설계된 제품을 통해 균일한 부품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미국식 생산체계는 이후 대중시장을 위한 대량생산으로 불리게 될 것의 기반을 이루었다. 독립전쟁 종식부터 남북전쟁 발발 사이의 기간 동안 미국 정부는 전쟁부를 통해 자금을 제공했고, 이것이 없었다면 체계의 발전은 진척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만의 독특한 자원 균형─값싼 토지, 값비싼 노동력, 늘어나는 인구─은 숙련노동자를 미숙련노동자로 대체하는 기법을 선호했고, 이에 따라 개발 단계에 있던 체계가 형성되었다."(151)


# 병기창 관행(armory practice) : 특수목적 기계의 사용, 노동분업, 미숙련노동력 고용


# 미국 산업화의 특징

1. 값싼 토지 : 혁신가들은 희귀한 숙련 노동자들을 대체할 수 있는 기계 개발에 노력을 기울였다.

2. 국가 지원 : 국가는 독립 초기에 많은 양의 무기를 확보하고자 새로운 형태의 특수목적 기계 개발을 적극 지원했다.

3. 넓은 공장부지 : 많은 공장들이 유럽에 비해 더 오랫동안 농촌지역에서 수력을 이용하였다.

4. 인구 팽창 : 국내시장의 팽창으로 비용을 낮추고 생산력을 높이는 새로운 설비 투자에 적극적이었다.


연방의 결속력 강화를 바라는 "풀턴, 갤러틴,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로마인들에게 통했던 그 처방(공화주의, 시민권의 확산, 훌륭한 운송망)이 미국에서도 잘 통하기를 희망했다. 갤러틴의 보고서가 상원에 분명히 전달해준 것처럼, 그들은 국가 운송 체계─메인 주에서 조지아 주까지, 또 미시시피 강에서 대서양까지 뻗은 도로와 운하 체계─를 통해 미국의 다양한 지역들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특정 주들(특히 서부의 주들)의 연방 탈퇴를 경제적·정치적 견지에서 어렵게 만들고자 했다."(168-9) "1812년에 터진 전쟁은 영국이 대서양 연안을 봉쇄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그때까지 몇몇 주정부와 기업가들이 건설한 유료도로에 의존하던) 육상운송─군대를 이동시키거나 국가의 경제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화물을 운반하기 위한─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연방위원들은 이러한 경험과 1808년에 갤러틴이 내놓았던 제안을 반영해 국유도로체계의 건설 가능성을 숙고하기 시작했다."(176)


"역설적인 것은 유료도로의 시대에 종언을 고한 원인이 부분적으로는 많은 유료도로의 건설을 가능케 했던 바로 그 재정적 장치였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종류의 국가보조금으로 운영되는 주식회사가 그것이다. 주식회사는 수많은 종류의 공공 토목공사에 자금을 댈 수 있는 대단히 유연한 도구임을 입증해 보였다. 여기에는 하나의 운송방식으로서 유료도로를 결국 뛰어넘은 운하와 철도가 포함되었다."(178-9) 운하 건설과 증기선 개발은 "소비자들이 상품에 지불해야 하는 가격을 낮추어주었다. 비록 운하는 개별 주들 내에서 건설되었지만, 그것이 연결한 수로의 성격 때문에 주들을 경제적으로 서로 묶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갤러틴과 제퍼슨이 희망했던 바대로 운하는 이전까지 인구부족에 시달리던 시골지역의 농업과 제조업이 수익성을 갖도록 만듦으로써,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하거나 외국이 침입해 들어올 가능성을 더욱 낮추어주었다."(188)


"1860년이 되자 수백 개에 달하는 철도회사들이 미국 내에서 4만 8,960 킬로미터의 철도선로를 운행하고 있었다." "무겁고 부피가 큰 물품들─석탄, 밀, 가축, 심지어 철로까지─의 운송비용이 떨어지고 있었고, 이는 경제 전반에, 특히 정착지가 드문드문 존재하는 지역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미시시피 강 서쪽 지역들에 점점 빠른 속도로 정착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어떤 미국인들은 장거리여행을 통해 서로를 방문할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다른 어떤 미국인들은 한 곳에서 살면서 휴가는 다른 곳에서 보내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버터, 당근, 사과처럼 상하기 쉬운 식품류도 시장까지 먼 거리를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군대는 전장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남부동맹의 장군들을 당황케 했다. 일단 남북전쟁이 연방에서의 탈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자, 철도는 유료도로·운하·증기선으로 시작했던 국민국가 건설의 경제적 과정을 완결지었다."(206-8)


"성공적인 발명을 만들어내는 훌륭한 아이디어는 한 사람의 고독한 정신이 빚어낸 독특한 창조물일 수 있다. 그러나 그처럼 훌륭한 아이디어를 작동 가능한 실체로 전환하는 개발과정은 협력자들을 필요로 하며, 성공한 발명가들은 점차로 이러한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221) "19세기 말에 발명활동은 협력에 기초하는 것임을 의식적으로 깨달은 에디슨, 스페리, 이스트먼은 그러한 종류의 협력을 촉진하기 위한 전문연구소를 제각기 설립했다."(223) "1920년에는 제너럴 일렉트릭, 벨 전화회사, 웨스팅하우스 등등의 다른 회사들도 스페리와 이스트먼이 처음 걸어간 길을 좇아 이미 산업연구소를 설립해놓고 있었다. 독립발명가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고 기업발명가의 시대가 열렸다. 발명가들 사이에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그러한 필요를 처음 깨달았던 독립발명가들에 의해 하나의 제도인 산업연구소로 자리매김 되었다."(226)


"1870년에서 1930년 사이의 기간은 기업활동의 황금기였고, 경제적 선구자가 되기에 최적의 시기였다. 지방·주·연방 정부가 협력해 지원해준 덕분이었다. 미국 역사를 통틀어 이 시기만큼 미국의 각급 정부가 온갖 종류의 기업가들에 대해 그토록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던 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철도에 대한 토지불하처럼 "남북전쟁 이후 민간산업에 대한 정부의 원조는 더욱 광범해지고 정교해졌다." "규제는 최소한으로 억제되었고, 환경보호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거의 없었으며,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는 정부의 권한에서 완전히 벗어난 문제로 이해되었다." "최저임금 제도도 없었고, 위험한 장비를 다루는 사람들은 자격증을 갖춰야 한다는 요구조건도 거의 없었으며, 노동자들의 안전을 보호할 긴급한 필요도 없었다. 1906년까지는 광고 내용에 어떤 종류건 진실이 담겨야 한다는 요구조건도 없었다. 기업가는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누렸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를 행사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228-30)


"전前산업사회에서는 삶이 불안정하면 날씨의 변덕과 자연적 순환이 가져오는 위험에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흔했다. 반면 산업사회에서는 삶이 불안정하면 시장의 변덕과 사회적 힘들이 가져오는 위험에 책임을 돌리는 일이 많아졌다. 즉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개인들은 거대하고 복잡한 네트워크 속으로 모두 연결되었고, 서로서로에게 더욱더 의존하게 되었다."(258) "1860년경에는 이미 전신이 미국의 정치 및 경제 생활에서 중추적인 일부로 자리잡았고 1880년에 이르면 이는 더욱 확고해졌다. 신문들은 중요한 정보를 신속히 전송하기 위해 전신에 의존했다. 1847년에 터진 멕시코와의 전쟁은 빠른 뉴스 보도가 이루어진 최초의 전쟁이었고, 남북전쟁은 전신선로로 신속하게 전달된 전투정보에 의거해 군사전략이 짜여진 최초의 전쟁이었다. 흔히 '도금시대'로 불렸던 기간(1880~1900) 동안, 이제 막 번창하기 시작한 미국의 금융시장은 가격과 주문의 빠른 전송을 위해 전신에 의존했다."(263)


J. P. 모건, 릴런드 스탠퍼드, 제이 굴드,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찰스 크로커 같은 사업가들은 철도를 합병하면서 19세기 미국에서 최고의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경쟁하는 지선을 사들였고, 간선철도의 이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했으며, 지선이 간선과 합병될 때까지 지선철도의 주식을 사들이는 데 엄청난 투자를 했다. 이런 과정이 끝나자 이제 철도는 하나의 통합된 네트워크, 즉 기술시스템이 되었다."(267) "송유관 네트워크 역시 미국 경제와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에 광범한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말의 수십 년 동안 매우 많은 수의 미국인들─특히 대도시에 살지 않았던 사람들─은 석유산업의 산물 중 하나인 등유를 가정에서의 난방, 조명, 취사 용도로 이용했다." "20세기 초에 먼저 휘발유를 쓰는 내연기관이 나오고 이어 내연기관으로 움직이는 자동차 및 트럭이 등장하면서, 석유는 비단 미국인들의 노동생활뿐 아니라 여가시간에도 필수적인 조건으로 자리 잡았다."(275)


"전화는 (전신기사라는 중개인이 항상 있어야 하는 전신과 달리) 사용자들간에 직접적 통신을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전화는 음성통신의 한 형태였기 때문에 감정에 호소하기가 쉬웠는데, 이는 전신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277) "전기 시스템은 제각각 다른 사회적 목표와 경제적 전략을 가진 여러 개의 상이한 하부 시스템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화나 석유 시스템에 비해 훨씬 더 복잡했다. 그리고 그 복잡성 때문에 어떤 단일한 회사도 전기 시스템을 지배할 수 없었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전기 시스템은 그것의 산물인 전기 에너지가 표준화되었다는 사실에 일관성을 갖게 되었다. 1910년이 되면 거의 모든 발전회사들(점차 전력회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이 초당 60사이클(60Hz)의 교류전류로 공급하고 있었다. 이는 모든 가전제품이 일관된 사양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했고, 동시에 모든 송전설비가 잠재적으로 서로 연결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283-4)


"산업화가 미국인들에게 미친 영향에 관한 어떤 일반화도 미국인들을 직업, 성별, 인종, 계급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서는 틀린 것이 될 수밖에 없다."(297) "예상치 못한 결과의 법칙이라 부를 만한 것에는 그에 뒤따르는 명제가 있다. 만약 새로운 기술의 즉각적 이득이 분명하다면(새로운 수확기나 새로운 쟁기가 가져올 비용 감소와 수확 증가라는 즉각적 이득은 19세기에 농장을 소유한 많은 가족들에게 의문의 여지없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그로부터 시차를 두고 발생한 손해에 대해 기술을 비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특히 기술 외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다른 원인들이 존재할 경우 그렇다. 그래서 가격하락에 맞서 발버둥 치던 19세기의 농장가족들은 자신들이 처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철도, 제분소 주인, 대도시 상인, 타락한 정치인들을 비난했지만 그들이 가진 써레, 드릴, 탈곡기를 비난하지는 않았다."(305)


생산되는 상품의 질과 양에 상관없이 손쉽게 대체될 수 있는 미숙련노동자들과 달리 "숙련노동자들에게 1870년에서 1920년 사이의 기간은 행복한 시간이 못 되었다. 기계화는 작업장 소유주에게 축복이었던 만큼이나 작업장 노동자들에게 독으로 작용했다. 소유주들에게 기계화는 생산성과 (종종) 수익 모두의 증가를 의미했다. 노동자들에게 이는 흔히 탈숙련화를 의미했다. 자신의 숙련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것을 얻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던 사람들에게 이는 결코 달갑지 않은 과정이었다."(307) 건설업자들이 최소 비용과 최소 시간만을 고려하여 반半숙련/미숙련노동자들을 고용하자 "한때 그토록 견고해 보였던 사회적 위계의 사다리─젊은이가 도제생활에서 마스터의 지위까지 오르게 해주었던─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탈숙련화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목공의 전통 그리고 마스터와 직인들 모두가 품고 있던 전통적 기대는 이미 불안정해졌다."(310-11)


"산업화의 첫 번째 단계는 평균적인 미국인의 생활수준을 크게 높여준 다양한 혁신들을 미국 가정에 도입했지만, 여성이 가정에서 해야 하는 일의 양을 크게 줄이지는 못했다. 남성과 아이들은 일을 면제받을 수 있었고 학교로, 번창하는 공장으로, 사무실로 나갔다. 반면 성인 여성들은 쉽게 일을 면제받을 수 없었다. 설사 주철 스토브와 주석 빨래통, 수도시설과 가스램프, 깔개 청소용 솔과 페달로 움직이는 재봉틀을 집에 들여놓았다 하더라도, 여성들은 여전히 몹시 고된 노동이 집에 잔뜩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336) "공장의 일자리는 지루하고 보수도 열악했지만, 많은 젊은 여성들은 가사서비스보다는 공장노동을 선호했다. 공장노동자는 하루 일이 끝나고 나면 그녀의 삶은 자신의 것이었지만, 가사하인은 2주에 하루만 쉬면서 매일 24시간 내내 주인의 부름에 응해야 했다. 공장노동자는 그녀 또래의 남녀들로 구성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지만, 가사하인은 고립돼 있었다."(338-9)


"기술에 대한 관념은 자연, 사회적 지위, 숙련이라는 중요한 범주들과의 관계 속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범주들은 이 외에도 많이 있다. 가령 기술은 성별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어떤 기술들(강철대들보)을 본래 남성적인 것으로, 다른 어떤 기술들(요리용 스토브)을 본래 여성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기술은 또한 신에 대한 관념과의 관계 속에서(인간이 다른 네 손가락을 마주볼 수 있도록 엄지손가락을 갖도록 창조된 이유는 신이 인간을 도구 사용자로 만들려 했기 때문인가?), 또 정치에 대한 관념과의 관계 속에서('정부기제'니 '권력분립'이니 하는 중요한 표현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의미를 갖는다. 자연, 사회적 지위, 숙련, 성별, 신, 정치에 관한 이 모든 관념들은 서로 연결돼 있고, ('기술'이라는 단어가 통상적으로 쓰이기도 전인) 산업화 초기와 산업사회 발달기에 기술의 지성사의 구성요소를 이루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348-9)


"콕스나 해밀턴, 그 외 이들처럼 생각한 사람들은 산업화가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신에 의해 온전히 예정된 것이라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또한 물과 증기에서 동력을 얻는 기계들을 구비할 그 모든 공장들에서 누가 일해야 하는가에 관한 신의 뜻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바로 여성들과 아이들이었다. 왜 그럴까? 산업화된 경제에서도 농부들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작은 남성의 일이었고, 공장을 짓고 기계를 발명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반면 기계를 돌리는 것은 여성이나 아이들에게 적합한 일이었다. 그들은 결국 농업에서 필수적인 (남성) 노동자들을 빼내 오지 않고도 그런 노동을 맡길 수 있었고, 들판에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밤 시간에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결국 미국이 건국된 직후 기간 동안 신, 자연, 정치, 성별, 사회적 지위의 개념은 이미 기술에 대한 관념과 연관되어 있었다. 아직 그 단어가 널리 쓰이기도 전에 말이다."(353-4)


"어떤 관념이 매우 강력할 때는 심지어 논쟁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때때로 이를 수용한다. 그래서 남북전쟁을 전후한 수십 년 동안 산업화 옹호자들 일부는 낭만주의자들의 관념을 일부 받아들였다." "동일한 경향─산업화 지지자들이 낭만주의 관념을 일부 받아들이는 것─은 산업화를 좋아하고 그것이 계속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탈숙련화의 문제를 다룬 방식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산업화의 옹호자들은 낭만주의자들의 비판에서 '기계화된 인간'에 관해 지적한 부정적인 사항들을 인정하면서도, 19세기 후반이 되면 산업화가 결국에 가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해방할 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산업화와 해방 사이의 연결고리는 번영이 될 터였다. 그러한 연결고리는 19세기 말에 쓰인 수많은 기술 유토피아의 중심주제였다. 기술 유토피아란 기술이 인류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준 사회에 대한 가상적 설명이었다."(357-9)


"테일러와 그 제자들은 노동과정이 재설계되고 노동자들이 성과급을 지급받으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소기업가로서 시간을 스스로 관리하는 과거의 장인 같은 존재가 될 거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 숙련화가 되는 것이다. 또한 과학적 관리자들은 효율의 증대가 산업노동을 노동자들에게 더 쉽고 즐거운 것으로 만들어줄 것이고 그러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낭만주의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업무에서 창조성을 발휘하고, 수동적인 노동자 무리와 관계를 끊고, 임금과 지위를 향상시키는 식으로 말이다."(362) 19세기 말의 산업 옹호자들은 '노동, 자존심, 창조성, 예술성, 자부심, 숙련, 자유, 남자다움, 독립성'과 같은 낭만주의자들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산업기술이 보통 사람들을 위한 번영과 물질적 안락을 창출할 거라고 주장했다. "이는 때때로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불린 일단의 관념들이기도 하다."(364)


"정부기구들이 기술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식에는 적어도 일곱가지가 있다. 특허, 관세, 규제, 교육, 연구, 건설, 소비가 그것이다. 군대는 특히 뒤의 네 가지에 집중적으로 관여해왔다."(420) "전쟁을 수행하는 데 연구개발이 중요함을 인식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새로운 조직의 창설을 승인했다. 과학연구개발국(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 OSRD)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업무를 담당하는 민간기구로 만들어져, 정부─특히 군대─가 후원하는 (수많은 분야에 걸친) 모든 연구활동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에 따라 2차대전은 미국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전쟁에 거의 전면적으로 동원된 최초 사례가 되었고, 그 속에서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의 국가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산업체와 학계는 이 모든 노력에서 힘을 합쳤지만, 총책임을 맡은 것은 연구를 관리하고 비용을 대던 정부였다."(433)


"19세기 초에 과학과 기술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현저하게 다른 집단에 속해 있었고, 이는 곧 두 직업간의 차이가 상당히 분명했음을 의미했다. 과학은 대학과 박물관에 일자리를 가진 교육받은 계층의 사람들이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이었고, 기술은 작업장과 공장에서 훈련을 받고 숙련기술을 실행에 옮기는 장인들이 사용하고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5년 이후에 "과학연구에 드는 비용이 점점 상승하고 대학의 교수로 있는 과학자들이 점점 외부의 연구자금에 의존하게 되면서, 한때 과학과 기술 사이에 놓였던 선명한 경계선은 다소 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연구가 점차 복잡한 기계장치들(예컨대 선형가속기와 전자현미경)과 기계에 기반한 과정(예컨대 겔 전기영동과 컴퓨터 모델링)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손을 써서 일하는 사람과 머리를 써서 일하는 사람 사이의 오래된 구분이 상당히 의심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503-4)


1906년부터 옥수수 교배 실험에 착수한 이스트와 셜은 "모두 과학자였고 그들의 실험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것이었다. 이스트는 옥수수의 특성들 중 어떤 것이 우성이고 어떤 것이 열성인지를 알아내고 싶어 했고, 셜은 옥수수에서 어떤 특성이 멘델이 찾아낸 단위특성(씨앗의 색깔이나 형태 같은)에 해당하는지를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이스트와 셜은 모두 대단히 실용적 목표를 추구하는 기술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엄청난 경제적 중요성을 지닌 작물에 멘델주의의 법칙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확인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들이 옥수수의 유전 패턴에 관해 알아내고자 했던 이유는 더 나은 옥수수 작물을 번식시키기 위해서였다."(509) " 잡종 옥수수의 역사는 우리에게 "기술과학은 사람들이 자연을 변형하기 위해 그것에 관한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이며, 역으로 자연에 관한 모종의 진리가 자연을 변형하려 애쓰는 실천 속에서 드러나는 활동"이라는 것을 알려준다.(513)


"잡종 옥수수는 가족농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소규모농장이 대기업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거대한 농장에 자리를 내주었던 과정과 연관돼 있다. 잡종 옥수수를 재배하려면 농부는 상업적 종자회사에 의지해야만 하며 종자를 구입하는 데 들어가는 추가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따라서 잡종 옥수수는 석유에서 뽑아낸 비료, 석유를 연료로 움직이는 트랙터, 전기로 열을 얻는 부화기, 온라인 기상 데이터베이스 등과 마찬가지로 성공적인 농장운영을 위해 자본이 더 필요하도록 만든 하나의 기술시스템이다. 요구되는 자본이 점점 많아질수록 수익을 내기 위해 경작해야 하는 토지 규모는 점점 커지며, 독립적으로 농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점점 적어진다." "이처럼 예상치 못했고 의도하지도 않은 결과들은 거의 모든 기술변화에 공통된 특징이며, 우리 모두가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특징이기도 하다."(514-6)


"모든 기술변화는 의도하지 않았고 예상치도 못한 사회적·윤리적 결과들을 야기하며, 설사 최고의 전문가들이라 하더라도 이를 예측해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울러, 적어도 1945년 이후부터는 설사 최고의 전문가들이라 하더라도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기술과학의 속성 때문에 사실상 모든 연구자들은 모종의 목표지향적 프로젝트에 종사하며 이런저런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이는 프로젝트에 영향을 미칠 정치와 정책들에 그들 모두가 일정한 기득권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술은 복잡하며, 우리 삶도 마찬가지이고, 우리가 함께 살아나가면서 만들어내는 역사 또한 그러하다. 미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복잡성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모든 기술변화는 심대한 사회적·윤리적 영향을 미치며, 우리는 그러한 영향에 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일을 전문가들에게 온전히 의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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