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당쟁사 1 - 사림정치와 당쟁 : 선조조~현종조
이성무 지음 / 아름다운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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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정치사

1. 사대부정치기 : 고려 말~조선 초 유학적 소양을 지닌 신흥 사대부들이 집권한 시기

2. 훈신정치기 : 세조대에 등장한 정란공신(靖難功臣)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훈구파가 집권한 시기(세조~중종)

3. 권신정치기 : 훈구파의 몰락과 사림파의 집권 사이의 과도기로서, 외척이 정치를 주도한 시기

4. 사람정치기 : 권신들이 물러나고 사림들이 집권하면서, 자기 분열과 붕당 간의 당쟁이 치열해지는 시기(선조~경종)

5. 탕평정치기 : 사림정치기에서 외척세도정치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영조, 정조)

☞ 이조정랑과 좌랑의 자대권과 당하통청권이 혁파(1741, 영조 17)되면서 사림정치의 토대 붕괴

6. 외척세도정치기 : 외척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가 득세하고 산림이 세도 가문의 시녀로 전락한 시기(순조~고종)


선조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명종조에 외척 심의겸의 도움으로 관계에 진출한 선배 사림들과 선조조에 새로이 등장한 후배 사림들 간의 갈등이 당쟁으로 비화했다.


(2) 주요 사건/인물

- 을해붕당(乙亥朋黨, 1575) : 주요 관직의 인사추천권을 가진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 심의겸과 김효원이 대립하면서 사림은 한양 동쪽에 사는 김효원을 따르는 동인과 서쪽에 사는 심의겸을 따르는 서인으로 갈라선다.

- 율곡 이이 : 철저하게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펴면서 동인과 서인을 중재했으며 종종 양쪽 모두에게 공격받았다. 서인과 가까운 교우 관계 때문에 사후에 서인의 종장(宗長)으로 추대된다.

- 기축옥사(1589) : 동인 정여립이 모반 혐의를 받다가 자살하자, 정철을 위시한 서인들은 정여립의 집에서 나온 문서들을 근거로 동인들을 역당으로 몰아 처단한다.

- 세자 책봉 논의(1591) : 동인 이산해가 선조에게 정철이 세자 책봉을 빌미로 선조가 총애하는 인빈 김씨와 그의 아들 신성군을 제거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고하여 서인을 정계에서 축출한다. 이때 동인은 서인을 대거 처벌해야 한다는 강경파와 범위를 축소하려는 온건파가 각각 북인과 남인으로 나뉜다.


광해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하여 각각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지원하다가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이 정권을 장악한다.


(2) 주요 사건/인물

- 사림 5현의 문묘종사 : 사림파는 도통(道統)을 천명하고 사림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1570년(선조 3)부터 사림 5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문묘(文廟)종사를 수시로 청하였고, 마침내 1610년(광해군 2)에 광해군의 윤허를 받아 이를 매듭지었다.

- 회퇴변척(晦退辨斥, 1611) : 정인홍은 이황과 불화를 겪던 자신의 스승 남명 조식이 사림 5현에 거명조차 되지 않자 문묘종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에 분노한 성균관 유생들은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렸다.

- 조목(趙穆)의 도산서원 종향 : 남인의 영수 유성룡은 관인으로서의 이황을 중시했고, 이황의 제자 조목은 향촌에서의 이황을 중시했다. <퇴계집> 간행을 둘러싸고 두 사람의 갈등이 깊어지자, 북인이 조목과 연대하여 유성룡을 파직시킨다.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그 반대급부였다.

- 폐비와 영창대군 제거 : 권력을 장악한 대북당은 광해군의 왕권을 위협하는 영창대군을 살해(1614)하고 그의 모친인 인목대비를 폐비(1618)하여 서궁에 유폐시켰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대북 실세들간의 권력 다툼과 전횡은 서인들의 반정을 초래하게 된다.


인조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서인이 이를 갈고, 남인이 원망을 품고, 소북이 비웃는’ 대북정권의 독주는 결국 인조반정으로 막을 내린다. 반정 후 서인은 남인과 소북 일부를 야당 삼아 연립 정권을 수립한다.


(2) 주요 사건/인물

- 공서와 청서 : 반정공신들이 국정을 전단하며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챙기는 데 몰두하자,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서인의 한 갈래인 이이와 성혼의 문인들이 공신들의 전횡을 비판했다. 공서(功西)와 청서(淸西)로 나뉜 두 세력 갈등은 인조 7년을 전후해 노서(老西)와 소서(少西) 대립으로, 다시 병자호란의 와중에 척화와 주화 대립으로 이어진다.

- 원종 추숭(1635) : 할아버지 선조를 계승한 인조는 부친 정원군을 추숭하고자 했다. 공신을 대변하는 산림 박지계는 인조를 지지했고, 조신을 대변하는 산림 김장생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불확실한 왕통 문제로 몰락한 광해군의 사례를 목도한 인조는 자신의 왕통(王統)과 종통(宗統)을 모두 정통으로 확립하고자 했고 결국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한다.


효종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효종조의 서인은 훈구세력을 대표하는 낙당(洛黨)과 원당(原黨), 그리고 김육과 김집을 대표하는 한당(漢黨)과 산당(山黨)으로 나뉘어졌다. 한당은 청서의 후인들이고, 산당은 사계(沙溪) 김장생 문하들로 구성된 호서산림들이다.


(2) 주요 사건/인물

- 한당과 산당의 대립 : 붕당의 폐해를 빌미로 낙당과 원당이 몰락한 뒤 경화사족으로 구성된 관료지향적 집단인 한당과 도학을 지향하는 유학자 집단인 산당은 대동법 시행(한당의 김육 주장)과 인재 발탁(산당의 김집 주장) 등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 북벌론 : 북벌의 명분은 복수설치(復讐雪恥, 명나라의 원수를 갚고, 삼전도의 치욕을 설욕하자)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북벌의 수단에서 효종은 양병과 군비 확장을, 송시열은 민생 안정과 군덕(君德)을 우선시하면서 각자 왕권 강화와 도학 이상의 실현이라는 다른 꿈을 꾸었다.


현종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효종의 급작스런 죽음과 상례를 둘러싼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예송논쟁은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살아 있는 판국에 왕위 계승의 정통성으로 비화할 수 있는 문제였다. 


(2) 주요 사건/인물

- 기해예송(己亥禮訟) : 효종 사후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문제를 둘러싸고 1년복을 주장하는 서인 송시열과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 허목이 대립하는 와중에, 윤선도가 허목을 지지하면서 논의를 효종의 정통성을 둘러싼 당쟁으로 확장시켰다.

- 공의·사의 논쟁(1663) : 산당 김만균이 대의명분을 앞세워 청나라 사신 접대를 거부하자 한당 서필원이 개인의 입장보다 공무가 우선한다는 현실론을 주장하면서 당대에 팽배한 명분론에 일침을 가했다.

- 갑인예송(甲寅禮訟, 1674) : 효종비 인선왕후의 죽음으로 대왕대비 조씨의 상복 문제가 되살아났다. 현종은 왕의 직권으로 1년복을 선포하면서 기해예송 때 서인의 압력으로 달성하지 못한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9개월복을 주장한 서인 관료들을 정계에서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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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9세기, 인민의 탄생 - 조선 5 민음 한국사 5
김정인 외 지음, 강응천 엮음 / 민음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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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배층의 성리학에 대한 믿음은 강고했다. <허생전>에서 박지원은 "상인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상업을 하는 것은 결국 나라를 병들게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는 "만 냥의 돈이 어찌 도道에 도움이 되겠소." "덕이 있으면 사람이 저절로 모인다네." "나에게 재앙을 같다 맡기면 어찌하오?"라고 말하면서, 돈을 재앙으로 인식하고 있다. 상업을 포함해 실리를 추구하는 행위는 국부를 증진시키고 나아가 기민饑民을 구제하는 등 사회적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돈을 버는 것, 부를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린다면 오히려 재앙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지원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인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도리를 아는 양반이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동시대의 누구보다 더 상업의 유용성과 상업 발전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박지원조차 상인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다."(52)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이 되면 상업은 새로운 발전 단계로 나아갔다. 세도 정권은 상업에 대한 불간섭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대상인의 독점을 보장하고 이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거둬들일 수 있도록 장려했다. "포구를 중심으로 하는 포구 시장권과 장시를 중심으로 하는 장시 시장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전국적 규모의 유통망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장권을 기반으로 농촌 생산물이 농촌 장시를 통해 중간 도매상에게 매집되고, 이는 포구가 있는 산지 매집상에게로 모였으며, 다시 선상과 포구주인에 의해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운반되는 체계가 완성되었다."(46-7) 상업 발전과 더불어 수공업으로 생산된 상품들의 수요도 증가했다. "초기의 상인들은 수공업자의 원료와 제품을 매점함으로써 수요 증가에 따른 이익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거듭되면서 점차 스스로 상품 제조장을 마련하고 수공업자들을 고용해 상품을 직접 생산하는 단계, 즉 선대제로 발전했다."(38) 


# 독점 상인들과 대표적인 선대제 상품

1. 시전 상인 : 종이와 도자기

2. 경강 상인 : 조선造般 산업

3. 개성 상인 : 인삼 재배 및 홍삼 가공업


"상인은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양반 의식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보부상이다. 보부상은 사회의 천대에 맞서 자부심을 가지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노력의 하나가 바로 엄격한 규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 규율은 주로 성리학적 질서를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물론 동료의 불행, 질병, 죽음을 외면한 자들도 대상이었지만, 주로 부모에 불효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없는 자, 술주정한 자, 불의를 저지른 자, 언어가 공손하지 못한 자, 어른을 능멸한 젊은이 등이 대상이었다." "이러한 행동의 뒷면에는 체제에 순응하고 기회만 되면 사회가 용인하는 질서 속으로 편입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학농민전쟁이나 독립협회 해체 때 관의 '앞잡이'로 나서 농민이나 민중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재산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양반이나 지배 계층의 일원으로 합류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모습은 대상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53-4)


"18세기 말 이후 상인과 권력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주교사(임금이 거동할 때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설치였다. 1794년(정조 18) 주교사를 설치해, 경강상인들의 선박을 관리했다. 따라서 주교사 당상과 경강상인 사이에 결탁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도 높았다." "더욱이 18세기 말 이후에는 권력자들이 직접 상업에 투자하는 사례도 급격히 증가했다. 경강의 여객주인권을 궁방 권세가들이 많이 사들이고 있었다. 다시 말해 권력자들이 상인을 비호하는 단순한 결탁 관계가 아니라, 권력자가 직접 상업에 투자하는 사례도 빈발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도 정권하에서는 국내외 상업을 막론하고 독점 상업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폈다." "예를 들어 당시 영의정 김재찬은 1809년 흉년이 들어 서울의 미곡 공급에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에 서울로 반입된 곡물을 외방으로 유출하는 것을 금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59-61)


"19세기 조선 정부의 부세는 크게 토지에 부과되는 전정, 양인에게 부과되는 군정, 환곡 운영인 환정이 있었고, 이를 아울러 삼정이라 한다. 삼정은 총액제로 운영되었다." "조선 정부는 중앙 재정의 소요 경비를 기준으로 삼정마다 총액을 정하고, 매해 변동 상황에 대해 기계적으로 세액을 조정해 주었다." "문제는 각 군현에 할당된 세액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세는 실제의 풍흉과는 무관하게 책정되었고, 농작물 피해를 심하게 입어 세액이 면제되는 재결災結의 수량도 현실과 맞지 않았다. 군역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총액이 결정되면 양인들이 죽거나 도망가서 수가 크게 줄어들더라도 총액을 줄여 주지 않았다. 게다가 각 군현에 세액이 할당되면, 이를 백성에게 부과하는 것은 거의 향리의 손에 맡겨졌다. 향리는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수확이 잘된 논을 면세시켜 주고, 큰 흉년이 든 논에 정상 세액을 부과하곤 했다."(66-7)


"대상인의 독점 상업을 보호하는 세도 정권의 상업 정책과 매관매직으로 인한 삼정 문란은 중소 상인, 빈민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특히 중국 무역을 의주상인과 개성상인에게 독점시키면서 평안도의 중소 상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중소 상공인들은 이러한 정부 정책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기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 바로 그것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두 세력의 대립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난을 주도한 사람들은 당시 평안도의 지역적 시장권을 장악한 중소 상인층, 대청 밀무역을 중심으로 성장을 도모하던 잠상(밀무역업자) 세력이었다. 그들이 상대한 세력은 세도 정권을 배경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 간 유통을 통해 전국의 상권을 장악한 특권 대상인층, 그리고 대청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남기던 특권적 무역 상인이었다."(70-1)


쇄국을 견지하던 흥선대원군 정권이 붕괴하고 고종이 친정 체제를 출범시킨 후 "1876년 2월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국제조약이었다." 조약에 따라 "우선 영사재판권에 의한 치외법권이 인정되고 조계인 거류지가 설정되었으며, 기존의 부산 이외에 인천과 원산 두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국내시장 보호와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관세권을 상실한 조항이었다. 강화도조약 체결에 임했던 조선의 관료들은 여전히 사대교린적인 입장에서 조약 체결에 나섰다. 그리고 근대적 관세권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일본 정부는 수출입세 5퍼센트를 용인할 의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관세 무역을 용인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조선은 국내시장과 발달이 미약한 국내 산업의 보호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수단이자 주요한 정부 재정원으로 삼을 수 있는 관세 수입을 박탈당했다."(88-9)


낮은 관세의 물품들이 선박을 통해 대량으로 거래되는 "조일 무역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국내의 상품유통도 그 영향을 받아 전반적으로 변화했다. 첫 번째 변화로는 조선산 쌀, 콩 등 곡물이 주로 수출되고 자본제 면제품이 수입되는 수출입 무역 구조가 점차 형성되어 간 것을 꼽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조선의 재래적 상품유통망이 해체되고 점차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유통 구조가 형성되어 갔다." "마지막으로 외국 무역의 확대로 유통량이 증가하면서 점차 상품 생산 구조도 변화되어 갔다. 조선의 주된 수출품은 쌀과 콩 등의 곡물류였고 이들 상품은 국내 소비가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일본에 수출할 수 있었다. 그때문에 조선의 농업 생산 기반은 논에서는 쌀, 밭에서는 콩만을 경작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요컨대 무역의 확대는 조선의 생산 구조 자체의 변동을 가져와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식량 원료 공급지, 자본제 상품의 소비 시장으로 자리잡게 하였다."(91-2)


# 이어지는 불평등 조약 체결

1. 조미통상조약(1882.5)

2. 조청상민수륙장정(1882.8)

3. 신新조일통상장정(1883)

4. 조영수호통상조약(1883)


"19세기 중반 들어 조선 연안에 서양 선박의 출몰이 잦아지고 천주교가 확산되자 유림은 본격적으로 척사론을 제기했다. 척사의 선봉장이었던 이항로와 그의 문인들은 천주교는 물론 서양 과학기술 등도 일절 배척하면서 척사운동을 주도했다."(151) 북학의 명맥을 이어받은 재야지식인 "이규경, 최한기는 기본적으로 유교적 이념을 정신적 기준으로 삼으면서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는 동도서기東道西器적 변통론을 제시했고 서기 수용을 위해 적극적으로 통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의 손자이자 중앙 관료였던 박규수는 유교로 서양인들을 감화하고, 중화 문명으로 귀의하는 서양인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밝혔다. "개방적 태도를 지녔던 박규수는 뒤에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주도했고 한편으로는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을 지도해 개화당이 탄생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재야 지식인에 의해 맥이 이어지던 개방론이 박규수를 매개로 중앙 정치권에 접목되었다고 할 수 있다."(160-1)


"조선 지식인들 가운데도 1880년대 들어 일본에 건너가 문명개화론을 접하고 그에 동조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가장 열렬한 문명개화론자는 급진개화파와 친분이 깊었던 윤치호이다." "그는 일본을 조선이 추구해야 할 문명개화의 모델로 설정한 반면, 청은 문명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규정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인식은 급진개화파 인물들에게 공통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서양 정치 제도의 수용을 모색하는 등 동도서기론자들에 비해 서양 문물의 도입에 더 적극적이었지만 서양 종교도 긍정했다는 점에서 특히 동도서기론자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급진개화파의 등장으로 1880년대 초반의 지식계는 보수적 유생, 동도서기론자(온건개화파), 급진개화파가 분립하는 형국이 되었다."(168-9)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대하는 시각이 완연히 달랐던 세 집단에게 타협과 조율을 거쳐 위태로운 형국을 헤쳐나갈 역량을 기대하기란 애당초 무리였다. 


1882년 11월 고종은 기존의 통리기무아문 체제를 내무와 외무로 분리했는데 여기에는 여흥 민씨와 개화파라는 다소 이질적인 두 집단이 친위 세력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여흥 민씨도 기본적으로는 개화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김옥균 중심의 개화파와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특히 차이를 보인 것은 청에 대한 인식이었는데 여흥 민씨들이 친청적이었던 데 반해 개화파는 일본에 호의적이고 청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두 세력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던 "민영익이 결국 그의 가문 편에 섬으로써 김옥균과 갈라서게 되었고, 중요한 지원자를 잃은 김옥균은 결국 1884년(고종 21)에 갑신정변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갑신정변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이는 고종이었다. 고종을 지지하던 중요한 두 축이 동시에 무너짐으로써 정치적 기반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 청으로부터는 개화파와 연계해 반청적인 태도를 취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입지가 불안해졌다."(141-2)


"조선 사회에 만민 평등의 조류가 밀려들 때, 이를 정치라는 링 위에 올려 한 방의 강력한 펀치로 단숨에 해결하려는 욕망 역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욕망은 변란이란 이름으로 실현되었고, 이를 주도한 이들은 권력의 밖에서 권력을 갈망하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이 인민에게 던진 희망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새로운 세상을 이끌 정 도령'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예언을 담은 책이 <정감록>이다." "<정감록>을 세상에 전하고 나아가 스스로 정 도령이 되거나 정 도령의 출현을 돕겠다며 변란을 도모한 것은 권력의 바깥에서 소외감에 젖어 살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의사, 지관地官, 훈장 등으로 밥벌이를 연명하는 부류였다. 좌절과 고통만 안겨 주는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을 때 <정감록> 등 비기秘記류의 책이 주장하는 역성혁명은 더 없는 이념적 무기였다."(194-5)


"삼정(전정, 군정, 환곡) 문란은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낡은 조세제도와 관리의 부정부패, 비리가 결합해 일으킨 비극이었다. 그 근원적 원인은 19세기다운 제도로 나아가지 못하고 '옛 것'에 매달리게 만든 퇴행적인 정치, 즉 세도정치에 있었다." "본래 수령과 아전의 과도한 권력 행사를 견제한 것은 향회, 향약 등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지방 유지들이었다. 과도한 수세 부담을 조정하고 지방 관리를 감시함으로써 인민의 삶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불행히도 19세기 들어 이러한 지방 유지 주도의 향촌 사회 운영 원리는 무너져 갔다. 18세기 후반부터 수령권이 지방 유지의 권력, 즉 향권을 압도하면서 수탈이 더욱 번성했다." "19세기는 '탐학이 풍습'인 시대였다. 인민 항쟁은 호소할 곳마저 없어 종기처럼 안에서 곪던 데가 터진 것일 뿐이었다." "인민들이 관리의 부정부패를 합법적으로 호소하고 바로잡을 제도적 길이 막혔다는 점도 항쟁을 예고하는 징표였다."(201-2)


# 인민항쟁의 유형 : 조세/군역 저항, 도망(유민화), 횃불시위, 무기명 관청 투서, 집회 조직/등소等訴 운동(소장 제출), 봉기(무장 항쟁)


"(1860년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는 하느님을 때로는 유교적 용어인 상제上帝라 부르기도 했으나, 그가 말하는 하느님은 천주교에서 말하는 오직 하나의 신인 천주와 같았다. 최제우는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만 공경하라고 가르쳤다. 천주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느님을 내 몸 안에 모시고 있다는 것, 즉 시천주侍天主를 주장한 점이다. 이는 곧 내 안에 하느님이 있다는 것이고 결국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최제우에 이어 동학을 이끈 최시형은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일과 사물 안에도 하느님이 있다고 주장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경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최시형은 '하늘이 곧 나이고 내가 곧 하늘'이라는 천인합일의 평등적 주체로서 인간을 강조했다. 또한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을 대하기를 하늘처럼 하라'고 해 인간관계의 원리도 인간 존엄에 바탕을 둔 평등에 있다고 강조했다."(214-5)


"조선 정부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향해 진군하자 비로소 대대적인 개혁으로 성난 민심을 달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동시에 황토현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하자, 청에 원군을 요청했다. 동학농민군은 청일 양국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정부와 평화조약을 맺고 무장을 해제했다. 청일 군대가 조선 땅에 주둔할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청은 물론 일본도 조선 정부의 철수 제의를 무시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내정 간섭을 물리치고 진행된) 조선 정부의 독자적 개혁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6월 21일 새벽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했다. 무력으로 자신들이 요구하는 내정 개혁안을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 달 간 경복궁을 경비한 것은 일본군이었다. 일본공사관이 발급하는 증명서 없이는 궁궐 출입을 할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갑오개혁의 막이 올랐다."(226-7)


"(갑오개혁 당시 각종 개혁조치를 주도하고 의결하는 기관이었던) 군국기무처의 주요 구성원은 개화파 계열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반청·반反세도 사상이 강하고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제에 불만이 많은 한편, 사절단이나 유학생 등으로 일찍이 서양과 일본 문물을 접한 엘리트 관료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외국 공사관과 일정한 인연을 맺고 출세를 도모해 온 인물들로, 유달리 서자 출신이 많아 '소실小室파'로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개혁에 필요한 구상과 전문가적 소양을 갖추었으나, 10여 년 동안 권력 핵심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막상 집권하고 보니 권력을 뒷받침할 군사적·경제적 기반이 없는 것은 물론 인민의 지지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에게 집권의 기회를 준 일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228) "개화파 내각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나서야 비로소 1895년(고종 32) 1월 7일에 갑오개혁의 기본 노선을 제시한 <홍범 14조>를 발표했다."(230)


# 갑오개혁에 반영된 동학농민군의 요구

1. 노비 문서 소각

2. 7종의 천인 차별 개선, 백정이 쓰는 평량갓 없앰

3. 젊은 과부의 재혼 허용

4. 무명의 잡다한 세금 폐지

5. 관리 채용시 지벌 타파, 인재 등용

6. 기존의 공채와 사채 전부 무효화


"서양 각국에서 정당과 의회를 주축으로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 꼴을 갖추어 가던 무렵인 1898년, 동아시아 최대의 정치 화두 역시 의회였다. 그해 일본에서는 1890년 제국의회 개원 이래 최초의 정당 내각인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이 들어섰다. 청에서는 강유위 등이 의회 설립을 요구하는 변법자강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한제국에서는 독립협회가 의회 개설 운동을 전개했다."(250)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긴 했지만 "보수파의 줄기찬 요구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에 역적이란 올가미를 씌우지는 않았다. 독립협회의 해산에 이은 탄압은 있었지만, 피비린내 나는 응징은 없었다. 세상은 그만큼 변해 있었다. 고종은 피의 응징 대신 체제를 다잡는 전략을 취했다. 이듬해인 1899년 대내외적으로 대한제국이 전제군주의 나라임을 공표하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를 선포했다. 아직 인민 주권의 시대는 오지 않았고 황제권은 더욱 공고해졌다."(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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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8세기, 왕의 귀환 - 조선 4 민음 한국사 4
김백철 외 지음, 강응천.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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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탕평의 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했다. 일례로 자신의 즉위와 함께 집권한 노론 강경파가 신임환국의 복수를 집요하게 요구하자, 영조는 이들을 쫓아내고 소론 인사들을 요직에 임명해 정국을 주도하게 했다(정미환국, 1727). "그러나 1728년(영조 4) 영조와 소론이 시도하는 탕평에 중대한 시련이 닥쳤다. 소론과 남인의 급진 세력이 인조 대 이후 최대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영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심유현 등 소론 과격파가 주도하고, 영남과 기호 지역에 살고 있던 남인과 소론 명문의 후손이 적극 가담했다. 이 사건을 당시 충청도 청주에서 반란을 이끈 이인좌의 이름을 따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하고,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무신란이 진압되고 노론이 재차 명분을 쥐게 되었지만, "영조는 흔들림 없이 소론 주도의 탕평을 견지했다. 한쪽 세력을 일방적으로 배제하는 바람에 무신란이 일어난 측면도 있다면서 더욱 더 소론 탕평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다."(42)


"탕평 정국에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한 노·소론 탕평파는 각각 자기 정파의 주류인 강경파를 흡수해 세력을 키우고자 했다. 그런데 노론 탕평파는 강경파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지만, 소론 탕평파는 그렇지 못했다. 소론 강경파는 탕평파의 행태가 노론과 다를 것 없다면 강한 반감을 가졌다." "(노론 강경파가 주장한) 소론 강경파 숙청을 둘러싼 대립 구도가 커져 가던 1749년(영조 25) 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되었다." "노론 강경파가 볼 때, (영조가 남겨 둔 문제는) 부친의 즉위를 방해한 소론 5대신을 숙청하고 그들을 비호하는 이종성 등 소론 강경파까지 단호히 처벌해 아들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었다. 세자는 그러한 요구를 받을 때마다 자신의 궁료로 포진해 있는 소론 강경파를 옹호하거나 영조에게 판단을 미루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바로 이때 탕평 정국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1755(영조 31) 1월 전라도 나주 객사에 조정을 비방하는 괘서掛書가 내걸린 것이다."(46-7)


# 을해옥사(1755) : 나주에 유배 중이던 소론 윤지가 조정을 비방하는 괘서掛書를 내걸었다가 처단된 후, 이를 축하하는 과거시험에서 소론 강경파를 칭송하는 자들이 또다시 조정을 비방하는 괴시권怪試卷을 제출하자, 격노한 영조가 500여 명에 이르는 소론 강경파와 관련자들을 참하고 유배시킨 사건


"을해옥사로 소론 강경파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는 소론 강경파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던 세자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세자는 노론의 압박을 받는 가운데 소론 강경파와 관계를 설정하고 신임의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 등의 문제로 상당한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다. 여기에 1757년(영조 33)에는 그동안 세자를 보호해 주던 숙종비 인원왕후, 영조비 정성왕후 등이 잇달아 사망했다." 왕실과 조정에서 빚어진 복잡한 갈등에 시달리던 세자가 결국 정신질환을 일으켜 각종 비행을 저지르던 "그 무렵 세자의 생모인 영빈은 세자를 만났다가 죽을 뻔했다면서 그대로 놔두면 언제 변란이 닥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라고 영조에게 알렸다. 영조는 이를 근거로 세자의 죄를 추궁하고는 결국 세자를 뒤주에 가둔 채 폐세자의 전교를 내렸다." "영조는 세자를 8일간이나 내버려 두어 결국 죽게 만들었다. 1762년(영조 38) 윤 5월에 일어난 이 사건을 '임오화변'이라 한다."(49-50)


"1775년(영조 51) 무렵 영조는 정신이 극도로 혼미해져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워졌다. 세손은 (자신을 여러차례 위험에 빠뜨리고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하는) 외척들과 두루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세손이라는 지위와 이를 보호하는 영조, 정순왕후 등 공적 계통에 의지하고 있었다." "영조는 통치의 한계를 절감하며 세손의 대리청정을 지시하는 전교를 내렸다. 세손도 이를 반포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홍인한이 대리청정을 반대하고 조정에 이 사안이 알려지는 것을 막는 바람에 세손의 대리청정은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신하가 대리청정을 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손은 정순왕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충성스런 신하를 물색해 홍인한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소론의 서명선이 그 역할을 맡았다. 홍인한과 정후겸이 역공세를 펴기도 했으나, 영조의 단호한 의지에 따라 대리청정이 결정되었다. 석 달 후 영조가 승하하고 세손이 보위에 오르면서 숨가빴던 정치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55)


"영조가 필생의 과업으로 인식한 것은 '양역 변통'이었다. 양역 변통이란 국가의 안위에 영향을 미칠 만큼 심각한 수준에 이른 양민의 신역을 개혁하는 것을 말한다."(59) 영조는 가호 단위로 양역을 징수하는 호전제戶錢制를 실시하면 양인의 세금이 줄어드는 대신, 양반은 아예 내지 않던 세금을 가호마다 내게 되니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관료들의 반발은 적지 않았다. 개혁을 주도하던 탕평 관료들조차 "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대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양인이나 양반이나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양인은 부유한 백성과 궁핍한 소민으로 계층 분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양반들 역시 벼슬 길에 나가거나 향촌에서 농장 따위 사업 경영에 성공해 경제력이 있는 계층과 몰락한 잔반殘班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양인과 양반 모두 경제력에 따른 재분류를 선행하지 않는다면 국가에서 세금을 안정적으로 걷기 어려웠다. 관료들은 바로 이 점을 우려했다."(70)


"과세 대상을 넓히는 유포론은 선무군관포라는 변형된 형태로 흡수되었고, 영조가 지지한 호전론이 좌절한 마당에 더 급진적인 구전론을 시행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따라서 남은 대안은 토지에 부과하는 결전론뿐이었다. 이미 전세와 대동미를 토지에 근거해 거두고 있는데 양역까지 토지에 부과하면 3중 과세의 혐의가 짙을 터였다. 그래서 결전론은 마지막까지도 고려 대상에서 비켜나 있었지만 다른 대안이 마땅치 않았다. 이미 화폐경제가 급진전된 상황에서 가호나 장정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해 봤자 가난한 자들로부터는 세금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빈부 격차가 커지던 조선 후기에 경제력의 척도인 토지에 과세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토지 소유자인 양반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결전의 시행은 피할 수 없었다. "양역 감면에서 결전에 이르는 이 개혁 입법들을 (백성들이 국가에 지는 역을 고르게 한다는 뜻에서) 균역법이라 한다."(73)


# 영조 대에 논의된 개혁안 양역4조

1. 유포론游布論 : 세금을 내지 않는 양인 장정을 찾아내 추징

2. 호포론戶布論 : 신분에 관계없이 가호마다 면포 추징

3. 구포론口布論 : 개별 장정마다 면포 추징

4. 결포론結布論 : 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 부과

☞ 면포를 뜻하는 포布 대신 동전을 뜻하는 전錢을 쓰기도 함


"영조 대에 이루어진 개혁은 정치의 탕평, 경제의 균역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민국'을 향한 영조의 의지가 가장 잘 드러난 치적은 따로 있었다. 흔히 영조의 세 번째이자 최대의 치적으로 꼽히는 준천濬川이 그것이다."(84) 18세기 조선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계층은 토지를 잃고 떠도는 빈민이었다. 이들이 거지꼴을 모면하려면 "자신의 노동력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했다. 그러한 품팔이 노동은 주로 경강 일대에서 이루어졌다. 용산, 마포, 서강 등 경강 나루에서 쌀, 땔나무, 각종 잡화를 배에서 내리거나 실어 나르는 노역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동력을 사고파는 행위를 '고립雇立'이라 하고, 대가를 받고 품을 파는 품팔이꾼을 '고정雇丁'이라 했다."(90) 그들은 개천가에 움막을 짓고 모여 살고 있었다. "준천은 바로 이들 빈민을 품고 그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 시행된 것으로, 노비까지 백성으로 끌어안으려는 영조의 민국 구상에서는 핵심에 자리한 사업이었다."(84)


# 준천 사업(1760) : 총 57일간 공사인력 21만 명, 공사대금과 임금 전錢 3만 5000민緡, 쌀 2300석을 투입하여 청계천 바닥을 긁어내고 하천에 놓인 다리를 보수하며, 하천 양안에 축대를 쌓아 천변 주민의 안전을 도모한 거대한 공공 근로 사업


"북방의 여진족이 청 제국의 기치를 들고 쳐들어온 병자호란 이래 북쪽이라면 손사래를 치던 조선 사회에 ‘북학’이 등장했다."(107) "의리를 중심에 두는 노론의 태도는 호란에 따른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데 분명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작용도 드러났다. 조선이 유일한 문명국가라는 자부심은 어느 순간 조선의 문물만이 의미 있다는 독선주의, 다른 국가의 문물은 볼 것이 없다는 배타 의식으로 변질되었다." "노론에서 (이러한 태도를 반성하는) 목소리를 낸 대표적 인물이 홍대용과 박지원이다.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는 풍요로운 경제생활을 강조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이었다. 홍대용은 "성리性理란 별것 아니라 곧 나날의 삶에 필요한 일용日用에 흩어져 있다."라며 성리를 일용의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박지원은 독서를 하고 학문을 하는 것은 실용에 쓰이느냐 실용에 쓰이지 않느냐의 구분이 있을 뿐이라며 공허한 이론만 내세우는 성리학자들의 태도를 비판했다."(10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의리학을 중시한 유학자들이었다. 홍대용은 청에서 성현의 자손들이 머리를 깎이고 호복을 입는 등 예악 문물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했고, 박지원은 조선이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쓰는 데 상당한 자긍심을 가졌다. "이희경은 명청 교체를 큰 도둑(이자성)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주인(명)이 집을 버리고 도망치자 먼 곳에서 온 용기와 힘이 출중한 자(청)가 도둑을 쫓고 처자식을 데리고 와 거주하게 된 상황으로 비유했다. 청은 명을 멸망시킨 주범이 아니라 오히려 명에 침입한 도적 이자성을 내쫓아 준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빈집을 차지한 청이 전 주인 집의 기구와 법도가 훌륭한 것을 보고 감탄해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 문물이 다름 아닌 중화 문물이라는 것이다. 박지원, 박제가, 이희경 등은 하나같이 청 문물이 중화의 유제를 간직한 것이라 강조하면서 청 문물을 수용해도 될 근거를 마련했다."(119)


"북학파가 청 문물에 대한 관심에서 중국을 방문하던 그때 다른 이유로 청을 찾는 이들이 있었다. 1783년(정조 7)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연행한 부친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다녀온 이승훈이 그러한 인물이었다. 그가 중국에 간 목적은 천주교를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경에 간 이승훈은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인 최초 영세자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들이 대부분 남인이었다는 사실이다."(127) 서울 주변의 경기 일대에 살던 근기남인의 학풍을 계승하고 확장시킨 인물이 이익이다. 이익은 천주교에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그의 문하는 천주교를 적극 수용한 권철신-정약용 계열과 천주교에 반대해 척사론을 제기한 안정복-황덕길 계열로 분화했다. 권철신 계열은 다분히 탈주자학적 학문 태도를 견지하다가 천주교를 수용한 데 반해 안정복 계열은 보수적 주자학풍으로 회귀하면서 천주교 배척에 나섰다."(130-1)


"천주교와 성리학의 갈등은 천주교 측이 유교의 예제禮制를 거부한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폭발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사는 진사 출신 윤지충이 어머니의 신주를 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이른바 '진산사건'이 발생했다." "진산사건은 심각한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짙었다. 윤지충이 정약용 형제의 이종사촌으로, 정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를 수용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정조는 천주교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정치적 쟁점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어렵게 여러 정파를 망라하는 탕평 정국을 이끌어 냈는데, 남인이 천주교 문제로 공격을 받게 된다면 그간의 정치적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는 천주교를 믿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일 뿐 남인과는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다. 또 노론이 순정하지 못한 문체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아(문체반정) 노론이 남인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140-1)


"남인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축출된 이후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 있었지만, 정조의 정치적 배려에 힘입어 정계에 복귀했다.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를 발탁하려는 정조의 계획은 마침내 1788년(정조 12) 삼정승에 노론, 소론, 남인을 안배한 일종의 연립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결실을 맺었다. 정조 자신도 '붕당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의미 있는 조치였다. 이름 있는 가문 출신도 아닌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우의정에 발탁한 것은 그야말로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중인 이하 계층도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이들은 서얼 계층이었다. 그들은 사대부와 똑같이 벼슬길을 열어 달라는 통청通淸 운동을 전개했다." "신분이 낮은 숙빈 최씨의 소생 영조는 왕실로 보자면 서얼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서얼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1772년에는 <통청윤음>을 내려 서얼을 청요직에 등용할 수 있도록 했다."(149-50)


평민보다는 지위가 높았지만 양반 관직자와 비교해 차별에 시달리던 "중인 의식의 밑바탕에는 양반 문화에 대한 동경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위항문학 활동은 그러한 동경에서 전개된 측면이 크다. 그것은 하층민도 상층문화를 공유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시를 짓는 데 치중한 문학 행위는 기본적으로 양반 문화의 모방이라는 한계를 지닌 것이기도 하다. 더러 신분제를 비판하는 시를 지어 울분을 토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 발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중인의 의식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이때부터 선배들의 시사 활동을 계승하면서도 양반 문화를 모방하거나 자신의 신분을 한탄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사회변혁 운동의 전면에 나선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강위가 주도한 '육교시사六橋詩社'이다. 이 시사에서 활동한 중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가 개화운동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162-3)


"정조는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지었다. '모든 강에 비치는 하나의 밝은 달'이라는 뜻이니, 스스로 만백성을 밝게 이끄는 군주를 자처한 것이다. 이 자신감 위에서 그는 군주가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만백성을 통치하는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재위 기간을 바쳤다. 정조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 문제로 분열되었던 사대부 사회를 군주 중심으로 헤쳐 모이도록 해 활용 가능한 모든 인력을 국가 운영에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탁월한 능력과 기지로 이 과업은 거의 성공했고, 그동안 국가 운영에서 소외되었던 수많은 인재들이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안팎에서 일어난 변화를 모두 수용해 정조가 구상한 국가 체제로 끌어들이기에는 그의 재위가 너무 짧았고, 그가 가진 성리학적 세계관도 한계가 분명했다. 결국 정조는 1800년(정조 24) 다소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조선은 표류하기 시작했다."(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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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7세기, 대동의 길 - 조선 3 민음 한국사 3
문중양 외 지음, 강응천 엮음 / 민음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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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청 교체기 전후의 사건

1. 누르하치의 굴기(1583, 선조 25)

2. 임진왜란(1592)

3. 후금後金 건국(1616, 광해군 8)

4. 후금이 명에 선전포고(1618)

5.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제국 성립 선포, 조선 침략(1636)

6. 명 멸망, 산해관을 통과한 청이 북경을 접수(1644)


"광해군은 크게 세 방향에서 대후금 정책을 펼쳐 나갔다. 먼저 후금의 동향을 파악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조선의 내부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또 후금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취하면서 그들을 기미(상대를 견제만 할 뿐 직접 지배하지 않는 정책)하려 노력했다."(43) (1618년 누르하치가 이른바 일곱 가지 원한을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한 뒤 무순을 공격해 점령하자 명은 조선에 원병을 요구했다. 명의 원병 요구를 놓고) "광해군은 우선 파병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낸 주체가 명의 황제가 아니라 왕가수 등 신하라는 사실부터 문제 삼았다. 황제가 칙서를 내린 것이 아니므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광해군은 또한 조선의 약한 병력을 보내 봤자 명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내세워 파병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료들은 "조선이 명의 번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뒤, 조선이 원병을 파견하되 명의 지휘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45-6)


# 명군 총사령관 양호의 질타로 1619년(광해군 11) 1만 5000여 명의 병력 파견 / 심하전투에서 패전


"광해군은 (심하전투를 포함해 일련의 싸얼후 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한 후의 이른바) '전후 외교'에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당시 요동 등지의 명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조선이 고의적으로 항복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해군은 이 같은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와 관련해 광해군은 먼저 심하전투에서 전사한 김응하를 현창하는 사업을 벌였다." "김응하 추모를 통해 심하전투 당시 '조선군도 목숨을 바쳐 분전했다'는 것, '조선이 거국적으로 그를 추모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강홍립이 고의적으로 항복했다'고 여기는 명의 의심을 해소하려는 계책이었다." "광해군은 또 명이 조선에서 재차 원병을 동원하려는 것을 차단하는 데 부심했다. 광해군은 후금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도망병들의 견문 내용을 명에 알리는 한편, 조선군이 원정에 동참한 데 원한을 품은 후금이 보복 차원에서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49-50)


"명과 후금의 양단에 걸쳤던 광해군의 대외 정책은 서인이나 남인 신료들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샀다. 더욱이 광해군이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자행하고 경덕궁(지금의 경희궁) 건설을 비롯한 토목 사업에 집착하자 민심 또한 이반되었다." "1623년(인조 1) 3월 이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문제 삼아 김류, 이귀 등 서인들이 중심이 되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훗날 인조)이 주도한 정변이 일어났다."(57) 명은 "'인조와 새 정권이 명에게 충성을 다해야만 책봉해 준다'는 전제를 달고 있었다. 그나마 책봉을 결정하기까지 2년 이상 시간을 끌었다. 그 시간 동안 명은 '명분'과 '현실'을 놓고 고민한 끝에 '조선의 정변이 불법 찬탈임에도 불구하고 새 정권이 책봉을 간청하면서 오랑캐와 싸우겠다고 다짐하기에 봉전封典의 은혜를 베풀기로 했다'는 명분을 만들어 냈다. 명은 이제 조선에게 기존의 '재조지은'뿐 아니라 '봉전지은'을 베푼 존재로 떠올랐다."(59)


# 폐모살제廢母殺弟 : 서자 출신인 광해군은 즉위 후에 후환을 없애라는 대북파의 요구에 따라 영창대군(선조 말년에 인목대비가 낳은 아들)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시켰다.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로 칸에 오른) 홍타이지는 1627년(인조 5) 조선을 침략해 당면한 난제들을 돌파하려 한다. 그것이 곧 정묘호란이다.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도발한 목적은 복합적이었다. 가장 큰 목적은 '목에 걸린 가시'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또 조선을 협박해 생필품의 교역 루트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했다. 홍타이지는 조선 침략군의 사령관에 (독립을 꿈꾸던 사촌형) 아민을 임명했다. 그의 능력과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는 절묘한 인선이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군사력을 소모한 조선군은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금군은 순식간에 황해도까지 남하하고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했다. 후금군도 한계를 안고 있었다. 개전 초기 모문룡을 제거하는 데 실패한 데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배후에 있는 원숭환의 위협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후금군은 서울로의 진격을 멈추고 조선에게 화의를 제의했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과 후금은 화약을 체결했다."(62-3)


"후금과 화약을 맺은 조선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조 정권이 후금과 화친한 것은 '명을 배신하고 오랑캐와 화친했으므로 광해군 정권을 타도한다'는 인조반정의 명분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조선을 곤혹스럽게 한 것은 정묘호란 이후에도 명과 후금의 군사적 대결이 지속되는 사실, 그리고 양자의 싸움에서 후금이 계속 명을 이기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이 '부모국' 명, '형제국' 후금과 모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65) 1633년, 산동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명군 지휘관 공유덕과 경중명이 토벌군의 공격을 피해 후금으로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선군이 명의 편을 들고 후금군과 교전까지 벌이자 홍타이지는 격분했다. 정묘호란 이후 어렵사리 유지되던 양국의 화친 관계가 사실상 파탄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68)


"(1636년 마침내 제위에 오른)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결심하고 그 이유를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열었다. 홍타이지는 정묘년 맹약 이후 조선이 '저지른 과오'를 나열했다. '도망친 요민들을 명으로 넘긴 것', '명에는 병선을 빌려 주면서 후금에게는 그러지 않은 것', '공유덕 등이 귀순할 때 명을 편들고 후금은 돕지 않은 것', '인조의 유시에서 정묘년 화약은 부득이했으나 이제 대의로써 절교한다고 한 것', '조선인들이 맹약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와 산삼을 캐 간 것' 등을 조선 침략 명분으로 제시했다. 이윽고 12월 9일, 청군은 압록강을 건너 침략을 개시했다. 병자호란이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 조정이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한 사실을 인지한 홍타이지는 항복을 요구했다. 그들이 조선에 제시하는 항복 조건은 갈수록 가혹해졌다." 전란을 타개할 계책이 전무한 것을 깨닫자,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송파의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한다."(71-2)


"병자호란 이후 인조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청에 순응하는 자세를 취해다. 그는 항복 이후 척화신들을 조정에서 배제하고 최명길 등 주화파 신료를 중용했다. 나아가 '자강을 도모해 청에 대한 복수를 도모하자'는 신료들의 주장에 응답하지 않고, 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신료를 파직시키기도 했다. 1640년(인조 18) 청이 자신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해 원손元孫을 입송시키라고 했을 때에도 철저히 순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1643년(인조 21) 순치제順治帝가 즉위한 뒤 청이 소현세자를 조기에 귀국시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입조론 때문에 겁먹었던 인조에게 이제 소현세자는 아들이 아니라 '정적'이자 '경쟁자'로 보였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의심하고 감시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부자 관계는 파괴되어 갔다. 급기야 1645년 2월, 소현세자가 영구 귀국했을 때 인조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급사한다. 곧이어 세자빈인 강빈 역시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는 비극이 일어났다."(81-2)


"임진왜란 직후의 상품유통 경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다. 시전 체제처럼 국가의 통제 아래 있던 교역 체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반면 장시처럼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있던 교역 기구는 계속 성장해 이전과 다른 유통 체제의 형성에 접근하고 있었다." (상품유통 경제의 발전은) "한편으로는 농민층 사이의 경제력 차이를 벌려 농민층 분해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에서 쫓겨난 농촌 사회의 유민流民들에게 상업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기회를 제공했다."(120)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空名帖(성명란을 비워둔 임명장)을 함부로 찍어 내거나 납속책納粟策(곡물을 바치는 대가로 상이나 벼슬을 주는 정책)을 통해 면천을 남발하는 시책은 신분제의 문란을 가져왔다." "지배층 자신들이 살아남아야 노비도 부릴 수 있다는 논리로 왜군의 목을 베어 오는 천인에게 면천을 약속했다."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면서 또 많은 것을 가능케 했다."(121)


"(공물을 대납하고 대가를 받는) 방납防納의 메커니즘은 지방의 장시, 도성의 경시京市에서 공물을 사 들이는 행위를 통해 돌아간다. 이 행위의 주체인 방납인은 새로운 유통 구조 속의 상인층으로 등장했다. 방납인을 중심으로 하는 공물 방납의 확대는 한편으로는 불법적인 방납권을 통한 상업자본의 축적을 초래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장시의 확산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농촌 경제에서 상품유통이 지닌 비중을 증대시켰다." "방납인들에게 경제적 이익은 떨쳐 버리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당시 방납인으로 활약한 것은 권세가의 하인, 중앙관청의 서리胥吏 등이었다. 이들은 지방에서 바친 공물에 흠집이 있다는 식으로 퇴짜를 놓았다. 그런 다음 다시 준비할 공물을 방납인에게 본래 공물 가격보다 턱없이 높은 가격으로 구해서 바치게 했다. 방납의 폐단은 관청의 유력자와 결탁한 방납인에 의해 저질러졌다. 이에 따라 농민은 본디의 공물 가격에 비해 훨씬 많은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126-7)


# 모순을 더해가는 세제

1. 무너지는 조용조租庸調(전세·잡역·공납) 체제 : 대토지 소유자의 이해관계에 맞게 점차 대부분의 토지를 하등전으로 분류하면서 전세 비중 축소, 용조 비중 증가

2. 악순환 고리 : 재정악화 → 증세 정책 시행 → 전세는 그대로인 채 공물 압력만 가중 → 농민의 토지 이탈과 초적으로의 변신 → 세수 감소와 정치·사회적 위기 초래 → 재정 악화


1649년(효종 즉위) "김육이 (1608년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도입된 후 제도와 관련 시설 미비를 핑계로 정체 상태에 있던)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것은 그의 말대로 안민安民의식과도 관련이 있지만 정치적 위기감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의 근본이 되는 삼남 지방이 동요하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며 이 지역에서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김육의 주장에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이조판서 김집이 대동법 반대 진영의 선두에 나섰다. 김집은 아버지 김장생의 학맥을 이어받아 예학의 태두로 군림하며 문하에 많은 제자를 두고 있었다. 그는 공납제가 국왕에 대한 진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하며 공물을 쌀로 일원화하는 대동법 시행에 반대했다. 김육이 이를 반박하자 김상헌, 송시열, 송준길 등이 김육을 공격하며 김집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로써 대동법 논의는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 산당山黨과 김육, 신면 등 한당漢黨의 분열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137-8)


# 산당 : 향촌의 서원을 중심으로 결집한 세력 / 한당 : 한강 이북 도성에 거주하는 경화사족京華士族 세력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전 유목계 왕조들이 100년을 넘기지 못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청 또한 100년이 못 갈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다면 '홀로 남은 유교 문명국' 조선은 다시 밝아질 유교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식인들은 국내의 여러 질서와 문화를 철저히 유교식으로 정비하며 미래를 맞고자 했다. 정비는 유학에서 시작해 당대의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에 미쳤다. 유학, 특히 주자학의 성격부터 달라졌다. 주자학은 새 사회 건설의 이념이 되었다. 예학禮學이 중시되고, 학파에 뿌리를 둔 붕당이 형성되었다. 붕당의 정점에는 이념가인 산림山林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개인의 일상도 주자학적 예법에 따라 재구축되었다." 예송禮訟 논쟁이 이단 시비로 확대되는 장면은 "조선이 유교의 불씨를 보존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집단적 책임감을 전제하지 않으면 연출될 수 없었다. 그렇게 조선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전형적인 주자학 국가로 재탄생하고 있었다."(175)


유교에서 예는 "일상 행동의 기본일 뿐 아니라, 사회·국가·세계 질서의 근본으로 간주되었다." "주자학은 한발 더 나아가 예를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질서와 일치시켰다. "예를 행하는 데는 조화가 중요하다禮之用, 和爲貴."라는 <논어>의 구절에 대해 주희는 "예는 천리가 적절하게 행해진 것이고 인간 만사의 의식과 법칙이다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라고 해석했다. 이로서 예는 천리의 형상물이자 사회 운영의 기준이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주자학적 예법의 정착을 압박한 외부 요인이었다. 양 난을 겪는 과정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회 질서가 혼란해졌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의 재건을 두고 조선 지배층은 이미 정착하고 있던 주자학적 예법을 강화하는 방향을 택했다." "남인 학자 장현광이 "다스림에는 예교禮敎보다 더 앞서는 것이 없고, 학문은 예학보다 더 간절한 것이 없다."라고 한 발언에서는 예로써 사회 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볼 수 있다."(195-6)


적장자가 부친을 계승하는 종법 질서가 예법의 기초를 이루고 명분 질서를 고정하게 되면서 "외가의 비중이 약해진 자리는 부계父系 시조를 중심으로 구성된 본관本貫이나 본관 안의 특정 지파가 결속한 문중門中이 차지했다. 문중은 17세기 이후 공고해지기 시작했다. 문중은 시조나 뛰어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현창 사업 등을 통해 결속력을 다졌다. 또 제사를 위한 토지 등의 명목으로 문중 재산을 형성하고, 종계宗契·종회宗會 등 다양한 모임을 결성해 일종의 사회 조직으로도 기능했다. 향촌에서도 부계 성씨를 중심으로 한 동성 촌락同姓村落이 생겨났다. 본관이나 문중의 구성원들은 정기적으로 족보를 제작해 구성원들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동본同本 의식을 공유했다." "부계 친족 위주의 질서가 17세기에 대세를 이루게 된 이유는 종법을 중심으로 이완된 사회 질서를 재편하려 한 사회 구성원의 선택 때문이다."(200)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념화된 유교를 택했다. 주자학이 '주의화主義化'한 것이다. 이를 가장 일관성 있게 구축한 사상가는 송시열이었다. 그는 '오늘날은 송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와 같다'고 해 자신의 시공간을 주희의 시공간과 동일시했다. 또 '주자가 조정의 부름에 응했던 것은 복수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해 주희를 대학자뿐 아니라 중화 문화의 수호자로도 부각했다."(180) "송시열의 '주자 식으로'와는 다른 경로의 유교 문명을 구상한 지식인도 있었다. 주자학과는 다른 모델을 체계적으로 구상한 대표적인 학자는 유형원이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먼 옛날 이상 사회를 건설했다는 성왕聖王의 통치 시스템을 조선의 현실에 맞추어 제시했다. 고대 중국에서 시행되었다는 평등한 토지 제도인 정전법井田法을 근간으로 교육·군사·관료 시스템을 정비하자는 그의 주장은 이념보다는 공공 시스템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주자학보다 더 근본적이었다.(182)


"사대부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복수설치'(復讐雪恥)로부터 '북벌'로 바뀌어 간 것 역시 중화 의식과 관련이 깊다. 복수설치는 의리를 천하에 보여 수치를 씻고 잔존한 남명의 중국 복권을 돕는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북벌은 다르다. '벌伐'이란 말은 천자가 난적亂賊을 토벌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북벌은 남명조차 망했으므로 유일한 정통인 조선이 청을 토벌한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조선이 소중화나 중화로 특별할 수 있는 근거는 '유교 문화의 실현'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교는 보편 정신이자 문화이므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청, 일본 등도 유교 문화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중화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청이 한족을 지배하는 논리도 그 논리에 근거해 있었다. 명은 민심을 잃어 내분으로 망했고 천명을 얻은 청이 명을 위해 복수했다는 것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청은 명보다 더 뛰어난 내치로 민생을 안정시키고 있었다."(190)


새로운 국제관계가 안정기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장생에서 송시열로 이어지는 서인 산림은 주자학에서 강조하는 보편 원리를 중시했다. 주자의 <가례>는 의리와 예법의 일반 원칙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왕실도 적용 대상이었다. 송시열은 장유長幼라는 보편 원칙 앞에는 왕실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체이부정(體而不正, 아들이지만 맏이가 아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편 예법을 왕실에 관철할 것인지 여부는 국왕의 위상과 연동된 민감한 문제였다." "윤휴와 허목으로 대표되는 남인 산림은 생각이 달랐다. 의리와 예법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그들도 송시열과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의리를 대변하는 국왕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했다." "따라서 윤휴는 모든 신민은, 그가 왕의 어머니일지라도, 군주에 대해 동일한 예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허목은 종통을 이은 군주는 장유長幼의 차례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08-9)


# 예송논쟁

1. 기해예송(1659) :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벌인 논쟁

2. 갑인예송(1674) :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시어머니인 장렬왕후가 맏며느리에 해당하는 상복을 입을 것인가, 둘째 며느리에 해당하는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놓고 벌인 논쟁


"그러나 환국기를 지나면서 (17세기 주자학의 이상을 주도하던) 산림의 위상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붕당 사이의 대립과 논쟁이 격화함에 따라 산림이 공론이 아니라 자기 정파의 이해만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붕당정치의 대안으로 탕평 정치가 전개되고 국왕이 군사(君師, 국왕이자 사대부의 스승)를 자임하며 성왕을 표방하자, 산림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격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의 변화도 산림의 지위가 떨어진 원인이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도시의 문물이 흥기하고 학문이 전문화되어 갔으며 새로운 학문 풍조도 일어났다. 이런 변화 속에서 향촌에서 유교 경전 위주로 공부를 하던 산림의 사회 인식과 식견은 뒤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산림의 정치적 영향력은 영조 대에 현격히 축소되며, 정조 대에는 노골적으로 친왕적 속성을 드러내는 산림도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세도 가문의 식객과 같은 인물도 나와 산림은 점차 형식적인 지위로 전락해 간다."(222)


# 주요 환국

1. 경신환국庚申換局(1680) : 종친 복선군과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올라오자, 숙종이 남인 전체를 정계에서 도태시키고 서인 일색의 정권을 구성한 사건

2. 기사환국己巳換局(1689) :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희빈 장씨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정한 숙종의 결정을 비판하다가 서인 대다수가 파직되고 남인이 대거 기용된 사건

3. 갑술환국甲戌換局(1694) :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서로를 맞고변하자, 숙종이 새로 총애하던 숙원 최씨(영조의 모친)와 가까운 서인의 손을 들어준 사건

4. 신임환국辛壬換局(1721-22) : 신축년(1721)의 환국과 임인년(1722)의 옥사를 합쳐 부른 말. 노론이 경종의 병세를 빌미삼아 왕세제였던 연잉군(영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다가 정권을 잃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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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 조선 2 민음 한국사 2
한명기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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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사대부들은) 도덕적 자의식이 강한 사의 정체성보다는 국왕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관료적 지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16세기에 이르러 서서히 변해 갔다. 변화의 바람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하나는 과거제와 관련한 것이었다. 과거가 지배층으로 편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함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 응시생들의 숫자가 확대·누적되면서, 외형적으로나마 사의 모양새를 갖춘 독서인 층이 확대되었다." "변화의 또 다른 바람은 정부 안의 권력구조 개편을 통해서 불어오고 있었다. 중·하급 엘리트 관료인 청요직들이 공론을 내세우며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해 감에 따라 도덕적 권위와 함께 사 의식이 한층 더 강조되었다. 청요직들은 도덕적 권위에 근거한 언론言論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해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도덕적 가치와 권위가 하나의 권력으로 실체화하고 있었다."(30)


# 청요직 : 깨끗한 명성을 중시하는 청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과 정치적으로 중요한 관직이라는 의미의 요직(이조와 병조의 낭관, 의정부의 사인, 검상 등 관료 선발에 관여하는 자리)을 합친 말


"청요직들은 <홍문록>, '서경署經', '피혐避嫌' 등을 적절히 활용해 청요직 인선에서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장치들을 확보해 갔다. <홍문록>은 동료 평가에 기초한 홍문관의 자체적인 인선 명부라 할 수 있는데, 동료들의 평판이 인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특징이다. 서경은 대간에서 5품 이하의 관직에 임명된 관료들의 신원을 조사하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성종대부터 서경은 단순한 신원 조사에 그치지 않았다. 당사자의 명망과 도덕적 흠결 여부까지도 평가해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면 그에 대한 서경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임명을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혐은 어떤 혐의를 받는 관료들이 사직을 요청해 국왕의 처치를 받는 것을 말한다. 대간은 피혐을 특정 안건을 거부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특히 대간에서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헌부나 사간헌에 임명되면 피혐을 통해 끝까지 그의 임명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35-6)


즉위하자마자 성종의 장례 절차 문제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당 건립 여부를 놓고 "연산군과 대간이 격한 대립을 반복하는 동안 대신들은 다소 복잡한 양상을 보이며 우왕좌왕했다. 이는 성종대 이래 국왕이 대신들을 친왕 세력으로 적극적으로 유인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재상과 대신들은 직급상으로는 대간보다 상위에 있었지만, 도덕적 명분을 선점한 대간이 공론을 표방하며 대신들의 비리를 들추거나 불합리한 국정 운영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게 되자 그만큼 대신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태종대나 세조대처럼 대신들에게 도덕적인 흠결이 있어도 국왕의 신임을 내세워 대간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도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국왕의 대신 보호는 약해지는 가운데 대간이 공론의 소재처라는 위상까지 얻게 되자 대신들은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42-3)


조정의 분위기가 날로 험악해져갔지만 "청요직 인사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강개한 언론은 멈출 수가 없었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연산군의 허물을 묵과할 수 없었을뿐더러, 언관이 몸을 사리는 태도를 보였다가는 동료들 사이에서 자칫 소인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45) 그 결과 "연산군대에는 모두 두 차례의 사화가 일어났다. 연산군 초반 왕과 대간의 갈등이 격해지면서 발생한 무오사화와 연산군의 폭압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의 사초 문제에서 시작해 김종직 문인들을 붕당으로 규정하고 일부 대간들을 능상凌上의 명목으로 단죄한 사건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자의적인 국정 운영과 폐비 윤씨 문제가 결부되어 신료 전체가 치도곤을 당한 사건이었다. 두 사화의 공통점은 연산군 자신이 능상이라 부르던 조정 내 하극상의 분위기를 일소하려 했다는 점이다."(48)


연산군은 주색잡기에 탐닉하고 왕실의 정통성과 국왕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남발했을 뿐만 아니라 "문묘에 모셔져 있던 공자와 선현들의 위판位版을 태평관·장악원·서학 등으로 옮기고, 성균관 강당과 대성전을 흥청들과의 연회 장소로 삼았다." "그 밖에도 연산군은 사간원을 폐지하고 홍문관마저 혁파해 군주에 대한 간쟁과 왕이 들어야 할 수업 자체를 없애 버렸다. 또 사초를 검열해 자신에 대한 비평을 막았다." "결국 폭력을 극대화한 연산군의 통치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폭력으로 종말을 맞았다.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주도한 중종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폭력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어육漁肉이 되어 가는 생민을 구원한 거사'로, 연산군의 치세를 부정하며 성종대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반정反正이라는 말로 칭송되었다. 그러고는 모든 제도를 원상태로 되돌리면서 연산군을 폭군으로 규정하고, 그가 사문과 도덕에 씻을 수 없는 죄인임을 천명했다."(51)


"거사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폐위하고 정현왕후 소생의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가 바로 조선 최초의 반정 군주인 중종이다." 반정 공신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왕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종의 또 다른 노력은 연산군과 대비되는 반정 군주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중종은 도덕의 이름으로 집권의 정당성을 수식하고 그를 통해 신료와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자 했다." 중종은 연산군이 폐지한 각종 제도들을 성종대 모습으로 되돌리도록 명했으며 "충신·효자·열부·절부의 정표 가운데 무너진 것을 세우게 하고, 1511년(중종 6)에는 무려 2940절에 달하는 <삼강행실도>를 반포했다. 연산군의 집정으로 퇴락한 풍속을 삼강오륜을 밝힘으로써 회복하겠다는 포부를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도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적이 있지만 거의 3000절에 달하는 분량은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을 주었다."(56-7)


"조광조가 조정에 첫발을 디딘 것은 청요직들의 영향력이 크게 신장하여 국왕 및 대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1515년(중종 10)이었다." "조광조가 청요직들 사이에서 높은 신망을 얻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사회적 기강이 크게 퇴락한 상황에서도 그가 도학자로서 한결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성 청요직들을 압도하는 강직한 주론자主論者로 기능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는 당시 청요직 사이에서 가장 중시되는 자질로 평가받고 있었다."(63) "주론자란 대간 언론의 향방을 지휘하는 일종의 오피니언 리더였다. 조선 후기의 경세가 유수원은 조선 시대 첫 번째 주론자로 조광조를 꼽고 있는데, 이들 주론자는 청요직 연대를 통해 언론의 활성화가 일상화되는 상황에서, 대간 언론이 권력에 위축되지 않도록 독려하며 특정한 안건에 대한 언론의 개시와 종결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었다."(66)


# 신씨 복위 상소 사건(조광조의 논변 승리)의 의의

1.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세력이 조정의 실세로 등장

2. 청요직 내부에서도 직급보다 도덕적 권위가 우선시 됨

3. 공론 형성의 기제가 도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계기 마련


조광조와 기묘사림이 주도한 개혁은 "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시도되었다. 하나는 도덕적 가치의 확산을 추구하는 것으로,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적 질서에 바탕을 둔 사회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성리서들의 보급, 문묘 종사 운동, 향약의 보급, 사전祀典 체제의 정리, 여악의 폐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75) "개혁의 두 번째 방향은 '누가 정치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관료로 선발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퇴출하는 것이었다. 기묘사림은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새로운 인재들을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과거 시험의 한계, 즉 문장을 위주로 하는 시험 방식을 바로잡아 응시자의 성리학 지식과 도덕 수양을 중시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했다." "현량과의 시행은 조선 왕조 최초의 천거과라는 의의와 함께 도학에 소양을 가진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점을 시험제도를 통해 선언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77)


"중종은 조광조가 왕권을 반석에 앉혀 주리라는 판단에서 그를 발탁했다. 물론 중종이 도학자로서의 조광조의 학식과 인품, 그리고 이상을 향한 열정에 매혹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안한 자신의 왕좌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도교 의식 집행 기관인) 소격서昭格署 혁파와 (아무런 공도 없이 공신에 책봉된 자들의 거짓 공훈을 없애기 위해) 위훈 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하는 조광조를 보면서 자신과 그의 길이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광조를 신임하면 할수록 국왕인 자신의 권위보다는 도덕과 도학의 권위가 높아졌으며, 그것은 다시 자신의 권력을 제약했다. 간혹 성군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자신이 손에 쥘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와 기묘사림으로 대표되는 청요직 연대가 통제할 수 없는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현실적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 기묘사화가 일어났다."(82-3)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은 과거의 어느 임금 못지않게 도학 정치에 관심을 갖고 지치에 따른 통치를 펴고자 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제대로 뜻을 펴 보지도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인종의 뒤를 이은 국왕이 바로 명종이다. 명종대는 명종 자신보다도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시대로 더 많이 인식된다. 문정왕후의 치세에서 마지막 사화인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임꺽정의 난도 일어났다. 수많은 사림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떠났고 백성의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세조가 훈척의 세력화를 조장한 이래 공공의 선보다는 사익 추구를 더 밝히는 훈척 세력의 폐단이 가장 극성을 부린 시대가 바로 문정왕후의 치세였다." "훈척 세력은 (공납 비리에서 비롯되는) 사회 경제적 파탄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방 관아와 결탁해 토지를 넓히며 농민의 생활 터전을 빼앗았다. 지도층이 공공성과 도덕성을 상실한 조선 사회는 거세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102-3)


"16세기 조선에서 살아가던 보통 백성은 훈척 정치의 농단에 그대로 노출된 채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방납의 폐단 등 부세賦稅 제도의 문란 때문에 제대로 살길을 헤쳐 나갈 수 없었다. 훈척 세력은 토지를 넓히고 사행使行 무역(사절단이 외국을 오갈 때 이루어지던 무역)에 개입해 이득을 꾀했다. 게다가 연안 지역에서 개간할 수 있는 땅을 차지하고 백성을 동원해 간척하는 방법으로 대토지를 손에 넣었다. 지방 수령은 탐욕을 감추지 않고 공물의 방납 등을 자행하고 있었다." "임꺽정이 반란을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농민들이 땅을 잃어버린 데 있다. 훈척 세력과 내수사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넓혀 나간 데다 수령들이 부세 과정에서 탐학을 부리는 바람에 농민들은 경작할 토지를 잇따라 빼앗겼다. 살길이 없어진 농민들이 무리 지어 도적으로 변신했고, 그 도적들 가운데 유력한 이가 바로 임꺽정의 무리였다."(130-1)


한편 15세기 후반, 흉작기에 농촌 지역 주민들이 서로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는 장시場市가 정기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 무렵 농촌 사회에서 장시를 통해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각 지방 장시를 연결해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장악한 사상私商 계층이 성장한다.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시전 중심으로 재화가 유통되던 경기 지방에서도 장시가 자주 개설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장시가 읍치의 범위를 벗어나 산림 지대까지 확대되었다. 읍치란 지방 고을의 중심 공간으로 대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해안 지방의 경우 읍성이 없는 곳도 있었다. 행정이 행해지는 읍치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사직단 등의 제사 시설, 향교, 장시 등이 들어서게 마련이었다. 농업 사회인 조선에서 읍치를 벗어나 장시가 뻗어 나갔다는 것은 중대한 변화였다. 뿐만 아니라 인접한 장시들 간에 흡수·통합·이동 등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장시의 연계망이 형성될 기반도 마련되었다."(119-20)


16세기에 재인식한 새로운 사상으로서의 성리학은 "부계父系 남성 위주의 가족 질서, 붕당을 중심으로 한 사림 정치, 서원과 향약 등을 기반으로 한 향촌 질서 등 사회 전반을 가로지르는 질서의 원형을 제공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이 바로 이 시기, 16세기에 탄생한 것이다."(147) " 사림은 새로운 지배 이념으로서 성리학의 가치를 탐구하며, 성리학의 기본 경전인 <소학>과 사서삼경 등에 구결을 붙이고 한글로 풀이했다. 그리하여 이황의 <삼경사서석의>, 이이의 사서언해, 경서언해교정청의 <소학언해>·사서삼경 언해 등이 출현했다." 이와 더불어 16세기에는 "과전법이 사전의 지급 대상을 현직 관료로 제한하는 직전법으로, 다시 관에서 전조田租를 수취해 전주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로 변하며 해체해 가자 양반들의 경제적 지위가 불안정해졌다. 따라서 새로운 사상이었던 성리학은 조선 전기와는 달리 중소 지주층의 이념으로도 재발견될 수 있었다."(158-9)


# 16세기 이전의 현실 의례

1. 결혼 풍습 : 남귀여가男歸女家의 솔서혼率壻婚(데릴사위)이 일반적, 처가외동딸인 경우 처가의 제사를 물려받는 외손 봉사奉祀도 시행

2. 상속 제도 : 남녀 모두 똑같이 재산을 나누는 균분상속

3. 족보 기록 : 남녀순이 아니라 출생순으로 기록

4. 제사 풍습 : 아들딸이 돌아가면서 부모의 제사 시행


"역설적이지만 사림들이 새로운 사상을 만드는 데 몰두할 수 있었던 계기는 사화였다. 그들은 사화 때문에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향촌 사회에 머물며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은 정치적 탄압을 피해 주로 충청도 충주를 중심으로 남한강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공립 교육기관을 대체할 민간 교육기관인 서원에 주목하게 되었다."(167) "서원의 성립이 갖는 사회적 의의는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사족이 자율적으로 지역 언론을 공론화하고 도학적 모범을 보인 인물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사림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서원의 강학 활동을 통해 각 지역에서는 학파가 성립하고 재생산됨으로써 성리학이 융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지역사회에서 서원을 중심으로 사림의 공론을 결집해 사족 지배 체제를 확립·유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서원과 연결된 산림이 출현해 도학을 무기로 중앙의 정계까지 좌우할 수 있었다."(169)


# 서원과 더불어 사족의 지위를 강화한 지역 조직

1. 향회 : 향안에 등록된 양반 사족들의 정기 모임

2. 향안 : 부모와 처가 세 가문의 3대조 조상에 대한 심사를 통과한 양반 사족들을 등록한 명단

3. 유향소 : 관아 다음 가는 위상을 가진 향촌의 비공식적 기관


1565년에 즉위한 선조는 사림 중심의 정치 질서를 만들었다. "사림의 지지를 받으며 등극한 선조는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경사經史를 토론했다. 명종 때 여러 차례 징소徵召(임금이 특별히 부름)를 받고도 조정에 나오지 않던 명유名儒 이황에게는 예폐禮幣(경의를 표하기 위해 보내는 물건)를 극진히 해 나오도록 권유했다."(177-8) "이황의 <성학십도>,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 등 성학에 대한 이론서들은 이전의 제왕학과 달리 신하들이 제왕학의 기준점을 제시한다는 데 특징이 있었다. 특히 이 책들은 조선 전기에 중시된 <대학연의>와 달리 국왕을 사대부의 논리에 따라야 하는 존재로 파악해 조선 후기 사림 정치의 이론적 모델을 제시했다. 사림은 이러한 제왕학 이론을 실제로 경연과 같은 제도에서 적극 활용해 국왕에게 성학을 가르치고 또 이를 적극적으로 따르도록 유도했다. 조선 후기에 붕당정치, 예송禮訟 등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 변화한 정치사상에 힘입은 바 컸다."(181)


# 동아시아 7년 전쟁을 칭하는 한중일 삼국의 공식 명칭

1. 한국 : 임진왜란(임진년에 왜구들이 쳐들어와 벌인 난동)

2. 일본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벌 - 분로쿠게이초노에키(분로쿠·게이초 연간의 전쟁)

3. 중국 : 항왜원조抗倭援朝(일본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


# 동아시아 7년 전쟁을 바라보는 한중일 삼국의 시각

1. 한국 : 전쟁의 승패를 중시하여 침략자 일본을 물리친 조선의 승리와 대첩을 강조하고, 그것을 이끌어낸 무장과 의병들의 영웅적인 활약상 탐구

2. 일본 : 삼한 정벌론의 연장이자 '일본의 국위를 선양한 선구적인 쾌거'로 재조명하여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대외 팽창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

3. 중국 : 제1차 중·일전쟁으로 칭하여 청일전쟁 때 일본에 패배한 사실을 반성하는 한편, 조선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강조


# 동아시아 7년 전쟁이 끼친 영향

1. 한국 : 국토가 황폐화되고 기근·전염병·포로 등으로 인구 격감, 지배층의 권위 추락과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와 반감, 현실도피적인 사상 유행

2. 일본 : 지역의 군사 강국으로 자리매김, 조선에서 약탈한 인적·물적 자산을 바탕으로 근세 사회 발전의 초석 마련,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 수립

3. 중국 : 막대한 전비 조달을 위해 증세와 징집, 징발을 강행하면서 재정적자와 민심 악화, 요동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여진세력이 만주 지역에서 급부상


"전쟁 전부터 모화慕華 의식이 커지고 있던 참에 임진왜란을 맞아 명이 원군을 보낸 것은 조선과 명의 관계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1593년 1월 평양전투의 승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던 조선 지배층에게 '재조지은', 즉 망해 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 준 은혜로 인식됐다. 이제 명은 '상국'이자 '부모국'인 동시에 종사를 구해 준 '은인'으로까지 추앙된다." "선조는 전쟁이 끝난 뒤 논공행상할 때, 이순신 등 공을 세운 무장들을 제쳐 놓고 명에 청원사請援使로 다녀온 정곤수를 일등 공신이자 원훈元勳으로 녹공했다. 그것은 이순신을 비롯해 백성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무장들의 활약과 공로를 상대적으로 축소하려는 의도였다. 선조는 왜란 초반 의주로 파천했을 뿐 아니라 전쟁 극복에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다. 따라서 명군의 은혜를 강조하는 데에는 실추된 자신의 권위를 만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252-3)


임진왜란 참전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각종 반란을 계기로 명의 국력이 쇠퇴하고 요동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의 세력이 급속히 커지자 조선은 두 가지 난제에 직면한다. 하나는 건주여진의 군사적 위협을 막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을 이용해 누르하치를 견제하려는 명의 이이제이책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조선은 임진왜란 중에도 건주여진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와 서인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세력은 광해군이 내정에서 범한 실책과 더불어 명에 대한 배신을 정권 타도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명에 대한 배신이란 다름 아닌 재조지은의 배신을 의미했다. 이후 인조 정권의 대외 정책은 자연스레 친명의 방향으로 기울고, 이 과정에서 후금과의 관계는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 귀결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었다."(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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