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음 한국사 : 19세기, 인민의 탄생 - 조선 5 ㅣ 민음 한국사 5
김정인 외 지음, 강응천 엮음 / 민음사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조선 지배층의 성리학에 대한 믿음은 강고했다. <허생전>에서 박지원은 "상인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상업을 하는 것은 결국 나라를 병들게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는 "만 냥의 돈이 어찌 도道에 도움이 되겠소." "덕이 있으면 사람이 저절로 모인다네." "나에게 재앙을 같다 맡기면 어찌하오?"라고 말하면서, 돈을 재앙으로 인식하고 있다. 상업을 포함해 실리를 추구하는 행위는 국부를 증진시키고 나아가 기민饑民을 구제하는 등 사회적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돈을 버는 것, 부를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린다면 오히려 재앙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지원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인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도리를 아는 양반이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동시대의 누구보다 더 상업의 유용성과 상업 발전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박지원조차 상인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다."(52)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이 되면 상업은 새로운 발전 단계로 나아갔다. 세도 정권은 상업에 대한 불간섭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대상인의 독점을 보장하고 이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거둬들일 수 있도록 장려했다. "포구를 중심으로 하는 포구 시장권과 장시를 중심으로 하는 장시 시장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전국적 규모의 유통망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장권을 기반으로 농촌 생산물이 농촌 장시를 통해 중간 도매상에게 매집되고, 이는 포구가 있는 산지 매집상에게로 모였으며, 다시 선상과 포구주인에 의해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운반되는 체계가 완성되었다."(46-7) 상업 발전과 더불어 수공업으로 생산된 상품들의 수요도 증가했다. "초기의 상인들은 수공업자의 원료와 제품을 매점함으로써 수요 증가에 따른 이익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거듭되면서 점차 스스로 상품 제조장을 마련하고 수공업자들을 고용해 상품을 직접 생산하는 단계, 즉 선대제로 발전했다."(38)
# 독점 상인들과 대표적인 선대제 상품
1. 시전 상인 : 종이와 도자기
2. 경강 상인 : 조선造般 산업
3. 개성 상인 : 인삼 재배 및 홍삼 가공업
"상인은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양반 의식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보부상이다. 보부상은 사회의 천대에 맞서 자부심을 가지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노력의 하나가 바로 엄격한 규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 규율은 주로 성리학적 질서를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물론 동료의 불행, 질병, 죽음을 외면한 자들도 대상이었지만, 주로 부모에 불효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없는 자, 술주정한 자, 불의를 저지른 자, 언어가 공손하지 못한 자, 어른을 능멸한 젊은이 등이 대상이었다." "이러한 행동의 뒷면에는 체제에 순응하고 기회만 되면 사회가 용인하는 질서 속으로 편입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학농민전쟁이나 독립협회 해체 때 관의 '앞잡이'로 나서 농민이나 민중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재산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양반이나 지배 계층의 일원으로 합류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모습은 대상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53-4)
"18세기 말 이후 상인과 권력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주교사(임금이 거동할 때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설치였다. 1794년(정조 18) 주교사를 설치해, 경강상인들의 선박을 관리했다. 따라서 주교사 당상과 경강상인 사이에 결탁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도 높았다." "더욱이 18세기 말 이후에는 권력자들이 직접 상업에 투자하는 사례도 급격히 증가했다. 경강의 여객주인권을 궁방 권세가들이 많이 사들이고 있었다. 다시 말해 권력자들이 상인을 비호하는 단순한 결탁 관계가 아니라, 권력자가 직접 상업에 투자하는 사례도 빈발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도 정권하에서는 국내외 상업을 막론하고 독점 상업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폈다." "예를 들어 당시 영의정 김재찬은 1809년 흉년이 들어 서울의 미곡 공급에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에 서울로 반입된 곡물을 외방으로 유출하는 것을 금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59-61)
"19세기 조선 정부의 부세는 크게 토지에 부과되는 전정, 양인에게 부과되는 군정, 환곡 운영인 환정이 있었고, 이를 아울러 삼정이라 한다. 삼정은 총액제로 운영되었다." "조선 정부는 중앙 재정의 소요 경비를 기준으로 삼정마다 총액을 정하고, 매해 변동 상황에 대해 기계적으로 세액을 조정해 주었다." "문제는 각 군현에 할당된 세액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세는 실제의 풍흉과는 무관하게 책정되었고, 농작물 피해를 심하게 입어 세액이 면제되는 재결災結의 수량도 현실과 맞지 않았다. 군역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총액이 결정되면 양인들이 죽거나 도망가서 수가 크게 줄어들더라도 총액을 줄여 주지 않았다. 게다가 각 군현에 세액이 할당되면, 이를 백성에게 부과하는 것은 거의 향리의 손에 맡겨졌다. 향리는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수확이 잘된 논을 면세시켜 주고, 큰 흉년이 든 논에 정상 세액을 부과하곤 했다."(66-7)
"대상인의 독점 상업을 보호하는 세도 정권의 상업 정책과 매관매직으로 인한 삼정 문란은 중소 상인, 빈민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특히 중국 무역을 의주상인과 개성상인에게 독점시키면서 평안도의 중소 상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중소 상공인들은 이러한 정부 정책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기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 바로 그것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두 세력의 대립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난을 주도한 사람들은 당시 평안도의 지역적 시장권을 장악한 중소 상인층, 대청 밀무역을 중심으로 성장을 도모하던 잠상(밀무역업자) 세력이었다. 그들이 상대한 세력은 세도 정권을 배경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 간 유통을 통해 전국의 상권을 장악한 특권 대상인층, 그리고 대청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남기던 특권적 무역 상인이었다."(70-1)
쇄국을 견지하던 흥선대원군 정권이 붕괴하고 고종이 친정 체제를 출범시킨 후 "1876년 2월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국제조약이었다." 조약에 따라 "우선 영사재판권에 의한 치외법권이 인정되고 조계인 거류지가 설정되었으며, 기존의 부산 이외에 인천과 원산 두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국내시장 보호와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관세권을 상실한 조항이었다. 강화도조약 체결에 임했던 조선의 관료들은 여전히 사대교린적인 입장에서 조약 체결에 나섰다. 그리고 근대적 관세권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일본 정부는 수출입세 5퍼센트를 용인할 의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관세 무역을 용인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조선은 국내시장과 발달이 미약한 국내 산업의 보호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수단이자 주요한 정부 재정원으로 삼을 수 있는 관세 수입을 박탈당했다."(88-9)
낮은 관세의 물품들이 선박을 통해 대량으로 거래되는 "조일 무역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국내의 상품유통도 그 영향을 받아 전반적으로 변화했다. 첫 번째 변화로는 조선산 쌀, 콩 등 곡물이 주로 수출되고 자본제 면제품이 수입되는 수출입 무역 구조가 점차 형성되어 간 것을 꼽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조선의 재래적 상품유통망이 해체되고 점차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유통 구조가 형성되어 갔다." "마지막으로 외국 무역의 확대로 유통량이 증가하면서 점차 상품 생산 구조도 변화되어 갔다. 조선의 주된 수출품은 쌀과 콩 등의 곡물류였고 이들 상품은 국내 소비가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일본에 수출할 수 있었다. 그때문에 조선의 농업 생산 기반은 논에서는 쌀, 밭에서는 콩만을 경작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요컨대 무역의 확대는 조선의 생산 구조 자체의 변동을 가져와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식량 원료 공급지, 자본제 상품의 소비 시장으로 자리잡게 하였다."(91-2)
# 이어지는 불평등 조약 체결
1. 조미통상조약(1882.5)
2. 조청상민수륙장정(1882.8)
3. 신新조일통상장정(1883)
4. 조영수호통상조약(1883)
"19세기 중반 들어 조선 연안에 서양 선박의 출몰이 잦아지고 천주교가 확산되자 유림은 본격적으로 척사론을 제기했다. 척사의 선봉장이었던 이항로와 그의 문인들은 천주교는 물론 서양 과학기술 등도 일절 배척하면서 척사운동을 주도했다."(151) 북학의 명맥을 이어받은 재야지식인 "이규경, 최한기는 기본적으로 유교적 이념을 정신적 기준으로 삼으면서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는 동도서기東道西器적 변통론을 제시했고 서기 수용을 위해 적극적으로 통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의 손자이자 중앙 관료였던 박규수는 유교로 서양인들을 감화하고, 중화 문명으로 귀의하는 서양인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밝혔다. "개방적 태도를 지녔던 박규수는 뒤에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주도했고 한편으로는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을 지도해 개화당이 탄생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재야 지식인에 의해 맥이 이어지던 개방론이 박규수를 매개로 중앙 정치권에 접목되었다고 할 수 있다."(160-1)
"조선 지식인들 가운데도 1880년대 들어 일본에 건너가 문명개화론을 접하고 그에 동조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가장 열렬한 문명개화론자는 급진개화파와 친분이 깊었던 윤치호이다." "그는 일본을 조선이 추구해야 할 문명개화의 모델로 설정한 반면, 청은 문명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규정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인식은 급진개화파 인물들에게 공통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서양 정치 제도의 수용을 모색하는 등 동도서기론자들에 비해 서양 문물의 도입에 더 적극적이었지만 서양 종교도 긍정했다는 점에서 특히 동도서기론자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급진개화파의 등장으로 1880년대 초반의 지식계는 보수적 유생, 동도서기론자(온건개화파), 급진개화파가 분립하는 형국이 되었다."(168-9)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대하는 시각이 완연히 달랐던 세 집단에게 타협과 조율을 거쳐 위태로운 형국을 헤쳐나갈 역량을 기대하기란 애당초 무리였다.
1882년 11월 고종은 기존의 통리기무아문 체제를 내무와 외무로 분리했는데 여기에는 여흥 민씨와 개화파라는 다소 이질적인 두 집단이 친위 세력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여흥 민씨도 기본적으로는 개화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김옥균 중심의 개화파와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특히 차이를 보인 것은 청에 대한 인식이었는데 여흥 민씨들이 친청적이었던 데 반해 개화파는 일본에 호의적이고 청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두 세력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던 "민영익이 결국 그의 가문 편에 섬으로써 김옥균과 갈라서게 되었고, 중요한 지원자를 잃은 김옥균은 결국 1884년(고종 21)에 갑신정변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갑신정변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이는 고종이었다. 고종을 지지하던 중요한 두 축이 동시에 무너짐으로써 정치적 기반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 청으로부터는 개화파와 연계해 반청적인 태도를 취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입지가 불안해졌다."(141-2)
"조선 사회에 만민 평등의 조류가 밀려들 때, 이를 정치라는 링 위에 올려 한 방의 강력한 펀치로 단숨에 해결하려는 욕망 역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욕망은 변란이란 이름으로 실현되었고, 이를 주도한 이들은 권력의 밖에서 권력을 갈망하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이 인민에게 던진 희망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새로운 세상을 이끌 정 도령'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예언을 담은 책이 <정감록>이다." "<정감록>을 세상에 전하고 나아가 스스로 정 도령이 되거나 정 도령의 출현을 돕겠다며 변란을 도모한 것은 권력의 바깥에서 소외감에 젖어 살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의사, 지관地官, 훈장 등으로 밥벌이를 연명하는 부류였다. 좌절과 고통만 안겨 주는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을 때 <정감록> 등 비기秘記류의 책이 주장하는 역성혁명은 더 없는 이념적 무기였다."(194-5)
"삼정(전정, 군정, 환곡) 문란은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낡은 조세제도와 관리의 부정부패, 비리가 결합해 일으킨 비극이었다. 그 근원적 원인은 19세기다운 제도로 나아가지 못하고 '옛 것'에 매달리게 만든 퇴행적인 정치, 즉 세도정치에 있었다." "본래 수령과 아전의 과도한 권력 행사를 견제한 것은 향회, 향약 등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지방 유지들이었다. 과도한 수세 부담을 조정하고 지방 관리를 감시함으로써 인민의 삶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불행히도 19세기 들어 이러한 지방 유지 주도의 향촌 사회 운영 원리는 무너져 갔다. 18세기 후반부터 수령권이 지방 유지의 권력, 즉 향권을 압도하면서 수탈이 더욱 번성했다." "19세기는 '탐학이 풍습'인 시대였다. 인민 항쟁은 호소할 곳마저 없어 종기처럼 안에서 곪던 데가 터진 것일 뿐이었다." "인민들이 관리의 부정부패를 합법적으로 호소하고 바로잡을 제도적 길이 막혔다는 점도 항쟁을 예고하는 징표였다."(201-2)
# 인민항쟁의 유형 : 조세/군역 저항, 도망(유민화), 횃불시위, 무기명 관청 투서, 집회 조직/등소等訴 운동(소장 제출), 봉기(무장 항쟁)
"(1860년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는 하느님을 때로는 유교적 용어인 상제上帝라 부르기도 했으나, 그가 말하는 하느님은 천주교에서 말하는 오직 하나의 신인 천주와 같았다. 최제우는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만 공경하라고 가르쳤다. 천주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느님을 내 몸 안에 모시고 있다는 것, 즉 시천주侍天主를 주장한 점이다. 이는 곧 내 안에 하느님이 있다는 것이고 결국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최제우에 이어 동학을 이끈 최시형은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일과 사물 안에도 하느님이 있다고 주장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경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최시형은 '하늘이 곧 나이고 내가 곧 하늘'이라는 천인합일의 평등적 주체로서 인간을 강조했다. 또한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을 대하기를 하늘처럼 하라'고 해 인간관계의 원리도 인간 존엄에 바탕을 둔 평등에 있다고 강조했다."(214-5)
"조선 정부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향해 진군하자 비로소 대대적인 개혁으로 성난 민심을 달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동시에 황토현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하자, 청에 원군을 요청했다. 동학농민군은 청일 양국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정부와 평화조약을 맺고 무장을 해제했다. 청일 군대가 조선 땅에 주둔할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청은 물론 일본도 조선 정부의 철수 제의를 무시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내정 간섭을 물리치고 진행된) 조선 정부의 독자적 개혁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6월 21일 새벽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했다. 무력으로 자신들이 요구하는 내정 개혁안을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 달 간 경복궁을 경비한 것은 일본군이었다. 일본공사관이 발급하는 증명서 없이는 궁궐 출입을 할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갑오개혁의 막이 올랐다."(226-7)
"(갑오개혁 당시 각종 개혁조치를 주도하고 의결하는 기관이었던) 군국기무처의 주요 구성원은 개화파 계열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반청·반反세도 사상이 강하고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제에 불만이 많은 한편, 사절단이나 유학생 등으로 일찍이 서양과 일본 문물을 접한 엘리트 관료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외국 공사관과 일정한 인연을 맺고 출세를 도모해 온 인물들로, 유달리 서자 출신이 많아 '소실小室파'로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개혁에 필요한 구상과 전문가적 소양을 갖추었으나, 10여 년 동안 권력 핵심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막상 집권하고 보니 권력을 뒷받침할 군사적·경제적 기반이 없는 것은 물론 인민의 지지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에게 집권의 기회를 준 일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228) "개화파 내각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나서야 비로소 1895년(고종 32) 1월 7일에 갑오개혁의 기본 노선을 제시한 <홍범 14조>를 발표했다."(230)
# 갑오개혁에 반영된 동학농민군의 요구
1. 노비 문서 소각
2. 7종의 천인 차별 개선, 백정이 쓰는 평량갓 없앰
3. 젊은 과부의 재혼 허용
4. 무명의 잡다한 세금 폐지
5. 관리 채용시 지벌 타파, 인재 등용
6. 기존의 공채와 사채 전부 무효화
"서양 각국에서 정당과 의회를 주축으로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 꼴을 갖추어 가던 무렵인 1898년, 동아시아 최대의 정치 화두 역시 의회였다. 그해 일본에서는 1890년 제국의회 개원 이래 최초의 정당 내각인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이 들어섰다. 청에서는 강유위 등이 의회 설립을 요구하는 변법자강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한제국에서는 독립협회가 의회 개설 운동을 전개했다."(250)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긴 했지만 "보수파의 줄기찬 요구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에 역적이란 올가미를 씌우지는 않았다. 독립협회의 해산에 이은 탄압은 있었지만, 피비린내 나는 응징은 없었다. 세상은 그만큼 변해 있었다. 고종은 피의 응징 대신 체제를 다잡는 전략을 취했다. 이듬해인 1899년 대내외적으로 대한제국이 전제군주의 나라임을 공표하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를 선포했다. 아직 인민 주권의 시대는 오지 않았고 황제권은 더욱 공고해졌다."(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