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 18세기, 왕의 귀환 - 조선 4 민음 한국사 4
김백철 외 지음, 강응천.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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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탕평의 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했다. 일례로 자신의 즉위와 함께 집권한 노론 강경파가 신임환국의 복수를 집요하게 요구하자, 영조는 이들을 쫓아내고 소론 인사들을 요직에 임명해 정국을 주도하게 했다(정미환국, 1727). "그러나 1728년(영조 4) 영조와 소론이 시도하는 탕평에 중대한 시련이 닥쳤다. 소론과 남인의 급진 세력이 인조 대 이후 최대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영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심유현 등 소론 과격파가 주도하고, 영남과 기호 지역에 살고 있던 남인과 소론 명문의 후손이 적극 가담했다. 이 사건을 당시 충청도 청주에서 반란을 이끈 이인좌의 이름을 따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하고,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무신란이 진압되고 노론이 재차 명분을 쥐게 되었지만, "영조는 흔들림 없이 소론 주도의 탕평을 견지했다. 한쪽 세력을 일방적으로 배제하는 바람에 무신란이 일어난 측면도 있다면서 더욱 더 소론 탕평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다."(42)


"탕평 정국에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한 노·소론 탕평파는 각각 자기 정파의 주류인 강경파를 흡수해 세력을 키우고자 했다. 그런데 노론 탕평파는 강경파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지만, 소론 탕평파는 그렇지 못했다. 소론 강경파는 탕평파의 행태가 노론과 다를 것 없다면 강한 반감을 가졌다." "(노론 강경파가 주장한) 소론 강경파 숙청을 둘러싼 대립 구도가 커져 가던 1749년(영조 25) 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되었다." "노론 강경파가 볼 때, (영조가 남겨 둔 문제는) 부친의 즉위를 방해한 소론 5대신을 숙청하고 그들을 비호하는 이종성 등 소론 강경파까지 단호히 처벌해 아들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었다. 세자는 그러한 요구를 받을 때마다 자신의 궁료로 포진해 있는 소론 강경파를 옹호하거나 영조에게 판단을 미루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바로 이때 탕평 정국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1755(영조 31) 1월 전라도 나주 객사에 조정을 비방하는 괘서掛書가 내걸린 것이다."(46-7)


# 을해옥사(1755) : 나주에 유배 중이던 소론 윤지가 조정을 비방하는 괘서掛書를 내걸었다가 처단된 후, 이를 축하하는 과거시험에서 소론 강경파를 칭송하는 자들이 또다시 조정을 비방하는 괴시권怪試卷을 제출하자, 격노한 영조가 500여 명에 이르는 소론 강경파와 관련자들을 참하고 유배시킨 사건


"을해옥사로 소론 강경파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는 소론 강경파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던 세자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세자는 노론의 압박을 받는 가운데 소론 강경파와 관계를 설정하고 신임의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 등의 문제로 상당한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다. 여기에 1757년(영조 33)에는 그동안 세자를 보호해 주던 숙종비 인원왕후, 영조비 정성왕후 등이 잇달아 사망했다." 왕실과 조정에서 빚어진 복잡한 갈등에 시달리던 세자가 결국 정신질환을 일으켜 각종 비행을 저지르던 "그 무렵 세자의 생모인 영빈은 세자를 만났다가 죽을 뻔했다면서 그대로 놔두면 언제 변란이 닥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라고 영조에게 알렸다. 영조는 이를 근거로 세자의 죄를 추궁하고는 결국 세자를 뒤주에 가둔 채 폐세자의 전교를 내렸다." "영조는 세자를 8일간이나 내버려 두어 결국 죽게 만들었다. 1762년(영조 38) 윤 5월에 일어난 이 사건을 '임오화변'이라 한다."(49-50)


"1775년(영조 51) 무렵 영조는 정신이 극도로 혼미해져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워졌다. 세손은 (자신을 여러차례 위험에 빠뜨리고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하는) 외척들과 두루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세손이라는 지위와 이를 보호하는 영조, 정순왕후 등 공적 계통에 의지하고 있었다." "영조는 통치의 한계를 절감하며 세손의 대리청정을 지시하는 전교를 내렸다. 세손도 이를 반포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홍인한이 대리청정을 반대하고 조정에 이 사안이 알려지는 것을 막는 바람에 세손의 대리청정은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신하가 대리청정을 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손은 정순왕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충성스런 신하를 물색해 홍인한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소론의 서명선이 그 역할을 맡았다. 홍인한과 정후겸이 역공세를 펴기도 했으나, 영조의 단호한 의지에 따라 대리청정이 결정되었다. 석 달 후 영조가 승하하고 세손이 보위에 오르면서 숨가빴던 정치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55)


"영조가 필생의 과업으로 인식한 것은 '양역 변통'이었다. 양역 변통이란 국가의 안위에 영향을 미칠 만큼 심각한 수준에 이른 양민의 신역을 개혁하는 것을 말한다."(59) 영조는 가호 단위로 양역을 징수하는 호전제戶錢制를 실시하면 양인의 세금이 줄어드는 대신, 양반은 아예 내지 않던 세금을 가호마다 내게 되니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관료들의 반발은 적지 않았다. 개혁을 주도하던 탕평 관료들조차 "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대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양인이나 양반이나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양인은 부유한 백성과 궁핍한 소민으로 계층 분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양반들 역시 벼슬 길에 나가거나 향촌에서 농장 따위 사업 경영에 성공해 경제력이 있는 계층과 몰락한 잔반殘班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양인과 양반 모두 경제력에 따른 재분류를 선행하지 않는다면 국가에서 세금을 안정적으로 걷기 어려웠다. 관료들은 바로 이 점을 우려했다."(70)


"과세 대상을 넓히는 유포론은 선무군관포라는 변형된 형태로 흡수되었고, 영조가 지지한 호전론이 좌절한 마당에 더 급진적인 구전론을 시행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따라서 남은 대안은 토지에 부과하는 결전론뿐이었다. 이미 전세와 대동미를 토지에 근거해 거두고 있는데 양역까지 토지에 부과하면 3중 과세의 혐의가 짙을 터였다. 그래서 결전론은 마지막까지도 고려 대상에서 비켜나 있었지만 다른 대안이 마땅치 않았다. 이미 화폐경제가 급진전된 상황에서 가호나 장정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해 봤자 가난한 자들로부터는 세금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빈부 격차가 커지던 조선 후기에 경제력의 척도인 토지에 과세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토지 소유자인 양반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결전의 시행은 피할 수 없었다. "양역 감면에서 결전에 이르는 이 개혁 입법들을 (백성들이 국가에 지는 역을 고르게 한다는 뜻에서) 균역법이라 한다."(73)


# 영조 대에 논의된 개혁안 양역4조

1. 유포론游布論 : 세금을 내지 않는 양인 장정을 찾아내 추징

2. 호포론戶布論 : 신분에 관계없이 가호마다 면포 추징

3. 구포론口布論 : 개별 장정마다 면포 추징

4. 결포론結布論 : 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 부과

☞ 면포를 뜻하는 포布 대신 동전을 뜻하는 전錢을 쓰기도 함


"영조 대에 이루어진 개혁은 정치의 탕평, 경제의 균역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민국'을 향한 영조의 의지가 가장 잘 드러난 치적은 따로 있었다. 흔히 영조의 세 번째이자 최대의 치적으로 꼽히는 준천濬川이 그것이다."(84) 18세기 조선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계층은 토지를 잃고 떠도는 빈민이었다. 이들이 거지꼴을 모면하려면 "자신의 노동력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했다. 그러한 품팔이 노동은 주로 경강 일대에서 이루어졌다. 용산, 마포, 서강 등 경강 나루에서 쌀, 땔나무, 각종 잡화를 배에서 내리거나 실어 나르는 노역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동력을 사고파는 행위를 '고립雇立'이라 하고, 대가를 받고 품을 파는 품팔이꾼을 '고정雇丁'이라 했다."(90) 그들은 개천가에 움막을 짓고 모여 살고 있었다. "준천은 바로 이들 빈민을 품고 그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 시행된 것으로, 노비까지 백성으로 끌어안으려는 영조의 민국 구상에서는 핵심에 자리한 사업이었다."(84)


# 준천 사업(1760) : 총 57일간 공사인력 21만 명, 공사대금과 임금 전錢 3만 5000민緡, 쌀 2300석을 투입하여 청계천 바닥을 긁어내고 하천에 놓인 다리를 보수하며, 하천 양안에 축대를 쌓아 천변 주민의 안전을 도모한 거대한 공공 근로 사업


"북방의 여진족이 청 제국의 기치를 들고 쳐들어온 병자호란 이래 북쪽이라면 손사래를 치던 조선 사회에 ‘북학’이 등장했다."(107) "의리를 중심에 두는 노론의 태도는 호란에 따른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데 분명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작용도 드러났다. 조선이 유일한 문명국가라는 자부심은 어느 순간 조선의 문물만이 의미 있다는 독선주의, 다른 국가의 문물은 볼 것이 없다는 배타 의식으로 변질되었다." "노론에서 (이러한 태도를 반성하는) 목소리를 낸 대표적 인물이 홍대용과 박지원이다.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는 풍요로운 경제생활을 강조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이었다. 홍대용은 "성리性理란 별것 아니라 곧 나날의 삶에 필요한 일용日用에 흩어져 있다."라며 성리를 일용의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박지원은 독서를 하고 학문을 하는 것은 실용에 쓰이느냐 실용에 쓰이지 않느냐의 구분이 있을 뿐이라며 공허한 이론만 내세우는 성리학자들의 태도를 비판했다."(10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의리학을 중시한 유학자들이었다. 홍대용은 청에서 성현의 자손들이 머리를 깎이고 호복을 입는 등 예악 문물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했고, 박지원은 조선이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쓰는 데 상당한 자긍심을 가졌다. "이희경은 명청 교체를 큰 도둑(이자성)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주인(명)이 집을 버리고 도망치자 먼 곳에서 온 용기와 힘이 출중한 자(청)가 도둑을 쫓고 처자식을 데리고 와 거주하게 된 상황으로 비유했다. 청은 명을 멸망시킨 주범이 아니라 오히려 명에 침입한 도적 이자성을 내쫓아 준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빈집을 차지한 청이 전 주인 집의 기구와 법도가 훌륭한 것을 보고 감탄해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 문물이 다름 아닌 중화 문물이라는 것이다. 박지원, 박제가, 이희경 등은 하나같이 청 문물이 중화의 유제를 간직한 것이라 강조하면서 청 문물을 수용해도 될 근거를 마련했다."(119)


"북학파가 청 문물에 대한 관심에서 중국을 방문하던 그때 다른 이유로 청을 찾는 이들이 있었다. 1783년(정조 7)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연행한 부친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다녀온 이승훈이 그러한 인물이었다. 그가 중국에 간 목적은 천주교를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경에 간 이승훈은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인 최초 영세자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들이 대부분 남인이었다는 사실이다."(127) 서울 주변의 경기 일대에 살던 근기남인의 학풍을 계승하고 확장시킨 인물이 이익이다. 이익은 천주교에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그의 문하는 천주교를 적극 수용한 권철신-정약용 계열과 천주교에 반대해 척사론을 제기한 안정복-황덕길 계열로 분화했다. 권철신 계열은 다분히 탈주자학적 학문 태도를 견지하다가 천주교를 수용한 데 반해 안정복 계열은 보수적 주자학풍으로 회귀하면서 천주교 배척에 나섰다."(130-1)


"천주교와 성리학의 갈등은 천주교 측이 유교의 예제禮制를 거부한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폭발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사는 진사 출신 윤지충이 어머니의 신주를 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이른바 '진산사건'이 발생했다." "진산사건은 심각한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짙었다. 윤지충이 정약용 형제의 이종사촌으로, 정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를 수용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정조는 천주교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정치적 쟁점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어렵게 여러 정파를 망라하는 탕평 정국을 이끌어 냈는데, 남인이 천주교 문제로 공격을 받게 된다면 그간의 정치적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는 천주교를 믿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일 뿐 남인과는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다. 또 노론이 순정하지 못한 문체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아(문체반정) 노론이 남인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140-1)


"남인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축출된 이후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 있었지만, 정조의 정치적 배려에 힘입어 정계에 복귀했다.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를 발탁하려는 정조의 계획은 마침내 1788년(정조 12) 삼정승에 노론, 소론, 남인을 안배한 일종의 연립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결실을 맺었다. 정조 자신도 '붕당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의미 있는 조치였다. 이름 있는 가문 출신도 아닌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우의정에 발탁한 것은 그야말로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중인 이하 계층도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이들은 서얼 계층이었다. 그들은 사대부와 똑같이 벼슬길을 열어 달라는 통청通淸 운동을 전개했다." "신분이 낮은 숙빈 최씨의 소생 영조는 왕실로 보자면 서얼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서얼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1772년에는 <통청윤음>을 내려 서얼을 청요직에 등용할 수 있도록 했다."(149-50)


평민보다는 지위가 높았지만 양반 관직자와 비교해 차별에 시달리던 "중인 의식의 밑바탕에는 양반 문화에 대한 동경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위항문학 활동은 그러한 동경에서 전개된 측면이 크다. 그것은 하층민도 상층문화를 공유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시를 짓는 데 치중한 문학 행위는 기본적으로 양반 문화의 모방이라는 한계를 지닌 것이기도 하다. 더러 신분제를 비판하는 시를 지어 울분을 토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 발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중인의 의식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이때부터 선배들의 시사 활동을 계승하면서도 양반 문화를 모방하거나 자신의 신분을 한탄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사회변혁 운동의 전면에 나선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강위가 주도한 '육교시사六橋詩社'이다. 이 시사에서 활동한 중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가 개화운동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162-3)


"정조는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지었다. '모든 강에 비치는 하나의 밝은 달'이라는 뜻이니, 스스로 만백성을 밝게 이끄는 군주를 자처한 것이다. 이 자신감 위에서 그는 군주가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만백성을 통치하는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재위 기간을 바쳤다. 정조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 문제로 분열되었던 사대부 사회를 군주 중심으로 헤쳐 모이도록 해 활용 가능한 모든 인력을 국가 운영에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탁월한 능력과 기지로 이 과업은 거의 성공했고, 그동안 국가 운영에서 소외되었던 수많은 인재들이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안팎에서 일어난 변화를 모두 수용해 정조가 구상한 국가 체제로 끌어들이기에는 그의 재위가 너무 짧았고, 그가 가진 성리학적 세계관도 한계가 분명했다. 결국 정조는 1800년(정조 24) 다소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조선은 표류하기 시작했다."(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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