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의 탄생 돌베개 한국학총서 11
강명관 지음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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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 열녀는 고려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 존재했던 것은 '절부'였다. 절부는 유일한 성적 대상자인 남편의 부재(주로 사망)시에 다시 결혼하지 않는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아내의 부재(주로 사망)시에 결혼하지 않는 남성인 '의부'義夫와 짝을 이루고 있었다. '수절'은 여성에게만 강요된 윤리가 아니었다. 아울러 처가살이가 보편적이었고, 여성의 재가, 삼가가 얼마든지 허락되는 상황에서의 절부는 여성 자신의 선택이었지, 도덕적·법적 강제 사항이 아니었다. 여말선초 사대부들은 조선 건국 이후 한동안 효자·순손·절부·의부를 한 묶음으로 하는 표창을 계속하다가 <경국대전>에 와서 '의부'를 삭제함으로써 배우자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오로지 여성의 윤리로 강제하였다. 가부장제는 남성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여성이 자신의 신체 일부 혹은 전체를 스스로 희생하게 하면서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을 실천한 여성이 곧 열녀였다."(46-7)


열녀담론의 주입은 고려가 망하기 불과 2년 전인 1390년 사대부 정권에 의해 주도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산기散騎 이상의 고급 관원의 처는 재가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판사 이하 6품 관원의 처는 남편이 죽은 지 3년 내에 재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산기 이상의 처가 개가했을 경우, 그것을 '절개를 잃은 것'(失節)과 동일하게 본다는 것이다. 즉 개가를 죽은 남편 이외의 남성과의 성적 교섭으로 보고 논죄한다는 것은, 여성의 성적 종속성을 요구하는 남성의 욕망을 국가권력과 제도를 통해 관철한 것이다." "여기서, 산기 이상 관리의 첩과 6품 이하의 처첩에게 수절은 권장 사항일 뿐이었다. 이를 약간 보완한 것이 정려법旌閭法인데, 정려는 해당인이 사는 마을 앞에 정문旌門을 세우는 것으로 명예 차원에서의 권장책이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순식간에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지만, 처벌과 장려라는 조선의 대여성對女性 정책의 골간을 이루는 것이었다."(49-50)


태종 6년 대사헌 허응은 "개가 금지령을 강력하게 실현하기 위해 세 번 결혼한 여자를 '자녀안'恣女案에 올리자고 제안했다. '자녀'는 고전의 내력을 갖는 말은 아니다. '자'恣는 곧 방종하다는 뜻을 가진 말로, 자녀는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을 말한다."(51-2) 자녀안이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사헌부는 자녀안의 작성을 사헌부의 전담 사항으로 하고, 또 삼가녀三嫁女의 자손에게 관료로서의 진출을 제한하자고 요청한다. 사헌부의 제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절하지 않은 여성의 자손에게 관료로서의 진출로를 제한한다는 발상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은 사헌부의 요청을 의정부에 회부하여 심의한 결과, 삼가녀의 자손은 사헌부·사간원과 같은 언관직言官職, 관리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병조의 벼슬을 할 수 없도록 결정하였다. 이 관직들은 관료로 출세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였던 바, 이 제안은 대단히 가혹한 처벌에 해당하였다."(54-5)


# 재가 여성이 낳은 자손의 관료 진출을 제한하는 법은 성종 8년에 제정되었다.


"개가를 금지하는 법은 건국 이후 성종 을사년의 <경국대전>까지 약 1백년을 거치면서 서서히 완성되어 갔다. 하지만 그 법만으로 여성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가 금지법과 함께 다른 법적 장치도 필요했다. 그것은 곧 여성의 활동 공간을 제한하여 특정한 인물 이외의 인물로부터 격리하며, 여성을 가정 내부로 유폐시키는 것이었다." "(태조 1년 대사헌) 남재의 요구는, 여성은 부모, 남자·여자 형제, 아버지의 형제, 어머니의 남자·여자 형제를 제외한 사람은 접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여성은 남편 이외의 일반 남성은커녕, 자신의 친형제, 부모의 친형제 외에는 6촌도 8촌도 친구도 만날 수 없다." "남재의 황당한 제안은 <경제육전>經濟六典 예전禮典에 정식 법령으로 등재되었다."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집 바깥으로의 여성의 출입을 봉쇄하는 것이었던 바, 논의의 핵심은 여성의 사찰 출입을 막고, 비구승과의 접촉을 금지하는 것이었다."(65-6)


"금제禁制와 아울러 검토해야 할 것은 장려책이다. 앞에서 수절하는 여성을 위해 설치한 수신전守信田이 대표적인 것이지만, 이것은 세조 때 폐지되고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장려책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국가-남성은 개가 금지, 여성의 유폐와 아울러, 수절을 실천한 여성을 표창, 장려하여 여성의 성적 종속성의 실천을 적극 유도했다." "열행에 대한 장려책은 열녀에 대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유가 윤리의 실천에 대한 장려책의 하나였다. 유가 윤리의 실천이란 다름 아닌 충·효·열이 중심이 되는 바, 충신·효자·열녀가 역시 중심이고, 여기에 순손, 효부 그리고 형제 간의 우애 등도 포함되었다. 여말선초 사대부들의 유가 윤리의 실천에 대한 장려책은 정려旌閭만이 아니라, 관직을 주는 상직賞職, 요역을 면제해 주는 복호復戶, 음식물을 내려주는 식물食物 하사를 포함하여 모두 네 종류가 있었으며, 이 중에서 정려가 가장 높은 단계의 표창이었다."(76) 


# 정려 : 충신·효자·열녀가 사는 마을에 붉은 홍살문인 정문을 세워 그 인물의 존재를 알리고 명예를 높이는 방법


"<삼강행실도> 열녀편은 <고금열녀전>과 <후한서>, <진서>를 비롯한 중국 단대사의 열녀전을 인용 자료로 삼았다." "편집자들은 선택과 배제, 생략이라는 방법을 통해 여성-어머니, 여성-딸(자식)의 관계와 여성과 지성, 학문 등과의 관계, 여성의 활동성, 적극성을 모두 제거했다. 인용된 텍스트들은 새로 편집되어 배치됨으로써 의미가 집중·강화되고,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오로지 남편에 대한 여성의 관계만이 성립했던 바, 그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종속이라는 단일한 성격으로 집중되었다. 편집자들은, 남편에 대한 여성의 관계와 성적 종속성을, 고대 하夏·은殷·주周로부터 수천 년을 넘어 당대까지, 즉 명明과 조선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초시간적 진리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다."(151-2) "<삼강행실도>의 편자는 (남편 이외의 성적 관계는 모두) '오염'이라는 관념을 주입하여 여성의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강렬한 수치심을 여성의 의식 속에 심고자 했다."(161)


"<삼강행실도> 열녀편의 주제는 명백하다. 남성은 원래 자신의 성적 대상자, 곧 아내를 제외한 여성에 대해서는 재취再娶 또는 축첩蓄妾의 주체, 또 강간의 주체(심리적인 것까지 포함해서)이지만, 자신의 공인된 성적 대상자(주로 아내)에 대해서는 그 여성이 자신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지킬 것을 강력하게 희망한다."(161) "(열녀편의) 거의 모든 이야기는 "전쟁, 군도 등 비상 상황의 발생 → 강간 시도 → 저항 → 죽음"이라는 동일한 서사적 전개를 갖는다. 이 중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서술되는 부분은 부녀자의 강렬한 저항 부분이다. 전쟁 등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여성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열행이 될 수는 없다. 즉 강간을 당한 뒤 살아남는 것은 물론이고 강간 당한 뒤 살해될 경우 그것은 열행이 될 수 없다. 강간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의 격렬한 저항, 즉 강간에 대한 강렬한 거부의 의지와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열행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그 의지와 행동이 바로 열행의 핵심이다."(169)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성을 여성에게 자발적으로 내면화시키고자 했던 조선 초 사대부의 인식을 규정한 것은 다름 아닌 <소학>이었다. 남성의 생애가 나이에 따라 세분화되어 있는 것과 달리, <소학>에 나오는 여성의 일생은 "7세에 남성과 분리된 뒤, 10세에 규방에 유폐되고, 16세에 성인식(계례), 20세(또는 23세)에 혼례를 치른다. 남성은 20세 이후 학문 연마와 벼슬 등의 지적·사회적 활동이 있으나, 여성의 일생은 결혼으로 끝이다. 남성의 일생이 다채로운 반면, 여성의 일생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이 단순성은, 여성이 가정 내에 유폐되어 있으며, 여성의 일이 가사노동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직물의 직조織造, 음식의 조리(특히 제사 음식)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소학>의 여성 노동에 대한 규정은 조선 시대 여성의 성 역할을 규정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직조와 조리가 여성의 일이라는 담론은, 여성의 의식을 완벽하게 규정했던 것이니, 이 관념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102)


# <소학>이 규정하는 부부지별夫婦之別

1. 삼종지도三從之道 : 집에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 감히 스스로 하는 일이 없다.

2. 성적 종속성 : 한 번 혼례를 올리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편이 죽어도 시집가지 않는다(一與之齊, 終身不改, 故夫死不嫁).

3. 칠거지악七去之惡 :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자식이 없거나, 음란하거나, 질투하거나, 나쁜 질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하면 내쫓긴다.


"<소학>은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인간의 신체를 규율하는 텍스트다. 신체의 통제를 요구하는 텍스트가 쉽게 수용될 리 만무했다. 따라서 이 책은 별로 인기가 없었다. (성종대에)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과거 응시 과정에 집어넣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200) 도학을 실천으로 옮기고자 하는 운동에 앞장섰던 사림의 주요 인물인 "김굉필은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학> 외의 다른 책을 읽었다고 할 정도로 <소학>에 몰입하였다." "<소학>은 이제 단순히 보기 위해 암송하는 책이 아니라, 성종 연간 '소학계'의 출현에서 보듯 남성-양반에게 내면화되어 실천되기 시작했다. <소학>의 실천은 상민과 구별되고, 여성과 구별되는 남성-양반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203-4) "조광조는 <소학>의 실천에 골몰했던 '소학동자' 김굉필의 제자였다. 그는 김굉필보다 더 철저한 <소학>의 실천주의자였다. 조광조의 신체는 이성과 율법, 곧 <소학>으로 완벽하게 제어된 것이었다."(205)


"<소학>은 사대부의 신체언어 곧 양반다움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남성-양반들은 여성과 구분되고, 비사대부층과 결정적으로 구분되었다. <소학>의 내면화는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어 신체언어 속에 녹아 들어갔으며, <소학>의 정당성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성은 대기大氣처럼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남성은 <소학>에 의해 먼저 의식화되었다. 자기 의식화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남성은 <소학>의 외화를 생각하고 그 외화에 의해 내부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뒤, 자기 이익 즉 남성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그 모순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여성의 의식화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남성/여성의 구별이 아닌 차별이 세계의 본모습이라는 것, 그것이 진리라는 것, 동시에 그것이 차별이 아닌 단지 분별일 뿐이라는 사고에 스스로 의식화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스스로 중세의 족쇄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213)


"선조는 1592년(선조 25) 4월 30일 서울을 떠나 이듬해 10월 1일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입성 하루 전 비변사가 왕이 도성에 들어가는 것을 사방에 알리기를 청하면서, 충신·효자·열녀의 포상을 건의한 일은, 전쟁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한다는 차원 이상의 행위였다. 선조는 서울에서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을 포상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면서, 예조에서 오부에 알려 충신·효자·열녀의 사례를 찾아내 보고하고, 정표하게 하라고 조급하다 싶을 정도로 급히 명령을 내린다. "난리를 겪은 후 죽은 서울 백성이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남은 백성의 절반이 소복을 입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도성에 들어오는 날 서울 백성이 길을 가득 메웠건만 상복을 입은 사람이 없으니, 이것은 필시 난리 후에 윤리가 무너져 그런 것이다. 오부에서 규찰하게 하라." 이것은 윤리의 회복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성-양반의 지배 체제의 공고화, 곧 가부장적 질서를 세우기 위한 필수적인 과업이었다."(293-4)


1615년(광해 7) <동국신속삼강행실도>라는 거질의 윤리서가 국가적 에너지를 동원하여 편찬되었다.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듯, 임진왜란은 정절, 곧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종속성을 수호하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창출해냈다. 잔혹성을 스스로 실천한 강렬한 여성의 이미지, '열'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창출했던 것이다. 이제 열녀는 '列女'가 아니라 '烈女'가 되었다." "이 책은 잔혹한 죽음의 선택에 대한 찬미의 책이다. 여기에 실린 여성들에게는 예외 없이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전쟁 후 나라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정문이 생겼고, 그 정문은 남성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실천하기 위해 신체 전체를 바친 여성들의 이야기를 유포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간단한 구조의 동일한 이야기였으며, 정문의 존재를 인지하다는 것은 곧 그 이야기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해서 열녀 이데올로기는 전쟁을 계기로 하여 사회 전체로 퍼졌고, 궁극적으로 여성들의 대뇌에 설치되었다."(330) 


병자호란 이후 청으로 잡혀간 "대규모의 피로자被虜者는 희한한 문제를 제기했다. 즉 부녀자가 속환되었을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였다." "최명길은 상식적인 결론을 내린다. "예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때에 따라 마땅함을 달리 하는 것으로서 한 가지 예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최명길의 또 다른 이유는 이렇다. 이혼해도 된다는 명을 내리게 되면, 피로된 아내의 속환을 원하는 사람은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허다한 여성을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해서 결국 그 원망이 화기를 해치게 될 것이다. 최명길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에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최명길의 견해가 현실적으로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를 이혼시켜 달라는) 장유의 요청은 사대부들이 내심 찜찜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부분을 일깨웠다. 오염되었을지도 모를 아내와 며느리를 그대로 두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339-40)


"인조의 결정으로 모든 사태가 진정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효종 즉위년 11월 21일, 사헌부는 "풍속을 손상시킨 것으로 이보다 심한 것은 없다"면서 최명길을 비난하고, 다시 "절개를 잃은 자를 자기 짝으로 삼는 것도 절개를 잃는 것"이라는 정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조정의 결정은 정자의 가르침과 괴리되고 예를 심히 그르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헌부는 사대부의 가풍家風이 날로 무너져 규문閨門에 부끄러운 일이 많으며, 가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일도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법, 인조가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법 때문에 야기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사헌부는 속환된 아내와 결혼을 유지하라는 법을 시행하지 말고 남편의 재혼을 허락할 것을 요청했다. 효종은 아버지 인조의 결정을 뒤집어 사헌부의 요청을 따랐다." "효종의 번복으로 인해 실제 이혼 사례가 급증했다."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속환된 여성의 자식들에게 불이익을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343-5)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상속제에도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조선 전기에 토지보다 더 중요한 상속 대상이었던 노비가 전쟁으로 인해 사망하거나 도망하여 그 수가 줄어들자, 사족의 노비 소유 체제가 근본적으로 동요되고, 노비 수의 절대 감소는 곧 재산의 영세화를 초래했다. 여기에 두 차례의 대규모 전란 이후 국가 전체의 생산력 수준이 하락하여 사족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가문과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경제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재산을 균분할 경우 재산이 영세화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신분의 하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노비보다 중요하게 된 토지의 분산을 막으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은 딸을 상속에서 배제하고 토지를 장자에게 집중시켜 상속하는 장자우대 상속제로 귀결되었는데, 그 변화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것이 제사였다. 즉 봉사용奉祀用 재산을 안정적으로 마련한다는 것이 장자우대 상속제의 이유였다."(348-9)


조선 시대 열녀의 열행을 관통하는 성적 종속성은 국가-남성의 이익을 위해 고안되었고, "이것은 여성의 행위가 여성 주체가 아닌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타자의 사유에 의해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은 가부장제 속에서 드디어 남성이 되었다. 스스로 가부장제를 실천했던 바, 그 명확한 실례가 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다. 시어머니는 가부장화한 여성이다. 여성이 완벽하게 가부장화하였을 때 더 이상의 가부장제는 필요하지 않았다. 흔히 중세 사회에서의 주체적 여성이라고 해석되는 경우, 그것은 남성과 대립하는 여성이 아니며, 가부장제의 모순을 꿰뚫어본 여성 주체도 아니다. 그저 가부장제화한 여성, 곧 그 의식의 주체가 여성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적인 여성을 말한다. 그 주체는 타자에 의해 왜곡된 주체, 곧 타자에 의해 오염된 주체였다." "이 오염은 조선의 가부장제가 가장 완벽하게 작동할 수 있는 원리였다."(5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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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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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용어로서의 선비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유교적 지식과 윤리로 무장하고 지배층을 형성한 최고 엘리트 집단, 곧 사대부를 칭하는 의미로 좁혀야 논의의 의미가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선비란 곧 성리학적 명분의 소산이자 바로 그 가치를 실현한 구현체具現體이므로, 조선 사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한 성리학의 가치 체계와 별도로 선비의 조건이나 가치만 따로 분리해 내어 논할 수는 없다."(47-8) "선비의 삶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정치 행위와 불가분의 관련이 있었다."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글을 익혀 벼슬길에 나서는 것은 백성의 스승이 되고 백성을 교화敎化하는 것을 뜻했다. 관직에 있는 자는 곧 정치를 통한 백성의 교화자였다. 비록 벼슬을 하지 않더라도, 선비라면 깊은 의미의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 되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관직의 유무와 상관없이 청의淸議라 하여 명분과 원칙을 지키며 정치에 개입해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그것을 선비의 의무로 여기기까지 했다."(51-2)


"흔히 가난한 선비가 선비의 진정한 기질을 잘 간직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이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실재했던 선비는 대개 부유한 지주거나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재산가들이었다. 특히 특정 직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경제 활동에서 필수불가별한 두 핵심인 토지(생산수단)와 노비(노동력)를 소유함으로써 편안히 앉아서 재화를 쌓는 자들이었다."(66)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 선비라 할 수 있는 이황도 소유 노비가 367명이었으며, 예안·봉화·영천·의령·풍산 등지에 걸쳐 논은 1,166마지기, 밭은 1,787마지기라는 엄청난 규모의 전답을 보유했다. 마지기는 면적 자체보다는 수확량에 따른 기준이라 그 넓이를 일률적으로 가름할 수는 없으나, 논 한 마지기가 대략 150~300평, 밭 한 마지기는 대략 100~400평 정도다. 그렇다면 최소의 면적으로 계산하더라도 이황은 논과 밭 각각 17만 평 이상, 도합 34만 평 이상을 보유한 셈이다."(68)


"여러 차례 왕명을 받고도 응하지 않을 뿐더러 설사 응했다가도 매우 사소한 핑계를 대고 마음대로 떠나버리는 선비들의 행동에 대해 (명종대 영의정) 이준경이 비판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이이는 이준경이 원칙만 고집하여 유자儒者를 대우하지 않고 교만하게 굴었다면서 육두문자까지 써가며 비난했다. 이준경이 죽음에 임박해 붕당朋黨의 조짐을 우려하며 올린 유차遺箚 내용에 대해서도 이이는 이준경을 비난했다." "조선의 선비(사대부)들은 각기 왕을 정점으로 한 국가 조직에 기초해 권력 구조를 형성하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붕당의 리더 또는 자신의 정치적·학문적 후원자에게 더 충성을 바쳤다." "왕에 대한 충성이 관념적으로 흐른다는 것은 왕을 정점으로 한 관료 조직의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뜻하며, 이는 곧 조선의 정치가 국가(왕조)의 보편적인 이익보다는 붕당 구성원들의 사적인 이해관계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음을 뜻한다."(76-7)


"이상적인 선비의 모습과 현실에 나타난 선비의 모습이 도저히 일치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선비의 덕목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왠만한 인간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지고의 상태를 덕목으로 설정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결과일 수 있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선비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며 평생을 공부한 내용, 곧 유교 이론에 혹시라도 어떤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다. 이론은 좋으나 그것이 현실에서는 거의 들어맞지 않는 공론空論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88) 대표적인 예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이론은 그것이 실제로 들어맞은 사례를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오히려 수신·제가 과정 없이 치국·평천하 한 사례들은 수도 없이 많다. 중국 대륙을 침입해 왕조를 건설한 수많은 북방계 정복자들은 유교적 수신·제가 덕목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91)


"유교 정치의 꽃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덕치德治에 따른 왕도 정치다. 군왕의 수신을 바탕으로 한 덕치 이론은 결국 교화를 그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데, 이 덕치와 교화 이론 또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수신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삶이라는 것이 개인윤리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이미 고도의 국가 체제를 갖춘 사회의 윤리로는 부적절한 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의 모범적인 행동을 통해 사회를 교화한다는 목표는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현실성이 거의 없다." "서주의 명맥을 이은 동주 사회의 정치적 혼란과 그 몰락 과정을 문명사 차원에서 보면,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한 왕국이 철기 문명의 급속한 보급에 따른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해체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가에서 말한 각자의 본분은 바로 서주 사회의 위계질서에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유가에서 제시한 해결책은 주나라의 통치질서를 되돌리려 한 시대착오적인 관념철학에 지나지 않았다."(96-7)


"조선의 왕권은 신하들보다 대체로 약했는데도, 정작 실제 정치 현장에서는 누릴 수 있는 실제 권력보다 더 큰 의무를 요구받았다. 모든 면에서 수신의 모범이 되어야 했고,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그 책임도 고스란히 국왕에게 돌아왔다. 평상시에는 권리보다 더 무거운 의무를 감당해야 했고, 비상시에는 모든 책임을 혼자 져야 했던 것이 바로 조선 국왕의 위상이었다."(115) "조선시대에 왕의 자격 요건과 행동에 대해 열변을 토한 선비들의 논설과 간쟁은 수없이 많아도, 왕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신하들의 도리, 곧 신도臣道에 대해서 비슷한 비중으로 열변을 토한 논설은 별로 없다." "조선의 선비들이 국왕을 '우습게' 여긴 이면에는 그들의 사대적事大的·모화적慕華的 문명관도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의 왕은 중국에 있는 천자라는 대리인을 통해 그 정통성과 정당성을 인정받았기에 조선의 사대부들이 충성을 바칠 최종 대상은 자기 나라 왕이 아니라 중국(명)의 천자였다."(117-8)


"조선은 인간관계의 위계질서가 엄정한 나라였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그런 사회였다. 유교가 그런 수직적 위계를 정당화시켜 주었으며, 조선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중국을 훨씬 능가했다."(133) "조선 가족 관련 규정의 근간은 주희와 그 제자들이 편집한 『가례家禮』였다." "『가례』는 조선왕조 500년 내내 가족 관련 의례와 가족 내 위계질서를 공고히 하는 데 국가가 인정한 최고의 '메뉴얼'로 자리 잡았다. 『가례』에 비록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런 원칙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철저한 일부일처제였다. 처가 아닌 첩은 아예 가족 구성원으로 취급도 하지 않았으므로, 굳이 명시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면서도, 처와 첩이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기도 한 사실은 조선이 비록 법률적으로는 일부일처제 사회였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일부다처제 사회이기도 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렇듯 법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은 현실은 필연적으로 서얼에 대한 차별을 불렀다."(136)


"조선을 건국한 주체 세력은 무신정권과 몽골 간섭하에서 기형적으로 늘어난 노비인구를 본래 상태로 줄이려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분제를 통해 더욱 공고히 하는 정책을 취했다." "종모를 근간으로 하는 종모종부 원칙(부모 중 한 명이라도 노비이면 그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된다)은 주자학에서 강조한 부계 혈통 계승 원칙에 위배되는 제도였다. 그렇지만 종부법을 따를 경우에는 노비의 수가 감소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노비 소유주들은 종부법에 크게 반발했다. 또한 여자 노비의 성관계가 일정하지 않은 탓에, 아이를 출산해도 그 아비가 누구인지 정확히 가리기 어렵다는 핑계를 내세워 종모법을 선호했다. 그런데 남자 노비가 상민 여자와 결혼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종부법을 적용해 그 자식을 노비로 삼는 이율배반적 원칙을 법으로 규정함으로써, 재산 증식 차원에서 노비 수를 무한정 늘릴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143-4)


"양반층은 선비를 우대하는 국가정책에 편승해, 건국 초기부터 최대한 군역에서 빠지고 있었다. 유학 공부를 업으로 삼고 있다는 뜻의 업유業儒를 자칭하거나, 향교의 교생校生이 되어 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방법 등을 통해 얼마든지 군역을 피할 수 있었다." "이른바 사림이 권력을 잡았다는 16세기 후반에도 군역제도와 관련해 아무런 개혁조치가 없었던 이유 또한 이런 풍조 때문이었다."(175) 조선 후기, 오랑캐의 보호를 받는 소중화라는 모순된 "이중 구조 안에서 200년이 넘도록 안주한 결과, 선비들은 '청질서'라는 '동아시아 수족관'의 운영 시스템이 작동을 멈출 경우에 스스로 생존하기조차 벅찬 국제 현실을 전혀 깨달을 수 없는 '은둔의 나라' 속으로 끝없이 침잠해 들어갔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발생한 청일전쟁(1894~95년)에서 청이 패하고 물러갔을 때, 적자생존의 논리가 국제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던 당시 국제 무대에서 조선이 스스로 살아남을 길은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179-80)


"조선 선비들의 당쟁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조선의 역사가 유교에서 추구한 이상적인 정치를 향해 나아갔다는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상호 견제와 공존을 원칙으로 하는 복수군자당 운운하는 붕당론이 이이가 제시한 조제보합론調劑保合論 등을 통해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런 붕당론은 조선의 정치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191) 오히려 "유교의 제일 덕목인 충성의 대상이 점차 국왕에서 붕당의 보스로 바뀌고, 군신유의 덕목이 추상적으로 변질되는 현상이 편만했다."(193) 16세기 이후 심화되는 토지 집중화와 국방력 약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쟁은 갈수록 심해져, 결국에는 한 줌의 벌열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19세기 세도 정치에 이르러서야 중앙 조정의 당쟁이 표면적으로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는 당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소멸됐기 때문이 아니라, 80퍼센트 이상의 사대부 집안이 정치 참여에서 배제된 탓에 중앙에서 자웅을 겨룰 붕당들조차 없었기 때문이다."(184-5)


조선의 국가 경제가 자급자족 형태로 굳어진 이유는 "상행위를 통한 부의 창출을 원천적으로 비하한 유교 이념을 무조건 신봉한 위정자들의 인식도 큰 요인이었다."(196) "연행사와 통신사를 통해 청나라와 일본의 엄청난 부에 대한 소식이 조선에 꾸준히 전해졌지만 조정은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조정만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재야 지식인들, 곧 선비들도 이런 문제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늘이 내려준 제한된 물자를 분배하는 데에만 관심을 둔 유교적 경제관 때문이자, 청나라와 일본을 오랑캐로 취급한 철저한 화이華夷사상,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강화된 지나친 쇄국정책, 또한 그 결과로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무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조선만이 중화 문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비현실적인 자기기만적 이데올로기의 득세 현상, 상공업 발달과 해외무역을 추진하기에는 너무 준비가 안 된 국내의 척박한 산업 인프라 실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었다."(201)


"자본주의 맹아론을 지지한 연구들이 제시한 대표적인 증거로는 조선 후기(18세기)에 이르러 상업이 활발해진 점, 금난전권禁難廛權 폐지(1791년)와 같이 국가의 상업 통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점, 광산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임금노동자들이 등장한 점, 농촌에서도 고공雇工이라 하여 임금노동자들이 등장한 점, 상평통보와 같은 새로운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점, 광작廣作이 성행하면서 경영형 부농처럼 판매를 염두에 둔 농업형태가 등장한 점, 봉건적 토지소유제가 쇠퇴한 점, 전국에 걸쳐 장시가 활발해지면서 송상松商과 같은 대상인을 비롯해 자본의 축적에 따라 객주客主나 여각旅閣 등 새로운 상업 구조가 등장한 점 등을 꼽는다. 그러나 앞에 열거한 이유들로 조선 후기 사회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볼 수 있다면, 중국의 경우에는 송나라 때 이미 자본주의 단계에 사실상 진입했다고 봐야 하며, 일본도 이미 17세기에는 자본주의 체제로 깊숙이 들어섰다고 봐야 한다."(202)


"조선은 정말 가난한 나라였다. 전체 파이를 키울 생각을 못하고 주어진 농산물에만 주로 의지하다 보니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유교에서 강조한 민생의 안정을 위해 세금을 올리지도 못하니, 국가재정은 만성 적자에 허덕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통 방법은 양입위출量入爲出, 곧 수입을 미리 헤아려 거기에 맞게 지출하는 것이었다. 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수도 있으나, 역시 파이를 키우려는 의지가 없이 분배에만 몰입한 방법일 뿐이었다. 그래도 양입위출에 기초한 대동법의 성립으로 백성들은 세금을 이전의 약 20퍼센트 정도만 내게 되어 좋았으나, 그 전체 과정은 거의 200년이 걸렸으며 이미 관행적으로 시행되던 것을 법적으로 보완해 추인한, 매우 느린 개혁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불에 타 무너진 채 (1867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기까지) 무려 275년이나 한양 도성 한복판에 남은 경복궁 터는 조선 후기 국가재정의 궁핍상을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204-5)


"상장례와 제사제도는 가족의 범주와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와 직결되었는데, 가족 관련 유교화가 급속히 진행된 시기가 바로 17세기였다." "흥미롭게도, (가족 구성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이 죽은 자들은 사후에도 죽음을 초월해 가족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죽은 자들은 제사라는 제도를 통해 항상 산자들과 교통했으며, 산 자들을 하나의 가족공동체로 묶어주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따라서 유교 사회 조선, 선비의 나라 조선에서는 망자라 해도 여전히 현세의 가족 구성에서 지대한 위치를 점하고 큰 역할을 수행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가족관계는 주희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조상과 후손들은 같은 기氣로 구성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기는 소실되어 흩어지지만, 그 본체는 후손에게 보존된다. 만약 후손들이 조상에게 최고의 성의와 존경심을 표시하면, 제사를 지내는 동안 조상의 기를 불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망자와 피로 맺어진 혈육들만 제사를 지낼 수 있다."(222-3)


"조선 사회에서 지배 구조의 이론적 근거는 사회 전체를 수직적 관계로 조직한 충과 효였다. 더 나아가, 명나라가 조선의 군부君父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이런 지배 이념이 국내를 넘어 명나라와의 국제관계에까지 확대되었음을 뜻한다. 조선에게 명나라는 충의 대상(君)인 동시에 효의 대상(父)이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군부(명나라)를 공격하는 원수(청나라) 앞에 나아가 항복한 것은 조선의 지배층인 왕과 신료들 스스로 충과 효라는 양대 가치를 동시에 범한 셈이었다."(212) "위정척사 선비들은 결코 조선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으려 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조선 그 자체로서의 조선이 아니라 중화(중국) 문명을 간직한 조선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는 중국으로부터 전수 받은 보편적 유교 전통의 수호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위정척사 선비들이 목숨을 던져 지키고자 한 '정正'은 중화문물을 계승한 조선이었다."(218)


"국권 상실의 위기에서 분연히 일어난 위정척사 선비들의 항일투쟁은 개화파들 중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나선 자가 거의 없는 사실과 아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 결과, 국권 상실에 대해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할 유학자 선비들이 졸지에 애국자로 변신했다. 따라서 한국 사회는 타락한 유교 문화와 부패한 양반 통치 문화를 청산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구한말 역사의 또 다른 비극은 동학농민봉기(1894년) 때까지만 해도 잠재적 적대관계였던 농민과 양반이 이제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 전선을 구축한 점이다. 양반 통치에 저항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부패한 양반 지배 체제를 척결하고 새 시대의 지평을 여는가 싶더니,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 활동을 통해 곧바로 양반과 농민이 합작을 해버린 것이야말로 역사 청산을 하지 못하게 된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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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기원 너머의 역사담론 3
존 B. 던컨 지음, 김범 옮김 / 너머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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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 성과의 요약(pp.382~397)


# 고려의 관료 제도에서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요소

1. 전통적인 종교(이데올로기)가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 : 고려의 건국을 정당화한 불교와 풍수지리설

2. 여전히 막강한 전통적인 귀속 집단의 정치력 : 지방 군현의 거의 모든 일상 행정에 관여하던 향리 가문

3. 지배 집단 구조의 연속성 : 지방 사회를 지배한 주요 가문의 세습적 특권이 중앙 관원 가문으로 연결


"고려부터 조선 전기까지 한국사의 중심적 주제의 하나는 중앙집권적 관료 제도를 창출하려는 노력이었다. 이것은 고려가 흥기하기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관료제도를 만들려는 신라 국왕들의 노력은 골품제 귀족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좌절했지만, "2세기가 넘는 통일신라의 통치는 지속적인 통일을 위한 제도적·문화적 기반을 놓았다."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물리치고 승리했지만, 반도의 장악력은 미약했다. 왕건이 이끈 체제는 대등한 세력 중에서 국왕이 실질적인 수장을 맡은 군사 지도자의 연합이었다. 전국 대부분은 중앙의 군사 지도자와 연합하거나 그 아래에 복속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사병을 지휘하고 독립적으로 지방을 통치하려는 의도를 가진 지방 호족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이처럼 고려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통치를 수립하는 데 왕실 자체에 맞서는 권력과 권위를 누린 중앙 연합과 반도 전역에 걸쳐 높은 정도의 지방자치가 지속되었다는 두 가지 주요한 내부 장애에 직면했다."


"새 왕조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중앙 연합의 권력을 억제하고 국왕의 권력과 권위를 제고하는 것이었다. 고려의 제2·3대 국왕인 혜종과 정종의 치세 동안 일어난 유혈 사태로 임무는 좀더 쉬워졌지만, 왕권을 견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은 국왕은 제4대 광종이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의 공포와 과거제도의 시행─연합 세력의 군사적·정치적 지위를 격하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을 비롯한 여러 제도 개혁을 단행한 뒤 마침내 치세 후반 일련의 유혈 숙청으로 연합 세력의 배후를 파괴했다. 광종의 방법은 가혹했지만, 그 후계자가 관료 제도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고려의 제5대 국왕인 경종은 전시과를 시행해 왕조를 안정된 재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제6대 성종은 중국 삼성육부제의 모범을 받아들여 정무 관서인 중추원과 문하성을 정규 조정 안에 편성해 구조적으로 국왕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함으로써 관료적 정치체제의 창출로 나아가는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고려 전기의 국왕들은 지방 호족의 도전도 해결해야 했다. 광종의 과거제도 시행은 중앙 연합에 대항해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지방 호족의 후손이 중앙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제도적 방법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국왕이 지방 호족에게 중앙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사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충성을 배양하려는 왕조의 정책은 성종 때 그들의 특권을 축소해 중앙이 지방행정을 통제하는 제도 아래로 복속시키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성종은 지방 사병을 혁파하고 지방 통치 조직을 전국적인 향리 제도로 통합하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12개의 지역 거점에 설치된 목牧에 문치 행정을 처음 시행했다. 11세기 전반 현종은 소수의 중앙 관원을 지방에 파견해 그 정책을 계승했는데, 이것은 150년 동안 지방 주요 가문의 강력한 자치적인 통제 아래 있었던 군현에 고려왕조가 직접적인 감독을 시행한 첫 번째 사례였다." 


"다음 한 세기 반 동안 중앙 체제는 지방 주재를 점진적으로 확대했고, 그 결과 12세기 후반에는 전국 군현의 거의 절반이 중앙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관료 제도를 향한 명백한 전진에도 불구하고 국왕들은 고려 사회의 비교적 낮은 분화에서 부과된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10세기 중반 지주의 이해가 해상무역 세력의 이해를 무너뜨리면서 고려 국왕들은 지주 세력 이외에는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대안적 사회계층을 갖지 못했다. 광종은 지방 호족을 이용해 중앙 연합을 상쇄하려고 했지만, 호족 또한 세습적인 지주층이었다. 그 결과 과거제도를 거쳐 등용된 호족 가문의 자손들은 그들의 귀속적 특권을 이용해 자립할 수 있었고 그 후손들은 새로운 중앙 귀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2세기가 시작될 무렵, 중앙에 기반을 둔 이런 가문은 관원의 상층을 장악해 정무 기구의 통제, 토지에서 산출되는 가용 자원과 농민에 대한 접근을 놓고 국왕과 경쟁하게 되었다."


"1170년의 무신란 이후 정치권력은 문반 귀족으로부터 무신에게 넘어갔지만, 그 반란은 고려 정치체제의 기본 역학을 바꾸지 못했다. 무신 집정은 문반 귀족보다 더욱 많이 국왕을 통제했지만, 무신들은 자신 소유의 농장을 만들고 문반 귀족 가문과 혼인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위신을 높이려고 했다. 그 결과 무신 집권기 동안 많은 기존의 문반 귀족이 생존할 수 있었고 번창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고려 후기의 국왕들은 12세기의 선왕들을 괴롭혔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상황에 자신들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고려 후기 국왕들의 상황이 더 나빴는데, 무신 집권기 동안 사유지가 확대되어 가용 자원의 분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단합해 지주 귀족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상인 같은 그 밖의 중요한 사회집단이 없는 상황에서 고려 후기 국왕들과 원元 출신의 왕비들은 외국 신하·환관·노비에게 의존해 정치 운영을 통제하려고 했다."


"국왕이 지원을 의지할 만한(도시都市나 상인 집단 같은) 다른 주요한 사회계층이 없는 사회에서 대토지를 소유한 중앙 귀족의 흥기는 고려 왕권을 약화시킨 주요하고 결정적인 요소였다. 국왕이 의지할 만한 또 다른 사회집단은 신라-고려 교체기 지방 호족의 후손인 향리였다." "국왕은 향리에게 수조권의 특권을 주고 중앙 관직의 획득을 보장함으로써 그들의 지원을 얻는 정책을 추구했다. 광종과 그 밖의 10세기 국왕들은 지방 향리를 이용해 중앙 연합의 권력을 상쇄하려고 했지만, 대안적 사회집단으로서 향리는 매우 실제적인 한계를 일부 안고 있었다. 향리는 그 자신이 대토지를 소유한 세습적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10세기의 수많은 중앙 연합 세력과 11~12세기의 문반 귀족과 전체적으로 동일한 사회계층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 향리 권력의 물질적·사회적 기반은 외침의 파괴와 중앙 귀족 가문의 경제적 이익으로 지방이 수탈되면서 전국적으로 심각하게 침식되었다."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앙의 권력투쟁은 세 가지 주요한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하나는 물적·인적 자원에 접근하는 문제였다. 나라의 경작지는 대부분 농장에 편입되었고, 그 농장의 주인들은 자주 탈세할 수 있었으며, 인구의 대부분은 소작농이나 노비로 농장에 편입되었다. 국왕은 토지와 백성의 소속을 결정하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특별 기구를 이용해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주장하려고 간헐적으로 시도했지만, 양반이 점점 더 자원을 지배하는 경향을 되돌릴 수 없었다." "훨씬 긴급한 문제는 공전으로 할당된 토지의 분량이 줄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려 후기 국왕들은 일상적으로 신하들에게 토지를 분급하거나 앞서 공전이었던 토지의 수조권을 주어 충성을 사려고 했다. 그 결과 조세수입이 급감했고, 상황은 왜구의 침입으로 더욱 악화되어 국가는 야전군에게 지급할 자금이 부족하고 관원들에게 녹봉을 줄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 번째 쟁점은 정치 운영의 통제와 관련된 문제였다. 권위의 부족과 자원에 대한 접근의 제한으로 곤란을 겪고, 양반이 지배하는 조정과 직면한, 고려 후기의 국왕과 원 출신 왕비들은 인사 기구와 정무 관서를 궁중으로 옮기고, 외국 신하·환관·노비 같은 비양반 출신을 임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국왕과 양반이 갈등을 빚은 주요한 원인이었는데, 양반은 정규 관서에서 정치적 권한을 회복하려고 거듭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4세기 중반 원의 패권이 약화된 뒤 공민왕은 이제현 같은 개혁적 양반과 연합해 왕조의 정치제도를 다시 활성화하려고 시도했지만, 제도적 기반과 왕권은 이미 너무 약화되어 공민왕과 그 후계자들은 외척인 남양 홍씨와 이인임 일파 같은 강력한 양반 파벌에 지배되었다." 결국 공민왕과 바로 다음 국왕인 우왕의 개혁 시도는 좌절되었고 "왕조의 마지막 수십 년은 다양한 양반 집단 사이의 격렬한 권력투쟁으로 특징지어졌다."


"세 번째 쟁점은 중앙 조정에서 관직을 가질 수 있는 자격과 관련된 문제였다. 양반은 관직을 지냈다는 전통을 근거로 자신을 증명했기 때문에 관직 획득 자격은 사실상 왕조의 지배층에 포함되는 자격조건 중 하나가 되었다. 국왕이 환관·노비, 그 밖의 비양반 출신을 등용한 것은 이런 쟁점을 조성한 한 가지 요인이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중앙 관직을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세습 자격을 왕조의 제도적 구조에 따라 보장받았던 향리에 의해 제기되었다. 고려 후기에 지방을 떠나 대거 수도로 옮겨온 향리는 중앙 관인층을 팽창시켰으며 사회질서의 정점에 있던 양반의 지위를 약화시키려고 위협했다. 이런 문제를 다루려는 고려 후기의 노력은 향리를 지방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향리의 숫자를 제한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시도는 뿌리 깊은 전통과 국왕이 향리에게 첨설직을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군직에 배치한 뒤 그 대부분을 등용하면서 좌절되었다."


"13세기 말엽 중앙 관원 가문은 자신을 (비양반 집단이나 지방 향리층 같은) 다른 사회집단과 구별하기 위해 사대부·사족·양반 같은 용어를 사용한 것에서 보이듯이, 스스로를 차별적인 사회집단으로 파악하는 의식을 발전시켰다." "14세기 후반 무렵 개혁적 양반은 자신의 권력과 권위가 관원의 지위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강력하고 효과적인 중앙 체제에 의존했다. 이런 각성은 외침을 막거나, 관원을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보호하거나, 그들에게 녹봉의 형태로 기초적인 물질적 유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복지를 제공하지 못하던 왕조의 무능력을 포함한 여러 요인의 영향을 받았다. 양반의 태도는 유학의 학습이 다시 활성화된 것에서도 영향을 받았는데, 그런 변화는 부분적으로 원에서 도입된 주희학파의 새로운 사상으로 국왕과 그 재상의 도덕적 지도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과 사회 변화에서 중앙 조정의 활발한 역할을 강조한 옛 고려와 북송의 고문 전통에서 발원했다."


국가의 사회·정치제도를 재점검하기 시작한 이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추진할 수 있는 권력과 권위를 가진 새로운 지도자에게 충성을 돌릴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이성계가 양반 개혁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개인적 권력과 권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동북면 지방을 고려에 복속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14세기 중반 고려의 수도에 도착한 뒤, 이자춘과 이성계는 평양 조씨·황려 민씨 같은 중요한 양반 가문의 자제와 자신의 자녀를 혼인시켜 중앙 귀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정책을 추구했다. 또한 이성계의 아들로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이성계를 즉위시키는 데 중심인물이었고, 1400년에 마침내 스스로 국왕이 된 이방원은 과거 급제자로서 개혁자들이 유교 원리에 따라 조직한 새 질서의 전망에 공감했다. 이처럼 이성계는 군사적 지도자였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12세기 후반 조정을 장악한 무신들과는 매우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1391년 과전법은 양반 토지 소유의 기본적 형태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사전을 급격히 줄이고 공전을 크게 늘렸다. 불교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의 몰수와 맞물려 과전법으로 국가는 더 많은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 뒤 국력 신장의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중앙 정치제도의 개혁은 태종이 사병을 최종적으로 혁파하고 모든 병권을 국왕에게 집중시켜 새 왕실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게 된 뒤에야 추진되었다. 도당을 혁파하고 몇 개의 독립적인 관서로 신권臣權을 분산한 것은 왕권의 상당한 신장을 보여주며 양반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일부 개혁자들은 전제정치의 성장을 막는 데 유의했지만, 국왕과 신하의 권력균형을 시정하지 않고는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충분히 신장시킬 수 강력하고 효과적인 중앙 체제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다수의 양반 세력은 태종의 정치제도 개편을 지지했다."


"고려와 조선 제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방 통치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개혁자들은 낮은 품계의 지방관이 파견된 허약한 고려의 지방 통치권을, 높은 품계의 지방관이 폭넓은 통제권을 행사하는 제도로 대체했다." "이것은 국가가 토지와 인적 자원을 통제하는 데 중요했으며, 13~14세기에 지방 사회가 붕괴되어 향리가 이탈한 현상 때문에 필요한 측면도 있었다. 지방 통치 제도의 재편은 향리층의 이익을 보호했던 옛 지역적 신분제의 공식적인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조선 건국 이후 수도의 모든 향리는 과거에 급제했거나 특별한 공적을 세운 소수를 제외하고는 강제로 지방으로 돌려보내졌다. 향리는 더 이상 과거 응시를 보장받지 못했으며, 명예직이나 그런 칭호를 받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 관원 아래서 근무하는 세습적인 서리의 지위로 격하되었다. 양반은 권력 경쟁의 주요한 근원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회·정치적 질서의 정상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보장하려는 양반의 노력은 향리를 제거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개혁자들은 의관이나 천문관 같은 기술관─그 뒤 '중인'이 된 집단─의 후손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들을 하위 관서에 제한하는 규정을 시행했다. 신분의 범주를 유지하려는 양반의 관심은 천민이나 양인 출신이 많았던 첩의 아들들에 관련된 비슷한 규제에서도 찾을 수 있다. 향리·기술관·서자는 고려에서는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지만, 그들의 배제는 지배층의 확실한 축소를 나타냈다. 또한 처음에는 이성계가 약간 반대했지만, 개혁자들은 (고려 말기에 원元 출신의 왕비를 위시한 왕실과 더불어 일군의 정치 세력을 형성했던) 환관을 정권의 핵심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며 천민·장인·상인 출신이 과거에 응시하고 관직에 등용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을 시행했다. 이런 변화의 결과, 이제 양반은 한국 사회·정치적 질서의 정점에 홀로 서게 되었다."


"요컨대 조선왕조의 건국은 고려 전기 국왕들의 중앙집권적 개혁에서 처음 결과를 맺은 중앙 귀족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정치·사회제도를 재건한 것이었다. 중앙 귀족은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 동안 일정한 좌절을 겪었지만, 고려 시대 전체에 걸쳐 정치를 지배했다. 때로는 일부 가문이 쇠퇴하기도 했지만, 중앙 귀족은 고려 시대 전체와 조선 전기까지도 구조와 구성 모두에서 뚜렷한 지속성을 보여주었다." "이성계와 그의 동북면 연합은 상당한 권력과 내부 결속력을 가진 잠재적인 새로운 집단으로 등장했지만, 중앙 귀족을 대체하기보다는 그들에 동참하는 것을 선택했다." "새 왕조의 정치제도는 왕권을 상당히 신장시켰지만, 세습적인 생득적 권리와 대토지 소유의 특권 인정을 포함한 양보는 궁극적으로 왕조를 통치할 수 있는 조선 국왕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조선 시대 내내 자원과 권력의 통제를 둘러싼 국왕과 양반 사이의 오랜 갈등의 무대를 마련했다."


"양반 권력의 세습적 본질과 대토지 기반은 양반을 귀족으로 보아야 할 필요를 알려준다. 그러나 주요한 중앙 관원 가문은 초기부터 계속 관료적 특징을 가졌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고려에서 과거제도의 중요성은 이미 안전한 중앙 관직에 오른 뒤에도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이 많았고 최고 품계의 재추 중에도 과거 급제자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고려 시대 전체에 걸쳐 등용과 승진의 이런 양상이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중앙 양반 가문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증거와 맞물려 관료적 귀족층으로서 양반의 기원은 조선왕조의 건국이 아니라 고려 시대인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전반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지배층 내부의 상당한 연속성의 맥락 안에서 보면, 1392년의 왕조 교체는 혁명이라기보다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10세기의 노력이 4세기 이상 흐른 뒤에 정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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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금보다 비쌌을 때 - 충격과 망각의 경제사 이야기
알레산드로 지로도 지음, 송기형 옮김 / 까치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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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을 녹이는 데 필요한 온도(섭씨 1,535도)를 만들어내기 전까지 거의 모든 철은 운석에서 채취하였고 따라서 값이 매우 비쌌다.

2. 키프로스 섬은 청동기시대 말경(기원전 1650~110년)에 절정에 달한 구리 생산의 중심지로서 지중해 지역 전체의 가격을 좌우했다.

3. 아티케, 크레타, 아나톨리아 연안 세 지역의 중앙에 위치한 델로스 섬은 지정학적 요인 덕분에 노예무역의 이상적인 중심지였다.

4. 기원전 12세기경 지중해 문명이 몰락하면서 청동 생산에 필수적인 주석 무역이 급감하자, 야금업자들은 대안으로 철을 다루었다.

5.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지역의 광산들과 어마어마한 보물을 밑천 삼아 군사들을 후하게 대우하면서 인도 원정에 나섰다.


6.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정복한 스페인 북서부의 최대 광산(라스 메둘라스)은 약 250년 동안 로마에 금을 공급하여 제국의 발판이 되었다.

7. 서기 66년의 유대 반란을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는 예루살렘 신전을 약탈하여, 콜로세움 공사의 재원으로 사용했다.

8.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 제국을 선포하면서, 이교도들의 신전에서 약탈한 귀금속과 청동을 재원 삼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였다.

9. 사산 왕조를 무너뜨린 우마이야 왕조는 대대적으로 광산을 개발하고 활발한 국제 무역을 주도하여 7~12세기 황금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10. 한나라 황제들은 유목민들과의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비단을 수출했고, 비잔틴 제국의 수도승들은 비단 제조 비법을 훔쳐냈다.


11. 로마 제국의 쇠퇴는 유럽 광산의 생산량 감소와 폐광을 가져왔고, 중세 유럽이 등장하기 전까지 중앙아시아가 주요 광산 지역이 되었다.

12. 귀금속과 향신료, 비단에 이끌려 남쪽으로 진출한 바이킹은 전리품을 얻기 위해 무역뿐만 아니라 폭력에도 의존한 난폭한 정복자였다.

13.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광산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던 아프리카 노예들(잔즈, Zanj)은 아바스 칼리프국에 맞서 3차례 반란(7~9세기)을 일으켰다.

14. 지폐는 송나라 상인들이 최초로 발명하고 유통시켰지만 금나라, 몽골과 전쟁을 치르면서 인플레이션이 폭증하여 그 가치가 폭락했다.

15. 안데스 산맥 지역에서 산출되는 청금석과 인도산 식물에서 추출한 인디고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청색 염료를 만들어내는 값비싼 상품이었다.


16. 이탈리아 북서부의 롬바르디아인 은행가들은 교황청에 헌금하는 은 수송을 전담하면서 확보한 자금으로 양털과 백반 무역을 장악했다. 

17. 13세기 유럽 각지의 도매상들이 모인 샹파뉴의 연례 정기시장은 필리프 4세가 매긴 무거운 세금과 프랑스-플랑드르 전쟁으로 몰락했다.

18. 베네치아의 리알토 시장에서는 하루 두 번 상인들이 모여 귀금속 가격을 공식적으로 정했으며, 그 가격이 유럽 전체의 가격을 결정했다.

19. '화산 겨울'이 초래한 유럽 최악의 기근(1315~1318)으로 인구의 10~15%가 사망했지만, 남유럽 곡물상들의 투기 활동은 최악의 사태를 막았다.

20. 15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 그단스크와 뤼베크를 비롯한 한자 동맹은 낮은 세금과 '발트 해의 평화' 덕분에 곡물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21. 흑사병은 임금 인상, 인력 부족에 따른 기계화, 교회의 권위 추락, 사회의 세속화와 지방 속어 확대 등 사회 구조를 완전히 재편했다.

22. 신앙심보다 이익을 좇은 피렌체 상인들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청동 대포를 대량 생산한 오스만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23. 인도 데칸 고원의 골콘다 지역은 기원전 4세기부터 1868년 남아프리카 킴벌리 광산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산지였다.

24. 15세기 말~16세기 초, 개인 장서는 교양과 부의 상징이었으며, 유럽에서 제작되는 도서의 절반은 베네치아의 인쇄업자들이 출판을 도맡았다.

25. 로마부터 중세까지 모든 소식들은 같은 속도로 전해졌으며, 상인과 정치계, 교회는 가장 빠른 정보를 얻기 위해 막대한 돈을 기꺼이 지출했다.


26.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소식은 각국 정부와 상인들에게 속달로 전해졌는데, 기이하게도 베네치아 정치가들은 이 발견의 중요성을 외면했다.

27. 굶주림과 질병, 해상 사고, 풍토병과 성난 원주민 등 미지의 탐험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엘도라도의 부를 향한 열정과 욕망을 꺾지 못했다.

28. 대서양 항로가 열리고 베네치아의 아시아산 제품과 향신료 무역이 치명상을 입자, 베네치아는 맘루크 술탄국에 수에즈 운하 건설을 제안했다.

29. 프랑크푸르트 정기 시장은 유럽 최대의 도서 시장이었으며, 대발견 전후에는 지리상의 발전을 신속하게 반영한 지도 시장으로 군림하였다.

30. 16세기의 세계 양대 강국인 중국과 인도는 정치 혼란과 지역내 분쟁, 제위 계승을 둘러싼 골육상쟁 등에 시달리면서 점차 위상이 무너져갔다. 


31. 헨리 8세는 종교시설 폐지법을 근거로 몰수한 막대한 교회 재산을 함대 편성과 해안 방어 시스템 구축 같은 해군 강화 비용으로 사용했다.

32. 1526년부터 본격 개발된 이와미 광산에서 대량 생산된 은은 쇼군들이 내전에 활용할 화승총을 구입할 때 사용된 이상적인 화폐였다.

33. 16~18세기 세계 최대 광산 도시의 하나였던 포토시는 지상에 있는 생지옥인 동시에 (종교)전쟁에 심취한 스페인 군주들의 든든한 돈줄이었다.

34. 중세와 바로크 시대 말기의 4대 해양강국인 베네치아, 제노바, 포르투갈, 네덜란드는 인구 부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35. 대발견 이후 스페인의 젊은 남성들은 제조업을 버리고 모험 사업에 뛰어들었고, 귀족들마저 사치품 소비에 매진하여 무역 적자를 심화시켰다.


36. 아메리카 은의 유입 규모가 유럽 금융시장의 이자율을 좌우하던 시절, 아비소(선단 정보를 항구에 미리 알려주는 쾌속선)의 역할은 지대했다.

37. 19세기 초까지 멕시코 아카풀코와 마닐라를 오가던 갤리언 선의 은 수송은 중국-아시아와 아메리카-유럽을 연결하는 통화 체제를 형성했다.

38. 스페인 남부 알마덴 광산의 수은은 은을 추출하는 아말감 방식의 핵심 요소로서, 푸거와 로스차일드 가문 같은 금융업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39. 최대 5~6만에 달하는 도공들이 작업하던 징더전(景德鎭)은 10~18세기 동안 세계 최대의 자기 산지였지만, 태평천국의 난으로 결정타를 맞았다.

40. 멕시코의 코치닐 연지벌레를 가공한 붉은색 코치닐 염료는 스페인에서 은 다음 가는 세원(稅源)이었으며, 투기꾼과 사략선의 주된 표적이었다.


41. 독일의 군소 군주들은 유대인 은행가들이 중심이 된 호프-팍토렌(궁정 은행가)의 돈으로 30년 전쟁을 치렀으며, 골동품 사치경쟁을 벌였다.

42. 에도 시대에는 고쿠(石, 성인 남성에게 1년 동안 필요한 쌀의 양)로 조세를 거두었고, 도지마 시장에서는 쌀 선도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43. 막대한 물과 에너지(목탄의 재료인 땔나무)를 소모하는 철제 대포 산업과 범선 제작 산업은 윌드 숲 같은 영국 남부의 숲들을 황폐화시켰다.

44. 말라카-고아-리스본, 광저우-나가사키, 마닐라-멕시코 통상로의 중심지인 마카오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앞선 포르투갈 삼각무역의 축이었다.

45. 1580년대부터 이와미 은광은 세계 은 생산의 1/5, 은 공급의 1/3을 점유하면서 동아시아 무역에 기여했고 일본을 국제 무역에 편입시켰다. 


46. 오스만 제국은 선박 건조에 필요한 고급 목재가 항시 부족했고, 초석 생산과 철제 대포 제작, 화페 주조 역시 목재 부족 현상을 심화시켰다.

47. 네덜란드는 조가비를 주고 구입한 맨해튼 섬을 영국인들에게 넘기고 런 섬(고급 향신료인 육두구 생산지)을 받았지만, 역사적 실패로 남았다.

48. 기름세, 오줌세, 비누세, 턱수염세, 창문세, 벽돌세, 모자세 등 과도한 세금은 생활규범을 바꿨고 때로는 반란의 도화선 역할을 하기도 했다.

49. 17세기 기온 저하는 세계 각지에서 식량 가격 폭등과 농민 반란을 초래했고, 국가의 멸망(명나라, 콩고 왕국)과 내전(무굴 제국)도 유발했다. 

50. 중앙은행과 관련 기관들은 대부분 전쟁 자금 때문에 궁지에 몰린 나라의 재정을 지원하거나 전후 채무를 장기로 전환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51. 18세기 초 우역(牛疫)이 발생하여 유럽 가축의 90%가 죽었는데, 전염병 전파의 본거지였던 이탈리아는 수의학 연구의 본산으로 거듭났다.

52. 전쟁 상대국에 맞선 경제전의 주된 방법은 런던이 미국 콘티넨털 지폐와 프랑스 아시냐 지폐를 상대로 벌인 것 같은 위조 지폐 발행이었다.

53. 영국은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맞서 140억 프랑을 지출했는데, 이 중 10억 프랑은 동맹국들을 지원하여 '성 조지 황금 기병대'로 불리었다.

54. 1855년 미국의 고래기름 산업은 국가 산업 순위에서 5위에 오를 정도로 엄청난 활황이었는데, 곧 이어진 석유 생산이 생태계 재앙을 막았다.

55. 러시아는 1861년 농노제를 폐지하면서 토지보상금 1,500만 파운드를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빌렸는데, 이를 갚기 위해 알래스카를 매각했다.


56. 아마존 지역 중앙에 위치한 도시 마나우스는 19세기 말 고무 붐의 혜택을 크게 봤지만, 씨앗이 동남아로 밀반출되면서 독점의 막을 내렸다.

57. 1928년 새로운 유전들이 발견되면서 석유값이 60% 폭락하자, 메이저 업체들이 아크나카리 성에서 밀약을 맺어 반세기 동안 석유 값을 결정했다.

58. 1940년대 중반 나치는 비료, 폭발물, 질산 제조의 우수한 촉매제였던 백금을 확보하기 위해 금괴와 백금의 교환 비율을 5대 1까지 올렸다.

59.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제정하여 소련에 450만 톤의 식품 외에도 엄청난 양의 민수 물자와 군수 물자를 지원했고, 이는 전황의 반전을 이끌어냈다.

60. 1927년 탄생한 헝가리 은화 '펭괴'는 1929년 세계 대공황과 2차대전기 헝가리 국토 파괴에 시달리면서 현대사 최악의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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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사 2 - 탕평과 세도정치 : 숙종조~고종조
이성무 지음 / 아름다운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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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숙종이 송시열계 서인들을 축출하자 남인 정권과 김석주 등 외척 세력이 득세하였다(갑신환국). 정권 교체 이후 남인은 허적·권대운 등의 탁남(濁南)과 윤휴·허목 등의 청남(淸南)으로 분열되었다.


(2) 주요 사건/인물

- 경신환국(1680) : 남인 세력에게 염증을 느끼던 숙종을 등에 업고 외척 김석주는 모종의 정치극을 꾸몄다. 기름장막 사건을 계기로 허적이 제거되고, 윤휴 역시 복선군 역모 사건에 엮여 제거된다.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재집권한다.

- 이이·성혼의 문묘종사(1681) : 서인은 자신들의 집권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인 학맥의 원천인 이이와 성혼을 문묘종사하여 퇴계 이황과 동등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 서인의 분열 : 훈척들에 대한 이해 관계와 태조 존호가상 등을 둘러싸고 점차 분열의 조짐을 보이던 서인은 송시열과 윤증 부자간의 ‘회니시비(懷尼是非, 주자 절대주의를 부정하는 윤휴의 사문난적 시비를 둘러싸고 송시열과 윤선거·윤증 부자가 대립한 사건)’ 갈등으로 결국 노론(송시열 당)과 소론(윤증 당)으로 갈라진다.

- 기사환국(1689) : 숙종이 희빈 장씨의 아들 균(?, 훗날의 경종)이 태어난지 석 달도 안 되어 원자 명호(후궁 소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될 수 있도록 명호를 정하는 일)를 밀어붙이자 송시열이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분노한 숙종은 송시열 사사, 인현왕후 민씨 폐출, 이이·성혼 문묘 출향 등을 단행하여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정권을 재수립한다.

- 갑술환국(1694) : 노론 명문가의 자제들이 폐비 복위를 도모한 혐의로 체포되어 서인이 재차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숙종이 총애하던 숙원 최씨(영조의 생모) 독살설이 불거졌다. 여기에 왕비 장씨가 숙원 최씨를 모질게 탄압한 사실이 밝혀지자 숙종이 심경을 바꿔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다시 등용하였다. 이이·성혼도 다시 문묘에 배향되었다.

- 병신처분(1716) : 숙종이 ‘회니시비’의 빌미가 된 윤선거 묘갈명과 ‘신유의서’를 읽은 후 노론의 손을 들어주자, 이에 힘을 얻은 노론은 윤선거 부자의 문집을 파기하고 관작을 추탈하였다. 아울러 소론이 대거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노론 전제정치가 개막된다.


경종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경종은 자신을 지켜주던 소론 세력이 아버지 숙종에 의해 와해되자, 대리청정 기간동안 그의 흠결을 찾아 폐세자 명분으로 삼으려던 노론 세력의 거센 압력을 이겨내야 했다.


(2) 주요 사건/인물

- 신축옥사(1721) : 경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노론이 경종의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연잉군(영조)의 세제 책봉을 건의하여 성공시킨다. 그러나 세제 책봉 2개월만에 또다시 노론이 세제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는 무리수를 두자 소론이 경종에 대한 불경·불충죄를 공박하여 일시적으로 조정을 장악했다.

- 임인옥사(1722) : 목호룡이 노론 4대신의 자제들을 포함한 역모 기도를 고변하자, 소론은 경종의 통치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옥사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처리하였고 노론은 최대의 참변을 겪었다.


영조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영조는 경종의 아우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종통상의 문제점과 노론의 재집권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한 경조 독살설에 시달렸다. 더 많은 권력을 원하는 노론과 역습의 기회를 노리는 소론 사이의 당쟁은 여전히 치열했다.


(2) 주요 사건/인물

- 을사처분(1725) : 영조는 즉위 직후 3정승 모두를 소론에서 임명하고 노·소론의 충역시비에 일체 간여하지 않겠다는 ‘시비불분(是非不分)’의 입장을 고수하는 등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순식간에 정국을 개편하여 신임옥사를 무옥(誣獄)으로 규정하고 노론 4대신의 신원을 명하는 조치를 내려 노론 집권의 명분을 세워주었다.

- 정미환국(1727) : 영조가 을사처분에 이은 정치보복을 경계하여 탕평을 환기시키면서 노론의 협조를 요청했지만, 노론 강경파는 노소병용(老少竝用)에 협조하는 노론 온건파를 극렬하게 공격한다. 노론 강경파에게 염증을 느낀 영조는 소론 정권을 수립하고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취소하였다.

- 무신란(1728) : 소론 급진파와 남인 일부가 영조의 왕위 계승 절차와 경조 독살 여부를 문제삼아 일으킨 난. 소론 정권을 붕괴시킨 무신란은 당쟁의 폐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여 탕평을 향한 영조의 각오를 더욱 단단히 다지는 계기가 된다.

- 신유대훈(1741) : 영조는 신임의리를 완전히 해결하여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이때 형조참판 오광은이 대훈(大訓) 반포를 건의하자 영조는 양 당을 강경책으로 밀어붙여 ‘임인옥은 무옥이므로 피화자는 신원한다’는 최종 단안을 내렸다. 신유대훈은 서원 철폐와 전랑통청권 혁파로 이어진다.

- 을해옥사(1755) : 소론 윤지가 나주에 괘서(掛書)를 걸어 조정을 비방하고 역모를 꾀한 사실이 밝혀졌다. 격노한 영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소론 일파를 대거 숙청하여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고, 경종조 이후 발생한 일련의 사건이 소론에 근원한다고 발표하여 완전한 노론 정권을 승인하였다.


정조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영조 말기 외척 세력이 성장하면서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중심으로 하는 부홍파(扶洪派, 북당 혹은 시파)와 홍봉한의 잘못을 공격하는 공홍파(功洪派, 남당 혹은 벽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2) 주요 사건/인물

- 남당·북당의 와해(1777) :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홍국영 중심의 비척신 계열을 규합하여 외척 세력 제거에 나섰다. 우선 공홍파의 지원 아래 홍봉한 계열의 부흥파를 숙청했고, 이어 공홍파의 김구주를 유배보내어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 시파와 벽파 :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고 정조의 정국 운영에 동조한 세력이며,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고 정조의 정국 운영에 반대한 세력이다. 시파와 벽파는 노론·소론·남인 모두에 산재해 있었으며, 1788년 정조가 김치인(노론)·이성원(소론)·채제공(남인)으로 3정승을 구성하면서 점차 대립이 가시화된다.

- 진산사건(1791) : 남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사건. 노·소론은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타도하려는 목적에서 진산사건을 이용했고, 결국 1792년(정조 16) 박종악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채제공 독상(獨相) 체제가 종료되었다.

- 영남만인소(1792) : 갑술환국(1694) 이후 정계에서 거의 배제되던 남인이 채제공의 정승 입각을 계기로 사도세자의 신원과 임오의리의 천명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렸다. 정조는 만인소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노론 벽파의 반발을 우려하여 영조의 금령을 환기시키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렸다. 

- 오회연교(五晦筵敎, 1800) : 정조는 임오의리를 바로잡되 관련자를 처벌하지 않으며, 임오의리로 인해 신임의리를 번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는 벽파의 투항을 촉구하는 선언문이었는데, 그로부터 12일 뒤 정조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사태는 미완의 종결을 맞았다.

- 산림무용론과 군주도통론 : 정조는 편협한 당색의 의리에 매몰된 산림을 더이상 신뢰하지 않았고, 군주가 사문의 정통이자 도학상의 권위를 확보한 세도의 주재자이며 의리의 주인이라는 ‘군주도통론’을 내세워 왕권 강화를 모색했다.


순조조 이후의 당쟁


(1) 시대 배경


정조의 죽음은 탕평의 종말인 동시에 벽파 정권의 시작이었다. 벽파는 정조의 정책을 무산시키는 데 주력하다가 6년만에 붕괴되고, 정국의 주도권은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외척세력에게 넘어간다.


(2) 주요 사건/인물

- 벽파의 집권(1800) : 수렴청정을 거행하게 된 정순왕후는 벽파 인물들로 조정을 구성한다. 이들은 시파의 군사적 기반인 장용영을 혁파하고, 천주교 문제를 빌미로 대대적인 남인 박해를 가하였다(신유박해).

- 벽파의 몰락(1805) : 정순왕후 사후 벽파는 순조의 정치보복을 우려하여 사도세자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다가 시파의 역공을 받아 권력 중심부에서 대거 축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동 김씨 세력이 공을 세우면서 외척으로 등장하게 된다.

-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 : 순조의 뒤를 이은 헌종조에는 외척 풍양 조씨 가문이 권력을 잡았다.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는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1849)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내부 알력과 조만영의 죽음(1846)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 김씨에게 넘어갔다.

-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 철종은 안동 김씨 세력을 두려워하여 국사를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김좌근에게 의지하였다. 정치가 전적으로 안동 김씨 가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면서 삼정의 문란이 심해지고 마침내 진주민란(1862)을 시작으로 전국 도처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 대원군의 등장 : 고종의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은 수렴청정을 하는 조대비의 막후에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 대원군은 비변사를 약화시키고 의정부와 6조의 기능을 확대하는 한편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 결과 대원군파와 안동 김씨의 노론 보수파, 남·북인 및 박규수를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 등으로 정치 지형이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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