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 인간 이봉창 이야기
배경식 지음 / 너머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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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3·1운동 당시 이봉창은 무라타 약국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봉창이 3·1운동에 관해서 언급한 것은 1932년 9월 16일에 있은 첫 공판 때뿐이다. 일본인 관선변호사가 "그것을 듣고 어떤 소감을 가졌는가"라고 묻자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이처럼 이봉창은 3·1운동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무엇 때문에 그러한 운동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으며, 직접 참여하지 않고 방관자로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다면 왜 이봉창은 3·1운동이나 민족운동과 아무런 상관없이 성장했을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식민의 아픔을 느낄 수 없었던 가정환경이다." 이봉창의 아버지 이진구는 식민지배와 약탈에 필요한 건축 수요 및 이주 일본인들을 위한 주택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한일합방 이전 시기부터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을 영위하면서 큰 재산을 모았다. "이봉창이 민족운동과 무관하게 자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용산의 지역적 특징을 들 수 있다."(35) 


"이봉창이 어린 시절을 보낸 용산 일대는 '조선 내 일본'으로 불릴 정도로 일본의 각종 군사시설과 운수, 통신 기관이 밀집된 식민통치의 심장부였다. 용산은 경성 시가지의 외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에 전차 노선이 들어오고, 상수도도 제일 먼저 설치되는 등 도시개발 과정에서 막대한 특혜를 누렸다." "이러한 주변 환경은 이봉창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봉창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을 접하면서 다른 조선인보다 빨리 일본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조선인의 일본어 해독능력은 1913년에 0.61%였던 것이 10년이 지난 1923년에도 1.81%에 불과했을 정도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이 드물었다." "이봉창은 일본인 상점에 취직하여 일본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면서 일본어에 더 능숙하게 되었고, 그것은 또한 그가 나중에 일본행을 결심할 수 있었던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36-7)


일본으로 가기 전의 이봉창의 행적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일은 1925년 10월에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최초의 근대적인 인구센서스인 간이국세조사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한 것이다. "간이국세조사위원이 '명예직'이었다는 것은 총독부의 정책에 협력하고 있던 조선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뒤에 유명한 친일파가 된 이들의 상당수가 관직 경력에 '국세조사위원' 항목을 자랑스럽게 적어넣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시 국세조사위원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적어도 일정한 사회적 지위와 총독부의 식민정책에 대한 동의 등이 인정되어야만 선발되었던 것이다." "이봉창이 국세조사위원으로 활동하여 총독으로부터 상금과 함께 나무잔까지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에 불만을 품고 용산역 근무를 그만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의 식민정책에 협조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65-7)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업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자 "이봉창은 조선인으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자책했다. '내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그쪽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결코 그쪽이 나쁜 것이 아니라 부탁하는 내가 나쁜 것이다. 유치한 것이다. 내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보통사람처럼 얼굴을 내민 것이 잘못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이봉창은 자신이 비참해졌다. 그러면서도 이런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인간인데도 똑같이 대접해 주지 않는다. 나도 일본인임에 틀림없다. 신일본인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이봉창이 조선인이기 때문에 거절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조선인이 아니라 '신일본인'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조선인으로서 차별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할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안정된 직장을 구해 평범한 인간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80-1)


"1926년 12월 25일, 몸이 약해 병으로 고생하던 다이쇼(大正) 천황이 사망하자 오랫동안 섭정을 해오던 히로히토가 도쿄 궁성에서 조견례를 갖고 천황에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대례, 곧 공식적으로 천황에 즉위하는 행사는 다이쇼의 복상이 끝나는 1928년 11월 10일에 교토 고쇼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이봉창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왕의 얼굴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란 것을 처음 깨달았다." 아마가자키 출장소 공작계의 상용인부로 일을 나가는 동안 능숙한 일본어 실력과 성실한 작업 태도를 인정받아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생활이 안정되자 이봉창은 천황의 얼굴을 봐야만 제대로 된 진짜 일본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자신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노동자이지만 돈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천황의 얼굴을 보겠다고 다짐했다."(93-4)


그러나 정작 즉위식날 검문에서 소지하고 있던 한글 편지 때문에 유치장에 갇힌 신세가 되자 "이봉창은 자신을 '불행한 인간'이라고 체념하면서,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을 유치장에 집어넣는 '얄궂은 세상'을 원망했다. 그럴수록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조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런 압박과 차별을 받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이봉창이 당시 느꼈던 분노와 절망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책할수록 더 깊은 절망에 빠질 뿐이었다. 결국 이봉창은 자신이 조선인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98) "유치장에 갇혀 있는 동안 이봉창은 취조를 받거나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이봉창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봉창은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서 처음으로 조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막연한 생각에 불과했다."(100-1)


"이봉창은 오사카에서 조선인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쓰루하시에서 생활하면서도 (정신적 안식처가 되어주는) 모든 것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는 진짜 일본인처럼 행동한다면 일본인들에게 차별대우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인과의 교제를 완전히 끊었다. 쓰루하시를 비롯하여 오사카에는 친구들도 많이 살고 있었지만 이봉창은 그들을 만나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봉창은 오사카에 살고 있는 사랑하는 조카딸 은임과의 연락도 끊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정책은 결코 이봉창의 그러한 '소박한 열망'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105-7) "결국 이봉창은 불경기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민하던 상황에서 상해에 가면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그곳에서는 조선인이라는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떳떳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생각을 품고 상해행을 결심했다. 이봉창이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서 들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119)


1931년 1월 초순 임시정부 사무실을 방문한 이봉창을 눈여겨본 김구는 며칠 뒤 "이봉창이 묵고 있는 여관을 찾아가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제 나이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생 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봉창의 이 말에 김구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때서야 김구는 이봉창이 의기남아로서 살신성인할 큰 뜻을 품고 상해로 건너와서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김구는 이봉창의 위대한 인생관을 듣고 감동의 눈물이 벅차오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봉창은 겸손한 마음으로 나라 일에 몸바칠 수 있도록 지도해 달라고 김구에게 청했다. 김구는 쾌히 승낙했다."(129)


"이봉창이 도쿄로 떠난 1931년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암흑의 시기'였다. 3·1운동 직후의 혁명적인 열기와 독립의 희망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22~23년을 넘어서면서 국제정세가 점차 안정되고 일본이 승승장구하면서 기대와 달리 독립의 희망은 점점 멀어졌다. 그럴수록 독립운동가들의 이탈은 늘어났다. 그리하여 192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부여잡고 견뎌야만 하는 긴긴 절망의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특히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직전인 1929년과 1930년 무렵은 뚜렷한 독립운동의 성과가 없었던 가장 힘든 시기였다." "특히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이 그 여세를 몰아 만주 전체를 장악하고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이 건설되면서 독립운동 최대의 근거지였던 만주에서의 무장투쟁도 어렵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 최고조에 이르렀던 국내의 대중투쟁도 현격히 줄어들었다."(185-6)


"(천황 폭살을 시도한) 이봉창은 결정적인 실수 두 가지를 범했다. 우선 천황의 행차코스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은 거사 당일 천황의 이동코스를 제대로 알지 못해 시간을 놓치고 당황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실수는 천황에 대한 정보를 전혀 입수하지 않은 것이다. 천황의 사진은 물론이요 천황이 야외행차를 할 때에 행렬의 어디쯤에서 움직이는지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지 않았다." "천황 폭살이라는 엄청난 거사를 오로지 이봉창에게만 일임한 김구의 잘못도 있었다. 김구 자신이 일본 사정에 어두웠고, 이봉창을 도와줄 동지 한 명 없이 혼자 파견했다. 물론 당시의 임시정부 형편으로 이봉창을 도와줄 인물을 함께 일본에 파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봉창 한 명을 도쿄로 보내는 여비를 마련하는 데도 반 년 이상이 걸렸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김구는 도쿄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이봉창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김구의 결정적인 실수였다."(211)


# 1932년 1월 8일 거사 실행 그리고 실패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일본의 천황을 죽이려고 시도한 적은 딱 두 번뿐이었다. 첫번째는 이봉창 이전에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가 계획단계에서 발각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무정부주의자 박열의 경우이고, 두번째가 이봉창의 경우이다. 물론 1924년 1월에 의열단원 김지섭이 천황이 사는 고쿄의 궁성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니주바시에 폭탄을 투척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천황의 폭살을 직접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239) "김구가 테러리즘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승승장구하면서 독립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들어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못했을 때였다. 그때 김구는 실력양성이나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조직이나 자금도 부족한 상황에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일대 타격을 가해 꺼져가는 독립운동의 불씨를 다시 살릴 방법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테러리즘이었다."(243)


"비록 이봉창 의거는 실패했지만 동경의거를 통해 김구와 임시정부는 재기에 성공했다. 한동안 임시정부에 냉담했던 미주 동포들이 다시 뜨거운 성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동경사건을 보고) 찾아온 청년들에게 김구는 제2, 제3의 동경의거의 임무를 주어 적지로 침투시켰다. 유진식과 이덕주에게는 조선총독 암살을, 최흥식·유상근·이성원·이성발 등 4명에게는 관동군사령관, 관동청장관, 남만철도 총재 등 만주침략의 원흉을 폭살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각각 국내와 만주로 파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홍구공원 야채시장에서 채소장수를 하던 또 한 청년이 김구를 찾아왔다." "그가 바로 "장부가 한번 집을 나가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고향을 떠나 상해에 와 있던 윤봉길이었다." "이봉창의 희생으로 인해 꺼져가던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다시 불길을 당긴 것은 매우 중요한 공적이라 할 수 있다."(2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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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러일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 - 동아시아 50년전쟁 다시 보기
하라 아키라 지음, 김연옥 옮김 / 살림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 메이지·다이쇼·전전 쇼와 시대의 전쟁


보신전쟁(1868-69) → 세이난전쟁(1877) → 청일전쟁(1894-95) → 의화단전쟁(1900) → 러일전쟁(1904-05) → 1차 세계대전 → 만주사변(1931) → 중일전쟁(1937) → 아시아·태평양전쟁(1941)


제1장 청일전쟁 : 제1차 조선전쟁


"폐번치현 직후인 1871년에 일본은 청국과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은 상호 간에 영사 재판권을 인정하는 등 일본이 처음으로 외국과 맺은 '대등'한 조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국과 일본이 대등하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조선에 대한 일본의 입장이 유리해지는 것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청일수호조규 체결 이전에 일본과 조선의 관계에서 주의해야 할 사건이 있습니다. 1868년 일본은 왕정복고를 알리는 국서를 조선에 보냈는데, 조선이 국서를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스스로를 '황皇' 혹은 '칙勅'이라는 문자를 사용해서 국서를 보냈는데,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종주국인 청국 황제뿐이었습니다. 만약 일본이 '황皇'을 사용하게 된다면, '왕王'으로 칭하고 있는 조선이 일본보다 격이 내려가는 셈이 됩니다." "이에 더해 1873년 부산 왜관에 일본을 모욕하는 내용을 게시한 사건은 훗날 유수정부가 논쟁하던 '정한론'의 빌미가 됩니다."(59-60)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조선왕궁을 점령한 일은 "단순한 '정변'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일본과 조선 사이에 벌어진 전쟁 행위였습니다. 청일전쟁 개시 직전에 사실상 '조일朝日전쟁'이 일어났던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7월 25일 일본 함대가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합니다. 이때 훗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되는 도고 헤이하치로가 청나라 병사를 태운 영국 선적 화물선 고승호高陞號를 격침하라고 지시합니다. 청일전쟁 선전포고 직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제법상으로 논란을 일으켰고 외교적으로도 크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불문에 부쳐지지만 국제관계상 매우 위태위태한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이 조선에 최후통첩장을 내민 7월 20일 직전인 7월 16일에 일본과 영국 간에 매우 중요한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바로 (치외법권 철폐와 관세 자주권 일부를 회복하면서 서구와 맺은 불평등조약을 시정하는 첫걸음이 된) 영일통상항해조약입니다."(69-70)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도 언급했지만, 청일전쟁 개시와 조약개정은 사실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영일통상항해조약이 7월 16일에 조인되고 그 직후인 7월 20일에 일본이 조선에 대해 최후통첩을 했다는 점입니다. 즉 영국과 조약개정 합의가 이루어지기 직전 상황이었는데 성사되자마자 조선 내정에 간섭해 23일 왕궁을 점령하고, 25일에는 풍도해전을 치르고, 29일에는 육상에서 일본군이 충남 천안 성환읍에서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고, 30일에는 아산에 있던 청국 군대를 공격해 평양으로 패주敗走시킵니다. 이후 8월 1일에 청나라에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당시에는 선전포고를 한 후에 전투를 개시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8월 1일 선전포고를 한 시점부터 청일전쟁을 다루려 한다면 많은 것을 놓쳐버리는 셈이 되므로 이 전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76)


"1895년 4월 17일에 체결된 청일강화조약 제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는 문구로 시작해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물貢物 헌납이나 전례典禮 등은 앞으로 일절 폐지할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 부여한 제일 큰 목적은 한반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 확보에 있었으므로 제1조에 조선이 '독립 자주'국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기입한 것입니다." "강화조약 중 특히 중요한 것이 제6조 제4항인데, 이 조항은 청나라 안에서 일본인이 공장을 지어도 좋으며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해도 좋다는 권리(자본수출권)였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여러 열강이 좀처럼 얻어내지 못한 자본수출권을 일본이 따낸 것은 구미 열강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준 셈이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것을 일본이 구미제국에게 준 '경제적 뇌물'로 비평하기도 했습니다." "이 조항 때문에 이후 청나라는 여러 열강의 세력권 설정에서 경쟁의 무대가 됩니다."(81-3)


"청일전쟁 후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얻은 배상금 약 3억엔 중 1억 8,000만 엔을 육군과 해군을 확장하는 비용으로 썼습니다. 나머지는 제강소製鋼所를 설치하거나 철도 부설비·전화 설치비로 사용하는 등 청일전쟁 후 '전후경영'이라는 명목으로 군비중심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한편 방대한 배상금을 떠안게 된 청국은 자력으로는 지불할 수 없어 열강으로부터 빌린 외채로 지불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타이완 정복전쟁으로 타이완이라는 식민지를 얻으면서 제국주의 국가 대열의 끝자락에 합류하는 데 성공합니다. 반면 청국은 금융·외교적으로 종속국, 반半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이렇듯 두 나라가 정반대 방향으로 운명이 갈리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청일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3국간섭으로 일본이 포기한 랴오둥 반도의 뤼순·다롄을 조차租借하고, 독일은 산둥 반도의 자우저우만을 조차했으며, 영국은 6월에 주룽 반도를, 7월에 웨이하이웨이를 조차했습니다."(90-1)


"후세인의 관점에서 메이지 천황은 메이지 1년부터 군주로 군림한 것처럼 생각되기 일쑤이지만, 당시 서민들의 대부분은 쇼군 가문은 알아도 천황에 대해서는 여전히 "천자天子라는 존재가 있는 듯"하다는 정도로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청일전쟁을 통해 국민의식이라는 것이 서서히 서민들 속에도 싹트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국가인 일본이 이웃대국인 청나라와 싸우며 자신들의 나라에는 천황이라는 위대한 분이 계시다, 그전까지만 해도 제일 위대한 사람은 그 지역의 영주라고 여겨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더 위대한 천황이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청일전쟁 즈음에 '대일본제국의 국민'이라는 표현을 거쳐 "처음으로 사람들 사이에 '국민'의식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그것이 서서히 정착되어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청일전쟁에 의해 일본에 '국민'이 탄생하고 천황의 권위도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101)


제2장 러일전쟁 : 제2차 조선전쟁


"의화단전쟁의 8개국 연합군(일본·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미국) 가운데 대활약을 한 것은 일본군이었습니다. 청국과 인접한 곳에 있으며 신속하게 군대를 파견할 수 있었던 일본은 열강 군대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1900년 10월 열국列國 공사가 모여 의화단전쟁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논의하는 제1차 회의가 열립니다. 청국에 대한 강화조건을 제시한 이듬해인 1901년 4월에 열국은 4억 5,000만 냥의 배상금을 청국에 요구했습니다. 청국도 이를 수락했습니다. 배상금은 39년간 분할 지불하며, 다구 포대를 철거하고, 베이징 공사관 지구에 군대를 주둔시켜도 좋다는 승인을 받습니다. 일본에 배당된 배상금은 3,479만 냥이었습니다. 참고로 이때 각국 군대 주둔을 허락한 것이 훗날 중일전쟁의 방아쇠가 되는 루거우차오 사건의 원인遠因이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중국 파견' 근거가 된 것은 이때 열국이 얻어낸 베이징의 군대 주둔 항목이었습니다."(107-9)


# 제1차 영일동맹 성립(1902.1) : 일본을 이용하여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했던 영국의 의도


"1904년 2월 10일 러일전쟁을 선전포고한 날로부터 2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인 2월 23일,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하기' 위해 군사상 필요한 지역을 일본이 접수해 사용할 것을 승인하는 내용이 포함된 「한일의정서」를 한국에 들이밀었습니다. 그러고는 개전 후인 5월 말에 '제국의 대한對韓 방침'을 결정, 한국의 군사·외교·재정·교통·통신 등을 일본의 감독하에 둘 것을 정합니다.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고 일본인 혹은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 고문·외교 고문을 둘 것, 한국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때에는 일본과 반드시 사전에 협의할 것 등을 용인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인 이른바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2개월 후인 1905년 11월에는 '제2차 한일협약'에 강제적으로 조인하게 해 한국에 통감을 두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에 임명합니다. 즉 일본은 러일전쟁 시기에 한국 지배를 사실상 거의 확정시켰던 것입니다."(113-4)


"러일전쟁은 군사사적軍事史的으로는 육전에서 랴오양 전투·사허 전투·펑톈 전투를 벌였지만 전혀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군이 퇴각하면 일본정부는 국민에게 "이겼다. 이겼다"고 계속 선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개별 전투의 실태는 일본육군이 러시아육군에게 명백하게 이겼다고 볼 수 없었고, 언제 역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겨우겨우 '무승부'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일본해군도 러시아해군 극동의 두 거점인 뤼순과 블라디보스토크를 봉쇄하려는 작전을 펼쳤지만 이 역시 계획대로 순조롭게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육군 측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간신히 뤼순을 공략했던 것입니다." "러일전쟁은 이른바 '상처투성이의 무승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동해해전에서 이긴 일본이 강화조정을 미국에 먼저 의뢰했고, 강화조건도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던 것을 봐도 명확히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122-4)


"러일강화조약 제1조는 의례적인 조항으로 실질적인 조항은 제2조부터입니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군사상·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가짐'을 인정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 역시 한국에 관한 조항이었는데,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의 첫 번째 전쟁 목적은 한국을 확보하는 것이었음을 이 조항이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제5조에서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의 조차권을 일본에 양도할 것을, 제6조에서는 청국의 승인을 전제로 창춘·뤼순 간 철도를 일본에 양도할 것을 규정했습니다. 이들 조항은 훗날 남만주철도, 즉 만철滿鐵이 됩니다. 제9조에서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이른바 남쪽 가라후토 섬을 러시아가 일본에 양도할 것을 규정했습니다. 포츠머스 조약의 주요 항목은 이것이 전부였고 배상금 항목은 아예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강화조약을 성립시켜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었던 것입니다."(125-6)


제3장 한국병합과 21개조 요구


"1909년 7월 6일 일본정부는 각의에서 사법과 감옥 사무를 일본에 위탁하게 하는 등 한국병합방침을 결정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0월에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조약이 조인되고 1주일 뒤인 8월 29일에는 조약이 공포와 함께 즉시 시행되고 메이지 천황은 「한국병합조서韓國倂合詔書」를 발포합니다." "일본은 한국병합 직전인 7월 4일 러시아와 '제2차 러일협약'을 맺어 만주에서 얻는 특수이익을 서로 존중해주고 군사동맹조치를 취하자고 확인합니다. 러일전쟁 결과 기존의 만주와 한국 사이에 있던 러시아와 일본의 권익 분계선이 좀 더 북쪽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남만주와 북만주를 사이에 두고 선을 긋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즉 일본은 한국에 대해 자유 재량권을 얻은 셈이 되어 다른 제국주의 열강도 공공연하게 또는 묵인하는 형태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했습니다."(169-71)


# 신해혁명(1911.10) 봉기 - 청나라 선통제 퇴위(1912.1.1) - 메이지 천황 사망(1912.7.30), 다이쇼 시대 개막


영일동맹을 근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은 1915년 1월 18일 중국 공사 히오키를 앞세워 당시 중립을 선언하고 있던 중국 위안스카이袁世凱 대총통에게 [총]5호로 구성된 「21개조 요구서」를 제출합니다. "제1호의 요구는 일본이 독일에서 뺏은 산둥 성 권익에 관한 조약이고 제2호는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에 관한 조약입니다. 이것은 '남만동몽南滿東蒙조약'이라고도 불립니다. 제2호의 요구는 뤼순·다롄의 조차, 남만주·안평 철도의 기한을 각각 다시 99년씩 연장할 것, 일본의 자본수출권과 광산채굴권 취득, 타국으로부터 자금을 공급받거나 차관 제공을 받을 때 일본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정치·재정·군사 고문이 필요한 경우는 사전에 일본과 협의할 것, 창춘에서 지린 구간의 철도 경영 관리를 99년간 일본에 위임할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이중 제1호와 제2호가 일본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항목들이어서 모두 '조약안'으로 되어 있습니다."(197-9)


중국 측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 내용이 제5호였습니다. "제5호의 첫 번째 항목은 중국정부의 정치·재정·군사 고문을 일본인으로 삼을 것, 두 번째 항목은 중국의 병원·사원·학교의 토지소유권을 일본에 인정할 것, 세 번째 항목은 경찰은 중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한다는 것이며, 네 번째 항목은 무기 창고의 설치를, 다섯 번째 항목은 여러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게 준다는 것을, 여섯 번째 항목은 푸젠 성에 외국 자본을 도입할 경우 제일 먼저 일본에 협의할 것을, 일곱 번째 항목에서는 중국에서 일본인의 불교 포교권을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이상의 요약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21개조 요구는 상당히 노골적인 형태로 중국에 대한 일본의 권익을 요구한 것입니다.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에 열강의 아시아에 대한 관여가 적어질 수밖에 없는 절호의 찬스를 노려, 일본은 아주 다양한 요구를 중국에게 들이밀었습니다."(200-1)


"이후 중국에서 항의활동이 활발해집니다. 상하이에서는 '국민대일對日동지회'가 결성되어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퍼집니다.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배일운동을 단속하는 대총통령을 발표하지만 운동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중국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데는 일본의 군사적 위협뿐만 아니라 서양 열강의 권고도 일정 부분 작용했습니다. '유럽 대전' 중이던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은 중국에게 일본과의 무력충돌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결국 중국은 5월 9일, 제5호를 삭제한 나머지 전부를 일본의 요구대로 승인합니다. 이후 5월 9일이라는 날은 중국에서는 '국치國恥 기념일'로 중국인들이 마음에 뼈아프게 새겨지게 됩니다. 훗날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했던 7월 7일, 1931년 '만주사변'이 개시되었던 9월 18일 등도 국치기념일에 포함됩니다. 국치기념일은 중화민국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에는 없습니다."(203-5)


제4장 세계대전 : 그 영향


전후 각국의 군비 경쟁이 치열해지자 군축을 목적으로 1921년 11월부터 개최된 워싱턴 회의는 "국제질서 차원뿐만 아니라 일본 입장에서도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먼저 회의 개최지가 '세계대전'의 강화회의가 열렸던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바뀐 점이 상징적입니다. 이때부터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국제회의를 여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워싱턴 회의에서는 해군군축조약 이외에 미국·영국·프랑스·일본의 4개국 간에 태평양 섬 지역에 관한 '4개국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약의 제4조 규정에 의해 1902년부터 지속되어오던 영일동맹도 여기서 끝을 맺습니다. 이 시점부터 일본은 영국이라는 동맹국을 잃고 해도海圖 없는 항해를 하게 됩니다. 의화단전쟁에서 벌인 활약으로 대영제국의 '주니어 파트너'로 자리매김한 이래 영국을 방패막 삼아 국제적인 지위 향상을 꾀해오던 일본의 20년 세월은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223)


"일본은 '대전경기大戰景氣'로 경기가 활성화되었지만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른바 '휴전 쇼크'로 인해 주가가 폭락합니다. 그런데 1919년 후반부터는 주가가 다시 상승해 대전 기간을 웃도는 맹렬한 '열광적 호경기'에 돌입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흔히 말하는 '버블'인데, 거품이 꺼지는 것도 빨라서 이듬해 1920년 3월 15일 주식 대폭락을 계기로 '전후공황'이 일본사회를 엄습해옵니다. 이때 대전 중에 크게 이익을 본 회사나 이류·삼류 재벌 등의 대부분이 휘청거리게 되고 기업이 도산하며 은행 고객이 대규모로 예금을 찾아가려는 '뱅크런bank run' 소동이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전후공황'의 원인은 전쟁을 끝낸 열강들이 해외수출을 늘리려는 정책을 폄으로써 대전 중에 이른바 '어부지리'로 이익을 내고 있던 일본에 대한 수출이 감소한 것과, 대전시기부터 계속되어 오던 과잉생산과 '버블'의 반동에 따른 것이었습니다."(233-4)


# 간토 대지진 발생(1923.9.1)


"1929년 10월 24일 월가의 주가 대폭락은 바로 일본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남미·북미 및 동유럽·북유럽을 돌아 이듬해 1930년 7월에 생사 가격이 대폭락하는 형태로 세계공황의 영향을 일본도 받게 됩니다." "사업 축소, 연이은 도산, 실업자 급증, 노동쟁의 발생 등 전체적으로 '쇼와 공황'으로 불리던 이 공황은 이때까지 일본이 경험한 공황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세계 다른 나라의 상황도 살펴보면 미국에서 발생한 공황은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 유럽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독일은 '세계대전'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미국의 투자에 의존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공황으로 인해 미국에서 투자를 끊자 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힙니다." "독일에서는 실업자의 불만이나 배상금 부담에 대한 원망이 치솟아 선거에서 나치스 당이 제1당이 되고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수상에 취임합니다. 이로써 이상적이라 일컬어지던 바이마르 헌법이 짓밟히는 형국을 맞이합니다."(244-5)


# 불황과 테러, 우경화의 결합


종장終章 다음 세계대전 : 그 징조


"1941년 11월 5일 어전회의에서 일본은 '대동아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태평양전쟁 개전의 길로 나아갑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전 문제를 생각할 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일본은 공습과 원폭으로 미국에게 졌다고 착각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은 중국에게도 졌습니다. 이 점은 패전 당시 중국대륙에 남아 있던 일본육군병력이 105만 명 이상이었던 것을 봐도 분명합니다. '지나사변'이 '대동아전쟁' 중에도 계속되고 있었다는 점도 제대로 이해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1945년 아시아 태평양전쟁 종결 조칙이 발표되기까지의 역사를 후지무라 미치오는 그의 명저 『청일전쟁』에서 이미 '중일 50년전쟁'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저도 후지무라의 견해에 동의하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과 중국을 포함시켜서 평가하자면 이 반세기를 '동아시아 50년전쟁' 시대라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2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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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 푸른역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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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본 사람들이 청일전쟁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치른 전쟁이었다고 배웠을 것이다. 청일전쟁의 목적을 나라 안팎에 밝힌 선전조칙(宣戰詔勅)에도 "조선은 (일본)제국이 처음에 가르치고 이끌어 열국의 대열에 들게 만든 독립된 나라다. 그런데도 청나라는 조선을 속방이라고 칭하여 음으로 양으로 그 내정에 간섭하니·····제국이 솔선해서 제 독립국의 대열에 들게 한 '조선의 지위'와 '그것을 표시하는 조약'을 업신여기는 청조 중국의 잘못된 욕망 때문에 일본은 부득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청일전쟁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여기는 일본과, '속국'이라고 여기는 청나라가 벌인 전쟁으로, 조선을 '속국'이라고 한 청조 중국은 '야만국'이며 일본은 '문명국'이다. 청일전쟁은 '야만'과 '문명'의 전쟁이었다고 곧 떠들썩하게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처음 행사한 무력은 다름아닌 그 독립을 위해 싸운다던 조선의 왕궁을 향해서였다."(59-60)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자유민권운동이 쇠퇴하면서 중국에 대한 적대적인 강경론이 우세해지고 있었다. 청일전쟁 발발 10년 전인 1884년 일본의 후원을 받은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서울에 주둔한 중국 군대에게 격파되어 실패로 끝났고, 김옥균 등은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중국에 대한 적대감과 일본의 국권확장 주장이 국민들 사이에서도 급속히 퍼졌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탈아론(脫亞論)'을 외친 것도 갑신정변 다음해의 일이다. 더구나 청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894년 3월 김옥균이 상해에서 조선의 자객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청에 대한 일본의 적대감정은 한층 높아갔다. 따라서 조선의 농민반란을 이유로 일본군이 출병하자 여론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신문도 적극적으로 전쟁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은 구미 열강의 (간섭) 움직임이었다."(61)


"그래서 조선주재 일본공사 오토리 케이스케가 생각해 낸 방법이, 청한 종속문제를 끄집어 낼 것이 아니라 조선 정부에게 터무니없이 무리한 난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즉 1876년 조선 정부가 일본과 맺은 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서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로서·····"라고 약속한 것을 들어, 지금 청조 중국의 군대가 "속방을 보호한다"라는 이유로 주둔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다. 조선은 청국의 속국인가 독립국인가, 독립국이라면 청국군을 국외로 몰아내야 하며, 조선에 그럴 힘이 없다면 일본군이 대신해서 몰아낼 것이므로 조선 정부는 일본에게 '청군 구축'을 의뢰하는 공식 문서를 보내라며 정부를 압박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미 7월 12일 청조 중국에 대한 영국의 조정 공작이 실패하자 전쟁을 시작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19일 대본영(大本營)도 조선에 있는 일본군에게 "청국군이 늘어나면 스스로 결단을 내리도록 하라"며 개전을 허가하였다. 조선왕궁점령은 이렇게 해서 계획되었다."(62-3)


'공간전사'인 《메이지 이십칠팔년 일청전사》 제1권은 조선 국왕이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충돌로 서로 사격하게 되어 국왕에게 걱정을 끼친 것을 사죄하고, '국왕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보도는 사건 직후부터 일본은 물론 나라 안팎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일청전사》 초안에 분명히 나타난 바와 같이 국왕은 일본군에게 협박당하고 있었으며, 국왕을 지키고 있었던 이들은 조선 병사들이었다. 더욱이 이 위급한 때에 국왕측은 '외무독판이 지금 오토리 공사에게 가서 담판 중이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 문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며 일본병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야마구치 대대장은 "문안에 있는 조선 병사의 무기를 인도하면 응할 것이다"라고 대답했지만, 국왕측이 듣지 않자 '칼을 빼들고 군대를 지휘하고 질타하여 일본병을 문안으로 돌입'시키려고 했던 것이다."(76-7)


"일본군이 왕궁을 점령한 7월 23일 오전 11시에 국왕의 부친인 대원군 이하응이 일본군 보병 제11연대 제6중대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왕궁으로 들어왔다. 일본측은 왕비인 민비 일족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대원군을 추대하여 민씨 일족을 정권에서 배제하려고 했다." "일본 공사관의 스기무라 후카시 서기관은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는 대원군에게 "일본 정부의 이번 거사는 실로 의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일이 성사된 다음 조선국의 땅을 한 치도 빼앗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을 전했다. 어떻게 하든지 대원군을 끌어내서 민씨 일족을 궁정에서 몰아내고, 국왕을 일본 지배하에 두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조선왕궁점령의 최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마지못해 요청에 응하여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왕궁으로 들어간 것이 오전 11시였다. 이어서 오토리 공사도 궁전으로 들어와 조선 정부는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83-4)


"조선 출병 이후 군사 관련 보도는 도쿄 발은 물론, 현지 보도도 일본 정부와 군의 엄중한 관리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일본 국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렇게 걸러진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언론 기관은 신문지조례를 비롯하여 여러 법률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 파병 직후부터는 군사에 관한 기사 게재에 대한 내무성 경보국의 '주의 구두전달'(6월 5일)이 있었고, 또 육군성 제9호·해군성령 제3호(모두 6월 7일) 등에 의해 엄중하게 통제되었다. 〈오사카아사히 신문〉의 기사 가운데 "이상 전보 세 개 중 23일 발은 모두 그날 접수했지만 즉각 독자에게 보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든가,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의 "위 확실한 보도는 육군성 검열필"이라는 기록은 그 같은 통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 내무성과 육군성·해군성 등은 단순한 통제뿐 아니라 '꾸민 이야기'를 흘려 정보를 조작하기도 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사실인 듯이 보도한 7월 25일자 기사는 그 같은 정보 조작의 한 예다."(128-9)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에서는 "미국과 싸운 일은 잘못되었지만, 청일·러일전쟁까지는 좋았다"라고 하는 역사관이 지배적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책임에 대해서도, 그 주요한 책임은 일본의 군부, 특히 육군에 있으며, 그 군인들이 "위대했던 메이지 시대 선배들의 작업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쪽에는 군도(軍刀)를 차고 위압을 가하는 거친 군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국가의 앞날을 우려하여 고뇌하는 자유롭고 합리주의적인 시민들이 있는 듯한 역사 인식, 그리고 양심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힘이 없는 후자의 사람들이 군인 집단에 맞서 힘으로 지탱하지 못해 굴복하는 가운데 전쟁을 향한 길이 준비되고 있었다는 역사 인식이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단지 천황과 그의 측근 그리고 일본의 보수 정치가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들조차 이와 비슷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현실에서 자주 경험한다."(161-2)


"오늘날까지도 "일본은 청일·러일전쟁 무렵까지는 국제법을 잘 지켰다"는 목소리는 일본에서 끊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한층 목청을 돋우기까지 하고 있다. 시바 료타로가 죽고 나서, ('좋은 시대 메이지'로 대표되는) '시바 사관'을 찬미하는 소리가 한층 더 높아진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다." "시바는 정체와 부패로 얼룩진 조선 왕조와 비교하여 일본의 '메이지를 찬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시바가 죽은 후 일본의 저널리즘이 조잡하고도 일방적으로 '시바 찬가'를 선전할 때, '메이지 찬미'와 극에 위치한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 사실 그리고 그에 저항했던 조선과 중국의 민족적 각성의 역사는 일본인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 현대사상의 동향은 청일·러일전쟁 승리라는 그늘 뒤에서 일본이 조선과 중국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그리고 조선과 중국에서는 이러한 침략과 패배에 대항하여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애써 감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167-8)


청일전쟁의 선전조칙(詔勅)이 나온 지 채 열흘도 되기 전에 육해군 참모회의에서 남방 작전 구상이 논의된다. "그곳에는 '동아의 평화를 교란할 염려가 있는 영국'을 견제하려면 영국의 '화심을 안고 있는 홍콩'을 제압할 수 있는 팽호도의 영유가 꼭 필요하고, 팽호도의 안전을 위해서는 '타이완을 병유'하지 않으면 안 되며, 다시 마음껏 '구주 열국'과 경쟁하여 '동아시아에서 자웅을 다투기' 위해, 기회를 틈타 필리핀을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상까지 있었다. 필리핀 점령까지 구상한 이 같은 논의가 참모들 사이에서 오간 것으로 당시 정부의 대외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청일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일본군의 중추에서 이러한 논의가 거듭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무적 황군의 신화'가 생기고, 비합리적인 전략으로 내달린 태평양전쟁으로의 길이 청일·러일 두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172-3)


"'무적 황군의 신화', 비합리적인 전략 포로의 학대 등 태평양전쟁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타락한 일본군의 모습을 보며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청일·러일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일본의 침략을 받아 전장이 됐던 조선과 중국의 입장을 고려하는 관점이 거의 무(無)에 가깝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군과 일본 정부 지도자는 물론 저널리즘과 일반 국민여론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조선인과 중국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일본 정부와 일본군은 그들의 저항에 어떻게 반응했는가와 같은 문제에 대한 고려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점이 훗날 무모한 침략과 조선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국민에 대한 학대로 이어진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을 당했던 조선으로서는 그 나라 군대가 다시 몰려와 나라의 상징인 왕궁을 점령했으니, 조선의 관야에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는가. 조선 민족의 눈으로 그 일을 목격한다면 사건의 중대성을 자연히 알 수 있을 터이다."(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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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배신 - 착한 유전자는 어째서 살인 기계로 변했는가
리 골드먼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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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인류를 생존시킨 네 가지 형질의 비밀


1장 우리 몸은 어떻게 지금처럼 프로그래밍되었을까


"DNA의 양은 각 염색체에 따라 다르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각각 32억 쌍씩 받아 모두 합치면 64억 쌍의 뉴클레오티드(DNA를 구성하는 단위 분자)가 포개어 합쳐져 이중 나선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64억 쌍은 보통 '염기쌍'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누군지를 규정하는 단어(유전자, 즉 유전 형질을 발현시키는 인자)를 이루는 글자들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우리의 염색체 DNA에는 거기에 호응하는 RNA를 위한 암호를 가진 약 2만 1000개의 유전자가 들어있다. 또 RNA에는 우리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데 꼭 필요한 특정 단백질을 만드는 암호가 들어 있다. 놀랍게도 이 2만 1000개의 유전자는 우리가 가진 염색체 DNA의 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또 다른 75퍼센트 DNA에 들어있는 1만 8000개의 유전자는) 단백질 암호화 유전자를 활성화 또는 억제하거나 단백질 기능 자체를 제어하는 신호를 보내는 기능을 한다. 나머지 20퍼센트 정도의 DNA는 아직 그 기능이 밝혀지지 않은 정크DNA이다."(31-2)


"우리는 뇌를 사용해 환경에 대단한 변화를, 그것도 이전에는 예측조차 할 수 없었던 속도와 방향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반면에 세대가 흘러도 이전 세대의 DNA를 '복사기로 복사하듯' 완벽하게 반복하도록 만들어진 우리 신체는 계속해서 느린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우리의 유전자가 현대의 변화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계산은 간단하다. 1000명 중 1명이 가지고 있는 유전적 돌연변이가 10세대(약 200년), 즉 산업 혁명이 시작된 뒤부터 지금까지 기간 만에 인구 전체에 퍼지려면 생존에 엄청나게 유익한 돌연변이여야 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유전자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지닌 사람이 자손을 가질 확률이 30배 이상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우리 모두가 전례 없는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상황뿐이다. 예를 들어 인류 전체가 HIV에 감염되었는데 치료할 방법이 전혀 없는 그런 시나리오 같은 것 말이다."(65)


2장 굶주림, 음식 그리고 비만과 당뇨라는 현대병


"지구상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부터 인간은 몸에 필요한 열량을 제공하는 음식을 간절히 원했다. 우리는 많은 양의 음식을 섭취할 능력이 있어서, 음식이 풍부할 때 과식을 해서라도 남은 열량을 지방으로 축적해 다음에 찾아올 기근을 이겨낼 수 있다. 또 다양한 음식을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로 바꿀 능력도 갖추고 있다. 굶주림은 개인뿐 아니라 생물 종 전체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기에 우리의 본능과 인체 내 조절 장치는 전부 과식을 해서라도 당장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흡수하는 쪽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기울어 있다. 인체는 손에 넣을 수 있는 음식이 늘 넘쳐나는 상황을 예상해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않다. 특히 사냥이나 채집을 하면서 엄청난 열량을 소비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음식은 아예 계산에 들어 있지도 않다. 그 결과 꾸준한 식량 공급이 확산되면서 비만과 당뇨병 같은 문제도 함께 확산되기 시작했다."(72)


"배가 고프다는 것은 시상하부가 알려 주고, 배가 부르다는 것은 장에서 보내는 피드백이 알려 준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음식을 먹도록 만드는 것은 시상하부도 장도 아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은 바로 미각(입맛)이다. 미각은 혀에 있는 세포 기관인 미뢰(맛봉오리)에서 시작된다. 우리 혀 표면에는 수천 개의 미뢰가 자리 잡고 있다. 혀 뒤쪽 골진 곳, 혀 양쪽 가장자리, 그리고 입천장까지 모두 이 미뢰가 깔려 있다. 미뢰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맛을 감지하기 때문에, 혀끝으로만 뭔가를 핥는 것은 제대로 된 맛을 다 느끼기에 적당한 방법이 아니다. 포도주 감정가들이 포도주 한 모금을 입 전체에 굴려 혀와 입천장에 모두 닿도록 하는 것은 그저 잘난 척하려는 게 아니라 근거 있는 행동이다." "놀랍게도 어떤 유형의 맛에 특화된 미각 센서들 각각은 그것들이 어느 곳에 위치해 있든 상관없이 모두 뇌의 정해진 부분─단맛 센터, 감칠만 센터, 짠맛 센터, 쓴맛 센터, 신맛 센터─으로 정확히 메시지를 보낸다."(92)


"건강한 사람이 살찌기보다 살빼기가 실제로 더 어려운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살이 빠지면서 필요한 열량도 줄어든다. 인체는 체중의 1퍼센트가 감소할 때마다 20칼로리를 덜 소모하게 된다. 둘째, 거기에 더해 체중이 감소할 때, 얼마나 살이 쪘는지에 상관없이 입맛을 돋우는 적어도 일곱 가지의 서로 다른 호르몬과 분자의 분비가 상승한다. 이런 물질의 분비는 한번 높아지면 그 수준에서 몇 년 동안 지속된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생존하는 데는 아주 유용한 형질이었지만 살을 빼려는 현대인에게는 커다란 장애물이다. 이전보다 열량이 덜 필요한데 더 배가 고파지면 원래 체중이 얼마냐에 상관없이 살빼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 셋째, 체중을 유지하려는 이러한 신체 내부의 요인을 생각하면, 애초에 살이 찌지 않도록 하는 쪽이 한번 쪘다 빼는 쪽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133)


"항상 불확실한 식량 공급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몸은 반복되는 아사의 위협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진화했다. 우리의 미뢰는 열량 밀도가 높은 지방, 당, 단백질을 원하도록 만들어졌다. 소장과 대장은 섭취한 음식, 특히 원래 형태에서 분해되어야 하는 음식에서 영양소를 최대한 흡수한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가능할 때마다 과식을 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어서 장래에 있을지 모르는 식량 부족에 대비해 지방을 저장한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너무 뚱뚱해지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무거운 사람은 가볍고 건강한 사람보다 같은 일을 하는 데 열량을 더 많이 소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만이 되기 쉬운 유전적 성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유행병처럼 퍼진 비만이 전 세계 인류의 게놈에 갑자기 변화가 와서 생긴 현상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간단히 말해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열량을 섭취하는 대신 운동은 덜 한다는 것이다."(154-5)


# 구석기 식사 목록에 없는 것들 : 동물 유제품, 곡물, 정제 설탕, 정제 식물성 기름, 알코올 


3장 물, 소금 그리고 고혈압이라는 현대병


"물을 충분히 마시지 않으면 탈수 증상이 나타나고 혈압이 떨어진다." "탈수가 되면 90퍼센트가 물로 이루어진 액체 성분인 혈장이 줄어들어 전체 혈액량이 감소한다. 처음에는 혈액량이 줄고 혈류 속도가 감소하는 것을 상쇄하기 위해 동맥이 좁아진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덜 나오면 수압을 유지하기 위해 호스 끝에 달린 노즐의 구멍을 좁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면 그렇게 유지하는 압력마저 떨어진다. 혈압이 떨어지면 우리는 현기증이 나거나 기절하며, 낮은 혈압으로 인해 뇌와 다른 중요 기관들로 충분한 양의 혈액이 공급되지 않으면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 "그런데 우리는 순수한 물만으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소변과 땀으로 소금도 잃기 때문에 염분을 섭취해야 한다. 신장은 몸안이 너무 싱겁거나 짜지 않도록 불필요한 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동시에 적절한 양의 소금을 배출한다. 한편 소금은 필요한 물, 또는 소량의 여유분 물을 몸속에 비축하도록 돕는다."(166-7)


"견줄 데 없이 월등한 땀 흘리는 능력은 인간이 끈기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다. 격렬한 육체 활동 중에 더 정상적인 또는 정상에 가까운 체온을 유지하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 몸이 땀을 분비하면 피부 표면에 맺힌 물을 증발시키기 위해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에너지는 몸에서 열의 형태로 배출이 되므로 체온이 식는다." "땀을 흘리는 것이 인간에게 이토록 중요하므로 우리는 다른 포유류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을 마셔야 한다. 탈수증과 저혈압은 무척 위험할 수 있어 우리 조상들은 이 문제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리고 앞으로 흘릴 땀을 대비한 커다란 물탱크가 몸 자체에 없으므로 인체는 뇌, 폐, 간, 부신 등에서 나오는 각종 호르몬의 도움으로 약간의 잉여 수분(그리고 거기에 항상 따르는 소금)을 몸 전체에 고루 분산해 보유한다." "또 신장을 제어해 소금과 물이 부족할 때는 보존하고 너무 많으면 배출하도록 한다."(173-5)


"몸에 물이 부족해지면 신장으로 들어가는 혈액의 양이 줄어들고, 그러면 신장은 체내 염도를 정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적정 비율의 나트륨과 물을 몸속에 보존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데, 그 결과 신장에서 만들어지는 소변의 양이 줄어든다. 경미한 탈수 현상이 생겼을 경우 우리는 소변을 통한 수분 배출을 하루에 1쿼트(약 0.95리터) 이하로 줄여 몸속에 지니고 있으며 독이 될 폐기 물질을 배출할 수 있을 정도로만 소변을 만든다. 몸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면 동맥과 정맥의 근육들이 수축하는 방법으로 적절한 혈압을 유지해 혈액량이 줄어도 심장으로 돌아가는 피의 양을 증가시킨다. 한편 심장은 더 힘차고 빨리 박동해 줄어든 혈액이 더 빨리 몸을 순환하도록 한다." "나트륨과 물의 경우 과잉 보호가 주는 유리함은 간단하다. (몸에 나트륨과 물이 부족해서) 혈압이 너무 낮아지면 우리는 기절하거나 죽는다."(180-1)


"동맥이 점점 경화되는 현상은 두 가지 원인 때문에 벌어진다. 첫번째는 혈액이 흐르는 혈관 안쪽의 얇은 층에 주로 콜레스테롤로 이루어진 지방 플라크plaque가 엉겨 붙으면서 표면이 딱딱해지는 경우다." "모든 동맥에는 작은 근육들이 한 겹 들어 있어서 수축과 이완 작용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동맥 경화의 두 번째 원인이다. 이 근육들이 수축하면 동맥은 혈액의 흐름에 더 크게 저항하고 이 때문에 혈압이 높아진다. 이러한 수축 작용은 탈수증이 생겼을 때 혈압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능이다. 그런데 혈압이 약간이라도 높아지면 이 근육층은 또 다른 이유로 수축한다. 늘어난 압력으로 인해 너무 많은 혈액이 중요 장기에 쏟아져 들어가 손상을 초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처럼 현대인의 고혈압 중 약 95퍼센트는 '본태성本態性 고혈압'으로 분류된다. 이 용어는 나트륨 조절 장치(나트륨을 보존하거나 동맥을 수축하는 일을 맡은 호르몬)가 잘못 맞춰져서 생긴 고혈압을 가리킨다."(203-4)


4장 위험, 기억, 두려움 그리고 불안과 우울증이라는 현대병


"스트레스는 뇌하수체를 자극해 신장 가까이 위치한 부신에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을 분비하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아드레날린이 대량 분비되면 맥박 수와 혈압이 증가하고 정신이 더 바짝 나서 싸우거나 도망할 준비를 재빨리 갖출 수 있다. 생리 작용에 따라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자연적으로 분비되면, 우리는 정신이 더 기민해지고, 몸속에 소금을 보존하고, 감염에 맞서 싸울 능력이 더 강해진다." "스트레스는 우리 세포 내의 칼슘 조절 장치를 손상시킬 수 있다. 심장, 근육, 뇌 등을 이루는 세포의 칼슘 조절 장치가 손상되면 망가진 자동차 엔진에서 기름이 새듯 세포에서 칼슘이 새어 나온다. 칼슘 조절 장치는 뇌가 기본적인 투쟁/도피 반응을 일으키는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스트레스로 손상이 가면 학습과 기억에 문제가 생긴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우리는 생각을 명료하게 하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릴 확률이 높아진다─그로 인해 스트레스가 더욱 쌓여서 악순환에 들어간다."(245-6)


"잠재적 위험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을 과대 평가함으로써 부적응 과민 반응과 부작용을 경험하듯, 우리는 실제로 직면하는 위험에 대해서도 과민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해결 불가능한 상황이나 이길 수 없는 도전에 부닥쳤을 경우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생존에 가장 유리한 전략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결과로 나타나는 부작용인 낮은 자존감은 사회적 과잉 위축과 지나친 슬픔을 초래할 수 있다. 구석기 시대에는 슬픈 감정이 더 강한 적으로부터 살해당하는 것을 방지하는 순종적인 태도의 일부를 이루는 유용한 방어 기제였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슬픔은 육체적 대립 상황과는 관련이 없는 다양한 상실로 인해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슬픔은 어떤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일시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슬픈 감정이 2주일 이상 계속되면 '우울증'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울증은 인류가 타고난 심리적 생존 본능이 낳은 가장 심각한 부작용이다."(250-1)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되 미치게 하지만 않는다면 기억에 기초한 두려운 감정은 적절하고 유용하다. 그러나 과도한 스트레스가 쥐의 뇌에 과민 반응을 촉발하듯,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일상 활동만으로도 과도한 공포의 원인이 된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트라우마를 준 사건을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끊임없는 두려움에 대한 반응 탓에 보통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두려움 반응을 주로 관장하는 물질인 가스트린 방출 펩티드의 수치도 낮은 경향이 있다. 또 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기억을 검색해 다시 꺼내는 대뇌 측두엽의 해마를 비롯한 뇌의 특정 부분들의 크기가 작아져 있다. 이러한 뇌 구조 변화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인지 결과인지 아직 모르지만, 이 사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뇌의 생리학적·해부학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다."(255-6)


"현대인이 타인에게 살해당하기보다 자기 손에 죽을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구석기 시대 조상들을 보호했던 두려움과 불안, 순종적 태도가 안전한 세상에서 사는 우리에게 너무 과도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현대 문명 사회의 규범에 따른 경쟁에서는 상대방은 죽이고 자신이 죽는 것은 피하는 일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 돈, 자원, 위상을 얻기 위해 경쟁하지만 현대 사회의 이런 경쟁이 생사를 가르는 투쟁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의 20만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서로를 죽일 더 나은 방법을 개발하고 죽음을 면하는 더 나은 방어 전략을 세우는 진정한 의미의 '군비 경쟁'을 해 왔다. 좋은 소식은 방어 쪽이 이기고 있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경쟁이 방어 쪽으로 너무 유리하게 기울어 살해당하지 않으려는 방어 기제가 불안과 우울증을 유발해 원래 피하려 했던 폭력 자체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288-9)


5장 출혈, 응고 그리고 심장 질환과 뇌졸증이라는 현대병


"혈액 응고 신속 대응 체계에는 서로 독립적이지만 깊이 연관된 두 가지 경로가 있다. 하나는 혈소판에 기초한 체계다. 혈소판은 평소에는 혈액 속을 떠돌다가 혈관 안쪽 세포 방어벽에 손상이 가면 노출되는 특정 수용체에 자석처럼 재빨리 가서 붙는다. 각 혈소판은 노출된 수용체와 결합되면서 유인 물질을 분비해 다른 혈소판들에게 동맥이나 정맥에 난 구멍을 막는 전투에 신속하게 참가하도록 독려한다." "철분 부족형 빈혈이 생기면 흔히 혈소판 수치가 정상 수준 이상으로 증가한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낮아져 더 이상 많은 피를 잃으면 안 될 때 혈소판이 자연스럽게 증가해 출혈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두 번재 혈액 응고 경로는 열 가지가 넘는 혈액 응고 단백질이 도미노처럼 연쇄 반응을 일으켜 일종의 섬유 그물망을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이 그물망은 혈관 벽에 난 더 큰 상처를 때우는 동시에 혈소판들이 와서 쌓일 수 있는 기본 구조물 역할을 한다."(306-7)


"우리가 섭취한 지방은 소장에서 흡수된다. 지질이라고 부르는 이 지방은 수용성이 아니기 때문에 혈장에서 바로 녹지 않고 지질 단백질이라고 부르는 수용성 물질에 실려 이동한다." "(동맥 벽에) 침착된 콜레스테롤의 양은 우리가 먹는 포화 지방의 양에 달려 있다. 포화 지방을 운반하기 위해 간에서 지질 단백질을 만들 때 쓰이는 재료가 바로 LDL 콜레스테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레스테롤 수치는 혈액 내 지방량을 감지하는 기능을 하는 간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된다." "지질 단백질을 과잉 생산하는 경향은 아마 구석기 시대에는 중요한 기능이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어쩌다가 한번씩 한꺼번에 많은 양의 식사를 해서 흡수한 지방을 저장해 핏속에서 돌리다가 먹을 것이 충분치 않을 때 바로 쓸 수 있는 원료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지질 단백질 운반 용기를 많이 만들어 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 몸은 필요한 양보다 너무 많은 지질 단백질과 나쁜 콜레스테롤을 만들어 내고 있다."(322-4)


"콜레스테롤과 기타 지질이 동맥 안쪽 벽, 특히 관상 동맥(심장 동맥) 안쪽 벽에 축적되면 혈관이 좁아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완전히 막히는 일은 드물다. 대신 이 지방질 침전물은 표면 플라크를 형성한다. 이 플라크는 쉽게 균열되거나 파열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세포 한 겹으로 이루어진 동맥 안쪽 보호막을 손상시켜 그 아래 동맥 조직을 노출시킨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동맥은 원래 계획에 따라 행동을 개시한다─혈소판과 응고 단백질을 불러들여 상처를 복구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에 따라 생긴 혈전은 손상이 간 곳을 메울 뿐 아니라 피가 동맥 하류 쪽으로 흐르는 것을 부분적으로, 때로는 전적으로 막아 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세포 한 겹짜리 동맥 보호막에 난 흠집 때문에 피를 많이 흘려 죽지는 않겠지만, 혈전 때문에 피의 흐름이 막혀 혈액 공급을 받지 못한 기관의 세포들이 죽을 수도 있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326)


"인체의 혈액 응고를 관장하는 조절 장치가 미세 조정 끝에 고정되었던 구석기 시대에는 수천 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장거리 자동차, 비행기 여행으로 인해 생긴 다리 정맥의 혈전이 폐로 옮아가 목숨을 앗아갈 가능성은 너무나 먼 일이었다. 아울러 식생활과 신체 활동의 변화, 혈압 등으로 동맥이 좁아지고 혈전이 생길 확률이 높아져 심장 마비와 뇌졸중을 야기하는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예측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피의 응고 기능이 필요하다. 심각한 부상뿐 아니라 분만과 일상 생활에서 생기는 자잘한 상처로 목숨을 잃지 않으려면 없어서는 안 될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혈과 응고 사이를 미세 조정해 자연이 결정한 균형은 현대인 입장에서는 응고 쪽으로 너무 치우친 셈이 되었다. 오늘날 미국에서 출혈로 인한 모든 사망보다 과도한 응고로 인한 사망이 네 배 이상 많고 심장 마비와 뇌졸중이 4대 사망 원인에 포함된 것은 이 때문이다."(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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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 - 맛, 음식, 요리, 사피엔스, 그리고 진화
조너선 실버타운 지음, 노승영 옮김 / 서해문집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해부학적 근거에 따르면 최초의 요리사는 호모 에렉투스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그 기나긴 역사에서 요리가 시작된 것은 언제일까? 여기에 실마리를 던지는 유전학적 증거가 하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인간 아닌 영장류의 턱 근육을 강화하는 MHY16이라는 유전자가 200만 년 전 이전에 인류 계통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최초의 호모 에렉투스는 그 시기에 이미 요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강한 턱 근육은 필요가 없어졌거나, 점점 작아지는 이빨이 부서질 위험만 가중시켰을 것이다. 화석과 고古고고학적 증거가 계속 발견되고 있으니 정확히 언제 요리가 시작되었는가의 수수께끼와 비교하면 '왜'라는 질문의 답은 훨씬 분명하다. 음식을 요리하면 소화하기가 쉬워지고 더 많은 에너지를 끄집어 낼 수 있으며 많은 독성이 중화된다. 그리하여 요리는 사람족 진화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열었다."(43)


"뇌는 에너지에 굶주린 장기다. 인간의 뇌는 몸무게의 약 2퍼센트밖에 되지 않지만 휴지기 에너지 소비량은 전체의 20퍼센트를 차지한다. 이 에너지의 대부분은 시냅스라는 전기적 연결부에서 쓰이는데, 시냅스는 신경 세포와 신경 세포를 연결하며 뇌 기능의 주춧돌 역할을 한다. 단위 무게로 따지면 소화관도 뇌만큼 에너지에 굶주렸지만, 우리의 뇌는 비슷한 크기의 영장류보다 훨씬 큰 데 반해 우리의 소화관은 훨씬 작다. 진화는 소화관의 효율을 높여 절약한 에너지를 더 커진 뇌에 쏟아부었다. 랭엄의 가설은 요리로 음식의 에너지 값을 증가시킨 덕에 뇌 진화로 인한 에너지 수요 급증을 작은 소화관으로도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화관이 연료 탱크라면 요리는 연료의 옥탄값을 높이는 셈이다. 최근에 대형 유인원의 대사율과 인간의 대사율을 비교했더니 인간의 대사율이 침팬지보다 27퍼센트 높았다. 따라서 우리는 고옥탄 연료를 쓸 뿐 아니라 이 연료를 더 빨리 태운다."(45)


"호모 사피엔스의 발원지인 아프리카 대륙은 네안데르탈인이 최후의 비둘기 만찬을 먹은 고르함 동굴로부터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불과 15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아프리카를 떠나면서 해협을 건너지도 비둘기로 배를 채우지도 않았다. 우리는 전혀 다른 경로를 따라 아프리카에서 퍼져 나갔으며 전혀 다른 음식을 먹었다."(50) "우리 종이 해안선을 따라 이동한 역사적 경로에는 먹다 버린 조개 껍데기가 군데군데 쌓여 있다. 북쪽의 북극에서 남쪽의 아프리카 남해안과 남아메리카 남단에 이르기까지, 썰물 때 홍합을 채집한 사람들이 버린 껍데기는 그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무엇을 먹었는지 잘 보여준다. 해산물은 뇌 발달에 중요한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하기에 인류 진화에 영양 측면에서 필수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오래된 조개더미는 16만 5000년 전 중석기 아프리카 유적에서 발견되었는데, 인도양이 멀리 내다보이는 이 동굴에 최초의 현생인류가 살았다."(56)


"경작하기에 알맞은 야생종이 한곳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것은 묘한 우연으로 보이겠지만, 여기에는 진화적으로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비결은 기후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강수량이 철마다 다르며 불규칙하다. 건조하고 강수가 불확실한 기후는 야생 식물이 작물화에 알맞게 진화하기에 유리하다. 첫 번째 특징은 짧은 수명이다. 수명이 짧은 한해살이 식물은 금새 자라 성숙하며 여름의 건조한 열기에 죽기 전 씨앗을 잔뜩 퍼뜨린다." "다산성은 이런 식물의 두 번째 유용한 특징이다. 한해살이 식물은 번식 기회가 한 번뿐이기 때문에 여러 해에 걸쳐 후손을 퍼뜨릴 수 있는 여러해살이 식물에 비해 가용 에너지의 더 많은 부분을 씨앗 만들기에 투입한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야생 한해살이 식물이 작물화에 안성맞춤일 수 있었던 세 번째 특징은 씨앗의 크기가 비교적 크다는 것이다. 건조한 기후는 큰 씨앗의 진화에 유리하다. 발아한 씨앗이 살아남으려면 물 공급원인 뿌리를 뻗어야 하기 때문이다."(69-70)


"밀, 보리, 귀리 등의 야생종은 익으면 이삭에서 낟알이 떨어지는 탈립shatter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래야 씨앗을 널리 퍼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이 모든 종의 자식에게 확산 수단을 부여한 것은 생존과 번식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식물이 작물화되어 재배되면 확산 방법이 달라진다. 이 경우에는 씨앗이 채집되어 재파종되는 식물이 자손을 가장 많이 남길 수 있다. 따라서 지속적인 수확과 재파종을 통해 선택되는 식물은 이삭이 여물어도 탈립하지 않는 식물이다. 작물화 초기 단계에는 야생에서 채집한 곡물과 경작지에서 재배한 곡물이 고고학 자료상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곡물이 작물화되면서 이삭의 탈립을 막는 유전자의 빈도가 인위적 선택을 통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탈립 이삭을 탈곡하면 야생 식물처럼 말끔하게 떨어지지 않고 가장자리가 삐죽빼죽하게 떨어져 나간다." "고고학 기록에서 에머밀은 이처럼 뚜렷한 작물화 흔적이 나타난 최초의 곡물이다."(71-2)


"진화 과정에서 기능을 잃은 형질의 유전자는 돌연변이가 누적되어 허깨비 같은 '위유전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위유전자는 한때 유용했던 유전자의 흐릿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고양이처럼 고기만 먹는 육식동물에서는 당을 맛보는 능력이 불필요해져서 T1R2 단백질의 유전자가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기르는 고양이에게 달콤한 설탕쥐를 줘도 녀석은 설탕 맛을 못 느낀다. 곰은 육식동물이지만 물열매(베리)도 먹기 때문에, 단맛을 느끼는 데 필수적인 T1R2 유전자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곰의 친척 대왕판다는 대나무만 먹기 때문에, 당은 느낄 수 있지만 감칠맛은 느끼지 못하며 T1R3 유전자는 기능을 잃었다. 바다사자는 먹이를 씹지 않고 통째로 삼키기 때문에, 감칠맛 수용체와 단맛 수용체가 둘 다 쓸모없어서 T1R군의 유전자 세 개가 모두 위유전자로 바뀌었다. 돌고래와 흡혈박쥐에서도 똑같은 진화적 유실이 독자적으로 일어났다(둘 다 먹이를 씹지 않는다)."(98-9)


"신맛은 쓴맛만큼 불쾌하지는 않으며 요리에서 더 중요하게 쓰인다. 신맛은 레몬과 덜 익은 과일의 시트르산이나 식초의 아세트산 같은 약한 산의 맛이다. 덜 익은 과일의 신맛은 분명한 역할이 있는데, 그것은 안에 든 씨앗이 세상에 나갈 준비를 마칠 때까지 동물이 과일을 먹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식초도 생물학적 억제제이지만 원리가 다르다. 과일이 가지에서 떨어지거나 젖이 유방에서 나오면 효모와 세균에 의해 발효가 시작된다. 발효는 공기가 없을 때 미생물이 당을 먹고 알코올(효모의 경우)이나 젖산(젖산균의 경우) 같은 노폐물을 배출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알코올과 젖산은 미생물의 단순한 노폐물이 아니라 다른 효모와 세균의 증식을 막아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한 전쟁 무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식품을 절여 보존하는 것도 발효를 같은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알코올 발효 과정에서 공기가 들어가면 환경 변화로 인해 아세트산균이 번성해 알코올을 아세트산(식초)으로 바꾼다."(103-4)


미각과 마찬가지로 화학 물질을 감지하는 체계인 "후각은 여느 감각처럼 뇌에서 지각되는데, 코안에 있는 수백만 개의 후각 수용체 세포가 신경 세포를 통해 뇌로 연결된다." "후각 수용체 단백질(OR)은 특정한 분자에 의해서만 활성화된다. 유전자가 다르면 수용체 단백질도 달라진다. 하지만 이 수준을 넘어서면 미각과 후각의 작용 방식에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쓴맛 성분을 감지하는 수용체와 그 유전자는 약 서른다섯 개인 반면, 후각 수용체 종류는 그 열 배를 넘는다. 약 400개의 유전자가 나름의 OR 단백질을 만든다. 하지만 쓴맛 수용체와 후각 수용체 사이에는 훨씬 중요한 차이가 있다." "모든 쓴맛 수용체 세포는 하나의 선으로 뇌에 연결되어 '퉤퉤'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만 전달한다. 후각 수용체 세포는 400개의 수용체 각각이 전용선을 따라 뇌에 연결된다." "후각은 음식과 섹스에 대해 훨씬 미묘하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므로 더 풍부한 전달 체계가 필요하다."(113-4)


"진화가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으려면 자연선택이 신무기와 새로운 방어 수단을 빚어낼 수 있도록 유전적 변이가 그때그때 공급되어야 한다. 덩이줄기를 다시 심어 재배하는 감자처럼 영양 생식으로만 번식하는 식물은 유전적으로 똑같기 때문에 천적에게 몰살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마니옥도 덩이줄기를 잘라 심는 영양 생식 방식으로 재배한다. 이 진화적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는 길이 바로 유성 생식이다. 유성 생식은 부모의 유전자를 새로 조합해 자식에게 물려주기 때문에 자식의 유전자는 부모와도 자식끼리도 다르다." "유성 생식은 유전적 변이를 유지해 작물이 유행병에 걸릴 위험을 줄일 뿐 아니라 다른 종과의 교잡을 가능하게 한다." "이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채소를 먹는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영양소, 특히 탄수화물 때문이다. 우리는 채소를 식용으로 바꾸기 위해 인위적 선택과 요리·가공으로 천연 방어 수단을 무력화했다."(172-4)


"(통각을 자극하는) TRP 수용체는 진화사적으로 아주 오래되었기에 척추동물뿐 아니라 곤충, 선충, 심지어 효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식물이 초식동물의 통각 회로를 해킹하려고 겨냥하는 수용체들이 우리의 감각에도 작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통각 수용체를 자극하고 다른 종에게서 회피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일까?"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는 수용체는 위험을 막는 방어 체계의 제일선에 불과하다. 그 화학 물질에 독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 우리는 그 자극을 회피하기보다는 즐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이 유익하고 자연선택에 의해 선호되는 이유는 "나한테 독 있어. 먹지마!"라는 식물의 허풍에 속지 않으면 많은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양이다. 작은 곤충이 독성 식물을 많이 먹으면 우리 같은 대형 동물이 같은 식물을 조금 먹는 것이 비해 몸무게당 더 많은 단위 독성에 노출된다."(189-90)


"과당fructose은 포도당과 함께 자당 분자를 이루는 쌍둥이로, 둘 중에서 더 달콤하고 더 치명적이다. 과당은 포도당보다 무게 대비 두 배 달고, 과일에 들어 있는 과당은 우리 같은 동물을 사정없이 유혹한다." "식품 및 음료 회사도 과일과 같은 수법을 쓴다. 그들은 효소를 이용해 옥수수 시럽의 포도당 일부를 과당으로 전환해서 고과당 옥수수 시럽(HFCS)을 만든다. HFCS는 아주 값싸고 아주 달고 맛이 기막히기 때문에 제조업체들은 많은 가공식품과 대부분의 소다에 HFCS를 첨가한다." "우리가 먹는 양과 식품 속 열량에 일어나는 변화를 조절하는 호르몬이 세 가지 있다. 그렐린ghrelin은 위가 비었을 때 신호를 보내고, 췌장에서 분비하는 인슐린은 혈당치를 줄여야 할 때 신호를 보내며, 지방 세포가 만드는 렙틴leptin은 지방 저장 용량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신호를 보낸다." "과당은 인체가 당으로 인식하지 못해 에너지 섭취와 저장을 제한하는 조절 호르몬을 활성화하지 않는다."(207-9)


"포도당은 인체의 모든 장기에서 연료로 쓰지만, 과당은 간에서만 대사할 수 있다. 따라서 포도당은 모든 장기가 나눠 쓰지만, 과당은 사실상 전부 간으로 간다. 말하자면 여러분이 음료수로 섭취한 열량의 절반이다. 간은 포도당 부하의 약 20퍼센트도 처리하기 때문에, 여기에 과당까지 감안하면 일반적인 가당 음료의 열량 중 60퍼센트를 간이 대사해야 한다. 과당은 간을 혹사한다." "뚱뚱해지는 것만 해도 충분히 나쁜 일이지만, 과당은 훨씬 은밀하고 흉악한 짓을 저지른다. 대사 증후군을 앓는 비만 환자에게 식단의 과당을 같은 열량의 녹말성 식품으로 대체하도록 했더니 몸무게가 줄고 9일 만에 대사 상태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과당이 대사 증후군에 미치는 영향을 열량 함량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대량의 과당을 정기적으로 섭취하면 간에 위험 수준의 지방이 쌓여 대사 증후군과 제2형 당뇨병의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210-1)


"포유류의 젖은 젖먹이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젖먹이를 보호하는 두 가지 상호 의존적인 기능을 하는 독특한 액체다. 영양을 공급하는 것은 젖에 들어 있는 단백질, 지방, 당(젖당), 칼슘, 기타 무기질이고 젖먹이를 보호하는 것은 항균 작용을 하는 여러 항체와 효소다. 이런 성분은 새끼 포유류가 갓 태어나 처음 먹는 젖인 초유에 특히 풍부하다. 초유에는 어미의 면역 세포도 들어 있다. 젖의 탄수화물 성분은 모든 세포가 이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당인 포도당이 아니라 젖당의 형태가 대부분인데, 이는 이례적 현상이다." "세상은 포도당에 굶주린 세균과 효모로 가득하지만, 젖당을 이용할 수 있는 세균은 몇 종류 안 된다." "새끼에게 유별난 당을 먹이는 데는 문제가 하나 있다. 당을 분해할 수 있는 유별난 효소가 새끼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끼 포유류의 위에는 바로 이 일을 하는 효소인 락타아제lactase가 들어 있다. 새끼가 자라 젖을 떼면 필요 없어진 락타아제는 분비량이 점차 줄다 아예 없어진다."(217-8)


"약 1만 1000년 전 서남아시아에서 소와 양을 가축화한 최초의 농부들은 고기뿐 아니라 젖도 이용했을 것이다." "요구르트는 젖산균 종균을 젖에 넣어 만든다. 젖산균은 대다수 세균과 (심지어) 우리 몸의 세포와 달리 젖당을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는 희귀한 능력이 있다. 젖산균은 젖당을 먹고서 생장 노폐물로 젖산을 배출한다. 유산균속이 젖당을 모조리 먹어치우기 때문에 이렇게 만든 요구르트는 젖당 내성이 없는 사람이 먹어도 안전하다." "치즈를 만들 때도 젖산균 종균을 쓰는데, 이 때문에 치즈도 젖당이 없다." "고고학 유적에서 발견된 사금파리의 젖 잔존물로 보건대 7000년 전에는 서남아시아 전역, 특히 소를 치던 곳에서 낙산물酪産物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그릇에 어떤 낙산물이 담겨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치즈보다는 요구르트였을 가능성이 크다. 치즈는 나중에 발전했기 때문이다. 치즈 제조 설비가 발견되는 것은 최초의 낙농용 도자기가 등장한 지 약 1000년 뒤다."(219-20)


"알코올이 우리를 단단히 사로잡은 것은, 좋든 나쁘든 우리가 독소인 에탄올에 내성을 진화시켰기 때문이다. 알코올은 이 점에서 그 밖의 향정신성 약물과 다르다. 아편, 대마, 코카인은 신경계의 천연 물질을 흉내 내어 뇌에 작용한다. 식물들이 오피오이드, 카나비노이드, 코카인 같은 향정신성 화합물을 진화시킨 것은 초식동물과의 군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였다. 이 성분들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은 동물들의 뇌 화학 구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헤로인 중독자는 양귀비·털애벌레 전쟁의 민간인 사상자다. 이에 반해 에탄올은 인체 대사에서 기능적 대응물이 전혀 없는 독소다." "에탄올과 여느 독성 물질의 차이점은 우리가 식품 속 에탄올에 아주 오랫동안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대형 유인원의 대표 메뉴가 과일 칵테일이니 말이다." "익은 과일이 있는 곳에는 효모가 있으며 효모가 있는 곳에는 알코올이 있다. 우리는 대형 유인원great ape이자 포도 유인원grape ape이다."(235-6)


"녹색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곡식의 줄기가 길고 가늘었다. 그래서 추수하기 전에 쓰러지기 일쑤였다. 소출을 늘리려고 비료를 주면서 더 웃자랐다. 곡식이 에너지를 씨앗이 아니라 잎과 줄기에 쏟아부었기 때문에 생산량은 늘지 않았다. 길고 가는 줄기는 야생에서 비롯한 진화적 유산이었다. 자연선택은 이웃 식물의 그늘에 가리지 않도록 높이 자라는 식물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밀, 벼, 옥수수 등 세 가지 주곡에서 녹색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줄기의 길이를 줄여 굵기를 늘림으로써 더 큰 이삭을 매달 수 있게 한 덕분이었다." "녹색 혁명은 식량 안전을 향상시켰을 뿐 아니라 기존 경작지의 소출을 증가시킴으로써 자연 서식지 1800만~2700만 헥타르를 (농지로 전환되지 않도록) 보호했다." "그러나 한 추산에 따르면 현재의 생산량과 2050년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생산량의 격차를 없애려면 수확량이 적어도 50퍼센트 더 증가해야 한다."(280-1)


"1차 녹색 혁명의 과제는 산업적 농업에 적응한 신품종을 육종하는 것으로 대표된다." "이에 반해 2차 녹색 혁명을 준비하는 식물 육종가들이 소출을 늘리기 위해 넘어야 하는 장벽은 더 복잡하다. 이를테면 과거의 관행적 관개로 인해 염화된 토양에서도 자랄 수 있도록 작물의 내염성을 개선하고, 가뭄과 고온에 대한 저항성을 키우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병충해와 맞서 싸워야 한다. 2차 녹색 혁명을 위한 과제는 1차 때보다 힘들지만, 우리가 쓸 수 있는 유전학적 수단은 (반半난쟁이 밀 품종을 탄생시킨) 볼로그와 1950년대 및 1960년대 작물 육종가들보다 부쩍 발전했다." "무엇보다 기대되는 것은 광합성의 기본 메커니즘이 충분히 규명되어 유전 공학을 통해 이를 부쩍 개선할 여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GM 기술은 실제로 혜택을 가져다준다. GM 기술은 작물의 생산량을 향상시키고 살충제 사용량을 감소시켰으며 심지어 질병으로 전멸할 뻔한 농작물을 구하기도 했다."(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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