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광시대 - 식민지시대 한반도를 뒤흔든 투기와 욕망의 인간사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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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경제 상황은 금광업의 활황을 훨씬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다른 산업도 함께 번성했다면, 금광업의 활황이 그처럼 돋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는 황금광시대이기 이전에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의 시대였다." "황금광시대를 관통한 대공황의 그림자는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황금광(黃金狂)시대가 이제 막 시작될 무렵인 1931년 겨울, 식민지 조선은 최악의 경제 위기 상태에 놓여 있었다. 물건은 팔리지 않았고, 곡식 가격은 떨어졌고, 사회는 어수선하고 불안했으며, 국경 너머 만주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대공황, 실업, 물가 폭락, 노동쟁의, 소작쟁의, 만주사변 등으로 얼룩진 아수라장 속에서 유독 금광업만이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금광업의 호경기는 너무나 이례적인 것이었던 나머지 '변태 경기'라 불릴 지경이었다."(44-6)


"황금광시대 조선에서는 '금광 출원증'이라는 일종의 광업권증서가 매력적인 투기의 대상으로 대두되었다. 1930년 이후 금광 출원이 급증한 것은 금을 캐겠다는 의도보다는 광업권을 확보하여 기십 기백 배의 가격으로 팔겠다는 투기적인 의도가 강했다. 즉, 황금광시대의 금광 개발자들은 프리미엄을 받고 매도하기 위해 광업권 확보에 혈안이 되었다."(71) "금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던 시기였지만, 투기꾼들은 하찮은(?) '금'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을 사로잡은 것은 오로지 '금광'이었다. 금광 거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활발했고, 이를 통해 십만장자 백만장자의 반열에 오른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엄청난 자본이 요구되는 것도, 그렇다고 발급 받기 위해서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닌, 그 자체로는 그저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광업권'이 두 해 동안 무려 87명의 십만장자 백만장자를 배출했으니 세상 물정 아는 이들에게 광업권 투기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76-7)


"일반적인 조선의 부자들은 금보다는 땅을 더 좋아했다. 땅을 팔아 금광을 사기는커녕, 금광으로 한몫을 챙긴 사람조차 땅 매입에 열을 올렸다. 금광으로 조선 굴지의 거부로 성장한 최창학과 방응모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토지를 사들였다. 최창학은 압록강변에 임야 수백만 평과 구성에 2천석지기 논이 있었고, 방응모는 수원에 대농장이 있었다. 조선부자들이 금광을 사지 않았다면 수십에서 수백만원씩을 주고 금광을 매입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바다 건너온 '왜인'들, 곧 미쓰이, 미쓰비시, 구라하 등 일본 굴지의 재벌들이었다. 이 시기 금광 투기꾼에게 '일본 재벌에게 금광 팔기'란 필생의 소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 불어 닥친 골드러쉬는 한반도의 천연자원, 식민지의 값싼 노동력, 일본의 자본과 기술, 그리고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금을 캐내고야 말겠다는 일본 정부의 결연한 의지가 결합된 결과물이었다."(84-6)


1930년 1월 11일, 근 13년 동안 금지되었던 금수출이 허용되었고, 일본은행·조선은행·대만은행 등 제국의 중앙은행에서는 금화와 지폐를 교환해주는 태환(兌換) 업무가 재개되었다. "몸에 금붙이 하나 지니지 않은 민초들조차 금해금에 대비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금수출을 금지하였다가 허용하면 '위체(爲替)' 가격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 위체는 금화 대신 대외 무역 거래의 결제에 이용되던 외국환 어음이었다. 위체 시세란 오늘날로 치면 환율에 해당한다. 여기서 금수출을 허용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드러난다. 그것은 금이라는 '상품'을 해외에 팔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화폐 가치를 금에 고정시키는지 아니면 시장 자율에 맡기는지의 문제였던 것이다. 1930년 1월 11일은 금수출을 허용함으로써 일본제국이 금본위제로 복귀한 날이었다. 그날 이후 적어도 국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던 위체 시세만큼은 급속히 안정되었으니 경제 기념일로 지정되고도 남음이 있었다."(219)


"금의 입장에서 금본위제로의 복귀는 '1돈에 5원'이라는 법정 가치의 회복을 의미했다." "금본위제로의 복귀 이후 금광업은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보호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강도 높게 시행된 '산금정책'이었다." "안정적인 금의 공급 없이는 통화 제도의 유지가 불가능했다. 통화 제도가 붕괴된다면, 국가 경제가 근간부터 무너질 것이었다. 금본위제 하의 금광업은 광업으로 분류될 수도 있었지만, 금융업으로 분류되어도 틀리지 않는다. 땅속에 묻힌 정화(正貨)를 캐내는 산업이었던 까닭이다. 조선의 금광 개발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미쓰비시, 미쓰이의 양대 재벌은 광업뿐만 아니라 금융업에서도 독점적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조선의 금광 개발에 뛰어든 일본의 양대 재벌은 금광 개발을 통해 그 자체로 수익을 얻는 한편, 계열 은행에 안정적으로 금을 공급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 말 그대로 꿩 먹고 알 먹기였던 것이다."(224-5)


"(금본위제 복귀 후) 이제 남은 일은 '위체의 평가 회복→통화 수축→물가 하락→생산비 저하→무역 호조→국제 대차의 개선→경제 활성화'로 이어지며 경기가 선순환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수출은 늘지 않고 오히려 무역 규모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물가와 물건값은 30%씩 떨어졌어도 일본 상품은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전혀 팔리지 않았다. 대공황의 여파로 국내 해외 할 것 없이 구매력이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호경기가 도래하기는 커녕, '구매력 부족→판매 감소→조업 단축, 가격 인하→이윤 감소→투자 위축, 고용 감축→실업 증가→구매력 부족'으로 이어지는 경기 악순환이 거듭될 뿐이었다. 수출이 지지부진한 판에 정부도 소비를 줄이고, 민간도 허리띠를 졸라매면, 공장에서 무작정 찍어낸 상품들은 도대체 어디다 팔아야 하는가? 다이어트를 하려다 사람 잡은 격이었다."(249-51)


"1931년 9월 20일 영국이 금본위제 정지를 선언했을 때, 이보다 1년여 전에 '금해금일'을 잡고 금본위제 복귀를 축하하며 샴페인을 터뜨렸던 하마구치 총리대신과 내각의 각료들은 현직에 있지 않았다. 하마구치 총리는 금본위제 복귀 10개월 후인 1930년 11월 백주대낮에 극우파 테러범에게 총격을 당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다음해인 1931년 4월 병상에서 총리직을 사임했다."(264) "군축 결정 이후 군부의 반발은 예상보다 거셌다. 내각은 군부가 성명서 몇 장 내는 선에서 그칠 줄 알았지만, 군부는 기어이 총을 들고야 말았다." 민간인 수상의 통제에서 벗어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던 군부는 "영국의 금본위제 정지 이틀 전인 1931년 9월 18일, 내각의 승인 없이 만주철도 보호라는 명분으로 군사적 행동을 취하고야 말았다. 이는 곧장 만주사변으로 비화되었다. 관동군의 명분 없는 군사행동으로 일본의 외교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266-7)


# 재벌을 위시한 투기 자본의 공격으로 금유출이 심화되고 국제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경기 침체 지속


"와카스키 내각이 뚝심을 발휘하고 있는 동안 일본은행의 지불 준비용 금은 심각한 수준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1931년 12월 금 보유고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민정당 정권의 오기도 이제 물리적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결국 민정당 내각은 만주사변 처리 지연과 경제 위기의 책임을 지고 1931년 12월 13일 총사퇴하고, 이누카이 츠요시를 수반으로 하는 정우회 내각이 들어섰다. 일본이 금본위제로 복귀한 지 2년, 와카스키 내각이 출범한 지 8개월, 영국이 금본위제에서 일탈한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누카이 총리는 취임 당일 새 내각의 첫 번째 각의 첫 번째 안건으로 금본위제의 존폐 문제를 상정하여 전격적으로 금수출 금지를 결정했다. 1931년 12월의 금수출 금지 조치로 일본의 금본위제는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금본위제에 대한 미련은 그 후로도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지만, 일본땅에서건 조선땅에서건 금화와 지폐가 자유롭게 교환·통용되는 '아름다운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았다."(273-4)


"금본위제의 정지는 금의 급격한 유출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국내 통화'로서 금의 기능을 폐기한다 하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국제 통화'는 금뿐이었다. 금본위제가 정지된 이후로도 믿을 수 없는 국내 통화보다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금 보유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금본위제의 정지는 뛰어오르는 금값의 고삐를 풀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금본위제의 정지가 금 준비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정부 차원의 금 수요는 가일층 증대되었다." "1933년 2월 미국의 루스벨트 행정부가 대공황 극복의 일환으로 금본위제를 정지하자 잠잠하던 전세계의 금값은 또 한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세계 금 보유고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미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제간 공식적인 금 이동이 사실상 정지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86)


"1930년대 초 일본은 심각한 금 유실로 신용 경색의 위기에 몰린 데다 전세계적으로 금본위제가 정지되면서 해외에서 금을 수입해올 길까지 막히게 되었다. 더욱이 만주사변 이후 만주의 처리 문제를 둘러싼 국제 여론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국가 권력을 송두리째 장악한 군부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영국과 미국에 대한 일전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전쟁을 치르려면 군비의 확충과 함께 비상시에도 효험을 발휘하는 유일한 국제 통화인 금 확보가 절실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금을 구해야 했던 것이다."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대대적인 산금정책을 세우고 돈을 풀었다." "육군성과 해군성에 모여 앉은 늙은 군인들은 전쟁을 사랑한 만큼 황금을 사랑했다. 그들은 황금이 필요했고, 황금이 부족했고, 황금에 목말랐다. 따라서 '산금매상안(産金買上案)'은 대장성의 계획이기 이전에 대전(大戰)을 준비하던 군부의 음모였던 것이다. 황금광시대, 1930년대 한반도의 골드러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288-90)


금수출 재금지 이후 조선총독부가 대대적으로 추진한 산금정책과 더불어 "금 생산을 늘려 놓은 또 하나의 주요한 동인은 금값 폭등이었다. 금값이 오르니 새로운 금광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이 늘게 되었고, 금값이 오르니 과거 채산성 문제로 채굴이 중지되었던 금광도 재개발될 수 있었다." "1931년 이후 불과 2년 만에 3배 이상 오른 금값은 조선의 금광 개발에서 가장 큰 취약점이었던 채산성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주었다. 금 생산의 채산성을 맞추려면 금맥 자체의 함금 비율이 높거나, 기계화 자동화로 생산성을 현격히 높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금값이라도 생산 원가 이상으로 유지돼 주어야 하는데, 함금 비율이 떨어지는 저품위 광맥이 대부분이고, 기계화도 덜된 조선의 상황에서 금값이 올랐다는 것은 거의 유일한 개발 동력이었다. 1933년 이후 무려 11년 동안 10톤 이상의 금이 꾸준히 생산될 수 있었던 것도 그 기간 동안 금값이 강세를 이어갔기 때문이었다."(300-1)


"황금광시대에 생산된 엄청난 양의 금은 반지나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금광에서 생산된 금이 옮겨진 것은 금은방이 아니라 은행이었다. 조선은행은 매일 금매입가를 고지했고, 금본위제가 정지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금을 매입했다. 금매입가는 주가, 쌀값과 함께 1930년대 조선의 3대 경제 지표였다."(312) "조선은행이 매집한 금은 그때그때 삼엄한 경계 속에 일본으로 송출되었다. 1934년 1월부터 5월까지 조선은행에서 일본은행으로 총 44회에 걸쳐 금이 송출되었다. 연말까지 족회 1백 회는 되었다는 말이다. 한 번에 대략 100kg의 금이 송출되었으므로 조선은행을 통해 일본으로 옮겨진 금괴는 1934년 한 해만 해도 10톤에 달했던 것이다. 1934년 조선의 금 생산량이 16톤이었음을 고려하면, 당시 국내에서 생산된 금의 대부분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은행 금고 속으로 사라졌던 셈이다."(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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