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안병직 옮김 / 이숲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제 제4차위안단


1942년 5월초부터 헌병이나 경찰이 아닌 위안소업자들이 주축이 되어 모집한 "제4차위안단의 위안부로 동원된 사람들은 위안부 경험이 있는 약간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위안소업자들이 위안부들을 동원하는 방법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포로심문보고』에서는 위안부의 동원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비스'의 성격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병원에 있는 부상병을 위문하고 붕대를 감는 일이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장병을 즐겁게 해주는 것에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들 의뢰인들이 사용한 미끼는 다액의 수입, 가족의 부채를 변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 고되지 않은 노동과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신생활에 대한 전망이었다. 이와 같은 허위 설명을 믿고 많은 여성이 해외근무에 응모하고, 2~3백 엔의 전차금(前借金)을 받았다.〉" 23)


"제4차위안단은 일본군부에 의하여 조직되었기 때문에 위안소업자들과 위안부들은 군속적(軍屬的) 대우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외국으로 출국하면서도 여권을 가지고 출국했던 것이 아니라 군이 발행하는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출국했다. 그리고 그들은 출국할 때 여객선이 아니라 군용선을 이용하였으며, 이동할 때에는 주로 군용 교통수단을 이용했기 때문에 요금은 무료였다. 위안부 동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전차금이 어디에서 지출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전차금을 스스로 부담했다는 몇몇 위안소 경영자의 증언이 있기도 하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1938년 1월 상해 파견군사령부가 오오우치에게 일본에서의 위안부 모집을 의뢰했는데, 그때의 모집조건은 〈작부는 16세로부터 30세까지, 전차금은 500엔으로부터 1000엔까지, 가업년한은 2개년, 소개수수료는 전차금의 1할을 군부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26-7)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군위안소의 유형으로서는 군직영위안소, 군전용위안소 및 일반위안소 중 군도 이용하는 위안소의 세 가지가 있었다고 이해되어왔는데, 요시미 교수는 위안소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위안소는 경영 형태로 보면, 세 가지 타입이 있었다. 첫째는 군직영의 군인·군속전용의 위안소, 둘째는 형식상 민간업자가 경영하나 군이 관리·통제하는 군인·군속전용의 위안소, 셋째는 군이 지정한 위안소로, 일반인도 이용하나, 군이 특별한 편의를 요구하는 위안소이다.〉 군위안소 중에서는 군전용 위안소가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데, 많은 경우 이 유형을 민간이 경영하는 위안소로 이해하고 있으나, 요시미 교수는 그 유형을 '형식상 민간업자가 경영하나 군이 관리·통제하는 군인·군속전용의 위안소'로 규정했다. 일기에는 위안소의 유형을 가리키는 낱말이 네 가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항공대 소속 위안소', '병참 관리 위안소', 군전용 위안소' 및 '지방인 위안소'이다."(32)


"군위안소의 경영은 경영자(夫婦), 쵸우바 1명, 나카이 1명, 심부름꾼 1~2명 및 위안부 20명 전후로써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쵸우바의 기본업무는 위안소를 방문하는 장병들을 맞이하여 그들을 원하는 위안부에게 안내하고 회계장부를 정리하는 일일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일기의 필자는, 시장에서 위안소의 식자재를 구입하고, 위안소의 대외업무도 담당했다. 위안부들에 관련되는 일로서는 취업 및 폐업의 허가 신청, 성병검사에의 안내, 저금 및 송금 업무와 귀국절차의 업무 등이 있었으며, 소속기관과의 관련업무로서는 연대사령부, 병참사령부 혹은 경무부에 대한 영업일보, 영업월보 및 월별 수지계산서의 제출 등의 업무가 있었다. 위안소가 소속기관에 내는 각종 보고서들을 보면, 위안소 경영의 독립성이 매우 취약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본래 위안부의 모집부터 경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군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본질에 있었을 것이다."(34-5)


"위안부와 업자들의 화폐수입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서는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 아주 많다. 첫째는 일본군 점령지에서의 전시하이퍼인플레를 어떻게 감안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문옥주의 예금통장에 대한 고바야시 히데오 교수의 시산(試算) 결과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옥주의 통장에 기입된 예금을 가지고 인플레를 감안하여 일본의 엔 기준으로 그녀의 실질수입을 계산하면, 1941년 12월의 일본물가를 100으로 하고 버마에서의 월 인플레율을 11~14%로 보았을 때, 1943년 4~9월의 2150엔은 264~405엔, 1943년 10월~44년 3월의 2641엔은 148~266엔, 1944년 4~9월의 900엔은 23~48엔, 1945년 4~9월의 20860엔은 110~321엔으로서 합계 527~1040엔으로 계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화폐수입도 송금하는 데 엄청난제약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송금이 허락되었다 하더라도 조선에서 그것을 현금으로 인출하는 데 있어서도 큰 제약이 있었다."(39-40)


"위안부들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의 성격도 모른 채 전차금과 높은 수입이라는 미끼에 끌려들어 '유괴나 다름없는' 인신매매나 사기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위안부의 동원 방법을 '광의의 강제동원'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취업허가는 위안부가 위안부로서 종사할 수 있는 장애요인이 없는 한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폐업허가에 있었다. 폐업허가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위안부로 동원될 때의 계약조건이었는데, 그것은 주로 전차금의 문제였을 것이다. 문제는 전차금을 변제했을 경우에도 폐업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폐업이 어려웠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위안소가 군편제의 말단조직으로 편입되어 군부대와 같이 이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들은 항상 추업부(醜業婦)로 천시되었다. 군위안부들이 놓인 위와 같은 처지를 '성적 노예상태'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41-2)


1부 번역문


1943년 1월 1일 금요일. 맑음

대동아성전 2주년인 1943년 신춘을 맞이하여 1억 민초는 엎드려 삼가 폐하의 만수무강하심과 황실의 더욱 번영하심을 봉축하는 바이다. 나는 멀리 고향을 떠나 버마 아캬브 시 위안소 칸파치 클럽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궁성을 향하여 절을 하고 고향의 부모, 형제 및 처자를 생각하고 행복을 빌었다. 동쪽 하늘의 햇빛도 유심한 듯 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와 국가의 융창(隆昌)을 축복하여 준다. 오직 금년 한 해도 무사히 행운 속에서 보내게 하여주옵소서. 처남과 O환(O桓) 군은 위안부를 데리고 연대 본부와 기타 서너 곳에 신년 인사차 갔다 왔다. 일선 진중에서 맞은 새해 첫날도 다 가고 밤이 되어 금년의 행운을 꿈꾸며 여러 날 잠을 못 자서 괴롭던 차에 깊이 잠들었다. p.46


1월 13일 수요일. 맑음

버마 아캬브 시 위안소 칸파치 클럽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다. 연대 본부 의무실에 가서 위생 콘돔 1000개를 가져 왔다. 밤 1시 반경에 자다. 어젯밤에는 적기(敵機) 소리가 나지 않았다. p.48


3월 10일 수요일. 맑음

버마 페구 시의 카나가와 씨 댁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다. 랑군의 카나자와 군이 만달레에 갔다 오는 길에 페구에 들러 내가 있는 줄 알고 찾아왔더라. 종일 놀다가 저녁을 먹고 자다. 카나가와 씨의 위안소를 55사단에서 만달레 근처의 이에우(Ye-U)라는 곳으로 이전하라는 명령이 있어 오늘 모처 부대장이 와서 가자 하는데, 위안부 일동은 절대 반대하며 못 가겠다더라. p.61


4월 5일 월요일. 맑음

버마 페구 시 사쿠라 클럽의 카나가와 씨 처소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사쿠라 클럽의 위안부 후미코는 복부가 크게 아파 오후에 해부 수술을 한다더라. 후미코는 작년에 만달레에 있을 때에도 맹복염(盲腹炎)으로 수술하였는데, 이번에 또 수술하는 불행한 몸의 주인공이다 저녁을 먹고 분라쿠관에 놀러 가니 랑군에서 오오하라 씨가 와 있기에 같이 밤 12시 남짓까지 놀다가 사쿠라 클럽으로 돌아와서 잤다. p.67


7월 18일 일요일. 맑고 조금 흐림

인센의 숙사에서 일어나 무라야마 씨 댁에서 아침을 먹고 종일 놀다. 아캬브에서 온 아사하라 씨는 이번에 부대가 이동하여 온 타운기에 갔다 왔는데, 선발대장 치바 대위의 편지를 전하더라. 열어보니, 위안소를 타운기에서 경영하도록 아캬브에서 여자들이 오거든 같이 오라는 것이더라. 오늘 밤부터 무라야마 씨 위안소 내의 일실에서 호이 군과 같이 자기로 하였다. p.94


7월 29일 목요일. 흐리고 비

인센 요마 거리의 무라야마 씨 댁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아라이 씨와 병참에 가서 콘돔을 배급받았다. 위안부 진료소에 가서 등록되지 않은 2,3인의 위안부에게도 진찰을 받게 했다. 이전에 무라야마 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 생활하려 나간 하루요와 히로코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김천관에 있게 되었다더라. 중국인 거리에 들러 저녁에 인센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밤 1시경에 자다. p.97


1944년 2월 22일 화요일. 흐리고 조금 비 오고 맑음

싱가포르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니시하라 군과 고리짝 짐을 싸고 있는데, 위안부들이 돌연 취객이 검을 빼 폭행한다기에 니시하라 군이 곧 달려가서 취객을 붙들어 진정시키느라 짐을 완전히 싸지 못하였다. 밤 1시경에 잤다. p.157


2월 29일 화요일. 흐림

싱가포르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요코하마 정금은행에서 저금 1000엔을 찾아 200엔은 전신환으로 고향의 동생에게 부쳤다. 손가방 1개를 사고, 악어지갑 1개를 주문하였다. 물가가 높이 솟아 지갑 한 개에 75엔이다. 이렇게 물가가 폭등하면 장차 어찌 될까. 금년이 윤년이라 2월이 하루 더 있어 29일이 되다. p.159


4월 25일 화요일. 맑음

싱가포르 시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보이를 데리고 시장에 갔다 왔다. 아침을 먹고 클럽 전원이 13시 15분 야스쿠니 신사의 임시대제(臨時大祭)에 즈음하여 엄숙히 요배식을 거행하였다. 카나가와 광옥과 시마다 한옥 2명을 데리고 검역하러 갔더니, 오후에는 휴무라 검역을 못 하고 돌아왔다. 밤 1시경에 잤다. 피마자를 심었다. pp.172-3


4월 29일 토요일. 맑음

전쟁 중의 제3회 천장절이다. 천황 폐하께서는 제44회의 탄신을 맞이하셨다. 우리들 민초는 오직 성수의 무궁하심을 봉축하옵나이다. 특별시청 앞 광장에서 배하식(拜賀式)을 거행하였다. 오늘은 천장절의 경축일이라 군인의 외출이 많아 클럽의 수입이 2450여 엔으로 개업 이래 최고 기록이었다. 밤 1시 남짓에 쵸우바 일을 마치고 잤다. p.173


4월 30일 일요일. 맑고 조금 흐리고 맑음

싱가포르 시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보이를 데리고 자동차로 비치로드 시장에 가서 장을 보아 왔다. 오늘도 군인의 외출이 많아 어제의 최고 수입을 훨씬 초과하여 2590여 엔의 최신 기록이다. 밤 2시경까지 쵸우바 일을 보다가 잤다. p.174


6월 9일 금요일. 맑음

싱가포르 시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보이를 데리고 오챠로드 시장에 가서 장을 보아 왔다. 오늘 검미 결과는 입원 중인 2명은 퇴원하고 2명만 입원일 뿐, 집에 있는 여자는 전부 합격되었다. 이 달부터는 여자는 담배 배급이 없는데, 클럽의 가업부에 대해서는 접대용으로서 특별히 매일 10개비의 배급이 있다. p.184


10월 28일 토요일. 맑음

싱가포르 시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고 싱가포르 종합물자배급조합에 가서 손수건과 양말 특별 배급을 받아 왔다. 저녁을 먹고 밤 1시경까지 쵸우바 사무를 보다가 잤다. 필리핀 동방 해상과 레이테(Leyte) 만에서 적함선 70여 척을 격침하고 파괴한 대전과가 있다. 클럽 종업원의 신체검사를 하였다. p.2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
안연선 지음 / 삼인 / 200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군의 위신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군 당국은 1938년 두 가지 지시를 내렸다. 첫째, 위안부의 모집은 군당국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어야 하고 모집 담당자는 군에서 신중하게 선정해야 한다. 둘째, 위안부 모집 과정은 조선에서와 같이 관련 지역 경찰과 긴밀히 협력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군 교통 수단이나 군 숙소 등을 제공해서 군이 모집해 온 소녀들을 호송했다는 증언이 많이 있었다. 이들 여성들은 종군 간호부처럼 일본군 조직 내에서 공식성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수송시에도 군수품 수송을 위한 장소, 즉 기차의 맨끝 연결 차량이나 배의 밑바닥에 실려갔다. 위안부 모집자들을 태평양 섬 지역으로 운송하는 동안 "배 안에서 사용 중지"라는 경고문이 선내에 붙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들 모집자들을 각 부대로 할당할 때는 '군수 물자 배급'이라는 명목에 위안부들의 이름을 적었다고 한다."(86)


"위안부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경제적 약자일 뿐만 아니라, 외부모 가족(특히 '편모 가정') 출신이나 고아와 같은 당시 사회적인 배경에서 약자들인 경우가 많았다." "옛 위안부들의 가족 배경에서 발견한 또 하나 눈여겨볼 사실은 장녀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맏딸로서 가족 부양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위안부 모집 대상의 또 다른 그룹은 기생 학교의 소녀들이었다." "위안부들 중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모집 대상자가 된 경우도 있었다. 정서운·윤순만 할머니처럼 당시 조선 독립 운동과 연루되어 있던 가족의 딸들 역시 위안부로 차출된 경우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위안부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그룹을 주요 대상으로 모집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집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사회적인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사회적 계급이라는 변수가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87-9)


"위안부들을 통제하기 위해 서로 분열시켜 통제한다는 분리 지배의 원리가 사용되었다. 배족간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위안부들도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위안소에 있었던 기한에 따라 계급이 매겨지기도 했고, 상급자 위안부는 하급자를 처벌할 수도 있었다." "위안부들 사이의 위계 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이 된 것은 그들이 '상대하는' 군인들의 계급이었다. 군인들 사이의 위계 구조는 위안부들 사이에서도 재생산되었다. 각 위안부가 '받는' 군인이나 장교의 계급에 따른 특권과 위계 구조가 바로 이들의 지위를 결정했다. 군 위계 구조 내 고위직 장교를 '상대한다'는 사실은 이들의 일상 생활에 차이를 가져왔다. 위계 질서 구조에서 위안부가 지니는 위치에 따라 그들이 하루에 몇 명을 받아야 하는가가 결정되었다. 주로 장교들을 '상대하는' 일본 위안부들은 다른 위안부들처럼 많은 군인들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차별은 이들 여성들을 서로 분열시키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96-7)


"위안부들이 더 이상 군인을 '상대할' 수 없을 때는 사용 가치가 없는 것이므로, 그야말로 사용후 버려지는 소모품과 같은 존재였다. 예를 들어 병이 심해지거나 몸이 너무 약해서 더 이상 성행위를 할 수 없게 되면, 위안부로서의 사용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들의 몸은 성행위를 위해서만 유용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성병이나 다른 질병에 걸리지 않은 상대적으로 건강한 위안부만이 그 '유용성'을 인정받았다." "위안부들에게는 성노예에서부터 심지어 전쟁 말기에는 군사적인 업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일이 부과되었다. 예를 들면 군부대 병영의 청소, 군복 세탁, 창 찌르기 등의 군사 훈련, 탄약 상자와 폭탄 나르기, 부상병 간호, 전투에 나가거나 돌아오는 군인들의 환송과 환영, 춤과 노래로 군인들에게 오락 제공, 재사용을 위해 사용한 콘돔 세척하기, 부상병을 위한 헌혈, 심지어는 스파이 활동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했다."(103-4)


"위안부들은 매일매일 계속되는 장기적인 성폭행에 대처해 나갈 생존 전략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위안소 체제는 위안부들의 저항을 약화시켰지만, 그러함에도 몇몇 위안부들은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방식으로 저항했다. 저항의 방식은 다양했다. 위안소 탈출을 시도하기, 군인 요구에 저항하기, 되받아치거나 싸우기, 군인 살해, 자살 시도, 실성함(미침), 힘든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술이나 마약 복용하기, 장교와의 친근감을 형성하기 등 여러 가지 생존 전략과 저항의 방식이 존재했다. 그 가운데 가장 대담한 저항 방식 가운데 하나는 바로 위안소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안부들은 늘 감시당하고 있었으므로 탈출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위안소를 벗어나기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던 대부분의 위안소들이 최전방 근처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위안부들이 위안소를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바깥은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111-2)


"전후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위안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수치와 비난과 오명뿐이었다. 자신과 가족과 한국 사회는 이들을 '더럽혀진 몸'으로 여겼다.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더 이상 '정상적인' 다른 여자들과 같을 수 없음에 대한 쓰라린 심정을 토로했다. 위안부들이 자신의 과거를 주위에 밝히자 가족과 친척들은 심지어 이를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이러한 가족들의 반응은 이들을 다시 가족 밖으로 내몰았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사회 운동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 옛 위안부들이 자신의 과거를 신고하거나 공개적으로 밝히고자 할 때, 이들은 또다시 가족과 마찰을 빚었다. 이제는 위안부 자신만이 아니라 그녀의 가족 모두가 '더럽혀진 몸'에 대한 수치와 맞부딪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옛 위안부들에게는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것을 운동단체나 정부에 신고차는 것 자체가 '가족의 수치'를 사방에 알리는 것으로 해석되었다."(119-20)


"옛 일본 군인들 가운데는 위안부와 나눈 연애 관계 때문에 전쟁터에서 상실된 자아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인 작가 니시노 루미코가 만난 한 군인은 위안부와의 만남이 "진정한 인간적 만남"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는 위안부와 군인의 경험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는 것 중에 하나이다. 위안부들의 구술과는 많이 다른데, 옛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 여성들이 자신들의 동반자였고, 연인이었고,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옛 일본군인들은 그들이 그리던 어머니, 아내, 연인상을 투영시킨 이상적인 여성상의 대용품으로 이들 위안부들을 대상화했던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인간적인 연애 관계에 대한 감정이 위안부를 경멸하는 감정과 함께 공존했다는 것이다. 옛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들은 성적 쾌락을 얻기 위한 대상이라든가, '더러운 여자'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131-2)


"위안부뿐만 아니라, 일본 군인도 엄격한 규제와 통제를 받았다. 그들은 일본제국 군대의 군인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증명해야 했다." "일반병들은 고참들의 가혹한 대우와 혹독한 군사 훈련을 견뎌야 했다. 특히 막 입대해 들어온 신참들은 '지옥 훈련'이라는 것을 거쳐야 했다. 이때 신참들은 매일 맞았다. 군복에 조금이라도 흙이 묻었다거나, 군화가 제대로 광이 나지 않는다거나, 대답이나 태도가 고참의 맘에 들지 않을 때는 신참들은 고참들에게 가차없이 구타를 당했다. 그러나 군인들을 통제된 군생활과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길들이기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했다. 혹독한 군생활을 보상하기 위한 일종의 위로·오락으로서(그러니까 당근으로서) 제공된 것은 바로 '성'이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처벌과 보상 체계가 공존했던 것이다. 옛 일본군 장교 요시오카 다다오 역시 일본 군당국이 군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위안부 제도에 의존했음을 시인했다."(142-3)


"옛 위안부와 전쟁 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옷을 갈기갈기 찢고 발가벗기기, 채찍질하기, 가슴 도려내기, 담배불로 지지기, 자궁에 총을 겨누어 발사하기, 복부 가르기 같은 상상하기도 힘든 행위들을 일본 군인들이 했음이 보고된 바 있다." "폭력은 마치 화폐처럼 군인들이 위안부들한테 원하는 '서비스'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폭력은 위안부들뿐만 아니라 부하 군인들, 그리고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널리 사용되었다. '불굴의 전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전투를 위한 사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군대 내 폭력은 국가 권력에 의해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도화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인들은 일상에서 계속되는 구타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갔다. 말하자면 위안부를 구타하는 것을 포함해 군대 내에서 구타는 하루 일과 가운데 하나로 일상화되었고, 가차없이 냉혹해져 갔다."(148-9)


# 위안소 설치를 합리화하는 주장들

1. 위안소 제도는 기존의 매춘 제도와 다를 바 없다.

2. 전시戰時라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3. 남성은 통제할 수 없는 생물학적 성욕이 있다.

4. 주둔/작전 지역의 여성들에 대한 강간을 방지한다.

5. 주둔 지역의 치안 유지에 이바지하여 반일감정을 억제한다.

6. 위안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당국이 개입했다.


"(가혹한 폭력과 더불어) 남성성을 부추기기 위한 또 다른 실천 가운데 하나는 여러 명이 함께 위안소에 가서 성관계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마치 하나의 '의식'(ritual)과 같다. 이때는 대개 장교나 고참이 부하들을 이끌고 갔다. 옛 위안부 하군자 할머니는 군가를 부르며 그녀의 방 안으로 행진해 들어오는 군인들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성행위는 그룹의 구성원 모두가 참여해야만 하는 하나의 통과 의례와도 같다." "군인들이 성적인 필요를 느끼는지, 또는 상대 여성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와는 상관없이 위안부와 성관계를 하는 것은 이들 군인들에게 주어진 권리였을 뿐 아니라 성을 통해 남성성을 증명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였다. 성행위를 통해서 남성다운 행동의 기준에 들었음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러므로 성은 군대 내에서 일상 생활을 통해 남성성을 강화시키고 재확인하기 위한 주요 실천 관행 가운데 하나였다."(176-7)


"한마디로 말해 위안부 제도는 남성적 정체성(용맹스럽고 공격적이고 성적화된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재확립할 수 있는 환경을 군인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일본 군대의 위계 구조에서 일반 사병이나 갓 입대한 신병들이 가장 낮은 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군대 내 위계 구조, 특히 체벌의 위계 구조에서 위안부들은 일반 사병들보다 더 낮은, 유일한 '부하'들이었다. 군인으로서의 남성적인 지배와 군사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구성된 '위안'을 위한 공간에 위안부들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남성은 전투를 위한 하나의 군수품이나 '총알받이'로 전락했다. 그러나 위안소에서는 위안부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통해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들의 주체성을 재확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통해서 남성적인 주체성을 회복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행위는 남성성의 정수로 여겨진다."(185-6)


"조선의 여성성 모델은 일본 천황의 군대를 '위안'하기 위한 성적인 대상('창녀')으로 규정되는 반면, 모범적인 일본 여성의 역할은 재생산자로서 미래 천황의 군인을 생산하기 위한 모성으로 규정되었다." "조선 여성과 일본 여성 사이의 이분화된 이미지, 즉 성적인 도구와 '국가의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는 가부장적 국가 권력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인 분류는 서로에 상반되어 개념화되기 때문에, 위안부들을 '더러운 창녀'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일본의 후방에 있는 일본 여성들에게 '정숙한' 부인·어머니·딸의 자리를 비축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분화는 이들 둘 사이의 민족적인 위계 질서의 골을 깊게 하는 데 한몫 했다. 조선과 일본에 걸쳐 통용되었던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에 기반한 이러한 위계 질서는, 전쟁을 통한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에서 식민주의 지배를 당연시하기 위한 또 다른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211-2)


# 여성의 몸에 대한 이미지가 '조국(homeland)'으로 상징화


"여성의 몸을 민족의 고결함으로 상징하는 담론은 여성에게는 위험한 것이다. 사실 상당수의 위안부들이 전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또한 귀향을 한 경우도 자신들이 위안부였음을 공개하지 않았다. 또다시 수치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며, 그들이 속한 공동체, 즉 '민족의 명예'를 훼손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국도 일본도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여성성에 대한 한국 민족주의와 유교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이의 실천은 이러한 집단적인 '기억상실증'을 초래했다. '정숙한' 여성의 성과 '정조'는 민족의 순수성과 연관지어 개념화되므로 위안부들의 침묵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대부분의 위안부들에게 부과된 수치감들은 이들을 침묵하게 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위안부 문제를 부인해 온 일본의 이해 관계에 공모해 온 셈이다."(223-4)


"위안부들에게 강요된 '난잡함' 또는 '더러운' 여성 정체성은 군인들 내에 여성을 혐오하도록 하는 남성 정체성을 강화시켰고, 순종적인 여성성은 우월한 남성성을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위안부들을 노예화된 위치에 놓음으로써 일본 군인의 '주인됨'이 형성되고 강화되었다. 즉 조선인 위안부들의 몸은 일본 군인의 민족적 우월성과 남성성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위안부들의 '오염된' 여성성은 군인들의 남성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위안부 제도를 통해 구성된 여성성에는 모순이 드러난다. 노예화되고 성애화된 위안부의 여성성과의 관계에서 군인들의 남성성은 강화되는 한편, '더러운' 위안부의 몸과 접촉함으로써 군인들 자신도 '오염되고', 성병에 걸려 남성성이 훼손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는 위안부를 '필요악'의 위치에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225-6)


"일본 군인의 민족 정체성은 '광적인' 애국주의, 천황에 대한 충성, 외국인 혐오주의, 집단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들의 민족 정체성은 또한 성별화되어 있었다. 특히 천황제는 일본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의 정체성은 천황제와 민족주의의 결합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대부분의 조선인 위안부들의 민족 정체성은 반식민주의적이었으나 일본 남성들의 민족 정체성은 식민주의적이었다." "일본에 의한 조선인의 민족 정체성 형성은 일본인의 우월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한국 위안부를 '미문명화되고' 성애화되고 '음란하고'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는 것은, 반대로 일본 군인의 문명화되고 우월하고 애국적이고 남성적인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가부장적인 민족주의와 '광적'인 애국주의는 조선인 위안부의 멸시와 고통에 의해 마련된 토양 위에서 번성했다."(23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 - 일본 전범기업과 강제동원의 현장을 찾아서
김호경.권기석.우성규 지음 / 돌베개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과 한국의 연구 성과들을 종합해 정리하면 1939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여 동안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연인원 600~700만 명에 달한다. 당시 조선 인구가 2,000여만 명임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전 민족적’ 수난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 병력으로 징발된 조선인이 40여만 명이니 숫자상으로 강제동원 피해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게 노무징용자들이다. 이 중 일본 본토를 비롯해 사할린, 남양군도, 만주, 시베리아 등 국외로 동원된 노무인력이 150만 명 안팎일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450만 명 안팎은 각종 보국대, 봉사대, 근로단 등의 이름으로 한반도 내 작업장에 끌려간 국내동원 피해자다. 국내동원의 경우 1인당 두 세 차례씩 여러 번 차출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연인원이 아닌 실인원수는 200만 명 정도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국내외 강제동원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적게는 10~20만 명, 많게는 50여만 명까지 추산된다. pp.28-29


 1938년 4월 일본 정부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해 ‘전반적 노동 의무제’의 강행실시에 돌입했다.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일본 정부는 의회의 비준 없이 칙령 하나만으로도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고 통제할 권한을 손에 넣었다. 일제는 이어 9월에 노무동원계획을 수립해 1939년의 수요 노동력을 110만 명으로 결정했으며 그 공급원 다섯가지 중 하나로 조선인 노무자를 지목함으로써 중요 산업에 연행할 것을 결정했다. 특별히 노동력 부족을 호소해 온 탄광, 광산 및 토건업에 집단연행을 허락해줬다.

 노무동원은 일본 정부와 기업의 합작품이다. 당국이 법령과 제도로서 동원의 근거를 마련하고 송출을 해주면 기업은 조선인들을 군수물자 생산, 토목공사 등의 각종 작업장으로 끌고 갔다. 기업에는 정부 정책과는 별도로 과도한 이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기업 간에 이를 위한 격렬한 경쟁이 있었다. pp.34-36


 1990년대 일본 재판부는 강제징용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청구권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두 가지 논리로 강제징용자의 소를 기각했다. 하나는 시효 만료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 무책임의 법리'다. 국가 무책임의 법리란, '패전 전 일본에서는 국가의 권력적 작용에 의해 개인에게 손해가 발생해도 민법의 불법행위책임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고, 현재의 국가배상법과 같은 일반적으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법률도 없었기 때문에 그 손해에 대해 국가의 배상책임을 추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순길 씨가 1심에서 진 근거가 바로 국가 무책임의 법리였다. 

 일본 재판부는 그런데 2000년 이후 다른 판결문을 쓴다. 2001년 3월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여운택, 신천수 씨에게 '한일조약에 따라 청구권을 상실했다'며 기각 판결을 내렸다. 그 뒤 한동안 일본에서 한국인 강제 징용자들이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은 대부분 '청구권 소멸' 논리로 기각됐다. 한일협정이 수많은 강제 징용 피해자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에 관한 해석을 전과 다르게 했다. 2000년대 이전에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라고 주장하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 국민에게는 애당초 이러한 클레임을 제기할 수 있는 지위는 없기 때문에, 한국 국민이 이것을 청구해도 우리나라는 이것을 인정할 법적 의무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논리를 일본 재판부가 받아들였다. 그 뒤 일본에서 한국인 강제징용자 소송과 관련해서는 화해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pp.458-460


 개인 청구권에 관한 2000년대 이후 일본 정부의 입장은 '소멸'에 가깝고 '인정하지 않겠다'라는 것이지만 명확한 '소멸'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왜 개인 청구권에 관해 딱 부러지게 '소멸'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일까. 이 배경에는 1956년 일본과 옛 소련이 맺은 공동선언이 있다. 공동선언에서 양국은 "국가, 단체,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서로 포기한다"라고 밝혔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옛 소련에 재산을 두고 온 일본 국민들에게서 소송을 당했다. '소련에 있는 내 재산권을 정부가 소멸시켰으니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각 개인의 청구권까지 포기한 게 아니다"라고 대응한다.

 즉 일본 정부는 소련 정부에 대해 비록 공동선언에 의해 외교보호권은 포기했지만 개인 청구권은 남아 있으니 각 개인이 알아서 청구권을 행사해서 재산을 찾으라는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하면 스스로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대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나타나고 있을까. 근원적 이유는 1965년 한일협정이 엉터리로 맺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청구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해두지 않았다. 김창록 교수는 "협정 및 그 부속문서의 어디에도 '청구권'에 관한 정의 규정이 없다. 그 결과 '청구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협정 및 그 부속문서의 조문만으로는 우리의 문제, 즉 '한국의 외교적 보호권만 소멸된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 개인의 재산, 권리 미치 이익과 청구권까지 소멸된 것인가'에 관한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다른 한편 양국 정부는 한일협정 뒤 후속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협정에 적힌 것처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면 양국은 국내에서 관련법을 제정하고 후속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국민의 청구권을 소멸시키는 법을 만들고 동시에 일제 피해에 관한 보상법을 만들었어야 했다. 일본 정부도 자국민의 권리를 없애는 법을 만들고 한반도에 두고 온 재산을 보상해줬어야 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엉뚱하게도 한국인의 재산에 관한 권리를 소멸하는 국내법(이른바 144호)을 만들었다. 자국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pp.464~4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청년이여 황국 신민이 되어라 - 식민지 조선, 강제 동원의 역사
정혜경 지음 / 서해문집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1943년 말 국민징용령이 개정되면서 1944년 2월부터 많은 조선인이 국민 징용에 해당되었다. 국민 징용이란 일본 정부가 이미 등록한 대상자 중에 선정해서 징용 영장을 발령하여 동원하는 형태다. 미리 등록이 되어 있었으므로 뽑아서 보내는 것이 쉬웠다. 그리고 '응징사應徵士'라 해서 노동자를 군인과 동일한 의무를 지닌 것으로 규정했다. 동원에 응하지 않으면 국민징용령 위반으로 검거하여 감옥살이를 시키거나 형무소가 지정하는 작업장에 가서 일해야 했다. 의무로 하는 것이니 임금이나 노동자의 권리 같은 것은 적용되지 않았다. 노동자에 대한 고용 계약도 정부와 노동자가 했다." "동원 체제가 강화되면서 송출되는 인원수도 늘었다. 중간에 탈출하거나 거부하는 것 자체가 어려우니 송출되는 수도 늘어났다. 일본으로 간 인원수만 보면, 1943년에 13만 명 정도였으나 1944년에는 29만 명으로 두 배가 넘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 내에서 동원되어 노역을 한 수는 세 배가 넘었다."(65-6)


"할당받은 인원수를 채우는 방법은 선전과 속임수였다." "일본 당국도 헌병과 경찰의 힘만으로는 통제를 할 수 없으니 '황국의 신민'이 해야 하는 의무라거나 전쟁에서 이기면 풍요로운 부가 뒤따를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하는 일이 강제 노동인지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이를 위해 국가가 직접 동원하는 강제 동원이지만 명칭을 '지원'이니 '모집'이니 하고 붙인 것이다. '볼런티어volunteer'가 공식 명칭이다. 독일에서도 '의용'이나 '지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것이 바로 총동원 체제를 유지했던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운영했던 고도의 동원 전략이다." "그런데 1944년 말부터는 가장 수준 낮은 인간 사냥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더 이상 민중은 '모집'이니 '지원'이니 하는 말에 속지 않고 징용을 회피하는데, 작업장에서는 인력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을 치니 할 수 없이 집집마다 뒤져서 장정들을 끌고 간 것이다."(77-8)


"일본 당국은 남양군도에 동원된 조선인 작업자들의 노동 생산성을 높이고 당국의 통제에 순응하게 하는 데 가장 큰 목적을 두었다. 특히 노동을 시키기 위해 일본어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업무 지시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훈련 결과에 대해 당국은 매우 만족해했다. 일본 측 자료에서도 '조선인들의 능력이 일본인을 능가한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훈련 과정을 거친 조선인들은 한 달에 25일 동안 일했고, 평균 출근율이 98퍼센트에 이를 정도였다. 남녀를 막론하고 어린이를 양육하는 여성까지 모두 열 시간 동안 일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균 기온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열 시간 노동은 살인적이다." "장시간 노동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배고픔도 적잖은 고통이었다. 당시 남양군도는 외부에서 식량을 제공받지 못하고 현지 조달에 의존했다. 일본 본토도 물론 식량난으로 어려웠지만, 전쟁이 깊어지면서 해상이 봉쇄되어 보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05-6)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맨손으로 태면철도를 건설하는 무리한 공사에 동원된 포로와 노동자가 4만 3000명이었다. 이 과정에서 포로 2만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진다. 하루에 평균 100여 명이 사망했고, 심지어 300명이 사망한 날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태면철도를 '죽음의 철도'라 불렀다. 또한 부족한 식량과 영양실조, 과도한 노동은 사망자를 양산했다. 재판 기록을 보면 포로들에게 비타민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도 전쟁 범죄의 하나였다. 포로감시원들이 포로들에게 일을 시키는 과정에서 공정을 맞추기 위한 가혹 행위도 일어났다. 물론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포로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킨 것이다. 그러나 포로들이 얼굴을 맞댄 사람들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인이었으므로 포로들은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자신들을 학대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후 포로 학대의 책임은 일본군의 지시를 받아 포로들에게 직접 일을 시킨 조선인 포로감시원에게 돌아갔다."(129-30)


"조선인이 군인으로 동원된 경우는 지원병과 징병이 있다. 총 동원자는 23만 명인데, 반수가 '조선군'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 배치되고, 그다음이 일본, 세 번째가 중국 전선이다. 동남아시아에 배치된 인원은 소수였다." "조선인 군인들이 후방인 일본에 많이 배치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본은 조선인을 군인으로 동원하긴 했지만 전쟁터에서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보다는 다른 역할을 맡겼다. 조선인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인 군인이 맡은 역할은 전투가 아니었다. 전쟁을 보조하는 일과 위급한 때 총알받이 역할이다." "일본군과 동등한 무기를 지급해서 전선에 투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시기적으로도 당시 연합군의 해상 봉쇄로 군대가 조선에서 동남아시아로 가기는 어려웠다." "1944년 말부터 징병이 시작되지만, 그때는 이미 동남아시아 전선이 무너진 후였다. 동남아시아로는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가 없었다."(142-3)


"화태(남사할린) 탄전은 규모에서는 일본 훗카이도 탄전에 미치지 못하지만, 질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였다. 역청탄이라고 해서 제철소에서 철을 생산할 때 쓰이는 철광석이 대부분이고, 무연탄도 윤이 반질반질 나고 화력이 매우 좋았다. 더구나 화태 전체의 20퍼센트가 탄전일 정도로 탄광 비율이 높았으니 탄광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또한 화태는 목재업과 제지업으로 유명해서 일본과 한반도에서 사용하는 종이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생산된다고 할 정도였다. 일본 최대의 제지 회사인 오지 제지(미쓰이 계열)가 남사할린 전체에서 아홉 개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산에서 나무를 구해 종이를 만들려면 여간 노동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무도 베어야 하지만 이것을 제지 공장으로 운반하고, 석탄을 집어넣고 불을 때서 종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력을 담당한 것이 바로 조선인이다."(158)


"일본 규슈 지방의 후쿠오카 현과 나가사키 현, 혼슈 지방의 이바라키 현과 후쿠시마 현에 위치한 탄광은 모두 작업 환경이 열악했다. 막장 높이가 매우 낮거나 바닷속에 있어서 습하기도 했다. 특히 나가사키 현에 있는 하시마 탄광은 지옥섬으로 유명했다. 노동 조건이 너무 나빠서 일본인들이 지옥섬이라 불렀다. 물론 초기에는 죄수들이 끌려와 일하던 곳이었다. 자연섬 주변을 시멘트로 둘러쌓아 군함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군함섬이라 불리기도 한다. 최근 일본은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하시마에 세계 최초로 아파트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란다." "이곳 탄광은 막장 높이도 낮아서 광부들은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탄을 캤다. 이런 형태의 탄광을 사갱斜坑이라고 한다. 물이 흥건한 막장에서 몸을 눕다시피 기울여서 탄을 캐야 했으니 그 참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165-7)


"훗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지시마가 있다. 일본이 러시아에게서 빼앗은 섬으로 러시아어로는 쿠릴 열도라도 한다." "1855년 러일화친조약을 맺으면서 에토로후 섬 이남을 일본령으로 확정하는 데 합의하고, 1875년에 가라후토-지시마 교환조약으로 쿠릴 열도는 일본의 지시마가 되었다." "(비행장이 많았던) 지시마는 통제된 지역이라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섬에 들어간 조선인들은 어려움이 더 많았다. 더구나 인근 해역으로 연합군이 자주 함대를 이동했기 때문에 공격을 많이 받기도 했다. 지시마는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 본토와 훗카이도를 지키는 외곽 지대로서 역할을 강요받았다. 그래서 희생자도 많았고 가혹 행위도 심했다." "일부기는 하지만 고래잡이로 지시마에서 조업을 하던 조선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사할린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원래 고래는 잡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일본은 전쟁에서 기름을 사용하기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포경을 했다."(250-2)


"훗카이도를 건너면 아오모리 현에 닿는다. 아오모리에서도 철도와 도로, 항만 공사장, 군수공장에서 조선인들이 가혹한 노동을 했다. 아오모리 부근은 아키타 현인데, 금광이 많은 지역이다. 그 조금 아래에 이와테 현이 있다. 이곳도 금광과 군수공장이 많은 곳이다. 이들 현들을 포함해서 도호쿠 지방이라고 한다. 도호쿠 지방은 토질이 척박하고 농산물도 적게 소출되는 곳이어서 이전부터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이곳은 또한 농경근무대라 해서 농사짓는 조선인 군인들이 근무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훗카이도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대단히 춥고 눈이 많은 지역이어서 주로 한반도 남부에 살던 조선인들이 견디기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특히 아키타 현은 조선인들이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고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인 1만 3535명이 동원되었다고 추정된다. 안전장치를 전혀 갖추지 않았으므로 낙반 사고를 비롯한 작업장 사고가 빈번하여 사망자가 많았다."(253-4)


"아오모리 현 아래쪽에 이와테 현이 있다. 철광산이 많아서 철광석을 가공하는 공장이 있었던 곳이다. 광산이 13개소나 있고, 철광석을 제련하는 제철소와 제련소가 세 군데 있었다. 그 밖에 조선인들은 철도 공사장이나 댐 공사장에서도 일했다. 이들 작업장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일본제철주식회사 가마이시 제철소다. 일본제철은 1880년에 이와테 현 가마이시 시市에 제철소를 만들었다. 당시에는 관영이었는데, 1887년에 운영권이 민간에 이양되었다." "이와테 현 아래쪽에는 야마가타와 니가타, 미야자키라는 3개의 현이 있다. 야마가타는 이와테 현과 마찬가지로 광산이 많다. 열 두 곳의 광산과 발전소, 철도 공사장, 비행장 건설 공사장에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미야자키는 관광지로 알려졌지만, 야마가타의 맞은편에 있는 지역으로 야마가타보다 훨씬 많은 작업장에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 "니가타는 북한으로 떠나는 '만경봉호'가 출발했던 항구로 유명하다."(262-5)


"간토 지방은 일본 수도인 도쿄와 수도권인 지바, 가나가와, 수도권에서 조금 확대해 야마나시, 도치기, 군마, 사이타마가 포함된다. 도쿄는 일본의 수도라 조선인들이 동원된 작업장이 없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군수공장과 해운 항만 시설, 비행장 건설과 지하 시설물 건설 공사장에서 일했던 조선인들이 매우 많았다." "군수공장 가운데에는 히타치 제작소 같은 기계 제작 공장도 있지만, 철강업이나 조선소, 제철소, 가스공장 등 규모가 큰 공장이 대부분이다. 총알이나 폭탄 등 무기를 만드는 공장도 있었고, 군인들이 신는 구두나 의복을 만드는 공장도 있었다." "서른 군데나 되는 운수 항만 작업장은 바로 군수공장과 직결된다. 군수공장에서 만든 물품을 전국 각지와 일본이 전쟁을 치르던 지역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쿄는 바로 항구가 연결되니 군수물자를 보내는 출발 지역으로 적당했다. 도쿄에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장이 많다 보니 연합군의 폭격을 많이 받기도 했다."(274-5)


"지바는 간토 대지진으로 유명한 지역이자 조선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학살의 중심지다." "지바 부근 가나가와는 유행가로 잘 알려진 요코하마 항구가 있는 곳이다.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항만 운수 관련 작업장이 많이 있었으나 가장 많은 작업장은 역시 군 공사장이나 군수공장 등이었다." "가나가와 현의 대표적인 작업장은 일본강관주식회사다. 이 회사는 가나가와 현에만 무려 작업장 일곱 곳을 운영하며, 8000명에 가까운 조선 청년들을 노동자로 끌고 갔다." "히타치나 나카지마 등 굴지의 일본 기업들이 당시 사이타마에서 비행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사이타마에는 육군항공사관학교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생산한 비행기를 훈련할 조종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또 다른 간토 지역인 군마 현에 있는 동원 작업장의 특징은 농경근무대라고 해서 전투가 아니라 농사를 짓는 업무를 담당한 부대가 배치된 지역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280-4)


"교토와 나라는 이전에 일본 수도였기 때문에 궁성과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한편으로 전쟁과 관련한 조선소와 군수공장, 지하공장이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유적지에 군수공장과 지하공장이라고 하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 지역에 군수공장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유적지라면 보호해야 하니 공습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 일본은 유적지에 집중적으로 지하 시설을 만들고 군수공장을 가동했던 듯하다. 이런 일본 당국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나고야나 오사카 등 간사이 지역에도 공습이 있었지만, 나라나 교토는 공습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301) "미에 현은 구리 광산으로 유명한 곳으로 이시하라 산업 본사가 있다. 중국 하이난 섬에서 조선 수형자들을 동원해 1000명에 가까운 동포들의 목숨을 앗아간 기업의 하나가 이시하라 산업이다. 미에 현에서 이시하라 산업은 1936년경부터 기슈 광산이라는 구리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다."(304-5)


규슈 지역에는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한 것"이라는 망언으로 유명한 전 일본 수상 아소 다로의 집안이 경영했던 탄광이 있다. "아소 상점은 1910년대부터 조선인을 광부로 채용하기 시작했는데, 1932년에 아소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이 일으킨 파업이 일본 노동 운동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1932년이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데, 임금 차별과 계속되는 사고 등 노동 조건이 열악했기 때문에 파업이 일어났다. 당시 자료를 보면, 아소 탄광에서 조선인의 생활에 대해 '착취 지옥'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정도로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조선인들에게는 열악한 작업장이었다 아소 광업은 전쟁 기간 동안 사세를 더욱 확장해서 이후에는 지역 경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큰 기업이 되었다. 경영자가 정계로도 진출했고, 탄광업이 사양 산업이 된 이후에는 시멘트 산업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도 후쿠오카 중심지인 이즈카 시에서는 '아소 타운'이라 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3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완용 평전 -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장 관료로 내딛은 첫발, 그 신중한 한 걸음


"이호준은 19세기 말 조선 정계의 복잡한 인맥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인물이었다. 세도정권의 막후였던 조대비 세력, 고종의 등극과 함께 막후가 된 대원군, 그리고 임오군란 이후 고종의 막후였던 중전 민씨 세력과 언제든 소통 가능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론 명문가에 양자로 들어간 이완용은 그 집안의 상속자로 교육받았고, 다른 명문가 자제들과의 인맥을 형성하면서 관료로 진출하는 길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2)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양자가 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드는데, 서자는 적자가 될 수 없었으며 성씨가 같은 집안 아이만이 양자가 될 수 있었다. 서얼이 관직에는 나아갈 수 있었지만, 양반가의 관습에서는 여전히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고 있었다. 이호준의 경우도 이미 서자인 이윤용이 있었지만 가문을 상속받을 적자가 필요했고, 같은 우봉 이씨 가문의 이완용을 양자로 들여 그를 적장자로 삼았다."(25)


"고종의 미국에 대한 짝사랑은 대단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종은 1881년 김홍집이 가져온 황쭌센의 『조선책략』을 읽고 조미통상조약의 체결을 결정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부유한 나라가 되었지만, 유럽의 열강과 달리 식민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미국에 대해 당시 중국도 매우 호감을 갖고 있었다. 서양과 최초로 맺은 조약인 조미통상조약은 조선이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조약 중에서 그나마 조선에게 가장 유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관세율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둘러싼 국제 분쟁이 발생하면 미국이 두 나라 사이를 조정하는 거중조정(居中調停) 조항까지 들어 있었다."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면서 (갑신정변에 연루된) 신기선의 국문을 행했던 1887년의 이완용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정계 분위기에 조응하면서도 조용히 미래의 변화를 준비하는 치밀함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36-8)


"이완용이 귀국했을 때에는 위안스카이와 그의 위세를 등에 업은 민영준(민영휘) 등의 민씨 척족이 큰 세력을 형성하여 정사를 좌우하고 있었다.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고종의 외교 정책과 차관 도입 시도가 좌절되었으며, 내무부를 중심으로 근대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점차 빛을 잃어갔다. 고종의 결정을 믿고 주미대리공사직을 수행했던 이완용의 정치적 입지는 고종의 정책 실패와 함께 줄어들어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이완용에게 내부 참의직을 제수한 것은 고종의 신임이 이완용에게 쏠리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조치였다. 더욱이 청과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주미대리공사직을 수행한 이완용에 대한 고종의 신임은 청의 세력을 등에 업은 정치 세력을 자극할 만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완용은 사직상소를 통해 "이러한 총애가 미치자 사람들이 오히려 놀라는데, 신의 황송하고 두려운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52-3)


"그는 사직상소가 아니면 병을 핑계로 임명받은 자리에 불참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정계와 거리를 두고자 했다. 반면에 왕과 세자를 가까이할 수 있는 시강원과 승정원의 관직은 계속 유지했다." "이완용보다 7살이 어린 윤치호는 조선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그 개혁은 급격한 정치 구조의 변동을 초래하지 않으면서 왕을 중심으로 서서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종이 추진하던 개혁은 청의 간섭으로 거의 수포로 돌아갔고, 국가의 실권을 가진 내무부는 친청세력과 민씨 척족이 장악한 채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었다. 변화의 새로운 기운이 없는 정계에서 이완용이 자신의 입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분란이 생길 수 있는 관직을 마다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1893년 가을, 생모 신씨가 사망했다. 이완용은 3년간 꾸준히 지켰던 시강원 겸교사서직을 사직하고 생모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낙향했다."(55-7)


2장 충성스러운 신하에서 기민한 정치인으로


"1차 갑오내각 때는 대원군과 민씨 척족의 첨예한 대립이 부각되었고, 왕이 배제된 상황에서 새로운 내각이 어떤 방향으로 재편될지 매우 불투명한 상태였다. 이때 이완용은 조선을 떠나 있어야 하는 전권공사직을 마다한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반면에 2차 갑오내각은 대원군과 민씨 척족 세력이 배제된 대신 친일적 색채를 띠면서 관료 중심의 개혁을 이끌려 했던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의 세력과 일본 망명에서 돌아온 박영효 등의 갑신파가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조선 정부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기 위해 친일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는 한편 앞으로 예상되는 외교적 마찰을 줄이기 위해 러시아, 미국 등 구미 열강의 외교관들과 소통 가능한 인사들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이때 주목받은 세력이 친미 성향의 정동파였다. 이완용의 입각은 조선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노우에의 정략적 필요와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65)


"3차 갑오내각의 초기인 1895년 6월 초에는 아직 이들이 적극적으로 일본을 배척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노우에가 조선을 떠난 후 임시 대리공사였던 스기무라 후카시가 6월 16일 일본 외무성에 보낸 보고에 따르면, 정동파는 각국과 골고루 교제하여 각국 공동의 보조에 의해 어느 한 나라의 강제를 피하려 한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6월 25일 일본공사관 서기관 히오키 마쓰는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서광범, 이완용, 이윤용을 지목해 이들은 일본을 배척하는 기색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완용이 열흘 사이에 일본을 배척하는 정치색을 분명히 드러낸 것은 중전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중전은 6월 7일 이노우에 공사가 일본으로 귀국하자 정동파 인사들을 통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접촉했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은 고종과 중전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고, 일본을 배척하고 고종을 중심으로 개혁을 단행할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69)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벌어진 후, "미국공사관에 기거하던 이완용은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귀국한 이범진과 함께 다시 고종을 빼내오는 계획을 세웠다." "고종을 자주 만났던 미국 선교사들이 이완용과 고종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고종을 모시던 상궁 엄씨가 계획에 동참했다. 궁궐이 습격당하고 중전이 처참하게 죽자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더구나 임오군란 때처럼 권력 행사에서 배제된 고종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빠져나왔다." "이완용은 이범진, 베베르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과 세자를 맞이했다. 이완용과 고종은 4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아관파천이 춘생문 사건처럼 사전에 발각되었다면 이완용은 망명을 하거나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완용 역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이 일을 감행했고 성공시켰다."(84-5)


# 춘생문 사건 : 1895년 11월 28일,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는 시도가 좌절된 사건


3장 정계의 중심에서 세상과 만나다


"이범진의 축출 이후 갑오개혁에 따른 사회적 혼선이 빚어지자 양반을 비롯한 보수 기득권 세력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신식'에 대한 불만 여론은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고종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여론에 부응하며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정치 세력을 등용하여 축소된 왕권을 확대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범진 퇴진 이후 정계를 주도했던 이완용에게는 새로운 갈등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왕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 체제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왕실과 정부의 분리를 통해 왕의 권력 행사를 일정하게 제약하고 내각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왕과 내각이 조화를 이루면서 통치권의 일부인 행정권을 내각이 어느 정도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다. 고종의 입장에서 보면, 왕실과 정부의 분리라는 갑오개혁의 원칙이 관철될 경우 통치권의 일부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의정부 제도를 부활시켜 행정 권력을 다시 자신의 통치권 내로 편입시키고자 했다."(102-4)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1년 동안 이완용은 고종을 등에 업고 세력을 얻은 보수 세력에 맞서 정동파의 입지를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정동파가 보수 세력의 반격에 맞서는 동안 고종과 러시아공사 사이에서 통역을 담당했던 김홍륙은 이용익 등과 결탁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한편 1896년 10월 21일, 니콜라이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이 러시아 차관을 얻는 데 실패한 채 러시아 군사교관 14명만을 데리고 귀국했다. 그는 고종에게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조선을 도울 의사가 없으므로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필요가 없다며 환궁을 요청했다. 이완용은 기대했던 러시아의 원조가 성사되지 않자 실망하는 한편 김홍륙 등을 후원하면서 조선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려는 러시아공사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한다. 이에 그는 일본공사관원과 친분이 있는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를 통해 은밀히 일본과의 제휴를 도모했다."(118-9)


"김홍륙 등의 정치 공세로 인해 민영환, 박정양이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이완용의 고종 환궁 계획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고종의 '총신'에 의해 그는 점차 정계에서 밀려난다. 그러나 정동파는 아직 고종에게 유용한 세력이었다. 김홍륙 등의 득세로 실권은 상실했지만, 미국공사관과 소통할 수 있는 이완용 등을 내각에서 완전히 밀어낼 순 없었다. 또한 보수 세력과 정동파 세력을 서로 견제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해가던 고종은 김홍륙 등의 독주를 견제할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경운궁 수리가 마무리되자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할 명분이 없어진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마침내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고종의 환궁이 실현되었지만, 이완용은 환궁을 주도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이 계획했던 미국인 고문을 통한 내정 개혁 역시 실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정계 개편의 주도권은 환궁으로 왕의 건재를 과시할 수 있었던 고종의 손에 넘어갔다."(124-5)


"1898년 1월, 러시아는 조선에서 부동항을 얻기 위해 목포와 진남포 지역의 토지 매입에 적극 나서는 한편 부산 절영도를 석탄고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조차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군함을 부산에 입항시킨 후 무력시위를 벌였다. 또한 김홍륙, 민종묵, 이용익 등의 친러세력은 한러은행 설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더욱 커져가자 독립협회는 윤치호와 서재필이 주축이 되어 러시아의 국권 침탈을 비판하는 사회·정치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한 다음 2월 13일 토론회를 개최하여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기로 건의한다." 1898년 2월 27일, 양부의 병을 핑계로 서울에 남아 있던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명실상부하게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기 시작한다."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공감대를 형성해가자 러시아공사 스페이어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킬 용의가 있다면서)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137-9)


"갑오개혁 이전의 정계에서 몇 안 되는 개화 성향의 인물로 평가받았던 이완용은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자신보다 출신 성분이 낮은 사람들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 했다. 이들은 정계에 안주하지 않고 인민을 향해 정치적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가 겸 언론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양반 관료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정계를 주도해왔던 이완용은 이러한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을미사변 전후에 반일을 표명하다가 아관파천 이후 반러로 입장을 바꾸었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그가 변신의 귀재이고, 그래서 을사조약 체결 과정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간주해왔다. 그러나 고종의 통치권을 회복하여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이완용에게 그것은 변신이 아니었다. 더구나 고종의 신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권력 구조 속에서 이완용은 일관되게 군주를 보필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갔다."(143-5)


4장 정계 밖에서 설움을 겪다


"1894년과 1895년에 이완용이 보여준 고종에 대한 충성심과 여전히 고종의 부름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찾으려는 그의 행동은 기존의 권력 구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위치 지우려는 것이었다. 갑오개혁 시기에 그가 추진한 행정제도와 교육제도의 개혁은 기존 체제 안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전라북도 관찰사로서 보여준 관료적 합리성 역시 기존 지방 행정 체제 안에서 허용 가능한 것이었다. 이완용은 갑오·을미개혁을 거치면서, 그리고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기존의 권력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규정하는 관료로서의 태도를 벗어버린 적은 없었다. 그는 개량적 개혁을 추진하는 정치 관료였다. 그리고 다른 관료에 비해 신중한 성품의 인물로, 유교적 합리성을 교육받았고 근대적 합리성을 체득한 이였다. 그는 체제에 편입된 양반 관료로서 자신의 지위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정세의 흐름과 상황에 맞춰 행동반경을 결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171-2)


"이완용이 학부대신으로 다시 내각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공사 하야시의 추천 때문이었다. 1905년 초에 일진회가 친일 집회를 열었을 때만 해도 이완용은 친러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야시 공사의 추천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 시기에 일본공사는 되도록 친일 인사를 입각시켜 고종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기 때문에 반일 성향의 인물들은 대부분 내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러적 이미지를 가진 이완용이 학부대신에 임명된 것은 매우 의외의 일이었다. 그러나 1902년 유길준의 쿠데타 사건으로 이완용과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던 이하영이 일본공사관을 통해 자신과 이완용 형제의 구원을 요청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이완용은 이하영을 통해 일본공사와 연계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대한제국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정책 기조로 인해 고종과 이완용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알렌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177-9)


"1905년 9월 5일,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하는 조항이 들어 있는 포츠머스조약에 러시아가 합의하면서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또한 9월 27일, 영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한다는 내용의 제2차 영일동맹을 공개했다. 이로써 일본을 견제할 현실적 가능성도 사라졌다. 갑오·을미년의 위기를 아관파천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기대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이때 고종은 측근 세력을 동원하여 미국 등에 지원을 호소할 방안을 고심하고 있었지만, 내각원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고종의 계획에 함께하지 않았다. 고종 측근들은 내각 대신을 친일 세력으로 몰아가고 있었지만, 내각 대신들은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할 가능성이 사라진 이상 고종의 계획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완용 역시 아관파천 때와 같이 고종을 위해 어떠한 계획도 도모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았던 가능성이 불가능성으로 바뀐 이상 국제 정세는 10년 전처럼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80-1)


5장 애국과 매국의 갈림길에서


1905년 11월 15일, 을사조약 체결을 놓고 이토의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은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토가 고종의 말에 찬성한 것은 당시 정부의 정책 결정 구조가 의정부에서 각 대신들의 사안을 의논한 후 고종에게 올리면 고종이 최종적으로 가부를 결정하는 형식이었으므로 이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신들이 모두 반대 의견을 표명하더라도 고종이 찬성할 권한은 갖고 있었다. 이토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이완용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이완용은 "아래에서 대신들이 막아서기 어렵다"고 말함으로써 고종이 결정권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던 것이다. 이날 신하들이 일본공사에게 거절 의사를 전달하기로 대책을 마련한 것은 고종에게 조약 거부의 구실을 제공하는 데 불과했다. 즉 고종이 '신하들이 모두 반대하니 지금 바로 결정하기 어렵다'고 말함으로써 조약 체결을 미루고, 영국·미국·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일 시간을 벌어보자는 것이었다."(195)


"1905년 11월 17일, 소위 '을사5적'으로 불리는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5명의 대신이 '가(可)'에 서명하여 체결된 을사조약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국내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에서 동양 평화의 화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배신했고, 내각 대신이 임금과 백성을 저버리며 일신의 영화만을 추구했다고 비난했다. 장지연은 을사조약 체결의 책임을 이토와 내각 대신들에게 떠넘긴 채 대한제국 권력의 핵심인 고종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한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이 글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각지의 유생들은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무효화하라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고, 도끼를 등에 메고 대궐 앞에 엎드려 읍소하기 시작했다. 민영환 역시 유생들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서 읍소했는데, 일본 헌병들이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자 울분을 참지 못한 채 결국 자결한다."(198-9)


"대부분의 유생들이 최고 결정권자였던 고종을 차마 거론하지 못한 채 모든 책임을 을사5적에게 떠넘기고 있었지만, 최익현은 고종의 허약과 무능을 정면으로 엄중하게 꾸짖었다. 을사5적을 처단하라는 유생들의 상소에 대해 '충심을 알고 있다'라는 비답을 내려왔던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에 대해서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임오군란과 갑오농민전쟁에서 보여준 백성들의 힘과 분노를 두려워했던 지배 엘리트들은 백성들에게 나라의 주권을 일부 넘겨주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왕과 인민 사이에서 양자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 엘리트 중심의 정당을 구상했다. 입헌군주제와 지배 엘리트가 장악한 정당의 수립이 그들이 생각하는 정체였다. 이러한 구상은 기존 체제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가운데 왕권을 조금 제한하고, 백성들의 요구를 조금 수용하는 절충적인 형태였다. 따라서 이들은 왕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고, 또한 부정해서도 안 되었다."(201-3)


"이완용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면 대한제국이 국가적 위기에 봉착할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일본 정부의 강력한 관철 의지를 확인한 후 고종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거절 의사를 표명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판단 속에서 조약문을 수정하여 되도록 왕권 행사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그래서 통감의 권한을 외교에 한정시킴으로써 고종의 통치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이완용은 현실 상황에 맞춰 자신의 입지를 정하는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그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향으로 결과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는 매우 실용적인 인물이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울분과 분노에 치를 떨기보다는, 또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상황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합리성과 실용성을 갖춘 관료였다."(206-7)


"이완용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었지만, 합리성과 실용주의로 포장된 이완용의 주장은 조금씩 대한제국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계몽운동 단체와 근대 문명을 받아들인 유학파 지식인들은 을사조약에서 명시했던 "한국이 부강을 인할 시"까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에 근거하여 부강을 위한 실력 양성의 기치를 더욱 높이 내걸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스웨덴-노르웨이 제국 등 실질적으로는 식민지에 가깝지만 형식적으로는 국가 연방의 형태로 통합된 나라들, 그리고 독일과 미국 등의 연방 국가들을 소개하면서, 보호국은 식민지와 다르며 대한제국이 부강해진다면 다시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저항과 투쟁이 사회 혼란을 가중시키고 일본의 강압을 더 불러온다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은 '실력 양성'만이 독립 주권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209-10)


6장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친일로 나아가다


"고종의 양위와 정미7조약 체결로 이토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얻은 이완용은 자신의 세력과 친인척을 정계에 등용하는 한편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계몽 단체와 일진회를 무력화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일진회는 6월 10일 일진회 특별평의원회를 열어 총리대신 이완용의 사직 권고안을 의결함으로써 본격적인 이완용 반대운동을 벌여 나간다. 송병준은 일진회원들을 동원해 여론을 이끌어내고, 일본 군부 세력을 등에 업고 이완용 내각을 전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당시에 일본 정부 내에서는 대한제국 문제를 놓고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커져가고 있었다.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갔던 군부 세력은 대한제국에 대한 즉각적인 군사 점령을 주장한 반면, 이토는 주변 열강, 특히 러시아의 눈치를 보면서 대한제국을 점진적으로 점령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군국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이토의 정치적 입지는 축소되어가고 있었다."(229-31)


"1909년 7월 10일 이토의 귀국 연회가 끝나자 소네 통감은 이완용을 불러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게 위탁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완전히 보호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기유각서'의 체결을 요구했다." "이완용은 이미 일본의 지배에 대해 어떠한 회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일본 차관으로 대한제국이 개발되고 있었고, 강력한 일본의 무력이 대한제국을 전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순종의 순행 때 행했던, 일본의 지도를 받아 실력을 양성하는 길만이 대한제국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완용의 연설은 대중을 회유하기 위한 연설만이 아니었다. 이는 자신의 행동과 역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최면이기도 했다. 사법권의 위탁으로 대한제국 언론은 이완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인 사법권 이양은 통치권의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236-7)


"주권의 핵심 내용이었던 통치권을 이양하되, 국호와 왕실을 그대로 두는 형태의 병합은 1905년 이후 대한제국 지식인들이 수용한 국가연합 이론에서도 언급되었던 형태였다." "국호와 황실의 존재는 대한제국의 멸망이란 충격을 완화시키는 방법이었다." "데라우치는 이완용의 제안 중 국호 문제는 양보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독립 제국임을 선포했던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존속시킬 경우, 일본 황족에 포섭된 대한제국 황실의 지위 문제가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한국 또는 대한제국이 국제법상 독립국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청의 속국인 왕조 국가란 이미지가 있는 조선이란 국호를 고집했던 것 같다. 데라우치는 대한제국 국호 사용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왕의 칭호 존속 요구를 수용했다. 데라우치와의 협상을 마친 이완용은 8월 22일 순종을 알현하고 한일병햡조약에 대한 전권 위임장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통감부에 가서 데라우치와 회견하고 조약에 조인했다."(253)


"순종은 이왕(李王)이란 호칭에 불만을 표했다. 병합 조칙이 발표되기 전날인 8월 28일, 순종은 궁내부대신 민병석을 데라우치 통감에게 보내 일본 측이 제시한 '왕'을 '대왕'으로 정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순종이 끝까지 황실의 지위 문제를 고집했던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협상 전 이완용과 만났을 때 고종과 순종이 끝까지 관철시키려 했던 것은 황실의 지위 문제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더구나 데라우치와의 협상에서 이완용이 관철하려 했던 것이 왕호, 즉 황제와 황실에 대한 지위 문제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 보인다. 결과적으로 고종과 순종, 그리고 황실의 지위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8월 29일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한국을 제국에 병합하는 건'이 선포되고, 고종과 순종을 각각 덕수궁 이태왕과 창덕궁 이왕으로 책봉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자국의 황실 전범에 없는 '왕공족(王公族)'이란 제도를 만들었고, 대한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개칭하는 칙령이 선포되었다."(254-5)


7장 권력의 정점에서 지탄의 절정으로


# 1926년 2월 11일 이완용 사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