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루돌프 피어하우스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오토 브루너, 베르너 콘체 엮음, 공진성 옮김 / 푸른역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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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유럽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정치적 전통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단어들인 '자유주의적liberal', '자유주의자Liberale', '자유주의Liberalismus'는 정치적 구호와 투쟁의 언어로서, 그리고 정치적 지향과 정당의 이름으로서 19세기에 처음 등장하여 자리를 잡았다." "기본적으로 모든 자유주의자들은, 철학적 견해나 정치적 주장의 차이를 넘어, 공통적으로 그들이 그 자체로 인도적이며 합리적이고 교육받은 선한 사람이면 누구나 마땅히 동의할 목표를 추구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적과 비판자들은 그들을 전통의 파괴자라고 폄하했고, 그들이 처음에는 자유를 요구하지만 나중에는 평등을 추구함으로써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정치적 자유주의는 그것이 세속화와 사회적 원자화의 부수적 현상이며, 물질주의와 상업 정신의 정치적 표현이고, 민주주의와 대중의 전제적 지배로의 길을 에비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직면해 있었다."(12-3)


"두 가지 정황이 추가로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19세기 이후에 정치적 입장의 스펙트럼이 〈왼쪽〉으로 확장됨으로써 한때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입장이 점차 중앙으로 밀려나 혁신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둘째, 자유주의가 그 비판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세계관이나 정치적 목표와 동일시됨으로써 하나의 계급 이데올로기로 축소되었다. 이것이 19세기 중반 이후로 자유주의자들이 다른 정당들의 정치적 구상과 충분히 차별적인 독자적 정치 구상을 내세워 자신들의 집권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자유주의의 정치적 미래는 오늘날 자유와 평등 간의 긴장, 개인의 자기 결정과 사회적 형평성의 제도적 보장 간의 긴장, 법치국가와 복지국가 간의 긴장이 민주주의 정치 체계 속에서 어느 정도로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이제야 제기된 현대의 문제가 아니라, 19세기부터 독일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잠재되어 있던 문제였다."(14)


2. 문제 상황 : 리버랄 - 진보적 - 자유로운 정신의 - 민주적인


"오늘날까지 '리버랄liberal'과 '리버랄리테트'라는 단어는 전반적으로 아직 정치적이지 않은 일정한 성향과 입장이 편견에서 자유롭고 잘 베풀며 관대하고 계몽된 사고와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유럽의 사회적·정치적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등장한 시민의 해방과 자유주의적 정치 이념의 결합을 자연법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 했고, 성숙하고 자유로운 국민을 그 단계에서 등장한 것으로 보려고 했으며,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정치적 사고를 당파적인 것으로 여기지는 않으려고 했다. 이런 생각이 재산을 지닌 교육받은 시민 계층의 특수한 이익을 표현한다는 주장을 자유주의자들이 굳이 반박하지 않은 것은 그런 생각이 [시민 계층의 특수 이익을 표현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모든 사람의 이익에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그들이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6-7)


"자유주의를 지칭하는 단어들은 유럽에서 혁명 이후에 정치적인 개념으로 발전했다. 이 개념을 사용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지성적이거나 문학적이지만은 않은 투쟁을 이미 경험했다. 그 투쟁은 한 사회 안에서 벌어진 앞으로 밀고 나아가려는 세력과 버티려는 세력 간의 투쟁이었고, 분배의 상황을 바꾸려는 세력과 재산을 지키려는 세력 간의 투쟁이었으며, 정치적 자유와 법적 평등을 추구하는 집단과 특권을 지키려는 집단 간의 투쟁이었다. 혁명이 다가올 사회에 관한 이론을 폭력적으로 실천하려는 방향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자유주의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폭력적인 반동과 복고의 가능성도 알고 있었다." "'리버랄'은 구체제의 정치적·사회적 관계를 복원하거나 유지하는 것에 반대하고, 시대에 맞는 개혁을 통해 정치적·사회적 제도들이 계속 발전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대한 자칭, 타칭의 수식어가 되었다."(17-8)


3. 단어의 역사


"라틴어 'liberalis'는 먼저 '자유와 관련된', 다음으로 '너그러운'과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에게 어울리는'을 의미했고, 명사형 'liberalitas'는 개별 인간의 '귀하고 깨어 있는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특히 그런 사람이 지닌 '너그러움'과 능력, 물론 개인적인 능력으로 이해되지만 자신에게만 유익하지는 않은 능력을 의미했다. 이것은 (예컨대 관후寬厚함처럼) 공중의 존경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liberalitas'는 아직 정치적인 덕은 아니었지만, 공적으로 인정받는 덕이기는 했다." "그 밖에도 'liberalitas'는 자선이나 기부와 같은 구체적인 의미와 여러모로 연관되는 일반 윤리적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독일어 '리버랄'과 '리버랄리테트'는 지식인들이 라틴어에서 가져와 사용한 말로서 16세기 이후에 독일어에 등장했으며, 넓은 의미로 공적이고 정치적인 삶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어떤 태도에 대해 말할 때 '리버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일이 독일에서 이미 18세기 후반에 뚜렷하게 증가했다."(24-7)


4. 정치적 개념으로의 변화


"(프랑스에서 반反시에예스파, 곧 온건 입헌주의자들을 가리키던) 'liberal' 개념이 이른바 공적인 영역의 빛 속으로 완전히 들어온 것은 혁명력 8년(1799) 브뤼메르 18일이었다. 하루 전에 마레는 〈혁명의 토대가 된 관대하고 리버럴한 사상들〉을 칭송했다. 그리고 18일에 〈원로원Conseil des Anciens〉에서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의 구성원인 바라와 물리아가 자신에게 〈리버럴한 사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타도하고자 하는〉 정당의 당수 자리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19일에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보수주의적인 사상, 후견주의적인 사상, 리버럴한 사상들은 각자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자신의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정파들 사이를 연결하는 끈을 없애려는 의도를 나폴레옹은 분명히 이 선언으로써 표현하기를 원했다. 보수주의적인 사상과 리버럴한 사상을 나란히 놓은 것은 그 두 사상이 서로 대립적이지 않고 급진주의, 반동, 부패, 무정부에 맞서 필요하게 될 것임을 보이기 위해서였다."(36)


"당대의 프로이센 정치가들의 언어에서 '리버랄'이라는 말은, 계몽을 통해 더욱 활성화된 더 오래된 의미, 즉 '호의적인, 자선을 베푸는, 관대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44) "1815년 무렵의 독일에서는 '리버랄'이라는 단어에 더욱 확실하게 정치적 윤곽을 부여하는 일이 아직 필요하지 않았다. 공화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요구들을 표현하기에 그 단어는 너무 불확실했다. 계몽된 정부의 정책을 가리키는 데에는 다른 표현들이 사용되었다. 물론 이 정책을 '리버럴'하다고 부를 수 있었지만, 애국적인 의식을 지닌 시민의 태도도 그렇게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을 요구하고 이런 태도를 강조하는 것은 다른 집단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어떤 집단의 정치적 강령이 아직 아니었다. 그래서 〈리버럴한〉 사상과 원칙이 사적인 삶 속에서나 공적인 삶 속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리버럴들〉이라고 부를 기회도 역시 없었다."(47)


5. 1830년 이전의 자유주의 개념


"1822~1823년에 괴레스는 〈자본주의자들의 돈에 대한 교만〉과 〈배운 자들의 이성에 대한 교만〉을 〈요란한 자유주의〉의 요소라고 일컬었다. 〈신흥 자본가 귀족〉과 새로운 〈지식인 성직자〉를 〈전제적 지배의 도구〉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서 육성한 정부들은 이제 이들이 정부의 〈근간〉을 허문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으며, 〈두 개의 다른 계급〉, 즉 〈용병 부대〉와 〈관료 집단〉을 정부의 수호를 위해 끌어들여야 했다. 〈이 두 적대적 집단 간의 싸움에서 한편은 자유주의를, 다른 한편은 정통주의Legitimismus를 구호로 내세웠다.〉 몇 년 후(1825)에 프란츠 폰 바더는 당대의 〈리버럴한 교의 속에서 로마제국을 부패시킨 것과 동일한 에피쿠로스주의[쾌락주의]를〉 다시 발견했다고 믿었다." "바더의 '자유주의' 개념은 훗날 가톨릭적 반근대주의의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정치적 사유와 행위를 가리키는 개념 그 자체가 되었다."(60-1)


"한편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원칙과 목표의 추상성은 자유주의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며, 인간을 잘못 판단하여 정작 인간을 개선하고 싶어 하면서도 오히려 망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헤겔과 같은 낭만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헤겔은 자유주의를 〈이성의 ····· 추상Abstraktion ····· der Vernunft〉에 매달리는 노선이라고 표현했다. 〈이성의 원칙들은 구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안착하게 된다. 자유주의는 추상에 매달리는 노선이다. 구체적인 것은 자유주의를 언제나 이기며, 구체적인 것에 맞서서 자유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파산한다.〉" "헤겔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단지 제한된 역사적 권리만을 가지며, 그 자체로는 원칙적으로 [국가를] 안정시킬 수 없으므로, 보편적 국가 목적에 대한 관념 속에서 자유주의를 〈지양Aufhebung〉하는 것이 필수적이다"(64-5)


6. [1848년] 3월혁명 이전 시기의 자유주의


"1842년에 〈독일 계간 문집〉은 1830년 이후로 독일에서 리버럴들이 점차 의심받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혁명에 대한 공포가 기존의 것과 다른 것을 원하고 생각하는 것 일체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혁명가들이 자신을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진보적인 사람들이 이제 혁명가로 여겨지게 되었다. 과거에 사람들이 리버럴이라는 표현에 자부심을 가졌다면, 이제 이 한정사는 욕설과 비난이 되었고, 소란하고 음험하고 전복적이며 위험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리버럴들의 수가 늘어나자 사람들은 그들을 〈선량한 백성들로부터 ····· 분리시키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제후의 신성한 권리, 이른바 [통치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사람을 〈리버럴〉이라고 불렀다면, 이 비난은 계속 확장되었고, 마침내 〈어떤 사람이 맘에 안 드는데 그를 비난할 다른 어떤 말이 즉시 생각나지 않을 때〉 아무에게나 갖다 붙이는 말이 되었다."(83-4)


"(자유주의가 〈합리적인 법의 생산을 지향하는 노력들의 총체〉라고 주장한) 파울 피처는 '가짜 또는 오해된 자유주의의 무절제' 속에서, 순수한 '진짜' 자유주의를 〈잘못 다룬〉 결과를 깨닫는다. 이 순수한 진짜 자유주의가 거부될 수 없기 때문에 그 반대자들은 그것을 〈매우 거친 급진주의〉와 동일시하고, 〈입헌적 리버럴들〉을 〈자기자신의 원칙을 따른 결과를 두려워하는 ····· 길들여진 혁명가들〉이라고 부른다. 〈자유주의를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반동〉이 자신들이 가진 힘을 사용한 이후로, 〈리버럴한 시각〉은 사방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리버럴한 원칙〉에 기초한 모든 주장은 〈계획적인 반대라고 비난〉받으며, 〈전체의 이익 ····· 그리고 양도할 수 없는 진보의 권리〉에 대한 옹호는 〈기존 체제의 전복과 무정부, 폭도들의 지배〉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모략당하고, 〈리버럴한 분위기의 상승〉은 소수 몽상가들의 작품으로 폄하된다."(86)


"당파 싸움과 혁명에 대한 의심을 넘어 〈순수하게reine〉 리버럴한 입장을 규정하고 '자유주의' 개념에 신념윤리적인 합리적 속성을 부여하려는 이러한 노력들에 맞서 자유주의 좌파 진영은 자유주의의 정치적이고 당파적인 기능을 강조했다. 에드가 바우어는 1843년에 〈독일의 이른바 리버럴들〉이 투쟁을 기피하고 단결을 호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생각에 모순은 분명해져야 했으며 통일은 비판을 통해 달성되어야 했다." "바우어에 의하면 〈헌정 체제에서 최고의 선을 발견하는 자유주의의 어떤 장르〉는 모호하며 극복되어야 한다. 이런 급진적 비판 속에서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이제 단순히 하나의 세계관적·정치적 지향이나 관념적 구상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어떤 정치적 입장과 당파를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 당파는 단호한 야당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성과가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87-8)


"1840년대에 이미 급진주의자들은 오늘날까지 자유주의의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는 요소들을 거의 모두 지적하며 자유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리버럴', '리버랄레, '자유주의'와 같은 개념들에 (가치를 긍정하는 어떤 수식어도 그 앞에 붙이지 않으면서)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그리고 폄하하는 어조를 부여했다. 1845년에 〈진정한〉 사회주의자 진영에서 나온 어느 논문은 〈독일의 자유주의〉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독일의 자유주의가 〈리버럴한 헌법〉을 지지했고, 독일 자유주의의 〈정치적 시야〉가 당시로서는 〈가장 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논문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가 발견됨〉으로써 독일의 자유주의는 계속해서 존재할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자유주의는 스스로 존재하기를 단념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저 〈위선적이고 잔혹한 형태로〉만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90-1)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보기에 독일에는 〈실질적 자유주의〉가 없었다. 그저 자유주의에 대한 〈열광〉과 〈이데올로기〉만 있었을 뿐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를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부르주아의 최종 목표〉는 [자신이] 〈성숙한 리버럴, 곧 국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리버럴한 말들은 부르주아지의 실제 이해관계를 감추는 관념적 표현〉이다. 〈자유주의가 우리의 기존 관계에 대한 합리적 인식이라는〉 믿음은 그저 독일인들이 여전히 〈자유주의에 대한 환상〉에 매달려 있음을 확인해줄 뿐이다." "1840년대를 지나면서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자신이나 타인의 정치적 입장과 당파를 표시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정치적 표어가 되었고, 정치적 토론과 논쟁에서 사용되는 어휘들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내에서 온건 노선과 급진 노선 간의 차이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면서 온건한 자유주의는 점차 [급진적 자유주의보다] 보수주의에 더 가깝게 변하게 되었다."(93)


7. 혁명과 반동


"많은 리버랄레들이 더 나은 시대에 대한 희망과 의심, 낙담 사이에서 반동의 시절들을 견뎠고, 다른 리버랄레들은 민주주의와 '붉은' 혁명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리버럴한 원칙들을 실행에 옮기기를 주저했지만, 그들은 모두 단절을, 즉 시간이 자유주의를 도울 것이라고 기대했던 19세기 전반기의 이상주의적 자유주의가 이제 유효하지 않게 된 시간적 단절을 느꼈다. '자유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그들의 당혹감과 자신을 '리버랄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이런 감정의 반영이었다. 많은 리버랄레들이 더욱 강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원칙들이 낳은 결과와 거리를 두었고, 정치적 패배 후에도 [프롤레타리아의 해방보다는] 경제의 전체적 발전을 지지하고 민족 통일의 달성을 자유주의의 진정한 목표들보다 우선시함으로써, 더욱 강하게 '기존의 것'과 타협했다. 그러나 이런 타협들은 집권하지 않는 정당을 본질 상실의 위험뿐만 아니라 분열의 위험으로도 이끌 수 있다."(109-10)


8. 정치적 자유주의의 부활


9. 전망


"정치적 발전 과정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동의를 묻는 질문과 관련해 자유주의가 오랫동안 반복해서 새로운 것으로 분열되었고, '리버럴'이라는 말이 정당 이름에서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리버럴한 생각과 행동의 필요성이 심지어 민주주의를 다르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일에 대해서도 인정되고 강조되는 나라에서 리버럴한 대의제 민주주의가 동시에 자유롭고 사회적인 법치국가여야 한다는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자유주의의 정치적 신조Credo이다." "이 단어는 오랫동안 불분명한 것뿐만 아니라 부담스러운 것으로도 여겨졌다. 이 말이 사회적으로는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주의 체제와 연결된 것처럼 보였고, 정치적으로는 유약함과 기회주의를 상기시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민주주의의 지지자들과 상대적으로 사회주의적인 민주주의의 지지자들의 결집이라는 측면에서, 리버럴한 민주주의의 중도적 입장은 (적어도 교정자로서) 필요해 보인다."(1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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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호르스트 슈투케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오토 브루너, 베르너 콘체 엮음, 남기호 옮김, / 푸른역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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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2. 사실의 규정과 단어의 역사를 위한 지침들


"오늘날 지배적인 정의에 따르면 시대 개념으로서의 '계몽'은 17세기 후반기에 착수되어 18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유럽의 정신 운동을 나타낸다. 이 정신 운동을 통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근본에서부터 변화시킨 세속화 과정 속에서 〈근대 세계〉가 표출되었던 것이며, (막스 베버가 말한) 〈세계의 탈마법화〉가 전면적으로 도입되었던 것이다. 이 〈탈마법화〉의 목표는 원리상 역사적 전통 세계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율적인 인간 이성의 비판적 검증을 견딜 수 없는 모든 권위, 교의, 질서, 결속, 제도, 인습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이었다. 이것들은 자신들의 합법칙적 체계 내의 분류에서 벗어나는 것들이었으며, 따라서 미신, 선입견, 오류 등으로 입증되었다." "이제 절대적으로 정립되어 불변하고 보편타당한 것으로 간주된 이성이 계몽의 기초로 출현하게 된다." "〈근대적인〉 인간은 스스로를 자신의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며, 자연을 자신이 이성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의 대상으로서 지배하게 된다."(20-1)


3. 18세기 마지막 30년 동안의 전형적인 개념 형성


# 계몽 개념의 다의성

1. 베스텐리더 : 온갖 종류의 외피와 덮개를 제거하여 빛으로 오성을 비추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 즉 교화와 도야를 통해 국민 전체의 교양 수준을 고양시키는 것

2. 빌란트 : 이성의 권리와 책무를 통해 요청되고 구성되는 보편적 인식 개념이자 앎의 수준. 변증법적 연관 속에서 학문적 지식이 가장 높은 단계까지 상승하는 것

3. 박애주의자들 : 자신이 부분으로 속한 전체와의 결합 속에서 자신의 계층에 맞는 올바른 지식을 습득하는 것, 도덕적·실용적인 민족 교양 운동의 측면을 강조함

4. 칸트 : 미성년 상태에서 성년 상태로 전진하는 '과정', 예술과 학문, 종교로 대표되는 정신 영역에서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 더 나은 것을 향한 역사적 진보

5. 멘델스존 : 계몽은 특수한 '근대적' 상황이나 이에 상응하는 기획과는 구성적 연관성이 없으며, 단지 '교양'의 이론적 측면을 표현(실천적 측면은 문화)하고 있는 것

6. 바르트 : 모든 인간들에게 도덕적·경제적으로 유익하고 실현 가능한 공통 자산으로서, 보편적 인식 요구와 결합되거나 고도의 사고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 개념


4. 혁명기 매체의 논쟁에서 표어 신조어들과 개념 구획들


"표어로서, 또는 동시대 표현에 따르면 유행어로서, '계몽'은 매체에서, 그리고 매체 때문에 가장 구별되어 수용되고 평가를 겪었다. 매체의 경우 몇 년 만에 책, 소책자, 정기간행물, 논문, 기사 등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범람했으며, 모두 제목에 '계몽'이라는 말을 달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말은 어떤 이들에겐 신성한 이름의 지위와 타당성을 획득했고, 애용하는 말로 뽑혔으며, 마법의 주문처럼 다루어졌고, 국민의 좌우명으로 제시되었다. 이에 반해 다른 이들은 이 말을 욕설로 여겼고, 아예 존경스럽게 표현하길 거부했으며, 솔직하게 미심쩍고 경멸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다." "언어 사용의 비일관성에도 불구하고, 1780년대 중반부터 도처로 퍼져가는 계몽 논의의 정치화와 세계관적 양극화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계몽의 친구와 적에 관해 힘주어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99-100)


"계몽에 대해 제기된 엄청난 양의 비난과 고발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계몽은 기존의 정치와 종교 질서에 대한 모반을 꾀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국가의 토대와 존립을 위협하고 공공의 안녕을 매몰시키며 종교와 왕권의 전복을 획책하고 보편적 자유 정신, 무종교, 몰인륜성, 무정부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명목적인 또는 실제적인 〈계몽의 적들〉로 우둔함의 촉진자, 무지한 자, 정통 고수자, 무지와 우둔의 사도, 열광자, 몽매한 자, 어둠의 친구, 반反계몽의 친구와 같은 이름들이 꼽혔으며, 이들의 입장은 〈예수회〉와 〈비밀 가톨릭〉의 입장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다른 한편으로 〈계몽가〉라는 단어가 경멸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해도, 〈계몽가〉는 자유정신가, 반反그리스도, 무신론자, 무신앙과 반란과 악덕의 친구, 열광자(!), 종교와 인간 행복의 적, 인류의 적,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비방되고 탄핵되었다."(102-3)


"계몽을 '일루미나티'나 '자코뱅주의'에 귀속시키는 것은 '계몽'과 '비계몽' 간의 대립이 '진보'와 '반동' 간의 대립과 동일하며, 체계 또는 운동 개념으로서의 '계몽'이 내용적으로 이념과 정당의 역사로부터 알려진 초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생과 수렴한다는 이해를 실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외관은 미혹된 것이다. 개념사적으로 그러한 종류의 이해는 근거가 없다. 1790년대에는 여전히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으로 인정된 계몽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개념사적으로 (이신론으로부터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계몽=자유사상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입헌주의로부터 급진적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계몽=정치적 자유 감각이라는 등식도 성립되지 않는다. 매체상의 계몽 논의에서조차도 이러한 연관은 열려 있었으며, 계몽 개념의 보편적 논의 가능성에도 한계가 없었다."(106-7)


"모든 정치적 지향의 추종자들과 자코뱅주의자들은 계몽 개념을 혁명적인 것, 선동적인 것, 폭력적인 것, 무정부적인 것과 분리하려 시도했다. 바이에른의 한 자코뱅주의 전단지는 프랑스혁명의 원인들로 미신, 재정 파탄, 국세 낭비, 경솔한 전쟁, 귀족의 패륜, 부역 부담, 높은 문맹률Zehentbarbarei 그리고 보편적인 국가 노예 상태를 꼽고 있다. 전제정치를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국가를 파괴하고 프랑스혁명을 야기했던 것이지, 계몽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계몽의 적들'의 중상모략을 무력화시키고 계몽의 속행과 촉진과 완성을 위해 통치자나 대중을 움직이려는 변론적인 의도 때문에 〈진보주의자들〉이 다시금 계몽을 활성화하려 했다면, 〈보수주의자들〉이 추구한 목표는 〈참된 계몽〉을 대변한다는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드물지 않게 〈참된 계몽〉을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 인식에 결부시키고, 전승된 정치 질서의 원리 위에 확립하게 하는 데까지 멀리 나아갔다."(109-10)


5. '독일 운동'에 있어서의 단어 사용과 개념 규정들


"헤르더에게 '계몽'은 특정한 종류의 합리적 앎을 표시하기 위해 아무 시대에나 임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표현으로 머문다. 그는 이 단어의 사용을 본격적인 정의 속에 확정하지도, 매우 폭넓은 변용變用들을 중단하지도 않았다. 그가 '계몽'으로써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인본성과 일반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앎이다. 이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이성의 인도하에 밝히고 확장시키는 과정과 결과를 포함하며, 자연 및 인간 세계의 인과적 연관들에 대한 지식의 획득과 증가를 포함한다. 더 나아가 이 앎은 〈사물들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제시해준다. 마지막으로 앎은 다른 무엇보다 그에 상응하는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정상적인 삶의 형식 속에서 자신의 표현을 발견한다. 헤르더는 '계몽'에 대한 이러한 근본 이해를 가지고 상이한 곳에서 풍부하게 구별되는 관점들을 결합시켰다. 계몽의 의미 내용은 이 결합된 과점들을 통해 다양하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140)


"1786년 칸트는 한 시대를 계몽하는 것을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로 본 반면에, 한 개별 인간을 계몽하는 것을 당시로선 비교적 쉬운 일로 여겼다. 실러에겐 이 관계가 정확히 정반대다. 그에게 현 시대의 계몽은 문젯거리가 아니다. 이 시대는 이미 계몽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진리가 밝게 비추었는데도 동시대인들에게 진리 수용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 진리가 생생하게 확신시켜 주었는데도 진리 가정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에 따라 더 긴급한 시대의 욕구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지이다." "그가 우리 시대의 더 긴급한 욕구·····로 특징짓는 것은 〈감정을 고상하게 하고 의지를 도덕적으로 순화하는 것·····이다. 오성의 계몽을 위해서는 이미 상당히 많은 것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빛이 아니라 온기이며, 철학적 문화가 아니라 미적 문화다.〉 실러는 이 후자를 성격 형성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여긴다."(146-7)


"예나 시절 초기의 헤겔이 '계몽'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다음 문장이 잘 보여준다. 〈계몽은 이미 그 근원에 있어서, 그리고 즉자 대자적으로 오성의 통속성과 이성을 넘어서려는 오성의 허황된 고양을 표현한다.〉 이때 헤겔에게 '계몽'은 일단 모든 철학적 이념들을 대중적으로, 또는 본래 통속적으로 만드는, 그리고 이렇게 진부하게 만드는 일Plattmachen을 체계로까지 고양시키는 풍조Manier와 동일하다. 비판적인 철학적 규명을 통해 헤겔의 계몽 이해의 중심에 이를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계몽'을 오성의 활동과 영향을 받은 고유한 학문적 형태와 방법으로 파악하며, 자신의 관점에서 오성을 모든 이념적인 것을 유한성 아래에 제한하고 계산하고 정립하는 힘으로 규정한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오성의 〈왕국〉은 유한한 것이 즉자 대자적으로 절대적인 것이며, 유일한 실재성이라는 원리에 의거한다. 그래서 계몽의 근본 특징에 ····· 속하는 것은 유한자와 무한자의 절대적 대립태다."(159-60)


"헤겔은 계몽 개념을 사용할 때에 도식적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계몽〉이라는 역사적 전체 현상의 특수한 현상 형식들과 부분적으로 합치하는 구별된 관점들은 계몽의 구성적 징표들에 관한 그때마다 구별되는 조합과 평가에 이를 수 있다." "보편적 계몽 개념은 어떤 면에서 정신사적 근본 개념으로서의 '계몽'을 서술한다. 비록 이것을 헤겔 자신이 명시적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 이전의 18세기 독일 철학을 특별히 볼프 형이상학이 아닌 한에서 ····· 계몽이라는 표현으로 특징짓는다. 그렇지만 그는 이 시기 프랑스 철학에 관해서는 다른 계몽의 형식을 말하고 있다." "독일 계몽에 대해 헤겔은 대체로 아주 혹평하는 편이다. 독일 계몽과 정반대로 그는 프랑스 철학을 일관성과 정신적인 활력과 개념의 힘 때문에 놀랄만한 것으로 여긴다. 프랑스 철학은 그러한 것들을 갖추고 부정의 관점을 관철했으며, 실존에 대항해서, 신앙에 대항해서, 권위의 온갖 힘에 대항해서 싸웠던 것이다."(174-5)


"헤겔은 계몽의 성과를 조명하고 심오한 역사적 권리를 증명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계몽의 권리란 바로 감정의 몰사고적 종교성에 맞서 있는 사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체계적인 개념 형성은 단호하게 계몽의 성과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단점과 불충분성을 통해서 규정된다. 이것들의 입증에 결정적 구실을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항상 절대지의 원리에 따라 계몽이 맺는 〈절대자〉와의 연관이다. 절대지의 원리는 헤겔에 의해 무한하고 유한한 생동하는 정신 자체의 변증법적 운동으로부터 획득된다. 이에 따르면 사유의 유한화는 신이 그 외부에 정립되어 있는 인식의 우주와 진리의 왕국을 창출하는 만큼만 계몽의 구성적 징표가 된다. 이로써 유한자의 관점이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신은 사유 밖의 피안으로 여겨진다." "헤겔에게 〈계몽〉은 18세기 프랑스혁명의 부속물, 즉 정신을 갖추지 않고 오성적 진지성과 유용성의 원리로써 이념을 쟁취한 프랑스혁명의 맥 빠진 형식이다."(176-7)


6. 19세기 계몽 이해의 근본 경향들과 국면들


"적지 않은 개별적 이질성에도, 낭만주의와 관념론이 '계몽'의 의미 영역을 역사적·체계적으로 구분함으로써 '계몽'이라는 역사적 개별 개념 형성에 기여한 몫은 그 당시엔 성취되지 못했던 함축성과 목적성을 띠었다. 전체 결과 속에 일관되게 실현된 의도는 〈계몽〉을 철저히 〈근대〉의 획기적 정신 형태와 운동으로, 또는 모든 역사적 전승과 외적 권위에 대항하는 합리주의적이고 유한한, 결국엔 〈반종교적인〉 18세기의 세계관, 사유방식, 정신 태도로 바꿔 표현하려는 것이었으며, 근대의 추상적·해방적 특징을 역사철학적으로 명료화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보편적 언어 사용에 끼친 낭만주의적·관념론적 계몽 이해의 영향은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언어 사용은 '계몽'의 의미 내용과 적용 영역에 대한 논쟁들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참된 계몽과 거짓된 계몽의 구분 문제에 해당된다."(182-3)


특정한 단어 선택은 해당 개념의 적용 범위를 협소화하지만 시대적 관점에서는 그 개념이 무제한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말하자면 19세기 후반기에 역사적 시기 및 운동 개념으로서의 '계몽'이 의미상 고정되고 사태 중립적·가치 중립적 보편 개념으로서의 '계몽'과 분리됨에 따라 '계몽'을 보편적 세계관 개념, 체계 개념, 방법 개념으로 형성하려는 경향이 출현한다. 이 개념은 사안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역사적, 구체적 계몽 개념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개념의 적용 영역은 〈계몽의 시대〉에 제한되지 않으며, 원리상 인간성의 전체 역사를 포괄한다. 이 개념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보편적인 하나의 세계관, 정신 태도, 사유방식 등으로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이것들은 전통의 구속적인 권위를 내던지고, 전승된 신앙 교의, 교리적 표상 방식과 관례로부터 사유를 해방시키며, 사유의 고유한 지위를 자리 잡게 하고, 사유에 의해 이성적으로 인식된 것만을 타당하게 보려 한다."(202-3)


"계몽 개념을 보편적으로 구속력 있게 정의하려는 19세기의 다양한 노력들 중에서 〈계몽〉을 〈반계몽주의Obskurantismus〉의 정반대로 규정함으로써 계몽의 구성적 징표들을 정교하게 만들려 했던 노력 또한 주목할 만하다." "18세기 말에 같은 방향의 논쟁을 계승하면서 표어로서 다양하게 사용된 반계몽주의는 정신적·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보에 절대적으로 적대적이고, 모든 변화와 새로운 현상을 단호하게 혐오하며, 민족의 우둔화와 무지에만 관심을 두고, 가장 타락한 수단으로써 학문적 통찰을 확산시키고 도덕적·종교적·정치적 대상들에 대한 명석한 개념을 형성하며 인간의 권리들에 대한 가르침을 억압하고 정신의 자유로운 도약을 저지하려 했던 힘과 경향을 총칭하는 일종의 집합 개념이다." "그것의 반대 개념인 '계몽'은 인식 및 앎의 개념으로서 일반적으로 참된 사실들과 인식들의 전달 및 조화로운 합일 그리고 올바르고 명료한 사유 및 개념 파악의 형성을 포괄한다."(207-8)


"브루노 바우어에게 '계몽'은 일반적으로 종교의 파괴를, 특정하게는 기독교의 비판적 파괴를 의미한다. 그는 세계사를 완전한 자기 인식과 절대적 자유를 향한 인간성의 변증법적 진보로 파악한다. 이는 고대로부터 일련의 계몽들을 거쳐 성취되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계몽'을 원리상 역사를 조건으로 하는 해방적 진리 인식이자 의식의 도야로 파악한다. 의식의 도야는 자연적 의식으로부터 초자연적인 종교적 의식으로 상승하며, 인간의 자율적인 자기 인식에서 완성된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본질 인식은 종교적 표상들을 통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모든 인식의 진보와 이 진보를 불러오는 계몽마저도 그렇게 규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계몽은 18세기의 무신론에 이르기까지는 종교적 계몽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계몽은 종교적 형식으로 수행된 종교의 해체다." "바우어에겐 이러한 계몽이 '근대 세계'의 중심 과제다."(225-6)


"니체의 〈새로운 계몽〉 개념은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배경으로 하여 〈사이비 신앙〉의 문화 비판적·시대 비판적 반대 개념으로서, 그리고 지성에 대한 의지의 우월성을 설정하는 엘리트적 교육 개념으로서 구상된 것이다. 그 개념은 기독교에 대한 투쟁 못지않게 도덕, 이성, 인본성, 문화, 진리, 철학 등 〈옛 계몽〉의 지도 이념들에 대한 거부를 함축한다. 그 개념은 이념들을 대체해 방향을 지시하는 원리로서 〈생〉과 〈의지〉를 설정한다. 니체는 〈진리에의 의지〉를 〈힘에의 의지〉의 기능으로 설명하고, 특정한 종류의 생명체를 보존하기 위해 특정한 종류의 비진리가 승리하고 지속되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여기면서, 합리주의적·기독교적 해석의 기반에 놓여 있던 계몽의 원리들과 의식적으로 결별한다. 그렇게 니체는 19세기 말에도 여전히 '계몽'이라는 말의 다양한 철학적 사용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다."(2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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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5 - 평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5
외르크 피쉬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안삼환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1. 서론


"'평화Friede'는 언어적으로 유사한 낱말들인 '자유로운frei', '구혼하다freien', '친구Freund'처럼 인도게르만어의 어근 'pri-' (사랑하다, 보호하다)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원래는 사랑과 보호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감정적 속박과 애착의 관점보다는 상호 적극적인 도움과 후원의 관점이 훨씬 더 강조되었다. '평화'는 처음부터 사회적인 개념이다." "결정적인 것은 평화의 상태를 '사랑하다'로부터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보호하다'로부터 이해해야 하는지가 차이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에 상응해서 '평화'는 어떤 때에는 (특히 친족 간에 지배적인 것처럼)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의 상호 결속의 상태로, 또 어떤 때에는 단순히 비폭력 상태로 파악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세에 널리 퍼진 화해와 평화의 대립이 그 사실을 대변하는데, 여기서 '평화'는 바로 (대개는 시간적으로 기한이 정해진) 폭력의 중지를 의미할 뿐이다."(12-3)


2. Friede 1


"〈평화의 휴전induciae pacis〉과 〈항구 평화pax perpetua〉라는 '평화'의 두 가지 의미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특히 안전securitas 개념으로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평화 개념도 있었다. 이것은 내용적으로 '안전securitas'과 '정의iustitia'보다는 오히려 '사랑caritas'과 '은총gratia'을 지향하고 있으며, 법ius, 즉 엄격하고 공식적인 법률에 대한 반대말로 사용되었다." "중세 교회의 법률적 사고에서 '사랑caritas(minne)'과 '정의iustitia'는 바로 평화의 관점에서 대립했다. 즉 기독교인은 (그리고 교황도) 평화의 이해와 관계되는 〈사랑을 위해서propter caritatem〉 권리를 포기하도록 요구받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물론 '정의iustitia'의 관철이 짜증스러운 일(불쾌감)을 유발할 것 같은 경우에만 그랬다. 그러므로 'caritas', 즉 'minne'의 의미에서 '평화'는 '평화로운'(즉 법적인) 소송을 포함해 '다툼' 자체에 대한 반대 개념이었다."(20-1)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평화와 정의는 세계 질서의 기본 범주들이었다. 그는 평화를 〈질서의 고요함tranquillitas ordinis〉으로, 질서를 〈동등한 것들과 동등하지 않은 것들을 각각 자기 자리에 앉히는 배치〉로 파악했다. 그러나 그는 위계적으로 구성된 세계 질서 내에서 모든 사물에다 그에 걸맞은 〈올바른〉 자리를 배정하는 능력과 의지를 'iustitia', 곧 정의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완전한 〈세계(만물)의 질서ordo omnium rerum〉 및 그에 소속된 평화와 정의는 그 창시자이자 최종 목표인 신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본래의 완전한 의미에서의 평화와 정의는 피안의 완전함의 상태에서만 가능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지상의 평화와 정의는 불완전한 모사, 또는─극단적인 경우─영원한 평화pax aeterna, 영원한 정의의 파편상破片像 이상일 수는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기에, 이생에서는 기껏해야 일시적 평화pax temporalis가 주어진 것일 뿐이었다"(23)


"중세의 평화는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1) 깨지지 않은 또는 회복된 법질서의 상태로서의 평화, 즉 〈평화와 정의〉로서 나타나고, 2) 소송과 논쟁의 중지로서의 평화 그리고 정의와 법의 집행이 중지된 평화, 즉 〈평화의 평온함〉이 개념의 실질적 내용을 형성하는 평화로서 나타나며, 3) 아주 특별한 법률적·물적·인적 영역들의 〈충족〉으로서의 평화, 즉 〈평화의 안전securitas pacis〉이 중요시되는 평화로서 나타난다. 공포된 평화든, 명령받은 평화든, 합의된 평화든 간에 중세의 모든 평화는 공간적·물적·인적 견지에서 평화롭지 못한 영역들이 있음을 전제로 한 〈특수한 평화paces speciales〉였다. 이것을 넘어서는 최초의 걸음은, 〈보편적 평화pax generalis〉라는 특이한 개념으로 불린 적도 있었던 [중세 때 국왕 등이 내린] 분쟁 중지령Landfrieden이었다." "즉 보장된 비폭력 상태로서의 평화를, 비록 제약된 공간 내에서이긴 했지만, 〈보편적〉으로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34-5)


# 중세의 정치·사회적 평화 개념

1. 사랑caritas, 평온tranquillitas, 안전securitas, 그리고 정의iustitia 같은 개념들로 경계가 표시되는 의미 영역 내에 평화를 분류해 넣는다.

2. 참된 평화와 거짓 평화를 구별하되, 그 기준은 정의에 대한 평화의 관계다.

3.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평화는 자기 영역권 밖의 '평화롭지 못한' 영역들, 즉 이교도 세계를 배제한 '닫힌' 평화였다.

4. 도덕적·신화적인 '영적 평화' 개념과 달리, '정치적 평화' 개념은 개방성을 띠고 있다.

5. 모든 정치 공동체 형성의 의미와 목적으로 평화('현세적 평화'pax temporalis)의 가치가 인정되었다. '현세적 평화'는 '시민 평화pax civilis'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3. Freide 2


"종교 개혁에 의해 야기된 기독교 세계의 종파 분열은 지금까지 통용되어온 '평화'의 의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을 요구하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초래했다. 기독교의 '영적 평화pax spiritualis'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평화의 기초fundamentum pacis'로서의 '정의iustitia'에 대해 더 이상 의견 일치를 볼수 없었기 때문에, 공동체들 내의 그리고 공동체들 사이의 '현세적 평화pax temporalis'도 의문시되었다." "종파들로 분열된 기독교는 법과 평화를 더 이상 연관시킬 수 없었다. 기독교의 평화는 '외견상의 평화pax apparens'가, 즉 전통적 교리의 의미에서의 사이비 평화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해하던 대로의 '정의롭고 참된 평화'는 결국 전쟁을 통해서만 복구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들의 결과는 전래적 의미에서의 저 '정의로운 평화'가 아니라 다른 새로운 평화, 즉 '시민의 평화', 다시 말해 국가의 평화였다."(43)


"국가 내부의 이 같은 평화 상태는 그 후 250년 동안 평화 그 자체로 이해되었다." "이 '시민 평화'의 성격에 대해서는 근세 초기의 사회 및 국가 이론서들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이 토론의 골자는, 통일된 신학적 세계 이해가 붕괴된 이후 다시 한 번 종파들을 포괄하는 공동의 '세계관'을 가능하게 한 철학적, 합리적 자연법(즉 탈신학화한 기독교적 자연법)의 체계 속으로 새로운 평화 개념을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이 자연법 속에는 이미 15세기와 16세기의 위대한 발견들을 통해서 소개된 기독교 밖의 세계에 대한 경험들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종파의 분열과 더불어 자연법 사상의 형성을 촉진시킨 경험이었다. 이 자연법의 관점에서는 '인류'가 '기독교'보다 더 가치 있고 우선한다. 또한 그것은 평화와 기독교 사이의 긴밀한 중세적 결합을 해체시키고, 그 대신 '평화'와 '인간성humanitas'을 현대적 개념으로 결합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기여를 했다."(44)


"장 보댕은 평화를 〈국가의 평화〉로 이해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기초 작업을 했다. 그러나 정신사적인 면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토마스 홉스다. 그는 〈시민의 상태status civilis〉와 〈평화의 상태status pacis〉가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 미래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생각을 아주 확고하게 표명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평화와 국가는 서로 의존한다. 즉 국가만이 자신의 시민들에게 평화를 보장해줄 수 있으며, 반대로 평화를 실제로 보장해주는 그런 공동체만을 국가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홉스에게는 중세적 국가 사상가들의 (시류가 지나버린) 〈참된 평화pax vera〉보다 〈효과적인 평화pax effectiva〉가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공정성과 진리의 문제는 제쳐둔 채 당국에 의해 강제되고 보증된 〈시민 평화〉일 뿐이었고, 그 내용은 '안전'과 '평온'이었다. 중세에 평화와 정의가 병존하는 가치들이었다면, 이제 정의는 엄격하게 평화에 종속되었다."(44-6)


"그에 비해 전통적이고 스콜라 철학적인 사회 이론에 관심을 둔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자연법의 합리주의에 관심을 둔 이론가들도 자연적인 정의에 기반하는 〈자연적인 평화pax naturalis〉 개념을 고집했다. 이 사상가들은 평화란 '사회적 결합에 의해 비로소 창출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러므로 칸트의 표현을 쓰자면 평화란 '문화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이들에게 평화는 오히려 사회를 이루어 살기 이전에 인간들이 함께 살던 〈자연스러운〉 상태로 간주되었고, 이러한 것으로서 평화는 인간들 상호관계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정의, 즉 이성이 직접 통찰할 수 있는 정의가 지배하는 한, 효력을 지니며 또 무효화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들은 홉스가 그랬던 것처럼, 평화를 전쟁으로부터 생각해서, 평화가 〈전쟁의 부재absentia belli〉라고 파악할 수는 없었다. 반대로 이들은 전쟁을 평화로부터 생각해서, 〈평화의 깨짐ruptura pacis〉으로 정의했다."(48-50)


"스콜라 철학에 따르면 국내 평화는 정의에 기반을 두며, 동시에 분란이 생길 경우에 무엇이 옳고 합법적인지를 확인하고, 또 자기들 판결이 실행되도록 힘쓰는 사법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었다. 국가들 간의 진정한 평화도 정의에 기반을 두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재판권이 없었다. 분란이 생길 경우에는 우월한 적수가 자신이 개입되어 있는 사건의 공정성을 판단하고 판결 또한 직접 집행해야만 했다. 즉 전쟁을 통해서 말이다." "〈국가 간 평화inter civitas〉는 〈시민 평화〉인 국내 평화에 비교해서 좀 더 열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시민 평화〉를 옹호하던 바로 그 중요한 대변인들이 지속적인 국내 평화와 지속적인 국제 평화의 병존이란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했고, 좀 더 높은 가치인 국내 평화를 위해 국제 평화를 희생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보댕과 리슐리외 같은 사람들은 국가 조직의 공고화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국가 간 전쟁의 〈정화 작용〉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다."(56-7)


"18세기에 들어와 (도덕적) 이성법의 이념이 점차 정치적 중요성을 띠게 되면서 평화 개념 또한 중요해졌으며, 결코 완전히 잊힌 적이 없는 참된 평화와 거짓 평화 간의 오래된 구분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1797년에 피히테는 〈법은 평화다〉라고 쓴 바 있다." "이 진술은, 참된 평화란 폭력이 아닌, 부당한 폭력은 더더욱 아닌, 올바른 법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피히테는 자국 내에서 〈시민 평화〉가 〈정의로운 평화〉가 되면 국가 간 평화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말한 바 있다." "내적 평화와 외적 평화는 불가분 서로 연결되어 있고, 먼저 이 국내 평화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계몽주의 평화 이념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국제 영구 평화(1795)에 관해 구상한 칸트의 결정적인 첫 논문이 〈모든 국가의 시민헌법은 공화주의적이어야 한다〉라는 내용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칸트에게는 내부의 '올바른' 질서 없이는 외부의 어떤 평화도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66-7)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보기에 영구 평화의 상태가 확산되는 걸 방해하는 것은 계몽되지 않은 종교 사상이 아니라 계몽되지 않은 '경제적' 사고였다. 중상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통상 제한 정책이 국가들 간의 영구 평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난 것이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은 국가 간의 무역과 교통의 자유에서 그리고 국가 내부에 전파되고 있는 '무역 정신'에서 '지속적인 평화'의 가장 훌륭하고 확실한 보증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그 다음에는 도덕적으로도 이해된) 인간과 민족들 간의 이해의 조화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18세기 전반기의 경제 이론과 평화 사상의 결합이 계몽주의적·시민적 평화 개념의 실제 지평을 형성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18세기에 〈평화의 정신〉과 〈무역의 천재〉의 결합으로서 시작된 것이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경제 사상과 평화 사상의 동일시로까지 확대되었다."(72-3)


"프랑스혁명의 대변자들이 생각했던 평화는 공공의 안녕과 안전을 보장하는 현대 국가의 〈시민 평화〉가 아니었다. 시민 평화는 이성, 자유, 도덕을 억압하고 조롱한 전제 정치의 강제력에 기인하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혁명가들이 추구한 평화는, 국가 내의 강제 평화든 교묘하게 측정된 균형 체계에 기초하는 국가 간의 평화든 간에 국가의 평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평화는 보편적 인류의 평화로서, 무력이나 정치적 계산에 의해 비로소 형성된 게 아니라 비이성과 착각에 의해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모든 인간과 민족의 자연스러운 〈박애〉로부터 이에 반대하는 방해물들이 먼저 제거되기만 하면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는 평화였다. 방해물들이란 절대주의 국가 체제와 그 대변자들이다." "영구평화를 위한 정의로운 전쟁은 시민전으로서만, 즉 세계시민의 전쟁으로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성, 평화, 보편적 박애의 제국은 자의적 국경선을 통해 제한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76-8)


"'평화'의 종교적 의미를 정치·사회적 평화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이 계몽주의 사상의 신세를 지고 있는 모든 사회적 구상들의 특징이다." "전쟁과 적대관계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했던 것은 바로 세속화된 종교적 평화 개념이었다. 세계에 평화의 제국이 도래하리라고 확신하고, 스스로를 예언자로서뿐만 아니라 이 도래하는 제국의 대표자로서 이해한 정치 이데올로기의 안목에서 볼 때, 이러한 평화의 제국을 믿지 않거나 또는 이 제국의 도래를 저지시키려고까지 했던 모든 사람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적으로 간주되었다. 더욱이 자기들이 주장하는 평화를 저지하거나 공격하는 자는 누구나 평화의 적 그 자체로 간주했고, 미래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박멸되어야만 할 평화의 절대적 적(중세의 이단자가 그랬듯이)으로 간주되었다. 이 절대적 적(평화의 적과 인류의 적)의 개념은 나중에 그 어느 이론에서보다도 특히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큰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95)


4. 전망


"국력 신장을 위해 또는 민족적 이익 및 권리 주장을 위해 전쟁이 필요 불가결하고도 허용된 수단이라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한 민족의 도덕 능력의 회복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철천욕(鐵泉浴, 혹독한 시련)'이라며 전쟁을 높이 평가하는 그런 확신들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19세기 후반에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런 확신들은 파시즘 사상의 구성 요소로서 20세기에도 아직 그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파시즘의 붕괴 이후까지 살아남지는 못했다." "〈주전론자들〉은 전쟁을 찬미하면서 오직 국가들 간의 전쟁만을 생각했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공공의 안녕과 안전이라는 국내 평화의 가치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20세기 초에야 그런 사람이 나타났는데, 〈폭력에 관한 성찰〉에서의 조르주 소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폭력〉이 국가 내부의 싸움에서도 필요한 형태로 인정되기를 바라면서, 무조건적 평화 연맹으로서의 근대 국가의 의미를 지양했다."(102-3)


"'냉전'이 개시된 이후 평화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정받은 구체적인 내용을 상실하고, 조화, 자유, 정의, 행복의 세상을 불러올 수 있다고 희망하는 일종의 주문이 되었다. '평화'는 세계 구원을 기대하는 짧은 상투어가 되었다. 물론 이때 주목해야만 할 점은 평화가 더 이상 인간적인 공동생활의 이상적 상태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세계 평화pax universalis'로서 인류 전체의 존립을 위한 조건이 되어버린 한, 이 〈구원〉은 핵무기 기술에 직면해 완전히 냉철한 의미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은 ······ 그리고 정복은 인간성에 반하는 것 ······〉이라는 홀바흐의 말은, 극단적인 형태의 전쟁(세계 전쟁)은 인간성humanitas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humanum genus〉 전체를 향해 조준되었다는 격화된 표현 속에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모든 역사적 경험을 초월하는 이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평화를 얻으려는 학문적 노력과 각성이 강화되었다."(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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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 전쟁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빌헬름 얀센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권선형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1. 서론


2. Krieg 1


"14세기부터 '무력에 의한 권리중재kriec'에서 '전쟁Krieg'으로 개념 내용의 이동이 목격되는 사실은 영방領邦의 힘이 강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법 제도의 새로운 정립 및 전래된 소송 절차의 개혁,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는 공적 무력의 확립을 통해 영방들은 당시에 전쟁이라는 개념이 발전하기 위한 객관적인 전제 조건들을 이루어냈다. 이런 영방들은─서유럽의 왕국들과 마찬가지로─그 구조상 내부적으로 분쟁에 적대적이었고, 분쟁을 억제하는 데에도 확실히 중세 절정기에 교회가 명하는 신의 평화령Gottesfrieden이나 왕이 명하는 지방의 평화령Landfrieden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합법적인 무력 사용을 독점하거나 독자적인 무력에 의한 법률 수행을 일반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었다. 무기 사용권이 있는 사람들은 기사의 페데Fehde라는 형태로 계속 전쟁과 같은 방식의 대결을 할 수 있었다."(18)


# 영방領邦 : 중세 독일의 지방 국가로 제후들이 독립된 주권 영역을 형성한 형태

# 페데Fehde : 중세의 합법적인 결투, 싸움


"중세의 전쟁들은 커다란 페데들로, 질적인 면에서는 이런 페데들과 구분되지 않고 단지 양적인 면에서만 구분되었다. 그리고 페데들에 결부되어 있는 결과와 관련하여 정치적 계산이라는 측면에서 좀 더 주의 깊게 다루어졌다. 그래서 예를 들어 1344년에 쾰른의 주교좌主敎座 성당 참사회는 대주교 발람에게 자신들의 동의 없이는 〈정말 대규모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커다란 전쟁groyss urluge〉도 시작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전쟁은, 무력 사용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한 기존 법질서의 테두리 내에서 구체적인 권리 분쟁이 무력에 의해 해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무력과 법은 상호간에 조화를 잘 이루는 것이었지 결코 대립되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페데권을 가진 집단을 제한하고 평화적인 분쟁 해결(중재재판)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그리고 군주에게 권력이 축적됨으로써 전반적으로 무력을 덜 사용하는 추세이긴 했다."(19)


"중세에는 전혀 무력이 사용되지 않은 채 판결이나 화해에 의해 종결될 수 있었던 커다란 전쟁과 페데들이 존재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세의 전쟁은 권리 분쟁으로서의 그 개념에 걸맞게 최소한의 무력 행위에 의해 수행되었다. 전쟁의 목표는 적을 괴멸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법률적 관점을 적이 제 자신에게도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이런 인정을 종국에는 평화 협정, 속죄를 통해 고착화하도록 강요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강요는 〈해를 끼치기〉를 통해 실행되었다. 즉 당시의 문헌들이 말하듯이 〈약탈과 방화〉를 통해 또는 오늘날 말하곤 하는 것처럼 재화에 대한 폭력을 통해 실행되었다. 사람에 대한 폭력은 일반적으로 적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로잡기 위해 행사되었다. 시체가 아니라 보상금을 원했기 때문이다." "분쟁이 빈번했지만 15세기에 경제 부흥이 이루어진 이유는 이런 전제 조건하에서만 이해된다."(20-1)


"게르만적 뿌리에서 발전한 중세의 헌법 구조가 전쟁의 정당성 이론에 대한 욕구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다면, 중세 세계의 또 다른 중심 세력이었던 기독교는 그런 정당성 이론을 매우 강력하게 요구했다." "즉 전쟁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합치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일반적인 전쟁 금지를 목표로 하는 엄격한 전통들과 경향들은, 전쟁 그 자체는 허락하지 않지만 특정 조건하에서의 전쟁은 허용하는 것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하는 성찰에 의해 비교적 쉽게 밀려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스토아 학파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정당한 전쟁gerechte Krieg〉의 이론, 허가된 전쟁의 이론으로 이런 성찰들을 종합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정당성을 위한 결정적인 기준─불의에 대해 복수하는 전쟁─을 전쟁의 원인에서 찾아냈다."(22)


3. Krieg 2


"종파 분열은 비교적 고요했던 중세 말기를 종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새로운 전쟁 유형을 낳았다. 즉 서양 역사를 150년 동안 규정지은 종파에 의한 내전을 낳았다. 당시까지의 전쟁이 적대자들 사이에서 인정된 법질서 내에서의 무력에 의한 권리 분쟁이었다면, 이제는 이런 근본적인 공통점과 그것으로부터 연유하는 무력 사용의 한계들이 무너졌다. 중세에는 단지 이교도 전쟁이라는 이례적이고 극단적인 형식으로만 알려져 있던 것이 종파 전쟁에서는 전반적인 특징이 되었다. 즉 무력의 무분별한 표출, 적을 〈무법자outlaw〉로 경멸하기, 적을 괴멸시키려는 경향이 그것들이다. 공화제respublicae를 안정시킬 채비를 했었던 내부와 외부 사이의 희미한 경계들은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미 가시적이고 작동 가능했기 때문에 (중세의 사상가들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내전은 특별히 강렬하게 체험된 공포가 되었다."(35)


"중세 도덕신학Moraltheologie의 테두리 안에서 발전된 자연법 학설은 이성을 지닌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사는 적합한 자연적 상태가 평화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은 언제나 보통의 상태로 회귀하려고 하는 예외적인 상태로 여겨졌다. 〈평화를 얻기 위해 전쟁을 한다.〉(아우구스티누스) 하지만 홉스의 경우에는 인간의 본능적인 사회성socialitas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적 상태status naturalis〉와 관련하여 평화와 전쟁의 관계를 뒤집었다. 그에게는 평화pax가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in omnes이 자연 상태를 특징짓는다." "홉스의 국가론은 말하자면 부정적으로 반영됨으로써, 즉 국가 상호간의 관계에 관한 학설이 됨으로써 전쟁 개념의 발전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국가들 사이에서inter civitates〉는 계속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자연 상태가 존재했고, 〈자연법laws of nature〉은 무제한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36-7)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전쟁과 협정을 번갈아서 행하여 균형과 안정을 이루었던 유럽적 국가 시스템을 비판함으로써 영구 평화ewige Friede에 대한 소망을 표현했다." "(절대주의) 국가는 계몽주의의 비판적인 관점에 따르면 전쟁을 관리할 수 있는 그 어떤 기능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절대주의 국가는 전쟁의 원인 제공자다. 〈평화는 자유로부터, 또한 필연적으로 억압에 대한 전쟁으로부터 생겨난다.〉 100년이 지체된 후인 1866년 제네바 〈국제평화협정〉은 이해하기 쉬운 간결한 어구 속에 이런 확신을 집약했다. 계몽주의의 국가 간 전쟁에 대한 유죄 판결은 그러니까 전쟁보다는 국가를 겨냥하고 있었다." "전쟁이 국가의 산물로 해석된 것처럼 반대로 국가가 전쟁의 산물로 해석되기도 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향에 의해 작은 사회들이 형성되고, 필요에 의해 시민 사회들이 형성되며, 전쟁에 의해 국가들이 형성된다.〉"(48-50)


"내전의 청산인이자 내적 평화의 보증인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정당화는, 내적 평화가 사회에 대한 전제정치 식의 억압으로 가치가 떨어진 이래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다. 인간의 도덕적·경제적 이익의 조화라는 계몽주의적 입장에 의하면 무력을 독점한 제도적 평화 보증인의 필요성은 더 이상 인정될 수 없었다. 파스칼이 자기 시대의 경험에 의해 모든 불행 중에 가장 좋지 않은 것으로 염려한 내전은 이제 마블리에게는 심지어 〈선행bien〉으로 여겨졌다. 내전의 도움을 통해서만 억압과 정복을 지향하는 구체제의 지배 질서를 제거할 수 있었고, 그로써 영구 평화 상태를 마련할 조건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유럽적 국가 시스템의 틀 안에서 혁명적인 내전은 전쟁에 대한 전쟁이라는 특성과 신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런 식의 내전에 대한 성찰들은 프랑스 혁명과 그에 이은 혁명 전쟁에서 점차 전쟁 이데올로기로 집약되었다."(52)


"국가 간 전쟁은 이제 16~17세기의 정치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더 이상 내전의 방지를 위한 필요악으로 정당화되지 않고, 그와는 정반대로 단지 유럽의 전래된 정치 질서에 의해 강요된 내전의 수행 방식의 하나로 합법화되었다." "구舊체제의 국가 간 전쟁에서는 왕의 전투를 모든 점에서 시민과 멀리 떼어 놓는 원칙이 적용된 반면에, (전쟁이 '수동적으로 민주화'되면서) 이제는 반대로 온 국민이 실제적인 측면이나 선동적인 측면에서 전쟁에 관여했다. 옛 국가의 군인들에게는 그때그때의 〈전쟁의 원인causa belli〉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면─아무 상관이 없었음에 틀림없다!─이제 전사들은 목숨 걸고 싸우거나 또는 그렇게 싸운다고 믿는 그 일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또한 그들에게는 무관심한 순종과 형식적인 용감성 이상이 요구되었다. 전사가 일부러 의식적으로 싸우면서 변호한 그 원칙들은 열정, 희생정신 및 헌신을 요구했다."(54-6)


"독일에서는 구체제로부터 물려받았으며 이제 헤겔 철학을 통해 이념적으로 기초를 다진 국가와 사회의 대립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전쟁은 〈법률처럼 국가의 기본 기구〉(라손, 1868)로서 국가를 통해 대변되는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 남겨졌다. 사실로 주어지고 철학적으로 합법화된 이러한 지평 내에서 전쟁을 〈적을 강요하여 우리의 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무력행위로, 다른 수단들이 개입된 정치적 교류의 연장으로〉 이해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전개될 수 있었다." "19세기의 정치적 실천은 전반적으로 이런 모델을 지향하고 있었다. 〈전쟁의 목적은 국가가 추구하는 정치에 상응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쟁취하는 것이다.〉(비스마르크), 〈전쟁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합리적 조약을 맺기 위한 교섭 수단이다.〉(라손, 1871) 할러는 전쟁이 〈좀 더 나은 평화, 즉 좀 더 유리한 조약으로 이끄는 ····· 수단〉으로 통용되도록 했다."(66-7)


"18세기와는 달리 19세기의 정치가들은 내부적으로도 선동을 하면서 전쟁을 준비하고 또 전쟁에 동참하며, 전쟁에 따라붙는 〈위대하고 정당한 민족적 이해〉를 여론에 분명하게 전달하거나 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여론을 형성하는 한 국가의 교양계층이 이미 전쟁을 〈문명화된 국민〉의 〈구원〉이나 〈회춘〉으로서(라손, 1868) 광적으로 확신하고 있을수록 더 쉽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상호간에 내적인 간격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이해함에 있어서 비스마르크와 같은 보수적인 정치가의 생각과 점점 더 큰 목소리를 내게 된 19세기의 전쟁주의가 만난 지점은 바로 이곳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서 전쟁을 이처럼 보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결국 얼마나 반동적이고 시대착오적이었는지가 분명해졌다." "민족 전쟁으로 행해진 19세기의 국가 간 전쟁에서는 개인적 (적대감) 또는 집단적 당혹감이라는 요소가 더 이상 제거될 수 없었다."(69)


"여기서 힘주어 강조해야 할 것은, 이 전쟁주의는 오로지 국가들 사이의 전쟁만 고려했다는 점과, 그래서 공적인 평안과 안전을 통해 나타나는 국가의 내적 평화는 이론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로지 이런 외적인 전쟁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것은 어떤 혐의를 불러일으킨다. 즉 국가 간 전쟁을 찬양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발설되지는 않은 어떤 동기가 있는데, 그것은 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내전에 대한 공포, 즉 혁명에 대한 고백되지 않은 공포였다는 혐의 말이다. 이미 헤겔은 〈행복한 전쟁은 내적인 불안을 막아주고 국가의 내적 힘을 확고하게 했다〉고 확증했다. 이것은 보댕 이래로 통용되는 생각이다. 전쟁은 단지 일반적인 것을 지향하는 도덕적인 고양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혁명적인 요소를 파괴함으로써 혁명적인 상황과 분위기를 분해한다는 것을 하인리히 레오는 암시했었다." "19세기 내내 귀족과 시민계급 엘리트 대부분은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74-5)


"영구 평화에 관한 계몽주의적 이념에서 처음으로, 전쟁의 원인은 인간의 본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고착된 정치·사회적 제도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등장했다. 이미 몽테스키외와 루소는 전쟁을 사회화의 산물로 인식했었다." "이제는 전제주의자와 귀족들이 아니라 시민사회 자체와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사유재산 원칙이 전쟁의 원인으로 지탄받았다. 정치적 억압이 아니라 사회적 억압과 착취가 지금까지 추구되어온 조화로운 평화 상태로 가는 도상에서 진정 방해가 되는 요소로 증명되었다. 〈그래서 소유라는 개념이 인간을 동물 이하로 끌어내리는 가장 끔찍한 괴물인 전쟁을 세상에 불러들였다.〉"(79-81) "최후의 혁명적 내전을 통해 시민사회를 파괴함으로써 전쟁을 초래하는 시민사회의 대립 요소를 제거하려고 한, 바이틀링이 말하는─종교적 색채를 띤─사회 혁명적 동력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에 사로잡혔고, 포괄적인 역사 이론의 틀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83)


"마르크스의 전쟁 개념의 근간에 놓여 있는 특징은 전쟁에 관한 보통의 이해와 결부되어 있는 생각과 가치 평가를 독특하게 뒤집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 전쟁의 일반적인 유형이다. 국가 간 전쟁은 19세기 중반 이래로 단지 진정한 대립을 은폐하고 국제적인 내전의─〈가난한 자들의 부자들에 대한 전쟁〉의─발발을 연기시키는 그런 기능만 지녔다." "마르크스의 혁명 개념이 혁명적 내전의 전통에 의해 매우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혁명은 (시민)전쟁이다.〉 레닌의 이 문장도 마르크스의 입장을 적절하게 특징짓는다. 내전이 없는 비폭력적인 혁명에 대한 구상은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의회에서 거둔 성과가 자아낸 인상에 의해 비로소 발전되었고, 현대의 무기 기술로 볼 때 성공적인 봉기가 가능할지에 대한 늙은 엥겔스의 의심을 통해 힘을 받았다."(84-5)


4. 전망


"내전의 전통은 다시 20세기에야 비로소,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현실적으로 중요해졌다. 그에 대한 한 가지 이유는 상상할 수 없는 효력을 지닌 핵폭탄이라는 파괴적인 무기의 발전으로 국가 간 전쟁에 정치 수단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또는 전쟁을 주전론적으로 신격화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주권 국가들의 전래된 시스템이 거대 권력들의 존재로 인해 변형되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 존재하고 심지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반면, 군사적으로 무능한 국가들 사이의 간헐적인 국지전을 도외시한다면 이런 시스템에 구조적 특징으로 내재해 있는 국가 간의 열린 전쟁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이 무의미하게 된 이후, 혁명 전쟁은 이를 넘어서서 거대 국가들이 다양한 방식의 공개적·비공개적 중재들을 통해, 말하자면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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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3 - 제국주의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3
외르크 피쉬 외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황승환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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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2. '제국주의' 형성기까지의 '임페리움'


"'임페리움imperium'은 동사 'imperare'(명령하다)에서 파생되었다. 원래의 비전문적인 의미로는 〈명령〉 또는 〈지시〉인데, 국법에 관해 사용될 때는 최고위 공무원의 공권력을 의미한다. 원래 군軍통수권에 제한되었으나, 나중에는 포괄적인,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무제한적인 공권력을 일컫는 총괄 개념이 되었다." "'임페리움'은 적어도 공화정 말기 이후로는 '로마 인민의 지배imperium populi Romani'라는 뜻으로서 타민족에 대한 로마 민족의 힘을 의미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법적으로 엄밀하게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처음에는 사람에 대한 명령권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해당 지역에 대한 명령권을, 그리고 마침내 지배하는 지역 자체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즉 명령이 통용되는 영역이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이 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 이후로 이 용어는 로마 밖의 통치자나 제국과도 여러모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물론 그 경우 로마는 최고의 제국이었다."(14-5)


"서로마 제국 몰락 후 서방에서 '임페리움'은 카를 대제의 대관식(800)과 오토 대제의 대관식(962)을 계기로 다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때때로 이런 저런 다른 명칭이 덧붙기도 했지만, 제국의 명칭은 1806년 해체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임페리움과 더불어 왕의 영토, 즉 '레그나regna'가 생겨났다. '임페리움'과 '레그나'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황제 측에서는 세계 지배의 요구(물론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이 아니라 옹호자들에 의해서만)에서부터 의전儀典에서의 단순한 우위에 이르기까지 우월한 측면을 강조했다. 이와 상응하게 '레그나' 편에서는 임페리움에 대항하여 다소 강한 유보 조건들을 제시했다. 통치권에 대한 요구들은 항상 거부당했지만, 통상적으로 황제에게 더 높은 위엄과 더 큰 특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임페리움은 국법상 황제에게 귀속되지 않는 영역에서는 결코 현실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16-7)


3. 근대 이전의 제국주의 개념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제국주의 개념이 확산된 것은 19세기의 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1834년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유럽문화 특유의 진보적 특성에서 유럽문화가 전 세계로 확산될 수 밖에 없음을 보증하는 ······ 세 가지 주된 작용이 생겨났다. 즉 1) 새로운 기계와 새로운 작업방식의 고안, 그리고 새로운 발견으로 인한 생필품 생산의 지속적인 증대, 2) 자본의 증대, 3) 인구의 지속적인 증가〉가 그것이다. 이로써 리스트는 세기말 이후 일반적으로 근대 개념인 '제국주의'라는 말이 의미하는 역사적 정황을 최초로 표현한 인물이 되었다. 여기에서 제국주의 개념은 민족국가 안에서 국가권력의 증대나 독립과 연결되었다." "또한 민족국가들의 경쟁과 이들의 경제적·문화적 확장을 위한 열망은 곧 절대적으로 긍정적이며 유익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대중과 대중의 영향은 (이데올로기적인 영향을 행사하려는) 모든 정부에 매우 중요해졌다."(30-1)


"'제국주의' 개념은 긍정적인 측면 또는 부정적인 측면을 막론하고, 유럽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현상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비평가들과 사회주의적 비평가들에게 와서야 비로소 그 개념은 역사적 분석을 위한 개념적인 도구로 발전하였다." "서구에서 '제국주의' 개념의 내용과 용법이 비판적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은 1870년대의 영국뿐 아니라 독일어권에도 해당된다. 영국에서는 긍정적인 내용이 '엠파이어empire' 개념과,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임페리움' 개념과도 연결되었으며, 독일어권에서는 긍정적인 내용이 힘의 균형을 노리는 개념인 '세계 정책'과 확고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는 그 개념을 호전적이고 군국주의적으로 발전해 가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첨예화하는 데 사용했으며, 레닌의 제국주의 분석은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공산주의의 분열과 시사적인 논쟁에 이르기까지 토대와 척도가 되었다."(35-7)


4. 민족적 제국주의들


"영국이 의식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에 노력을 경주하던 시기에 전통적인 개념으로서의 '제국주의' (동시에 '카이사르주의' 또는 '나폴레옹주의')는 퇴색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의 자리에 '엠파이어'와 '임페리움'이 등장했다." "(1872년 4월 3일과 6월 24일에 행한 두 연설에서) 디즈레일리는 개인적으로 해외 지역보다는 민족적 명예와 위대성에 중점을 두었다. 확실한 본능으로 그는 선행된 논의들에서 영국 연방에 소속된 개별 국가들이 독립하는 방향이 아니라 엠파이어가 더 강하게 결속하는 방향이 시대의 특징─그리고 그에게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요소는 유권자들의 여론이었다─이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에 맞서 통합을 공고히 하고 강화하는 것, 즉 〈제국의 관세, 제국의 신탁통치, 제국의 방어, 그리고 대의제적 토대에서의 공동제국 협의회 형식〉을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네 개의 〈본질적인 기둥〉이라고 못 박았다."(43-4)


"다른 한편 미국에서는 동일한 정치적 우월감에서 기인한 〈문명적 사명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미 1853년에 독일 출신의 이주자들은 〈새로운 로마 또는 세계의 미국〉이라는 강령적인 글에서 세계 공화국의 건설, 보통선거권, 국민 개병제의 도입 그리고 모든 형태의 전제정치에 맞서 싸우기 위해 미국이 유럽에 간섭해야 할 필요성 등을 선전했다. 비록 그러한 정치적 전제들이 실현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논거는 새로운 상황에서 관심 있게 다루어질 수 있었으며, 원래의 의도가 전도되어 필리핀 식민지화와 쿠바 점령에 이용되었다." "함장 앨프러드 머핸은 제국주의 정책의 범주에서 해군력을 높이 평가하고 그 위상을 정립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존 실리의 논거를 받아들여 역사적으로 위대한 모든 결정은 궁극적으로 해군력의 강·약에 좌우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경쟁이 점점 더 격화되는 가운데 전 세계에서 결속을 유지하고 통제하는 것이 제국주의 정책의 핵심이 되었다."(53-4)


"미국의 팽창보다 훨씬 더 강력했던 러시아의 팽창에서는 군사적 요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동요하고 있던 시베리아의 남쪽 국경을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다. 차르 제국은 지리적으로 해외 식민지 확장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세력 정치Machtpolitik 경쟁에서 범슬라브주의라는 독특한 형태의 민족주의에 호소했다. 범슬라브주의Panslawismus는 분명 제국주의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제국주의 유럽에 유럽의 세력 정책과 팽창 정책에 과잉 경향이 있음을 매우 첨예하게 드러내준 계기가 된 것은 바로 범슬라브주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역으로 유럽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를 단순히 확장하는 것만으로는 식민지의 지배권을 요구하는 데 대한 정당성을 끌어낼 수 없었기에, 자국민의 우월성을 점점 더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월한 민족이 다른 민족 위에 선다는) 예정설은 특히 종교적 토대에서 번성했으며 비합리적인 충동을 촉진시켰다."(54-5)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동화〉 정책에서 〈연합〉 정책으로 변화했다. 유럽에서 건너간 이주자들뿐만 아니라 본토박이들의 식민지에서 일으키는 소요는 〈동화〉 정책으로는 억제될 수 없다는 식민지의 자연스러운 특수성을 신속히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나폴레옹 3세 이후, 궁극적으로는 세기말 무렵 이후 프랑스 문명을 전파하겠다는 이념과 식민지를 통합하겠다는 이념은 점점 더 뒷전으로 밀려났다. 비록 철저한 식민지 정책을 운용했고, 중앙 집중식 행정을 발전시켰으며, 식민지를 위해 상당한 자금을 퍼부었을지라도, 프랑스는 영국에 비견될 만한 제국주의적 성과나 그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계급투쟁을 최초로 천명한 1848년 6월 봉기와) 1871년의 패배 그리고 파리코뮌 이후 정치적 에너지는 주로 민족 자체의 분열과 모순에 얽매여 있었다." "퇴적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외교적으로 분명한 적성국을 접하면서 비로소 분출되었다."(55-6)


5. 독일의 '제국주의'


"피히테의 강연 〈독일 국민에게 고함〉은 민족국가 형성을 위한 최초의 정점이었다. 강연의 직접적인 정치적 의도가 독일 민족국가를 겨냥한 것이었지만, 그 논거는 본래의 의도를 넘어섰으며, 독일 민족은 〈악의 심연에서 인류 전체를 구원해줄 희망〉으로 간주되었다. 식민지 문제에서는 영국식의 고전적인 정당화 도식이 다시 등장했다. 문명은 제국주의적 확장 근거를 스스로 제공하고 있다. 〈민족 경제〉가 문화에 종속됨으로써 경제와 정치의 연관성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비스마르크가 해임되면서 독일 민족주의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이라는 강박관념에 빠져들게 되었다." "국가의 위대함은 더 이상 프로이센-독일에 국한된 힘이나 황제권의 방어적 규정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동맹체제 등과 상응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독일 민족주의는 젊고 저돌적인 독일 제국주의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독일 제국주의는 〈세계 정책〉이라고 지칭되었다."(61-2)


"'세계 정책'은 경제적·정치적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특히 확고한 지위를 가진 '영국 연방'의 요구에 반대하는 신생 독일 제국주의의 투쟁 개념이 되었다. 그 때문에 동시대의 논쟁은 독일의 요구 또는 〈사명〉이 유럽의 균형체제를 세계 전체로 전이하는 데 있는지 아니면 인기를 끈 가이벨의 말처럼 〈독일적 본질로 세계를 치유하는〉 데 있는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1914년에 가까워질수록 논쟁은 대상을 상실했고, 두 개의 관점은 유사한 정치적 실천으로 귀결되었다."(66) "'세계 정책'의 정당성이 천박해지는 만큼, 세뇌와 세뇌에 따르는 사회심리적 메커니즘이 강화되었다. 이에 대한 사례로서, 한편으로는 민족적 충성심을 부인하고 국가 권위를 공격한 자로 평가된 사회민주주의적 희생양과 반유대주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 정책적인 적성국 이미지(시기심 많은 영국,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는 프랑스, 세련되지 못한 러시아)를 들 수 있다."(63)


"한편으로 독일 제국주의로 인해 생겨난 대량 징집과 다른 한편으로 현상 유지를 하려는 태도의 이율배반은 장기간에 걸쳐 파시즘이 등장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1890년 이후 급속도로 번진 전前파시즘적 태도와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전개에 대한 초기의 징표들이다. 제국주의 정책은 점점 더 국민들의 태도에 좌우되었고, 파당들의 영향력과 중요성이 고조되었다. 물론 전반적으로 책임감 없는 의회는 통합 기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프로이센-독일은 곧장 지속적인 민주화와 의회 제도화의 길로 간 것이 아니었다. 1903년과 1912년의 선거 충격이 있은 후 억압이 커졌고, 제국주의적 조치가 실행되면서 계급 간의 대립도 격화되었다. 그러자 계급 대립의 배후에서 이를 무마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대중 교화 조치가 취해졌다. 궁극적으로 '세계 정책'의 지배적인 역할은 국내정치적 위기 상황의 결과였으며, 그에 따라 독일 제국주의 특유의 민족적 색채가 두드러졌다."(85)


6. 제국주의의 정치경제학


"하인리히 쿠노는 1900년 5월 말 제국주의의 정복 성향의 원인이 〈화폐자본의 이용 욕망과 팽창 욕망〉에 있다고 보았다. 식민지 정복의 초기 단계에는 판매 시장이 핵심이었다면, 이제 영국의 지위는 식민지 영토의 크기가 아니라 반대로 식민지와 연관된 〈세계 무역 독점과 산업 독점〉으로 설명된다. 식민지와의 상품 교환에는 시장 법칙이 유효한 반면에, 〈이익을 낳는 투자처를 찾아다니면서 실제로 제국주의적 팽창 열망의 현실적인 추동력으로 작용하는 화폐자본은〉 성격이 다르다. 〈솟아 넘치는 활동 욕구로 국내 투자보다 해외의 사업에서 더 높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에게 어떤 지역이 누구에게 속하는지는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럴 것이 정치적 지배력은 투자의 가능성과 안전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식민지는 대규모 산업의 판매 시장 역할을 하다가 부를 축적한 산업국가들의 잉여자본 투자 시장으로 발전했다.〉"(103)


"스페인-미국 전쟁, 의화단의 난Boxeraufstand 그리고 무엇보다 보어 전쟁 등으로 촉발된 해외 정책에 관해 커다란 논쟁들이 벌어지자 비로소 포괄적으로 이해된 제국주의적 발전에 대해 이론적인 비판이 다듬어져 표현되기 시작했다." "1902년 《제국주의》를 저술한 홉슨은 주요 유럽 열강들의 무역과 팽창에 관해 연구했고, 제국주의적 확장은 경제 전반과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한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가 팽창하는 이유를 〈국가 전체의 상업적 이해관계는 국가 자원의 통제권을 빼앗아, 그것을 사적으로 점유하는 특정한 국지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있다. ······ 새로운 제국주의는 ······ 그 나라의 특정 계급과 특정한 무역을 위해 번창해왔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차관, 교통수단 등의 형태로 투자가 증가한 점에 근거하여 입증했다. 제국주의는 납세자에게 많은 세금을 요구하는 한편, 투자자와 투기꾼들이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원천이었다."(104-6)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적 붕괴를 다룬) 마르크스의 숙고를 그 성향과 이론적 최종 성과에 관련해서만 수용했다. 사실 그녀도 모든 국가와 생산의 모든 부문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독점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오직 이론적인 구성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이론적인 가설을 제국주의적 발전의 근저에 놓인 실제적 모순이라고 가정했다. 〈마르크스의 확장된 재생산 도식이 현실과 상응하는 순간, 그것은 결말, 즉 축적운동의 역사적 한계를 예고하며, 나아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종말도 예상케 한다. 축적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며, 또한 자본주의의 몰락이 객관적·역사적으로 필연적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부터 자본의 역사적 진행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서 제국주의라는 최후 단계의, 모순에 가득 찬 운동이 생겨난다.〉"(112-3)


7. 전망


"레닌이 내린 '제국주의'의 가장 간략한 정의─기존 자료들을 정치적-실용적 의도에서 조합하여 하나의 추상적인 이상형으로 재가공한─는 〈자본주의의 독점 단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 자신도 그러한 정의를 불충분하다고 여겼다. 산업의 독점화와 경쟁에 기반을 두는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주의〉로 변화하는 것을 간략하게 공식화하려는 레닌의 노력은, 물론 종종 경제와 사회 현상들이 국가나 지역에 따라 차별화된 형태로 드러나는 특수성을 경시하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경험적으로 확실히 뒷받침된 이론보다는 제국주의를 〈지배 관계〉로서 해독解讀하는 일과 〈역사 속에서 제국주의의 자리〉를 찾기 위한 역사철학적인 방향성을 띤 탐구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국주의는 레닌이 보기에 〈금융 자본과 독점의 시대〉 또는 〈붕괴에 직면한, 사회주의에 자리를 내어 줄 정도로 무르익거나 너무 무르익은 자본주의〉의 시대였다."(119)


"니콜라이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 경제〉에 대한 연구는 거의 같은 시기에 레닌의 이론보다 더욱 경험에 강한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무역 및 생산 통계들을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이 경제학자는 1914년 이전 세계 경제 체제의 구조적 연관성을 해명하려고 했다. 여기서 그는 〈경제 활동의 국제화 과정〉, 즉 전 세계적으로 생산과 상품 교역이 서로 얽혀 있는 것과 상호 대립적인 경향들, 즉 민족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이해관계들〉을 구분했다. 부하린은 그러한 이해관계들을 적대적이고, 원칙적으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부하린의 구상에 따르면 국제화와 〈민족주의화〉의 대립적인 과정 속에서 제국주의에게 주도적인 기능이 넘어간다. 그는 제국주의 개념을 힐퍼딩의 논지에 따라 (독점 세력과 금융자본 그리고 국가권력의 새로운 형태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나타나는) 〈금융자본주의의 정책〉이라고 정의했다."(122)


"마오쩌둥의 이론은 (1930년대 중국의 고유한 경제적·정치적 정황들에 대한 상황 분석에 기반하여) 〈중국의 특수성과는 동떨어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잡담들은 단지 추상적이고 공허한 마르크스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명제에서 시작된다. 마오쩌둥에게 그러한 정황들의 결정 요소들은 외부적으로는 〈일본의 침략〉이었으며 내부적으로는 〈봉건체제〉였는데, 그로부터 마오쩌둥은 아주 일반적으로 자기 나라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낙후성을 이해했다. 이러한 상황 서술로부터 마오쩌둥은 중국의 독립은 오로지 인민해방 전쟁을 위한 인민의 동원을 통해 다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제국주의의 경제적·사회적 전제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보다는 군사적인 투쟁 조건들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마오쩌둥의 언어에서 '제국주의'는 '침략자', 다시 말하면 군사적으로 굴복시켜야 할 '적'과 동의어가 된다."(123-4)


"1920년대에 벌써 마르크스-레닌주의 정통 이론의 방법과 태도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나타났다. 논란의 여지없이 인플레이션에 이어 자본주의 경제가 일시적으로 안정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자본주의가 기생적이고 부패하며 몰락해간다는 진단에는 들어맞지 않는 현상이었다." "제국주의 이론은 완전히 경직되었고, 제국주의 개념은 정치 투쟁을 위한 저속한 표어가 되었다." "제국주의 개념이 거의 완전히 내용이 없어지고 역사적 성격을 잃어버림으로써, 그것은 수많은 사회적 현상과 사건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그 때문에 제국주의 개념은 아마도─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가끔 정치적인 선전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제국주의는 〈진보와 평화의 가장 가증스러운 적〉이고, 제국주의의 신봉자는 〈국가를 빼앗는 강도이며 식민지 정복자이고 전쟁광〉이다."(125-7)


"(정치 어휘를 '공간화'한 카를 슈미트의 '광역권(실행공간)' 개념으로 대표되는) 독일 민족 우파와 국가사회주의자들의 공간 이데올로기는 종국에는 극단적 팽창주의에 대한 암호가 된다. 그들은 그러한 팽창주의에 제국주의 개념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 이론가들에게 이 개념은 이중으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 개념을 자신들의 이론과 특히 정치 일상에서 표어로 사용했다. 더욱이 독일 우파들에게 서구 열강의 정책은 대개 〈제국주의〉로 여겨졌다. 공간 이데올로기는 그들에게서 두 가지 기능을 충족시켰다. 먼저 그것의 불명료성이나 불확실성은 팽창의 실제적인 목표들에 대한 구체적인 결론을 보여주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특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식민지 열광자들의 변변치 못한 선전을 상기하지 않게 해주었다. 정치 분야에서 그러한 언어 조작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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