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동아시아질서 개념의 역사적 변환 : 천하에서 복합까지
제2장 '사대'의 개념사적 연구
# 페어뱅크의 전통적 중화질서론
동아시아 정치단위들은 주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조공, 책봉, 일종의 집단안보 등 정치·경제·군사적 체제를 기반으로 정교하게 상호관계를 정비해왔으며, 이 과정에서 중원왕조는 경제적 이득을 얻기보다는 주변 국가들에 물질적 이익을 나누어주고, 문화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주변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 신청사론(新淸史論)의 비판
중원왕조는 조공, 의식, 이데올로기, 문화 등을 앞세워 주변 왕조에 대한 강력한 지배를 추구했지만, 사실상 그 과정은 무역과 외교, 실용주의와 실천이성 간의 상호 긴장관계가 작동하는 매우 실질적이고 정치적인 관계였다.
# 이용희의 동아시아 지역질서론
'명분으로서의 사대'는 유교적 관념의 토대 위에서 동아시아 질서를 관할하는 제도·규범·국제법의 역할을 했으며, '힘의 관계로서의 사대'는 주로 중원의 힘이 약해지고 이민족 왕조가 들어선 시기에 적용된 실력 중심의 사대관계였다.
제3장 한국의 근대국가 개념 형성사 연구 : 개화기를 중심으로
"서양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로 전파된 근대국가의 핵심적 속성으로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영토, 주권, 국민이라는 세가지 요소이다. 이 중에서 영토성은 비록 서양에서는 중세국가와 비교할 때 근대국가의 차별적 특징이기는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그다지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나라를 의미하는 한자어 '국(國)' 자체가 나라의 사방 경계를 뜻하는 '구'와 창을 들고 나라의 경계를 지키는 것을 표현하는 '역'이 합쳐 뜻을 이룬 것이다. 중국과 주변의 번국들은 비록 책봉·조공 관계에 있었지만 유럽의 봉건질서와는 전혀 다르게 영토적 통일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반면, 주권사상과 국민관념은 천하질서하에서 전통적 왕조국가를 이루고 있던 동아시아 국가들에 있어 대단히 생소한 개념이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근대국가 개념의 형성과정은 다름 아닌 서양의 주권사상과 국민국가 개념을 수용하여 전통적 국가개념과 접목하는 과정이었다."(93)
"한국의 국가개념은 1870년대까지만 해도 전통과 근대 사이의 지점에 머물러 있었으나 1880년대 들어 개화당(문명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돌연 근대국가 개념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문명개화파는 반드시 주권사상과 국민관념을 토대로 근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국공법』에서 제시하는 주권의 권리에 대해서는 비단 개화당뿐만 아니라 당시 조정의 많은 인사들이 인지하고 있었으나 청으로부터 '독립'해야 진정한 주권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개화당 고유의 주장이었다." "문명개화파의 국가개념이 근대국가 개념에 도달해 있다고 할 수 잇는 것은 주권국가를 지향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관념을 도입하여 국민국가를 건설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일본 망명시절에 작성한 「지운영규탄상소문」(1886)에서 〈문벌을 폐지하고 인재를 선발하여 중앙집권의 기초를 확립하며 인민의 신용을 얻고 널리 학교를 세워 인재를 개발〉할 것을 주장했다."(100-2)
"문명개화파는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자면 독립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유길준도 주권과 독립을 불가분의 관계로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청과의 조공관계를 일거에 청산하기 어려운 현실도 인정했다. 그는 이러한 딜레마를 속국(屬國)과 증공국(贈貢國)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속국은 주권과 독립권이 없지만 증공국은 주권과 독립권을 침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논리를 양절체제(兩截體制)였다. 유길준은 근대국가의 주권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이 처한 국제정세를 고려하여 속국과 증공국을 구분해 중국과의 조공관계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주권국가임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고자 했다. 한편 그는 근대국가는 국민국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국가가 정부를 설립하는 본의는 인민을 위한 것이고 군주가 정부를 명령하는 취지도 인민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유길준이 말하는 인민이란 국민에 다름 아니다."(108-9)
제4장 지역공간의 개념사 : 한국의 '동북아시아'
"구미의 쇄도에 맞서 동양삼국이 연대/합방해야 한다는 일본의 인종연대론은 황인종 내부의 서열화와 일본의 맹주적 지위가 전제되어 있다." "일본은 인종주의로서 동양연대론을 활용하여 청일전쟁 이후 발생한 동아시아 내부의 균열과 상처를 봉합하고자 하는 한편, 러시아와의 전쟁을 합리화하였다. 이 논리는 조선의 개화파나 위정척사파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독립신문』은 동양삼국이 아시아라는 같은 지역에 속해 있을뿐만 아니라 인종이 같고 문자가 상통하며 풍속도 유사하기 때문에 유럽의 침범을 '동심(同心)'으로 막아야 유럽에 의한 속국화를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의 침략성에 강하게 저항해왔던 위정척사론자들도 문명개화론자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동양삼국의 인종적 연대를 주장하였다. 최익현은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가 일본에 복수하기 위해 동양에 재진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동양삼국이 '정립(鼎立)'하여 전력을 다해 이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다."(123-4)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한국인들은 이 전쟁의 승패에 황색인종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파악하고 황색인종인 동양삼국이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성신문』은 러일전쟁이 러시아로부터 '동양평화와 안전'을 지키려는 노력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여, 러시아를 동양삼국 공동의 적국으로 간주하였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이러한 시대적 추세를 담은 구상이었다. 안중근의 구상이 처참하게 실패한 후 한국에서는 동양연대론의 허구를 비판하는 민족론이 등장하는 한편, 연대적 가치와 자주독립의 가치, 즉 외부(서양)으로부터 균형을 성취하려는 의도와 내부(동양)에서의 균형, 즉 한중일 삼국의 자주독립과 균형을 성취하려는 의도가 결합된 정립(鼎立)론 혹은 정족(鼎足)론이 등장하게 된다.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해 삼국의 연대를 주창하면서도 이를 실천할 내부의 존재방식으로서의 독립과 균형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러한 국제정치적 발상은 3·1독립선언서로 연결된다."(124-5)
"한편, 중국의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일-만-화(중) 삼국 간의 동아신질서/동아협동체 구상을 넘어 남진(南進)을 추진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교착상태에 빠진 중일전쟁의 해결방안으로 동남아시아로 전선을 확대한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대동아공영권 구상이었다. 이 공간은 '대동아'라 불리는 훗카이도, 일본, 만주, 중국, 인도차이나반도, 남양제도라는 광대한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에자와 등 당시 일본의 지정학자들은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대동아가 갖는 생활공간, 혹은 대동아라는 공간이 결합되는 유대는 태평양을 끼고 있는 지형의 유사성, 기후의 통일성, 미작(米作), 공생관계 등과 같은 공통의 특질이라고 주장했다. 지형과 기후로부터 나오는 공통의 특질에 의해서 공통의 민족감정, 공통 유형의 문화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 지역의 민족들이 대동아라는 생활공간을 공유하는 것은 필연적 운명이라는 요지였다."(126-7)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반격을 가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세력이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동남아시아'라는 지리적 공간이 획정되었고, 이와 짝을 맞추어 '동북아시아'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이 언어 역시 서양세력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 동북아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은 대동아공영권의 붕괴와 관련하여 동남아와는 다른 새로운 지리적 영역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 중국이 일본제국을 압박하면서 서로 만나게 되는 전략적 영역이 그것이다. 미국은 특히 소련의 동/남진에 의해 형성되는 최전선, 즉 중국과 일본,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리적 경역을 동북아로 불렀다." "1931년에 이미 소련-중국-일본의 지정학적 관계에 주목한 커너 교수의 문제의식은 일본의 진주만 침공, 전쟁 말기 소련의 개입으로 확인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미국 국무성 편제에서 중국과(科), 일본과와는 별도로 동북아과(Office of Northern Asian Affairs)가 설치되는 것으로 이어졌다."(128-30)
제5장 19세기 조선의 외교개념
"'외교'라는 용어는 『예기(禮記)』 교특성(郊特性) 편의 〈위인신자무외교 부감이군야(爲人臣者無外交 不敢貳君也)〉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외교는 '신하가 군주 몰래 남의 나라와 통한다'는 식의 나쁜 의미를 가진다. 이와 같이 전통 국제질서하에서 외교라는 용어는 유력한 신하가 자국의 군주에 대하여 반의를 가지고 외국의 제후와 몰래 통교하는 사도(邪道)나 권도(權道)의 색채를 띤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한비자』에서는 신하가 외부의 권위와 통하는 것을 사통(私通)으로 규정하고, 신하에 대한 군주의 권력 저하를 가져와 일국의 통치를 혼란스럽게 할 우려가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안으로는 신하에 대한 군주의 지배력이 확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복수의 군주가 패권을 경합하여 허점을 엿볼 수 있는 상황에서, 외교는 일국의 통치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위험한 행위로 인식되었다." "청대에 오면 '人臣無外交'는 인적 왕래와 문화적 교류를 억제하는 현실적 규제로 작동하게 되었다."(150)
# 조선 역시 '人臣無外交' 원칙을 내세워 서양의 통상 요구를 거부
"인신무외교의 개념에서 보이듯이 조공질서에서의 사절은 교섭의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를 행하고 문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사신의 역할은 근대적인 교섭과정을 이해하는 데 갈등요인으로 작용한다. 전통적 사신의 역할과 근대적 사신의 역할 사이에 갈등을 불러온 것이 전권(全權) 제도이다. 전권 제도는 일국을 대표하는 권리를 위임받아 외국과 교섭하는 근대적 외교 관행을 가리킨다. 1876년 일본이 근대적인 외교제도에 입각하여 조약 체결을 요구하면서 전권문제가 처음으로 대두된다." "전권문제는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일본과 사실상 근대적인 관계가 수립되면서 각종 사안을 교섭하는 과정에서 현실문제로 대두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세칙협상에서 문제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조선이 전권개념에 무지하다는 점을 악용하여 세칙협상을 회피하는 명분으로 전권제도를 활용하였다."(157-8)
제6장 근대한국의 '자주'와 '독립' 개념의 전개 : '속방자주'에서 '자주독립'으로
"조선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하에서 '사대자소(事大字小)'의 예라는 명분하에 종주국인 중국에 대하여 조공국의 의례적인 절차로서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쳤지만, 간섭은 받지 않았으며 외교와 내정에서 자주성을 유지해왔다. 이러한 시각에서 '자주(自主, autonomy)'는 사대질서 하에서 사용되는 용어이고 '독립(獨立, independence)'은 근대 국제법(만국공법) 질서 하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개화기에는 이 두 용어가 분리되지 않고 혼재되어 사용되었다." "19세기 후반 전통적 사대질서가 무너지면서 조선과 청의 관계에서는, 기존의 조공책봉체제로부터, 더 나아가 1880년대 임오군란 이후 청군 주둔 시 청의 종주권을 강화하고 조선을 속국화하려 했던 청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의 내정과 각국 교제에서의 '자주'를 확보하는 것이 과제였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 및 서구국가와의 관계에서는 주권국가로서의 '독립'을 확보하는 것이 과제였다."(173-4)
"근대한국에서 '자주'라는 용어가 해석상 논란의 대상이 된 첫번째 경우로, 조일수호조규 체결 시 조선의 지위에 대한 인식으로서 '자주(自主)의 방(邦)'이라는 표현을 들 수 있다. 1876년 2월 27일 체결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의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지방(自主之邦)으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는 조항이 명기되었다. 이 조항에 대한 해석에서 사대질서의 개념인 '자주'와 서양공법질서의 개념인 '독립'이라는 두 개념이 충돌하였다. 조선은 외번의 정교와 금령은 자주에 임한다는 사대질서 안에서의 의미로 인식했고, 일본은 자주가 곧 독립을 의미하므로 조선이 서양 국제법상 하나의 주권국가라고 해석하였다. 즉 일본 측은 조선이 과거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청의 번방(藩邦, 또는 속방)으로 있었던 것에서 벗어나 하나의 독립국가로서 국가 간 조약에 정식으로 명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176-7)
"'속방'이라는 표현이 조선의 의도 내지 해석과는 반대로 실질적 간섭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은 임오군란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규정부터였다. 임오군란 당시 청은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대내외적으로 공포함으로써, 청의 간섭을 기정사실화하였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청이 조선을 하나의 속방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다는 이유를 일본 등에 통지하였으며, 조선 인민들에게 기존의 군신관계를 확인시키는 통지문을 거리에 게재하였다. 청의 이러한 의도는 1882년 10월 17일 체결된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반영된다. 그 전문에서 조선을 청의 번 내지 속방으로 간주하고 통상분야에서 청의 배타적인 이득을 보장하며, 제8조에서 조선 국왕의 위상을 북양대신(北洋大臣)과 동격으로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청은 사실상 조선정부로 하여금 청의 속국임을 인정하는 내용을 공식협정에 명문화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179-80)
"조선의 자주독립 선언은 1894년 12월 12일 종묘에서 고종이 직접 공포한 홍범(洪範) 14개조에 잘 나타나 있다. 홍범 14개조 첫번째 조항은 〈청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의 터전의 기초를 굳건히 한다〉는 점을 공포하였다. 이로써 조선정부는 조청 간의 기존 조공관계의 종식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자주독립 선언 이후 조선정부는 그 취지와 자주외교의 필요성을 국내적으로 설명하고 홍보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더불어 조선정부는 그간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장소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병자호란 당시 청국의 전공을 기록한 비문인 삼전도비(三田渡碑)를 허물어뜨림으로써, 그동안 청에 대하여 수치스러웠던 상징물들을 제거하였다. 또한 조선정부는 조선국왕의 칭호를 '주상전하(主上殿下)'에서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시켜, 이후 조선의 군주가 외국과 대등한 독립국가 군주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음을 과시하였다."(189-90)
제7장 근현대 한국에서 국제정치영역의 자유개념
"서구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자유(自由)는 서양 근대 국제질서가 동아시아에 유입되면서 필요해진 independence의 번역어 자리를 두고 독립(獨立), 자주(自主) 등과 경쟁하였다. 자유라는 한자어의 의미가 independence와 유사하다는 한자문화권의 공통된 배경에 더하여 명/청과의 국제관계에서 자유개념을 써온 긴 역사가 있었다는 특수한 배경이 존재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자유와 independence는 다른 한자문화권의 국가에서보다 더 자연스럽게 결합되었던 듯하다. 예를 들어 윤치호는 1884년의 일기에서 미국, 영국 등이 각국이 조선과 자유로이 조약과 세칙 등을 정한 것을 예로 들어 〈우리나라의 자유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윤치호의 이러한 자유개념은 근대서양 국제정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independence와 자유에 대한 정합적 이해의 전형적인 예였다."(208)
"량치차오는 대한제국의 자유 담론─liberty/freedom의 번역어로 자리잡은─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 개념에 대한 그의 이해에는 나카무라 마사나오의 『자유론』 번역본이 큰 영향을 주었다. 나카무라의 번역에 보이는 자유개념 이해에는 큰 특징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西洋事情)』 이래 일본어의 자유개념에 강하게 남아 있던 independence의 의미를 없애고 자유의 주체를 기본적으로 개인으로 설정하여 자유의 영역을 국내로 단일화하였다. 둘째, 밀의 텍스트를 오역함으로써 자유를 둘러싼 개인과 사회/국가 사이의 관계설정을 변화시켰다. 밀은 '다수의 전제'를 논하면서 국가의 전제가 없어도 벌어질 수 있는 사회 내 다수의 전제에 대항하여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원리를 『자유론』의 중요한 목표로 설정했다. 그런데 나카무라가 society를 '동료집단 즉 정부'로 번역한 결과, 사회와 국가가 동일한 것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211-2)
"민족/국가가 가지는 국제정치영역의 자유를 설정하고 이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1902~03년 이후 량치차오 자유론의 가장 전형적인 표현이었다. 신채호는 애국계몽기에 량치차오의 자유개념을 받아들여 당시의 대한제국의 상황에 맞추어 이 개념을 소화한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1908년 「대아와 소아」라는 글에서 신채호는 즉자(卽自)적인 개인을 가리키는 소아에 대하여 수많은 소아의 집합체로서의 대자(對自)적인 대아의 존재가 가지는 본질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대아의 무한한 자유로움을 강조하면서 자유를 논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약체화와 함께 대한제국의 집권세력이 주창하던 왕권 중심의 정치에 대한 이해가 붕괴되고 공화적인 정치체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대두되는 과정에서, 개인을 그 구성원으로 하면서도 단순한 개인의 집합을 초월하는 민족/국가가 가져야 할 핵심적인 가치로서 무한한 자유자재(自由自在)가 제시되었던 것이다."(213)
"1920년대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국제정치영역의 자유 개념이 침체한 것은 성격을 달리하는 세 가지 맥락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운동의 분기과정에서 민족주의 우파의 일부는 식민지 상황을 인정한 자치(自治)의 주장으로 전향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 우파의 자치론 전개는 국제정치영역 자유의 포기를 전제한다." "둘째, 3·1운동 이후의 분기과정에서 민족주의 우파 이외의 세력 사이에 사회주의가 지속적으로 침투함에 따라 국제정치적 자유개념을 포함한 정치적 자유개념 전반에 주변화가 일어났다." "사회주의 세력은 정치적 자유 개념을 부르주아 계급에 봉사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로 폄하하였고, 그 결과 민족/국가가 가지는 국제정치영역의 자율성도 자유가 아닌 다른 개념─예를 들어 해방─으로 표현되어 자유개념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셋째, 일본을 통하여 비정치적인 자유개념이 유입되어 세력을 획득해나가는 현상이 더해졌다."(222-4)
"자유개념은 1945년 이후 한국정치에서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확고한 위치를 획득한다. 첫째, 해방과 함께 국제정치영역의 자유개념이 부활하였다." "해외독립운동 세력들이 담론의 장에 복귀해 독립을 회복하고 건국을 시행하게 되는 상황 변화의 결과, 1920년 이후 침체를 겪었던 국제정치영역의 자유개념은 해방, 자주, 독립과 함께 국제정치영역의 목표를 나타내는 중심 개념으로 부활하였다. 둘째, 미군정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국내정치영역의 자유가 중심 개념으로 주어졌고 또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냉전의 국제관계가 국가 간의 경쟁이라는 차원에 더하여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진영 간의 경쟁으로 구성되었고 두 진영 중 하나가 자유세계를 자칭했다는 외부적 상황으로 인해, 근대한국의 고유한 자유개념에 냉전과 함께 도래한 자유진영의 자유개념이 결합하여 냉전시기 국제정치영역의 자유개념을 구성하기에 이른다."(234-5)
"자유는 국제관계의 개념으로서, 두 개로 나뉜 세계에서 우리 측 집단이 공유하는 특징을 드러내어 공통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개념이 되었다. 동시에 이 자유진영의 자유개념은 진영 간의 국제정치적 대립이라는 정치적 맥락과 연결되어, 대립하는 세력을 전체주의=공산주의로 규정하여 타자화하는 상징정치의 핵심적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국제정치의 자유개념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냉전자유주의의 국제정치적 부분으로서 세계적 차원에서 재등장하였는데, 해방 후 3년간 냉전의 국제정치적 전개가 국내정치적 분열을 고착시키는 과정을 겪는 가운데 이 자유개념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50년의 『동아일보』를 보면, 제국과 식민지의 역사를 가진 일본도 자유진영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나타난다. 이처럼 1950년이 되면 새로운 국제정치분야의 자유개념, 즉 자유진영의 자유개념이 36년간의 일본 제국주의의 경험도 상대화시킬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36-7)
"1960년 이후 자유개념은 국내/국제정치의 현실 변화와 밀접한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변화해나갔다." "4·19혁명의 주도세력은 민주주의와 함께 민주주의의 근저에 있는 자유의 문제를 더불어 제기했다. 그들은 정권에 의해 상실된 자유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에 자신들의 전쟁을 자유의 전쟁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4·19혁명은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변혁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선언문을 보면 민주주의보다도 자유가 보다 중심적인 과제였던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다. 이와 같이 4·19혁명의 과정에서 국내 정치분야의 자유개념이 중차대한 가치를 가진 정치적 모토로 급속히 대두된 것은, 자유(liberty/freedom) 개념이 19세기 말부터 외부로부터 수용되었지만 망국과 식민지를 거치는 과정에서 한국의 정치적 삶에 체화되지 못했던 한계를 넘어서 드디어 한국정치의 맥락 속에서 자생적인 전개를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42-3)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세력이 지배한 제3공화국도 자유주의 진영에 속해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게도 자유를 둘러싼 개념적 모순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공을 실현하기 위해 단순하고 통일성이 있으며 서로 협동하는 상하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공동체를 열망했던 박정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과정에서 자유개념의 잠재적 갈등을 처리하는 나름의 논리를 제시하기에 이른다. 『우리민족이 나아갈 길』에서 박정희는 〈참된 자유에 대한 가장 무서운 적은 제멋대로 한다는 생각과 방종인 것이다〉라고 썼다. 방종은 거짓된 자유─실질적인 의미는 권력자인 그가 정한 틀을 넘어서는 자유─에 대한 비판의 원리로 제시되었다." "이것이 후쿠자와가 liberty/freedom에 대한 오해를 우려하며 제시했던 제멋대로·방탕(放蕩)과 명확한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일제시기에 제국일본에 의한 교육을 받은 박정희의 지적 배경과 연결지어 생각하면 우연이 아닐 것이다."(246)
"1970년대 미국 외교에서는 데탕트를 배경으로 냉전적 대결만이 아닌 다른 사안에 대한 관심의 증가가 하나의 특징이었는데 그중에서 카터 행정부는 인권외교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한국의 자유 개념사의 입장에서 보면 이 변화는 이전에 주로 국제정치영역의 반공과 동일한 개념으로 존재하던 자유진영의 자유개념이 자유진영의 성원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즉 국내정치영역의 특성을 중시하는 개념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국제정치적 자유개념과 방종개념을 결합시켜 국내정치영역의 자유를 억압하던 박정희식의 자유/방종담론에 대한 반론이 독재에 대항하여 정치적 자유를 옹호하던 세력을 중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장준하는 근대 이후로부터 계승한 국제정치영역의 자유에의 갈망이라는 과제를 민족주의로 승화시키면서, 이 민족적 과제가 새롭게 받아들인 고귀한 가치인 국내정치영역의 자유와 대립되지 않게 구성하고자 했다."(250-2)
"미국의 압력과 저항세력의 운동으로 인해 자유진영의 자유개념에서 국내정치영역이 가지는 중요성이 점증하는 가운데, 박정희는 반공과 근대 이후 국제정치적 자유의 내용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국내정치영역 자유의 억압을 떠올리게 하는 자유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게 된 듯하다. 그 결과 국내정치적 자유를 포함하지 않고 국제정치영역에서의 자율성만을 나타낼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자유의 대체 개념으로 가장 유력했던 것이 자주(自主)였다. 자주는 19세기 후반에 independence의 번역어를 둘러싸고 독립, 자유와 경쟁했고 이 경쟁에서 패한 이후에 주로 독립보다 더 불명확하면서도 보다 넓은 의미의 주체성과 자립성을 나타냈던 개념이었는데 이 시기의 새로운 맥락에서 다시 대두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국제정치영역 자유 개념은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저항자들의 민족주의, 그중에서도 반미민족주의와 결과적으로는 부분적이나마 공통점을 띠게 되었다."(256-7)
"1980년대 저항운동이 진행되면서 자유주의나 자유민주주의의 자유개념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며 자유의 중요성을 무시, 심지어 자유를 적대시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에는 두 갈래가 있었다. 첫번째는 민중민주주의론의 입장에서 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종속적인 이데올로기로 보고 자본주의의 극복을 지향하는 움직임이었다. 이 정치적·경제적·사상적 운동은 1980년대를 거치며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으며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두번째는 민족해방론이 대두되면서 국제정치분야의 자유개념의 전개에서 나타난 새로운 움직임이다." "민족해방론은 민족/국가의 실질적인 자율성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가치로 삼는 관점에서 미국에 대한 한국의 종속적인 상황에 주목하여 이러한 현실의 극복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표상하는 국제정치영역의 개념으로는 주로 '자주'가 사용되었다."(259-60)
제8장 민권과 제국 : 국권상실기 민권개념의 용법과 변화, 1896~1910
"독립협회는 창립 초기의 한 논설에서 인민의 권리를 '법률에 정해진 것'으로 정의하면서, 이 법률을 제정하는 정부의 관인을 선출할 '권리'를 백성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민권'이라는 용어는 『독립신문』에서 선거제를 도입한 외국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사용되었고, 특히 미국의 정당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다." "민권은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나라들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권이나 천부인권의 의미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인민주권 혹은 인민의 정치참여권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인식되었다. 인민의 정치참여권을 강조하는 민권개념은 독립협회 후반부로 갈수록 강화된다. 예를 들어 초기 『독립신문』이 인민을 〈시켜〉 좋은 관리를 천거하고 벌주는 제도로 설명한 선거는 1898년 2월의 한 논설에 이르러 〈임금과 같이 높은 권리〉를 행사하는 대통령의 자리를 인민에게 줄 수 있는 〈성스러운〉 제도로 찬양되었다."(274-6)
"『독립신문』은 「민권론」이라는 논설에서 민권 확장이 국가 부강의 근본이라는 논리를 제시한다. 동양에서는 백성이 권리가 없으므로 나라의 흥망을 정부에만 미루고 수수방관한다. 즉 동양의 왕조 교체에서는 종묘사직과 임금을 바꿀 뿐 정부와 백성은 그대로 두는 고로, 정부가 새 나라에 다시 벼슬하고 백성도 그 새 나라에 다시 세를 납부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상관치 않았다." "그러나 이 민권론에 의하면 나라는 임금이 천명을 받아 세우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임금 혼자의 것도 아니다. 나라는 '임금, 정부, 백성'이 동심(同心)하여 세운 것이고 특히 생산과 재정을 담당하는 〈백성의 권리〉로 나라가 생성되는 것이다. 이 논설의 어조는 조심스러우며 〈백성의 권리〉를 지금 모두 주장할 수는 없음을 인지하나 강한 참정권의 지향을 드러낸다. 논설의 주장 중 민권이 보장되어야 백성이 나라의 위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나라의 부강이 도모된다는 주장은 광범한 파급력을 가졌다."(280)
"『황성신문』은 민권과 관권은 서로 분리되는 영역이 있고 서로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 결국 국권의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절충논리로 독립협회를 거들었지만 독립협회 해산 후 침묵했고, 유교적 논리에 입각한 정부와 민의 신뢰 구축과 군주제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한편 통감부 정치기 현상타파세력 중 급진적인 그룹이었던 일진회는 인민의 대표를 자임하며 민의 직접적 지방행정 개입과 세율 조정 및 감세, 국가 소유 토지에서 소작권의 재분배 등 다른 엘리트 개혁세력이 제시하지 않은 포퓰리스트적 의제들을 제기하며 대중동원 정치를 벌였으나 통감부에 의해 수용되지 않았다. 말기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민권이 확보된다면 조선왕조를 역사적 기반으로 형성된 한국이라는 정치적 공동체가 일본제국 속으로 해소될 수도 있다는 입장에서 합방청원서를 발표해 조선사회 내부에서 큰 반발을 샀고 일제의 해산 명령과 함께 정치적으로 소멸되었다."(305-6)
"통감부가 내건 소위 '시정 개선'은 민권 확대와 상충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민권론은 특히 고종황제 퇴위 후 식민관료의 직접통치가 강회되는 통감부 후기로 접어들면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접점에서 민권론이 인민주권론적 정향성을 드러내며 민족국가론으로 흡수되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대한매일신보』의 논설들이다. 이 논설들에 이르러 국가는 인민이 계약에 의해 창조한 것이며 인민은 정부와 반반씩 권한을 나누거나 정부권한을 거스르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정치역량을 강화하여 정부를 감독하고 지도하여야 하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 자로 규정되었다. 또한 인민은 국권을 떠난 권리를 추구할 수 없으며, 국가주권의 보존과 회복을 위해 모든 자유권을 압제에 잃어도 애국자의 사상을 가지고 노력해야 하는 존재로 정의되었다. 이제 인민의 권한과 국권은 결합되어 분리불가능한 것이 되었다."(306)
제9장 근대한국의 기술개념
"기술의 개념사라는 시각에서 볼 때, 17~19세기 한국에 전파된 서양 근대기술의 특징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근대기술개념의 핵심은 장인에 구현된 기능이나 기예로서의 테크네(techne)로부터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지식'이라는 의미로서의 기술, 즉 테크놀로지(techne+logos)의 출현에 있다. 둘째, 근대기술의 출현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자연관으로부터 기계적이고 객관적인 자연관으로의 변환을 바탕에 깔고 있다. 다시 말해 근대기술의 발달은 탈도덕화된 근대과학의 성립을 배경으로 가능했다. 끝으로 근대기술의 발달은 단순히 기계의 발명이나 과학·지식 체계의 발달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제와 체제 전반의 변환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국제정치의 시각에서 볼 때, 근대기술이 부국강병의 상징으로 이해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즉, 서양기술의 전파는 외래문물의 순탄한 수용과정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던 동태적인 과정이었다."(308)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개물(開物)이라는 용어가 기술에 상응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역경(易經)』을 보면, 개물성무(開物成務)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개물이란 '자연의 개척 내지 자연의 인위적 가공'이라는 의미였다." "개물이라는 말은 천공(天工)이라는 용어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물(物)은 천(天)에서 생기지만 공(工)은 인(人)에 의하여 열린다. 따라서 천공이란 천과 인을 겸한 것을 말한다. 천공이라는 말은 '하늘이 만든 자연을 인공에 의하여 이용한다는 것, 즉 '하늘과 사람의 합작'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중국의 독특한 천(天)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인위적 기교만으로는 참된 생산[工]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동아시아의 기술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동아시아인들은 천공을 기다린 다음에야 비로소 인공이 완전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천(天)과 지(地)의 관여가 없는 개물, 즉 인공만으로는 훌륭한 기술이 이룩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311-2)
"성리학에서 격물(格物)은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데 활용되지 않았고, 인간의 수신(修身)을 위해 필요한 방향으로만 적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은 하나의 독자적인 지식체계가 아니라 인간, 즉 장인에 배태된 일종의 덕목으로서 이해되었다. 최고의 기술은 천지의 도(道)에 연결되며, 기술이 이러한 도(道)로 고양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숙련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숙련된 뒤에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경지, 즉 기교를 의식하지 않는 반사운동으로서의 기술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도에 이른 기술의 경지는 자기가 그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도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경지를 의미한다. 이렇게 숙련을 통해서 이뤄지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기술개념이 근대적인 'technology' 개념과 거리가 있었음은 당연하다. 요컨대, 전통 동아시아의 기술은 아직 장인의 직업을 도구적 수준에서 보조하는 형태였으며, 도제를 통해서 전수되는 경험적 수준의 테크네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15-6)
"동도서기론은 유교적 전통을 지키려면 서양의 기술을 수용해야 한다는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동도서기론은 기본적으로 서양의 근대기술을 그 자체로서 인식하기보다는 서양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이이제이의 수단으로서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기술의 개념사적 측면에서 볼 때, 동도서기론은 서양기술의 '하드웨어'적 발전, 즉 도구에서 기계로의 발전에만 주목하고, 그 '소프트웨어'적 측면, 즉 지식체계로서의 속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동도서기론은 후자 없이 전자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동도서기론자들에게 서양의 발전된 기계는 새로운 개념의 것이라기보다는 '장인의 기술'의 관점에서 이해된 또 하나의 신기한 도구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 신기한 도구를 들여오거나 그것을 만드는 방법만 배우면 서양을 능히 따라갈 수 있다는 식의 사고가 가능했고, 이러한 점에서 동도서기론이 서양기술의 '하드웨어', 즉 기(器)만을 보게 되는 구도가 설정되었던 것이다."(329-30)
"근대기술에 대한 개화기 지식인들의 이해는 동도서기론의 발상으로부터 서도(西道)와 서기(西器)가 분리될 수 없는 표리의 관계라는 인식─명실상부한 근대 'technology'에 가까운─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인식의 변환은 주로 1880년대를 넘어서면서 나타난다. 단순히 하드웨어만을 수입하려는 시도를 넘어서 사회체제 전반의 변화라는 맥락에서의 서양기술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는 1880년대 초엽 파견된 영선사나 조사시찰단 등을 통한 근대서양의 군사 및 산업 기술에 대한 이해가 한몫을 담당했다. 소위 개화론으로 알려진 이러한 인식은 동도서기론과는 달리 전통적 가치에 대한 회의를 바탕으로 하여 좀더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으로, 그들의 인식 속에 반영된 기술은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의 면모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기술개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신구세력 간의 정치사회적 진통은 불가피한 것이었다."(339-40)
제10장 식민지 한국의 국제협조주의
"제국주의가 넓은 의미의 국제주의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주의론이 공격적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언설로 각광받았던 것은 명백하다. 당시 유럽에서는 생물 진화가 생존경쟁뿐만 아니라 상호부조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는 크로포트킨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유럽에서 국제협조주의의 전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파는 1920년대 신자유주의(new liberalism) 계열이었다. 나바리는 소극적 자유보다 적극적 자유를 주창하던 신자유주의자들이 새로운 집단안보, 새로운 외교, 국가 간의 폭넓은 연결성에 대한 요구를 이론화했다고 밝히면서, 신국제주의가 곧 신자유주의였다고 설명한다. 19세기 말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상품과 아이디어의 사적·경제적 교환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을 발전시키면서 국제법 확장, 규정된 국제법적 판결, 국제재판소 창설을 지지하고 그에 대한 정부의 영구적인 개입을 요구했다는 것이다."(347-8)
"국제협조주의는 국가절대사상에서 국가를 어느 정도 상대화시킨 것이었고 군국주의, 국가지상주의, 국가만능주의, 침략주의, 이권독점주의 등으로 명명되는 국제질서의 원리와 대립했다." "종전 이후 세계개조론의 유행 속에서 국내외의 개조를 동시에 논하던 일본 사상계의 움직임은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에게 거의 시간 격차 없이 전달됐다." "일본인들은 개조를 국내와 국제 차원에서 폭력적 군국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확립으로 나아가려는 세계의 흐름으로 인식했다. 식민지 한국인들은 일본의 논의를 이어받아 세계개조가 민의정치와 여론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고, 이를 국제간에 적용하면 제국주의와 완력주의를 타파하고 〈공론(公論)과 협조와 이의(理義)〉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세계개조 개념을 통해 국제협조주의를 받아들인 초기 단계에서 식민지 한국인들은 (민본주의와 계급평등을 강조하던 일본과 달리) 민족자결 원칙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다."(356-9)
"1920년대 생존경쟁론 비판이 세계개조론과 함께 한국에서 큰 논쟁을 낳았던 이유는 식민지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열망이 치열하던 1920년대 초반에, 세계개조론은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과 대척점에 서 있었고 침략주의와 대조되는 협조주의, 군국주의와 대조되는 평화주의로 표현되었다. 조선사회에서 사회진화론은 이미 1890년대에도 존재했다. 윤치호는 서로 다른 민족 사이에서는 힘의 정의뿐이라며, 강한 인종이나 민족이 힘을 얻어 스스로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 정의와 평화는 결코 지구상에 자리잡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조선인들은 세계대전의 경험으로 대세가 바뀌고 있다는 희망을 갖고서 일본에서의 육군 축소운동 등에 주목하며 군국주의가 나아갈 방향에 깊은 깊은 관심을 보였다." "가령, 김영식은 다원적 구심작용으로 민족자결을 고창하고, 일원적 구심작용으로 국제주의 또는 세계주의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