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철학을 번역하다 : 플라톤의 파이돈
남경희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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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자연언어는 신이 창조하여 인간에게 선사한 것도,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정신에 심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고유한 시간과 공간을 사는 특정 공동체 구성원들이 아마도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모두가 참여하여 이루어낸 가장 포괄적이고 기반적인 문화 활동의 성과다. 언어 형성을 위한 정신적 활동은 너무나 기초적이고 편재적이기에, 마치 물고기가 수압에 대해, 우리 신체가 기압에 대해 그러하듯이, 우리는 그것의 영향력을 간과한다. 자연언어는 인간의 정신이 숨 쉬는 공간이기에, 나름의 압력을 가하고 있다. 자연언어는 그 자체가 특수적이고 개별적인 문화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적인 좌표대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를 사용하는 언어 주체들의 사고방식, 세계관, 인간관, 사회관, 관점 등이 내장되어,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차적 문화 활동 전체의 기본 틀이나 범주로 기능하며 정신 전체의 분위기나 기상도, 사유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12-3)


1부 고전 번역론: 철학의 매체에 대한 철학적 반성


1장 언어와 사유의 관계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권의 어휘들이 그 청각적 또는 시각적 모습은 달라도 의미는 동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가령 '어머니', 'mother', 'meter'는 각각 한국어, 영어, 그리스어 어휘로서 외적(기표적)인 모습은 다르지만 의미 내용은 '한 가족의 2세를 낳거나 양자로 삼아 양육하는 여인'으로 서로 같다. 즉 기표는 물리적 존재이니만큼 발성 구조나 시공적 환경의 영향을 받으나, 그 배면의 의미는 정신적 내용이기에 그런 차이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과연 '어머니'와 'mother', '사랑'과 'love'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와 'meter'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의 정서나 태도는 시간과 거리의 차이만큼 다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효도'라는 덕목이 중요하지 않았으며, 고대 그리스의 'meter'가 한국의 '어머니'처럼 자식에게 희생적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23)


# 의미동일론 비판


"동서고금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다르지만, 그를 도구로 사용하는 주체인 정신이나 사고의 구조, 논리, 방식 등은 대체로 비슷하다는 것이 통념이다. 사유의 내용은 물론 다를 수 있지만 인간 정신의 사유 틀, 사유법, 사유의 구조는 지역과 시대라는 시공적 차이를 넘어서 보편적이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종이 자연 진화의 결과라 한다면, 인간 정신도 자연적·문화적 진화의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일관된 입장이다. 정신이 등장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요인은 신경생리학적 기반에 더하여 다른 인간과의 사회적 관계이며, 사회적 관계에서 핵심은 언어이다. 인간의 정신은 다른 인간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자라나는 것인데, 그 사회적 관계의 기초이자 가능 근거는 언어일 것이다. 인간이 유아 시절부터 무인도에서 자라난다고 한다면, 그는 정신적 능력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설득력 있는 추정이다."(25-6)


# 사유선재론 또는 언어도구론 비판


"의미동일론은 더 근본적이고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념에 기대고 있다. 그것은 우리 밖 세계의 모습이 고정적이고 동일하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 밖 외계 내의 대상이나 사태가 일정하며 객관적인 그 자신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그것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는다." "우리의 감정이나 정서를 표현하는 문장의 경우에도 비슷한 입장을 견지한다." "이 경우 역시 어떤 언어(기표)를 사용하느냐는 우리의 내면 감정이나 정서의 풍경화가 지니는 모습에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통념이다." "그렇다면 언어를 배우지 않은 유아들도 다양한 감정이나 정서 등의 심적 상태를 품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경우 문제는 유아들의 심적 상태와 그들이 배우게 될 다양한 심적 술어들의 의미 혹은 공적 사용 기준 간의 관계를 해명하기가 쉽지 않다. 양자는 사실상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전자는 주관적인 것이고, 후자는 객관적이고 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28-30)


"감정과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의 존재 순서는 뒤바뀌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감정 상태가 생기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감정 어휘들이 고안되는 것이기보다는, 감정 어휘들을 배우면서 감정 상태가 형성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감정 어휘들을 기존의 언어공동체로부터 학습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달리 이들 어휘를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감정 어휘의 학습은 어떤 객관적·공적 사용 기준을 매개로 하거나, 또는 그 어휘의 사용례들을 접하고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로 아동이 자신의 내면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감정 어휘를 사용하는 경우, 그 술어의 의미나 사용 근거가 되는 것은 자신의 내면 상태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그 술어의 공적 사용 기준이나 사용례들에 대한 기억이다. 타인이 아동의 심적 문장을 이해하는 준거 역시 그 공적인 것이다."(30)


# 세계동일론 비판


2장 플라톤 시대의 담론 문화: 준구술 시대


"에릭 해블록은 호메로스 시대에서 300~400년 지나 등장한 자연철학자들도 구술 시대의 사상가라고 자리매김한다. 소크라테스 역시 저술 없이 대화나 토론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설파했다는 점에서 구술 시대의 현자로 평가할 수 있다. 철학함에서 그가 의지했던 언어 매체는 구어, 대면적 구어였다. 몇몇 소피스트는 직접 저술을 했으나, 그런 저술 활동은 주로 자신을 시인과 차별화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들의 주된 활동은 대면적 담론이었으며, 그들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아고라agora에서의 연설과 토론, 혹은 법정에서의 변론 기술이었다. (플라톤 시대 역시 저술의 출판과 대중의 독서가 일반화될 수 있는 물리적·문화적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가 구술 시대인가 문자 시대인가의 물음은 그의 저술 의도만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철학함의 모습, 그의 저서에 담긴 철학적 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도 필수적이다."(43)


"고대 그리스가 공적인 공간에서도 글보다 말을 더 중시했던 구조적 이유는 고대 그리스가 대면적 사회라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규모가 큰 곳이 20여만 명, 그중 정식 시민은 4~5만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소규모 공동체였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면 서로를 익숙하게 알 수 있는 좁은 사회였다. 이러한 대면사회에서는 구태여 규범, 관습, 권리 관계를 위탁할 문서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문서란 말하자면 인간관계에 있어서 타자 또는 제3자이며, 스스로는 증언할 수 없는 물리적 존재라는 점이다. 말보다 문서에 의존하면 문자의 비대면성, 간접성, 사물성, 비활성성 등 때문에 불안감이 더 커질 수 있다. 이에 비해 대면적이고 구술적인 관계는 사람을 직접 대하고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확실성, 직접성, 인격성, 행위성 등의 특색이 있다 글과 달리 말은 인격의 일부이자 행위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46)


"'개인의 신원' 또는 '자아 정체성'을 의미하는 영어 어휘 'personal identity'에서 'identity'는 개인의 고유하며 개성적인 자아라기보다는 원래 '소속', '타자와 함께하는 것', '타자와 공유하는 동질적인 성질'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 개인에게 신원을 물으면 그가 소속한 집단을 말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내면적 개인, 정신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개념은 플라톤 시대에는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공동체적인 시기에 홀로 행하는 독서와 사색은 특이하고 예외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현자들은 지혜를 전하고 자연철학자들은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며 저술했으나, 그것은 이들이 사유 주체로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루는 것이라기보다는 학예의 여신 뮤즈Muse의 도움으로, 혹은 신들의 신탁을 통해서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시인들은 뮤즈를 호출하여 영감을 요청하고, 파르메니데스 등의 자연철학자들은 뮤즈의 인도를 받아 진리의 길을 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53-4)


"철학자나 현자들이 자신의 사상을 타인들에게 가르치는 데 있어서 도서라는 매체에 의탁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제작할 수 있는 필사본이 소량이고 글 읽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그 범위가 제한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선의 방법은 대면을 하고서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를, 또는 수사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플라톤의 대화록 저술 목적 역시 구술적 가르침을 재현함으로써 후대의 시민들을 이런 대면적·상호적 철학함으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게 인간 정신의 성장과 발전은 서재나 연구실에서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의 대화·토론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적이고 정치철학적인 과정이다. 플라톤의 저술은 독자가 홀로 독서하면서 동료 시민들을 떠나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사색의 여정을 떠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대화와 토론을 하기 위한 자료로서 저술된 것이다. 그것은 파피루스나 양피지 위의 아고라였던 것이다."(62-3)


"구술적 철학함은 역설적이다. 구술적 철학함은 역동적이고 가변적이며 관계적이지만, 철학자들은 이런 역동적이고 상호적인 말하기를 통해 정태적이고 불변적이며 자체적인 실재를 찾아간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철학의 목표를 불변하는 실재나 진리를 지적으로 정관하는 상태(프로네시스phronesis)라고 논한다." "이런 역설이 어떻게 가능한가? 대화와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상호 공유하는 지평이나 좌표대를 구축한다. 자연스레 구축·형성된 공동의 좌표대는 일종의 문서적 세계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철학적 대화와 토론이 진행됨에 따라 참여자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내용들만이 그 좌표대에 등록되고 저장·축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객관화·합리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의 정신과 그들의 말은 점차 구체적이고 특수한 삶의 현장에서 비상하여 플라톤이 말하는 자체적인 존재자들이 세계에 이르게 된다."(84-5)


"플라톤의 대면적 철학함의 모델은 구술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그가 생각하는 구술적 활동의 성격이나 내용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전에는 전승되는 이야기를 그대로 암송하고 이를 자기화하여 자신의 행동과 삶을 위한 지침으로 삼는 것이었다. 플라톤 이전에 말이란 단지 지혜의 전승·전달을 위한 매체이거나 소통의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말(소통 수단으로서의 로고스)은 아직 진리 발견의 방법(이성으로서의 로고스)으로서의 지위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시민들이 진리와 실재를 탐구함에서 실질적인 사유 주체로 격상될 수 있었던 것은 말하기가 진리 발견의 방법의 지위에 오르면서이다. 진리 발견을 위해서는 특별한 예외적 능력이나 과정이, 가령, 신탁, 계시, 신들림, 영매 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말하기에 의존하되, 말의 정신과 논리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96-7)


"플라톤이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타무스의 입을 통해 문자를 비판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문자는 사람들의 정신에 망각을 주입한다. ②지식의 보관을 문자에 의존하기에 그들 정신의 암기력을 소홀히 하게 된다. ③문자는 정신에 외적인 것이며, 타자에 속하는 매체이다. ④문자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내부로부터 암기하려 하지 않는다. ⑤문자는 기억하기가 아니라 생각나게 하기를 위한 간접 도구에 불과하다. ⑥문자나 문헌을 통해서는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 지혜로 보이는 바만을 획득할 수 있다. ⑦문헌의 독서로는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 ⑧많은 것을 읽기만 해서는 단지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이기만 할 것이다. ⑨다루기 힘든 사람들이 되어 학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구술 시대에 말은 살아 있는 것이지만, 글은 독자가 읽기까지는, 그리고 글의 의미를 새기고 수용하기까지는 가수假睡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106-7)


"플라톤은 진리 발견의 능력을 감싸고 있던 신성성의 안개를 흩날려버리고 세속화했다. 그것은 일상의 감각 경험과는 다른 능력이기는 하되,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일종의 선험적인 기억력이다. 이런 세속화와 함께 그 특별한 능력이 대상으로 하는 바 역시 다른 위상을 부여받게 된다. 인간은 선험적 기억력을 통해서 일상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를 접하기는 하되, 그것은 영웅과 신들의 세계가 아니라 보편자·추상체의 세계, 개념들의 세계이다. 이제 '신적이고', '초월적이며', 비경험적인 기억력은 시인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 모두가 지닐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시인과 같이 선택되거나 점지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보통 시민들도 스스로의 사유 활동에 의해 뮤즈의 지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단 이런 초자연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기억력을 향유하고 배양하려면 정신의 정화, 신체적인 것을 정신에서 씻어내는 정화 과정, 즉 철학함의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25)


3장 그리스의 담론 매체와 이성의 발견


"전쟁에서 적과의 투쟁은 물론, 동일 진영 내에서도 전략 토론과 전리품 분배를 둘러싼 치열한 다툼, 올림픽 경기에서의 승부 경쟁, 아고라에서의 정치적 논쟁, 법정에서의 논고와 변론, 나아가 소피스트들과 철학자들의 이론적 토론 등의 다양한 경쟁적이고 논쟁적인 관계가 고대 그리스 문화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심지어 인간의 정신적 활동도 정신 또는 영혼을 구성하는 이질적 요소들 간의 주도권 경쟁이라고 설명했다. 지성과 기개와 욕망, 검은 말과 흰 말과 이들을 통어하는 기사, 지성과 감정, 억견(doxa)과 인식 등 간의 경쟁과 갈등이 인간 정신 내면의 풍경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담론 문화도 경쟁적이기에 변증술, 이중 논변, 반론술, 논박법, 쟁론술 등 다양한 논쟁 방식이 생겨났다. 경쟁적 관계란 말의 권리나 말의 평등성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며, 이런 믿음은 전시에나 평화 시에나 그들 도시적 삶에서 주축의 원리이자 가치로 기능했다. 132)


"우리의 생각이나 발언들이 논리적·이성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자들, 특히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논변에서 이미 확립된 것이다. 이들은 존재의 단일성, 존재와 사유의 일치, 운동과 다수의 불가능성을 논하는 다양한 역설을 개진했는데, 그 정당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들은 존재 개념에 대한 논리적 분석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이들 논변의 논리적 지렛대는 논리학의 제1원리라 할 동일률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순을 찾아 논파하는 철학적 방법론인 논박법을 진리 검증의 핵심적 방법으로 제안한다. 이는 논리학의 제2원리인 모순 배제율의 원형을 이룬다. 플라톤은 스승의 정신을 이어받아 철학적 사유의 중심 원리는 논리나 이성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를 관찰하기보다는 로고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진상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136)


"우리는 상호 담론을 이해하기 위한 조건, 진리를 위한 조건, 이들 조건을 충족시키는 제반 사항들을 모두 합하여 이성이나 합리성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언어적 소통은 이성을 전제하며, 이성을 형성해간다. 언어는 이성의 현현이며, 이성은 말의 본질이다. 이성이나 합리성이란 다름 아닌 이해와 진리를 위한 조건, 그러므로 말이 곧 말이 되기 위한, 말다운 말의 조건이다. 그리스적 언어관은 말에 대한 인식적 관점을 취한다 할 수 있는데, 말에 대한 다른 관점과 비교할 때 그 고유성이 드러날 수 있다. 유가의 언어 이론은 정명론正名論에 요약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언어란 규범이다. 동아시아에서 언어란 사실을 기술하기보다는 행위를 처방하고 규제하는 규범의 역할을 한다.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어버이는 어버이답게 행동하고, 자식은 자식답게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동아시아적 사유에서 사물에 로고스를 준다는 생각은 낯설 뿐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생각이다."(140-1)


"플라톤 대화 모델의 사고관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문자 문화의 영향이라 추정할 수 있다. 플라톤은 저술을 하고, 문자의 특색에 주목하고 반성하면서 사유를 점차 정신이 독립적으로 홀로 수행하는 특유의 활동이라고 보았으며, 경험계와는 다른 고유의 대상에 관여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새로운 사고관의 특징을 지적해보자. 첫째, 사고 활동이란 정신이나 영혼이 신체와 독립적으로, 그리고 홀로 수행할 수 있는 고유의 활동이다. 둘째, 감각 대상을 다루거나 기표 또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 자체적이고 보편적이며 개념적인 존재를 인식과 논구의 대상으로 한다. 셋째, 이들을 인지하는 것을 넘어서 이들에 대해 새로운 종류의 활동, 가령 비교, 평가, 공통점 추출, 추론, 연역, 일반화 등의 활동을 수행한다. 그리고 넷째, 이들을 경험계의 대상들, 또는 이들에 대한 인식과 관계시킨다."(146-7)


"문자의 비효율성이나 의존성은 오히려 정신의 등장이나 활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적극적 기능을 한다. 문자는 정신에 의해 사념될 수 있는 추상적이며 비가시적인 존재를 요청한다. 그런 것의 매개 없이 그것은 소통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자는 무언가의 대리인이다. 문자가 언어라고 한다면, 그것의 존재 기반이 되는 자체적이고 추상적인 의미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문자는 이들 추상체를 대리하는 것이며, 추상체는 문자의 배후 후견인으로서 이들을 지원한다고 여겨지기에 문자 문화는 추상체나 자체적인 것의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믿음을 강화시켰을 수 있다. 글에 대한 이런 믿음은 말에도 전이되어 언어 일반에 대한 입장을 형성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문자에 대한 반성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그가 철학적 사유에서 필수적이라 생각했던 바, 즉 자체적인 것,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것, 정신의 고유 영역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했을 것이다."(148-9)


# 플라톤 철학의 두 가지 측면

1. 구술 문화적 요소 : 대화록이라는 저술 형식, 이야기식 문체, 문자에 대한 명시적 비판, 소크라테스의 대면적 철학함, 아카데메이아에서의 철학함의 방식, 당시 문자 자원의 희소성

2. 문자 문화적 요소 : 형상의 존재, 자체성의 개념, 지적 정관(프로네시스), 실재의 불변성, 정태적 인식의 주체로서의 정신, 실재 탐구에서 차선의 방법인 언어방법론, 가설의 방법, 변증법, 분석과 종합의 방법, 추론과 연역적인 사고의 강조


4장 고대 그리스어의 언어철학


"문자 형성의 기반이 무엇이냐는 언어관 형성에 기초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그리스 문자는 음성을 가시적 매체로 전사하는 음성문자이다." "음성문자는 그 자체로서는 물리적 끄적임이기에 그것의 의미, 혹은 그것이 지칭·묘사하는 사물이나 사태와 전혀 무관하다. 기표는 기의에 대해 자의적이다. 그래서 음성문자적 문화는 끄적임의 배후에 그 물리적 흔적을 언어로 역할하게 하는 의미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가시적 끄적임이나 흔적은 시각적인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홀로는 언어기호로 기능할 수 없다. 그래서 그를 소통의 매체로 기능할 수 있게 하는 어떤 것이 배후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럽다. 배후의 것은 끄적임과는 달리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며, 눈이나 귀로는 지각할 수 없으나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으로는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을 수 있다."(178)


"미국의 고전학자 찰스 칸은 그리스어 be동사('einai' 동사)의 진리 확인적 역할을 조명하면서 그리스어 be동사는 ①'존재한다'는 의미('a is' = 'a가 있다'), ②계사적 역할('a is P' = 'a는 P이다')에 더하여, 보다 기초적인 의미로서 ③진리 서술적 의미('a is P' = 'a가 P라는 것은 참이다')를 지니고 있다고 논한다. 그리스어 be동사는 자신이 연결사가 되어 서술된 사태가 객관적 사실이며 진리임을 주장하고 확인하는, 상위 술어(메타)적인 역할도 함께 수행한다는 것이다. 칸은 그 근거로 'einai'의 분사형에서 파생된 부사('ontos')와 형용사('on')가 결합된 어구 'ontos on'이 '진정으로 실재인really real'을, 'to onti'가 '실제로really'나 '진실로truly'를, 'esti tauta'가 '이들은 사실이다these are real' 또는 '이들은 진실이다these are tru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더 나아가 '진술된 바가 진리이다 또는 사실이다'라는 진리언명적 의미가 그리스어 be동사의 보다 중심적인 의미라고 주장한다."(186)


"'einai' 동사를 사용하여 무언가를 서술하고, 서술되는 바가 진리임을 주장하려 한다는 것은 역으로 그것이 논파될 가능성을 우려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be동사를 사용한 사실 언명이나 주장이 일상적이고 빈번히 이루어질수록 진리 주장에 대한 비판 의식은 첨예해질 수 있다." "플라톤 철학에서, 더 일반적으로 서양철학에서 인식론이나 존재론이 중심적인데, 그 이유는 그리스어의 be동사가 지닌 서술적 역할이나 진리주장적 의미와 관련이 있다. 그리스 이래 서구적 사고에서는 실재란 무엇이냐, 언표되는 바가 객관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냐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철학은 오랫동안 서구 학문의 중심이었고, 철학이나 학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진리의 인식이었다. 자연철학자들은 서양철학의 비조鼻祖로 평가되는데, 그들의 전형적인 물음, 아르케에 관한 물음은 바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었다."(186-8)


"그리스어를 포함한 서구어에서는 형용사에 정관사(고대 그리스어에는 정관사만 있음)를 붙이면 그 형용사가 기술하는 성질을 지닌 어떤 보편자나 추상체를 가리키는 어휘를 만들어낼 수 있다. 'the red'는 보고 만질 수 있는 'red apples', 'red lights' 등과 대조되어 빨강 자체, 빨강의 성질, 빨강의 본질을, 'the just'는 'just societies', 'just decisions' 등에 공통적인 덕목인 정의 자체, 정의로움, 정의의 본질을 지칭한다. 이들 보편적이고 추상적이며 자체적인 것, 그러면서 특수자들에 공통적인 본질은 관사의 도움을 받아 존재론적인 추론을 거치면 쉽사리 실체로서의 추상체나 보편자로 변모한다. 서구어의 관사가 이렇게 형용사를 실체화할 수 있는 이유는 지칭적인 기능을 행하기 때문이다. 지칭될 수 있는 것은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이다. 'the red'나 'the just' 역시 관사적인 것, 즉 지칭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어떤 존재자이다."(197-8)


"플라톤은 형용사와 보통명사의 의미 근거와, 이들에 의해 기술되는 물상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성질의 근거가 되는 것이란 동일하다고 추론했다. 사물들이 특정한 형용사('정의롭다')나 명사('정의')에 의해 의미있게 서술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 어휘에 의해 기술되거나 지칭되는 어떤 속성(가령 '정의로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형용사나 명사는 그 실체 또는 형상을 명명하는 이름이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산하는 모두 '아름답다'고 의미있게 서술될 수 있고, 그런 기술이 진리일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아름다움'이라는 어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이면서도 '아름다움'의 근거가 되는 이것을 플라톤은 그리스어 형용사에 관사를 붙여 'to kalon(아름다움the Beautiful)'이라고 부르며, 나아가 이를 'to Kalon auto kath' hauto(자신에 즉해 있는 아름다움 그 자체Beautiful itself)라 칭하면서 다양한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분리 구분했다."(200-1)


"그리스어 동사 'einai'와 라틴어 동사 'existere'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어 'einai'는 지속적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로서 'gignesthai(생겨나다)'와 대조된다. 이에 비해 라틴어나 영어의 존재동사는 오히려 '생겨남'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동사이다. 라틴어 'existere'는 두 어휘 요소 'ek-sistere'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구성에 비추어볼 때, 이 동사는 '앞으로 나옴', '걸어 나옴', '존재하게 됨',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대낮의 밝은 빛 속으로 부상함'을 의미한다. 이 동사의 접두사인 'ex(ek)'는 과정의 완료를, 그리고 어간 'sistere(서게 되다)'는 지속성을 함의하는 'stare(서 있다)'와 달리 부정과거aorist의 일회성이나 순간성을 함의한다. 이렇게 분석해보면 'existere'라는 동사는 'gignesthai'의 반대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 즉 생성 과정이 완료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existere'는 '존재하게 되다', '생성 과정의 결과로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다'를 의미한다."(208)


"이 어휘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부상하게 되다'를 의미하므로, 존재자들이란 '부상하게 된 것들id quod existit'이다. 이렇게 부상하게 되어 대낮의 빛 속에 들어선 것은 우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부상하지 않고 어두운 배경에 머무를 수도 있으며, 곧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중세 신학은 성서의 영향을 받아 존재와 본질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런 구분법에는 존재가 우연적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우연한 존재의 개념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개념으로 계승된다. 'einai'의 명사적 형태라 할 수 있는 그리스어 'ousia'는 '우연적 현존existence'이 아니라 '항구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 '본질essence'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고대 그리스의 'einai'는 중세적 'existere'와 달리, 우연적이고 일시적으로 있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있음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의 존재 개념은 중세나 이후 실존철학의 존재 개념과는 정반대적이라 할 정도로 현격한 차이를 지닌다."(208-9)


"'praxis(프락시스)'와 'poiesis(포이에시스)'의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또는 행위철학의 중심 이론 중 하나인데, 이는 그리스적 사유에서 동사상 구분에 대한 민감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poiesis'는 대략 '노동', '제작'이라 번역될 수 있는 어휘로, 외부에서 주어진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적 활동을 의미한다. 외재적 목적이 성취되면 그 행위는 종료된다. 가령 '(밭을) 갈다'라는 동사가 기술하는 경작의 활동은 밭을 다 갈게 되면 종료된다. 목공일은 가구가 완성되면 더 이상 수행할 필요가 없다. 이와 달리 '실천'이라 번역할 수 있는 'praxis'는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산책하기, 놀이하기, 운동하기, 명상하기, 지적 호기심 충족하기, 수학문제 풀기, 우주의 질서를 관조하기 등의 활동은 실천적 활동이다. 이들 활동은 어떤 외부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즐거움을 주며 가치를 지니기에 활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211-2)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활동을 두 종류로 구분하는 것은 윤리적 삶과 행위를 규정함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 삶의 목표는 'eudaimonia(에우다이모니아)'이다. 통상 이는 'happiness' 또는 '행복'이라 번역되어 왔는데, 이는 일종의 마음의 상태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어의 '에우다이모니아'는 심리적 상태라기보다는 어떤 활동을 의미하는데, 다양한 활동 중에서도 앞서 구분한 바, 자체 목적적인 활동인 실천(프락시스)이다. 삶의 목표인 에우다이모니아는 어떤 행위를 통해 도달한 상태나 무엇을 성취하여 이룬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가치를 지닌 진행적인 실천 활동인 것이다." "노동이나 제작이란 부정과거 동사상(일회성으로 끝나는 활동)이나 완료 동사상(행위의 온료 또는 행위에 의해 이르게 된 상태)적 활동이다. 이에 비해 실천이나 그 전형인 에우다이모니아는 반과거 동사상(진행적 활동)으로 표현될 수 있는 활동이다."(212)


2부 플라톤의 『파이돈』 : 철학적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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