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를 읽다 - 레비스트로스와 인류학을 공부하는 첫걸음 유유 고전강의 13
양자오 지음, 박민호 옮김 / 유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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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하버드에서 레비스트로스를 만나다


"십자군의 동정東征에서 대항해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근대사상은 끊임없이 시간과 공간에 있어 '인간'의 범위를 확대해 왔다. 공간적으로 보자면, 유럽인은 유럽 이외 지역에도 인간이 존재하며, 그 수가 유럽인을 초월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시간적으로 보자면, 고대 그리스 이전에도 인간이 존재했으며, 그 수가 한둘이 아니고 그 기간도 100~200년에 그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확장된 인류의 범위는 인류학 연구에서 새로운 문제를 촉발했다. 본래의 철학적 방법은 지나치게 서양인의 사고와 자각에 의존했고, 그리스 로마에서 기독교 전통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이 발견된' 인간은 철학의 대상에 포함시키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본디 전칭全稱의 특징을 지닌 인류학 개념은 점차 전통 철학의 탐구 영역 밖에 있던 '인간 현상'을 탐구하는 것으로 전환되었고, 새로이 개척된 인간의 영역이 서양인의 관심과 해석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44)


2장 인류학의 대전환


"문명 바깥에는 '야만'이 존재한다. 주류 분과 학문은 각기 여러 인종과 문명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고, 인류학의 연구 대상으로 '야만'과 '야만인'만을 남겨 두었다. 역사, 문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은 모두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그러한 분과 학문의 기준에서 야만인은 '인간'에 포함되지 않으며 인간 연구의 범위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인류학은 특별하다. 야만인은 물론 인간이다. 야만인을 인간 연구에 포함할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인간됨'의 최대공약수를 발견할 수 있으며, 제대로 인간을 정의할 수 있다. 야만인을 배제한다면, 우리가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최대 범위란 단지 '문명인'에 불과하게 된다. 심지어 그 문명인이란 특정한 몇 개의 문명에 속하는 인간으로, 진정한 인류와는 논리적 정의에서도 차이가 난다." "'황금' 또는 인류학이 밤낮없이 추구하는 '성배'란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전칭적' 인식을 말한다."(47-8)


"말리노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하나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 지역 사람들의 관점, 그들과 그들의 생활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인류학자는 과거의 관찰 태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참여자'여야 한다. 관찰자는 현지인의 생활을 외부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므로 객관적 혹은 주관적 편견을 갖게 된다. 반면 참여자는 참여 학습과 현지인의 생활관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그들의 삶을 그들의 입장에서 인식할 수 있다." "(참여자의) 자격을 얻은 인류학자는 늘 두 가지 초점을 가진 안경으로 세상을 본다. 인류학자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에믹emic과 에틱etic이라는 서로 다른 초점거리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 이 두 개념은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는데, 각각 '내재'와 '외재' 또는 '집단 내부'와 '집단 외부'라는 의미다. 나아가 그것은 '특수성'과 '보편성' 간의 차이로 이야기될 수도 있다."(51-3)


"현대 문명, 공업화, 도시화는 전통적인 약세 문화를 지속적으로 파괴했고, 도처에서 옛 부락이 사라져 갔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학자에게 참여식 관찰을 통해 그와 같은 문화적 자료를 구출하고 지킬 것을 수시로 요구해 왔다. 그러나 결국 레비스트로스처럼 '보편적 인류 지식'이라는 과거의 몽상을 견지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시선을 돌려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렇게 쌓아 둔 표본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하려는가? 이런 표본을 정리해 인류에 관한 보편적 인식을 끄집어낼 수 없다면, 그토록 힘을 들여 그것을 수집하고 기록할 필요가 있는가?〉 레비스트로스는 한 가지 방식을 찾아냈다. 이 방식으로 인류학자들은 다시금 인류의 공통성을 직시하게 되었다." "당시 인류학자들은 문화적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했고, 모든 보편성의 주장에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용감하고 영리하게 '구조'라는 새로운 관념을 제시해 보편성에 대한 인류학자의 관심을 확장시켰다."(69-70)


"이렇게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와 시 혹은 시학 사이의 첫 번째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시학에는 항상 신비하면서도 동시에 확고한 주장이 포함되었다. 우리는 시가 시인의 독특한 개성을 분출한 것이라 여기지만, 시에서 인류가 공유하는 심층적 경험과 만나기도 한다. 시인은 다른 사람이 한번도 사용한 적 없는 어구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렇다면 시는 어떻게 개별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을 결합할 수 있을까? 언어 내부는 거의 무한정한 탄성彈性으로 가득 차 있지만, 늘 고정된 구조의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시가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시는 현실을 보여 주는 역사보다 더 진실하다. 그리고 이 진실은 보편적 경험, 이치, 규칙을 대단히 뚜렷하게 지시해 준다." "이것이야말로 레비스트로스가 방대한 민족지 자료를 분석하여 '구조'를 수립하려고 실행했던 바가 아니겠는가?"(70-1)


3장 슬픈 열대로 들어가다


"레비스트로스를 인류학자로 성장케 한 경험은 다른 사람들과 매우 달랐다. 말리노프스키 이래로 일찍이 영미 인류학자들이 받아들인 '통과의례'rite of passage는 원시 부락에서의 참여식 관찰이었다. 이는 인류학자가 되기 위한 일종의 학술적 성인식이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달랐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있어 은폐되고 헤아릴 수 없는 지식은 지질학,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의 교집합을 형성했다. 그는 자신을 이 교집합에 포함시켰다. 또한 인류학을 이 교집합에서 수행하려 했다." "그는 분명 현지 조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에 대한 참여식 관찰 방식의 현지 조사를 통해서만 인류학자로 변모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언어학자(야콥슨)를 알게 되고, 다른 언어학자(소쉬르)의 저작을 꼼꼼히 읽으면서 현지 조사 경험의 대응 방법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73-7)


"(언어를 랑그la langue, the language와 파롤la parole, the speaking로 구분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출현은 19세기에 갈수록 쇠퇴하던 언어학 연구를 해방시켰다.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 이전 언어학이 처했던 곤경이 당시 그가 느끼던 인류학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시절 언어학자들은 세계의 수많은 언어를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풍부한 자료를 집적했다. 그러나 물밀 듯 밀어닥친 언어 자료는 점차 언어학자들을 질식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언어 자료를 어떻게 정리하고 연구를 진척시켜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소쉬르는 명확한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현상인 파롤 안에서 헤매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현상이 제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언어학의 핵심으로 이끌 수 없음을 강조했다. 서로 다른 언어의 구조를 정리하고 채택해 초언어적 거대 구조를 탐구하는 것, 즉 대문자적이고 궁극적인 랑그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소쉬르가 제기하는 바였다."(80-1)


4장 시처럼 모호한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하나의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그것은 윌컨이 말한 '단호하고 창조적인 청년 시절의 글'과 '힘찬 문학적 실험'을 인류학과 현지 조사에 연결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와 같은 문학적 실험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소불위의 문장을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그는 글로 기록하기 어려운 특이한 현상,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정서와 이치 등을 분명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언어와 문장에 대한 깊은 신뢰,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기 위한 천착, 표현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 이것은 본래 시인의 태도이자 시적 추구의 태도다." "레비스트로스는 활자라는 시인의 무기와 시인의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보고자 하는 것, 경험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경험과 모험으로부터 가져와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다른 인류학자의 그것과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89-91)


5장 개별 현상과 기본 구조 사이를 오가다


"실존주의는 existence(실존)라는 개념으로 being(존재)이라는 개념을 대체하려 했다. being이란 추상적인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 개인, 구체적 생활, 구체적 감각 경험을 배제하고, 모든 인간과 사물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며, 집단적 존재 원칙을 관철한다. 반면 existence는 구체적 개인이 구체적 삶에서 획득하는 구체적 감각 경험을 지향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 삶의 가장 구체적인 다종다양한 선택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철학이 해석하는 being은, 그것이 아무리 논리정연할지라도 일상의 구체적 상황과 조건에서 맞닥뜨리는 인간관계, 도덕, 삶과 죽음 등과 관련한 중대한 결정을 도와줄 수 없다. 실존주의는 구체적인 존재와 용감하고 결연하게 대면하려 한다. 실존주의는 기존 철학적 문제의 경중과 완급을 뒤바꿔 개인, 개별성, 현재, 변화하는 현상 등을 인간의 본질, 전체성, 영원, 불변의 원리 따위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더욱 사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본다."(114)


"카뮈의 『이방인』은 추상적 본질적 규정에 의존하지 않은 채 느끼고 반응하는 인간을 묘사한다. 그것은 그만의 '실존'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의 실존을 직시하려 하지 않고 홀대한다. 그들은 추상적 본질에 따라 그를 바라보고 통제하며, 자신의 실존을 포기하고 추상적 본질을 흉내낼 것을 그에게 강요한다. 카뮈가 볼 때 이는 부조리하다. '개성'은 응당 '공통성'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개성의 횃불'이 가장 크게 타오르던 시기에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 사상계에 나타나 냉정하게 실존주의의 열기를 잠재웠다. 레비스트로스는 재차 공통성을 내세웠고, 구조 개념을 통해 인간의 시선을 개인과 구체적 '실존'에서 공통적이고 체계적인 원리로 이끌었다." "구조주의의 약진은 실존주의가 일으킨 개인주의와 다원주의의 광풍을 수습했고, 사람들에게 〈인류 사회의 유희, 몽상과 망상은 개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떤 관념의 저장소에서 선택된 몇 가지 조합물〉임을 일깨웠다."(115-6)


# 구조주의의 양상

1. 영미의 구조기능주의 :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으며, 서로 연관된 이 현상들을 조직해주는 '기능'을 발견하면,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를 아울러 발견할 수 있다.

2. 프랑스의 구조주의 : 변화무쌍한 언어 배후에 모든 언어를 관통하는 몇 가지 기본 구조가 존재하듯이, 변화무쌍한 인류 사회와 문화 현상은 몇 가지 기본 구조의 파생과 변화의 결과물이다.


"구조주의로 인해 후에 포스트구조주의가 생겨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무엇인가?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절차를 뒤집어, 현상에서 구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만 현상을 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인간은 현상의 진면모에 가닿거나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구조의 개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구조의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왜곡 속에서 살아가야 할 숙명을 영원히 짊어져야 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 내부의 구조를 발굴했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언어 속의 모든 단어와 의미 사이의 관계─보다 폭넓게 말하면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 사이의 관계─를 분석해 그것이 모두 언어의 구조에 의해 규제되고 결정된다는 점을 밝혔다. 우리는 구조가 발견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진리란 특정한 구조 속의 의미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일 뿐이다. 특정한 구조의 견제를 받지 않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117)


6장 인류학자는 창조자다


"1955년 『슬픈 열대』가 출판되었을 때, 사르트르와 실존주의는 지성계의 최고봉을 점하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했지만, 인간이 살아야 할 이유 그리고 인간이 과거에 습관적으로 의존해 왔던 바를 제거해 버렸다. 사르트르의 철학에는 고도의 비판성과 부정성이 있었고, 그 부정과 전복의 제거는 긍정과 구축과 창조를 멀리 뛰어넘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와 카뮈를 포함한 여타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이 오랫동안 의지해 왔던 것들을 과감히 제거해 버렸다. 받침목도, 지팡이도, 손을 짚을 난간도 모두 빼앗아 버린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제공했던 과거의 모든 외적 조건을 무정하게 깨뜨렸고, 우리는 의지할 데 없는 삶의 낭떠러지에 외로이 서서 모든 불확실성과 위험에 직면해야 했다. 그들의 분석은 훌륭하고, 그들의 표현 역시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주장은 대부분이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도전이었다."(151-3)


"사르트르 자신도 그 엄혹한 시험을 늘 통과했던 것은 아니다. 스탈린 사후, 스탈린의 폭정이 알려진 후로도 사르트르는 계속해서 (코민테른 내 교조파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공산혁명을 신뢰하고 소련 공산당의 태도를 믿었다." "사르트르는 모든 것을 궁구한 끝에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주체성과 자유를 부여했다. 이제 사람들은 그의 철학이 듣기에는 좋지만 실상 허황되다고 느끼게 되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주장과 이론은 이와 같은 시대 배경에서 인간이 그토록 초조해할 필요도, 모든 것을 스스로 모색하고 결정할 필요도 없음을 알려 주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와 실존주의에 거리낌 없이 대응했다. 〈미혹되지 말자. 인간이 어디 그렇게 자유로운가. 당신의 행위는 구조의 한계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이 자유로운 선택이라 여기는 것은 모두 구조적 해석이 가능하다. 소란 떨지 말자. 더 이상 자신의 초조함을 세계적 진리로 확대하지 말자!〉"(153-5)


"인류학을 수학이나 음악에 비유함으로써 레비스트로는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희극적으로 부각시켰다. 그는 인류학자는 수집가여선 안 된다고, 바로 창조자creator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집이라는 행위는 인류학자가 자신의 사회문화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주는 과정일 뿐이다. 다양한 사회와 문화를 관찰하고 그에 관해 수집함으로써, 인류학자는 자신이 몸담았던 사회와 문화로부터 벗어나 해방되어 인류 경험의 대양大洋으로 진입한다. 그 대양은 특정 문화나 사회가 아니라, 인류학자가 모든 안락한 문화와 사회에서 벗어난 뒤 스스로 창조해 낸 '초문화적'trans-cultural 이해 지평을 말한다. 그것은 구체적 문화 현상에서 뽑아낸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규율에 의해 구성된 공간이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다양한 문화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은 구조를 발견하기 위해 부득이 거쳐야 할 노정이지, 그 자체가 인류학 연구의 목적은 아니다."(159-61)


7장 대지식


"통합적인 묘사나 정의가 그러한 구성원이나 현상을 처리하기 곤란할 때, 우리는 별 수 없이 일일이 나열하는 방식으로 분류된 집단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묘사는 집단의 유사성을 다룬다. 묘사는 언어나 문자를 통해 그 집단의 공통점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리스트가 다루는 것은 집단 안의 차이성이다." "따라서 묘사와 리스트의 관계는 '원리'와 '현상'의 관계와 닮아 있다. 원리를 발견하면 우리는 현상을 공통된 원리의 묘사에 통합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상황에서 묘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재차 리스트로 돌아가게 된다. 첫 번째 상황은 사물의 차이가 거듭 환원될 수 없으며, 환원하려 하면 그 역할이 상실되는 경우다. 가장 좋은 사례가 바로 원소주기율표다. 100여 개에 달하는 화학 원소는 도표로 열거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원소로서 다시 분리될 수 없는 기본 물질로 제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176-7)


"또 다른 상황은 이렇다. 즉 우리는 주관상 각 구성원의 독립성을 제거하는 것에 저항하고, 의도적으로 리스트를 통해 차이가 존재함을 깨달으며, 그것을 존중하려는 태도를 지닌다. 이 상황을 보여 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상단에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군의 이름이 가득 새겨진) 베트남전 기념비이다. 이 거대한 리스트는 하나의 묘사, 하나의 거대한 분류 속에서 축소되고 상실될 뻔한 살아 숨쉬던 개체들의 개별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리스트의 특수한 의의이자 작용이다. 그것은 개체와 차이를 보존하는 동시에 두드러지게 한다. 열거식 리스트는 겉보기에 매우 가지런하고 형식상으로도 일정하다. 그러나 에코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운다. 그처럼 가지런하고 일정한 형식의 외관은 일종의 가상假像이다. 그 안에는 통합적 이성에 의해 수용된 길들여지지 않은 차이들이 숨겨져 있다. 리스트는 항상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이며, 리스트에 수용되지 않은 리스트 바깥의 것을 생각하도록 자극한다."(177-8)


"비록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가장 유명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구호는 본질로부터의 탈피를 요청하는 듯하지만,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사르트르의 철학은 시종 본질론에 머물러 있었다. 사르트르의 사상은 본질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한편 이성을 분석한다. 그런데 분석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분류와 묘사를 해야 한다. 우선 문제와 분석 대상을 묘사한 연후에야 비로소 분석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석에 활용되는 그러한 묘사는 총체적 이성에서 나오는 묘사이기에, 그 자체로 이미 본질론적이다." "상대적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사상 모델은 '유비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서술한 시장처럼) 분류를 통해 '동류'同流의 현상을 한데 모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도 서로 완전히 동일할 수 없음을 수시로 관찰하고 인식하여 단지 상호 간의 유사성에 의지해 그것을 한데 모아야 한다. 즉, 묘사가 아닌 리스트를 통해 현실의 현상을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유비적이라 할 수 있다."(180-1)


8장 야생적 사고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사고가 '신석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야만인의 숙고'와 함께 '수공예 장인식 연구 방법'을 제시했다. 이 둘은 서로 표현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는 동일하다. 분류와 분업에 반대하고 그 이외에 인류 지식을 조직하는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자신의 이론적 필요에 따라 재료와 도구를 직접 찾거나 만드는 작업 방식을 말한다. 현대 과학 이성의 분류 원칙에 따르면, 그러한 재료나 도구는 각기 다른 분과 학문에 속해 있으며 서로 다른 연구 성격을 띤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그러한 분류를 따르지 않았고, 그 자신의 '수공예적' 필요와 유비적 원칙에 따라 여기저기서 재료와 도구를 탐색해 독특한 지적 학문적 체계를 수립했다. 그것은 복제할 수도, 어떤 부류에 포함시킬 수도 없는 거대 이론이었다. 어떤 수공예 장인이 일생을 바쳐 손수 만들어 낸 공예품처럼, 그의 이론은 현대 학술 분업 체계에 편입시킬 수 없는 독특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186-8)


"〈뇌를 먹어 머리를 좋게 한다〉거나 〈간을 먹어 간을 보양한다〉는 전통 관념은 모두 전형적인 유비적 사유에 해당한다. 동물의 뇌와 간과 사람의 뇌와 간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데 묶어 일련의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확정, 중복, 예상 가능한 인과관계만을 인정하는) 과학 이성에 비춰 볼 때 얼토당토 않은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탐구하려 했던 총체적 의미, 구조 등은 부분적으로 엄격한 인과론으로 수립될 수도 없고, 그것으로 분석하거나 증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증명할 수 없고 인과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총체적 의미와 구조의 존재 그리고 그 중요성을 부정하기를 거부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의미와 관계가 과학 이성의 분석이나 인과적 추론만으로 모두 설명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야만인, 신석기시대, 수공예 장인의 사유와 그것들이 세계를 보는 시각을 활용했고, 또 그것들을 수호하려 했다."(188-90)


"과학은 끊임없이 사실을 절단하는데, 많은 사실을 절단하고 분석할수록 더욱 예리해지고, 예리해질수록 더 많은 사실을 절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예리해져 많은 사실을 절단할수록 과학은 본질로부터 점차 멀어진다. 반면 물고기나 벌처럼 과학의 성질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생존 조건을 파악하는 것, 즉 냄새, 깊이, 무게, 명암을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사물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라 할 수 있다. 〈야만인의 신화나 상징〉도 그러하고 〈화가, 시인, 작곡가의 작품〉 역시 그러하다. 절단의 방식이 아니라 상반된 것을 혼동함으로써 수립한 〈가장 기본적이고 유일한 지식〉이야말로 바로 〈보다 고차원적인 지식〉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특이하게도 문학예술을 문명 속에 보존된 야만의 특별한 일부라고 보았다. 야만, 야성의 비분석적 사유는 과학 이성으로 뒤덮인 환경에서도 문학이나 예술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201-2)


9장 신세계로 나아가다


"야만에 관한 설명 방식 중 하나는 그곳에는 전기도, 수도도, 장미 정원도 없고 '시詩'도 없다는 것이다. 즉 문명의 성취, 문명의 이기利器가 결여된 것이 바로 야만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와 20세기 초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이러한 대조를 뒤집었다. 야만에 있는 직관, 공포, 활력, 리듬, 자연스러움이 문명에는 전혀 없다고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묻는다. 현대 문명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야만의 요소나 특질이 정말 오로지 야만에만 있으며, 그것은 문명과 공존할 수 없는가?" "그는 야만의 요소와 특질 중 상당 부분이 인류 공통의 자산이라고, 다만 문명에서는 배제되어 보이지 않거나 식별이 어려운 여타 형태로 변형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세대의 임무는 일상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후미진 곳을 들추거나 겹겹이 쌓인 안개 속을 헤쳐 야만과 문명 사이의 공통된 부분, 즉 전체 인류에 속한 총체적 의미와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다."(209-10)


10장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 인류학의 주요 분과

1. 고고학

2. 체질인류학 :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고대의 유해와 체질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는 분야

3. 사회인류학(문화인류학) : 특정 사회와 문화에 관한 자료를 정리, 귀납, 분석, 해석하는 분야

4. 민족지 : 특정 사회와 문화에 관한 자료를 조사, 수집, 기록하는 분야


"본디 민족학은 모든 야만 문화를 서구인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진화론의 거대 계보 내에서 평가하고 자리 매겼다. 그들에 의하면, 인류는 막 탄생한 0점 단계에서 진화를 거듭해 현대 유럽에 이르러 100점 단계에 도달했다. 이 과정은 대단히 길고 연속적인 계보를 형성한다. 이에 기초하여 민족학자들은 자연스럽게 눈앞의 부락을 평가했고, 도구, 공예, 조직, 자연신에 대한 신앙 등 각종 척도를 사용해 그들의 진화가 어느 지점에 이르렀는지 탐구했다. 민족학이 민족지로 전환되면서 이러한 척도는 한쪽으로 밀려났다. 민족지는 문화의 내적 의미를 강조하며 모든 문화가 서로 다른 내적 의미 체계를 지녔음을 부각했고, 각 문화를 '진화 정도'에 따라 비교하는 태도를 배제했다. 민족지학자는 먼저 해당 문명의 내부로 최대한 진입해 그것을 상세하게 기록하고자 했고, 겉으로 드러난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 사상과 그것이 외적 행위와 맺는 관계 모두를 기술하려 했다."(235-6)


"모든 문화에는 저마다 자신의 체계에서 당연시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 당연시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민족지학자나 민족지 조사와 기록 훈련을 받은 인류학자는 〈현대 생활을 인류 생활의 보편적 규범이라 여기는〉 잘못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활동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와 같은 길을 따라 더 먼 곳까지 이르렀다. 그는 모든 본성과 천성에 대한 논의는 '지식/권력'이 작동한 결과물이며, 가장 큰 권력은 진리를 구축하는 권력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볼 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을 진리로 격상시킨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에 부합하지 않는 현상을 배제하고 자신의 생활이나 습관을 진리로 드높여 차이를 제거하거나 억압한다. 레비스트로스는 푸코처럼 극단적인 입장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를 포함한 당시의 많은 인류학자가 인류 행위에 대한 기존의 보편적 준칙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246-7)


11장 이원 대립: 레비스트로스 사상의 핵심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생각하기 좋은 것'good for thinking이 가장 중요하다. 그가 볼 때 특정 문화의 감각적 선호는 내재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세계 분류로부터 결정된다. 카두베오족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신체 그림은 표층적인 시각적 즐거움보다는 심층적인 세계관과 이상理想에 의해 결정된다. 신체 그림의 도안은 그들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내포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진정 'good for looking'(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good for thinking'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훗날 『신화학』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날것과 익힌 것'의 기본 대립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우리에게 전한다. 특정 문화에서 어떤 음식은 먹을 수 있고 어떤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여기는 기준은 미각이 아니라 그 배후의 세계 분류 의식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음식이 사람들에게 맛있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good for eating'(먹기 좋은 것) 때문이 아니라 'good for thinking' 때문인 것이다."(258)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으로 돌아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원적 철학 분석 체계가 레비스트로스의 가장 근원적인 문화 관찰 방법의 배경이 되었다고." "이분법 또는 이원론은 사물을 두 측면으로 나누는데, 이 두 측면이 서로 맺은 다양한 관계는 레비스트로스가 가장 좋아하고 또 가장 잘 운용하는 문화 해석 양식이자 그가 보기에 가장 근본적인 문화적 이미지였다. 인류 문명의 오묘함은 어떻게 그 이원성을 운용해 두 측면을 서로 협력시키거나 대립시켜 보다 고차원적인 새로운 이원 관계를 형성하는가에 있다. 즉 대립 속에 존재하는 협력, 협력 속에 존재하는 대립이 서로 나선형을 그리며 상승해 보다 높은 차원의 이원적 조합을 이루는 것이다. 인류 문명의 모든 기제는 서로 층위가 다른 이원적 대상들의 운동에 포함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 이론의 핵심 역량인 동시에 치명적인 결함은 그 이분법적이고 이원로적인 개념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265-70)


12장 앞을 계승하고 뒤를 잇다


"특히 말리노프스키 이래 인류학은 객관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인류학자의 현대적 편견을 억제하려 했다. 그리고 인류학자에게 멀리 떨어진 야만 문화를 '여실히' 기록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기억이 이후의 경험이 미치는 간섭을 배제할 수 없는 것처럼, 야만에 대한 기록 역시 현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아가 현대의 간섭을 의식하기 때문에, 우리는 도리어 그와 같은 야만 문화의 특수성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후대의) 드뷔시 음악이 일찍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쇼팽 음악의 의미를 도드라지게 했던 것처럼, 현대 문명은 야만인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객관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야만 문화의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다." "이 역시 현대적 편견인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을 통해 야만에 가치와 존엄을 부여한 정의正義다. 그것은 '시학적 정의' 혹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 할 수 있다."(295-6)


13장 먼 여행의 의의


"인류학자의 여정은 출발 전에 이미 결정된다. 대다수 인류학자는 미리 설정된 틀에 따라 탐사의 의의가 높다고 여겨지는 지역으로 떠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달랐다. 그는 여정 중에 억누를 수 없었던 감정을 진실하게 써 내려갔다. 외딴 곳은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다. 외딴 지역에 반드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그는 그 지역에서 끊임없이 익숙한 현상을 발견했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으며, 심지어 자신을 저주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인류학자들은 자신의 기대가 어긋난 데서 오는 실망감과 허무함을 진실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레비스트로스의 내면에 이미 인류 문화를 하나의 총체로 이해하려는 신념이 줄곧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인류 문화의 구조와 총체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그 구조와 총체적 의미를 발견하고 증명하려 한 것이지, 그들의 문화에서 상이한 면모를 발견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308-9)


"레비스트로스는 고백한다. 진정한 인류학자는 첫 번째 현지 조사를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 후 다시 현지 조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한 번은 꼭 가 봐야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한 번의 여행으로 특별한 현상에 대해 가졌던 매혹에서 빠져나와 다양한 현상의 한계와 시시함을 냉정하게 꿰뚫어 보고 인류학의 진정한 목적을 발견했다면, 그는 앞으로 탐구해야 할 대상을 원래 살던 환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즉 그는 이제 자신이 살고 있는 익숙한 환경에서도 구조를 볼 수 있는 안목과 재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니 다시 여정을 떠날 이유가 있겠는가? 또다시 현지 조사를 떠나는 인류학자는 여전히 기이한 현상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그 현상의 한계와 시시함을 간파하지 못한 사람이다. 반면 문화와 사회 현상의 유한성을 간파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구조인류학자가 될 수밖에 없다."(313-4)


14장 부단히 확대되는 구조


"레비스트로스 이후 라캉의 구조주의 정신분석이 등장했다. 라캉은 레비스트로스가 언어학에서 차용해 인류 문명을 분석한 방법으로 개인 심리와 정신을 연구했다. 라캉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의 정신은 고정된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구조는 외부에서 온 자극을 유형화하고 정리하도록 우리를 지배한다. 또한 그러한 작용은 임의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개별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라캉은 구조언어학과 구조인류학이 고찰한 집단 현상의 기초를 더 파고들었다. 그는 인간이 언어 구조와 문명 구조를 집단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각 개인의 내부에 그러한 정신 구조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 정신 구조가 그와 같이 유한한 구조 형식 속에서만 인간이 감관과 심리 정보를 다루도록 제한하기 때문에 인간과 외부 세계의 관계 양상은 무한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류는 오로지 유한한 형식하에서만 사회와 문명을 구축할 수 있다."(330)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예로 푸코의 구조주의 지식사智識史가 있다. 푸코는 구조주의의 핵심 주장을 받아들여 〈관계가 어떠한 개별 구성원이나 개별 요소보다 중요하다〉고 보았고, 이러한 원칙을 통해 지식을 재정리함으로써 기존과는 구별되는 지식사를 수립했다. 그는 분리와 구분의 방식으로 지식을 보지 않았다. 즉 그는 철학, 문학, 예술, 역사 등의 분과를 구분해 연구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지식 사이의 관계에 주목했고, 지식의 생산에서 성립까지를 결정하는 구조의 연구에 가치를 두었다. 푸코는 이러한 연구를 '지식고고학'이라 불렀다. 그는 칸트, 헤겔, 피히테 등 철학자를 시간순으로 나열해 사상의 변화를 고찰하지 않았다. 마치 고고학자가 유적지를 발굴하듯, 하나의 층위에서 발견된 모든 사물을 하나로 연결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분석을 거쳐 푸코는 서로 다른 지식 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요소가 바로 '권력'임을 밝혀냈다."(330-1)


# 그 외 : 롤랑 바르트의 문학구조주의(문학작품이란 심층적인 언어 문법과 문화 문법 간의 상호 교차의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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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유유 서양고전강의 5
양자오 지음, 조필 옮김 / 유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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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권과 분권 사이에서 계속된 실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설계하고 배치한 정치 제도 가운데 핵심 내용 하나는 '각 주 분권제'입니다." "영국의 상하원은 귀족 제도의 유산으로, 국왕의 지위를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하원은 국민이 투표해 선출하지만 상원은 명예직으로 임명됩니다." "그러나 미국의 상원과 하원은 연방 정부와 각 주의 권력을 나누기 위해 안배된 것입니다. 하원은 인구수에 따라 선출하는데, 전 미국 3억 인구를 400여 개 선거구로 나누고 선거구마다 하원 의원을 한 명씩 뽑습니다. 모든 하원 의원은 동등하게 국민의 뜻을 대표합니다. 그렇다면 상원은 어떨까요? 상원에는 모두 100개의 자리가 있습니다. 50개 주에서 각 주마다 두 자리씩 할당됩니다." "땅이 넓고 인구가 많고 경제가 발달한 큰 주를 위해 작은 주가 자기의 이익을 희생하지 않도록 한 거지요. 연방법은 상원의 인준을 받아야 법률이 됩니다. 따라서 큰 주는 작은 주의 반대를 무시하고 법을 만들 수 없습니다."(36-8)


# 선거인단 제도 역시 각 주 분권의 원칙 아래 유지되고 있다.


"민주주의 원칙을 가진 연방제에 기반하고 있는 미국은 또 다른 방향에서 국가의 정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국가를 조직할 때 변화를 가함으로써 (아래층이 위층에 예속되어 있던) 일반적인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 충격을 준 겁니다." "미국의 제도는 다른 종류의 조직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조직 원리도 철저하게 뒤집어 놓았습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은 국가를 이루는 형식을 결정합니다. 권력의 분배와 지배가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이루어집니다. 각 지방의 주민 회의에서 어떠한 형태의 주 정부가 필요한지, 어떤 사무를 주 정부가 관할하도록 할지, 또 어떤 사무는 주 정부에서 개입하거나 침범할 수 없는지를 결정합니다. 각 주의 주 의회와 주 정부는 연방정부의 권력 범위와 권력 집행 방식을 결정합니다. 이러한 국가는 미국 이전에는 이론으로만 있었지 현실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45-6)


"대통령제는 미국 민주주의의 특수한 발명품입니다." "연방 정부는 직접 미국 시민을 통치하지 않고, 또 시민이 선출한 대표가 연방의 권력을 행사하도록 해서도 안 됩니다. 연방 대통령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각 주 정부 사이의 조정자이고, 연방 정부의 역할은 각 주 정부에 봉사하는 것이지 미국 시민을 통할統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연방 대통령의 역할은 어쩔 수 없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대외적으로 미국의 대표이고 연방군을 지도할 책임이 있는 데다 주 사이의 업무를 총괄하는 사람입니다. 각 주가 여러 가지 사정상 쉽게 인식을 공유하지 못하면 현실적으로 대통령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연방의 조직력을 이용해 그 결정이 관철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설계가 어찌 됐든, 대통령이 된 사람의 태도가 어떻든, 미국 연방이 존재하고 운영되며 발전하려면 대통령의 권력을 갈수록 강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48-9)


"연방에는 연방 헌법이 있고, 각 주에는 각 주의 헌법이 있습니다. 또한 각 주의 독립적 권력 범위에 속하는 수많은 법률과 제도가 규정되어 있어서 연방은 이를 침범할 수 없습니다." "각 주를 독립된 단위로 보는 분권제는 역사적으로 엄청난 역할을 했고, 미국이라는 방대한 규모의 나라에 민주주의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연방과 각 주 사이에는 복잡하게 밀고 당기는 집권集權과 분권 관계가 존재합니다. 상대적으로 주 정부와 그 아래 있는 시나 카운티 정부 사이에도 비슷한 집권과 분권의 변증 관계가 있습니다. 분권 덕분에 민주주의가 실현되어 모든 시민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집권 덕분에 국가는 그 방대한 규모를 유지하면서 붕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0여 년간 미국은 집권과 분권 사이에서 실험을 지속해 왔습니다. 실험의 성패는 미국의 성쇠뿐 아니라 민주주의 제도의 효과와 타당성을 결정했습니다."(55-8)


2 미국에 온 두 프랑스인


"미국이 발흥하기 전 유럽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역사성을 띠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뇌리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은 어떤 현실의 국가나 정권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로마 초기의 공화 제도였습니다. 역사에서 얻은 지식에 따라 유럽인은 민주주의가 작은 정치체에만 적용될 수 있다고 보편적으로 믿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납니다. 이어서 미국 헌법도 나타나지요. 북미 신대륙에서는 유럽의 상식에 어긋나는, 상대적으로 방대한 토지와 많은 인구를 민주적 방식으로 조직하고 다스리고자 하는 정치 실험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토크빌이 책을 쓴 1830년대에는 대규모 민주 공화제가 가능하다는 미국 정치 실험의 성과가 기본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는 정치 문제를 두고 반드시 미국의 경험을 철저히 새롭게 생각해 봐야만 했습니다."(63-6)


"토크빌이 보기에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 사이의 선택은 이미 흘러간 역사가 됐습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민주주의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혼란으로 점철되고 폭력과 비이성이 충돌하는 민주주의냐, 아니면 조금이나마 질서와 도덕이 있고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안배할 수 있는 민주주의냐." "토크빌이 쓰고자 한 것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미국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인에게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미국의 민주주의 경험을 기본으로 삼아 프랑스인이 거기에서 배우도록 돕고 미래에 반드시 가야만 하는 민주주의의 길을 준비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토크빌이 책을 쓴 진정한 의도이고, 우리가 200여 년 뒤인 지금 이 책을 읽을 때도 여전히 기억해야 하는 전제입니다."(88-90)


3 미국의 두 가지 키워드 이해하기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쓰고 출판한 시기는 19세기 초이므로 당시 주류였던 '진보 사관'을 반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토크빌 또한 인간이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가장 뚜렷한 진보의 표지는 평등이었습니다. 인간이 진보한다는 믿음을 가진 것은 그도 당시 절대다수 유럽인과 마찬가지였는데, 진보의 초점을 평등에 맞춘 것이 그만의 독특성이었습니다. 사실 토크빌은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가치관을 제시한 것입니다. 불평등은 좋지 않다, 불평등은 원시적이고 낙후한 것이다, 평등만이 진보다, 이로 인해 인류는 끊임없이 원시적이고 낙후한 불평등한 상태에서 진보한 평등의 상태로 점차 나아가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행한 진보 사관이 없었다면 토크빌의 논증은 발 딛고 설 수 없었을 테고, 의심받고 논파되기 십상이었을 겁니다. 토크빌의 책이 당시 진보 사관을 믿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96-9)


"토크빌의 기본 관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귀족은 기본적으로 토지가 희소해 발생한 경쟁 상황에서 나타난, 토지를 확보하고 장악하는 자였습니다. 귀족의 토대는 토지에서 나온 이익이었지요. 토지가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충분히 많은 토지를 확보하고 장악하는 사람은 땅이 없는 사람에게 땅을 빌려주고 그가 농사지어 얻은 성과를 앉아서 편히 받아먹습니다. 이렇게 부를 모은 사람은 그 부를 권력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까지 얻습니다. 귀족의 권력은 그 뿌리를 파헤쳐 보면 토지, 정확히는 토지 부족에서 온 것입니다. 신대륙에서는 이렇게 토지로 인한 귀족이 생겨날 수 없었습니다. 토지가 너무 많고 컸으니까요." "미국은 토지 귀족이 없는 상황에서 세워진 나라이고 건국 후에도 일정 시간 동안,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쓰고 있을 때까지도 토지가 부족하다거나 토지를 빼앗는다거나 토지 자원을 독점한다든가 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108-9)


"두 번째 키워드는 청교도입니다. 청교도의 종교 신앙과 교육적 태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아이들이 정확한 행동, 그러니까 규칙을 잘 따르고, 교리문답을 암송하며, 예배법을 익히도록 하는 데에서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내면의 진실한 신앙을 더욱 중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겉으로 꾸민 행위나 의식에 극도로 민감했습니다. 그들은 교육이 내면에 파고들어서 아이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근본적인 가치관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지 불과 16년 만에) 신학교를 세운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북미 대륙에 온 사람들이 청교도가 아니라 생활이나 경제적 동기로 온, 남미 대륙의 식민 침략자 같은 이들이었다면 그들은 신대륙에 머물려고 고집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울러 청교도들이 그토록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들의 무리를 유지하고, 자신들만의 강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겁니다."(117-8)


4 현실 속의 민주주의


"은근함, 실용성, 과장하지 않음, 뽐내지 않음 같은 청교도의 기본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토크빌이 말한 (미국의) 민주주의의 특색입니다. 종교 이민자가 세운 뉴잉글랜드에서는 큰 교회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규모가 큰 교회 자체가 소수인데, 그마저도 훗날 가톨릭교나 영국 국교회에서 지은 교회입니다." "북미 식민지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없습니다. 그러나 토크빌은 이렇게 일깨웁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채가 사라지면 그와 함께 비참한 생활도 사라진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채를 지닌 프랑스 사회에는 빅토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이 공존한다.〉 광채와 비참은 서로 손을 잡고 함께합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사회를 프랑스의 귀족주의 사회와 비교하면 광채가 줄어든 만큼 비참도 줄어듭니다. 귀족의 영광은 없지만 귀족의 발아래 밟힌 비참한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도 없습니다."(127-9)


"토크빌은 일방적으로 민주주의를 찬미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상반된 양쪽 관점의 균형을 맞춥니다. 그가 비교하는 내용을 보면 우리는 토크빌이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평가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중간의 좋음과 선량을 만들어 내면서 가장 탁월한 부분과 가장 사악한 부분을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는 토크빌 자신이 귀족 가문 출신이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귀족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즐거움을 누린 사람이었고, 이 신분을 지니고 반세기나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사회를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민주주의는 그들이 누렸던 화려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없앨 테지만 상대적으로 평등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결국 민주주의는 비교적 정확하고 수지타산이 맞는다고 본 거지요. 민주주의는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섭리적 사실'이라고 생각한 겁니다."(133)


5 두 가지 자유를 구분하다


"프랑스 대혁명은 악독한 징세인의 폐단과 정부의 불가사의할 정도로 엄청난 무능에서 비롯됐지만 그러한 혁명의 열정 속에는 또 하나의 갈망, 곧 유능한 정부, 그럴듯한 정부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갈망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구호로 수용되지 않고 무시됐지만, 당시 현실에서는 자유, 평등, 박애와 똑같이 중요했습니다. 혁명의 충동, 집단적 열정이 격앙되는 와중에 사람들은 자유, 특히 고도의 개인적 자유와 유능한 정부라는 이 두 가지 요소가 기본적으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유능한 정부는 먼저 공공질서를 만들어내야 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개인 행위를 구속함으로써 개인 행위가 집단이 추구하는 목표에 합치되도록 요구합니다. 집단에 유리한 일이 반드시 개인에게도 유리하리라는 법은 없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집단의 이익을 창출할 수 없습니다."(149-50)


"토크빌은 자유를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자연적 자유natural liberty, 다른 하나는 시민적 자유civil liberty, 또는 공민적 자유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발생한 모순과 충돌이 대단히 컸던 까닭에 프랑스인은 그들의 구호 중 자유를 자연적 자유, 곧 구속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는 자유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혁명 전의 사회에서 수많은 불합리한 제한과 압박을 받았고, 혁명으로 이 제한과 압박을 깨부쉈으므로 그 결과 모두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토크빌은 미국은 자유로운 국가이지만 미국인이 자기 국가에서 누리는 자유는 결코 자연적 자유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미국인의 자유는 처음부터 영국인에게서 쟁취한 것, 곧 시민적 자유, 공민적 자유라고 본 것입니다." 청교도 윤리를 내면화한 미국인들은 자기 멋대로 하는 자연적 자유가 아니라 엄격한 도덕의식의 제한과 관리를 받는 자유를 원했습니다.(154-5)


6 섬세한 삼권 배치


"미국이 독립전쟁에 이긴 걸 두고 감탄할 필요는 없다고 토크빌은 말합니다. 핵심을 놓쳐선 안 된다는 거지요. 미국인에게 감탄할 대목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라고 말합니다. 영국인에게 맞서 독립전쟁을 치를 때 13개 주는 임시로 합쳐서 외교와 군사 영역에서 함께 행동합니다. 전쟁에서 이겼고, 적은 사라졌습니다. 이젠 더 이상 뭉쳐야 할 이유가 없었지요. 그러나 지혜롭고 용기 있는 미국인은 국가를 세운 지 10년 후 국가 성립의 기본 원칙을 전면적으로 재고하기로 결정합니다. 국가의 대강령과 가장 중요한 법을 다시금 설계하기 위해 잠시 멈추어 2년이라는 시간을 씁니다. 당시 북미에서 가장 똑똑한 두뇌, 가장 정직한 인격을 모아 미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합니다. 그 내용을 13개 주에 전달하고 일일이 투표를 거쳐 통과시킵니다. 이 작업의 의미는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능가한다고 토크빌은 주장합니다."(181)


"삼권의 구조를 다루며, 토크빌은 책에서 가장 먼저 헌법에 대해 말한 후 삼권을 나누어 이야기합니다. 처음으로 논하는 것은 사법이고 그 다음은 입법이며 마지막으로 행정을 다루는데 이 순서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간단하고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미국에 가서 조사하려 한 것이 사법에 속하는 감옥 행정이므로 당연히 미국 사법에 가장 익숙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심층적인 이유는 토크빌이 삼권 가운데 사법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가장 특수한 정신은 법에 의해 통치하고 관리한다는 정신이므로, 위계 또한 법률이 가장 높고 모든 법률 중에서도 헌법이 으뜸이라는 것이지요. 주의할 것은 헌법은 진리가 아니므로 수정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만 정해진 순서에 따라 수정하기 전까지 헌법은 국가 정치상의 진리입니다. 이는 또한 매우 중요한 자리매김으로, 예전의 인류 정치사에는 이런 경우가 없었습니다."(185-6)


"이론상 의회는 언제든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희롱하듯이 불시에 대통령을 희롱하면서 '엄중한 행위'에 걸릴 만한 온갖 이유를 대 대통령을 번거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 사이에서 움직이는 핵심 요인이 바로 정당입니다. 미국 헌법은 숱한 문제를 낳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헌법상 규정하지 않은 중요한 문제 중 큰 부분을 정당이 처리합니다. 예컨대 행정권과 입법권은 헌법상 날카롭게 대립합니다. 이 둘의 관계는 수많은 충돌 가능성을 품고 있지요. 그러나 미국의 실제 민주주의 운용에서는 그렇게 많이 충돌하지 않습니다. 정당이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중재하고 조정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과 집권당의 밀접한 이익 관계는) 헌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현시에서 권력 분배에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192-3)


"미국의 민주주의는 청교도 전통에서 발원했습니다. 하지만 민주 제도가 건설된 후에는 점차 한 걸음씩 청교도 전통 외의 것으로 독립해 발전했습니다." "민주주의가 미국에서 세워진 것은 여러 가지 역사적 우연에 기대고 있지만 민주주의가 다른 제도와 차별되는 지점은 바로 이 민주주의가 모든 인류가 설계한 정치 제도 중 자기 수정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원래 고도로 동질적인 성격을 가진 집단에서 생겨났지만, 민주주의는 다원적인 발전 가능성이 열려 있고, 다원적인 사회에 맞추어 변화합니다. 사회가 다원화할수록 직접 민주주의는 공감대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민주 제도는 점차 대의적인 성격이 강해졌고, 대의를 통한 정책 결정의 범위도 갈수록 넓어졌지요. 이러한 내재적인 수정은 민주주의의 일부입니다. 미국에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그 범위를 넓혔고, 넓힐 때마다 민주주의 내부의 시스템도 조정됐습니다. 이것은 미국 역사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입니다."(194-5)


7 사회학적 시각


"『미국의 민주주의』 2권에서 토크빌은 평등과 관련된 두 가지 문제를 설정하고 분석합니다. 첫 번째 문제는 평등과 민주주의에 어떠한 사회 기초가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폭과 둘레는 바로 사회 전체이고, 따라서 민주주의에는 특정한 사회 기초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좀 더 큽니다. 정치에서 민주 제도를 채택하면 사회에 어떠한 효과를 만들어 낼까요? 어떤 사회가 생겨날까요? 토크빌의 분석은 여전히 미국과 프랑스를 대조하며 진행됩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관점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곧 '민주주의는 혁명에서 온다'는 관점입니다. 말하자면 혁명이라는 수단으로 원래 있던 비민주적인 정치 구조를 깨뜨린 후에야 그 공간을 민주주의로 대체할 수 있고, 혁명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관점이지요." "반면 토크빌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미국이 민주주의 사회가 된 것은 미국에서 혁명이 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08-10)


"미국은 프랑스 식의 대파괴, 대소동을 거친 후 민주주의를 이룩한 게 아닙니다. 미국이 건국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겪은 의혹과 전복은 영국 식민지와 관련된 사항이었습니다. 영국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미국인 자신이 갖고 있던 이념과 신앙은 동요하거나 파괴되지 않았고, 되레 강화됐습니다. 공동의 적과 맞서면서 단결 의식이 더 강해졌고, 이 강화된 공동 이념과 신앙에 의지해서 힘을 모아 승리를 얻어 냈습니다." "이처럼 미국인의 표면적인 자유 뒤에는 더 깊고 강력한 공동의 신앙이라는 제약이 있습니다." "단순히 기원을 살펴보면 민주주의가 성립하는 조건은 모두가 상당히 공감하는 공통된 신념을 갖는 겁니다. 개신교는 당시 미국인이 논쟁할 수도, 논쟁할 필요도 없는 공통의 기반이었습니다. 그 사회의 공감대의 범위가 넓었기 때문에 민주주의 실험을 할 유한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겁니다."(210-1)


"토크빌은 이미 언어가 사고의 도구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지가 직접적으로 그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머릿속에 어떤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그 생각을 하는 거라고 여겼습니다. 사람은 언어가 없으면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1830년대에 토크빌은 이미 언어와 사고의 긴밀한 관계를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를 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미국인의 다른 생각과 논리, 사고방식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영어가 미국에 건너간 뒤 변화가 늘어나고 그중 '비기능성'을 띤 변화가 많다는 점을 알아챘습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환경에 처해 새로운 현상을 묘사하고 새로운 사물에 대해 논의하려다 보니 언어에 새로운 부분이 추가됐다는 것입니다. '비기능성'의 변화는 변화를 위한 변화입니다. 곧 변하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지만 미국 같은 사회에서는 변화한 것이지요."(228-30)


"언어와 문자는 집단 규율이 있고 규율을 세우고 양성하는 기제도 있습니다. 평등과 민주의 효과 중 하나는 고정된 전범이 사라진다는 겁니다. 원래 모든 사람이 꼭 읽어야 하거나 학습해야 하는 언어와 문자의 본보기가 없어지거나 또는 원래 본보기가 존재한다 해도 그 규범의 강도가 크게 약화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100여 년 전 미국에서 나타났습니다. 토크빌의 말을 빌리면 이런 상황이 됐습니다. 〈모든 세대의 미국인은 새로운 사람이고 새로운 종의 사람이다. 그들은 옛사람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전범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세대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므로 진정한 구속력을 가진 정전正典, canon이란 것은 사라졌다. 정전이 없으니 내면화되고 일치된 언어 규율이 없어지고, 언어와 문자를 운용하기 위한 연구도 없어지며, 과거 유럽의 정확하고 연구된 언어, 문자와 문학도 없다.〉"(232-3)


8 모든 곳에 미치게 된 '평등'의 효과


"『미국의 민주주의』  2권에서 토크빌은 평등이 왜 자유보다 중요하며 어째서 평등이 사람 마음 속에 자유보다 더 높은 열정을 자극하는지 설명합니다. 이 장에서 대혁명 때 그토록 유명하고 그토록 쩌렁쩌렁 울렸던 구호를 회상하는 내용을 읽노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큰 문제가 떠오릅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대혁명의 구호 중에 '박애'는 어디로 갔는가?" "박애의 문제는 인간의 마음을 위반하는 고답적인 평등의 이상을 가정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행인을 형제로 여기는 것은 선하고 고귀한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상에 불과합니다. 현실에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은 행인을 형제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형제를 행인처럼 보는 겁니다." "대혁명의 교훈은 보편적인 사랑인 '박애'를 보편적인 잔혹, 평등한 잔혹으로 왜곡하고 변형시켰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현실적 능력을 뛰어넘는 부분을 없애고 고고한 이상을 평지로 끌어내리면 평등만이 남아 모든 사람이 같아집니다."(244-6)


"토크빌은 200여 년 전에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각기 다른 모든 영역을 평준화하면 원래 있던 높고 낮음의 구분이 사라져, 구사회에서 볼 때는 높은 곳에 있던 정치 영역이 추락하고 상업, 제조업, 교육 등의 업무와 뚜렷한 차별이 없어지면서 정치 영역이 우수한 인재를 얻을 수 없게 된다고요. 한 사회에서 특별한 재능이 있고 높은 성과를 거둔 사람은 우선적으로 정치 영역에 들어가서 재능을 이용해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하는데, 민주주의 상황 아래의 정치 분야는 이러한 유인 요소가 사라져 좋은 인재를 흡수할 수 없습니다. 토크빌은 200여 년 전에 이 점을 지적했습니다. 경제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은 재능과 품격 면에서 정치 영역의 사람을 신속하게 추월한다고요. 그의 화법은 실로 악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보통 자기 재산을 처리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어야 국가의 재산을 처리할 수 있다.〉"(256)


"토크빌은 특히 인간이 물질을 추구하는 현상을 중시했습니다."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기회를 제한하는 어떤 구조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재산을 늘리고 쌓을 권리와 기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평등한 사회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은 사라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분 차이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귀족, 평민, 승려, 장인, 농부 등이 모두 같아집니다. 그래서 사회의 지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르게 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부러움을 받고 존경을 얻을 수 있는데, 이는 평등한 사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불평등이 됩니다. 민주적인 사회에서 사람들의 신분은 여전히 다릅니다." "형식적인 평등 아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위 고하의 구분, 온갖 시기와 부러움, 차별 대우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재산이 신분을 대신해 사회에서 지위 고하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됩니다."(259-60)


"평등은 고정된 범위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정치권력상 평등한 대우를 획득하면 이러한 평등의 경험은 반드시 다른 생활 영역까지 확장되므로 평등은 고정된 범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평등은 그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평등의 확장력은 일단 긍정적 가치가 되고 나면 모든 불평등에 설명과 해설을 요구하게 합니다. 더 이상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되는 거지요. 이것이 평등이 담고 있는 개조와 진보의 운동 에너지입니다. 평등은 과거에는 평등하지 않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기던 수많은 일에 끊임없이 도전합니다. 평등의 보편성은 갈수록 높아집니다. 토크빌은 보지 못했지만 우리 시대에는 이미 전 인류의 범주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주장이 세워졌습니다. 바로 '인권'입니다. 인권은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기본 권리이며, '사람'이라는 사실 말고는 어떠한 자격 제한도 없습니다. 인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합니다."(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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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Ⅱ - 문명의 수수께끼를 풀다 1915~1939
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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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문명의 해부학자 1915~1939


8장 전쟁과 인간


"메타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심리학 가운데 의식을 넘어서는, 또는 프로이트의 표현대로 하자면 의식 '뒤'에 있는 부분을 해명하려고 계획된 것이었다." "프로이트가 1915년에 '억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방식을 따르자면, 이 말은 주로 본능적인 소망을 의식에서 배제하기 위해 고안된 다양한 정신 활동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물었다. 애초에 왜 억압이 일어나는가? 충동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사실 쾌락을 주는 일이다. 따라서 정신이 만족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이상해 보인다. 프로이트는 그 답을 자세하기 밝히지는 않지만, 답은 정신을 전장으로 보는 그의 입장에 함축되어 있다. 예상되는 쾌락 가운데 많은 수는 고통으로 변한다. 인간 정신은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은 자신이 몹시 원하는 것을 동시에 몹시 경멸하거나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런 내적 갈등의 가장 분명한 예다."(30-4)


"억압의 원초적 형태는 유아의 삶의 초기에 생기는데, 이후에 가지를 뻗어 나가며 그 검열 작업 속에 표현을 거부당하는 충동들만이 아니라 그 파생물들도 포함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정력적인 작업이 계속 반복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억압은 끊임없는 에너지의 소비를 요구한다.〉 억압된 것은 지운 것이 아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옛 속담은 틀린 것이다. 억압된 자료는 접근 불가능한 무의식의 다락방에 저장되며, 이곳에서 계속 번성하면서 만족시켜 달라고 다그친다. 따라서 억압의 승리는 기껏해야 일시적이며, 늘 의심스러운 것이다. 억압된 것은 대체물 형성 또는 신경증 증상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괴롭히는 갈등이 기본적으로 완화불가능하고 영속적이라고 본 것이다. 프로이트는 메타심리학에 관한 자신의 세 번째 논문인 〈무의식〉에서 그런 갈등이 벌어지는 무대의 지도를 그런대로 자세하게 그렸다."(34-5)


"무의식 이론은 일반 심리학에 대한 프로이트의 가장 독창적인 기여로 꼽힌다." "프로이트는 진짜 무의식적인 것과 그 순간에 우리 정신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명확하게 구별하기 위해 《꿈의 해석》에서 이미 했던 구분, 즉 전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을 다시 꺼내들었다. 억압된 생각과 감정, 나아가서 충동들을 그 원시적 형태로 보존하고 있는 곳은 무의식, 즉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막론하고 가장 폭발력이 강한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는 지저분한 창고였다. 프로이트는 충동이 매개 또는 위장 없이는 절대 의식이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역동적인 무의식은 이상한 곳이다. 소망들이 꽉 차서 넘칠 것 같으면서도, 의심을 환영하지 못하고 자연을 참지 못하고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무의식은 직접적인 조사로는 접근 불가능하지만, 정신분석가는 곳곳에서 무의식의 흔적을 발견한다. 프로이트는 빠른 속도로 써내는 메타심리학 논문에서 무의식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확실히 못 박아 두려 했다."(35-7)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루어진 대학살은 전장의 실제 전투에서뿐만 아니라 신문 지상의 호전적인 논설에서도 인간의 잔혹성에 관한 가혹한 진실을 보여주었으며, 프로이트도 그것을 보면서 공격성에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915년 겨울 학기에 빈 대학에서 강연을 하면서 청중에게 문명화된 세계에 확산되고 있는 야만성, 잔혹성, 허위를 생각해보고, 기본적인 인간 본성에서 악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1914년 전쟁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공격성의 힘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쟁은 분석가들이 공격성에 관하여 그동안 해 오던 이야기를 확인해주었을 뿐이다." "프로이트는 훗날 그런 개념이 처음 정신분석 문헌에 나타났을 때 그 자신이 방어적으로 그런 충동을 거부했다고 회고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덧붙였다."(85-7)


"프로이트가 지체한 데에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하필이면 아들러가 남성적 저항이라는 개념─프로이트의 훗날의 정의와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을 주창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선뜻 파괴적 충동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보다 앞서 리비도가 삶 못지않게 죽음도 목표로 삼는다는 점을 밝혔다는 융의 주장 또한 프로이트가 그것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가 되었다. 또 그가 주저한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주제가 자신의 공격적 태도에 맞서 자기 보호적인 방어 작전을 구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공격성을 근본적 충동으로 보는 것이 인간 본성을 모독하는 낮은 평가라며 거부한다는 이유로 현대 문화를 비난했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주저하는 태도 또한 그 자신의 부인(否認)을 다른 사람들 탓으로 돌리는 투사의 한 조각처럼 읽힌다."(87-8)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보편적 에너지로 희석할─그는 융이 그렇게 했다고 비난했다─의도는 전혀 없었다. 또 리비도의 자리에 보편적인 공격적 힘을 대신 앉혀놓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그것이 아들러의 치명적인 실수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었다. 프로이트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융의 '일원론적' 리비도 이론을 분명하게 집어내, 이것을 자신의 '이원론적' 구도와 대비하고 비판했다. 프로이트는 임상적, 이론적, 미학적 이유 때문에 끝까지 확고한 이원론자의 자세를 유지한다. 더욱이 정신분석 이론의 초석인 억압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신 작용의 근본적인 분리를 전제한다. 프로이트는 억압하는 에너지와 억압당하는 내용을 분리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이원론에는 금방 파악되지 않는 미학적인 영역이 있다." "그의 글에는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랑과 갈망, 그리고 전쟁 뒤에 등장한 삶과 죽음 등 대립들이 넘쳐난다."(88-9)


"모든 정신분석 치료에서 만나는 저항이라는 현상은 프로이트가 오래전에 밝혀낸 어려운 이론적 수수께끼를 제기한다. 저항을 하는 환자는 비참한 신경증 상태에 빠져들어 자신이 분석 과정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거나, 희미하게만 짐작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항과 억압의 발생지인 자아가 완전히 의식적일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그렇다면,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사이의 갈등에서 신경증을 끌어내는 전통적인 정신분석 공식에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서, 〈정신 생활에 관한 메타심리학적 관점으로 가는 길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의식'이라는 증후의 의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1915년에 쓴 이 구절은 프로이트의 이론화 속에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 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그의 통찰의 전체적 결과물을 끌어내게 된 것은 《자아와 이드》에 와서였다."(113)


"프로이트가 말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자아를 〈세 겹으로 예속되어 있으며, 그 결과 세 겹의 위험에 시달리는 가엾은 존재〉로 본다. 자아는 〈외부 세계, 이드의 리비도, 가혹한 초자아에 시달리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이런 위험에 상응하는 불안에 시달리는 자아는 자신을 위협하면서 서로 전쟁을 벌이는 힘들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전능한 협상가와는 거리가 멀다. 자아는 이드가 세상과 초자아의 압력에 유순하게 굴복하게 하려고 애쓰는 동시에, 세상과 초자아가 이드의 소망을 따르게 하려고 노력한다. 자아는 이드와 현실 중간에 있기 때문에 〈아첨을 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거짓말을 하고자 하는 유혹에 굴복〉할 위험에 처해 있다. 〈훌륭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지지를 받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정치가와 비슷한 것이다.〉" "자아는 가엾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내부와 외부의 요구에 대처하는 인류 최고의 도구인 것이다."(114-5)


"프로이트는 이렇게 썼다. 〈정상적이고 의식적인 죄책감(양심)은 해석에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판적 재판관에 의한 자아 심판의 표현이다.〉 그러나 초자아는 더 복잡한 정신적 장치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초자아는 한편에서는 개인의 윤리적 가치를 품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행위를 관찰하고 판단하고 승인하고 벌한다. 강박 신경증 환자와 우울증 환자의 경우 그 결과로 초래된 죄책감이 의식에까지 떠오르지만, 다른 대부분의 경우에는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정신분석가는 상대적으로 접근이 어려운 괴로운 도덕적 불편함의 원천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것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간신히 판독할 수 있는 단편적인 자취만 남긴다." "여기서 정신분석가는 〈정상적인 인간은 자신이 믿는 것보다 훨씬 부도덕할 뿐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도덕적이기도 하다〉는 언뜻 보기에 역설적인 진술을 기쁜 마음으로 인정할 수 있다."(116-7)


9장 프로이트의 안티고네


"프로이트가 (자신을 모범 삼아 정신분석가의 길에 들어선 막내딸) 〈안네를〉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딸은 그의 여생 동안 늘 가장 가까운 동맹자였으며 거의 동등한 동료였다. 1920년대 말 안나의 아동 분석에 관한 견해가 심한 공격을 당하자 프로이트는 사납게 딸을 방어했다. 반대로 안나 프로이트는 1930년대 중반에 발표한 자아심리학과 방어 기제에 관한 고전적인 논문에서 자신의 임상 경험에 의존하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글을 자신의 이론적 통찰의 주요한 권위적 전거로 삼았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소유욕이 강했으며, 남들이 아버지의 작업에 비판을 하는 기미만 있어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자신의 특권을 축소시킬 수도 있는 사람들─형제, 환자, 친구─을 질투했다. 1920년대 초에 두 사람은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그 뒤로도 계속 그런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167)


"말년에 프로이트는 딸 안나를 그의 안티고네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비록 사랑스러운 비유에 불과하더라도) '안티고네'의 의미는 너무 풍부하여 완전히 무시하고 갈 수는 없다. 이 이름은 프로이트와 오이디푸스의 동일시를 강조한다. 오이디푸스는 인류 비밀의 대담한 발견자였으며, 정신분석의 '핵심 콤플렉스'에 이름을 빌려준 영웅이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사랑한 자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이디푸스이 자식들이 모두 예외적으로 그와 가까웠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들이었으므로, 그들은 오이디푸스의 후손인 동시에 형제이기도 했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자식들 가운데 특출했다. 그녀는 오이디푸스의 용감하고 풍성스러운 동반자였다. 안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아버지에게 선택된 동지 역할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삶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가 되었고, 죽음에 대항하여 그의 동맹자가 되었다."(167-8)


10장 여성과 정신분석


"《억제, 증후, 불안》에서 정식화된 프로이트의 정의에 따르면, 불안은 분명한 신체적 감각을 동반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출생 트라우마는 모든 불안 상태의 원형이다. 이것은 훗날의 불안들이 모방할 반응─뚜렷한 생리적 변화─을 일으킨다. 프로이트는 유아가 불안에 대해 어떤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불안 반응은 한마디로 타고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어둠에 대한 공포, 그들의 요구를 보살펴줄 사람의 부재에 대한 공포 등 출생 경험에서만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많은 불안을 겪는다. 프로이트는 정확한 시간표를 그리지는 않았지만, 정신 발달의 각 단계에는 그 단계 특유의 불안이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믿었다. 출생 트라우마 뒤에는 분리 불안이 따르고, 그 뒤에는 사랑의 상실에 대한 공포, 거세 불안, 죄책감,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이 나타난다. 따라서 징벌적인 초자아가 만들어내는 불안은 다른 불안들이 이미 자기 할 일을 한 뒤에만 나타난다."(245-6)


"프로이트는 한 유형의 불안이 다른 모든 유형을 대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각 유형은 평생 무의식 속에 집요하게 살아남아 언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일찍 나타나든 나중에 나타나든 모든 불안은 공포, 소망, 감정 등 압도적인 자극을 감당할 수 없다는 느낌, 즉 무력감이라는 매우 불편한 느낌을 공유한다. 다시 요약하면, 프로이트가 가장 중시하는 공식은 이런 것이다. 불안은 앞에 위험이 있다는 경고다. 이 위험이 현실이냐 상상한 것이냐, 합리적으로 평가한 것이냐 히스테리 때문에 과장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느낌 자체와는 상관이 없다. 그 원인은 엄청나게 다양하며, 생리학적, 심리학적 결과도 마찬가지다." "점차 프로이트는 불안을 인간이 삶의 위험들을 헤쳐 나가도록 안내하는 신호로 묘사하면서 전문화된 정신병리학 탐사에서 끌어낸 결론들을 신경증 환자든 아니든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심리학적 법칙으로 번역했다."(246)


"프로이트가 《억제, 증후, 불안》 여기저기에 흩어놓은 발언 중에 1926년에 분명하게 이야기한 것은 불안과 방어가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 정도였다. 불안이 경보음을 내는 탑의 보초라면, 방어는 침입자를 확인하기 위해 동원된 부대다. 방어 작전은 불안보다 파악이 훨씬 힘들 수도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무의식이라는 거의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보호 덮개 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어도 불안과 마찬가지로 자아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또 불안과 마찬가지로 꼭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인간적이면서 너무나 오류가 많은 관리 방법이다. 사실 방어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 한 가지는 이것이 적응의 부지런한 하인이 되었다가 반대로 적응의 비타협적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 방어는 신경증을 낳을 수도 있는 갈등에서 자아가 이용하는 〈모든 기법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고, 반면 〈'억압'은 방어의 한 가지 방법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247-8)


# 또 다른 방어 전술 : 경험 자체를 날려버리는 취소(undoing), (불쾌한) 기억과 거기에 연관되는 감정을 서로 차단하는 분리(isolating)


"1920년대 중반 프로이트는 여성에 관한 자신의 관점이 여자들의 갈망에 비우호적이며 남성 편향이라는 비판이 나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의 예측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한 방식으로 현실이 되었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여자에 관해 매우 불쾌한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의 이론적 견해와 개인적 의견이 모두 적대적이거나 생색을 내는 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여성 심리에 관하여 때로는 거의 불가지론적 입장을 택했다." "그는 물었다. 〈여자는 무엇을 원합니까?〉 여자는 암흑의 대륙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는 이 유명한 말은 현대적으로 포장되었지만 사실 오래된 상투적 질문이었다. 남자들은 오랫동안 여자 전체를 불가해하다고 묘사함으로써 여자의 감추어진 힘에 대한 모호한 공포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해 왔다. 그러나 이 표현은 프로이트의 입장에서는 자기 이론의 구멍에 불만을 표시하며 무력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것이기도 했다."(268-70)


"1910년 빈 정신분석협회의 회원들이 내규를 검토할 때 이지도어 자드거는 여자들의 가입에 반대했지만, 프로이트는 단호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원칙적으로 여자들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모순으로 보일 것〉이라는 이유였다. 나중에 프로이트는 잔 랑플-드 그로와 헬레네 도이치 같은 '여성 분석가들'이 자신 같은 남성 분석가보다 여자 환자들의 유아기─〈나이가 들면서 잿빛으로 변하고, 어두워지는〉─를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망설임 없이 이야기했다. 전이에서 그들이 남자보다 어머니 대리 역할을 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분석 진료의 중요한 측면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유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 나름의 신랄함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이것은 상당한 찬사였다. 굽힐 줄 모르는 반(反)페미니즘적 편견과 더불어 그런 편견의 은근한 표현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으로서는 주목할 만한 양보였다."(272-3)


"여자는 천성적으로 성적인 면에서 수동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프로이트는 여자의 성적 수동성 가운데 많은 부분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한 것임을 인식하여, 그런 대중적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여자들에게서 어떤 정신적 결함이 발견될지 몰라도 그것은 자연적 자질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적 억압의 결과라는 오래된, 디포와 디드로와 스탕달만큼이나 오래된 통찰의 힘을 알았다. 여자에 관한 이런 생각들이나 다른 생각들은 불편하게 공존을 하거나 때로는 서로 모순을 일으키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그의 발언에 등장했다. 게다가 남성 우월성과 관련된 관념 가운데 일부가 그의 마음의 전면을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남성적 소유욕과 문화적 보수주의를 갖춘, 사교, 윤리, 복식 스타일에서 전혀 개조되지 않은 19세기 신사였다. 프로이트의 여성에 대한 태도는 더 넓은 문화적 충성심, 즉 그의 빅토리아 여왕 시대 스타일의 한 부분이었다."(280-1)


"여자라는 민감한 문제에서 프로이트는 우경화했다. 프로이트는 강건하고 통렬한 언어를 사용하여 페미니스트들의 비위에 맞았던 생각, 즉 인간 남성과 여성은 매우 비슷한 심리적 역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뒤집어버렸다." "1920년대 초에 이르면 프로이트는 어린 소녀는 실패한 소년이고, 성인 여자는 일종의 거세된 남자라는 입장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1923년에 인간의 성 역사의 단계들을 제시할 때는 구순기와 항문기 다음에 나오는 단계를 남근기라고 불렀다. 어린 소년은 어린 소녀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어머니를 포함한 모두에게 음경이 있다고 믿으며, 이 문제에서 사실에 눈을 뜨는 과정은 소년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자가 프로이트의 척도였다. 이 무렵 프로이트는 소년과 소녀의 성 발달을 유사하게 다루던 이전의 방식을 버렸다. 그는 정치에 관한 나폴레옹의 유명한 말을 살짝 바꾸어 도발적인 경구를 남겼다. 〈해부학이 운명이다.〉"(292-3)


11장 문명 속의 불만


"프로이트는 평생 설명이 필요한 것은 무신론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1905년에 메모해 둔 것들 가운데는 이런 간결하고 암시적인 내용이 있다. 〈강박 신경증으로서 종교-강박 신경증은 개인적 종교〉. 2년 뒤 그는 이런 맹아와 같은 생각을 예비적 논문 〈강박 행동과 종교 의식〉으로 풀어냈다. 종교와 신경증을 하나의 굴레에 묶으려는 우아하면서도 감질나는 시도였다. 프로이트는 강박 신경증 환자에게 필수적인 '의식(Ceremonies)'이나 '제의(Rituals)'가 모든 신앙의 핵심 요소인 식전(式典, Observances)과 비슷하다는 점은 금방 눈에 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신경증과 종교, 양쪽의 관행이 충동의 포기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둘 다 방어적이고 자기 보호적인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치와 유사성에 비추어 강박 신경증을 종교적 구성물의 병리적 대응물로, 신경증을 개인적 종교로, 종교를 보편적인 강박 신경증으로 과감하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312)


"1927년에 출간된 《환상의 미래》는 시작부터 커다란 주장을 한다. 여기서 내건 주제는 종교지만, 의미심장하게도 문화의 본질에 대한 숙고에서 시작한다. 마치 3년 후 출간된 《문명 속의 불만》을 위한 예행 연습처럼 읽힌다. 이런 식의 출발은 자신의 과제에 대한 프로이트의 인식을 드러낸다. 종교를 최대한 넓은 맥락 안에 자리 잡게 하여,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자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프로이트가 동시대 대부분의 종교심리학자나 종교사회학자와 공유하고 있는 비타협적인 세속주의는 신앙의 문제에 어떤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며, 분석에서 면제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성역을 존중하지 않았다. 연구자로서 그가 들어갈 없는 신전은 없다고 보았다." "그의 친구 피스터는 솔직하게 말했다. 〈교수님의 대체 종교는 본질적으로 당당하고, 신선하고, 현대적인 모습의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입니다.〉"(314)


"프로이트의 에세이는 문화에 관한 논의로 시작한다. 그의 간결한 정의에 따르면 문화는 외적인 자연을 정복하고 인간들의 상호 관계를 규제하려는 집단적 노력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불쾌하고 어려운 희생에, 소망의 지연과 쾌감의 박탈에 노출된다는 뜻이다." "분명한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자신의 주된 과제, 즉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방어하는 과제를 이행하는 방법을 상당히 잘 습득했다고 프로이트는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이미 정복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프로이트는 인간에 대한 자연의 적대 행위의 놀라운 목록을 나열했다. 지진, 홍수, 폭풍, 질병 그리고 프로이트 자신의 절박한 관심사에 더 다가가,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수수께끼〉를 들었다." "프로이트가 개인적인 소회를 감추지 않고 〈인류 전체에게나 개인에게나 삶은 견디기 힘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도 당연하다. 무력함이야말로 공동의 운명인 것이다."9316-8)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는 교묘하게 종교를 그의 분석에 집어넣었다." "물론 종교는 예술이나 윤리와 더불어 인류의 가장 귀중한 소유물에 속하지만, 그 기원은 유아의 심리에 있다. 아이는 부모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부모가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아이가 성장하면서 부모─특히 아버지─의 힘에 대한 느낌, 위험하면서도 가능성이 있는 자연 세계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생각을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어른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소망에 굴복하고 가장 공상적인 장식으로 자신의 환상을 꾸민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생존자들이다. 아이의 요구, 취약한 상태, 의존은 어른이 되어서까지 계속 존재하며, 따라서 정신분석가는 종교가 존재하게 된 방식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종교적인 개념은 다른 모든 문화적 성취와 똑같은 요구, 즉 자연의 압도적 우위에 대항하여 자신을 보호할 필요〉, 그리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문화의 불완전성을 교정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왔다.〉"(318-9)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늑대다.〉 따라서 인간은 제도로 길들여야 한다." "인류는 국가에 독점적 강제 권한을 부여하는 사회 계약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문명화된 인간 관계에 들어설 수 있었다.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은 이런 홉스적인 전통 속에서 탄생했다. 공동체가 권력을 쥐고 개인이 직접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포기했을 때 문화를 향한 거대한 진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처음으로 적을 향해 창이 아니라 욕을 던진 사람이 문명의 진정한 건설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는 불가결하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불만이 표출될 무대도 마련되었으며, 모든 사회은 이런 불만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사회는 개인의 강렬한 욕망에 매우 철저하게 간섭했으며, 본능적 욕구를 억제하고 억압했는데, 이런 욕망과 욕구는 계속 무의식에서 곪으면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올 길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346-7)


"《문명 속의 불만》은 프로이트의 더 큰 생각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의 정신분석학적 사고방식을 배경으로 보았을 때에만 그 영향력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이 에세이는 어떤 문화든 문화 속에서 프로이트적인 인간이 형성되는 방식을 요약한다. 프로이트적인 인간은 무의식적 요구에 시달리고, 치유 불가능한 양가적 태도와 원시적이고 정열적인 사랑과 증오를 드러내고, 외적인 제약과 내밀한 죄책감 때문에 간신히 제어되고 있다. 사회 제도는 프로이트에게 많은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살인, 강간, 근친상간을 막는 댐 역할을 한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문명 이론은 사회 속의 삶을 강요된 타협이자, 본질적으로 해소 불가능한 곤경으로 본다.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 자체가 불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완전하지 않은 상태로, 인간이 나아진다는 점에 관해서는 최소한의 기대만 하고 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348)


"그러나 프로이트의 주된 관심은 문화가 공격성을 억제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한 가지 방법은 내면화(internalization), 즉 공격적인 감정들을 원래 출발지인 정신 속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런 행동, 또는 일련의 행동은 프로이트가 '문화적 초자아'라고 부르는 것의 기초다. 처음에 아이는 권위를 두려워하며, 아버지로부터 예상되는 징벌적 보복을 계산하여 딱 그만큼 얌전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아이가 어른의 행동 기준을 내면화하면 외적인 위협은 불필요해진다. 아이의 초자아가 아이를 바르게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과 증오 사이의 투쟁은 문명 자체의 기초에 놓여 있듯이 초자아의 기초에도 놓여 있다. 개인의 이런 심리적 발달은 종종 사회의 역사에서 복제된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비난할 예언자들을 배출했으며, 신의 법을 어겼다는 집단적 느낌으로부터, 가혹한 계명을 갖춘 지나치게 엄격한 종교를 키워 나갔다."(354)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그의 체계의 주요한 가닥들을 서로 엮어 나갔다." "감동적인 동시에 강건한 결론 부분의 사유도 오래된 내적 갈등을 다시 짚어 나간다. 이 사유는 프로이트가 지나침을 경계하면서도 사변의 요구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문화적 초자아라는 관념에 기초하여 신경증적 문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환자에게 하듯이 그런 문화에 치료자로서 권고를 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이 문제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개인과 그가 속한 문화 사이의 유추는 긴밀하고 유익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유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보적 태도는 중요하다. 이 덕분에 프로이트가 자신을 사회 개혁가라기보다는 연구자로 규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에 대한 처방을 손에 쥔 사회의 의사로 나서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점을 더 분명할 수 없게 밝혀 놓았다."(355)


12장 인간 모세의 최후


"강력한 이웃인 파시즘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포위가 점점 강해지고 위협적이 되면서 빈 생활은 점점 위태로워졌다. 히틀러 정권 첫 해에 쓴 프로이트의 편지들은 비록 쓸쓸함과 분노가 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낙관주의의 영향이 남아 있었다. 1933년 페렌치는 프로이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들 가운데 한 통에서 다정하게, 그러나 미친 듯한 목소리로 프로이트에게 어서 오스트리아를 떠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너무 늙고, 너무 아프고, 의사와 안락한 생활에 너무 심하게 의존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우파 정당들이 오스트리아 나치즘을 반드시 제어할 것이라고 낙관한 프로이트는 물론 우파정당들의 독재가 유대인들에게 매우 불쾌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차별적인 법률은 상상하지 못했다. 평화 조약이 명시적으로 그런 법을 금지했으므로 국제 연맹이 분명히 개입할 것이라고 보았다."(426-8)


"역설적으로 이때는 프로이트에게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이 기분 좋은 시기였다. 그는 힘든 시기가 유대인에게는 '인종적' 충성심을 선언하는 데 특히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때야말로 유대인에게 힘든 시기였다. 대공황과 정치적 혼란은 합리적인 해법들의 인기를 떨어뜨렸으며, 이것은 특히 중유럽에서 반유대주의의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그러나 신교로 개종한 아들러, 잠깐 로마가톨릭에 의지한 랑크와는 달리 프로이트는 결코 자신의 조상을 거부하거나 감추지 않았다. 우리는 1924년에 쓴 〈나의 이력서〉에서 그가 분명하게, 심지어 약간 공격적으로, 자신의 부모가 유대인이며, 자기 또한 늘 유대인이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의 유독한 분위기 속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유대인 출신임을 부정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유대인 출신임을 널리 과시하기까지 한 것이다."(434-5)


"유대적인 면의 본질, 또는 그의 개인적인 유대인적 정체성이 분석에 저항했는지는 몰라도, 프로이트는 그의 사회에서 유대인이라는 것의 함의는 분명하게 알았다. 그는 조상의 신앙에 낯선 동시에 그가 살고 일해야 하는 오스트리아의 강력한 반유대주의적 요소에 분개했기 때문에 이중으로 소외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프로이트는 자신을 주변인으로 보았고, 이런 위치가 자신에게 측량할 수 없는 이점을 준다고 생각했다." "이런 측면에서 독실한 유대인 또는 기독교인은 절대 정신분석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발언에는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신분석은 우상 파괴적이고, 종교적 신앙을 무시하고, 기독교 변증론을 경멸하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종교적 신앙─유대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적 신앙─을 정신분석적 연구의 주제로 여겼기 때문에, 오직 무신론자의 관점에서만 그런 신앙에 접근할 수 있었다."(443-5)


"더욱이 프로이트의 기질에는 도전의 분위기도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반대파의 지도자, 가짜의 껍질을 벗겨내는 자, 자기 기만과 착각에 벌을 주는 자라는 지위에서 기쁨을 맛보았다. 그는 박해하는 로마가톨릭교회, 위선적인 부르주아지, 우둔한 정신의학 기성체제, 물질주의적인 미국인들이 자신의 적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 자부심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이 적들은 그의 마음 속에서 실제보다 훨씬 사악하고 강한, 또 서로 엉겨 붙은 유령으로 커 갔다. 그는 자신을 한니발, 아하수에로스(크세르크세스 1세), 요셉, 모세에 비유했다. 이들 모두 역사적 사명을 띠고, 강한 적과 마주하고, 괴로운 운명을 감내한 인물들이었다. 프로이트는 자주 인용되는 초기 편지에서 약혼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보아서는 잘 알기 힘들겠지만, 나는 이미 학생 때부터 늘 용감한 반대자였고, 늘 극단을 고백하는 자리에 있었으며, 대개 그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446)


"1938년 3월 12일과 그 다음 날, 프로이트는 라디오 옆에 앉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장악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곧 시작된 공포 정치 하에서, 독일인들이 갖추거나 표현하는 데 5년이 걸린 편협한 태도나 사디즘적인 복수심을 오스트리아인은 불과 닷새 만에 행동에 옮겼다. 많은 독일인들이 가차 없이 쏟아지는 폭탄 같은 선전에 굴복했고, 가혹한 국가, 방심하지 않는 당, 통제된 언론에 겁을 먹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인의 경우에는 전혀 압력이 필요 없었다. 그들이 행동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나치 테러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이라고 설명되거나 변명될 수 있을 뿐이었다. 유대인의 아파트를 약탈하거나 유대인 상점주들에게 테러를 한 군중은 공식적인 명령 없이 그런 일을 하면서 자신들이 하는 일을 철저하게 숨겼다. 로마가톨릭 양심의 수호자인 오스트리아의 고위 성직자들은 여전히 남아 있던, 깨어 있는 정신과 품위를 갖춘 세력들을 동원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471-2)


"새로운 통치자들은 오스트리아를 히틀러의 제국에 합병하는 작업에서 신속하고 무자비한 효율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작업은 말 그대로 오스트리아의 종말(finis Austriae)을 의미했다. 일주일이 안 되어 오스트리아 군, 법, 공적 제도는 독일의 해당 부문에 편입되었고, 오스트리아는 한 나라가 아니라 독일의 동부 지방이 되어, 일부러 고어로 '오스트마르크(Ostmark, 동쪽의 변경)'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대인 판사, 관료, 산업가, 은행가, 교수, 저널리스트, 음악가는 바로 숙청당했다. 몇 주가 안 되어 오페라, 신문, 실업계, 고급 문화, 커피하우스는 간절한 목소리로 자신이 〈순수한 아리안〉이라고 선전했다. 중요하고 책임 있는 자리는 모두 믿을 만한 나치들에게 돌아갔다. 거의 아무런 저항도, 심지어 이의 제기도 없었다. 저항을 했다 해도 효과도 없고 비이성적이었다." "국외로 탈출한 소수는 바깥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478-9)


# 프로이트 역시 1938년 6월 4일에 빈을 떠나 6월 6일 망명지 영국에 도착


"슈어는 (궤양이 일어난 구개암으로 고통받던) 프로이트가 위엄 있게, 자기 연민 없이 죽음과 마주하는 것을 목격하며 눈물을 흘릴 뻔했다. 9월 21일 슈어는 프로이트에게 모르핀 3센티그램을 주사했다. 22일 마지막 주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져든 프로이트는 1939년 9월 23일 새벽 3시에 죽었다. 거의 40년 전 프로이트는 오스카어 피스터에게 앞으로 언젠가 〈생각을 못하고 말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이 가능성 앞에서 불안〉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직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운명 앞에 완전히 체념하는 마음으로, 나는 한 가지 정말 비밀스러운 소원을 품고 있네. 숙환이 생기는 것, 신체적인 비참한 상태로 인하여 능력이 마비되는 것만은 싫다는 걸세. 맥베스 왕이 말한 대로, 평소처럼 일하다 죽게 해 달라는 거야.〉 프로이트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빈틈없이 대비해놓았다. 늙은 금욕주의자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통제한 것이다."(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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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Ⅰ - 정신의 지도를 그리다 1856~1915 문제적 인간 8
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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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프로이트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다른 누구보다 분명하게, 또 더 공정하게 보았다. 그는 인간, 모든 인간이 문명의 딜레마와 직면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문명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취인 동시에 가장 큰 비극이기 때문이다. 문명은 개인이 충동을 통제하고, 소망을 부정하고, 욕정을 제한할 것을 요구한다. 환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프로이트의 지혜로운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문명이 부과하는 속박 없이 살 수 없지만, 그런 속박 안에서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 수도 없다. 좌절과 불행은 인간 운명의 한 부분이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간과되는 측면이 그 금지하는 면이다. 교육은 아이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 요청하지 말아야 할 것, 심지어는 상상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니며, 이런 소식을 알렸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는 절대 인기 있는 예언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점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10)


들어가는 글_스핑크스의 정복자, 오이디푸스


1부 무의식의 탐험가 1856~1905


1장 앎의 의지


"1860년대 말 제국 내각은 교양 있고 헌신적인 중간계급 관료와 정치가들이 지배했다. 아무 이유 없이 이들을 '부르주아 내각'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이 부르주아 내각과 그 뒤를 이은 내각들의 체제에서 정부는 교육과 결혼에 대한 통제권을 세속 당국에 넘겼으며, 종파 간 결혼의 길을 열었고, 인도적인 형법을 도입했다. 이렇게 정치적인 자유주의로 진입한 뒤 오스트리아의 상업과 금융, 산업, 운송, 통신은 눈에 띄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는 산업혁명이 늦게 찾아왔지만, 어쨌든 오기는 왔다. 그러나 1873년 5월 9일 '검은 금요일'의 주식 시장 붕괴로 모든 것이 의심을 받게 되었으며, 이 사태는 그동안 이루어낸 많은 성취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대량 파산과 은행 붕괴는 경솔한 투기꾼, 운 없는 예금자, 불행한 사업과, 장인, 농장주를 궤멸시켰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희생양을 찾고자 했던 오스트리아인은 아무런 억제 없이 반유대주의를 분출했다."(53)


"시온주의나 사회주의라는 대안은 아직 시야에 나타나지 않았다. 프로이트는 해방된 많은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적 세계관이 자신에게 맞았기 때문에, 또 흔히 말하듯이 그것이 유대인에게 좋았기 때문에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인간 본성에 관해 비관적이었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정치적 만병통치약에 관해 회의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존심 있는 부르주아로서 오만한 귀족에게 짜증이 났다. 억압적인 성직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유대인이 오스트리아 사회에 완전히 통합되는 데 주요한 장애물이 로마 교회와 오스트리아의 그 앞잡이들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부터 책에 등장하는 모든 반유대주의자에게 상상의 복수를 하는 정교하고 유쾌한 상상을 만들어냈다. 반유대주의가 무럭무럭 성장하면서 새로운 증오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는 오랜 원수인 로마가톨릭을 결코 잊지 않았다."(56-7)


"이 수십 년 동안 빈은 동유럽의 유대인 이민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피난처였다. 오스트리아로부터 나오는 신호도 종잡을 수 없기는 했지만, 다른 곳의 상황은 더 나빴기 때문이다." "이런 유대인 침공─모든 유형의 반유대주의자가 그런 식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다─으로 인해 빈의 동화된 유대인들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이 시절에 베를린이나 런던 등 다른 곳의 유대인도 비록 강도는 덜하지만 비슷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미개한 동유럽 출신의 가난에 찌든, 그리고 종종 정신적 외상까지 입은 난민들에게 느끼게 되는 약간의 동정심이 그들의 습관이나 외모에 대한 방어적인 거부감에 눌려버리곤 했던 것이다. 프로이트 또한 그런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부의 곤궁한 마을 출신인 많은 이민자들의 복장이나 언어나 몸짓이 빈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불쾌했다. 그들은 익숙하다고 느끼기에는 지나치게 이국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매혹적으로 느낄 만큼 이국적이지는 않았다."(59-61)


"1873년 6월에 김나지움을 뛰어난 성적을 졸업하기 전부터 프로이트는 자신이 가장 간절하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자연은 인간 본성임을 인식했다. 그는 나중에 돌이켜보면서, 지식에 대한 자신의 욕심이 〈자연물보다는 인간사를 향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런 기질을 조숙하게 입증했는데, 이런 편지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꼬치꼬치 캐묻는 탐구심과 심리적인 인식으로 가득하다. 그는 열여섯 살이 되던 1872년 9월에 에밀 플루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연과 운명이 우리 주위에서 짜 나가는 실들의 두툼한 질감을 파악하는 것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 프로이트는 어렸지만 이미 단순하고 피상적인 소통은 매우 수상쩍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872년 여름 에두아르트 질버슈타인에게 불평을 했다. 〈네가 나한테는 네 경험 가운데 몇 가지만 골라서 알려주고, 네 생각은 전적으로 너 혼자만 간직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72-3)


"실증주의는 체계화된 학설이라기보다는 인간과 자연의 탐구 방식을 대하는, 널리 퍼져 있는 어떤 태도였다. 그 지지자들은 자연과학의 프로그램과 그 발견과 방법을 사적이든 공적이든 모든 인간 사상과 행동 연구에 도입하기를 바랐다. 19세기 초반에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실증주의 제창자였던 오귀스트 콩트가 사회 속의 인간에 관한 연구를 믿을 만한 기초 위에 올려놓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면서 그것을 일종의 '사회적 물리학'으로 규정한 것은 이런 정신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18세기 계몽주의 속에서 태어나, 형이상학을 거의 신학만큼이나 단호하게 배격한 실증주의는 19세기에 물리학, 화학, 천문학, 의학이 거둔 극적인 승리와 더불어 번창했다." "프로이트는 1932년에 (실증주의 스승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식으로) 정신분석은 〈과학의 한 조각이며, 과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면 된다〉고 요약했다."(88-90)


2장 무의식의 탐사


"사실 위대한 합리주의자였던 프로이트도 미신, 특히 숫자와 관련된 미신으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51세에, 또 나중에는 61세나 62세에 죽을 운명이라는 생각에 시달렸다. 그는 이런 운명의 숫자들이 자신의 필멸성을 일깨우며 쫓아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그가 1899년에 할당받은 전화번호 14362도 그 증거라고 보았다. 43은 그가 43세에 《꿈의 해석》을 출간한 것을 보여주며, 마지막 두 숫자 62는 그의 수명을 가리키는 불길한 경고라고 확신했다. 프로이트는 한때 미신이 적대적인 소망, 살인하고 싶은 소망의 위장이며, 자신의 미신은 불멸을 향한 억눌린 욕망이라고 분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자기 분석 뒤에도 프로이트는 작은 비합리성에서 완전히 놓여나지 못했으며, 그 스스로 자신의 〈유대인다운 특징을 보여주는 신비주의〉라고 부른 것의 이런 잔여물 때문에 (생물학에 수학을 도입하려는) 플리스의 황당한 이론에 민감하게 반응했다."(134-5)


"프로이트는 심드렁한 태도로 계속 최면적 암시를 이용하여 환자의 증상을 완화해주다가, 1892년 겨울 그의 치료가 성공을 거둔 사례를 기록한 짧은 사례사를 발표했다. 프로이트는 나중에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다. 〈신경 관련 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해서 먹고살고 싶으면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신경쇠약을 치료하는 관습적인 방법─전기 치료를 말하는데, 그도 환자들에게 시도해보았다─이 최면보다 훨씬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890년대 초에 〈전기 장치를 치워버렸는데〉,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무렵 프로이트의 편지는 훨씬 광범한 혁신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성적 갈등이 신경병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눈여겨본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끌어낸 결론은 신경쇠약이 완전히 예방 가능하고 또 완전히 치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142-3)


"이 대담한 시절에 프로이트가 치료한 히스테리 환자들은 다리의 통증에서부터 한기까지, 우울한 기분에서 간헐적인 환각까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전환성 히스테리 증상들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아직 자신의 진단에서 유전, 즉 〈신경병적 소질〉이라는 요소를 제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환자가 겪는 기묘한 장애의 그런 감추어진 원인보다는 유아기의 트라우마 경험에서 실마리를 찾는 쪽을 더 좋아했다." "에미 폰 N. 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최면이 사실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 깨달음은 브로이어에게서 벗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제약 없이 말하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조사 도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결함을 미덕으로 바꾼 것이 아니었다. 사실상 새로운 치료 방식을 채택하는 것과 다름없는 중요한 변화였다. '자유연상'이라는 기법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157-9)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비길 데 없는 의미심장한 사건에 관한 프로이트의 유명한 고백적 언급─자서전과 과학이 뒤엉킨 양상을 보이는─은 그것이 말하는 만큼이나 생략하고 있는 것 때문에도 주목할 만하다. 즉, 어머니의 죽음이 아버지의 죽음보다 조금이라도 아픔이 덜하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 하는 점이다. 침착하고 위풍당당한 프로이트의 어머니는 가장 사랑하던 귀중한 장남을 포함하여 모든 자식에게 충성을 요구하면서 1930년, 95세까지 살았다. 그녀가 활달하게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녀의 정신분석가 아들이 오이디푸스 전투의 온전한 함의를 피해 갈 수 있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프로이트가 아버지 쪽에 훨씬 가까운 아들로서 어머니와의 관계보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꿈으로도 꾸고 걱정도 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양면적 감정의 일부는 분석을 하지 않은 채로 남겨 두려고 무의식적으로 안간힘을 썼다는 사실은 정신분석의 역사에서 중요하다."(193)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프로이트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었느냐(또는 그가 그것을 상상했느냐)가 아니라, 모두가 그런 콤플렉스를 거쳐 간다는 그의 주장이 독립적인 관찰이나 정교한 실험으로 입증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경험이 모든 인간에게 무조건 적용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환자들의 경험에 비추어, 나중에는 정신분석 문헌에 비추어 검증했다." "프로이트는 아무도, 심지어 그 자신도 모든 사람의 대표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적절하게 조심하면서, 즉 각 개인을 바로 그런 개인으로 만드는 변수를 염두에 두면서, 같은 인간들의 경험을 잘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정신적 경험을 읽어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례가 순전히 정신분석 증거로 영향력을 갖기를, 또한 그가 세운 공식의 설득력으로 뒷받침되기를 바랐다."(194-5)


"프로이트가 자기 분석에 사용한 방법은 자유연상이며, 그가 주로 얻은 재료는 자신의 꿈에서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뭐라고 표현하든, 1890년대 프로이트는 아주 철저하게 자기 탐사를 했다. 자신의 단편적인 기억들, 감추어진 소망과 감정들을 정교하고 깊이 있게, 쉴 새 없이 조사한 것이다. 그는 감질나는 작은 조각들로부터 묻혀 있던 어린 시절을 단편적으로 재구성했으며, 매우 개인적인 이런 재구성의 지원을 받고 여기에 임상 경험을 결합하여 인간 본성의 윤곽을 스케치하고자 했다. 이런 작업에는 선례가 없었고, 스승도 없었다. 따라서 작업을 해 나가면서 규칙을 만들어내야 했다. 자신의 자아를 탐헌한 프로이트와 비교하면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장-자크 루소에 이르기까지 가장 제약 없이 쓴 자서전 작가들마저, 그 통찰이 아무리 깊이 파고들고 자신을 아무리 솔직하게 드러낸다 해도, 어느 정도 유보적이라는 느낌을 준다."(208-9)


3장 정신분석의 탄생


"프로이트는 〈정신분석(psychoanalysis)〉이라는 운명적인 용어를 1896년에 처음 사용했다." "프로이트는 처음에는 침착한 속도로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1897년부터 자신에 대한 정밀 조사 결과를 내놓으면서 점차 속도를 붙여 가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는 그 후 3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자기 정신의 지도를 만지작거리고, 정신분석 기법들을 다듬고, 충동, 불안, 여성의 성욕 이론들을 수정하고, 예술사, 사변적 인류학, 종교심리학, 문화 비평 분야를 공략했다. 그러나 1899년 말 《꿈의 해석》을 출간할 무렵에 정신분석의 원리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05년에 발표한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는 이런 원리들을 상술한 두 번째로 중요한 텍스트다. 물론 첫번째는 '해몽 책'이며, 프로이트는 이것이 자신의 작업으로 진입하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꿈의 해석은 정신적 삶의 무의식을 알 수 있는 왕도다.〉"(217-8)


"꿈에는 메시지가 있다. 이 점에는 프로이트도 동의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꿈의 각각의 세목에 하나의 분명한 상징적인 의미를 할당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나, 단순한 열쇠를 이용하여 해독하면 되는 암호문처럼 꿈을 읽어내는 독법으로는 꿈의 의미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꿈을 꾼 사람은 반드시 자유연상을 이용해야 하며, 정신적으로 구불구불한 길에 대한 평소의 합리적 비판을 버려야 하고, 자신의 꿈을 있는 그대로, 하나의 증후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꿈의 각 요소를 분리하여(과거의 암호 해독 방법에서처럼, 즉 과학적인 목적을 위해 활용될 수 있도록), 그 요소를 자유연상의 출발점으로 이용하면, 꿈을 꾼 사람 또는 그의 분석가는 결국 그 의미를 풀어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런 기법으로 자기 자신의 꿈과 분석 대상자의 꿈을 천 개 이상 해석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나타난 것이 다음과 같은 일반 법칙이었다. 〈꿈은 소망의 충족이다.〉"(224-5)


"그러나 반대자는 소망 충족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보이는 꿈이 많다고 고집을 부릴 것이다. 꿈들은 불안을 표현하거나 자극할 수도 있고, 중립적이고 매우 비감정적인 시나리오를 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답은 왜곡에 있다. 왜곡은 사람이 꿈을 꾸면서 무의식적으로 수행하는 작업의 핵심적 실마리를 제공한다. 프로이트는 왜곡을 설명할 준비를 하면서 '나타난 꿈(manifest dream)'과 '잠재적 꿈 사고(latent dream thought)'라는 핵심적인 구분을 도입했다. 나타난 꿈이란 깨어나는 순간 대체로 흐릿하게 기억하는 꿈이다. 잠재적 꿈 사고는 감추어져 있으며, 나타난다 하더라도 보통 심하게 베일에 덮인 상태로 나타나 암호 해독이 필요하다. 예외가 되는 어린아이의 꿈은 따라서 역설적으로 지루한 동시에 정보가 풍부하다. 〈어린아이들의 꿈은 종종 순수한 소망 충족이다.〉 따라서 〈해결할 수수께끼가 없다.〉"(226)


"프로이트는 환자들이 분명하게 소망이 좌절되는 꿈을 꾸었다고 말할 때, 이것을 〈소망에 반하는 꿈〉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꿈은 프로이트가 틀렸다고 증명하고 싶은 소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런 꿈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프로이트의 이론을 멋지게 반격하는 것처럼 보이는 불안의 꿈도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것은 무의식에서 생산되었지만 정신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거부하는 소망을 표현하는 꿈이다. 따라서 이때 나타나는 꿈에는 불안이 잔뜩 실려 있는 것이다. 한 예로 어린 소년은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소망을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억압하지만, 그 소망은 무의식 속에서 끈질기게 남아 어떤 식으로든 나타난다. 불안의 꿈에 나타날 수도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이 지점에서 제안하는 것은 그의 원래의 정식화로부터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꿈은 (억제된, 억압된) 소망의 (위장된) 충족이다.〉"(228)


"정신이라는 우주에 우연은 없다는 것, 이것이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우연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강조했다. 〈우리는 정자와 난자의 만남에서 우리가 생겨난 것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모든 것이 사실 우연이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또 그는 인간의 선택이 진짜라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정신분석 치료의 한 가지 목적이 바로 〈환자의 자아에게 이쪽이든 저쪽이든 결정을 할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게는, '우연'도 '자유'도 자발성의 자의적인 또는 무작위적인 표현이 아니다. 정신에 대한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사건은 비록 겉으로는 아무리 우연처럼 보인다 해도, 사실은 서로 엉킨 인과 관계의 실들의 매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정신에 관한 이론은 엄격하게 또 솔직하게 결정론적이다."(244-5)


"이것은 또한 분명하게 심리학적이며, 따라서 그 시대를 고려할 때 혁명적이다. 프로이트는 당대 심리학의 틀 안에서 자신의 프로그램을 전개했으나, 결정적인 지점을 넘어서자 그 틀을 깨고 나아갔다. 정신의학 분야에서 그의 가장 저명한 동료들은 본질적으로 신경학자들이었다." "크라프트-에빙은 '신경과민'을 〈중추 신경계의 후천적인 병리학적 변화라기보다는 타고난 병리학적 성향〉이라고 정의했다. 유전이 문제의 주된 원천이라는 것이다." "크라프트-에빙은 엄숙하게, 거의 경외심에 가까운 존경심으로 〈유전이라는 강력한 생물학적 법칙〉에 경의를 표했으며, 〈이것이 모든 유기체에 결정적으로 개입한다〉고 보았다." "19세기에 심리학이라는 과학은 인상적인 발걸음을 내디디며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위치는 역설적이었다. 그전에 신학으로부터 해방되었듯이 철학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생리학이라는 새로운 주인의 오만한 포옹을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245-7)


"프로이트가 마침내 혁명을 일으켰을 때, 그 혁명은 신경학 이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의 상호작용에서 기존에 받아들여졌던 서열을 역전시킨 것이었다. 그는 정신의 작용에서 독점적 지위가 아니라 우선적 지위를 심리적 영역에 할당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또한 많은 사람들이 현대 문화의 유해한 부작용이라고 생각한 것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사실 이 마지막 진단에 관해서는 프로이트도 이유는 달랐지만 다수와 의견을 같이 했다. 그의 시대의 다른 많은 관찰자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도 자기 시대의 도시적, 부르주아적, 산업적 문명이 신경과민─그는 이 질환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고 생각했다─에 분명히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근대 문명의 성급함, 소란, 빠른 교통, 정신 기계가 떠안는 과도한 부담 등이 신경과민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반면, 프로이트는 근대 문명이 성적 행동을 과도하게 제약하는 것이 원인이라고 보았다."(250-2)


"정신분석은 〈극단적인 신경증과 건강 사이에는 아주 다양한 형태의 신경증들이 한 줄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프로이트는 장난스럽게 독일의 정신의학자 파울 율리우스 뫼비우스의 말을 인용하는데, 그 말은 〈우리 모두가 약간은 히스테리를 갖고 있다〉는 취지다. 모든 인간은 성도착을 타고났다. 성도착의 일종의 부정적 대응물을 이루는 증상을 보이는 신경증 환자들은 '정상적인' 사람들보다 이런 보편적인 원시적 성향을 더 강하게 보여줄 뿐이다. 신경증 〈증상은 환자의 성적 활동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에게 신경증은 기이하고 이국적인 병이 아니라, 불완전한 발달, 즉 정복되지 않은 유년기 갈등의 아주 흔한 결과다. 신경증은 그 증상을 겪는 사람이 유년기의 대결로 퇴행한 상태다. 간단히 말해서 끝나지 않은 일을 처리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공식을 가지고 프로이트는 가장 민감한 주제, 즉 유아의 성욕에 이르렀다."(291)


2부 정신의 정복자 1902~1915


4장 투사와 정신분석가


"프로이트는 그의 시대의 교육 받은 중간계급 시민이었다." "아름다움에 열려 있든 아니든, 프로이트의 취향은 대체로 관습적인 쪽이었다. 그가 함께 살기로 선택한 물건들은 그 보수성과 더불어 기존에 잘 확립된 전통을 기념한다는 면에서 타협이 없었다. 그는 19세기 부르주아 대부분이 자신들의 행복에 불가결하다고 생각했던 기념물들을 좋아했다. 예를 들어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의 사진, 찾아가 보았고 또 기억할 때마다 기쁨을 주는 곳의 기념품, 미술에서 말하자면 구체제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에칭이나 조각품들─모두 아카데믹하고, 모험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따위였다. 프로이트는 주변에서 폭발하는 회화, 시, 음악 혁명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드문 일이지만 그런 것들이 밀고 들어와 그의 눈길을 끌 때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표현주의와 마주했을 때, 프로이트는 오스카어 피스터에게 자신이 속물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321-2)


"문학에 대한 프로이트의 태도도 이와 비슷한 갈등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논문이나 글은 그의 폭넓은 독서, 뛰어난 기억력, 스타일에 대한 엄격한 요구 등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특히 괴테와 실러 등 그가 좋아하던 독일 고전과 셰익스피어를 자주 인용했다. 셰익스피어는 그에게 매혹적인 수수께끼를 제시했으며, 그는 거의 완벽한 영어로 셰익스피어를 길게 암송할 수 있었다. 하인리히 하이네 같은 재사, 빌헬름 부슈 같은 약간 상스러운 편인 유머 작가 등은 그에게 정통을 찌르는 예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작가를 선택할 때 그의 시대 유럽의 아방가르드는 무시했다." "이 시절에 전기 충격을 받은 듯이 저항할 수 없는 모더니즘적 충동에 사로잡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했던 빈 사람들 가운데 프로이트가 분명하게 찬사를 보냈던 사람은 아르투어 슈니츨러뿐이었다. 그것은 슈니츨러가 당시 빈 사회의 성에 관하여 통찰력 있는 심리학적 연구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324)


5장 정신분석 정치학


"늘 확고한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이었던 융은 스스로 프로이트의 열렬한 지지자를 자임하고, 의학 학회나 글을 통해 정신분석의 혁신성을 힘차게 옹호했다. 또 자신의 전문분야로 명성의 발판이 되었던 정신분열증(당시에는 조발성 치매라고 불렀다)에 프로이트의 이론을 적용하여 효과를 보자 그 이론에 대한 괸심이 더 깊어졌다." "그들의 우정은 일단 시작되자 힘차게 피어났다. 두 사람은 정중한 편지로 신경증의 발생에서 성의 역할을 토론했고, 논문 발췌 인쇄물과 책을 교환했으며, 특별히 관심을 끄는 사례를 교환했다. 융은 절대 아첨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중했다. 그는 프로이트의 생각을 잘못 대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정신분석에 대해 약간 주저하는 마음은 자신의 미숙함과 주관성 때문이고, 프로이트와 개인적으로 만난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공적으로 프로이트를 옹호할 때 신중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은 외교의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정당화했다."(384-7)


"융은 훗날 적대감을 가지고 돌아보면서, 자신과 프로이트의 결별의 뿌리가 1909년 여름 프로이트, 페렌치와 함께 미국에 갈 때 조지 워싱턴 호 선상에서 벌어진 에피소드에 있다고 생각했다. 융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프로이트의 사생활에 관해 더 자세히 듣지 못하는 상황에서 프로이트의 꿈 하나를 최선을 다해 해석했다. 프로이트는 사생활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면서 의심하는 눈으로 융을 보았고, 남에게 자신을 분석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그의 권위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이었다. 융은 이런 거부가 자신을 지배하던 프로이트의 힘에 조종(弔鐘)이 울리는 소리로 들렸다고 회고했다. 자칭 과학적 솔직함의 사도인 프로이트가 개인적 권위를 진리 위에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이 무엇이든 융은 프로이트의 권위 밑에서 안달을 하고 있었으며, 융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것을 오래 견디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431)


"융과 프로이트는 과학적 기획에 대한 기본적 태도에서 근본적으로 달랐다. 두 사람이 서로를 과학적 방법론으로부터 떠나 신비주의에 빠졌다고 격렬하게 비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융은 이렇게 썼다. 〈나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에 나타나는 편협성과 편견을 비판합니다. 또 '프로이트 학파'의 부자유스럽고 종파적인 불관용과 광신의 분위기를 비판합니다.〉 융은 프로이트가 정신과 관련된 사실들을 발견한 위대한 인물이지만, 〈비판적 이성과 상식〉이라는 견고한 기반을 떠나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프로이트대로 융이 비교(秘敎)적 현상에 속기 쉬우며 동양 종교에 매혹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종교적인 감정을 정신 건강에서 뗄 수 없는 요소로 옹호하는 융의 태도를 가차 없이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로 바라보았다. 프로이트에게 종교란 문화에 투사된 심리적 요구, 어른들에게서 살아남은 아이의 무력감으로서, 존중되기보다는 분석되어야 할 것이었다."(453)


"돌이켜보면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는 그 이전의 운명적인 우정들─브로이어, 플리스, 아들러, 슈테켈 등과 맺었던─의 새로운 변형처럼 보인다. 프로이트 자신이 그런 독법의 실마리들을 제공했다. 이 시기 그의 편지에는 플리스를 비롯하여 다른 버려진 동맹자들의 이름이 여기저기에서 출몰한다. 융은 프로이트의 괴로운 암시에 감염된 듯 그 암시에 의미 있는 반응을 보였다. 이전 우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빠르게, 거의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애정을 투자하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따뜻한 태도를 보여주다가, 격분 상태에서 돌이킬 수 없는 소원한 관계로 끝을 맺었다. 모든 것이 끝난 1915년 프로이트는 경멸하듯이 융을 〈성스러운 개종자들〉 가운데 하나로 거론했다. 그의 편지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융이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위기'〉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그를 좋아했다." "프로이트가 이 맹렬한 동맹 관계에서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았던 유일한 감정은 무관심이었다."(459-60)


6장 정신분석의 환자들


"프로이트는 1897년에 현실적 사건들─어린아이의 강간이나 유혹─만이 신경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을 버리고, 신경증적 갈등을 만드는 데 환상이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는 이론을 택했다. 1910년 경, 늑대 인간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내적이고 대체로 무의식적인 정신적 과정이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관점을 옹호했다." "요점은 어른의 신경증은 훗날 아무리 왜곡과 환상으로 위장을 한다 해도, 어린 시절에 획득한 경험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경증의 뿌리는 융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나중에 그냥 몰래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깊이 박혀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최대한 힘을 주어 말했다. 〈유년의 영향은 한 개인의 삶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극복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어떤 지점에서 해결하지 못하느냐를 규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점에서 신경증 형성 최초의 상황에서부터 벌써 자신을 드러낸다.〉"(540-1)


"신경증과 싸우는 전쟁에서 분석 대상자의 무기는 말이다. 분석가의 무기는 해석인데, 이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말이다." "정신분석의 해석은 전복적인 독해다. 이 해석은 분석 대상자 스스로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표면적인 메시지에 놀랍고 또 종종 불편한 의심을 던진다. 간단히 말해서 분석가의 해석은 분석 대상자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으로 관심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늑대 인간의 꿈에 나오는,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늑대들을 정력적인 성행위의 왜곡된 재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시무시하면서도 흥분되는 기억이 들어가 있는 퇴행의 굴에 연기를 들여보내 기억이 뛰쳐나오게 하는 것이다. 쥐 인간의 강박적인 제의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무의식적 증오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 또한 억압되었던 것을 빛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분석가의 해석이 늘 이런 화려한 결과를 끌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목적은 늘 자기 기만을 조금이라도 깎아내는 것이다."(553-4)


7장 정신의 지도 그리기


"문화의 영역으로 진군하는 프로이트의 돌격대를 지배하는 원칙은 수도 많지 않고 정리하기도 쉬웠지만, 실제 적용은 어려웠다. 그 원칙이란 모든 것이 타당하고, 모든 것이 위장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정신분석은 〈개인과 사회 양쪽에 똑같은 역동적인 원천을 가정함으로써 양쪽의 심리적 성취〉 사이에 긴밀한 연관을 확립한다. 〈정신적 메커니즘의 주요한 기능〉은 〈한 개인의 욕구가 그의 내부에 만들어내는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외부 세계에서 만족을 얻어내는 것〉 또는 〈충족되지 않은 충동을 처리하는 다른 방법을 찾아내는 것〉에 의해 이런 긴장을 해소하려 한다. 따라서 예술이나 문학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는 신경증 연구와 마찬가지로 충족되거나 좌절된 상태인 감추어진 소망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모든 탐사에서 프로이트는 청원자라기보다는 정복자로서 낯선 영역에 진입해 들어갔다."(578-9)


"프로이트의 고급 문화에 대한 분석적 연구는 단편적이지만, 미적 경험의 주요한 세 영역, 즉 주인공들의 심리, 관객의 심리, 창조자의 심리를 건드린다. 이 영역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얽히며 서로를 비춘다. 따라서 정신분석가는 《햄릿》을 해소되지 않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자신에 대한 분석을 권유하는 미학적 산물로 읽을 수도 있고, 햄릿의 비극에서 자신의 은밀한 역사를 인식하며 깊은 감동을 받는 많은 관객의 콤플렉스를 풀 실마리로 읽을 수도 있고, 저자 자신의 오이디푸스적인 드라마, 그가 아직도 씨름을 하고 있는 미완의 감정적인 문체로 읽을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서 훗날의 많은 연구자를 매혹시키는 동시에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허구적인 인물 햄릿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는 그의 행동의 모호한 원천, 수백 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내는 그의 불가사의한 힘, 그를 만들어낸 사람의 통찰을 설명해줄 수도 있다."(589)


"프로이트가 자신의 발견을 조각과 소설과 그림에 적용한 것은 아주 대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화의 가장 깊은 기초까지 파고들려는 시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질서 정연한 모든 사회에 꼭 필요한 터부들을 자신에게 명령하여 문명으로 도약한 시점을 밝히려고 한 것이었다." "1908년 11월 중순에는 빈 정신분석협회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죄책감의 근원에 대한 탐구는 손쉽게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죄책감이 성 충동의 폐허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두 주 뒤, 영웅 탄생의 둘레에 달라붙은 신화들에 관한 오토 랑크의 논문을 논평하면서, 프로이트는 허구의 진짜 주인공은 자아(ego)라고 말했다. 자아는 〈첫 번째 영웅적 행위, 즉 아버지에 대한 반항을 통하여 자신이 영웅이 되었던〉 때로 돌아감으로써 자신을 재발견한다."(598-9)


"프로이트의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로 연결된 네 편의 에세이 《토템과 터부》의 윤곽이 그려지고 있었다." "《토템과 터부》는 독자를 찾으려는 시도보다도 그것을 지배하는 주제라는 면에서 훨씬 야심만만했다. 완전한 독창성이라는 면에서는 장-자크 루소의 추측들마저 넘어선다. 루소가 18세기 중반에 인간 사회의 기원에 관하여 했던 유명한 이야기는 명백히 가설적이었다. 루소는 인류가 문명 이전에서 문명으로 넘어오는 시점을 자신이 상상할 때 독자들에게 사실을 따지지 말아 달라고 길게 요청했다. 그러나 루소와는 달리 프로이트는 자신의 깜짝 놀랄 만한 추측이 오랫동안 묻혀 있던 획기적인 선사시대 사건을 분석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주기를 독자들에게 요청했다. 그는 임상적 추론이라는 친밀하고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위험할 정도로 멀리 떠나와 있었지만, 이것 때문에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599-602)


"1915년 프로이트는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유럽의 다른 합리적인 사람들을 대변하여, 전쟁이 일으킨 환멸과 죽음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를 주제로 한 쌍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문명을 위한 만가였다. 우리는 다양한 경제와 문화 수준에 놓인 나라들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 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때 상상했던 전쟁은 영웅적인 행위로, 민간인은 끼지 않게 해주는 '기사도적인 싸움'이었다. 이것은 예리한 통찰이었다. 큰 전쟁의 정화하는 힘을 고대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오래전에 벌어졌던 위생적이고 낭만화된 전투를 떠올렸다. 그러나 현실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 전의 어느 전쟁보다 많은 피를 흘리고, 〈거의 상상도 못하던 현상〉, 즉 적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쏟아내는 갈등으로 타락했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사람인 프로이트도 전쟁에 나선 인간 본성이 보여준 무시무시한 광경에는 놀라고 말았다."(651-2)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인 인간 충동은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표현될 곳을 찾으려 하지만 사회적 통제와 내적인 억제에 가로막힌다. 이 과정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충동을 길들이는 현대 문명의 압력은 지나치며, 인간 행동에 대한 기대도 마찬가지다. 전쟁 덕분에 사람들은 적어도 인간이 원래부터 선하다는 착각에서는 벗어나게 되었다. 사실 사람들은 〈우리가 걱정하는 것만큼 낮게 침몰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인간이 우리가 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높이 올라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이 한 일은 문명화된 외피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전쟁은 〈우리에게서 나중에 문화적으로 부과된 것을 벗겨냈으며, 우리 안의 원시인을 드러냈다.〉 이런 드러냄에도 그 나름의 쓸모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전보다 진실하게 자신을 보게 해주며, 해로운 것으로 드러난 착각을 버리는 데 도움을 준다."(6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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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을 읽다 - 프로이트를 읽기 위한 첫걸음 유유 고전강의 4
양자오 지음, 문현선 옮김 / 유유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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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세기말의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인간과 인간 자신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프로이트 이전의 자아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하나의 주체로서 일체의 대상을 탐구하는 필연의 원점이었다. 데카르트의 논증에 따르면, 모든 것을 회의하더라도 최후까지 결코 회의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지금 회의한다'라는 바로 그 사실이다. 이것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지닌 본래 의미다. 여기서 '생각'은 'Cogito의 번역어로 강력한 회의를 의미한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이르면 무엇을 회의하는 행위는 더 이상 하나의 원점이 아니다. 회의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이면의 동기를 내포한다. 우리는 뒤에서 이 동기를 조작하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자각하지 못하며, 우리가 이 사실을 잘 모를수록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중요하기에 비로소 억압된다. 인간과 자아 사이에는 이처럼 기괴하고 기묘한 관계가 설정된다."(30-1)


"프로이트는 유럽의 산물이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 그 사조의 기복 및 유동은 프로이트라는 개인에게 매우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다음으로 그는 '세기말 비엔나'의 표지 가운데 하나다. 낭만주의가 정점에 이르기까지 발전하며 빚어낸 문제 및 가치 의식은 프로이트의 삶과 사상의 바탕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했다. 『꿈의 해석』 및 그의 다른 저작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당연하게도 개인주의다. 프로이트에게 개인은 지식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다. 둘째는 욕망이다. 낭만주의는 이성과 추상에 반대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성과 추상이 인간의 욕망과 열정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욕망과 열정은 개인이 가장 구체적이고 진실하게 느끼는 무엇이지만 이성과 추상, 객관에 배제되었다." "그리고 19세기 사회와 유럽 문화에서 가장 억압받고 거부되었던 것은 욕망, 특히 개인이 느끼는 욕망 가운데 가장 강렬한 성욕이었다."(48-9)


"빅토리아 시대라는 말은 하나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분위기를 가리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너무도 신사적이고 억압적이고 냉정한, 뿐만 아니라 아마도 허위적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그런 환경과 시대를 가리킨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욕망을 그리 중시하지 않았으며, 디코럼decorum이라 불리는 엄격한 예의범절 규정을 준수했다." "사람들 모두가 남에게 인정받고 남의 눈에 바람직하게 여겨지며 멋진 외양과 상식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했다. 옳다고 생각해서 옳다고 말할 때도, 정해진 어휘를 사용해서 정해진 어감에 따라 정해진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평화롭게 지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평화는 일종의 대가를 요구한다. 모두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탓에 참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참된 자아는 끊임없이 억압되고 은폐된다. 그리하여 이런 사회의 이면,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온갖 발산과 해소의 행위가 이루어진다."(50-4)


2장 꿈의 특수한 성질


"꿈은 병이 아니다. 이 점에서 꿈은 히스테리와 다르다. 그러나 자기 꿈을 제어하는 사람은 없다. 이 점에서 꿈은 묘하게 히스테리와 동일하다. 프로이트 시대의 이론에 따르면, 히스테리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발작하는 질환이었다. 이제 곧 발작할 것 같다고 스스로 깨닫는다면 이미 히스테리가 아니다. '통제'가 바로 히스테리 치료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어떤 요소와 맞닥뜨리거나 어떤 자극을 받을 때 스위치가 켜지듯 히스테리 발작이 일어나는지, 되짚어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스위치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스위치는 종종 기억 속 깊숙이 숨겨져 있다. 지나간 삶의 감추어진 기억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불쾌한 기억들을 되새기며 경험 속에서 발작의 스위치를 찾아내야 한다. 일단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알 수 있다면, 히스테리는 곧 약화된다. 꿈과 히스테리는 '통제 불능'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66-7)


"꿈은 평소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으며,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부분을 드러낸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적나라하고 비정하게 자기 자신을 폭로했다. 솔직히 이 점이야말로 프로이트의 대단한 일면이다. 당시 사회의 허위와 위선에서 벗어나 그처럼 용감하게 자신의 허위를 폭로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당시 사회가 허위적이고 위선적이었기에 그가 일부러 자신의 허위적 일면을 드러낸 것이라고. 선뜻 밝히기 어려운 개인적인 일면을 먼저 드러냄으로써, 꿈이 전달하는 정보에 독자가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꿈에 나타나는 정보는 개인의 고귀하고 영예로운 일면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어조를 유지하며 꿈의 왜곡을 설명하고, 현실을 왜곡하는 서로 다른 몇 가지 꿈의 기제를 분석했다. 이 책은 전술적으로 기획된 것이다. 『꿈의 해석』의 초판 판매량은 비록 300권에 불과했지만, 그 원인은 사회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던 데 있었다."(73-6)


"프로이트와 인간의 심리를 탐색했던 프로이트 이후의 연구자들은 이원론에서 벗어나 경험에 대한 탐구와 인지를 주장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관이냐 객관이냐가 아니라, 주관이 어떻게 객관을 인식하느냐는 점이었다. 우리의 주관, 우리의 감각 기관은 객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다시 말해, 객관 세계와 우리가 형성한 주관적 인상 또는 감상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그 차이는 지대하다. 프로이트의 출발점은 우리가 받아들인 객관 세계가 결코 완전할 수 없으며, 주관의 수정과 왜곡을 통해서야 비로소 우리의 경험으로 변화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중점은 주관이 어떻게 어떤 경험을 만들어 내느냐 또는 객관 세계가 도대체 무엇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도대체 어떤 요소, 어떤 힘에 의해 하나의 객관적 정보가 우리의 신체와 감각 기관 안으로 들어와 개개인 속에 각각 다른 경험으로 자리 잡느냐가 문제다."(90-1)


3장 '억압'이라는 진화의 원인


"프로이트는 인간의 생존, 곧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조건들에 대한 다윈주의의 기본 사유를 받아들였다." "다윈주의는 생물 종種이 유전을 통해 강성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생산하고 번식한다고 주장한다(다윈주의는 반드시 다윈 자신의 주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서 유리한 조건을 선택해 번식하는 것이야말로 생존과 진화의 기초다. 이런 주장에 의해 계발된 프로이트 체계의 대전제는 다음과 같다. 생물의 한 종으로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중요한 욕망은 번식과 직결되는 성욕이다. 인간의 리비도와 다른 생물의 번식 및 생식 충동은 무엇이 다른가? 다윈주의에서 받은 영감과 암시에 따라 프로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 인간이 다른 생물과 다르게 진화의 최첨단에서 고등생물로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한편으로 강렬한 성욕을 가졌음에도 다른 한편으로 성욕을 억압하고, 나아가 성욕이 품고 있는 거대한 잠재력을 다른 곳에 쓰도록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95-6)


"프로이트는 영유아의 성욕에서 그의 학문 체계의 핵심 개념인 '억압'을 도출했다. 인류는 어째서 서너 살부터 이성의 엉덩이에 열중하는 야수가 되지 않는가? 억압이 있기 때문이다. 억압이 있어 문명과 사회가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는 세밀한 기제들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기제들이 인간을 우월한 존재로 만들며, 인간이 너무 일찍부터 유한한 에너지를 성性에 소모하지 않도록 통제한다. 이것이 성을 억압하는 기제들이다. 성욕을 억압한 뒤에야 인간은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갖게 된다. 억압은 인간이 거대한 생식 기관으로 변하는 것을 막아 준다. 억압은 인간에게 성적 행위 이외의 다른 일을 할 기회를 주는 중요한 기제이다. 프로이트의 구상 속에서 문명은 억압이 출현한 후에야 비로소 존재했다. 성적 욕망에 대한 억압이 없다면, 인간은 문명화될 수 없을 것이다."(103-4)


"프로이트의 눈에 인생은 리비도와 억압의 대치, 상호 투쟁으로 점철된 드라마였다." "『꿈의 해석』 앞머리에서 프로이트는 모든 꿈이 잠재적인 원망충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왜 꿈에서조차 욕망은 직접 드러나지 않는가? 그 이유는 꿈이 드러내는 것이 원래의 원망이 아니라 억압되어 왜곡된 원망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은 상식적이거나 보편적인 욕망의 억압이 아니라, 영유아의 성욕에서 출발해 인류를 근본적인 진화 과정으로 이끄는 억압, 리비도를 잠재의식 속에 욱여넣는 특정한 억압이다. 상식적이거나 보편적인 욕망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며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욕은 다르다. 성욕은 번식의 기초이며 인간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가장 특수한 지점이지 보편적인 생물 종의 욕망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성 억압은 줄곧 핵시적인 위치를 차지했다."(106-7)


4장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어둠


"사람의 주관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제는 무의식 내부의 무엇이 어떻게 의식으로 빠져나오느냐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해석은 인격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뒤엎는다. 가장 중요한 반전은 의식과 무의식의 중요성이 전도되었다는 사실이다. 의식은 중요하다. 의식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좋은지 결정한다. 집단적인 문명이 구성한 가치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대부분 도둑질이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짓이라고 믿고 '양다리'가 옳지 않다는 데 동의한다. 이것이 의식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몰개성하고 무의미한 재현이다. 의식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의식이 더 흥미롭고 개인의 개성에 가깝다. 의식에 차원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닮아 있다. 그래서 진정으로 당신이 누구인지 결정하는 것, 당신과 다른 사람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분명히 무의식에 속하는 무엇이다."(124-5)


"억압된 정보는 인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일단 억압되면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없다. 문지기인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언제 비로소 인격의 개성을 결정하는 어두운 면을 볼 수 있는가? 문지기가 문을 잘 지키지 못했을 때뿐이다. 꿈은 왜 중요한가? 꿈은 문지기가 가장 허술한 시간이다. 꿈은 우리가 정신적 에너지를 배출할 수 있도록 돕는 특수한 상황이다. 꿈은 억압된 것들이 빠져나와 다리 쭉 뻗고 내달릴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억압된 정보들은 내달리면서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여전히 문지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갖은 방식으로 우회하고 수정하며 스스로를 위장할 수밖에 없다." "꿈으로 꾸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꿈의 정보는 모두 위장된 것이다. 깨어 있을 때의 경험 중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만이 꿈에 나타난다. 이는 일종의 암시다. 암시라는 용어도 『꿈의 해석』의 핵심어다."(127-8)


5장 '정신경제학'의 논리


"프로이트의 정신경제학은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외부 세계가 어떤 자극을 주든 전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면 인간은 성장이 불가능하다. 그런 체계는 곧 과부하 상태가 되어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를 모두 소모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무엇을 설명하는 이 순간, 내가 생각한 것을 여러분이 받아들이고 있는 이 순간을 포함하는 모든 심리적 순간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한다." "『꿈의 해석』 5장에서 프로이트는 꿈의 재료가 바로 전날 겪었던 삶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밝혔다. 우리가 꿈의 재료로 삼는 것은 전날의 삶의 경험 가운데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자투리 파편들이다." "그렇다면 꿈을 꾸면서 꿈을 만들 재료를 선택할 때에는 왜 오히려 중요하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가? 이는 정신경제학의 원리에 위배되지 않는가? 프로이트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여기에 해석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142-4)


# 19세기의 '경제' 개념 : 유한한 사물로 무한한 목표를 만족시키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분배의 방식을 고려하는 것, 나아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좋은 방법, 그 비결과 지혜를 가리킨다.


"인간은 성장 과정 가운데 심리적으로 먼저 두 가지 기본적인 억압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인간이 정신적으로 처음 배우는 일은 외부 세계를 처리하는 첫 번째 기제, 곧 모든 것에서 성욕을 제거하는 '중성화'다." "우리가 외부 세계와 대면하면서 어떤 것을 의식으로 받아들여 정신 구조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욕과 연관되는 부분을 삭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제거된 욕망은 잠재의식으로 침잠한다. 그러나 인간의 성장은 단순하거나 일방적이지 않다. 일생을 통틀어 인간이 중성화에 온 힘을 다하고 거세가 정말 철저하게 성공해 문명이 욕망에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면 인간은 결국 멸종하고 말 것이다. 인간은 성욕 없이 번식할 수 없다. 그래서 일정한 단계까지 성장한 뒤에는 이 과정을 역전시켜 재성화再性化해야 한다. 어릴 때 거세된 것, 욕망의 가능성을 배제당한 것이 다시 한 번 욕망의 대상이 된다. 재성화의 과정은 또다시 거대한 파란을 일으키며 우리의 의식을 뒤집는다."(158-9)


"프로이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거나, 의식의 내용을 배치하는 일은 이성이나 이치로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 의식의 내용은 이미 변조된 것, 여과되고 정제된 무엇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 진입한 것은 모두 가짜이며 허위이다. 진실에 가까울수록 의식으로의 진입은 더욱 어려워진다. 문지기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하므로 변조된 이후에야 의식 속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의식은 끊임없이 잠재의식과 전의식 또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이 일으키는 소란 속에서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호트러진다. 우리의 의식은 매우 어지러운 체계를 형성하며, 끊어지고 갈라진 채 자주 연속성을 잃는다. 의식은 '연상 법칙'에 따르지 체계적인 논리 법칙에 따르지 않는다. 이런 전제는 20세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로이트가 없었다면 우리는 (기억의 거대한 미로를 드러낸) 마르셀 프루스트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제임스 조이스를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162-3)


"프로이트가 말하는 의식 구조는 이렇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자극을 받으며, 이런 자극은 특별한 기제를 통한 뒤에야 의식으로의 진입이 결정된다.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한 것은 억압되어 무의식 안에 갇힌다. 무의식은 기본적으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나올 수는 없는 일방통행로다. 그러나 무의식과 잠재의식/전의식 사이에는 구멍이 존재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영원히 '잠재의식'의 내용을 알 수 없다. 그것은 실제로는 '무의식'이며 의식으로 진입할 수 없는 것이다. 잠재의식 또는 전의식이라는 애매한 영역은 사실 무의식의 내용이 뚫고 올라온 취약한 부분이다. 그러나 무의식이 뚫고 올라올 때는 원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 무의식의 내용은 잠재의식이나 전의식이라는 애매한 공간으로 들어가면서 의식과 서로 뒤섞인다. 뒤섞임의 가장 주요한 기제는 '변형'과 '전이'다. 무의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언제나 추리에 의존하며 '변형'과 '전이' 등의 원칙을 이용해 역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165-7)


6장 정신병 및 치료


"프로이트를 이해하려면, 그의 자아론 또는 자아 구조라 불리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리비도를 지니고 태어난다. 리비도가 구성하는 자아를 프로이트는 이드id라 불렀다. 이드는 충동으로 가득 차 있어 언제나 그 성욕의 대상을 추구하거나 획득하고자 하며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 남자아이가 타고나는 공격성은 이드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 살고 있는 하나의 개체로서 우리는 이드를 통해 세계와 접촉해서는 안 된다. 이드 위에 에고라 불리는 것을 덧씌워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자아'라 부를 수 있다." "셀프는 자아로서의 에고와 이드를 포함한다. 셀프 안에는 충동적이고 말을 듣지 않으며 하루 종일 번식에 대해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의 기반을 빼앗는 일에 골몰하는 이드가 존재한다. 또 다른 자아인 에고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이드에 비해 복잡하다. 프로이트의 개념에서 사람의 복잡하고 흥미로운 정신 활동은 모두 에고 속에서 일어난다."(178-9)


"에고란 무엇인가? 에고는 사실 이드에 쫓기는 신세이며 진정한 의미로는 이드에 저항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에고는 외부 세계를 대할 때나 내면의 이드를 대할 때 오히려 주인 행세를 한다. 따라서 에고는 가장 대단한 기만이자 일종의 가장假裝이다. 에고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에고는 끊임없이 핑계를 대고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말하면서 실제로는 통제받는 스스로의 처지를 은폐한다." "대부분 시간에 진정한 조종자는 이드다. 그러나 에고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설득한다. '내가 바로 주인이다.' 에고는 이드를 포장하는 분장사이며 외부 세계와 이드 사이를 조율하는 협상자이다. 에고는 이드뿐 아니라 실제로는 이드와 상호 작용하는 외부 세계를 속이고자 하나의 자아로서 외부 세계와 마주한다. 에고는 세계와 마주하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이드가 주는 것과 외부 세계의 자극을 조율하고자 한다."(179-80)


"20세기에는 인간을 연구하는 과학적 방법론에 중대한 혁신이 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물질의 가장 큰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자주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으나 사물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다. 컵을 가지고 100번쯤 실험을 하더라도 컵은 여전히 컵이다. 그러나 대상을 바꿔 어떤 사람을 두고 실험을 하면서 같은 실험을 다시 한다면 그는 아마 다른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프로이트는 이에 대응해 '분석'을 설계하고 제시했다. 사람을 연구하는 연구자와 연구 대상인 피연구자 사이에도 상호 작용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일 수는 없다. 사물을 연구하는 과학은 이런 상호 작용에 골몰할 필요가 없다. 프로이트가 연구자와 연구 대상의 상호 작용을 파악하는 데 모범을 보인 뒤, 20세기에는 철학, 사학, 사회학, 인류학, 정치학 등 모든 학과가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185-6)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20세기 정신분석과 정신이해는 스펙트럼 형태로 변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사람이 정신병 환자이고 다른 사람은 아닌지 명확하게 가려낼 수 없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정신병자다. 정신병자는 환자가 아닌 사람보다 심리 기제의 운용이 다소 극단적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 상태는 하나의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이쪽에 정상인이 있고 저쪽에 정신병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둘을 나누는 경계가 명확한 구조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의 모든 예술가는 자기 안에 내재된 정신질환을 자각했다. 그래서 20세기 예술가들은 강렬한 광기의 경향을 지녔으며 극심한 고통을 받아들였다. 그런 광기나 고통이 없었다면, 이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20세기 예술은 기본적으로 광기의 예술이자 정신분열적 예술이다."(188)


7장 프로이트의 성공


"세기말 비엔나에서 프로이트가 직업을 선택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그는 유대인이었다. 유대 문화는 고도로 내향적인 자기반성 경향을 지녔을 뿐 아니라 농후한 신비주의 전통을 따랐으며 복잡한 종교의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특징들은 모두 유럽의 보편적인 발전 경향과 크게 대조를 이루었다." "둘째, 유대인이란 신분은 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프로이트는 의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자 무던히 노력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신분은 그에게 커다란 장애였다." "유대인인 그로서는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해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인지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반유대주의'는 무척 미묘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아주 적나라한 '반유대주의'도 존재했다. 그러나 훨씬 더 만연하고 처치 곤란한 것은 은밀하고 말하기 어려운 '반유대주의'였다."(195-7)


8장 프로이트의 유행


"프로이트는 어떻게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로 건너가자마자 그토록 빨리 학계를 정복할 수 있었는가? 전쟁이 몰고 온 비관적인 분위기와 불가피한 반성 작업 덕분이었을 것이다. 왜 인간이 그런 방식으로 서로를 도살해야 했는가? 왜 일찍이 휘황찬란하고 낙관적이며 진취적이었던 문명이 그 문명에 의해 창조된 새 시대의 인간을 이토록 황당한 방식으로 전멸시켜야 했는가?" "프로이트가 이해한 인간성의 전제는 리비도와 성욕, 공격성이다. 보다 중요한 점은 이런 성질이 문명의 닿을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에 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개념은 곧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황당무계한 파괴에 꼭 들어맞았다. 이런 전쟁은 더 이상 과거의 현실 조건으로 해석할 수 없었으며, 그 내재적 인과 사이에는 방대하고 맹목적인 어둠이 자리했다. 그것은 이성으로 측량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파괴의 욕망이자 원초적인 공격성이었다."(219-20)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어둠을 직시하고 파헤칠 것인가? 가장 쉬운 방법은 프로이트를 읽는 것이었다. 프로이트의 개념으로 자신의 꿈을 해석하고 자신도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탐욕스러우며 명예와 이익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여기서 나아가 유행했던 또 다른 수단은 이성적인 삶과 이성의 존재 상황에서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 대상들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이성적인 삶과 이성의 존재 상황에서 해석되지 않는 모든 대상에는 특수한 가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사물의 가치는 완전히 전도되었다. 이성으로 해석되지 않을수록 더 중요한 것이었고, 더 파헤칠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며,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프로이트 이론이 유입된 프랑스의 시대 흐름에서 우리는 비로소 당시를 풍미한 초현실주의 운동을 이해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는 인류의 마음 속에 꿈처럼 해석되지 않는 것들을 새겨 넣었다."(225-7)


"프로이트의 이론과 관점은 우리에게 인류의 문명사를 다시 읽도록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프로이트는 그리스 신화를 즐겨 인용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그리스의 신화와 비극을 인용한 것이다. 우리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거꾸로 이용해 그리스 비극을 다시 해독하고 그리스 비극이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스 비극의 '비극성'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류의 문명이란 욕망이 억압을 거쳐 승화된 결과라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승화'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화'(카타르시스)는 다른 의미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한편으로 문명은 변형되고 승화된 욕망의 창조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발전을 거듭해 욕망을 억압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인간의 존재는 이렇게 순환을 반복한다. 욕망의 억압은 문명을 창조하고 문명은 욕망을 억압한다. 멈추지 않는 과정이다."(237-8)


9장 프로이트의 서사 혁명


# 19세기 소설의 5대 원칙(에드워드 사이드)

1. 보완의 원칙 : 소설은 이미 벌어진 사건을 보완 서술한다.

2. 전진의 원칙 : 서술은 기본적으로 (시간상) 앞으로 나아간다.

3. 적합의 원칙 : 서술은 의미를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둔다.

4. 결말의 원칙 : 서술 배치는 선형적으로 결말을 향해 간다.

5. 완결의 원칙 : 소설의 서사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이다.


# 5대 원칙에 반하는 양피지 서사(프로이트)

1. 꿈은 끊임없이 서술하고 해석할 뿐 사건이 선행하지 않는다.

2. 꿈은 전진한 후에 제자리를 맴돌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꾼다.

3. 꿈은 서술에 어떤 의미를 담은 정합성을 갖고 있지 않다.

4. 꿈은 모든 단락이 끊임없이 수정되고 반복 등장할 수 있다.

5. 꿈은 의미와 서술 사이에 주어진 주종 관계를 해체한다.


"프로이트 그리고 『꿈의 해석』이 보여준 글쓰기의 영향으로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사와 서술의 모든 것이 전도되어 오히려 좋은 텍스트나 서술이란 본디 애매한 것이라고 인식되었다. 좋은 텍스트나 서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행위이지, 또 다른 의미를 실어 나르기 위한 부수물이 아니었다. 프로이트의 시대에, 『꿈의 해석』과 같은 작품을 계기로, 이런 인식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보이는 수많은 상식, 예컨대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작품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읽어 낸다는 사실조차 19세기 프로이트 이전에는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적어도 19세기 서술 주류에서는 이런 사실이 용납되지 않았으며 아예 그 관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19세기에는 작가만이 권위를 지녔다. 작가는 독자에게 텍스트의 모든 것을 수여한다고 간주되었으며, 작가와 독자 사이의 상하 질서는 너무도 확고했다."(270-1)


"(프로이트 이후로) 작가의 의도와 작품은 점점 거리를 두고 멀어졌다. 이는 엄청난 해방이었다. 글을 짓거나 쓰면서 작가는 더 이상 무엇을 쓰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말하는 그 자체, 말하는 과정이 곧 문학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관점을 달리해서 말하면, 작가는 기존에 누리던 보호와 보장을 잃은 셈이다. 독서 행위에서 독자가 지니던 맹목적인 신앙은 사라지고 말았다. 19세기의 독자는 기본적으로 작가를 믿었고 그의 능력과 그가 쓴 것을 믿었다. 작가에게는 지고의 권위가 있었다. 20세기에 이르면, 작가의 권위를 독자의 권위가 대체한다. 나아가 독자는 작가의 권위를 위협하고 부정하기에 이른다. 작가는 더 이상 자기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나 그 작품에 대한 최고의 해석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작가가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작품을 써낼 수 있기에, 독자는 작가보다 더 작품에 가까운 존재일 수도 있고, 나아가 작품 내부의 논리로 작품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거부할 수도 있다."(273-4)


10장 프로이트와 더불어


"다윈에서 마르크스를 거쳐 프로이트에 이르는 사상 조류는 점점 더 개인을 추구하며 개인화하는 경향이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개인주의의 기초 위에 성립한 것으로 언제나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며 개인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한다. 그의 이론에서 집단과 사회는 개인 억압의 근원일 뿐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종족 및 우생학과 관련한 새로운 집단주의의 영향으로 다음과 같은 논제가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민족이나 종족 같은 집단에도 정신의 구조가 존재하는가? 프로이트가 개인의 차원에서 창안했던 이론은 어떤 방식으로 민족이나 종족과 같은 기타 집단 단위의 인식 연구에 활용될 수 있는가?" "나치 독일이 유대인 프로이트의 이론에 매우 적대적이었기에 그때까지 프로이트 학설의 영향력은 잠재적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전쟁에 대한 반성, 특히 나치 독일의 집단 행위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짐에 따라, 프로이트의 사유는 잠복기를 끝내고 발현되어 정신분석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282-3)


"정신분석은 상징에 매우 민감해 많은 곳에 적용할 수 있다." "가령, 영화는 1초에 24프레임으로 구성되지만 아무도 프레임 별로 영화를 보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 수많은 이미지 프레임이 연결된 허상이다. 영화와 꿈은 이 점에서 가장 닮아 있다. 중요하지 않은 자잘한 부스러기가 수없이 그 사이에 끼어 있다. 하나의 장면은 누군가의 연출에 의해 설정되지만, 더할 나위 없이 '말끔한' 장면에도 중요하지 않은 부스러기는 수없이 포함된다. 이 이미지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으며,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우리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하지 않은 이미지들은 꿈에서 사용되는 일상생활의 파편과 유사하다. 프로이트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화관에서 이처럼 서로 다른 것들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정신분석의 방법으로 행하는) 분석의 중요한 기능은 확실한 답안을 제출하는 데 있지 않고 더욱 풍부한 의미를 추구하는 길을 찾는 데 있다."(2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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