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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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승전의 영광과 축복을 몸소 체험하면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생존은 '제국의 영유(領有)'에 달려 있으며, 일본은 자위(自衛)를 위해서 영토를 확대해온 것"(46)이라는 호전적 애국주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정치가들이 국내의 농촌 과잉인구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만주를 일본 국민의 발전을 위한 "독점적 지역"으로 재인식하면서, 만주는 "생명선"이자 일본의 "특수권익"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나갔다.


기획원을 본거지로 삼아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 건설을 추진했던 일본의 혁신관료들은 일찍이 기타 잇키가 <일본개조법안>에서 주장했듯이 폭력을 수반한 국가개조를 옹호하였고, "독자적인 법칙 아래 운동을 완성하는 사회의 구조 또는 그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그 공학적인 지도를 실행"(31)해야 한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사회과학도 수용했다. 기시를 비롯한 이들은 국가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테크노크라트적 지도자"(33)로 자신들을 자리매김했다.


떠오르는 제국 일본에게 만주는 조선을 지배하고, 중국을 제압하며, 소련을 감시하는 교두보이자, 미국과 벌이게 될 최후의 한판을 준비하는 병참기지였다. '세계제패'라는 막중한 운명을 짊어진 만주국은 계획경제, 군부독재, 사상통제가 한 몸을 이룬 거대한 병영국가로서 야심찬 '정치가'와 '군인'들의 등용문이었다. "박정희를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도, 기시 노부스케를 '정치가'로 단련시킨 것도 모두 만주제국이라는 대일본제국의 '분신'이었던 것"이다.(12)


박정희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을 이념으로 하는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제도나 사상 면에서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황민화정책이 본격화"(107)되던 193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 "박정희와 같은 청년들이 나중에 '피지배민족'에서 '제국적 주체'로 변모하고 만주에서 활약할 꿈을 꾸려고 했던 것도 이러한 제국 일본의 동심원적인 확대가 가져온 '음덕' 덕분"(47)이었으며, "박정희가 택한 길은 '동아신질서'에서 제국의 정당한 주체로서의 지위를 살려 황국 군인이 되어 그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었다."(122)


그러나 1944년 12월 소위 임관과 1945년 7월 중위 진급이라는 그의 짧은 성공은 종전(終戰)으로 중단되었다. "만주에서 종전을 맞이한 박정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도하는 광복군에 합류한 뒤 이듬해 5월에 귀환선 편으로 부산에 도착했다."(123) 1948년 여순사건에 따른 숙군작업에서 남로당 가입이 적발된 박정희는 1949년 2월의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으로 파면이 언도되었지만, 그마저 10년 감형과 형집행정지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를 부활시킨 것은 백선엽을 비롯한 만주군 선배들의 배려와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이었다. 


한편, 미국의 일본점령을 "일본 국민 길들이기, 모럴의 파괴"(200)라고 규정한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을 향한 "잃어버린 뿌리에 대한 열렬한 향수"와 "심오한 꿈이 깃든 강력한 정치"(160)에 대한 대중의 갈망을 연료 삼아 전후 정치권에서 부활을 도모했다. 그는 점령에 대한 반동으로 확산되는 "내셔널리즘 풍조"를 적극 이용하여 세력을 얻었고, 만주국에 적용하던 통제경제 실험을 "일본적 경제시스템의 원형"(178)으로 단단히 이식시켰다. 기시에게 "일본헌법은 일본의 빛나는 전통과 역사를 깎아내리는 전전부터의 오점"에 불과했으며, "자주적인 헌법을 새로이 제정하는 것"(206)만이 점령정치의 굴욕을 씻는 유일한 길이었다.


박정희 역시 "막강한 군을 배경으로 하는 리더십, 소수의 경제 테크노크라트에 의한 의사결정과 자원배분 권한 독점, 수출시장 확보와 기술력 및 외자 도입을 목적으로 하는 대외관계 구축, 중화학공업화를 향한 적극적인 재정지출, 그리고 만주국협화회를 방불케 하는 국민동원을 위한 새마을운동 등"(218) 만주국과 유사한 형태로 국가를 조직했다. "박정희 정권 치하의 한국은 만주국에서 거행된 국민대회, 추도식, 전몰자기념비, 학생웅변대회, 표어 짓기, 반공대회, 체조, '건설'이나 '재건'이 붙은 슬로건, '총력안보', '총동원' 등을 모조리 모방"(271)한 병영국가였다. 기시가 청출어람의 옛 식민지 지도자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월 혁명 이후 "한 번 더 혁명해야 한다. 혁명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외친 함석헌은 물론이요, <사상계>의 지식인들도 "정부의 무능과 분열, 인플레이션과 실업자의 증가, '혁명과업'의 후퇴 등을 엄하게 추궁하면서 경제번영의 건설과 국민성의 '개조'라는 두 측면에서 국가발전의 이정표를 제시"(220)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시 강력한 국가주의는 모두의 염원이었다. "빈곤에서의 해방이라는 경제적 욕망과 '조국 근대화'라는 민족주의적 욕구"(224)가 전국민을 감싸고 있었기에,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프로젝트는 자율과 동원이라는 양대 엔진을 달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혼돈에 빠진 조국을 구해낸 "중흥의 아버지"는 1968년 제2경제론을 표방하여 동원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것은 "일본의 교육칙어를 상기시키는 '국민교육헌장'의 제정과 민족교육의 강화"(243)를 통해 추진되는 정신의 동원이었다. '화랑도'에서 민족정신의 기원을 찾는 이선근의 '신라중심사관'은 "북한과 대치하며 민족사관을 정립해서 이데올로기 면에서 국내체제를 다잡으려는 박정희 정권에게 유용"(266)한 수단이었다. 


마침내 "1972년 11월 21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9퍼센트의 투표율과 91.5퍼센트의 찬성으로 유신헌법이 확정"되었다. 대통령이 "국회해산권과 긴급조치권을 장악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함으로써 의회와 사법에도 견제"(252)당하지 않는 초법적인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 마지막은 다시금 혼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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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중국까지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이근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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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중국 사유에 천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회'와 '회귀'라는 방식을 통해 "틀 바깥의 사유 가능성"(12)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회'는 "사유의 낯설음이 무엇"인지를 체험하는 과정이며, '회귀'는 "유럽적 이성을 중국이라는 바깥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명"(15)하는 방식이다. 즉, 중국 사유는 유럽적 이성의 대립항이나 우열을 가늠하는 경쟁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바깥에서 '자아'의 한계를 검증하고 최종적으로 '자아'로 되돌아가는 노정을 확장해주는 '다른' 사유의 지평인 것이다.


그리스 모델은 '효율성'에 기반한다. "효율적이려면 모델의 [관념적인] 형태를 구성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설정"한 뒤, "그 목적을 근거로 행동에 착수한다." 이처럼 "유럽의 고전 사유는 지성과 의지 두 능력이 결합한 작용을 구상"(17)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이론과 실천의 불균형"이라는 난제(aporia)가 도출된다. "실천은 이론의 수준으로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구 사유에는 언제나 "매개자", "중간자"가 '요청'되며, 이것이 "모델화와 적용을 나누는 구렁을 메우는"(19) 역할을 한다.


그러나 모델과 적용을 "매개"로 연결하는 방식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전쟁이 대표적인 예인데,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실제 전쟁은 "결코 모델로서의 전쟁처럼 진행"되지 않으며, "이것이 바로 전쟁의 '본질' 또는 '개념'이다." 그는 모델화가 "전술에서 전략으로 올라갈수록 덜 작동한다는 점"(27)을 간파했다. 제식동작은 훈련이 가능하지만, 전투상황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결국 전략의 완성은 '천재적 능력'으로 무장한 위대한 장군을 필요로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진행과정에서 모델화가 빗나가는 것을 '마찰'(fric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마찰은 계획한 행동을 세계에 던졌을 때 주변상황들로부터 닥쳐오는 저항이다."(29) 


중국 사유는 '모델화'와 '적용'이라는 구분을 파괴한다. <손자병법>은 전략가가 '지세', '지형'[形]으로 규정되는 상황에서 출발할 것을 권고한다. 이 상황은 "모델화한 상황이 아니라, 내가 이미 개입되어 있는 상황이다."(32) "전략의 원리는 상황 속에서 유리한 요인들을 탐지해내고 그것들을 활용"(34)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처럼 중국 사유는 "목적성에 대한 사유을 제거"하고, "목적을 고갈시키는 대신 성향[勢]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40)


한마디로 중국 사유는 "수단-목적보다는 조건-귀결의 관계"를 중시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상이 도가이다. 도가 사상은 "성향에 순응하고 성향과 함께 가는 것, 앞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보조하는 것, 즉 영광도 없고 심지어 주의를 끌지도 않으면서 겸손하게 둘째가 되는 것"을 말한다. 노자는 이를 한마디로 요약한다.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도와줄 뿐이다. (輔萬物之自然)"(51) 


또한 중국 사유는 "자아-주체보다는 상황에서 출발"(54)한다. 유럽 사유는 "관념적 형상을 실재 속에 집어넣는" 과정에서 "항상 어느 정도의 인위성을 전제한다."(55) 그러나 "중국 사유의 중심 용어는 '변화'(變化)이다." 중국 사유는 "행동하기보다 변화시킨다."(60) 유럽이 존재와 인식을 '잠재태'와 '현실태'라는 대립 양상으로 파악할 때, 중국 사유는 사태를 하나의 흐름 안에 편입시킨다. "이런 운행은 그 자체로서 온전한 실재(운행의 도道)이다."(70) 길에 대한 유럽적 상상은 항상 "목적(telos) 관념과 결부"되지만, 중국의 도(道)는 "어딘가로 이끄는 길"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일이 가능한 길"이다. 여기에는 "운행이 있을 뿐 진보는 없다."(75-6)


우리에게 은폐되고 잠재되어 있는 전제는 저자가 반사유의 역할을 맡기고 탐색한 중국 사유이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 안에 '형세'와 '변화'를 응축하여, 인위적 조작 가능성을 제거한다. 모든 사유의 궁극이자 원천인 '하늘'(天)은 "절대 고갈되지 않고 끊임없이 쇄신되도록 하는"(76) 원리이다. 하늘은 '조화'의 가치만을 추구하기에, 중국의 문사들은 "군주에 저항하기 위한 이상(ideal)으로 조화만을 강조하였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그 이외의 다른 이상은 생각"(139)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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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타밈 안사리 지음, 류한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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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오래된 미래가 로마 제국이라면, 이슬람의 오래된 미래는 초기 칼리프 공동체이다. 우리가 무함마드의 초기 칼리프 공동체를 이슬람 원리주의의 모태로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다면, 아테나이의 "정치적" 시민들이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고자 애썼던 것처럼, 종교적 열정을 세공하여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를 세우고자 했던 또다른 현실태를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믿었으며, 자신이 "새로운 교리를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미 말한 것을 다시 이야기한다고 믿었다."(63) 그는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했듯이, 수많은 이교도의 신들을 모시는 사원들로 오염된 메카를 알라의 유일한 성지로 되돌리고자 했다. 그 첫 단계는 메디나로의 이주, 곧 히즈라[단절]였으며, 그곳에서 "'움마'라고 부르는 무슬림 공동체가 탄생"(67)한다. 


'움마'는 부족을 초월한 연맹으로서, 이슬람은 "고립된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정의로운 공동체 건설이라는 프로젝트"(68)를 제시한 정치적 운동이었다. 이는 끝없이 이어지는 부족간의 분쟁과 약탈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던 당대인들에게 '평화의 영역'을 실증해 준 인식의 전환이었다. 이제 "움마에 합류하는 사람들은 동료 무슬림들과 있을 때라면 더 이상 뒤를 조심하지 않아도 되었다."(77) '분열'에서 '통합'으로 전환된 무슬림들의 역사는 "히즈라 이전(BH)과 히즈라 이후(AH)"로 나뉜다.


무함마드를 계승한 4명의 라시둔[올바르게 인도받은 사자들]도 '움마'를 공고히 하는 작업을 착실히 수행했다. 1대 칼리프 아부 바르크는 예언자 사후에 부족 이탈이라는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자 "오늘날까지도 이슬람을 사로잡고 있는 원칙을 세웠으니, 배교는 반역"이라는 원칙이었다. 그는 "하나의 무슬림 공동체는 얼마든지 많이 존재할 수 있는 무슬림 공동체 중의 한 종류가 아니라, 오직 하나만 존재할 수 있는 특별한 공동체"(90)라고 단언했다.


2대 칼리프 우마르는 쿠란과 무함마드의 지령을 "이슬람 교리의 주춧돌"로 삼아, "무슬림들로 하여금 계시가 명한 것이라면 크든 작든 모든 경우에 지키도록 결의"하게 만들었다. 우마르는 학자들이 "계시의 내용과 무함마드의 일생, 그밖의 관련 자료들에 몰두 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는 "장차 이슬람의 주요 사회 제도 중 하나이며 '학자들'을 뜻하는 울라마가 자라난 씨앗이 되었다."(106-7)


3대 칼리프 우스만은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지켜나갔지만 자신의 관료들에게 금욕을 요구하지는 않았다."(116) 그가 물려받은 무슬림 공동체는 정복 사업의 연이은 성공으로 제국의 반열에 들어섰고, 권력을 장악한 신흥 상류층은 칼리프가 강조하는 청렴과 개혁에 대한 저항의 단초가 되었다. 4대 칼리프 알리는 다른 칼리프들이 "무함마드가 제시한 공동체의 미래상을 지키는 수호자"로 자리매김할 때, 자신을 "내면의 불꽃을 지키는 자"로 정립하여 내면에 근거한 신비주의의 밑돌을 놓았다. 


"알리가 죽으면서 이슬람 역사의 첫 번째 시대가 끝났다."(130) 우마이야를 위시한 지배 계급은 청빈과 금욕,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라는 '움마'의 이상을 벗어던지고 여느 제국과 다를 바 없는 세속 권력을 수립했다. 이슬람 공동체는 쿠란과 하디스[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것], 키야스[쿠란과 하디스에서 유추한 지침], 이즈마[학자들이 합의한 지침]로 이어지는 율법 체계를 정교하게 다듬고, 샤리아[삶 전체를 규율하는 만고불변의 법칙]를 완성했지만, 초기 칼리프 공동체의 이상과 실천은 종교 분파들 사이의 분쟁을 정당화하는 구호로 격하되었다. 


번창하는 제국에서 안주하던 무슬림들의 실존을 뒤흔든 것은 몽골의 침략이었다. "책의 백성"도 아닌 몽골족에게 짓밟혔다는 현실의 참담함 때문에 "이슬람 신학자들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괴로워했으며 일반 무슬림들은 신앙에서 시험을 겪으면서" 내면의 동요에 시달렸다. "이슬람 공동체의 보편화가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믿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하고 묻는 것이 당연했다."(264) 1452년 "오스만 왕조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승리를 거뒀을 때 이슬람은 무슬림 세계전체가 재기하리라 확신"(289)했지만 그 승리는 어둠을 예비하는 찬란한 석양빛에 불과했다.


1500년~1850년의 식민화 기간 동안 "유럽 문명은 이슬람 문명과 한 번도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351) 서유럽은 식민지에서 강탈한 자금으로 원자재를 싹쓸이하고, 제조업 기반을 무너뜨려, 경제를 혼돈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제국을 손아귀에 넣었다. 오스만 왕조가 무너진 것은 사회의 기능 장애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운영되어서 다른 상황을 상정할 이유가 없는 "높은 수준의 평형 상태라는 덫"(429)에 오랫동안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병사들이 아니라 무역상이었다."(359) 


무슬림들은 다시금 "무슬림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확장해나가는 과정이 계시의 진실성을 증명한다면, 이 새로운 외국인들 앞에 무슬림이 무력하게 복종하는 현실은 이슬람의 어떤 면을 드러내는가"(398)라는 물음에 집착했다. 현재의 실패와 일상화된 모욕을 벗어나기 위해 제국을 재건하고 이슬람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은 "이슬람 권력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욕구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었다."(399) 19세기 이후의 이슬람 세계는 세속적 근대주의자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대립하면서 수시로 이를 조장하고 이용하는 서구를 향한 반감으로 점철되었다. '움마'는 지하드를 이슬람의 "여섯 번째 기둥'으로 격상시킨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다양한 변종들"(516)의 세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페르시아는 민주주의의 성지를 침략하려다 마라톤 평원(기원전 490)과 살라미스 해안(기원전 480)에서 몰살당한 야만의 왕국이 아니다. 페르시아는 정복자에 대한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정복한 지역의 주민 전부를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43) 가혹한 수법을 구사했던 아시리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등장했다. 그들은 앞선 정복자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하나의 큰 텐트 아래에 여러 민족을 두는 다문화 전략"(45)을 펼쳤으며, 이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오스만 제국까지 이어지는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서구 문명은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최초로 정복했다고 말하지만, "그때는 이미 '페르시아'가 세계를 정복한 뒤였다."(50) 그 제국은 태초부터 타락한 광신의 본산지가 아니라,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국가의 본질을 습득하던 또 다른 세계였다. 




   The essence of a modern state is centralized authority, bureaucratic management, the efficient delivery of the public services that only a state can provide; Persia provided fewer services than a modern state and "outsourced" much of the work to official in semiautonomous political dependencies, but the principle was there.


   "근대 국가의 본질은 중앙집권화, 관료 행정, 국가만이 제공할 수 있는 공공 서비스의 효율적 수행에 있다. 페르시아는 근대 국가에 비해 소수의 공공 서비스를 제공했고, 반자치 상태의 속령들이 공식 업무의 상당부분을 "위탁경영"하긴 했지만, 근대국가의 원리가 존재한 곳이었다." -Alan Ryan, <On Politics>, Introduction p.2



서기전 386년에 페르시아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에 평화조약을 맺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전쟁이 벌어지면 자신들이 직접 개입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페르시아가 에게해와 소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상위 권위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유원, <역사 고전 강의>,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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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역사
마크 마조워 지음, 이순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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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은 오랫동안 발칸을 안개에 가려진 이교도의 땅이자, 폭력에 물든 변방으로 취급해 왔다. 주류 사학자들은 오스만제국을 "기원, 전통, 종교가 유럽과 확연히 다른 곳"이며, "유럽 문명이 태동한 지역을 통치하는 '아시아족', '유목민', '야만인'들"의 점령지라고 외면했다. 오스만제국이 유럽에 편입된 것은 "제국이 쇠락하는 것이 분명해지고 러시아가 부상하는 것에 대한 우려감이 팽배해진"(p.30) 근대의 길목에서였다.

발칸을 일군 농민들에게 오스만제국은 안전지대라는 의미에서, 20세기 유대인들의 피난처였던 합스부르크 제국과도 같은 존재였다. "앞선 세기의 기독교인 지주들은 날이 갈수록 농민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데, 오스만제국이 싹쓸이를 해준 것이 바로 이 지배계급"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훗날의 발칸 국가들의 모습은 "자체 귀족층이 없는 '농민 민주주의', 다시 말해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 형태를 띠게 되었다."(pp.60-1)

오스만제국 시절에도 발칸 인구는 태반이 기독교도였는데, 이것은 "기독교도들이 높은 세금을 물고 있었고, 이들이 대규모로 개종할 경우 제국의 재정이 허약해질 것"(p.101)을 우려한 술탄이 개종에 별 열의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교회는 오스만제국의 방임 아래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가톨릭 공세를 피해 착취와 부패에 물들어갔고, 이는 "농민들이 '그리스' 교회에 착취당했다는 감정을 갖게 되어 결과적으로 발칸 민족주의가 태동하는 원인이 되었다."(p.107)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1789년 나폴레옹이 오스만 이집트를 침공한 것은 발칸 기독교도 지성인들의 정치적 생각을 급진적으로 바꿔놓았다."(p.134) 리가스는 "국민이 언어나 종교에 관계없이 주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여, 아직 윤곽도 잡히지 않은 '국가Nation' 개념을 오스만 왕조와 정교회 앞에 놓았다. 그러나 "'루마니아'나 '불가리아'라는 말은 1830년도까지도 일부 지식인과 운동가들에게만 의미 있는 말이었고,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도 그 점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었다." 그때문에 "신생국 지도자들은, 오스만의 세계관에 푹 젖어 있는 농촌 사회에서 국가를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pp.156-7)

"종교의 시대가 끝나고 이데올로기의 시대"(p.186)가 오는 발칸을 지배한 것은 민족주의였다. 19세기 민족주의는 독일과 이탈리아 같은 신생국들을 "더 크고 합리적인 경제 통합체"(p.20)로 묶어준 반면, 발칸에서는 국가의 난립을 자극했다. 발칸의 신생국들은 저마다 "중세나 고전시대로 돌아가 자신들의 국가적 뿌리를 캐내려" 노력했고, "자국 역사가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그 시기[오스만제국]를 지워버리라고 주문했다."(p.37) 아울러 그들은 유럽 국가군에 끼기 위해서 "제국주의 압제에 항거하는 민족주의 투쟁과 저항을 벌였다는 그럴싸한 기록"(p.38)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발칸의 승리는 "강대국들의 힘을 빌려서야 결실을 맺은 무기력한 것"(p.143)이었기에, 정치가들은 "영토 확장에 대한 꿈"으로 훼손된 야망을 충족시키고자 했다. 발칸의 신생국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강대국들에게서 분배받은, 다시 말해 자국 영토 외곽에 놓인 '회복 안 된' 이웃사촌들의 땅이나 역사적 땅은 모두 자국 땅이라 고집했다." "대중적 실지(失地) 회복 운동은 여론을 결집시켰고, 국경 침입을 일삼는 비정규군의 자금 조달원이 돼주었으며, 강대국들의 조언이나 소망에 반하는 무모한 행위를 하도록 발칸의 군주들을 윽박질렀다."(p.165)

강대국들은 발칸 민족에게 자결권을 심어준 것이 아니라, 민족 순혈주의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만을 남겼다. 이는 "강요된 개종, 대량 처형,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도주"를 초래했으며, 신생국들은 "유럽에 남아 있던 오스만 지방들을 민족성 원칙에 따라 일소하려는 노력"(p.192)을 경주했다. 이 작업에는 이념이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 현대화에 몰두한 진보세력들도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 활발한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펴서 나라를 20세기로 진입시킨다"(p.197)는 명분 하에 소수 민족을 탄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강대국들의 의지 아래 "1929년 이후 발칸의 모든 나라에는 민주주의 대신 우익 독재정권"이 수립됐지만, 이들은 "농민의 불안정 고용이라는 난국을 타개해야 하는, 다시 말해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부르주아지 정치인과 이들을 계승한 보수적 정치인들에 대한 이런 환멸이 결국 1945년 이후 소련의 감시하에 좌파가 이룬 경제 소생 계획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p.209)

발칸의 비극은 그들이 "국가 건설을 위한 기나긴 투쟁으로 20세기를 거의 다 소진"하는 동안, 세계가 요동치면서 "국가라는 생각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었다는 점이다."(p.226) 발칸을 위협하는 것은 더 이상 제국의 도전이나 주변국의 적개심이 아니라 자신들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국제 경제"이다. 서유럽은 오랫동안 "발칸의 폭력을 원시적이고 비현대적이라고 몰아세우면서"(p.238) 야만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했다. 이제는 "국제 경제"가 제국의 가면을 건네받아 발칸을 갈아넣은 맷돌을 열심히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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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 평천하의 논리
헤어프리트 뮌클러 지음, 공진성 옮김 / 책세상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제국은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으례 제국의 주변부가 기대하듯이 도덕적 신뢰를 바탕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제국은 "도덕적 신뢰를 권력의 요소로 이용하는 법을 매우 잘 알지만, 결코 도덕적 신뢰에 맞춰 자신을 판단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p.55) 제국은 'The One'이며, 도덕적 신뢰는 제국이 가진 "권력 자원"의 하나에 불과하다.

'제국'이 '우세한 국가'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들이 'one of them'이 아니며, 그렇기에 "비교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최고여야 한다는 무형의 압력"(p.85)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냉전시대가 종결된 이후로 "미국이 '자애로운 패권국'에서 '강경한 제국'으로 변했다"는 주장은 "양극 체제가 부과했던 제약이 사라지면서 위신을 얻기 위한 경쟁이 더 치열해진 결과"(p.88)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과거 영국은 독일의 팽창과 러시아의 남하, 그리고 미국의 급속한 부상이라는 난제에 직면하여 "세계정치적 패권국의 지위를 지키고자 했다."(p.89) 해양 제국이었던 영국의 강점은 "육상 제국이 지배 공간을 밀집시키면서 등장하는 반면에 해양 제국은 자기의 무역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확장하면서 팽창"(p.122)하기 때문에 정치,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양 제국은 "주변부에 대한 관심이 본질적으로 착취적이며 문명적 성취를 확산하려는 어떤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p.139)는 단점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오래 존속하는 제국의 비밀은 중심부의 판단과 결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쇠퇴기에 주변부가 제국의 수호자로 나서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것은 "그 지역들이 제국에 속해 있다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때였고, 제국의 붕괴가 그들에게 이익보다 손해가 된다고 확신했던 때"(p.140)를 예비하는 작업이다.

여기에는 물론 경제적 이해관계가 긴밀하게 얽혀 있지만, 주변부 주민들이 제국 지배기를 좋은 시절로 내면화하는 문명의 매력, 곧 '이데올로기의 힘'이 결정적인 원천으로 작용한다. 영국에 밀려 군사적 우위를 상실한 스페인이 그토록 빨리 몰락한 이유는 그들이 "군사적 우위의 상실을 보충해줄 수 있는 다른 종류의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p.159)

빈번히 국가간 분쟁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정치사상의 주류는 제국 지배의 평화보다는 "원칙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 행위자들의 집합적 자기 구속이 평화를 보증"(p.191)하는 국가 간의 협약에 따른 평화를 선호했다. 반면 미국이 주변 국가들을 압도했던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유사종교적 확신을 이용하는 제국적 수사"와 "종교적 확신에 기대는 반제국적 대응 수사"가 격렬하게 부딪혔다. "반제국적 악마론은 제국의 중심부를 도덕적 타락과 죄악의 온상으로 묘사함으로써 같은 방식으로 제국적 악마론에 보복"(p.218)하는 악순환 속에서 번성했다.

20세기 역사를 보면 반제국적 행위자들은 비록 "전쟁터에서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제국을 지치게 하고 제국의 힘을 빼앗고, 또 그렇게 하여 제국을 철수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일에서는 성공적이었다."(p.253) "파르티잔 전쟁의 전략적 합리성은 공격하는 쪽이 언제나 즉각 비용을 지불하지만 그에 대해 평화나 항복의 형태로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키신저는 파르티잔은 지지 않으면 이기지만, 정규군은 이기지 않으면 진다는 말로써 이 문제를 요약했다."(p.256)

그러나 프란츠 파농의 기대와 달리 "전쟁과 폭력의 환경은 식민 억압의 굴욕을 적극적으로 극복한 자유롭고 자의식 강한 사람들을 길러내지 않았고, 오히려 정신적으로 상처 받은 군상들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시련과 고통에 대해 보상받기를 기대"했고,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진짜 업무가 여전히 자신들 앞에 놓여 있다"(p.289)는 사실을 외면했다. 폭력이 실낱같이 남아 있던 통제를 벗어난 지역에서, 비극은 자발적으로 무대를 내려오지 않는다. 시리아 내전과 ISIS가 이를 증명한다.

주변부가 제국 질서를 악마시하는 것은 피로 물든 역사가 남긴 가르침이자 굴레이다. 억압과 반란, 통치와 일탈만이 제국과 주변부의 관계를 규정하는 요소는 아니다. 주변부는 제국과 경직된 경계(Grenzen)를 긋고 대립할 수도 있고, 유연한 완충 작용을 하는 경계 지대(Grenzräume)를 형성할 수도 있다. 힘의 우열이 명백한 세계에서 '인권을 지키려는 자'는 '가정을 지키려는 자'를 이길 수 없다. 국제 관계는 "잔혹한 교사"(stern teacher)이다. 주변부의 시민들이 제국에 대해 탐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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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오 2016-03-15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좋아요
많은걸 알게됐어요^^

nana35 2016-03-15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