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 평천하의 논리
헤어프리트 뮌클러 지음, 공진성 옮김 / 책세상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제국은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으례 제국의 주변부가 기대하듯이 도덕적 신뢰를 바탕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제국은 "도덕적 신뢰를 권력의 요소로 이용하는 법을 매우 잘 알지만, 결코 도덕적 신뢰에 맞춰 자신을 판단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p.55) 제국은 'The One'이며, 도덕적 신뢰는 제국이 가진 "권력 자원"의 하나에 불과하다.

'제국'이 '우세한 국가'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들이 'one of them'이 아니며, 그렇기에 "비교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최고여야 한다는 무형의 압력"(p.85)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냉전시대가 종결된 이후로 "미국이 '자애로운 패권국'에서 '강경한 제국'으로 변했다"는 주장은 "양극 체제가 부과했던 제약이 사라지면서 위신을 얻기 위한 경쟁이 더 치열해진 결과"(p.88)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과거 영국은 독일의 팽창과 러시아의 남하, 그리고 미국의 급속한 부상이라는 난제에 직면하여 "세계정치적 패권국의 지위를 지키고자 했다."(p.89) 해양 제국이었던 영국의 강점은 "육상 제국이 지배 공간을 밀집시키면서 등장하는 반면에 해양 제국은 자기의 무역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확장하면서 팽창"(p.122)하기 때문에 정치,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양 제국은 "주변부에 대한 관심이 본질적으로 착취적이며 문명적 성취를 확산하려는 어떤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p.139)는 단점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오래 존속하는 제국의 비밀은 중심부의 판단과 결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쇠퇴기에 주변부가 제국의 수호자로 나서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것은 "그 지역들이 제국에 속해 있다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때였고, 제국의 붕괴가 그들에게 이익보다 손해가 된다고 확신했던 때"(p.140)를 예비하는 작업이다.

여기에는 물론 경제적 이해관계가 긴밀하게 얽혀 있지만, 주변부 주민들이 제국 지배기를 좋은 시절로 내면화하는 문명의 매력, 곧 '이데올로기의 힘'이 결정적인 원천으로 작용한다. 영국에 밀려 군사적 우위를 상실한 스페인이 그토록 빨리 몰락한 이유는 그들이 "군사적 우위의 상실을 보충해줄 수 있는 다른 종류의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p.159)

빈번히 국가간 분쟁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정치사상의 주류는 제국 지배의 평화보다는 "원칙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 행위자들의 집합적 자기 구속이 평화를 보증"(p.191)하는 국가 간의 협약에 따른 평화를 선호했다. 반면 미국이 주변 국가들을 압도했던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유사종교적 확신을 이용하는 제국적 수사"와 "종교적 확신에 기대는 반제국적 대응 수사"가 격렬하게 부딪혔다. "반제국적 악마론은 제국의 중심부를 도덕적 타락과 죄악의 온상으로 묘사함으로써 같은 방식으로 제국적 악마론에 보복"(p.218)하는 악순환 속에서 번성했다.

20세기 역사를 보면 반제국적 행위자들은 비록 "전쟁터에서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제국을 지치게 하고 제국의 힘을 빼앗고, 또 그렇게 하여 제국을 철수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일에서는 성공적이었다."(p.253) "파르티잔 전쟁의 전략적 합리성은 공격하는 쪽이 언제나 즉각 비용을 지불하지만 그에 대해 평화나 항복의 형태로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키신저는 파르티잔은 지지 않으면 이기지만, 정규군은 이기지 않으면 진다는 말로써 이 문제를 요약했다."(p.256)

그러나 프란츠 파농의 기대와 달리 "전쟁과 폭력의 환경은 식민 억압의 굴욕을 적극적으로 극복한 자유롭고 자의식 강한 사람들을 길러내지 않았고, 오히려 정신적으로 상처 받은 군상들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시련과 고통에 대해 보상받기를 기대"했고,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진짜 업무가 여전히 자신들 앞에 놓여 있다"(p.289)는 사실을 외면했다. 폭력이 실낱같이 남아 있던 통제를 벗어난 지역에서, 비극은 자발적으로 무대를 내려오지 않는다. 시리아 내전과 ISIS가 이를 증명한다.

주변부가 제국 질서를 악마시하는 것은 피로 물든 역사가 남긴 가르침이자 굴레이다. 억압과 반란, 통치와 일탈만이 제국과 주변부의 관계를 규정하는 요소는 아니다. 주변부는 제국과 경직된 경계(Grenzen)를 긋고 대립할 수도 있고, 유연한 완충 작용을 하는 경계 지대(Grenzräume)를 형성할 수도 있다. 힘의 우열이 명백한 세계에서 '인권을 지키려는 자'는 '가정을 지키려는 자'를 이길 수 없다. 국제 관계는 "잔혹한 교사"(stern teacher)이다. 주변부의 시민들이 제국에 대해 탐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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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오 2016-03-15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좋아요
많은걸 알게됐어요^^

nana35 2016-03-15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