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 18세기, 왕의 귀환 - 조선 4 민음 한국사 4
김백철 외 지음, 강응천.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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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탕평의 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했다. 일례로 자신의 즉위와 함께 집권한 노론 강경파가 신임환국의 복수를 집요하게 요구하자, 영조는 이들을 쫓아내고 소론 인사들을 요직에 임명해 정국을 주도하게 했다(정미환국, 1727). "그러나 1728년(영조 4) 영조와 소론이 시도하는 탕평에 중대한 시련이 닥쳤다. 소론과 남인의 급진 세력이 인조 대 이후 최대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영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심유현 등 소론 과격파가 주도하고, 영남과 기호 지역에 살고 있던 남인과 소론 명문의 후손이 적극 가담했다. 이 사건을 당시 충청도 청주에서 반란을 이끈 이인좌의 이름을 따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하고,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무신란이 진압되고 노론이 재차 명분을 쥐게 되었지만, "영조는 흔들림 없이 소론 주도의 탕평을 견지했다. 한쪽 세력을 일방적으로 배제하는 바람에 무신란이 일어난 측면도 있다면서 더욱 더 소론 탕평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다."(42)


"탕평 정국에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한 노·소론 탕평파는 각각 자기 정파의 주류인 강경파를 흡수해 세력을 키우고자 했다. 그런데 노론 탕평파는 강경파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지만, 소론 탕평파는 그렇지 못했다. 소론 강경파는 탕평파의 행태가 노론과 다를 것 없다면 강한 반감을 가졌다." "(노론 강경파가 주장한) 소론 강경파 숙청을 둘러싼 대립 구도가 커져 가던 1749년(영조 25) 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되었다." "노론 강경파가 볼 때, (영조가 남겨 둔 문제는) 부친의 즉위를 방해한 소론 5대신을 숙청하고 그들을 비호하는 이종성 등 소론 강경파까지 단호히 처벌해 아들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었다. 세자는 그러한 요구를 받을 때마다 자신의 궁료로 포진해 있는 소론 강경파를 옹호하거나 영조에게 판단을 미루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바로 이때 탕평 정국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1755(영조 31) 1월 전라도 나주 객사에 조정을 비방하는 괘서掛書가 내걸린 것이다."(46-7)


# 을해옥사(1755) : 나주에 유배 중이던 소론 윤지가 조정을 비방하는 괘서掛書를 내걸었다가 처단된 후, 이를 축하하는 과거시험에서 소론 강경파를 칭송하는 자들이 또다시 조정을 비방하는 괴시권怪試卷을 제출하자, 격노한 영조가 500여 명에 이르는 소론 강경파와 관련자들을 참하고 유배시킨 사건


"을해옥사로 소론 강경파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는 소론 강경파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던 세자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세자는 노론의 압박을 받는 가운데 소론 강경파와 관계를 설정하고 신임의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 등의 문제로 상당한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다. 여기에 1757년(영조 33)에는 그동안 세자를 보호해 주던 숙종비 인원왕후, 영조비 정성왕후 등이 잇달아 사망했다." 왕실과 조정에서 빚어진 복잡한 갈등에 시달리던 세자가 결국 정신질환을 일으켜 각종 비행을 저지르던 "그 무렵 세자의 생모인 영빈은 세자를 만났다가 죽을 뻔했다면서 그대로 놔두면 언제 변란이 닥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라고 영조에게 알렸다. 영조는 이를 근거로 세자의 죄를 추궁하고는 결국 세자를 뒤주에 가둔 채 폐세자의 전교를 내렸다." "영조는 세자를 8일간이나 내버려 두어 결국 죽게 만들었다. 1762년(영조 38) 윤 5월에 일어난 이 사건을 '임오화변'이라 한다."(49-50)


"1775년(영조 51) 무렵 영조는 정신이 극도로 혼미해져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워졌다. 세손은 (자신을 여러차례 위험에 빠뜨리고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하는) 외척들과 두루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세손이라는 지위와 이를 보호하는 영조, 정순왕후 등 공적 계통에 의지하고 있었다." "영조는 통치의 한계를 절감하며 세손의 대리청정을 지시하는 전교를 내렸다. 세손도 이를 반포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홍인한이 대리청정을 반대하고 조정에 이 사안이 알려지는 것을 막는 바람에 세손의 대리청정은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신하가 대리청정을 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손은 정순왕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충성스런 신하를 물색해 홍인한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소론의 서명선이 그 역할을 맡았다. 홍인한과 정후겸이 역공세를 펴기도 했으나, 영조의 단호한 의지에 따라 대리청정이 결정되었다. 석 달 후 영조가 승하하고 세손이 보위에 오르면서 숨가빴던 정치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55)


"영조가 필생의 과업으로 인식한 것은 '양역 변통'이었다. 양역 변통이란 국가의 안위에 영향을 미칠 만큼 심각한 수준에 이른 양민의 신역을 개혁하는 것을 말한다."(59) 영조는 가호 단위로 양역을 징수하는 호전제戶錢制를 실시하면 양인의 세금이 줄어드는 대신, 양반은 아예 내지 않던 세금을 가호마다 내게 되니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관료들의 반발은 적지 않았다. 개혁을 주도하던 탕평 관료들조차 "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대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양인이나 양반이나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양인은 부유한 백성과 궁핍한 소민으로 계층 분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양반들 역시 벼슬 길에 나가거나 향촌에서 농장 따위 사업 경영에 성공해 경제력이 있는 계층과 몰락한 잔반殘班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양인과 양반 모두 경제력에 따른 재분류를 선행하지 않는다면 국가에서 세금을 안정적으로 걷기 어려웠다. 관료들은 바로 이 점을 우려했다."(70)


"과세 대상을 넓히는 유포론은 선무군관포라는 변형된 형태로 흡수되었고, 영조가 지지한 호전론이 좌절한 마당에 더 급진적인 구전론을 시행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따라서 남은 대안은 토지에 부과하는 결전론뿐이었다. 이미 전세와 대동미를 토지에 근거해 거두고 있는데 양역까지 토지에 부과하면 3중 과세의 혐의가 짙을 터였다. 그래서 결전론은 마지막까지도 고려 대상에서 비켜나 있었지만 다른 대안이 마땅치 않았다. 이미 화폐경제가 급진전된 상황에서 가호나 장정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해 봤자 가난한 자들로부터는 세금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빈부 격차가 커지던 조선 후기에 경제력의 척도인 토지에 과세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토지 소유자인 양반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결전의 시행은 피할 수 없었다. "양역 감면에서 결전에 이르는 이 개혁 입법들을 (백성들이 국가에 지는 역을 고르게 한다는 뜻에서) 균역법이라 한다."(73)


# 영조 대에 논의된 개혁안 양역4조

1. 유포론游布論 : 세금을 내지 않는 양인 장정을 찾아내 추징

2. 호포론戶布論 : 신분에 관계없이 가호마다 면포 추징

3. 구포론口布論 : 개별 장정마다 면포 추징

4. 결포론結布論 : 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 부과

☞ 면포를 뜻하는 포布 대신 동전을 뜻하는 전錢을 쓰기도 함


"영조 대에 이루어진 개혁은 정치의 탕평, 경제의 균역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민국'을 향한 영조의 의지가 가장 잘 드러난 치적은 따로 있었다. 흔히 영조의 세 번째이자 최대의 치적으로 꼽히는 준천濬川이 그것이다."(84) 18세기 조선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계층은 토지를 잃고 떠도는 빈민이었다. 이들이 거지꼴을 모면하려면 "자신의 노동력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했다. 그러한 품팔이 노동은 주로 경강 일대에서 이루어졌다. 용산, 마포, 서강 등 경강 나루에서 쌀, 땔나무, 각종 잡화를 배에서 내리거나 실어 나르는 노역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동력을 사고파는 행위를 '고립雇立'이라 하고, 대가를 받고 품을 파는 품팔이꾼을 '고정雇丁'이라 했다."(90) 그들은 개천가에 움막을 짓고 모여 살고 있었다. "준천은 바로 이들 빈민을 품고 그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 시행된 것으로, 노비까지 백성으로 끌어안으려는 영조의 민국 구상에서는 핵심에 자리한 사업이었다."(84)


# 준천 사업(1760) : 총 57일간 공사인력 21만 명, 공사대금과 임금 전錢 3만 5000민緡, 쌀 2300석을 투입하여 청계천 바닥을 긁어내고 하천에 놓인 다리를 보수하며, 하천 양안에 축대를 쌓아 천변 주민의 안전을 도모한 거대한 공공 근로 사업


"북방의 여진족이 청 제국의 기치를 들고 쳐들어온 병자호란 이래 북쪽이라면 손사래를 치던 조선 사회에 ‘북학’이 등장했다."(107) "의리를 중심에 두는 노론의 태도는 호란에 따른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데 분명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작용도 드러났다. 조선이 유일한 문명국가라는 자부심은 어느 순간 조선의 문물만이 의미 있다는 독선주의, 다른 국가의 문물은 볼 것이 없다는 배타 의식으로 변질되었다." "노론에서 (이러한 태도를 반성하는) 목소리를 낸 대표적 인물이 홍대용과 박지원이다.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는 풍요로운 경제생활을 강조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이었다. 홍대용은 "성리性理란 별것 아니라 곧 나날의 삶에 필요한 일용日用에 흩어져 있다."라며 성리를 일용의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박지원은 독서를 하고 학문을 하는 것은 실용에 쓰이느냐 실용에 쓰이지 않느냐의 구분이 있을 뿐이라며 공허한 이론만 내세우는 성리학자들의 태도를 비판했다."(10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의리학을 중시한 유학자들이었다. 홍대용은 청에서 성현의 자손들이 머리를 깎이고 호복을 입는 등 예악 문물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했고, 박지원은 조선이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쓰는 데 상당한 자긍심을 가졌다. "이희경은 명청 교체를 큰 도둑(이자성)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주인(명)이 집을 버리고 도망치자 먼 곳에서 온 용기와 힘이 출중한 자(청)가 도둑을 쫓고 처자식을 데리고 와 거주하게 된 상황으로 비유했다. 청은 명을 멸망시킨 주범이 아니라 오히려 명에 침입한 도적 이자성을 내쫓아 준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빈집을 차지한 청이 전 주인 집의 기구와 법도가 훌륭한 것을 보고 감탄해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 문물이 다름 아닌 중화 문물이라는 것이다. 박지원, 박제가, 이희경 등은 하나같이 청 문물이 중화의 유제를 간직한 것이라 강조하면서 청 문물을 수용해도 될 근거를 마련했다."(119)


"북학파가 청 문물에 대한 관심에서 중국을 방문하던 그때 다른 이유로 청을 찾는 이들이 있었다. 1783년(정조 7)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연행한 부친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다녀온 이승훈이 그러한 인물이었다. 그가 중국에 간 목적은 천주교를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경에 간 이승훈은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인 최초 영세자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들이 대부분 남인이었다는 사실이다."(127) 서울 주변의 경기 일대에 살던 근기남인의 학풍을 계승하고 확장시킨 인물이 이익이다. 이익은 천주교에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그의 문하는 천주교를 적극 수용한 권철신-정약용 계열과 천주교에 반대해 척사론을 제기한 안정복-황덕길 계열로 분화했다. 권철신 계열은 다분히 탈주자학적 학문 태도를 견지하다가 천주교를 수용한 데 반해 안정복 계열은 보수적 주자학풍으로 회귀하면서 천주교 배척에 나섰다."(130-1)


"천주교와 성리학의 갈등은 천주교 측이 유교의 예제禮制를 거부한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폭발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사는 진사 출신 윤지충이 어머니의 신주를 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이른바 '진산사건'이 발생했다." "진산사건은 심각한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짙었다. 윤지충이 정약용 형제의 이종사촌으로, 정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를 수용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정조는 천주교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정치적 쟁점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어렵게 여러 정파를 망라하는 탕평 정국을 이끌어 냈는데, 남인이 천주교 문제로 공격을 받게 된다면 그간의 정치적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는 천주교를 믿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일 뿐 남인과는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다. 또 노론이 순정하지 못한 문체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아(문체반정) 노론이 남인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140-1)


"남인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축출된 이후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 있었지만, 정조의 정치적 배려에 힘입어 정계에 복귀했다.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를 발탁하려는 정조의 계획은 마침내 1788년(정조 12) 삼정승에 노론, 소론, 남인을 안배한 일종의 연립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결실을 맺었다. 정조 자신도 '붕당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의미 있는 조치였다. 이름 있는 가문 출신도 아닌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우의정에 발탁한 것은 그야말로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중인 이하 계층도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이들은 서얼 계층이었다. 그들은 사대부와 똑같이 벼슬길을 열어 달라는 통청通淸 운동을 전개했다." "신분이 낮은 숙빈 최씨의 소생 영조는 왕실로 보자면 서얼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서얼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1772년에는 <통청윤음>을 내려 서얼을 청요직에 등용할 수 있도록 했다."(149-50)


평민보다는 지위가 높았지만 양반 관직자와 비교해 차별에 시달리던 "중인 의식의 밑바탕에는 양반 문화에 대한 동경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위항문학 활동은 그러한 동경에서 전개된 측면이 크다. 그것은 하층민도 상층문화를 공유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시를 짓는 데 치중한 문학 행위는 기본적으로 양반 문화의 모방이라는 한계를 지닌 것이기도 하다. 더러 신분제를 비판하는 시를 지어 울분을 토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 발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중인의 의식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이때부터 선배들의 시사 활동을 계승하면서도 양반 문화를 모방하거나 자신의 신분을 한탄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사회변혁 운동의 전면에 나선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강위가 주도한 '육교시사六橋詩社'이다. 이 시사에서 활동한 중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가 개화운동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162-3)


"정조는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지었다. '모든 강에 비치는 하나의 밝은 달'이라는 뜻이니, 스스로 만백성을 밝게 이끄는 군주를 자처한 것이다. 이 자신감 위에서 그는 군주가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만백성을 통치하는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재위 기간을 바쳤다. 정조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 문제로 분열되었던 사대부 사회를 군주 중심으로 헤쳐 모이도록 해 활용 가능한 모든 인력을 국가 운영에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탁월한 능력과 기지로 이 과업은 거의 성공했고, 그동안 국가 운영에서 소외되었던 수많은 인재들이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안팎에서 일어난 변화를 모두 수용해 정조가 구상한 국가 체제로 끌어들이기에는 그의 재위가 너무 짧았고, 그가 가진 성리학적 세계관도 한계가 분명했다. 결국 정조는 1800년(정조 24) 다소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조선은 표류하기 시작했다."(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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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7세기, 대동의 길 - 조선 3 민음 한국사 3
문중양 외 지음, 강응천 엮음 / 민음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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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청 교체기 전후의 사건

1. 누르하치의 굴기(1583, 선조 25)

2. 임진왜란(1592)

3. 후금後金 건국(1616, 광해군 8)

4. 후금이 명에 선전포고(1618)

5.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제국 성립 선포, 조선 침략(1636)

6. 명 멸망, 산해관을 통과한 청이 북경을 접수(1644)


"광해군은 크게 세 방향에서 대후금 정책을 펼쳐 나갔다. 먼저 후금의 동향을 파악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조선의 내부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또 후금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취하면서 그들을 기미(상대를 견제만 할 뿐 직접 지배하지 않는 정책)하려 노력했다."(43) (1618년 누르하치가 이른바 일곱 가지 원한을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한 뒤 무순을 공격해 점령하자 명은 조선에 원병을 요구했다. 명의 원병 요구를 놓고) "광해군은 우선 파병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낸 주체가 명의 황제가 아니라 왕가수 등 신하라는 사실부터 문제 삼았다. 황제가 칙서를 내린 것이 아니므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광해군은 또한 조선의 약한 병력을 보내 봤자 명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내세워 파병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료들은 "조선이 명의 번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뒤, 조선이 원병을 파견하되 명의 지휘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45-6)


# 명군 총사령관 양호의 질타로 1619년(광해군 11) 1만 5000여 명의 병력 파견 / 심하전투에서 패전


"광해군은 (심하전투를 포함해 일련의 싸얼후 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한 후의 이른바) '전후 외교'에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당시 요동 등지의 명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조선이 고의적으로 항복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해군은 이 같은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와 관련해 광해군은 먼저 심하전투에서 전사한 김응하를 현창하는 사업을 벌였다." "김응하 추모를 통해 심하전투 당시 '조선군도 목숨을 바쳐 분전했다'는 것, '조선이 거국적으로 그를 추모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강홍립이 고의적으로 항복했다'고 여기는 명의 의심을 해소하려는 계책이었다." "광해군은 또 명이 조선에서 재차 원병을 동원하려는 것을 차단하는 데 부심했다. 광해군은 후금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도망병들의 견문 내용을 명에 알리는 한편, 조선군이 원정에 동참한 데 원한을 품은 후금이 보복 차원에서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49-50)


"명과 후금의 양단에 걸쳤던 광해군의 대외 정책은 서인이나 남인 신료들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샀다. 더욱이 광해군이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자행하고 경덕궁(지금의 경희궁) 건설을 비롯한 토목 사업에 집착하자 민심 또한 이반되었다." "1623년(인조 1) 3월 이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문제 삼아 김류, 이귀 등 서인들이 중심이 되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훗날 인조)이 주도한 정변이 일어났다."(57) 명은 "'인조와 새 정권이 명에게 충성을 다해야만 책봉해 준다'는 전제를 달고 있었다. 그나마 책봉을 결정하기까지 2년 이상 시간을 끌었다. 그 시간 동안 명은 '명분'과 '현실'을 놓고 고민한 끝에 '조선의 정변이 불법 찬탈임에도 불구하고 새 정권이 책봉을 간청하면서 오랑캐와 싸우겠다고 다짐하기에 봉전封典의 은혜를 베풀기로 했다'는 명분을 만들어 냈다. 명은 이제 조선에게 기존의 '재조지은'뿐 아니라 '봉전지은'을 베푼 존재로 떠올랐다."(59)


# 폐모살제廢母殺弟 : 서자 출신인 광해군은 즉위 후에 후환을 없애라는 대북파의 요구에 따라 영창대군(선조 말년에 인목대비가 낳은 아들)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시켰다.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로 칸에 오른) 홍타이지는 1627년(인조 5) 조선을 침략해 당면한 난제들을 돌파하려 한다. 그것이 곧 정묘호란이다.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도발한 목적은 복합적이었다. 가장 큰 목적은 '목에 걸린 가시'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또 조선을 협박해 생필품의 교역 루트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했다. 홍타이지는 조선 침략군의 사령관에 (독립을 꿈꾸던 사촌형) 아민을 임명했다. 그의 능력과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는 절묘한 인선이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군사력을 소모한 조선군은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금군은 순식간에 황해도까지 남하하고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했다. 후금군도 한계를 안고 있었다. 개전 초기 모문룡을 제거하는 데 실패한 데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배후에 있는 원숭환의 위협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후금군은 서울로의 진격을 멈추고 조선에게 화의를 제의했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과 후금은 화약을 체결했다."(62-3)


"후금과 화약을 맺은 조선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조 정권이 후금과 화친한 것은 '명을 배신하고 오랑캐와 화친했으므로 광해군 정권을 타도한다'는 인조반정의 명분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조선을 곤혹스럽게 한 것은 정묘호란 이후에도 명과 후금의 군사적 대결이 지속되는 사실, 그리고 양자의 싸움에서 후금이 계속 명을 이기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이 '부모국' 명, '형제국' 후금과 모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65) 1633년, 산동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명군 지휘관 공유덕과 경중명이 토벌군의 공격을 피해 후금으로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선군이 명의 편을 들고 후금군과 교전까지 벌이자 홍타이지는 격분했다. 정묘호란 이후 어렵사리 유지되던 양국의 화친 관계가 사실상 파탄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68)


"(1636년 마침내 제위에 오른)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결심하고 그 이유를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열었다. 홍타이지는 정묘년 맹약 이후 조선이 '저지른 과오'를 나열했다. '도망친 요민들을 명으로 넘긴 것', '명에는 병선을 빌려 주면서 후금에게는 그러지 않은 것', '공유덕 등이 귀순할 때 명을 편들고 후금은 돕지 않은 것', '인조의 유시에서 정묘년 화약은 부득이했으나 이제 대의로써 절교한다고 한 것', '조선인들이 맹약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와 산삼을 캐 간 것' 등을 조선 침략 명분으로 제시했다. 이윽고 12월 9일, 청군은 압록강을 건너 침략을 개시했다. 병자호란이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 조정이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한 사실을 인지한 홍타이지는 항복을 요구했다. 그들이 조선에 제시하는 항복 조건은 갈수록 가혹해졌다." 전란을 타개할 계책이 전무한 것을 깨닫자,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송파의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한다."(71-2)


"병자호란 이후 인조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청에 순응하는 자세를 취해다. 그는 항복 이후 척화신들을 조정에서 배제하고 최명길 등 주화파 신료를 중용했다. 나아가 '자강을 도모해 청에 대한 복수를 도모하자'는 신료들의 주장에 응답하지 않고, 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신료를 파직시키기도 했다. 1640년(인조 18) 청이 자신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해 원손元孫을 입송시키라고 했을 때에도 철저히 순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1643년(인조 21) 순치제順治帝가 즉위한 뒤 청이 소현세자를 조기에 귀국시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입조론 때문에 겁먹었던 인조에게 이제 소현세자는 아들이 아니라 '정적'이자 '경쟁자'로 보였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의심하고 감시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부자 관계는 파괴되어 갔다. 급기야 1645년 2월, 소현세자가 영구 귀국했을 때 인조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급사한다. 곧이어 세자빈인 강빈 역시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는 비극이 일어났다."(81-2)


"임진왜란 직후의 상품유통 경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다. 시전 체제처럼 국가의 통제 아래 있던 교역 체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반면 장시처럼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있던 교역 기구는 계속 성장해 이전과 다른 유통 체제의 형성에 접근하고 있었다." (상품유통 경제의 발전은) "한편으로는 농민층 사이의 경제력 차이를 벌려 농민층 분해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에서 쫓겨난 농촌 사회의 유민流民들에게 상업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기회를 제공했다."(120)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空名帖(성명란을 비워둔 임명장)을 함부로 찍어 내거나 납속책納粟策(곡물을 바치는 대가로 상이나 벼슬을 주는 정책)을 통해 면천을 남발하는 시책은 신분제의 문란을 가져왔다." "지배층 자신들이 살아남아야 노비도 부릴 수 있다는 논리로 왜군의 목을 베어 오는 천인에게 면천을 약속했다."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면서 또 많은 것을 가능케 했다."(121)


"(공물을 대납하고 대가를 받는) 방납防納의 메커니즘은 지방의 장시, 도성의 경시京市에서 공물을 사 들이는 행위를 통해 돌아간다. 이 행위의 주체인 방납인은 새로운 유통 구조 속의 상인층으로 등장했다. 방납인을 중심으로 하는 공물 방납의 확대는 한편으로는 불법적인 방납권을 통한 상업자본의 축적을 초래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장시의 확산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농촌 경제에서 상품유통이 지닌 비중을 증대시켰다." "방납인들에게 경제적 이익은 떨쳐 버리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당시 방납인으로 활약한 것은 권세가의 하인, 중앙관청의 서리胥吏 등이었다. 이들은 지방에서 바친 공물에 흠집이 있다는 식으로 퇴짜를 놓았다. 그런 다음 다시 준비할 공물을 방납인에게 본래 공물 가격보다 턱없이 높은 가격으로 구해서 바치게 했다. 방납의 폐단은 관청의 유력자와 결탁한 방납인에 의해 저질러졌다. 이에 따라 농민은 본디의 공물 가격에 비해 훨씬 많은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126-7)


# 모순을 더해가는 세제

1. 무너지는 조용조租庸調(전세·잡역·공납) 체제 : 대토지 소유자의 이해관계에 맞게 점차 대부분의 토지를 하등전으로 분류하면서 전세 비중 축소, 용조 비중 증가

2. 악순환 고리 : 재정악화 → 증세 정책 시행 → 전세는 그대로인 채 공물 압력만 가중 → 농민의 토지 이탈과 초적으로의 변신 → 세수 감소와 정치·사회적 위기 초래 → 재정 악화


1649년(효종 즉위) "김육이 (1608년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도입된 후 제도와 관련 시설 미비를 핑계로 정체 상태에 있던)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것은 그의 말대로 안민安民의식과도 관련이 있지만 정치적 위기감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의 근본이 되는 삼남 지방이 동요하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며 이 지역에서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김육의 주장에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이조판서 김집이 대동법 반대 진영의 선두에 나섰다. 김집은 아버지 김장생의 학맥을 이어받아 예학의 태두로 군림하며 문하에 많은 제자를 두고 있었다. 그는 공납제가 국왕에 대한 진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하며 공물을 쌀로 일원화하는 대동법 시행에 반대했다. 김육이 이를 반박하자 김상헌, 송시열, 송준길 등이 김육을 공격하며 김집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로써 대동법 논의는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 산당山黨과 김육, 신면 등 한당漢黨의 분열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137-8)


# 산당 : 향촌의 서원을 중심으로 결집한 세력 / 한당 : 한강 이북 도성에 거주하는 경화사족京華士族 세력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전 유목계 왕조들이 100년을 넘기지 못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청 또한 100년이 못 갈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다면 '홀로 남은 유교 문명국' 조선은 다시 밝아질 유교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식인들은 국내의 여러 질서와 문화를 철저히 유교식으로 정비하며 미래를 맞고자 했다. 정비는 유학에서 시작해 당대의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에 미쳤다. 유학, 특히 주자학의 성격부터 달라졌다. 주자학은 새 사회 건설의 이념이 되었다. 예학禮學이 중시되고, 학파에 뿌리를 둔 붕당이 형성되었다. 붕당의 정점에는 이념가인 산림山林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개인의 일상도 주자학적 예법에 따라 재구축되었다." 예송禮訟 논쟁이 이단 시비로 확대되는 장면은 "조선이 유교의 불씨를 보존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집단적 책임감을 전제하지 않으면 연출될 수 없었다. 그렇게 조선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전형적인 주자학 국가로 재탄생하고 있었다."(175)


유교에서 예는 "일상 행동의 기본일 뿐 아니라, 사회·국가·세계 질서의 근본으로 간주되었다." "주자학은 한발 더 나아가 예를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질서와 일치시켰다. "예를 행하는 데는 조화가 중요하다禮之用, 和爲貴."라는 <논어>의 구절에 대해 주희는 "예는 천리가 적절하게 행해진 것이고 인간 만사의 의식과 법칙이다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라고 해석했다. 이로서 예는 천리의 형상물이자 사회 운영의 기준이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주자학적 예법의 정착을 압박한 외부 요인이었다. 양 난을 겪는 과정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회 질서가 혼란해졌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의 재건을 두고 조선 지배층은 이미 정착하고 있던 주자학적 예법을 강화하는 방향을 택했다." "남인 학자 장현광이 "다스림에는 예교禮敎보다 더 앞서는 것이 없고, 학문은 예학보다 더 간절한 것이 없다."라고 한 발언에서는 예로써 사회 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볼 수 있다."(195-6)


적장자가 부친을 계승하는 종법 질서가 예법의 기초를 이루고 명분 질서를 고정하게 되면서 "외가의 비중이 약해진 자리는 부계父系 시조를 중심으로 구성된 본관本貫이나 본관 안의 특정 지파가 결속한 문중門中이 차지했다. 문중은 17세기 이후 공고해지기 시작했다. 문중은 시조나 뛰어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현창 사업 등을 통해 결속력을 다졌다. 또 제사를 위한 토지 등의 명목으로 문중 재산을 형성하고, 종계宗契·종회宗會 등 다양한 모임을 결성해 일종의 사회 조직으로도 기능했다. 향촌에서도 부계 성씨를 중심으로 한 동성 촌락同姓村落이 생겨났다. 본관이나 문중의 구성원들은 정기적으로 족보를 제작해 구성원들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동본同本 의식을 공유했다." "부계 친족 위주의 질서가 17세기에 대세를 이루게 된 이유는 종법을 중심으로 이완된 사회 질서를 재편하려 한 사회 구성원의 선택 때문이다."(200)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념화된 유교를 택했다. 주자학이 '주의화主義化'한 것이다. 이를 가장 일관성 있게 구축한 사상가는 송시열이었다. 그는 '오늘날은 송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와 같다'고 해 자신의 시공간을 주희의 시공간과 동일시했다. 또 '주자가 조정의 부름에 응했던 것은 복수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해 주희를 대학자뿐 아니라 중화 문화의 수호자로도 부각했다."(180) "송시열의 '주자 식으로'와는 다른 경로의 유교 문명을 구상한 지식인도 있었다. 주자학과는 다른 모델을 체계적으로 구상한 대표적인 학자는 유형원이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먼 옛날 이상 사회를 건설했다는 성왕聖王의 통치 시스템을 조선의 현실에 맞추어 제시했다. 고대 중국에서 시행되었다는 평등한 토지 제도인 정전법井田法을 근간으로 교육·군사·관료 시스템을 정비하자는 그의 주장은 이념보다는 공공 시스템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주자학보다 더 근본적이었다.(182)


"사대부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복수설치'(復讐雪恥)로부터 '북벌'로 바뀌어 간 것 역시 중화 의식과 관련이 깊다. 복수설치는 의리를 천하에 보여 수치를 씻고 잔존한 남명의 중국 복권을 돕는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북벌은 다르다. '벌伐'이란 말은 천자가 난적亂賊을 토벌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북벌은 남명조차 망했으므로 유일한 정통인 조선이 청을 토벌한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조선이 소중화나 중화로 특별할 수 있는 근거는 '유교 문화의 실현'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교는 보편 정신이자 문화이므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청, 일본 등도 유교 문화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중화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청이 한족을 지배하는 논리도 그 논리에 근거해 있었다. 명은 민심을 잃어 내분으로 망했고 천명을 얻은 청이 명을 위해 복수했다는 것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청은 명보다 더 뛰어난 내치로 민생을 안정시키고 있었다."(190)


새로운 국제관계가 안정기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장생에서 송시열로 이어지는 서인 산림은 주자학에서 강조하는 보편 원리를 중시했다. 주자의 <가례>는 의리와 예법의 일반 원칙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왕실도 적용 대상이었다. 송시열은 장유長幼라는 보편 원칙 앞에는 왕실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체이부정(體而不正, 아들이지만 맏이가 아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편 예법을 왕실에 관철할 것인지 여부는 국왕의 위상과 연동된 민감한 문제였다." "윤휴와 허목으로 대표되는 남인 산림은 생각이 달랐다. 의리와 예법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그들도 송시열과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의리를 대변하는 국왕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했다." "따라서 윤휴는 모든 신민은, 그가 왕의 어머니일지라도, 군주에 대해 동일한 예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허목은 종통을 이은 군주는 장유長幼의 차례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08-9)


# 예송논쟁

1. 기해예송(1659) :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벌인 논쟁

2. 갑인예송(1674) :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시어머니인 장렬왕후가 맏며느리에 해당하는 상복을 입을 것인가, 둘째 며느리에 해당하는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놓고 벌인 논쟁


"그러나 환국기를 지나면서 (17세기 주자학의 이상을 주도하던) 산림의 위상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붕당 사이의 대립과 논쟁이 격화함에 따라 산림이 공론이 아니라 자기 정파의 이해만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붕당정치의 대안으로 탕평 정치가 전개되고 국왕이 군사(君師, 국왕이자 사대부의 스승)를 자임하며 성왕을 표방하자, 산림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격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의 변화도 산림의 지위가 떨어진 원인이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도시의 문물이 흥기하고 학문이 전문화되어 갔으며 새로운 학문 풍조도 일어났다. 이런 변화 속에서 향촌에서 유교 경전 위주로 공부를 하던 산림의 사회 인식과 식견은 뒤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산림의 정치적 영향력은 영조 대에 현격히 축소되며, 정조 대에는 노골적으로 친왕적 속성을 드러내는 산림도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세도 가문의 식객과 같은 인물도 나와 산림은 점차 형식적인 지위로 전락해 간다."(222)


# 주요 환국

1. 경신환국庚申換局(1680) : 종친 복선군과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올라오자, 숙종이 남인 전체를 정계에서 도태시키고 서인 일색의 정권을 구성한 사건

2. 기사환국己巳換局(1689) :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희빈 장씨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정한 숙종의 결정을 비판하다가 서인 대다수가 파직되고 남인이 대거 기용된 사건

3. 갑술환국甲戌換局(1694) :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서로를 맞고변하자, 숙종이 새로 총애하던 숙원 최씨(영조의 모친)와 가까운 서인의 손을 들어준 사건

4. 신임환국辛壬換局(1721-22) : 신축년(1721)의 환국과 임인년(1722)의 옥사를 합쳐 부른 말. 노론이 경종의 병세를 빌미삼아 왕세제였던 연잉군(영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다가 정권을 잃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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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 조선 2 민음 한국사 2
한명기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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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사대부들은) 도덕적 자의식이 강한 사의 정체성보다는 국왕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관료적 지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16세기에 이르러 서서히 변해 갔다. 변화의 바람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하나는 과거제와 관련한 것이었다. 과거가 지배층으로 편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함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 응시생들의 숫자가 확대·누적되면서, 외형적으로나마 사의 모양새를 갖춘 독서인 층이 확대되었다." "변화의 또 다른 바람은 정부 안의 권력구조 개편을 통해서 불어오고 있었다. 중·하급 엘리트 관료인 청요직들이 공론을 내세우며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해 감에 따라 도덕적 권위와 함께 사 의식이 한층 더 강조되었다. 청요직들은 도덕적 권위에 근거한 언론言論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해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도덕적 가치와 권위가 하나의 권력으로 실체화하고 있었다."(30)


# 청요직 : 깨끗한 명성을 중시하는 청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과 정치적으로 중요한 관직이라는 의미의 요직(이조와 병조의 낭관, 의정부의 사인, 검상 등 관료 선발에 관여하는 자리)을 합친 말


"청요직들은 <홍문록>, '서경署經', '피혐避嫌' 등을 적절히 활용해 청요직 인선에서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장치들을 확보해 갔다. <홍문록>은 동료 평가에 기초한 홍문관의 자체적인 인선 명부라 할 수 있는데, 동료들의 평판이 인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특징이다. 서경은 대간에서 5품 이하의 관직에 임명된 관료들의 신원을 조사하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성종대부터 서경은 단순한 신원 조사에 그치지 않았다. 당사자의 명망과 도덕적 흠결 여부까지도 평가해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면 그에 대한 서경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임명을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혐은 어떤 혐의를 받는 관료들이 사직을 요청해 국왕의 처치를 받는 것을 말한다. 대간은 피혐을 특정 안건을 거부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특히 대간에서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헌부나 사간헌에 임명되면 피혐을 통해 끝까지 그의 임명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35-6)


즉위하자마자 성종의 장례 절차 문제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당 건립 여부를 놓고 "연산군과 대간이 격한 대립을 반복하는 동안 대신들은 다소 복잡한 양상을 보이며 우왕좌왕했다. 이는 성종대 이래 국왕이 대신들을 친왕 세력으로 적극적으로 유인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재상과 대신들은 직급상으로는 대간보다 상위에 있었지만, 도덕적 명분을 선점한 대간이 공론을 표방하며 대신들의 비리를 들추거나 불합리한 국정 운영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게 되자 그만큼 대신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태종대나 세조대처럼 대신들에게 도덕적인 흠결이 있어도 국왕의 신임을 내세워 대간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도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국왕의 대신 보호는 약해지는 가운데 대간이 공론의 소재처라는 위상까지 얻게 되자 대신들은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42-3)


조정의 분위기가 날로 험악해져갔지만 "청요직 인사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강개한 언론은 멈출 수가 없었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연산군의 허물을 묵과할 수 없었을뿐더러, 언관이 몸을 사리는 태도를 보였다가는 동료들 사이에서 자칫 소인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45) 그 결과 "연산군대에는 모두 두 차례의 사화가 일어났다. 연산군 초반 왕과 대간의 갈등이 격해지면서 발생한 무오사화와 연산군의 폭압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의 사초 문제에서 시작해 김종직 문인들을 붕당으로 규정하고 일부 대간들을 능상凌上의 명목으로 단죄한 사건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자의적인 국정 운영과 폐비 윤씨 문제가 결부되어 신료 전체가 치도곤을 당한 사건이었다. 두 사화의 공통점은 연산군 자신이 능상이라 부르던 조정 내 하극상의 분위기를 일소하려 했다는 점이다."(48)


연산군은 주색잡기에 탐닉하고 왕실의 정통성과 국왕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남발했을 뿐만 아니라 "문묘에 모셔져 있던 공자와 선현들의 위판位版을 태평관·장악원·서학 등으로 옮기고, 성균관 강당과 대성전을 흥청들과의 연회 장소로 삼았다." "그 밖에도 연산군은 사간원을 폐지하고 홍문관마저 혁파해 군주에 대한 간쟁과 왕이 들어야 할 수업 자체를 없애 버렸다. 또 사초를 검열해 자신에 대한 비평을 막았다." "결국 폭력을 극대화한 연산군의 통치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폭력으로 종말을 맞았다.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주도한 중종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폭력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어육漁肉이 되어 가는 생민을 구원한 거사'로, 연산군의 치세를 부정하며 성종대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반정反正이라는 말로 칭송되었다. 그러고는 모든 제도를 원상태로 되돌리면서 연산군을 폭군으로 규정하고, 그가 사문과 도덕에 씻을 수 없는 죄인임을 천명했다."(51)


"거사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폐위하고 정현왕후 소생의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가 바로 조선 최초의 반정 군주인 중종이다." 반정 공신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왕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종의 또 다른 노력은 연산군과 대비되는 반정 군주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중종은 도덕의 이름으로 집권의 정당성을 수식하고 그를 통해 신료와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자 했다." 중종은 연산군이 폐지한 각종 제도들을 성종대 모습으로 되돌리도록 명했으며 "충신·효자·열부·절부의 정표 가운데 무너진 것을 세우게 하고, 1511년(중종 6)에는 무려 2940절에 달하는 <삼강행실도>를 반포했다. 연산군의 집정으로 퇴락한 풍속을 삼강오륜을 밝힘으로써 회복하겠다는 포부를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도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적이 있지만 거의 3000절에 달하는 분량은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을 주었다."(56-7)


"조광조가 조정에 첫발을 디딘 것은 청요직들의 영향력이 크게 신장하여 국왕 및 대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1515년(중종 10)이었다." "조광조가 청요직들 사이에서 높은 신망을 얻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사회적 기강이 크게 퇴락한 상황에서도 그가 도학자로서 한결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성 청요직들을 압도하는 강직한 주론자主論者로 기능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는 당시 청요직 사이에서 가장 중시되는 자질로 평가받고 있었다."(63) "주론자란 대간 언론의 향방을 지휘하는 일종의 오피니언 리더였다. 조선 후기의 경세가 유수원은 조선 시대 첫 번째 주론자로 조광조를 꼽고 있는데, 이들 주론자는 청요직 연대를 통해 언론의 활성화가 일상화되는 상황에서, 대간 언론이 권력에 위축되지 않도록 독려하며 특정한 안건에 대한 언론의 개시와 종결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었다."(66)


# 신씨 복위 상소 사건(조광조의 논변 승리)의 의의

1.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세력이 조정의 실세로 등장

2. 청요직 내부에서도 직급보다 도덕적 권위가 우선시 됨

3. 공론 형성의 기제가 도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계기 마련


조광조와 기묘사림이 주도한 개혁은 "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시도되었다. 하나는 도덕적 가치의 확산을 추구하는 것으로,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적 질서에 바탕을 둔 사회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성리서들의 보급, 문묘 종사 운동, 향약의 보급, 사전祀典 체제의 정리, 여악의 폐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75) "개혁의 두 번째 방향은 '누가 정치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관료로 선발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퇴출하는 것이었다. 기묘사림은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새로운 인재들을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과거 시험의 한계, 즉 문장을 위주로 하는 시험 방식을 바로잡아 응시자의 성리학 지식과 도덕 수양을 중시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했다." "현량과의 시행은 조선 왕조 최초의 천거과라는 의의와 함께 도학에 소양을 가진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점을 시험제도를 통해 선언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77)


"중종은 조광조가 왕권을 반석에 앉혀 주리라는 판단에서 그를 발탁했다. 물론 중종이 도학자로서의 조광조의 학식과 인품, 그리고 이상을 향한 열정에 매혹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안한 자신의 왕좌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도교 의식 집행 기관인) 소격서昭格署 혁파와 (아무런 공도 없이 공신에 책봉된 자들의 거짓 공훈을 없애기 위해) 위훈 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하는 조광조를 보면서 자신과 그의 길이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광조를 신임하면 할수록 국왕인 자신의 권위보다는 도덕과 도학의 권위가 높아졌으며, 그것은 다시 자신의 권력을 제약했다. 간혹 성군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자신이 손에 쥘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와 기묘사림으로 대표되는 청요직 연대가 통제할 수 없는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현실적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 기묘사화가 일어났다."(82-3)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은 과거의 어느 임금 못지않게 도학 정치에 관심을 갖고 지치에 따른 통치를 펴고자 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제대로 뜻을 펴 보지도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인종의 뒤를 이은 국왕이 바로 명종이다. 명종대는 명종 자신보다도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시대로 더 많이 인식된다. 문정왕후의 치세에서 마지막 사화인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임꺽정의 난도 일어났다. 수많은 사림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떠났고 백성의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세조가 훈척의 세력화를 조장한 이래 공공의 선보다는 사익 추구를 더 밝히는 훈척 세력의 폐단이 가장 극성을 부린 시대가 바로 문정왕후의 치세였다." "훈척 세력은 (공납 비리에서 비롯되는) 사회 경제적 파탄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방 관아와 결탁해 토지를 넓히며 농민의 생활 터전을 빼앗았다. 지도층이 공공성과 도덕성을 상실한 조선 사회는 거세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102-3)


"16세기 조선에서 살아가던 보통 백성은 훈척 정치의 농단에 그대로 노출된 채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방납의 폐단 등 부세賦稅 제도의 문란 때문에 제대로 살길을 헤쳐 나갈 수 없었다. 훈척 세력은 토지를 넓히고 사행使行 무역(사절단이 외국을 오갈 때 이루어지던 무역)에 개입해 이득을 꾀했다. 게다가 연안 지역에서 개간할 수 있는 땅을 차지하고 백성을 동원해 간척하는 방법으로 대토지를 손에 넣었다. 지방 수령은 탐욕을 감추지 않고 공물의 방납 등을 자행하고 있었다." "임꺽정이 반란을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농민들이 땅을 잃어버린 데 있다. 훈척 세력과 내수사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넓혀 나간 데다 수령들이 부세 과정에서 탐학을 부리는 바람에 농민들은 경작할 토지를 잇따라 빼앗겼다. 살길이 없어진 농민들이 무리 지어 도적으로 변신했고, 그 도적들 가운데 유력한 이가 바로 임꺽정의 무리였다."(130-1)


한편 15세기 후반, 흉작기에 농촌 지역 주민들이 서로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는 장시場市가 정기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 무렵 농촌 사회에서 장시를 통해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각 지방 장시를 연결해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장악한 사상私商 계층이 성장한다.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시전 중심으로 재화가 유통되던 경기 지방에서도 장시가 자주 개설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장시가 읍치의 범위를 벗어나 산림 지대까지 확대되었다. 읍치란 지방 고을의 중심 공간으로 대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해안 지방의 경우 읍성이 없는 곳도 있었다. 행정이 행해지는 읍치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사직단 등의 제사 시설, 향교, 장시 등이 들어서게 마련이었다. 농업 사회인 조선에서 읍치를 벗어나 장시가 뻗어 나갔다는 것은 중대한 변화였다. 뿐만 아니라 인접한 장시들 간에 흡수·통합·이동 등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장시의 연계망이 형성될 기반도 마련되었다."(119-20)


16세기에 재인식한 새로운 사상으로서의 성리학은 "부계父系 남성 위주의 가족 질서, 붕당을 중심으로 한 사림 정치, 서원과 향약 등을 기반으로 한 향촌 질서 등 사회 전반을 가로지르는 질서의 원형을 제공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이 바로 이 시기, 16세기에 탄생한 것이다."(147) " 사림은 새로운 지배 이념으로서 성리학의 가치를 탐구하며, 성리학의 기본 경전인 <소학>과 사서삼경 등에 구결을 붙이고 한글로 풀이했다. 그리하여 이황의 <삼경사서석의>, 이이의 사서언해, 경서언해교정청의 <소학언해>·사서삼경 언해 등이 출현했다." 이와 더불어 16세기에는 "과전법이 사전의 지급 대상을 현직 관료로 제한하는 직전법으로, 다시 관에서 전조田租를 수취해 전주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로 변하며 해체해 가자 양반들의 경제적 지위가 불안정해졌다. 따라서 새로운 사상이었던 성리학은 조선 전기와는 달리 중소 지주층의 이념으로도 재발견될 수 있었다."(158-9)


# 16세기 이전의 현실 의례

1. 결혼 풍습 : 남귀여가男歸女家의 솔서혼率壻婚(데릴사위)이 일반적, 처가외동딸인 경우 처가의 제사를 물려받는 외손 봉사奉祀도 시행

2. 상속 제도 : 남녀 모두 똑같이 재산을 나누는 균분상속

3. 족보 기록 : 남녀순이 아니라 출생순으로 기록

4. 제사 풍습 : 아들딸이 돌아가면서 부모의 제사 시행


"역설적이지만 사림들이 새로운 사상을 만드는 데 몰두할 수 있었던 계기는 사화였다. 그들은 사화 때문에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향촌 사회에 머물며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은 정치적 탄압을 피해 주로 충청도 충주를 중심으로 남한강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공립 교육기관을 대체할 민간 교육기관인 서원에 주목하게 되었다."(167) "서원의 성립이 갖는 사회적 의의는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사족이 자율적으로 지역 언론을 공론화하고 도학적 모범을 보인 인물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사림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서원의 강학 활동을 통해 각 지역에서는 학파가 성립하고 재생산됨으로써 성리학이 융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지역사회에서 서원을 중심으로 사림의 공론을 결집해 사족 지배 체제를 확립·유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서원과 연결된 산림이 출현해 도학을 무기로 중앙의 정계까지 좌우할 수 있었다."(169)


# 서원과 더불어 사족의 지위를 강화한 지역 조직

1. 향회 : 향안에 등록된 양반 사족들의 정기 모임

2. 향안 : 부모와 처가 세 가문의 3대조 조상에 대한 심사를 통과한 양반 사족들을 등록한 명단

3. 유향소 : 관아 다음 가는 위상을 가진 향촌의 비공식적 기관


1565년에 즉위한 선조는 사림 중심의 정치 질서를 만들었다. "사림의 지지를 받으며 등극한 선조는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경사經史를 토론했다. 명종 때 여러 차례 징소徵召(임금이 특별히 부름)를 받고도 조정에 나오지 않던 명유名儒 이황에게는 예폐禮幣(경의를 표하기 위해 보내는 물건)를 극진히 해 나오도록 권유했다."(177-8) "이황의 <성학십도>,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 등 성학에 대한 이론서들은 이전의 제왕학과 달리 신하들이 제왕학의 기준점을 제시한다는 데 특징이 있었다. 특히 이 책들은 조선 전기에 중시된 <대학연의>와 달리 국왕을 사대부의 논리에 따라야 하는 존재로 파악해 조선 후기 사림 정치의 이론적 모델을 제시했다. 사림은 이러한 제왕학 이론을 실제로 경연과 같은 제도에서 적극 활용해 국왕에게 성학을 가르치고 또 이를 적극적으로 따르도록 유도했다. 조선 후기에 붕당정치, 예송禮訟 등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 변화한 정치사상에 힘입은 바 컸다."(181)


# 동아시아 7년 전쟁을 칭하는 한중일 삼국의 공식 명칭

1. 한국 : 임진왜란(임진년에 왜구들이 쳐들어와 벌인 난동)

2. 일본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벌 - 분로쿠게이초노에키(분로쿠·게이초 연간의 전쟁)

3. 중국 : 항왜원조抗倭援朝(일본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


# 동아시아 7년 전쟁을 바라보는 한중일 삼국의 시각

1. 한국 : 전쟁의 승패를 중시하여 침략자 일본을 물리친 조선의 승리와 대첩을 강조하고, 그것을 이끌어낸 무장과 의병들의 영웅적인 활약상 탐구

2. 일본 : 삼한 정벌론의 연장이자 '일본의 국위를 선양한 선구적인 쾌거'로 재조명하여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대외 팽창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

3. 중국 : 제1차 중·일전쟁으로 칭하여 청일전쟁 때 일본에 패배한 사실을 반성하는 한편, 조선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강조


# 동아시아 7년 전쟁이 끼친 영향

1. 한국 : 국토가 황폐화되고 기근·전염병·포로 등으로 인구 격감, 지배층의 권위 추락과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와 반감, 현실도피적인 사상 유행

2. 일본 : 지역의 군사 강국으로 자리매김, 조선에서 약탈한 인적·물적 자산을 바탕으로 근세 사회 발전의 초석 마련,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 수립

3. 중국 : 막대한 전비 조달을 위해 증세와 징집, 징발을 강행하면서 재정적자와 민심 악화, 요동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여진세력이 만주 지역에서 급부상


"전쟁 전부터 모화慕華 의식이 커지고 있던 참에 임진왜란을 맞아 명이 원군을 보낸 것은 조선과 명의 관계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1593년 1월 평양전투의 승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던 조선 지배층에게 '재조지은', 즉 망해 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 준 은혜로 인식됐다. 이제 명은 '상국'이자 '부모국'인 동시에 종사를 구해 준 '은인'으로까지 추앙된다." "선조는 전쟁이 끝난 뒤 논공행상할 때, 이순신 등 공을 세운 무장들을 제쳐 놓고 명에 청원사請援使로 다녀온 정곤수를 일등 공신이자 원훈元勳으로 녹공했다. 그것은 이순신을 비롯해 백성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무장들의 활약과 공로를 상대적으로 축소하려는 의도였다. 선조는 왜란 초반 의주로 파천했을 뿐 아니라 전쟁 극복에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다. 따라서 명군의 은혜를 강조하는 데에는 실추된 자신의 권위를 만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252-3)


임진왜란 참전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각종 반란을 계기로 명의 국력이 쇠퇴하고 요동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의 세력이 급속히 커지자 조선은 두 가지 난제에 직면한다. 하나는 건주여진의 군사적 위협을 막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을 이용해 누르하치를 견제하려는 명의 이이제이책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조선은 임진왜란 중에도 건주여진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와 서인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세력은 광해군이 내정에서 범한 실책과 더불어 명에 대한 배신을 정권 타도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명에 대한 배신이란 다름 아닌 재조지은의 배신을 의미했다. 이후 인조 정권의 대외 정책은 자연스레 친명의 방향으로 기울고, 이 과정에서 후금과의 관계는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 귀결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었다."(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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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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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비록 대외적으로는 제후국을 표방하며 중국과 조공 관계를 맺었지만, 안으로는 황제국을 자처하면서 모든 제도를 황제국 체제에 맞도록 운영했다. 이 점은 13세기 후반 이후 원 간섭기에 격하·수정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고려의 전 시기에 일관한 체제였다. 조선은 이 같은 고려의 체제를 참람한 것, 즉 정당한 분수를 뛰어넘는 것으로 규정했다. 제후국은 대외 관계뿐 아니라 국내의 제도와 문물도 격에 맞게 운영해야 하며, 그것이 성리학 이념을 원칙에 맞게 구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30) 그렇지만 황제 독재 체제를 확립한 명과 달리 "조선에서는 관료 집단을 중심으로 국시인 성리학의 정치 이념, 즉 신하의 정치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군주와 신하가 협의를 통해 함께 국정을 운영해 가는 '군신 공치君臣公治'의 원칙을 충실히 구현하고자 했다." 신권주의와 왕권주의가 갈등을 일으킬 조짐이 왕조의 탄생기부터 잠복해 있었던 셈이다.(31)


# 조선 건국기의 국제정치

1. 명明 건국(1368) : 공민왕이 원元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명에 사신을 보내 책봉 관계 요청

2. 명의 요동 진출 : 원의 잔여세력 나하추를 제거하는 동시에 요동지방을 점령하여 철령위 설치를 통보

3. 고려의 요동 정벌 추진 : 우왕과 최영은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우사령관으로 삼아 정벌군 출정

4. 위화도 회군(1388) : 최영 유배, 우왕 폐위

5. 조선 건국(1392) : 요동 문제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가운데 표면적으로는 대명 관계 정상화


"태조대 조·명 관계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난 가장 큰 갈등은 표전表箋 문제였다. 표전이란 조선에서 명으로 보낸 외교 문서인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가리키는데, 그 격식과 용어가 매우 까다로웠다. 명은 이 표전문 속에 명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의미의 글자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조선의 사신을 억류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자를 압송하라고 요구했다." "표전 문제가 양국 간의 현안으로 드러난 이면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선의 요동 정벌 움직임이었다. 즉 표전 문제가 처음 불거진 1393년부터 1398년까지 조선에서는 정도전의 주도하에 사병 혁파와 국군 체제 확립을 골자로 하는 군제 개혁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 훈련을 시행했다. 명은 이 같은 조선의 움직임이 요동 정벌을 위한 일련의 준비 과정이라고 보고, 군제 개혁 및 군사 훈련을 주도한 정도전을 요동 정벌 추진의 중심인물로 주목했다."(36-8)


# 1398년 홍무제(주원장)와 정도전(1차 왕자의 난)의 사망이라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문제 해소


"지리는 천문과 함께 국가를 경영하는 기초 학문으로 중시되었다. 천문은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고 예측해 정확한 역易을 만드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지리는 국토의 지형 지세·토지·인구·물산을 파악해 국정의 기초 자료를 마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개국 초기에 "천문과 지리 분야에서 국가적 사업을 추진한 데는 국가 경영에 활용하려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왕조의 개창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이념적 목적도 크게 작용했다. 천문도의 제작에는 하늘의 성좌를 측정해 별자리의 도수度數를 정확하게 밝히려는 과학적·실용적 측면과 더불어 조선 왕조의 개창이 하늘의 뜻에 따른 선양禪讓이었음을 강조하는 이념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마찬가지로 세계지도에서도 단순히 세계의 형세와 모습을 파악하는 차원을 넘어 새로이 개창된 조선 왕조를 만천하에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 의도를 드러낸 것 중 하나가 실제보다 과장된 조선의 크기이다."(54-5)


# 천상열차분야지도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


"고려 말 혁명 과정에서 정도전의 가장 큰 공헌은 척불斥佛 운동의 전개와 반혁명 세력의 숙청에 앞장섰던 점이다. 1391년(공양왕 3) 4월 정도전은 성균관의 여러 관원과 함께 공양왕의 호불好佛 성향과 각종 불사佛事를 비판하면서 강력한 불교 배척을 요구했다. 정도전의 척불 운동은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측면에서는 혁명 세력의 정책에 비협조적이던 공양왕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반혁명 세력의 중심 인물인 이색이 불교에 우호적인 점을 이용해 그의 입지를 약화하려고 했다." 여기에 더해 조준은 "1388년 7월 상소를 올려서 사전 개혁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수조지를 파악해서 이를 몰수한 뒤 관료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이 조준이 주장한 사전 개혁의 골자였다. 이로부터 사전 개혁은 가장 중요한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73-4)


# 1391년 5월 과전법科田法 공포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의 추구는 권문세족과 지방 호족이 토지와 농민에 사적 지배권을 행사하던 고려 말 정치의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과 지방 호족은 권력과 부를 이용해 불법적으로 토지와 농민을 침탈했다. 이는 귀족의 토지 겸병과 농장 경영으로 이어지고 그에 따라 농민층이 몰락했다. 농민층의 몰락은 결국 국가 재정 기반의 붕괴를 초래했다." 새롭게 건설되는 중앙집권 체제의 형태에 대해 "정도전은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 운영의 주도권을 재상이 가지는 재상 중심의 권력 구조를 추구했다. 그는 왕위는 한 가문에서 세습하는 것이므로 국왕이 항상 현자賢者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국왕은 상징적인 최고 권력자로만 머물러야 했다." "반면 이방원은 국왕 중심의 정치 운영을 추구했다. 국왕이 상징적인 최고 권력자로 남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국정을 직접 주도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77-8)


정도전의 군제 개혁에 반발하여 1차 왕자의 난(1398)을 성공시킨 태종이 가장 먼저 시행한 정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군권의 일원화를 위한 군제 개혁과 사병 혁파였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400년(정종 2)에 군제 개혁을 단행해 종친과 공신들이 사적으로 거느리던 군사들을 모두 삼군부에 소속하도록 하고, 지방의 절제사節制使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사 지휘권도 모두 삼군부로 귀속시켰다." 이와 더불어 "전국에 걸쳐 양전量田 사업, 즉 토지조사 사업을 시행해 전국 토지의 수량과 소유관계 등을 파악했다. 또 호구조사도 시행해 전국의 가구 수와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호적을 새로 정비했다. 그리고 새로 정비한 호적의 내용을 기준으로 16세 이상의 남자들에게 일종의 신분증명서인 호패號牌를 소지하도록 하는 호패법을 시행했다. 전국의 토지와 호구 조사 결과는 사람들의 신분을 파악하고 토지세와 군역 등의 세금을 거두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었다."(84-6)


고려 말기부터 이어진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협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조선은 투항해 오는 여진족은 포상을 내리며 적극적으로 환영했고, 그러지 않은 여진족이라도 문호를 개방했다." "고려 때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에 들어서도 왜국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나라의 근심이 왜국만한 것이 없다國家所患莫甚於倭."라고 할 정도였다." "여진과 왜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젊은 왕 세종이 성리학적 이상 국가로 나아가기에 앞서 반드시 풀어야 하는 선결 과제였다. 중화 체제의 모범 국가로서 주변 세력을 교화하되 안 되면 무위武威를 과시해서라도 문화적이고 평화로운 관계로 들어오게 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명 중심의 중화 체제에서 확고한 위상을 지키고 그에 걸맞는 영역을 확보해야 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세종은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나라 밖으로 정벌군을 보낸, 몇 안 되는 조선 국왕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105)


# 왜구 진압 및 교역 재개

1. 기해동정 : 이종무 함대의 쓰시마 정벌(1419)

2. 계해조약 : 부산포, 내이포, 염포 등 삼포 개방(1443)


# 여진 정벌 및 교역 재개

1. 4군 : 최윤덕 부대가 압록강 일대 여연, 자성, 무창, 우예의 4군 점령(1437), 

2. 6진 : 김종서 부대가 두만강 일대 회령부, 경원부, 종성군, 경흥군, 온성부, 부령부의 6진 구축(1449)


"1492년(세종 11년) 간행된 <농사직설農事直說>은 가장 널리 알려진 조선 시대의 농업 서적이다." 고려 시대에는 원元의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가 두루 쓰였는데 조선의 풍토에 알맞는 독자적인 농서 편찬이 필요한 상황에서, 세종이 그 일은 해낸 것이었다. "세종은 조선의 농서를 편찬하면서도 그것이 태종의 치적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내세웠다. 태종이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농상집요>의 주요 내용을 초록하고 이두로 번안해 농서를 편찬했으니, 세종은 그 업적을 계승한다고 표방한 것이다. 이때 세종이 더욱 강조한 것은 바로 오방五方 풍토의 개별성이었다. 오방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천하의 여러 곳을 가리키며 조선이 중국과 구분되는 지역임을 강조한다." "1428년(세종 10) 세종의 명령을 받은 하삼도下三道 관찰사가 각지의 농법을 종합해 올린 책자를 기반으로 정초와 변효문이 편찬한 책이 바로 <농사직설>이다."(119-20)


"하늘을 대신해 인간 세상을 통치하라는 명을 받은 자로서 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기 위해 항상 정성을 다해 천문을 읽어야 했다. 그렇기에 천문학은 제왕학이었다. 천문학을 학습하는 것은 제왕된 자의 의무이고, 천문역법을 독점하고 세상에 반포하는 것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제작으로 시작된 조선의 천문역법은 세종대에 이르러 완성된다.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수립한 독자적인 역법으로 이해되는 '칠정산'이 그것이다."(136-7) "요 임금은 역법을 확립하고 순 임금은 혼천의를 만들어, 완벽한 역볍을 확립해 정확한 때를 일러 주고자 했다. 이것이 곧 하늘을 공경하는 정치였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성군으로 추앙받는 우 임금은 황하의 물줄기를 트는 치수 사업을 벌여 황폐해진 중원 지역을 평정했다. 천문역법 사업이 위대한 요·순 임금을 따르는 것이라면, 측우기와 수표의 창제 및 측정 제도의 확립은 우 임금을 따르는 성군의 정치였다."(146)


"조선 왕조는 유교적 이상 국가를 구현하고자 예악 정치를 표방했다. 여기서 예禮와 악樂이란 추상적 구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가 질서를 위한 것이라면 악은 조화를 위한 것이다. 질서와 화합을 위해 필요한 예악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체로서, 형정刑政의 근본을 이루며 왕도의 필수 요건이다. 중국 고전인 <예기> 「악기」에 따르면 예악 형정이 추구하는 궁극은 민심을 하나로 해 잘 다스려진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조선의 역대 왕은 이러한 통치 원리를 바탕으로 치도治道를 갖추고자 노력하고, 그를 위해 예와 악이 정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음악적 안목이 남달랐던 세종은 "음의 시가時價를 표기할 수 있는 정간보井間譜를 창안하고, 아악기의 표준이 되는 편경을 우리의 기술로 만들어 냈다. 또한 아악雅樂을 정리하고, <여민락與民樂>,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 등의 음악을 만들어 국가 전례를 거행하는 데 긴요한 성과를 이룩했다."(151-2)


"세종이 문자 창제 프로젝트를 은밀히 추진한 것은, 신하들이 반발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지배층은 한문을 배워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과거 시험은 양반 관료로 편입되어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반이었다." "세종이 한글을 이용해 처음으로 공개적인 사업을 추진한 것은 1444년 2월 16일 집현전의 관리들을 시켜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한 일이다." 마침내 한글과 관련해서 공개적으로 일이 추진되자 "최만리 등은 상소문에서 언문 창제와 같은 중대한 일을 신하들의 공론을 모으지 않고 졸속으로 진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임금의 건강이 안 좋아 요양을 떠나면서까지 그리 급한 일도 아닌 언문 관련 사업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이 상소문은 세종이 한글 관련 사업을 은밀히 추진했다는 것, 그리고 세종이 한글 관련 사업에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169-71)


"세종의 맏아들 문종은 자질과 인품이 뛰어나 서른둘이 되던 1442년부터 국정을 대리하며 통치 경험을 쌓았지만 즉위 2년 만에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로 붕어했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단종은 겨우 열하나의 어린 나이였다. 국왕의 때 이른 붕어와 어린 세자의 즉위라는 돌발 상황은 그 자체로 중요한 정치적 위기였지만, 그 위기는 또 다른 조건 때문에 더욱 심각해졌다. 그것은 단종을 둘러싼 숙부들의 존재였다. 세종은 대군만 여덟 명을 두었는데, 특히 둘째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은 능력을 높이 평가받았다. 두 사람은 단종이 즉위했을 때 삶에서 가장 정력적인 나이인 삼십대 중반이었다."(184) "1452년 7월 28일, 수양대군은 권람의 추천으로 한명회를 만났다. 기록에 따르면 수양대군은 그를 처음 만난 뒤 '나라의 선비國士'라고 극찬하면서 오랜 친구처럼 여겼다. 며칠 뒤에는 신숙주를 포섭했다." "거의 동년배인 세 사람의 만남과 제휴는 14개월 뒤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이어져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188)


# 계유정난(1453)

1. 권람의 노비 계수가 김종서를 위시한 재상들이 안평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수양대군에게 고변

2. 수양대군이 먼저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김종서와 아들 김승규를 살해

3. 수양대군 일파가 대궐과 도성 주요 지점을 장악한 뒤 조극관, 황보인 등을 유인, 살해

4. 숨이 끊어지지 않은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반전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귀양


"단종은 세조가 즉위한 뒤인 1455년 윤6월 20일 상왕의 자리로 물러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7월 11일 곧바로 태상황에 추대되었다. 그해 10월 13일 명도 칙사를 보내 세조의 즉위를 인정해 주었다. 세조의 체제는 순조롭게 안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조에게 지울 수 없는 도덕적 오점이 있는 것은 자명했다. 그의 체제가 뿌리내리기까지는 또 한 번의 진통과 최종적 조처가 필요했다. 그것은 사육신 사건과 단종의 사사였다." "성삼문 등이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1456년(세조 2) 6월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한 사육신 사건은 다시 한번 많은 희생자와 함께 세조에게 큰 도덕적 상처를 남겼다. 이런 변란의 궁극적인 원인은 단종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당하고, 그의 일가친척이 숙청당하는 일련의 사태를 거친 뒤 "다섯 달 만인 1457년 10월 24일 사사賜死됨으로써 16세의 짧고 비극적인 생애를 마쳤다."(192-3)


"세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요하게 추구한 과업은 왕권의 강화였다. 그는 다양한 제도와 확고한 태도로 그 목표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그 결과 세조는 외형적으로 매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내면에는 상당한 한계도 잠복해 있었다."(199) "왕권의 절대성에 관련된 세조의 생각은 1467년 12월 "친히 정사를 보고 권력이 아래로 옮겨 가지 않는 것이 군주의 도"라고 한 발언에 가장 잘 집약되어 있을 것이다. 이 발언이 치세 끝머리에 나왔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세조는 이런 원칙을 재위 내내 강력히 관철했다. 그러나 부당한 집권이라는 태생적 결함 때문에 세조는 어느 때보다 많은 공신을 양산했고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으로 대표되는 소수 대신들에게 크게 의지해 국정을 운영했다. 그리고 그런 통치 방식은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권력이 아래로 옮겨가는' 결과로 이어졌다."(201)


# 세조의 주요 정책

1. 호패법 재시행(1459), 인구조사 실시(1461)

2. 백성에게 부과하는 공물 축소(1457), 공물 명세서 횡간橫看 제정(1464)

3. 풍년에 곡식을 사들여 흉년에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상평창 설치(1458), 현직 관원에게만 과전을 지급하고 세습을 금지한 직전법職田法 실시(1466)

4. 군사제도 개편(1457) : 중앙의 오위五衛와 지방의 진관鎭管 체제 수립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재위 14개월 만에 붕어했다. 인위적인 사고는 아니지만, 원자인 제안대군이 세 살밖에 안 된 상황에서 국왕이 붕어한 것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또 한 번 격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짙은 큰 위기였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았다. 15년 전 어린 국왕의 등극이 가져온 정치적 공백을 파고들어 집권한 훈구 대신들은 그때의 경험을 살려 이 위기를 진정시켰다. 왕실과 대신은 가장 중요한 후사 문제에 신속하게 합의했다."(216) "성종 초반 왕권의 위상과 정치의 전체적인 양상은 이 시기를 이끈 두 개의 이례적 제도인 (세조비 자성대비의) 수렴청정과 원상제로 파악할 수 있다." 자성대비와 정치적 주도권을 공유한 대신들의 주요 기구인 원상은 '승정원의 재상'이라는 이름이 알려 주듯이, "국가의 최고 중신인 재상을 국왕과 가장 가까운 관서인 승정원에 근무케 하는, 그러니까 의정부와 승정원의 기능을 합친 매우 변칙적이며 강력한 특별 기구였다."(217-8)


"성종에게 진정한 원년은 수렴청정과 원상제가 종결되고 친정을 시작한 1476년이었을 것이다. 훈구 대신들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에 변형된 왕정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던 성종에게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왕권을 강화해 대신들의 입지를 축소하는 것이었다."(222) "삼사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함께 부르는 이름이다. 탄핵과 간쟁을 고유한 임무로 부여받은 삼사는 국왕 및 대신과 긴장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본원적으로 큰 관서였다. 조선의 역사에서 삼사가 본격적으로 대두한 첫 시점은 성종 중반 무렵이었다. 이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직접적인 동기는 성종의 정책이었다. 성종은 대신의 견제 세력으로 삼사를 육성해 신하들 내부의 견제 구도를 형성하려고 했다." "삼사가 중앙 정치의 한 축으로 대두함으로써 그동안 국왕과 대신이 주도하던 체제에서 국왕-대신-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구도로 이행한 것이다."(228-9)


"대신과 삼사의 표면적인 대립은 해당 관원이나 통설처럼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정치 세력의 성향보다는 <경국대전>에서 규정하고 보장된 그 관서의 기본 임무에서 발원한 측면이 더 크다고 판단된다. 다시 말해 대신의 보수적 성향이나 삼사의 진보적 태도는 그 관원의 자발적 선택이나 집단적 성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소속한 관서의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다." "아울러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실은 이처럼 대신과 삼사의 기능은 서로 매우 다르고 고정적이었지만, 그 구성원은 언제나 유동적이었으며 긴밀한 인적 연속성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의 유망한 관원들은 대부분 삼사를 거쳐 대신으로 승진했다." "즉 조선의 주요 관원들은 젊을 때는 삼사에 근무하면서 탄핵과 간쟁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지만, 그 뒤 나이를 먹고 품계가 올라 대신이 되면 그 관직에 합당한 현실론적 태도를 나타낼 가능성이 컸다."(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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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술의 사회사 - 초기 아메리카에서 20세기 미국까지, 세상을 바꾼 기술들
루스 슈워츠 코완 지음, 김명진 옮김 / 궁리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미국 기술의 독특한 특성, 다시 말해 그것을 영국, 일본, 캐나다, 멕시코, 혹은 그 외 다른 나라의 기술과 구별해주는 요소들은 북미대륙의 지리가 갖는 남다른 특성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 유래한 것이다. 오늘날 미국 본토라고 불리는 북미대륙의 이 특정한 부분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조작해왔고 또 적응해온 자연환경이다. 이는 또한 태평양에서 대서양에 걸쳐 세 가지 기후 지대(아열대, 온대, 아한대)를 횡단하며, 최소 열두 개의 매우 다른 생태 지역을 포괄하는 대단히 광활한 땅이기도 하다."(23) "사람들은 이처럼 지리가 각기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발전시킨 문화와 기술도 서로 크게 달랐다. 새로운 환경은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스스로를 부양하고 먹고 살 수 있도록 오래된 도구들을 변형할 기회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우리가 이들을 한데 뭉뚱그려 하나의 일반적 용어(인디언)로 부르는 오류를 저지르긴 하지만, 각각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은 사실상 고유한 존재였다."(25-6)


# 지역별 특성

1. 건조한 남서부 : 진흙벽돌로 집을 짓고, 토기를 빚었으며 면화로 옷을 짜 입었다.

2. 태평양 해안지역 : 다양한 목공도구를 이용하여 판잣집을 지었고, 물고기를 잡아 먹었다. 북서부 지역은 다양한 야생 열매를 보존, 섭취하였다.

3. 평원과 대초원 : 유목생활을 하면서 버팔로를 사냥했다. 동물 가죽을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

4. 동부해안 평원과 애팔래치아 고지대 : 삼림을 파괴하지 않고 적정한 수준에서 나무제품을 활용했고, 비옥한 토양에서 농경생활을 했다.


"유럽 이주자들은 영구적인 집을 만들려고 애썼고, 땅을 개간하기 위해 힘든 악전고투를 하면서 농장을 영구히 비옥하게 유지하려고 했다. 원주민들은 그런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떤 땅에서 수확이 빈약하면 그 땅을 포기했고 자연상태로 되돌아가도록 내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상품을 축적하고 집, 울타리, 쟁기 같은 물건에 집착하는 것은 그들에게 어리석음의 극치로 보였다." "무엇보다 유럽인이 지닌 습관 중에 땅뙈기를 개인이나 그 자손에게 영구히 줘버리는, 즉 땅을 소유하는 것만큼 기이해 보이거나 많은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일도 없었을 것이다." "원주민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일한 땅에서 나는 생산물을 소유했지만 땅 그 자체를 소유하지는 않았다. 원주민 가족은 어떤 주어진 땅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거나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떤 영토의 일부를 팔고 사거나 기증하거나 제한을 두는 일에 대해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34-5)


"유럽인들은 대서양을 건너 이주하면서 이전까지 삶에서 의지해왔던 숙련기술자들의 네트워크에서 단절되었다. 가장 가까운 물레나 바늘제조공이 5,000킬로미터나─그리고 가는 데 몇 달이 걸리는 곳에─떨어져 있는데, 바늘이 부러지거나 실이 떨어지면 어땠을지 한번 상상해보라."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 기본적인 생존 기술을 배워야 했다. 그것도 도착하자마자 바로 배워야 했다." 그런 배움 중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초기 이주자들은 그들이 그토록 빨리 불공평하게 몰아내버린 원주민들로부터 미분화되고 미특화된 방식으로 사는 법의 미덕을 배웠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람이 수많은 기술에 능해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어느 한 분야의 대가는 못 되더라도 온갖 기술을 다룰 수 있는 팔방미인이 되어야 했다. 그들은 그러한 지식과 기술을 자식에게 물려주었고, 이후 '양키의 창의성'(Yankee ingenuity) 문화라고 불리게 된 것을 만들어냈다."(40-1)


"1750년경에 식민지 경제의 80퍼센트는 농업이었고, 식민지에 거주하는 모든 성인 인구의 90퍼센트는 1년에 적어도 일부 기간에는 농사를 지었다. 18세기 말에 탄생한 신생국가는 진정 농부들의 국가였다." 이러한 농업적 기원이 미국문화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널리 공유된 관념 속에 반영되어 있는데, "그러한 신화 중 하나는 '자족성(self-sufficiency)'의 신화이다." 미국사 교과서를 거의 아무거나 들춰봐도 식민지 시기의 자족적 농부에 관한 얘기를 읽을 수 있다. 스스로를 부양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빵, 육류, 옷감, 장작─을 생산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결코 아무것도 구입할 필요가 없었던 사람 말이다. 어떤 독립기념일 연설을 들어봐도 우리 조상의 '독립적' 삶에 관한 얘기를 들을 가능성이 높다." "기술사는 우리에게 자족성의 신화가 (공동체적 정체성의 느낌을 북돋아준다는 긍정적 의미와 사실이 아닌 이야기라는 부정적 의미의 두 가지 모두에서) 신화임을 가르쳐준다."(62-3)


"혼합농업이나 자급농업에 종사하는 평균적인 농장가족이 이처럼 상대적으로 검소한 생활수준이라도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노동으로 영위하려 했다면, 수많은 도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사과술 압착기와 쟁기, 직기와 써레, 마구와 물레, 칼과 양초 만드는 틀 등이 그런 도구들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단순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값비싼 물건들이었다." "비용뿐만 아니라 자족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수많은 일손, 비범한 수준의 기술이 필요했다." 실제 수행에 몇 시간,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달이라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숙련도의 부족보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일들 중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숙련이 부족하면 종종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은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자족적인 농업과 그에 따르는 생활수준에 매혹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은,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82-4)


물물교환 경제를 보완한 것은 "식민지 도로를 따라 다니던 떠돌이 기술자들이었다. 그들은 농장 가정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도구를 제공해주었다." "농장에 사는 남녀들은 온갖 일에 능한 팔방미인이었는지 모르지만, 기회가 되기만 하면 어떤 일에 특화한 사람에게 자신들의 일 중 일부를 맡기는 쪽을 분명히 선호했다."(86) "경제적 독립성, 다른 말로 하자면 가정의 완전한 자족성은 대단히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자족적 농업의 가치를 마음속 깊이 믿고 있었다. 헌법의 기틀을 다진 사람으로서 그는 소농의 이해관계가 존중받고 자족성의 문화가 미국의 정치과정에 확실히 자리잡을 수 있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떤 정치적 묘안도─대의제 의회도, 강력한 주정부도, 선거권을 토지소유자에게만 국한시킨 조치도─제퍼슨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사회, 즉 진정으로 독립적인 소농들의 국가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당대의 기술시스템은 그런 도전을 감당할 수 없었다."(87)


"18세기 중엽이 되면 거의 모든 도시에서 수력으로 가동되는 제조소가 적어도 하나 이상 있었다."(105) "제조소 건설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인 제조소기술자(millwright)들은 당대에 가장 기계적 숙련이 높은 기술자들이었을 것이다."(107) "많은 지역사회에서 제조소는 교회, 학교, 법원이 들어서는 것보다 앞서 건설되었다. 제조업자들이 이민에 관심을 갖도록 온갖 종류의 특별한 유인책들이 마련되었다." "한 버몬트 사람의 말을 빌리면, 제조소가 없는 것은 "문명화된 삶의 존재와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제분소가 있으면 개척가족은 먹을 곡물을 직접 갈아야 하는 노동에서 해방되었고, 제재소가 있으면 집을 지을 때 목재를 준비하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제혁소, 소모소, 축융소는 모두 식민지인들이 값싸고 오래가는 옷감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한 옷감은 빵을 만드는 곡물이나 지붕에 올리는 판자와 마찬가지로 안락함과 생존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물품이었다."(109-10)


# 제조소의 종류

1. 제분소 : 곡물을 빻아주는 곳

2. 제재소 : 통나무를 판자로 만들어주는 곳

3. 소모소 : 새로 깎아낸 양털이 뒤얽힌 것을 풀어주는 곳

4. 축융소 : 젖은 천을 두들겨 오그라들게 하는 곳

5. 제혁소 : 가죽 제품을 유연하게 만드는 떡갈나무 껍질을 빻는 곳


"도시장인들은 자신의 부가 상인들의 부와 마찬가지로 토지소유의 정치가 아닌 교역의 정치에 매여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식민지인과 달랐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토지가격과 토지에 붙는 세금을 걱정했다면, 숙련기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수출 할당량과 수입관세, 신용협약, 통화의 안정성에 대해 우려했다. 1760년 이후에 모국과 식민지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었다."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장인들 역시 1763년 이후 국왕 조지 3세가 식민지 무역에 대해 더 많은 통제권을 행사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하려고 도입했던 "통화법(1764년, 식민지 의회가 발행한 지폐의 가치를 평가절하한)과 인지세법(1764년,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문서에 드는 비용을 증가시킨)에 의해 사업에 제한을 받았다. 타운센드 관세(1767년)가 제정되자 상인들은 수입된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 조직에 나섰고, 식민지의 숙련기술자들은 나름의 이해관계에 따라 불매운동을 지지했다."(122)


# 식민지 해방의 결과 : 중상주의 정책의 철폐와 신생국가의 산업기술 발전 토대 마련


"에번스가 제분과정을 좀더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개발한 기계들은 19세기 전반기 제분업의 성장과 산업화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다." "식민지 시기에는 숙련노동력이 부족했고, 건국 이후 초기 수십 년 동안에도 이 문제는 계속되었다. 토지가격이 계속해서 저렴한 상황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많은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기보다는 자기 땅에서 일하는 편을 더 선호했다. 노동이 희소해지면 값은 비싸지며, 이는 노동절감 장치가 수익을 증가시켜줌을 의미했다. 이는 왜 그토록 많은 미국산업들이 점차 기계화의 길을 걸어갔는지의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134-5) "개선된 생산재들은 경제에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를 미쳤다. 생산재들은 여러 방식으로 쓰였기 때문에 여러 증폭 효과를 가져왔다." 곡물 엘리베이터는 밀가루 생산비용을 낮췄고, 증기기관은 운송비용을 낮췄다. 가격 인하가 초래한 "수요 증가는 제분업자들이 시설을 확충하도록 자극했다. 이것이 바로 승수효과이다."(139-40)


# 에번스의 대표적인 발명품 : 곡물을 운반하는 '곡물 엘리베이터'와 곡물가루를 체로 걸러내는 '호퍼보이'


조면기를 최초로 발명했지만 생산과 유지보수가 간편하다는 이유로 복제품이 난무해 수익을 얻지 못한 경험은 "휘트니에게 소중한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발명은 어렵지만, 개발은 그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었다. 밀가루를 빻거나 방아쇠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내기 위해서는 창조성과 창의력이 요구된다. 발명에서 수익을 얻어내거나 실제로 새로운 장치를 생산해내기 위해서는 끈기, 참을성, 정치적 안목, 그리고 많은 돈이 필요하다. 어떤 종류의 돈이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선불로 주어지는 돈─때때로 투자자본이라고 불리는─이 있어야 한다. 뭔가를 내다 팔 준비가 되기 전에 여러 달, 여러 해 동안 사업을 지탱하려면 말이다. 일라이 휘트니는 연방정부가 선불로 돈을 줄 수 있는 극소수의 잠재적 원천 중 하나라는 사실을 간파하는 기지를 발휘했고, 아울러 19세기 초에 연방정부가 무기제조업자들로부터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정치적 안목도 갖추고 있었다."(146-7)


# 휘트니가 정의한 미국식 생산 체계

1. 신속성 :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기계화

2. 균일성 : 대량 생산된 제품의 동일성

3. 정확성 : 정확한 명세에 따라 생산한 호환 가능한 부품


"휘트니가 꿈꾸었고 그의 뒤를 이은 수십 명의 제조업자들이 이뤄낸 새로운 생산방법은 독특한 미국적 특성을 갖고 있었다." "병기창에서건 시계공장에서건 간에, 기본적 요소는 언제나 동일했다. 상대적으로 미숙련된 노동자들이 특수목적 동력 기계류와 표준화된 척도를 사용해서 대단히 높은 수요(소비재의 경우)나 대단히 정확한 수준(군사무기의 경우)에 맞추기 위해 특수하게 설계된 제품을 통해 균일한 부품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미국식 생산체계는 이후 대중시장을 위한 대량생산으로 불리게 될 것의 기반을 이루었다. 독립전쟁 종식부터 남북전쟁 발발 사이의 기간 동안 미국 정부는 전쟁부를 통해 자금을 제공했고, 이것이 없었다면 체계의 발전은 진척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만의 독특한 자원 균형─값싼 토지, 값비싼 노동력, 늘어나는 인구─은 숙련노동자를 미숙련노동자로 대체하는 기법을 선호했고, 이에 따라 개발 단계에 있던 체계가 형성되었다."(151)


# 병기창 관행(armory practice) : 특수목적 기계의 사용, 노동분업, 미숙련노동력 고용


# 미국 산업화의 특징

1. 값싼 토지 : 혁신가들은 희귀한 숙련 노동자들을 대체할 수 있는 기계 개발에 노력을 기울였다.

2. 국가 지원 : 국가는 독립 초기에 많은 양의 무기를 확보하고자 새로운 형태의 특수목적 기계 개발을 적극 지원했다.

3. 넓은 공장부지 : 많은 공장들이 유럽에 비해 더 오랫동안 농촌지역에서 수력을 이용하였다.

4. 인구 팽창 : 국내시장의 팽창으로 비용을 낮추고 생산력을 높이는 새로운 설비 투자에 적극적이었다.


연방의 결속력 강화를 바라는 "풀턴, 갤러틴,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로마인들에게 통했던 그 처방(공화주의, 시민권의 확산, 훌륭한 운송망)이 미국에서도 잘 통하기를 희망했다. 갤러틴의 보고서가 상원에 분명히 전달해준 것처럼, 그들은 국가 운송 체계─메인 주에서 조지아 주까지, 또 미시시피 강에서 대서양까지 뻗은 도로와 운하 체계─를 통해 미국의 다양한 지역들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특정 주들(특히 서부의 주들)의 연방 탈퇴를 경제적·정치적 견지에서 어렵게 만들고자 했다."(168-9) "1812년에 터진 전쟁은 영국이 대서양 연안을 봉쇄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그때까지 몇몇 주정부와 기업가들이 건설한 유료도로에 의존하던) 육상운송─군대를 이동시키거나 국가의 경제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화물을 운반하기 위한─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연방위원들은 이러한 경험과 1808년에 갤러틴이 내놓았던 제안을 반영해 국유도로체계의 건설 가능성을 숙고하기 시작했다."(176)


"역설적인 것은 유료도로의 시대에 종언을 고한 원인이 부분적으로는 많은 유료도로의 건설을 가능케 했던 바로 그 재정적 장치였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종류의 국가보조금으로 운영되는 주식회사가 그것이다. 주식회사는 수많은 종류의 공공 토목공사에 자금을 댈 수 있는 대단히 유연한 도구임을 입증해 보였다. 여기에는 하나의 운송방식으로서 유료도로를 결국 뛰어넘은 운하와 철도가 포함되었다."(178-9) 운하 건설과 증기선 개발은 "소비자들이 상품에 지불해야 하는 가격을 낮추어주었다. 비록 운하는 개별 주들 내에서 건설되었지만, 그것이 연결한 수로의 성격 때문에 주들을 경제적으로 서로 묶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갤러틴과 제퍼슨이 희망했던 바대로 운하는 이전까지 인구부족에 시달리던 시골지역의 농업과 제조업이 수익성을 갖도록 만듦으로써,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하거나 외국이 침입해 들어올 가능성을 더욱 낮추어주었다."(188)


"1860년이 되자 수백 개에 달하는 철도회사들이 미국 내에서 4만 8,960 킬로미터의 철도선로를 운행하고 있었다." "무겁고 부피가 큰 물품들─석탄, 밀, 가축, 심지어 철로까지─의 운송비용이 떨어지고 있었고, 이는 경제 전반에, 특히 정착지가 드문드문 존재하는 지역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미시시피 강 서쪽 지역들에 점점 빠른 속도로 정착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어떤 미국인들은 장거리여행을 통해 서로를 방문할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다른 어떤 미국인들은 한 곳에서 살면서 휴가는 다른 곳에서 보내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버터, 당근, 사과처럼 상하기 쉬운 식품류도 시장까지 먼 거리를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군대는 전장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남부동맹의 장군들을 당황케 했다. 일단 남북전쟁이 연방에서의 탈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자, 철도는 유료도로·운하·증기선으로 시작했던 국민국가 건설의 경제적 과정을 완결지었다."(206-8)


"성공적인 발명을 만들어내는 훌륭한 아이디어는 한 사람의 고독한 정신이 빚어낸 독특한 창조물일 수 있다. 그러나 그처럼 훌륭한 아이디어를 작동 가능한 실체로 전환하는 개발과정은 협력자들을 필요로 하며, 성공한 발명가들은 점차로 이러한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221) "19세기 말에 발명활동은 협력에 기초하는 것임을 의식적으로 깨달은 에디슨, 스페리, 이스트먼은 그러한 종류의 협력을 촉진하기 위한 전문연구소를 제각기 설립했다."(223) "1920년에는 제너럴 일렉트릭, 벨 전화회사, 웨스팅하우스 등등의 다른 회사들도 스페리와 이스트먼이 처음 걸어간 길을 좇아 이미 산업연구소를 설립해놓고 있었다. 독립발명가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고 기업발명가의 시대가 열렸다. 발명가들 사이에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그러한 필요를 처음 깨달았던 독립발명가들에 의해 하나의 제도인 산업연구소로 자리매김 되었다."(226)


"1870년에서 1930년 사이의 기간은 기업활동의 황금기였고, 경제적 선구자가 되기에 최적의 시기였다. 지방·주·연방 정부가 협력해 지원해준 덕분이었다. 미국 역사를 통틀어 이 시기만큼 미국의 각급 정부가 온갖 종류의 기업가들에 대해 그토록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던 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철도에 대한 토지불하처럼 "남북전쟁 이후 민간산업에 대한 정부의 원조는 더욱 광범해지고 정교해졌다." "규제는 최소한으로 억제되었고, 환경보호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거의 없었으며,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는 정부의 권한에서 완전히 벗어난 문제로 이해되었다." "최저임금 제도도 없었고, 위험한 장비를 다루는 사람들은 자격증을 갖춰야 한다는 요구조건도 거의 없었으며, 노동자들의 안전을 보호할 긴급한 필요도 없었다. 1906년까지는 광고 내용에 어떤 종류건 진실이 담겨야 한다는 요구조건도 없었다. 기업가는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누렸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를 행사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228-30)


"전前산업사회에서는 삶이 불안정하면 날씨의 변덕과 자연적 순환이 가져오는 위험에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흔했다. 반면 산업사회에서는 삶이 불안정하면 시장의 변덕과 사회적 힘들이 가져오는 위험에 책임을 돌리는 일이 많아졌다. 즉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개인들은 거대하고 복잡한 네트워크 속으로 모두 연결되었고, 서로서로에게 더욱더 의존하게 되었다."(258) "1860년경에는 이미 전신이 미국의 정치 및 경제 생활에서 중추적인 일부로 자리잡았고 1880년에 이르면 이는 더욱 확고해졌다. 신문들은 중요한 정보를 신속히 전송하기 위해 전신에 의존했다. 1847년에 터진 멕시코와의 전쟁은 빠른 뉴스 보도가 이루어진 최초의 전쟁이었고, 남북전쟁은 전신선로로 신속하게 전달된 전투정보에 의거해 군사전략이 짜여진 최초의 전쟁이었다. 흔히 '도금시대'로 불렸던 기간(1880~1900) 동안, 이제 막 번창하기 시작한 미국의 금융시장은 가격과 주문의 빠른 전송을 위해 전신에 의존했다."(263)


J. P. 모건, 릴런드 스탠퍼드, 제이 굴드,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찰스 크로커 같은 사업가들은 철도를 합병하면서 19세기 미국에서 최고의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경쟁하는 지선을 사들였고, 간선철도의 이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했으며, 지선이 간선과 합병될 때까지 지선철도의 주식을 사들이는 데 엄청난 투자를 했다. 이런 과정이 끝나자 이제 철도는 하나의 통합된 네트워크, 즉 기술시스템이 되었다."(267) "송유관 네트워크 역시 미국 경제와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에 광범한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말의 수십 년 동안 매우 많은 수의 미국인들─특히 대도시에 살지 않았던 사람들─은 석유산업의 산물 중 하나인 등유를 가정에서의 난방, 조명, 취사 용도로 이용했다." "20세기 초에 먼저 휘발유를 쓰는 내연기관이 나오고 이어 내연기관으로 움직이는 자동차 및 트럭이 등장하면서, 석유는 비단 미국인들의 노동생활뿐 아니라 여가시간에도 필수적인 조건으로 자리 잡았다."(275)


"전화는 (전신기사라는 중개인이 항상 있어야 하는 전신과 달리) 사용자들간에 직접적 통신을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전화는 음성통신의 한 형태였기 때문에 감정에 호소하기가 쉬웠는데, 이는 전신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277) "전기 시스템은 제각각 다른 사회적 목표와 경제적 전략을 가진 여러 개의 상이한 하부 시스템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화나 석유 시스템에 비해 훨씬 더 복잡했다. 그리고 그 복잡성 때문에 어떤 단일한 회사도 전기 시스템을 지배할 수 없었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전기 시스템은 그것의 산물인 전기 에너지가 표준화되었다는 사실에 일관성을 갖게 되었다. 1910년이 되면 거의 모든 발전회사들(점차 전력회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이 초당 60사이클(60Hz)의 교류전류로 공급하고 있었다. 이는 모든 가전제품이 일관된 사양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했고, 동시에 모든 송전설비가 잠재적으로 서로 연결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283-4)


"산업화가 미국인들에게 미친 영향에 관한 어떤 일반화도 미국인들을 직업, 성별, 인종, 계급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서는 틀린 것이 될 수밖에 없다."(297) "예상치 못한 결과의 법칙이라 부를 만한 것에는 그에 뒤따르는 명제가 있다. 만약 새로운 기술의 즉각적 이득이 분명하다면(새로운 수확기나 새로운 쟁기가 가져올 비용 감소와 수확 증가라는 즉각적 이득은 19세기에 농장을 소유한 많은 가족들에게 의문의 여지없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그로부터 시차를 두고 발생한 손해에 대해 기술을 비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특히 기술 외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다른 원인들이 존재할 경우 그렇다. 그래서 가격하락에 맞서 발버둥 치던 19세기의 농장가족들은 자신들이 처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철도, 제분소 주인, 대도시 상인, 타락한 정치인들을 비난했지만 그들이 가진 써레, 드릴, 탈곡기를 비난하지는 않았다."(305)


생산되는 상품의 질과 양에 상관없이 손쉽게 대체될 수 있는 미숙련노동자들과 달리 "숙련노동자들에게 1870년에서 1920년 사이의 기간은 행복한 시간이 못 되었다. 기계화는 작업장 소유주에게 축복이었던 만큼이나 작업장 노동자들에게 독으로 작용했다. 소유주들에게 기계화는 생산성과 (종종) 수익 모두의 증가를 의미했다. 노동자들에게 이는 흔히 탈숙련화를 의미했다. 자신의 숙련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것을 얻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던 사람들에게 이는 결코 달갑지 않은 과정이었다."(307) 건설업자들이 최소 비용과 최소 시간만을 고려하여 반半숙련/미숙련노동자들을 고용하자 "한때 그토록 견고해 보였던 사회적 위계의 사다리─젊은이가 도제생활에서 마스터의 지위까지 오르게 해주었던─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탈숙련화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목공의 전통 그리고 마스터와 직인들 모두가 품고 있던 전통적 기대는 이미 불안정해졌다."(310-11)


"산업화의 첫 번째 단계는 평균적인 미국인의 생활수준을 크게 높여준 다양한 혁신들을 미국 가정에 도입했지만, 여성이 가정에서 해야 하는 일의 양을 크게 줄이지는 못했다. 남성과 아이들은 일을 면제받을 수 있었고 학교로, 번창하는 공장으로, 사무실로 나갔다. 반면 성인 여성들은 쉽게 일을 면제받을 수 없었다. 설사 주철 스토브와 주석 빨래통, 수도시설과 가스램프, 깔개 청소용 솔과 페달로 움직이는 재봉틀을 집에 들여놓았다 하더라도, 여성들은 여전히 몹시 고된 노동이 집에 잔뜩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336) "공장의 일자리는 지루하고 보수도 열악했지만, 많은 젊은 여성들은 가사서비스보다는 공장노동을 선호했다. 공장노동자는 하루 일이 끝나고 나면 그녀의 삶은 자신의 것이었지만, 가사하인은 2주에 하루만 쉬면서 매일 24시간 내내 주인의 부름에 응해야 했다. 공장노동자는 그녀 또래의 남녀들로 구성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지만, 가사하인은 고립돼 있었다."(338-9)


"기술에 대한 관념은 자연, 사회적 지위, 숙련이라는 중요한 범주들과의 관계 속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범주들은 이 외에도 많이 있다. 가령 기술은 성별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어떤 기술들(강철대들보)을 본래 남성적인 것으로, 다른 어떤 기술들(요리용 스토브)을 본래 여성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기술은 또한 신에 대한 관념과의 관계 속에서(인간이 다른 네 손가락을 마주볼 수 있도록 엄지손가락을 갖도록 창조된 이유는 신이 인간을 도구 사용자로 만들려 했기 때문인가?), 또 정치에 대한 관념과의 관계 속에서('정부기제'니 '권력분립'이니 하는 중요한 표현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의미를 갖는다. 자연, 사회적 지위, 숙련, 성별, 신, 정치에 관한 이 모든 관념들은 서로 연결돼 있고, ('기술'이라는 단어가 통상적으로 쓰이기도 전인) 산업화 초기와 산업사회 발달기에 기술의 지성사의 구성요소를 이루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348-9)


"콕스나 해밀턴, 그 외 이들처럼 생각한 사람들은 산업화가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신에 의해 온전히 예정된 것이라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또한 물과 증기에서 동력을 얻는 기계들을 구비할 그 모든 공장들에서 누가 일해야 하는가에 관한 신의 뜻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바로 여성들과 아이들이었다. 왜 그럴까? 산업화된 경제에서도 농부들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작은 남성의 일이었고, 공장을 짓고 기계를 발명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반면 기계를 돌리는 것은 여성이나 아이들에게 적합한 일이었다. 그들은 결국 농업에서 필수적인 (남성) 노동자들을 빼내 오지 않고도 그런 노동을 맡길 수 있었고, 들판에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밤 시간에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결국 미국이 건국된 직후 기간 동안 신, 자연, 정치, 성별, 사회적 지위의 개념은 이미 기술에 대한 관념과 연관되어 있었다. 아직 그 단어가 널리 쓰이기도 전에 말이다."(353-4)


"어떤 관념이 매우 강력할 때는 심지어 논쟁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때때로 이를 수용한다. 그래서 남북전쟁을 전후한 수십 년 동안 산업화 옹호자들 일부는 낭만주의자들의 관념을 일부 받아들였다." "동일한 경향─산업화 지지자들이 낭만주의 관념을 일부 받아들이는 것─은 산업화를 좋아하고 그것이 계속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탈숙련화의 문제를 다룬 방식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산업화의 옹호자들은 낭만주의자들의 비판에서 '기계화된 인간'에 관해 지적한 부정적인 사항들을 인정하면서도, 19세기 후반이 되면 산업화가 결국에 가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해방할 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산업화와 해방 사이의 연결고리는 번영이 될 터였다. 그러한 연결고리는 19세기 말에 쓰인 수많은 기술 유토피아의 중심주제였다. 기술 유토피아란 기술이 인류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준 사회에 대한 가상적 설명이었다."(357-9)


"테일러와 그 제자들은 노동과정이 재설계되고 노동자들이 성과급을 지급받으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소기업가로서 시간을 스스로 관리하는 과거의 장인 같은 존재가 될 거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 숙련화가 되는 것이다. 또한 과학적 관리자들은 효율의 증대가 산업노동을 노동자들에게 더 쉽고 즐거운 것으로 만들어줄 것이고 그러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낭만주의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업무에서 창조성을 발휘하고, 수동적인 노동자 무리와 관계를 끊고, 임금과 지위를 향상시키는 식으로 말이다."(362) 19세기 말의 산업 옹호자들은 '노동, 자존심, 창조성, 예술성, 자부심, 숙련, 자유, 남자다움, 독립성'과 같은 낭만주의자들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산업기술이 보통 사람들을 위한 번영과 물질적 안락을 창출할 거라고 주장했다. "이는 때때로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불린 일단의 관념들이기도 하다."(364)


"정부기구들이 기술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식에는 적어도 일곱가지가 있다. 특허, 관세, 규제, 교육, 연구, 건설, 소비가 그것이다. 군대는 특히 뒤의 네 가지에 집중적으로 관여해왔다."(420) "전쟁을 수행하는 데 연구개발이 중요함을 인식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새로운 조직의 창설을 승인했다. 과학연구개발국(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 OSRD)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업무를 담당하는 민간기구로 만들어져, 정부─특히 군대─가 후원하는 (수많은 분야에 걸친) 모든 연구활동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에 따라 2차대전은 미국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전쟁에 거의 전면적으로 동원된 최초 사례가 되었고, 그 속에서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의 국가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산업체와 학계는 이 모든 노력에서 힘을 합쳤지만, 총책임을 맡은 것은 연구를 관리하고 비용을 대던 정부였다."(433)


"19세기 초에 과학과 기술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현저하게 다른 집단에 속해 있었고, 이는 곧 두 직업간의 차이가 상당히 분명했음을 의미했다. 과학은 대학과 박물관에 일자리를 가진 교육받은 계층의 사람들이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이었고, 기술은 작업장과 공장에서 훈련을 받고 숙련기술을 실행에 옮기는 장인들이 사용하고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5년 이후에 "과학연구에 드는 비용이 점점 상승하고 대학의 교수로 있는 과학자들이 점점 외부의 연구자금에 의존하게 되면서, 한때 과학과 기술 사이에 놓였던 선명한 경계선은 다소 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연구가 점차 복잡한 기계장치들(예컨대 선형가속기와 전자현미경)과 기계에 기반한 과정(예컨대 겔 전기영동과 컴퓨터 모델링)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손을 써서 일하는 사람과 머리를 써서 일하는 사람 사이의 오래된 구분이 상당히 의심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503-4)


1906년부터 옥수수 교배 실험에 착수한 이스트와 셜은 "모두 과학자였고 그들의 실험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것이었다. 이스트는 옥수수의 특성들 중 어떤 것이 우성이고 어떤 것이 열성인지를 알아내고 싶어 했고, 셜은 옥수수에서 어떤 특성이 멘델이 찾아낸 단위특성(씨앗의 색깔이나 형태 같은)에 해당하는지를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이스트와 셜은 모두 대단히 실용적 목표를 추구하는 기술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엄청난 경제적 중요성을 지닌 작물에 멘델주의의 법칙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확인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들이 옥수수의 유전 패턴에 관해 알아내고자 했던 이유는 더 나은 옥수수 작물을 번식시키기 위해서였다."(509) " 잡종 옥수수의 역사는 우리에게 "기술과학은 사람들이 자연을 변형하기 위해 그것에 관한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이며, 역으로 자연에 관한 모종의 진리가 자연을 변형하려 애쓰는 실천 속에서 드러나는 활동"이라는 것을 알려준다.(513)


"잡종 옥수수는 가족농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소규모농장이 대기업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거대한 농장에 자리를 내주었던 과정과 연관돼 있다. 잡종 옥수수를 재배하려면 농부는 상업적 종자회사에 의지해야만 하며 종자를 구입하는 데 들어가는 추가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따라서 잡종 옥수수는 석유에서 뽑아낸 비료, 석유를 연료로 움직이는 트랙터, 전기로 열을 얻는 부화기, 온라인 기상 데이터베이스 등과 마찬가지로 성공적인 농장운영을 위해 자본이 더 필요하도록 만든 하나의 기술시스템이다. 요구되는 자본이 점점 많아질수록 수익을 내기 위해 경작해야 하는 토지 규모는 점점 커지며, 독립적으로 농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점점 적어진다." "이처럼 예상치 못했고 의도하지도 않은 결과들은 거의 모든 기술변화에 공통된 특징이며, 우리 모두가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특징이기도 하다."(514-6)


"모든 기술변화는 의도하지 않았고 예상치도 못한 사회적·윤리적 결과들을 야기하며, 설사 최고의 전문가들이라 하더라도 이를 예측해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울러, 적어도 1945년 이후부터는 설사 최고의 전문가들이라 하더라도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기술과학의 속성 때문에 사실상 모든 연구자들은 모종의 목표지향적 프로젝트에 종사하며 이런저런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이는 프로젝트에 영향을 미칠 정치와 정책들에 그들 모두가 일정한 기득권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술은 복잡하며, 우리 삶도 마찬가지이고, 우리가 함께 살아나가면서 만들어내는 역사 또한 그러하다. 미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복잡성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모든 기술변화는 심대한 사회적·윤리적 영향을 미치며, 우리는 그러한 영향에 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일을 전문가들에게 온전히 의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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