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 푸른역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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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본 사람들이 청일전쟁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치른 전쟁이었다고 배웠을 것이다. 청일전쟁의 목적을 나라 안팎에 밝힌 선전조칙(宣戰詔勅)에도 "조선은 (일본)제국이 처음에 가르치고 이끌어 열국의 대열에 들게 만든 독립된 나라다. 그런데도 청나라는 조선을 속방이라고 칭하여 음으로 양으로 그 내정에 간섭하니·····제국이 솔선해서 제 독립국의 대열에 들게 한 '조선의 지위'와 '그것을 표시하는 조약'을 업신여기는 청조 중국의 잘못된 욕망 때문에 일본은 부득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청일전쟁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여기는 일본과, '속국'이라고 여기는 청나라가 벌인 전쟁으로, 조선을 '속국'이라고 한 청조 중국은 '야만국'이며 일본은 '문명국'이다. 청일전쟁은 '야만'과 '문명'의 전쟁이었다고 곧 떠들썩하게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처음 행사한 무력은 다름아닌 그 독립을 위해 싸운다던 조선의 왕궁을 향해서였다."(59-60)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자유민권운동이 쇠퇴하면서 중국에 대한 적대적인 강경론이 우세해지고 있었다. 청일전쟁 발발 10년 전인 1884년 일본의 후원을 받은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서울에 주둔한 중국 군대에게 격파되어 실패로 끝났고, 김옥균 등은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중국에 대한 적대감과 일본의 국권확장 주장이 국민들 사이에서도 급속히 퍼졌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탈아론(脫亞論)'을 외친 것도 갑신정변 다음해의 일이다. 더구나 청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894년 3월 김옥균이 상해에서 조선의 자객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청에 대한 일본의 적대감정은 한층 높아갔다. 따라서 조선의 농민반란을 이유로 일본군이 출병하자 여론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신문도 적극적으로 전쟁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은 구미 열강의 (간섭) 움직임이었다."(61)


"그래서 조선주재 일본공사 오토리 케이스케가 생각해 낸 방법이, 청한 종속문제를 끄집어 낼 것이 아니라 조선 정부에게 터무니없이 무리한 난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즉 1876년 조선 정부가 일본과 맺은 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서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로서·····"라고 약속한 것을 들어, 지금 청조 중국의 군대가 "속방을 보호한다"라는 이유로 주둔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다. 조선은 청국의 속국인가 독립국인가, 독립국이라면 청국군을 국외로 몰아내야 하며, 조선에 그럴 힘이 없다면 일본군이 대신해서 몰아낼 것이므로 조선 정부는 일본에게 '청군 구축'을 의뢰하는 공식 문서를 보내라며 정부를 압박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미 7월 12일 청조 중국에 대한 영국의 조정 공작이 실패하자 전쟁을 시작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19일 대본영(大本營)도 조선에 있는 일본군에게 "청국군이 늘어나면 스스로 결단을 내리도록 하라"며 개전을 허가하였다. 조선왕궁점령은 이렇게 해서 계획되었다."(62-3)


'공간전사'인 《메이지 이십칠팔년 일청전사》 제1권은 조선 국왕이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충돌로 서로 사격하게 되어 국왕에게 걱정을 끼친 것을 사죄하고, '국왕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보도는 사건 직후부터 일본은 물론 나라 안팎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일청전사》 초안에 분명히 나타난 바와 같이 국왕은 일본군에게 협박당하고 있었으며, 국왕을 지키고 있었던 이들은 조선 병사들이었다. 더욱이 이 위급한 때에 국왕측은 '외무독판이 지금 오토리 공사에게 가서 담판 중이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 문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며 일본병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야마구치 대대장은 "문안에 있는 조선 병사의 무기를 인도하면 응할 것이다"라고 대답했지만, 국왕측이 듣지 않자 '칼을 빼들고 군대를 지휘하고 질타하여 일본병을 문안으로 돌입'시키려고 했던 것이다."(76-7)


"일본군이 왕궁을 점령한 7월 23일 오전 11시에 국왕의 부친인 대원군 이하응이 일본군 보병 제11연대 제6중대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왕궁으로 들어왔다. 일본측은 왕비인 민비 일족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대원군을 추대하여 민씨 일족을 정권에서 배제하려고 했다." "일본 공사관의 스기무라 후카시 서기관은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는 대원군에게 "일본 정부의 이번 거사는 실로 의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일이 성사된 다음 조선국의 땅을 한 치도 빼앗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을 전했다. 어떻게 하든지 대원군을 끌어내서 민씨 일족을 궁정에서 몰아내고, 국왕을 일본 지배하에 두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조선왕궁점령의 최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마지못해 요청에 응하여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왕궁으로 들어간 것이 오전 11시였다. 이어서 오토리 공사도 궁전으로 들어와 조선 정부는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83-4)


"조선 출병 이후 군사 관련 보도는 도쿄 발은 물론, 현지 보도도 일본 정부와 군의 엄중한 관리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일본 국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렇게 걸러진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언론 기관은 신문지조례를 비롯하여 여러 법률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 파병 직후부터는 군사에 관한 기사 게재에 대한 내무성 경보국의 '주의 구두전달'(6월 5일)이 있었고, 또 육군성 제9호·해군성령 제3호(모두 6월 7일) 등에 의해 엄중하게 통제되었다. 〈오사카아사히 신문〉의 기사 가운데 "이상 전보 세 개 중 23일 발은 모두 그날 접수했지만 즉각 독자에게 보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든가,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의 "위 확실한 보도는 육군성 검열필"이라는 기록은 그 같은 통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 내무성과 육군성·해군성 등은 단순한 통제뿐 아니라 '꾸민 이야기'를 흘려 정보를 조작하기도 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사실인 듯이 보도한 7월 25일자 기사는 그 같은 정보 조작의 한 예다."(128-9)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에서는 "미국과 싸운 일은 잘못되었지만, 청일·러일전쟁까지는 좋았다"라고 하는 역사관이 지배적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책임에 대해서도, 그 주요한 책임은 일본의 군부, 특히 육군에 있으며, 그 군인들이 "위대했던 메이지 시대 선배들의 작업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쪽에는 군도(軍刀)를 차고 위압을 가하는 거친 군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국가의 앞날을 우려하여 고뇌하는 자유롭고 합리주의적인 시민들이 있는 듯한 역사 인식, 그리고 양심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힘이 없는 후자의 사람들이 군인 집단에 맞서 힘으로 지탱하지 못해 굴복하는 가운데 전쟁을 향한 길이 준비되고 있었다는 역사 인식이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단지 천황과 그의 측근 그리고 일본의 보수 정치가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들조차 이와 비슷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현실에서 자주 경험한다."(161-2)


"오늘날까지도 "일본은 청일·러일전쟁 무렵까지는 국제법을 잘 지켰다"는 목소리는 일본에서 끊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한층 목청을 돋우기까지 하고 있다. 시바 료타로가 죽고 나서, ('좋은 시대 메이지'로 대표되는) '시바 사관'을 찬미하는 소리가 한층 더 높아진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다." "시바는 정체와 부패로 얼룩진 조선 왕조와 비교하여 일본의 '메이지를 찬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시바가 죽은 후 일본의 저널리즘이 조잡하고도 일방적으로 '시바 찬가'를 선전할 때, '메이지 찬미'와 극에 위치한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 사실 그리고 그에 저항했던 조선과 중국의 민족적 각성의 역사는 일본인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 현대사상의 동향은 청일·러일전쟁 승리라는 그늘 뒤에서 일본이 조선과 중국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그리고 조선과 중국에서는 이러한 침략과 패배에 대항하여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애써 감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167-8)


청일전쟁의 선전조칙(詔勅)이 나온 지 채 열흘도 되기 전에 육해군 참모회의에서 남방 작전 구상이 논의된다. "그곳에는 '동아의 평화를 교란할 염려가 있는 영국'을 견제하려면 영국의 '화심을 안고 있는 홍콩'을 제압할 수 있는 팽호도의 영유가 꼭 필요하고, 팽호도의 안전을 위해서는 '타이완을 병유'하지 않으면 안 되며, 다시 마음껏 '구주 열국'과 경쟁하여 '동아시아에서 자웅을 다투기' 위해, 기회를 틈타 필리핀을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상까지 있었다. 필리핀 점령까지 구상한 이 같은 논의가 참모들 사이에서 오간 것으로 당시 정부의 대외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청일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일본군의 중추에서 이러한 논의가 거듭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무적 황군의 신화'가 생기고, 비합리적인 전략으로 내달린 태평양전쟁으로의 길이 청일·러일 두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172-3)


"'무적 황군의 신화', 비합리적인 전략 포로의 학대 등 태평양전쟁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타락한 일본군의 모습을 보며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청일·러일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일본의 침략을 받아 전장이 됐던 조선과 중국의 입장을 고려하는 관점이 거의 무(無)에 가깝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군과 일본 정부 지도자는 물론 저널리즘과 일반 국민여론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조선인과 중국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일본 정부와 일본군은 그들의 저항에 어떻게 반응했는가와 같은 문제에 대한 고려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점이 훗날 무모한 침략과 조선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국민에 대한 학대로 이어진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을 당했던 조선으로서는 그 나라 군대가 다시 몰려와 나라의 상징인 왕궁을 점령했으니, 조선의 관야에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는가. 조선 민족의 눈으로 그 일을 목격한다면 사건의 중대성을 자연히 알 수 있을 터이다."(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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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배신 - 착한 유전자는 어째서 살인 기계로 변했는가
리 골드먼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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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인류를 생존시킨 네 가지 형질의 비밀


1장 우리 몸은 어떻게 지금처럼 프로그래밍되었을까


"DNA의 양은 각 염색체에 따라 다르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각각 32억 쌍씩 받아 모두 합치면 64억 쌍의 뉴클레오티드(DNA를 구성하는 단위 분자)가 포개어 합쳐져 이중 나선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64억 쌍은 보통 '염기쌍'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누군지를 규정하는 단어(유전자, 즉 유전 형질을 발현시키는 인자)를 이루는 글자들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우리의 염색체 DNA에는 거기에 호응하는 RNA를 위한 암호를 가진 약 2만 1000개의 유전자가 들어있다. 또 RNA에는 우리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데 꼭 필요한 특정 단백질을 만드는 암호가 들어 있다. 놀랍게도 이 2만 1000개의 유전자는 우리가 가진 염색체 DNA의 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또 다른 75퍼센트 DNA에 들어있는 1만 8000개의 유전자는) 단백질 암호화 유전자를 활성화 또는 억제하거나 단백질 기능 자체를 제어하는 신호를 보내는 기능을 한다. 나머지 20퍼센트 정도의 DNA는 아직 그 기능이 밝혀지지 않은 정크DNA이다."(31-2)


"우리는 뇌를 사용해 환경에 대단한 변화를, 그것도 이전에는 예측조차 할 수 없었던 속도와 방향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반면에 세대가 흘러도 이전 세대의 DNA를 '복사기로 복사하듯' 완벽하게 반복하도록 만들어진 우리 신체는 계속해서 느린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우리의 유전자가 현대의 변화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계산은 간단하다. 1000명 중 1명이 가지고 있는 유전적 돌연변이가 10세대(약 200년), 즉 산업 혁명이 시작된 뒤부터 지금까지 기간 만에 인구 전체에 퍼지려면 생존에 엄청나게 유익한 돌연변이여야 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유전자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지닌 사람이 자손을 가질 확률이 30배 이상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우리 모두가 전례 없는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상황뿐이다. 예를 들어 인류 전체가 HIV에 감염되었는데 치료할 방법이 전혀 없는 그런 시나리오 같은 것 말이다."(65)


2장 굶주림, 음식 그리고 비만과 당뇨라는 현대병


"지구상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부터 인간은 몸에 필요한 열량을 제공하는 음식을 간절히 원했다. 우리는 많은 양의 음식을 섭취할 능력이 있어서, 음식이 풍부할 때 과식을 해서라도 남은 열량을 지방으로 축적해 다음에 찾아올 기근을 이겨낼 수 있다. 또 다양한 음식을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로 바꿀 능력도 갖추고 있다. 굶주림은 개인뿐 아니라 생물 종 전체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기에 우리의 본능과 인체 내 조절 장치는 전부 과식을 해서라도 당장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흡수하는 쪽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기울어 있다. 인체는 손에 넣을 수 있는 음식이 늘 넘쳐나는 상황을 예상해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않다. 특히 사냥이나 채집을 하면서 엄청난 열량을 소비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음식은 아예 계산에 들어 있지도 않다. 그 결과 꾸준한 식량 공급이 확산되면서 비만과 당뇨병 같은 문제도 함께 확산되기 시작했다."(72)


"배가 고프다는 것은 시상하부가 알려 주고, 배가 부르다는 것은 장에서 보내는 피드백이 알려 준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음식을 먹도록 만드는 것은 시상하부도 장도 아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은 바로 미각(입맛)이다. 미각은 혀에 있는 세포 기관인 미뢰(맛봉오리)에서 시작된다. 우리 혀 표면에는 수천 개의 미뢰가 자리 잡고 있다. 혀 뒤쪽 골진 곳, 혀 양쪽 가장자리, 그리고 입천장까지 모두 이 미뢰가 깔려 있다. 미뢰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맛을 감지하기 때문에, 혀끝으로만 뭔가를 핥는 것은 제대로 된 맛을 다 느끼기에 적당한 방법이 아니다. 포도주 감정가들이 포도주 한 모금을 입 전체에 굴려 혀와 입천장에 모두 닿도록 하는 것은 그저 잘난 척하려는 게 아니라 근거 있는 행동이다." "놀랍게도 어떤 유형의 맛에 특화된 미각 센서들 각각은 그것들이 어느 곳에 위치해 있든 상관없이 모두 뇌의 정해진 부분─단맛 센터, 감칠만 센터, 짠맛 센터, 쓴맛 센터, 신맛 센터─으로 정확히 메시지를 보낸다."(92)


"건강한 사람이 살찌기보다 살빼기가 실제로 더 어려운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살이 빠지면서 필요한 열량도 줄어든다. 인체는 체중의 1퍼센트가 감소할 때마다 20칼로리를 덜 소모하게 된다. 둘째, 거기에 더해 체중이 감소할 때, 얼마나 살이 쪘는지에 상관없이 입맛을 돋우는 적어도 일곱 가지의 서로 다른 호르몬과 분자의 분비가 상승한다. 이런 물질의 분비는 한번 높아지면 그 수준에서 몇 년 동안 지속된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생존하는 데는 아주 유용한 형질이었지만 살을 빼려는 현대인에게는 커다란 장애물이다. 이전보다 열량이 덜 필요한데 더 배가 고파지면 원래 체중이 얼마냐에 상관없이 살빼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 셋째, 체중을 유지하려는 이러한 신체 내부의 요인을 생각하면, 애초에 살이 찌지 않도록 하는 쪽이 한번 쪘다 빼는 쪽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133)


"항상 불확실한 식량 공급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몸은 반복되는 아사의 위협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진화했다. 우리의 미뢰는 열량 밀도가 높은 지방, 당, 단백질을 원하도록 만들어졌다. 소장과 대장은 섭취한 음식, 특히 원래 형태에서 분해되어야 하는 음식에서 영양소를 최대한 흡수한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가능할 때마다 과식을 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어서 장래에 있을지 모르는 식량 부족에 대비해 지방을 저장한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너무 뚱뚱해지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무거운 사람은 가볍고 건강한 사람보다 같은 일을 하는 데 열량을 더 많이 소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만이 되기 쉬운 유전적 성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유행병처럼 퍼진 비만이 전 세계 인류의 게놈에 갑자기 변화가 와서 생긴 현상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간단히 말해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열량을 섭취하는 대신 운동은 덜 한다는 것이다."(154-5)


# 구석기 식사 목록에 없는 것들 : 동물 유제품, 곡물, 정제 설탕, 정제 식물성 기름, 알코올 


3장 물, 소금 그리고 고혈압이라는 현대병


"물을 충분히 마시지 않으면 탈수 증상이 나타나고 혈압이 떨어진다." "탈수가 되면 90퍼센트가 물로 이루어진 액체 성분인 혈장이 줄어들어 전체 혈액량이 감소한다. 처음에는 혈액량이 줄고 혈류 속도가 감소하는 것을 상쇄하기 위해 동맥이 좁아진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덜 나오면 수압을 유지하기 위해 호스 끝에 달린 노즐의 구멍을 좁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면 그렇게 유지하는 압력마저 떨어진다. 혈압이 떨어지면 우리는 현기증이 나거나 기절하며, 낮은 혈압으로 인해 뇌와 다른 중요 기관들로 충분한 양의 혈액이 공급되지 않으면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 "그런데 우리는 순수한 물만으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소변과 땀으로 소금도 잃기 때문에 염분을 섭취해야 한다. 신장은 몸안이 너무 싱겁거나 짜지 않도록 불필요한 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동시에 적절한 양의 소금을 배출한다. 한편 소금은 필요한 물, 또는 소량의 여유분 물을 몸속에 비축하도록 돕는다."(166-7)


"견줄 데 없이 월등한 땀 흘리는 능력은 인간이 끈기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다. 격렬한 육체 활동 중에 더 정상적인 또는 정상에 가까운 체온을 유지하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 몸이 땀을 분비하면 피부 표면에 맺힌 물을 증발시키기 위해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에너지는 몸에서 열의 형태로 배출이 되므로 체온이 식는다." "땀을 흘리는 것이 인간에게 이토록 중요하므로 우리는 다른 포유류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을 마셔야 한다. 탈수증과 저혈압은 무척 위험할 수 있어 우리 조상들은 이 문제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리고 앞으로 흘릴 땀을 대비한 커다란 물탱크가 몸 자체에 없으므로 인체는 뇌, 폐, 간, 부신 등에서 나오는 각종 호르몬의 도움으로 약간의 잉여 수분(그리고 거기에 항상 따르는 소금)을 몸 전체에 고루 분산해 보유한다." "또 신장을 제어해 소금과 물이 부족할 때는 보존하고 너무 많으면 배출하도록 한다."(173-5)


"몸에 물이 부족해지면 신장으로 들어가는 혈액의 양이 줄어들고, 그러면 신장은 체내 염도를 정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적정 비율의 나트륨과 물을 몸속에 보존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데, 그 결과 신장에서 만들어지는 소변의 양이 줄어든다. 경미한 탈수 현상이 생겼을 경우 우리는 소변을 통한 수분 배출을 하루에 1쿼트(약 0.95리터) 이하로 줄여 몸속에 지니고 있으며 독이 될 폐기 물질을 배출할 수 있을 정도로만 소변을 만든다. 몸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면 동맥과 정맥의 근육들이 수축하는 방법으로 적절한 혈압을 유지해 혈액량이 줄어도 심장으로 돌아가는 피의 양을 증가시킨다. 한편 심장은 더 힘차고 빨리 박동해 줄어든 혈액이 더 빨리 몸을 순환하도록 한다." "나트륨과 물의 경우 과잉 보호가 주는 유리함은 간단하다. (몸에 나트륨과 물이 부족해서) 혈압이 너무 낮아지면 우리는 기절하거나 죽는다."(180-1)


"동맥이 점점 경화되는 현상은 두 가지 원인 때문에 벌어진다. 첫번째는 혈액이 흐르는 혈관 안쪽의 얇은 층에 주로 콜레스테롤로 이루어진 지방 플라크plaque가 엉겨 붙으면서 표면이 딱딱해지는 경우다." "모든 동맥에는 작은 근육들이 한 겹 들어 있어서 수축과 이완 작용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동맥 경화의 두 번째 원인이다. 이 근육들이 수축하면 동맥은 혈액의 흐름에 더 크게 저항하고 이 때문에 혈압이 높아진다. 이러한 수축 작용은 탈수증이 생겼을 때 혈압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능이다. 그런데 혈압이 약간이라도 높아지면 이 근육층은 또 다른 이유로 수축한다. 늘어난 압력으로 인해 너무 많은 혈액이 중요 장기에 쏟아져 들어가 손상을 초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처럼 현대인의 고혈압 중 약 95퍼센트는 '본태성本態性 고혈압'으로 분류된다. 이 용어는 나트륨 조절 장치(나트륨을 보존하거나 동맥을 수축하는 일을 맡은 호르몬)가 잘못 맞춰져서 생긴 고혈압을 가리킨다."(203-4)


4장 위험, 기억, 두려움 그리고 불안과 우울증이라는 현대병


"스트레스는 뇌하수체를 자극해 신장 가까이 위치한 부신에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을 분비하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아드레날린이 대량 분비되면 맥박 수와 혈압이 증가하고 정신이 더 바짝 나서 싸우거나 도망할 준비를 재빨리 갖출 수 있다. 생리 작용에 따라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자연적으로 분비되면, 우리는 정신이 더 기민해지고, 몸속에 소금을 보존하고, 감염에 맞서 싸울 능력이 더 강해진다." "스트레스는 우리 세포 내의 칼슘 조절 장치를 손상시킬 수 있다. 심장, 근육, 뇌 등을 이루는 세포의 칼슘 조절 장치가 손상되면 망가진 자동차 엔진에서 기름이 새듯 세포에서 칼슘이 새어 나온다. 칼슘 조절 장치는 뇌가 기본적인 투쟁/도피 반응을 일으키는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스트레스로 손상이 가면 학습과 기억에 문제가 생긴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우리는 생각을 명료하게 하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릴 확률이 높아진다─그로 인해 스트레스가 더욱 쌓여서 악순환에 들어간다."(245-6)


"잠재적 위험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을 과대 평가함으로써 부적응 과민 반응과 부작용을 경험하듯, 우리는 실제로 직면하는 위험에 대해서도 과민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해결 불가능한 상황이나 이길 수 없는 도전에 부닥쳤을 경우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생존에 가장 유리한 전략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결과로 나타나는 부작용인 낮은 자존감은 사회적 과잉 위축과 지나친 슬픔을 초래할 수 있다. 구석기 시대에는 슬픈 감정이 더 강한 적으로부터 살해당하는 것을 방지하는 순종적인 태도의 일부를 이루는 유용한 방어 기제였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슬픔은 육체적 대립 상황과는 관련이 없는 다양한 상실로 인해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슬픔은 어떤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일시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슬픈 감정이 2주일 이상 계속되면 '우울증'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울증은 인류가 타고난 심리적 생존 본능이 낳은 가장 심각한 부작용이다."(250-1)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되 미치게 하지만 않는다면 기억에 기초한 두려운 감정은 적절하고 유용하다. 그러나 과도한 스트레스가 쥐의 뇌에 과민 반응을 촉발하듯,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일상 활동만으로도 과도한 공포의 원인이 된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트라우마를 준 사건을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끊임없는 두려움에 대한 반응 탓에 보통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두려움 반응을 주로 관장하는 물질인 가스트린 방출 펩티드의 수치도 낮은 경향이 있다. 또 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기억을 검색해 다시 꺼내는 대뇌 측두엽의 해마를 비롯한 뇌의 특정 부분들의 크기가 작아져 있다. 이러한 뇌 구조 변화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인지 결과인지 아직 모르지만, 이 사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뇌의 생리학적·해부학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다."(255-6)


"현대인이 타인에게 살해당하기보다 자기 손에 죽을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구석기 시대 조상들을 보호했던 두려움과 불안, 순종적 태도가 안전한 세상에서 사는 우리에게 너무 과도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현대 문명 사회의 규범에 따른 경쟁에서는 상대방은 죽이고 자신이 죽는 것은 피하는 일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 돈, 자원, 위상을 얻기 위해 경쟁하지만 현대 사회의 이런 경쟁이 생사를 가르는 투쟁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의 20만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서로를 죽일 더 나은 방법을 개발하고 죽음을 면하는 더 나은 방어 전략을 세우는 진정한 의미의 '군비 경쟁'을 해 왔다. 좋은 소식은 방어 쪽이 이기고 있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경쟁이 방어 쪽으로 너무 유리하게 기울어 살해당하지 않으려는 방어 기제가 불안과 우울증을 유발해 원래 피하려 했던 폭력 자체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288-9)


5장 출혈, 응고 그리고 심장 질환과 뇌졸증이라는 현대병


"혈액 응고 신속 대응 체계에는 서로 독립적이지만 깊이 연관된 두 가지 경로가 있다. 하나는 혈소판에 기초한 체계다. 혈소판은 평소에는 혈액 속을 떠돌다가 혈관 안쪽 세포 방어벽에 손상이 가면 노출되는 특정 수용체에 자석처럼 재빨리 가서 붙는다. 각 혈소판은 노출된 수용체와 결합되면서 유인 물질을 분비해 다른 혈소판들에게 동맥이나 정맥에 난 구멍을 막는 전투에 신속하게 참가하도록 독려한다." "철분 부족형 빈혈이 생기면 흔히 혈소판 수치가 정상 수준 이상으로 증가한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낮아져 더 이상 많은 피를 잃으면 안 될 때 혈소판이 자연스럽게 증가해 출혈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두 번재 혈액 응고 경로는 열 가지가 넘는 혈액 응고 단백질이 도미노처럼 연쇄 반응을 일으켜 일종의 섬유 그물망을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이 그물망은 혈관 벽에 난 더 큰 상처를 때우는 동시에 혈소판들이 와서 쌓일 수 있는 기본 구조물 역할을 한다."(306-7)


"우리가 섭취한 지방은 소장에서 흡수된다. 지질이라고 부르는 이 지방은 수용성이 아니기 때문에 혈장에서 바로 녹지 않고 지질 단백질이라고 부르는 수용성 물질에 실려 이동한다." "(동맥 벽에) 침착된 콜레스테롤의 양은 우리가 먹는 포화 지방의 양에 달려 있다. 포화 지방을 운반하기 위해 간에서 지질 단백질을 만들 때 쓰이는 재료가 바로 LDL 콜레스테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레스테롤 수치는 혈액 내 지방량을 감지하는 기능을 하는 간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된다." "지질 단백질을 과잉 생산하는 경향은 아마 구석기 시대에는 중요한 기능이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어쩌다가 한번씩 한꺼번에 많은 양의 식사를 해서 흡수한 지방을 저장해 핏속에서 돌리다가 먹을 것이 충분치 않을 때 바로 쓸 수 있는 원료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지질 단백질 운반 용기를 많이 만들어 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 몸은 필요한 양보다 너무 많은 지질 단백질과 나쁜 콜레스테롤을 만들어 내고 있다."(322-4)


"콜레스테롤과 기타 지질이 동맥 안쪽 벽, 특히 관상 동맥(심장 동맥) 안쪽 벽에 축적되면 혈관이 좁아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완전히 막히는 일은 드물다. 대신 이 지방질 침전물은 표면 플라크를 형성한다. 이 플라크는 쉽게 균열되거나 파열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세포 한 겹으로 이루어진 동맥 안쪽 보호막을 손상시켜 그 아래 동맥 조직을 노출시킨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동맥은 원래 계획에 따라 행동을 개시한다─혈소판과 응고 단백질을 불러들여 상처를 복구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에 따라 생긴 혈전은 손상이 간 곳을 메울 뿐 아니라 피가 동맥 하류 쪽으로 흐르는 것을 부분적으로, 때로는 전적으로 막아 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세포 한 겹짜리 동맥 보호막에 난 흠집 때문에 피를 많이 흘려 죽지는 않겠지만, 혈전 때문에 피의 흐름이 막혀 혈액 공급을 받지 못한 기관의 세포들이 죽을 수도 있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326)


"인체의 혈액 응고를 관장하는 조절 장치가 미세 조정 끝에 고정되었던 구석기 시대에는 수천 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장거리 자동차, 비행기 여행으로 인해 생긴 다리 정맥의 혈전이 폐로 옮아가 목숨을 앗아갈 가능성은 너무나 먼 일이었다. 아울러 식생활과 신체 활동의 변화, 혈압 등으로 동맥이 좁아지고 혈전이 생길 확률이 높아져 심장 마비와 뇌졸중을 야기하는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예측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피의 응고 기능이 필요하다. 심각한 부상뿐 아니라 분만과 일상 생활에서 생기는 자잘한 상처로 목숨을 잃지 않으려면 없어서는 안 될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혈과 응고 사이를 미세 조정해 자연이 결정한 균형은 현대인 입장에서는 응고 쪽으로 너무 치우친 셈이 되었다. 오늘날 미국에서 출혈로 인한 모든 사망보다 과도한 응고로 인한 사망이 네 배 이상 많고 심장 마비와 뇌졸중이 4대 사망 원인에 포함된 것은 이 때문이다."(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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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 - 맛, 음식, 요리, 사피엔스, 그리고 진화
조너선 실버타운 지음, 노승영 옮김 / 서해문집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해부학적 근거에 따르면 최초의 요리사는 호모 에렉투스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그 기나긴 역사에서 요리가 시작된 것은 언제일까? 여기에 실마리를 던지는 유전학적 증거가 하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인간 아닌 영장류의 턱 근육을 강화하는 MHY16이라는 유전자가 200만 년 전 이전에 인류 계통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최초의 호모 에렉투스는 그 시기에 이미 요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강한 턱 근육은 필요가 없어졌거나, 점점 작아지는 이빨이 부서질 위험만 가중시켰을 것이다. 화석과 고古고고학적 증거가 계속 발견되고 있으니 정확히 언제 요리가 시작되었는가의 수수께끼와 비교하면 '왜'라는 질문의 답은 훨씬 분명하다. 음식을 요리하면 소화하기가 쉬워지고 더 많은 에너지를 끄집어 낼 수 있으며 많은 독성이 중화된다. 그리하여 요리는 사람족 진화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열었다."(43)


"뇌는 에너지에 굶주린 장기다. 인간의 뇌는 몸무게의 약 2퍼센트밖에 되지 않지만 휴지기 에너지 소비량은 전체의 20퍼센트를 차지한다. 이 에너지의 대부분은 시냅스라는 전기적 연결부에서 쓰이는데, 시냅스는 신경 세포와 신경 세포를 연결하며 뇌 기능의 주춧돌 역할을 한다. 단위 무게로 따지면 소화관도 뇌만큼 에너지에 굶주렸지만, 우리의 뇌는 비슷한 크기의 영장류보다 훨씬 큰 데 반해 우리의 소화관은 훨씬 작다. 진화는 소화관의 효율을 높여 절약한 에너지를 더 커진 뇌에 쏟아부었다. 랭엄의 가설은 요리로 음식의 에너지 값을 증가시킨 덕에 뇌 진화로 인한 에너지 수요 급증을 작은 소화관으로도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화관이 연료 탱크라면 요리는 연료의 옥탄값을 높이는 셈이다. 최근에 대형 유인원의 대사율과 인간의 대사율을 비교했더니 인간의 대사율이 침팬지보다 27퍼센트 높았다. 따라서 우리는 고옥탄 연료를 쓸 뿐 아니라 이 연료를 더 빨리 태운다."(45)


"호모 사피엔스의 발원지인 아프리카 대륙은 네안데르탈인이 최후의 비둘기 만찬을 먹은 고르함 동굴로부터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불과 15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아프리카를 떠나면서 해협을 건너지도 비둘기로 배를 채우지도 않았다. 우리는 전혀 다른 경로를 따라 아프리카에서 퍼져 나갔으며 전혀 다른 음식을 먹었다."(50) "우리 종이 해안선을 따라 이동한 역사적 경로에는 먹다 버린 조개 껍데기가 군데군데 쌓여 있다. 북쪽의 북극에서 남쪽의 아프리카 남해안과 남아메리카 남단에 이르기까지, 썰물 때 홍합을 채집한 사람들이 버린 껍데기는 그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무엇을 먹었는지 잘 보여준다. 해산물은 뇌 발달에 중요한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하기에 인류 진화에 영양 측면에서 필수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오래된 조개더미는 16만 5000년 전 중석기 아프리카 유적에서 발견되었는데, 인도양이 멀리 내다보이는 이 동굴에 최초의 현생인류가 살았다."(56)


"경작하기에 알맞은 야생종이 한곳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것은 묘한 우연으로 보이겠지만, 여기에는 진화적으로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비결은 기후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강수량이 철마다 다르며 불규칙하다. 건조하고 강수가 불확실한 기후는 야생 식물이 작물화에 알맞게 진화하기에 유리하다. 첫 번째 특징은 짧은 수명이다. 수명이 짧은 한해살이 식물은 금새 자라 성숙하며 여름의 건조한 열기에 죽기 전 씨앗을 잔뜩 퍼뜨린다." "다산성은 이런 식물의 두 번째 유용한 특징이다. 한해살이 식물은 번식 기회가 한 번뿐이기 때문에 여러 해에 걸쳐 후손을 퍼뜨릴 수 있는 여러해살이 식물에 비해 가용 에너지의 더 많은 부분을 씨앗 만들기에 투입한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야생 한해살이 식물이 작물화에 안성맞춤일 수 있었던 세 번째 특징은 씨앗의 크기가 비교적 크다는 것이다. 건조한 기후는 큰 씨앗의 진화에 유리하다. 발아한 씨앗이 살아남으려면 물 공급원인 뿌리를 뻗어야 하기 때문이다."(69-70)


"밀, 보리, 귀리 등의 야생종은 익으면 이삭에서 낟알이 떨어지는 탈립shatter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래야 씨앗을 널리 퍼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이 모든 종의 자식에게 확산 수단을 부여한 것은 생존과 번식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식물이 작물화되어 재배되면 확산 방법이 달라진다. 이 경우에는 씨앗이 채집되어 재파종되는 식물이 자손을 가장 많이 남길 수 있다. 따라서 지속적인 수확과 재파종을 통해 선택되는 식물은 이삭이 여물어도 탈립하지 않는 식물이다. 작물화 초기 단계에는 야생에서 채집한 곡물과 경작지에서 재배한 곡물이 고고학 자료상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곡물이 작물화되면서 이삭의 탈립을 막는 유전자의 빈도가 인위적 선택을 통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탈립 이삭을 탈곡하면 야생 식물처럼 말끔하게 떨어지지 않고 가장자리가 삐죽빼죽하게 떨어져 나간다." "고고학 기록에서 에머밀은 이처럼 뚜렷한 작물화 흔적이 나타난 최초의 곡물이다."(71-2)


"진화 과정에서 기능을 잃은 형질의 유전자는 돌연변이가 누적되어 허깨비 같은 '위유전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위유전자는 한때 유용했던 유전자의 흐릿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고양이처럼 고기만 먹는 육식동물에서는 당을 맛보는 능력이 불필요해져서 T1R2 단백질의 유전자가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기르는 고양이에게 달콤한 설탕쥐를 줘도 녀석은 설탕 맛을 못 느낀다. 곰은 육식동물이지만 물열매(베리)도 먹기 때문에, 단맛을 느끼는 데 필수적인 T1R2 유전자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곰의 친척 대왕판다는 대나무만 먹기 때문에, 당은 느낄 수 있지만 감칠맛은 느끼지 못하며 T1R3 유전자는 기능을 잃었다. 바다사자는 먹이를 씹지 않고 통째로 삼키기 때문에, 감칠맛 수용체와 단맛 수용체가 둘 다 쓸모없어서 T1R군의 유전자 세 개가 모두 위유전자로 바뀌었다. 돌고래와 흡혈박쥐에서도 똑같은 진화적 유실이 독자적으로 일어났다(둘 다 먹이를 씹지 않는다)."(98-9)


"신맛은 쓴맛만큼 불쾌하지는 않으며 요리에서 더 중요하게 쓰인다. 신맛은 레몬과 덜 익은 과일의 시트르산이나 식초의 아세트산 같은 약한 산의 맛이다. 덜 익은 과일의 신맛은 분명한 역할이 있는데, 그것은 안에 든 씨앗이 세상에 나갈 준비를 마칠 때까지 동물이 과일을 먹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식초도 생물학적 억제제이지만 원리가 다르다. 과일이 가지에서 떨어지거나 젖이 유방에서 나오면 효모와 세균에 의해 발효가 시작된다. 발효는 공기가 없을 때 미생물이 당을 먹고 알코올(효모의 경우)이나 젖산(젖산균의 경우) 같은 노폐물을 배출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알코올과 젖산은 미생물의 단순한 노폐물이 아니라 다른 효모와 세균의 증식을 막아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한 전쟁 무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식품을 절여 보존하는 것도 발효를 같은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알코올 발효 과정에서 공기가 들어가면 환경 변화로 인해 아세트산균이 번성해 알코올을 아세트산(식초)으로 바꾼다."(103-4)


미각과 마찬가지로 화학 물질을 감지하는 체계인 "후각은 여느 감각처럼 뇌에서 지각되는데, 코안에 있는 수백만 개의 후각 수용체 세포가 신경 세포를 통해 뇌로 연결된다." "후각 수용체 단백질(OR)은 특정한 분자에 의해서만 활성화된다. 유전자가 다르면 수용체 단백질도 달라진다. 하지만 이 수준을 넘어서면 미각과 후각의 작용 방식에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쓴맛 성분을 감지하는 수용체와 그 유전자는 약 서른다섯 개인 반면, 후각 수용체 종류는 그 열 배를 넘는다. 약 400개의 유전자가 나름의 OR 단백질을 만든다. 하지만 쓴맛 수용체와 후각 수용체 사이에는 훨씬 중요한 차이가 있다." "모든 쓴맛 수용체 세포는 하나의 선으로 뇌에 연결되어 '퉤퉤'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만 전달한다. 후각 수용체 세포는 400개의 수용체 각각이 전용선을 따라 뇌에 연결된다." "후각은 음식과 섹스에 대해 훨씬 미묘하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므로 더 풍부한 전달 체계가 필요하다."(113-4)


"진화가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으려면 자연선택이 신무기와 새로운 방어 수단을 빚어낼 수 있도록 유전적 변이가 그때그때 공급되어야 한다. 덩이줄기를 다시 심어 재배하는 감자처럼 영양 생식으로만 번식하는 식물은 유전적으로 똑같기 때문에 천적에게 몰살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마니옥도 덩이줄기를 잘라 심는 영양 생식 방식으로 재배한다. 이 진화적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는 길이 바로 유성 생식이다. 유성 생식은 부모의 유전자를 새로 조합해 자식에게 물려주기 때문에 자식의 유전자는 부모와도 자식끼리도 다르다." "유성 생식은 유전적 변이를 유지해 작물이 유행병에 걸릴 위험을 줄일 뿐 아니라 다른 종과의 교잡을 가능하게 한다." "이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채소를 먹는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영양소, 특히 탄수화물 때문이다. 우리는 채소를 식용으로 바꾸기 위해 인위적 선택과 요리·가공으로 천연 방어 수단을 무력화했다."(172-4)


"(통각을 자극하는) TRP 수용체는 진화사적으로 아주 오래되었기에 척추동물뿐 아니라 곤충, 선충, 심지어 효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식물이 초식동물의 통각 회로를 해킹하려고 겨냥하는 수용체들이 우리의 감각에도 작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통각 수용체를 자극하고 다른 종에게서 회피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일까?"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는 수용체는 위험을 막는 방어 체계의 제일선에 불과하다. 그 화학 물질에 독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 우리는 그 자극을 회피하기보다는 즐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이 유익하고 자연선택에 의해 선호되는 이유는 "나한테 독 있어. 먹지마!"라는 식물의 허풍에 속지 않으면 많은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양이다. 작은 곤충이 독성 식물을 많이 먹으면 우리 같은 대형 동물이 같은 식물을 조금 먹는 것이 비해 몸무게당 더 많은 단위 독성에 노출된다."(189-90)


"과당fructose은 포도당과 함께 자당 분자를 이루는 쌍둥이로, 둘 중에서 더 달콤하고 더 치명적이다. 과당은 포도당보다 무게 대비 두 배 달고, 과일에 들어 있는 과당은 우리 같은 동물을 사정없이 유혹한다." "식품 및 음료 회사도 과일과 같은 수법을 쓴다. 그들은 효소를 이용해 옥수수 시럽의 포도당 일부를 과당으로 전환해서 고과당 옥수수 시럽(HFCS)을 만든다. HFCS는 아주 값싸고 아주 달고 맛이 기막히기 때문에 제조업체들은 많은 가공식품과 대부분의 소다에 HFCS를 첨가한다." "우리가 먹는 양과 식품 속 열량에 일어나는 변화를 조절하는 호르몬이 세 가지 있다. 그렐린ghrelin은 위가 비었을 때 신호를 보내고, 췌장에서 분비하는 인슐린은 혈당치를 줄여야 할 때 신호를 보내며, 지방 세포가 만드는 렙틴leptin은 지방 저장 용량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신호를 보낸다." "과당은 인체가 당으로 인식하지 못해 에너지 섭취와 저장을 제한하는 조절 호르몬을 활성화하지 않는다."(207-9)


"포도당은 인체의 모든 장기에서 연료로 쓰지만, 과당은 간에서만 대사할 수 있다. 따라서 포도당은 모든 장기가 나눠 쓰지만, 과당은 사실상 전부 간으로 간다. 말하자면 여러분이 음료수로 섭취한 열량의 절반이다. 간은 포도당 부하의 약 20퍼센트도 처리하기 때문에, 여기에 과당까지 감안하면 일반적인 가당 음료의 열량 중 60퍼센트를 간이 대사해야 한다. 과당은 간을 혹사한다." "뚱뚱해지는 것만 해도 충분히 나쁜 일이지만, 과당은 훨씬 은밀하고 흉악한 짓을 저지른다. 대사 증후군을 앓는 비만 환자에게 식단의 과당을 같은 열량의 녹말성 식품으로 대체하도록 했더니 몸무게가 줄고 9일 만에 대사 상태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과당이 대사 증후군에 미치는 영향을 열량 함량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대량의 과당을 정기적으로 섭취하면 간에 위험 수준의 지방이 쌓여 대사 증후군과 제2형 당뇨병의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210-1)


"포유류의 젖은 젖먹이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젖먹이를 보호하는 두 가지 상호 의존적인 기능을 하는 독특한 액체다. 영양을 공급하는 것은 젖에 들어 있는 단백질, 지방, 당(젖당), 칼슘, 기타 무기질이고 젖먹이를 보호하는 것은 항균 작용을 하는 여러 항체와 효소다. 이런 성분은 새끼 포유류가 갓 태어나 처음 먹는 젖인 초유에 특히 풍부하다. 초유에는 어미의 면역 세포도 들어 있다. 젖의 탄수화물 성분은 모든 세포가 이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당인 포도당이 아니라 젖당의 형태가 대부분인데, 이는 이례적 현상이다." "세상은 포도당에 굶주린 세균과 효모로 가득하지만, 젖당을 이용할 수 있는 세균은 몇 종류 안 된다." "새끼에게 유별난 당을 먹이는 데는 문제가 하나 있다. 당을 분해할 수 있는 유별난 효소가 새끼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끼 포유류의 위에는 바로 이 일을 하는 효소인 락타아제lactase가 들어 있다. 새끼가 자라 젖을 떼면 필요 없어진 락타아제는 분비량이 점차 줄다 아예 없어진다."(217-8)


"약 1만 1000년 전 서남아시아에서 소와 양을 가축화한 최초의 농부들은 고기뿐 아니라 젖도 이용했을 것이다." "요구르트는 젖산균 종균을 젖에 넣어 만든다. 젖산균은 대다수 세균과 (심지어) 우리 몸의 세포와 달리 젖당을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는 희귀한 능력이 있다. 젖산균은 젖당을 먹고서 생장 노폐물로 젖산을 배출한다. 유산균속이 젖당을 모조리 먹어치우기 때문에 이렇게 만든 요구르트는 젖당 내성이 없는 사람이 먹어도 안전하다." "치즈를 만들 때도 젖산균 종균을 쓰는데, 이 때문에 치즈도 젖당이 없다." "고고학 유적에서 발견된 사금파리의 젖 잔존물로 보건대 7000년 전에는 서남아시아 전역, 특히 소를 치던 곳에서 낙산물酪産物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그릇에 어떤 낙산물이 담겨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치즈보다는 요구르트였을 가능성이 크다. 치즈는 나중에 발전했기 때문이다. 치즈 제조 설비가 발견되는 것은 최초의 낙농용 도자기가 등장한 지 약 1000년 뒤다."(219-20)


"알코올이 우리를 단단히 사로잡은 것은, 좋든 나쁘든 우리가 독소인 에탄올에 내성을 진화시켰기 때문이다. 알코올은 이 점에서 그 밖의 향정신성 약물과 다르다. 아편, 대마, 코카인은 신경계의 천연 물질을 흉내 내어 뇌에 작용한다. 식물들이 오피오이드, 카나비노이드, 코카인 같은 향정신성 화합물을 진화시킨 것은 초식동물과의 군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였다. 이 성분들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은 동물들의 뇌 화학 구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헤로인 중독자는 양귀비·털애벌레 전쟁의 민간인 사상자다. 이에 반해 에탄올은 인체 대사에서 기능적 대응물이 전혀 없는 독소다." "에탄올과 여느 독성 물질의 차이점은 우리가 식품 속 에탄올에 아주 오랫동안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대형 유인원의 대표 메뉴가 과일 칵테일이니 말이다." "익은 과일이 있는 곳에는 효모가 있으며 효모가 있는 곳에는 알코올이 있다. 우리는 대형 유인원great ape이자 포도 유인원grape ape이다."(235-6)


"녹색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곡식의 줄기가 길고 가늘었다. 그래서 추수하기 전에 쓰러지기 일쑤였다. 소출을 늘리려고 비료를 주면서 더 웃자랐다. 곡식이 에너지를 씨앗이 아니라 잎과 줄기에 쏟아부었기 때문에 생산량은 늘지 않았다. 길고 가는 줄기는 야생에서 비롯한 진화적 유산이었다. 자연선택은 이웃 식물의 그늘에 가리지 않도록 높이 자라는 식물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밀, 벼, 옥수수 등 세 가지 주곡에서 녹색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줄기의 길이를 줄여 굵기를 늘림으로써 더 큰 이삭을 매달 수 있게 한 덕분이었다." "녹색 혁명은 식량 안전을 향상시켰을 뿐 아니라 기존 경작지의 소출을 증가시킴으로써 자연 서식지 1800만~2700만 헥타르를 (농지로 전환되지 않도록) 보호했다." "그러나 한 추산에 따르면 현재의 생산량과 2050년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생산량의 격차를 없애려면 수확량이 적어도 50퍼센트 더 증가해야 한다."(280-1)


"1차 녹색 혁명의 과제는 산업적 농업에 적응한 신품종을 육종하는 것으로 대표된다." "이에 반해 2차 녹색 혁명을 준비하는 식물 육종가들이 소출을 늘리기 위해 넘어야 하는 장벽은 더 복잡하다. 이를테면 과거의 관행적 관개로 인해 염화된 토양에서도 자랄 수 있도록 작물의 내염성을 개선하고, 가뭄과 고온에 대한 저항성을 키우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병충해와 맞서 싸워야 한다. 2차 녹색 혁명을 위한 과제는 1차 때보다 힘들지만, 우리가 쓸 수 있는 유전학적 수단은 (반半난쟁이 밀 품종을 탄생시킨) 볼로그와 1950년대 및 1960년대 작물 육종가들보다 부쩍 발전했다." "무엇보다 기대되는 것은 광합성의 기본 메커니즘이 충분히 규명되어 유전 공학을 통해 이를 부쩍 개선할 여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GM 기술은 실제로 혜택을 가져다준다. GM 기술은 작물의 생산량을 향상시키고 살충제 사용량을 감소시켰으며 심지어 질병으로 전멸할 뻔한 농작물을 구하기도 했다."(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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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2 - 유형원과 조선 후기
제임스 버나드 팔레 지음, 김범 옮김 / 산처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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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관제개혁


"국왕의 정통성을 의심치 않았음에도 유교적 경세학자로서 유형원은 국왕의 전제주의와 독재의 가능성을 막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많은 방안을 고안했다. 이런 쟁점과 관련해서 유형원은 주로 세 가지 분야를 다뤘다. 첫째는 국왕이 자신과 종친과 총신에게 쓰는 지출과 궁극적으로는 국가 재정, 특히 호조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내수사의 지출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혼례·장례·연회를 치르고 정치적 충성의 포상을 받을 만한 공신을 임명하는 등의 국왕 자신과 관련된 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결정권도 포함됐다." "두 번째 영역은 일정한 유교적 가치를 존중하도록 설득하는 상징적 방법으로 국왕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 관심은 관료체제를 운영하고 매일의 국무를 처리하는 권한의 분배와 관련된 문제였다. 후자는 매일의 국무를 처리하는 데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상정된 국왕과 그의 충성스럽고 순종적인 신하 사이에 적절한 권력의 분배와 관련되어 있었다."(11-2)


"유형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의식 중 하나는 국왕이 적전籍田을 의례적으로 경작하는 고대의 전통이었는데, 그것은 중국과 유학에서 중농주의적 전통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굶주림에 직면하면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통은 부정과 이단적인 신앙을 불러왔다. 충분한 숫자의 사람들이 토지에 정착해서 농업에 시간을 투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이 발생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농업을 버리는 이유는 번잡한 농법의 변화와 예측하기 어려운 자연, 그리고 세리·서리·채권자들의 약탈로 고통받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황제가 농업 생산을 증가시키는 데 관심을 쏟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통치자의 의례적인 경작은 농민들에 대한 관심과 양육을 통해 농업 생산을 유지하고 관원들의 불법을 근절하는 데 헌신하겠다는 것을 상징화하려는 의도였다."(24-5)


"유형원은 중앙 각사의 이서와 관련된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제안 중 하나는 모든 이서에게 녹봉을 줌으로써 조선의 관료제도에 고착된 부패의 주요한 원인 하나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이서의 조직을 두 등급으로 나누고 시험을 거쳐 서리가 녹사로 승진할 수 있도록 했다. 역설적이지만, 관료제도가 시행된 조선시대보다 귀족제도가 우세했던 고려시대에 이서는 정규 관원으로 좀더 자유롭게 올라갈 수 있었고, 16세기 초반까지도 녹사는 대신의 자제 및 급제자와 동등한 지위로 간주됐으며, 6품까지 오른 뒤에는 과거를 치르거나 정규 관직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직능의 숙련도와 교육 수준에 따라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쪽에 가까웠다. 그는 정규 관원과 이서의 근본적인 구분을 받아들였지만 이서에게만 해당되는 취재시험을 개선하고 그들 자체의 승진체계를 만들려고 했다."(88-9)


"유형원은 중국의 역사와 최근 조선 사대부들의 조언에서 도덕의 교육과 실천은 등용의 기준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관원의 행동에서 항상 시험되고 관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과거로는 개인의 충실한 덕행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선발과 승진은 모두 관찰과 천거로 전환되어야 했다. 유형원은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인 관료제도에 모든 사람이 서로 알고 어떤 사람이 믿을 만한지 보장할 수 있는 향촌공동체의 특징(즉 주대 봉건제도의 기초)을 접목시킴으로써 그런 목표를 이루려고 했다. 그는 모든 관원에게 천거제도를 확대하고 후보자에게 어떤 결함이 발견되면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그 제도를 강화하자는 송대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천거는 이조와 병조의 업무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더라도, 보충했다. 그 제도의 정점은 정호가 구상한 연영원筵英院이었는데, 그것은 촉망되는 후보자를 수도에 모아 조언을 듣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일종의 두뇌집단이었다."(127)


"관원을 장기 근속시키면 빠르고 잦은 이직으로 야기된 부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유형원은 16세기 후반 관원을 다른 관직으로 옮기기 전에 현재의 직책에서 충분히 근무케 해야 한다면서 이이가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 매우 공감했다." "16세기 후반 이이는 국왕에게 (칭병稱病을 핑계로 전보를 신청하는) 관행을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형원은 유능한 관원을 다른 관직에서 필요로 할 때 이동시키는 당시 조선의 방식은 용인했지만, 현재의 임기를 마친 뒤에만 허용했다." "이이는 이런 상황이 모두 일반 관원의 잘못은 아니며, 그들이 공무는 물론 사적으로도 고대 성인의 높은 도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지나친 요구를 제기한 삼사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관원이 사소한 잘못을 저질러도 그것이 불법행위라는 탄핵을 쏟아냈는데, 그 결과 많은 관원들은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자리를 비우거나 그밖의 구실을 만들어 방어할 수밖에 없게 됐다."(113-5)


"지방 행정의 네 가지 문제와 관련해서 유형원은 면적과 인구에 따라 각 행정 단위와 진관의 서열을 좀더 일정하게 재배열함으로써 면적과 조세 분배의 불일치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관찰사를 가족과 함께 비교적 오래 재직케 해서 지방의 사무에 익숙해져 통제력을 얻을 수 있게 함으로써 좀더 강력한 지방 행정을 구축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는 관찰사와 병사·수사의 이서를 감축해 비용을 줄이려고 했다. 그는 녹봉을 받지 못하는 이서와 조예의 만연한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국가에서 기본적 녹봉을 지급하고, 공비公婢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서 국역을 면제함으로써 관청의 착취는 물론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시도했다. 가장 복잡한 문제는 중앙의 관원 및 그 부하와 향촌 사회 사이의 권력의 분배였다." "유형원은 (세금과 요역 징발, 구휼과 환자 등을) 수령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데서 폐단이 발생했다고 결론짓고 권력을 수령에서 향촌 사회로 옮긴 중국의 제도를 선호했다."(166)


"샤오콩취엔蕭公權은 청에서 향약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열거했는데, 그 대부분은 조선의 상황에도 들어맞았다. 전반적으로 생산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이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무식한 농민은 유교의 교훈보다 비유교적 종교운동과 도적활동의 호소에 훨씬 더 호응했으며, 향정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권력을 휘둘렀고 향약은 보갑과 단련團練의 임무를 맡으면서 지역의 경찰 및 민병과 동일하게 됐다. 조선에서 향약은 표면적으로는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렸기 때문에 시행이 중단됐지만, 훨씬 중요한 이유는 처벌의 권한을 수령에게서 향촌으로 이관하면서, 특히 유학 교육을 받은 양반의 이상인 위계적 사회 구조를 방어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엄격한 통제와 규율을 시행하는 데 불신이 컸기 때문이다." "향약의 옹호자들은 구속받지 않는 개인 생활의 가능성을 거의 모두 제거하고 통제된 사회조직제도를 채택함으로써 사회적 조화와 정의를 이루려고 했다."(205-6)


6부 재정개혁과 경제


"유형원은 정규 세입으로 지불해야 하는 정규 지출에 논의를 국한하려고 했다. 그는 당시의 대동법이 지출을 계산해서 세입을 확정한다고 비판했는데, 세입에 따라 지출을 제한하는 고전적 방식을 사용하면 당시 정부 재정의 더욱 심각한 문제인 추가적이고 자의적이며 잡다한 세금을 제한 없이 부과하는 관행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그는 균형 잡힌 예산에 대해서 논의했던 것이다. 그는 국가의 부채가 발생할 가능성을 막고 재정의 부족을 개인 단체에서 충당하는 데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산 부족을 막기 위해서 미리 지출을 계산해 예상된 세입에 맞추어 그것을 줄이려고 했으며, 긴급 상황이나 예측하지 못한 변화, 또는 계산 착오로 생긴 부족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낮게 잡은 예상 세입에 따른 재정 부족을 국가 부채를 야기시키지 않고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추가 과세를 그때그때 허용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유형원이 극복하려고 노력한 관행이었다."(315)


"유형원은 (공물의) 시장 구매와 관련해서 판매자와 무비주인貿備主人이 서로 협상해 가격을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정부가 당시의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을 책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유형원은 상인들이 대동법을 반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정부에 물건을 판매해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수도로 상품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도록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고 암시했다." "대동법이 시장의 발전에 주요한 자극이 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유형원은 생산자들이 경쟁을 통해 비용이나 가격을 낮추거나 비효율적인 생산자를 도태시키는 자유시장의 이점을 옹호하는 경제 이론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유형원의 경제이론은 객관적인 경제적 영향력을 가치 평가를 배제한 채 분석하기보다는 도덕적 기준에 바탕했기 때문에, 상인과 생산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해서 정부 관원들의 이익을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웠다."(324-5)


"유형원은 동전은 주의 정전제와 합치된다고 언급했는데, 그것은 동전이 가장 중요한 농업 생산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농민은 생계를 벌 수 있는 수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상인은 사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받음으로써 "사민은 각각 자기에게 합당한 위치를 얻었다[四民各得其所]." 동전은 상품의 가격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사용됐으며, 상인은 동전을 유통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상인은 동전이 유통되는 데 충분한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활발히 활동해야 했기 때문에 일반 경제의 번영에 필수적이었으며, 동전의 유통은 가뭄과 물자가 부족할 때 백성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데 필요했다. 유형원은 위기 상황이 닥치면 국가에서는 요역을 동원해 동전을 좀더 주조하면 됐고 동전의 공급은 기후조건에 의존하는 곡물처럼 변동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전은 미곡이나 면포보다 유용한 교환수단이라고 지적했다."(396)


"시장거래의 확대는 동전의 수요를 자극했으며, 국가는 시장에 동전을 공급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유형원이 세상을 떠난 5년 뒤인) 1678년(숙종 4) 숙종이 동전을 주조하기로 결정하자 동전 공급을 통제하는 문제가 대두했다. 숙종은 수도에서만 주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지방으로 동전을 운반하는 비용이 많이 들 것을 감안해 지방에서도 주전하도록 허락했는데, 그 결과 동전 공급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약화됐다. 지방 관원들은 자신들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동전을 주조하려고 했으며, 동전 주조세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서 품질이 떨어지는 주화를 주조했다. 이런 변질된 동전은 백성들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그 가치를 하락시킬 뿐이었다." "숙종은 동전 사용을 촉진하기 위해서 동전의 공급을 늘리려고 했지만, 동전의 가치가 저하된 결과 동전 공급을 줄이고 주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정책에서 심각한 모순이었다."(456-7)


"자연적이며 농업적인 경제의 단순성을 선호하는 견고한 보수주의자들은 동전의 도입을 언제나 반대했지만, 이제는 가격·교환 가치·이율의 변동에 반대하는 새로운 보수적인 견해가 나타났다. 보수적인 비판자들은 정부의 미숙한 행정으로 가격을 충분히 보고하고 조사하지 못했으며, 국가가 보유한 동전의 분량을 정확히 파악하고 지역적으로 동전을 고르게 배급하지 못한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그들은 통화관리의 문제를 동전 자체가 해악을 초래한다는 단순하고 도덕적인 개념으로 축소시켰다. 그러므로 1720년대에 나타난 동전에 대한 부정론은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었으며, 단순히 유교적 근본주의자의 몽매한 생각이라기보다는 '근대적' 경향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러나 1720년대 후반 동전 사용의 증가와 시장의 점진적인 확대는 동전의 부족과 일용품 가격의 하락을 가져왔는데, 관원들은 그런 변화를 동전이 도입된 이후 사실상 뒤집을 수 없는 흐름으로 보기 시작했다."(469-70)


"1731년 영조는 마침내 동전의 유통과 추가적인 주전을 승인했지만, 이는 왕조의 후반을 휩쓴 잦은 가뭄과 국가의 재정 위기 때문이었으며 설득력 있는 주장의 가치에 동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울러 1726년에 시작된 논쟁에서 많은 신하들은 고액전과 지폐, 유형원의 단순한 '소액전'에 대한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에서 이율의 제한에 관련된 진지한 주장을 제기했지만, 영조는 동전 문제에서 새롭고 진보적인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 지폐나 어음, 또는 은행을 도입하는 발전은 더이상 없었다. 1867년(고종 4)까지는 고액전은 시도되지 않았으며, 그것은 가치가 금방 떨어지고 상품 가격의 팽창을 야기했기 때문에 즉시 퇴출됐다. 그러나 그 까닭은 대원군이 주로 세입을 올리는 데 치중하고 동전 공급을 제한할 필요성에 무지했기 때문이었다."(509-11)


"18세기 말엽 국가는 급격한 경제발전을 향한 길을 주도하려고 나아가지 않으면서 공인된 독점과 사상 사이에서 심판의 기능에 만족했다." "사상과 도고, 공장은 조선 전기의 공인된 생산과 상업의 좁은 구조를 느슨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자본가계층은 매우 제한된 규모였고, 대부분의 생산이 소규모의 수공업에 국한됐기 때문에 산업적 무산계급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는 경제의 확대를 주도할 능력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국가는 동전을 좀더 주조하는 데 동의했지만 소액전에만 국한됐고, 채광 활동을 제한하고 국내 교통을 개선하지 않았으며, 주로 이전의 공물을 구입하려는 목적에서 일정한 독점을 유지했으며, 중국과 조공관계로 좁게 국한되고 일본과 매우 제한된 대외무역을 유지했다. 외국의 무역상과 선교사들이 19세기 아편전쟁 이후 조선의 해안에 나타났을 때 조선 관원들은 그들이 국가를 멸망시키는 전조라고 간주했다."(563-4)


맺음말


"조선 후기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그 사회의 근본적인 양상의 일부를 잘못 이해했는데, 조선이 스스로 변화와 발전을 주도할 수 있었다는 증거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학문의 노력은 비농업적 상업 분야의 성장, 노비제도의 축소, 조세제도의 전환 같은 일부 주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입증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진보를 입증하려는 열망은 농업의 지배와 양반 권력의 유지, 지식계층의 사고에 준 유교적 경세론의 영향에서는 관심을 거두었다. 이 책이 밝혔듯이 유교적 경세사상은 정책에 직접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정부의 도덕성을 강조한 그 논리는 국가가 인간의 약점, 부패, 부도덕으로 약화됐을 때도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상업경제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상인과 장인은 여전히 소수였으며, 교육과 고위 관직을 지배하고 부와 토지, 농업 생산의 주요한 원천을 장악한 양반가문의 지배에 도전하기에 그들은 너무 약했다."(5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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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1 - 유형원과 조선 후기
제임스 버나드 팔레 지음, 김범 옮김 / 산처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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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유형원의 작업은 유교적 학자와 관원들이 신성시한 중국 고대의 전통을 바탕으로 제도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근본적 원리를 수립하는 것이었다."(14)


1부 조선 전기 : 1392년(태조 1)~1650년(효종 1)


"조선 전기 제도들의 기본 구조는 15세기 전반에 형성됐지만 격동하는 왕조 교체기의 급진적인 성리학자들의 생각과 완전히 부합되지는 않았다. 불교계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고 고려의 일부 양반과 향리들의 정치적·경제적 자치를 약화시키며, 군사적·경제적으로 왕권과 국가 관료제를 강화하고 관리 등용의 주요 수단으로 과거를 시행하며, 성리학의 경전들을 교육과 과거의 기본 과목으로 확립하려는 성리학자들의 열망은 이루어졌다. 국가에서 공인한 장인들만 수공업에 종사케 함으로써 산업 대신 농업 생산에 집중하려는 구상을 달성했다. 국가가 공인한 시전을 도성에 설치하고 지방에서는 정기적인 시장과 보부상만 허용한 결과 상업도 계속 규제됐다. 여러 국왕들은 동전과 지폐를 도입해 지나치게 보수적인 통화체제를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그런 정책은 궁극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적 성리학자들은 그런 최종적 결과를 환영했다."(87-8)


2부 사회개혁 : 양반과 노비


"『반계수록』의 중심 주제 중 하나는 조선왕조의 본질적 구조에서 흘러나왔다. 그 본질적 구조는 일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관료 정부조직과 세습적 신분의 강인한 전통이 혼합된 것이었고, 특수하게는 상층의 반半귀족적 지배 신분과 하층의 세습적 노비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한편에서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도가 시행되고 다른 한편에는 세습적 귀족과 노비가 존재하는 사회·정치조직의 원리는 근본적으로 달랐으며 자주 충돌했다. 세습 귀족들은 가족관계, 개인적 인맥, 세습된 특권과 신분을 중시했지만, 관료 국가는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넓히고 객관적으로 인재를 선발·평가하며, 양반 관원들을 제외하고는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유형원은 고대의 모범을 숭배했지만 그것을 재건하려는 희망은 품지 않았으며, 돌이킬 수 없이 고정된 당시 조선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에 그 원칙들을 적용하는 데 만족했다."(169-70)


"17세기의 양반은 당唐의 귀족과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양반은 권력과 부를 계산할 때 관직과 토지 소유뿐만 아니라 노비 소유까지 합산했다는 점이었다. 17세기뿐만 아니라 여러 세기 전에도(아마 10세기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한국은 전체 인구의 30퍼센트 이상과 수도 인구의 3분의 2 정도가 노비였던 전형적인 노비제 사회였으며, 그 대부분은 양반 주인의 지배를 받았다. 당 사회에도 노비의 보증인과 하층신분의 서열이 있었지만, 노비제 사회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10세기 세습적 노비제도의 출현과 노비 인구의 팽창은 고려가 끝날 때까지 불교나 유교에 의해 저지되지 않았으며, 15세기에 성리학이 도입되어 불교를 압도했을 때도, 노비제도나 노비제 사회에 대해서는 어떤 심각한 비판도 제기되지 않았다." "정부에서 노비 해방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던 유일한 시기는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사이에 군사로 징발할 인력의 수요가 급증한 기간이었다."(174)


"조선의 지배세력과 관련된 유형원의 주된 관심은 세습적 양반이 정치와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런 문제를 푸는 열쇠는 삼대(하·은·주)의 국왕들이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을 강조했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형원은 고대의 교육제도가 올바른 도덕수행에 필수적인 교재로 짜인 교과과정을 통해 핵심적인 윤리 개념들을 포괄했다고 확신했다. 고전에 대한 지식은 덕德·행行·예藝라는 3개의 주요한 범주로 나뉘었다. 『주례』는 지혜로움智·어짊仁·성스러움聖·의로움義·충성됨忠·화목함和을 '여섯 가지 덕목六德'으로 규정했으며, 『예기』의 주석에서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일곱 가지 가르침七敎'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도덕에 대한 이런 지식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으며, 도덕교훈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예의바른 행동을 가르쳐야 했다. 『주례』는 효성孝·우애友·가정의 화목睦·원만한 혼인관계姻·책임감任·구휼恤을 '여섯 가지 행동六行'으로 규정했다."(182-4)


"유학은 생각과 행동, 또는 지식과 실천을 도덕수양에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강조했는데, 이것은 후보자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동료나 선배가 그를 직접 평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라는 의미였다. 고대의 학교제도는 관직에 임용되기 전에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평가 기간이 길었다. 그러나 학교는 개인을 평가하는 데 유일하지도 가장 중요하지도 않은 무대였다. 고전적 선례에서 행정·군사·학교의 기본적 위계질서였던 향촌은 다른 어느 집단보다 개인의 행동을 더욱 친밀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최초의 평가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됐다. 행동에 대한 평가를 천거의 주요한 방법으로 삼은 제도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풀뿌리 참여가 필요했다." "후대의 학자들은 주대의 학교와 천거제도를 이해하는 데 모호함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선례는 공로를 포상하는 제도에 주대 봉건질서의 세습적 특권이 개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명백하지 않거나 모순적이었다."(187-8)


"유형원이 연구한 중국 학자들은 거의 모두 과거제도의 이점보다는 결점에 주목했는데, 그것이 중정제만큼이나 고대 중국에서 시행된 교육과 등용의 이상과 동떨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주요한 비판의 하나는 성인의 도덕적 진리를 공정하게 전달해야 할 도구인 문학이 오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교육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렸다. 도덕주의자들은 언어가 형식주의적으로 사용되고 산문의 형식이나 세련되고 심미적 즐거움을 주는 시문의 창작을 너무 존중한 결과 도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됐다고 계속 개탄했다." "가장 자주 거론된 비판은 과거가 어떤 원리를 이해하기보다는 사실을 암기하는 데 치중했다는 것이었다." "당의 자사刺史 조광은 과거제도가 나쁜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중립적 방안이 아니라 탐욕과 야심을 자극하고 고위 관원에게 구걸하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료 학생들을 허위로 중상하게 만드는 제도라고 생각했다."(204-5)


# 9품 중정제 : 남북조 시대에 행해진 관리 등용법의 하나로서, 중정관이라는 관리가 지방의 인재를 9등급(향품)으로 나누어 추천하면 국가에서 이 등급에 맞는 관직을 주는 추천제로, 9품 관인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원래 지방에 숨어 있는 인재를 등용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중정 관직을 지방 유력 호족들이 자신들의 일족을 추천함으로써 호족 세력이 관직을 독점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특정 가문의 문벌 귀족화를 초래하였다.


"중앙집권화된 관료적 왕정체제에서 학교의 역할에 대한 유형원의 태도는 양면적인 것이었다. 국가의 교육제도, 특히 공립학교와 낙후된 조건을 개탄했기 때문에 그는 중앙 정부가 후원하는 학교제도를 창출하려고 계획했지만, 자신의 새로운 학교는 학자와 도덕적인 군자들이 운영하는 반半자치적 제도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들을 교육하고 도덕적으로 교화시키는 중요한 업무는 정부가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나 국왕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유교교육을 후원하는 데 국가를 이용하고 싶어했다. 반면 그는 당시 양반들이 사적으로 교육을 통제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공립학교제도가 세습적 지배계층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를 열망했다." "교육에 대한 통제는 궁극적으로 중앙 정부와 양반이 상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17세기 무렵 양반이 너무 강해졌기 때문에 공립학교제도가 위축되고 제도화된 교육이 서원과 서당으로 이관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234-5)


"유형원이 좀더 계몽적이고 개방적으로 비친 주요한 까닭은 당시는 기술지식과 기술관을 무시했는데 그는 기술을 제한적으로 존중했다는 측면이 대비됐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에 기술 학생들을 뽑는 데 무관심하고 그들에게 녹봉을 주지 않으며 기술직을 선택하는 젊은이들을 특별히 보상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들이 바랄 수 있는 보상은 기껏해야 얼마 되지 않는 체아직遞兒職뿐이었다. 당시 기술 관직을 선택하는 유일한 동기는 국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지방에서 강제로 기술 훈련생을 모집해야 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기술학교의 정원을 줄이고 정규 녹봉을 주며, 입학시험의 선발 인원을 감축하고 졸업자들을 모두 고용할 수 있는 충분한 정규 관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키지 않는 응시자들을 강제로 고용하고 정원을 멋대로 할당하는 당시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조치들이었다."(268)


"유형원은 특히 노비제도가 사회 전체에 미친 비인간적 효과에 주목했다. 그는 노비 소유주들은 자신의 노비를 매질로 다룰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노비제도는 노비뿐만 아니라 노비 소유주까지 잔인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학대를 받은 노비들은 교화되기는커녕 무리를 지어 유망에 나섰다." "그는 더 나아가 이전의 문헌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인간의 평등에 대한 원칙을 분명하게 밝혔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노비를 재산으로 여긴다. 사람은 모두 동일한데, 어찌 사람이 사람을 재산으로 여길 수 있는가." 그가 보기에 노비를 재산으로 보는 관습은 고대 (중국) 사회에는 없었으며, 그러므로 당시 조선 사회에 그런 풍조가 있다는 사실은 조선이 과거의 영광스러운 규범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불행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핵심적인 문제점은 사람들이 눈앞의 사사로운 이익에 빠져 노비제도는 철폐하기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338)


"그의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신이 받아들인 방법(종부법과 종모법 모두 결함이 있다)이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비도덕적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수긍했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를 '실학'적 전통을 따르는 진정한 학자로 부각시킨 명쾌한 발언 중 하나였다." "그는 노비제도의 폐지에 원칙적으로 찬성했지만, 지배계층은 주대처럼 국왕의 후원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노비제도를 갑작스럽게 폐지하면 당시의 양반뿐만 아니라 학식과 도덕을 갖춘 새로운 지배계층도 아무런 대비 없이 방치되어 생활할 수 없게 만들어 너무 갑작스럽게 풍습이 바뀔 것이므로 그런 변화는 노비를 고용노동이나 임금노동으로 단계적으로 대체하면서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개혁이 이루어지면 지배계층은 노비보다는 고공雇工을 사용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전환해가는 첫 번째 단계는 당시의 노비를 세밀하게 등록해서 다음 세대까지만 노비신분을 세습시키도록 최종기한을 정하는 것이었다."(341)


"현재의 일부 학자들은 유형원과 그밖의 이른바 실학자들이 17~18세기에 일어난 긍정적 변화를 돕고 지원하는 데 영향을 주었으며, 세습적 노비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유형원의 이론은 1730년 종모법을 최종적으로 채택한 결정이나 1801년 공노비의 혁파를 단행하는 데 일정한 영향력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 노비인구가 급감한 원인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이론적인 주장이나 경영형 부농의 발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비 자신들의 움직임이었는데, 그들은 정치가 부패해 도망간 노비를 추쇄할 의지를 잃어버린 틈을 이용해 대규모로 유망함으로써 '저항했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일부 외거노비가 아무리 기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이었다고 해도 속신의 대가는 매우 비쌌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부류는 거의 없었다." "(개혁을 구상한 이들도) 모두 누대의 양반이었으며, 권력의 구조는 1910년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 사실상 바뀌지 않았다."(391-2)


3부 전제개혁


"전통적 유교사상은 농업 생산을 증진할 필요를 강조했지만, 재생산과 국가에 10분의 1세를 바쳐야 하는 분량보다 많은 잉여생산을 촉진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 목적은 양인 농민의 생존과 지배계층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세를 공급하는 데 있었다. 아울러 유교의 이상적인 개혁에는 토지의 재분배나 그것을 통한 부의 재분배가 수반됐다. 그러므로 유교적 경세학자들은, 급진적인 개편이 아니라면, 토지의 재분배가 사회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유형원이 일정한 종류의 전제개혁은 왕조를 중흥시키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특히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과 지도력을 제공할 수 있는 양반 지배계층의 이해와 전제개혁안이 상충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 추상적으로 개혁을 논의하는 것과 토지 재산을 부자에서 빈자로 옮기는 급진적인 계획에서 나타날 수 있는 반작용을 숙고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396)


"유형원은 토지가 부당하게 분배된 주요 원인은 사유재산제도라고 명쾌하게 결론 내렸다. 그가 당시 조선의 상황을 독자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그는 이전에 중국에서 나온 사유재산에 관련된 비판에 근거해 자신의 주장을 대부분 전개했다. 유형원이 아무 이의 없이 받아들인 그 자료의 핵심적 주장은 완벽한 토지소유제도는 모든 농가들이 최소의 세금을 내면서 공평한 경작지를 보장받았던 주대의 정전제라는 것이었다. 그 세금은 국왕의 토지를 공동으로 경작해서 납부했다. 주의 봉건제도에서는 사유권이 없었기 때문에 농가들은 자신들의 구역을 사용하거나 경작할 권리만을 가졌다." "또한 유형원은 사유재산제도가 소작농에게 과도한 지대를 부과할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조세 부담을 줄이려던 한대 황제들의 좋은 의도를 뒤엎었다는 후한대 순열荀悅의 주장을 인용했다."(399-401)


# 주요 토지 개혁 방안

1. 한전제 : 토지 소유를 제한

2. 균전제 :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들에게 재분배


"유형원은 자신의 전체적인 계획이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평하게 분배해서 함께 경작한다는 정전제의 모범적 원리에 기초한 공전제도와 양인 농민보다 지배계층에게 더 많은 토지 소유를 허용하는 한전제라는 두 가지 모범을 절충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의 한전제처럼 유형원도 품계에 따라 차등적으로 토지를 분급했다. 그러나 그는 차등적으로 토지를 분급하는 자신의 방안을 토지의 사유제도와 타협하거나 공유에 기반한 균전제를 성취하는 과정으로 제안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사유지를 즉각 국유화하고 농민과 사대부에게 재분배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자신의 한전제에서, 농민과는 반대로, 사대부는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고 반납해야 하는 토지를 좀더 많이 할당받으며, 사대부의 지위를 법률로 공인받은 경우에만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으며, 품계에 따라 상속할 수 있는 세대의 범위가 엄격히 정해져 있다고 규정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의 타협이 아니라) 지배신분과의 타협이었다."(482-3)


"토지를 공적으로 소유하는 공전제도는 유형원에게 두 가지 목적이 달성된 사회를 창출하는 수단으로 대단히 중요했다. 첫째는 농민들이 비교적 평등한 수입을 올리고 거기에 공정하게 과세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국가가 경제를 통제함으로써 시장경제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자의적으로 관원을 등용치 못하게 함으로써 사대부 가문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사유지가 개인적 이익에 집착한 양반들의 경제적 기반이듯이, 공유지는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도덕적 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이 될 것이었다." "사대부에게 토지를 분급하는 유형원의 계획은 적어도 2세대 동안 그들을 후원하는 것이었지 관직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다. 한정된 세습적 특권은 왕족에게까지 확대됐으며, 공신과 대신의 후손에게는 문음을 통해서 확대됐다. 세습적 차별은 서얼과 노비에게 적용됐다. 신분에 대한 당시 조선의 관습적 차별은 새로운 사회로 대부분 이월됐다."(498-9)


17세기 후반부터 축적된 "조선의 경험(이앙법 보급, 관개시설 급증, 이모작 실시, 고추, 호박 같은 새로운 작물 도입 등)과 비슷한 사례는 송대의 '녹색 혁명'일 것인데, 당시는 토지의 개간, 관개와 급수, 다모작, 상업적 농업, 지역적 특성화, 비단과 차 산업이 발달하면서 생산이 증가했다. 18세기 청대에는 중국 중부와 남서부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생산이 증가했지만, 그 뒤 "인구 증가는 농업 생산을 따라잡아" 농촌은 궁핍해졌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의 주요한 차이점의 하나는 송과 청에서는 농업 생산이 증가하고 상업경제가 발달한 뒤에는 인구가 급증했지만 조선의 인구는 1693년(숙종 19) 이후 1천만에서 1,250만 명 사이에서 정체됐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도쿠가와시대 후반 3,500만 명에서 멈춘 일본의 상황과 상당히 비슷했다." "그런 잉여생산은, 18~19세기에 인구를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급격한 경제 발전을 위해 이륙하는 데 충분한 자본을 창출할 만큼 넉넉하지 않았다."(519-20)


"토지 소유에 대한 유형원의 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토지와 부의 불공평한 분배라는 문제를 그 논쟁에 관련된 다양한 집단의 상충하는 요구를 균형을 맞춤으로써 해결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양인 농민은 토지를, 노비는 면천을, 지배계층은 양인보다 높은 수입과 자신들에게 봉사할 노동력을, 그리고 국가는 안정된 재정과 충분한 세입을 요구했다. 그는 정전제와 한전제라는 고전적이며 역사적인 선례의 요소를 조합해 당시의 조선에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새로운 지배계층은 세습적 특권과 문과 급제라는 두 요소의 조합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양반이 아니라 덕행에 따라 구성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몰수·국유·재분배라는 급진적이며 평등적인 방안은 지배계층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마련하려는 그 자신의 생각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는 세습적 노비제도를 폐지하자고 용감하게 주장했지만, 그것을 온건하게 절충하고 수용하면서 직면한 미래를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543-4)


4부 군제개혁


"유형원보다 당시 군역제도의 결함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군적은 쓸모없는 종이 조각이었고 대부분의 군사들은 훈련되지 못했으며, 군역제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정병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군포를 납부하는 독립된 조세제도로 변질됐다." "이이는 정병에게 군포를 내도록 전환한 조처는 병력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양정과 그 가호의 조세 부담을 증가시킴으로써 군사제도를 약화시킨 근본적인 원인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양인들은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서 양반신분을 얻을 필요는 없었으며, 관원들은 진보의 군사를 충원하는 것보다는 군적에 기재된 숫자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농민들은 군역 대신 군포를 마련하기 위해 기꺼이 고리로 빚을 얻었다. 거주지에서 먼 진관에 배치되면 그들은 그곳의 서리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을 뿐만 아니라 진장에게 바칠 물건들을 많이 가져가야 했다. 군역을 피해 도망가면 그 부담은 그들의 친척과 이웃에게 돌아갔다."(563-6)


유형원이 보기에 주대의 정전제는 "민정 분야뿐만 아니라 군사 부분에도 적용됐다. 농민 가호는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일시적으로 분급받은 동시에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전시에는 군사로 참전해야 했는데, 이것은 농민이 군사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민병제도였다. 모범적인 민병제도는 평화시에는 복무하는 기간을 최소화해 농민에게 절대 부담을 주지 않았다. 군사훈련은 농한기에만 실시해서 농민의 생산과 생존을 방해하지 않도록 했다. 모든 양정은 직접 복무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상비적인 직업 군인이나 그런 부대를 후원하기 위한 조세제도도 필요치 않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주대의 이상적 제도가 무너진 뒤 널리 나타난 특징이었다." "민병은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을 유지했기 때문에 녹봉으로 지출되는 비용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이 끝나면 해산했기 때문에 부대에 주둔할 필요도 없었으며, 지휘관이 그들을 동원해 권력을 잡을 정치적인 위협도 없었다."(570-2)


"번상 정병과 보인제도에 기초해 모든 군사 부대를 개편하려고 시도한 유형원은 훈련도감처럼 영속적으로 녹봉을 받음으로써 재정에 부담을 지우는 군사들을 혁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훈련도감의 핵심 병력인 포수, 진보된 무기와 조직은 국방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복무와 재정을 번상 정병과 보인으로 전환해 국가의 지출을 줄이면서 그것을 보존하려고 했다." 이러한 유형원의 가정은 소박하고 비현실적이었는데 "6~7천 명에 이르는 훈련도감의 직업군인을 대체하려면 9만 명의 번상 정병과 보인이 필요했지만 한정은 말할 것도 없고 양정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17세기 무렵 유망은 너무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되어 제한된 소수만이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에게서 예상되는 하나의 권리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유형원이 매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 문제─보인을 더 많이 등록시키는 것─는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650-1)


# 번상정병(番上正兵) : 조선 초기에, 지방에서 올라와 중앙의 군대 조직인 오위(五衛)에 근무하던 정병


"유형원과 현직 관원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유형원은 현재의 정병과 보인제도를 유지하려 했던 반면, 이사명 같은 일부 개혁적 신하들은 그런 제도를 넘어서 다른 과세 방안을 도입하는 데 좀더 유연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가호에 일정한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이사명은 군사를 후원할 수 있는 충분한 세원을 확보하고 (모든 가호에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겠지만) 현재보다 훨씬 공평하게 과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군역이나 군포가 자신의 신분과 위엄을 훼손하는 저급한 의무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온 양반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반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이사명 같은 현실적인 신하들은 양반과 그밖의 피역자에게는 단지 보인의 의무만 부과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는데, 그 주요한 까닭은 양반이 지주로서 전세를 납부하는 데는 아무런 오명도 붙지 않기 때문이었다."(691-2)


"유형원은 진관이 여러 군현을 관할해 이중의 방진으로 적군을 방어하는 유성룡의 방안을 도입해 지방의 군사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는 핵심적 전략 요지에 서열에 따른 부대를 배치한 척계광의 속오군과 비슷한 제도에 기초해 육군과 수군을 재편하고, 행정구역과 군사조직을 결합해 수령이 진장의 지휘를 받도록 했으며, 이미 존재하던 속오군을 노비로만 편성해 거주지에서 훈련을 받는 일종의 민병조직으로 유지시키려고 했다." 진관이 통제하는 유성룡의 방안은 "전국을 군사조직으로 연결한 것처럼 보였지만, 적군이 병력을 집중해 침략할 경우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 그 제도의 주요한 결함은 기동성보다는 고정된 위치에서 방어하는 데 치중했다는 데 있었다." "유형원은 당시 수령들은 전면적인 교육 개편을 통해서 문무에 모두 능통한 고전적 개념의 보편적 지식인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성리학과 문관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그리 쉬운 목표가 아니었다."(737)


"1750년의 균역법은 양인의 세율을 절반으로 줄인 결과 그들에게 즉각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1754년(영조 30) 무렵 여러 지역에서 다시 부정이 시작됐다. 1764년 영의정 홍봉한은 지난 10년 동안 재정 상황은 계속 나빠졌으며 1780년대에 접어들면서 어염선세魚鹽船稅가 과중해져 해안 주민들을 파산으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다. 선박·어전·염전을 조사해 세금을 재산정하도록 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할당량은 변하지 않았으며, 17세기부터 1850년대까지 백성들의 계속적인 부담이 됐다. 균역볍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가세들은 새로운 부정의 원천이 됐다." "정조의 치세인 1770년대 후반에는 향교나 서원에 학생이나 교관으로 등록하거나 학문적 능력을 검증받지도 않은 채 유학으로 등록해 피역하는 사례가 만연했다.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과세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면 낮은 세율의 양역을 이행했으며 금전을 기부해 향안에 이름을 올려 피역한 부류도 나타났다."(780-1)


"군역과 군포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 결과는 1862년의 임술민란으로 폭발했으며, 그 영향으로 1870년 대원군은 모든 양반 가호에게 그들이 소유한 노비의 이름으로 호포를 내도록 명령했다. 19세기 중반 군역은 양역보다는 조세로 전환됐으며, 그런 변화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전함이 조선의 해안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들을 막기에는 국방력이 너무 약했던 불행한 결과로 이어졌다. 일정한 개혁이 시도됐지만 도망이나 면제의 방법으로 납포하지 않는 데 성공한 부류는 국가의 이익을 희생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킬 수 있었다. 양반과 그 이익을 대변한 집단은 국왕과 개혁자들에 맞서 흔들리지 않는 장벽을 구축했지만, 계속 늘어나는 면세자들은 세습적 양반 귀족의 좁은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김용섭이 1792년(정조 16) 경상도 영천에서 15퍼센트의 가호만이 양역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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