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1 - 유형원과 조선 후기
제임스 버나드 팔레 지음, 김범 옮김 / 산처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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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유형원의 작업은 유교적 학자와 관원들이 신성시한 중국 고대의 전통을 바탕으로 제도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근본적 원리를 수립하는 것이었다."(14)


1부 조선 전기 : 1392년(태조 1)~1650년(효종 1)


"조선 전기 제도들의 기본 구조는 15세기 전반에 형성됐지만 격동하는 왕조 교체기의 급진적인 성리학자들의 생각과 완전히 부합되지는 않았다. 불교계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고 고려의 일부 양반과 향리들의 정치적·경제적 자치를 약화시키며, 군사적·경제적으로 왕권과 국가 관료제를 강화하고 관리 등용의 주요 수단으로 과거를 시행하며, 성리학의 경전들을 교육과 과거의 기본 과목으로 확립하려는 성리학자들의 열망은 이루어졌다. 국가에서 공인한 장인들만 수공업에 종사케 함으로써 산업 대신 농업 생산에 집중하려는 구상을 달성했다. 국가가 공인한 시전을 도성에 설치하고 지방에서는 정기적인 시장과 보부상만 허용한 결과 상업도 계속 규제됐다. 여러 국왕들은 동전과 지폐를 도입해 지나치게 보수적인 통화체제를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그런 정책은 궁극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적 성리학자들은 그런 최종적 결과를 환영했다."(87-8)


2부 사회개혁 : 양반과 노비


"『반계수록』의 중심 주제 중 하나는 조선왕조의 본질적 구조에서 흘러나왔다. 그 본질적 구조는 일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관료 정부조직과 세습적 신분의 강인한 전통이 혼합된 것이었고, 특수하게는 상층의 반半귀족적 지배 신분과 하층의 세습적 노비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한편에서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도가 시행되고 다른 한편에는 세습적 귀족과 노비가 존재하는 사회·정치조직의 원리는 근본적으로 달랐으며 자주 충돌했다. 세습 귀족들은 가족관계, 개인적 인맥, 세습된 특권과 신분을 중시했지만, 관료 국가는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넓히고 객관적으로 인재를 선발·평가하며, 양반 관원들을 제외하고는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유형원은 고대의 모범을 숭배했지만 그것을 재건하려는 희망은 품지 않았으며, 돌이킬 수 없이 고정된 당시 조선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에 그 원칙들을 적용하는 데 만족했다."(169-70)


"17세기의 양반은 당唐의 귀족과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양반은 권력과 부를 계산할 때 관직과 토지 소유뿐만 아니라 노비 소유까지 합산했다는 점이었다. 17세기뿐만 아니라 여러 세기 전에도(아마 10세기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한국은 전체 인구의 30퍼센트 이상과 수도 인구의 3분의 2 정도가 노비였던 전형적인 노비제 사회였으며, 그 대부분은 양반 주인의 지배를 받았다. 당 사회에도 노비의 보증인과 하층신분의 서열이 있었지만, 노비제 사회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10세기 세습적 노비제도의 출현과 노비 인구의 팽창은 고려가 끝날 때까지 불교나 유교에 의해 저지되지 않았으며, 15세기에 성리학이 도입되어 불교를 압도했을 때도, 노비제도나 노비제 사회에 대해서는 어떤 심각한 비판도 제기되지 않았다." "정부에서 노비 해방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던 유일한 시기는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사이에 군사로 징발할 인력의 수요가 급증한 기간이었다."(174)


"조선의 지배세력과 관련된 유형원의 주된 관심은 세습적 양반이 정치와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런 문제를 푸는 열쇠는 삼대(하·은·주)의 국왕들이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을 강조했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형원은 고대의 교육제도가 올바른 도덕수행에 필수적인 교재로 짜인 교과과정을 통해 핵심적인 윤리 개념들을 포괄했다고 확신했다. 고전에 대한 지식은 덕德·행行·예藝라는 3개의 주요한 범주로 나뉘었다. 『주례』는 지혜로움智·어짊仁·성스러움聖·의로움義·충성됨忠·화목함和을 '여섯 가지 덕목六德'으로 규정했으며, 『예기』의 주석에서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일곱 가지 가르침七敎'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도덕에 대한 이런 지식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으며, 도덕교훈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예의바른 행동을 가르쳐야 했다. 『주례』는 효성孝·우애友·가정의 화목睦·원만한 혼인관계姻·책임감任·구휼恤을 '여섯 가지 행동六行'으로 규정했다."(182-4)


"유학은 생각과 행동, 또는 지식과 실천을 도덕수양에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강조했는데, 이것은 후보자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동료나 선배가 그를 직접 평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라는 의미였다. 고대의 학교제도는 관직에 임용되기 전에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평가 기간이 길었다. 그러나 학교는 개인을 평가하는 데 유일하지도 가장 중요하지도 않은 무대였다. 고전적 선례에서 행정·군사·학교의 기본적 위계질서였던 향촌은 다른 어느 집단보다 개인의 행동을 더욱 친밀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최초의 평가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됐다. 행동에 대한 평가를 천거의 주요한 방법으로 삼은 제도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풀뿌리 참여가 필요했다." "후대의 학자들은 주대의 학교와 천거제도를 이해하는 데 모호함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선례는 공로를 포상하는 제도에 주대 봉건질서의 세습적 특권이 개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명백하지 않거나 모순적이었다."(187-8)


"유형원이 연구한 중국 학자들은 거의 모두 과거제도의 이점보다는 결점에 주목했는데, 그것이 중정제만큼이나 고대 중국에서 시행된 교육과 등용의 이상과 동떨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주요한 비판의 하나는 성인의 도덕적 진리를 공정하게 전달해야 할 도구인 문학이 오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교육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렸다. 도덕주의자들은 언어가 형식주의적으로 사용되고 산문의 형식이나 세련되고 심미적 즐거움을 주는 시문의 창작을 너무 존중한 결과 도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됐다고 계속 개탄했다." "가장 자주 거론된 비판은 과거가 어떤 원리를 이해하기보다는 사실을 암기하는 데 치중했다는 것이었다." "당의 자사刺史 조광은 과거제도가 나쁜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중립적 방안이 아니라 탐욕과 야심을 자극하고 고위 관원에게 구걸하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료 학생들을 허위로 중상하게 만드는 제도라고 생각했다."(204-5)


# 9품 중정제 : 남북조 시대에 행해진 관리 등용법의 하나로서, 중정관이라는 관리가 지방의 인재를 9등급(향품)으로 나누어 추천하면 국가에서 이 등급에 맞는 관직을 주는 추천제로, 9품 관인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원래 지방에 숨어 있는 인재를 등용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중정 관직을 지방 유력 호족들이 자신들의 일족을 추천함으로써 호족 세력이 관직을 독점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특정 가문의 문벌 귀족화를 초래하였다.


"중앙집권화된 관료적 왕정체제에서 학교의 역할에 대한 유형원의 태도는 양면적인 것이었다. 국가의 교육제도, 특히 공립학교와 낙후된 조건을 개탄했기 때문에 그는 중앙 정부가 후원하는 학교제도를 창출하려고 계획했지만, 자신의 새로운 학교는 학자와 도덕적인 군자들이 운영하는 반半자치적 제도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들을 교육하고 도덕적으로 교화시키는 중요한 업무는 정부가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나 국왕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유교교육을 후원하는 데 국가를 이용하고 싶어했다. 반면 그는 당시 양반들이 사적으로 교육을 통제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공립학교제도가 세습적 지배계층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를 열망했다." "교육에 대한 통제는 궁극적으로 중앙 정부와 양반이 상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17세기 무렵 양반이 너무 강해졌기 때문에 공립학교제도가 위축되고 제도화된 교육이 서원과 서당으로 이관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234-5)


"유형원이 좀더 계몽적이고 개방적으로 비친 주요한 까닭은 당시는 기술지식과 기술관을 무시했는데 그는 기술을 제한적으로 존중했다는 측면이 대비됐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에 기술 학생들을 뽑는 데 무관심하고 그들에게 녹봉을 주지 않으며 기술직을 선택하는 젊은이들을 특별히 보상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들이 바랄 수 있는 보상은 기껏해야 얼마 되지 않는 체아직遞兒職뿐이었다. 당시 기술 관직을 선택하는 유일한 동기는 국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지방에서 강제로 기술 훈련생을 모집해야 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기술학교의 정원을 줄이고 정규 녹봉을 주며, 입학시험의 선발 인원을 감축하고 졸업자들을 모두 고용할 수 있는 충분한 정규 관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키지 않는 응시자들을 강제로 고용하고 정원을 멋대로 할당하는 당시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조치들이었다."(268)


"유형원은 특히 노비제도가 사회 전체에 미친 비인간적 효과에 주목했다. 그는 노비 소유주들은 자신의 노비를 매질로 다룰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노비제도는 노비뿐만 아니라 노비 소유주까지 잔인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학대를 받은 노비들은 교화되기는커녕 무리를 지어 유망에 나섰다." "그는 더 나아가 이전의 문헌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인간의 평등에 대한 원칙을 분명하게 밝혔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노비를 재산으로 여긴다. 사람은 모두 동일한데, 어찌 사람이 사람을 재산으로 여길 수 있는가." 그가 보기에 노비를 재산으로 보는 관습은 고대 (중국) 사회에는 없었으며, 그러므로 당시 조선 사회에 그런 풍조가 있다는 사실은 조선이 과거의 영광스러운 규범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불행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핵심적인 문제점은 사람들이 눈앞의 사사로운 이익에 빠져 노비제도는 철폐하기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338)


"그의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신이 받아들인 방법(종부법과 종모법 모두 결함이 있다)이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비도덕적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수긍했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를 '실학'적 전통을 따르는 진정한 학자로 부각시킨 명쾌한 발언 중 하나였다." "그는 노비제도의 폐지에 원칙적으로 찬성했지만, 지배계층은 주대처럼 국왕의 후원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노비제도를 갑작스럽게 폐지하면 당시의 양반뿐만 아니라 학식과 도덕을 갖춘 새로운 지배계층도 아무런 대비 없이 방치되어 생활할 수 없게 만들어 너무 갑작스럽게 풍습이 바뀔 것이므로 그런 변화는 노비를 고용노동이나 임금노동으로 단계적으로 대체하면서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개혁이 이루어지면 지배계층은 노비보다는 고공雇工을 사용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전환해가는 첫 번째 단계는 당시의 노비를 세밀하게 등록해서 다음 세대까지만 노비신분을 세습시키도록 최종기한을 정하는 것이었다."(341)


"현재의 일부 학자들은 유형원과 그밖의 이른바 실학자들이 17~18세기에 일어난 긍정적 변화를 돕고 지원하는 데 영향을 주었으며, 세습적 노비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유형원의 이론은 1730년 종모법을 최종적으로 채택한 결정이나 1801년 공노비의 혁파를 단행하는 데 일정한 영향력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 노비인구가 급감한 원인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이론적인 주장이나 경영형 부농의 발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비 자신들의 움직임이었는데, 그들은 정치가 부패해 도망간 노비를 추쇄할 의지를 잃어버린 틈을 이용해 대규모로 유망함으로써 '저항했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일부 외거노비가 아무리 기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이었다고 해도 속신의 대가는 매우 비쌌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부류는 거의 없었다." "(개혁을 구상한 이들도) 모두 누대의 양반이었으며, 권력의 구조는 1910년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 사실상 바뀌지 않았다."(391-2)


3부 전제개혁


"전통적 유교사상은 농업 생산을 증진할 필요를 강조했지만, 재생산과 국가에 10분의 1세를 바쳐야 하는 분량보다 많은 잉여생산을 촉진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 목적은 양인 농민의 생존과 지배계층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세를 공급하는 데 있었다. 아울러 유교의 이상적인 개혁에는 토지의 재분배나 그것을 통한 부의 재분배가 수반됐다. 그러므로 유교적 경세학자들은, 급진적인 개편이 아니라면, 토지의 재분배가 사회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유형원이 일정한 종류의 전제개혁은 왕조를 중흥시키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특히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과 지도력을 제공할 수 있는 양반 지배계층의 이해와 전제개혁안이 상충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 추상적으로 개혁을 논의하는 것과 토지 재산을 부자에서 빈자로 옮기는 급진적인 계획에서 나타날 수 있는 반작용을 숙고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396)


"유형원은 토지가 부당하게 분배된 주요 원인은 사유재산제도라고 명쾌하게 결론 내렸다. 그가 당시 조선의 상황을 독자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그는 이전에 중국에서 나온 사유재산에 관련된 비판에 근거해 자신의 주장을 대부분 전개했다. 유형원이 아무 이의 없이 받아들인 그 자료의 핵심적 주장은 완벽한 토지소유제도는 모든 농가들이 최소의 세금을 내면서 공평한 경작지를 보장받았던 주대의 정전제라는 것이었다. 그 세금은 국왕의 토지를 공동으로 경작해서 납부했다. 주의 봉건제도에서는 사유권이 없었기 때문에 농가들은 자신들의 구역을 사용하거나 경작할 권리만을 가졌다." "또한 유형원은 사유재산제도가 소작농에게 과도한 지대를 부과할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조세 부담을 줄이려던 한대 황제들의 좋은 의도를 뒤엎었다는 후한대 순열荀悅의 주장을 인용했다."(399-401)


# 주요 토지 개혁 방안

1. 한전제 : 토지 소유를 제한

2. 균전제 :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들에게 재분배


"유형원은 자신의 전체적인 계획이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평하게 분배해서 함께 경작한다는 정전제의 모범적 원리에 기초한 공전제도와 양인 농민보다 지배계층에게 더 많은 토지 소유를 허용하는 한전제라는 두 가지 모범을 절충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의 한전제처럼 유형원도 품계에 따라 차등적으로 토지를 분급했다. 그러나 그는 차등적으로 토지를 분급하는 자신의 방안을 토지의 사유제도와 타협하거나 공유에 기반한 균전제를 성취하는 과정으로 제안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사유지를 즉각 국유화하고 농민과 사대부에게 재분배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자신의 한전제에서, 농민과는 반대로, 사대부는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고 반납해야 하는 토지를 좀더 많이 할당받으며, 사대부의 지위를 법률로 공인받은 경우에만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으며, 품계에 따라 상속할 수 있는 세대의 범위가 엄격히 정해져 있다고 규정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의 타협이 아니라) 지배신분과의 타협이었다."(482-3)


"토지를 공적으로 소유하는 공전제도는 유형원에게 두 가지 목적이 달성된 사회를 창출하는 수단으로 대단히 중요했다. 첫째는 농민들이 비교적 평등한 수입을 올리고 거기에 공정하게 과세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국가가 경제를 통제함으로써 시장경제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자의적으로 관원을 등용치 못하게 함으로써 사대부 가문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사유지가 개인적 이익에 집착한 양반들의 경제적 기반이듯이, 공유지는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도덕적 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이 될 것이었다." "사대부에게 토지를 분급하는 유형원의 계획은 적어도 2세대 동안 그들을 후원하는 것이었지 관직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다. 한정된 세습적 특권은 왕족에게까지 확대됐으며, 공신과 대신의 후손에게는 문음을 통해서 확대됐다. 세습적 차별은 서얼과 노비에게 적용됐다. 신분에 대한 당시 조선의 관습적 차별은 새로운 사회로 대부분 이월됐다."(498-9)


17세기 후반부터 축적된 "조선의 경험(이앙법 보급, 관개시설 급증, 이모작 실시, 고추, 호박 같은 새로운 작물 도입 등)과 비슷한 사례는 송대의 '녹색 혁명'일 것인데, 당시는 토지의 개간, 관개와 급수, 다모작, 상업적 농업, 지역적 특성화, 비단과 차 산업이 발달하면서 생산이 증가했다. 18세기 청대에는 중국 중부와 남서부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생산이 증가했지만, 그 뒤 "인구 증가는 농업 생산을 따라잡아" 농촌은 궁핍해졌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의 주요한 차이점의 하나는 송과 청에서는 농업 생산이 증가하고 상업경제가 발달한 뒤에는 인구가 급증했지만 조선의 인구는 1693년(숙종 19) 이후 1천만에서 1,250만 명 사이에서 정체됐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도쿠가와시대 후반 3,500만 명에서 멈춘 일본의 상황과 상당히 비슷했다." "그런 잉여생산은, 18~19세기에 인구를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급격한 경제 발전을 위해 이륙하는 데 충분한 자본을 창출할 만큼 넉넉하지 않았다."(519-20)


"토지 소유에 대한 유형원의 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토지와 부의 불공평한 분배라는 문제를 그 논쟁에 관련된 다양한 집단의 상충하는 요구를 균형을 맞춤으로써 해결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양인 농민은 토지를, 노비는 면천을, 지배계층은 양인보다 높은 수입과 자신들에게 봉사할 노동력을, 그리고 국가는 안정된 재정과 충분한 세입을 요구했다. 그는 정전제와 한전제라는 고전적이며 역사적인 선례의 요소를 조합해 당시의 조선에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새로운 지배계층은 세습적 특권과 문과 급제라는 두 요소의 조합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양반이 아니라 덕행에 따라 구성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몰수·국유·재분배라는 급진적이며 평등적인 방안은 지배계층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마련하려는 그 자신의 생각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는 세습적 노비제도를 폐지하자고 용감하게 주장했지만, 그것을 온건하게 절충하고 수용하면서 직면한 미래를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543-4)


4부 군제개혁


"유형원보다 당시 군역제도의 결함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군적은 쓸모없는 종이 조각이었고 대부분의 군사들은 훈련되지 못했으며, 군역제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정병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군포를 납부하는 독립된 조세제도로 변질됐다." "이이는 정병에게 군포를 내도록 전환한 조처는 병력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양정과 그 가호의 조세 부담을 증가시킴으로써 군사제도를 약화시킨 근본적인 원인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양인들은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서 양반신분을 얻을 필요는 없었으며, 관원들은 진보의 군사를 충원하는 것보다는 군적에 기재된 숫자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농민들은 군역 대신 군포를 마련하기 위해 기꺼이 고리로 빚을 얻었다. 거주지에서 먼 진관에 배치되면 그들은 그곳의 서리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을 뿐만 아니라 진장에게 바칠 물건들을 많이 가져가야 했다. 군역을 피해 도망가면 그 부담은 그들의 친척과 이웃에게 돌아갔다."(563-6)


유형원이 보기에 주대의 정전제는 "민정 분야뿐만 아니라 군사 부분에도 적용됐다. 농민 가호는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일시적으로 분급받은 동시에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전시에는 군사로 참전해야 했는데, 이것은 농민이 군사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민병제도였다. 모범적인 민병제도는 평화시에는 복무하는 기간을 최소화해 농민에게 절대 부담을 주지 않았다. 군사훈련은 농한기에만 실시해서 농민의 생산과 생존을 방해하지 않도록 했다. 모든 양정은 직접 복무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상비적인 직업 군인이나 그런 부대를 후원하기 위한 조세제도도 필요치 않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주대의 이상적 제도가 무너진 뒤 널리 나타난 특징이었다." "민병은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을 유지했기 때문에 녹봉으로 지출되는 비용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이 끝나면 해산했기 때문에 부대에 주둔할 필요도 없었으며, 지휘관이 그들을 동원해 권력을 잡을 정치적인 위협도 없었다."(570-2)


"번상 정병과 보인제도에 기초해 모든 군사 부대를 개편하려고 시도한 유형원은 훈련도감처럼 영속적으로 녹봉을 받음으로써 재정에 부담을 지우는 군사들을 혁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훈련도감의 핵심 병력인 포수, 진보된 무기와 조직은 국방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복무와 재정을 번상 정병과 보인으로 전환해 국가의 지출을 줄이면서 그것을 보존하려고 했다." 이러한 유형원의 가정은 소박하고 비현실적이었는데 "6~7천 명에 이르는 훈련도감의 직업군인을 대체하려면 9만 명의 번상 정병과 보인이 필요했지만 한정은 말할 것도 없고 양정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17세기 무렵 유망은 너무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되어 제한된 소수만이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에게서 예상되는 하나의 권리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유형원이 매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 문제─보인을 더 많이 등록시키는 것─는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650-1)


# 번상정병(番上正兵) : 조선 초기에, 지방에서 올라와 중앙의 군대 조직인 오위(五衛)에 근무하던 정병


"유형원과 현직 관원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유형원은 현재의 정병과 보인제도를 유지하려 했던 반면, 이사명 같은 일부 개혁적 신하들은 그런 제도를 넘어서 다른 과세 방안을 도입하는 데 좀더 유연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가호에 일정한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이사명은 군사를 후원할 수 있는 충분한 세원을 확보하고 (모든 가호에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겠지만) 현재보다 훨씬 공평하게 과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군역이나 군포가 자신의 신분과 위엄을 훼손하는 저급한 의무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온 양반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반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이사명 같은 현실적인 신하들은 양반과 그밖의 피역자에게는 단지 보인의 의무만 부과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는데, 그 주요한 까닭은 양반이 지주로서 전세를 납부하는 데는 아무런 오명도 붙지 않기 때문이었다."(691-2)


"유형원은 진관이 여러 군현을 관할해 이중의 방진으로 적군을 방어하는 유성룡의 방안을 도입해 지방의 군사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는 핵심적 전략 요지에 서열에 따른 부대를 배치한 척계광의 속오군과 비슷한 제도에 기초해 육군과 수군을 재편하고, 행정구역과 군사조직을 결합해 수령이 진장의 지휘를 받도록 했으며, 이미 존재하던 속오군을 노비로만 편성해 거주지에서 훈련을 받는 일종의 민병조직으로 유지시키려고 했다." 진관이 통제하는 유성룡의 방안은 "전국을 군사조직으로 연결한 것처럼 보였지만, 적군이 병력을 집중해 침략할 경우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 그 제도의 주요한 결함은 기동성보다는 고정된 위치에서 방어하는 데 치중했다는 데 있었다." "유형원은 당시 수령들은 전면적인 교육 개편을 통해서 문무에 모두 능통한 고전적 개념의 보편적 지식인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성리학과 문관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그리 쉬운 목표가 아니었다."(737)


"1750년의 균역법은 양인의 세율을 절반으로 줄인 결과 그들에게 즉각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1754년(영조 30) 무렵 여러 지역에서 다시 부정이 시작됐다. 1764년 영의정 홍봉한은 지난 10년 동안 재정 상황은 계속 나빠졌으며 1780년대에 접어들면서 어염선세魚鹽船稅가 과중해져 해안 주민들을 파산으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다. 선박·어전·염전을 조사해 세금을 재산정하도록 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할당량은 변하지 않았으며, 17세기부터 1850년대까지 백성들의 계속적인 부담이 됐다. 균역볍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가세들은 새로운 부정의 원천이 됐다." "정조의 치세인 1770년대 후반에는 향교나 서원에 학생이나 교관으로 등록하거나 학문적 능력을 검증받지도 않은 채 유학으로 등록해 피역하는 사례가 만연했다.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과세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면 낮은 세율의 양역을 이행했으며 금전을 기부해 향안에 이름을 올려 피역한 부류도 나타났다."(780-1)


"군역과 군포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 결과는 1862년의 임술민란으로 폭발했으며, 그 영향으로 1870년 대원군은 모든 양반 가호에게 그들이 소유한 노비의 이름으로 호포를 내도록 명령했다. 19세기 중반 군역은 양역보다는 조세로 전환됐으며, 그런 변화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전함이 조선의 해안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들을 막기에는 국방력이 너무 약했던 불행한 결과로 이어졌다. 일정한 개혁이 시도됐지만 도망이나 면제의 방법으로 납포하지 않는 데 성공한 부류는 국가의 이익을 희생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킬 수 있었다. 양반과 그 이익을 대변한 집단은 국왕과 개혁자들에 맞서 흔들리지 않는 장벽을 구축했지만, 계속 늘어나는 면세자들은 세습적 양반 귀족의 좁은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김용섭이 1792년(정조 16) 경상도 영천에서 15퍼센트의 가호만이 양역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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