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 - 일본 전범기업과 강제동원의 현장을 찾아서
김호경.권기석.우성규 지음 / 돌베개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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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과 한국의 연구 성과들을 종합해 정리하면 1939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여 동안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연인원 600~700만 명에 달한다. 당시 조선 인구가 2,000여만 명임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전 민족적’ 수난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 병력으로 징발된 조선인이 40여만 명이니 숫자상으로 강제동원 피해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게 노무징용자들이다. 이 중 일본 본토를 비롯해 사할린, 남양군도, 만주, 시베리아 등 국외로 동원된 노무인력이 150만 명 안팎일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450만 명 안팎은 각종 보국대, 봉사대, 근로단 등의 이름으로 한반도 내 작업장에 끌려간 국내동원 피해자다. 국내동원의 경우 1인당 두 세 차례씩 여러 번 차출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연인원이 아닌 실인원수는 200만 명 정도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국내외 강제동원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적게는 10~20만 명, 많게는 50여만 명까지 추산된다. pp.28-29


 1938년 4월 일본 정부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해 ‘전반적 노동 의무제’의 강행실시에 돌입했다.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일본 정부는 의회의 비준 없이 칙령 하나만으로도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고 통제할 권한을 손에 넣었다. 일제는 이어 9월에 노무동원계획을 수립해 1939년의 수요 노동력을 110만 명으로 결정했으며 그 공급원 다섯가지 중 하나로 조선인 노무자를 지목함으로써 중요 산업에 연행할 것을 결정했다. 특별히 노동력 부족을 호소해 온 탄광, 광산 및 토건업에 집단연행을 허락해줬다.

 노무동원은 일본 정부와 기업의 합작품이다. 당국이 법령과 제도로서 동원의 근거를 마련하고 송출을 해주면 기업은 조선인들을 군수물자 생산, 토목공사 등의 각종 작업장으로 끌고 갔다. 기업에는 정부 정책과는 별도로 과도한 이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기업 간에 이를 위한 격렬한 경쟁이 있었다. pp.34-36


 1990년대 일본 재판부는 강제징용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청구권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두 가지 논리로 강제징용자의 소를 기각했다. 하나는 시효 만료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 무책임의 법리'다. 국가 무책임의 법리란, '패전 전 일본에서는 국가의 권력적 작용에 의해 개인에게 손해가 발생해도 민법의 불법행위책임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고, 현재의 국가배상법과 같은 일반적으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법률도 없었기 때문에 그 손해에 대해 국가의 배상책임을 추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순길 씨가 1심에서 진 근거가 바로 국가 무책임의 법리였다. 

 일본 재판부는 그런데 2000년 이후 다른 판결문을 쓴다. 2001년 3월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여운택, 신천수 씨에게 '한일조약에 따라 청구권을 상실했다'며 기각 판결을 내렸다. 그 뒤 한동안 일본에서 한국인 강제 징용자들이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은 대부분 '청구권 소멸' 논리로 기각됐다. 한일협정이 수많은 강제 징용 피해자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에 관한 해석을 전과 다르게 했다. 2000년대 이전에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라고 주장하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 국민에게는 애당초 이러한 클레임을 제기할 수 있는 지위는 없기 때문에, 한국 국민이 이것을 청구해도 우리나라는 이것을 인정할 법적 의무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논리를 일본 재판부가 받아들였다. 그 뒤 일본에서 한국인 강제징용자 소송과 관련해서는 화해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pp.458-460


 개인 청구권에 관한 2000년대 이후 일본 정부의 입장은 '소멸'에 가깝고 '인정하지 않겠다'라는 것이지만 명확한 '소멸'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왜 개인 청구권에 관해 딱 부러지게 '소멸'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일까. 이 배경에는 1956년 일본과 옛 소련이 맺은 공동선언이 있다. 공동선언에서 양국은 "국가, 단체,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서로 포기한다"라고 밝혔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옛 소련에 재산을 두고 온 일본 국민들에게서 소송을 당했다. '소련에 있는 내 재산권을 정부가 소멸시켰으니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각 개인의 청구권까지 포기한 게 아니다"라고 대응한다.

 즉 일본 정부는 소련 정부에 대해 비록 공동선언에 의해 외교보호권은 포기했지만 개인 청구권은 남아 있으니 각 개인이 알아서 청구권을 행사해서 재산을 찾으라는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하면 스스로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대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나타나고 있을까. 근원적 이유는 1965년 한일협정이 엉터리로 맺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청구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해두지 않았다. 김창록 교수는 "협정 및 그 부속문서의 어디에도 '청구권'에 관한 정의 규정이 없다. 그 결과 '청구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협정 및 그 부속문서의 조문만으로는 우리의 문제, 즉 '한국의 외교적 보호권만 소멸된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 개인의 재산, 권리 미치 이익과 청구권까지 소멸된 것인가'에 관한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다른 한편 양국 정부는 한일협정 뒤 후속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협정에 적힌 것처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면 양국은 국내에서 관련법을 제정하고 후속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국민의 청구권을 소멸시키는 법을 만들고 동시에 일제 피해에 관한 보상법을 만들었어야 했다. 일본 정부도 자국민의 권리를 없애는 법을 만들고 한반도에 두고 온 재산을 보상해줬어야 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엉뚱하게도 한국인의 재산에 관한 권리를 소멸하는 국내법(이른바 144호)을 만들었다. 자국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pp.464~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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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청년이여 황국 신민이 되어라 - 식민지 조선, 강제 동원의 역사
정혜경 지음 / 서해문집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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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말 국민징용령이 개정되면서 1944년 2월부터 많은 조선인이 국민 징용에 해당되었다. 국민 징용이란 일본 정부가 이미 등록한 대상자 중에 선정해서 징용 영장을 발령하여 동원하는 형태다. 미리 등록이 되어 있었으므로 뽑아서 보내는 것이 쉬웠다. 그리고 '응징사應徵士'라 해서 노동자를 군인과 동일한 의무를 지닌 것으로 규정했다. 동원에 응하지 않으면 국민징용령 위반으로 검거하여 감옥살이를 시키거나 형무소가 지정하는 작업장에 가서 일해야 했다. 의무로 하는 것이니 임금이나 노동자의 권리 같은 것은 적용되지 않았다. 노동자에 대한 고용 계약도 정부와 노동자가 했다." "동원 체제가 강화되면서 송출되는 인원수도 늘었다. 중간에 탈출하거나 거부하는 것 자체가 어려우니 송출되는 수도 늘어났다. 일본으로 간 인원수만 보면, 1943년에 13만 명 정도였으나 1944년에는 29만 명으로 두 배가 넘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 내에서 동원되어 노역을 한 수는 세 배가 넘었다."(65-6)


"할당받은 인원수를 채우는 방법은 선전과 속임수였다." "일본 당국도 헌병과 경찰의 힘만으로는 통제를 할 수 없으니 '황국의 신민'이 해야 하는 의무라거나 전쟁에서 이기면 풍요로운 부가 뒤따를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하는 일이 강제 노동인지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이를 위해 국가가 직접 동원하는 강제 동원이지만 명칭을 '지원'이니 '모집'이니 하고 붙인 것이다. '볼런티어volunteer'가 공식 명칭이다. 독일에서도 '의용'이나 '지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것이 바로 총동원 체제를 유지했던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운영했던 고도의 동원 전략이다." "그런데 1944년 말부터는 가장 수준 낮은 인간 사냥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더 이상 민중은 '모집'이니 '지원'이니 하는 말에 속지 않고 징용을 회피하는데, 작업장에서는 인력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을 치니 할 수 없이 집집마다 뒤져서 장정들을 끌고 간 것이다."(77-8)


"일본 당국은 남양군도에 동원된 조선인 작업자들의 노동 생산성을 높이고 당국의 통제에 순응하게 하는 데 가장 큰 목적을 두었다. 특히 노동을 시키기 위해 일본어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업무 지시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훈련 결과에 대해 당국은 매우 만족해했다. 일본 측 자료에서도 '조선인들의 능력이 일본인을 능가한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훈련 과정을 거친 조선인들은 한 달에 25일 동안 일했고, 평균 출근율이 98퍼센트에 이를 정도였다. 남녀를 막론하고 어린이를 양육하는 여성까지 모두 열 시간 동안 일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균 기온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열 시간 노동은 살인적이다." "장시간 노동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배고픔도 적잖은 고통이었다. 당시 남양군도는 외부에서 식량을 제공받지 못하고 현지 조달에 의존했다. 일본 본토도 물론 식량난으로 어려웠지만, 전쟁이 깊어지면서 해상이 봉쇄되어 보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05-6)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맨손으로 태면철도를 건설하는 무리한 공사에 동원된 포로와 노동자가 4만 3000명이었다. 이 과정에서 포로 2만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진다. 하루에 평균 100여 명이 사망했고, 심지어 300명이 사망한 날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태면철도를 '죽음의 철도'라 불렀다. 또한 부족한 식량과 영양실조, 과도한 노동은 사망자를 양산했다. 재판 기록을 보면 포로들에게 비타민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도 전쟁 범죄의 하나였다. 포로감시원들이 포로들에게 일을 시키는 과정에서 공정을 맞추기 위한 가혹 행위도 일어났다. 물론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포로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킨 것이다. 그러나 포로들이 얼굴을 맞댄 사람들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인이었으므로 포로들은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자신들을 학대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후 포로 학대의 책임은 일본군의 지시를 받아 포로들에게 직접 일을 시킨 조선인 포로감시원에게 돌아갔다."(129-30)


"조선인이 군인으로 동원된 경우는 지원병과 징병이 있다. 총 동원자는 23만 명인데, 반수가 '조선군'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 배치되고, 그다음이 일본, 세 번째가 중국 전선이다. 동남아시아에 배치된 인원은 소수였다." "조선인 군인들이 후방인 일본에 많이 배치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본은 조선인을 군인으로 동원하긴 했지만 전쟁터에서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보다는 다른 역할을 맡겼다. 조선인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인 군인이 맡은 역할은 전투가 아니었다. 전쟁을 보조하는 일과 위급한 때 총알받이 역할이다." "일본군과 동등한 무기를 지급해서 전선에 투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시기적으로도 당시 연합군의 해상 봉쇄로 군대가 조선에서 동남아시아로 가기는 어려웠다." "1944년 말부터 징병이 시작되지만, 그때는 이미 동남아시아 전선이 무너진 후였다. 동남아시아로는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가 없었다."(142-3)


"화태(남사할린) 탄전은 규모에서는 일본 훗카이도 탄전에 미치지 못하지만, 질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였다. 역청탄이라고 해서 제철소에서 철을 생산할 때 쓰이는 철광석이 대부분이고, 무연탄도 윤이 반질반질 나고 화력이 매우 좋았다. 더구나 화태 전체의 20퍼센트가 탄전일 정도로 탄광 비율이 높았으니 탄광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또한 화태는 목재업과 제지업으로 유명해서 일본과 한반도에서 사용하는 종이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생산된다고 할 정도였다. 일본 최대의 제지 회사인 오지 제지(미쓰이 계열)가 남사할린 전체에서 아홉 개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산에서 나무를 구해 종이를 만들려면 여간 노동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무도 베어야 하지만 이것을 제지 공장으로 운반하고, 석탄을 집어넣고 불을 때서 종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력을 담당한 것이 바로 조선인이다."(158)


"일본 규슈 지방의 후쿠오카 현과 나가사키 현, 혼슈 지방의 이바라키 현과 후쿠시마 현에 위치한 탄광은 모두 작업 환경이 열악했다. 막장 높이가 매우 낮거나 바닷속에 있어서 습하기도 했다. 특히 나가사키 현에 있는 하시마 탄광은 지옥섬으로 유명했다. 노동 조건이 너무 나빠서 일본인들이 지옥섬이라 불렀다. 물론 초기에는 죄수들이 끌려와 일하던 곳이었다. 자연섬 주변을 시멘트로 둘러쌓아 군함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군함섬이라 불리기도 한다. 최근 일본은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하시마에 세계 최초로 아파트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란다." "이곳 탄광은 막장 높이도 낮아서 광부들은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탄을 캤다. 이런 형태의 탄광을 사갱斜坑이라고 한다. 물이 흥건한 막장에서 몸을 눕다시피 기울여서 탄을 캐야 했으니 그 참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165-7)


"훗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지시마가 있다. 일본이 러시아에게서 빼앗은 섬으로 러시아어로는 쿠릴 열도라도 한다." "1855년 러일화친조약을 맺으면서 에토로후 섬 이남을 일본령으로 확정하는 데 합의하고, 1875년에 가라후토-지시마 교환조약으로 쿠릴 열도는 일본의 지시마가 되었다." "(비행장이 많았던) 지시마는 통제된 지역이라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섬에 들어간 조선인들은 어려움이 더 많았다. 더구나 인근 해역으로 연합군이 자주 함대를 이동했기 때문에 공격을 많이 받기도 했다. 지시마는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 본토와 훗카이도를 지키는 외곽 지대로서 역할을 강요받았다. 그래서 희생자도 많았고 가혹 행위도 심했다." "일부기는 하지만 고래잡이로 지시마에서 조업을 하던 조선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사할린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원래 고래는 잡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일본은 전쟁에서 기름을 사용하기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포경을 했다."(250-2)


"훗카이도를 건너면 아오모리 현에 닿는다. 아오모리에서도 철도와 도로, 항만 공사장, 군수공장에서 조선인들이 가혹한 노동을 했다. 아오모리 부근은 아키타 현인데, 금광이 많은 지역이다. 그 조금 아래에 이와테 현이 있다. 이곳도 금광과 군수공장이 많은 곳이다. 이들 현들을 포함해서 도호쿠 지방이라고 한다. 도호쿠 지방은 토질이 척박하고 농산물도 적게 소출되는 곳이어서 이전부터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이곳은 또한 농경근무대라 해서 농사짓는 조선인 군인들이 근무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훗카이도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대단히 춥고 눈이 많은 지역이어서 주로 한반도 남부에 살던 조선인들이 견디기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특히 아키타 현은 조선인들이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고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인 1만 3535명이 동원되었다고 추정된다. 안전장치를 전혀 갖추지 않았으므로 낙반 사고를 비롯한 작업장 사고가 빈번하여 사망자가 많았다."(253-4)


"아오모리 현 아래쪽에 이와테 현이 있다. 철광산이 많아서 철광석을 가공하는 공장이 있었던 곳이다. 광산이 13개소나 있고, 철광석을 제련하는 제철소와 제련소가 세 군데 있었다. 그 밖에 조선인들은 철도 공사장이나 댐 공사장에서도 일했다. 이들 작업장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일본제철주식회사 가마이시 제철소다. 일본제철은 1880년에 이와테 현 가마이시 시市에 제철소를 만들었다. 당시에는 관영이었는데, 1887년에 운영권이 민간에 이양되었다." "이와테 현 아래쪽에는 야마가타와 니가타, 미야자키라는 3개의 현이 있다. 야마가타는 이와테 현과 마찬가지로 광산이 많다. 열 두 곳의 광산과 발전소, 철도 공사장, 비행장 건설 공사장에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미야자키는 관광지로 알려졌지만, 야마가타의 맞은편에 있는 지역으로 야마가타보다 훨씬 많은 작업장에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 "니가타는 북한으로 떠나는 '만경봉호'가 출발했던 항구로 유명하다."(262-5)


"간토 지방은 일본 수도인 도쿄와 수도권인 지바, 가나가와, 수도권에서 조금 확대해 야마나시, 도치기, 군마, 사이타마가 포함된다. 도쿄는 일본의 수도라 조선인들이 동원된 작업장이 없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군수공장과 해운 항만 시설, 비행장 건설과 지하 시설물 건설 공사장에서 일했던 조선인들이 매우 많았다." "군수공장 가운데에는 히타치 제작소 같은 기계 제작 공장도 있지만, 철강업이나 조선소, 제철소, 가스공장 등 규모가 큰 공장이 대부분이다. 총알이나 폭탄 등 무기를 만드는 공장도 있었고, 군인들이 신는 구두나 의복을 만드는 공장도 있었다." "서른 군데나 되는 운수 항만 작업장은 바로 군수공장과 직결된다. 군수공장에서 만든 물품을 전국 각지와 일본이 전쟁을 치르던 지역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쿄는 바로 항구가 연결되니 군수물자를 보내는 출발 지역으로 적당했다. 도쿄에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장이 많다 보니 연합군의 폭격을 많이 받기도 했다."(274-5)


"지바는 간토 대지진으로 유명한 지역이자 조선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학살의 중심지다." "지바 부근 가나가와는 유행가로 잘 알려진 요코하마 항구가 있는 곳이다.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항만 운수 관련 작업장이 많이 있었으나 가장 많은 작업장은 역시 군 공사장이나 군수공장 등이었다." "가나가와 현의 대표적인 작업장은 일본강관주식회사다. 이 회사는 가나가와 현에만 무려 작업장 일곱 곳을 운영하며, 8000명에 가까운 조선 청년들을 노동자로 끌고 갔다." "히타치나 나카지마 등 굴지의 일본 기업들이 당시 사이타마에서 비행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사이타마에는 육군항공사관학교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생산한 비행기를 훈련할 조종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또 다른 간토 지역인 군마 현에 있는 동원 작업장의 특징은 농경근무대라고 해서 전투가 아니라 농사를 짓는 업무를 담당한 부대가 배치된 지역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280-4)


"교토와 나라는 이전에 일본 수도였기 때문에 궁성과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한편으로 전쟁과 관련한 조선소와 군수공장, 지하공장이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유적지에 군수공장과 지하공장이라고 하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 지역에 군수공장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유적지라면 보호해야 하니 공습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 일본은 유적지에 집중적으로 지하 시설을 만들고 군수공장을 가동했던 듯하다. 이런 일본 당국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나고야나 오사카 등 간사이 지역에도 공습이 있었지만, 나라나 교토는 공습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301) "미에 현은 구리 광산으로 유명한 곳으로 이시하라 산업 본사가 있다. 중국 하이난 섬에서 조선 수형자들을 동원해 1000명에 가까운 동포들의 목숨을 앗아간 기업의 하나가 이시하라 산업이다. 미에 현에서 이시하라 산업은 1936년경부터 기슈 광산이라는 구리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다."(304-5)


규슈 지역에는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한 것"이라는 망언으로 유명한 전 일본 수상 아소 다로의 집안이 경영했던 탄광이 있다. "아소 상점은 1910년대부터 조선인을 광부로 채용하기 시작했는데, 1932년에 아소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이 일으킨 파업이 일본 노동 운동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1932년이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데, 임금 차별과 계속되는 사고 등 노동 조건이 열악했기 때문에 파업이 일어났다. 당시 자료를 보면, 아소 탄광에서 조선인의 생활에 대해 '착취 지옥'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정도로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조선인들에게는 열악한 작업장이었다 아소 광업은 전쟁 기간 동안 사세를 더욱 확장해서 이후에는 지역 경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큰 기업이 되었다. 경영자가 정계로도 진출했고, 탄광업이 사양 산업이 된 이후에는 시멘트 산업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도 후쿠오카 중심지인 이즈카 시에서는 '아소 타운'이라 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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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평전 -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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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관료로 내딛은 첫발, 그 신중한 한 걸음


"이호준은 19세기 말 조선 정계의 복잡한 인맥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인물이었다. 세도정권의 막후였던 조대비 세력, 고종의 등극과 함께 막후가 된 대원군, 그리고 임오군란 이후 고종의 막후였던 중전 민씨 세력과 언제든 소통 가능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론 명문가에 양자로 들어간 이완용은 그 집안의 상속자로 교육받았고, 다른 명문가 자제들과의 인맥을 형성하면서 관료로 진출하는 길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2)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양자가 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드는데, 서자는 적자가 될 수 없었으며 성씨가 같은 집안 아이만이 양자가 될 수 있었다. 서얼이 관직에는 나아갈 수 있었지만, 양반가의 관습에서는 여전히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고 있었다. 이호준의 경우도 이미 서자인 이윤용이 있었지만 가문을 상속받을 적자가 필요했고, 같은 우봉 이씨 가문의 이완용을 양자로 들여 그를 적장자로 삼았다."(25)


"고종의 미국에 대한 짝사랑은 대단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종은 1881년 김홍집이 가져온 황쭌센의 『조선책략』을 읽고 조미통상조약의 체결을 결정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부유한 나라가 되었지만, 유럽의 열강과 달리 식민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미국에 대해 당시 중국도 매우 호감을 갖고 있었다. 서양과 최초로 맺은 조약인 조미통상조약은 조선이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조약 중에서 그나마 조선에게 가장 유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관세율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둘러싼 국제 분쟁이 발생하면 미국이 두 나라 사이를 조정하는 거중조정(居中調停) 조항까지 들어 있었다."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면서 (갑신정변에 연루된) 신기선의 국문을 행했던 1887년의 이완용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정계 분위기에 조응하면서도 조용히 미래의 변화를 준비하는 치밀함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36-8)


"이완용이 귀국했을 때에는 위안스카이와 그의 위세를 등에 업은 민영준(민영휘) 등의 민씨 척족이 큰 세력을 형성하여 정사를 좌우하고 있었다.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고종의 외교 정책과 차관 도입 시도가 좌절되었으며, 내무부를 중심으로 근대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점차 빛을 잃어갔다. 고종의 결정을 믿고 주미대리공사직을 수행했던 이완용의 정치적 입지는 고종의 정책 실패와 함께 줄어들어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이완용에게 내부 참의직을 제수한 것은 고종의 신임이 이완용에게 쏠리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조치였다. 더욱이 청과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주미대리공사직을 수행한 이완용에 대한 고종의 신임은 청의 세력을 등에 업은 정치 세력을 자극할 만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완용은 사직상소를 통해 "이러한 총애가 미치자 사람들이 오히려 놀라는데, 신의 황송하고 두려운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52-3)


"그는 사직상소가 아니면 병을 핑계로 임명받은 자리에 불참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정계와 거리를 두고자 했다. 반면에 왕과 세자를 가까이할 수 있는 시강원과 승정원의 관직은 계속 유지했다." "이완용보다 7살이 어린 윤치호는 조선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그 개혁은 급격한 정치 구조의 변동을 초래하지 않으면서 왕을 중심으로 서서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종이 추진하던 개혁은 청의 간섭으로 거의 수포로 돌아갔고, 국가의 실권을 가진 내무부는 친청세력과 민씨 척족이 장악한 채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었다. 변화의 새로운 기운이 없는 정계에서 이완용이 자신의 입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분란이 생길 수 있는 관직을 마다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1893년 가을, 생모 신씨가 사망했다. 이완용은 3년간 꾸준히 지켰던 시강원 겸교사서직을 사직하고 생모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낙향했다."(55-7)


2장 충성스러운 신하에서 기민한 정치인으로


"1차 갑오내각 때는 대원군과 민씨 척족의 첨예한 대립이 부각되었고, 왕이 배제된 상황에서 새로운 내각이 어떤 방향으로 재편될지 매우 불투명한 상태였다. 이때 이완용은 조선을 떠나 있어야 하는 전권공사직을 마다한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반면에 2차 갑오내각은 대원군과 민씨 척족 세력이 배제된 대신 친일적 색채를 띠면서 관료 중심의 개혁을 이끌려 했던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의 세력과 일본 망명에서 돌아온 박영효 등의 갑신파가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조선 정부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기 위해 친일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는 한편 앞으로 예상되는 외교적 마찰을 줄이기 위해 러시아, 미국 등 구미 열강의 외교관들과 소통 가능한 인사들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이때 주목받은 세력이 친미 성향의 정동파였다. 이완용의 입각은 조선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노우에의 정략적 필요와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65)


"3차 갑오내각의 초기인 1895년 6월 초에는 아직 이들이 적극적으로 일본을 배척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노우에가 조선을 떠난 후 임시 대리공사였던 스기무라 후카시가 6월 16일 일본 외무성에 보낸 보고에 따르면, 정동파는 각국과 골고루 교제하여 각국 공동의 보조에 의해 어느 한 나라의 강제를 피하려 한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6월 25일 일본공사관 서기관 히오키 마쓰는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서광범, 이완용, 이윤용을 지목해 이들은 일본을 배척하는 기색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완용이 열흘 사이에 일본을 배척하는 정치색을 분명히 드러낸 것은 중전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중전은 6월 7일 이노우에 공사가 일본으로 귀국하자 정동파 인사들을 통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접촉했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은 고종과 중전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고, 일본을 배척하고 고종을 중심으로 개혁을 단행할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69)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벌어진 후, "미국공사관에 기거하던 이완용은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귀국한 이범진과 함께 다시 고종을 빼내오는 계획을 세웠다." "고종을 자주 만났던 미국 선교사들이 이완용과 고종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고종을 모시던 상궁 엄씨가 계획에 동참했다. 궁궐이 습격당하고 중전이 처참하게 죽자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더구나 임오군란 때처럼 권력 행사에서 배제된 고종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빠져나왔다." "이완용은 이범진, 베베르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과 세자를 맞이했다. 이완용과 고종은 4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아관파천이 춘생문 사건처럼 사전에 발각되었다면 이완용은 망명을 하거나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완용 역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이 일을 감행했고 성공시켰다."(84-5)


# 춘생문 사건 : 1895년 11월 28일,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는 시도가 좌절된 사건


3장 정계의 중심에서 세상과 만나다


"이범진의 축출 이후 갑오개혁에 따른 사회적 혼선이 빚어지자 양반을 비롯한 보수 기득권 세력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신식'에 대한 불만 여론은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고종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여론에 부응하며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정치 세력을 등용하여 축소된 왕권을 확대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범진 퇴진 이후 정계를 주도했던 이완용에게는 새로운 갈등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왕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 체제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왕실과 정부의 분리를 통해 왕의 권력 행사를 일정하게 제약하고 내각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왕과 내각이 조화를 이루면서 통치권의 일부인 행정권을 내각이 어느 정도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다. 고종의 입장에서 보면, 왕실과 정부의 분리라는 갑오개혁의 원칙이 관철될 경우 통치권의 일부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의정부 제도를 부활시켜 행정 권력을 다시 자신의 통치권 내로 편입시키고자 했다."(102-4)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1년 동안 이완용은 고종을 등에 업고 세력을 얻은 보수 세력에 맞서 정동파의 입지를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정동파가 보수 세력의 반격에 맞서는 동안 고종과 러시아공사 사이에서 통역을 담당했던 김홍륙은 이용익 등과 결탁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한편 1896년 10월 21일, 니콜라이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이 러시아 차관을 얻는 데 실패한 채 러시아 군사교관 14명만을 데리고 귀국했다. 그는 고종에게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조선을 도울 의사가 없으므로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필요가 없다며 환궁을 요청했다. 이완용은 기대했던 러시아의 원조가 성사되지 않자 실망하는 한편 김홍륙 등을 후원하면서 조선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려는 러시아공사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한다. 이에 그는 일본공사관원과 친분이 있는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를 통해 은밀히 일본과의 제휴를 도모했다."(118-9)


"김홍륙 등의 정치 공세로 인해 민영환, 박정양이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이완용의 고종 환궁 계획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고종의 '총신'에 의해 그는 점차 정계에서 밀려난다. 그러나 정동파는 아직 고종에게 유용한 세력이었다. 김홍륙 등의 득세로 실권은 상실했지만, 미국공사관과 소통할 수 있는 이완용 등을 내각에서 완전히 밀어낼 순 없었다. 또한 보수 세력과 정동파 세력을 서로 견제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해가던 고종은 김홍륙 등의 독주를 견제할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경운궁 수리가 마무리되자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할 명분이 없어진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마침내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고종의 환궁이 실현되었지만, 이완용은 환궁을 주도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이 계획했던 미국인 고문을 통한 내정 개혁 역시 실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정계 개편의 주도권은 환궁으로 왕의 건재를 과시할 수 있었던 고종의 손에 넘어갔다."(124-5)


"1898년 1월, 러시아는 조선에서 부동항을 얻기 위해 목포와 진남포 지역의 토지 매입에 적극 나서는 한편 부산 절영도를 석탄고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조차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군함을 부산에 입항시킨 후 무력시위를 벌였다. 또한 김홍륙, 민종묵, 이용익 등의 친러세력은 한러은행 설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더욱 커져가자 독립협회는 윤치호와 서재필이 주축이 되어 러시아의 국권 침탈을 비판하는 사회·정치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한 다음 2월 13일 토론회를 개최하여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기로 건의한다." 1898년 2월 27일, 양부의 병을 핑계로 서울에 남아 있던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명실상부하게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기 시작한다."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공감대를 형성해가자 러시아공사 스페이어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킬 용의가 있다면서)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137-9)


"갑오개혁 이전의 정계에서 몇 안 되는 개화 성향의 인물로 평가받았던 이완용은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자신보다 출신 성분이 낮은 사람들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 했다. 이들은 정계에 안주하지 않고 인민을 향해 정치적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가 겸 언론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양반 관료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정계를 주도해왔던 이완용은 이러한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을미사변 전후에 반일을 표명하다가 아관파천 이후 반러로 입장을 바꾸었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그가 변신의 귀재이고, 그래서 을사조약 체결 과정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간주해왔다. 그러나 고종의 통치권을 회복하여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이완용에게 그것은 변신이 아니었다. 더구나 고종의 신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권력 구조 속에서 이완용은 일관되게 군주를 보필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갔다."(143-5)


4장 정계 밖에서 설움을 겪다


"1894년과 1895년에 이완용이 보여준 고종에 대한 충성심과 여전히 고종의 부름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찾으려는 그의 행동은 기존의 권력 구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위치 지우려는 것이었다. 갑오개혁 시기에 그가 추진한 행정제도와 교육제도의 개혁은 기존 체제 안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전라북도 관찰사로서 보여준 관료적 합리성 역시 기존 지방 행정 체제 안에서 허용 가능한 것이었다. 이완용은 갑오·을미개혁을 거치면서, 그리고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기존의 권력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규정하는 관료로서의 태도를 벗어버린 적은 없었다. 그는 개량적 개혁을 추진하는 정치 관료였다. 그리고 다른 관료에 비해 신중한 성품의 인물로, 유교적 합리성을 교육받았고 근대적 합리성을 체득한 이였다. 그는 체제에 편입된 양반 관료로서 자신의 지위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정세의 흐름과 상황에 맞춰 행동반경을 결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171-2)


"이완용이 학부대신으로 다시 내각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공사 하야시의 추천 때문이었다. 1905년 초에 일진회가 친일 집회를 열었을 때만 해도 이완용은 친러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야시 공사의 추천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 시기에 일본공사는 되도록 친일 인사를 입각시켜 고종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기 때문에 반일 성향의 인물들은 대부분 내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러적 이미지를 가진 이완용이 학부대신에 임명된 것은 매우 의외의 일이었다. 그러나 1902년 유길준의 쿠데타 사건으로 이완용과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던 이하영이 일본공사관을 통해 자신과 이완용 형제의 구원을 요청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이완용은 이하영을 통해 일본공사와 연계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대한제국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정책 기조로 인해 고종과 이완용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알렌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177-9)


"1905년 9월 5일,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하는 조항이 들어 있는 포츠머스조약에 러시아가 합의하면서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또한 9월 27일, 영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한다는 내용의 제2차 영일동맹을 공개했다. 이로써 일본을 견제할 현실적 가능성도 사라졌다. 갑오·을미년의 위기를 아관파천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기대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이때 고종은 측근 세력을 동원하여 미국 등에 지원을 호소할 방안을 고심하고 있었지만, 내각원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고종의 계획에 함께하지 않았다. 고종 측근들은 내각 대신을 친일 세력으로 몰아가고 있었지만, 내각 대신들은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할 가능성이 사라진 이상 고종의 계획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완용 역시 아관파천 때와 같이 고종을 위해 어떠한 계획도 도모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았던 가능성이 불가능성으로 바뀐 이상 국제 정세는 10년 전처럼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80-1)


5장 애국과 매국의 갈림길에서


1905년 11월 15일, 을사조약 체결을 놓고 이토의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은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토가 고종의 말에 찬성한 것은 당시 정부의 정책 결정 구조가 의정부에서 각 대신들의 사안을 의논한 후 고종에게 올리면 고종이 최종적으로 가부를 결정하는 형식이었으므로 이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신들이 모두 반대 의견을 표명하더라도 고종이 찬성할 권한은 갖고 있었다. 이토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이완용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이완용은 "아래에서 대신들이 막아서기 어렵다"고 말함으로써 고종이 결정권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던 것이다. 이날 신하들이 일본공사에게 거절 의사를 전달하기로 대책을 마련한 것은 고종에게 조약 거부의 구실을 제공하는 데 불과했다. 즉 고종이 '신하들이 모두 반대하니 지금 바로 결정하기 어렵다'고 말함으로써 조약 체결을 미루고, 영국·미국·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일 시간을 벌어보자는 것이었다."(195)


"1905년 11월 17일, 소위 '을사5적'으로 불리는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5명의 대신이 '가(可)'에 서명하여 체결된 을사조약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국내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에서 동양 평화의 화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배신했고, 내각 대신이 임금과 백성을 저버리며 일신의 영화만을 추구했다고 비난했다. 장지연은 을사조약 체결의 책임을 이토와 내각 대신들에게 떠넘긴 채 대한제국 권력의 핵심인 고종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한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이 글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각지의 유생들은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무효화하라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고, 도끼를 등에 메고 대궐 앞에 엎드려 읍소하기 시작했다. 민영환 역시 유생들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서 읍소했는데, 일본 헌병들이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자 울분을 참지 못한 채 결국 자결한다."(198-9)


"대부분의 유생들이 최고 결정권자였던 고종을 차마 거론하지 못한 채 모든 책임을 을사5적에게 떠넘기고 있었지만, 최익현은 고종의 허약과 무능을 정면으로 엄중하게 꾸짖었다. 을사5적을 처단하라는 유생들의 상소에 대해 '충심을 알고 있다'라는 비답을 내려왔던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에 대해서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임오군란과 갑오농민전쟁에서 보여준 백성들의 힘과 분노를 두려워했던 지배 엘리트들은 백성들에게 나라의 주권을 일부 넘겨주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왕과 인민 사이에서 양자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 엘리트 중심의 정당을 구상했다. 입헌군주제와 지배 엘리트가 장악한 정당의 수립이 그들이 생각하는 정체였다. 이러한 구상은 기존 체제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가운데 왕권을 조금 제한하고, 백성들의 요구를 조금 수용하는 절충적인 형태였다. 따라서 이들은 왕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고, 또한 부정해서도 안 되었다."(201-3)


"이완용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면 대한제국이 국가적 위기에 봉착할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일본 정부의 강력한 관철 의지를 확인한 후 고종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거절 의사를 표명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판단 속에서 조약문을 수정하여 되도록 왕권 행사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그래서 통감의 권한을 외교에 한정시킴으로써 고종의 통치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이완용은 현실 상황에 맞춰 자신의 입지를 정하는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그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향으로 결과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는 매우 실용적인 인물이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울분과 분노에 치를 떨기보다는, 또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상황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합리성과 실용성을 갖춘 관료였다."(206-7)


"이완용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었지만, 합리성과 실용주의로 포장된 이완용의 주장은 조금씩 대한제국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계몽운동 단체와 근대 문명을 받아들인 유학파 지식인들은 을사조약에서 명시했던 "한국이 부강을 인할 시"까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에 근거하여 부강을 위한 실력 양성의 기치를 더욱 높이 내걸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스웨덴-노르웨이 제국 등 실질적으로는 식민지에 가깝지만 형식적으로는 국가 연방의 형태로 통합된 나라들, 그리고 독일과 미국 등의 연방 국가들을 소개하면서, 보호국은 식민지와 다르며 대한제국이 부강해진다면 다시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저항과 투쟁이 사회 혼란을 가중시키고 일본의 강압을 더 불러온다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은 '실력 양성'만이 독립 주권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209-10)


6장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친일로 나아가다


"고종의 양위와 정미7조약 체결로 이토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얻은 이완용은 자신의 세력과 친인척을 정계에 등용하는 한편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계몽 단체와 일진회를 무력화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일진회는 6월 10일 일진회 특별평의원회를 열어 총리대신 이완용의 사직 권고안을 의결함으로써 본격적인 이완용 반대운동을 벌여 나간다. 송병준은 일진회원들을 동원해 여론을 이끌어내고, 일본 군부 세력을 등에 업고 이완용 내각을 전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당시에 일본 정부 내에서는 대한제국 문제를 놓고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커져가고 있었다.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갔던 군부 세력은 대한제국에 대한 즉각적인 군사 점령을 주장한 반면, 이토는 주변 열강, 특히 러시아의 눈치를 보면서 대한제국을 점진적으로 점령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군국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이토의 정치적 입지는 축소되어가고 있었다."(229-31)


"1909년 7월 10일 이토의 귀국 연회가 끝나자 소네 통감은 이완용을 불러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게 위탁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완전히 보호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기유각서'의 체결을 요구했다." "이완용은 이미 일본의 지배에 대해 어떠한 회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일본 차관으로 대한제국이 개발되고 있었고, 강력한 일본의 무력이 대한제국을 전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순종의 순행 때 행했던, 일본의 지도를 받아 실력을 양성하는 길만이 대한제국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완용의 연설은 대중을 회유하기 위한 연설만이 아니었다. 이는 자신의 행동과 역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최면이기도 했다. 사법권의 위탁으로 대한제국 언론은 이완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인 사법권 이양은 통치권의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236-7)


"주권의 핵심 내용이었던 통치권을 이양하되, 국호와 왕실을 그대로 두는 형태의 병합은 1905년 이후 대한제국 지식인들이 수용한 국가연합 이론에서도 언급되었던 형태였다." "국호와 황실의 존재는 대한제국의 멸망이란 충격을 완화시키는 방법이었다." "데라우치는 이완용의 제안 중 국호 문제는 양보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독립 제국임을 선포했던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존속시킬 경우, 일본 황족에 포섭된 대한제국 황실의 지위 문제가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한국 또는 대한제국이 국제법상 독립국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청의 속국인 왕조 국가란 이미지가 있는 조선이란 국호를 고집했던 것 같다. 데라우치는 대한제국 국호 사용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왕의 칭호 존속 요구를 수용했다. 데라우치와의 협상을 마친 이완용은 8월 22일 순종을 알현하고 한일병햡조약에 대한 전권 위임장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통감부에 가서 데라우치와 회견하고 조약에 조인했다."(253)


"순종은 이왕(李王)이란 호칭에 불만을 표했다. 병합 조칙이 발표되기 전날인 8월 28일, 순종은 궁내부대신 민병석을 데라우치 통감에게 보내 일본 측이 제시한 '왕'을 '대왕'으로 정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순종이 끝까지 황실의 지위 문제를 고집했던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협상 전 이완용과 만났을 때 고종과 순종이 끝까지 관철시키려 했던 것은 황실의 지위 문제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더구나 데라우치와의 협상에서 이완용이 관철하려 했던 것이 왕호, 즉 황제와 황실에 대한 지위 문제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 보인다. 결과적으로 고종과 순종, 그리고 황실의 지위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8월 29일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한국을 제국에 병합하는 건'이 선포되고, 고종과 순종을 각각 덕수궁 이태왕과 창덕궁 이왕으로 책봉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자국의 황실 전범에 없는 '왕공족(王公族)'이란 제도를 만들었고, 대한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개칭하는 칙령이 선포되었다."(254-5)


7장 권력의 정점에서 지탄의 절정으로


# 1926년 2월 11일 이완용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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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혁명의 기록 - 동학농민전쟁 120년, 녹두꽃 피다
이이화 지음 / 생각정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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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이 행동으로 나선 기록은 1892년 11월 동학교도들이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며 일어난 삼례 집회 때부터 나타난다. 교도들의 탄압을 중지하라는 소장을 낼 때 이를 들고 갈 사람이 없었다. 목숨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한 일이었다. 이때 전봉준이 선뜻 나선 것이다. 그는 전라감사에게 항의의 글을 내기도 하고 창의문倡義文(봉기할 것을 호소하는 글)을 직접 써서 돌리기도 했다. 또 동학교단에서 최시형의 허락을 받아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대궐 앞에 엎드려 소문을 올리는 절차)를 올릴 직전에 다시 삼례에서 집회를 열고 전라감사에게 글을 보냈다. 이때도 전봉준이 활동을 전개했다." "여기서는 교조 신원만이 아니라 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한다는 의지도 분명하게 드러냈다." "전봉준은 이 무렵부터 척양척왜를 분명하게 표방했다. 이는 흥선대원군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인지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이 동지적 관계를 맺었다는 설도 널리 퍼져 있다."(49-50)


전봉군의 주도로 농민군이 거세게 일어나자 "1894년 2월 말경 신임 군수 박원명이 고부로 들어왔다. 박원명은 농민군 지도자들을 불러모아놓고 위로하면서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약속하고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잔치를 풍성하게 벌였다. 농민군들은 현저히 동요하는 빛을 보이며 해산을 서둘렀다." "해산의 원인은 첫째, 마을 단위의 집강으로 표현되는 토호와 부자들이 지도부에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여러모로 수탈을 당한 분풀이로 민요를 일으켰으나 지경 바깥으로 진출해 역적의 누명을 쓰는 것을 꺼려 적당하게 타협하려 들었다. 전봉준을 잡아 보내려 한 일부 무리도 이들 부류였을 것이다. 둘째, 하부 구조는 영세농과 머슴들이었고 무뢰배와 발피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전봉준은 공초에서 "동학의 무리는 적고 원민怨民(원한을 가진 백성)이 많았다"고 했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분을 풀고 곡식을 나누어 받는 것 따위 재미를 보다가 토호와 부자들이 해산하려 하자 덩달아 흩어졌던 것이다."(83-4)


"전봉준은 일찍이 그의 부하들에게 "나는 신령스런 부적이 있어 몸을 보호해준다. 비록 대포 연기가 자욱한 속이나 총알이 비가 오듯 하는 속에서도 다치지 않는다. 너희들 보아라"라고 말하고는 몰래 탄환 수십 개를 소매 속에 넣어두고 친하고 믿을 만한 사람 십여 명에게 비밀히 알려준 뒤 그들로 하여금 에워싸고 총을 쏘게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포였다." "땅에 떨어진 탄환을 본 무리들은 "장군은 신령스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본 부하들은 그 부적을 다투어 붙이고 총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다. 또 전봉준은 어느 때 밤을 이용해 총잡이와 짜고 미리 손아귀에 총탄을 숨겼다가 총수가 헛방을 놓으면 전봉준이 총알을 재빨리 잡는 시늉을 하고 나서 손을 펴 총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이를 바라보던 농민군들은 "우리 대장만 따라다니면 어떤 양총을 맞아도 죽지 않아"라고 떠들었다. 농민군들은 대장의 신통력을 믿어 더욱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113-4)


박원명의 후임으로 온 이용태는 포악한 인물로, 민요 두목들을 붙잡는다는 핑계로 각종 행악을 부렸다. 이를 참지 못하고 재봉기한 전봉준의 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점령한 후 세력을 늘려나갔다. 농민군은 황토재에서 승리한 뒤 정읍을 거쳐 고창·무장·영광으로 진출한 후, 마침내 전주성마저 함락했다. 그러나 전주성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전주성으로 장위영군을 이끌고 와 대포를 쏘며 포위망을 조여오던 홍계훈은 "항복 권고를 연달아 성안으로 날려보냈고 농민군은 승전의 빌미를 찾을 수 없었다. 더욱이 전봉준은 몇 차례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머리와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5월 7일, (농민군의 시정사항을 조정에 건의하기로 하면서) 화해 약속은 성립되었다. 이는 휴전의 의미와는 다르다. 전봉준과 홍계훈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화약을 성립한 것이 아니다.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조건을 제시하다가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판결선언서〉대로 화약이 아니라 합의라고 하는 것이 맞다."(121-2)


"농민군은 왜 '귀화'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화해 약속을 맺었을가? 첫째, (동학) 북접의 호응이 없었던 것이요 둘째, 외국 군대의 개입이 두려웠으며 셋째, 농민군의 내부 동요가 있었고 넷째, 양곡과 생필품의 결핍이 있었던 탓이다. 실제로 북접은 남접의 행동이 과격하다고 비난했으며 북접의 지시를 받는 호남의 동학 세력은 자기들의 고장에서 귀추를 엿보고 있었다. 게다가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원세개가 보낸 청군은 전주에 와서 농민군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들은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한편 농민군은 농군이어서 농사철을 맞아 들떠 있었다. 논에 물을 대야 하는데, 볍씨를 뿌려야 하는데, 모내기 날이 다가오는데 따위를 생각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농심農心이 일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전주성이 완전히 포위되어 시장도 열리지 않고 물품의 조달이 단절되어 당장 밥을 굶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124-5)


"그러면 관군 측은 왜 화전 약속을 급하게 맺으려 했던가? 첫째, 조정에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자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구실로 서울로 들어왔으며 둘째, 일본군이 횡행하는 서울과 인천에는 수비병이 거의 없어 수도 방위가 위태했고 셋째, 홍계훈이 지휘하는 관군의 사기가 거의 땅에 떨어진 상태였으며 넷째, 농민군의 지원군이 언제 배후를 공격해올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홍계훈 개인의 공명심이 작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홍계훈은 적당하게 화전을 맺어 농민군에 전주성을 내준 책임에서 벗어나 자신이 승리의 장수임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홍계훈은 농민군이 전주에서 썰물 빠지듯 물러나자 엉뚱하게도 "비적을 소탕한다"고 외치면서 호기를 부렸다." "(곧이어 홍계훈도 서울로 상경하고) 농민군 지도자들은 각기 지방에 흩어져 집강소 조직을 정비했다. 이제 새 국면은 서울과 인천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새롭게 전개되고 있었다."(125-6)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전봉준은 재봉기를 준비하는 장소를 삼례로 삼고 9월부터 직속부대를 이끌고 양반다리 언저리에 머물렀다. 그는 집강소 활동 기간에 양곡과 무기를 확보하고 말과 나귀를 모으며 군수전을 마련하는 등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재봉기를 서두르면서 여러 장령들에게 협조를 구하기도 하고 설득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군수전·군수미를 확보하기 위해 부호들에게 일종의 어음이라 할 표지標紙(액수를 쓴 종이)를 돌렸으며 집강소 활동 기간에 농민군에게서 거둔 무기를 삼례로 돌리게 했다. 또 유별나게 호남의 북접 교도들에게는 군량미와 말 먹일 꼴을 버겁게 배당해 노골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북접을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북접과 남접의 갈등이 깊어지자 최시형은) 교단의 지도자들을 불러 상의한 끝에 대세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정부에서는 남·북접의 교도들을 가리지 않고 한 통속으로 보아 탄압을 가했고 교단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려 포교들을 풀어놓은 처지였다."(157-9)


# 최시형의 '대동원령'에 따라 북접 지도자들은 벌남기伐南旗(남접을 징벌하라는 기)를 찢어 버리고 연합전선을 구축


"10월 25일 벌어진 능치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왼쪽에서 진격해왔고 관군이 반대편에서 협공을 했다. 농민군은 중간에서 좌우를 향해 맞받아 대응했다. 전투는 한낮까지 계속되었다. 농민군은 협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구덩이 속에서 인해전술로 적을 공략하려 했다. 잎이 떨어진 나목을 차폐물로 의지해 몸을 숨기기가 마땅치 않았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효포의 들판에서 진용과 장비를 수습하고 있을 때 관군이 다시 공격해왔다. 농민군은 경천점으로 후퇴했으나 관군이 다시 추격해와서 농민군들은 논산으로 물러났다. 능치의 골짜기와 효포의 길바닥과 하고개의 언덕이 시체로 쌓이고 피로 물들었다." "세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농민군은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다. 농민군은 전투에 지치고 추위를 견디다 못해 연달아 달아났다. 특히 전투 경험이 적은 북접 농민군은 몇 차례 전투를 치르고 난 뒤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1차 공주 공방전의 대체적인 상황이다."(182-3)


"11월 9일 정오가 되기 직전, 모리오 대위는 기다리던 작전 개시의 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일본군은 봉우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포를 연달아 쏘아댔다. 농민군도 대응해 본격적으로 전투를 개시했다. 한꺼번에 밀려 올라가다가 대포를 쏘면 물러나고 잠시 대포 쏘기를 멈추면 밀려왔다. 제1대가 무너지면 제2대, 제3대가 꼬리를 이었다. 이날 오후까지 전진과 후퇴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농민군의 시체가 언덕과 고개 언저리에 쌓였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눈을 흥건하게 적셨다." "두 차례 전투를 벌이고 나서 점검해보니 1만여 명이던 군사가 3천여 명만 남았고 다시 두 차례 접전을 한 뒤 점검해보니 500여 명만이 남았다." "이런 형편에 놓여 있었으니 전봉준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우금재의 마지막 보루를 버리고 남은 농민군을 이끌고 달아났다." "이제 공주를 포위했던 농민군은 사라졌다. 내리 4일 동안 전개된 이 전투를 2차 공주 전투라 한다."(188-9)


"전봉준이 지휘하는 주력 농민군은 원평과 태인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해산했다. 전봉준은 자신이 어릴 때 자라고 돌아다닌 원평과 태안을 최후의 격전지로 삼았다. 그런 연고로 하여 수백 명 정도 남은 농민군을 다시 수천 명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농민군으로는 한풀 꺾인 사기를 올릴 수 없었으며 일본군의 성능 좋은 신무기를 극복할 수도 없었다. 전봉준은 공초供招(죄인 심문 기록)에서 이때의 정황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했다. 전봉준은 금구 등지에서 다시 군사를 모았는데 그 수효는 많았으나 기율이 없어서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아주 어렵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일본군이 계속 추격해와서 그들이 맞서 싸울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어서 두 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태인 전투를 치른 뒤 대장으로서 정식으로 농민군의 해산을 침통한 심정으로 명령했다."(204)


"전봉준의 죄목은 《대전회통大典會通》에 규정된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부대시참'이었다. 꽤나 긴 죄명이었다. 이를 풀이해보면, 군복 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서 관아에 대항해 변란을 만든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하는 죄다. 그리하여 전봉준과 같은 사형언도를 받은 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한 등 네 명은 판결이 난 날 곧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들이 교수형에 처해진 것은 갑오개혁 때 개정된 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종전에는 역적죄에 해당하는 사형수들은 모조리 참형을 가해 목을 잘라 관아의 문 앞에 걸어두거나 여러 사람들이 보도록 조리를 돌렸다." "개화정부는 형법을 개정해 "모든 재판과 소송은 2심으로 한다"는 조항을 두고 4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포했다. 이들 다섯 명에게는 그 시행을 불과 2일 앞두고 사형을 집행했다. 그러니까 사형 선고와 사형 집행을 전격적으로 단행해 2심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속전속결로 들뜬 민심을 가라앉히려 했던 것이다."(235-6)


"전봉준이 역적으로 처형을 당하고 난 뒤 고창의 당촌을 비롯해 주변의 전씨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관군들은 전씨 마을을 덮쳐 재산을 약탈하거나 불태웠고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전씨 집성촌을 폐허가 되었으며 전씨들을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실의 언덕배기에 '녹두장군'의 묘소라 전해지는 초라한 무덤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끔 제물을 차려놓고 녹두장군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1990년대에 일 벌이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이 무덤을 발굴해보니 유물이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가묘假墓(빈 무덤)를 조성할 때는 고인의 머리카락이나 쓰던 물건 따위 유물을 껴묻는 경우가 있으나 전봉준의 가묘에는 껴묻은 물건조차 나오지 않았다. 전봉준의 묘소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가묘를 만들어서 추모제를 지냈던 것이다. 「파랑새」를 목 놓아 부르던 민중이 전봉준이 살던 마을의 언덕에 가묘를 조성해 모셨으니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2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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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박맹수 외 지음, 한혜인 옮김 / 모시는사람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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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사상의 특징

1. 시천주侍天主 : 누구나 자신 안에 ‘천주’(만물의 생명의 근원)를 모실 수 있다는 만민평등 사상

2. 보국안민輔國安民 : “국가의 악정을 고쳐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민본주의적 사상

3. 후천개벽後天開闢 : 현세가 종말을 맞이하고 가까운 미래에 이상적인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

4. 유무상자有無相資 :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는 공동체 정신


# 동학조직의 구성

1. 대도소大都所 : 2대 교주 최시형이 1893년 충청도 보은에 설치한 총본부

2. 포包(대접주) : 몇 개의 접을 묶어 만들어진 중간 조직

3. 접接(접주) : 35-70호 정도의 규모로 지역에 만들어진 기초 조직


#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1. 최초의 무장봉기 : 1894년 2월 15일 전봉준 등이 중심이 되어 고부의 악덕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항의하면서 일어난 봉기

2. 혁명을 목표로 한 봉기: 전봉준과 손화중·김개남 등의 대접주들이 뜻을 모아 전면 봉기하여 황토재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5월 10일)하고 전주마저 점령(5월 31일). 동학농민군 진압을 구실로 청나라와 일본군이 조선 출병.

3. 전주화약(全州和約) :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농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도소(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을 진행하기로 합의

4. 항일투쟁 : 일본군의 경복궁점령 소식이 전해지면서 10월 이후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2차 봉기. 두 차례의 우금티 전투(11월 10-12일, 12월 4-7일)에서 일본군에게 대패

5. 우금티전투 이후 : 일본군의 포위섬멸작전


후비 제19대대 3개 중대 중 일본군 서로 부대인 제2중대는 남·북접 합동 농민군의 북상을 논산평야 북부에 있는 금강 강변의 요지인 공주성에 들어가서 기다렸습니다. 11월 20일에 농민군이 북상해서 동학농민전쟁 최대의 격전이었던 공주전투가 두 차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 후비 부대는 스나이더 소총이라는 라이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이플총은 탄구를 회전시키도록 총 내부에 나선형 홈이 새겨진 총으로, 당시의 소총과는 격이 다른 사정거리와 명중률, 살상력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 보병전에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 최대의 격전이 되었던 이 공주전투가 전장의 최후로 서술되어 있는 우금티전투입니다. (···)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은 100명 단위로 병력이 훨씬 적은 일본군에게 개개 전투에서는 압도적으로 격파당하였습니다. 죽창과 화승총을 가진 농민군과 라이플총을 가진 훈련된 근대 보병대와의 싸움은 농민군 200명을 일본군 1명이 대적할 정도로 엄청난 전력 차가 있었던 것입니다.(94-6)


# 후비병 : 현역과 예비역 다음으로 병역에 임한 27-32세 가량의 최고령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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