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현대사총서 27
김득중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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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는 여순사건이라는 기념비적이고 유혈적인 사건을 통해 탄생했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공산주의자는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 비인간, 악마로 간주되었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 공산주의자는 이제 '빨갱이'로 불리어졌다. 공산주의자라는 낱말이 정치적 지향을 일컫는 것에 반하여,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를 비인간적 존재로 멸시하는 용어였다. 그들은 같은 민족이 아니고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동정조차 필요 없었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빨갱이'는 인간의 기본적 위엄과 권리를 박탈당한 '죽여도 되는' 존재, '죽여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에는 '빨갱이'를 죽이는 것 자체가 애국하는 일이고 민족을 위하는 일이며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일로 생각되었다. '공산주의자'로부터 '빨갱이'로의 전환, 빨갱이를 비인간적인 악마로 형상화한 계기는 다름 아닌 여순사건이었다."(46-7)


제1부 여순사건의 발발과 대중봉기로의 전화


# 14연대 남로당 세포들이 봉기를 결정한 요인

1. 제주도 파병 명령에 대한 거부감

2. 숙군에 대한 두려움


"봉기 주동자는 (지창수 상사를 중심으로) 불과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 소수이었는데도 2천여 명에 가까운 연대 병력이 일순간에 봉기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먼저 지창수의 연설이 경찰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응징해야 한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경찰에 대한 원한이 깊이 사무쳐 있던 14연대 장병들에게 지창수의 연설은 직접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었고, 제주도 인민을 진압하러 가는 14연대 출동을 동족상잔이라며 민족 감정에 호소했다. 북한의 인민군이 남진하고 있고, 14연대는 인민군과 같이 행동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른 점이었지만 이것도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는 선동적 내용이었다. 두 번째로 14연대 봉기가 일어난 직후 많은 장교가 사살되었다는 점이 하사관이 주도한 봉기를 성공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연대장을 비롯한 살아남은 14연대 지휘장교들은 봉기 소식을 듣고도 이를 제지할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78-9)


"연대 대부분의 병사들은 "대한민국 국방군은 침공하는 외국 군대에 싸우는 것이 본래의 사명이지, 동족 농민과 청년·부녀자들에게 총을 쏘고, 죽이기 위해 국방군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 출병을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간주했다. 여수봉기 뒤에 탈출한 박승훈 연대장조차 기자회견에서 14연대 병사들 대부분은 제주도 출병을 희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제주도를 전남과 같은 지역권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서도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성명성에는 쌀 수집이나 토지개혁 같은 사회경제적 요구는 나타나고 있지 않은 반면, 강력한 반미·반제국주의 의식을 표출하면서 동족상잔의 전쟁에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병사위원회의 성명서만으로 볼 때, 14연대 군인들의 봉기는 전반적인 사회개혁을 염두에 둔 것이라기보다는 당면한 제주도파병을 반대하는 것에 초점이 두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81)


"조선경비대가 내용적으로는 군대이지만 형식적으로는 경찰을 보조하는 하부 조직으로 창설된 것은 정부수립 후 국군으로 발전하는 조선경비대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었다. 첫째로 조선경비대가 전국적인 군대조직이 아니라 향토연대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다." "특히 해당 지역에서 모병을 했기 때문에, 사회운동으로 수배되어 경찰을 피해 다니던 인물들이 이미 군대에 들어와 있던 인맥을 통해 경비대에 입대할 수 있게 되면서, 각 연대는 인적 구성으로 보아 상당한 정도로 지방색을 띠게 되었다. 둘째로 조선경비대는 경찰의 보조 조직을 표방하여 본격적인 무장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비나 인력 면에서 경찰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셋째, 조선경비대의 주요 활동 목표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있기보다는 폭동진압이나 치안유지 같이 남한에서 발생한 정치적 동요를 진정시키는 데 두어졌다."(104-6)


"(여순 봉기 직전에 시행되던) 숙군은 좌익 세력뿐만 경비대 내에서 김구를 추종하는 우파 세력 등, 숙군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을 제외한 모든 파벌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동기가 체포되었다 하더라도 14연대 남로당 세포가 받은 피해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우익 장교를 체포할 만큼 숙군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 바람이 언젠가는 남로당 세포 적발로까지 이어지리라는 것이었다." "백선엽은 만주 간도특설대에 있을 때 공산세력을 토벌한 경험이 있었고 극도의 반공주의적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 세포를 적발하는 데 적합한 인물이었다." "백선엽은 여수 14연대를 국군 내에서 가장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백선엽이 지목한 반란세력은 단지 공산주의자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선엽의 정보활동에 따라 체포된 오동기 전 14연대장은 김구를 추종하는 인물이었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123)


"여수에서 시작된 봉기가 전남 동부 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은 주로 군대의 물리력에 의지했다." "이처럼 봉기 확산에서 결정적이었던 것은 군대였다. 무장 세력은 한 지역을 방어하면서 그 안의 인민위원회 활동을 보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봉기군이 물러나면서 인민위원회도 동시에 무너졌다. 봉기군의 짧은 점령 기간 때문에 인민위원회는 구체적인 정책을 펴지 못했고, 지역의 경찰이나 우익인사들을 처단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 같은 '반동세력'의 처단은 곧이어 진압군이 들어오면서 피의 악순환을 불러 일으켰다. 벌교의 경우에서 보듯, 진압군은 우익 세력이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장소에서 좌익 혐의자를 죽였다. 진압군의 점령 뒤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여수·순천과는 달리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산발적인 봉기군 활동이 계속되었다. 특히 산악지대를 끼고 있었던 구례는 한국전쟁 때까지도 빨치산과 정부군과의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128)


"여수에서 경찰이 가장 많이 희생된 때는 14연대 봉기군 주력과 당 지도부가 진압군을 피해 여수를 빠져나가려 한 10월 24일 밤이었다. 서종현 등 소장 강경파들은 경찰서 유치장에 가득 차 있던 경찰관 약 50여 명에게 총격을 가해 집단학살했다. 서종현 등은 단선반대투쟁에서 경찰에 잡혀 고문 받았던 경험으로 경찰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고, 체포한 경찰들을 풀어주면 다시 해를 끼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전에 인민위원회가 주도한 숙청은 조사와 선별 과정이 있었고, 죄가 가볍다고 생각되거나 양심적인 경찰로 판단된 인물들은 석방했다. 하지만 서종현이 이날 여수 경찰서에서 벌인 일은 이러한 과정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자의적 판단과 적개심으로 이루어진 학살이었다." "우익 세력 처단은 주로 친일파와 한민당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단독선거를 반대한 김구의 한독당 계열은 숙청대상에서 제외되었다."(153)


제2부 진압과 학살


"여순사건이 14연대의 봉기와 이에 따른 지방 좌익 세력 참여로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순사건 직후의 정부 대응은 정치적 반대 세력인 김구를 고사시키려는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한민당이 스스로 야당의 역할을 자임하고 김구의 한독당과 국회 내 소장파가 반이승만 세력으로 결집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활용하여 우익 지배층의 역학관계를 재편하고 이승만의 의지가 관철될 수 있는 안정적인 정치지형을 만들고자 의도했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정부의 실정에서 비롯된 밑으로부터의 저항이 아니라 일부 우익 세력에 의한 쿠데타적 행동으로 국민에게 선전함으로써 이를 계기로 정치세력을 재편하는 데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순사건을 이용하여 정적을 압살하려던 이승만 정부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듬해 김구 암살과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이루어진다."(210-1)


# 반대파를 옭아매려는 사건 규정

1. 이범석 국무장관은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와 극우정객들(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한독당 세력)이 결탁한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발표


"김구가 여순사건 관련을 분명하게 부인하고 일반 여론도 호의적이지 않자, 권력에서 소외된 극우정객과 공산주의자들이 합동으로 반란사건을 일으켰다는 정부의 발표는 민간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으로 그 범위가 점차 변화하게 된다." 전남 현지에 암약하던 좌익분자들이 계획적·조직적으로 사건을 일으켰다는 공보처의 발표는 "정부 조직의 한 부분인 국군 내부로부터 반란이 처음 일어났다는 점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반란의 초기 주체가 국군임을 부정하고 그 책임을 민간인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여순사건의 주체에 대한 규정은 이런 식의 냉전적 설정으로 이동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뒤바뀜을 통해 내부 갈등의 책임을 밖의 확인되지 않은 실체에게 떠넘김으로써 지배층의 실정을 은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외부의 사주로 몰아감으로써 사건 주체의 정당성을 박탈해버리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었다."(211-3)


"국회의원에 대한 암살계획이 있다고 위협했던 윤치영 내무장관은 이제 국회 차원을 넘어 국민과 전 사회를 향해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11월 8일 윤치영은 북한의 최소한 8개 도시에서 공산지배에 반대하는 광범한 폭동이 1주일 전부터 일어났다고 발표했다." "윤치영은 이 보도의 출처를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정보를 독점했지만, 더욱 더 중요한 문제는 북한에서는 이러한 폭동이 일어난 사실이 없다는 점이다." "실제 이 발표의 수신인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 민중이었다. 즉 윤치영은 남한의 여순사건이 가져올 신생정부의 위약성과 정통성 부재를 외부의 북한정권에 대항한 더 큰 규모의 반란에 관심을 돌리게 함으로써 문제를 회피하려 했던 것이다. 북한에서 공산정권과 소련군의 학정에 반대하는 수만 명의 봉기가 일어나는 판에 남한에서 공산주의적 색채를 띤 반란은 용납될 수 없다는 근거도 이 발표는 제공하고 있었다."(215-7)


"초기에 나타났던 군 명령계통의 혼란이 정리되는 과정은 결국 만주군 출신의 강경파가 진압작전에서 헤게모니를 잡아나가는 과정이었고, 이는 곧 군 내부에서 반공주의 노선이 강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진압군 내부에서 반공주의 노선이 강화되는 과정은 미군의 의도와도 부합했다. 4연대를 진압군으로 파견하느냐의 문제를 놓고 육군과 미 임시군사고문단 간에서 시각 차이가 나타났을 때, 결국에는 미 임시군사고문단의 입장이 관철된 것에서 잘 드러나듯 진압작전은 완전히 미군의 통제하에 있었다. 여수봉기를 군대 내의 공산주의 세포가 일으킨 반란으로 간주한 미군은 이를 시급히 진압하지 못하면 이승만 정권이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활약은 과연 육군이 봉기군을 성공적으로 진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사권을 장악한 미군은 지휘 체계가 변화하는 것을 묵인했다."(244)


"(송호성 보좌역으로 파견된) 하우스만은 한 사람의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그는 국방경비대 창설에 초석을 놓았고, 광범한 한국인 인맥을 기반으로 1980년대까지 한국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나중에 '한국군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은 하우스만은 특히 미군정시기와 이승만 정권 초기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장관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국무회의에 국방부장관의 고문관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미군 당국은 진압작전에 직접 전투 병력을 출동시키지는 않았으나, 국군 각 부대에 배치되어 있는 미군 고문단원을 활용하여 진압작전을 통제하고 조언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지도(lead)하지 말고 조언(advise)하라'는 지시를 받은 고문단원들의 활용은 "미군을 직접 투입할 경우 발생하는 희생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작전을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원하는 대로 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278-9)


"미군에게 여순 진압작전의 효과는 무엇이었나? 미 임시군사고문단원들은 정부 진압부대의 전투능력 부족, 유능한 지휘관의 부재, 인접부대간의 상호협동작전의 부재, 광범위한 포위망 형성에 따른 통신 두절, 부대의 좌익 침투, 장교와 사병간의 일체감 부족 등의 취약성을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허점을 메운 것은 미 임시군사고문단원에 의한 전반적인 작전계획수립, 병력집결지 선정, 작전지원 등이었다고 자평했다. 고문단원들은 여순 진압작전이 국군에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전에 국군은 다른 부대와 협력하여 대규모 작전을 경험하지 못했으나, 여순 진압작전에는 38선 경비임무를 맡은 부대를 제외한 남한의 많은 부대가 참가함으로써, 국군은 처음으로 연합작전을 펴는 요령을 익혔다는 것이었다. 결국 군 지휘관과 참모 그리고 국군 부대에게 여순 진압작전은 하나의 훌륭한 연습장(training ground)이었다."(290-1)


"수많은 인명 피해를 불러온 협력자 색출 과정은 어떤 이의도 용납하지 않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희생자들과 시민들은 도저히 저항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손가락 총으로 상징되는 협력자 색출은 같은 지역 공동체 성원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붕괴시켰다. 협력자 색출로 형성된 공포와 죽음 뒤에는 지역 공동체 성원들 간의 불신과 증오가 내면화되었다." "이 같은 분열은 지역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먼저 반공국민이 되어야만 했다. 반공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입구였다." "이승만 반공체제에서 거세되어야 할 잡초는 공산주의자로 상정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계속된 숙청작업을 통해 건설되었고, 여순사건에서 전면적으로 등장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이후 공산주의 혐의자를 제거하는 하나의 경험과 실례로서 간직되었다."(314-5)


제3부 반공 국가 '대한민국'의 건설


정부는 10월 20일 일체의 보도를 금지하는 '기재유보(記載留保)' 조치를 내리고 21일에야 여수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발표했다. 정부 발표문에 사실상 의존하던 각 신문은 "전남 여수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순천을 점령하고 점차 북진하고 있다, 14연대 반란은 극우와 극좌세력의 합작품이다, 반란세력이 살인과 방화를 일삼고 있다는 이범석 국무총리의 기자회견 내용을 그대로 받아 보도했다.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라면, 이 반란이 공산주의자들의 모략선전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사건의 원인에 대한 보도였다. 그리고 원인에 대한 판단은 어느 정도의 사태 파악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범석 국무총리가 여순사건 발발 원인을 발표할 당시, 정부는 사건의 진상과 진행방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 언론은 '골육상잔'이나 '천인공노' 같은 감정적 언어들을 사용하여 이 사건에 이미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374)


"당시 여순사건을 보도한 각 신문 기사의 끝에는 '군검열제(軍檢閱濟)'라는 꼬리가 달려있었고,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기사는 내용이 삭제되었다." "당시 각 신문들이 보도했던 양상을 살펴보면, 언론은 정부 발표에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이 극우와 극좌세력이 연합해서 일으킨 사건이라는 데는 처음부터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어느 신문도 이 사실을 파고들거나 문제로 삼지 않았다. 김구가 '극우세력'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정부 발표를 의식하여 사건 관여를 적극 부인하자 신문들은 단지 김구의 발언을 기사화 했을 뿐, 이에 대한 짤막한 해설도 싣지 않았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정부의 발표만이 실릴 뿐이었고, 이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원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이 사건의 성격은 무엇인지에 대한 파악과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문들의 이러한 무책임한 방임적 태도는 신문사가 현지에 특파원을 파견한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377-8)


"반란자 즉 공산주의자들은 '내 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민족의 범주에서 배제되었다. 이제 이들은 동족이 아니라 민족의 '원수'이자 '적'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공산주의냐 반공이냐 라는 이데올로기적 기준이 민족의 구성원을 규정하는 1차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반공 민족'의 발견은 이승만 정권이 직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교두보였다. 같은 핏줄을 공유하고, 같은 지역에 살며 동일한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내 민족'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잔인무도한 악마로 변하였기 때문에 같은 민족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민족을 통일하는 구심점은 반공이었으며, 반공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 민족이 살아가야 할 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여순사건은 '반공 민족'을 탄생시키는 주요한 계기였다." "이승만 정부로서는 이 사건을 '동족상잔'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미온적이고 동정적인 태도이며 올바르지 않은 관점이었다."(413-4)


"여순 진압작전을 통해 국군은 군사적 경험을 익히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 이데올로기적으로 안정되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된 숙군은 한국군을 '정화'하는 계기였다. 대한민국 군대는 숙군을 통해 가장 강력한 반공 조직체이자 반공이데올로기의 보루로 만들어졌다." "숙군을 추진한 조직과 인물들이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등 한국전쟁 전후 시기의 민간인 학살을 직접 주도하고 시행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숙군은 단지 군 조직을 정화하는 데 머물지 않았으며, 숙군 과정에서 사용된 조직과 인적 자원들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에서 그대로 전용되었다. 1948년 제주도와 여순 지역에서도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지만,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에 군 정보기관과 헌병대 등이 직접 관여하면서 민간인 학살은 매우 조직적인 성격을 띠어갔다."(451-2)


"이제 군대는 나라를 지키는 엄숙한 임무를 떠맡은 '호국의 간성'으로 떠올랐다. 학교에는 학도호국단이 설치되었다. 대통령령 제186호로 제정된 '대한민국학도호국단규정(1949.9.28 제정)은 중앙학도호국단 아래에 시·도 학도호국단, 부·군·도 학도호국단 학교 학도호국대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학교 자체가 군대식으로 조직되었고, 교사와 학생은 군사 교육을 받았다. 군대의 구호는 학교 체육 용어로 채택되었다. 1949년 말 학도호국단은 전국의 중학교 이상 1,146개 교, 총 단원 수는 35만 명을 통괄하는 전국적인 학생조직이 되었다.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군 장성과 지휘관들은 파워 엘리트로 진입했다. 군부는 국가를 운영하는 주요한 정치세력으로 떠올랐고, 지방의 부대사령관은 도지사, 시장, 지역 유지들과 어울려 지방 사정을 논의하고 운영하는 주체가 되었다. 대한민국 성립 초기부터 군은 비정치적인 집단이 아니었으며, 정치적인 부문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457-8)


#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주요 조치들

1. 대한청년단(한청) 발족(1948.12.19) : 국민회청년단·대동청년단·대한독립청년단·서북청년회·민족청년단·청년조선총동맹을 통합하고, 통합에 반대한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족청)은 해체

2. 교육계 '정화'(1949.1~3) : 문교부장관 안호상의 주도로 교원들의 사상검증과 숙청 진행

3. 학도호국단 창설(1949.4.22) : 학교 내에서 우익청년단체 활동을 공식화하고 반공주의에 기반한 군사 교육 실시

4. 국민보도연맹 결성(1949.4.20) : 좌익 전력을 가진 사람들을 사상적으로 개조한다는 취지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좌익 세력을 색출하고 섬멸하는 도구로 사용

5. 국가보안법 제정(1948.11.9~20) : 국가가 어떤 집단이나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목적을 사전에 판단하여 특정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예비검속'을 입법으로 명문화


"정부 수립 초기 대한민국의 국민 만들기는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압도적인 물리력을 동원한 국가폭력의 사용이었다. 군경을 동원한 대량학살은 인민을 죽음의 공포에 빠뜨리게 함으로써, 국민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두 번째는 법제적 폭력이었다. 법은 폭력을 감소시킨 것이 아니라,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거나 보완하는 기능을 하였다 법은 폭력의 화장한 얼굴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국민 형성 과정에서 '배제'의 메커니즘을 구성한다. 대한민국 국민 형성에서는 물리적, 법적 폭력이 광범하게 사용되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 형성이 '포섭'보다는 '배제'를 우선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진행되는 일상적 삶에 대한 통제였다. 사회통제는 배제보다는 포섭에 중심을 두는 국민 형성의 방법이자 국가의 권력 기술이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562)


# 사회통제를 통한 포섭 방식

1. 유숙계(1949.7~한국전쟁기) : 가족 이외의 친척을 포함한 다른 사람이 각 가정에 유숙할 경우 반장을 통해 경찰관에게 보고하도록 한 제도로서, 충실한 국민이 되기 위해 일상에서 서로를 감시하고 경계해야 하는 정신분열증적인 상황을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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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회의의 정체 - 아베 신조의 군국주의의 꿈, 그 중심에 일본회의가 있다!
아오키 오사무 지음, 이민연 옮김 / 율리시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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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일본회의의 현재


 1990년을 전후하여 소련을 필두로 하는 사회주의 정권이 차례로 붕괴하면서 이른바 냉전체제는 종식되었다. 일본 국내에서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운동단체 등이 큰 피해를 보았지만, 반공을 최대의 결집 축으로 삼은 일본의 우파 역시 일종의 목표상실 상태에 빠졌다. 그래서 운동을 다시 새롭게 부흥하고 재결집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것이 냉전체제가 붕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7년에 일본회의를 결성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는데, 결국 우파로서 내세운 결집축도 새롭게 정리되어 일종의 '원점회귀'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한다. p.31


2장 또 하나의 학생운동과 생장의 집


3장 꿈틀거리는 회귀 욕구


4장 풀뿌리 운동의 궤적


 일본회의가 가장 중시하는 주제들은 무엇보다 먼저 ① 천황, 황실, 천황제의 수호와 그 숭배, 이어서 ② 현행 헌법과 그로 상징되는 전후체제의 타파 , 그리고 이에 부수하는 것으로서 ③ '애국적'인 교육의 추진, ④ '전통적'인 가족관의 고집, ⑤ '자학적'인 역사관의 부정. 이로부터 파생한 그 밖의 주제를 다룰 수는 있어도 역시 핵심적인 운동대상은 이상 5가지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운동의 노하우 역시 원호법제화 운동 등에서의 '성공체험'을 통해 배운 수법, 오직 그것을 반복하여 진화·발전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대규모 운동의 경우에는 신사본청이나 신사계, 신흥종교단체와 같은 동원력, 자금력을 보유한 조직의 후원을 받으면서 전국 각지에 '캐러밴대'라는 명칭의 회원부대를 파견하여 '풀뿌리 운동'으로 대량의 서명 모집과 지방조직 구축, 또는 지방의회에서의 결의와 의견서 채택을 추진함으로써 '여론'을 형성한다. 

 그와 동시에 중앙에서도 일본회의와 그 관련 단체, 종교단체 등이 연계하여 '국민회의'라는 명칭의 조직을 설립하고, 대규모 집회 등을 파상적으로 개최하여 시선을 끌면서 전국에서 모은 서명과 지방의회의 결의, 의견서를 갖고 중앙정계를 압박한다. 한편, 뜻을 같이 하는 국회의원들도 이에 호응하여 의원연맹이나 의원 모임을 결성하고, 여당과 정책결정자를 움직여 운동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한 토대로 일본회의는 지금까지 국회의원간담회나 지방의원연맹의 내실을 다지면서 가맹의원 수를 착실히 늘려왔다. pp.204-205


# 풀뿌리 운동의 주요 활동 내역

1. 정부 주최 '헌법기념식전' 규탄(1976)

2. 원호법제화 운동(~1979) : 일본의 공식연호를 기록방법으로 법제화하려는 운동. 1979년 6월 법으로 제정되었다. 

3. (헌법을 존중하는) 자민당 신강령 반대 운동(1985) 

4. 쇼와 천황 재위 60년 봉축운동(1985~86)

5. 《신편 일본사新編日本史》 편찬 운동(1985~86)


6. 건국기념일 식전 독자개최(1988) : 기원절(초대 천황인 신무 천황의 즉위일)을 건국기념일로 정립

7. 천황 방중 반대 운동(1992)

8. 전후 50년 국회결의(무라야마 담화) 등에 대한 반대 운동(1994~95)

9. 선택적 부부별성제도 반대 운동(1996~)

10. 국기국가법 제정 운동(1999)


11. 외국인(특히 재일한국인)의 지방참정권 반대 운동(1999~)

12.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지지와 (별도의) '국립추모시설' 계획에 대한 반대 운동(2001~02)

13. 야스쿠니 신사 20만 참배운동(2005)

14. 교육기본법 개정 운동(2000~06) : 헌법개정의 전초전으로 '공공의 정신, 도덕심'이나 '일본의 전통·문화 존중' '향토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교육기본법에 포함시키려는 운동 → 제1차 아베 정권에서 개정 교육기본법 설립(2006)

15. 여성 천황 허용의 황실규범 개정 반대 운동(2005~06)


 일본회의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이들을 아는 관계자는 그 집념과 끈기의 배후에 '종교심'이 있다고 지적한다. 신흥종교단체 생장의 집 출신이기에 존재하는 '종교심'이 그렇다. 일본회의 자체가 신사본청을 필두로 하는 신사계로부터 두터운 후원을 받기 때문에 그 '종교심'에 의해 뒷받침되는 운동과 주장은 가끔 근대민주주의 대원칙을 쉽게 벗어나거나 짓밟는다. 

 천황 중심주의의 찬미와 국민주권의 부정, 제정일치에 대한 한없는 동경과 정교분리의 부정. 예를 들면 일본회의의 실무를 관장하는 가바시마는 일본이 세계적으로 드문 전통을 지닌 국가이며, 국민주권이나 정교분리 등과 같은 사상은 일본 특성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평소 태연하게 입에 담아왔다. 이는 일본회의의 운동과 동질성·연관성을 지닌 아베 정권의 위험성을 동시에 부각해준다. pp.206-207


5장 아베 정권과의 공명, 그 실상


 일본회의가 아베 정권을 좌지우지한다거나 지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양자가 공감하고 공명하면서 '전후체제의 타파'라는 공통목표를 향해 나아가 결과적으로 일본회의라는 존재가 거대해졌다고 생각하는 편이 적절한 것 같다. 즉 '위로부터'의 권력 행사를 통해 '전후체제를 타파'하려고 호령하는 아베 정권과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운동'으로 '전후체제를 타파'하고자 집요하게 운동을 지속해온 일본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전후 처음으로 자전거 앞뒤 바퀴처럼 서로 작용하면서 오랜 비원을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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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푸른역사 학술총서 6
류대영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1부 기독교와 근대 한국


1장 기독교에 대한 개화기 지식인들의 태도와 근대성 문제


#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바라보는 조선 지식인들의 견해

1. 전통적 중화주의 : 서양 문물을 야만으로 간주한 성리학자들

2. 현실적 중화주의 : 양무洋務운동에 영향을 받은 온건개화파

3. 일본식 서구주의 : 메이지 일본에 영향을 받은 급진개화파

4. 미국식 서구주의 : 미국식 교육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세례를 받은 자들


"개항기 미국 공사관에서 일했던 윌리엄 샌즈는 조선의 지성인들이 기독교 속에서 진정으로 찾았던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는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그에 의하면 조선 지식인들이 기독교 속에서 매력을 느꼈던 요소는 인도적·윤리적 삶, 정치적 원리, 그리고 서구적 생활이었다. 그는 또한 기독교를 수용하는 일이 조선 지식인에게 "그들의 윤리와 조화되지 못할 것 없는 서구적 윤리규범을 받아들여 그것을 마치 편리한 탈것을 이용하듯 타고 서구의 지식으로 나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관찰했다. 조선 지식인들이 서구 종교와 서구의 학문을 구별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샌즈에 의하면 조선 지식인들이 기독교에서 진정으로 목격했던 것은 영적인 일과 결부되어 있는 어떤 정치적인 힘의 작용이다. 즉 조선인은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미국 선교사들 속에서 미국의 힘을 보았다는 것이다."(41)


"윤치호와 서재필은 미국 기독교 신자였고, 개항기의 개혁가 가운데 가장 친미국적이고 친선교사적이었다. 그들이 해외에 있는 동안 미국 선교사를 선두로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입국하였고, 조선인들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서구 문물과 개신교를 국내에서 접할 수 있었다." "(계층과 개종 동기가 다양했던) 개종자들의 대부분은 평민, 상인, 천민 등 중하층 계급 출신이었다. 양반 출신 개종자는 극히 드물어, 몰락한 집안사람이거나 개인적으로 극한의 위기상황에 처한 사람 가운데 개종자가 발생하는 일이 간혹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미국과 개신교를 배울 때는 그들을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생각하다가, 무기수 신분으로 옥중에서 개종한 이승만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승만은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이며, 미국으로부터 도덕적·물질적 도움을 받아 자강과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50-1)


2장 한말 기독교 신문의 문명개화론


"〈죠션크리스도인회보〉와 〈그리스도신문〉의 문명관이 특히 강조한 것은 "반개화"와 완전한 "문명개화"의 차이점, 그리고 반개화에서 문명개화로 이르는 길이었다." "조선이 반개화의 지경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과 그 증상들을 알려줌으로써 독자들을 일깨우고, "개화의 가장 높은 데" 이른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여 그 진보됨과 편리함을 독자들이 사모하게 한 후, 어떻게 그런 지경에 이를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두 신문의 목표였다. "인종과 개화의 등급" 기사가 조선 사람들은 문명의 등급과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부국강병의 실효를 힘써 급히 진보하야 가히 문명 개화의 사람이 되기를 도모"해야 한다고 결론 맺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신문〉은 반개화의 전형을 청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청이 반개화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오랫동안 중국을 문명의 중심으로 여겨 온 조선을 일깨우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67-8)


# 반개화문명과 개화문명의 차이점

1. 물질적 차원 : 농공상업이나 지식·기예가 어느 정도 발달했는가, 철도·기선·인쇄술 같은 기술분야는 어느 정도 발달했는가

2. 법률적·정치적 차원 : 법률이 얼마나 공정하고 엄정하게 집행되는가, 위정자와 백성들이 얼마나 단결되어 있으며 애국적인가

3. 정신적 차원 : 이기적이지 않고 몽매하지 않으며 실속 없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문명인의 염치와 도덕을 갖추었는가


"〈회보〉와 〈신문〉의 문명개화론에 따르면 근대적 법률을 제정하고 그것을 공평무사하게 실행하는 일이 개화의 중요한 구성요소였다." "법률과 관련하여 선교사들은 문제의 근본은 법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문화되었거나 아니면 공평무사하게 집행되지 않는 데 있다고 보았다." "갑오개혁으로 근대적 법률체계의 도입이 시도된 이후에도 과거의 악법이 여전히 사용되는 데 대한 비판은 특히 날카로웠다." "조선의 법이 진보하기보다 퇴보하고 있다는 〈신문〉의 비판은 구체적으로 1898년 9월 김홍륙 일당이 독이 든 커피를 진상하여 고종과 황태자를 위해하려 한 사건과 관련 있었다.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중추원은 이미 폐지된 연좌법과 참수형을 부활시켜 관련자들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두 신문은 황제와 황태자의 독살음모에 대해서는 그 잘못을 엄중히 따지면서도 이미 폐지된 옛 악법을 다시 살리는 일을 격렬하게 비판했다."(80-1)


"조선의 문명개화를 논한 〈회보〉와 〈신문〉의 기사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것이 교육의 중요함을 강조한 내용이었다. 물질적 개화든지 아니면 정신적 개화든지, 무지몽매한 백성을 일깨워 일하는 근대적 시민으로 만들고 나라를 문명개화케 하는 모든 일이 교육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부강한 나라들이 교육에 힘써서 효험을 얻은 것을 증거로 "교육은 국가의 대본"이라고 선언한 것부터, 사람이 읽고 쓸 줄 모르면 "금수보담 나흘 거시 없나니"라는 자극적인 권면에 이르기까지 두 신문은 교육찬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글들의 논지는 결국 교육이 문명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전국 방방곡곡에 학교를 세워 자녀들을 교육시켜야 하는데, 만약 정부에서 이 일을 충분히 추진하지 못한다면 교회라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문명개화를 위해서는 기독교의 진리가 교화敎化의 기능을 반드시 담당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98-9)


3장 20세기 초 한국 교회 부흥현상에 관한 재검토


1907년 1월 평양에서 있었던 부흥집회에서는 흔히 성령세례 혹은 성령강림이라고 불리는 비상한 육체적, 정신적 현상이 나타났다.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당시 한국인의 절대다수는 좁은 농촌 공동체에서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또한 제국주의 침략 앞에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왕조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삶은 극도로 불안했다. 왕래를 어렵게 하는 한국의 산악지형, 전통적으로 폐쇄적인 향촌 사회, 불편한 교통, 그리고 인구비례로 볼 때 얼마 되지 않는 기독교인 수 등을 고려한다면, 수백 명 혹은 그 이상씩 모이는 규모가 큰 사경회나 부흥집회는 대단한 종교적-사회적 모임이었다. 또한 그렇게 큰 모임은 일 년에 한 번씩 밖에 열리지 않는 귀한 기회였다. 망해가는 나라의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가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사경회나 부흥회가 한편으로는 강렬한 집단적 종교경험을 하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교제와 학습, 정체감 확인 등 의미 있는 사회적 기능을 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117)


20세기 초 부흥운동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났던 것은 "통회자복痛悔自服"이라고 불렸던, 격정적인 회개였다. "유교에 기초한 이성적이고 공적인 질서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일 때 "구원"이나 "믿음"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사적인 차원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개종자들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신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에 속하는 것, 즉 교회의 교리와 신앙고백, 그리고 윤리규범을 이성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부흥운동에서 벌어진 통회자복 현상은 한국 교인들이 개인적이고 초이성적 차원의 기독교를 비로소 경험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점은 부흥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국 교인들이 일본인들을 증오한 죄까지 회개하고, 고종이 퇴위했을 때 극도로 고조되었던 반일감정을 길선주가 기독교적 원칙에 따라 진정시킨 현상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123-4)


4장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이해, 1890~1930


"존스의 논문 〈한국인들의 정령숭배〉는 당시 한국에 유행하던 세 가지 종교였던 유교, 불교, 샤머니즘 가운데 어느 것도 다른 것들에 대해 배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지 못하며, 세 종교가 공존하면서 중첩되고 상호침투하여 구별할 수 없는 뒤범벅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존스는 세 종교가 이론적으로는 구별되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하나의 혼합되고 소화되지 않은 가르침과 믿음의 덩어리"로 자리 잡고 있으며, "보통의 한국인은······ 세 종교제도 모두의 추종자"라고 말했다." "서로 혼합되어 한국인의 종교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세 종교전통 가운데서도 존스는 특히 정령숭배spirit worship가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가장 오래된 종교행위로서 다른 두 종교에 있는 거의 모든 초자연적인 요소를 흡수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인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그들은 한국인이 믿고 있던 정령의 놀라운 다양성과 그 수효에 놀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57-8)


"유신론적 관점에서 종교를 접근했던 선교사들은 유교가 과연 종교인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선교사들이 만든 상해 중서서원과 미국의 기독교 대학에서 공부한 윤치호가 유교를 비판하면서, 신앙을 파괴하는 불가지론적인 가르침으로 오직 현세에만 관심을 가지며, 영적spiritual이지 못해서 "경건한" 사람을 기르지 못하며, 인간에서 시작하여 인간에서 끝난다고 지적한 것은 이와 같은 서구적 관점을 드러낸 대표적인 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유교는 오직 현세에서 사람들 사이의 적절한 행위에 관심을 가지는 "정치 도덕"이었다." "초월적 신과의 사적인 관계를 종교의 핵심으로 파악했던 선교사들의 관점에서 볼 때 유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종교적인 면은 죽은 자에 대한 "숭배"였다. 존스는 유교가 만들어낸 "사자死者숭배"가 한국의 국가 종교라고 하였다. 선교사들은 사자숭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위패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173-4)


"조상제사에 구복적인 요소가 있다고 이해한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어, 클라크는 제사를 올리는 이유가 단순히 효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사를 올리지 않으면 자손들이 번영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제사를 올려 죽은 사람을 먹이지 않으면 죽은 이가 화난 악령이 되어 산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클라크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평화가 제사에 달려있다는 것이 조상숭배의 "교리"라고 했다." "선교사들이 볼 때 조상제사는 영생을 바라는 한국인의 소망을 반영했으며, 남아선호 현상 및 그것과 연관된 여러가지 폐습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를 이어 계속되는 제사를 통해 사후에도 삶을 누리게 되므로 제사는 영생을 위한 조건이었고, 아들만 제사를 모실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인은 반드시 아들이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많은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여성 비하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믿었다."(176-7)


2부 기독교와 사회주의


5장 기독교와 사회주의 관련 연구 : 현황과 과제


"사회주의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의 응전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된 것 가운데 하나가 "사회복음Social Gospel"의 도입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서구 교회에 일기 시작한 자본과 노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반영한 사회복음은 192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었는데, 여기에도 사회주의의 기독교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될 만한 측면이 있었다." "(민중을 향한 교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실천적인 성격의 단체들에서 추진된) 사회복음은 유물론과 같은 사회주의적 요소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기독교사회주의와 구별되었다. 그러나 실천에서는 두 흐름 모두 실력양성운동, 농촌운동, 협동조합운동, 그리고 이상촌운동 등으로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이상촌운동은 미국의 기독교사회주의와 사회복음에서도 볼 수 있는, 기독교적 공산사회를 추구하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utopian socialism"의 모습이었다."(207-8)


이론적 측면이 아닌 역사적 연구 측면에서도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남 대동군의 유력한 기독교 지도자 강돈욱의 딸이었던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은 일요일 예배뿐 아니라 새벽기도회에 성실하게 참가하던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기독교인이 아니면 입학할 수 없었던 숭실학교에 다녔고 다른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펼쳤다. 김형직, 손정도를 비롯하여 김일성의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민족주의자였다. 그 자신도 길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손정도의 교회를 다니며 주일학교 교사를 했으며, 그곳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적 소년회 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김일성은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그런 태도는 기독교와 북한 사회주의가 "민족"을 접점으로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211-2)


6장 김일성과 기독교, 기독교인


"북한의 종교인과 종교시설 가운데는 그 계층적·물질적 기반이나 반사회주의적 성향 때문에 반제반봉건 혁명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서북지역에 기반한 기독교인들은 계층적으로 중농, 부농, 지주, 자본가 층이 많았고, 친미반공주의를 견지하여 김일성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사회주의 정권 건립에 반대했다. 예를 들어, 해방 후 북한지역 장로교의 대표기관으로 형성된 5도연합노회는 1946년 10월에 임시인민위원회에 전달한 5개조의 결의문을 통해 인민위원회위원 선거일로 지정된 일요일에는 기독교인들이 예배 이외의 어떠한 행사도 참가하지 않으며 예배당은 예배 이외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김일성은 종교인들을 향해 선거참여를 못하게 하는 사람들을 "흉악한 의도"를 지닌 "반동분자"라고 강하게 비난하면서, 조국과 인민을 위해 일하는 애국적 행위를 금하는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223)


"1948년 9월에 건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은 선교나 종교 교육을 포함한 포괄적인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신앙 및 종교의식 거행의 자유", 즉 "신앙의 자유"만 가능하게 했다.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북한 헌법이 반反종교 선전의 자유 조항을 빠뜨렸다는 점이다. 소련의 헌법, 또 그것을 기초로 만들어진 다른 사회주의 국가 헌법들은 모두 신앙의 자유와 아울러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보장했다. 북한 헌법이 반종교 선전의 자유 조항을 넣지 않은 것은 감리교 목사 홍기주가 부위원장, 장로교 목사 강량욱이 서기장으로 인민위원회에 참여햐는 등 북한정권이 광범위한 통일전선적 연대 속에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전체 인민위원 가운데 2.7%가 종교인이었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목사들이었다. 북한 정권은 헌법에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포함시키지 않았을뿐 아니라 조직적으로 반종교 선전을 행하지도 않았다."(226-7)


"사회주의 건설과 관련하여 볼 때 종교는 "비과학적"이고 "반동적"인 것으로 아편처럼 "해독"을 끼치는 무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는 여전히 "례배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헌법이 그들의 종교행위를 보장했다.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을 중심으로 친정권적인 사람만 교수나 학생이 될 수 있기는 했지만 신학교가 운영되고 있었으며, 사경회 같은 집회도 개최되었다. 북한 정권 초기의 통일전선적 상황에서 김일성이 종교인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건국사업"에 동참하는 일이었다." "(국가를 종교 앞에 둔) "하느님을 믿어도 조선의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은 김일성이 어렸을 때 부친 김형직으로부터 들었다는 "하늘을 믿어도 조선의 하늘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고쳐서 사용한 것이었다. 이 말은 이후에도 종교인에 대한 김일성의 기본적인 입장을 대표하는 발언으로 자주 인용되었다."(228-9)


"(남한을 제국주의와 봉건 잔재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목적을 앞세워 일으킨) 파괴적인 전쟁을 겪으면서 북한에 "종교허무주의"가 광범하게 확산되어 갔는데, 개신교인들이 특별히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교회와 신학교 건물이 거의 파괴되어 전쟁 후에는 모이려고 해도 모일 장소가 없을 지경이었다. 미국이 절대 교회를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공습경보가 나면 방공호가 아니라 교회로 모였다가 희생된 경험은 쓰라렸다. 결국, 기독교가 증오하는 미국의 종교로 인식되면서 신자들이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내놓고 다니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탈교脫敎하는 사람도 많았다. 회고록을 쓰면서 김일성은 미군이 교회를 파괴하고 교인들도 죽였는데, 신이 그런 만행을 제어하지 못하자 기독교 신자들이 "스스로 신앙을 버리고"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세계의 창조자라는 주체사상의 신봉자가 되었다고 말했다."(231)


"(1972년 12월에 채택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은 최고인민회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내각을 폐지한 후 국가의 수반이며 국가주권의 대표자인 주석을 신설했다. 주석제 신설은 1960년대 말부터 전개해온 주체사상의 유일사상화 작업, 그리고 주체사상의 유일한 해석자인 "수령" 김일성이 지닌 절대권위의 헌법적 표현이었다. 1974년 2월 김정일은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공식 선포하며 조선로동당의 지도사상으로 삼았다." "이 시기의 종교 상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사회주의헌법에 "반종교선전의 자유"가 새로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종교의 자유와 관련하여 구헌법이 "공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 거행의 자유를 가진다"고 한 데 비해서 사회주의 헌법은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1970년대와 1980년대 중반까지 북한 정부는 공연물과 문서를 통해 활발한 반종교 선전을 하였다."(241-2)


3부 기독교와 남한 사회


7장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태도


"한국기독교연합회(NCCK)의 "파월 장병을 위한 전국 기도회" 권고문은 베트남에 파견된 장병들이 "아세아의 평화와 월남 국민의 자유수호"를 위한 "승공전쟁"에 참가하고 있다고 하면서 장병들의 생명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했다. 백마부대 환송예배를 주선하고 사회를 본 NCCK 전도부장 김활란은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위장僞裝 없는 영구한 평화를 아시아에 심고자" 몸 바치고 나선 그들을 "자유의 십자군"이라고 부르며 신의 가호를 기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무 유호준은 환송사를 통해 "자유월남을 위협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무찔러" 지켜주는 일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사랑이 아니고 한국 및 "세계적 전선戰線"과 직결된 문제라고 말했다. 그 전선의 일부가 무너지면 한국과 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 "자유진영"의 자유와 평화가 위태롭다는 것이었다."(271-2)


"한국 교회가 베트남 전쟁에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데 특별한 역할을 했던 것이 "임마누엘" 부대였다. 임마누엘 부대는 백마부대 안에 지휘관과 병사가 모두 기독교인들만으로 구성된 중대(제29연대 5중대)였다. 기독교인들만으로 구성되고 기독교적인 이름을 지닌 부대의 편성을 허락한 것은 베트남 파병과 관련된 정부와 교회의 밀월관계를 잘 보여주었다. 백마부대 환송예배에서 설교를 했던 NCCK 총무 길진경은 백마부대는 "임마누엘 소대를 지체肢體"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의 십자군", "정의의 군대"라고 말했다. 그는 임마누엘 소대 때문에 백마부대에 "하나님의 가호하심이 더욱 극진할 것"이라고 기원했다. 임마누엘 중대의 군목 박귀현은 〈교회연합신문〉으로 보낸 편지에서, 임마누엘 중대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20세기의 자유 십자군"이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과 한국 교회를 연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베트남에 파견된 군목들이었다."(277-8)


8장 1980년대 이후 보수교회 사회참여의 이론과 사례


"한국의 보수교회는 1980년대를 지나면서 전두환의 군사독재 횡포가 점점 더 심해지는 가운데 정교분리, 전도, 반공 등의 논리에 기대어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데 대한 신학적 "명분"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구조적 악 앞에서 침묵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한국 보수교회의 새로운 이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재권主宰權이 실현되는 영역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와 미래를 포함한 모든 시간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역사적 성격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 "이미" 이 땅에 임하였고, 그 완전함은 미래에 올 것이라 가르쳤다." "하나님나라의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동참하는 일이 곧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는 것이 되게 해주었다."(303-5)


"1980년대 한국 보수교회가 전반적으로 어용화되거나 제도적인 불의 앞에 침묵하고 있을 때 사회참여의 최일선에 서 있었던 이만열은 당시 보수교회의 사회참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만열은 매우 보수적인 교단인 "고려파(즉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출신으로 한 번도 자신의 교단을 떠난 적은 없으면서도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신학자, 기독교 사회활동가들과 교류하며 협력한 매우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해서 모범을 보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 사회참여의 당위성을 학문적으로 설파하여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만열은 스스로의 신앙적, 학문적 화두를 "신앙과 역사 그리고 민족"이라고 정의하곤 한다." "특히 친구인 김창락의 권유로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안병무, 서남동 등 민중신학자들과의 만남은 "신앙과 신학상의 개안"을 가져올 정도로 이만열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324-5)


"사회참여에 대한 손봉호의 가치관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말은 〈선지자적 비관주의prophetic pessimism〉다." "문제는 비관주의가, 허무주의나 상대주의처럼 패배주의로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였다." "손봉호는 그 가능성을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에서 보았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면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심판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들이 이런 역설적 기능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궁극적인 구원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구원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오게 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손봉호는 철학자와 선지자에게 비판이 각각 의미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선지자적 비관주의"는 낙관주의에서 오는 교조주의와 비관주의에서 오는 패배주의를 철학자들이 극복할 수 있는 태도를 제공한다고 보았다."(334-5)


9장 2천년대 초 한국 개신교 보수주의자들의 친미·반공주의 이해


"근본주의를 포함하여 현대 복음주의의 신학적, 역사적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19세기 미국의 "복음적 기독교evangelical Christianity" 속에는 당시 사회·문화적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었던 진보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의 복음적 기독교인들 중에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애쓴 사람, 여권신장에 힘써 오늘날 여성주의의 선구자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19세기 내내 진보적, 개혁적 역할을 담당했던 복음적 기독교인들의 후손들이 20세기에 들어서 보수적인 사회, 정치, 문화적 행동을 보인 현상을 두고 "대반전the great reversal"이라고 부른다. (대반전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근본주의자들은 당시의 역사적 "변화"를 총체적으로 상징했던 근대성이 1920년대 이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수용되어 보편적인 미국의 가치가 되었을 때 여전히 근대성을 거부하고 그들이 생각한 이상적 과거를 "보수"했다."(357-8)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과 경계심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직후부터 미국 사회에 퍼졌다. 그런데 공산주의의 위협을 가장 심각하게 느낀 사람들은 서구 문명을 "성경에 근거한 문명"으로,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생각한 개신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무신론적 공산주의는 진화론과 더불어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탄의 주무기였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가치와 미국의 섭리적 위치에 대해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성경적 서구 문명과 기독교적 미국을 붕괴시키고 있다고 그들이 판단했던 근대성과 더불어 종말론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던 터라 공산주의 러시아의 등장은 그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공산주의 음모론은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흥미로운 점은 극단적인 반공주의가 극단적인 애국적 종말론과 연결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358-9)


"한국 기독교인들이 견지하고 있던 반공주의는 해방공간과 6·25 전쟁을 통해 공산주의와 직접 충돌하면서 극단적으로 강화되었다. 일본의 반공정책 때문에 일제강점기 동안 사회주의 세력과 크게 충돌할 일이 없었던 교회는 해방 직후 북한 지역을 장악해가던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과 충돌했다. 일제에 순응하고 자본주의적, 비민중적이었던 북의 교회는 반봉건·반제국주의를 표방한 사회주의 주도세력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와 기독교를 조화시킬 수 없었고, 미국과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남쪽으로 "대탈출"을 감행했다. 한경직을 비롯하여 이렇게 남하한 지도자들은 반공주의를 신학화 하여 북의 공산정권을 종말론적 적그리스도라고 단정했다." "반공주의를 종말론 신학과 연결시킨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전쟁 전부터 "북진통일"을 주장하여 반공·멸공의 선봉에 섰으며, 전쟁 중에는 휴전을 끝까지 반대했다."(368-9)


"미국의 경우를 적용하여 분석해보면, 복음주의 우파가 정치적으로 적극적을 띠게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외부적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첫째, 그들의 종교적 세계관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이 조성되어야 한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우주 전체의 최종 운명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면서 정작 이 세상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현실은 언제나 비관론을 증명하기 마련이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현실적 비관주의는 모든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하려는 복음주의 특유의 신학적 경향과 합하여 대개 정치적 침묵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해가다 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접어든 사회가 개인의 영혼을 위협한다고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느끼는 단계에 이른다. 이 시점이 되면 복음주의 우파는 영혼을 위해서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374-5)


"'잘못된' 세상을 바꾸겠다는 복음주의 우파의 행동은 그들이 변화지향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권위에 순응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변화가 자신들의 신앙적 세계관에 위협적이라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현실 정치에 뛰어들지 않는다. 신앙적이건 정치적이건 그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은 언제나 몇몇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의 동기부여와 선동에 의해서다. 보수적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적 힘의 향방을 대단히 민감하게 감지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 근본주의 지도자들의 정치적 행동에 관해 연구한 한 역사가는 그들이 어떤 "힘의 공백power vacuum"을 감지했을 때 그것을 채우는 데 재미를 느낀다고 했다. 미국에서 1970년대에 기독교 신우파the Christian New Right나 도덕적 다수the Moral Majority, Inc. 운동이 등장하여 복음주의자들 다수가 정치적으로 활기를 띠게 된 것은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발생한 현상이었다."(375)


10장 한국 기독교 뉴라이트의 이념과 세계관


"기독교 우파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결합된 현상이다. 그들은 종교적 사명감에 따라 정치적인 활동을 펴고 있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서라면 종교적 신념도 접어둘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이다. 정치집단으로서 기독교 우파가 정치 현장에서 믿는 것은 신의 섭리가 아니라 표의 힘이다. 라헤이는 "중생한 기독교인"이 미국 전체 인구의 25~30%이므로 그 비율만큼의 공직을 차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독당(대표 전광훈)은 18대 총선에 나서면서 "권력은 표에서 나온다"고 선언했다." "표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의) 기독교 우파는 가톨릭 가운데 반공주의와 전통적 윤리관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협력했다. 신학적으로 근본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는 기독교 우파가 과거 맹렬한 공격의 대상이었던 가톨릭과 협력한다는 사실은 미국 기독교 우파의 행동 가운데서도 가장 놀라운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398-9)


# 한국 역시 뉴라이트 기독교연합과 뉴라이트 가톨릭연합 그리고 뉴라이트 불교연합이 모여 뉴라이트 전국연합을 구성


"한국 기독교 뉴라이트가 생각하는 대한민국(기독교 역사관과 세계관에 따라 구성된 '상상의 공동체')은 건국세력 및 근대화 세력의 주도로 만들어지고 발전해 온 우파 공화국으로서, 좌파가 정권을 잡기까지 '성공의 역사'를 이루어 온 국가였다. 대한민국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이승만의 "현실주의적 선택"과 "민주적 선거과정을 거쳐" 탄생한, "어떤 정통성의 하자"도 없는 나라다. 분단과 6·25 전쟁의 책임은 소련과 김일성에게 있다. 한국과 미국의 작전수행 중 민간인 "오인 사격"이 있었지만 인민군의 민간인 납치와 학살에 비할 바 아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이루어진 빠르고 성공적인 근대화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라는 "조건 하에서" 가능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부의 불균형과 권위주의 정치, 그리고 인권의 제한과 탄압은 산업화 과정에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일반적으로 불가피하게 나타는 부작용과 희생"이다."(405)


"미국 뉴라이트운동은 크게 종교적 우파, 보수적 기업가, 그리고 네오콘이라고 불리는 지식인·정치인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집단은 뉴라이트운동 내에서 각각 독특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종교적 우파, 즉 기독교 우파가 맡은 일은 대중을 동원하는 일이다. 네오콘은 원래 자유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였던 사람들로서 1970년대 후반에 자유주의와 민주당을 버리고 보수진영에 합류한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현실에 의해 습격당한" 진보주의 전력자들이다. 보수로 전향하기 이전, 네오콘들은 평등을 이상으로 삼았으며, 평등한 삶을 가로막는 인종, 성, 계층 등에 의한 장애물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계급new class"을 형성하게 된 사회운동가, 평화운동가, 급진적 지식인, 교원노조 등이 기회의 균등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an equality of outcome"을 추구하고, 반공과 전통적 가치를 버렸다고 판단했다."(406)


"한국의 뉴라이트가 뜻하는 자유주의는 정부의 개입과 규제가 최소화된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옹호한다는 차원, 즉 경제적 차원으로 제한되어 있다.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작은' 정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정치·문화·사상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고 그 조건으로서 양심과 삶의 방식에 관한 개인의 선택을 철저히 보장하려 한다. 사상, 종교, 예술의 자유를 중시할 뿐 아니라 성性, 낙태, 도박, 술, 중독성 물질 등과 관련하여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자유주의의 한 요소로서 자유민주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 절차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포괄적인 사상과 삶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한국의 뉴라이트, 특히 기독교 뉴라이트가 이런 차원에서도 자유주의를 추구하는지 의문이다."(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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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상인 - 서울,개성,인천 지역 자본가들과 한국 부르주아의 기원, 1896~1945 역비한국학연구총서 28
이승렬 지음 / 역사비평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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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8세기 후반 도성의 상업계에 두 가지의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게 된다. 하나는 시전상인과 사상층이 경제외적인 분야 즉 조선왕조 정부·궁방·권세 있는 양반사대부의 후원을 얻기 위해 벌인 경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상품유통경제의 주도권을 둘러싼 시전상인 대 사상층의 경쟁이었다. 도고행위─시전상인과 같은 관상도고나 경강상인과 같은 사상도고─는 모두 경제 외적인 배경을 전제로 행해지는 상행위였지만, 도고상인 간의 경쟁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 아래로부터의 상품화폐경제 발달을 반영하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재야 사림과 중앙관료 사이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기반이었던 사림정치의 주자학 이념이 파탄을 맞고 소수의 경화사족이 정권을 독점한 것도 도성 주변 상인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여건이었다. 세도정권은 수령-이서층으로 연결된 수령권을 매개로 재지사족의 향권을 제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 의한 농민수탈을 방조하면서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50)


"농민수탈의 방조는 세도정권이 말단 지배기구에서 복무하는 수령과 이서층에게 주는 복종의 대가였으며, 이러한 부패의 공유를 통해 세도정권은 정치적 생명을 연장해갔다." "조선의 19세기는 현물경제에 기초한 국가적 상품화폐경제와 화폐수탈에 기초한 농민적 상품화폐경제가 병존하는 시대였다." "한말의 조세수취제도 및 재정운영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개혁의 최우선 과제는 현물경제와 화폐경제가 병존하는 지금의 이중구조를 혁파하고 화폐경제로 완전히 전환하는 것과 중간수탈이 자행될 수 있는 허점을 가진 현 징세기구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는 것이었다. 전자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세금납화의 젼면실시와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화폐개혁, 그리고 국고은행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중앙은행의 설립이 요구되었으며, 후자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세의 부과와 징수체계를 분리하여 근대적인 징수제도를 수립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51-2)


"(광무정권과 도고상인층이 합작하여 금융근대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도고상인들이 은행가로 전환한 것은 한국에서 부르주아의 등장을 의미했다. 정부와 상인의 공생관계 위에서 성장한 그들은 국가권력에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식민지 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 대한제국의 금융근대화를 추진했던 은행가들은 대한제국 금융기구의 식민지적 재편을 주도했고, 일제강점 이후에는 조선상업은행장 및 한성은행장을 지내는 등 금융계의 주요인물이 되었다. 또 친일귀족, 일본인 고위관리와 자본가, 그리고 한인 자본가들이 함께 식민지기 '자본과 권력'의 교제를 위한 최고의 사교공간인 대정친목회, 조선실업구락부를 조직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은 식민지기 금융 산업의 주변에서 부르주아로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렸지만 사회를 주도할 만한 도덕적·이념적 헤게모니를 가지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대한제국의 유산인 그들은 식민지 근대, 식민지 자본주의가 전개되던 발판이기도 했다."(59)


# 조선은행 창립(1896.6), 한성은행 창립(1897.2), 대한제국 출범(1897.10), 대한천일은행 설립(1899.1)


제1부 대한제국과 상인


"조선은행의 초기 영업은 상업금융과 정부의 지원을 통해 순조로웠다. '창립주의서'에 나와 있듯이 상업금융은 '금은포면'과 같은 상품을 담보로 한 연리 12~24%의 단기대부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정부의 지원도 적지 않아 운영자금을 조성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조선은행 영업은 독립협회운동의 성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창립 발기인 대부분이 독립협회 창립 발기인인 점, 독립협회운동이 고조기에 달했던 1889년까지는 정부의 조세금 취급인가를 받거나 국고금 예치 등의 특혜를 얻었지만 1889년 후반 독립협회운동의 좌절 이후에는 영업상황을 보여주는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은행장 안경수가 1898년 6월 한국을 방문한 일본 다이이치은행 두취(頭取) 시부자와 에이이치를 통하여 100만 원을 차입하여 태환지폐를 발행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8월에 망명함으로써 은행을 주도할 수 있는 인물이 없어진 점 등은 조선은행의 부침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80-2)


"1899년 10월부터 이용익을 중심으로 한 광무정권의 관료들은 차관도입을 위해 일본·미국·프랑스·러시아·벨기에 등 여러 나라와 분주하게 접촉했는데, 이 사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국제정세에서 일본의 주도권이 강화되는 추세였으나 1895년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 이후에는 조금 달라져서, 상대적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기는 했지만 열강들의 세력은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관계는 광무정권이 독자적인 개혁과 외교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력 균형을 조금이라도 깨는 조치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제재가 돌아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열강의 간섭을 타파하려는 구체적인 시도로는 광무정권이 프랑스계 자본인 운남雲南신디케이트와 체결한 차관 계약이 있는데)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등을 통해 일본의 침략 의도를 체험한 광무정권은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103-4)


"일본공사 하야시는 각국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면서 광무정권 내에서 이번 차관 교섭을 반대할 세력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고종을 직접 알현하는 자리에서 차관교섭이 향후 대한제국에 미칠 해악을 강조하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영국, 미국, 일본 삼국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영향력이 대한제국에서 신장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이해관계였기 때문에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었다." "마침내 정부는 1902년 2월에 운남신디게이트와 맺은 차관도입 계약의 이행 거부를 선언하게 되는데, 이는 달리 말하자면 차관을 제공하는 나라의 경제적 지배를 의식해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들이 제공하는 차관을 선호했던 이용익의 노선이 1902년 1월 30일에 영일동맹을 체결한 일본외상 고무라의 노선에게 패한 것이다. 열강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서 외자도입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광무정권은 외자도입을 추진하는 와중에도 많은 부작용을 낳는 백동화 발행을 늘려갈 수밖에 없었다."(106)


"대한천일은행의 본점 경영진은 크게 네 가지 계통에서 충원되었다. 첫째, 민병석·이근호·최석조와 같은 황실 측근의 관료 및 재무관료, 둘째, 김기영·홍정섭 등으로 대표되는 개성상인, 셋째 조진태로 대표되는 시전상인과 경성의 대상(大商)인 김두승·백완혁, 넷째 인천 객주 출신의 김종례 등이다. 나머지 임원들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전환국 전·현직이 대한천일은행의 운영을 주도하거나 참여했다는 사실은 대한천일은행의 설립이 백동화 인플레이션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백동화 유통 확대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자금 조달원인 전환국 관료 최석조를 중심으로 하여 경성·개성·인천의 상인들로 짜여진 대한천일은행의 경영진은 국가와 상인의 협력 관계가 은행 설립의 모태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1902년에 영친왕이 은행장, 광무정권의 재정관리자인 이용익이 부행장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120-1)


제2부 일본제국주의와 은행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주의는 대한제국 정부에 강요한 '제1차 한일협약'(1904년 8월 22일)을 맺고 재정과 외교 분야의 정무를 실질적으로 관장했다. 1904년 10월에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일본 대장성 주세국장 메가타 다네타로가 부임했고 그가 맨 처음 단행한 사업은 대한제국의 화폐발행기관인 전환국의 폐쇄였다. 또한 그에 그치지 않고 메가타는 조선의 화폐와 재정제도를 전면적으로 바꾸어나갔다. 그동안 인플레이션을 촉발시킨 원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화폐의 침략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던 백동화는 이제 더 이상 발행되지 않고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메가타 다네타로의 두 번째 사업은 다음해 1월 15일에 체결된 탁지부와 일본 다이이치은행 간의 '화폐정리 사무에 관한 계약'이었다. 이로써 다이이치은행은 한국의 화폐정리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를 취급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213)


"일본 정부는 1905년 3월에 칙령 제73호를 공포하여 다이이치은행에게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고, 이 은행은 한국에서 실질적인 중앙은행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다이이치은행권은 칙령 2호에 근거한 금본위제가 아니라 일본의 원화(圓貨)를 발행 준비로 하는 원화본위제 아래에서, 즉 1905년 6월 1일부터 한국의 본위화가 된 다이이치은행권은 금화·금은지금·일본은행태환권 등과 같은 정화(正貨)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일본 정부의 치밀한 계산이 들어가 있었다. 식민지 화폐제도를 수립하는 데 드는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하나의 이유였고, 식민지 경제의 모순이 일본 경제에 끼칠 위험성을 대비한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화폐정리를 위한 화폐교환 과정에서) 한상韓商들이 재산상의 피해를 입은 것은 2대1로 설정된 구화폐와 신화폐의 교환비가 및 까다로운 교환조건 탓도 있지만, 불안감으로 인해 적절한 재산운용에 실패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214-5)


# 일본이 관여한 주요 조치

1. 대한천일은행을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1911년)

2. 한성공동창고(주) 설립 : 부동산 담보 대출을 시행하여 부동산 중심의 자산구성을 가진 한상들의 금융 경색 완화

3. 한성수형조합 설립 :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어음 발행과 유통을 활성화(신화폐와 일본통화 태환권만 결제수단으로 인정)

→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체제를 안정화시키는데 기여


"조선상업은행의 대출 동향은 식민지 경제의 흐름의 대강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민족적 구분 없이 191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증가했던 미곡 및 포목상에 대한 자금 융통은 식민지적 교역구조라 할 수 있는 미면교환무역의 확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조선회사령'을 실시하여 자유로운 자본 운동을 억제하고 한국을 일본의 식량공급 기지이자 상품 시장으로 만들고자 했던 조선총독부의 지배정책에 은행자금이 동원되었다. 토목건축업자에 대한 대출 역시 관공서 및 군대 등의 시설을 건설하는 용도로 쓰였다는 점에서 '무단통치'로 명명되는 1910년대 지배정책의 물리적인 기반 조성에 은행 자금이 동원된 것으로 봐야 한다." "특히 1910년대 후반기에 미곡수출이 지나치게 증가하면서 국내 미가가 급등하고, 이에 따라서 수입 면직물의 가격 역시 상승하여 물가가 크게 오르는 등 인플레이션 현상이 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상업은행은 계속해서 금리를 인하하면서 미면교환무역을 지원했다."(279)


제3부 식민지 조선사회와 계급


"1910년대의 한인 자본가들의 대응은 크게 네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첫째, 대한천일은행·조선상업은행의 경영진에 참여했던 김기영·김진섭·홍충현처럼 금융·상업자본에서 금융자본 혹은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을 모색했거나 둘째, 한일은행의 백인기와 민대식처럼 지주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 전환한 경우이다. 셋째, 경성방직의 김성수와 김연수처럼 지주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사례이고 넷째는 박승직처럼 중세적 상업자본에서 근대적 상업자본으로 성장한 사례가 있었는데 경성의 여러 포목상 중에서도 그러한 자들이 많았다. 조진태와 백완혁은 어떤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1910년대에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배경이 다른 상인이나 지주들에 비해 우월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놓인 유리한 환경을 이용하여 자본의 전환을 모색하지 않은 이유는 한말 이래로 끊임없이 정치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자본의 운동을 도모했던 그들만의 전통이 1910년대에도 그대로 답습되었기 때문이다."(312)


"은행의 경영진이 선택한 자본축적의 길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대한제국의 몰락에 직면하여 관료와의 유착관계에서 벗어나 민간 자본가로 전환한 경우이다. 상업·산업자본가로 전환한 개성상인 김기영과 금융·산업자본가로 전환한 김진섭은 노년의 나이에도 기업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유형은 대한제국과의 유착을 통한 자본증식에 한계를 느끼면서 또 다른 권력층인 친일정치세력 및 일제와의 정치·경제적 유대관계를 통해 관변 혹은 예속적 금융자본가의 지위를 유지한 경우이다. 조진태·백완혁이 이 사례에 해당된다." "대정친목회 회원이던 조진태는 『조선일보』의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1920년 3월 5일에 『조선일보』는 '신문명 진보주의'를 사시로 내걸고 창간되었지만, 일제와 유착해 있던 조진태를 비롯한 대정친목회 인사들로는 민족주의가 고양된 1920년대 전반기의 한국 사회에서 여론을 주도할 수 없었다."(313-4)


"한편 전라도 대지주의 자제로서 일본유학을 다녀오고 서울에 정치적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20대 초반의 청년 김성수 주변에 엘리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1919년에 김성수는 한국 방직산업의 선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경성방직을 창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한 아시아 시장에서 유럽 상품의 퇴조, 면방직제품의 수요가 풍부한 국내 시장의 여건 등은 당시 한국에서 면방직산업이 발흥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그의 인적 네트워크는 그의 선택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국가의 보호도 받지 않고 시장의 동향을 완전히 예측할 수 없었던 상태에서 지주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드물고 획기적인 일이었다. 조기준의 지적대로 김성수는 마셜이 언급한 '개척적인 기업가'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김성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식민지 조선 사회의 여론 형성에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동아일보』를 1920년 4월에 창간했다."(322-3)


"이러한 그의 행보는 지대나 이자 수익에 익숙해 있는 지주 혹은 자본가들과 달랐다. 그 덕택에 그는 약관의 나이 20대에 지주·교육·산업·언론자본 등 복합적 성격을 지닌 부르주아로서 식민지 조선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인사로 부상했다." "김성수는 친일적 문명개화론자, 애국계몽운동 세력, 대상인과 지주층, 그리고 일본유학 경험이 있는 청년 지식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실로 다양한 세력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으며, 그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자본주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세력의 핵으로 부상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부르주아 1세대에 속하는 시전상인 출신 장두현과 미곡상인 고윤묵이 김성수의 인적네트워크 안에 들어간 점이다." "이러한 인물들을 그의 주변에 모이게 한 것은 그가 부르주아 1세대까지 포함하는 자본가 사회의 지도적 위치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323-5)


"(1923년에 일어났던 물산장려운동은 의욕이 넘치는 산업부르주아의 정치적 능력을 대중적으로 검증하는 시험무대였다.) 『동아일보』는 조선인들이 살기 위해 당면과제인 조선사람의 생산력 발달─민족경제의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민중은 민족적 대의로 개인의 경제적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조선인이 만든 상품을 사야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싼 논쟁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항했던 여러 논객들 역시 그러한 논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민중지향적 계몽운동가나 산업부르주아의 입장을 대변하는 『동아일보』 모두 '개인'보다는 전체-민족을 강조하는 점에서 일치했다. 그들 모두 조선인의 경제력이 향상되면 민중의 절박한 생활현실이 개선될 수 있다는 단계론적 진화론적 자본주의 근대화론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또 비판적 견해들에 대해서는 계급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만 치부했고, 비판세력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던 점에서도 비슷했다."(334)


"물산장려운동이 실패한 원인으로는 조선인들의 자본·기술·경제적 역량·자본주의적 단합력 부족·경제상 정치적 실권이 없는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이미 운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문제들이고, 사회주의자들의 조직력이 일반 민중의 소비패턴까지 규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그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산 상품의 가격 폭등과 같은 시장질서의 왜곡을 통제할 지도력을 결여한 운동주도세력에 있었다. 물산장려운동 주도세력은 민족적 명분만을 민중에게 강요하고, '우리 것을 사라'고 외쳐댈 뿐이었지 민중의 신뢰를 얻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인도의 스와데시 운동이 민중적 지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민회의와 간디라는 정치적·도덕적 구심점이 있었지만, 이에 비해 물산장려운동에서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던 개인 혹은 단체가 없었다."(336)


"일본과 조선은 같은 동족이라는 '일선동조론'을 매개로 한 '내선일체론'은 조선인 자본가가 '민족'을 대신하여 일본·황국(皇國)을 국가로 대체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였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이란 가치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내선일체론'은 차별 받고 있는 민족을 위한 실천 이념이었다. 자본가 계급의 이데올로기인 '문화적 민족주의'는 그러한 논리를 더욱 다듬었다." "1920년대 문화운동을 대표하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의 표면에는 독립을 위해 우리 민족이 무엇을 고치고 준비할 것인가에 적극적인 주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망국에 이르게 한 '조선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인식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는 계기만 주어진다면 '내선일체론'을 수용할 터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황국신민'관, 그리고 민족 차별을 벗어나기 위해 청년들에게 침략전쟁에 학병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하는 행위는 아마도 그의 입장에서는 크게 모순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346-7)


"박흥식의 식민지 파시즘 수용은 개인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현준호는 호남의 대지주였고, 경성방직과 『동아일보』에 이사 및 주주로 참여했으며, 또 박흥식이 운영하는 화신무역의 대주주였다. 박흥식은 경성방직의 이사 및 주주로 참여했으며, 김연수 및 경성방직은 화신무역의 대주주였다. 한말부터 친일적 금융자본가로 조선실업구락부 창립의 주역이었던 한상룡은 김연수가 설립한 남만주방적(주)의 발기인이었고 김연수는 조선생명보험회사의 주주였으며 조선실업구락부의 회원이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인 대자본가들은 서로 사업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산업부르주아가 주도하여 설립한 『동아일보』 창간사에 표방했던 자유주의·민주주의 이념이 동료 부르주아에 의해─그리고 스스로에 의해─철저하게 부정되고 있었다. 또 최초로 정치적 주체임을 자임했던 부르주아 세력은 '지배할 권리'와 '돈 벌 권리'를 맞바꾸었다."(350)


결론


"한국사에서 부르주아의 기원을 탐색할 때 피해갈 수 없는 문제는 근대로 이행할 수 있는 사회적 역동성이 과연 조선왕조 사회 내부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에 근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가능케 할 내적 가능성을 농업적 경로에 제한하지 않고 상업적 경로까지 확장시킨다면 한국의 근대이행에 대한 이해는 훨씬 풍부해질 수 있다. 상업적 경로를 고려한다는 것은 단지 관권의 비호를 받고 있는 독점적인 시전상인에 대항하는 자유상인을 연상시키는 경강상인 같은 사상(私商) 즉 상업부르주아의 성장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17세기 이후 상업변동에서 성장한 상인과 국가의 상호의존적 관계 그리고 그것의 사회적 대응을 시야에 넣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아래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조선왕조 사회의 내적 변화를 제한한 요인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근대화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기도 했다."(354)


"상인들의 자본과 지식은 조세제도 개혁과 화폐금융정책에 반드시 필요한 근대 금융기관 설립의 씨앗이었고, 1903년 중앙은행 창설을 주도하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대한천일은행에서 중앙은행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근대 금융기관 설립이 추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세·화폐제도 개혁을 위시하여 사회경제 분야의 개혁을 위해 금융근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역대 어느 조선왕보다 강한 권력을 소유하게 된 고종이 의정부 내의 반대를 물리치면서 적극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양반관료들의 정치 공세에도 불구하고 상민 이용익을 재상에 등용하여 광무정권의 근대화를 추진하게 한 것은 고종의 권력 기반이 안정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였다. 전제황권의 수립은 정치제도의 발달이란 측면에서 볼 때 반동적인 현상이겠지만, 그것 또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의 개혁과정에서 나타나는 정부주도성에 해당되는 일이다."(3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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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어스 - 홀로코스트, 역사이자 경고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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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론 히틀러의 세계


"히틀러의 견해는 인간은 동물이며 윤리적 숙고 그 자체가 유대인의 타락을 보여주는 징후라는 것이었다. 보편적 이상을 세우려는 시도와 이를 향한 노력은 바로 증오해야 할 대상이었다." "히틀러는 비종족주의적 태도란 모두 유대적인 것이며, 보편 관념은 유대인의 지배 도구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둘 다 유대인의 특성을 지녔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명백히 투쟁을 포용한 것은 유대인의 세계 지배 욕망을 감추는 엄폐물일 뿐이었다. 국가에 관한 추상적 관념도 전부 유대인이 만든 것이다. 히틀러는 이렇게 썼다. 〈그 자체가 목적인 국가 따위는 없다.〉 히틀러는 분명하게 밝혔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특정 국가나 정부의 보존이 아니라 인류의 보존〉이었다. 기존 국가들의 국경은 종족 투쟁의 과정에서 자연의 힘에 의해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정치적 국경의 존재 때문에 영원한 진실의 경계에서 돌아서서는 안 된다.〉"(22-3)


1 생활공간


"히틀러는 『나의 투쟁』을 쓰면서 생활공간Lebensraum이라는 낱말을 배웠고 이를 자신의 의도에 맞게 사용했다. 그의 저술과 연설에서 생활공간은 물리적 생존을 위한 부단한 종족 투쟁에서부터 세계 최고의 생활 수준을 갖춘다는 주관적 의미를 위한 끝없는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가 자연에 투쟁을 부여한 온갖 의미를 다 표현했다. 생활공간이라는 용어는 독일어에 프랑스어의 생활 환경biotope에 상당하는 낱말로 들어왔다. 생활공간은 생물학적 맥락보다는 사회적 맥락에서 다른 것을 뜻할 수 있다. 이를테면 가족의 안락함이나 〈거실〉과 비슷한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한 낱말에 담는 것은 히틀러의 순환적 사고를 촉진했다. 다시 말해 자연은 곧 사회이고, 사회는 곧 자연이었다. 따라서 물리적 생존을 위한 동물의 투쟁과 더 나은 삶을 원하는 가족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둘 다 생활공간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37)


"유대볼셰비즘 신화는 히틀러의 전체적인 구도에서 빠진 조각을 채워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특정 지역을 지구 전체와, 슬라브족에 맞선 식민지 전쟁의 승리에 대한 기대를 유대인에 맞선 영광스러운 반식민지 투쟁과 결합했다. 소련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한 차례 공격함으로써 독일인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소련 유대인의 괴멸은 유대인 세력의 제거를 뜻했다. 그렇게 되면 동부 제국의 창설이 가능해질 것이고, 이는 동유럽에서 미국의 프런티어 역사를 되풀이한다는 뜻이었다. 독일 종족의 제국이 세계 질서를 교정할 것이며 유대인으로 오염된 지구에 자연을 되돌려줄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유대인은 편리한 대로 제거할 수 있었다. 열등한 슬라브인이 독일을 어느 정도 방해한다면, 유대인이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종족 제국의 추구는 유대인 근절 정책을 가져올 것이었다."(54)


2 베를린, 바르샤바, 모스크바


"히틀러는 독일 국가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 팽창은 실제로 그의 목적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주의의 효용을 이해했지만 실제로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히틀러에게 동포 독일인들의 민족 감정은 그들을 종족 투쟁으로 몰아갈 수 있는 이른바 〈공간 정복의 힘〉이었다. 독일인들은 종족 투쟁에서 자신들의 고귀한 운명을 보고 실현할 수 있을 것이었다. 독일인들을 나라 밖에 그들이 지배할 수 있는 외계 속으로 들여보내려면 조국애가 필요했다. 히틀러를 이해했던 어느 독일인 여성이 말했듯이, 〈좁은 공간을 좋아하는 성향은 끈적한 덩어리처럼 독일 국민에 들러붙어 있는데, 이를 극복해야 한다〉. 생활공간이라는 훨씬 더 큰 대망을 위해서 히틀러는 (군국주의적) 발칸 모델에 다음의 일곱 가지 혁신을 더했다. 일당 국가, 폭력 전문 집단, 무정부 상태의 수출, 제도들의 이종 교배, 국가 없는 상태의 창출, 독일 유대인의 세계화, 전쟁의 재정의."(68-9)


"1918년 독일의 재난은 폴란드의 기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에서 독일인들을 위협했던 것은 거의 전부 폴란드인들에게 유쾌한 것이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서는 부당함의 상징이었지만 독립국 폴란드가 존재할 수 있는 법적 질서의 기둥이었다. 독일군이 동유럽에서 철수했을 때, 새로운 폴란드 군대가 그 힘의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폴란드인들은 독일의 속국이었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소련군과 싸웠다. 폴란드는 폴란드-소련 전쟁에서 승리했고, 1921년 리가 조약으로 소련에 맞닿은 폴란드 동쪽 국경이 정해졌다." "유대인은 거의 국토 전역에 많은 숫자로 존재했고, 따라서 다른 폴란드 시민들에게 유대인과의 교류는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독일만큼이나 폴란드에서도 많은 유대인이 동화되었다. 차이는 동화된 폴란드 유대인 중에 이디시어를 말하고 이러저러한 형태로 종교적 전통을 엄수하는 자가 열 배 더 많았다는 것이다."(77-8)


# 폴란드의 현상유지 정책

1. 소련과 불가침 조약 체결(1932.7)

2. 독일과 불가침 조약 체결(1934.1)


3 팔레스타인의 약속


"히틀러는 오스만 제국에서 발칸 반도의 국민국가들이 탄생한 것을 군국주의의 긍정적인 사례로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폴란드인들은 같은 역사를 민족 해방으로 보았고 이것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확산되리라고 이해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들에서 떨어져 나온 유럽의 속령들이 대체로 국민국가가 되었던 반면, 아시아의 속령들은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령〉 형태로 프랑스 제국이나 영국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 지역들은 독립국을 세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따라서 강대국에 맡겨져 정치적 훈련을 받아야 했다. 사멸한 오스만 제국의 남부 시리아에서 떨어진 팔레스타인은 그러한 위임 통치령의 하나였다. 1920년 영국이 점령했을 때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은 매우 적었지만, 영국의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미래의 유대 민족의 고향으로 제시했다. 이는 시오니스트들의 바람과 일치했다. 그들은 언젠가 완전한 국가의 지위를 얻기 위한 협상이 타결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100)


"독일의 유대인 정책과 폴란드의 유대인 정책이 처음으로 크게 충돌한 곳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였다. 나치의 탄압으로 독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는데, 이 때문에 아랍인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우파 시오니즘은 더욱 과격해졌으며 이르군(Irgun, 폴란드군사기구를 본따 만들어진 유대인 민족군사기구)을 지원한다는 폴란드 외교 정책이 실현될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1935년 이후 외교 정책을 수립한 폴란드인의 작은 집단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프로메테이즘에서 다른 형태의 프로메테이즘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피우수트스키가 추진한 원래의 프로메테이즘은 폴란드가 동쪽의 이웃 민족들, 특히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도록 도을 수 있다고 가정했다. 새로이 등장하던 프로메테이즘에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에 반대하는 유대 민족을 지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폴란드 당국은 반反소련 노선을 포기하면서 친親시오니즘 음모로 노선을 바꾸었다."(109)


# 프로메테이즘Prometeizm : 제국에 반대하고 핍박받는 민족들의 대의를 지지하는 사업


4 국가 파괴자들


"1935년 독일 유대인은 2등 시민으로 영락했다. 1938년 일부 나치는 유대인에게서 국가의 보호를 박탈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국가를 파괴하는 것임을 알았다. 법적 차별은 어느 것이든 법률과 관료적 업무의 다른 측면에 미치는 예기치 않은 영향 때문에 복잡해지곤 했다. 몰수와 이주 같이 간단해 보이는 문제들도 나치 독일에서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반면 오스트리아가 파괴됐을 때, 오스트리아 유대인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내다보고자 했던 대다수의 손에 고통을 당했다. 국가 없는 상태는 폭력과 절도를 수행할 준비가 된 자들에게 기회의 창을 열어 주었다. 나치 국가는 병합의 논리에 따라 그 창문을 닫아야 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가 되어야 했고 돌격대가 조장한 무정부 상태는 나치 국가의 통치 능력을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국가 없는 상태의 순간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132-3)


"(1938년 11월 9일 자행된) 수정의 밤Kristallnacht으로 괴벨스는 오스트리아 모델에서 나타났던 몰수와 추방이 독일에서도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독일 유대인이 대규모로 고국을 떠나기 시작한 것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폭력이 자행된 이후였다. 그렇지만 제국 내부에서 벌어진 무질서한 폭력은 막다른 길이었음이 드러났다. 독일 여론은 대체로 그 대혼란에 반대했다. 사람들은 절망을 목격하자 나치가 기대했던 것처럼 정신적으로 거리를 두는 대신 유대인을 동정했다. 물론 독일인들은 유대인이 폭력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으면서도 동시에 유대인을 전혀 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괴링과 힘러, 하이드리히는 즉각 독일 내부에서 포그롬을 조장한 것은 실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머지않아 이들은 괴벨스가 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렇지만 독일 국경 너머에서, 전쟁 중에, 독일군이 국가를 파괴한 곳에서 포그롬을 실행한다."(136-7)


"폴란드의 관점에서 보면 독일은 유대인 문제에서 혼란을 초래하는 무익한 상대자였다. 독일의 유대인 정책은 팔레스타인의 문을 닫았고 수만 명의 유대인을 폴란드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만일 팔레스타인에서 어느 한편에 화를 내야 한다면 그것은 아랍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랍인과 무슬림의 충성은 영국 제국 전체에 매우 중요했기에 감히 건드릴 수 없었다. 충돌이 다가오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 없었다. 1939년 5월의 어느 영국 백서White paper는 훗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면 아랍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영국은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폴란드를, 이 점에서 간접적으로는 폴란드의 유대인을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즉각 유대인의 대량 정착을 위해 열어 놓아야 한다는 폴란드의 의견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151-2)


"스탈린은 히틀러와 유럽의 동부를 나눠 갖기로 하면서 무력 충돌을 유럽의 서부로 돌리기를 바랐다. 그곳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상대해야 할 것이었다. 이는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보면 소련 외교의 작은 역할로써 자본주의의 모순이 전장에서 발현됨을 의미했다. 스탈린의 전술적 관점에서 보면, 가장 훌륭한 전쟁 수행 방법은 다른 이들이 서로 싸워 있는 대로 피를 흘리게 한 뒤 전리품을 취하는 것이다." "폴란드는 유럽의 전쟁에서 더는 동맹국으로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몰로토프는 폴란드를 〈꼴보기 싫은 자식〉이라고 말했고, 히틀러는 폴란드를 베르사유 조약의 〈비현실적 피조물〉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옛 균형을 제거할 공동의 소망〉을 선언했다. 스탈린은 옛 균형의 파괴가 무정부 상태와 유대인의 고통을 뜻함을 알았다. 스탈린은 폴란드를 반으로 나누는 것이 200만 명의 유대인을 히틀러에게 넘겨준다는 의미임을 이해했다."(156)


5 이중 점령


"히틀러는 스탈린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대리인의 손을 빌려 국가를 파괴했다." "히틀러는 소련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늘 동맹국에 넘겨준 땅을 침공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1939년 히틀러는 스탈린에 국가를 파괴하라고 권유했지만 뒤이어 1941년에 같은 땅으로 직접 출정한다. 그러므로 독일의 퓌러는 국가의 이중 파괴를 염두에 두었다." "독일인들은 1941년에 소련을 침공할 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을, 즉 처음으로 유대인을 대규모로 살해할 수 있는 상황을 찾아냈다. 최종해결이 실현된 곳은 독일에 앞서 소련이 지배했던 곳, 소련이 두 대전 사이의 국가들을 파괴한 후 독일이 소련 제도를 폐지한 곳, 즉 이중 점령 지대였다. 1939년에 독일 지배하의 약 200만 명의 유대인이 거의 전부 죽게 된다. 1939년과 1940년에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된 200만 명의 유대인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애초에 소련의 지배를 받은 유대인들이 제일 먼저 독일의 대량 학살에 희생된다."(176)


"(폴란드 시민들, 특히 장교단처럼 교육 받은 엘리트들을 대량 학살한) 볼셰비키는,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직접 그 일을 했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의미가 명확한 공식 문서로 남겨 기록 보관소에 잘 정리해 놓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찬동할 수 있었다. 진정한 책임은 공산당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는 종족의 우월성이라는 화려한 문구를 썼고, 힘러는 독일 종족을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이는 행위에 도덕적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때가 오자, 독일인들은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책임감도 없이 행동했다. 나치의 세계관에서, 일어난 일은 그저 일어났을 뿐이며 강자가 승리해야 하지만,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의 관계도 전혀 분명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역사History가 자신들 편이라고 믿었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나치는 자신들이 만들어 낸 무질서만 빼고 모든 것을 두려워했다."(183-4)


6 더 큰 악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파멸했을 때, 소련이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점령하고 병합했을 때, 두 나라가 공동으로 폴란드를 파괴했을 때, 슈미트는 국가 없는 상태의 법률 이론을 준비했다. 이는 국제법은 규범이 아니라 힘에서 나온다는 원리에서 시작했다. 규칙은 누가 예외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는가를 드러낼 때에만 흥미롭다. 슈미트에게 〈구식의 국가 간 국제법〉은 구실에 불과했다. 누가 국가를 파괴할 수 있는가, 이것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독일이 퓌러를 따라 〈국가의 영토라는 공허한 개념〉을 무시한다면, 독일의 힘은 그 자연 국경으로 흘러넘칠 것이다. 그 결과는 정치적 행동과 군사적 행동에 대한 규범적 제약(바로 유대인의 것인)으로 교란되지 않는 〈이치에 맞게 분할된 지구〉였다." "힘이 정의였다. 실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원리의 문제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이 결론은 원리라는 개념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11-2)


"특수임무단은 유대인 이외의 다른 사람도 사살했으며, 특수임무단이 아닌 다른 이들도 유대인을 사살했다. 특수임무단이 제일 먼저 유대인을 대규모로 사살했지만, 이들은 독일인 가해자의 작은 부분을 차지한 소수집단이었다. 이들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신화는 전후 독일 연방공화국의 재판 중에 대다수 독일인 살인자들을 보호하고 학살을 독일 사회에서 떼어 내려는 의도에서 등장했다." "1941년의 학살에 현지인들이 연루되었다면, 그것은 독일의 정책이 아니라 현지 반유대주의가 초래한 결과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는 홀로코스트를 정치 없이 설명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동유럽인들의 야만성이 분출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설명은 위안이 된다. 오로지 지나친 반유대주의와 관련된 자들만이 재앙 같은 폭력에 탐닉했으리라는 생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위안을 줄지언정 틀린 이 생각은 나치의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의 유산이다."(216-7)


"동유럽 현지에 반유대주의가 넘쳤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구한 반유대주의는 왜 포그롬이 정확히 1941년 여름에 시작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러한 설명은 포그롬이 독일이 소련을 몰아낸 곳에서 가장 많았다는 암시 가득한 사실과 그러한 곳에서 포그롬을 부추기는 것이 독일의 노골적인 정책이었다는 명백한 객관적 사실을 무시한다." "1941년 후반에 일어난 일은 학살 속도전이었다. 그로써 100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고 독일 지도부는 자신들이 지배한 유대인을 전부 제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 참화는 수동적인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 유대인, 명령 수행자 독일인이나 계획 실행자 독일인, 잔혹한 반유대주의자 현지인 같은 고정 관념으로, 그밖에 다른 어떤 진부한 문구로도, 그것들이 당시에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녔어도, 오늘날 아무리 편리하다고 해도, 설명할 수 없다. 이 미증유의 대량 학살은 특별한 성격의 정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218-9)


"A 특수임무단 지휘관 슈탈레커는 이제 공식을 발견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의 말을 옮기자면, 유대인을 공격하는 데 〈토착 주민이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자진하여 이 조치들을 수행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다. 슈탈레커는 소련 점령기의 경험을 친독일 행위로 〈유도할〉 필요가 있음을 얘기했다. 리투아니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입을 통해서나 매체를 통해서 현지 언어로 전달된 선전의 목적은 그렇게 유도할 도랑을 파는 것이었다. 슈탈레커는 독일이 유도한 포그롬을 일종의 인력 충원 연습으로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이중으로 점령된 라트비아에서 새로운 모델이 등장했다. 독일의 명령에 따라 대부분의 살인을 수행한 현지인들의 학살파견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 지도자였던 빅토르스 베른하르드 아라이스는 유럽 역사상 가장 능숙한 대량 학살자의 한 사람이 된다."(242)


7 독일인, 폴란드인, 소련인, 유대인


"1941년 말 독일은 소련 시민들의 협조를 받아 점령지 소련에서 약 1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특수임무단은 살인 기술을 개선했으며 현지 주민에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법을 완성했다. 특수임무단은 치안경찰과 국방군과 나란히 유대볼셰비즘 논리의 완전한 이행을 향해 조용히 전진했다. 그리고 유대볼셰비즘 논리는 서서히 승리를 가져오는 방법이 아니라 패배를 덮어 가리는 방법이 되었다. 특수임무단은 소련 국가를 무너뜨릴 수 없었지만, 소련 기관들을 파괴한 곳에서는 유대인을 죽일 수 있었다. C 특수임무단 지휘관 오토 라슈는 1941년 9월 〈유대인의 제거〉는 그 전쟁의 원래 목적이었던 전체적인 식민지 개척 작전보다 〈실제로 더 쉬웠다〉고 썼다." "경찰이 원래 할당받은 임무는 1941년 말까지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던 훨씬 더 큰 영역을 통제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을 죽이는 데 대규모로 투입될 수 있었다."(272)


"독일인에 의해서든 소련에 의해서든, 둘 다에 해당되는 경우든, 국가가 파괴된 곳이라면 어디서나 거의 모든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홀로코스트는 국가가 빠르게 연이어 두 번 파괴된 곳에서, 처음에는 소련이 전쟁 이전의 국민국가를 파괴하고 그다음에는 독일이 소련의 정부 기관을 파괴한 곳에서 집단 사살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이중의 〈국가 없는〉 지대에서 발전한 기술, 즉 현지인의 충원, 여러 독일 기관의 이용, 노출된 곳에서의 사살도 동쪽으로 더 나아간 곳, 다시 말해 독일 세력이 확장된 소련 지역 도처에서 적용되었다. 독일인들이 1939년 9월부터 들어와 있었으나 유대인의 대량 학살은 2년이 더 지난 후 시작된 서부 폴란드와 중부 폴란드에는 비밀 가스 시설, 게토에서 추방하기, 유대인 사냥이라는 다른 기술들이 적용되었다. 발트 국가들과 동부 폴란드, 소련의 유대인들에게는 총탄과 구덩이가 준비되었다. 유럽의 남은 유대인은 대부분 아우슈비츠라고 불린 곳을 향하게 된다."(290)


8 아우슈비츠 역설


"아우슈비츠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로서는 비교적 다루기 쉬운 상징이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의 실제 규모를 크게 축소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의 융합은 독일인들이 유럽 유대인의 대량 학살이 발생하고 있을 때 그 사실을 몰랐다는 기괴한 주장을 가능하게 했다. 일부 독일인이 아우슈비츠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많은 독일인이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관해 몰랐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대인의 대량 학살은 독일에서, 적어도 가족들과 친구들 사이에서는, 아우슈비츠가 학살 시설이 되기 훨씬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었고 토론의 대상이었다. 3년에 걸쳐 수만 명의 독일인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수백 개의 죽음의 구덩이 위에서 사살했던 동유럽에서, 대다수 주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았다. 수십만 명의 독일이 학살을 목격했으며, 동부 전선의 수백만 명에 달하는 독일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293-4)


"비슷한 이유에서, 아우슈비츠는 전후 소련과 오늘날의 탈공산주의 러시아에서 편리한 상징이 되었다. 홀로코스트를 아우슈비츠로 환원할 수 있다면, 독일의 유대인 대량 학살이 소련이 막 점령한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잊을 수 있다. 서부 소련에서는 누구나 독일인과 똑같은 이유에서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관해 알았다. 동유럽에서는 대량 학살 방법이 수많은 참여자를 요구했고 많은 사람이 그것을 목격했다. 홀로코스트를 오직 아우슈비츠와만 동일시한다면, 이러한 경험도 역사와 추모에서 배제될 수 있다. ... 물론 이 모든 일은 독일이 소련 국가의 파괴를 꾀했기 때문에, 문제의 소련 시민들이 전쟁 이전의 현실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몇몇 경우에는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려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소련의 선전은 소련 체제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대량 학살에 유용한 협력자가 되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294-5)


"아우슈비츠는 또한 홀로코스트를 간단히 표현하는 기준이 되었다. 신비적이고 환원적인 방식으로 다루면 유대인의 대량 학살을 인간의 선택과 행위로부터 떼어 놓는 것 같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가 아우슈비츠로만 국한되는 한, 아우슈비츠는 그 영향을 받은 대다수 국가들과 그것으로 바뀐 풍경과 절연될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문과 벽은 실제로 파리에서 스몰렌스크까지 세력을 뻗친 악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전쟁 전후로 폴란드에 있었던 작은 땅을 지칭하는 독일어 낱말인 아우슈비츠는 현실의 장소 같지 않다. 아우슈비츠 둘레에는 물리적인 가시철망은 물론 정신의 가시철망도 쳐져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기계화한 학살이나 냉혹한 관료주의, 근대성의 행진, 심지어 계몽의 종착점까지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아이들과 여자들, 남자들의 살해를 인간보다 더 큰 힘들이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하는 비인간적 과정으로 보이게 한다."(295)


"독일은 소련이 점령하지 않은 곳에서는 소련의 점령으로 생겨난 심리적, 물질적, 정치적 자원을 이용할 수 없었다. 독일은 자신들이나 소련이 국가를 파괴하지 않은 곳에서는 파괴된 국가의 파편들을 다시 모을 수 없었다. 독일은 전쟁이 종족 지배 전쟁이 아닌 곳에서는 상대적 박탈의 정치를 적용할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수백만 명의 유럽 유대인은 열차에 올라타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독일의 지배에 들어간 유대인 중에서 아우슈비츠로 가기로 되어 있었던 자들이 그곳으로 갈 예정이 없었던 자들보다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것이 아우슈비츠의 역설이며, 이는 국가들이 어떻게 파괴되고 어떻게 파괴되지 않았는지 고찰해야만 해소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일반적인 계획 속의 상이한 결과들을 설명하는 정치적 특수성이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일반적인 계획을 증명한다. 또한 유대인을 보호하는 데 국가의 지위가 갖는 보편적인 의미도 증명한다."(298-9)


# 에스토니아와 덴마크의 사례 비교

1. 에스토니아 : 소련과 독일의 이중점령 경험, 국가 조직 파괴, 내부인들이 적극적으로 학살에 가담(그럼으로써, 소련에 복무한 혐의 제거), 그 결과 99퍼센트의 유대인 말살

2. 덴마크 : 이중점령 X, 독일 침공 후에도 국가 주권 유지, 독일의 식량 공급 기지 역할, 주권 보호 차원에서 유대인 시민들의 안전 보장, 그 결과 99퍼센트의 유대인 생존


9 주권과 생존


"독일의 동맹국들 중에서는 다른 국가의 잔해로부터 탄생한 꼭두각시 국가들이 홀로코스트가 발생한 무법 지대와 가장 많이 닮았다. 그러한 국가들이 탄생하려면 하나의 국가를 제거해야 했고, 옛 국가의 종말과 새 국가의 창조는 둘 다 독일의 명령으로 이루어졌다. 그 앞선 국가의 시민은 전부 그 이행기 동안 이전 정권의 보호를 빼앗겼다. 독일의 감독을 받아 헌법이 제정되었을 때, 유대인이 그 국가에서 완전한 시민권을 얻기는 불가능했다. 독일은 이 새로운 국가들의 유대인 주민을 먼저 노동 수용소로, 그다음 학살 시설로 수용하기를 간절히 원했고, 이는 현지의 민족정화론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독일이 만들어 낸 꼭두각시 국가, 즉 유고슬라비아에서 탄생한 크로아티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탄생한 슬로바키아는 둘 다 다민족 국가가 파괴되지 않고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던 민족주의자들이 통치했다."(319)


#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셰와 슬로바키아의 요제프 티소 정권, 그리고 자발적으로 유대인 학살에 나선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 정권


# 네덜란드와 그리스, 그리고 프랑스의 사례

1. 네덜란드 : 미미한 반유대주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1940년 여왕 빌헬미나와 정부의 망명으로 관료 기구 붕괴 → 4분의 3 가량의 유대인 말살

2. 그리스 : 미미한 반유대주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1941년 독일에 맞서던 국왕과 정부 붕괴 → 4분의 3 가량의 유대인 말살

3. 프랑스 : 독일과 정책 협력을 맺은 비시 정부가 반유대인 법 주도, 그러나 프랑스가 시민권을 박탈한 유대인들에 한정해서 학살 실행 → 4분의 3 가량의 유대인 생존


10 잿빛 구조자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공격했을 때, 스탈린은 억류하고 있던 폴란드 남성 시민을 이전과 다른 식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굴라크를 떠나 폴란드인 군대로 편성되어 독일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스탈린은 폴란드 시민들을 동부 전선에서 싸우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그곳에서 싸운다면 나중에 소련에 문제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련군은 어쨌거나 그 전쟁 중에 이미 한 차례 폴란드를 침공했으며, 이들이 바로 내무인민위원부로부터 탄압받은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소련과 폴란드에서 멀리 떨어진 서부 전선에서 싸우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곳에서 이들이 독일인을 죽이고 자신들도 죽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폴란드 시민들이 굴라크에서 나와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려면 유라시아 대륙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소련의 북부나 극동, 카자흐스탄에서 인도와 이란, 팔레스타인을 거쳐 서유럽으로 가야 했다."(364-5)


"어떤 이유에서든, 스탈린의 표적이 되기 쉬웠기 때문이든, 싸우고 싶은 열의가 더 강했기 때문이든, 아니면 폴란드 장교들과 더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든, 베타르 구성원들과 수정주의 시오니스트들은 폴란드 군대에 상당히 많았다. 이런 식으로 많은 우파 시오니스트가 길고 둘러가는 길이었을지언정 폴란드에서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영국은 그 전쟁 중에 바다를 통해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오려 했던 유대인들을 막았지만 연합군 군복을 입고 육지로 들어오는 유대인은 거의 막을 수 없었다." "1943년 말 이후 전황이 나치 독일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바뀌었으므로, 베긴의 이르군은 샤미르의 레히에 합류하여 반反영국 테러 활동을 수행했다. 이는 폴란드 유대인 두 사람이 폴란드의 동맹국에 맞서 식민지 해방 투쟁을 이끌고 있음을 뜻했다. 1944년 2월 베긴은 이르군이 영국 위임 통치령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고 선포했다."(366)


# 1949년 이스라엘 건설


11 신과 인간의 투사들


"소련은 전쟁으로 폐허에 된 나라로 들어갔고 전체적으로 적대적인 주민과 대면했다. 소련 세력은 나치가 폴란드에서 수행한 사회 혁명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승인했다. 결과적으로, 의도적이지는 않았을지언정, 독일은 소련의 표준적인 두 단계 혁명의 첫 번째 단계를 수행했다. 미래가 없어 보였던 집단의 재산을 권력의 은혜를 입게 된 다른 집단에 넘겼던 것이다. 이는 집단화를 통한 혁명의 완수를 준비했다. 소련 공산당의 선전은, 따라서 폴란드 공산당의 선전도 유대인의 특별한 고통을 부정했으며 유대인 학살을 평화를 사랑하는 소련 시민이나 폴란드 시민의 전체적인 수난의 일부로 묘사했다." "유대인을 구한 폴란드인들은 새로운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때로 성가신 존재였다. 전쟁에 관한 소련의 설명이 공허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소련 지배의 사회적 기반에도(유대인의 재산을 훔친 폴란드인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 때문이다."(397-8)


"자원하여 아우슈비츠로 들어갔다가 바르샤바 봉기에서 싸웠던 비톨트 필레츠키는 폴란드 공산당 정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총살당했다. 독일인들에 의해 아우슈비츠 행을 선고받고 제고타에서 유대인을 능숙하게 구했던 브와디스와프 바르토셰프스키는 국내군에 복무했다는 사실 때문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자발적으로 바르샤바 게토에 들어가 서방 지도자들에게 최종해결의 성격을 설명하려 했던 얀 카르스키는 종전 후 이민을 떠났으며 그래서 폴란드 공산다 당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유대인 혁명가들을 지원했던 폴란드 외교관 비톨트 훌라니츠키는 팔레스타인에서 피살되었다. 동유럽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유대인을 구조한 사람인 아마추어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는 소련 방첩부에 체포되어 악명 높은 루뱐카 감옥과 레포르토보 감옥에 억류되었다. 비록 지금까지도 상세한 내막은 아무도 모르지만 발렌베리는 소련에 구금된 상태에서 사망했다."(398-9)


결론 우리의 세계


"히틀러를 반유대주의적 인종주의자나 반슬라브주의적 인종주의자로 본다면 나치 사상의 잠재력을 너무 작게 평가하는 것이다. 유대인과 슬라브인에 대한 히틀러의 사고는 어쩌다가 극단으로 흐른 편견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바꿀 잠재력을 지닌 통일적 세계관의 발산이었다. 히틀러는 정치와 과학을 융합하여 정치적 문제를 과학적 문제로, 과학적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자신을 원의 중심에 두고 모든 자료를 종족 학살이라는 완벽한 세계의 구도에 따라 해석했다. 그 세계는 오로지 유대인의 인간화하는 영향력으로만 더럽혀졌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지구의 부조화에 책임이 있는 생태학적 결함으로 제시함으로써 세계화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긴장을 인격화했다. 유일하게 건전한 생태학은 정치적 적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유일하게 건전한 정치는 지구를 정화하는 것이었다."(447-8)


"우리에게 구조라는 관념은 가깝고 살인의 이데올로기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생태학적 공황, 국가 파괴, 식민지적 인종주의, 세계적 반유대주의는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람들은 대부분 잘 작동하는 국가에서 살기에 그 전쟁 중에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보전한 주권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즉 외교 정책과 시민권, 관료 기구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두 세대 후, 녹색 혁명은 유권자의 정서와 정치인의 언어에서 굶주림의 공포를 제거했다. 반유대주의 사상의 공개적인 표명은 서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비록 그 힘이 약해지고는 있어도 여전히 금기이다. 우리는 다행스럽게 시간적으로 나치즘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나치 사상을 그 작동 방식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쉽게 내버릴 수 있다. 망각은 우리도 똑같을 수 있음을 덮어 가린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나치와 다르다고 확신한다."(450-1)


"미국인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국가 권력의 부재가 자유라고 믿는 것이다." "정치적 우파는 국제적 자본주의에 의한 국가 권력의 침식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본다. 정치적 좌파는 방향타 없는 혁명들을 미덕으로 묘사한다. 21세기에는 무정부주의적 저항 운동들이 전 세계적인 과두주의자들과 우호적으로 드잡이를 쳤다. 양쪽 다 국가를 진정한 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 싸움에서 어느 편도 다치지 않는다. 좌파나 우파 모두 질서의 파괴나 부재보다 질서를 더 두려워하는 경향을 보인다. 공동의 이데올로기적 습성은 탈근대성, 즉 큰 것보다 작은 것을, 구조보다 파편을, 넓은 전망보다 힐끗 보기를, 사실보다 느낌을 더 좋아하는 것이었다. 좌파와 우파에서 똑같이 홀로코스트의 탈근대적 설명은 1930년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전통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로 이들은 장래의 범죄 가능성을 낮추기보다는 높이기 쉬운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4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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