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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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장 골육상쟁(骨肉相爭)의 근본주의 /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자체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공갈 정책'이 실패한 결과라고 할 정도로 그의 '무력통일 공갈'은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무력으로 통일하겠다고 허세를 부림으로써 국내외에서는 그의 실력과 의도에 관해 많은 오해를 하게 되었다.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과 그의 정권이 북한에 비해 우월한 힘을 갖고 있거나 적어도 자위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 박사에게 더욱 무기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이 북한에 비해 군사력에 있어 열세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무기만 주면 이 대통령과 그의 군대가 38선을 넘어 북진할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해 그에게 무기를 공급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그의 공갈 정책의 결과는 이승만의 위협이 실현되어 한국군이 북진할 경우에 대비해서 김일성과 그의 북한 공산정권이 더욱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라는 점이다."(31-2)


박명림은 7월 1일 새벽의 대전 탈출은 어떤 명분으로도 설명되기 어려운 '도망'이었다고 말한다. "6월 25일 전쟁 시작 이후, 특히 6월 27일 서울 탈출 이후 7월 9일 대구로 이동하기까지 서울-대구-대전-수원-대전, 그리고 다시 대전-이리-목포-부산-대구에 이르는 15일 동안의 이승만의 행적은 한마디로 의문투성이였다. 단순한 우왕좌왕이라고 부르기에는 국가원수로서 너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누란의 위기에서 이승만은 두 번의 통치 공백, 사실상의 통수권 유고사태를 빚었던 것이다. 처음엔 대구로 혼자 도망하였다가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열차 내에서 머문 12시간 30분이었고, 두 번째는 훨씬 더 길어서 대전-부산 간 이동에 소요된 32시간이었다. 이 시간 동안 그는 아무런 군대통수 기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의 입만을 바라보던 각료들이 황망히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동안 정부로서 아무런 정상적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였다."(66-7)


"(민간인 대량학살을 일컫는) '뿌리뽑고 씨 말리기' 원칙은 열 명 가운데 하나를 잡기 위해선 열을 다 죽여도 좋다는 발상에 근거한 것이었다."(89-90) "6·25전쟁 중 저질러진 '뿌리뽑고 씨 말리기' 가운데 그 정신을 가장 철저하게 실천한 학살극은 이른바 '나주 부대'의 학살 사건일 것이다." "나주 부대란 인민군이 공격해오자 나주경찰서 경찰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100여 명 규모의 임시부대였다. 이들은 전남 강진·해남·완도·진도 등지로 후퇴하면서 이상한 짓을 저질렀다. 나주 부대는 7월 하순께 전남 해남군 남창에서 완도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완도중학교 교사가 전화를 받자, 〈우리는 인민군이다. 완도로 간다〉고 밝혔다. 이에 완도에서는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가 구성돼 시가지 환영대회까지 준비했다. 나주 부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해 그 환영대회에 참석한 후 그 자리에서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사살했다."(92)


"학살은 악순환의 게임이었다. 네가 죽였으니 나도 죽여야겠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복수의 질과 양이 똑같이 이루어질 리는 만무했으니 증폭은 필연적이었다." "경기도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도 바로 그런 악순환 때문에 빚어진 참사였다. 그 지역에서 좌익세력이 우익단체 단원 50여 명을 처형했다. 9·28 수복 직후 국군과 치안대에 의해 보복이 이루어졌는데, 이때의 희생자가 1천여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피를 본 사람들이 더욱더 피에 굶주리게 되는 악순환 속에서 '범주의 폭력'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좌익세력이 비교적 왕성해 일단 '빨갱이 마을'로 낙인찍히면 그 마을 사람들 모두는 그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우익일지라도 자신의 마을이 '빨갱이 마을'로 소문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부역 혐의자에 대한 보복에는 '병균의 논리'가 적용되었다. 이 논리는 학살의 현장에서 급조된 게 아니라 당시 한반도를 지배하던 '게임의 법칙'이었다."(132-4)


2장 '톱질전쟁'의 와중에서 / 1951년


"한반도 땅덩이가 좁은 탓이었겠지만, 6·25전쟁은 전형적인 '톱질전쟁'이었다. 톱질을 하듯이 왔다갔다하면서 점령과 후퇴를 반복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비극적이었다. 전선이 왔다갔다하면서 죽어나는 건 민간인들이었다. 누구를 지지하는가? 이들에게는 이런 고문이 강요되었고, 그 와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게다가 톱질전쟁은 전선이 따로 없는 전 국토의 전선화를 초래하면서 빨치산 투쟁을 낳았고, 이는 민중들 사이에 원한관계를 만들어 그 원한이 민간인들 상호간에 학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51년 1월 1일 중국군 6개 군단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12월 24일 서울시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렸지만, '빽'과 줄이 있는 사람들은 얻어들은 게 있어 이미 12월 초부터 피난길에 나섰다." "지난 여름 서울 잔류로 수복 후 호되게 당했기 때문에 너나할 것 없이 피난길에 올라 중국군이 입성하기 하루 전인 1월 3일 서울은 '무인지경'이었다."(183-4)


"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돼 소집된 국민방위군 중 서울에 모여든 방위군 숫자만 50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을 기막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할 것인가? 놀랍게도 이들은 걸어서 혹한의 천릿길을 돌파해야 했다.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되지 않았다. 징집된 사람들은 군복을 줄 줄 알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으로 나섰는데, 아무것도 주질 않았으니 얼어 죽으라는 소리나 다를 바 없었다. 잠잘 때는 2명당 가마니 1장이 전부였다. 행군이 계속되면서 동사·아사·병사·낙오자들이 속출하는데도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 이들을 가리켜 나온 '죽음의 행렬' 또는 '해골의 행렬'이란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들 중 일부는 경상남도와 북도의 교육대에 수용되었고, 일부는 제주도로 옮겨졌지만, 수용되지 못한 장정들은 노상의 거지 신세가 돼 해골 모습을 해가면서 계속 죽어 나갔다."(200-2)


"함평에서 민간인 524명을 학살하고 가옥 1천454동을 불태웠던 11사단 예하 부대의 이른바 '견벽청야' 학살극은 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또다시 발생했다. 11사단 9연대 제3대대는 719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죽은 사람 가운데 14세 이하가 전체 사망자의 절반인 359명이었으며, 60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사망자의 10%, 그리고 나머지 40%의 사망자 중에서도 3분의 2는 부녀자들이었다." "'톱질전쟁'이라고 하는 전쟁의 구조상 전선이 따로 없는 가운데 빨치산 출몰 지역은 낮에는 국군, 밤에는 빨치산의 지배하에 놓이기 마련이었다. 그런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낮에는 국군에 협조하고 밤에는 빨치산에 협조하는 '이중 생활'을 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 토벌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빨치산에 협조하는 자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212-3)


"리지웨이는 휴전회담이 시작된 7월 10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북한과 중국 공산군에게 최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안겨 줌으로써〉 협상이 타결될 수 있도록 군사적으로 압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2년 후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되는 존 포스터 덜레스에 따르면 〈중국군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명백한 우위를 (모든 아시아 국가들 앞에) 보여주지 못한다면 한국의 협상에서 얻어낼 것이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 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8개월 동안 미 공군은 적의 통신망과 보급로 타격을 이유로 철도, 차량, 도로, 교량 파괴는 물론 마차나 손수레, 창고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주택과 방공호에 네이팜탄과 소이탄, 세열탄 등을 퍼부었다." "미국은 51년 8월 내부적으로 미군이 군사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경우 원자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10월에 '허드슨 하버'라는 암호명 아래 몇 차례 원자탄 투하 연습까지 실시하였다."(243-4)


"휴전회담이 진행되던 그 시기에 미군은 북한을 폭격하기에 바빴고, 남한 산악 지대를 파고든 북한군 잔류 세력은 빨치산 투쟁을 하기에 바빴다. 그래서 빨치산 세력이 가장 왕성한 지리산 일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뒤바뀌곤 하였다. 빨치산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휴전회담의 한국측 대표였던 백선엽은 51년 11월 16일 토벌군사령관으로 차출되었다. 최전선의 2개 사단도 토벌군으로 차출되었다. 이는 이승만이 8군사령관 벤플리트에게 간곡히 요청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군은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60여 명의 미군 고문단을 파견하였다. 선전전도 미군이 주도했다. 미군은 남원에 방송 시설을 갖추고 투항 권유 방송을 송출했으며, 투항 권유 전단을 동경에서 인쇄해 공수해 왔다. 전단은 〈그 넓은 지리산이 하얗게 덮일 정도로 대량으로 공중 살포했다〉 살포된 전단은 모두 992만 장이었다."(248-9)


3장 '군사 전쟁'과 '정치 전쟁' / 1952년


"1952년 들어서도 휴전회담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었다. 흥미로운 건 북한의 지도부에서는 이런 논란이 있었던 반면 남한에선 오직 한 목소리뿐이었으며 휴전을 찬성했다간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52년 3월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는 진단을 내리면서 〈민족국가로 생존을 위하여 단독으로라도 계속하여 싸워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런 주장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휴전 불가'를 협상 카드로 이용하였다. 트루먼은 3월 4일 이승만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 정부가 계속 유엔군사령부와 협력하겠다고 약속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3월 21일 답신에서 그런 약속에 대한 대가로 한미간의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한국 병력의 증강을 요구하였다. 52년 4월에는 '통일없는 휴전 반대 국민총궐기대회'가 열렸으며, 이런 종류의 데모는 휴전협정이 맺어지는 그 날까지 계속될 이승만의 협상 카드가 되었다."(277-9)


"1952년 내내 남한은 '군사 전쟁'과 동시에 '정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51년 11월 30일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공고 기간을 마치고 52년 1월 28일 표결에 들어갔는데, 재석의원 163명 가운데 가결이 19표, 부결이 143표, 기권이 1표 나왔다. 이에 이승만은 〈국회의원이 잘못하면 국민의 투표로써 소환한다〉는 협박 성명을 냈다. 그 성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원외 자유당'은 18개 사회단체들을 규합해 개헌안 부결 반대 민중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민의를 배반한 국회의원들을 소환하라〉는 소위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전개했다. 52년 1월 말부터 부산에는 백골단, 땃벌떼, 민족자결단 등 각종 단체들 명의로 된 〈살인 국회를 해산하라〉는 구호 및 각종 전단이 넘쳐 흐르는 등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국회는 52년 4월 17일 개헌선을 한 명 초과하는 123명의 연서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280-2)


"6월 21일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내각제 추진 의원들은 국회 출석을 거부하고 잠적하였다. 정족수 미달로 개헌안 심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7월 1일부터 국회 임시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의원들의 강제 연행이 시작되었다. 개헌안의 의결 정족수는 123명이었는데 도무지 의원들을 모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붙잡혀 온 의원들은 임시의사당에 연금되어 정족수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 일을 위해 국제공산당 혐의로 체포된 10명의 의원들까지 석방 및 동원당했다. 7월 4일 185명 가운데 166명이 출석하여 정족수에 이르렀다. 그 날 밤 9시 30분 경찰과 관제 시위대가 국회의사당을 완전 포위한 가운데 발췌개헌안 안건에 대한 표결에 들어갔다. 표결 방법은 기립 표결이었다. 개헌은 출석의원 166명 가운데 163명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3명은 기권이었으며, 반대는 단 한 명도 없었다."(289-91)


# 8월 16일 이승만 2대 대통령 취임(부통령 함태영)


"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에서 포로의 '자동송환'이냐 '자유송환'이냐를 놓고 북한과 미군은 지루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미군측은 포로들의 의사를 먼저 묻고 원하는 대로 보내주자는 '자유송환'(또는 자원송환)을 주장했고, 북한측은 포로들을 의무적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자동송환'을 주장했다." "한홍구는 미국이 자원송환을 고집한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인도주의적 원칙에 따라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나마 결정적 승리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박명림도 미군측이 자유송환 원칙을 고수한 본질적인 이유는 공산 포로들이 모국 송환을 거부할 때 또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반사적 이익, 즉 체제간 대결에서의 심리적·도덕적·선전적 승리를 집요하게 추구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52년 5월 휴전회담은 딱 하나만 빼고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했는데, 바로 그 마지막 하나가 포로교환 문제였다."(304-5)


"미국은 52년 11월로 예정된 미 대통령 선거 전에 협상에서 개가를 올리기 위해 북한을 압박하는 강경 대응책을 썼다. 그건 바로 대대적인 북한 폭격이었다. 6월 23일 미군은 500대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해 압록강에 위치한 수풍댐과 10개의 수력발전소를 폭파하였다." "북한 지도부의 조기 정전 희망은 수풍발전소가 폭격당한 이후 더욱 강렬해졌다. 8월 20일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중국 외상 주은래는 〈수풍발전소가 폭격당한 이후 북한 주민들이 심하게 동요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북한 지도부까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며 〈이에 부담을 느낀 북한 동지들이 정전협상에 집착하게 됐다〉고 밝혔다. 미군의 폭격은 7~8월 '압력펌프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더욱 강화되어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78개 도시와 마을을 집중 폭격하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10월로 접어들자 폭격 목표물로 삼을 만한 도시와 산업시설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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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
노다 마사아키 지음, 서혜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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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전 이후 일본인들의 반응

1. 무벌화(無罰化) : 전쟁 가담자에게도 피해자에게도 전쟁은 비참한 것이므로 모두를 벌하지 않고 함께 평화를 제창하자는 평화운동으로 치환

2. 물질주의로 '바꿔치기' : 경제 부흥으로 미국의 경제력을 따라잡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세로, 부국강병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경제성장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치환


"나는 지금까지 전범으로 중국의 수용소에 잡혀 들어간 많은 일본군들을 만나왔는데, 그들에게 공통된 점은, 〈나는 중국인을 학살했다. 그러므로 사정이 어찌됐건 그들도 나를 죽일지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없었다는 점이다. 윤리적인 죄의식이 없는데다, 중국쪽에 기대려는 어리광 심리마저 있었다. 죄라고 자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죄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많은 중국인을 학살했으니까 자신도 죽임을 당할 거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집단에 준거해서 사는 인간의 정신적 강인함이 잘 나타나고 있다. 자아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집단으로 있는 한 불안하지 않다. 집단이 혼란상태에 빠질 경우 자신도 혼란에 빠지지만, 그것은 일과성일 뿐이다. 집단은 끊임없이 개개인이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모호하게 흐리고, 모든 행위에 동의하는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42-3)


"유아사 씨 등이 중국 대륙에서 생체해부에 대한 죄목을 추궁 받던 시기에, 생체해부 및 인체실험의 추진자였던 기타노 세이지, 후타키 히데오 등 전 731부대(관동군 방역급수부)의 중추와 나이토 류이치 전 육군 군의학교 방역연구실 교관은 1951년 '일본 블러드뱅크'를 만들었다. 그들은 전쟁 중에 실시한 인체실험으로 터득한 혈액의 동결 건조 기술을 사용하여, 산야, 가마가자키, 고토부키쵸와 같은 싸구려 여인숙 거리에서 혈액을 싸게 사들여 만든 건조혈액을 미군에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한국전쟁 특수는 전쟁범죄 의학자들을 윤택하게 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1964년 '미도리십자'로 발전한 이 회사는 미국의 매혈을 다량 수입하여, 후생성과 한몸이 되어 일본을 혈액제제의 소비대국으로 만들어갔다. 한편 후생성의 중심 연구소인 국립예방위생연구소의 역대 소장과 각 연구부문의 책임을 맡고 있는 부장의 대부분은 전 육군 방역급수부나 군의학교의 의사였다."(54-5)


"오가와 씨는 의료 전도의 뜻을 버리지 않고 펑티엔으로 돌아와 만주의과대학에 재입학했다. 이 의학생 시절, 기타노 교수로부터 〈현지 원숭이를 사용한 발진티푸스 예방 왁진 개발 실험〉 강의를 받았다. 기타노는 731부대에서 부대장 이시이 시로 다음 가는 자리에 있으면서 당시 군의 대좌였으나, 칙명에 의해 만주의대 미생물학교 교수가 되었다. 후에 기타노는 731부대장(소장)이 된다. 기타노 교수는 온화한 얼굴로 칠판에 그림을 그리며 〈장기의 병변이 이와 같이 나타나고, 체온이 이와 같이 내려가 죽었다〉고 설명했다. 오가와 씨는 〈만주에 현지 원숭이가 있었나?〉하고 의아해했으나, 그것이 중국인이나 러시아인을 사용한 인체실험이었고, 실시된 장소가 의대 미생물학과 교실과 해부실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82) 기타노 세이지는 39년 2월, 13명의 중국인을 발진티푸스에 감염시킨 뒤 그들을 생체해부해 얻은 지식을 토대로 발진티푸스 예방 왁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오가와 씨는 강한 척하는 인간의 어쩔 도리 없는 나약함을 줄곧 보아왔다. 만주사변 직후 펑티엔에서 경비를 서던 학생들의 공포심과, 공포를 견디다 못한 살인.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의 초년병 교육 시절, 인격이 퇴행하여 죽음에 빨려들어가는 병사들의 모습. 스지아주앙과 베이징 제1육군병원에서 전쟁 영양실조증으로 말라비틀어지고 왜소하게 오그라들어 죽어가는 병사들. 혹은 자살하는 병사. 그들은 약탈전쟁에 적응할 수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도망죄로 총살당하기 직전의 병사들. 오가와 씨에게는 〈인간을 여기까지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있다. 전쟁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일으킨다. 그러나 전쟁터의 현실은 관념을 넘어선다. 관념은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지만, 전쟁터의 시간은 길고, 그것을 견뎌야 하는 자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기나긴 비인간적인 시간 속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격이 해체되는 위기를 맞이한다."(105-6)


"황허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산동성 내륙부에서, 고지마의 중대는 당시의 일본 육군이 범한 모든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촌락을 습격하여 빼앗고 태우고 몰살시켰다. 초년병을 단련시키기 위해 중국 농민을 나무에 매달아두고 총검으로 찌르는 훈련도 시켰다. 나무에 매단 중국인의 흉부를 5~6명의 병사들에게 차례로 찌르게 하는 것이다. '토끼사냥'이라 불리던 중국인 강제연행 작전도 펼쳤다. 1942년 9월부터 연말에 걸쳐 중국인 일꾼사냥이 실행됐다." "한 개 중대(고지마 중대는 150명)가 죽 늘어서서 4km에 걸친 지역을 맡는다. 일본 병사 한 명에 경비원 10명 정도를 붙여서 물샐틈없이 좁혀 들어간다. 중심이 되는 분대장의 소재지에는 일장기를 세우고, 반경 16km의 커다란 포위망을 만든다. 이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중국 농민을 잡아들였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면서 각 중대의 진행을 조정했다."(115-6)


"(패전 후) 일본 포로들은 마음이 흔들렸다. 누구 한 사람, 자신이 형법상의 죄를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들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알고 있는 중국인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 생존자나 유족의 신고에 의해서 반드시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했다. 저마다 굳은 얼굴 표정 아래 불안, 분노, 절망, 변명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5년간이나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혹사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어갔지만, 나는 견뎌냈다. 그만큼 괴롭힘을 당한 우리들을 이제 또 다시 전범이라고 보복하다니, 너무나 불공평하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가 벌이는 사투다. 전범이란 전쟁을 명령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지,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이렇듯 그들의 사고는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의심은 감정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폭력적 성향, 인간에 대한 불신, 권위주의는 중국 쪽에 투영되어, 거꾸로 자신들을 덮쳤다. 자기자신의 인간관, 사회관에 포위되어 있었던 셈이다."(118-9)


"관리소쪽에서 보자면 고지마 씨는 이른바 '완고(頑固) 분자'였다. 딱딱한 변명의 갑옷을 두르고 웅크리고 있는 수인들에게 중국 쪽이 취한 방침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본군이 저지른 일들을 알려주는 것, 군대 하나하나는 자신이 관여한 전쟁터밖에 모른다. 게다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지금 당장 직시하는 일은 괴롭다. 그래서 중국쪽은 중국 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지금도 전쟁 피해가 얼마만큼 지속되고 있는지를 알리는 방법을 취했다. 다른 하나는 충분한 보살핌이었다. 둘 다 우순 전범관리소에 배속된 혁명군 병사들이 해방군이 되어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인간관계였다. 거기에 하나 더, 이 두 가지 방침을 지탱해준 것은 '시간'이었다. 천천히 시간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릴 것. 이렇게 기다려줌으로써 전범들의 태도변화에 대비하고자 했다." "희생자와 그 가족, 그리고 그들의 동포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고지마 씨는 겨우겨우 깨달아갔다."(127-8)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자신은 중대장이었으니, 부하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 고지마 씨는 '내가 죽였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고 결정하고, 우선 고백서 비슷한 것을 써서 내기로 했다. 몇 월 몇 일, 몇 명을 이끌고 어디어디로 가서 팔로군 몇 명과 전투를 했다. 적의 유기 사체 몇 명, 전과는 소총 몇 정, 기관총 몇 정. 우리 편의 손해는 ····· 하는 식으로 서너 편 써냈다. 마치 전투보고서 같았다. 서류를 내면 바로 오 지도원이 불렀다. 담화실에 들어가면 〈고미자, 너는 제국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 그것으로 끝. 다른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반장을 불러 다시 방으로 돌려보냈다. 이렇게 되자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게 해 봐야지'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보고서를 내면, 바로 호출됐다. 〈너는 제국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 오 지도원의 답은 그것 뿐. 뭐가 제국주의 사상인가?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고지마 씨는 더욱 더 움츠러들 뿐이었다."(133-4)


"1954년 10월, 가족들의 편지를 받고 고지마 씨는 〈나는 중국에 억류되어, 따뜻한 방에서 따뜻한 옷을 입고 쌀밥을 먹고, 무엇 하나 어려움 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썼다." "이에 대해 오 지도원은 이렇게 말했다. 〈고지마, 네가 쓴 편지는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오랫동안 헤어져있던 사람이 쓰는 편지가 아니다.〉 〈오랫동안 못 만난 일본인은, 편지 서두에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다', 이렇게 쓰는 것이 습관 아닌가? 네 편지는 중국을 칭찬하는 것으로 시종일관하고 있으니, 요컨대 관리소쪽에 잘 보이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고지마 씨는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다. 〈더 이상 저항해봤자 소용없겠다.〉" "고지마 씨는 방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기억나는 모든 악행을 종이에 쓰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고백에 값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모두 정서하여 오 지도원에게 제출했다. 이렇게 해서 1955년 봄 다른 병사들보다 늦게, 드디어 고지마 중대장의 '인죄(認罪, 죄를 인정함)'가 성립했다."(139-40)


"고지마 씨가 모든 것을 다 고백한 뒤, 오 지도원은 각 마을에서 올라온 고소장을 한 장 한 장 읽어줬다. 한 장에 한 건씩 적힌 고소장이 두꺼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있었다." "중국쪽은 독자적으로 조사한 것과 전범이 자백한 것이 일치하면 죄를 인정한 것으로 판정했다. 그들은 자백을 유도하는 일도 없었고, 자백에 기초하여 조사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배려 아래 양자가 접근했을 때, 죄를 자각한 것으로 인정했다. 〈전쟁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시오. 그것만으로도 좋소.〉 〈전쟁이란 이렇게 잔혹한 것입니다. 당신이 한 행위는 중국 인민에게 커다란 재난과 그 뒤에 남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알기 바라오.〉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중국쪽은 그렇게 말했다. 그 뿐, 고소의 내용을 듣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지마 씨 내면의 감정까지 묻는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가해와 피해의 사실에 대한 인식을 요구했을 뿐이었다."(140-1)


"마침내 기소 면제 결정을 듣는 순간, 그저 '돌아갈 수 있다'는 환희가 가득 차 올라왔다. 지금까지의 죄의 자각도, 어떤 형벌이든 달게 받겠다던 반성도 한 순간에 날아가버렸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 11년간 억류되었다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세뇌 당한 남자', '빨갱이'라는 낙인이었다. 취직이 안 되고, 공안경찰의 정기적인 방문을 받아야 했다. 그를 받아주겠다고 열성인 곳은 증원을 서두루고 있던 자위대뿐이었다. 대학 시절의 교수님과 선배가 애를 써줬지만, '중국 귀환자'라는 이유로 아무데서도 일을 시켜주지 않았다. 그런 한편, 자위대에서는 제국 군인이 그대로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입대할 것을 권했다. 고지마 씨는 이런 일본의 현실을 마주하고, 〈과연 중국에서 말한 것이 틀림없구나〉하고 생각했다." "전범관리소에서 배운 사상과 일본의 현실에 비추어보며 생각하는 나날이 한동안 계속됐다. 고지마 씨가 개인으로서 전쟁범죄와 맞서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148-50)


"우리들은 전쟁 중의 잔학행위에 대해 들었을 때, 〈전쟁이란 그런 거다. 인간을 짐승으로 만든다〉고 일반화하기 쉽다. 〈영국과 미국도, 소련도, 중국까지도 다 그랬다〉는 반론을 덧붙이면서 자기 나라의 범죄를 중화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개개의 사례를 검토한 뒤의 귀납이 아니라, 미리 해버린 일반화이며, 사실을 잊으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 야전 소대장에 임명된 도미나가 씨가 살인이라는 입사식(入社式을 치를 때 "〈상관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변명을 했던 것도, 미리 해버린 일반화였다." "자신의 부하가 될 하사관, 병사는 모두 버젓이 한 사람 몫의 군인 노릇을 해내고 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들의 지휘관으로서 아직 검증되지 않은 나에게 상관은 〈베라〉고 말한다. 귄위에 의한 명령, 그리고 부하에게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 이 두 가지에 힘입어 그는 순순히 제국 육군에 적응하는 길을 선택했다."(189-90)


"1938년 난징을 침략했을 때, 누가 먼저 1백 명을 베어 죽이느냐는 경쟁을 벌여, 일본 군인의 무용담으로 일본 국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던 무카이 도시아키(전 육군소좌, 1946년 1월 난징에서 총살형당함)와 노다 쓰요시(전 육군소좌, 1948년 1월 광동에서 총살형당함)의 유서는 다음과 같다. 무카이의 유서는 〈나는 천지신명께 맹세코 포로와 주민을 살해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난징 학살사건의 죄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내가 죽음으로써, 중국 항전 8년이 패배로 끝난 데 대한 한을 씻고, 일·중 친선, 동양 평화의 단서를 이룬다면 이렇게 버려짐을 행운으로 알겠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노다도 마찬가지로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포로, 비전투원의 학살, 난징 학살사건의 죄명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거부하겠습니다. 죽음이 선고된 것에 대해서는 하늘의 명이려니 체념하고, 일본 남아의 최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214-5)


"둘 다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든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누구나가 같은 논리다. 자신은 〈일본 군인 혹은 군속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고, 전쟁범죄는 저지르지 않았으며, 중국인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에 진 이상, 일·중 평화를 위해 희생자가 되어 죽는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자신이 저지른 잔학한 행위를 상기하고 후회스러워 치를 떨며, 다른 사람들의 비난과는 관계없이,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은 인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공격성을 전혀 자각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자기자신의 공격성은 부인하고 있다. 그 대신 적에게 강한 공격성이 있었고, 자신은 그러한 상대의 공격성에 고스란히 희생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투사'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교묘히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상대에게만 공격성이 있다고 느끼고 있으므로, 거기서 죄의식이 생겨날 리 없다."(216)


타이위앤 전범관리소에서 지내면서 점차 중국쪽의 요구를 알게 된 나가토미 씨는 "'이미 사형으로 정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거꾸로 살고 싶은 욕구가 강렬해졌다. 그러나, 〈내 죄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밖으로 끌려나가 대중재판에서 욕설을 들으면서 죽는 것만은 싫다. 그것만은 봐줬으면 좋겠다. 어차피 죽는 거라면 모두가 있는, 온정을 느낄 수 있는 이 방에서 죽고 싶다.〉 나가토미 씨는 이렇게 생각하고, 목매어 죽을 끈을 만들었다. 내일은 죽자고 결심한 날 밤, 감방의 창틀로 내리비추는 달빛을 보고, 그는 '살고 싶다'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몰랐다."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던 감정이, 억제를 뚫고 '괴롭다'고 외쳐댔다. 〈그토록 악행을 거듭해온 사내가 이 무슨 어리광이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가토미 씨의 자아는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적나라한 감정의 부르짖음을 들었던 것이다."(237-8)


"판결은 13년의 금고형. 체포 이후의 기간이 형기에 포함되어 남은 기간은 7년이었다." "판결 뒤에 타이위앤에서 우순 전범관리소로 이송된 나가토미 씨 등은 오전에는 책을 읽고 학습하고, 오후에는 양계, 야채 재배, 논 개발 등에 종사했다. 이른바 교육형(敎育刑)을 받은 것이다." "그는 1963년 9월에 석방되어 26년 만에 귀국했다. 취직은 어려웠다. 공안 경찰의 미행, 잠복이 계속되었다. 겨우 취직한 일본도로공단의 사무실에도 전화가 걸려오고, 때로 연행되기까지 하는, 집요한 추적을 견디지 못하고 퇴직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익 나가토미 청년이 폭력으로 일궈온 일본이란 사회가 어떠한 곳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뒤 나가토미 씨는 침뜸치료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반전 평화와 일·중 우호를 호소해 왔다. 나가토미 씨는 요청하는 곳이 있으면 전국 어디든, 아무리 작은 집회라 할지라도 기꺼이 갔다. 육중한 풍채, 걸걸한 목소리로 자신이 중국에서 얼마나 잔혹한 짓을 했는지 얘기했다."(240-1)


"'731부대'는 세균전 수행을 위해 일본 육군이 1933년에 창설한 '관동군 방역급수부' 본부의 약칭이다. 전후에는 부대장 이시이 시로 중장(군의)의 이름을 따서 이시이부대라고도 불렸다." "본부인 핑팡에는 1939년부터 패전 때까지 약 3천명이 실험용으로 보내졌다. 어린이를 포함한 중국인, 러시아인, 조선인, 몽골인, 소수의 구미인이 실험동에 격리되어, 인체실험과 실험 후의 생태병리해부에 의해 죽어갔다. 이들 731부대로 이송되는 희생자를 관동군 헌병대는 '특이급'(특별이송취급)이라고 불렀다. 군사경찰인 헌병대는 용의자를 체포, 조사한 뒤에 만주국의 법원(삼심제)에 송치해야 한다. 법제상 재판을 하지 않고 살해 결정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731부대 이송은 단 한마디의 통첩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특이급에 관한 통첩」을 보면, 특이급 인물에 대해 〈죄상이 가벼우나 석방불가〉란 글귀가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헌병에 체포된 자는 누구라도 특이급이 될 수 있었다."(253)


'특고(特高, 특별고등경찰)의 하느님'이라고 불리던 쓰치야 씨는 "1934년 4월에 관동헌병대의 헌병이 된 뒤 12년간 쭉 치치하얼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도 특고 외길로, 부대 부속 소위로까지 승진했다. 한 번도 전근하지 않은 헌병은 예외 중에서도 예외이다. 그만큼 역대의 대장이 그를 신뢰하고 놓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294) 전쟁이 패전으로 막을 내리고 소련군의 진격이 코앞으로 닥쳐오자 "그의 장래를 보장하던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래서인지 그의 의식은 과거로 향했다. 헌병 제복을 입고 자랑스런 계급장을 달고, 말 위에서 등을 곧게 편 자세로 거리를 지나간다. 그는 혼자서 치치하얼의 거리 전체와 마주할 생각이었다. 그에게 치치하얼은 하나의 대상물이며, 하나의 생명이었다. 그의 의식에서 치치하얼은 살아 있었지만, 그 거리의 인간은 죽어 있었다. 살아서 생활하는 개개의 인간을 그는 몰랐다."(297-8)


"그의 인간관을 서서히 서서히 변화시켜 간 것은 중국인 관리소원의 태도였다. 결코 모욕하지 않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식사는 정성들여 요리해서 가져다 주었다. 산책도 체조도 하게 해주었다. 머리가 길어지면 이발도 해 주었다. 병에 걸리면 헌신적으로 치료와 간호를 해주었다. 보살핌을 받을수록 차차 마음이 괴로워졌다. 이러한 중국인의 태도 하나하나가, 그에 대응하는 과거의 그의 행위를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쓰치야 씨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이런 대접을 받아도 좋을리가 없다. 이런 후한 대접에 만족해하는 자신은 어떤 인간일까? 그는 개인으로 존중받는다는 것, 즉 전범과 관리자라는 관계이기 이전에 대등한 인간으로 교류한다는 것을 처음을 체험했다. 지금까지 일본인으로서의 인간관계에는, 도움이 됐든 안 됐듯, 효율과 타산의 관점밖에 없었다. 신뢰도, 도움이 되냐 안 되냐에 따라 고려됐다. 가족관계는 애정이 넘쳤지만, 그것은 가족 내에서의 일일 뿐이었다."(300-1)


귀국 후 반전평화운동에 참여한 쓰치야 씨를 두고 세뇌당했다는 둥, 일본공산당이라는 둥 비난이 쏟아졌다. 그에게 쏟아진 우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말로 속죄할 마음이라면, 그것을 깨달았을 때 깨끗이 자기 몸을 처분하는 것이 전해져 오는 무사의 자세다. 젊어서 그 기회를 놓치고 지금도 배를 가를 용기가 없다면, 행각승이라도 돼서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 피해자의 혼을 위로하는 공양 행각이라도 하는 게 어떠냐?〉 〈대동아전쟁의 대의명분은 아시아 약소 민족을 미국과 영국의 질곡으로부터 해방하는 데에 있었으나, 일본은 결국 패했다. 그러나 전후 40년, 아시아가 해방된 사실을 너는 어떻게 보느냐?〉 이 글들은, 쓰치야 씨가 진술한, 헌병들이 혐의를 두고 체포하여 고문하는 과정을 관철하는 사고 그 자체를 보여준다. 자신이 지목한 자는 혐의가 있는 자이며, 혐의는 확증이 있는 사실로 갈아치워지고, 자백하지 않는 자는 공산당원이기 때문인 것으로 된다."(309)


"전후 세대(전후에 태어난 사람만이 아니라, 나와 같이 전쟁 중에 태어났더라도 전후에 자아 형성을 한 사람을 포함하는 개념)가 부모나 친척으로부터 들어온 전쟁은, 전사 통지, 공습의 공포, 소개(疏開), 전쟁 때와 그후의 식량난 등이었다. 이와 같은 얘기는 부모 세대가 즐겨 얘기했다. 그것은 곤란을 극복해온 자기 긍정의 감정과 함께 전해졌다. 그러나 부모들은 결코 자신이 저지른 침략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전후 세대는 부모에게 묻지 않았다. 공습의 공포, 소개나 철수 때 고생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당신은 전쟁 때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무엇을 했습니까? 묻지 않았다. 확실히 그들이 굳게 입을 다문 것도 그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온 나라가 나서서 문제의 본질을 얼버무리기도 했다. '비참한 전쟁'이라고 틀에 박힌 표현을 써서, 침략전쟁의 구체적인 사실을 피해 갔다." "전후 세대의 교과서 『민주주의』(1949.8)를 보면,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에 아연해진다."(332-4)


"전쟁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세계평화」란 절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다수의 국민은 군인이 되어서 전쟁터를 향하며, 죽음의 위험에 직면한다. 그뿐만 아니라, 근대전에서는 국내의 후방도 폭격을 받아, 여자와 아이들도 희생당한다. 집이나 재산이 불탄다. 막대한 전비를 부담하여 경제생활은 커다란 타격을 입는다〉고 전쟁의 피해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전제주의라고 서술한 뒤, 정말 놀랍게도 일본의 전쟁 확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독일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런 서술은 오늘날 일본인의 전쟁관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고 있다. 천연자원은 거의 없지만 일본인의 근면과 기술은 장래에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식의 비슷한 주장을 반복해서 싣고 있는 교과서 『민주주의』의 페이지들을 넘기면서, 전후 세대의 사상 형성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잘 알 것 같았다. '전후 민주주의'와 '침략전쟁에 대한 부인'은 하나의 세트였다."(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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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3장 분열에서 분단으로 / 1947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이승만의 대미(對美) 로비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는 원래 5~6주 동안 미국에 체류할 예정이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체류를 연장해 가면서 미국 정부의 동향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제정세는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47년 3월 5일, 전(前)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미국 남부의 작은 도시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행한 연설에서 유럽에는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다고 주장했다." "3월 12일 이승만에게 큰 도움이 될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그날 상하 양원 합동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리는 선언을 한 것이다. 트루먼은 〈미국의 목적은 소수파가 독재정치를 강요하는 공산 침략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영토보전을 위해 투쟁하는 세계의 모든 국민을 원조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23-5)


"여운형의 암살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서중석은 〈1947년 6월 28일 하지는 이승만에게 이승만과 김구가 계획 중이라는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은밀히 보내지 않고 '공개적으로' 보냈는데, 그 이후 미군정의 태도를 보면 여운형의 암살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공개적으로' 경고만 하고는 방관하였다는 인상을 준다〉고 했다. 〈1947년 7월 19일쯤의 시점에서 미국으로 볼 때 김규식과는 달리 여운형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 시기 미국은 냉전의 길목으로 깊숙이 들어서고 있었다. 한국 문제는 더 이상 소련과 협의하여 처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좌우합작위의 좌측 수석이었던 여운형이 암살당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사실상 활동 정지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후, 한반도 문제가 UN으로 이관되자, 좌우합작위는 활동을 시작한 지 1년 5개월 만인 47년 12월 6일 공식 해체되었다."(51-2)


'하나의 민주공화국' 수립을 위해 46년 2월 9일 이래, 다섯 차례나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은 1886년생, 김일성은 1912년생으로, 여운형이 26년 연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엔 더욱 장유유서(長幼有序) 의식이 강하던 때였고 그런 의식이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일성과 김구·이승만은 36~37년의 나이 차이가 났는데, 바로 이런 나이 차이가 세대간 의식 차이와 더불어 남북협상을 어렵게 만든 점도 전혀 없진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건 방북, 그것도 위험을 무릅쓰면서 38선을 넘나드는 것에 대해 여운형의 측근들이 그런 장유유서의 질서를 언급하면서 반대할 때에 여운형은 〈나라의 통일독립을 위해 선후배나 체면을 가릴 때인가〉라는 말로 반대를 일축하곤 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하는 정병준은 해방정국에서 〈북한 방문을 통해 민족통일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 연대 형성에 노력한 것은 여운형뿐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58-9)


4장 욕망과 폭력의 제도화 / 1948년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훗날 긴 세월 끝에 '제주 4·3항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사건이 일어났다.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 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되리라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106) "육지 응원 경찰의 대거 투입으로 48년 7월경 경찰 병력은 2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응원 경찰이 1천 500명이었는데, 이들은 '제주는 빨갱이섬'이라는 인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 "본격적인 민간인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48년 11월 중순부터 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에 발생하게 된다."(113-4)


"해방 후부터 계속 제기되어 온 친일파 처단 문제는 1948년 8월 5일 제헌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의원 김웅진의 발의로 다시 본격 논의되기 시작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둘러싸고 공방이 치열하던 8월 26일 국회의원의 숙소와 시내 각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삐라가 살포되었다. 〈대통령은 민족의 신성(神聖)이다. 절대로 순응하라. 민족을 분열하는 반족안(反族案)을 철회하라.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走狗)다. 인민은 여기에 속지 말고 가면 쓴 의원을 타도하라. 민의를 이반하는 의원은 자멸이다. 한인은 지금 뭉쳐야 한다.〉 8월 27일엔 2명의 방청객이 국회의사당 안에서 〈국회에서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다〉라는 삐라를 살포했다. 이런 반발 움직임을 가리켜 『독립신보』 8월 27일자는 〈친일파들이 발악〉한다고 평하였다." "특히 친일파의 아성이라 할 경찰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160-1)


"여순사건은 그 배경에 있어서 좌익 군인들이 '숙군(肅軍) 작업'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경찰과 경비대가 평소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다는 점도 자리하고 있었다." "〈경찰은 국민생활의 모든 면에 걸쳐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걸핏하면 생사람을 좌익으로 몰아 때려잡는 바람에 '관제 공산당'이라는 새 용어가 생겨났고,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 무조건 쩔쩔 맸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흔히 좌익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쫓기게 되면 국방경비대에 들어가는 것이 상식처럼 돼 있었고, 일반 청년들도 경찰에 억울하게 당하고 나면 그들을 한번 봐주기 위해 일부러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방경비대와 경찰은 마치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충돌하기 마련이었고, 그게 커지면 총격전까지 벌이는 일도 더러 있었다.〉" "장택상 등 경찰 간부들이 경비대를 경시하였고 경찰관들도 경비대를 경찰예비대로 간주하여 깔본 것도 갈등을 키웠다."(174-5)


"여순사건이 거의 진압되어 가던 9월 29일 잠자고 있던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이 다시 등장하여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 법은 곧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회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은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와 처벌 규정이 아주 모호해서 정권이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한민당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연합에 의하여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해 12월 1일 공포되었다. 이제 통일 논의 자체가 어렵게 되었다. 북측에 무엇을 제안한다거나 남북회담을 하자거나 합작을 하자는 것도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가장 원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당시 법무부 검찰국 초대 검찰과장 겸 고검 검사로서 '빨갱이 잡는 검사'로 이름을 날린 선우종원에게 〈빨갱이는 무조건 포살(捕殺)해야 돼〉라고 격려하였다."(189-91)


5장 반공의 종교화 / 1949년


"한민당은 신익희와 지청천 세력을 흡수해 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민국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민국당은 49년 4월 말에 이르러 소속의원 69명의 제1당으로 부상했다. 이승만은 힘이 달려 이들과 어느 정도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1인 집권체제를 원하는 이승만으로선 무언가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만 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장악할 수 없는 정당 체계에는 고개를 돌리고 정치적 과제까지도 자신의 측근을 중심으로 한 관료조직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3월경에 이르러 좌익이 거의 소멸되었다는 건 그런 프로젝트의 나아갈 바를 시사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좌익의 산악 게릴라전은 49년 9월 최고조에 달해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되지만, 합법 공간 및 일상적인 민생 영역에서의 좌익은 49년 3월 남로당 지도자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된 뒤 붕괴되었다. 남로당의 궤멸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남한에서 이렇다 할 인민 봉기가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225-6)


유사 국가 기구에 의한 통치 계획의 일환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학도호국단이다. "학도호국단은 이미 48년 10월에 구성된 대한청년단과 49년 8월에 재편성돼 나타날 국민회와 함께 3대 반관(半官) 또는 유사 국가기구적 대중조직으로 '3위1체'를 구성했다." "대한민국 국적이 있는 18세 이상의 모든 남녀는 모두 국민회에 가입해야만 했으며, 그와 동시에 성년 여성은 대한부녀회, 청년은 대한청년단, 학생은 학도호국단에 가입해야만 했다. 이것 말고 청년들은 민보단, 소방단, 의용단에도 가입해야 했다. 국민회비를 내지 않으면 식량배급통장이나 물자의 배급을 중지한다고 위협했고, 청년단비를 내지 않으면 38선에 보낸다고 위협했다. 이 모든 조직의 총재나 명예총재는 모두 이승만이었고, 대한부녀회만 프란체스카가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법률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매우 기이한 이중적 국가체제 운영 방식이었던 것이다."(226-7)


"학도호국단은 족청의 부단장을 역임하였다가 초대 문교부 장관으로 발탁된 안호상의 일민주의(一民主義) 사상에 근거하여 안호상의 지도하에 만들어졌다. 안호상은 '국민사상을 귀일(歸一)' 시키기 위한 일민주의 사상 보급에 문교 행정의 중점을 두었다." "『일민주의 개술』에서 이승만은 〈하나가 미처 되지 못한 바 있으면 하나를 만들어야 하고, 하나를 만드는 데에 장애가 있으면 이를 제거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일민은 생각도 같고 행동도 같아야만 하며, 동일성과 동질성이 생명이라고 했다. 〈우리는 일민이다. 이 일민, 곧 한 민족에는 오직 한 주의만이 그 지도원리가 된다. 만일 두 주의들, 세 주의들을 지도원리로 한다면 우리는 한 민족이 아니라, 도리어 벌써 두 민족, 세 민족이 되고 말아, 한 민족의 부정이요 멸망이다.〉 일민주의 추종자들은 피를 강조했다. 핏줄과 혈통이 주된 화두였다. 히틀러의 게르만 순혈론과 '피와 땅'과 거의 같은 담론이었다."(227-8)


6월 5일 이승만 정권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을 만들었다. "국민보도연맹은 그냥 가입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동지나 아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자백서를 쓰게끔 강요받았으며, 그밖에도 고통스러운 일들을 해야만 했다. 박명림은 〈보도연맹은 민중 속에 침투한 정보망이자 동원망〉이었다며, 〈자수와 밀고가 장려되었다. 이 자수와 밀고는 한국전쟁 전후로 남한과 북한이 공히 동원했던 충성을 추출하는 방식이었다〉고 했다." "보도연맹은 더 나아가 '알아서 기는 문화'와 '충성경쟁'을 낳게 했다. 박명림은 〈보도연맹의 설립과 자수의 권장, 그것은 시민사회에 대한 물샐틈없는 옥죔의 시도였다〉며, 〈과거에 좌파활동을 한 자들은 자수하여 국가에 대한 과거의 불충을 사죄할 것이며 이를 통해 국가가 베푸는 은전을 받으라는 종용을 받았다〉고 했다."(248-9)


"김구는 이승만과는 다른 인물이었지만, 동질적인 세대적 특성은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1875년생, 김구는 1876년생이었다. 이는 이들이 30년 가까이 왕정체제하에서 산 사람들이라는 걸 의미한다. 이들의 왕정체제 이후의 삶은 내내 복고적인 투쟁의 연속이었다. 아니 이들의 전 생애가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그 투쟁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들이 해방정국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엔 이미 70대 노인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말은 어떻게 했을망정, 일상적 영역에선 생물학적 연령으로 인해 극복하기 어려운 권위주의와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다."(267) "이는 이들에 비해 36~37년이나 젊었던 김일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거쳐야 할 사회 발달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해방 직후에도 왕조적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바, 김일성은 그 전통에 편승하여 자신에 대한 우상화 작업을 이승만 못지않게 해 나갔다."(271-2)


"해방정국을 주도한 '통역 정치'의 다른 한쪽엔 '기독교 정치', 특히 '개신교 정치'가 있었다. 미군정 치하에서 우대를 받고 미국인들에게 접근하는 데엔 영어 다음으로 개신교가 유리하였다는 뜻이다."(279) "개신교는 '반공' 및 '친미'의 강력한 보증수표였다. 개신교 스스로 '반공'과 '친미'를 위해 적극적인 이념성과 정치성을 띠는 걸 마다하지 않았고, 종교지도자들은 그걸 부추겼다. 해방 후 장로교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 가운데 하나였던 한경직은 45년 9월 평안북도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다가 46년 1월 5일 조만식의 연금 이후 월남했다. 한경직은 일본 천리교회가 남기고 간 재산을 미군정으로부터 접수하여 영락교회를 세웠다. 공산주의를 반드시 베어야만 할 '괴물'이며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으로 간주한 한경직은 신자들의 정치참여를 촉구하였다." "영락교회 청년회의 핵심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인 오제도는 서북청년단 조직에 참여하였고 나중에 '사상검사'로 이름을 날렸다."(282-3)


맺음말 전투적 극단주의의 배양


일체의 도덕과 윤리와 행동규범이 무시되고, 간교와 탐욕과 냉혈이 그 자리를 차지한 무법천지, "그런 '무질서'와 '아사리판'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남한 사회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또는 좀더 잘먹고 잘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카오스의 도가니'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익 청년단체에게 테러와 폭력은 호구지책이었지만, 그들은 그런 행위를 포장할 그 무엇이 필요했다.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호구지책 행위를 더욱 극렬하게 만들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정치행위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출발한 면도 있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를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행위를 하기 위해선 정치자금을 만들어야 했고 사람을 불러모아야 했다. 그러나 이 일은 곧 그 나름대로의 자율적 힘을 갖게 되어 역으로 정치행위를 규제하였다. 정치 패거리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일이 민족에 우선하면서 정치세력 간 타협은 점점 멀어져 갔다."(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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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머리말 한(恨)과 욕망의 폭발


"일반 민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정국과 이후 6·25전쟁에서의 반공과 친공은 이데올로기보다는 원한관계와 얽혀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더더욱 대화와 타협은 불가능했다. 또 그래서 그 시절에 저질러진 학살도 〈근대적 국가기구에 의해 감정 중립적, 관료적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전근대 시절 부족간의 전쟁에서 나타난 것처럼 무자비한 살인과 강간, 재산 탈취, 피학살자를 거의 동물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극히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진정한 이데올로기가 있었다면, 그건 대세 또는 힘이 센 쪽으로 기우는 기회주의였을 것이다." "피가 끓는 원한관계, 전통적인 유대관계, 대세 추종의 처세술 등과 같은 동기들로 인해 빚어졌거나 증폭된 갈등마저 이데올로기 투쟁이라 불러야 한다면, 그건 아마도 '의사(擬似) 이데올로기 투쟁'이라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9-10)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갈등의 핵심은 '기득권 투쟁'과 '면죄부 투쟁'이었다. 일제 36년을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과거에 대한 평가와 그 평가에 따른 이해득실의 문제를 둘러싼 혈투였다. 이데올로기는 그 과정에서 도입된 장식물의 성격이 강했다.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모든 갈등의 핵이었던 신탁통치 문제도 독립의 방법론적 문제였다기보다는 생사와 흥망의 이해득실의 문제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반공만 해도 그렇다. 일제는 공산주의 사상을 억압하는 동시에 그걸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의 분열과 내부 갈등을 부추기는 데 이용하였다. 똑같은 독립운동을 하더라도 좌익 독립운동 세력에게 혹독한 탄압을 집중시킴으로써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좌우 반목을 조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반공주의는 혹독한 탄압을 통해 식민지 민중의 사회적 활동을 비교적안전이 보장되는 연고주의에 의존케 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이후 한국 사회의 공공 영역의 발달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쳤다."(11-2)


1장 36년 묵은 한(恨)의 분출 / 1945년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이 38도선 이북만을 점령하고 그 이남은 미군이 점령할 것이 확실해지자, 단 하루 만에 행정권 이양을 거부하고 나섰다. 그리고 나서 〈민심을 교란하고 치안을 해치는 일이 있으면 일본군은 단호한 조치를 취할 방침이다〉라는 포고령을 내리고 일본 군인 3천 명을 동원해 특별경찰대를 조직하고 건준이 접수한 경찰서·방송국 등을 다시 빼앗아 버렸다. 미군 진주 후에도 한국인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안재홍은 뒷날 〈해방은 16일 하루뿐이었다〉고 개탄했다. 그렇다고 해서 건준의 모든 기능이 다 죽은 건 아니었다. 민중의 감격과 환희는 여전했다. 건준의 조직 확대도 계속되었다. 건준은 8월 22일에는 총무, 조직, 선전, 재정, 식량, 문화, 치안, 교통, 건설, 기획, 후생, 조사 등 12부와 서기 1국으로 발전했으며,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의 지부를 설치할 만큼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36-7)


"미 점령군의 행정요원은 대부분 행정을 해본 경험이 없는 하급 장교였다. 점령군은 모든 행정에 있어서 일본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일본인들은 10월까지 약 350권의 비망록을 영어로 작성하여 미 군정청에 제출하였으며, 한인 관리들을 임명할 때에도 추천권을 행사하였다. 하지가 신문 기자들에게 〈사실 일본인들이 가장 신뢰할 만한 나의 정보원이다〉라고 실토했듯이, 미군은 일본군에 이은 새로운 지배자의 자세로 한국인들을 대했다. 이는 미군의 옷을 갈아입은 일제 통치와 다를 바 없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미군에게 준 한국에 관한 정보의 주요 내용은 ① 한국인의 민도는 극히 낮고 야만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불결하고 도둑이 많다), ② 2대 정치세력은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인데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의 지령을 받고 있다, ③ 한국을 통치하려면 총독부 관료체제의 도움이 필요하다 등이었다."(72-3)


"1946년 후반 일제 시기의 경찰 8천여 명 중 5천여 명이 미군정 경찰로 활동했으며, 경찰 간부의 80% 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그런 경찰이 '극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것도 큰 문제였다. 패전국 일본에선 국립경찰이 〈대중적 지역통제를 받지 않았으므로 전제적 억압의 도구로 너무나 쉽게 사용되었다는 정당한 판단을 기초로 하여〉 미군의 점령 기간 중 폐지되었지만, 한국에선 일제 치하의 방식 그대로 존속된 것이다. 도 경찰국장은 도지사가 아니라 서울에 있는 경무부장이 직접 통솔했으므로 전국의 모든 경찰은 미군정의 일사분란한 지휘 체계하에 놓이게 되었다. 극적인 중앙집권성과 더불어 경찰력도 과거보다 더 강화되었다. 해방 전 조선 전체의 경찰은 2만 명(일본인 1만 2천 명)이었지만, 미군정 치하에서 남한 경찰력은 2만에서 2만 5천 명으로 늘어 사실상 배가되었다." "초강력 중앙집권체제로 강화된 경찰이 민주주의 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은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98-9)


"미군정은 군정의 자문행정기구를 수립하기 위한 사전조치로 각 정치 세력의 통합을 원했다. 이승만이 공산당에 대해 호감을 표명한 거나 자신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어느 정당에 대해서도 뚜렷한 언질을 주지 않은 채 각 정당의 통일을 강조한 것도 바로 미군정의 그런 뜻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승만은 미군정의 그런 뜻을 자신의 세력기반을 구축하는 용도로 이용하고자 했겠지만, 양측의 뜻이 맞아 구성된 것이 바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였다." "그러나 평화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 문제가 가장 큰 쟁점이었다. 〈임시정부를 추대하느냐, 인민공화국을 국외의 인사로 보강하느냐, 양자택일을 하자〉(공산당의 이현상), 〈임시정부를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해야 한다〉(한국국민당의 원세훈), 〈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은 대립된 것이 아니다. 국내외 혁명가들이 결합하자〉(건국동맹의 이걸소) 등의 주장 가운데 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110-1)


"임정에겐 한민당과의 관계 설정도 문제였지만, 더욱 큰 문제는 오랫동안 임정을 괴롭혀 온 고질적인 내분이었다." "미군정의 한 보고서는 〈중경(임정)의 문제점은 정책상의 차이라기보다는 분파와 개별 인물들간의 파쟁에 있다〉며, 〈이는 이들 망명한 애국자들이 지난 26년 간 먹고살기 위해 투쟁하는 한편으로 혁명적 지도자로 행세하기 위해 투쟁하던 데에 그 뿌리가 있다〉고 했다."(132) "귀국시 1진과 2진을 나눈 문제를 둘러싼 (김구의 한국독립당 계열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계열간의) 갈등은 급기야 12월 6일 경교장에서 열린 첫 국무회의마저 무산시키고 말았다." "회의 기록을 위해 참석했던 장준하는 후일 〈환국한 임정 각료들 안에서까지 일치구국의 염이 저렇듯 허사가 된다면 이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라면서, 〈이 난국에 온 국민의 기대가 임정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단 한마디가 없는 국무회의가 된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개탄했다."(135)


2장 좌우(左右) 갈등의 폭발 / 1946년


한국군과의 언어 장벽을 해소하기 위해 미군정이 1945년 12월 5일에 건립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간 "광복군 출신들은 일본군 출신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소란스럽고 불평하는 소수파〉가 되어 대부분 국방경비대의 고위직을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미군정은 경비대 장교는 투옥 경력이 없어야 된다고 규정함으로써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용사들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국방경비대는 일본 식민지의 군사적 배경을 지닌 장교들의 집합 장소가 되고 말았다.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원용덕은 만주 군의(軍醫) 중좌 출신이었으며, 제1연대장 채병덕은 일본육사 49기, 제2연대장 이형근은 일본육사 56기, 제4연대장이자 경비대 총참모장 정일권은 만주군관학교, 나중에 창설된 제5연대장 백선엽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다. 국방경비대 창설의 산파역을 맡았던 미 군정청 국방부 고문 이응준도 일본육사 26기생으로 육군 대좌(대령) 출신이었다."(209-10)


"미군정은 1945년 9월 17일 '정당은 오라' 성명을 통해 일종의 정당신고제를 택한 지 5개월여 만인 46년 2월 23일 법령 제55호 '정당등록법'을 발표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3인 이상의 집단이 어떠한 형태의 정치 활동을 하려면 군정청에 등록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등록은 당원 명부에서부터 재정 상태에 이르기까지 정당에 관한 모든 정보를 요구하였다. 정당의 모든 걸 당국에 정확하게 보고하게 함으로써 좌파정당의 비밀 활동을 규제하는 동시에 등록의무 불이행을 이류로 정당 해체가 가능토록 하였다. 등록하지 못한 조직은 회합이나 시위에 필요한 허가를 얻기도 어려웠다. 4월까지 134개 정당 및 단체가 등록하였는데, 이는 미군정이 3월 20일로 예정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전에 공산주의 활동에 관한 보다 나은 정보를 얻고 궁극적으로 좌익들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인민보』가 해당 조치를 〈일본인들의 치안유지법보다 더 고약한 것〉이라고 비판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233-4)


"1946년 5월 8일 미소공위가 무기 휴회에 들어가자 미군정은 좌익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도 좌우파들을 대상으로 한 좌우합작을 구상하게 되었다."(247) "미군정은 왜 그렇게 좌우합작에 열성을 보였던 걸까? 후일 미 군정청에 경제고문으로 있으면서 미소공위의 미국 측 대표단원이었던 로버트 키니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미군정은 중도파들을 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중도파를 제외하고 이승만과 김구 등 극우세력을 지지한다면 중도파들은 공산당과 합류, 큰 세력을 유지할지 모르며, 또 우리가 중도파를 지지해도 민족주의 우익세력은 공산당과 합작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김규식(1881년생)과 여운형(1885년생)은 서로 형님, 아우하는 사이로 오래전부터 막역한 독립운동 동지들이었기에 대화가 잘 통했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은 약했거니와 권모술수에도 능하질 못해 이후 좌우 양쪽으로부터 호된 공격을 받아 비틀거리게 된다."(251-2)


"해방 정국의 우익 청년단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서북청년회(서청)는 46년 11월 30일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안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회를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훗날 제주 4·3항쟁 진압시 서청의 활동이 말해 주듯이, 서청은 종교적 수준의 반공 의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서청의 간부인 문봉제의 회고에 따르면, 서청 사무실은 한민당 본부가 들어 있는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는데, 동아일보 사옥 옥상에서는 '성분 심사' 등으로 매타작이 하루가 멀다시피 있었고, 그때마다 '살려달라'는 비명과 기절이 엇갈리는 생지옥이 연출되었다."(263-4) "'입만 살아 움직이는 지식인'보다 실천하는 '서청 단원'들이 차라리 더 순수하다며 그들의 폭력을 (필요악으로 간주하고)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논리는 비단 선우휘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반공주의자들에게 깊이 침투돼 있는 것이었다."(266)


"우익청년단체 조직원 수가 총 323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던 건 당시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던 대규모 실업과 경제난 때문이었다. 정치단체나 정치지도자들도 청년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청년단체들이 정치인들로부터 자금을 일부 제공받는 동시에 경찰의 비호하에 폭력을 일삼으면서 사회 각계에서 기부금을 받아내는 것으로 연명하였다. 폭력성이 강한 테러의 경우엔 높은 소득을 올릴 수도 있었다. 그런 테러단원의 소득은 기업체에서의 임금 소득보다 훨씬 높았다. 46년 8월 전평 조합원에 대한 대한노총의 테러에 가담한 청년 테러단원은 하루 300~500원을 받고 동원되었다. 이때 전 산업 남성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은 61원이었다." "그랬다. 청년단의 폭력 행사는 겉으로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양상을 강하게 띠었지만, 그 실상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의 성격이 강했다."(269-70)


극심한 식량난에서 비롯한 10월 대구항쟁이 핏빛 진압에 쓸려나가면서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당시까지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인민위원회의 파국을 낳았다." "〈좌파의 주요 기구의 전국 및 지방 지도자들은 대부분 죽든지, 투옥되었든지, 쫓기고 있든지 혹은 지하로 잠입하였다. 그들의 수많은 지지자들은 정치에서 떠나거나 더욱 급진적으로 되었다. 좌파 전체를 포용했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분쇄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중적 지지를 상실한 채 보다 극단적이며 포용력이 적은 남조선노동당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빈농들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는다는 단순한 합리성에 입각하여 묵묵히 경작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 농민의 보수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이 농촌을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역사적 상처에 근거한 것이었다."(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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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과 저항 - 해방 전후 서울의 주민사회사, 한국근현대사회문화사총서 1
김영미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1장 식민지 경성의 동화정책


# 조선 후기 한성부의 주민 통제수단

1. 행정관이 배치되는 공식적인 지방행정조직 : 부部와 방坊

2. 자발적으로 생겨난 주민조직 : 리里와 계契와 동洞

3. 오가통五家統으로 대표되는 더 작은 규모의 인보조직隣保組織

4. 세원稅源이 되는 개인을 직접 파악하기 위한 호적戶籍제도와 호패號牌제도


"과도적인 상황을 정리하고 경성부가 행정제도를 일원적으로 정비한 것은 1914년이었다. 그것은 부제府制라는 지방자치제도의 도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부제는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시제市制를 모방한 도시 지방자치제도이면서 일본인 중심의 도시재편정책이었다. 도시지역에만 지방자치제도를 도입하되 그 혜택이 일본인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고안된 제도였다. 부제의 실시와 함께 일본인 거류민단이 폐지되었으며 일본인들의 자치에 대한 요구는 부府에 부윤府尹의 자문기관인 부협의회府協議會를 두는 것으로 수렴되었다. 재조 일본인들은 그동안 누려온 거류민단의 자치적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부협의회제도를 통해 정치 참여에 대한 요구를 일정하게 보장 받았으며 거류민단의 부채를 경성부로 떠넘기는 경제적 실익도 얻었다." "종래의 경성부 하부 행정구역이었던 부·방·계·동이 전부 폐지되고 모든 거주구역은 정町·동洞으로 일원화되었다."(57-8)


"일제 시기 도시지역 주민지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행정기관의 비중을 줄이고 행정보조기구의 역할을 극대화한 것이었다. 행정기관의 업무를 대신한 행정보조적 주민조직이 바로 정·동 총대제도였다." "총대는 주민에 의해 '선임'되고 부윤이 '승인'하는 존재로서 공공사무를 보조하는 행정보조자이다. 총대는 5명 이내의 평의원들의 보좌를 받게 되므로 각 동과 정에는 총대와 평의원 6인으로 행정보조기구가 구성된다. '총대'란 일본어 음독으로 '쇼다이'로서 대표자를 뜻한다. 동 총대란 곧 조선어로 동수洞首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총대제도는 갑오개혁 이후나 대한제국 시기에 하부 행정을 보조하던 동수제도의 변형이며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후기 자연촌락에 설치된 동 존위제도의 식민지 근대적 현신이었다. 총대는 오늘날 동 회장의 전신으로 동 총대제도는 동사무소 제도의 기원이다."(60-1)


"1916년 주민자치제를 내세우며 총대제도를 도입한 경성부는 1933년 이를 보다 발전시킨 정·동회제도를 시행한다고 발표하였다. 일본인 거주지역인 정과 조선인 거주지역인 동에 조직되는 정회·동회는 그 지역에 거주하는 세대주들의 모임이다. 조선에 도입되는 이 제도는 당시 일본 대도시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일본에서 이러한 주민 조직은 '죠카이[町會]' 혹은 '죠나이카이[町內會]'로 불렸다."(102) "죠나이카이는 사회적 위기를 완화시켜주고 행정보조사무도 담당하였기 때문에 도시의 행정당국은 이 조직의 효용성에 주목해 주민조직을 행정보조에 활용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104) "다만 일본의 대도시에서는 죠나이카이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다음 국가적으로 정비되었다면 경성부 정·동회의 경우 처음부터 행정당국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차이가 있었다."(106)


"(1930년대 들어 급격해진) 지역의 발전은 지역유지 혹은 일부 주민들에게 동리의 개발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지역개발, 이것이 지역유지들이 정회에 참여하는 주요한 활동 명분이자 주민동원의 논리였다." "동리 발전과 생활환경의 개선은 지역유지뿐만 아니라 지역주민 일반의 염원이기도 했다." "정회사업의 목표는 교통·상하수도·교육·위생 등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공동체문화를 만들어 나가며, 동리의 유해환경을 퇴출하는 것이다. 결국 생활환경을 개선하여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드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도시화의 진전과 더불어 1930년대 경성부에서는 여러 가지 도시문제가 발생하고 있었으며 생활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도시민들은 이러한 공동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대응할 조직이 필요하였으며 정회제도는 주민들의 그러한 요구를 하나의 포섭 지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122-3)


2장 전시총동원체제 하의 정회町會와 주민생활


"경성부에서는 전시체제기에 접어들면서 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두 개의 주민조직이 결성되었다. 하나는 경성부 방호단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정신총동원조직이다. 경성부에서 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조직들이 빠른 시일에 결성될 수 있었던 토대는 주민조직으로 육성된 정회조직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성부 방호단과 국민정신총동원 경성연맹의 하부조직은 모두 정회조직을 토대로 하여 결성되었다. 따라서 1939년에 이르면 정회는 사실상 세 가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주민자치기구로서의 기존 정회, 방호단의 세포인 방호분단, 그리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조직인 하부단위 정연맹이다. 방호단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정연맹은 독자적인 물적 기반 없이 정회의 인력과 자금력을 동원하면서 결성되고 운영되었다. 곧 정회조직은 방호단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정연맹의 물적 토대였다."(138-9)


"초기의 정회는 주민들의 수평적 모임이었지만, 전시에 이르면 정회의 외부와 내부에 연합회와 세포조직이 결성되어 정회는 경성부가 주민들로부터 효율적으로 물자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총동원조직으로 변모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총대제와 초기 정·동회제 그리고 전시 정회제에서 '자치'와 '동원'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정회제하에서 '자치정신'과 '공동체정신'에 대한 강조는 효율적인 동원을 보장하고 있었다. 전시체제기 정회의 자율적 공간들이 축소되지만, 효율적인 동원과 통제를 위해 집단적 가치와 자발성은 오히려 한층 더 강조되었다. 일제가 강조하는 자치정신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국가적 이해에 헌신하는 태도를 의미하였다. 주민들이 생활공간의 주인으로서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해가는 주민 자치의 내용은 국가의 이해와 합치되는 한에서 인정되었다."(144)


"그 전에는 정회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배급제도가 시행되면서 이제는 주택의 소유자이건, 곁방살이를 하는 사람이건 정회사무소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수와 직업과 연령에 따라 배급량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배급을 비롯한 모든 전시업무들이 정회와 애국반으로 통합된 체제는 도시에서 주민동원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유판매가 금지되고 배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도시민들에게 식량배급권은 무엇보다 강력한 주민통제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배급대상자의 근거가 되는 정적부는 곧 동원대상자들의 명부로 이용되었다. 정회와 애국반은 배급단위이자 주민동원조직이었으며, 정회 임원들과 애국반장은 통제경제 하에서 주민생활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 동시에 동원구조의 최말단에서 주민들로부터 인적·물적 자원을 징발하는 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배급권을 담보로 한 사실상의 강제동원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149-51)


3장 지배를 타고 넘어 : 동민洞民 사회의 지배와 저항


"1920~30년대는 위생문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도시문제가 대두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경성부의 주민사회는 일상적인 권익을 보장받기 위해 행정당국에 진정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자신들의 목소리를 표출하였다. 이 시기 도시문제는 절대적인 인프라의 부족에서 연유하기도 하였지만 일제 행정당국의 차별적이고 권위적인 대민행정이 그 배경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지역사회의 집단행동은 그러한 경성부의 차별적이고 부조리한 행정을 문제 삼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주민운동은 조선인 거주지역인 북촌과 빈민들이 밀집한 교외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162) "주민운동이 제기한 도시문제들은 생계의 직접적 위협, 생활상의 불편, 불합리한 자원배분, 지역개발 등 여러 차원의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주민들은 지역을 단위로 결집하여 경성부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공공성과 불일치하는 행정 태만, 지역 차별 등의 과오에 대해서 항의하고 있다."(173)


# 주민운동의 전개양상

1. 오물(방치된 쓰레기와 분뇨) 처리 태만에 대한 항의

2. 경성부에 편입된 교외지역의 상하수도 시설 설치 요구

3. 경성부와의 연결도로 개수를 요구하는 도로·교통 문제

4. 북촌 지역의 교육예산 배정 문제(민족차별적인 행정)

5. 위생상·교육상 유해하거나 혐오스러운 시설 철거 요구

6. 이전능력이 전무한 무허가주택 주민들의 대책 요구

7. (제방 축조 같은) 재해 예방 시설과 구제 대책 마련 촉구


4장 해방 직후 동회의 정치세력화


"1945년 8월 16일 행정의 준공백 상태에서 출범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당면 임무를 질서 유지에 두었다. 해방 직후 건준이 처리해야 할 당면 업무들은 산적해 있었다. 도처에 산재해 있는 일본인들의 가옥과 공장·공공시설물에 대한 파괴 행위와 밀거래를 방지하는 일, 소위 적산이라 불리는 이 시설물들을 파악하고 접수해서 관리하는 일, 사적인 보복과 테러 행위를 금지하는 일, 식량창고를 접수해서 관리하고 식량을 안전하게 운반해서 전 시민들에게 배급하는 일 등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건준이 이 모든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기존의 주민조직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건준은 모든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자치수단을 강구하고 자신의 직역職域을 지킴으로써 건국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다. 자치를 위해 기존 정리조직町里組織을 활용할 수 있으며, 지역유지가 중심이 되어 청년층을 동원하거나 경방단警防團 조직을 개편하여도 무방하다고 하였다."(208-9)


"8월 19일 전경성총대연합회가 건준의 협력기관으로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며칠 전까지 총독부 하에서 활동하던 바로 그 정총대들의 조직이었다." "이와 같이 주민자치조직이자 전시체제기 주민동원조직이었던 정회는 해방과 함께 대두된 건국 준비의 필요성에 의해 재활용되었다. 정회뿐만 아니라 정회를 단위로 전시 방공防空과 치안유지 등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던 경방단이나 청년단 조직들도 식량배급이나 치안유지, 각종 자금과 인력동원을 위한 행동조직으로 재조직되었다."(210-2) "해방 이후에도 정·동町洞은 주민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단위이자 생활의 문제를 공동으로 풀어가는 단위, 그리고 지역엘리트들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정치 행위나 문화계몽운동을 벌여나가는 단위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 활발하게 전개되는 국가건설운동은 이 공간을 중심으로 주민들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고 자치성을 높여 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221)


"해방 직후 서울 주민들은 계급·계층적으로 보았을 때 절대다수가 실업자이거나 영세상인들이었다. 이는 해방 직후 서울에서 주민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결집시키거나 정치세력들이 주민들을 동원하는 데에 정회와 애국반이 가장 중요한 조직이 되었던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서울에서 미군정의 점령정책에 대한 좌익의 저항운동이 소위 '쌀 요구투쟁'으로 전개된 것도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좌익은 식량위기를, 당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실업자 대중을 투쟁에 동원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실업자 대중의 조직 방식으로 동회 단위의 '쌀 요구회'가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정회의 쌀 확보 노력은 초기에는 건의서 제출과 같은 온건한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좌익의 지도와 결합되면서 한층 적극적인 '쌀 요구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쌀 요구투쟁은 부분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 저지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241-2)


"정회조직에 대한 좌익의 통제력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 수락을 결의한) 1946년 1월 3일 집회를 계기로 반탁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곧바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우익이 주도하는 정연합회를 별도로 만든 미군정은 다른 한편으로 좌익의 협동조합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지역과 직장 단위의 소비조합 결성을 지지하였다. 1946년 2월 1일 군정청에서는 각 도 도지사회를 소집하여 경제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대책을 토의한 결과 물가조정책의 하나로 소비조합을 각 부·군·읍·면의 지역과 직장에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다." "소비조합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를 통해 중간 모리배의 개입을 없앤다는 점에서 사실상 좌익의 협동조합운동과 유사하다. 미군정은 협동조합운동의 취지를 인정하면서도 좌익의 주도권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비조합을 새롭게 제기함으로써 좌익의 협동조합운동을 무력화시키고자 한 것이다."(258-60)


"배급제도의 정비와 좌익의 퇴조 속에서 동회·애국반 조직은 배급권을 매개로 강제성이 강회된 우익의 동원조직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8월 15일 기념행사는 좌·우익 동원역량의 반전을 보여준다." "좌익 민전은 서울시가 이 행사를 위해 시내 각 동회라인을 통해 자금과 인원을 강제동원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1946년 중반부터 동회는 확실히 우익 정치세력의 자금과 인력동원의 중요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이승만의 도미渡美자금을 동민들에게 할당하거나, 통반장을 통하여 독촉 가입신청서를 돌리고 도장을 찍는 등 동회·애국반을 통한 강제동원 행위가 급증하였다."(265) "결국 동회조직을 통해서 주민들을 통제하고 동원해 가는 정치세력이나 그러한 정치세력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일반 민중 모두 식민지 전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속에서 이와 같은 강제적 주민동원 행위들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268)


5장 동원에서 통제로 : 정부수립과 동회의 국가기구화


"미군정은 1946년 8월 14일 해방 1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시를 특별시로 승격한다고 발표하였다. 미군정은 이 조치와 함께 서울시에 미국 도시에서처럼 시市 헌장憲章을 수여하였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서울시의 특별시 승격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해방 1주년, 곧 미군정 통치 1주년을 맞이하여 미국에 대한 이미지 쇄신이 필요했다. 식량 위기, 좌익 테러,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인해 민심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미군정은 해방 1주년 기념식을 거행해야 했다. 이에 이전부터 준비해온 특별시 승격조치를 해방 1주년 기념식에 맞추어 발표함으로써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서울시에 도와 동등한 직능과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행정력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946년 10월 1일부터는 행정구역 명칭을 변경하여 일본식 동명이던 정町은 동洞으로, 통通은 로路로, 정목丁目은 가街로 바꾸었다."(271-2)


"미군정에 의해 1947년 초 시행된 주민등록은 주민들의 기류 사항을 전면적으로 재확인하는 작업이었지만, 이 제도는 등록표의 발급과 연계됨으로써 일제 말기의 기류제도를 한층 보완한 새로운 주민통제방식이었다. 등록표는 발급과 관리 주체가 도시의 동회장과 지방의 면장이지만 전국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신분증이었다. 등록표의 가장 큰 특징은 키와 몸무게뿐 아니라 개인의 신체적 특징에 관한 사항을 기재하도록 되어 있으며 개인의 유일성을 입증하는 지문 날인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식량배급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가지고 다닐 것'이 명시되어 있어 항상적인 검문에 응하도록 되어 있다." "서울 시민들은 등록표와 생활필수품 통장을 가지고 가야 식량배급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시는 등록표제도의 시행과 더불어 1947년 4월 1일부터 가족단위의 배급통장제도를 폐지하고 개인별 통장제도를 시행하였다."(284)


"일제 시기 경방단의 재판이라는 비난 속에서 5·10선거를 사수하기 위해 결성된 동회 단위의 주민조직인 향보단은 5·10선거 과정에서 효율적인 주민통제조직으로 평가되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정권은 향보단을 해체한다고 발표하였지만 실제로는 향보단을 민보단으로 이름만 바꾸고 그대로 존속시키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이 조직은 향보단과 마찬가지로 청년층들을 민보단에 편입시켜 이들의 반정부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주민들이 반정부 활동을 주민들 스스로 감시하도록 만듦으로써 전 주민들을 경찰기구의 영향력 속에 편입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민보단 조직은 우익계 청년단 통합체로서 출범한 대한청년단(총재 이승만, 단장 신성모)과 함께 청년방위대로 개편되었다. 청년방위대는 오늘의 향토예비군과 흡사한 조직이다." "청년방위대와 대한청년단은 한국전쟁 당시 향토 방위를 위한 주민 자위대의 주축이 되었다."(296-9)


"여순항쟁을 계기로 치안에 더욱 불안을 느낀 이승만정권은 방공防共을 위한 보다 강력한 주민조직의 결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1949년 4월초 서울시 경찰국에서는 기성애국반을 재편성하고 유숙계 제도를 시행하여, 수도의 치안을 완전히 확보할 방침이라고 발표하였다." "1949년 애국반 개편의 특징은 향보단·민보단과 마찬가지로 경찰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이는 애국반 개편의 목적이 일제 말기처럼 혹은 미군정 시기처럼 행정보조조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찰의 하부기구 곧 주민들의 자치적 사찰기구로서 개조시키는 것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개편 내용의 핵심은 주민동태에 대한 의무적 신고제도인 유숙계법의 시행에 있었으며, 이 법을 실행하는 단위로서 애국반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또 애국반에 대한 감시체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전 국민들을 이와 같은 감시체제 하에 두고 국민 전체의 동태를 전부 경찰이 파악하는 것이 이 제도의 목표이다."(299-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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