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7장 '한일협정'과 '월남파병' / 1965년


"박정희 정권은 정치자금 모금을 위한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도 당당했고, 그 과정을 아예 반(半) 공식화했다. 65년부터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은 김성곤은 재벌들에게 돈을 거둬 박정희에게 갖다 바치는 역할을 했다. 김성곤이 거둬들인 자금 명세서는 박정희가 직접 결재를 했다. 돈을 거두는 건 정부가 발주하는 사업에서 무조건 10%를 정치자금으로 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부 발주 공사가 워낙 남는 장사이기 때문에 재벌들은 10%를 떼이면서도 서로 하겠다고 경쟁을 벌였고 박정희의 대리인인 김성곤에게 10%의 돈을 바치면서도 〈앞으로 이런 기회를 자주 달라〉는 식으로 고마워했다. 그래서 기업들로부터 돈을 뜯었다고 말썽이 날 일도 없었다. 그런 관행은 장려되었고, 전 관료 체제에 확산되었다." "북한의 존재는 늘 〈누구를 위한 경제개발인가?〉라는 질문으로 표상되는 남한의 빈부격차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었다."(17-8)


"로스토우는 58년에 낸 『경제성장의 제 단계: 반공산주의선언』에서 모든 사회를 전통적 사회, 과도적 사회, 도약 과정에 있는 사회, 공업화 과정을 통한 성숙사회, 고도의 대량소비 단계에 달한 사회 등 5단계로 구분하고, 과도적 사회와 도약단계의 사회에서 근대화를 위한 정치적 지도력의 원천으로 군부를 지목했다. 로스토우의 경제발전 단게설이 후진국 지도자들에게 던져주는 매력은 저개발 국가도 선진 국가처럼 발전할 수 있으며, 그것도 서구 선진 국가들이 수백 년을 통해 달성한 경제 번영을 저개발 국가들은 단기간에 달성할 수 있다는 '도약이론'이었다."(20) "이후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의 정책고문을 맡은 로스토우는 박정희의 성장주의 정책을 칭찬하면서 한국 경제의 도약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한 일본 자본의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다. 한일회담을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22)


# 로스토우의 경제단계설(박태균 요약)

1. 저개발 국가의 경제개발 계획만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적 팽창을 막을 수 있다.

2. 저개발 국가는 경제성장을 통해 미국과 선진 제국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될 것이다.

3. 저개발 국가의 경제개발 계획은 절대로 자기완결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

4. 자립 계획은 거부되어야 하며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 철저히 편입될 수 있는 경제체제를 지향해야 한다.

5. 이를 위해 외자 적극 도입, 수출주도형 발전, 불균형 성장론 등이 경제개발 계획에 도입되어야 한다.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발족된 64년 3월 6일부터 15개월여에 걸쳐 치열한 반대 시위가 벌어졌지만, 65년 6월 22일 오후 5시 동경의 일본 수상 관저에서 양국 외무장관 이동원과 시이나가 서명함으로써 한일협정은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이 협정은 한일합방 등 구조약에 대해서는 〈are already null and void〉라는 표현으로 합의했다. 유병용은 〈구조약의 무효시점을 '이미'라고 애매하게 기술한 것은 식민지 지배의 합법성을 강변하는 일본의 입장을 수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며 〈한국이 '이미'의 시점을 1910년으로 해석해 식민지 지배가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하는 것과 달리, 일본은 식민지 지배는 합법적이었으나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서도 〈양국 간의 긴 역사 중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매우 유감인 일〉이라는 외상 명의의 성명서 한 장으로 끝내고 말았다."(27-8)


"이 협정에 의해 평화선이 철폐되었으며,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영주권 문제 등도 일본 정부의 임의적 처분에 맡겨지게 되었다.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은 일제가 35년간 불법으로 강탈해간 모든 한국 문화재를 일본의 소유물로 인정해 버렸다. 정신대·사할린 교포·원폭 피해 등의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못했다." "일본은 62년 9월 〈독도는 크기가 히비야 공원 정도밖에 안 된다. 폭파라도 해 버리자〉고 주장했고, 외상 오히라는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단을 구하자〉고 주장한 바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제3국에 조정을 맡기자〉는 역제안을 해 논란거리를 남겼다. 조인 직전인 65년 4월에도 일본은 한국 정부에 〈다케시마의 불법 점거에 관하여 엄중 항의한다〉는 문서를 보내 국교 정상화가 한국의 독도 지배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28-9)


#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동의안 통과


"8월 13일 월남 파병 동의안은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찬성 101, 반대 1, 기권 2표로 통과되었다. 파월한 2만여 명의 전투부대에는 해병 청룡부대를 모체로 하여 창설된 해병 제2여단과 육군 수도사단이 맹호부대라는 이름으로 선정되었다. 10월 12일 여의도에서 30만 군중 환송 대회가 열렸다. 아직 마포대교가 부설되기 전이었는데, 정부는 이 행사를 위해 급히 마포와 여의도를 잇는 가교를 설치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파병의 명분은 6·25 때 입은 은혜에 대한 보은론과 더불어 '도미노 이론'이었다. 박정희는 환송 연설에서 〈우리가 자유 월남에서 공산 침략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는 멀지 않은 장래에 동남아세아 전체를 상실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우리 대한민국의 안전 보장도 기약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여기에 '대한 남아론'이 가세했다. 박정희는 파월 장병들을 '화랑의 후예'라고 부르면서 '대한 남아의 기개'를 만방에 떨치라고 말했다."(53-4)


8장 '정경유착'과 '한미유착' / 1966년


"1966년 5월 24일, 부산세관은 삼성이 경남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2천 259포대(약 55톤)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던 걸 적발하였다. 당시 사카린은 값이 비싼 설탕 대신에 식료품의 단맛을 내는 데 쓰이던 주요 원료였다. 부산세관은 1천 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매겼다."(79) "『중앙일보』는 9월 19일자 사설 〈재벌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재벌과 밀수를 등식적으로 규정한다든지 심지어는 재벌과 밀수, 그리고 정부가 일련의 관계를 갖는 함수관계에 있는 것처럼 여론이 비등되고 있는 데는 논리의 비약과 사회체제의 부정이란 측면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방향으로 일반적인 사고가 굳어질 때 파생될 문제를 그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동양텔레비전과 동양라디오까지 나서는 등 삼성 비호에 전 '중앙 매스컴'이 총동원되었다."(82-3)


"(미국의 추가파병 요구에 부응한) 제4차 파병안은 3월 20일 국회를 통과하였다. 제1야당인 민중당 대표 박순천은 66년 9월 베트남을 시찰한 후 다음과 같이 썼다. 〈탄손누트 비행장에 내려 베트남 땅의 높은 국기게양대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을 본 순간 나는 감격의 울음을 터뜨리고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가 공항에 접근하면서 비옥한 베트남의 땅이 눈 아래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역사상 침략만 받았던 우리 민족이 수천만 리 남의 나라 땅에 군대를 파견한 위업에 가슴의 고동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 비옥한 땅이 우리의 것이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나 하고 생각하였다.〉 여아가 죽이 잘 맞았다. 66년 10월 베트남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정희는 〈우리는 이제 새 시대 새 역사의 무대에서 영광스러운 주역〉으로 〈과거의 인종과 굴욕에서 탈피, 어엿한 주권 성년국가로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97-8)


9장 '정치 공작'과 '국가 테러' / 1967년


"67년 4월 29일 박정희는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하였다. 이건 호남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총체적 국부의 증대에는 어떤 기여를 할 망정 지역균형발전은 영영 불가능한 '구조'를 만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공업은 영남, 농업은 호남〉이라는 구도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은 농업 생산의 기본이 되는 수리 시설마저도 영남에 더 투자했다. 68년 현재 시설사업이 완성된 수리조합이 영남에는 72개소, 호남은 23개소였다." "문제의 핵심은 박정희의 인사 정책이 연고와 정실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는 쿠데타 하듯이 통치했다. 쿠데타란 믿을 수 있고 배짱이 맞는 사람 위주로 꾸미는 게 아닌가. 박정희의 인사가 연고 위주로 흐르다보니, 모든 행정이 연고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이후 수십 년 간 지속될 지역 갈등의 씨앗을 심게 된 것이다."(145-7)


# 호남선 복선화는 2003년 12월 8일에야 완료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는 1971년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늘 그 점이 아쉬웠다.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 전부터 늘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여권의 박정희 추종자들 사이에서 3선 개헌은 이미 66년부터 거론되고 있었다. 그간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 짓고 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박정희가 계속 집권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1967년 6월 8일에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는 박정희에게는 3선 개헌의 성패를 결정짓는 '전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이 자행되었다. 자유당 시절에 동원되었던 온갖 수법들이 되살아났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온갖 부정에 더하여 이른바 '야당 토벌작전'까지 도입되었다. 신민당 전국구 후보 10번 김재화는 재일동포 실업인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총선 일주일을 앞두고 김재화를 국가보안법, 반공법,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150-1)


선거 결과 공화당은 헌법 개정에 필요한 117석을 훨씬 웃도는 130석을 얻었지만, "선거 과정뿐만 아니라 투개표 과정에서도 전국적으로 엄청난 부정이 자행되었다. 야당은 6·8 총선을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요구하며 국회 등원을 거부했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등)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공화당은 부정선거를 비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야당과 타협할 자세를 취하였다. 이게 또 야당 내에 분란을 일으켰다. 야당이 타협파와 비타협파로 양분된 것이다."(153) 타협파인 신민당 대변인 김대중이 정부 측에 3선 개헌을 안한다는 보증을 받을 것과 지방자치를 실시하는 것을 조건으로 타협을 모색하자고 설득하자 유진오는 그 제안을 승낙했다. "김대중은 신문과 방송에 그걸 흘려 크게 보도되도록 했다. 그러자 비타협파인 강경파가 불만을 터뜨렸다. 강경파에 다시 설득된 유진오는 〈대변인의 말은 당의 의견과 다르다〉고 부정했다."(155)


"(국회의원직에 연연하던) 야당은 부정선거가 앞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법률을 제정한다는 수준의 타협안에 동의해 선거 169일 만인 11월 29일 등원했다. 김대중의 개탄이다. 〈얻은 성과는 전혀 없었다. 3선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이나 지자제를 실시한다는 약속도 얻을 수 없었다. 여당이 앞서 제시한 타협안에서 후퇴한 탓에 아무 소득도 없이 모처럼의 기회를 허망하게 놓쳐 버린 것이다. 나는 이 나라의 정치를 망쳐 독재정치를 초래한 것에 야당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일협정 문제에 이어 이번에도 거의 실현 불가능한 '선거 재실시'를 요구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이는 '한일회담 절대반대' 주장과 궤를 같이 한 것이다. 이러한 야당의 불행한 체질이 이번에도 일을 그르치게 했다. 강경론과 극한투쟁이란 공허한 명분주의로 야당이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고, 독재정권을 돕는 결과를 몇 번이나 초래했는지 모른다.〉"(155-6)


"1966년 10월 31일 시청 앞에서 벌어진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 환영행사는 엉뚱하게도 서울 도심부 재개발 사업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이유는 한미 양국의 TV 생중계 때문이었다. 당시 시청 맞은편엔 중국인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은 슬럼지대였다. 그 주변도 1930년대 이전에 지은 일본 적산가옥의 연속이었고, 그 사이사이에 무허가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TV 카메라가 30만 군중의 모습을 보여줄 때에 그 배경까지 잡히고 말았다." "〈건설은 나의 종교〉라는 신념을 갖고 있던 서울시장 김현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세운상가, 낙원상가, 파고다아케이드 등 도심부 재개발 사업에 매달렸다. 김현옥이 무허가 판자촌을 헐어내고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인 세운(世運) 상가는 주상복합아파트로서 당시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훗날 크게 쇠락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지만, 그때엔 사회 저명인사들이 주요 입주자가 되었다."(166-7)


"흐루시초프의 실각 이후 나타난 북한과 중국과의 갈등은 북한의 유일체제 수립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북한은 새로운 소련 지도부의 정책을 흐루시초프 시대의 정책과는 달리 본 반면 중국 공산당은 이를 〈흐루시초프 없는 흐루시초프주의〉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65년 베트남전에 대처하기 위해 소련이 사회주의 진영의 공동대응을 모색하자는 제의에 대해 북한은 찬성했으나 중국은 소련의 '수정주의적 자세'를 이유로 거부한 것도 바로 그런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국은 베트남전쟁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기회주의' '중간주의' '절충주의' 등으로 규정하고 북한이 '무원칙한 타협의 길'을 택하고 있으며 〈두 걸상 사이에 앉아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북한은 중국의 태도를 '편협한 교조주의적 행태'라고 반격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문화혁명은 중국 공산당을 더욱 교조화 시켜 북한에 대해서도 중국 노선에 따를 것을 집요하게 강요함으로써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190)


"그러나 북한의 자주노선엔 큰 희생이 뒤따랐다." "소련과 중국의 원조 중단으로 재정구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60년 전체 예산의 1%에 불과하던 국방비가 67년에는 30.4%로 뛰어올랐다." "이팝(쌀밥), 고깃국, 비단옷,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꿈이 날아갔다. 게다가 북한이 자주노선에 집착하는 가운데 벌어진 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북한의 위기의식을 크게 자극했다." "북한 내 강경파는 '모험주의'도 불사했다. 67년 1월 19일 해군 경비정 제56함 당포호가 동해에서 북한의 포사격을 받아 침몰함으로써 승무원 79명 중 28명이 실종됐고, 51명이 구조됐으나 구조 후 1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더니 급기야 북한은 68년 청와대 습격, 미 군함 푸에블로호 나포, 삼척·울진 게릴라 침투, 69년 4월 15일 미국의 EC 121형 정찰기 격추 등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대형 사건들을 잇달아 터뜨리게 된다."(195-6)


10장 남북한의 적대적 공존 / 1968년


"1960년대와 70년대를 통틀어 남북관계의 가장 중요한 특성 한 가지를 들라면 그건 바로 적대적 공존관계라는 점일 것이다. 북한의 강경 호전파와 남한의 강경 호전파의 이해관계는 같았다. 어느 한쪽의 호전파가 긴장을 고조시키면 다른 한쪽의 호전파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서로 몰래 만나 짜고 벌인 일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양쪽은 돕고 사는 관계였다. 그렇게 돕고 살다 보니 점점 서로 닮은 꼴이 되어갔다. 이종석은 그런 관계를 '거울영상효과'라고 부른다. 〈박정희 정권은 자주, 자립, 지위, 주체, 국방·경제 병진 건설 등 60년대 북한 정권이 즐겨 사용했던 말들을 60년대 말부터 빈번히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유신체제 형성 뒤에는 더욱 일반화해서 사용하였다. 1968년부터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는 구호가 제창되었으며, 이는 곧 '일면 국방, 일면 건설'이라는 정부 지표로 나타났다.〉"201)


"62년 5월 10일에 공포된 주민등록법은 이후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1·21 무장공비 침투 사태가 모든 걸 바꿔 놓고 말았다. 68년 5월 10일에 통과된 1차 개정안은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를 도입하여, 11월 21일부터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다. 이로써 6·25 때 발급되었던 시민증과 도민증은 자동 폐지되었다. 반공 교육은 물론 반공법 적용도 강화되었다. 68년은 〈미군들이 한국 사람을 린치한 신문기사를 놓고 술자리에서 미군들을 욕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빨갱이로 무수하게 두들겨 맞고, 택시에서 한두 마디 박정희 비난을 했다가 그대로 남산으로 실려가 빨갱이 앞잡이라고 매타작을 당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던 세상〉이었다." "남한 사회가 그렇게 경색되게끔 도운 최대의 협력자는 바로 북한이었다. 북한 역시 그런 분위기를 내세워 북한 사회를 옥죄는 쪽으로 나아갔다. 바로 이게 '적대적 공존관계'와 '거울영상효과'의 결과였던 것이다."(213)


"홍윤기는 박종홍이 주도하여 성안시킨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 권력의 결격 사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보완하여 그 권력 활동을 파시즘적인 것으로 승화시켰다고 말한다. 〈우선 헌장은 당시 비교적 자유방임 상태였던 초·중·고등학교 국민교육의 연장을 확신 있게 규제할 수 있는 권위를 도덕적 형태로 정립시켜 교육자, 피교육자, 학부모를 하나로 묶는 통제체제를 구축할 정신적 구심력을 제공했다. 이로 인해 박정희 정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던 대중동원이 선거자금 살포 차원을 넘어 교육적 차원에서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 또한 헌장 선포자로서 (중후한 권위를 부여받은) 박정희는 더 이상 정치나 경제에서 성공한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교육의 지도자로서 정신적으로 내면화한 이미지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들을 배경으로 놓고 볼 때, 역사적으로 헌장의 제정과 실현은 명백히 유신쿠데타의 정신적 전주곡이었다.〉"(238)


"언론의 치열한 상업성 추구는 박정희 정권이 바라던 바였다. 박 정권은 언론에게 각종 특혜를 베풀어 언론이 오직 상업적 성장에만 몰두하게 유도하였다. 67년 당시 일반 자금의 대출 금리가 25%였을 때 신문들은 18%의 낮은 금리로 대출 특혜를 받았으며, 신문용지에 대한 수입관세에서도 신문들은 일반 수입관세 30% 대신 4.5%의 관세율을 적용 받았으며, 저리의 차관 도입이라는 특혜까지 누렸다. 주태산에 따르면, 〈어떤 신문사는, 사설에서는 차관 망국론을 언급하면서도 뒤로는 일본의 차관 도입으로 호텔을 지으면서 '빨리 인가를 내달라'고 기획원에 압력을 넣어 관리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 신문사는 바로 『조선일보』였다. 박정희와 가까웠던 『조선일보』는 1968년 박 정권이 베푼 특혜에 힘입어 신문사 건물과 코리아나호텔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4천만 불의 상업차관을 아주 좋은 조건으로 들여왔다."248-9)


11장 독선·독단·독주의 정치 / 1969년


"1968년에 벌어진 일련의 북한 도발 사건으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까지 했던 박정희는 새해를 맞으면 69년을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하겠다는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시장 김현옥은 '서울시 요새화계획'을 발표했다. 그 계획 중 하나는 평화시에는 교통시설로 사용하고 전시에는 30~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로 쓰기 위해 남산에 1,2호 터널을 뚫는 것이었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싸우면서 공부하자〉는 것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학생들이 국가 방위에 자진 참여하는 기본자세 확립과 심신의 연마 및 집단행동능력 배양의 목표〉를 내세워 군사교육(교련)을 실시할 것을 발표하였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건 곧 3선 개헌을 하자는 말이기도 했다.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은 또다시 총대를 메고 69년 1월 7일 〈단군 이래의 위인인 박정희 대통령을 계속 집권시키기 위한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55-6)


"박정희 정권은 무력에 의해서만 유지되었던 건 아니었다. 무력 못지않게 중요한 건 금권(金權)이었다. 박정희는 엘리트층 인사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씀으로써 그들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거나 적어도 저항만은 하지 않게끔 하였고, 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돈질을 엘리트층 내부에선 '불우이웃 돕기' 수준의 선행으로 여겨지거나 박정희의 인정과 도량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일이었다. 훗날 박정희 옹호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박정희로부터 개인적으로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하겠다. 박정희는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도 거액의 정치자금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박정희는 숙청된 쿠데타 동지들에게도 생활비를 대주었으며, 야당 인사들에게도 격려금을 주었다. 푼돈이 아니었다. 박정희를 다시 보게 만들 수 있을 만큼 큰돈이었다."(322-3)


"1969년 9월 13일, 3선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에 회부되었다." "본회의 약 2시간 뒤인 오후 3시 50분경 국회의장 이효상의 세 번째 정회 신호로 공화당 의원들은 모두 본회의장에서 퇴장하고 신민당 의원들은 단상을 점거한 채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본회의장을 빠져나온 공화당 의원들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각 상임위 단위로 몇 개의 호텔에 투숙하였다. 14일 새벽 1시, 지휘 본부로 지정된 반도호텔에 모인 당의장 윤치영 등 지휘부는 2시 정각에 국회 제3별관에 모이라고 알렸다. 14일 새벽 2시 50분, 공화당 및 무소속 의원 122명은 야당 의원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는 국회 본회의장을 버리고, 길 건너편에 있는 국회 제3별관 3층에 있는 특별위원회실에 집결해서 개헌안을 25분만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국회의장 이효상은 의사봉이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자 국회 직원이 가져다 준 주전자 뚜껑으로 탕탕탕 책상을 쳤다."(328-9)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10월 17일로 예정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돈과 밀가루를 퍼붓기 시작했다. '밀가루 대통령'에 이어 '밀가루 헌법'을 탄생시키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박 정권이 유권자 매수를 위해 쓴 돈은 1천 500만 달러로 추산되었다. 개헌 지지 유세를 위해 전국을 돌던 김종필은 10월 6일 공주에서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내비치면서도 마지막 협박을 하였다. 그는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을 경우 그에 따르는 사회적 혼란과 국가위신 추락 및 국민이 원치 않는 또 한번의 군의 정치 참여를 초래할 우려가 있으므로 측근 의원들에게 개헌 찬성을 종용했다〉면서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비치며 개헌안에 대한 찬성을 유도했다." "마침내 10월 17일 실시된 국민투표의 투표율은 77.1%, 찬성률은 65.1%였다. 각 지역별 찬성표 비율에 따라 총 60만 달러의 보상금이 차등 지급되었다."(330-1)


"박정희의 권력 중독은 경제가 어려워짐에 따라 더욱 악화되었다. 69년까지의 경제성장률은 매우 높았고, 이는 3선 개헌의 성공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한국 경제는 69년부터 심각한 불황국면에 접어들었다. 직접적 원인은 미국이 68년 달러 위기에 봉착하여 한국으로부터 경공업제품 수입 규제조치를 취하고 차관의 원리금 상환 압박이 가중됨과 동시에 신규 차관 도입이 어려워진 것에 기인하였다." "노동계급은 60년 11.8%에서 70년 24.1%로 팽창하였지만,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궁핍이었다. 67년 광산노조의 광화문 시위, 68년 전매·철도노조 쟁의 및 조선공사 쟁의, 69년 면방 쟁의, 조선공사 쟁의, 부두노조 쟁의 등을 거치면서 노동운동은 점점 대규모화되고 격화되었다." "박정희는 그 위기를 70년대부터 더욱 강력한 독재체제로 돌파하는 노선을 걷게 된다. 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자살이 말해 주듯이, 노동자들에겐 저항의 길조차 막혀 버렸다."(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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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2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7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3장 병영국가의 건설 / 1961년


"군사정권은 민심의 호응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수법을 동원하였다. 물론 일시적인 이벤트로서의 포퓰리즘이었다. 법치(法治)니 인권(人權)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벤트들도 많았지만, 이 당시의 한국 사회가 그걸 따질 수준이나 조건이 아니었기에 그마저도 박수를 받았다. 법을 밟고 서 있는 군사정권으로선 아주 쉬운 일이었다. 민심이 불만을 느꼈을 법한 세력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4·19를 촉발시킨 데에 책임 있는 자유당 사람들과 그 시절의 부정축재자들, 그리고 혁신계 인사들까지 '용공'의 올가미를 씌워 감옥이 미어터지도록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13) "5월 23일에 사람들을 가장 감동시킨 건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정화' 방안의 발표였을 것이다. 이 조치의 결과, 전국 916개 언론사 가운데 일간지 39개, 일간통신 11개, 주간지 31개만이 남게 되었다."(15-6)


"군사정권의 청교도적 접근방법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440명의 뚜쟁이를 체포하고 4천 411명의 매춘부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조치도 보기에 화끈했고, 수입 사치품들을 수거해 불태우는 데엔 10년 먹은 체증까지 내려가는 것 같았다. 또 군사정권은 도시 엘리트의 상류생활을 비난함으로써 풍요로부터 소외된 민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다. 군사정권의 공무원들은 청교도적인 모범을 보여야 했다." "5월 29일 서울시 교육감은 과외수업과 교내외의 특별학습을 금지시켰다. '금지'라는 단어가 난무했다. 다방에도 (커피와 양담배 판매 불허라는) 사실상의 금지령이 떨어졌다." "6월 5일 치안당국은 떠돌이 고아들을 체포했는데 그 수가 보름 동안 1만여 명에 이르렀다. 6월 10일 내무부 산하에서만 첩을 둔 축첩(蓄妾) 공무원 510명이 쫓겨났다. 또 이날 최고회의는 최고회의법, 중앙정보부법, 농어촌고리채법을 공포했다."(17-9)


"5·16 쿠데타 한 달을 맞아 『경향신문』 6월 16일자는 한 면을 〈빛나는 혁명 한 달의 일지〉라는 제목의 특집을 마련했다. 이 특집의 서문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지 한 달 ····· 동안에 혁명정부가 이룩해 놓은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비록 짧은 한 달이나마 10여 년에 걸쳐 쌓인 부정과 부패는 깨끗이 씻겨져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문들은 박정희의 지도자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언론플레이'에도 호응하였다. 『조선일보』 6월 27, 28일자엔 박정희의 특별기고 〈지도자도(指導者道)〉가 실렸다. 이 글에서 박정희는 〈우리나라 국민의 대부분은 강력한 타율에 지배받던 습성이 제2의 천성으로 변하여 자각, 자율, 책임감은 극도로 위축되어 버렸다〉고 진단했다. 이 점에 관한 박정희의 '철학'은 시종일관 '한국인은 두들겨 패야 말을 듣는다'는 일본인들의 신념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제2의 천성을 하루아침에 고칠 순 없으니 앞으로 강력한 타율을 행사하더라도 이해하라는 것이었다."(32-3)


"이상우는 5·16 군정은 '군인의 정치'인 동시에 '대학교수의 정치'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는 평가를 내린다. 〈군정 동안은 군인과 대학교수라는 두 개의 아마추어 그룹이 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했던 시기였다. 군인들은 앞장을 서고 그 뒤에서 교수들이 머리를 제공했다. 대소의 국가정책으로부터 정당조직 새 헌법 제정 등 모든 작업이 '고문' '자문' '기획위원' '정책위원' 등등의 타이틀로 층층이 구축된 대학교수 그룹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군인과 교수들의 아마추어 세력의 의해 추진된 국가 정책은 많은 실적과 함께 시행착오를 남겼다. 그리고 '어용'이라는 달갑잖은 풍조를 낳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4·19에 적극 참여했던 교수들의 상당수가 쿠데타 정권에 참여하거나 비판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국 대사 사무엘 버거는 훗날(66년)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지식인들과 언론인, 그리고 정치인들이 쿠데타는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좋은 일이었다고 느꼈다〉고 썼다."(40-1)


"군사정권은 61년 5월 16일 오후 8시를 기해 각급 지방의회를 해산하였다. 52년 4월 정략적 음모로 탄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걸음마 단계의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데에 필수적이었던 지방의회가 탄생 9년 1개월 만에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군사정권은 6월 6일 비상조치법 20조에 의거하여 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 및 인구 15만 이상인 시의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승인을 얻어 내각이 임명하고 기타 지방자치단체장은 도지사가 임명하도록 했다. 9월 1일자로 공포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은 읍·면제를 폐지했다. 군사정권은 지방자치뿐만 아니라 농협이나 농지개량조합의 조합장 선거 등 자치적인 성격이 있는 것은 모조리 폐지하였다. '정치의 죽음'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박정희와 그 일행의 확고한 소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들은 정치를 낭비로 간주했다. 빈 자리의 상층부는 모두 군인들로 채워졌다."(54-5)


"기존의 정치를 대체한 건 중앙정보부였다. 1961년 6월 10일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중앙정보부법 공포와 함께 중앙정보부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중앙정보부법은 〈그 후의 이 나라 역사에 헌법만큼이나 중대한 의미를 갖는 법〉으로서 대형(大兄)이 지배하는 병영국가 건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병영국가란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는가 하는 식으로 국가안보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 그 목표 완수를 위해 〈폭력의 전문가들이 대거 국가의 전략적 엘리트로 등장〉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중앙정보부는 그런 '폭력의 전문가'들이 모인 집단으로 그들은 폭력의 기획에서부터 행사까지 모든 걸 전담하는, 정부 위에 존재하는 비밀 정부로 군림하게 되었다." "중앙정보부는 부장 김종필을 비롯하여 쿠데타 주체인 육사 8기생들의 독무대였는데, 이게 나중에 중앙정보부 자체가 치열한 권력투쟁의 무대로 변질되는 주요 이유가 되었다."(55)


"61년 7월 17일 조직된 경제재건촉진회는 한 달 후인 8월 16일 박정희가 지명한 이병철이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한국경제인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68년 3월 28일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훗날 이병철은 자신의 묘석에 다른 이름이나 단체의 일을 한 것은 다 쓰지 않더라도 이 단체의 회장을 지낸 것은 새기도록 미리 밝혀두었을 정도로 이 단체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한국경제인협회의 첫 번째 과업은 군사정권이 부과한 벌금에 대한 협상이었다. 이병철은 박정희를 만나 벌금을 현찰로 납부하는 것보다 그 돈으로 공장을 지어 주식으로 납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고, 이게 받아 들여졌다." "이는 군사정권이 '부정축재 처벌'에서 '부정축재 이용'으로 돌아섰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공장 헌납은 당초 금액의 5%에 불과한 벌금 지불로 둔갑하였다. 벌금은 깎이고 또 인플레 때문에 무의미하게 되었다."(80-1)


4장 구악(舊惡)을 뺨친 신악(新惡) / 1962년


"박정희는 1962년 2월 3일 열린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울산의 건설은 빈곤의 역사를 떨치고, 민족의 숙원인 부귀를 마련하기 위한 의지가 깃든 우리나라 공업화라는 거대한 작업의 첫 출발입니다. 서독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영성(榮盛)을 재현하려는 것이며, 이것이 곧 민족 부흥의 터전을 닦는 것이며,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를 마련하고,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입니다.〉 '신라의 영성'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하겠다는 것일까? 군사정권의 방식은 군사작전식이었다." "경제와 사회를 군사작전의 대상으로 삼는 군사문화엔 명암이 있었다. 군사문화는 '명령의 효율성에 대한 과신'과 더불어 '정치의 전쟁화'를 꾀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건 그 어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화끈하고 신속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군사문화는 한국 사회 곳곳에 스며들기 시작했다."(126-8)


"박정희는 62년 4월 29일 기자회견 석상에서는 〈자율적 정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부패 언론인의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경고했다." "6월 28일 군사정권은 새로운 '언론정책'을 내놓았다. 이 정책은 언론자유와 책임, 언론인의 품위와 자질, 언론기업의 건전성, 신문체제의 혁신, 언론정화 등 5개 항의 기본 방침과 20개 항의 세부 지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군사정권은 입법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권장'이라는 이름으로 이 같은 정책을 강요했다. 이 정책으로 인해 신문발행 요건이 까다로워져 사실상 신규 언론사의 출현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하루에 두 번을 내던 조석간제가 조간 또는 석간 가운데 하나를 택해 하루에 한번 신문을 내는 단간제로 바뀌었고 일요일자 신문발행이 금지되었다."(145) "1962년 10월 13일 (살아남은) 신문들은 한국신문발행인협회를 만들어 신문 면수나 구독료, 광고료 등을 담합 결정하는 카르텔을 형성하였다."(148)


"군사정권이 언론을 강력 통제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종필의 중앙정보부는 63년에 치러질 대선을 염두에 두고 62년 1월부터 비밀리에 정당을 조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정치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그건 바로 '부정부패'였다. 증권·워커힐·새나라·빠찡꼬 등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이었다. 이건 언론이 침묵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신문의 입에 재갈을 물렸던 것이다. 군사정권의 신당인 민주공화당은 1963년 2월 26일에 창당되지만, 4대 의혹 사건이 불거지게 된 건 62년부터였다. 워낙 가공할 부정부패라 덮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4대 의혹 사건은 박정희와 김종필의 합작품이었지만, 그 모든 책임은 김종필에게 돌아가게끔 되어 있었다. 나중에 김종필은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외유를 떠나게 되고, 그가 떠난 지 2주일 만인 63년 3월에 수사결과를 발표해 15명을 구속하지만, 그건 '정치 쇼'였다."(152)


# 4대 의혹

1. 증권 파동 :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주가조작 사건

2. 워커힐 : 워커힐 공사자금의 상당부분을 횡령한 사건

3. 새나라 자동차 : 일본산 소형차를 무관세로 수입해 시중 업자에게 비싼 값에 팔아넘긴 사건

4. 빠찡꼬 : 빠찡꼬 기계 수입 및 영업 허가 과정에서 돈을 챙긴 사건


5장 '권력투쟁'과 '색깔전쟁' / 1963년


"박정희는 10·15 대선 때까지 번의(飜意, 생각을 뒤집어 마음을 달리 먹음)에 번의를 거듭함으로써 〈변덕스러운 박씨〉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민주공화당 창당 대회 다음 날인 63년 2월 27일,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정치를 민간인에게 넘기고 대통령 출마를 않겠다는 이른바 2·27 선서라는 것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또 한번 감동시켰다. 박정희는 2월 27일 시민회관에서 3군 참모총장과 재야정치인 앞에서 자신의 민정 불참을 선언하는 이른바 2·27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3천여 명의 방청객이 현장에서 지켜보고 방송으로 중계된 선서식에서 박정희는 또 눈물을 흘렸고, 언론이나 정치인들은 군정이 종식되는 것처럼 흥분했다." "박정희의 눈물이 처음부터 의도된 '정치 쇼'였는지 그건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눈물로부터 20일이 지난 후에 '군정 4년 연장'이 나왔기 때문에 그리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178-9)


"박정희가 분야별 전문가들을 총동원해 집필한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은 〈혁명 기간에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서구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정치적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나가야 할 것인데, 그러한 민주주의는 다름 아닌 행정적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이는 부패 일소, 민생고 해결,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과도기 단계에서는 민주주의를 정치적으로 달성할 것이 아니라 행정적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행정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한국화' '한국적 민주주의'와 교체 가능한 용어였다. 박정희는 〈민주주의라는 빛좋은 개살구는 기아와 절망에 시달리는 국민 대중에게는 너무 무의미한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종국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가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아세아에 있어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성패와 장래를 결정하게 될 유일한 관건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204-5)


"공화당(박정희)은 〈새 일꾼 바로 뽑아 황소같이 부려보자〉, 민정당(윤보선)은 〈군정으로 병든 나라 민정으로 바로 잡자〉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10·15 대선은 사상 논쟁이 지배한 선거였다." "9월 23일 박정희는 방송연설에서 〈이번 선거는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대결〉이며, 〈이조 500년 동안의 사대주의적 근성과 일제 식민지적 근성을 일소하고 민족 주체의식의 확립 위에 외국의 주의·사상·정치제도를 우리 체질과 체격에 알맞도록 적용 실시하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라고 말했다. 9월 24일 윤보선은 전주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여순반란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으며 이번 선거야말로 이질적 사상과 민주사상의 대결〉이라고 응수했다. 그는 〈박정희 후보가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220-1)


"박정희는 사상논쟁에 대해 〈낡은 매카시즘의 찌꺼기〉라고 주장하면서 사실 관계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건 진상을 아는 왕년의 극우 인사들이 굳게 침묵하였거나 오히려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이다. 원용덕이나 윤치영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는 한국의 극우가 색깔보다는 '힘의 관계'에 더 민감하다는 걸 말해준다." "윤보선 측이 색깔 공세에 맛을 들인 반면, 박정희 측은 영남 지역주의에 호소하는 수법을 썼다. 박정희는 영남 이외의 지역에서는 '구악 일소' 등 개혁주의 메시지를 강조한 반면, 영남 지역에서는 지역성에 호소하는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는 민정 이양 과정을 거치면서 박정희 주변에 경북 출신, 특히 경북고(전신은 대구고보) 출신 정치인들이 대거 몰려든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박정희 측은 지역감정 선동과 더불어 윤보선을 '귀족'으로 몰고 박정희를 '서민'으로 부각시키는 민중주의 전략도 구사하였다."(225-7)


"'보수야당' 대 '진보여당'의 대결 구도는 지역주의와 무관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남한의 진보 및 민족주의 세력은 쿠데타에 지지를 보내거나 적어도 저항은 하지 않았으며, 이 같은 호의적 태도는 63년 대통령 선거에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한국전쟁 당시 소년 빨치산으로 활동했으며 나중에 민중운동에 헌신하게 되는 박현채 같은 이도 1963년에는 박정희에게 투표했다. 심지어 쿠데타권력에 의해 투옥 중이던 혁신계 인사들마저 면회 온 가족들에게 박정희를 찍으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윤보선의 집요한 색깔 공세는 이미 박정희가 저지른 '혁신계 죽이기'마저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박정희는 윤보선 측의 색깔 공세에 대해 〈저들이 나를 빨갱이로 몰려한다〉고 분노했지만, 빨갱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거나 탄압하는 건 이제 곧 박정희의 특기로 자리 잡게 된다. 또 박정희를 지지했던 혁신계 인사들은 곧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236-7)


"수출산업 육성에서 한국이 비교우위를 자랑할 수 있는 건 싼 노동력뿐이었다. 정부가 기업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계속 싼 임금을 그대로 묶어주는 것이었고, 군사정권은 이에 적극 응했다. 군사정권은 63년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껍데기만 남아있던 노동절을 그 이름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꿔 버렸다." "값싼 노동력만 있다고 수출산업 육성이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돈이 필요했다. 미국은 무상원조를 받는 나라에는 차관을 줄 수 없다고 버텼고, 일본은 아직 국교 수립이 안 된 상태였다. 군사정권은 경제사절단을 서독에 파견해 차관 제공을 요청했다. 4천만 달러의 상업차관 제공이 결정되었다. 문제는 지급보증이었다. 이 문제는 서독에 인력수출을 하여 그들의 3년간 급여를 서독은행이 코메르츠방크에 매달 강제 예치하는 담보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하였다."(255-6)


# 1977년까지 광부와 간호사 총 1만 2천여 명 파견


6장 '민족 신앙'에서 '수출 신앙'으로 / 1964년


"4·19를 어떻게 부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의미의 투쟁'으로서 사실상 '권력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문제는 4·19 직후부터 열띤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5·16 주체세력은 4·19의 좋은 이미지만을 차용해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4·19를 '4·19 의거'로 격하시키면서 그 수준으로만 묶어두려고 하였다. 그들의 4·19 이용은 '4·19 마케팅'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상품 판매를 위한 마케팅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4·19 찬양 수사(修辭)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지만, 그건 반드시 5·16의 '판매'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281-2) "박정희는 63년 9월 1일에 낸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는 〈4·19 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 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4·19=5·16"이라는 등식이 "4·19<5·16"으로 바뀐 셈이다."(284)


군사 및 경제 원조를 무기 삼은 미국의 압력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64년 3월 들어 한일회담을 재개하면서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 방침을 밝혔지만, 그런 강행 의지만큼이나 강한 야당과 학생들의 반발이 폭발하고 있었다. 야당, 사회·종교·문화단체 대표 2백여 명은 3월 6일부터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구국선언문'과 '대정부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3월 24일, 4·19 이래 최대의 학생 시위가 서울에서 발생했다." "이후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고등학생 및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 투쟁은 미국과도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미국 외교계의 실력자인 조지 케넌은 『뉴욕타임스』 64년 3월 25일자를 통해 〈우리는 이제까지 한일 양국뿐 아니라 자유세계 전체의 큰 이익이 될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희망하여 왔다〉고 말하고 한국의 반일 학생운동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했다."(289-90)


"3월 28일 박정희 정권은 김종필의 귀국 조치와 함께, 그간 야당이 백지화를 요구해온, 한일회담 타결의 핵심으로 간주되던 비밀문서,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공개하였다. 이는 62년 11월 12일에 중앙정보부 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 사이에 작성된 메모였다. 메모의 내용은 한일회담 타결의 조건으로 일본이 한국에게 제공할 돈의 액수를 밝힌 것이었다. 무상공여 3억 달러, 유상공여 2억 달러, 상업 차관 1억 달러 등이었다. 이 메모는 기본적으로 한국이 요구해 온 청구권을 포기시키는 해결방식이었으며, 어업문제에 있어서도 사실상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철폐하는 것에 합의한 것이었다. 이 메모는 자금 제공의 명목에 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아 쌍방이 각자 그 명목을 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청구권'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은 그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해석했다."(291)


"6월 3일 전국적으로 10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는 김종필 화형식이 거행되었고, 훈련을 마치고 군가를 부르며 학교로 돌아온 ROTC 후보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였다. 오후 4시경, 경찰 백차와 트럭을 탈취한 시위대는 세종로와 태평로 거리를 장악했다. 서울시내 몇 개의 파출소들은 시위대의 투석으로 박살이 났다. 시위대는 청와대 앞의 최후 저지선까지 위협하였다. 이날 밤 9시 40분을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8월 3일 하루 동안 시위대 200명이 부상당했고, 1천200명이 체포되었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되기까지 55일 동안에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 등 모두 348명이 구속되었다." "7월 27일 38세의 이동원이 외무장관으로 취임했다. 이동원은 김종필에 이어 '제2의 이완용'이라는 매도에 굴하지 않고 이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맹활약을 하게 된다."(300)


"(근본적인 언론 통제책을 모색하던) 박정희의 뜻을 받들어, 공화당은 계엄 해제 다음 날인 7월 30일에 (언론윤리요강으로 보도내용을 심사하는)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이 악법 반대 투쟁 과정에서 8월 17일 한국기자협회가 탄생하였지만, 언론사에 대한 정부의 압력 강화로 이탈자가 속출하였다." "박 정권은 8월 31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을 가로막는 기관이나 개인에 대해 특혜나 협조를 일제 배제키로 결정했다. 그 결과로 바로 그날 『조선일보』『동아일보』『경향신문』『대구매일신문』 등 이 법의 시행에 반대한 4대 신문에 대해 정오부터 1시간 동안 정부부처와 산하 금융기관, 각급 행정관서들이 신문구독을 중지토록 행정 압력을 가하였다. 박 정권은 신문구독 중지와 아울러, 은행융자 제한 및 기존대출자금 회수, 신문용지 가격의 차별대우, 극장협회와 기업체들에 대해 광고게재 중단 압력, 취재활동 제한 등 모두 다섯 가지 보복조치를 취하였다."(309-11)


"개발독재 체제하의 시장은 새로운 전장이었다. 공정하고 법이 지배하는 시장이 아니었다. 폭력과 협박과 온갖 권모술수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강력한 권력을 중심으로 연고와 정실이 난무했다. 빽과 줄이 총동원되곤 했다. 63년 3월에 이루어진 군부의 '알래스카파'(함경도 출신) 숙청과 함께 백남일, 함창희, 조성철, 이용범 등 재계의 알래스카파 역시 몰락했다. 60년 12월 국내 도급순위 1위에 오른 현대건설은 '알래스카 토벌'시에 한꺼번에 휩쓸려 현대건설까지 존폐의 기로에 섰다. 현대건설의 사주인 정주영은 강원도 출신인데도 '토벌' 대상에 오른 건 건설업계의 정치 싸움 때문이었다. 아마도 정주영은 '범 이북파'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이미 자유당 시절부터 권모술수에 찌든 재계에 5·16 쿠데타는 한 수 더 높은 권모술수를 가르쳐준 것이다. 이제 박정희의 고향인 영남 연고 재벌이 승승장구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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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장 점증하는 좌절의 혁명 / 1960년


"3·15 부정선거 이후 항의 시위의 주체는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이었으며, 대학생들의 참여도 서울 소재 대학보다는 지방대 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고, 이승만의 하야를 외치는 최초의 목소리는 대학생들이 아닌 교수들에 의해 먼저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4·19 혁명의 성격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학생들은 단지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는 이유에 근거한 특권·선민의식에 물들어 있었고, 〈소수를 제외하고는 극우냉전 체제적 사고와 구미 제일주의의 근대화론 틀에서 벗어나 있지 못했다.〉 그들은 이승만 체제 하에서 〈자발적이고 반체제적인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4·19 당시에도 〈기성세대는 각성하라〉는 식의 소박한 분노를 표출하는 차원에 머물렀다. 이는 종국엔 4·19 혁명의 주체가 된 대학생들에게 혁명 이후의 상황에 대한 '마음의 준비'조차 없었다는 걸 의미한다."(23-4)


"동양통신 기자 김성진은 이승만이 4월 28일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옮긴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광화문에서 경무대 입구까지 순식간에 일반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왜 그랬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승만의 사임이 4·19의 주요 목표가 아니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4·19 직후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실시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84.5%는 자유당에 반대하여 데모에 참가했다고 답했고, 이승만에 반대한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11.3%에 지나지 않았다. 4·19가 일어난 주요 이유를 들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들은 ①정부의 부패 ②부정선거 ③경제불황 ④이승만의 장기 집권 ⑤경찰의 고대생 데모대 공격 ⑥장면 지지 등을 지적하였다.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①이기붕 ②자유당 지도층 ③경찰 아첨배·특혜 추구자들 ④부정축재자 및 모리배 ⑤이승만 ⑥정부관료 순이었다."(38-40)


"민주당이 당면한 진짜 문제는 4·19 혁명에 민주당이 얼마나 기여했는가보다는 4·19 이후 민주당이 어떤 행태를 보였는가였다. 장면의 부통령 사임을 놓고도 구구한 해석이 난무한 가운데 내분의 수렁으로 빠져들었거니와 집권 후엔 더욱 격렬한 내분의 양상을 보이게 되는 민주당을 고운 눈길로 보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4·19는 애초부터 '주인 없는 혁명'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직접 집권하지 않는 한 '무임승차설'은 나오게끔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민주당의 '독식(獨食) 멘탈리티'였다. 7·29 총선 공천에 4·19 주도 인사들을 대거 참여시켰더라면 집권 이후 정국의 안정도 기할 수 있었을 텐데, 민주당은 파벌 간 나눠먹기를 하기에 바쁜데다 그 나눠먹기마저 여의치 않아 동일 선거구에 중복 출마하는 등 권력에 걸신들린 모습을 보였다. 이 경우엔 민주당에 강력한 보스가 없었던 것이 재앙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58-9)


"8월 19일에 국무총리 인준을 받은 장면은 8월 20일부터 조각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장면은 조각에서부터 신구파간 이전투구의 격랑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 윤보선이 문제였다." "윤보선은 60년 당시 63세였는데,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렸다."(77-9) "그러나 장면은 교육자나 성직자의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정치지도자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검소하고 온화한 반면 나약했고 의타적이었다. 죽도 밥도 아니라는 뜻에서 장면에겐 '짜장면'이라는 별명마저 붙었다. '착하지만 어리숙한' 모습을 꼬집은 것이었다. 장면의 정계 진출 자체가 천주교와 강한 친미주의라고 하는 배경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혁명 이후의 혼란한 사회를 이끌고 가기엔 역부족이었다."(81)


"(대한對韓 정책에 대한 권고를 담은) 콜론 보고서는 한국에서의 군사 쿠데타를 기대하는 미국 정계 일각의 기류를 반영했다. 예컨대,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풀부라이트는 59년 콜롬보에서 〈한국에서는 정치적 위기가 점차 커지고 있다. 정당 정치가 실패할 경우엔 군인 정치에 의한 교체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 무렵 일본 주재 미국대사 라이샤워는 〈한국을 계승할 사람은 전쟁 마당에서 자라온 새로운 젊은 군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일련의 주장은 제3세계에서 반공 우익정권을 지지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늘 민주주의를 외쳐온 미국의 대외정책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기회주의 성향을 잘 드러내준다." "콜론 보고서는 60년 1월부터 5월까지 『사상계』에 분할 게재됨으로써 국내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보고서는 특히 젊은 장교들을 자극하여 군인들이 너도 나도 우국방담에 뛰어들면서 강한 정치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107)


"한용원은 5·16 쿠데타 촉발 요인으로 ①정군파와 만군출신 비주류파를 중심으로 한 군부의 파벌주의 ②진급 적체현상의 심화에 따른 경비사 5기 및 육사 8기의 불만 증대 ③장면 정권의 10만 감군 계획으로 인한 군부의 제도적 이익의 손상 우려 ④정군을 추진한 '말썽 장교' 예편 계획에 따른 정군파 장교들의 불안 의식 고조 등을 들고 있다. 여기에 소장파 장교들이 갖고 있던 강한 자부심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군의 성장'이라고 하는 구조적 배경으로 볼 수 있으나, 그것이 장교들 개개인에겐 강한 자부심 또는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나라를 구하랴〉하는 식의 소영웅주의의 형태로 나타나 쿠데타의 촉발 요인이 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과대 성장한 국가의 제 부문에서 군은 초과대 성장한 집단이었다. 한홍구는 적어도 1970년대 초반까지 장교 집단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은 집단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109)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44년 4월 일본육사까지 졸업했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 시절 이름을 다카기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었다. 다카키 마사오는 창씨개명에 의한 이름으로 조선이름 박정희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웬만한 사람은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과 진짜 일본이름을 금방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진짜 일본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를 씀으로써 '조선민족의 흔적 지우기'를 시도했던 것이다. 또한 박정희는 일본 육사 시절 1936년에 일어났던 일본의 2·26 쿠데타 사건에 심취했다. 그 쿠데타 주동자들을 '정신적 선배'로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그는 훗날 초급 영관장교 시절부터 가까운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2·26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게 한국에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발언을 하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해방 덕분에 "1944년 7월 일본 만주군 소위로 부임한 박정희가 긴 칼 차는 기쁨을 누린 건 1년여에 지나지 않았다."(124)


"한홍구는 〈기회주의 청년 박정희!〉라는 글에서 젊은 시절 박정희의 삶에는 네 번의 결정적 변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이고, 두 번째는 해방 직후 광복군에 가담한 것, 세 번째는 남로당에 가입한 것, 마지막으로는 여순 사건 이후 단행된 숙군과정에서 다시 한번 극적인 변신을 해 살아남은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 곡절이 많다지만 박정희만큼 변신을 자주 한 이도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이 급히 변하다 보니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시류에 휩싸여 변할 수 있다. 세상이 변하는데 옛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변심은 횟수도 그렇지만 남다른 데가 있었다. 앞의 세 번의 변신은 불행한 기회주의자의 막차를 탄 변신이었다는 점이다.〉 그 이후에도 박정희의 변신은 계속되지만, 매번 변신의 동력은 '야심'이었다." "자신의 야심을 받쳐줄 배경이 없던 그가 택한 방식은 '목숨을 걸고' 크게 먹는 '올인' 방식이었다."(136)


2장 '역사의 지체'에 대한 분노 / 1961년 1


"장면 정부가 안정된 내각을 갖고 국정운영을 해 나간다 해도 돌파해야 할 난관은 만만치 않았다.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경제난이 워낙 심각한데다 4·19 혁명으로 인해 새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과잉'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다가 내각마저 불안정한 정도를 넘어서 휘청대고 비틀거림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건 이미 60년 7·29 총선을 전후로 해서 나타난 민주당 신·구파의 이전투구 때문이었다. 장면은 자신의 파벌인 신파조차 전혀 장악하지 못한 채 어찌 보면 '얼굴 마담' 가까운 노릇만 하고 있었으니 그 이전투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 윤보선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장면 정부 비판은 타당했을망정 그에겐 장면의 그런 한계까지 껴안으면서 국정운영의 안정을 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비공개로 협상과 타협을 모색해야 할 사안도 공개적인 발표로 대신함으로써 갈등을 더욱 악화시켰다."(191-2)


장면 정부 출범 초기부터 소장파가 줄기차게 요구한 "국방장관직을 (소장파 리더인) 이철승에게 주었더라면 적어도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거나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왜 노장파는 한사코 소장파의 요구를 거절해 분란을 키웠던 건가? 장면과 민주당 노장파가 소장파의 요구를 외면한 이유는 소장파들이 정부나 당의 요직을 차지할 경우 그것은 중진들의 권력에 대한 직접적이고 심각한 도전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민주당은 내부 헤게모니 투쟁에 몰두하다가 민주당 정권을 통째로 날린 것이다."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5·16 주체세력들도 정권 장악 후 군사적 위계질서라고 하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못지않은 내부 헤게모니 투쟁으로 몸살을 앓았다는 사실이다. 즉, 엘리트 집단의 내분은 정치 엘리트와 군 엘리트 모두 억눌리고 허기진 게 많은데다 '권력 잉여'가 너무 컸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어느 정도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199-200)


"16인 항명사건의 후유증까지 겹치는 바람에 61년 4월 초순, 박정희의 예편은 기정사실화 되었으며, 예편 일자는 5월 하순경으로 되어 있었다. 박정희가 5·16 거사계획이 사전에 누설된 것을 무릅쓰고 마구잡이로 일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절박한 사정 때문이었다. 누구나 다 동의하지만 5·16 쿠데타는 사실상 드러내놓고 한 엉터리 쿠데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신기하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박정희 지지자들은 '드러내놓고 한 쿠데타'를 박정희의 대담무쌍, 확고한 소신, 웅대한 비전 등으로 미화하지만, 그건 엄밀히 따지고 보면, '조폭논리'와 유사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무슨 일이건 '목숨을 걸고' 하면 목숨을 걸지 않은 사람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심하거나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치였다."(240-1)


"수십 년간 권력에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살아온 한국 민중에게 신문의 1차적 사명은 권력을 때리는 것이라는 정서가 강하게 배어 있었고, 신문들은 새롭게 얻은 무제한의 자유를 그런 민심에 영합하는 데에 바쳤다." "김정원은 신문 권력의 남용을 포함한 사회적 혼란에 대한 장면 정권의 무력한 대응을 '자유 지상주의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혼란을 야기토록 한 사태 중이 하나는 사이비 언론의 방종이었다. ····· 시가지의 교통을 마비시키는 시위대가 '집회의 자유'를 구실로 하듯, 이들 사이비 언론들의 방종도 '언론의 자유'라는 기치 아래 보호되고 있었다. ····· 이승만 정권을 뒤이은 민주당의 무능은 4월 혁명의 성공으로 의기양양해진 지식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불안을 조성했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는 한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상투어가 되기에 이르렀다.〉"(247-8)


"그러나 5월 16일 거사마저도 행동개시 5시간 전에 정보가 누설되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제30사단장 이상국(준장)이 방첩대장 이철희(준장)에게 알려주고, 이철희는 요정 은성에서 회식 중이던 장도영에게 보고했다. 이게 밤 10시경이었다. 장도영은 서울지구 방첩부대에 임시 지휘본부를 설치하였다. 5월 16일 새벽 1시 45분, 해병대 1개 대대가 한강 다리를 향해 진격해온다는 보고를 받은 장도영은 육군본부 헌병대에 한강 다리 사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장도영은 중화기 무장에 반대하면서 카빈총만 가지고 가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한강다리를 막되 차가 한 대 정도 통과할 수 있도록 여유를 남겨두라는 명령도 내렸다. 쿠데타를 막겠다는 뜻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한편 거사계획이 누설되면서 30, 33사단의 출동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박정희와 한웅진은 초조감을 견디지 못해 계속 담배를 피워댔다."(262-3)


"쿠데타가 발발하자 오전 11시 매그루더와 그린이 윤보선을 방문했다. 매그루더는 윤보선에게 〈쿠데타군은 3천 600명밖에 안 된다. 충분히 무력진압할 수 있다. 대통령이 동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거듭된 요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는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북한 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는 논리로 버텼다." "미 국무차관 체스터 보울즈는 국무장관 딘 러스크에게 보낸 17일자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윤 대통령은 (청와대 요담에서) '장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환멸과 불만족은 확산되었고 부정은 광범위하고 정부의 상층부까지 오염시키고 있으며 한국은 강력한 지도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도 장면은 그런 지도력을 제공하는 데 무능했다'고 지적했다. 윤보선은 국회 내외의 인물을 망라하는 거국 내각을 구성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276-8)


"18일 육사생도 800여 명은 졸업생 장교 200여 명과 함께 동대문-남대문-반도호텔-시청 앞 광장에 이르는 행진을 벌인 뒤 시청 앞 광장에서 '혁명 축하식'을 열었다."(295) "18일 낮 12시 30분, 55시간 동안 잠적해 있던 장면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고 중앙청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해 내각 총사퇴를 발표했다. 장면 내각 총사퇴와 함께 국회의사당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설치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와 혁명5인위원회(박정희, 윤태일, 송찬호, 채명신, 김동하)를 구성하였던 바,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은 장도영, 부의장은 박정희가 맡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3권을 장악한 기구로 각 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32명으로 구성되었다 육사생도의 지지 시위에 공을 세운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 요원으로, 이상훈은 경호실 요원으로 일하면서 '정치'를 배우게 되었다."(297-8)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는 매그루더와 그린의 성명이 나간 지 8시간 뒤인 16일 하오 5시, 미 합참의장 리먼 렘니처는 매그루더에게 〈앞으로는 더 이상의 논평은 삼가고 꼭 해야 할 경우는 유엔군의 목적이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지키는 것이란 사실만 강조하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5월 19일 아침 장도영과 박정희가 쿠데타 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용공 및 혁신을 빙자하는 친용공분자' 930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하자, 바로 그날 미 국무성은 〈한국의 사태는 고무적〉이라며 쿠데타에 대한 사실상의 지지를 표명했다. 미국 조야의 일각에서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미 상원 외교위원장 풀브라이트는 5월 20일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신정부를 지지하고 승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는 〈군사정권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통해 가장 훌륭한 정부〉라고 찬양하면서 〈한국에는 민주정치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300-1)


"박정희는 미군들과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미군들과 친하게 지내는 장성들을 경멸하기까지 했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박정희는 더더욱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 공약'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겠다는 것과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고 내세운 것도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321) "쿠데타 주체 세력으로선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은데, (미 국무성의) '고무적'이라는 논평 정도론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군사정권은 22일에는 용공분자 2천 14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진보 인사 3천여 명이 투옥되었다. 검거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모두 4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진짜 '빨갱이'도 전혀 없진 않았겠지만, 대량 검거의 동기가 말해주듯이, 그야말로 마구잡이 사냥이었다. 없으면 일부러 만들어내야 했다.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했거나 2대 악법 반대운동을 했으면 무조건 검거 대상이었다."(323-4)


# 미국의 환심을 얻기 위한 '빨갱이 만들기'의 대표적 사례 :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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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7장 '동원 대중'과 '피해 대중' / 1956년


"50년대 이승만 반공체제의 히스테리, 바로 그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실천한 인물이 김창룡이었다. 이승만이 이론이었다면, 김창룡은 실천이었다." "이승만의 이론이 '빨갱이 사냥'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그의 '빨갱이 사냥'은 늘 정치적이었고 정치와 연관되었다. 이승만에게는 그것까지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수하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김창룡이었다. 김창룡을 위한 육군 특무대가 창설되었을 때, 특무대에 부여된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정치공작이었다." "이승만은 출신별, 지역별로 형성된 군내 파벌이 상호 반목하도록 조장하는 동시에 그 모든 걸 감시하고 공작을 추진하기도 하는 기구로 헌병대와 특무대를 이용하였다. 김창룡의 충성 경쟁 라이벌은 헌병대의 원용덕이었던 셈이다. 헌병대는 반민특위 활동에 쫓겨 입대한 이익흥, 전봉덕, 노덕술 등 경찰 간부들까지 가세해 정치 개입 성향이 매우 강했지만, 충성 경쟁에서는 김창룡보다 한 수 아래였다."(17)


"민주당은 3월 28일 전국대회를 열어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민주당은 선거구호로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내걸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염증의 반사 효과였겠지만, 신익희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신익희의 강연회에는 30만 인파가 몰렸다. 서울운동장도 장충당공원도 빌릴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장소였다."(33-5) "야권 후보 단일화의 기운도 무르익고 있었다. 진보당 후보 조봉암은 4월 3일 정부통령 후보 백지화, 나아가서는 자신의 출마까지도 취소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둔 바로 그 날 신익희가 죽을 줄 누가 알았으랴. 신익희는 5월 5일 새벽 5시경, 부통령 후보 장면과 함께 호남선 열차를 타고 전북 이리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졸도했다. 수행원들이 인공호흡을 시도하며 기차 안에서 의사를 찾았지만 의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37-8)


# 5·15 선거 결과 이승만이 52% 득표로 대통령 당선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노래의 인기가 시사하듯이, 신익희의 사망은 많은 사람들을 허탈과 좌절에 빠지게 만들었다. 박경수는 〈그런 민심의 허탈은 한편으로 '이승만은 하늘에서 낸 사람'이라는 엉뚱한 '신수설(神受說)'까지 떠돌게 하면서 그 추종자들로 하여금 전혀 반성이나 개전의 빌미조차 가져보지 못하게 했다〉고 말한다. 그랬다.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였다. 이승만은 5월 26일 기자회견에서 이기붕의 부통령 낙선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나는 과거에 민중의 인텔리젠쓰, 즉 명철을 믿어왔던 것이나 지금은 그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가진 그 날 선거 주무장관인 내무부장관에 이익흥을, 치안국장에 김종원을 임명했다. 이익흥은 일제 때 경찰서장 출신으로 이승만의 방귀에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겼고, 김종원은 여순·거창 사건에서 이미 악명을 떨친 바 있는 인물이었다."(41)


"(야당 후보의 입후보 등록 방해 공작을 펼쳐) 야당의 손발을 꽁꽁 묶어 그라운드에 들어오지도 못하게끔 해놓고 치른 8월 8일의 기초의회 선거 결과가 자유당의 압승으로 끝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권이 전국에서 90% 이상을 휩쓸었다. 선거 후 순경 박재표가 (투표함 2개를 수송 도중 바꿔치기한) 환표 사건을 폭로함으로써 자유당이 다단계 선거 대책을 세웠다는 게 알려졌다." "그러나 8월 13일에 치러진 서울특별시·도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22%의 당선자를 배출했으며, 서울에서는 자유당이 참패했다. 서울시의원 47명 중 민주당이 40명을 차지했다. 서울에서는 자유당원이 자유당으로 입후보하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나와 무소속 후보자들은 '순수 무소속'을 표방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서울에서 자유당 공천을 받아놓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른바 '가면(假面) 입후보자'가 42명이었는데, 이 중 5명만 당선되었다. 전형적인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었다."(64-5)


8장 '장길산'과 '홍길동'을 기다린 세상 / 1957년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미국의 원조에 기대 굴러가던 한국의 '원조 경제'는 심각한 제약 조건을 안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원조물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그것을 판매한 뒤 그 대금을 대충자금(代充資金, Counterpart Fund)이라 하여 적립해야 했다. 이 자금은 한미합동경제위원회의 철저한 통제를 거친 뒤에 쓸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미국은 한국 정부와 경제를 통제하였다. 정부재정 가운데 절반이 넘는 대충자금은 미국에서 무기를 사들이는 등 주로 군사용으로 사용해야만 했다." "건설업계에는 정부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자유당 5인조'라는 게 있었다. 대동공업, 조흥토건, 극동건설, 현대건설, 삼부토건 등이었다. 삼부토건은 국내 건설업 면허 1호로 도로·항만 등 각종 토목 공사에 주력하였고, 현대건설은 57년 9월 한강 인도교 복구 공사를 수주하면서 '자유당 5인조'에 진입하였다."(143-4)


"『현대문학』 59년 10월호에 발표된 이범선의 〈오발탄〉은 뿌리뽑힌 월남민 가족이 겪는 처참한 가난의 고통을 다룸으로써 남한 사회가 자랑으로 내세우는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 "한수영은 〈어머니, 그래도 남한은 이렇게 자유스럽지 않아요?〉라는 말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대화는 〈오발탄〉 가운데서도 가장 냉소적인 부분이다. 주인공 송철호의 이 설득은 그 자신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무력한 것이다. 실성한 어머니와 임신중독에 걸린 아내, 영양실조로 말라가는 어린 딸, 상이용사로 제대해 은행강도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아우, 양공주인 누이들에게도 이 설득은 효력 상실이다. 요컨대, 이 독백에 가까운 설득은, 삶과 송두리째 맞바꾼 자유의 가치가 남한 사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월남민 주인공의 역설이며, 체제 유지의 내적 동의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50년대적 아이러니에 해당한다.〉"(148-9)


9장 '생각하는 백성'과 '인의 장막' / 1958년


"이승만의 '세계 4대 강국론'은 그가 평소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온 '반공적 선민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평소 주장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 반공진영의 중심지이자 '자유진영의 보루'였다. 그런데 이는 오직 공산주의에 대한 호전성을 강경하게 드러낼 때에만 유지할 수 있는 타이틀이었다. 그래서 국민에게는 늘 '성스러운 사명'이 강조되었다. 한국인은 세계를 구출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한국인은 자유세계를 구해야만 할 세계 정의의 사도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목숨은 한국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목숨을 내걸고 싸우려는 한국인에게 세계가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은 물질적 도움을 받는 대신에 세계에 정신적인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은 당당하게 생각해야 한다." "중요한 건 세계적인 반공 지도자인 이승만의 뜻과 명령에 복종할 때에만 세계를 구원해야 할 한국인의 사명이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183-4)


"제4대 민의원 총선거를 4개월 남겨둔 58년 1월 11일 조봉암,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등 진보당의 주요 간부 10여 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다. 다음 날 (소위 '근로인민당 재건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된) 박정호 사건을 담당하고 있던 부장검사 조인구는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박정호 등 10여 명에 대한 공소 내용을 설명했다. 조인구는 〈평화통일이란 구호는 남한의 적화통일을 위한 방편으로서 대한민국의 존립을 부인하는 것이다. '북진없는 정강정책을 갖는 정당을 조직하라'는 김일성의 지령 내용은 바로 진보당의 확대 공작에 귀착된다〉고 말했다. 조인구는 〈진보당이 박정호 사건에 관련되어 수사 대상에 오르는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문제는 진보당이 내건 평화통일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규명한 후 그것이 북괴의 지령과 동일할 때는 수사 대상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정부는 재판도 열리기 전인 2월 25일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시켰다."(190)


"자유당과 폭력조직의 유착은 진보당 사건에까지 영향을 미치려 들었다. 조봉암은 1958년 7월 2일 1심 재판에서 평화통일 주장이나 간첩혐의는 모두 무죄 판결을 받은 가운데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판결 뒤 이기붕 수하의 반공청년단 수백 명이 동원돼 법원청사에서 난동을 부렸다. 이들은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벌하라!〉고 외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승만은 1심 판결이 내려지자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라고 분노했다." "10월에 열린 2심 재판에서 검사 조인구는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조인구는 훗날(1994년)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한 것은 검찰총장·서울시경국장 등 나의 윗선에서 사형을 협의하여 지시한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승만의 뜻과 그 뜻에 충실한 공포의 관제 시위에 '겁먹은' 고등법원은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94-6)


"1958년 11월 18일, 자유당은 간첩 색출을 명분으로 하는 전문 3장 40조 부칙 2조로 구성된 신국가보안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검찰 실무자인 오제도, 문인구, 조인구 등에 의해 마련된 것이었다. 이 법안은 강력한 언론제한 규정과 더불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간첩행위를 극형에 처하게 하되 간첩활동의 방조행위에 대해 범죄구성의 요건을 명백히 하며, 간첩죄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을 금지하고, 상고심 제도를 폐지한다는 3대 원칙의 정략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이 법안에는 국가보안법 적용 대상을 확대하여 종래 북괴의 지령에 의해 운영되는 단체라고 규정된 적용 대상 외에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집단 또는 단체의 조직을 추가했다. 또한 이적행위의 개념을 확대시켜 종래 군사상의 비밀탐지에만 적용하던 간첩에 대한 개념을 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국가의 이익과 관련된 모든 정보의 수집을 국가보안법 처벌 대상으로 규정했다.〉"(207-8)


# 12월 19일, 야당 의원 감금 후 날치기 통과


10장 파국을 향한 질주 / 1959년


"50년 3월 '귀속재산처리법'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정부 소유의 귀속재산 불하작업이 시작되었지만, 이 작업이 본격화된 것은 전쟁이 끝난 54년 이후부터였으며 58년까지 거의 처분되었다. 귀속재산은 자본가에게 자본축적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권력과의 줄만 있으면 거저먹는 거나 다름없었다. 귀속재산은 10분의 1에 불과한 가격에 특혜 불하되었으며, 15년 이상 할부불의 지급조건으로 책정된 구입대금마저도 저리의 은행융자로 조달되었기 때문이다. 장하진에 따르면, 〈고정된 구입대금에 비해 15년 동안 물가 등귀에 따라 공장 가치는 약 260배나 상승하여 사실상 무상으로 공장을 취득한 결과가 되었다. 곧 이 시기에는 자산이 없이도 불하만으로 하나의 재벌이 창조되는 신화를 낳았다. 50년대의 89개 주요 대기업체 가운데 불하된 귀속기업체는 36개로 전체의 40.4%를 차지하였으며, 22개 거대 기업체 중에서는 그 비중이 더욱 높아 15개 업체(68%)나 되었다."(271-2)


"1957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은행 민영화는 은행을 중심으로 하는 재벌 구조를 형성케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인학은 〈기업과 정부의 유착관계의 대표적인 사건은 4개 시중은행의 민영화와 관련되어 1954년부터 시작되어 1956년에 종결된 시중은행주 불하공매인 바, 불하공매 과정은 정치적 영향력의 대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정치적 파워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말한다. 〈삼성그룹을 비롯한 당시 대표적 재벌들은 시중은행 불하공매에 참여하여 시중은행의 소유권을 취득하면서 재벌의 기본적인 형상을 이루게 되었다. 삼성그룹은 흥업은행(한일은행) 지분의 83%, 조흥은행 지분의 55%를 취득하면서 4개 시중은행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여 한국 최초로 완전한 재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삼성그룹 이외에 삼호그룹이 저축은행(제일은행), 대한제분이 상업은행, 개풍그룹이 서울은행을 소유하게 되어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지배하는 형상을 갖추게 되었다.〉"(275)


"대중의 침묵에 대해 이승만 정권의 억압과 공포 분위기 조성에만 그 책임을 돌릴 순 없을 것이다. 우선 민주당이 문제였다. 민주당은 미 대사관 못지않게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잘되었다는 반응이었다. 58년 2월 이승만 정권이 사실과 거리가 먼 이유로 재판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진보당 등록 취소를 공포했을 때에도 역시 민주당은 정략적인 주판알을 튕기면서 긍정적인 표정이었다. 언론, 특히 야당지들은 어떠했던가? 이들 역시 민주당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집단이었다. 이승만의 '반공 히스테리'를 이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은 조봉암 사형에 아무런 사회적 저항이 없는 것에 대해 득의양양해 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3·15 부정선거'를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자유당 정권은 59년 11월부터는 각 시도 경찰국장, 사찰과장, 경찰서장, 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 등에게 사전 사표를 받아 놓고 사전 선거운동을 강요하였다."(262)


"내무부장관 최인규가 이미 59년 11월에 세운 부정투표 계획에는 '4할 사전투표'와 '공개투표' 전략이 들어 있었다. '4할 사전투표'란 자연 기권자, 무효표, 번호표를 교부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생길 조작 기권자, 유령 기권자, 매수 기권자, 전출자, 노쇠자 등을 전 유권자의 4할로 책정하고, 이 4할의 투표자를 자유당 후보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 전에 미리 무더기로 집어넣는다는 계획이었다. 또 '공개투표'란 유권자를 3인조·9인조로 편성해서 자유당 당원, 경찰관, 공무원 또는 그 가족, 매수자가 조장이 되어 공개투표로 여당 후보를 찍게끔 하는 계획이었다. 여당계 유권자들에게 자유당 완장을 착용시켜 투표장 주위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유권자들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주며,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하거나 불가능할 때는 시비를 걸어서 함께 퇴장하도록 소동을 일으키라는 구체적인 행동요령까지 들어 있었다."(301-2)


"3·15 선거는 '불법·무효'라기보다는 그냥 '장난'이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그런 선거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얻은 표가 총 유권자수를 초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군대의 개표 결과는 유권자 수의 120%가 이승만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또 한번의 장난질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의 득표율은 80%, 이기붕의 득표율은 70에서 75% 정도로 하향 조정하라는 경찰 지령이 전국 개표소로 하달되었다." "마산 경찰당국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 시위를 〈공산당 지하조직의 폭동〉으로 조작했다. 경찰은 주모자로 구속한 26명을 공산당으로 몰아 혹독한 고문을 가했고, 정남규를 남조선 노동당원으로 둔갑시키고 각종 증거물을 조작해 제시했다. 마산경찰서 형사주임 노장광은 시위대 시체가 안치된 도립병원 시체실에 들어가 자신이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전단을 숨진 학생들의 호주머니에 집어넣기까지 했다."(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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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4장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으로) 정전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한 상태였다.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 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미국은 이미 53년 2월 22일에 〈우선 부상 포로부터 교환하자〉는 제의를 한 바 있었는데, 이를 소련측이 수용키로 한 것이다.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가하고 돌아온 중국의 주은래는 3월 30일 미국의 제안을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일반 포로 교환 문제는) 주은래가 송환을 바라는 포로는 즉각 송환하고,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는 일단 중립국인 인도 쪽에 넘쳐 처리하도록 하자는 타협안을 내놓았는데, 이를 미국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6월 8일에는 '포로교환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20-1)


"이승만이 헌병 총사령관 원용덕에게 은밀히 지시한 명령은 반공 포로를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원용덕은 헌병들을 각 수용소로 나누어 파견했다. 이들은 미군 보초를 영창에 가두어 버리고 반공 포로 석방에 들어갔는데, 바로 6월 18일 새벽 5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포로교환 심사 과정에서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해버린 것이다." "(세계를 경악으로 몰아넣은)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은 북한과 중국의 휴전회담 거부를 유도하여 휴전협정 체결을 지연 또는 파탄시키려는 계산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포로 석방이 휴전을 막을 순 없었다. 공산군측은 정말 휴전을 절실히 원했던 것이다." "바로 그 시간 38선 근처에서 치열한 '땅따먹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전협정 체결이 다소 지연될 수는 있을 망정 움직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땅을 조금이라도 더 빼앗겠다는 싸움이었다."(34-7)


#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합의, 54년 11월 17일 정식 발효


"경제 제일주의와 더불어 일본 사회의 우경화도 한국전쟁의 영향이었다. 반공 전쟁을 틈타 전범들이 대거 사회에 복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향력 강화는 결국 55년 자유민주당 결성으로 나타났으며, 이 보수 우익 정당은 향후 끝이 없는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 "미국이 패전국 일본에게 매우 관대한 평화조약 및 안보조약의 체결을 서두른 것도 한국전쟁의 산물이었다. 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대일 강화조약 및 태평양 안보조약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52년 4월 28일 공식적인 주권 독립국으로 새롭게 출발하였으며, 56년 12월 18일에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한국을 전승국에서 제외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재일교포 문제 등에 대한 보상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성과와 더불어 영토 문제에서도 큰 이익을 안겨 주었다. 일본은 이 틈을 이용해, 독도까지 넘보았다."(54-5)


"반공은 곧 친미(親美)를 의미하고 친미(親美)는 곧 친기독교(親基督敎)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한국전쟁에선 더욱 그랬다." "기복(祈福) 신앙은 전후의 잿더미와 비교돼 엄청난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국을 닮고 자본주의 정신에 투철해지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동경과 숭배, 물질에 대한 한(恨)의 종교적 표현이 바로 기복 신앙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기복 신앙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한 한국의 기복신앙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했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산물이었다." "현실이 각박한 만큼 복을 구하는 신앙의 발현도 전투적이었다. 김흥수는 1951년 부산에서만 100여 개의 교회가 신축되었으며 그밖에도 교인들은 천막이나 창고 건물, 심지어는 언덕 풀밭 위에서 모이고 있었다고 말한다."(120-1)


"전쟁이 제공한 계급상승 혹은 사회이동의 기회 개방은 도덕 없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낳았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남한 사회의 자본주의 발전을 가져오는 이른바 '전쟁의 역설'로 나타났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혼자 하는 것보다는 잇속으로 결속된 파벌을 만들 때에 더욱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전쟁이 파벌 조직을 크게 키우는 동시에 악화시켰다며 이렇게 말한다. 〈파벌 사회에서는 주로 충성스런 부하를 돌보아주는 능력에 가치를 둔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자파 사람들을 더 많이 돌볼 수 있다. ····· 파벌주의는 전쟁과 부패로 더욱 만연했다. 전쟁은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의 오류를 확대시켰으며 이를 호도하기 위한 파벌 보스의 보호막이 끊임없이 필요해 부패가 더욱 확산됐다. 죄상이 중하면 중할수록 일단 보호를 받게 되면 충성의 요구가 더 커졌다. 죄를 저지른 자는 파벌의 주요 모집 대상이다.〉"(129-30)


5장 자유당 독재체제의 구축 / 1954년


"이승만은 1954년 5월 20일로 예정된 제3대 총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는 52년 발췌개헌 때 2차에 한해서 중임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삭제하고 싶었지만 당시 여건이나 분위기가 그것까진 못한 터라 그 일을 해내야만 할 3대 국회에 큰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다. 5·20 총선에선 최초로 정당이 각 선거구마다 1인의 후보를 공천하는 공천제를 실시하였는데, 이승만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였다. 4월 6일 이승만은 〈개헌 조건부로 입후보케 하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래서 자유당에선 개헌 지지는 공천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경찰은 마을 반장회의 등을 열어 야당은 반정부당으로 공산당보다 더 나쁘며, 공산당보다 더 나쁜 야당 후보에게 투표하면 너희 마을은 공산당 소굴로 본다, 너희 마을 표가 120인데 야당 표가 한 표 나오면 너희 부락에 공산당이 하나 있고, 열이 나오면 열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식의 협박을 일삼았다."(188-9)


# 11월 27일 국회 본회의 표결 '사사오입' 통과


"5·20 총선의 최연소 당선자는 경남 거제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한 26세 청년 김영삼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대통령 꿈을 키워온 김영삼 학생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건 웅변 연습이었다." "김영삼이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받은 2등상은 외무부장관상이었는데, 당시 장관은 장택상이었다. 그 인연으로 김영삼은 서울대 3학년 재학 중이던 50년 4월 초순에 장택상의 요청을 받아 장택상의 지역구인 경북 칠곡에서 웅변으로 장택상 선거운동을 도와 주었다. 또 이게 인연이 돼 김영삼은 얼마 후 장택상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52년 5월 24일 이승만이 총리를 장면에서 장택상으로 바꿨을 때 장택상은 자신이 이끌고 있던 신라회 회원 21명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려놓은 바 있었다. 신라회는 영남 및 대한청년단 출신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 신라회의 운영을 도맡다시피 한 사람이 바로 장택상의 비서인 김영삼이었다."(192-3)


# 김대중은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


"(원조 요청차 미국 방문길에 오른) 이승만은 7월 28일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사실상 제3차 세계대전을 촉구하는 초강경 연설을 하였다." "(중국과의 즉시 결전을 요구하는 주장에서) 이승만이 역점을 두고자 했던 것은 〈미국의 보병은 단 1명도 필요치 아니하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한국을 이용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이승만이 역설해온 것이었다. 이승만은 54년 5월 8일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한국이 인도차이나에 2개 사단을 파견할 뜻이 있다는 제안을 했었다는 걸 상기시키면서 그 제안은 제스처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방미는 '불행한 방문'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의 귀국 직후 미국은 이승만의 호전성에 불안감을 느껴 주한미군을 2개 사단만 남겨놓고 나머지 4개 사단을 수개월 내에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는 8월 18일 야간에 국회를 소집하여 유엔군 일부 철수에 대한 반대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197-9)


6장 '우상 정치'와 '동원 정치' / 1955년


"수난의 역사를 겪은 한국 민중은 강력한 지도자를 열망해 왔다. 이승만은 그런 요청에 부응했고 그런 토양을 최대한 이용했지만, 그건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승만에 대한 충성이 사적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곡필(曲筆) 연구 전문가인 김삼웅은 자유당 시절 3월 26일은 '어용곡필배들의 잔칫날'이었다고 말한다. 그 날이 이승만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49년부터 시작된 '이승만 우상화'는 50년대 내내 조선조의 왕도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을 치달았다. 이승만의 귀환일과 생일은 국경일처럼 경축되었다. 학교마다 이승만의 초상화가 내걸리고, 이승만의 생일에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아야 했다. 지폐엔 이승만의 초상화가 인쇄되고 이승만 동상까지 세워졌다. 55년 3월 26일 이승만의 80회 생일 기념식은 '80'이라는 십진법의 원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승만 우상화의 정점을 보여 주었다."(240)


# 〈이렇게 위대한 리 대통령을 영도자로 모신 우리 민족의 영광이야말로 그 어느 민족에 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오직 대통령의 영도에 따름으로써 행운의 열쇠를 간직할 수 있다. 그리하여 리 대통령이 오래 생존해 계시면 그만큼 민족의 활로는 열리게 된다. 우리 민족만의 행복이 아니라 실로 전 자유세계의 광명이다〉 - 『서울신문』 칼럼 〈인심천심〉


"이승만은 수많은 관변단체들의 총재이기도 했다. 이 단체들은 모두 이승만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걸 공식적으로 선서하였다. 이승만을 위한 것이라면 테러도 정당화되었다. 애국심은 초법적인 것이었다." "정당도 이승만 임금을 모시는 '내시 정당'이었다. 이기붕은 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때 자유당의 위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자유당으로서는 '제도보다 인물'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 우리는 이승만 박사의 정치이념과 그분의 통일 방략을 절대 지지하는 인사들에 의하여 조직된 이 박사님을 지지하는 정치단체가 자유당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당보다는 관료조직을 더 좋아했다. 그는 정권 경쟁을 해야 하는 정당체계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경찰과 행정조직을, 그것도 측근을 통해 맹목적 충성을 유도하는 형태로 모든 걸 해결하고자 했다." "이승만의 인사 정책에서는 '충성' 하나면 족했다."(245-6)


"(인도에서 반둥회의가 개최된) 1955년경 제3세계의 화두는 '평화공존'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걸 '친공(親共)'으로 간주하고 배격하였다. 이승만은 이미 54년에 〈미국이 공존주의를 주장하게 될 지라도 우리로서는 자유독립의 권리를 위하여 싸워 죽기로 결심한 것이니 모든 친일친공 분자들은 극히 조심해서 외국인과 연락하여 시국을 혼란케 만든다는 것을 생각도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공존주의' 사상을 〈반정부 분자들의 파괴모략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니 이런 분자들을 먼저 제지하여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신경질적인 반응과는 달리, 반둥회의에서 제기된 '반식민주의'와 '비동맹주의'는 당시 국내의 지식인과 문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나세르는 52년 육군 중령으로 쿠데타를 주도해 정권을 잡았는데, 훗날 한국에서 5·16쿠데타에 대한 초기의 호의적 반응은 나세르의 활약이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것이 힘입은 바 컸다."(251-3)


"1955년은, 반일운동과 반공운동이 결합해 이승만식 '동원 정치'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해였다." "45년 9월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 열도 주변에 선을 그어 일본 어선의 조업을 제한하였다. 이는 맥아더 라인으로 불렸다. 미국은 49년까지 맥아더 라인을 세 번에 걸쳐 확장해주었지만 일본 어선은 50년부터 맥아더 라인을 침입해 한국 근해에서 마구잡이 조업을 해왔다." "이승만은 (52년 4월로 예정된) 맥아더 라인 철폐에 대비하여 한국의 어업 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구상하게 되었다. 51년 9월 7일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52년 1월 18일에 공포된 이 선언은 연안으로부터 평균 60마일을 한국의 해양 주권 영역으로 간주하였다. 이 선이 바로 '평화선'이다." "52년 9월 이승만이 해군에게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은 나포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은 뜨겁게 달아올랐다."(261-4)


"1955년 여름은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와 더불어 범 야권 통합신당 창당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9월 19일에는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이승만은 55년 10월 8일 유엔이 북괴군을 무장해제하고 북한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더니, 11월에는 일본이 이북 공산당과 합해서 남으로 내려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더욱 놀라운 주장마저 하였다. 근거는 없었다. 이승만에게 중요한 건 이렇게 위기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국민을 시위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손호철은 이승만 정권의 반일주의에는 체제정당화와 대중동원을 위한 목적 이외에도 정치적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키려는 당략적 목적도 내포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가장 강력한 정치적 반대 세력이었던 민주당, 특히 민주당 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친일 지주들이 실세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점과 관련, 이 정권의 반일주의는 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269-70)


"원내 15석의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를 통한 범야권 통합의 첫 번째 움직임은 54년에서 55년에 이르는 시기에 민국당 중심의 '호헌동지회'가 결성되고, 55년 초에 신당촉진위원회가 구성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당 창당에 있어서 가장 큰 쟁점은 조봉암 세력의 참여 문제였다." "민국당의 대주주였던 김성수는 병석에 누운 몸으로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종용하였다. 보수파들이 김성수의 권유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노선을 지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하자,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명확히 태도를 밝힐 것을 권고했다." "이에 조봉암은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신당운동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보수파들은 계속 색깔 공세를 취했다. 신도성을 비롯하여 김성수의 유언을 들은 사람들이 보수파 간부들의 모임에서 김성수의 뜻에 따르자고 역설하였지만 조병옥과 장면 등이 강력히 반대하였다."(297-9)


# 신당 참여가 배제된 조봉암 세력은 진보당 창당으로 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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