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7장 '한일협정'과 '월남파병' / 1965년


"박정희 정권은 정치자금 모금을 위한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도 당당했고, 그 과정을 아예 반(半) 공식화했다. 65년부터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은 김성곤은 재벌들에게 돈을 거둬 박정희에게 갖다 바치는 역할을 했다. 김성곤이 거둬들인 자금 명세서는 박정희가 직접 결재를 했다. 돈을 거두는 건 정부가 발주하는 사업에서 무조건 10%를 정치자금으로 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부 발주 공사가 워낙 남는 장사이기 때문에 재벌들은 10%를 떼이면서도 서로 하겠다고 경쟁을 벌였고 박정희의 대리인인 김성곤에게 10%의 돈을 바치면서도 〈앞으로 이런 기회를 자주 달라〉는 식으로 고마워했다. 그래서 기업들로부터 돈을 뜯었다고 말썽이 날 일도 없었다. 그런 관행은 장려되었고, 전 관료 체제에 확산되었다." "북한의 존재는 늘 〈누구를 위한 경제개발인가?〉라는 질문으로 표상되는 남한의 빈부격차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었다."(17-8)


"로스토우는 58년에 낸 『경제성장의 제 단계: 반공산주의선언』에서 모든 사회를 전통적 사회, 과도적 사회, 도약 과정에 있는 사회, 공업화 과정을 통한 성숙사회, 고도의 대량소비 단계에 달한 사회 등 5단계로 구분하고, 과도적 사회와 도약단계의 사회에서 근대화를 위한 정치적 지도력의 원천으로 군부를 지목했다. 로스토우의 경제발전 단게설이 후진국 지도자들에게 던져주는 매력은 저개발 국가도 선진 국가처럼 발전할 수 있으며, 그것도 서구 선진 국가들이 수백 년을 통해 달성한 경제 번영을 저개발 국가들은 단기간에 달성할 수 있다는 '도약이론'이었다."(20) "이후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의 정책고문을 맡은 로스토우는 박정희의 성장주의 정책을 칭찬하면서 한국 경제의 도약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한 일본 자본의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다. 한일회담을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22)


# 로스토우의 경제단계설(박태균 요약)

1. 저개발 국가의 경제개발 계획만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적 팽창을 막을 수 있다.

2. 저개발 국가는 경제성장을 통해 미국과 선진 제국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될 것이다.

3. 저개발 국가의 경제개발 계획은 절대로 자기완결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

4. 자립 계획은 거부되어야 하며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 철저히 편입될 수 있는 경제체제를 지향해야 한다.

5. 이를 위해 외자 적극 도입, 수출주도형 발전, 불균형 성장론 등이 경제개발 계획에 도입되어야 한다.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발족된 64년 3월 6일부터 15개월여에 걸쳐 치열한 반대 시위가 벌어졌지만, 65년 6월 22일 오후 5시 동경의 일본 수상 관저에서 양국 외무장관 이동원과 시이나가 서명함으로써 한일협정은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이 협정은 한일합방 등 구조약에 대해서는 〈are already null and void〉라는 표현으로 합의했다. 유병용은 〈구조약의 무효시점을 '이미'라고 애매하게 기술한 것은 식민지 지배의 합법성을 강변하는 일본의 입장을 수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며 〈한국이 '이미'의 시점을 1910년으로 해석해 식민지 지배가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하는 것과 달리, 일본은 식민지 지배는 합법적이었으나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서도 〈양국 간의 긴 역사 중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매우 유감인 일〉이라는 외상 명의의 성명서 한 장으로 끝내고 말았다."(27-8)


"이 협정에 의해 평화선이 철폐되었으며,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영주권 문제 등도 일본 정부의 임의적 처분에 맡겨지게 되었다.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은 일제가 35년간 불법으로 강탈해간 모든 한국 문화재를 일본의 소유물로 인정해 버렸다. 정신대·사할린 교포·원폭 피해 등의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못했다." "일본은 62년 9월 〈독도는 크기가 히비야 공원 정도밖에 안 된다. 폭파라도 해 버리자〉고 주장했고, 외상 오히라는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단을 구하자〉고 주장한 바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제3국에 조정을 맡기자〉는 역제안을 해 논란거리를 남겼다. 조인 직전인 65년 4월에도 일본은 한국 정부에 〈다케시마의 불법 점거에 관하여 엄중 항의한다〉는 문서를 보내 국교 정상화가 한국의 독도 지배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28-9)


#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동의안 통과


"8월 13일 월남 파병 동의안은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찬성 101, 반대 1, 기권 2표로 통과되었다. 파월한 2만여 명의 전투부대에는 해병 청룡부대를 모체로 하여 창설된 해병 제2여단과 육군 수도사단이 맹호부대라는 이름으로 선정되었다. 10월 12일 여의도에서 30만 군중 환송 대회가 열렸다. 아직 마포대교가 부설되기 전이었는데, 정부는 이 행사를 위해 급히 마포와 여의도를 잇는 가교를 설치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파병의 명분은 6·25 때 입은 은혜에 대한 보은론과 더불어 '도미노 이론'이었다. 박정희는 환송 연설에서 〈우리가 자유 월남에서 공산 침략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는 멀지 않은 장래에 동남아세아 전체를 상실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우리 대한민국의 안전 보장도 기약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여기에 '대한 남아론'이 가세했다. 박정희는 파월 장병들을 '화랑의 후예'라고 부르면서 '대한 남아의 기개'를 만방에 떨치라고 말했다."(53-4)


8장 '정경유착'과 '한미유착' / 1966년


"1966년 5월 24일, 부산세관은 삼성이 경남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2천 259포대(약 55톤)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던 걸 적발하였다. 당시 사카린은 값이 비싼 설탕 대신에 식료품의 단맛을 내는 데 쓰이던 주요 원료였다. 부산세관은 1천 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매겼다."(79) "『중앙일보』는 9월 19일자 사설 〈재벌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재벌과 밀수를 등식적으로 규정한다든지 심지어는 재벌과 밀수, 그리고 정부가 일련의 관계를 갖는 함수관계에 있는 것처럼 여론이 비등되고 있는 데는 논리의 비약과 사회체제의 부정이란 측면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방향으로 일반적인 사고가 굳어질 때 파생될 문제를 그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동양텔레비전과 동양라디오까지 나서는 등 삼성 비호에 전 '중앙 매스컴'이 총동원되었다."(82-3)


"(미국의 추가파병 요구에 부응한) 제4차 파병안은 3월 20일 국회를 통과하였다. 제1야당인 민중당 대표 박순천은 66년 9월 베트남을 시찰한 후 다음과 같이 썼다. 〈탄손누트 비행장에 내려 베트남 땅의 높은 국기게양대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을 본 순간 나는 감격의 울음을 터뜨리고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가 공항에 접근하면서 비옥한 베트남의 땅이 눈 아래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역사상 침략만 받았던 우리 민족이 수천만 리 남의 나라 땅에 군대를 파견한 위업에 가슴의 고동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 비옥한 땅이 우리의 것이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나 하고 생각하였다.〉 여아가 죽이 잘 맞았다. 66년 10월 베트남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정희는 〈우리는 이제 새 시대 새 역사의 무대에서 영광스러운 주역〉으로 〈과거의 인종과 굴욕에서 탈피, 어엿한 주권 성년국가로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97-8)


9장 '정치 공작'과 '국가 테러' / 1967년


"67년 4월 29일 박정희는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하였다. 이건 호남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총체적 국부의 증대에는 어떤 기여를 할 망정 지역균형발전은 영영 불가능한 '구조'를 만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공업은 영남, 농업은 호남〉이라는 구도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은 농업 생산의 기본이 되는 수리 시설마저도 영남에 더 투자했다. 68년 현재 시설사업이 완성된 수리조합이 영남에는 72개소, 호남은 23개소였다." "문제의 핵심은 박정희의 인사 정책이 연고와 정실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는 쿠데타 하듯이 통치했다. 쿠데타란 믿을 수 있고 배짱이 맞는 사람 위주로 꾸미는 게 아닌가. 박정희의 인사가 연고 위주로 흐르다보니, 모든 행정이 연고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이후 수십 년 간 지속될 지역 갈등의 씨앗을 심게 된 것이다."(145-7)


# 호남선 복선화는 2003년 12월 8일에야 완료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는 1971년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늘 그 점이 아쉬웠다.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 전부터 늘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여권의 박정희 추종자들 사이에서 3선 개헌은 이미 66년부터 거론되고 있었다. 그간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 짓고 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박정희가 계속 집권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1967년 6월 8일에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는 박정희에게는 3선 개헌의 성패를 결정짓는 '전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이 자행되었다. 자유당 시절에 동원되었던 온갖 수법들이 되살아났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온갖 부정에 더하여 이른바 '야당 토벌작전'까지 도입되었다. 신민당 전국구 후보 10번 김재화는 재일동포 실업인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총선 일주일을 앞두고 김재화를 국가보안법, 반공법,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150-1)


선거 결과 공화당은 헌법 개정에 필요한 117석을 훨씬 웃도는 130석을 얻었지만, "선거 과정뿐만 아니라 투개표 과정에서도 전국적으로 엄청난 부정이 자행되었다. 야당은 6·8 총선을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요구하며 국회 등원을 거부했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등)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공화당은 부정선거를 비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야당과 타협할 자세를 취하였다. 이게 또 야당 내에 분란을 일으켰다. 야당이 타협파와 비타협파로 양분된 것이다."(153) 타협파인 신민당 대변인 김대중이 정부 측에 3선 개헌을 안한다는 보증을 받을 것과 지방자치를 실시하는 것을 조건으로 타협을 모색하자고 설득하자 유진오는 그 제안을 승낙했다. "김대중은 신문과 방송에 그걸 흘려 크게 보도되도록 했다. 그러자 비타협파인 강경파가 불만을 터뜨렸다. 강경파에 다시 설득된 유진오는 〈대변인의 말은 당의 의견과 다르다〉고 부정했다."(155)


"(국회의원직에 연연하던) 야당은 부정선거가 앞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법률을 제정한다는 수준의 타협안에 동의해 선거 169일 만인 11월 29일 등원했다. 김대중의 개탄이다. 〈얻은 성과는 전혀 없었다. 3선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이나 지자제를 실시한다는 약속도 얻을 수 없었다. 여당이 앞서 제시한 타협안에서 후퇴한 탓에 아무 소득도 없이 모처럼의 기회를 허망하게 놓쳐 버린 것이다. 나는 이 나라의 정치를 망쳐 독재정치를 초래한 것에 야당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일협정 문제에 이어 이번에도 거의 실현 불가능한 '선거 재실시'를 요구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이는 '한일회담 절대반대' 주장과 궤를 같이 한 것이다. 이러한 야당의 불행한 체질이 이번에도 일을 그르치게 했다. 강경론과 극한투쟁이란 공허한 명분주의로 야당이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고, 독재정권을 돕는 결과를 몇 번이나 초래했는지 모른다.〉"(155-6)


"1966년 10월 31일 시청 앞에서 벌어진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 환영행사는 엉뚱하게도 서울 도심부 재개발 사업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이유는 한미 양국의 TV 생중계 때문이었다. 당시 시청 맞은편엔 중국인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은 슬럼지대였다. 그 주변도 1930년대 이전에 지은 일본 적산가옥의 연속이었고, 그 사이사이에 무허가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TV 카메라가 30만 군중의 모습을 보여줄 때에 그 배경까지 잡히고 말았다." "〈건설은 나의 종교〉라는 신념을 갖고 있던 서울시장 김현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세운상가, 낙원상가, 파고다아케이드 등 도심부 재개발 사업에 매달렸다. 김현옥이 무허가 판자촌을 헐어내고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인 세운(世運) 상가는 주상복합아파트로서 당시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훗날 크게 쇠락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지만, 그때엔 사회 저명인사들이 주요 입주자가 되었다."(166-7)


"흐루시초프의 실각 이후 나타난 북한과 중국과의 갈등은 북한의 유일체제 수립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북한은 새로운 소련 지도부의 정책을 흐루시초프 시대의 정책과는 달리 본 반면 중국 공산당은 이를 〈흐루시초프 없는 흐루시초프주의〉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65년 베트남전에 대처하기 위해 소련이 사회주의 진영의 공동대응을 모색하자는 제의에 대해 북한은 찬성했으나 중국은 소련의 '수정주의적 자세'를 이유로 거부한 것도 바로 그런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국은 베트남전쟁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기회주의' '중간주의' '절충주의' 등으로 규정하고 북한이 '무원칙한 타협의 길'을 택하고 있으며 〈두 걸상 사이에 앉아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북한은 중국의 태도를 '편협한 교조주의적 행태'라고 반격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문화혁명은 중국 공산당을 더욱 교조화 시켜 북한에 대해서도 중국 노선에 따를 것을 집요하게 강요함으로써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190)


"그러나 북한의 자주노선엔 큰 희생이 뒤따랐다." "소련과 중국의 원조 중단으로 재정구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60년 전체 예산의 1%에 불과하던 국방비가 67년에는 30.4%로 뛰어올랐다." "이팝(쌀밥), 고깃국, 비단옷,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꿈이 날아갔다. 게다가 북한이 자주노선에 집착하는 가운데 벌어진 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북한의 위기의식을 크게 자극했다." "북한 내 강경파는 '모험주의'도 불사했다. 67년 1월 19일 해군 경비정 제56함 당포호가 동해에서 북한의 포사격을 받아 침몰함으로써 승무원 79명 중 28명이 실종됐고, 51명이 구조됐으나 구조 후 1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더니 급기야 북한은 68년 청와대 습격, 미 군함 푸에블로호 나포, 삼척·울진 게릴라 침투, 69년 4월 15일 미국의 EC 121형 정찰기 격추 등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대형 사건들을 잇달아 터뜨리게 된다."(195-6)


10장 남북한의 적대적 공존 / 1968년


"1960년대와 70년대를 통틀어 남북관계의 가장 중요한 특성 한 가지를 들라면 그건 바로 적대적 공존관계라는 점일 것이다. 북한의 강경 호전파와 남한의 강경 호전파의 이해관계는 같았다. 어느 한쪽의 호전파가 긴장을 고조시키면 다른 한쪽의 호전파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서로 몰래 만나 짜고 벌인 일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양쪽은 돕고 사는 관계였다. 그렇게 돕고 살다 보니 점점 서로 닮은 꼴이 되어갔다. 이종석은 그런 관계를 '거울영상효과'라고 부른다. 〈박정희 정권은 자주, 자립, 지위, 주체, 국방·경제 병진 건설 등 60년대 북한 정권이 즐겨 사용했던 말들을 60년대 말부터 빈번히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유신체제 형성 뒤에는 더욱 일반화해서 사용하였다. 1968년부터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는 구호가 제창되었으며, 이는 곧 '일면 국방, 일면 건설'이라는 정부 지표로 나타났다.〉"201)


"62년 5월 10일에 공포된 주민등록법은 이후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1·21 무장공비 침투 사태가 모든 걸 바꿔 놓고 말았다. 68년 5월 10일에 통과된 1차 개정안은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를 도입하여, 11월 21일부터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다. 이로써 6·25 때 발급되었던 시민증과 도민증은 자동 폐지되었다. 반공 교육은 물론 반공법 적용도 강화되었다. 68년은 〈미군들이 한국 사람을 린치한 신문기사를 놓고 술자리에서 미군들을 욕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빨갱이로 무수하게 두들겨 맞고, 택시에서 한두 마디 박정희 비난을 했다가 그대로 남산으로 실려가 빨갱이 앞잡이라고 매타작을 당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던 세상〉이었다." "남한 사회가 그렇게 경색되게끔 도운 최대의 협력자는 바로 북한이었다. 북한 역시 그런 분위기를 내세워 북한 사회를 옥죄는 쪽으로 나아갔다. 바로 이게 '적대적 공존관계'와 '거울영상효과'의 결과였던 것이다."(213)


"홍윤기는 박종홍이 주도하여 성안시킨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 권력의 결격 사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보완하여 그 권력 활동을 파시즘적인 것으로 승화시켰다고 말한다. 〈우선 헌장은 당시 비교적 자유방임 상태였던 초·중·고등학교 국민교육의 연장을 확신 있게 규제할 수 있는 권위를 도덕적 형태로 정립시켜 교육자, 피교육자, 학부모를 하나로 묶는 통제체제를 구축할 정신적 구심력을 제공했다. 이로 인해 박정희 정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던 대중동원이 선거자금 살포 차원을 넘어 교육적 차원에서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 또한 헌장 선포자로서 (중후한 권위를 부여받은) 박정희는 더 이상 정치나 경제에서 성공한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교육의 지도자로서 정신적으로 내면화한 이미지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들을 배경으로 놓고 볼 때, 역사적으로 헌장의 제정과 실현은 명백히 유신쿠데타의 정신적 전주곡이었다.〉"(238)


"언론의 치열한 상업성 추구는 박정희 정권이 바라던 바였다. 박 정권은 언론에게 각종 특혜를 베풀어 언론이 오직 상업적 성장에만 몰두하게 유도하였다. 67년 당시 일반 자금의 대출 금리가 25%였을 때 신문들은 18%의 낮은 금리로 대출 특혜를 받았으며, 신문용지에 대한 수입관세에서도 신문들은 일반 수입관세 30% 대신 4.5%의 관세율을 적용 받았으며, 저리의 차관 도입이라는 특혜까지 누렸다. 주태산에 따르면, 〈어떤 신문사는, 사설에서는 차관 망국론을 언급하면서도 뒤로는 일본의 차관 도입으로 호텔을 지으면서 '빨리 인가를 내달라'고 기획원에 압력을 넣어 관리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 신문사는 바로 『조선일보』였다. 박정희와 가까웠던 『조선일보』는 1968년 박 정권이 베푼 특혜에 힘입어 신문사 건물과 코리아나호텔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4천만 불의 상업차관을 아주 좋은 조건으로 들여왔다."248-9)


11장 독선·독단·독주의 정치 / 1969년


"1968년에 벌어진 일련의 북한 도발 사건으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까지 했던 박정희는 새해를 맞으면 69년을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하겠다는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시장 김현옥은 '서울시 요새화계획'을 발표했다. 그 계획 중 하나는 평화시에는 교통시설로 사용하고 전시에는 30~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로 쓰기 위해 남산에 1,2호 터널을 뚫는 것이었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싸우면서 공부하자〉는 것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학생들이 국가 방위에 자진 참여하는 기본자세 확립과 심신의 연마 및 집단행동능력 배양의 목표〉를 내세워 군사교육(교련)을 실시할 것을 발표하였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건 곧 3선 개헌을 하자는 말이기도 했다.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은 또다시 총대를 메고 69년 1월 7일 〈단군 이래의 위인인 박정희 대통령을 계속 집권시키기 위한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55-6)


"박정희 정권은 무력에 의해서만 유지되었던 건 아니었다. 무력 못지않게 중요한 건 금권(金權)이었다. 박정희는 엘리트층 인사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씀으로써 그들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거나 적어도 저항만은 하지 않게끔 하였고, 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돈질을 엘리트층 내부에선 '불우이웃 돕기' 수준의 선행으로 여겨지거나 박정희의 인정과 도량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일이었다. 훗날 박정희 옹호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박정희로부터 개인적으로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하겠다. 박정희는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도 거액의 정치자금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박정희는 숙청된 쿠데타 동지들에게도 생활비를 대주었으며, 야당 인사들에게도 격려금을 주었다. 푼돈이 아니었다. 박정희를 다시 보게 만들 수 있을 만큼 큰돈이었다."(322-3)


"1969년 9월 13일, 3선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에 회부되었다." "본회의 약 2시간 뒤인 오후 3시 50분경 국회의장 이효상의 세 번째 정회 신호로 공화당 의원들은 모두 본회의장에서 퇴장하고 신민당 의원들은 단상을 점거한 채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본회의장을 빠져나온 공화당 의원들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각 상임위 단위로 몇 개의 호텔에 투숙하였다. 14일 새벽 1시, 지휘 본부로 지정된 반도호텔에 모인 당의장 윤치영 등 지휘부는 2시 정각에 국회 제3별관에 모이라고 알렸다. 14일 새벽 2시 50분, 공화당 및 무소속 의원 122명은 야당 의원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는 국회 본회의장을 버리고, 길 건너편에 있는 국회 제3별관 3층에 있는 특별위원회실에 집결해서 개헌안을 25분만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국회의장 이효상은 의사봉이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자 국회 직원이 가져다 준 주전자 뚜껑으로 탕탕탕 책상을 쳤다."(328-9)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10월 17일로 예정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돈과 밀가루를 퍼붓기 시작했다. '밀가루 대통령'에 이어 '밀가루 헌법'을 탄생시키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박 정권이 유권자 매수를 위해 쓴 돈은 1천 500만 달러로 추산되었다. 개헌 지지 유세를 위해 전국을 돌던 김종필은 10월 6일 공주에서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내비치면서도 마지막 협박을 하였다. 그는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을 경우 그에 따르는 사회적 혼란과 국가위신 추락 및 국민이 원치 않는 또 한번의 군의 정치 참여를 초래할 우려가 있으므로 측근 의원들에게 개헌 찬성을 종용했다〉면서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비치며 개헌안에 대한 찬성을 유도했다." "마침내 10월 17일 실시된 국민투표의 투표율은 77.1%, 찬성률은 65.1%였다. 각 지역별 찬성표 비율에 따라 총 60만 달러의 보상금이 차등 지급되었다."(330-1)


"박정희의 권력 중독은 경제가 어려워짐에 따라 더욱 악화되었다. 69년까지의 경제성장률은 매우 높았고, 이는 3선 개헌의 성공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한국 경제는 69년부터 심각한 불황국면에 접어들었다. 직접적 원인은 미국이 68년 달러 위기에 봉착하여 한국으로부터 경공업제품 수입 규제조치를 취하고 차관의 원리금 상환 압박이 가중됨과 동시에 신규 차관 도입이 어려워진 것에 기인하였다." "노동계급은 60년 11.8%에서 70년 24.1%로 팽창하였지만,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궁핍이었다. 67년 광산노조의 광화문 시위, 68년 전매·철도노조 쟁의 및 조선공사 쟁의, 69년 면방 쟁의, 조선공사 쟁의, 부두노조 쟁의 등을 거치면서 노동운동은 점점 대규모화되고 격화되었다." "박정희는 그 위기를 70년대부터 더욱 강력한 독재체제로 돌파하는 노선을 걷게 된다. 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자살이 말해 주듯이, 노동자들에겐 저항의 길조차 막혀 버렸다."(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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