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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병자들 -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9년 1월
평점 :
서론
"'어떻게'라는 물음은 특정한 결과를 낳은 상호작용의 연쇄를 면밀히 살펴보도록 이끈다. 그에 반해 '왜'라는 물음은 제국주의, 민족주의, 무장, 동맹, 거액 금융거래, 국가의 명예 관념, 동원의 역학 같은 범주별 원인遠因들을 조사하도록 이끈다. '왜' 접근법은 특정한 분석적 명확성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실상을 왜곡해 허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허상 안에서는 인과적 압력이 꾸준히 증대하고, 사태를 내리누르는 요인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정치적 행위자들이 그들의 통제 바깥에 있는 오래된 세력들의 한낱 실행자가 된다. 그에 반해 이 책에는 행위능력으로 가득하다. 핵심의사결정자들(국왕들, 황제들, 외무장관들, 대사들, 군 사령관들, 그외 수많은 관료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계산을 해가면서 위험을 향해 나아갔다. 전쟁 발발은 어느 정도 자기반성을 할 줄 알았고, 다양한 선택지를 인정했으며, 입수 가능한 최선의 정보를 바탕으로 최선의 판단을 내린 전쟁 행위자들의 연쇄 결정의 정점이었다."(31-2)
1부 사라예보로 가는 길
1장 세르비아의 유령들
"1903년 6월 11일 오브레노비치 국왕 시해는 세르비아 정치사에서 새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는 1804년 민중봉기를 이끌어 세르비아에서 오스만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1813년 오스만이 반격에 나서자 오스트리아로 피신해야 했다. 2년 뒤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이끄는 두 번째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유연한 정치적 수완가인 밀로시는 오스만 당국과 협상해 세르비아의 공국 지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망명지에서 귀국한 카라조르제비치는 오스만의 묵인 아래 오브레노비치의 명에 따라 암살되었다. 주요 정적을 제거한 오브레노비치는 오스만으로부터 세르비아 공 칭호를 받았다." "경쟁하는 두 왕가,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 사이에 노출된 위치, 소규모 자작농들이 지배하는 유달리 무례한 정치문화, 이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탓에 세르비아 군주정에서는 정쟁이 끊이지 않았다. 19세기 세르비아 통치자들 가운데 재위 중에 자연사한 이는 놀랄 만큼 적다."(42-3)
새로 즉위한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가 입헌군주제를 천명하면서 "세르비아왕국은 이제 진정한 의회제 정치체, 즉 군주가 존재하되 통치하지 않는 정치체가 되었다." "정당은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언론은 오브레노비치 가문 치하에서 규범이었던 검열에서 마침내 벗어났다. 정치권은 대중의 요구에 더 부응하고 여론에 더 호응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세르비아는 정치적 실존 면에서 새 시대의 문턱에 있었다. 그러나 1903년 쿠데타로 해묵은 문제들이 해소되기도 했지만, 장차 1914년 사태를 무겁게 내리누를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왕가 살해를 위해 결성된 음모단 네트워크가 차츰 와해되기는커녕 세르비아 정치와 공적 생활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남았다." "새 정권이 음모단의 유혈사태에 기대어 존속한다는 사실은 음모단 네트워크가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맞물려 공개 비판을 어렵게 만들었다."(54-5)
"야심차고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못하는 세르비아 경제에서는 군대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사실 역시 민간 당국이 군 지휘구조의 도전에 취약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세르비아 정부에는 19세기 다른 나라들에서 의회제를 지탱한 대규모 지식계급과의 유기적 연계마저 없었다. 이런 정부에게 민족주의는 강력한 정치적 도구이자 문화적 힘이었다. 되찾지 못한 세르비아 땅을 병합하려는 세르비아인들의 열의는 민중문화에 스며든 신화적 열망뿐 아니라 농지 면적과 소출이 줄어들어 살기 힘들어진 농민층의 토지 갈등에도 기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의 경제적 곤경은 빈의 가혹한 관세와 목조르기 탓이라는 정부의 주장(아무리 미심쩍더라도)에 국민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지 않을 리 없었다. 외세의 속박 탓에 베오그라드 정부는 바다로 진출하여 후진성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하구를 확보하는 데 집착하게 되었다."(82-3)
"1908~1909년 겨울 모든 열강은 베오그라드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편입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단념하고 불가피한 결과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세르비아 통일이라는 이념에 얽매인) 온건파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보였던 쟁점은 국가가 당면한 곤경을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는 문제 하나뿐이었다. 온건파라 해도 민족주의 프로그램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다(부인하려 들지도 않았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논쟁의 어휘를 택한 극단파의 수사법이 언제나 유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온건파는 극단파의 언어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외부 관찰자는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 어떤 입장차가 있는지 분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상과 달리 겉보기에 그들은 견고한 만장일치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정치문화의 이 위험한 역학이 훗날 1914년 6월과 7월에 베오그라드에 다시 출몰할 터였다."(88-9)
"(1차 발칸전쟁 이후) 베오그라드가 새로 획득한 영토에 살던 대다수 사람들은 세르비아의 통치가 시작되자 괴롭힘과 억압을 당했다." "정복된 지역들은 한동안 식민지의 성격을 띠었다. 정부는 새 영토의 문화적 수준이 너무 낮아서 자유를 줄 경우 나라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이유로 이런 결정을 정당화했다. 실제로 정부의 주요 관심사는 여러 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비세르비아인들을 민족정책에서 배제하는 것이었다." "세르비아에게 이것은 두 종류의 전쟁이었다. 다시 말해 정규군 부대만이 아니라 이 시절에 아주 흔했던 빨치산 무리와 자유계약 전사까지 싸우는 전쟁이었다. 새로 획득한 지역들에서 공식 당국과 비공식 집단의 결탁은 소름 끼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학교와 목욕탕, 모스크 같은 오스만 건물들이 숱하게 파괴되었다." "1913년 10월과 11월에 영국 부영사들은 병합 지역에서 세르비아인들이 자행하는 조직적인 위협, 자의적인 구금, 구타, 강간, 마을 방화, 학살을 보고했다."(98-9)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 표적이 된 이유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내 슬라브족 소수집단에게 어떤 적의를 보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암살한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말대로 〈향후 군주로서 그가 모종의 개혁을 추진하여 우리의 통일을 방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영토회복주의자들 중 다수는 (슬라브족의 땅에 자치권을 더 많이 주는) 이 개혁안이 영토회복주의 계획에 치명적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스스로를 개혁하여 빈에서 연방제 노선을 따라 통치하는 삼중 국가로 변모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래서 이를테면 자그레브가 부다페스트와 동등한 지위를 누리는 수도가 된다면, 세르비아는 남슬라브족의 피에몬테라는 선봉 역할을 빼앗길 위험이 있었다. 요컨대 대공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테러 운동들의 논리 중 변치 않는 한 갈래, 즉 명백한 적과 강경파보다 개혁파 및 온건파를 더 우려하는 갈래를 예증한다."(106-7)
"(대공 암살 실행자로 뽑힌 자들은) 근대 테러 운동들이 먹이로 삼은, 이상은 넘치고 경험은 부족한 젊은이 특유의 바로 그 음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성과 연애를 하고 싶어하면서도 젊은 여성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족주의 시詩와 영토회복주의 신문 및 팸플릿을 읽었다. 청년들은 세르비아 민족의 고통에 대해 오랫동안 숙고했고, 세르비아인을 뺀 모두가 그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비천한 동포들의 수모와 치욕을 그들 자신의 일인 양 느꼈다. 특히 오스트리아 때문에 보스니아 동포들이 쥐는 경제 악화에 대해 곱씹어 생각했다(보스니아가 실은 세르비아의 심장부 대부분보다 더 산업화되었고 1인당 소득도 더 높다는 사실은 간과한 불평이었다). 희생은 주요 관심사, 거의 강박관념이었다." "프린치프와 차브리노비치 두 사람은 코소보 신화에서 아주 중요한 자살 암살자 인물형에 심취했거니와 더 넓게 보면 자신을 범세르비아 운동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108-10)
2장 특성 없는 제국
"두 차례 군사적 재앙이 합스부르크제국의 마지막 반세기 동안 그 궤적을 규정했다. 1859년 솔페리노에서 프랑스-피에몬테 동맹군은 10만 병력의 오스트리아군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신생 이탈리아 민족국가 창건의 길을 열었다. 1866년 쾨니히그레츠에서 프로이센군은 24만의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하여 신생 독일 민족국가에서 합스부르크제국을 몰아냈다. 이 두 차례 충격은 오스트리아 영토 내부의 생활을 바꾸어놓았다. 패전에 휘청거린 신절대주의적 오스트리아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탈바꿈했다. 1867년 타결된 대타협에 따라 지배적은 두 민족, 즉 서부의 독일인과 동부의 헝가리인이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그 결과 마치 노른자가 두 개 든 쌍란처럼 오스트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흔히 '치스라이타니엔'이라 불린 영토와 헝가리왕국이 반투명한 외피 안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독특한 정치체가 출현했다."(130-1)
"남동유럽 지역은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진 두 강대국이 경쟁하는 긴장 지대가 되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둘 다 오스만이 물러난 이 지역에서 패권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고 자부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예부터 튀르크족에 맞서 유럽의 동쪽 관문을 지킨 수호자였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발칸반도의 신흥 슬라브계(특히 정교회) 민족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후견 세력 사이에 자연스러운 공통 이해관계가 있다고 역설했다. 또 오스만이 후퇴하면서 러시아정책수립자들에게 전략적으로 극히 중요한 타키 해협(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향후 통제권 문제가 불거졌다. 그와 동시에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와 목표를 가진 야심찬 신생 발칸 국가들이 출현했다. 이 요동치는 지형 곳곳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한 수 둘 때마다 상대방의 이점을 상쇄하거나 줄이려는 체스 선수처럼 책략을 썼다."(149-50)
"발칸전쟁은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의 안보 지위를 파괴하고 더 크고 더 강한 세르비아를 만들어냈다. 세르비아왕국의 영토는 80퍼센트 이상 확장되었다. 2차 발칸전쟁 기간에 최고사령관 푸트니크 휘하의 세르비아군은 인상적인 규율과 주도권을 보여주었다. 그 전까지 합스부르크 정부는 베오그라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 논의할 때면 무시하는 투로 말하곤 했다. 한 예로 언젠가 에렌탈은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치는 "짓궂은 아이"에 비유했다. 그런 경솔한 언행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1912년 11월 9일 참모본부 보고서는 세르비아의 급성장한 공격력에 놀라움을 표했다. 1912년 초부터 추진한 철도망 개선, 무기와 장비의 현대화, 전방부대 수의 엄청난 증가(모두 프랑스 차관으로 자금을 마련했다)의 결과로 세르비아는 만만찮은 교전국으로 변모했다. 더욱이 세르비아 병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182)
2부 분열된 대륙
3장 유럽의 양극화, 1887~1907
"1907년 유럽 동맹 지도를 보면 삼국동맹은 (1887년 체제) 그대로였다(다만 이탈리아의 신의는 갈수록 의문시되고 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양국동맹 협정문에는 삼국동맹의 어떤 국가든 군대를 동원할 경우 두 조인국은 〈이 사건의 소식을 듣는 즉시 사전 협의를 거칠 필요 없이〉 전군을 동원하여 〈독일이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싸울 수밖에 없도록 신속히〉 배치한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화친 협정(1904)과 영국-러시아 협약(1907)을 통해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연결되어 있었다." "유럽 지정학적 체제의 양극화는 1914년에 발발한 전쟁의 결정적 전제조건이었다. 1887년이었다면 오스트리아-세르비아 관계가 위기가 아무리 심각했다 해도 유럽을 대륙 전쟁으로 끌고 가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양분 구도는 전쟁 이전 수년간 분쟁을 고조시킨 것 못지않게 완화했다. 그러나 두 블록이 없었다면 1차 세계대전은 실제 발발한 대로 발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213-4)
"베를린이 이 위협을 막을 방법은 러시아를 자국의 동맹체제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은 1873년 오스트리아·러시아와 함께 삼제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둘 다 포함하는 모든 동맹체제는 발칸반도에서 두 강국의 이해관계가 겹친다는 것을 고려하면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양국 간 긴장을 억제하기가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될 경우,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만약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선택한다면, 프랑스와 러시아의 협력관계를 막는 장벽이 사라질 터였다. 1890년 3월 사임할 때까지 독일제국의 수석 설계자이자 외교정책의 제1입안자였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은 이 문제를 충분히 의식했다."(216) "그렇지만 비스마르크식 외교로 달성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삼제동맹이라는 허술한 얼개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발칸에서의 이해관계를 가진 러시아와 관련해 그러했다."(218)
"(독일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왜 1890년대 초 프랑스의 접근을 환영했을까? 분명 독일은 러시아의 친독일파 외무장관 니콜라이 기르스가 기존보다 나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재보장조약 갱신을 거절함으로써 러시아가 정책 방향을 전환하도록 부추겼다. 1890년 6월 평시 독일군 병력을 1만 8574명 늘리자는 온건한 군사 법안이 조약 비갱신 결정에 뒤이어 제출되었던 것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불안감을 자아냈다." "프랑스의 거액 차관을 좋은 조건에 제공받을 전망도 러시아에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를 움직인 결정적 촉매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영국이 삼국동맹에 가담할 두려운 가능성이었다." "(1890년대 초의 정세는) 극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경쟁국인 영국이 러시아의 강력한 서쪽 인접국인 독일과 힘을 합치고 더 나아가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경쟁국인 오스트리와와 협력하기 직전처럼 보였다."(222-3)
"(유럽 세력균형의 새로운 판도를 열어젖힌)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영국 정치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독일의 흥기가 아니라 영국의 숙적 러시아가 크림전쟁(1853~1856) 이후 강요받은 합의로부터 풀려날 전망이었다.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정한 1856년 파리조약의 조항들에 따라 흑해의 물길은 흑해 연안을 소유한 국가들의 군함에도, 다른 어떤 국가의 군함에도 〈공식적으로 영원히 차단〉되었다. 이 조약의 목표는 러시아가 동지중해를 위협하거나 영국의 영토와 인도행 해로를 교란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패전으로 1856년 조약의 정치적 토대가 무너졌다. 새로 수립된 프랑스공화국은 크림전쟁 합의를 깨고 흑해에서 러시아의 군사화에 반대하던 입장을 포기했다. 영국 혼자서는 흑해 조항들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러시아는 흑해 함대 건설을 밀어붙였다."(233)
"(적대적인 강대국 연대의 출현을 저지하는) 비스마르크 전략에는 대가가 따랐다. 독일은 항상 자기 체급보다 약한 펀치를 휘둘러야 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에서 제국들의 식민지 쟁탈전에 끼어들지 말아야 했고, 다른 강국들이 세계 세력권을 두고 다툴 때 방관자로 남아야 했다. 또한 베를린은 이웃 강국들에 모순적인 약속을 해야 했다. 그 귀결은 독일제국의회의 구성을 결정하는 유권자들이 원치 않는, 무력한 국가라는 의식이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방대한 제국의 주변부라는), 본국에 비교적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교환하고 거래할 수 있는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독일은 그런 제안을 믿을 만하게 할 수가 없었는데, 이미 붐비는 테이블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 애쓰면서도 거래할 것이 전혀 없는 벼락부자 같은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변변찮은 남은 몫을 차지하려던 독일의 시도는 기성 제국 클럽의 강경한 저항에 부딪혔다."(240-1)
"1890년 독일이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을 포기한 것은 어느 정도는 스스로 부과한 비스마르크 정책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1890년의 태도 변화(비스마르크 실각, 레오 폰 카프리비의 재상 취임,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제국 정치의 핵심 행위자로 부상)는 독일 대외관계의 새로운 단계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1890년대 초의 '신노선'은 본래 협의하여 의도한 방침이라기보다는 우유부단과 좌고우면의 결과였다. 비스마르크가 갑작스레 퇴장하면서 생긴 공백은 그대로 남았다." "자유재량 정책은 독일에 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으나 실은 중대한 위험을 수반했다." "(별다른 안보 이득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친교가 깊어감에도 영국이 독일과 더 가까운 관계를 추구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영국 정책수립자들은 먼저 프랑스와, 그 후에 러시아와 유화하는 정책의 이점을 고려하기 시작했다."(243-4)
"1907년부터 등장한 새로운 국제 체제가 유독 독일에게 불리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유럽 강국들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한 결과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의 경우에만 독일 견제를 우선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초에 유럽 국가들이 체결한 일련의 협정은 세계사적 변천의 결과로 생각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그런 변천으로는 중일전쟁과 지역 강국 일본의 부상, 아프리카 분쟁과 중앙아시아에서의 그레이트 게임으로 인한 재정 부담, 아프리카와 남서유럽에서 오스만 권력의 쇠퇴, 강대국들의 중국 쟁탈전뿐 아니라 그에 따른 중국 국내의 대격동까지 포함한 중국 문제 등이 있었다. 독일의 '안절부절'과 벼락부자처럼 끈덕진 요구가 당시 정세의 일부이긴 했지만, 이 시대를 재조정한 과정들을 더 폭넓게 분석한 연구들은 독일이 터무니없는 국제적 행위로 고립을 자초했다는, 한때 널리 수용되었던 견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266)
4장 유럽 외교정책의 뭇소리
"20세기 초 유럽은 군주국들의 대륙이었다. 가장 중요한 여섯 강국 중 다섯이 이런저런 군주국이었고, 한 나라(프랑스)만 공화국이었다. 발칸반도의 신생 민족국가들(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마, 루마니아, 알바니아)은 모두 군주국이었다. 고속순양함, 무선전신, 전기 시가라이터의 이면에는 크고 복잡한 국가들을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생명활동에 얽어매는 이 고색창연한 제도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유럽 각국 집행부들의 중추는 여전히 이런저런 남녀가 차지하고 앉아 있는 왕위였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에서 각료들은 황제에게 임명받았다. 세 황제는 국가 문서에 무제한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각국 군대에 공식 권한을 행사했다. 왕조들의 제도와 인맥은 국가 간 소통을 구조화했다." "군주들은 정치적 행위자일 뿐 아니라 상징적 행위자였으며, 이 역할로 집단 감정과 연상작용을 사로잡고 집중시킬 수 있었다."(282-3)
"정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했든 안 했든, 유럽 대륙에 군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국제관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일부분만 민주화된 체제에서 모든 공문서와 인사에 접근할 수 있고 모든 집행 결정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주권자, 각국 정부의 중심점으로 추정되는 군주의 존재는 모호함의 원인이었다. 군주들이 서로 만나서 국가의 큰일을 해결하는 순전한 왕조식 외교정책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았다. 허사로 돌아간 비외르쾨 회담이 그 증거였다. 그럼에도 군주를 집행부의 키잡이 겸 화신으로 보고픈 유혹은 외교관, 정치인, 특히 군주들 사이에서 여전히 강력했다. 군주들의 존재는 정책 수립 과정의 중심축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계속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국왕들과 황제들은 국제관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었다. 그 귀결인 불명확성은 확실하고 투명한 국가 간 관계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계속 방해했다."(301-2)
"언론에 집착하는 태도의 밑바탕에는 그와 상반되는 태도가 있었다. 각료와 관료, 군주는 언론을 대중의 감정과 태도를 반영하는 거울이자 드러내는 채널로 생각했고, 이따금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외무장관이라면 누구나 적대적인 언론 캠페인에 노출될 경우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부정적인 기사에 대한 두려움은 숱한 외무부들이 비밀을 엄수한 한 가지 이유였다." "대다수 정책수립자들은 언론을 영리하고 분별력 있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론이 휘발하는 성질이 있다고, 즉 금세 잦아드는 단기적인 선동과 광란에 휘둘리기 쉽다고 보았다. 민심이 상반되는 자극들에 의해 움직이고, 정부에 현실적인 요구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표현을 바꿔 말하자면, 여론은 대개 〈고삐 풀린 혀와 대책 없는 손을〉 결합한다고 보았다. 여론은 광란적이고 곧잘 공포에 휩싸였지만, 몹시 변덕스러웠다."(363-4)
"정책수립자들이 여론을 통제했던 것도, 여론이 그들을 통제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론과 공적 생활의 상호성에 대해,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에 대해 말해야 한다. 정책수립자들은 때때로 여론을 알맞은 방향으로 유도하려 하면서도, 자신들의 자율성과 정책수립 과정의 통합성을 신중하게 보호했다." "더욱 근본적인, 그리고 더욱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는 심성구조의 변화였다. 이 변화는 강경한 입장이나 대립을 요구하는 쇼비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쟁을 받아들이는 깊고도 광범한 마음가짐으로 표출되었다. 이제 전쟁은 국제관계의 본성상 확실히 일어날 사태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쌓인 마음가짐의 무게는 1914년 7월 위기 동안 공세 계획 성명의 형태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민간 지도자들의 웅변적인 침묵을 통해 드러났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에 살았더라면 강대국 간 전쟁이야말로 최악의 사태라고 지적했을 법한 사람들이었다."(380-1)
5장 얽히고 설킨 발칸
"발칸반도에 대혼란을 가져온 연쇄 전쟁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 1911년 이탈리아의 리비아 침공은 오스만 주변부에 대한 발칸 국가들의 전면전에 청신호를 보낸 격이었다. (당시 영국령이었던) 이집트와 (사실상 프랑스령이었던) 모로코와 달리, 나중에 리비아라고 알려진 3개 주(빌라예트)는 오스만제국에 속한 지방이었다. 오스만의 마지막 아프리카 영토인 이 지방들에 대한 이탈리아의 전혀 정당하지 않은 공격은, 당대의 어느 영국인 관측자의 표현대로, 발칸 국가들에게 〈돌파구를 열어준〉 사건이었다. (오스만 세력을 몰아내자는 이야기만 무성하던) 발칸 국가들은 이탈리아의 침공 이후에야 비로소 싸울 마음을 먹었다. 세르비아 외무부의 정치적 수장이었던 미로슬라브 스팔라이코비치는 1924년에 이 사태를 되돌아보면서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과정을 개시한 사건으로 이탈리아의 트리폴리 공격을 꼽았다. 〈뒤이은 모든 사태는 그 첫 공격의 진전에 지나지 않습니다.〉"(387)
"오늘날 대체로 잊힌 이탈리아-오스만 전쟁은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유럽 국제체제를 교란했다. 이탈리아의 점령에 맞선 리비아의 투쟁은 현대 아랍 민족주의의 출현을 자극한 중요한 초기 촉매들 중 하나였다. 삼국협상 국가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리비아를 강탈하려는 이탈리아의 대담한 행보를 부추긴 반면, 이탈리아의 삼국동맹 파트너들은 마지못해 묵인했다. 이런 국제정세는 중요한 진실을 드러내 보였다. 삼국협상 국가들의 개입으로 삼국동맹의 약점이, 아니 지리멸렬함이 노출되었다. 이탈리아의 행동이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칸반도 전체의 안정을 깨뜨릴 것이라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거듭된 경고는 무시되었다. 이탈리아는 명목상으로만 그들의 동맹인 것처럼 보였다." "이탈리아가 훗날 삼국협상에 붙을 뚜렷한 기미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이탈리아는 서로 모순되는 약속들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는 복잡하고 모호한 외교정책을 펴고 있었다."(395)
"삼국동맹의 콩가루 상태 이면에는 근본적으로 더욱 중요한 추세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침공하면서 유럽 대다수 국가들로부터 미지근한 지지를 받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한 정세였는데, 친오스만 유럽 연대가 전면적으로 해체되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1850년대에 출현한 유럽 열강의 협조체제는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강탈하려던 러시아를 견제했다(그 결과 크림전쟁이 일어났다). 이 연대는 러시아-오스만 전쟁 이후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다른 형태로 재편되었고, 1880년대 중반 불가리아 위기 때 재조정되었다. 이제 이 연대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탈리아와 전쟁을 시작할 무렵 오스만제국은 영국에 동맹을 요청했지만, 이탈리아와 소원해지고 싶지 않았던 런던 정부는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뒤이어 발칸전쟁으로 유럽 협조체제는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중대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396-7)
"발칸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은 옛 동맹 패턴의 반전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에는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지원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를 비호했다. 1914년 이 구도가 뒤집혔다." "이 발칸 지정학 재편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몇 년씩 걸리는 장기지속 현상이 아니라 급변하는 지정학적 환경에 적응하는 단기 현상이었다." "세르비아는 이제 발칸에서 러시아의 돌출부였다. 이것은 필연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결과가 전혀 아니었다." "발칸의 정교회 '자녀들'을 대신해 행동하겠다는 러시아의 주장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약화하고, 국내에서 인기를 얻고, 터키 해협의 발칸 배후지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포퓰리즘적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범슬라브주의는 러시아 민족주의 언론에 인기가 있었을지 몰라도, 히틀러의 생활권Lebensraum 개념과 비교해 정치행위의 신조로서 딱히 더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438-40)
"1913년 10월 세르비아와의 교착상태를 겪으면서 오스트리아가 향후 위기에 대처할 때 준거로 삼을 몇 가지 전례가 확립되었으며, 실제로 사라예보 암살사건 이후 양국 사이에 위기가 폭발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그 전례들에 따라 대처했다. 가장 명백한 전례는 최후통첩의 효과가 입증된 듯 보였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10월 17일 통첩은 언론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며, 세르비아군이 마침내 알바니아에서 철수했다는 소식에 빈 사람들은 희열을 느꼈다." "두 번째 전례는 세르비아가 빈과의 소통을 관리하면서 장차 화근이 될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다. 주도면밀하게 도발하고 불순응하는 정책을 다정함에 가까운 간사한 정중함으로 포장한다는 인상이었다." "베오그라드는 빈이 온갖 모욕을 침착하게 감내하면서 계속 몰아붙여야만 굴복하고, 오스트리아가 압박을 늦추는 즉시 도전과 도발을 재개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세르비아는 궁극적으로 무력만을 이해한다는 공리가 더욱 힘을 얻었다."(452-3)
"푸앵카레가 고위직에 취임할 무렵 프랑스에서는 역사가들이 '민족주의 부흥'이라 부르는 정치 기조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공화국 정치인들은 방어주의 안보정책, 즉 국경 요새화, 중포重砲, '국민무장군'으로 개념화된 군대의 짧은 훈련 기간에 역점을 둔 안보정책을 채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에 반해 아가디르 사건 이후 프랑스는 군대의 직업적 이해관계를 고려하고, 훈련 기간을 늘리는 한편 지휘체계를 더 효율적으로 일원화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다음번 전쟁에 명백히 공격적인 태세로 대비하는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1905년 팽배했던 대중의 평화주의적이고 반군사적인 분위기가 한결 호전적인 태도에 자리를 내주었다. 프랑스인 모두가 민족주의 물결에 휩쓸렸던 것은 아니지만(주로 젊고 지적인 파리 사람들이 새로운 호전주의를 받아들였다) 군사력 회복은 공화국 정치의 되살아나는 신조들 중 하나가 되었다."(464-5)
6장 마지막 기회: 데탕트와 위험, 1912~1914
"전전 막판 러시아-독일 데탕트는 발트항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곳에서 거둔 성과는 보잘것없었다. 양국은 우호적으로 대화하면서도 실질적 결정은 내리지 않았다. 언론에 배포된 공동성명은 알맹이 없는 일반론이었으며, 회담에서 "새로운 협정"을 맺지 않았고, 〈균형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입증된 국가들의 집단화에 어떠한 변화〉도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독일은 실제로 오스트리아에 자제를 촉구하여 빈에서 베를린의 동맹 약속이 과연 확고하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킨 반면, 러시아는 발칸 피후견국들을 이미 책동했고 앞으로도 책동할 예정이었다. 오스만제국의 곤경을 이용할 의도가 러시아에 없고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역사적 임무'가 이제 옛일이라는 사조노프의 확언은 줄잡아 말해도 실상을 호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러시아-독일 양해의 기반이었다면, 실로 위태로운 토대였다."(496-7)
"데탕트는 복잡한 방식으로 동맹 블록들의 유동적인 구조와 상호작용했다. 데탕트는 핵심 정치행위자들의 위험 의식을 낮춤으로써 결과적으로 위험 수준을 높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레이는 런던 대사회의(1차 발칸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정전회담)를 주재한 뒤 위기를 해결하고 "평화를 지키는"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는데, 결국 이 자신감 탓에 후일 1914년 7월 사태에 시의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영국과 독일의 발칸 데탕트로부터 독일이 맹방 오스트리아를 계속 억제할 거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억제할 거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야고브와 베트만도 런던 정부가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 정책의 진짜 성격을 마침내 알아차렸고 설령 이 지역에서 러시아가 분쟁을 일으키더라도 중립을 지킬 거라는, 똑같이 미심쩍은 통찰을 이끌어냈다. 게다가 유럽 국제체제에서 일부 국가들이 데탕트 국면을 조성하면 다른 국가들의 연대가 공고해지기도 했다."(507-8)
"삼국협상의 연대가 헐거워질지 모른다는 우려에 단기적으로 동맹 약속이 단호해졌으며, 유럽 곳곳에서 호전적인 정책 파벌들이 부상하면서 이 추세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시기에) 독일인들도 러시아의 굉장한 경제 성장과 활력에 감명을 받았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사령관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정학적 상황이 독일에 불리한 방향으로 급변하고 있는 것이 명약관화했다. 슐리펜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된 헬무트 폰 몰트케는 초지일관 암울하고 호전적인 관점에서 독일의 국제 상황을 전망했다. 그의 전망은 공리를 닮은 두 가지 가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두 동맹 블록 간 전쟁은 장기적으로 불가피하다. 둘째, 시간은 독일 편이 아니다. 장차 독일의 적이 될 나라들, 특히 급속히 팽창하는 경제와 사실상 무한한 인력을 가진 러시아는 해가 갈수록 군사력을 키울 것이고, 결국 도전할 수 없는 우위를 점한 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싸울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510-1)
"세계 제국들의 무대에서 독일의 선택권은 아주 제한되었고, 동맹 블록들로 나뉜 유럽의 상황은 비교적 닫혀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전쟁 없는 세계정책'에 관심 있는 독일 정치인들의 이목을 끌어모은 지역이 있었다. 바로 오스만제국이었다. 제국들이 특히 험악하게 각축을 벌인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정책은 전통적으로 다소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1880년대 들어 베를린은 한층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영국의 이집트 점령(1882)으로 영국과 소원해진 콘스탄티노플 정부는 베를린에서 적극적으로 파트너를 구하며 독일 정부의 관심을 부추겼다. 독일 은행, 건설사, 철도회사는 술탄의 제국에서 개발이 덜된 지역들부터 진출해 사업권과 이익영역을 확보했다." "이런 모험사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초기에는 다소 변덕스러웠지만 점차 확실하고 일관된 지원으로 바뀌어갔다. 1911년 콘스탄티노플 주재 독일 대사는 오스만제국이 독일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이익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523)
# 러시아 측의 안보 우려를 증폭시키는 계기로 작용
"삼국협상 정치인들의 수사에서 오스트리아의 쇠락이 불가피하다는 서사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유용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서사는 세르비아를 이중군주국의 구닥다리 구조를 쓸어버릴 현대성의 전령으로 묘사하며 세르비아의 무력투쟁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문화와 행정, 산업 면에서 유럽 현대성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반면 발칸 국가들(특히 세르비아)은 경제적 후진성과 생산성 하락의 악순환에 여전히 갇혀 있었음을 보여주는 차고 넘치는 증거를 은폐하는 기능을 했다. 하지만 이런 거대 서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의사결정자들로 하여금 그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심지어 그들 자신에게도 숨길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면, 정치는 저마다 다른 미래를 내포하고 있는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을 의미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역사의 비인격적 전진 운동에 보조를 맞추는 일이 된다."(544-5)
"발칸 반도에서 프랑스와 러시아가 합동 작전을 펼친다는 전략은 시나리오이지 계획 자체가 아니다. 그렇다 해도 양국 정책수립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독일에 미칠 법한 영향을 놀라울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프랑스 정책수립자들은 군사적 위협의 균형이 얼마만큼 독일에 불리하게 기울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1914년 6월 프랑스 참모본부는 〈군사적 상황이 독일에 불리하게 변경되었다〉라고 만족스러운 투로 지적했으며, 영국의 군사적 평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행동은 전적으로 방어적인 것이고 적에게만 공격적인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던 까닭에, 핵심 정책수립자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베를린의 선택지를 줄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국제관계 이론가들이 '안보 딜레마'라고 부르는 상황, 즉 한 국가가 자국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가 〈다른 국가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을 뚜렷하게 보여준다."(549-50)
"세기말적 남자다움에 호소하는 표현이 이 무렵의 서신과 메모에서 워낙 광범하게 나타나므로 그 영향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었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 해도 이런 표현은 분명 유럽 남성성의 역사에서 아주 특정한 순간을 반영한다. 젠더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19세기 말 수십 년과 20세기 첫 10년 동안 욕구 충족(음식, 섹스, 상품)에 집중하던 비교적 폭넓은 형태의 가부장적 정체성이 더 좁고 냉정하고 금욕적인 정체성으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한다. 그와 동시에 종속되고 주변화된 남성성들(예컨대 비백인 프롤레타리아의 남성성)과의 경쟁에 직면한 엘리트층 내에서 '진정한 남성성'의 표현이 강조되었다. 특히 군 지휘부 집단들 사이에서 체력, 강인함, 의무, 아낌없는 봉사가 그전까지 강조되었던 상류층 출신이라는 사실을 점차 대체했다." "페미니스트 사상가 로자 마이레더는 1905년에 〈그들은 전통적인 남성성의 규범에 들어맞기만 하면 패배의 참혹함이나 행위의 순전한 부당함에 무감각하다〉고 썼다."(559-60)
3부 위기
7장 사라예보 살인사건
"때때로 역사가들은 대공이 인기가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암살 자체는 사태의 중요한 계기가 아니었고 기껏해야 더 먼 과거에 뿌리박은 결정의 구실이었다고 추론했다. 그러나 이 결론은 실상을 호도하는 것이다. 우선 인기가 있었든 없었든, 제위계승자의 에너지와 개혁 열의는 널리 인정받았다. 콘스탄티노플 주재 오스트리아 공사는 세르비아인 동료에게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보기 드문 활력과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국정에 완전히 헌신했으며 죽지 않았다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공은 제국의 존속을 보장하려면 〈국내 정책 분야에서 방침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이해한 사람들〉 전부를 자기 주변으로 모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대공 암살은 단순히 그 개인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그가 상징하던 것, 즉 왕조의 미래와 제국의 미래, 그리고 둘을 통합한 '합스부르크 국가 이념'까지 타격을 받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의미했다."(587)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기는커녕 파시치(더 나아가 세르비아 당국)는 관습적인 자세와 태도로 되돌아갔다. 다시 말해 이번 사건으로 세르비아인들 자신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사라예보에서 피해를 입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자업자득이다, 세르비아인들은 말로써, 필요하다면 무력으로써 스스로를 지킬 권리가 있다는 등 이런저런 주장을 폈다." "이 견해에 따라 베오그라드 정부는 세르비아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오스트리아의 비난을 정당한 이유가 전혀 없는 공격으로 묘사했고, 공식적으로 도도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세르비아의 적절한 대응책이라고 밝혔다. 이 모든 주장은 베오그라드 정치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면 이해할 만한 일이었지만, 세르비아가 오만과 기만, 책임 회피로 일관한다고 여긴 오스트리아를 격분시킬 수밖에 없었다. 참사에 대한 세르비아 국가의 공동 책임이 추가로 확인되자 오스트리아가 분개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604)
8장 확산되는 파문
러시아는 자신들이 발칸의 불안정에 기여한 역사는 도외시한 채,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가 평화롭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쨌거나 런던과 파리 모두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러시아의 서사에 반대할 의향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인기 없고 전쟁을 도발하던 엄격한 차기 군주가 오랜 치욕과 학대에 격분한 자국 시민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대표하던, 부패해 무너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탐욕스러운 정권이 애석할 것 없는 그의 죽음의 책임을 떳떳하고 평화로운 슬라브족 이웃에게 덮어씌울 태세였다. 사라예보 사건에 이런 틀을 씌우는 것이 러시아의 행동 결정을 공식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틀 짓기의 결과로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 발생할 경우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저지할 장애물 중 일부가 제거되었다. 발칸 개시 시나리오가 일촉즉발 가능성이 되었던 것이다."(634-5)
"독일 지도부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공격을 계기로 러시아가 개입하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가동되고, 결국 대륙 전쟁이 발발할 위험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일부 역사가들은 빌헬름과 베트만, 그들의 군사고문들이 일촉즉발 사라예보 위기를 독일에 유리한 조건에서 다른 강대국들과 분쟁을 벌일 기회로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 물음에 답하자면, 먼저 독일 핵심 의사결정자들이 러시아가 개입할 것으로 예상하지도 않았고 개입을 유발할 생각도 없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7월 말까지 위기에 대처하는 동안 독일 정부의 특징이었던 군사적 대비를 꺼리는 태도에는 현재 대비태세에 대한 군부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겠지만, 분쟁을 발칸반도로 국한하려는 독일 지도부의 바람 또한 반영되어 있었다. 다만 이 정책으로 분쟁을 국한하는 데 실패할 경우 독일의 군사 대비태세가 위태로워질 위험이 있었다."(640-1)
"오스트리아는 의사결정 이론가들이 말하는 '중대 결정', 즉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고, 돌이킬 수 없는 변혁적 결과를 가져오고, 결정자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당시 위기를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 평가했고, 여러 요인과 위험에 대해 논의했다. 오스트리아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려는 세르비아 당국, 이런 사건을 중재할 수 있는 국제 사법기구의 부재, 향후 베오그라드에 순응을 강요할 수 없는 당시 국제 정세 등을 고려하면, 오스트리아가 덜 과격한 해법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의 대응은 (1914년의 다른 어떤 행위자들보다 더한 정도로) 근본적으로 기질과 직관에 따른 비약,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현재 어떤 상태이고 강대국으로 존속하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공통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적나라한 결정 행위'였다."(662)
9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프랑스인들
"(7월 21일~23일간 러시아를 국빈 방문한) 푸앵카레는 강경함이라는 복음을 전도했고 러시아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맥락에서 강경함이란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조치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의미했다. 자료들이 시사하는 대로, 푸앵카레도 러시아 대담자들도 대공 암살 이후 모종의 조치를 정당하게 취할 자격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임기응변도, 새로운 정책 성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푸앵카레는 그저 1912년 여름부터 구상해온 방침을 굳게 고수하고 있었다." "푸앵카레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숱한 대화를 나누며 예견한 발칸 대응 정책을 평화를 위한 정책이라고 불렀는데,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불요불굴 연대에 직면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십중팔구 물러설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설령 모든 예측이 어긋나더라도, 전쟁보다 나쁜 상황은 강력한 러시아가, 그리고 바라건대 영국의 육군력과 해군력, 상업력이 감당할 것이었다."(690-1)
10장 최후통첩
"오스트리아 수뇌부는 최후통첩 시나리오를 논의하는 회의는 물론 다른 회의들에서도 오늘날 말하는 출구전략을 조금이나마 닮은 것조차 마련하지 않았다. 세르비아는 조용히 지내는 이웃들 사이에 있는 불량국가가 아니었다. 인접국 알바니아는 여전히 매우 불안정했으며,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통제 아래 있는 마케도니아 영토를 먹어치우기만 하면 예전의 친러시아 정책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언제나 있었다. 불가리아의 마케도니아 지역 병합과 루마니아를 영토 보상으로 달래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오스트리아는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오스트리아 정치 엘리트들은 여전히 베오그라드와의 분쟁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더 폭넓은 문제들을 간과하고 있었다. 푸앵카레가 서파리에게 세르비아에게는 "친구들"이 있다는 이례적인 경고를 했다는 소식이 빈에 도착했을 때조차 베르히톨트는 방침 변경을 고려하지 않았다."(694-6)
"베오그라드에서 숙명론 분위기를 쫓아버리고 최후통첩 요구에 순응해 전쟁을 피해보려던 각료들의 마음을 돌린 것은 러시아에서 들려온 소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강경해지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 각료들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양보하지 않는 선에서 오스트리아의 요구에 최대한 순응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답변서를 다듬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세르비아의 답변서는 지저분해 보였을지 몰라도 외교적 얼버무림의 걸작이었다." "답변서 작성자들은 (자신만만한 자화자찬으로 시작되는) 자신들의 응답으로 양국 사이의 모든 오해가 풀릴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정부는 사적 개인들의 행동을 책임질 수 없으며 언론이나 〈협회들의 평화로운 업무〉를 직접 통제하지 않는 까닭에 빈에서 제기한 혐의에 놀라고 고통받은 터였다. 작성자들은 최후통첩의 각 항에 답변하면서 수락과 조건부 수락, 회피, 거부를 절묘하게 혼합했다."(711-3)
"1914년 7월 28일 오전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비트이슐에 있는 황제 별장의 집무실 책상에서 타조 깃펜으로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에 서명했다." "이즈음이면 베오그라드는 이미 인구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벌써 군복무 연령의 모든 남성이 징집되고 많은 가족이 친척과 함께 내륙으로 피난을 떠난 뒤였다. 7월 28일 오후 2시 정각에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들불처럼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모든 신문의 호외가 행상들이 거리로 가져가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이날이 지나기 전에 도나우강에서 탄약과 지뢰를 운반하던 세르비아 증기선 두 척이 오스트리아 공병들과 경비원들에게 몰수되었다." "마침내 전쟁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에 58세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한껏 흥분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나 자신을 오스트리아인으로 느끼고, 썩 희망적이지 않은 이 제국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은 기분이다. 나의 모든 리비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바친다.〉"(720-2)
11장 경고사격
"7월 24일 열린 러시아 각료평의회는 다섯 가지를 결의했다. ①오스트리아 측에 최후통첩의 시한 연장을 요청한다. ②세르비아 측에 국경에서 전투를 개시하지 말고 군대를 자국 중부로 후퇴시킬 것을 권고한다. ③차르에게 키예프, 오데사, 카잔, 모스크바 군관구의 동원을 "원칙적으로" 승인할 것을 요청한다. ④육군장관에게 군사장비 비축을 가속할 것을 지시한다. ⑤현재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투자 중인 러시아 자금을 회수한다. 이튿날, 더욱 엄숙한 각료평의회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전날 각료평의회에서 결정한 사항들을 확인하고 정교한 추가 군사조치들에 동의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조치는 각료평의회가 '전쟁 대비기간'이라고 알려진 일군의 복잡한 규제를 승인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동원에 대비한 많은 계획을 포함한 이 조치들은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댄 군관구들만이 아니라 유럽 러시아 전역에 적용될 예정이었다."(729-30)
"상술한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사조노프와 그의 동료들은 위기를 고조시키고 유럽 전면전의 가능성을 대폭 끌어올렸다. 우선 러시아의 사전동원은 세르비아 정계의 공감대를 바꾸어놓았다. 원래 최후통첩 수락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베오그라드 정부는 이제 오스트리아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을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다. 또한 사전동원은 러시아 국내에서 행정부에 대한 압력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군복 입은 남자들의 광경과 러시아가 세르비아의 운명을 '좌시하지' 않을 거라는 소식에 민족주의 언론이 환호성을 질렀기 때문이다." "사조노프는 왜 그렇게 했을까? 사조노프는 처음부터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조치가 러시아의 반격을 촉발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최후통첩에 대한 그의 대응은 그의 이전 언행과 완전히 일맥상통했다. 그는 세르비아의 영토회복주의에 대항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권리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737-8)
12장 마지막 날들
"러시아의 총동원은 7월 위기의 가장 중대한 결정 중 하나였다. 이것이 1차 세계대전의 첫 번째 총동원이었다. 이 시점에 독일 정부는 러시아가 7월 26일부터 시행 중이던 '전쟁 대비기간'에 상응하는 '전쟁 위급상황'을 아직 선포하기도 전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여전히 세르비아를 물리치는 데 초점을 맞춘 부분동원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 사건 순서는 훗날 프랑스와 러시아의 정치인들을 꽤나 불편하게 했다.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 정부가 7월 위기 동안 자국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펴낸 오렌지북Orange Book에서, 편집자들은 러시아의 총동원이 다른 나라의 조치에 대응한 결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총동원령 날짜를 3일 앞당겼다." 프랑스 역시 러시아의 동원령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동원조치'에 맞선 조치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독일은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7월 위기 내내 상대적으로 차분한 하나의 섬이었다."(780-1)
"오스트리아가 굼벵이처럼 대응한 탓에 국지화 정책의 성공에 필요한 전제조건 중 하나가 무너졌다면, 독일 정부는 이 정책을 왜 그토록 악착같이 고수했던 걸까?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무력 개입을 방지하는 더 깊은 구조적 요인들(러시아의 무장 프로그램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사정 같은)을 믿었다는 데 있다." "독일 정부가 국지화에 전념한 다른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대안이 부족했다는 데 있다. 합스부르크 맹방을 포기하는 방안은 논외였는데, 평판과 권력정치 때문만이 아니라 독일 의사결정자들이 세르비아를 고발하는 오스트리아의 정당성을 정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군사적 공격력의 균형이 독일에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면, 독일의 유일한 강대국 맹방을 잃을 경우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었다(독일 계획자들은 이미 이탈리아를 실질적은 자산으로 여기기에는 너무 신뢰할 수 없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792-4)
"러시아가 부분동원령을 공포한 7월 29일에 열린 회의에서도 독일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팔켄하인 육군장관은 전쟁 위급상황 선포에 찬성한 반면, 헬무트 폰 몰트케 육군참모총장과 베트만 재상은 중요한 운송체계에서 경비 근무를 확대하는 방안에만 찬성했다." "7월 31일 군사적 조치를 놓고 또다시 갈팡질팡하는 차에 모스크바의 푸르탈레스 대사로부터 러시아가 전날 한밤중에 총동원을 명령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카이저는 즉시 전화를 걸어 전쟁 위급상황 선포를 명령했고, 7월 31일 오후 1시 이 명령이 팔켄하인을 통해 군대에 하달되었다. 이제 먼저 동원한 책임은 분명히 러시아에 있었다. 이는 베를린 지도부에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독일 일부 도시들에서 일어난 평화주의 시위를 감안하면, 독일의 참전이 방어적 성격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어야 했다." "러시아 정부가 총동원령 철회를 거부하자 독일은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804-6)
"외교의 시간이 끝나가고 군인의 시간이 시작되는 참이었다. 베를린 주재 바이에른 군사전권위원은 동원령 발표 이후 육군장관을 방문했을 때, 〈복도에서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악수하는 이들을 어디서나〉 보았다. 〈누군가 장애물을 넘었다고 자축했다.〉 7월 30일 파리에서 이그나티예프 대령은 〈프랑스 측에서 생각하기에 유리한 전술적 상황을 이용할 기회를 잡은 데 대한〉 프랑스 동료들의 "숨김없는 기쁨"을 보고했다.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생각에 고무되었다. 7월 28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모든 것이 파국과 붕괴를 향해 나아가고 있소. 나는 흥이 나고 대비가 되어 있고 행복하다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쾌활한 알렉산드르 크리보셰인은 제정의회 의원 대표단에게 독일이 조만간 괴멸될 것이고 전쟁이 러시아에게 "호재"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우리를 믿으세요. 신사분들, 만사형통일 겁니다.〉"(843-4)
"다가오는 싸움에 열광하는 쇼비니즘적 표현들이 드문드문 있기는 했지만 이는 예외적이었다. 유럽 남자들이 증오스러운 적을 물리칠 기회를 덥석 붙잡았다는 신화는 그동안 철저히 타파되었다. 대부분의 장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동원 소식은 엄청난 충격,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리고 도심지에서 멀어질수록, 장차 전쟁에서 싸우거나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일가친척을 잃을 사람들이 동원 소식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차르의 말이 전해지자, 독특한 군사적 소명과 전통을 지닌 카자크인들은 〈적과 싸우고자 불타올랐다.〉 그런데 그 적은 누구인가? 아무도 몰랐다. 동원 전보에는 구체적인 정보가 없었다. 소문이 넘쳐났다. 처음에는 모두 중국과 전쟁하는 게 틀림없다고 상상했다. 〈러시아가 몽골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중국이 전쟁을 선포했대.〉 이내 다른 소문이 퍼졌다. 〈잉글랜드랑, 잉글랜드랑 싸운대.〉 이 견해가 한동안 우세했다."(845-6)
결론
우리는 의사결정자들에게 작용한 객관적 요인들과 그들이 서로 나눈 이야기들을 구별해야 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나이 많고 참을성 강한 이웃을 끊임없이 도발하고 못살게 구는 젊은 비적들과 국왕 시해자들로 이루어진 민족에 관한 이야기가 세르비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지 냉철하게 판단하는 것을 방해했다. 반대로 세르비아에서는 탐욕스럽고 막강한 합스부르크 제국이 자신들을 희생시키고 억압한다는 공상이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독일에서는 침공과 분할을 예상하는 어두운 미래상이 1914년 여름 내내 의사결정을 괴롭혔다. 러시아에서는 동맹국이 러시아를 거듭 욕보였다는 이야기가 과거를 왜곡하는 동시에 현재를 명료하게 하는 등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널리 회자된 이야기는 오스트리아가 중부유럽과 동유럽에서 안정의 버팀목 역할을 한다는 기존의 전제를 점차 대체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쇠락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서사였다."(852)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다룬 연구에서 폴 케네디는 교전국들 전부를 탓하거나 아무도 탓하지 않는 식으로 범인 색출을 회피하는 것은 "물렁한" 접근법이라고 말했다. 케네디의 말대로라면 더 딱딱한 접근법은 손가락질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 책임 지우기에 중점을 둔 서술의 문제는 결국 엉뚱한 국가에 누명을 씌울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런 서술에 전제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책임에 초점을 맞춘 서술은 첫째로 상호작용하며 갈등을 빚은 관계에서 궁극적으로 한 주역은 옳게 행동하고 다른 주역은 잘못 행동한 것이 틀림없다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고발 서사의 또 다른 단점은 다자간 상호작용의 과정보다는 특정한 한 국가의 정치적 기질과 구상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야를 좁힌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책임을 지우려는 수사관은 의사결정자들의 행위를 일관된 의도에 따라 계획한 행위로 해석하기 쉽다는 문제가 있다."(855-6)
"1914년 전쟁 발발은 온실 안에서 연기 나는 권총을 손에 쥔 채로 시체를 지켜보는 범인을 발견하며 끝나는 애거서 크리스티 류의 드라마가 아니다. 이 이야기에는 연기 나는 총이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주요 인물들 모두가 연기 나는 총을 쥐고 있다. 이렇게 보면 1차 세계대전 발발은 범죄가 아닌 비극이었다. 이를 인정한다고 해서 프리츠 피셔와 그의 역사 서술을 지지한 동료들이 올바로 주목한 오스트리아와 독일 정책수립자들의 호전성과 제국주의적 피해망상을 꼭 최소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일인들만 제국주의자였던 것도 아니고, 그들만 피해망상에 굴복했던 것도 아니다. 1914년에 전쟁을 불러온 위기는 유럽 국가들이 공유한 정치문화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극적이고 진정으로 상호적인 위기이기도 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1914년에 정치인들이 얻고자 다투었던 상들 가운데 그 무엇도 뒤이은 대재앙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지 않았다."(856-7)
"그들은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위험을 실감하기도 했을까? 이것은 1914년 이전과 1945년 이후의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의사결정자들과 일반 대중 모두 핵전쟁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파악했다(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위에 생긴 버섯구름 이미지가 일반 시민들의 악몽에 나왔다).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 경쟁이 벌어졌음에도 초강대국들 간 핵전쟁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1914년 이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많은 정치인들의 마음속에서 단기전에 대한 기대와 장기전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테면 서로를 상쇄하여 위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게 막았다." 우리는 전전 유럽 어디서나 이렇게 기대와 두려움이 상쇄된 견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1914년의 주역들은 눈을 부릅뜨고도 보지 못하고 꿈에 사로잡힌 채 자신들이 곧 세상에 불러들일 공포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몽유병자들이었다."(8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