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4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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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중산층 신화와 공안정국의 결탁 / 1989년


"1989년 2월, 정부는 대학생의 비영리 과외를 전면 허용하고 중고교 재학생들의 방학 중 학원수강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다."(35) "대학생 과외 전면 허용은 (명문대와 비명문대) 학생들 사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과외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입시 학원들은 80년대 내내 누려보지 못한 최고의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과외 허용 조치 이후로 (속셈학원 같은) 새로운 형태의 준입시 학원들도 생겨났다. 원칙적으로는 입시 학원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입시 학원의 기능을 발휘하는 학원이었다."(37-9) "중산층은 '계급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 어떤 비리와 문제에 대해서도 눈을 감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대학생 과외에서조차 벌어지는 명문대생과 비명문대생의 현격한 수입 격차는 평생 영향을 미칠 계급적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으니, 망설일 게 없었다."(41)


"4월 13일에 실시된 동해 보궐선거에서의 후보 매수 사건은 김영삼과 민주당의 발목을 잡는 대형 악재로 떠올랐다. 이는 민주당측이 공화당 후보 이홍섭을 1억 5천만 원에 매수한 사건이었는데, 민주당 사무총장 서석재가 5월 30일 구속되고 김영삼의 사전 공모설이 유포되면서 김영삼의 정치 생명이 끝장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용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 총재는 정부측에 코가 꿰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 총재는 민정당이 중간평가를 유보한 이후 기세 좋게 나갔으나 후보 매수 사건이 터지면서 형세가 역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이후 한국의 정치사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잖아도 제2야당 총재로 김대중에게 눌려지내는 치욕을 감수하기 어려웠던 김영삼은 이 사건으로 6공 정권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잡히자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결행하게 된다."(59)


"노태우와 김영삼의 '밀월관계'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5월 31일에 열린 노태우·김영삼의 청와대 회담이었다. 김영삼은 이 회담에서 '초당적 북방외교'에 합의했다. 김영삼은 6월 중 소련과 미국을 방문했는데, 6월 6일 소련에서 청와대가 주선해준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허담과의 회담에 응하고 이 회담에서 정부측 입장을 지지해줌으로써 3당 통합으로 나아가는 길을 밟아갔다." "김영삼은 잇따라 터진 임수경, 서경원 사건에 대해서도 노태우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1989년 8월 18일에 실시된 영등포 을구 재선거는 김영삼의 3당 통합 결심을 확실하게 굳혀주는 또다른 사건이 되었다. 공안정국으로 인해 김대중과 평민당이 위기에 처해 있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민주당 후보 이원범의 득표율은 2등으로 낙선한 평민당 후보의 득표율 30%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18.8%로 나타났기 때문이다."(61)


"1988년 12월 5일 문교부장관으로 취임한 정원식은, 취임 직후부터 사학분규를 비롯해 학원문제에 강경 진압으로 일관했다." "정원식은 학원안정 4단계 방안을 마련했는데, 89년 4월 11일 서울 동부와 남부지역 18개 대학 보직교수와 학부모 간담회에서 직접 〈학생들의 점거 농성 사태가 장기화되면 계고-임시휴업-전원유급-폐교의 단계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한 뒤, 경기대와 한림대 등에 계고 조치를 취했고, 고려대와 서울교대에는 임시휴업을 지시하기도 했다. 5·3 동의대 사건에 대한 강경 진압은 바로 이런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89년 5월 3일 새벽, 부산 동의대에서 학생들이 점거농성 중이던 도서관에 불이 나 진압하려 들어갔던 경찰관 7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알려진 5·3 동의대 사건은 학생운동 역사상 단일 대학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구속자와 제적생, 그리고 최대 형량 등의 기록을 낳은 만큼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90-1)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학생 임수경은 전대협의 대표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리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1989년 6월 21일에 서울을 출발, 도쿄와 베를린을 경유하여 6월 30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6월 30일 전대협 의장 임종석과 축전준비위원장 전문환은 한양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대협의 공식대표로 임수경을 평양 청년학생축전에 참가시키기 위해 평양으로 파견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들은 전대협의 평양축전 대표 파견이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진 불가피한 과정을 조국통일의 단심으로 이해해주길 바라며 아울러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불순한 마음도 없는 우리의 통일을 향한 평양행을 지지해 줄 것을 부탁드린다.〉 그러나 경찰은 바로 그 날 평양축전 참가 출정식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 무려 7천 5백여 명의 병력을 한양대로 진입시켜 학생 2천여 명을 강제 연행했다."(118-9)


# 1990년 9월 26일 대법원은 임수경, 문규현에게 각각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함


"89년 하반기 들어 학생운동 진영은 NL(민족해방)·PD(민중민주주의)라는 두 계열로 결집 및 분화되었다." "임수경의 방북은 NL과 PD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처음부터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 투쟁에 반대했던 PD 계열의 학생운동권은 평축 참가 투쟁이 ① 반파쇼 투쟁 도중에 깃발을 내린, 민중에 대한 반역 행위이며, ②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평축에 참가하자는 무원칙적 투쟁이자 개량주의적 통일운동이며, ③ 적이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빠진 어리석은 투쟁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전대협은 NL 노선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민족분열주의라고 반박하였다. 89년 2학기 말의 총학생회장 선거에선 NL파가 퇴조하고 PD파와 비운동권 세력이 부상해 이후 학생운동은 NL, PD, 비운동권의 3각 구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적어도 87년 이후 학생운동 정파간 갈등은 매우 치열하고 격렬했다. 분명히 과잉이었다."(128-31)


"6공 정권은 1988년 8월 1일 〈집시법 위반자의 경우 실형 3년 이하는 징집〉하던 기존의 시행령을 〈실형 1년 또는 집행유예 2년 미만을 선고받은 자〉만을 징집하는 것으로 개정했다. 6공 정권은 시행령을 개정한 지 불과 7개월만인 89년 3월 25일 공안정국을 틈타 〈실형 2년 미만을 선고받은 자는 모두 징집〉하는 것으로 오히려 '개악'해 버렸다. 더욱이 개정된 시행령에는 살인, 강도, 강간범 등 일반 사범의 경우 〈군 사고예방과 군 지휘부담을 감안하여 입영 순위를 후위로 조정한다〉는 단서를 붙여 1년 이상의 형을 받은 일반사범은 사실상 입영이 면제되게 되었는데 이는 형평의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시국사범에 대한 녹화사업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6공은 5공의 그 악명 높은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걸 한 단계 발전시킨 이른바 '학원 프락치 공작'을 유감없이 구사하였다."(146-7)


# 학원 프락치 공작 유형(김동훈)

1. 정보기관에서 선발해 조직적인 교육을 받고 경찰상황실(이른바 'CP')를 통해 활동하는 경우 : 동아대 CP사건, 부울총협 사건

2. 안기부나 경찰에 붙잡힌 운동권 학생이 회유와 협박 끝에 프락치로 전락한 경우 : 국민대 김정환 사건

3. 입대한 운동권 학생이 보안사(기무사)의 회유와 협박으로 프락치가 되는 경우 : 윤석양 이병 사건

4. 정보를 넘겨주는 댓가로 돈이나 신분보장을 받는 유급프락치 유형 : 한성대 교직원 프락치 사건, 전남대 나윤성 의경 사건

5. 범죄를 저지른 재수생에게 범죄 무마를 조건으로 학원 내 정보원 활동을 시킨 경우 : 성균관대, 한양대 프락치 의혹 사건


"신문들의 치열한 경쟁이 말해주듯이, 노 정권 하에서의 언론 민주화는 왜곡된 시장 민주화였을 뿐 근본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노 정권에서 재벌들의 신문 소유가 크게 늘어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국화약이 『경향신문』을, 롯데가 『국제신문』을, 대우가 『항도일보』(『부산매일신문』으로 개제)를, 대농이 『내외경제신문』과 『코리아헤럴드』를, 갑을이 『영남신문』을 인수하였으며, 현대가 『문화일보』를 창간하였다. 또한 재벌들은 앞다투어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문화재단을 설립하였지만 대부분 변칙 상속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였다. 재벌의 광고를 통한 언론 통제는 종합광고대행사의 계열화를 통해서 더욱 조직화되고 강화되었는데, 8대 대행사의 4대 매체 광고물량 처리액은 4대 매체 총 광고비의 40.8%에 달했다." "아울러 재벌들은 언론에 대한 영향력 증대와 더불어 정치 권력과의 통혼(通婚) 관계를 통해서도 한국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186-7)


"89년 12월 15일 청와대에서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4당대표가 모여 영수회담을 열었다. 여기서 12월 31일에 전두환의 증언을 듣고 5공 특위를 마무리짓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노태우는 백담사에 있던 전두환에게 전화를 걸어 국회에 출석해 증언해 줄 것을 설득했다." "12월 31일, 자신의 은둔지인 백담사에서 새벽에 출발한 전두환은 오전 10시부터 국회에 출석하였다. 이 날 전두환이 증인으로 출석한 국회청문회는 14시간여나 진행되었으나, 전두환의 증언 시간은 모두 합해봐야 두 시간도 채 안되었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흥분한 야당 의원들의 규탄과 이에 대한 여당 의원들의 맞대응으로 채워졌고 그래서 일곱 차례에 걸친 정회가 이루어졌다." "전두환이 퇴장한 뒤 노무현 의원은 증언대를 향해 명패를 집어던졌다. 그는 이 같은 '품위 잃은 행동'을 사과했지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증언의 내용과 저의 행위 중 어느 것이 더 비난받아야 하는지·····.〉"(193-4)


"이 당시의 중산층 의식은 상당 부분 소비 자본주의 체제의 진입으로 인한 변화에 영향을 받아 생겨난 '거품'이었다. 정권안보 차원에서 강력 추진된 '스포츠 과소비'는 제쳐놓더라도, 각종 가전제품과 백화점의 과시적 소비문화, 그리고 3대 붐(마이카, 증권투기, 부동산투기)에 대한 희망 욕구가 가세했다." "컬러 텔레비전은 이미 80년대 중반에 보유율 90%를 넘어섰고 냉장고와 세탁기의 보급도 대단히 빨랐다. 80년에 37.8%였던 냉장고 보급률은 90년에 93%를 넘어섰다. 백화점 건설 붐은 89년에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는 거의 모든 재벌들이 백화점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재벌들이 앞다투어 백화점 사업에 뛰어든 이유는 높은 현금 수익 외에도 백화점 그 자체가 엄청난 부동산이었기 때문이다." "백화점은 〈가장 적은 세금을 내면서 가장 값비싼 땅을 보유하고 또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훌륭한 재산증식 수단〉이었다."(200-1)


"30대 재벌그룹의 경우 88년 말 현재 10조원 상당의 부동산을 소유하였으며, 지가 상승에 비례해 이들 그룹에 막대한 자산 소득이 돌아갔다. 특히 삼성, 롯데 등 일부 재벌그룹들은 85년부터 88년까지 4년 사이에 총 보유 부동산의 70% 이상을 집중 매입하였다. 삼성은 이 기간 동안 기업투자 2천388억 원의 약 4배인 1조 원 상당의 부동산을 매입하여 총 보유 부동산의 74%를 차지했고, 롯데그룹은 기업투자 1천168억 원의 약 5배인 6천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사들여 88%를 차지했다. 그밖에도 기아, 금호, 두산 등이 각기 기업 투자액의 3~4배에 이르는 수천억 원을 부동산 매입에 사용하였다. 자기 돈으로 땅을 사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 다 은행에서 빌린 돈이었다." "박세길은 이렇게 말한다. 〈(권력이 미리 언질을 준) 개발이 진행된 이후 땅값이 엄청나게 뛰어오름으로써 막대한 투기 이익을 얻게 된 재벌은 당연히 그 답례로서 권력에게 상당한 자금을 바치는 게 기본 상식이다.〉"(218-9)


"1980년대는 광주학살과 더불어 극심한 호남 차별이 판을 친 시대였다. 5·6공 모두 대구·경북 중심의 이른바 TK 정권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극심했던 정부 인사에서의 호남 차별은 5공을 거치고 6공 들어서 더욱 심화되었다. 노태우는 대통령 취임 전 〈임기 중에 호남 출신 참모총장을 내겠다〉고 했던가 하면 취임 연설에서는 〈이제 지역감정은 새로운 출발의 광장에 묻자〉고 선언했지만, 호남 차별을 심화시키는 데에 골몰했다. 골몰까지 하지 않았다면, 공공성 의식이 없는 패거리주의라는 '시장 논리'에만 모든 걸 맡겨 두었다. 5공 시절 차관급 이상 관료 155명 중 43.6%인 67명이 경상도 출신(호남 출신은 9.6%)이었으며, 6공시 영남 출신은 전 각료의 48%, 차관급에서 60%에 이르렀다. 또 어느 부처를 막론하고 주요 실국장 등 요직은 대부분 대구·경북 출신이 차지했고, 특히 청와대와 검찰은 영남 출신이 거의 독점했다."(227-9)


맺는말 한국인의 '정치와의 전쟁'


"다수 한국인들은 광주학살과 호남 차별 문제를 '김대중'으로 의인화시키는 데에 공모했다. 호남인들 역시 그들의 한(恨)을 '김대중'으로 의인화하였지만, 이건 전혀 다른 문제다. 호남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현실적 방안에 주력했던 반면, 비호남 다수 한국인들에게 다급한 건 자신들도 잘 깨닫지 못하는 일종의 면책 심리였다. 그들에게 한동안 '정치와의 전쟁'은 상당 부분 '김대중과의 전쟁'이기도 했다. 비호남 다수 한국인들은 정권을 잡기 위한 김대중의 욕심과 정략을 광주학살을 저지른 신군부의 음모와 공작 수준의 것으로 폄하하고 매도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김대중의 욕심과 정략을 핑계 삼아 자신들의 군사독재 정권 지지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조갑제의 논리를 원용하자면, 김대중의 욕심과 정략은 박정희와 전두환을 보는 자신들의 눈을 '다소 맑게 해주었다'는 자기 기만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273-4)


"정의와 풍요는 결코 손에 손을 맞잡고 나아가지 않는다." "아울러 기득권은 막강한 권력과 금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건 아니다. 80년대의 불의와 모순에 순응하고 타협했던 사람들에게도 최소한 '정서적 기득권'이라는 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정서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맹목적인 당파성은 80년대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광주의 피로 얼룩진 80년대는 모든 걸 뒤틀어지게 만들어 버렸으며, 변화의 원동력이라 할 정치를 시궁창에 처넣게 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우리가 80년대에 이룬 경제적 업적과 성과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걸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이면의 고통과 희생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국민화합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전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80년대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최대의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을 제대로 깨닫는 일일 것이다."(2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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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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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대통령 직선제를 향하여 / 1986년


"직선제 개헌투쟁을 위해 뭉친 신민당과 재야단체 간의 합의가 깨진 것을 두고 임혁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주화연합은 대중동원을 통한 협상테이블을 여는 데 성공했으나 협상의 정치가 열리자마자 각기 다른 민주화 전략의 차이로 연합은 해체되었다. 이러한 민주화연합의 분열은 5·3 인천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5월 3일의 직선제 개헌추진을 위한 인천대회는 4월 30일의 타협이 이뤄지기 전에 예정된 것이었다. 타협이 이루어지자 신민당은 대회의 규모를 축소하고 대회를 정권으로부터 양보를 이끌어낸 성공을 자축하는 축제로 이끌어가려고 한 데 반해, 사회운동 세력은 신민당과 정권간의 보수대연합 움직임에 쐐기를 박기 위한 선제공격의 기회로 이용하려 하였다. 사회운동 세력은 직선제 개헌투쟁이라는 신민당 주도의 민주화를 거부하고 현정권 타도와 민중의 권력을 창출할 수 있는 민중민주헌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최대강령주의 전략을 고수했다.〉"(28)


"1986년 5월 3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의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는 바로 그런 배경을 깔고 있었다. 신민당의 집회를 1시간 앞두고 학생들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신민당이 개헌 현판식을 하기 위해 시민회관에서부터 신민당 인천시지부까지 행진할 계획이었는데, 그러한 폭력 사태로 인해 신민당 총재 이민우, 상임고문 김영삼 등은 최루탄에 범벅이 되어 시민회관 밖으로 몰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경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국의 조직적 유도와 일부 언론의 왜곡보도가 없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인천사태는 급진좌경 세력에 의한 '민중봉기'로 비춰지게 되었다.〉" "공안당국은 5·3 인천시위를 좌경용공 세력의 반정부 폭력 행위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물론 재야 세력에 대한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은 제도권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 및 학생운동 진영의 제휴를 깨뜨리고자 하는 의도였다."(28-31)


"1986년 6월 4일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학생 권인숙은 위장 취업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는 혐의로 경기도 부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5·3 인천사태 관련 수배자들의 소재를 집중 추궁하던 담당 형사 문귀동으로부터 6월 6일과 7일 두 차례에 걸쳐 성고문을 당했다." "7월 16일 검찰은 성모욕 행위는 없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전두환 정권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운동권이 마침내 성까지 혁명의 도구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역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언론에겐 보도지침을 통해 '부천서 성폭행 사건'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부천서 사건'이라고 보도할 것을 지시했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의 부도덕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언론은 인권단체와 시민단체들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하고 검찰에서 배포한 '보도 자료'와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에 따른 왜곡된 보도만을 내놓았다."(37-9)


"전두환 정권은 언론에 대한 광범위한 통제와 포섭으로도 모자라 문공부 내의 홍보조정실을 통해 각 언론사에 매일 이른바 '보도지침'을 내려보내 사실상 언론의 제작까지 전담하고자 하는 기이한 작태를 연출하였다.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문공부 내의 홍보조정실은 실제로는 청와대 정무비서실 지휘하에 있었다." "정대수는 이 보도지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지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제도언론(신문)은 취재한 뉴스의 비중이나 보도 가치에 구애됨이 없이 '절대 불가'면 기사를 주저없이 빼고, '불가'면 조금 미련을 갖다가 버리며, '가'면 안심하고 서둘러 실었다. 이같은 빈틈없는 지시와 충실한 이행과정 속에서 당시 상황은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작은 것이 큰 것으로, 큰 것이 작은 것으로' 뒤바뀌는 어이없는 대중조작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던 실로 미개 사회의 암흑을 방불케 했다.〉"(47-8)


"1986년 10월 28일 오후 1시부터 건국대 민주광장에선 전국의 29개 대학 학생 2천여 명이 모여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발족식을 열었다. 3시 20분쯤 학생들은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나카소네 일본 수상 등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때 학교 주변에 포위하고 있던 1천5백여 명의 경찰들이 불시에 최루탄을 난사하며 밀려들었다.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으로 맞섰으나 힘에 밀려 건물 안으로 피신하였고, 경찰은 건물을 에워싸고 물샐틈없는 경비를 폈다. 이런 상황이 되자 학생들은 건물 안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학교측은 학생들이 '안전한 귀가를 보장하면 자진 해산하겠다'는 입장이라며 경찰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전두환 정권은 이 요구를 묵살하고 언론을 동원해 학생들을 '친북 공산혁명분자'로 매도하였다. 학생들이 단수와 단전 그리고 초겨울의 한파를 버텨내며 농성에 돌입한 지 나흘째 되던 31일, ‘황소 31 입체작전’이라 명명한 대규모 진압작전이 펼쳐졌다."(90)


# 단일 사건으로 1290명 구속이라는 세계 기록 달성


11월 5일 돌연 발표된 "김대중의 불출마 선언은 절묘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전두환은 11월 7일에 비상조치와 계엄령을 선포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해 대선에서 이 불출마 선언은 대통령 후보 김대중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었다. 그의 정적(政敵)들이 김대중을 '거짓말 잘하는 정치인'으로 매도하는 데 이 선언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김영삼은 그런 추궁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김영삼도 85년 3월 7일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83년 단식투쟁을 통해 대통령을 하겠다는 욕심을 완전히 버렸다〉고 말했으며, 그 이후로도〈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여러 번 되풀이했다. 또 김영삼은 서독에서의 발언에서도 〈'당신이 나이도 위이고 하니 사면복권이 되면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겠다'고 얘기했으며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후 계속 불출마 발언 번복의 장본인으로 김대중만 지목되었다."(106-8)


8장 6월항쟁과 대통령 선거 / 1987년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진 후 3월 13일 하원에 전달된 정책교서에서 레이건은 '미국 정부는 친소좌익 정권의 독재자는 물론 반공친미 독재자에게도 반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요컨대, '독재정권'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한 만큼 '케이스 바이 케이스' 전술을 적용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한국에서도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점차 가열되어 동북아의 보수적인 지배구조가 흔들릴 조짐을 보이자 이른바 '보수대연합'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는 레이건 집권2기의 제3세계 정책인 친미(親美)의 범위 내에서 '민주적 변화'를 추구한다는 신개입주의의 한국적 적용이었다. 그리하여 슐츠, 시거, 솔라즈 등 국무부의 고위관리들이 수차례 한국을 방문해 전두환 정권에게 '보수대연합'을 종용하였다. 이른바 '이민우 구상'도 바로 그런 '보수대연합'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나, 이는 '국민적 민주열망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다."(138-9)


"6·10 항쟁에서도 4·19 혁명 때처럼 한 장의 사진이 큰 기여를 하였다. 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 중이던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직격탄(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동료에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 정태원에 의해 촬영되었다." "대학생들은 대학에서 출정식을 갖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도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후 6시경에는 학생과 야당의원들이 노상 규탄대회를 열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고, 가두시위를 벌이다 경찰에게 쫓기던 학생 1천여 명이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후 명동성당은 6월항쟁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이 날의 시위는 전국 514곳에서 연인원 50여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개되었는데, 경찰은 이 날의 국민대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원천봉쇄에 나섰지만, 국민들의 성난 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157-9)


"범국민적인 항쟁의 결과,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이른바 '6·29 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민정당 대표위원 노태우는 6월 29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폭탄선언'을 하였다. 전두환에게 건의 형식으로 제안된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외에 김대중 사면·복권 및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관련 사범의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기본권 신장, 언론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의 8개항을 제시했다. 당시 노태우는 광주학살에 대한 공식 사과도 포함시키려고 했지만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에 철회했다." "그건 아주 잘 꾸며진 한 편의 '쇼'였다. 6·29 선언은 전두환이 만든 각본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전두환이 직선제 수용을 결정한 뒤 노태우로 하여금 발표하도록 조치를 취해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171-2)


"12월 16일 대선을 2주일여 앞둔 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5분경, 대한항공 소속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 안다만 해역에서 공중 폭발해 추락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 비행기는 전날 밤 11시 27분(현지시각)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 아랍에미리트의 수도인 아부다비를 기착한 뒤 방콕을 향하던 중이었다. 29일 오후 2시 1분경 이 비행기는 미얀마의 뱅골만 상공인 어디스에서 방콕공항으로 〈45분 후 방콕에 도착하겠다. 비행 중 이상은 없다〉는 무선보고를 하였으나, 그로부터 4분 후에 그런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12월 1일 바레인에 머물던 용의자들은 요르단으로 탈출하려다가 위조여권이 적발되어 붙잡혔다. 이 순간 이들은 담배 필터 속에 숨겨둔 독약 앰플을 깨물었다. 이로 인해 남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지만, 여자는 바레인 여자 경찰관의 날렵한 동작으로 인해 미처 치사량을 삼키기도 전에 담배를 빼앗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204-5)


"하치마 마유미라는 가명으로 KAL 858편에 탑승, 폭발물을 설치했던 김현희에 따르면 김정일은 1987년 10월 7일 이들에게 〈88올림픽 참가 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고 친필 공작 지령을 내렸다. 그 후 두 사람은 11월 10일에 〈11월 28일 23시 30분 바그다드발 서울행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하라〉는 최종 지령을 받았다. 이들은 라디오에 시한폭탄과 액체 폭약을 몰래 숨겨 탑승해 9시간 뒤에 폭발하도록 장치한 후 기착지인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소련에 이어 중국까지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느낀 북한의 내부 국면 전환용으로 기도한 사건이었던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또 이 사건은 대통령 선거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하필이면 김현희가 서울로 이송된 날이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이었다."(207)


"1987년 7월 17일엔 김대중의 계보조직인 민권회가 '11·5 불출마 선언' 백지화를 결의함으로써 김대중의 대통령 출마가 기정사실화 되었다. 김대중은 8월 8일 민주당사에서 입당식을 갖고 고문에 취임하였다. 양김은 8월 11일 회동을 갖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209-10) "10월 27일 거행된 국민투표에서 신헌법은 93.1%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다음날 김영삼은 〈당총재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김대중에게) 경선을 제의했으나 이를 거부한 것은 국민의 뜻을 무시한 것이다〉며 자신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김대중은 10월 30일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과 함께 신당 창당을 선언하고, 11월 12일 평화민주당(평민당)의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민주당은 11월 9일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이 임시전당대회에선 전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영입돼 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었다."(214)


# 13대 대통령 선거 득표율 : 노태우 36.6%, 김영삼 28.0%, 김대중 27.1%


"87년 대선은 지역주의가 강하게 드러난 선거였다. 저절로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그건 5공 정권의 치밀한 사전 각본에 따라 부추겨진 것이었다." "후일, 『조선일보』 기자 방준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김영삼 후보의 광주 유세 때 돌멩이를 투척해 지역감정을 부추긴 사건, 당시 이 공작을 주도한 사람은 H처장(준장)이었다. 그는 보안사 내에서 '흑색 선전의 귀재'로 불리는 사람으로 80년 광주사태 때 전두환 사령관의 특명을 받고 전남도청에 있던 폭약의 뇌관을 제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H씨는 87년 대선 때 보안사 본부에서 김모 소령을 광주에 직접 내려보내 '돌멩이 투척 사건'을 지휘하도록 했다. 한 보안사 장교는 '이상하리만큼 YS를 집중 공략했었다'고 말했다.〉" "중요한 건 텔레비전이었다. 그런 폭력 사태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의 안방에 전달되었을 때 유권자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233-5)


"두말할 필요 없이 87년 대선에선 텔레비전이 큰 영향을 미쳤다. 노태우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은 비호남인으로 늦게 결정한 사람들이 많았고, 텔레비전을 정보원으로 비교적 더 많이 활용하였으며, 텔레비전의 영향은 노태우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KBS와 MBC가 오직 노태우의 이미지 메이킹만을 위해 기능했다면 문제는 덜했겠지만,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투표가 임박한 시기에 이데올로기 비판 프로와 함께 캄보디아·월남의 공산화와 필리핀의 사회 혼란을 다룬 프로를 집중 방영하였으며, 『TV 특강-민중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프로그램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방영하였다. 아니 그런 이데올로기 공세를 하는 데에만 머물렀더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이들이 (호남인을 과격·체제 전복세력으로 반복 선전하여 타지역에) 반(反)호남 정서를 유포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었다."(238-40)


9장 서울올림픽의 빛과 그림자 / 1988년


"전두환 정권하에서 전 정권의 정당화와 예찬에 가장 앞장섰으며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에도 크게 기여한 『조선일보』가 80년대에 가장 큰 성장을 했다는 건, 권언유착이 신문의 성장과 직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1980년 매출액에 있어서 『조선일보』는 161억 원으로 『동아일보』(265억 원)와 『한국일보』(217억 원)에 비해 한참 뒤처지는 신문이었다. 그러나 5공을 거치고 난 88년에 이르러 『조선일보』의 매출액은 914억 원으로 『동아일보』(885억 원)와 『한국일보』(713억 원)를 압도하게 되었다. 권언유착을 신문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 재미를 본 『조선일보』는 이후에도 권력 창출에 앞장서는 '정치 신문'으로서 가능하게 되었다." "후일 90년대까지 『조선일보』는 자사 기자 출신으로 14명의 장관을 배출할 정도로 정언(政言) 분리를 하지 않는 강한 당파성을 가진 신문이었으며, 이 나라를 정쟁(政爭)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261-3)


"7월 7일 노태우는 6공화국의 주요 외교 이념이라 할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7·7선언'의 내용 중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북한을 경쟁과 대결이라는 적대적 대상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동반자, 즉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공동번영을 모색하고, 이를 대전제로 '북방외교'를 추진함으로써 '북한과 한국의 우방들 간의 관계 개선을 적극 도우며, 동시에 한국도 중·소 등 공산국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해 가겠다'는 것이었다. 7·7 선언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88년 상반기 학생들과 재야 단체의 올림픽 공동개최 투쟁으로 인해 통일 열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노태우 정부는 공산권 국가의 올림픽 참가를 유도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즉, 7·7 선언으로 대표되는 북방외교로 공산주의 국가들의 올림픽 참여에 방해가 되는 정치적 걸림돌을 제거하겠다는 계산이었다."(281-2)


"노태우 정부는 '7·7 선언'의 후속 조치로 대북 비난 방송의 전면 중지, 통일 논의의 제한적 허용, 북한 관계 자료의 부분적 공개, 북한 외교관과의 적극적 접촉 허용, 북한과의 교역에 대비한 대북 경제조치 등을 발표하였다. 노태우는 더 나아가 8·15 경축사와 10월 18일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사상 처음 행한 유엔 연설을 통해 '남북불가침선언'을 비롯하여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군축, 남·북한 간의 교류와 협력의 증진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하였다. 그와 동시에 '동북아 6개국 평화협의회의 구성'과 '비무장지대 내 평화촌 건설' 그리고 '남·북한 무력불사용 원칙' 등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노태우의 이런 모든 선언은 '쇼'였음이 곧 드러나게 된다. 이 일련의 선언들에 고무돼 다음해 방북을 한 인사들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하면서 온 나라를 살벌한 공안정국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284)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4위를 차지한 〈올림픽은 우리 국민의 위대한 저력을 보여줘 자존심, 자부심, 미래의 가능성을 심어주고 성숙시켜 주었다. 올림픽 이후 고양될 국민의 자부심, 사회의 다양성, 민주화의 자신감은 소수 군인의 쿠데타와 극렬 좌경세력의 민중혁명을 있을 수 없게 할 것이다.〉 88년 9월 22일 『중앙일보』 창간일을 맞아 김영삼이 한 발언이다. 여론은 김영삼의 견해를 뒷받침해주었다. 올림픽 폐막 직후인 10월 4일 한국갤럽조사연구소는 '서울올림픽에 대한 여론조사'를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한국인의 95.4%가 올림픽을 잘 치렀다고 응답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한국의 이미지 개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걸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불안한 분단국'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털어냈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비수교국이었던 32개국이 참석해 외교 관계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308-9)


"88년 11월 23일 전두환 부부의 백담사 '유배'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5공 청산' 신호탄이었지만, 어찌됐건 공식적으론 전두환 정권이 청산의 대상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선언하는 의미에서 민주화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물론 언론도 어설픈 하이에나가 되어 그 분위기에 엉거주춤 편승하였다. 전두환의 백담사행을 전후로 하여 언론청문회가 개최되었다. 국회 문공위(위원장 정대철·평민당) 주관으로 11월 21, 22일, 그리고 12월 12, 13, 31일 등 5일 간에 걸쳐 열린 청문회는 신군부에 의한 80년 언론학살과 5공의 언론탄압 및 통제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일정 성과를 거두었지만 언론사주들의 '오리발 작전'으로 모든 걸 속속들이 파헤치기엔 역부족이었다." "청문회가 5공 비리를 속시원하게 밝히기에 역부족이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비리를 밝혀내야 할 청문회 의원들이 (재벌들에게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억대의 뇌물을 받았다는) 또다른 비리와 연루돼 있었기 때문이다."(3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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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2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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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충성경쟁과 마법의 주문 '86·88' / 1981년


"5공은 정치권을 떡 주무르듯이 하기 위해 '관제야당' 설립을 꿈꾸었다. 그런 음모의 일환으로 1980년 11월 12일 국보위는 10대 국회의원 835명을 정치규제 대상자로 발표했다. 이들 가운데 569명이 재심을 청구했고 그 가운데 268명이 구제됐다. 정치인들이 재심을 청구해 규제대상에서 풀린다는 건 5공에 대한 협조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군부의 이런 조치는 관제야당 창당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전두환은 1981년 1월 15일 자신을 총재로 한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창당하였으며, 이로부터 2일 뒤 유치송을 총재로 한 민주한국당, 1월 23일에는 김종철을 총재로 '공화당 이념을 계승'한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아니 정권이 야당을 창당하다니! 그러나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민한당과 국민당은 '관제야당'이었기 때문에, 정가에서는 '1대대(민정당) 2중대(민한당) 3소대(국민당)'이라는 말이 떠돌았다."(17)


"광주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정권은 피로 얼룩진 정권 이미지에 부드러운 가면을 씌우고 국민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각종 화려한 이베트와 조치를 양산해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5일간 열린 '국풍 81'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5공화국의 태평성대'를 선전하기 위한 대대적인 대중조작 이벤트였다. 일본의 극우에 심취한 허문도가 일본의 가미카제 정신을 본따 이름을 붙이고 적극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국풍'(國風)이었다. 그 정신을 상징하는, 유니폼을 입은 젊은이들의 행렬이나 배의 노를 합심해 젓는 그림 등으로 모자이크된 포스터가 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어용화된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한 이 행사는 행사장인 여의도를 통행금지까지 해제시켜가면서 유사 이래 가장 거대한 '놀자판'으로 만들었다. 아니 '난장판'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48-9)


"서울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개최도시로 선정된 직후부터, 전두환정권에게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은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정치 그 자체였다. 아니 '전가의 보도'였다. '86· 88'은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를 보도한 『조선일보』 81년 10월 2일자가 주장했듯이, 올림픽은 '민족우수성 과시, 국제적 위치 입증, 세계 속의 한국부각'의 기회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조치들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후일(86년) 『말』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86은 88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소위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86·88'은 현정권이 통치명분으로 내세운 알파요 오메가였다. 이 야릇한 관제 조어(造語)는 관제 매스컴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선전되면서 대중세뇌의 핵으로 등장하여 대중을 그야말로 '입만 벙긋하면 86·88'을 읊조리는 백치와 같은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65)


"전두환 정권은 대학 내에 상주해온 정보요원에 의해 문제학생으로 지목되었으나 법으로 걸 만한 뚜렷한 혐의가 없던 학생, 시위현장에서 붙잡힌 단순가담 학생들을 경찰서로 끌고가 조사한 다음, 곧바로 군대에 입영시켰다. 신체검사를 통하여 신체상의 결격사유 학생들마저 문제학생으로 낙인 찍혔으면 입영시켰으며, 입대할 수 없는 가정환경을 가진 학생들도 입영시켰다. 이들 강제징집자들은 '순수학적변동자'라는 붉은 낙인이 신상카드에 찍혀서 군 수사기관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돼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제대를 앞둔 강제징집자들에겐 '녹화사업'이라는 가공할 만한 탄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물을 빼고 푸른 물을 들이는 순화작업'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심사를 통해 활용가치가 있다고 생각될 때는 퇴계로의 진양상가 분실에서 교육을 시킨 뒤 대학가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도록 했다."(70-2)


"녹화사업에 따라 강제징집자들은 자신들의 정신적인 성장과정에 초점을 맞춘 방대한 분량의 자술서를 작성하고, 이를 통해 의식화의 정도를 측정받으며, 이후 체제를 긍정하도록 보름에서 두 달 간 이른바 '역의식화' 교육을 받게 되었다. 더욱 악랄한 것은 보안사가 이 작업 이후 그러한 교육성과의 검증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른바 '프락치' 임무를 맡기는 것이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녹화사업과 학원프락치 공작은 녹화사업으로 인해 사망자가 잇달아 발생하자 84년 3월에 열린 제적생과 해직근로자를 위한 기도회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것은 곧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는데, 결국 정부는 여론에 밀려 84년 9월 '소요관련 대학생 조기입영제'를 폐지하고 녹화사업을 전담했던 보안사 3처5과를 해체하고 사업을 공식 중단했다. 그러나 녹화사업과 학원프락치 공작은 6공정부에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72-3)


3장 밤의 자유와 프로야구에 취해 / 1982년


"1945년 9월 7일 미군정 치하에서 미군사령관 하지의 군정포고 1호로 시작된 통행금지가 그로부터 36년만인 1982년 1월 5일 밤 12시를 기해 전방 접경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해제되었다.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자, 국민들은 해방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해방감을 즐기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자정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며, 야간통금에 구애받지 않았던 경찰, 군인, 기자들의 특권이 사라졌다. 보통사람들의 입장에선 참으로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1년에 단 두 번 통행금지가 해제된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와 12월 31일 제야(除夜)였다. 이 때만 되면 사람들은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통행금지 해제는 1년 365일의 '크리스마스화' 또는 '제야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와 같았으니, 통금이 해제되었을 때 사람들이 느낀 흥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83-5) 


"통금해제가 가져다준 해방감은 민주화 쪽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통금이 해제된 후,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건 본격적인 밤문화와 성적 욕망의 배설구들이었다."(87-8) "그랬다. 많은 사람들에게 해방감은 꼭 정치적 해방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치적 자유에 대한 억압적인 통제와 탄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런 해방감의 제공은 필수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탱크로 광주를 깔아뭉개며 등장한 전두환정권은 폭압과 자유화라는 양날의 정책을 썼다. 교복과 통행금지 폐지 그리고 두발 자유화는 전두환정권의 선물이다. 충무로에 대한 전두환정권의 선물은 에로영화에 대한 검열 완화였다. ····· 당시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낮에는 전두환의 폭압정치에 맞서 돌을 던지고 밤에는 전두환의 자유화정책에 발맞춰 싸구려 에로영화를 보며 킬킬댔던 것이다.〉"(90-1)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정열을, 온 국민에게는 건전한 여가선용을!〉 이런 슬로건을 내세운 프로야구가 82년 3월 23일 출범했다. 5공이 '스포츠공화국'임을 입증하겠다는 듯 올림픽 유치와 더불어 야심작으로 내놓은 작품이었다. 이미 3일 전인 3월 20일, 5공은 체육부를 신설하고 장관에 5공의 제2인자라 할 노태우, 차관에 이영호를 임명하였다.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전두환의 시구로 삼성과 MBC의 경기로 첫발을 뗀 프로야구는 개막전부터 관중석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프로야구 출범이 전두환의 지엄한 명령이긴 했지만, 재원마련이 문제였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우병규와 마산상고 동기이던 전 MBC 해설위원 이호헌은 우병규로부터 프로야구 출범안을 문의받고, 정부가 돈 한푼 들이지 않은 채 프로야구를 출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기업들이 야구단 운영을 맡는 방법이었다."(104-5)


4장 '땡전뉴스'가 대변한 '전두환 공화국' / 1983년


"240명의 승객과 29명의 승무원 등 모두 269명(미국인 51명, 일본인 28명 포함)을 태우고 뉴욕에서 김포로 오던 대한항공(KAL) 정기여객기 007편은 중간 귀착지인 앵커리지 공항을 8월 31일 밤 9시 58분에 이륙한 직후부터 조금씩 우측(북쪽)으로 항로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KAL 007기는 소련영공을 침범해 세 시간 가까이 비행하다 소련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에선 어떻게 받아들여졌던가? 놀랍게도 이 사건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에겐 엄청난 행운으로 작용했다. 레이건이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강조한 바 있는 국가안보상의 '위기'가 현실로 입증된 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KAL기 격추 이전 MX미사일과 빅아이(BIGEYE)라고 하는 독가스 무기의 생산에 대한 미 의회의 견해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KAL기 격추사건은 미 의회의 반대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핵무기 감축마저도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152-5)


"이 비극적인 사건은 엉뚱하게도 5공치하에서 방송이 얼마나 권력의 주구로 유린됐는지를 웅변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자국민 수백명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인데도 그게 톱뉴스가 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5공치하에서 신문과 방송은 5공정권 홍보와 미화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런 일에 신문에게 선두자리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방송사들의 맹활약은 이른바 '땡전 뉴스'(또는 '뚜뚜전 뉴스')로 나타났다." "〈유린된 방송을 상징하는 사건 중의 하나를 살펴보면, 방송들은 83년 KAL기 실종 뉴스와 대통령 동정 중 어느 것을 톱뉴스로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결국 한 방송사에서는 뚜뚜··· 하는 신호음에 뒤이어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 ·····' 하고 뉴스를 시작하고 말았다. 그 TV 화면에 전씨가 서울 어느 거리에서 빗자루를 들고 환히 웃으며 조기 청소를 하는 모습이 비쳤다. 뉴스시간에 뉴스는 뒤로 밀리고 권력이 판을 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156-7)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에서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애초에 17박 18일로 계획되었던 전두환의 서남아 및 대양주 순방길에는 인도와 호주, 뉴질랜드 등 3개국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판에 미얀마가 추가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미얀마 방문은 외무부가 아닌 다른 정부기관의 지시에 의해 추가되고 준비되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미얀마는 여러모로 남한의 대통령이 방문할 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비록 남북한 동시수교를 하고 있었지만, 남한과는 별다른 거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쪽에 편향된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미얀마 순방계획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당시 5공의 핵심부가 미얀마의 통치체제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었다고 증언했다. 그 통치체제란 바로 『정권교체준비연구』에 나타난 섭정식 영구집권체제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이 바로 미얀마체제였던 것이다."(163)


"1983년 12월 21일 전두환정권은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른바 유화(宥和)정책이었다." "학원자율화 조치는 우선 당장 학원에 상주하던 경찰병력이 철수하는 가시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100명 가까운 해직교수와 1천3백여 명의 시국관련 제적생을 복직, 복학시켜줌으로써 사람들을 적지않이 헷갈리게 했다. 전두환 정권의 준비도 제법 치밀했다. 전정권의 지시를 받은 대학은 학생선도위원회와 홍보위원회를 설치하여 학생시위에 대처키로 했다." 그러나 모든 게 전정권의 뜻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전국적인 학생조직이 결성되고 "대학에 자율적인 학생회가 부활하면서 광주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광주문제는 지하유인물 형식이나, 구전형식으로만 전해졌었다. 그러다가 84년 학생회가 부활하면서 보다 체계적이고 시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광주민주화운동 알리기에 나선 것이다."(171-3)


5장 저항의 불꽃은 타오르고 / 1984년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노동조건을 개선해보려고 애쓰기는커녕 오히려 대학출신의 노동자 및 민주노조 운동 경력이 있는 운동가들을 노동현장에서 쫓아낸다는 목적 아래 84년부터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각 단위사업장에 배포했다. 이 '블랙리스트'는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 노동부, 국가정보기관이 힘을 합해 작성한 것으로서, 125개 사업장의 해고자 681명, 복직자 60명, 재취업자 57명에 대한 신상명세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조사, 정리한 것이었다 후일(87년 10월 27일) 전국 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와 인천지역 해고노동자협의회가 공개한 또다른 '블랙리스트'에는 78년의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124명과 태창섬유, YH무역 등에서 해고된 노동자 1662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 '블랙리스트'로 인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취업할 수 없었으며, 사업장에서는 불법적인 해고가 자행되었다."(182)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는 83년 황지우, 김정환, 김사인 등이 꾸려가고 있던 동인지 『시와 경제』 2호에 〈시다의 꿈〉, 〈하늘〉, 〈그리움〉 등 총 6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박노해의 등장에 대해 최재봉은 이렇게 말한다. 〈박노해의 노동시들은 특히 민중문학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시를 접한 많은 지식인 문인들은 어쩔 수 없는 위축감을 맛보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체험의 직접성이 가져온 충격이자 위축이었다. 채광석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민중주의자들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저주하면서 노동자계급에의 복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반드시 그들과 같은 견해를 지니지 않은 이들일지라도 지식인문학의 한계와 위선에 대한 반성은 시대의 유행과도 같았다.〉"(205-6)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나온 지 한 달 후인 1984년 10월엔 이문열의 『영웅시대』가 나왔다. 박노해는 노동자들의 한을 토로했던 반면, 이문열은 '선진조국'과 '번영의 조국'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다."(210)


6장 탄압과 고문의 광기 속에서 / 1985년


"양 김씨는 2·12 총선을 불과 20여일 앞둔 1985년 1월 18일 창당대회를 열고 신민당(신한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선거 4일 전에는 미국에 사실상 망명중이던 김대중이 2년 만에 귀국하였다. 신민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 '국정감사권 부활'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언론기본법 폐지 및 노동관계법 개폐' 등의 선거공약을 확정하고 창당 25일 만에 총선에 뛰어들었다. 이 선거에 대해 임혁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월 12일의 총선은 사회운동세력들의 전략적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일단 선거유세가 시작되자마자 유세장은 정권에 의해서 금기되어왔던 언어가 분출하는 공간으로 화하였다. 집권자의 광주학살 관련, 영부인의 금융스캔들 관련 사실이 공개적으로 신당후보의 입에서 튀어나왔고, 기존의 충성스런 야당들은 '1중대, 2중대, 3중대'라는 언어로 비하되었다. 선거공간은 반대세력의 언술의 경계를 넓혀주었고, 2·12 총선을 개별 국회의원을 뽑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에 대한 국민투표로 변모시켰다.〉"(223)


"2·12 총선은 11대 때의 78.4%를 훨씬 상회하는 84.2%의 높은 투표율을 보이면서 〈5·16 이후 최대 투표율〉이라는 기록을 남긴 가운데 신민당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신민당이 관제야당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함으로써 민한당 의원들은 대거 신민당에 입당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신민당은 5월 9일 민한당 부총재 이태구의 입당으로 헌정 이후 최대 의석인 103석을 확보하여 거대 야당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선거 결과에 민정당만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게 아니었다. 더 큰 충격을 받은 건 신군부 중심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민주화로 기울고 있었다. 2·12 총선 후 그간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로 갈라져 있던 사회운동의 통합이 급진전되어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되었으며, 1985년 하반기부터 민통련과 신민당은 광범위한 국민 대중의 지지와 참여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개헌투쟁에 임하게 되었다."(224-5)


"2·12 총선에서 분 신민당 바람엔 학생들의 적극적인 총선참여도 크게 기여하였다." "대학생들은 2·12 총선에 영향을 미친 동시에 역으로 2·12 총선결과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2·12 총선 후 대학가엔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선거열풍이 몰아쳤는데, 이에 대해 이경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총학생회 구성의 하이라이트는 후보자들의 합동유세였다. 후보들은 '강력한 민주투쟁'과 '학내문제의 우선해결'로 정견이 갈라졌으나 대체로 강력한 민주투쟁론자들이 당선되었다. 그것은 학원의 민주화투쟁이 격렬해지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학생세력 연합도 모색되었다. (···) 4월 17일 고려대에서 전학련(전국학생총연합) 결성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대통령의 방미성토대회를 갖고 '현정권에 보내는 경고장'을 채택하며 '매국방미 결사반대' '수입개방 결사반대' '경제종속 결사반대' '군부독재 퇴진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횃불시위를 벌였다.〉"(231-2)


"전두환은 정치헌금을 뻔뻔하게 받는 걸로 유명했는데, 재계 순위 6위이던 국제그룹 해체 이후 재계에 공포 분위기가 감돌면서 정치헌금이 잘 걷혔다." "그렇게 돈을 뜯긴 재벌들은 노동자들로부터 그 몫을 짜내야 했고 노동자들이 저항하면 그 때엔 돈 받은 정권이 나서서 해결해주었다. 5공은 '조폭정권'이었던 것이다. 전두환의 공격적인 정치자금 수금은 사실상 자신의 평생집권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 10월 아웅산사건 때 희생된 유족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추진된 일해재단이 전두환의 퇴임 후 위상과 관련된 연구소로 탈바꿈한 사실 자체가 그걸 잘 말해준다." "국제그룹 해체의 의미에 대해 김호진은 이렇게 분석한다. 〈자본가계급은 이러한 전(全)정권의 강압정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정부정책에 순응하고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것은 곧 재벌이 전정권과 지배연합을 형성하고 정경유착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246-8)


"1985년 5월부터 광주문제는 민주화세력의 본격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성명서를 낸 데 이어 5월 23일 12시 서울대 학생 함운경을 포함한 73명의 학생들은 미문화원 2층 도서관을 72시간 동안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이는 82년 3월 18일 문부식을 비롯한 부산 고신대생들에 의해 이뤄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에 뒤이은 것으로 광주학살을 외면하고 신군부를 지지한 미국에 대한 항거이자 응징이었다."(259) "이 점거사건은 당사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두환정권은 이 기회에 여론으로부터 학생운동을 격리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 사건을 언론을 통하여 크게 부각시켰지만, 오히려 이러한 언론의 대서특필은 국민들로 하여금 광주학살과 미국이 관련 가능성을 깨닫게 하는 역반응으로 나타났다. 이는 단순히 학생들에게만 반향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미국문제'를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262)


"1984년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노동운동은 1985년 4월 10일 '노동운동탄압 저지투쟁위원회'(노투)가 결성돼 지역단위 투쟁조직의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통해서 지역적 연대와 정치투쟁으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6월 1일에는 '구로지역 노조민주화추진연합'(구민연)이 결성되었다. 그러한 노동운동의 성과를 근거로 85년 6월 24일부터 일주일에 걸쳐 이른바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다. 구로동맹파업은 1950년대 이후 처음으로 시도된 본격적인 동맹파업이었다. 이 동맹파업은 개별기업 단위의 노동조합주의, 조직보존주의를 뛰어넘는 연대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초보적이기는 하나 정치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대중 스스로의 조직적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노동운동이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8월 25일에는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창립되면서 노동운동은 학생운동과 긴밀하게 결합하기 시작했다."(283)


"1985년 10월 29일 5공정권은 학내외의 각종 시위와 위장취업 등 노사분규의 배후에 좌경용공학생들의 지하단체인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라는 조직이 있음을 밝혀냈으며, 이 단체의 위원장 문용식(26, 서울대 국사학과 졸)과 문용식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38,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등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흔히 '깃발사건'(혹은 민추위 사건)으로 불려져 왔는데, 이는 민추위가 내세운 '노학연대'로 인해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5공정권이 급조해낸 것이었다. 체포된 학생들은 고문을 당했으며, 이후에도 민청련이 배후 조종세력으로 몰려 김근태 등이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서울대생 박종철은 이 사건의 마지막 수배자인 박종운을 하숙집에 재워줬다는 이유로 물고문을 받다가 숨지는 비극을 겪게 된다."(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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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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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 했나? / 1980년


"1980년대의 한국에서 '중산층'의 체제친화적인 보수성에 심리적 면죄부로 작용한 건 바로 '86·88'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담론이었다. 물론 87년 6월항쟁이 잘 보여주었듯이, '중산층'이 독재체제에 대해 무한대의 친화성과 인내심을 발휘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몸에 밴 부정부패와의 친화성이 '하층'에까지 전염된 탓에 한국인들은 '이기적 탐욕'을 자극하는 선전·선동에 매우 취약하였던 바, 바로 이 지점을 독재체제의 지역분열주의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6·25 시절 자동차에 탄 미군에게 껌과 초콜릿을 구걸했던 한국의 아이들이 커서 자동차를 만들어 미국에 팔아먹었다는 건 (정주영을 민중의 영웅으로 추켜세운) 김동길을 포함한 다수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살 떨리는 감격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광주'는 잊혀졌으면 하고 바라는 '과거지향적 갈등'이었을 뿐이고, 88올림픽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영광은 '미래지향적 비전'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23-4)


"신군부가 시도한 대대적인 여론조작과 관련해 우리가 가장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은 12·12쿠데타세력과 5·16쿠데타세력의 차이점이다. 12·12쿠데타는 5·16쿠데타로부터 18년이나 지난 시점에 일어났다. 18년 동안에 많은 변화를 겪은 한국인들이 또다시 일개 육군 소장이 집권하는 걸 반길 리는 만무했다. 무엇보다도 〈1960년대처럼 국민이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어서 경제성장이라는 '기능적 필수조건'이 다른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던 사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군부에겐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치밀한 '음모와 공작'이 필요했다." "전두환의 부하들은 전두환의 리더십을 미화하지만, 과거 그 어떤 군인도 전두환만큼 사조직 결성과 유지에 공을 들이진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더 공정한 평가가 될 것이다. 곧이어 발생할 '광주학살'이라는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도 바로 그런 사조직의 기이한 단결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55-6)


"신군부가 추진한 '음모와 공작'의 핵심은 여론조작이었다." "(언론이 자신들의 '애완견이자 보호견'이 되어주길 원했던) 신군부는 이미 1980년 3월 중순 이전에 보안사 언론대책반을 통해 이른바 'K(king)공작'을 입안하였다. 'K-공작'은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여론조작 방안으로 보안사의 권정달 정보처장, 정도영 보안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과 허화평 사령관비서실장 등 이른바 전두환그룹의 '5인방'이 주도하였다. K-공작의 큰 시나리오는 3김을 민주정치세력, 신군부를 안정구축세력으로 차별화하여 '선안정 이론'을 확산시키고 언론계 간부들의 성향을 분석하여 협조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한다는 두 가지로 구성돼 있었다. 이에 따라 보안사팀은 연일 계속되던 대학생 시위와 노동쟁의를 '혼란'으로 몰아붙였으며 3김의 대결양상을 '구태의연한 정치작태' '대통령병에 사로잡힌 추악한 파벌싸움'으로 비춰지도록 언론 논조를 유도하였다."(57-8)


"당시의 유화 국면 속에서 언론 검열은 완화되기 시작했고, 휴교령이 내려졌던 대학도 3월 1일을 기해 다시 문을 열었다. 박정희 시절 축출되었던 교수와 학생들이 다시 학원으로 돌아왔으며, 학생들에게는 거리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학내에서의 비폭력 시위와 자치권 일부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권력장악을 위한 신군부의 준비는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80년 2월부터 특전사는 '충정명령'이라는 강력한 폭동진압 훈련에 돌입했다. 말이 좋아 훈련이지, 이건 '인간폭탄 만들기' 훈련이었다. 영외 거주는 말할 것도 없고 외출과 외박이 전면금지된 상황에서 전 장병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가혹한 지옥훈련을 받으면서 까닭 모를 적개심과 분노를 키워가고 있었다. 병행된 정신교육 훈련은 장병들이 그래야만할 이유를 제공했다. 그 주요 내용은 〈시위 군중의 배후에는 빨갱이가 도사리고 있다.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때리고 짓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64)


"계엄사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령 10호에 의거해 18일 새벽부터 정치활동이 전면 중단되었고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도 금지되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18일 새벽 2시경 무장한 제33사단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사실상 헌정 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전두환은 미리 준비한 치밀한 전국계엄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보안사령부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기 이전인 16일 전군 보안부대 수사과장회의를 소집해, 17일 24시를 기해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다는 사실과 검거할 블랙리스트 8백여 명을 통보했다. 5월 17일 수배령이 떨어진 사람 가운데 6백여 명이 체포되었고, 신문과 방송은 수배자들의 명단과 죄목을 경쟁하듯 쏟아냈다. 신군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의 조작을 위해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하였다." "이들에게는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김대중과의 관계를 대라면서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115-6)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조작과 관련해 손호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두 야당지도자 중 김영삼 신민당 당수는 구속 대상에 제외됐고 김대중만이 구속됐다는 사실이다. 신군부는 정권장악의 마지막 장애물인 민중세력을 공격, 세칭 '시민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민주화진영을 분열시켜 그 힘을 약화시킬 필요성이 있었고 이를 위해 재야 민중세력과 좀더 직접적인 연계를 유지해왔고 박정희정권의 오랜 정치공작에 따라 '급진적' 이미지가 국민들 사이에 유포되어 있으며 지역기반 역시 소외된 호남인 김대중을 내란혐의의 구속대상으로 삼는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신군부는 광주·호남민들의 강한 반발이라는 효과를 초래한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의 역사를 내다보고 말한다면, 신군부가 저지른 가장 큰 범죄행위는 바로 이처럼 지역분열주의 공작을 펼쳤다는 점이었다."(118-9)


"계엄령 선포 후, 세상은 쥐죽은듯 조용해졌지만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신군부는 특전사 소속 7여단과 11여단 병력을 광주로 내려보냈다. 이른바 '충정훈련'으로 이미 '인간폭탄'이 돼 있는 병력이었다. 5월 17일 오후 광주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에선 공수부대병력 1천여 명이 작전개시 준비를 마치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명령은 '화려한 휴가'였다. 그러나 그 '휴가'는 차마 필설로 다하기 힘든 '인간사냥'을 위한 것이었다." "밤 11시 40분, 문공장관 이규현은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계엄확대가 발표되고 두 시간이 지난 후,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에 특전사가 투입되었다." "5월 18일 오전 10시, 휴교령이 내린 상태에서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든 학생 1백여 명과 무장 공수대원이 대치하였다." "오후 3시에는 공용터미널에 공수특전단이 투입되었다."(120-3)


"신군부는 광주에서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인 후에 그 진실을 은페하기 위한 공작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시도된 건 붙잡힌 광주시민군들을 '비열한 짐승'으로 만들어 그들의 저항의지, 아니 복수욕을 완전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최정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엄사는 27일 새벽, 투항한 시민군들을 체포하여 버스 4대에 실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 갔다. 끌고 가는 과정이나 그곳에서 계엄사가 시도한 일은, 모진 구타와 고문 그리고 배고픔으로 시민들이 투사가 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생명을 구걸하게 하는 비열한 짐승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엄청나게 적은 양의 식사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은 먹이를 구하는 동물에 불과하다는 자기확신을 심으려 했고 살인적인 구타는 그들에게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배신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연출한 '지상의 지옥'이야말로 광주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저지른 범죄행위였다."(177-8)


"광주학살 후, 전두환은 광주학살을 은폐하고 왜곡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미국 국방정보국이 작성한 1980년 6월 25일자 비밀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두환은 정부조사관들에게 학생이나 민간인들이 군인을 구타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필름)을 찾아낼 것을 명령했음. 이 사진을 구하려는 것은 『타임』, 『뉴스위크』 등 외신이, 저항하는 민간인에 대해 군인들(대부분 특전사 병력)이 잔혹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도한 것을 상쇄시키려는 의도임. 또한 그러한 물증은 반정부활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음.〉" "광주의 진실에 대해 티끌만큼이라도 말하는 건 모두 유언비어 유포로 체포되었고, 모든 사람은 오직 신군부의 발표만을 앵무새처럼 되뇌어야만 했다. 출판물 탄압은 80년대 내내 상시적으로 자행되었다. 5공은 분서갱유라 해도 좋을 정도로 '표현의 자유'에 억압적인 족쇄를 채움으로써 국민이 광주의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게끔 하였다."(181)


"언론은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모든 열성을 다했듯이,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 만들기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KBS는 8월 2일 『김대중과 한민통』이라는 특집 프로그램까지 내보냈는데, 이 프로그램은 김대중을 거의 간첩 수준으로 묘사했다. 차라리 간첩 수준이기만 했더라면 좋았겠지만(나중에 진실규명이 될 수 있으므로) 그것만도 아니었다. 원색적인 표현을 동원해 김대중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인간이며 이중인격자라는 인신공격까지 가하였다. 방송에 뒤질 신문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일보』와 더불어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경향신문』의 9월 11일자 특집기사는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변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서 친북괴 활동까지〉라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당시 모든 언론이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 조작에 혈안이 돼 있었다."(208-9)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전두환 단일후보를 총투표자 2525명 중 2524표의 찬성과 1표의 무효표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전두환은 9월 1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청와대에 입성했는데, 이는 12·12 쿠데타 이후 164일 만의 일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였던 것이다. 대통령 전두환은 9월 29일 개헌심사위원회를 통해 선거인단에 의해 대통령 간선제와 대통령의 7년 단임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만들어 공고했고, 10월 22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했다. 새 헌법안은 한국 투표사상 최고인 95.5%의 투표율과 91.6%의 찬성률을 기록하면서 10월 27일 공포되었다." "제8차 개정헌법에 따라 전두환은 국회를 해산했고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그 기능을 대신하도록 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81명은 모두 전두환이 임명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제11대 국회가 개원하기까지 156일 동안 215건의 안건을 접수하여 100% 가결했다."(233-6)


"1980년 신군부가 일련의 가혹한 조치들을 통해 언론을 완전히 장악한 정도를 넘어서 수족처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된 건, 5공의 '파시즘 체제'에 부드러운 가면을 씌어준 효과를 내게 되었다는 걸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70년대를 겪은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탄압하는 권력, 탄압받는 언론'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1980년 들어 신군부가 언론장악을 위해 저지른 일련의 조치들도 국민의 눈에는 '탄압받는 언론'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물론 국민들은 언론이 신군부의 강압으로 보도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는 건 알고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인식이 곧 신군부와 언론의 유착관계에 대한 인식의 수준으로까지 나아간 건 아니었다." "언론이 사실상 5공 파시즘 체제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여론조작을 왕성하게 전개하면서 최소한 국민의 '수동적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애를 썼기 때문에 5공 파시즘의 작동 방식이 비교적 부드러울 수 있었던 것이다."(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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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병자들 -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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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어떻게'라는 물음은 특정한 결과를 낳은 상호작용의 연쇄를 면밀히 살펴보도록 이끈다. 그에 반해 '왜'라는 물음은 제국주의, 민족주의, 무장, 동맹, 거액 금융거래, 국가의 명예 관념, 동원의 역학 같은 범주별 원인遠因들을 조사하도록 이끈다. '왜' 접근법은 특정한 분석적 명확성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실상을 왜곡해 허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허상 안에서는 인과적 압력이 꾸준히 증대하고, 사태를 내리누르는 요인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정치적 행위자들이 그들의 통제 바깥에 있는 오래된 세력들의 한낱 실행자가 된다. 그에 반해 이 책에는 행위능력으로 가득하다. 핵심의사결정자들(국왕들, 황제들, 외무장관들, 대사들, 군 사령관들, 그외 수많은 관료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계산을 해가면서 위험을 향해 나아갔다. 전쟁 발발은 어느 정도 자기반성을 할 줄 알았고, 다양한 선택지를 인정했으며, 입수 가능한 최선의 정보를 바탕으로 최선의 판단을 내린 전쟁 행위자들의 연쇄 결정의 정점이었다."(31-2)


1부 사라예보로 가는 길


1장 세르비아의 유령들


"1903년 6월 11일 오브레노비치 국왕 시해는 세르비아 정치사에서 새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는 1804년 민중봉기를 이끌어 세르비아에서 오스만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1813년 오스만이 반격에 나서자 오스트리아로 피신해야 했다. 2년 뒤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이끄는 두 번째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유연한 정치적 수완가인 밀로시는 오스만 당국과 협상해 세르비아의 공국 지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망명지에서 귀국한 카라조르제비치는 오스만의 묵인 아래 오브레노비치의 명에 따라 암살되었다. 주요 정적을 제거한 오브레노비치는 오스만으로부터 세르비아 공 칭호를 받았다." "경쟁하는 두 왕가,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 사이에 노출된 위치, 소규모 자작농들이 지배하는 유달리 무례한 정치문화, 이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탓에 세르비아 군주정에서는 정쟁이 끊이지 않았다. 19세기 세르비아 통치자들 가운데 재위 중에 자연사한 이는 놀랄 만큼 적다."(42-3)


새로 즉위한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가 입헌군주제를 천명하면서 "세르비아왕국은 이제 진정한 의회제 정치체, 즉 군주가 존재하되 통치하지 않는 정치체가 되었다." "정당은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언론은 오브레노비치 가문 치하에서 규범이었던 검열에서 마침내 벗어났다. 정치권은 대중의 요구에 더 부응하고 여론에 더 호응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세르비아는 정치적 실존 면에서 새 시대의 문턱에 있었다. 그러나 1903년 쿠데타로 해묵은 문제들이 해소되기도 했지만, 장차 1914년 사태를 무겁게 내리누를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왕가 살해를 위해 결성된 음모단 네트워크가 차츰 와해되기는커녕 세르비아 정치와 공적 생활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남았다." "새 정권이 음모단의 유혈사태에 기대어 존속한다는 사실은 음모단 네트워크가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맞물려 공개 비판을 어렵게 만들었다."(54-5)


"야심차고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못하는 세르비아 경제에서는 군대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사실 역시 민간 당국이 군 지휘구조의 도전에 취약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세르비아 정부에는 19세기 다른 나라들에서 의회제를 지탱한 대규모 지식계급과의 유기적 연계마저 없었다. 이런 정부에게 민족주의는 강력한 정치적 도구이자 문화적 힘이었다. 되찾지 못한 세르비아 땅을 병합하려는 세르비아인들의 열의는 민중문화에 스며든 신화적 열망뿐 아니라 농지 면적과 소출이 줄어들어 살기 힘들어진 농민층의 토지 갈등에도 기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의 경제적 곤경은 빈의 가혹한 관세와 목조르기 탓이라는 정부의 주장(아무리 미심쩍더라도)에 국민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지 않을 리 없었다. 외세의 속박 탓에 베오그라드 정부는 바다로 진출하여 후진성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하구를 확보하는 데 집착하게 되었다."(82-3)


"1908~1909년 겨울 모든 열강은 베오그라드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편입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단념하고 불가피한 결과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세르비아 통일이라는 이념에 얽매인) 온건파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보였던 쟁점은 국가가 당면한 곤경을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는 문제 하나뿐이었다. 온건파라 해도 민족주의 프로그램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다(부인하려 들지도 않았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논쟁의 어휘를 택한 극단파의 수사법이 언제나 유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온건파는 극단파의 언어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외부 관찰자는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 어떤 입장차가 있는지 분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상과 달리 겉보기에 그들은 견고한 만장일치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정치문화의 이 위험한 역학이 훗날 1914년 6월과 7월에 베오그라드에 다시 출몰할 터였다."(88-9)


"(1차 발칸전쟁 이후) 베오그라드가 새로 획득한 영토에 살던 대다수 사람들은 세르비아의 통치가 시작되자 괴롭힘과 억압을 당했다." "정복된 지역들은 한동안 식민지의 성격을 띠었다. 정부는 새 영토의 문화적 수준이 너무 낮아서 자유를 줄 경우 나라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이유로 이런 결정을 정당화했다. 실제로 정부의 주요 관심사는 여러 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비세르비아인들을 민족정책에서 배제하는 것이었다." "세르비아에게 이것은 두 종류의 전쟁이었다. 다시 말해 정규군 부대만이 아니라 이 시절에 아주 흔했던 빨치산 무리와 자유계약 전사까지 싸우는 전쟁이었다. 새로 획득한 지역들에서 공식 당국과 비공식 집단의 결탁은 소름 끼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학교와 목욕탕, 모스크 같은 오스만 건물들이 숱하게 파괴되었다." "1913년 10월과 11월에 영국 부영사들은 병합 지역에서 세르비아인들이 자행하는 조직적인 위협, 자의적인 구금, 구타, 강간, 마을 방화, 학살을 보고했다."(98-9)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 표적이 된 이유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내 슬라브족 소수집단에게 어떤 적의를 보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암살한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말대로 〈향후 군주로서 그가 모종의 개혁을 추진하여 우리의 통일을 방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영토회복주의자들 중 다수는 (슬라브족의 땅에 자치권을 더 많이 주는) 이 개혁안이 영토회복주의 계획에 치명적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스스로를 개혁하여 빈에서 연방제 노선을 따라 통치하는 삼중 국가로 변모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래서 이를테면 자그레브가 부다페스트와 동등한 지위를 누리는 수도가 된다면, 세르비아는 남슬라브족의 피에몬테라는 선봉 역할을 빼앗길 위험이 있었다. 요컨대 대공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테러 운동들의 논리 중 변치 않는 한 갈래, 즉 명백한 적과 강경파보다 개혁파 및 온건파를 더 우려하는 갈래를 예증한다."(106-7)


"(대공 암살 실행자로 뽑힌 자들은) 근대 테러 운동들이 먹이로 삼은, 이상은 넘치고 경험은 부족한 젊은이 특유의 바로 그 음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성과 연애를 하고 싶어하면서도 젊은 여성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족주의 시詩와 영토회복주의 신문 및 팸플릿을 읽었다. 청년들은 세르비아 민족의 고통에 대해 오랫동안 숙고했고, 세르비아인을 뺀 모두가 그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비천한 동포들의 수모와 치욕을 그들 자신의 일인 양 느꼈다. 특히 오스트리아 때문에 보스니아 동포들이 쥐는 경제 악화에 대해 곱씹어 생각했다(보스니아가 실은 세르비아의 심장부 대부분보다 더 산업화되었고 1인당 소득도 더 높다는 사실은 간과한 불평이었다). 희생은 주요 관심사, 거의 강박관념이었다." "프린치프와 차브리노비치 두 사람은 코소보 신화에서 아주 중요한 자살 암살자 인물형에 심취했거니와 더 넓게 보면 자신을 범세르비아 운동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108-10)


2장 특성 없는 제국


"두 차례 군사적 재앙이 합스부르크제국의 마지막 반세기 동안 그 궤적을 규정했다. 1859년 솔페리노에서 프랑스-피에몬테 동맹군은 10만 병력의 오스트리아군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신생 이탈리아 민족국가 창건의 길을 열었다. 1866년 쾨니히그레츠에서 프로이센군은 24만의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하여 신생 독일 민족국가에서 합스부르크제국을 몰아냈다. 이 두 차례 충격은 오스트리아 영토 내부의 생활을 바꾸어놓았다. 패전에 휘청거린 신절대주의적 오스트리아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탈바꿈했다. 1867년 타결된 대타협에 따라 지배적은 두 민족, 즉 서부의 독일인과 동부의 헝가리인이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그 결과 마치 노른자가 두 개 든 쌍란처럼 오스트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흔히 '치스라이타니엔'이라 불린 영토와 헝가리왕국이 반투명한 외피 안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독특한 정치체가 출현했다."(130-1)


"남동유럽 지역은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진 두 강대국이 경쟁하는 긴장 지대가 되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둘 다 오스만이 물러난 이 지역에서 패권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고 자부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예부터 튀르크족에 맞서 유럽의 동쪽 관문을 지킨 수호자였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발칸반도의 신흥 슬라브계(특히 정교회) 민족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후견 세력 사이에 자연스러운 공통 이해관계가 있다고 역설했다. 또 오스만이 후퇴하면서 러시아정책수립자들에게 전략적으로 극히 중요한 타키 해협(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향후 통제권 문제가 불거졌다. 그와 동시에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와 목표를 가진 야심찬 신생 발칸 국가들이 출현했다. 이 요동치는 지형 곳곳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한 수 둘 때마다 상대방의 이점을 상쇄하거나 줄이려는 체스 선수처럼 책략을 썼다."(149-50)


"발칸전쟁은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의 안보 지위를 파괴하고 더 크고 더 강한 세르비아를 만들어냈다. 세르비아왕국의 영토는 80퍼센트 이상 확장되었다. 2차 발칸전쟁 기간에 최고사령관 푸트니크 휘하의 세르비아군은 인상적인 규율과 주도권을 보여주었다. 그 전까지 합스부르크 정부는 베오그라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 논의할 때면 무시하는 투로 말하곤 했다. 한 예로 언젠가 에렌탈은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치는 "짓궂은 아이"에 비유했다. 그런 경솔한 언행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1912년 11월 9일 참모본부 보고서는 세르비아의 급성장한 공격력에 놀라움을 표했다. 1912년 초부터 추진한 철도망 개선, 무기와 장비의 현대화, 전방부대 수의 엄청난 증가(모두 프랑스 차관으로 자금을 마련했다)의 결과로 세르비아는 만만찮은 교전국으로 변모했다. 더욱이 세르비아 병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182)


2부 분열된 대륙


3장 유럽의 양극화, 1887~1907


"1907년 유럽 동맹 지도를 보면 삼국동맹은 (1887년 체제) 그대로였다(다만 이탈리아의 신의는 갈수록 의문시되고 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양국동맹 협정문에는 삼국동맹의 어떤 국가든 군대를 동원할 경우 두 조인국은 〈이 사건의 소식을 듣는 즉시 사전 협의를 거칠 필요 없이〉 전군을 동원하여 〈독일이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싸울 수밖에 없도록 신속히〉 배치한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화친 협정(1904)과 영국-러시아 협약(1907)을 통해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연결되어 있었다." "유럽 지정학적 체제의 양극화는 1914년에 발발한 전쟁의 결정적 전제조건이었다. 1887년이었다면 오스트리아-세르비아 관계가 위기가 아무리 심각했다 해도 유럽을 대륙 전쟁으로 끌고 가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양분 구도는 전쟁 이전 수년간 분쟁을 고조시킨 것 못지않게 완화했다. 그러나 두 블록이 없었다면 1차 세계대전은 실제 발발한 대로 발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213-4)


"베를린이 이 위협을 막을 방법은 러시아를 자국의 동맹체제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은 1873년 오스트리아·러시아와 함께 삼제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둘 다 포함하는 모든 동맹체제는 발칸반도에서 두 강국의 이해관계가 겹친다는 것을 고려하면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양국 간 긴장을 억제하기가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될 경우,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만약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선택한다면, 프랑스와 러시아의 협력관계를 막는 장벽이 사라질 터였다. 1890년 3월 사임할 때까지 독일제국의 수석 설계자이자 외교정책의 제1입안자였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은 이 문제를 충분히 의식했다."(216) "그렇지만 비스마르크식 외교로 달성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삼제동맹이라는 허술한 얼개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발칸에서의 이해관계를 가진 러시아와 관련해 그러했다."(218)


"(독일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왜 1890년대 초 프랑스의 접근을 환영했을까? 분명 독일은 러시아의 친독일파 외무장관 니콜라이 기르스가 기존보다 나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재보장조약 갱신을 거절함으로써 러시아가 정책 방향을 전환하도록 부추겼다. 1890년 6월 평시 독일군 병력을 1만 8574명 늘리자는 온건한 군사 법안이 조약 비갱신 결정에 뒤이어 제출되었던 것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불안감을 자아냈다." "프랑스의 거액 차관을 좋은 조건에 제공받을 전망도 러시아에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를 움직인 결정적 촉매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영국이 삼국동맹에 가담할 두려운 가능성이었다." "(1890년대 초의 정세는) 극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경쟁국인 영국이 러시아의 강력한 서쪽 인접국인 독일과 힘을 합치고 더 나아가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경쟁국인 오스트리와와 협력하기 직전처럼 보였다."(222-3)


"(유럽 세력균형의 새로운 판도를 열어젖힌)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영국 정치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독일의 흥기가 아니라 영국의 숙적 러시아가 크림전쟁(1853~1856) 이후 강요받은 합의로부터 풀려날 전망이었다.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정한 1856년 파리조약의 조항들에 따라 흑해의 물길은 흑해 연안을 소유한 국가들의 군함에도, 다른 어떤 국가의 군함에도 〈공식적으로 영원히 차단〉되었다. 이 조약의 목표는 러시아가 동지중해를 위협하거나 영국의 영토와 인도행 해로를 교란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패전으로 1856년 조약의 정치적 토대가 무너졌다. 새로 수립된 프랑스공화국은 크림전쟁 합의를 깨고 흑해에서 러시아의 군사화에 반대하던 입장을 포기했다. 영국 혼자서는 흑해 조항들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러시아는 흑해 함대 건설을 밀어붙였다."(233)


"(적대적인 강대국 연대의 출현을 저지하는) 비스마르크 전략에는 대가가 따랐다. 독일은 항상 자기 체급보다 약한 펀치를 휘둘러야 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에서 제국들의 식민지 쟁탈전에 끼어들지 말아야 했고, 다른 강국들이 세계 세력권을 두고 다툴 때 방관자로 남아야 했다. 또한 베를린은 이웃 강국들에 모순적인 약속을 해야 했다. 그 귀결은 독일제국의회의 구성을 결정하는 유권자들이 원치 않는, 무력한 국가라는 의식이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방대한 제국의 주변부라는), 본국에 비교적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교환하고 거래할 수 있는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독일은 그런 제안을 믿을 만하게 할 수가 없었는데, 이미 붐비는 테이블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 애쓰면서도 거래할 것이 전혀 없는 벼락부자 같은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변변찮은 남은 몫을 차지하려던 독일의 시도는 기성 제국 클럽의 강경한 저항에 부딪혔다."(240-1)


"1890년 독일이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을 포기한 것은 어느 정도는 스스로 부과한 비스마르크 정책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1890년의 태도 변화(비스마르크 실각, 레오 폰 카프리비의 재상 취임,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제국 정치의 핵심 행위자로 부상)는 독일 대외관계의 새로운 단계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1890년대 초의 '신노선'은 본래 협의하여 의도한 방침이라기보다는 우유부단과 좌고우면의 결과였다. 비스마르크가 갑작스레 퇴장하면서 생긴 공백은 그대로 남았다." "자유재량 정책은 독일에 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으나 실은 중대한 위험을 수반했다." "(별다른 안보 이득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친교가 깊어감에도 영국이 독일과 더 가까운 관계를 추구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영국 정책수립자들은 먼저 프랑스와, 그 후에 러시아와 유화하는 정책의 이점을 고려하기 시작했다."(243-4)


"1907년부터 등장한 새로운 국제 체제가 유독 독일에게 불리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유럽 강국들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한 결과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의 경우에만 독일 견제를 우선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초에 유럽 국가들이 체결한 일련의 협정은 세계사적 변천의 결과로 생각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그런 변천으로는 중일전쟁과 지역 강국 일본의 부상, 아프리카 분쟁과 중앙아시아에서의 그레이트 게임으로 인한 재정 부담, 아프리카와 남서유럽에서 오스만 권력의 쇠퇴, 강대국들의 중국 쟁탈전뿐 아니라 그에 따른 중국 국내의 대격동까지 포함한 중국 문제 등이 있었다. 독일의 '안절부절'과 벼락부자처럼 끈덕진 요구가 당시 정세의 일부이긴 했지만, 이 시대를 재조정한 과정들을 더 폭넓게 분석한 연구들은 독일이 터무니없는 국제적 행위로 고립을 자초했다는, 한때 널리 수용되었던 견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266)


4장 유럽 외교정책의 뭇소리


"20세기 초 유럽은 군주국들의 대륙이었다. 가장 중요한 여섯 강국 중 다섯이 이런저런 군주국이었고, 한 나라(프랑스)만 공화국이었다. 발칸반도의 신생 민족국가들(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마, 루마니아, 알바니아)은 모두 군주국이었다. 고속순양함, 무선전신, 전기 시가라이터의 이면에는 크고 복잡한 국가들을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생명활동에 얽어매는 이 고색창연한 제도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유럽 각국 집행부들의 중추는 여전히 이런저런 남녀가 차지하고 앉아 있는 왕위였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에서 각료들은 황제에게 임명받았다. 세 황제는 국가 문서에 무제한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각국 군대에 공식 권한을 행사했다. 왕조들의 제도와 인맥은 국가 간 소통을 구조화했다." "군주들은 정치적 행위자일 뿐 아니라 상징적 행위자였으며, 이 역할로 집단 감정과 연상작용을 사로잡고 집중시킬 수 있었다."(282-3)


"정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했든 안 했든, 유럽 대륙에 군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국제관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일부분만 민주화된 체제에서 모든 공문서와 인사에 접근할 수 있고 모든 집행 결정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주권자, 각국 정부의 중심점으로 추정되는 군주의 존재는 모호함의 원인이었다. 군주들이 서로 만나서 국가의 큰일을 해결하는 순전한 왕조식 외교정책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았다. 허사로 돌아간 비외르쾨 회담이 그 증거였다. 그럼에도 군주를 집행부의 키잡이 겸 화신으로 보고픈 유혹은 외교관, 정치인, 특히 군주들 사이에서 여전히 강력했다. 군주들의 존재는 정책 수립 과정의 중심축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계속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국왕들과 황제들은 국제관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었다. 그 귀결인 불명확성은 확실하고 투명한 국가 간 관계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계속 방해했다."(301-2)


"언론에 집착하는 태도의 밑바탕에는 그와 상반되는 태도가 있었다. 각료와 관료, 군주는 언론을 대중의 감정과 태도를 반영하는 거울이자 드러내는 채널로 생각했고, 이따금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외무장관이라면 누구나 적대적인 언론 캠페인에 노출될 경우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부정적인 기사에 대한 두려움은 숱한 외무부들이 비밀을 엄수한 한 가지 이유였다." "대다수 정책수립자들은 언론을 영리하고 분별력 있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론이 휘발하는 성질이 있다고, 즉 금세 잦아드는 단기적인 선동과 광란에 휘둘리기 쉽다고 보았다. 민심이 상반되는 자극들에 의해 움직이고, 정부에 현실적인 요구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표현을 바꿔 말하자면, 여론은 대개 〈고삐 풀린 혀와 대책 없는 손을〉 결합한다고 보았다. 여론은 광란적이고 곧잘 공포에 휩싸였지만, 몹시 변덕스러웠다."(363-4)


"정책수립자들이 여론을 통제했던 것도, 여론이 그들을 통제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론과 공적 생활의 상호성에 대해,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에 대해 말해야 한다. 정책수립자들은 때때로 여론을 알맞은 방향으로 유도하려 하면서도, 자신들의 자율성과 정책수립 과정의 통합성을 신중하게 보호했다." "더욱 근본적인, 그리고 더욱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는 심성구조의 변화였다. 이 변화는 강경한 입장이나 대립을 요구하는 쇼비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쟁을 받아들이는 깊고도 광범한 마음가짐으로 표출되었다. 이제 전쟁은 국제관계의 본성상 확실히 일어날 사태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쌓인 마음가짐의 무게는 1914년 7월 위기 동안 공세 계획 성명의 형태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민간 지도자들의 웅변적인 침묵을 통해 드러났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에 살았더라면 강대국 간 전쟁이야말로 최악의 사태라고 지적했을 법한 사람들이었다."(380-1)


5장 얽히고 설킨 발칸


"발칸반도에 대혼란을 가져온 연쇄 전쟁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 1911년 이탈리아의 리비아 침공은 오스만 주변부에 대한 발칸 국가들의 전면전에 청신호를 보낸 격이었다. (당시 영국령이었던) 이집트와 (사실상 프랑스령이었던) 모로코와 달리, 나중에 리비아라고 알려진 3개 주(빌라예트)는 오스만제국에 속한 지방이었다. 오스만의 마지막 아프리카 영토인 이 지방들에 대한 이탈리아의 전혀 정당하지 않은 공격은, 당대의 어느 영국인 관측자의 표현대로, 발칸 국가들에게 〈돌파구를 열어준〉 사건이었다. (오스만 세력을 몰아내자는 이야기만 무성하던) 발칸 국가들은 이탈리아의 침공 이후에야 비로소 싸울 마음을 먹었다. 세르비아 외무부의 정치적 수장이었던 미로슬라브 스팔라이코비치는 1924년에 이 사태를 되돌아보면서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과정을 개시한 사건으로 이탈리아의 트리폴리 공격을 꼽았다. 〈뒤이은 모든 사태는 그 첫 공격의 진전에 지나지 않습니다.〉"(387)


"오늘날 대체로 잊힌 이탈리아-오스만 전쟁은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유럽 국제체제를 교란했다. 이탈리아의 점령에 맞선 리비아의 투쟁은 현대 아랍 민족주의의 출현을 자극한 중요한 초기 촉매들 중 하나였다. 삼국협상 국가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리비아를 강탈하려는 이탈리아의 대담한 행보를 부추긴 반면, 이탈리아의 삼국동맹 파트너들은 마지못해 묵인했다. 이런 국제정세는 중요한 진실을 드러내 보였다. 삼국협상 국가들의 개입으로 삼국동맹의 약점이, 아니 지리멸렬함이 노출되었다. 이탈리아의 행동이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칸반도 전체의 안정을 깨뜨릴 것이라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거듭된 경고는 무시되었다. 이탈리아는 명목상으로만 그들의 동맹인 것처럼 보였다." "이탈리아가 훗날 삼국협상에 붙을 뚜렷한 기미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이탈리아는 서로 모순되는 약속들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는 복잡하고 모호한 외교정책을 펴고 있었다."(395)


"삼국동맹의 콩가루 상태 이면에는 근본적으로 더욱 중요한 추세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침공하면서 유럽 대다수 국가들로부터 미지근한 지지를 받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한 정세였는데, 친오스만 유럽 연대가 전면적으로 해체되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1850년대에 출현한 유럽 열강의 협조체제는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강탈하려던 러시아를 견제했다(그 결과 크림전쟁이 일어났다). 이 연대는 러시아-오스만 전쟁 이후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다른 형태로 재편되었고, 1880년대 중반 불가리아 위기 때 재조정되었다. 이제 이 연대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탈리아와 전쟁을 시작할 무렵 오스만제국은 영국에 동맹을 요청했지만, 이탈리아와 소원해지고 싶지 않았던 런던 정부는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뒤이어 발칸전쟁으로 유럽 협조체제는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중대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396-7)


"발칸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은 옛 동맹 패턴의 반전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에는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지원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를 비호했다. 1914년 이 구도가 뒤집혔다." "이 발칸 지정학 재편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몇 년씩 걸리는 장기지속 현상이 아니라 급변하는 지정학적 환경에 적응하는 단기 현상이었다." "세르비아는 이제 발칸에서 러시아의 돌출부였다. 이것은 필연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결과가 전혀 아니었다." "발칸의 정교회 '자녀들'을 대신해 행동하겠다는 러시아의 주장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약화하고, 국내에서 인기를 얻고, 터키 해협의 발칸 배후지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포퓰리즘적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범슬라브주의는 러시아 민족주의 언론에 인기가 있었을지 몰라도, 히틀러의 생활권Lebensraum 개념과 비교해 정치행위의 신조로서 딱히 더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438-40)


"1913년 10월 세르비아와의 교착상태를 겪으면서 오스트리아가 향후 위기에 대처할 때 준거로 삼을 몇 가지 전례가 확립되었으며, 실제로 사라예보 암살사건 이후 양국 사이에 위기가 폭발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그 전례들에 따라 대처했다. 가장 명백한 전례는 최후통첩의 효과가 입증된 듯 보였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10월 17일 통첩은 언론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며, 세르비아군이 마침내 알바니아에서 철수했다는 소식에 빈 사람들은 희열을 느꼈다." "두 번째 전례는 세르비아가 빈과의 소통을 관리하면서 장차 화근이 될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다. 주도면밀하게 도발하고 불순응하는 정책을 다정함에 가까운 간사한 정중함으로 포장한다는 인상이었다." "베오그라드는 빈이 온갖 모욕을 침착하게 감내하면서 계속 몰아붙여야만 굴복하고, 오스트리아가 압박을 늦추는 즉시 도전과 도발을 재개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세르비아는 궁극적으로 무력만을 이해한다는 공리가 더욱 힘을 얻었다."(452-3)


"푸앵카레가 고위직에 취임할 무렵 프랑스에서는 역사가들이 '민족주의 부흥'이라 부르는 정치 기조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공화국 정치인들은 방어주의 안보정책, 즉 국경 요새화, 중포重砲, '국민무장군'으로 개념화된 군대의 짧은 훈련 기간에 역점을 둔 안보정책을 채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에 반해 아가디르 사건 이후 프랑스는 군대의 직업적 이해관계를 고려하고, 훈련 기간을 늘리는 한편 지휘체계를 더 효율적으로 일원화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다음번 전쟁에 명백히 공격적인 태세로 대비하는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1905년 팽배했던 대중의 평화주의적이고 반군사적인 분위기가 한결 호전적인 태도에 자리를 내주었다. 프랑스인 모두가 민족주의 물결에 휩쓸렸던 것은 아니지만(주로 젊고 지적인 파리 사람들이 새로운 호전주의를 받아들였다) 군사력 회복은 공화국 정치의 되살아나는 신조들 중 하나가 되었다."(464-5)


6장 마지막 기회: 데탕트와 위험, 1912~1914


"전전 막판 러시아-독일 데탕트는 발트항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곳에서 거둔 성과는 보잘것없었다. 양국은 우호적으로 대화하면서도 실질적 결정은 내리지 않았다. 언론에 배포된 공동성명은 알맹이 없는 일반론이었으며, 회담에서 "새로운 협정"을 맺지 않았고, 〈균형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입증된 국가들의 집단화에 어떠한 변화〉도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독일은 실제로 오스트리아에 자제를 촉구하여 빈에서 베를린의 동맹 약속이 과연 확고하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킨 반면, 러시아는 발칸 피후견국들을 이미 책동했고 앞으로도 책동할 예정이었다. 오스만제국의 곤경을 이용할 의도가 러시아에 없고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역사적 임무'가 이제 옛일이라는 사조노프의 확언은 줄잡아 말해도 실상을 호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러시아-독일 양해의 기반이었다면, 실로 위태로운 토대였다."(496-7)


"데탕트는 복잡한 방식으로 동맹 블록들의 유동적인 구조와 상호작용했다. 데탕트는 핵심 정치행위자들의 위험 의식을 낮춤으로써 결과적으로 위험 수준을 높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레이는 런던 대사회의(1차 발칸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정전회담)를 주재한 뒤 위기를 해결하고 "평화를 지키는"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는데, 결국 이 자신감 탓에 후일 1914년 7월 사태에 시의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영국과 독일의 발칸 데탕트로부터 독일이 맹방 오스트리아를 계속 억제할 거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억제할 거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야고브와 베트만도 런던 정부가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 정책의 진짜 성격을 마침내 알아차렸고 설령 이 지역에서 러시아가 분쟁을 일으키더라도 중립을 지킬 거라는, 똑같이 미심쩍은 통찰을 이끌어냈다. 게다가 유럽 국제체제에서 일부 국가들이 데탕트 국면을 조성하면 다른 국가들의 연대가 공고해지기도 했다."(507-8)


"삼국협상의 연대가 헐거워질지 모른다는 우려에 단기적으로 동맹 약속이 단호해졌으며, 유럽 곳곳에서 호전적인 정책 파벌들이 부상하면서 이 추세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시기에) 독일인들도 러시아의 굉장한 경제 성장과 활력에 감명을 받았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사령관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정학적 상황이 독일에 불리한 방향으로 급변하고 있는 것이 명약관화했다. 슐리펜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된 헬무트 폰 몰트케는 초지일관 암울하고 호전적인 관점에서 독일의 국제 상황을 전망했다. 그의 전망은 공리를 닮은 두 가지 가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두 동맹 블록 간 전쟁은 장기적으로 불가피하다. 둘째, 시간은 독일 편이 아니다. 장차 독일의 적이 될 나라들, 특히 급속히 팽창하는 경제와 사실상 무한한 인력을 가진 러시아는 해가 갈수록 군사력을 키울 것이고, 결국 도전할 수 없는 우위를 점한 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싸울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510-1)


"세계 제국들의 무대에서 독일의 선택권은 아주 제한되었고, 동맹 블록들로 나뉜 유럽의 상황은 비교적 닫혀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전쟁 없는 세계정책'에 관심 있는 독일 정치인들의 이목을 끌어모은 지역이 있었다. 바로 오스만제국이었다. 제국들이 특히 험악하게 각축을 벌인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정책은 전통적으로 다소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1880년대 들어 베를린은 한층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영국의 이집트 점령(1882)으로 영국과 소원해진 콘스탄티노플 정부는 베를린에서 적극적으로 파트너를 구하며 독일 정부의 관심을 부추겼다. 독일 은행, 건설사, 철도회사는 술탄의 제국에서 개발이 덜된 지역들부터 진출해 사업권과 이익영역을 확보했다." "이런 모험사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초기에는 다소 변덕스러웠지만 점차 확실하고 일관된 지원으로 바뀌어갔다. 1911년 콘스탄티노플 주재 독일 대사는 오스만제국이 독일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이익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523)


# 러시아 측의 안보 우려를 증폭시키는 계기로 작용


"삼국협상 정치인들의 수사에서 오스트리아의 쇠락이 불가피하다는 서사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유용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서사는 세르비아를 이중군주국의 구닥다리 구조를 쓸어버릴 현대성의 전령으로 묘사하며 세르비아의 무력투쟁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문화와 행정, 산업 면에서 유럽 현대성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반면 발칸 국가들(특히 세르비아)은 경제적 후진성과 생산성 하락의 악순환에 여전히 갇혀 있었음을 보여주는 차고 넘치는 증거를 은폐하는 기능을 했다. 하지만 이런 거대 서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의사결정자들로 하여금 그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심지어 그들 자신에게도 숨길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면, 정치는 저마다 다른 미래를 내포하고 있는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을 의미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역사의 비인격적 전진 운동에 보조를 맞추는 일이 된다."(544-5)


"발칸 반도에서 프랑스와 러시아가 합동 작전을 펼친다는 전략은 시나리오이지 계획 자체가 아니다. 그렇다 해도 양국 정책수립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독일에 미칠 법한 영향을 놀라울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프랑스 정책수립자들은 군사적 위협의 균형이 얼마만큼 독일에 불리하게 기울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1914년 6월 프랑스 참모본부는 〈군사적 상황이 독일에 불리하게 변경되었다〉라고 만족스러운 투로 지적했으며, 영국의 군사적 평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행동은 전적으로 방어적인 것이고 적에게만 공격적인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던 까닭에, 핵심 정책수립자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베를린의 선택지를 줄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국제관계 이론가들이 '안보 딜레마'라고 부르는 상황, 즉 한 국가가 자국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가 〈다른 국가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을 뚜렷하게 보여준다."(549-50)


"세기말적 남자다움에 호소하는 표현이 이 무렵의 서신과 메모에서 워낙 광범하게 나타나므로 그 영향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었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 해도 이런 표현은 분명 유럽 남성성의 역사에서 아주 특정한 순간을 반영한다. 젠더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19세기 말 수십 년과 20세기 첫 10년 동안 욕구 충족(음식, 섹스, 상품)에 집중하던 비교적 폭넓은 형태의 가부장적 정체성이 더 좁고 냉정하고 금욕적인 정체성으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한다. 그와 동시에 종속되고 주변화된 남성성들(예컨대 비백인 프롤레타리아의 남성성)과의 경쟁에 직면한 엘리트층 내에서 '진정한 남성성'의 표현이 강조되었다. 특히 군 지휘부 집단들 사이에서 체력, 강인함, 의무, 아낌없는 봉사가 그전까지 강조되었던 상류층 출신이라는 사실을 점차 대체했다." "페미니스트 사상가 로자 마이레더는 1905년에 〈그들은 전통적인 남성성의 규범에 들어맞기만 하면 패배의 참혹함이나 행위의 순전한 부당함에 무감각하다〉고 썼다."(559-60)


3부 위기


7장 사라예보 살인사건


"때때로 역사가들은 대공이 인기가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암살 자체는 사태의 중요한 계기가 아니었고 기껏해야 더 먼 과거에 뿌리박은 결정의 구실이었다고 추론했다. 그러나 이 결론은 실상을 호도하는 것이다. 우선 인기가 있었든 없었든, 제위계승자의 에너지와 개혁 열의는 널리 인정받았다. 콘스탄티노플 주재 오스트리아 공사는 세르비아인 동료에게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보기 드문 활력과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국정에 완전히 헌신했으며 죽지 않았다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공은 제국의 존속을 보장하려면 〈국내 정책 분야에서 방침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이해한 사람들〉 전부를 자기 주변으로 모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대공 암살은 단순히 그 개인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그가 상징하던 것, 즉 왕조의 미래와 제국의 미래, 그리고 둘을 통합한 '합스부르크 국가 이념'까지 타격을 받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의미했다."(587)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기는커녕 파시치(더 나아가 세르비아 당국)는 관습적인 자세와 태도로 되돌아갔다. 다시 말해 이번 사건으로 세르비아인들 자신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사라예보에서 피해를 입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자업자득이다, 세르비아인들은 말로써, 필요하다면 무력으로써 스스로를 지킬 권리가 있다는 등 이런저런 주장을 폈다." "이 견해에 따라 베오그라드 정부는 세르비아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오스트리아의 비난을 정당한 이유가 전혀 없는 공격으로 묘사했고, 공식적으로 도도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세르비아의 적절한 대응책이라고 밝혔다. 이 모든 주장은 베오그라드 정치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면 이해할 만한 일이었지만, 세르비아가 오만과 기만, 책임 회피로 일관한다고 여긴 오스트리아를 격분시킬 수밖에 없었다. 참사에 대한 세르비아 국가의 공동 책임이 추가로 확인되자 오스트리아가 분개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604)


8장 확산되는 파문


러시아는 자신들이 발칸의 불안정에 기여한 역사는 도외시한 채,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가 평화롭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쨌거나 런던과 파리 모두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러시아의 서사에 반대할 의향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인기 없고 전쟁을 도발하던 엄격한 차기 군주가 오랜 치욕과 학대에 격분한 자국 시민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대표하던, 부패해 무너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탐욕스러운 정권이 애석할 것 없는 그의 죽음의 책임을 떳떳하고 평화로운 슬라브족 이웃에게 덮어씌울 태세였다. 사라예보 사건에 이런 틀을 씌우는 것이 러시아의 행동 결정을 공식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틀 짓기의 결과로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 발생할 경우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저지할 장애물 중 일부가 제거되었다. 발칸 개시 시나리오가 일촉즉발 가능성이 되었던 것이다."(634-5)


"독일 지도부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공격을 계기로 러시아가 개입하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가동되고, 결국 대륙 전쟁이 발발할 위험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일부 역사가들은 빌헬름과 베트만, 그들의 군사고문들이 일촉즉발 사라예보 위기를 독일에 유리한 조건에서 다른 강대국들과 분쟁을 벌일 기회로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 물음에 답하자면, 먼저 독일 핵심 의사결정자들이 러시아가 개입할 것으로 예상하지도 않았고 개입을 유발할 생각도 없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7월 말까지 위기에 대처하는 동안 독일 정부의 특징이었던 군사적 대비를 꺼리는 태도에는 현재 대비태세에 대한 군부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겠지만, 분쟁을 발칸반도로 국한하려는 독일 지도부의 바람 또한 반영되어 있었다. 다만 이 정책으로 분쟁을 국한하는 데 실패할 경우 독일의 군사 대비태세가 위태로워질 위험이 있었다."(640-1)


"오스트리아는 의사결정 이론가들이 말하는 '중대 결정', 즉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고, 돌이킬 수 없는 변혁적 결과를 가져오고, 결정자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당시 위기를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 평가했고, 여러 요인과 위험에 대해 논의했다. 오스트리아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려는 세르비아 당국, 이런 사건을 중재할 수 있는 국제 사법기구의 부재, 향후 베오그라드에 순응을 강요할 수 없는 당시 국제 정세 등을 고려하면, 오스트리아가 덜 과격한 해법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의 대응은 (1914년의 다른 어떤 행위자들보다 더한 정도로) 근본적으로 기질과 직관에 따른 비약,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현재 어떤 상태이고 강대국으로 존속하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공통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적나라한 결정 행위'였다."(662)


9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프랑스인들


"(7월 21일~23일간 러시아를 국빈 방문한) 푸앵카레는 강경함이라는 복음을 전도했고 러시아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맥락에서 강경함이란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조치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의미했다. 자료들이 시사하는 대로, 푸앵카레도 러시아 대담자들도 대공 암살 이후 모종의 조치를 정당하게 취할 자격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임기응변도, 새로운 정책 성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푸앵카레는 그저 1912년 여름부터 구상해온 방침을 굳게 고수하고 있었다." "푸앵카레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숱한 대화를 나누며 예견한 발칸 대응 정책을 평화를 위한 정책이라고 불렀는데,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불요불굴 연대에 직면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십중팔구 물러설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설령 모든 예측이 어긋나더라도, 전쟁보다 나쁜 상황은 강력한 러시아가, 그리고 바라건대 영국의 육군력과 해군력, 상업력이 감당할 것이었다."(690-1)


10장 최후통첩


"오스트리아 수뇌부는 최후통첩 시나리오를 논의하는 회의는 물론 다른 회의들에서도 오늘날 말하는 출구전략을 조금이나마 닮은 것조차 마련하지 않았다. 세르비아는 조용히 지내는 이웃들 사이에 있는 불량국가가 아니었다. 인접국 알바니아는 여전히 매우 불안정했으며,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통제 아래 있는 마케도니아 영토를 먹어치우기만 하면 예전의 친러시아 정책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언제나 있었다. 불가리아의 마케도니아 지역 병합과 루마니아를 영토 보상으로 달래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오스트리아는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오스트리아 정치 엘리트들은 여전히 베오그라드와의 분쟁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더 폭넓은 문제들을 간과하고 있었다. 푸앵카레가 서파리에게 세르비아에게는 "친구들"이 있다는 이례적인 경고를 했다는 소식이 빈에 도착했을 때조차 베르히톨트는 방침 변경을 고려하지 않았다."(694-6)


"베오그라드에서 숙명론 분위기를 쫓아버리고 최후통첩 요구에 순응해 전쟁을 피해보려던 각료들의 마음을 돌린 것은 러시아에서 들려온 소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강경해지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 각료들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양보하지 않는 선에서 오스트리아의 요구에 최대한 순응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답변서를 다듬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세르비아의 답변서는 지저분해 보였을지 몰라도 외교적 얼버무림의 걸작이었다." "답변서 작성자들은 (자신만만한 자화자찬으로 시작되는) 자신들의 응답으로 양국 사이의 모든 오해가 풀릴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정부는 사적 개인들의 행동을 책임질 수 없으며 언론이나 〈협회들의 평화로운 업무〉를 직접 통제하지 않는 까닭에 빈에서 제기한 혐의에 놀라고 고통받은 터였다. 작성자들은 최후통첩의 각 항에 답변하면서 수락과 조건부 수락, 회피, 거부를 절묘하게 혼합했다."(711-3)


"1914년 7월 28일 오전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비트이슐에 있는 황제 별장의 집무실 책상에서 타조 깃펜으로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에 서명했다." "이즈음이면 베오그라드는 이미 인구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벌써 군복무 연령의 모든 남성이 징집되고 많은 가족이 친척과 함께 내륙으로 피난을 떠난 뒤였다. 7월 28일 오후 2시 정각에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들불처럼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모든 신문의 호외가 행상들이 거리로 가져가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이날이 지나기 전에 도나우강에서 탄약과 지뢰를 운반하던 세르비아 증기선 두 척이 오스트리아 공병들과 경비원들에게 몰수되었다." "마침내 전쟁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에 58세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한껏 흥분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나 자신을 오스트리아인으로 느끼고, 썩 희망적이지 않은 이 제국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은 기분이다. 나의 모든 리비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바친다.〉"(720-2)


11장 경고사격


"7월 24일 열린 러시아 각료평의회는 다섯 가지를 결의했다. ①오스트리아 측에 최후통첩의 시한 연장을 요청한다. ②세르비아 측에 국경에서 전투를 개시하지 말고 군대를 자국 중부로 후퇴시킬 것을 권고한다. ③차르에게 키예프, 오데사, 카잔, 모스크바 군관구의 동원을 "원칙적으로" 승인할 것을 요청한다. ④육군장관에게 군사장비 비축을 가속할 것을 지시한다. ⑤현재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투자 중인 러시아 자금을 회수한다. 이튿날, 더욱 엄숙한 각료평의회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전날 각료평의회에서 결정한 사항들을 확인하고 정교한 추가 군사조치들에 동의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조치는 각료평의회가 '전쟁 대비기간'이라고 알려진 일군의 복잡한 규제를 승인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동원에 대비한 많은 계획을 포함한 이 조치들은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댄 군관구들만이 아니라 유럽 러시아 전역에 적용될 예정이었다."(729-30)


"상술한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사조노프와 그의 동료들은 위기를 고조시키고 유럽 전면전의 가능성을 대폭 끌어올렸다. 우선 러시아의 사전동원은 세르비아 정계의 공감대를 바꾸어놓았다. 원래 최후통첩 수락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베오그라드 정부는 이제 오스트리아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을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다. 또한 사전동원은 러시아 국내에서 행정부에 대한 압력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군복 입은 남자들의 광경과 러시아가 세르비아의 운명을 '좌시하지' 않을 거라는 소식에 민족주의 언론이 환호성을 질렀기 때문이다." "사조노프는 왜 그렇게 했을까? 사조노프는 처음부터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조치가 러시아의 반격을 촉발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최후통첩에 대한 그의 대응은 그의 이전 언행과 완전히 일맥상통했다. 그는 세르비아의 영토회복주의에 대항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권리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737-8)


12장 마지막 날들


"러시아의 총동원은 7월 위기의 가장 중대한 결정 중 하나였다. 이것이 1차 세계대전의 첫 번째 총동원이었다. 이 시점에 독일 정부는 러시아가 7월 26일부터 시행 중이던 '전쟁 대비기간'에 상응하는 '전쟁 위급상황'을 아직 선포하기도 전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여전히 세르비아를 물리치는 데 초점을 맞춘 부분동원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 사건 순서는 훗날 프랑스와 러시아의 정치인들을 꽤나 불편하게 했다.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 정부가 7월 위기 동안 자국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펴낸 오렌지북Orange Book에서, 편집자들은 러시아의 총동원이 다른 나라의 조치에 대응한 결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총동원령 날짜를 3일 앞당겼다." 프랑스 역시 러시아의 동원령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동원조치'에 맞선 조치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독일은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7월 위기 내내 상대적으로 차분한 하나의 섬이었다."(780-1)


"오스트리아가 굼벵이처럼 대응한 탓에 국지화 정책의 성공에 필요한 전제조건 중 하나가 무너졌다면, 독일 정부는 이 정책을 왜 그토록 악착같이 고수했던 걸까?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무력 개입을 방지하는 더 깊은 구조적 요인들(러시아의 무장 프로그램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사정 같은)을 믿었다는 데 있다." "독일 정부가 국지화에 전념한 다른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대안이 부족했다는 데 있다. 합스부르크 맹방을 포기하는 방안은 논외였는데, 평판과 권력정치 때문만이 아니라 독일 의사결정자들이 세르비아를 고발하는 오스트리아의 정당성을 정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군사적 공격력의 균형이 독일에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면, 독일의 유일한 강대국 맹방을 잃을 경우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었다(독일 계획자들은 이미 이탈리아를 실질적은 자산으로 여기기에는 너무 신뢰할 수 없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792-4)


"러시아가 부분동원령을 공포한 7월 29일에 열린 회의에서도 독일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팔켄하인 육군장관은 전쟁 위급상황 선포에 찬성한 반면, 헬무트 폰 몰트케 육군참모총장과 베트만 재상은 중요한 운송체계에서 경비 근무를 확대하는 방안에만 찬성했다." "7월 31일 군사적 조치를 놓고 또다시 갈팡질팡하는 차에 모스크바의 푸르탈레스 대사로부터 러시아가 전날 한밤중에 총동원을 명령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카이저는 즉시 전화를 걸어 전쟁 위급상황 선포를 명령했고, 7월 31일 오후 1시 이 명령이 팔켄하인을 통해 군대에 하달되었다. 이제 먼저 동원한 책임은 분명히 러시아에 있었다. 이는 베를린 지도부에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독일 일부 도시들에서 일어난 평화주의 시위를 감안하면, 독일의 참전이 방어적 성격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어야 했다." "러시아 정부가 총동원령 철회를 거부하자 독일은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804-6)


"외교의 시간이 끝나가고 군인의 시간이 시작되는 참이었다. 베를린 주재 바이에른 군사전권위원은 동원령 발표 이후 육군장관을 방문했을 때, 〈복도에서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악수하는 이들을 어디서나〉 보았다. 〈누군가 장애물을 넘었다고 자축했다.〉 7월 30일 파리에서 이그나티예프 대령은 〈프랑스 측에서 생각하기에 유리한 전술적 상황을 이용할 기회를 잡은 데 대한〉 프랑스 동료들의 "숨김없는 기쁨"을 보고했다.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생각에 고무되었다. 7월 28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모든 것이 파국과 붕괴를 향해 나아가고 있소. 나는 흥이 나고 대비가 되어 있고 행복하다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쾌활한 알렉산드르 크리보셰인은 제정의회 의원 대표단에게 독일이 조만간 괴멸될 것이고 전쟁이 러시아에게 "호재"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우리를 믿으세요. 신사분들, 만사형통일 겁니다.〉"(843-4)


"다가오는 싸움에 열광하는 쇼비니즘적 표현들이 드문드문 있기는 했지만 이는 예외적이었다. 유럽 남자들이 증오스러운 적을 물리칠 기회를 덥석 붙잡았다는 신화는 그동안 철저히 타파되었다. 대부분의 장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동원 소식은 엄청난 충격,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리고 도심지에서 멀어질수록, 장차 전쟁에서 싸우거나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일가친척을 잃을 사람들이 동원 소식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차르의 말이 전해지자, 독특한 군사적 소명과 전통을 지닌 카자크인들은 〈적과 싸우고자 불타올랐다.〉 그런데 그 적은 누구인가? 아무도 몰랐다. 동원 전보에는 구체적인 정보가 없었다. 소문이 넘쳐났다. 처음에는 모두 중국과 전쟁하는 게 틀림없다고 상상했다. 〈러시아가 몽골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중국이 전쟁을 선포했대.〉 이내 다른 소문이 퍼졌다. 〈잉글랜드랑, 잉글랜드랑 싸운대.〉 이 견해가 한동안 우세했다."(845-6)


결론


우리는 의사결정자들에게 작용한 객관적 요인들과 그들이 서로 나눈 이야기들을 구별해야 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나이 많고 참을성 강한 이웃을 끊임없이 도발하고 못살게 구는 젊은 비적들과 국왕 시해자들로 이루어진 민족에 관한 이야기가 세르비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지 냉철하게 판단하는 것을 방해했다. 반대로 세르비아에서는 탐욕스럽고 막강한 합스부르크 제국이 자신들을 희생시키고 억압한다는 공상이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독일에서는 침공과 분할을 예상하는 어두운 미래상이 1914년 여름 내내 의사결정을 괴롭혔다. 러시아에서는 동맹국이 러시아를 거듭 욕보였다는 이야기가 과거를 왜곡하는 동시에 현재를 명료하게 하는 등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널리 회자된 이야기는 오스트리아가 중부유럽과 동유럽에서 안정의 버팀목 역할을 한다는 기존의 전제를 점차 대체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쇠락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서사였다."(852)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다룬 연구에서 폴 케네디는 교전국들 전부를 탓하거나 아무도 탓하지 않는 식으로 범인 색출을 회피하는 것은 "물렁한" 접근법이라고 말했다. 케네디의 말대로라면 더 딱딱한 접근법은 손가락질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 책임 지우기에 중점을 둔 서술의 문제는 결국 엉뚱한 국가에 누명을 씌울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런 서술에 전제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책임에 초점을 맞춘 서술은 첫째로 상호작용하며 갈등을 빚은 관계에서 궁극적으로 한 주역은 옳게 행동하고 다른 주역은 잘못 행동한 것이 틀림없다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고발 서사의 또 다른 단점은 다자간 상호작용의 과정보다는 특정한 한 국가의 정치적 기질과 구상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야를 좁힌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책임을 지우려는 수사관은 의사결정자들의 행위를 일관된 의도에 따라 계획한 행위로 해석하기 쉽다는 문제가 있다."(855-6)


"1914년 전쟁 발발은 온실 안에서 연기 나는 권총을 손에 쥔 채로 시체를 지켜보는 범인을 발견하며 끝나는 애거서 크리스티 류의 드라마가 아니다. 이 이야기에는 연기 나는 총이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주요 인물들 모두가 연기 나는 총을 쥐고 있다. 이렇게 보면 1차 세계대전 발발은 범죄가 아닌 비극이었다. 이를 인정한다고 해서 프리츠 피셔와 그의 역사 서술을 지지한 동료들이 올바로 주목한 오스트리아와 독일 정책수립자들의 호전성과 제국주의적 피해망상을 꼭 최소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일인들만 제국주의자였던 것도 아니고, 그들만 피해망상에 굴복했던 것도 아니다. 1914년에 전쟁을 불러온 위기는 유럽 국가들이 공유한 정치문화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극적이고 진정으로 상호적인 위기이기도 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1914년에 정치인들이 얻고자 다투었던 상들 가운데 그 무엇도 뒤이은 대재앙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지 않았다."(856-7)


"그들은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위험을 실감하기도 했을까? 이것은 1914년 이전과 1945년 이후의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의사결정자들과 일반 대중 모두 핵전쟁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파악했다(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위에 생긴 버섯구름 이미지가 일반 시민들의 악몽에 나왔다).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 경쟁이 벌어졌음에도 초강대국들 간 핵전쟁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1914년 이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많은 정치인들의 마음속에서 단기전에 대한 기대와 장기전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테면 서로를 상쇄하여 위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게 막았다." 우리는 전전 유럽 어디서나 이렇게 기대와 두려움이 상쇄된 견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1914년의 주역들은 눈을 부릅뜨고도 보지 못하고 꿈에 사로잡힌 채 자신들이 곧 세상에 불러들일 공포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몽유병자들이었다."(8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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