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귄터 보른캄 지음, 허혁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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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바울 서신에 나타난 바울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그리스도인이며 선교사인 바울을 묘사할 때 아직도 바리새주의에 의해 대표되고, 이제는 예수의 부활에 의해 실증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선조들의 율법에 충실히 머물러 있는 확실한 바리새인임을 강조하는 반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배척함과 동시에 그들의 가장 고유한 거룩한 전통들을 배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실제의 바울은 전혀 다르다. 특히 빌립보서에서 분명히 밝힌 대로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義)를 얻으려는 그의 옛 바리새적인 열심을 버렸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오는 구원을 얻기 위해 그것을 '해로운 것', '배설물'로 여겼다. 물론 이 분명한 차이 때문에 사도행전은 원시적이고 유대주의적인 경향을 띤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사도행전의 견해들이 가능하게 된 것은 율법의 타당성 문제를 둘러싼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투쟁이 조정되고, 율법이 옛 편협한 제한성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다."(23)


"특히 주목할 점은 누가의 작품 전체의 어느 한 구절에서도 사도 자신의 서신을 알았거나 사용한 흔적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미루어 사도행전이 성립되던 시대에는 광범위하게 교회 영역들에 유포되어 있던 대표적인 바울 서신 수집록이 아직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물론 개개 서신들은 이미 일찍부터 이웃 교회들 사이에 교환되고 있었다. 고대 교회의 다른 저술가들이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수집록의 확실한 흔적이 산발적으로 나타나다가, 1세기 90년대부터는 점점 증가된다. 사도행전이 아직 서신들을 모르고 있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사도행전 역시 대략 이 시대에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에 앞서 저술, 완결되어 있던 누가복음서─이것은 70년 이후에 저술된 세 공관복음서들 중 마지막 것인데─가 80년대에 기록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연대를 가장 근거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누가는 직접적인 증인이 아니라 이차적인 보고자에 해당한다."(25-6)


"사도의 문서적 유산이 오직 서신들뿐이라는 사실은 역사적인 우연일 뿐 아니라 중요한 내용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수십 년 뒤에 나온 마가복음서 기자와 다른 사람들이 행한 것같이, 가령 어떤 복음서를 써서 나사렛 예수의 역사를 전할 생각을 가졌었다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다. 또한 그는, 가령 우리가 그와 동시대의 유대인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고대 그리스도교의 문필가들에게서 보는 바와 같은, 구약성서의 개별 문헌들에 대한 주석서를 쓰거나 고대 교회 이후 많이 선을 보인 교회제도에 관한 것, 신학적인 논문, 교리 지침서를 저술하려고 생각했다고 볼 수도 없다." "모든 순수한 편지처럼, 바울의 서신들도 특정한 기회에, 그 때를 위해, 구체적인 동기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쓴 것이다." "바울 자신은 이 편지를 임시변통으로, 헤어져 있어서 당장은 이룰 수 없는─이미 불가능하게 되었거나 아직은 가능치 않은─만남에 대한 불충분한 대안으로 생각했다."(27-8)


제1부 생애와 활동


"종교적으로나 세계관적으로 극도의 분열 상태에 있던 고대 말기 주변 세계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유대 종교의 방사력과 유인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시국가의 안온한 영역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세계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정도로 확장되었으며, 이와 함께 인간 자신은 개별화되었다. 아직 옛 신들을 위해 신전이 세워지고 계속 제사와 제물을 드렸으나 그것들은 진부한 것이고 신들에 관한 신화들은 쓸모 없게 되었으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위한 보호와 축복, 구원과 속량에 대한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이미 무력해졌다. 도처에서 옛 종교들과 특히 동양으로부터 쇄도해 오는 새로운 종교들의 융합과 혼합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이질적이고 복잡할수록 그만큼 더 매력이 있었다. 운명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과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는 밀의(密儀) 종교의 의식(儀式)과 구원의 교리가 지나치게 판을 쳤다. 이런 배경에서 유대교는 전혀 다른 것,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고자 했다."(44)


"디아스포라 회당의 선교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원칙들에 따라 수행되었으니 이방 주민 중에 유대인 공동체에 가담한 '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유일신론적인 신앙 고백, 최소한의 의전적 계명들(안식일 계명, 음식물 규정 등), 그리고 율법의 윤리적인 기본 요구들을 이행하는 것으로 족했다. 그들에게는 물론 할례도, 그와 함께 유대 민족의 완전한 지체로 간주되는 '개종자(Proselyt :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의 신분으로 들어오는 것도 강요하지는 않았다. 율법에 대해 엄격한, 바리새파의 지도하에 있는 팔레스틴 유대교는 이 관례를 배교적인 행위라고 판단하고 모든 사람에 대한 할례의 요구를 고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파 역시 이방 선교에 열중했다. 물론 디아스포라 유대교에 비해 그 성과가 미미했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로써 이미 유대교적 이방 선교의 영역에는 할례에 대한 문제로 나뉜 두 방향이 서로 반목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47-8)


"헬레니즘 파는 그리스도에 대한 극히 혁명적인 주장했으며, 이러한 이해는 유대교적인 엄격한 율법 이해와 충돌을 일으켰고, 성스러운 전통들과 성전 예배, 선택된 백성만 구원받는다는 배타적인 주장을 문제시했다.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인 바울에게─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그리스도인을 박해하도록 자극한 이유들이다." "여기서 예수의 메시아됨에 대한 신앙이, 엄격한 유대교도에게는 충분한 박해의 이유가 되었다는 널리 알려진, 그러나 잘못된 가정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눈에도 과오를 범하고 있는 기괴한 하나의 유대교 종파로 보이기는 했을 것이나 결코 신성모독적인 이단은 아니었다. 이런 '예언자'를, 혹은 저런 '예언자'를 메시아로 믿은 추종자들의 집단은 이 밖에도 유대교 내에 적지 않은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유대교 측으로부터 박해받고 추방당해야 했던 일은 없었다."(53)


"바울이 후기에 에베소에서 활동할 때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글은 유대주의적 거짓 교사들의 선동으로 인해 유발되었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전하는, 율법에 구애되지 않는 복음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오직 선택된 유대 민족의 일원이 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이들의 공격과 더불어 동시에 그의 사도직도 문제시되었다. 아무도 이 직책을 그에게 위임한 이가 없다는 것이다. 적대자들이 비방하는 내용은 바울이 소식을 변조하고 자칭 사도가 되려는 독단적인 월권을 저질렀다는 두 가지였다. 그 때문에 그는 스스로 공격하면서 동시에 그의 서신에서 아주 날카로운 어조로, 이방인들을 위한 그의 복음의 진리와 그의 사명의 신적인 근원이란 두 가지 점을 변호했다. 이 둘은 불가분의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이것들은 같은 내용의 두 가지 측면이고, 그 배후에는 하나의 신적인 의지의 권위가 있다."(57-8)


"예루살렘 회합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그의 복음을 제시함으로써 원사도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온전히 그리고 그것의 모든 결론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마치 신에 의한 기적적인 작용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는 직접적인 통찰이 순수한 신학적인 논증들보다 더 강하게 관여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그가 회심하고 소명을 받은 이래 바울에게 거의 의심 없었던, 그리고 후에 그의 서신들에서 전개된 신의 새 창조로서의 교회에 대한 인식들, 즉 교회에서는 이미 유대인도 없고 모두 그리스도 아래에서 하나(갈 3, 28)라는 인식들이 무조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전제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유대인계 그리스도교 교회와 유대교인들에 대한 설교에서는 오히려 지금까지의 것이 그대로 계속 타당하고 안디옥 사람들은 그들대로 이 이상 더 강요받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그렇게 할 사람도 없었음이 분명하다."(82)


"바울은 개체 교회를 넘어서 언제나 곧 나라와 지방들을 생각한다. 방금 세워진 교회일지라도 모두 그에게는 각기 그 모든 지방을 위해 있는 것이다: 가령 빌립보 교회는 마게도냐 지방을 위해(빌 4, 15),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위해(살전 1, 7-8), 고린도 교회는 아가야를 위해(고전 16, 15 고후 1, 1), 에베소 교회는 아시아를 위해(롬 16, 5 ; 고전 16, 19 ; 고후 1, 8) 있다." "즉 복음은 단 한 곳에만 선교되어도 스스로 길을 내고 개개 도시로부터 모든 주변 지방으로 퍼진다는 것이다." "남겨두고 간 교회들에 대해 바울이 무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얼마나 그들에 대해 책임지고 있었는지는 그의 서신들이 증명한다. 그러나 그가 이 교회들을 위한 지속적인 염려는 그의 동역자들에게 위임하고 그 자신은 그의 서신들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순간적인 방문으로써 교회들을 지킬 수 있었다.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한다는 그의 원대한 목표는 그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고, 초조하게 했기 때문이다."(100-1)


"바울이 떠난 이후 고린도 교회는 놀랍게 성장했고 활동적이었으며 결코 종교적인 가난과 불모에 떨어지지 않았다(1, 4-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혼돈된 모습을 제공하고 있다. 교회의 풍요로움이 교회에 큰 위험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교회에 당부하면서 또한 예리하게 비판한다. 그가 자세히 언급한 첫 질문(고전 1-4장)은 이미 그 교회가 바울 자신에 의해 닦여진 토대로부터 빗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교회는 경쟁적인 여러 파로 분열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의 통일성이 위협 받고 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고전 1, 12)." "그 당파들의 구성과 논쟁의 출발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떻게 싸웠든지 간에 교회 생활에 개입한 열광주의는 바울에 의해 고린도전서에서 처리되어야 했던, 참으로 위험한 현상이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자신들만이 이미 '완전한' 상태에 도달했고, '영'과 '지식'을 소유했다고 자랑했다."(119-20)


"고린도전서 8-10장은 특히 주의할 만하다. 바울은 여기에서 열광주의자들이 자신을 변호하는 모든 거짓 신학적 논증들을 얼마나 단호하게 멸시하고, 제기된 문제들을 신과 주변 세계 앞에 져야 할 다른 사람을 위한 책임이라는 주제 하에서 얼마나 단호하게 다루었는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구원에 참여한다는 신념 하에 주의 만찬이 베풀어진 것은 확실하나 부유한 사람들이 이 만찬에 수반된 공동 식사에서 가난한 자들, 늦게 오는 자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바울에 의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수치스럽게 하는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예배 때 황홀경에서 연설하는 데 몰두하는 영 소유자들의 소란한 경쟁에 반대하고 이성적인 분명한 말로 선포함으로 인해 아직 멀리 있는 자들과 불신자들을 설복하고 그들을 감화시킬 것을 종용했다."(122)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이방 세계의 신적인 이적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 자신의 사도직의 합법성을 변호해야 했었다. 이에 반해 고린도에서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들의 이방인 경쟁자들과 비슷하게 행동하며 바울과 그의 복음을 멸시하고 드러내 놓고 그에게 도전했다. 그들의 척도들에 의하면,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에 의해 위임된 참 사도의 표지들이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이 표지들이 있음을 주장했고 그것들로 그들의 인상을 교회에 심었다." "이에 맞서 바울이 '자랑'으로 여긴 것은 바로 그의 선포에 의해 신앙에로 일깨워진 교회이며, 그의 나날의 노동의 피로이며 그가 그의 일에서 경험한 수난과 박해의 연속이다. 이것이 그에게는 참 '사도의 표지'이다." "새로운 적들이 고린도에서 교란을 일삼는데 직면해 바울은 그의 사도직의 옹호와 함께 그의 복음과 그리스도인됨의 이해 전반을 위해 싸워야 했다."(124-5)


"자신의 생애사의 마지막 장이 될 예루살렘 여행길에 오른 바울은 '장로들'을 에베소로부터 불러서 예언자적 선견으로 곧 순교하리라는 감동적인 장황한 연설로 그들과 작별한다(행 20, 17-38)." "역사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은 무엇보다도 아주 자명하게 전제된 교회의 장로 제도인데, 이것은 바울 서신들이 아직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후세의 것임을 특징지어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별 연설 자체의 문체와 내용이다. 이 연설은 사도의 전체 활동을 회고하면서 그의 마지막을 예측하고 그가 죽은 후에 물어뜯는 늑대처럼 교회를 파괴할 거짓 교사들의 출현을 예고한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바울은 그의 순수한 가르침의 전권을 이 장로들에게 계승시키고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양떼의 '관리자들(Episkopoi)'로 선임된 직권자들로서 그들을 임명한다." "이는 후기 교회가 특히 이단 방지 싸움에서 발전시킨 사상들의 전형적인 성격을 보여 준다."(151-2)


"바울이 구금되기까지의 예루살렘 사건들에 관한 보도들은, 사도행전에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는 예루살렘 여행 목적, 즉 헌금의 전달과 연결시킬 때에 비로소 투명해진다." "헌금 전달과 함께 이것으로써 바울이 교회에서 가능하게 하려고 했던 것은 분명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의 통일을 과시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물론 이루어지지 않고 말았다. 그렇게도 큰 실천적이며 신학적인 정력을 가지고 모은 원교회를 위한 이방인계 그리스도 교회들의 헌금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가의 보도에 따르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만났는데 바울이 그의 동반자 가운데 유대교인이 아닌 한 사람, 즉 에베소 출신 드로비모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온 줄 잘못 알고 죽이려고 했다. 그에 대한 소동은 결국 로마 군인이 개입해서 그를 보호 검속해 유대 군중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한다(행 21, 27-36). 그 후 바울은 로마의 죄수가 되었다."(152-4)


"누가가 바울의 재판의 계속과 그의 불법적인 죽음에 관해 알면서도(행 20, 22 이하, 21, 10 이하) 한 마디 말도 시사하지 않은 것은 기이하다. 그러나 누가적인 역사서의 구상, 즉 예루살렘과 유대로부터 사마리아를 지나 땅 끝까지 이른 복음의 길을 서술한다(행 1, 8)는 계획을 회상하면, 이 책의 평화로운 마무리는 이해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저자는 이 위대한 이방 민족의 선교사로 하여금 로마에서도 그의 위력적인 일을 완수하게 했다. 그리고 특별히 바울의 순교에 관한 침묵이 사도행전의 현실적인 목표 설정을 통해서 이해된다. 사도행전은 신자들을 고무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이방 제국에 대한 변호적인 의도를 가지고 기록되었다. 이방 제국이 바울의 이 모습에서 그리스도교의 위대함과 평화의 의지에 관한 인상을 받고 로마 관원의 많은 대표들이 바울의 역사 과정에서 이미 보여 준 것과 같은 현명하고 바른 태도를 교회에 대해 취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사도의 실제 최후는 달랐을 것이다."(159)


제2부 소식과 신학


"지상의 예수의 선포와, 바울뿐만 아니라 부활 후의 교회 전반의 그리스도 소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놓여 있다. 이 차이는 생각 없는 사람만이 간과할 뿐이다. 바울은 그저 지상 예수의 설교를 전달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이 차이는 현저하게도 신약성서 문헌들이 각기 달리 보도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복음서들이 단순화된 도식적인 말로, 예수의 죽음과 그의 부활까지 그의 지상 역사 영역에서 일어난 그의 설교와 활동에 관해서 보도했다면, 사도의 소식(서신들, 사도행전, 요한묵시록)에서는 전자의 목표점이 부활 후의 증인들을 낳는 근거와 시초가 된다. 선포자가 선포되는 자로 되면서 그의 지상 역사의 제한성은 제거되었으며, 예수의 말 대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 부활, 마지막 날에 그의 옴에 관한 말이 등장한다. 바울을 이 과정의 제일 첫 책임자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서신들은 역시 우리로 하여금 특히 뚜렷하게 이 놀라운 사태에 직면하게 한다."(164)


"물론 이 변화 과정에는 종교사학적으로 후기 유대교적·묵시 문학적 사상들과 후기 고대 주변 세계의 신화적 표상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지상적인 예수가 신화적인 신적 존재로 바뀌고 역사는 절망적으로 포기되었다는 널리 알려진 주장은 피상적이고 잘못된 것이다." "원그리스도교적 증언들과 고백들, 즉 구약성서적·유대교적인 혹은 헬레니즘적인 언어로 그를 부른 수많은 호칭들이 예수의 이 구원의 의미를 분명히 말해 준다: 메시아, 그리스도, 퀴리오스(主), 사람의 아들(人子), 신의 아들 등. 이 모든 호칭들이 지상적인 예수를 대신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지상적인 예수가 폐기된 것은 아니다. 그의 이름도 우연하거나, 공허한 혹은 바꿀 수 있는 낱말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호칭들은 오직 그만이 신에 의해 세계에서 성취된 구원의 내용과 전달자라는 것을 말한다. 선포되는 말을 듣고 신앙으로 대답하는 자들은 다 함께 이 사건에 소속되고 관련된다."(165-6)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선포를 위해 성별(聖別)되고 부름을 받고 파견되었음을 알고 있다(롬 1, 1 ; 갈 1, 15)." "복음에서 일어나는 것에 관해 바울은 묵시 문학적인 울림으로 말하고 있다: 〈신의 의가 복음에서 계시된다〉(Apokalyptetai, 롬 1, 17)."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와 같이, 그가 미래적인 사건들을 예고하고 유대교적 묵시 문학에서처럼 환상적으로 세계의 파멸과 새 세대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 이미 지금 복음 자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오고 있는 구원과 파멸의 가능성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원을 가져오는 신의 도래가 그 안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 복음 자체가 〈믿는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는 신의 능력〉이다(롬 1, 16). 이것은 이미 묵시 문학적 의도에 일치하지 않는다. 유대교적·원그리스도교적 묵시 문학에서 먼 혹은 가까운 미래에 기다려지던 것이 복음에서는 현재가 된 것이다."(169-70)


"아직 실제로 주목을 끌지는 않지만 지적되어야 할 중요한 바울 신학의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즉 그의 신학은 처음과 끝이 서로 어울리는 주제들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배열된 체계로서, 이른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으로 그것을 재생시키려는 모든 노력에 강하게 반대한다. 많은 학문적인 진술들이 마치 여기에 그런 어려움이 없는 것같이 그의 신학을 다루며 신과 그리스도, 인간, 구원, 성례전, 교회, 마지막 일들과 그와 유사한 것들에 관한 바울의 진술들을 열심히 체계적으로 배열한다. 그들은 흩어져 있는 것을 한데 모아 하나의 통일체를 만들 수 있으면 있을수록 더 높은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설사 모든 구절을 위해 필요한 증거를 가져다 댈지라도 다음과 같은 단순한 관찰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은 거짓이 된다. 즉 바울의 진술들은 교의학적인 주제들의 체계적인 배열에 있지 않고 거의 언제나 단편적이며 항상 다른 것들과 엉켜 있다는 것이다."(172-3)


"구약성서의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서도 율법은 그 원래의 의미상 구원과 생명을 위한 신의 부름이며 처방이다(롬 2, 6 이하 ; 7, 10). 율법은 순종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율법은 십계명으로, 특히 사랑의 계명으로 종합되면서 유대인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다(롬 7, 7 ; 13, 9 ; 갈 5, 14)." "그러나 바울에 이르러 바로 이 성스럽고 의롭고 선한 율법(롬 7, 12.16)이 실제로는 이미 구원과 생명에 인도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비로소 부각되었다. 이 의미에서 그는 율법의 보편성을 완전히 새롭게 이해했다." "즉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그들이 신 앞에서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보기에 율법이 명하는 바를 열심히 실천하는 것도 유혹적으로 지배하는 죄의 세력의 구속에서 인간을 풀어 주지 못한다. 율법은 그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 율법의 지배하에 일어나는 모든 사람의 상실성의 불가피한 이 연대성이 비로소 그의 소식의 본래적 혁명성이다."(178-9)


"바울이 가르치는 의(義)는 신은 의롭다는 일반적인 신학 명제가 아니다. 그의 소식의 특수성은 믿는 자들에게 신의 의(義)를 넘겨 주는 것이다." "신의 의는 경건한 자가 율법의 일들에 의해 얻어내는 '의'와 정면으로, 배타적으로 반대된다. 그가 자신의 열심으로 이루어 놓은 것은 언제나 단지 그 '자신의' 의(롬 10, 3)에 불과하며 결코 신의 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신만이 의롭다고 선언하고 그럼으로써 의롭게 한다. 반면에 인간은 수동적이다. 즉 인간은 의롭다는 선언을 받고 의롭게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소유격 결합인 '신의 의'는 문법적으로 말해서 주어적 소유격(이렇게 보면 신은 접근할 수 없는, 인간을 배제하는 먼 그의 존엄성에 숨어 버릴 것이다)이 아니라 근원자의 소유격을 의미한 것이다. 즉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 그의 의를 마련해 주고 그를 의로 세움으로써, 신의 이러한 선언과 행위 없이는 멸망할 인간으로 하여금 지금의 신 앞에서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194-6)


"'오직 신에 의해서만(solo deo)' 그리고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sola gratia)'에는 만인을 포괄하는 철두철미 새로운 의미가 들어 있다. 신앙을 위한 신의 의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에 근거를 두고 율법 없이 제시되었다(롬 3, 21 이하).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에 관한 사상은 바울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 사상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신의 언약의 성실에 대한 증거를 보고, 이스라엘의 범죄에 의해 파기된 시내산 계약의 회복에 그리스도를 관련시킨 유대인계 원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은 바울 자신의 해석에서 곧 완전히 후퇴하고, 그 대신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는 바 현재에서 세계적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며 일어나는 신의 행위가 부각된다(롬 3, 26)." "오직 신만이 의롭게 하고 경건한 사람은 신의 은혜에 의지한다는 사상을 통해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한정된 옛 시내산 언약에 철저히 대립되는 새로운 언약 사상을 확언한다."(198-9)


"소식과 고백은 시간과 더불어 영원히 어제에 머물러 보리는 옛 시대의 사건들을 내용으로 갖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그것이 일회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구원 사건으로서 현재와 미래를 규정한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로부터 일깨워져서 다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죽음이 다시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이는 그가 그의 죽음으로 죄에 대해 단번에 죽고 그의 삶으로 그는 신에 대해 살아났음이다〉(롬 6, 9-10; 비교. 14, 9). 복음은 구원 사건을 진정한 의미에서 '현재화'하고 이 사건에 스스로 속한다; 복음은 단지 이 사건에 관한 차후의 보도가 아니다. 복음의 선포와 함께 새로운 창조의 날의 빛이 신자들의 마음에서 빛나기 시작한다(고후 4, 6).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세계에 대한 신의 화해의 행위에 관해 말하면서 동시에 신이 '직책'을, 즉 '화해의 말'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 선포가 단지 지나간 옛일의 회상만이 아닌 것처럼 그것은 미래에 대한 위로이다."(219)


"바울의 모든 역사는 양면에서 협공을 받았다. 한쪽은 율법과 할례, 제의적 의식을 받아들여 특권적인 구원의 백성에 관여하면서 그의 절망적인 길을 다시 타개하려는 시도이고, 다른 쪽은 외견상 반대 방향을 가는 노력같이 보이는데, 즉 모든 지상적인 제약들로부터 벗어나서─파렴치하게 선전되고 실천되는 윤리적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영에서' 새로운 실존을 보려는 것이다. 율법성에 되돌아가는 것과 영적인 체험에 심취하는 것─바울은 이 둘에 대해, 함께 십자가의 말을 부끄럽게 하고 무력하게 하는 것이며, 복음이 믿는 자들을 찾고 만나고 붙잡는 지상적이고 역사적인 현재를 상상적인 과거 또는 환상적인 '완성'에 넘겨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든 혹은 저렇게든 그의 소식에 만족하지 않는 그의 적들과 비판가들은 함께 절망적인 시대 착오에 빠졌으며, 참된 오늘과 지금을 탈취하는 데 그리고 이와 함께 그의 상대자, 즉 그 말이 상대하면서 해방시키려는 인간을 은혜의 말에서 탈취했다."(252-3)


"묵시 문학의 언어와 표상들이 바울 신학에 끼친 영향은 강하나 이 신학에서 심오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들은 완전히 거세되거나, 대개 단편적으로 또는 통일성 없이 산재할 뿐이다. 그의 종말론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냄에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세대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바울의 신학에서 이것에 긴밀하게 연결된 것은 그 전에 전혀 없었던, 그에 의해 철저히 생각되고 전개된 통찰, 즉 신 앞에서 상실된 인간이 세계의 특징으로 확인되고 신의 구원의 행위는 시간과 역사 '안에서' 이 인간에게 일어났다는 통찰이다. 신앙의 때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그의 도래 사이의 때로 된 것이다." "열광주의자들은 너무도 성급하게 때의 성취와 구원의 시작에 관한 소식을 탐욕적으로 받아들이고 새 시대를 그들 자신의 실존에서 연출시키되 낮아지고 고난받는 그리스도교적 현존의 나그네됨을 스스로 감내할 각오 없이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269)


결론 바울과 예수


"초기 교회사에서 바울에 대한 평가는 극히 분열적이었다. 예로부터 유대인계 그리스도교 측에서는 그를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의 적으로서 용서 없이 버렸다. 아니 이 그룹들에서는 그를 모든 이단자의 두목인 시몬 마구스와 동일시하는 데 서슴지 않았다(위僞클레멘스서). 1세기 말에는 그를 높이 존경하고 그의 서신들을 인용하는 교회의 문필가도 몇 있었다(클레멘스 1서,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폴리갑). 그러나 이 밖에 바울을 자기 편에 둠으로써 그로 하여금 교회의 의심을 받게 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소종파의 두목들, 특히 마르시온 같은 사람이 곧바로 등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수십 년 동안 침묵 속에 파묻히거나 위조된 베드로후서(2세기 중엽)에서와 같이 '사랑하는 형제'로 호칭은 되지만 역시 주저하면서만 언급되었다. 그의 서신들의 난해성 때문에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스스로 멸망에 이르렀기' (벧후 3, 15-16) 때문이다."(304-5)


"'바울이 아니라 예수'라는 구호를 내세우는 이들은 바울이 비정상적인 묵시 문학적 헬레니즘계 유대교, 그러나 아주 이방적인, 그리스·근동적 신화와 사상들에 희생되었으며 동시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불행한 대립과 예수 자신의 설교 및 순수한 유대교를 변질시킨 교회의 교리 전통에 대해 본래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 옛날의 많이 알려진 논증들─지금은 세분화되고 완전히 변한 전제들이기는 하지만─이 새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즉 그들은, 율법과 할례의 제거, 예수의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변질시킨 것, 그에게서 이미 현재한다는 종말론적 구원의 시대에 대한 선포─이것은 세계와 역사 안에서 날마다 겪는 모든 경험들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이스라엘의 희망의 포기, 끝으로 개인을 민족과 역사, 세계의 숨은 보호에서 분리시킨 것, 아니 그것들을 피조물로 인정하지 않고 악마화한 것 등을 바울의 책임으로 지적한다."(307)


"그러나 바울은 지상의 예수의 말들 또는 비슷한 말들에도 직접 자신을 결부시키지 않았다. 그의 모든 말은 오히려 그가 그런 것들을 알지조차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자신 있게, 많은 사람들에게 아마 놀랍고 역설적으로 들릴 주장, 즉 거의 2천 년의 거리를 둔 오늘의 우리가 아마 역사적 예수에 관해 바울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주장을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가 예수에 관해 아는 것, 즉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해방의 일을 선포하고 신의 약속을 확인하는 '예(Ja)와 아멘'으로서 예수 자신을 이해했다(고후 1, 17 이하)." "예수와 바울 모두의 설교는 깨어 있으라는 부름과 고난과 시련에 대비하라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여기서 깨어있음과 대비는 불확실성과 묵시 문학적인 유토피아의 설계, 또는 인간이 '무덤 직전에서도 가질 수' 있는 희망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날의 빛 가운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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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정치의 조건 - 미국 유일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서 배우는
조시 맥짐시 지음, 정미나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제1부 미국을 살린 뉴딜, 뉴딜을 지휘한 루스벨트


"1920년대에 등장한 다원주의는 사회가 여러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엘리트 권력에 의해 지배되기보다는 그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 등이 조화를 이뤄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보는 사상이다. 사회학자들의 이론에 따라 잘 정립된 다원주의는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가 고정적이고 위계적 방법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고 여기던 이전의 가정에서 탈피했다. 사회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고 역동적이어서 그런 식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원주의의 중심 가치관은 궁극적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결정과 행동의 연속적 과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전문적 지식의 역할을 경시하여 전문가의 위상을 지도자에서 남들이 더 나은 답을 얻도록 도와주는 사람으로 격하시켰다. 다원주의자들은 전문가들이 특정 원인에서 특정 결과를 예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또한 본질적으로 거대한 시스템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25)


"다원주의자들은 광범위한 진실이나 전체가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며, 특정 시기에 따라 고유한 모습을 취한다고 여겼다." "다원주의자들은 지역, 공동체, 공익, 연합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정부에게 정책에 대한 조정자의 역할을 요구했다. 즉, 정부는 다양한 시각을 규합하여 문제 해결을 촉진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하며, 주어진 상황의 다양한 특징들을 처리할 수 있는 전문가 팀이 될 것을 주장했다. 이런 다원주의의 주장에 의하면, 정부 정책은 너무 전반적이거나 중앙집권적이어서는 안 되고 너무 지령적이어서도 안 되었다. 또한 지역적 조건들을 존중하여 정부 정책의 목표가 지역민들, 즉 일반 대중에게 공통의 노력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다원주의자들은 사회조직이 번영하려면 이런 식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보았다. 루스벨트의 대통령 임기는 미국 정치사에서 이런 다원주의가 구현되는 시기였다."(26-7)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공의 자유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렇게 되면 공공의 자유는 더 이상 대중의 욕구의 합으로 규정되지 않고 공공 이익의 기본적 조화를 이끌어내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지도부에 의해 규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는 훌륭한 사회란 기능적 그룹들로 이루어진 사회이고, 각 개인에게는 주어진 역할이 있으며, 개인이 그 역할을 펼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사회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정부이며, 정부의 정책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전문적 지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사회적 지식에 따라 각 개인과 그룹의 기능이 정해지며,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이나 그룹의 사회제도 내에서의 가치도 정해진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그룹이 역할 수행 시에 합리적으로 행동하도록 촉구함으로써 사회제도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돕는다고 여겼다."(34)


"루스벨트의 기질 가운데 병으로 인해 가장 두드러지게 발휘된 부분은 내면의 용기였다. 그는 혼자 힘으로도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당장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이며, 그 어떤 시련도 자신을 흔들지 못한다고 여겼다." "조금 불확실한 견해지만 소아마비라는 병마가 루스벨트의 사회적 동정심을 키워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당시의 보편적인 사회적 관념에 길들여져 있었지만, 그것에 의지해 내면의 안정을 얻지는 않았다. 가령 흑인이 대체로 하인이 되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하인이 아닌 흑인을 보고 의아해하지는 않았다. 또 반유대주의적 언급을 묵인하고 즐기기조차 하면서도 유대인을 친구나 협력자로 삼길 꺼려하지도 않았다. 때때로 인격과 성격이 인종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국민성이라는 개념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올바른 국내 질서나 세계 질서에 대해 판단할 때 이런 개념을 잣대로 삼지는 않았다."(40-1)


제2부 민주적 다원주의의 새로운 세상을 열다


"루스벨트는 복잡한 정치적·개인적 경험을 거치는 와중에 인간관계란 본래 심리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35년 국가비상대책심의회와 국가의 경제 건전성을 판단하는 여러 가지 척도들에 대해 토론할 때도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최종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나는 1932년 이후로 이번에 미시시피 강 서부에 처음 와봤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얼굴이 아주 확연히 달라보였습니다. 그 달라진 모습은 기차 끝 쪽에 서서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번 알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 얼굴에 용기가 가득했고, 표정도 활기찼습니다. 그들은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지만 극복해낼 겁니다.〉 그것은 루스벨트가 육성하려고 애썼던 바로 그런 기운찬 용기였다. 루스벨트는 스스로도 자신에 찬 분위기를 풍겼고,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깊이 있고 심오한 품성에서 우러나오는 태도라고 믿었다."(213-4)


"(종종 잔인하거나 배려 없는 태도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히 있었지만) 루스벨트는 사람들을 국가의 도구로 삼았다. 그런 만큼 그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국가의 목적을 달성해내는 능력이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자질을 최대한 이용했다. 설계와 고안 능력을 발휘하고 목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면서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했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 헌신적인 이들을 모아서 그들의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했다. 이것은 공직에 몸담은 모든 사람들, 특히 중대한 책무를 맡은 사람들로서는 성공하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리처드 닉슨처럼) 개인의 안위를 공적 책임보다 더 중시할 경우에는 그로 인해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된다. 루스벨트에게 사람들은 자신의 책상에 놓여 있는 다양한 물건들과 같았다. 그 물건들은 그가 원할 때 조정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 것들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이용하더라도 서툴게 이용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잘 이용했다."(216-7)


"루스벨트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판단, 특히 자신의 타이밍 감각을 믿었다. 그는 고문들에게 때에 따라 대담한 모습과 소심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즉, 행동할 때가 됐다고 결정할 때는 대담했고,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는 소심했다. 그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하면 실패와 곤경의 위험 앞에서도 완강할 만큼 단호해졌다. 반면에 오랜 기간 좌절에 빠져서 행동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동안에는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이 중심에 서서 통제하고 있지 않으면 흥미를 잃었다." "그는 오랫동안 침착하거나 난처하거나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다가 갑자기 대담한 행동을 취하곤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취임 후 첫 100일' 중에는 연방 대법원 개혁 계획, 공화당원인 스팀슨과 녹스의 각료 임명, 무기대여법(Lend-Lease Bill), 무기한 국가비상사태 선언, 독일의 U보트에 대한 '목격 즉시 발사' 명령, 무조건 항복 원칙 같은 눈에 띄는 결과들을 내놓았다."(221-2)


"루스벨트가 한 다음의 말에서 그의 정치적 현실 감각이 잘 드러난다. 〈후보자는 유권자들을 놀라게 해도 되지만 충격을 주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자신의 프로그램에 내포된 이점을 교육시킬 수 있으나, 후보자는 국민의 편견을 받아들이고 그 편견이 좋은 방향으로 이용되도록 돌려야 한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은 정치적 자산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 자산을 너무 빨리 소비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진보주의적 정치인들은 동맹자로 신뢰할 수 없다는 신념도 있었다. 루스벨트의 눈에 비친 진보주의자들은 언제나 기꺼이 소속된 편에서 떠날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타협의 순간이 오면 자신들의 편에서 가능한 것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루스벨트는 민주당을 '자유주의'나 '진보주의'의 당으로 바꾸고 싶었지만, 진보주의자들의 지원에만 기대서는 그 바람을 달성할 수 없다고 믿었다."(224-5)


"루스벨트는 투표자들의 지지기반이 다양했다. 북부지역 백인 가톨릭교도와 남부지역 백인들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막론하고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투표에 무관심했던 유권자층을 투표하러 나오게 만든 일은 루스벨트의 정치적 기반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1928~1940년에 민주당이 새로 동원한 투표자 수가 자연적으로 증가한 유권자 수의 세 배 이상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 상당수의 시카고 노동자들, 특히 백인 소수민족 노동자들이 대거 투표를 하기 시작했다. 뉴딜 프로그램들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국가에 대해서나 복지와 안전보장을 제공해주는 방면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신뢰가 생겼던 것이다." "1936년에 루스벨트가 얻은 지지표 가운데 20퍼센트 정도는 통상적으로 공화당원을 자처하던 투표자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뉴딜정책이 정부의 기업 규제와 노조 결정 지지 쪽으로 진행되자 북부의 진보파 공화당원들이 민주당으로 이동했던 것이다."(240-3)


"루스벨트의 두 번째 정치적 기반은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당을 차지하게 된 민주당의 위상이었다. 의회 다수당의 위상은 루스벨트의 인기에 크게 힘입은 결과였다.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는 상당히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1920년대의 민주당원들은 압도적으로 '안전한' 민주당 표밭에 의존하면서 대체로 남부지역과 북부 도시 인근의 소수민 가톨릭교도 지역의 표에 기대야만 했었고, 공화당원들과의 경합에서 통상적으로 거둔 승률은 40퍼센트 이하였다. 그러나 1932년부터 1940년까지는 남부지역과 도시지역의 지지 기반을 유지하면서 '안전한' 의석을 추가로 확보하여 경합에서 57퍼센트의 승률을 거두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의회의 민주당 의원들은 당에 대한 충성심을 루스벨트에 대한 충성심과 결부시켰다. 대통령을 부인했다간 당의 힘을 약화시키고 공화당에 정권을 넘겨줄 위험이 있었다." "의회의 어떤 회기 중에도 민주당 의원들의 루스벨트 지지율이 70퍼센트 아래로 내려간 적은 없었다."(248-9)


"루스벨트는 첫 임기의 절반에 걸쳐 연방 대법원의 영향력을 제한하거나 무효화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심지어 연방 대법원의 반발을 북돋기 위한 일환으로서, 일부러 사건을 보내 반뉴딜 판결이 더 나오게 하라고 조장하기도 했다. '뭔가를 할' 적절한 방법을 찾는 일은 순조롭지 않았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뉴딜 법안을 수월하게 승인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방식을 제안했지만, 헌법 개정 절차가 너무 오래 걸리고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이 방식은 거절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지루한 토론이 이어진 끝에 근본 문제는 헌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판사들의 헌법 해석에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국가산업부흥국에 불리한 판결은 만장일치였으나, 그 외의 다른 판결들은 1~3표씩의 표차가 있었다. 다시 말해, 헌법을 바꾸는 대신 대법원의 판사 구성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였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여러 곳에서 의회를 통해 대법원의 판사 수를 늘리자는 제안이 나왔다."(292)


"그러나 대법원과의 투쟁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법원 재정비 안은 뉴딜의 그 어떤 경제 부문 입법보다 더 효과적으로 공화당원들을 단결시켰다. 반면에 민주당원들은 물론 양당의 진보파 개혁가들을 분열시켜놓았다. 또한 루스벨트도 패배할 수 있으며, 대통령의 인기가 어디에서나 탄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말았다. 게다가 루스벨트의 적대자들에게 공격할 결정적 수단을 제공해주었다. 이제 적대자들은 루스벨트에게 '독재자'를 꿈꾸고 있다는 이미지를 씌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이 활개치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기세를 떨치며, 라틴아메리카에서 파시스트 독재정권이 부상하고 있던 1930년대 말에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강력한 공격 수단이었다." "아울러 루스벨트가 간파하지 못한 점은 국민들은 '뭔가를 하라'고 요구하면서도 막상 하려는 일을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294)


제3부 더 강한 미국,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고립주의자들은 대부분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국제연맹이나 국제사법재판소 같은 국제협력기구를 불신했고, 방어를 위해 군사적 대비를 갖출 것을 주장했다. 1930년대에 고립주의자들은 루스벨트가 외교정책을 수립하여 유연성을 발휘하는 데 제한을 가할 만큼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들은 루스벨트의 국제연맹과의 협력 시도를 사사건건 비난했고, 군축을 위한 협력 시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전쟁 채무로 인해 채무불이행에 빠진 국가에 대출을 해주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미국이 교전 중인 국가를 지원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로 중립 법안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루스벨트가 다른 나라들과 관세율을 낮추는 협정을 맺으려 할 때도 반대했다. 이러한 협정은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위임하게 된다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주장이었다. 그들은 '호혜무역 협정' 법안이 나올 때마다 통과를 저지하다가 번번이 실패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그들의 단결력은 증대되어갔다."(317)


"사실 라인란트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세계 강대국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루스벨트만이 평화에 대한 히틀러의 위협을 정확히 헤아리고 있었고, 루스벨트만이 히틀러를 봉쇄하기 위해서 무력으로 위협을 저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져보면, 루스벨트의 적대자들은 미국 국민의 눈을 멀게 하여 세계질서가 서서히 파괴되고 있음을 보지 못하게 했고, 건설적인 정책을 개발하기보다는 루스벨트를 공격하기 좋아했다. 그리고 자국의 심리적·물질적 전쟁 대비를 방해했고, 대통령과의 싸움으로 자신들의 위신을 손상시켰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루스벨트의 외교정책이 평화 유지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36년 8월에 루스벨트는 전쟁을 혐오한다고 공표했으며,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외교정책 수립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1930년대 말의 세계 상황이 평화가 아닌 전쟁을 요구했다는 점이다."(318-20)


# 라인란트 사건 : 1936년 3월 히틀러의 군대가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로 진군한 사건


"루스벨트는 뉴딜정책 초창기 이후로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노변담화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설명했다. 이때의 이야기는 대체로 히틀러에 저항하는 이들을 원조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이 전쟁에 가담하지 않을 최선의 방법이라는 주장의 되풀이였다. 연설을 마무리할 즈음에는 특별히 더 긴박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일부 실업가들이 공장 생산능력의 확대가 현명한 처사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생산능력 확대가 추후에 국가의 과잉생산을 더 부추기기만 할 것을 우려했다. 루스벨트는 이런 우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새로운 방어시설이 요구되어 추가생산 능력이 필요해질 것이라고 말하며, 그렇게 생산 확대를 하지 않으면 위험성이 아주 높다고 강조했다. 또한 국가가 〈전쟁만큼이나 심각한 비상사태를 맞았다〉면서 교전 중일 때와 마찬가지의 헌신과 희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미국이 〈민주주의의 거대 병기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340-1)


"루스벨트는 강력한 행동을 정당화해줄 사건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보았다. 모겐소에게 말했듯이, 〈자진해서 전쟁에 나서기보다는 떠밀려 들어가고〉 싶어 했다. 주일 대사 조지프 그루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문제는 방어의 문제이니 엄중한 계획을 세울 수가 없네.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우리는 그 시점의 환경에 비추어보아 우리의 자원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이용할 수 있는 시기와 장소와 방법에 대해 결정해야 하네.〉 루스벨트가 당시 가장 의욕적으로 나섰던 일은 여론이 어떠한 사건이든 전쟁의 명분으로 인식할 만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1941년 5월 말로 접어들었을 때 그는 연설을 통해 히틀러가 세계 지배의 야심을 품고 있다고 비난하며, 미국의 방위 범위를 국경 너머까지 확대하는 한편 〈무기한의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어 더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겠다고 국민들을 안심시켰다."(348-9)


"루스벨트는 워싱턴 시각으로 오후 1시 직후에 진주만 폭격 소식을 들었다." "루스벨트의 오른팔인 해리 홉킨스는 그 소식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지만, 루스벨트는 덤덤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대꾸했다. 그는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각료 및 의원들과 논의를 시작하는 한편, 양원 합동회의에서 발표할 교서를 준비했다. 루스벨트는 현 상황에 대한 책임 소재를 따질 것이 아니라, 미국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본질적인 사실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양원 합동회의에 나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구했다. 루스벨트는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던 시절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위기에 처해서 자신의 리더십을 기꺼이 따르려는 국가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결국 몬태나 주의 평화주의자 재닛 란킨만이 루스벨트의 요구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 직후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이제 루스벨트의 대통령직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360)


"테헤란 회담은 그 급변성, 변환성, 즉흥성에도 불구하고 연합국 간의 외교술의 모범을 제시했다. 루스벨트는 세계 구조를 미국의 국내 정치에서 수용 가능한 방식으로 구상하려 애썼다. 그래서 고립주의의 저항을 경계하여 전후 평화유지 활동에 미군을 투입하는 방식을 회피했고, 대신 정치적 분산, 신탁통치, 4개 경찰국들에 의해 후원되는 국제기구를 통해 독일과 일본의 힘을 제한하는 식의 체제를 지지했다. 그는 소련의 전후 안보에 대한 요구가 미국의 반식민지주의 및 인종별 투표 경향과 균형을 맞추길 바랐고, 스탈린에게 소련이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데 있어 민의(民意)와 조화시키는 상징적 조치를 취하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군사적 의제를 설정하도록 허용함으로써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구슬렀다. 뿐만 아니라 양국의 협력관계를 굳히기 위해, 또다시 소련의 대일본전 참여를 요구하며 그 승리의 전리품을 분배받을 기회를 제시했다."(396)


"한편 루스벨트는 (최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목표를 군수품 생산량 증대로 설정하면서도) 미국 내의 전시 경제를 다루는 일도 착수했다. 그는 전쟁 개시 첫 해에만 500만 명 규모의 군대를 인가했다.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을 일터에서 끌어내 전장으로 보낸다는 것은, 군수품의 폭발적인 수요로 국가의 생산 능력이 무리하게 동원된 시기에 노동력 부족을 유발할 것이 분명했다." "말하자면 미국의 가장 절박한 문제는 전시 국가가 보편적으로 겪는 현상인 인플레이션이었다. 루스벨트는 이 문제에 대해 포괄적이고 통합된 접근법을 취하여, 전면적 세금 인상, 임금 및 물가 통제, 필수 물자의 소비제한, 전쟁공채 구매의 장려 등 7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의회에 제안했다. 프로그램에는 루스벨트의 신념인 전시에는 부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는 미국 국민 중에서 1년에 세금을 2만 5,000달러 이상 내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406)


"1943년에 들어서면서 3개월 동안 내리 물가가 무섭게 치솟아오르자, 루스벨트는 '현상유지' 명령을 내려 임금과 가격을 현 수준에서 동결했다. 루스벨트는 가격과 임금을 관리하는 주무기관들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 뒤에 물가관리국에서는 39개 상품의 가격을 내리고, 200개 도시의 약 1,000개 식료품에 대해 적정가격을 정했다." "또한 전시생산국에서 점점 더 많은 소비자 상품들에 대해 배급제를 인가해주었고, 마침내 배급제 상품이 소비자 물가지수 산출에 포함되는 품목의 20퍼센트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유연탄 광부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가자 루스벨트는 그 광산을 인계받았고, 결국 노조는 노동자들에게 일터로 돌아오라로 명령했다. 이처럼 가격 통제, 배급제, 정부의 인계가 어우러져서 큰 효과가 나타났다. 통제가 해제되었던 1943년 4월과 1946년 6월 사이에는 연 인플레이션율이 1.6퍼센트에 이르렀다."(411-2)


"미국은 (서반구의 다른 어느 국가보다 많은) 수천 명의 유대인 이민자들을 받아주었으나, 이 숫자는 종국에는 죽음을 맞게 될 수백만 명 가운데 극히 일부만 구해준 것에 불과했다." "루스벨트도 곤경에 처한 유대인들을 동정했지만, 으레 그렇듯 그는 우선 처리할 사항이나 운신 폭을 제한하는 정치적 압력들에 대해 (유대인 구출에 헌신하던) 엘리너 루스벨트보다 더 민감했다. 루스벨트는 이민자를 더 받아들이면 반대파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늘어나 전쟁 수행 노력에 위협이 가중될 것이라는 국무부의 우려에 공감했다. 국내 반대파들에게 포위되어 있다고 느끼던 백악관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루스벨트가 전쟁 수행에 매우 중요한 기술을 지닌 전문가들을 자유롭게 여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이민 절차를 파기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의회는 법이 바뀌면 이민자가 물밀듯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는 꼴이 된다면서 그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기까지 했다."(439-41)


"유대인을 구하는 문제에 이르면, 모든 사람들이 다른 급선무가 있었다. 전시난민위원회가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를 폭파시켜달라고 군에 호소했을 때, 군은 할애할 만한 전투기가 없다고 답했다. 또 유대인 피난민을 수송할 선박을 간청했다가 선박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 번에 수천 명씩 들어오는 비유대인의 수송은 이런 선박 부족 얘기가 나오지도 않았다. 일이 이렇게 이루어진 데는 동맹의 구축, 한 집단에 대한 '편애'의 회피, 적절한 절차와 문서를 내세운 변명, 관료주의적 실수 등 여러 사소한 원인들이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민주당원들은 뉴딜이 '주(Jew)딜'이나 다름없다는 비난에 자극받아 더 비난을 사지 않으려고 주저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 사회가 일종의 수동적 반유대주의에 물들어 있어서, 전국 각지에서 린치 가해자들과 인종차별자들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부여해주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해서였다."(442-3)


"행정학자 배리 D. 칼 교수가 통찰력 있게 간파했듯이, 루스벨트는 합리적 관리라는 척도에서는 점수가 낮은 편이지만, 참모와 각료를 정보 획득과 권한 양도의 방편으로 이용한 면에서는 칭찬을 받아왔다. 이런 접근법이 낳은 주된 결과는 복합적 기능에 이바지한 복합적 배치였다. 루스벨트는 프로그램들을 '조정'할 시스템을 세울 수는 없었지만, 이해관계의 균형을 맞추고 충돌을 중재할 만한 조직망을 만들 수 있었다. 결정권은 자신이 확보한 채로 말이다." "루스벨트에 대한 호의적이거나 비호의적인 평가 모두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의 아주 일관된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리더십에 대한 자신감이 강하며 루스벨트라는 인물 자체가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라는 이미지다. 루스벨트는 계속해서 세상의 이목을 끌면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그의 성공이나 실패는 그의 비전이나 정부 관리 측면에서의 취약성보다는 그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결과였다."(479-80)


"루스벨트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현대 복지국가를 위한 제도적 구조를 만들어낸 일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기관인 공공사업진흥국(WPA)을 비롯해 뉴딜정책 시행 기관들 대다수는 전시에 사라졌지만, 농산물 가격, 퇴직연금, 실업수당, 노사관계, 재무관리를 위한 프로그램들은 그대로 남았다.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업적은 그가 대통령에 재임하면서 정부가 시장의 변동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했던 심리적·정치적 장애물들을 제거한 것이었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덕분에 후임 대통령들은 정부를 창의적으로 이용하는 면에서 예전보다 더 자유로울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트루먼의 페어딜(Fair deal, 자유주의적 국내 개혁 정책), 케네디의 뉴프런티어(New Frontier, 신개척자 정신), 존슨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교육·의료 증진과 빈곤 퇴치를 내세운 국내 사회복지 정책) 정책이 가능해졌다. 로널드 레이건의 일자리 창출 입법은 WPA를 고스란히 본뜬 것이었다."(480-1)


"(뉴딜 프로그램이 경쟁적 이익과 공공복리 추구를 함께 추구했듯이) 루스벨트에게 민주주의란 더 많은 그룹을 정부의 인정과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공공의 장(場)으로 이끄는 것을 의미했다." "루스벨트는 결국 다원주의의 애매성과 복잡성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도시 당수들, 인종차별주의적 대농장주들, 요직 임명을 갈망하는 의원들, 영리에 집착하는 기업 임원들을 통해 복잡하게 성취를 이뤄나갔다. 그토록 애쓰고 바랐지만, 자신의 비전을 예상한 대로 확실하게 성취시킬 정치 행정 구조를 창출할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 재임 동안, 계속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책략 구사, 재정비, 비위 맞추기, 훈계하기, 고무시키기, 회피하기, 얼버무려 넘기기 따위를 거듭했다. 이렇듯 그의 행동은 다원주의적 비전의 특징을 그대로 따르면서 복잡하고 다양하며 칭찬받을 만한 면모와 비난받을 만한 면모를 모두 지녔다. 그러나 언제나 '네 가지 자유'에 대한 신념과 민주주의의 이상이 그 토대가 되었다."(492-3)


# 네 가지 자유(Four Freedoms)

1.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

2. 신앙의 자유

3. (경제적)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4. 공포로부터의 자유(전세계적 군비 축소)


"여러 중요한 방면에서 살펴볼 때, 루스벨트의 대통령 재임은 곧 엘리너의 대통령 재임이기도 했다. 엘리너는 루스벨트를 보완하는 역할을 맡아서 그가 착수하길 주저하는 문제들에 대해 결정을 내린 뒤에 그를 압박하여 자신의 주도를 따르게 했다." "루스벨트가 후대에 전해줄 프로그램들을 만들었다면, 엘리너는 후대들이 프로그램으로 전환할 수 있는 명분과 쟁점에 흥미를 보였다." "엘리너는 각종 의제에 흑인들 같은 그룹을 포함시킴으로써, 뉴딜의 다원주의적 목적의 명맥을 지켜나갔다. 또한 민권을 옹호함으로써, 전시에 진보주의를 경제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로도 재정의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1964년에 공민권법(인종·피부색·종교·출신국에 따른 차별을 철폐할 목적으로 제정된 연방법)이 제정되면서 마침내 1965년에 그녀의 사명이 성취되었지만, 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이 순간을 목격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494-6)


"폴 애플비의 이론에 의거하면, 민주적 제도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그 제도의 관료들은 협력적이었다. 또한 민주적 제도는 유권자들과 화합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상호작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점으로서, 민주적 제도는 공익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이었다. 애플비의 이론체계에는 다소 미해결의 문제가 있었다. 즉, 공익이란 것이 공개적이고 유연하며 상호작용적이고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제도의 필연적인 결과인지, 아니면 그 조직에서 공익이 목적임을 늘 염두에 둠으로써 비롯되는 결과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위대한 민주주의의 목적은 단순한 부분의 합을 뛰어넘는 전체라는 것이 애플비의 신념이었음은 분명하다. 애플비의 이론체계는 루스벨트가 행했던 다원주의적 행정과 정치에 대한 전형적인 이론체계였다. 말하자면, 루스벨트의 뉴딜정책과 전시 행정에 대한 지적 소산인 셈이다. 루스벨트가 남긴 교훈들 가운데 이 부분이야말로 최고의 가르침인 것 같다."(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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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의 연설 - 분열된 국가를 통합시킨 대통령의 연설, 올바른 리더십의 본보기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프롤로그 그때 게티즈버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게티즈버그에서 남군의 리Lee 장군은 뚜렷한 확신도 없이 절체절명의 적진으로 돌진해 나갔다. 그 불운한 진격이 끝난 후 리 장군은 잔류 병력의 소집을 지시했지만 조지 피켓 장군은 다시 끌어모을 병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양 진영은 5만여 명의 병사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고 실종된 이 전쟁에 대한 광범위한 핑계거리를 준비해야만 했다. 리 장군은 남군이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려 했고, 미드 장군은 자신 때문에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이런 혼란과 희망의 상실 그리고 무의미한 죽음들로부터 벗어나 국가적 지표와 자부심 그리고 이상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 추악한 현실을 소중하고 특별한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변형시켰다. 그는 오직 272개의 단어만을 사용하여 그 일을 해냈으며, 그 단어들보다 더 강력한 호소력을 갖춘 것은 없었다."(14-5)


"링컨의 연설은 대학살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벌어진 전투를 추상의 단계로 끌어올렸으며 그것을 통해 그 전투를 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사건으로 만들어냈다." "링컨은 어느 한 전장에서 얻어낸 성과를 남북전쟁 전체에 적용하려 했다. 그는 헌법과 지역주의, 소유권과 국가를 너저분한 논쟁들로부터 떼어내 추상화시켰다. 그의 연설 속에 게티즈버그가 등장하지 않았던 것처럼 노예제도 역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의 논의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을 뛰어넘어 더욱더 깊숙한 핵심으로 파고들어갔으며, 정신적인 투쟁을 통해 원형 그대로 획득되어야 할 위대한 이상을 향해 다가갔다. 링컨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부터 초월적인 의미를 새로이 이끌어냈다." "링컨은 게티즈버그의 험악한 분위기를 진정시켰을 뿐만 아니라 공적인 죄악들과 대물림된 범죄에 오염돼 있던 미국의 역사 그 자체를 정화시켰다."(41-2)


1장 그리스 문화 부흥 시기의 웅변술


"간결함은 단순히 길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스의 웅변에서처럼 어떤 것을 이상화하는 링컨의 기술에는 특별한 것들의 묘사가 억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억제가 미학적인 역설을 창조했으며, 그것에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음에도 미묘한 감동을 자아냈다. 그리스 웅변가들은 도시국가의 규정에 따라 답변할 때를 제외하고는 자기 자신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링컨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모든 시민을 지칭하는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했다. 또한 죽은 자들을 일일이 호명하지 않았다. 전사자들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이들(사람들)'이라 불렸다. 이것은 링컨이 '그들이 여기서 했던 일' 또는 '이들 전사자들'이라고 지칭했던 경우와 같다." "플라톤은 에피타피오스(국장國葬연설)에서 (연설가들이) 시인들의 수사를 제거한 꾸밈없는 언어를 사용했다고 말한다. 산문 형식 그 자체는 정치적 삶으로 회귀하는 것이며, 가족 단위의 애도보다 더 커다란 사회적 목적으로 전이하는 것을 뜻한다."(65)


"아테네인들의 연설에서처럼 링컨의 연설에서 주된 대조는 삶과 죽음에서 나타난다. 플라톤은 에피타피오스가 목적하는 주요한 두가지 임무는 죽은 자를 칭송하고extol 산 자를 분발exhort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죽은 자를 칭송하고laud 살아남은 자를 이끈다lead'와 같은 표현에서처럼 어원이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여 압운을 맞추었다. 장례 연설에는 두 가지 주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죽은 자를 위한 칭송epainesis과 산 자에게 주는 충고parainesis이다." "그리스 저자들은 이러한 주제를 각각의 경우에 확장하거나 축약하고 생략함으로써 발전시켰다. 또한 대부분의 요소들은 그 순서가 변경되거나 강조점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연설 속에 반영되어 드러난다. 그것은 기계적인 공식으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 통찰력으로 나타난다. 링컨의 연설이 경이로운 것은 그 통찰력이 그리스의 연설들과 비슷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점이다."(74-5)


"게티즈버그 전투의 생존자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이 대륙의 토지에 생명의 씨앗을 뿌렸던 것처럼 죽음으로부터 삶을 이끌어낸다. 생존자들은 전사자들이 '모든 것을 다 바쳐 온전히 헌신'했음에도 '더욱더 증대된 헌신'을 떠맡는다. 그 증대된 헌신은 생존자들이 그전에 느꼈던 헌신을 넘어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사자들이 제공해준 궁극적인 그 어떤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전사자들은 오직 살아있는 자들만이 완수해낼 수 있는 '남아 있는' 임무를 물려주었다. 죽은 자들은 나라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가 완수해야 할 진로를 한 걸음 더 진전시킨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앞에 놓인 그 임무를 위한 교훈이었다. 〈국가가 살 수 있도록who here gave their lives / 여기 목숨을 바친 사람들that that nation might live〉. 또한 그 국가가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라는 실험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80-1)


2장 게티즈버그와 죽음의 문화


"도시 경계 외곽으로 매장지를 이전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위생상의 문제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왔다. 즉, 교회 묘지와 도시 내에 위치한 묘지가 현대화된 도시계획에 방해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죽음의 문화를 연구했던 필립 아리에스의 추종자들은 관념적인 요인들이 훨씬 더 강하게 작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교회 묘지에 드리워진 신학적 음울함으로부터의 탈피, 자연으로의 회귀, 소멸과 생성을 동일시하는 범신론적 사상과 같은 태도에서 그리스적인 사고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월주의자들은 세미테리cemetery가 '인생의 배움터'로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묘역은 삶에서 동떨어진 채, '그저 침입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담으로 가로막혀' 주변과 소통이 단절된 협소한 영역이었다. 반면에 새로운 세미테리는 죽음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한 방편으로서 자연을 벗삼으려는 자들의 발길이 잦은 장소인 것이다."(85-6)


"그러므로 게티즈버그의 봉헌식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매료되어 공동묘지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19세기 문화의 한 일면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 의식을, 단순히 즉각적이며 어쩔 수 없이 연상하게 되는 남북전쟁과 군사적인 의식이라는 맥락 속에서만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죽은 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자연의 새로운 일부분을 헌납하는 것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의식에 대한 더 크고 더욱 오래 지속되어온 반응 양식을 완전하게 설명해낼 수 없다." "공동묘지는 19세기에 경계성을 나타내는 최고의 장소였다. 그것은 삶과 죽음, 현세와 영원, 과거와 미래 사이의 경계지역이었다." "만약 자연의 순환이 자연스러운 최면술의 역할을 한다면, 죽은 자들과 가까이 있다는 감각은 강신술의 한 형태일 것이다. 스토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가 죽은 자와의 교류를 통해 우리 자신이 더 순수해지고 더 나아지고 더 현명해짐을 느끼게 된다.〉"(94-9)


"링컨은 에버렛과는 달리 어느 한 병사를 추모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 대륙에서 이루어지는 한 국가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시련에 의한 시험과, 새로운 자유의 탄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어머니는 단지 그 나라를 태어나게 한 대륙만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링컨의 연설이 아테네의 에피타피오이와 얼마나 닮았는지 살펴보았다. 그리스의 연설에서도 역시 선조들progonoi의 전통은 언급되지만, 대지 그 자체의 모성이 더욱 강조되며 아테네 시민을 '흙에서 태어난autochthones'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지역에 대한 애국적인 애착심과 국가주의적 종교의 공통된 주제이다. 이러한 생각이 '처녀처럼 순결한 대륙' 위에 미국이 건립되었다는 진부한 표현을 낳았던 것이며 이것은 거짓된 은유(대륙을 '처녀'로 만들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무시되었고 또 제거되었다)임에도 끈질기게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아메리카 신화의 너무도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103)


"어떤 사상으로부터 탄생한 국가는 그 사상이 생명을 주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사상을 다시 주입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그 사상과 그 사상의 지지자들을 다시 살아나게 한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탄생'으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유용한 것이다. 연설문의 마지막 문장 속에 나타난 '자유의 새로운 탄생'이라는 표현은 우리들을 첫 문장의 기적적인 탄생으로 다시 데려가주며, 또한 이러한 이미지의 이면에는 '다시 태어난'(요한복음 3장 3절~7절) 사람들이라는 성서적 개념 역시 드러난다." "독립선언문은 영적 재탄생의 도구로서 복음서를 대체했다." "연설 끝 부분에 표현된 '남아있는 그 위대한 임무'는 선조들의 위대한 업적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일한 과업으로서 그들이 항상 행하고 있는 것이며 모든 투사들을 국가의 영원한 이상인 영웅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119-20)


3장 초월주의 선언


"링컨의 연설에는 몇 가지 사안들이 빠져 있었다. 게티즈버그 연설에 정작 게티즈버그에 대한 언급은 없다. 노예제도에 대해서도 그렇거니와 더 놀라운 것은 미합중국 자체에 대해서도 거론하지 않고 있다. (남부도 물론 언급하지 않는다.) 1863년의 노예해방령과 관련한 주요 내용도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옹호는 물론 변호도 하지 않고 있다. 연설에서 언급된 '위대한 과업'은 노예해방이 아니라 자치의 보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자치를 이야기할 때 백인뿐 아니라 당연히 흑인들까지 포함한 자치라고 생각하지만, 게티즈버그에서 연설을 할 당시까지도 링컨은 아프리카 출신 미국인들의 선거권에 대해서는 전혀 주창하지 않았다. 예술적이며 웅변적이기도 한 게티즈버그 연설은 당대의 역사적 공간에서 가장 까다롭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주요 사안에 대해 교묘히 회피하고 침묵했던 것 때문에 링컨은 살아 있는 동안 줄곧 비난을 받았다."(124)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파커는 노예제도 반대에 링컨보다 더 솔직했다는 이유로 윌리엄 수어드를 지지했다. 그러나 수어드는 바로 그 솔직함 때문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에서 탈락했다. 링컨은 더 조심스러웠고 우회적이었다." "링컨의 정치적 기반인 일리노이 주는 후일 웨스트버지니아 주가 된 전체 지역보다 훨씬 남쪽인 지점(남부도시 카이로)에까지 이르렀으며 또한 켄터키 주와 버지니아 주에 속한 대부분의 지역보다 훨씬 남쪽으로 뻗어나간다. 링컨이 더글러스와 토론을 벌이기 10년 전이었던 1848년, 일리노이 주에서는 널리 퍼진 '흑인 공포증'으로 자유를 얻은 흑인들이 주 내로 이주해오지 못하도록 하는 수정법안을 투표에 붙였다. 흑인 전입금지에 관한 주 전체의 투표율은 70%였지만 남부와 몇몇 중부의 카운티에서는 90% 이상이 찬성했다. 링컨은 자신이 속해 있는 주의 인종적 지도를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때그때의 청중들에 따라 노예제도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가늠하고 있었다."(125-6)


"링컨은 흑인이 백인에 비해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을 선호했으며, 흑인을 사회적으로 열등한 상태로 유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조지 프레더릭슨이 지적했던 것처럼, 흑인이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에 대해 확실성보다는 불가지론을 표명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링컨을 비롯한 그 어느 누구도 (흑백 인종의) 사회적 혼합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다. 링컨은 이러한 정서와 관련되어 있고 또 그 당시로는 해결할 수도 없었던 문제들과 정치적 평등의 문제가 한 묶음으로 다루어지게 되는 것을 꺼려했다. 그에게, 제대로 확립시키기는 어려웠지만 실현 가능한 최소한의 것, 즉 그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최소한, 인간을 자산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링컨은 그 결과들을 하나하나 명쾌하게 밝혀나감으로써 그러한 태도를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어나갔다."(133-4)


"만약 어떤 흑인이 타인의 자산이 아니라 스스로를 책임지는 인간이라면, 자신의 노동으로 얻게 된 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흑인들이 나와 동등하지 않다는 더글러스 판사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들과 나는 분명 피부색이 다르며, 어쩌면 도덕이나 지적인 천부의 자질도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획득한 빵을 다른 어느 누구의 허락 없이도 먹을 권리가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나와 동등하며, 또 더글러스 판사와 동등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등합니다.〉 링컨은 한 가지 편견에 대항하기 위해 또 다른 편견을 활용하려 했다. 미국인들은 성경에서 인용된 것이라면 우선적으로 호의를 보이는 성향이 있다. 링컨은 언제나처럼 뼈 있는 내용의 성경 구절을 활용하고 있다. 인류를 향한 예외 없는 구절인 '그대의 얼굴에 땀을 흘리고 나서야 빵을 먹을 수 있게 되리라'(창세기 3장 19절)는 적어도 흑인들의 입장에서는 냉소적인 권리인 것이다."(136)


# 또 하나의 논리 :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천부인권의 원리 아래 왕정을 반대한 독립선언문의 정신 주창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고결함과 이상과 간결함을 이룩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1850년대의 대부분의 시기를 그 시대의 가장 민감한 문제들과 더불어 독립선언문의 위대한 원칙과 끊임없이 연관시키며 보냈기 때문이었다. 만약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난 것이라면 그들 스스로 자산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은 그를 소유하는 군주에 의해 지배될 수 없다. 그들은 최소한의 의미에서도 자기 자신의 소유자로서 스스로를 다스려야만 한다." "연설에서 이 문제들의 구체적인 사례들이 언급될 필요조차 없다. 다시 말해 자유롭게 국가의 이상을 표명해온 국가라면 오랜 시간에 걸쳐 어느 특정하거나 제한적인 개혁들, 심지어 노예해방만큼 중요한 개혁들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국가의 이상에 다가가기 위해 자주적인 노력을 기울여왔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혼란스러운 특별한 사건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며 오랫동안 품어온 평등과 자치라는 과업으로 복귀하는 것이다."(169-70)


4장 사상의 혁명


"링컨은 독립선언문을, 추구해야 할 초월주의적 이상의 한 표현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링컨으로서는 독립선언문을 건국 문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시어도어 파커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몇 가지 생각들을 확실히 해두어야만 했다. 파커의 견해에 의하면, 남부 지역의 주들이 한 국가로서 미국의 비전을 부정한다면 미국의 비전을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남부에 그대로 남겨두고 합중국 내에서 오염인자가 될 남부 지역의 주들을 합중국에서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선언문이 단일 국민의 주권 행위였다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라 해도 그 국민은 분열될 수 없는 것이었다." "링컨이 '나의 정의로운 주인인 미국 국민들'이라고 선언하며 권좌에 오른 그 순간부터 그 두 가지 견해─국민은 확실한 역사적 실체이자 독립선언문의 주체로서 헌법적 실체라는 파커와 웹스터의 견해─는 링컨의 말과 행동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었다."(187-8)


"따라서 호전주의자들의 지위 문제에 관해 링컨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에게 이 문제는 전쟁이 아닌 반란이었다. 남부군은 외국 호전주의자들의 집합체가 될 수 없었다. 취임연설에서 '합중국은 부서지지 않는다'고 천명했듯이 그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도, '연방에서 탈퇴한 주들'이라는 표현을 잘못된 것이라는 일관된 주장을 펼쳤다. 그 주들은 탈퇴가 가능하지 않았으므로 탈퇴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임스 맥퍼슨이 그랬던 것처럼 링컨이 마침내 독립전쟁을 시민 봉기가 아닌 외국과의 전쟁이라는 견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사실, 북부는 대부분의 경우 국제법하에서 해외 강대국들과의 관계 때문에(예를 들어 외국 선박에 영향을 끼치는 봉쇄 조치의 관리) 교전국으로서의 절차들(예, 죄수의 교환)을 채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제퍼슨 데이비스의 군대를 남부를 약탈하는 도적떼로 여겼던 링컨에게는 법적인 가설일 뿐이었다."(189)


"〈노예해방은 정서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인 힘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마력이나 증기동력이 측정되고 평가될 수 있는 것처럼 보존되고 평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측정된 바에 의하면, 흑인들의 지지는 우리가 잃고 살아가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입니다.〉" "링컨은 스스로 언급했던 것처럼, 노예들의 힘마저 말이나 증기의 힘과 같은 물리적은 물자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군의 사기라는 군사적인 이유에서도, 복합적인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중요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노예해방이라는 위협과 그것의 실질적인 실현은 남부군의 사기에 타격을 입혔으며 북부군의 희망을 더욱 강화시켰다." "링컨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 호프스태터를 비롯한 비판자들은 노예해방의 동기로는 '저열한 것'이라며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새 세대의 흑인 역사가들은 그의 말에서 흑인들의 공헌을 인정하려는 현실주의적 자세를 찾아냈다. 즉, 노예들을 위해 노예해방을 추진한다는 생색을 내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201-4)


"(흑인 '투사들'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링컨이 노예해방에 대해 육군과 해군의 총사령관으로 자신의 권한을 제한했던 헌법적 도덕관이 가져다 준 여러가지 부수적인 효과 중의 하나였다. 민간의 권한으로는 남부의 제도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서약을 지킴으로써 링컨은 남부 사람들에 맞서 도덕적인 장광설을 구사하지 않고도 그들이 감당할 만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질서가 회복되었을 때, 그들은 통치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또한 엄격하게 지켜진 군사적 조치는(비록 간접적인 압력을 가중시키기는 했지만) 접경지역 주들의 자발적인 노예해방과 1865년 모든 노예의 해방을 선언한 제13차 수정법안을 이끌어낸 시민적 합의의 과정을 훼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방적인 분리는 있을 수 없음을 주장하여 일방적인 노예해방을 피하는 방법으로 링컨은 모든 국민을 위한 헌법(노예조항을 비롯한 모든 조항들)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시켰다."(204-5)


"링컨은 개별적인 것, 지역적인 것, 분열적인 것을 극복하려 했다. 그는 이상적 국가의 모습을 향한 노력으로 전쟁 이후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 위대한 책무'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가 개별적인 주보다 그 시기와 중요성에서 앞선다는 제임스 윌슨, 조지프 스토리 그리고 대니얼 웹스터와 같은 법률가들이 단순한 이론이 이제는 미국의 전통 속에 살아있는 실체가 되어 있다. 이러한 이론의 성과들은 한꺼번에 드러났다. 독립전쟁 시기까지는 (연합된 주들이라는 의미에서) '합중국the United States'은 언제나 복수명사로 사용되어왔다. 즉, 'The United States are a free government'라고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게티즈버그 연설 이후부터는 서서히 단수명사로 바뀌어 'The United States is a free government'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그것은 링컨이 연합을 신비주의적인 희망 사항이 아니라 헌법적인 실체로 만들면서, 자신의 표현뿐만 아니라 행동을 통해 표현해낸 투철한 철학의 결과라 할 수 있다."(205-6)


5장 문체의 혁명


"링컨의 산문적 특징으로 드러나는 간소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연구의 결과이다. 링컨 당대의 고대 수사법 해설자인 블레어는 꾸밈이 없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설령 문장의 정상적인 질서를 뒤바꾸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적절한 단어들이 두드러지게 배치되어야 한다. 젊은 시절에 링컨은 일종의 언어적 운동경기를 치르듯 이 문제에 몰두했다. '부서진다 해도, 나, 역시 어쩌면, 그것에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다Broken by it, I, too, may be; bow to it I never will.' 그는 일생을 통해 문법적인 도치를 즐겨 사용했지만, 그것을 제대로 연구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는 두 번째 취임연설에서 '우리들은 간절히 바라며 열정적으로 기도 드립니다We fondly hope and fervently pray'라 하지 않고 '진정으로 간절히 우리들은 바라며, 진정 열정적으로 우리들은 기도 드립니다Fondly do we hope, fervently do we pray'라고 표현했다."(231)


"또한 블레어는 균형 잡힌 대조법을 통해 뜻을 명확히 할 것을 권했다." "링컨은 1854년까지 미국이 처해 있었던 적대적인 분할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남부는 승리에 들떠 무리한 시도를 획책하려 하며, 북부는 배신감에 노여워 자신들의 잘못을 질책하며 복수심에 불타오릅니다. 한쪽은 선동하고, 다른 한쪽은 저항합니다. 한쪽은 조롱하고, 다른 한쪽은 무시합니다. 한쪽은 공격하고, 다른 한쪽은 보복합니다.〉" "블레어는 이러한 모든 장치들이, 의미를 더 명확히 하고 진실을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정직한 의도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자멸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분명, 이것이 바로 링컨의 웅변이 갖고 있는 비밀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소리로 나타내기 위해 큰 소리로 읽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글로 옮겨 썼다. 그는 분석적인 훈련에 열성적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가장 무미건조한 과목이라 생각했던 문법을 즐겨 연구했다."(231-3)


"그랜트 장군에 대한 링컨의 존경심은 부분적으로, 군사 작전에 대해 설명하거나 주장을 펼칠 때 애매모호했던 매클렐런과는 달리 그가 언어를 적확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제임스 맥퍼슨은 링컨이 언어의 힘으로 전쟁에서 이겼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두 가지의 반쪽 진실은 적어도 하나의 완벽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즉, 논점이 분명한 언어들은 그랜트와 링컨이 놀라울 정도의 상호교감과 군사적 의견일치를 이룰 수 있게 한 매개물이었다는 것이다. 1864년 8월 17일에 링컨이 보낸 전보에는 오해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계속 불독처럼 물고 늘어지고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버리시오. 최대한으로.' 이 전보문을 읽은 그랜트는 폭소를 터트리며 '대통령께선 그 어떤 고문들보다 배짱이 있다'고 말했다. 링컨이 전보문에 사용한 수사에는 단음절과 스타카토식의 박자가 있다. 〈받아들이지 마시오. 확고한 자세를 유지하시오. / 그 지점에서 확고히 지키시오. 마치 강철 사슬처럼. / 매일, 매시간 경계하고 강압하시오.〉"(244-5)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긴 라틴어 어원의 단어들 대신 간략한 앵글로색슨의 단어들을 사용하여 '세속적인' 문체를 만들어냈다며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링컨은 자유 속에 태어난born in freedom 국가로 표현하지 않고 자유 속에 잉태된conceived in Liberty 국가라 표현하며, 하나의 진실에 서약한vowed to a truth 국가라고 표현하지 않고 하나의 명제에 헌정된dedicated to [a] proposition 국가, 그리고 병사들의 헌신devotion을 보여주는 봉헌된consecrated 국가라고 표현하고 있다. 온통 라틴어 어원의 단어들이다. 심지어 링컨은 과거에 '명제proposition'와 같은 '비문학적인' 단어를 사용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비록 링컨이 전원묘지 운동으로부터 다산의 이미저리를 빌려와 사용하긴 했지만,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그 자체가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라틴어인) 전보문적인telegraphic 문체라 할 수 있다."(251)


"링컨은 민주주의의 일반원리와 자명한 이치들을 유클리드 수학의 '명제들'과 비교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사고를 지닌 초월주의자였다. 그는 추상적인 단어들이 잘 어울리는 과학의 시대와 교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대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그의 한결같은 주장은 '있는 그대로 말하기'와 같은 거친 방법보다는 연설의 내부적인 '연결'과 '실행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농업적인 미래가 아닌 기계론적인 미래를 연설하고 있었다. 그의 연설은 그 자신이 전투를 위해 시험을 거쳐 발전시킨 그 기계처럼 경제적이면서 간결하고 내부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비록 그 언어들이 전쟁의 와중에서 평화의 무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동원된 것이지만, 그에게 언어는 바로 무기였다." "그가 연설에서 제시한 상징은 경험에 의한 시험을 거친 것이었으며, (얼음 속의 불처럼) 침착한 추상적 개념 속에 감성적 긴박감을 지니고서 완벽하게 표현된 국가적 가치를 호소하는 것이었다."(252)


에필로그 그 밖의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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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 개정판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1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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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1장 감추어진 시간들


"네 개의 복음서 모두 예수의 사역의 시작을 세례 요한의 급진적인 개혁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찾고 있다. 예수는 동물 가죽으로 만든 거친 옷을 걸치고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누가 3:7)이라며 독설을 퍼붓는 거친 사람과 함께 행동했다." "예수가 에세네파의 영적인 은둔으로부터 벗어나 침례파(세례 요한)의 행동주의적인 선언으로 옮겨갔을 때, 그의 가족들은 더욱 심각한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마태와 누가의 복음서는 예수가 광야에서 체험한 일들이 갖는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특히 누가는 예수가 받았던 교육에 가장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난 이후에 예수가 겪었던 시험들을 묘사하고는 있지만, 서술방식은 광야에서 마주친 사탄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을 상징으로 삼아, 그가 사춘기와 청년기에 겪었던 정신적 탐구의 전 과정을 축약해놓았음이 분명하다."(50-1)


"광야에서의 유혹은, 아버지가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남들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다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위대한 인물들은 종종 매혹과 혐오 속에서 소명에 대해 번민하면서, 어렴풋하던 그것들을 명쾌하게 만들어가는 청년기를 겪곤 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위대한 인물의 형성에 나타나는 이러한 경향을 '후퇴와 복귀'로 일반화시켜 정의했다. 예수의 경우 보다 적절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선택된 땅을 향해 40년 동안 나아갔던 유대 민족이 황야에서 겪었던 시련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이 누가에 의해 예수의 40일간의 고난이라는 특별한 서술로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배고픔과 극기를 알게 해준 가장 중요한 영적 형성 과정을 거치고 난 후, 천사들은 비로소 더욱 강해지고 편안해진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준다.(마태 4:11)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막에서 만나를 먹었던 것과 같은 일이다."(60-1)


2장 사역을 시작하다


"(요한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사역에 나서기 시작한) 예수의 그 다음 행로는 분명 요한을 당혹스럽게 만들 것이었다. 실제로 예수는 초기 고행 수도로부터 멀어져 갔을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진 것처럼, 아주 빨리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속세의 사람들과 뒤섞였다. 그가 단순히 요한처럼 단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통적인 식사 관습마저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는 죄인들, 창녀들, 그리고 로마의 부역자들과 함께 식사했다." "예수에게 있어 먹보이며 술꾼이라 불리는 일은 결코 가벼운 비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레위의 율법에 근거한 비난이었다. 신명기 21장 20절에는 지파의 관습에 반항하는 아들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으며, 지파의 장로들 앞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처벌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예수가 그처럼 너무 급진적이었으므로 처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64-5)


"예수는 기적을 위한 기적은 일으키지 않았으며 그에게 기적을 일으켜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을 꾸짖었다.(마태 12:39, 16:4, 마가 8:12, 누가 11:16) 그의 기적들은 자신이 가져올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한 가지는 바로 사람들을 깨끗한 자와 부정한 자, 가치 있는 자와 가치 없는 자, 존경받는 자와 존경받지 못하는 자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예수가 일으킨 기적들 중 많은 것들이 유대인이 아닌 로마 백부장이나(누가 7:9) 튀루스(두로)의 여인(마가 7:29) 혹은 사마리아의 나병환자(누가 17:16) 등과 같은 아웃사이더들을 위해 행해졌다. 대부분의 기적들은 유대인들이 접촉조차 않으려고 하는 문둥병자, 창녀, 불구자, 천덕꾸러기, 이교도 혹은 병으로 인해 부정해진 자들(그로 인해 '귀신들린 것'이므로)과 같이, 부정한 자들과 관련하여 일어났다."(76-8)


3장 급진주의자, 예수


"복음서들은 부유함이 영혼의 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 권력에 대해, 특히 정신적인 권력에 대해서는 한층 더 강력하게 경고한다. 예수는 자기들끼리 혹은 남들을 넘어서는 권위를 갖추려 하는 제자들을 거듭해서 꾸짖는다.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크게 될 것인지를 묻자 예수는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마태 18:4-5)라고 대답했다. 제자들이 거듭 자신의 서열에 대해 논쟁할 때 예수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마가 9:35)라고 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지침으로 삼았던 규칙은 높은 자리를 피하라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낯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누가 14:11)"(96)


"예수는 급진적인 인류평등주의자였다. 남녀평등은 가부장 사회였던 예수의 시대에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어서 남자 제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가 그 여자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게다가 상대는 사마리아 여인이었던 것이다.(요한 4:27)" "예수를 대접하기 위해 부엌에서 일하고 있던 마르다를 돕는 대신, 예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이유로 칭찬을 받았던 마리아의 이야기는 아주 오랫동안 현실 생활과 대비하여 명상적인 생활이 더 훌륭하다는 근거로 이용되었다.(누가 10:38-42)" "하지만 웨스턴 신학대학의 제롬 너레이 교수는 예수 시대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철저한 연구 끝에, 예수가 당대에 허용된 공간을 벗어나 지식인의 세계로 들어서는 행동 때문에 (선생님의 발치에 앉아 있었다는 것으로 나타나는) 비난받을 수도 있는 여인을 옹호했던 것임을 밝혀냈다."(102)


4장 종교를 거부하다


"예수는 정결예식과 안식일이 지니고 있는 형식주의뿐만 아니라 동물을 희생제물로 쓰는 성전에서의 모든 제사를 비판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요한 9:13) 예수는 사무엘상 15장 22절의 〈순종에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제물로 쓸 짐승들을 팔고 사는 것과 그것들의 거래에 사용되던 금전을 성전 경내에서 내쫓았을 때, 짐승 제물을 비난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는 단지 장사꾼들이 '내 아버지의 집'(성전 그 자체)을 장사꾼의 장터(요한 2:16) 혹은 도적들의 소굴(마가 11:17)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만을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예수는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통해, 이미 타락했으며 썩어가고 있다고 여기던, 제물을 바치던 제도 자체를 통박했던 것이다."(122-4)


"제사장들과 예수 사이의 적대적인 반목을 생각해보면, 그의 제자들 중에 제사장이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네 개의 복음서나, 바울의 편지에서 '히에레우스'(hiereus, 제사장)라는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는 어느 누구도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바울 자신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고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그가 설립한 교회들 중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호칭으로 부른 사람은 없었다. 신약성서에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들을 13번 언급한다. 사도, 예언자, 교사, 기적을 행하는 사람, 병을 고치는 사람, 남을 도와주는 사람, 관리하는 사람, 여러가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12:27-28), 지혜로운 사람, 지혜를 해석하는 사람, 영혼을 분별하는 사람(12:8-10)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4:15) 등이다." "그것들은 모두 역할을 나타내는 것이지 직책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128-9)


"예수는 대제사장과 제사장 무리(사마리아 지역의 그리심 성전을 파괴했던 계급)가 피해 지나쳤던, 치명상을 입은 한 남자를 도와주었던 사마리아 여행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드러냈다.(누가 10:30-36) 부상을 당한 그 남자는 거의 죽게 될 지경이었지만 레위 법에서는 죽은 사람을 만지면 그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 문장에서 계율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이 '피하여 지나갔다(antiparelthon)'라며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중의 복합동사를 사용한 이유였다. 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단순히 구원자가 지닌 착한 심성을 보여주기 위해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유대 제사장들의 비인간적인 정결규례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 이야기는 바로 '종교'의 형식주의에 대한 예수의 비난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133)


5장 하나님의 나라


"신약성서의 초기 저작물들은 그리스도가 죽은 지 20년 후에 기독교 '교회들'에게 쓴 바울의 편지들이었다.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번역되는 그리스 단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 즉 '회중'이며, 이 단어는 단 하나의 복음서에만 등장한다(마태복음). 사도행전 19장 32절과 40절에서는 '군중'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바울이 편지를 보냈던 모임들은 전혀 계급적이지 않은 집단이었다. 그는 그 집단의 지도자에게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성직자가 없는 회중에게 보낸 것이다. 더 나아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교회 건물을 의미하는 교회도 없었다. 회중은 집에서 모임(oikoi)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바울이 기독교도들을 말할 때 '믿음의 식구들(oikeioi)'이라 부르는 것이 표준이었다.(갈라디아서 6:10)" "그러므로 사도로서의 베드로와 바울은 주님의 형제로서의 사도가 아닌, 예루살렘 회중의 '기둥들' 중 하나인 야고보와 대비하여, 단순히 안디옥에 모인 회중에 보내진 사절인 것이다."(142-3)


"만약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예수는 왜 왔던 것일까? 그는 처음부터 이 문제에 대해 거듭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온 것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마가 1:15, 누가 10:9-11) 여기서 '나라'(basileia)에 해당하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왕국'으로 번역되지만, 그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왕국은 어떤 장소나 정치적인 체제를 나타내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예수의 실존 그 자체인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주기도문에서 우리들에게 '나라가 임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라고 했으며, 그 나라는 종말Eschaton, 즉 세상이 완성될 때에만 완전하게 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예수는 또한 처음에는 설교와 치유, 그리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는 것으로 이미 그 나라가 임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창조의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 것이다."(150)


6장 지옥으로 내려가다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성전에서 제의를 훼방했던 일을 예수가 체포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는다. 광야에서의 시험을 예수의 사역의 시작으로 삼았던 누가처럼, 요한은 이 에피소드를 사역의 시작으로 꼽았으며, 이런 일화들이 예수의 공적인 사역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요한은 나사로를 살려낸 일을 예수가 체포된 원인으로 꼽는다. 예수가 마르다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이 사건은 메시아적인 행위였다. 이 사건은 예수를 생명의 주님으로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으며, 그러므로 그는 죽어야만 했다." "사실 이것은 생의 경계에서 격렬히 고뇌하던 예수가 자기 자신의 무덤 속으로 들어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베다니로 돌아가기를 주저하거나, 다가오는 어둠에 대해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의 영적인 격정과, 그가 보이는 눈물로 복음서에 나타나 있다."(165-6)


7장 하나님의 죽음


"만약 우리들이 예수의 피에 의해 구원받은 것이라면, 그의 피가 아버지에게 바치는 희생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예수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린 것이지, 성난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주獻酒로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방법이었다. 성서 속에서 예수의 희생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또 다른 구절들이 있다. 바울은 예수에 대해 '힐라스테리온(hilasterion)'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십계명에 새겨진 돌을 집어넣는) 법궤의 금으로 만든 덮개를 뜻하는 것으로(출애굽기 25:17) '자비의 좌(속죄제물)'로 알려져 있으며, 속죄의 날에 피가 흩뿌려졌던 곳이다." "즉, 예수는 새로운 속죄제물이며, 그곳에서 인간의 적들에 대항해 그 자신의 피가 뿌려져, 아버지와 결속되는 것이다."(202-3)


8장 하나님의 삶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앞으로 있을 식사를 위해 기도한다. 〈앞으로 있을(epiousios) 양식을 오늘도 우리에게 주십니다.〉 '앞으로 있을'에 해당하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형용사인 'epiousios'는 '현존하는' 혹은 '앞으로 닥쳐올'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들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 어원을 '현존하는'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그 문장을 즉시 먹을 수 있는 빵(일용할 양식)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기도문 전체의 내세론적인 맥락은 예수가 마지막 잔치를 기다리며 포도주를 아주 조금만 마시겠다고 했던 부분과 일맥상통한다. 예수가 했던 많은 말과 행동들은 마지막 잔치를 향하고 있다. 마지막 잔치의 특징은 궁극의 성취를 예시豫示하는 충만함과 풍부함이다." "예수가 현생에 있는 동안 베풀었던 성찬은 단지 현재의 배고픔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완전한 성취를 위해 하늘나라를 가져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예수는 훨씬 더 심한 목마름을 만족시키기 위해 온 것이다."(214-5)


맺는 말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성을 인간의 가장 숭고한 능력이라고 찬양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인 이상을 부인하기 위해, 적절한 때에 등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지닌 최고의 능력은 사랑, 즉 자기 자신을 비우는 예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다음과 같은 글을 쓸 때의 성 바울보다 예수의 뜻을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고린도전서 13:1, 13)"(2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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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그렇게 전해지지 않았다 - 개정판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3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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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복음서는 무엇일까?


"그동안 복음서의 장르는 빈번한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복음서는 전기傳記가 아니며 역사서도 아니고 학술논문 또한 아니다. 복음서의 형태는 그것의 쓰임새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초기 신자들의 삶과 기억과 기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다. 복음서는 그 자체로 기도의 한 형태인 것이다. 예수는 전기傳記로 시작되어 교의敎義로 마무리되었다고 얘기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가 진실임을 알고 있다." "부활 직후의 예수를 알게 되고, 믿게 되었던 초기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전기적傅記的인 기억들은 훗날 복음서들이 작성되기 시작할 무렵에 적절하게 조정되었다. 전기적인 기억들은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예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에 부합될 때에만─부활이 바로 그가 메시아임을 증명했다는─기록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 신성한 글에 지속적으로 의존해야만 했다."(12-3)


"그렇다면 복음서란 무엇일까? 그것은 신성한 글에 기록되어 있는 신성한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본 예수의 의미에 대한 묵상이다. 이 묵상은 공동의 행위로서, 부분적으로는 초기의 성찬식에서 생겨났으며 부분적으로는 성찬식에서 사용하기 위해 많은 기독교인들의 설교와 기도를 통합한 것이었다. 그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처해 있던 특별한 상황들에, 줄곧 전해져오고 있던 신성한 역사를 적용하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에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은 물론, 예수가 자기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함께 겪었던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자신들의 공동체에 내재內在하고 있다는 의식에 따라, 구성원들은 '만약 지금 예수가 있다면 어떻게 말했을 것인가'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늘 함께 있기 때문에, '예수가 지금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물었던 것이다. 예수의 삶은 지속적으로 그의 구성원들 사이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15-7)


제1장 마가복음 : 예수의 고통받는 몸


"마가의 복음서는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 공동체와 함께, 공동체를 위해 작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지역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들까지 언급되어 있다." "그렇게 특정한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의 내용을 참고할 때) 자신들이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공동체에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경우엔 그것을 배제했다. 따라서 예수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그들 가족 간의 불화에 대한 마가의 유별난 관심, 두려움에 떠는 여성 제자들의 행동에 대한 언급 같은 것들은 배제되었다. 자신들의 지역과 관련된 내용들 중에서 마가의 복음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박해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마가의 청중들에게는 특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마가는 비정상적이라 할 정도로 공동체의 고난에 철저하게 집중하고 있다. 이 복음서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겪어야 할 일들을 무척이나 모진 말들로 설명한다."(29-30)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텐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출애굽기 3:13-14) 이것보다 더 '고등한 그리스도론high Christology'은 있을 수 없다. 사실 이 한 구절 때문에 우리는 예수가 대제사장에게 조사를 받을 때 〈나다〉라고 한 대답의 중요성을 더욱 깊게 생각해야 한다." "예수가 펼쳤던 주장을 제기하는 자들은 누구나 저항을 겪게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마가복음에 기록된 박해의 진정한 이유이다. 예수의 신비한 몸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이 제기하는 주장의 불경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마가의 제자들 스스로가 메시아인 것이다."(60-2)


"그렇다면 박해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조엘 마커스는 마가가 제시한 고등 그리스도론 그 자체가 도발이었다고 지적한다. 60년대 후반에 예수의 제자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쫓아냈던 열심당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세속적인 통치와 같은 것들을 가져다주지 않는 메시아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마가의 시대에 이 문제는 내분의 지속적인 원인이었으며, 그것은 공동체 바깥에 있던 사람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형제들 내부에서도 박해로 인한 압박 때문에 예수의 메시아적 주장을 저버리는 제자들이 있었다. 이 복음서에서 예수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으로 묘사된 제자들과 같은 인물들이 마가의 공동체 내에도 있었던 것이다." "마가의 사람들은 유대인이든 이교도든 상관없이 자신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 즉 예수는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스러운 대리자라는 것을 믿지 않는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박해의 원인이었다."(62-4)


제2장 마태복음 : 예수의 가르침을 주는 몸


"마태의 복음서는 그의 공동체가 바울과 마가에 의해 알려져 있던 것보다 더 형식적인 절차와 체계를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마태는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을 위해 집필했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안디옥이었을 것이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한다. 이곳은 바울의 시대에는 유대인과 이방의 형제자매들이 섞여 있던 곳이며, 베드로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논쟁거리가 되었던 곳으로, 마태복음을 처음으로 인용했던 이그나티우스와 디다케의 저자들이 근거로 삼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을 훈련시키는 학교가 있을 만큼 발전된 도시였는데, 체계적이며 교훈적이고 현학적이기까지 한 이 복음서의 특성으로 인해 그런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데 활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활용했는지와는 관계없이, 이 복음서는 그러한 용도에 특히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93-5)


"마태와 누가는 인간들 사이에 나타난 예수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제시하며, 예수의 탄생이 지닌 메시아적 증거들로부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이런 방식으로 탄생 이야기는 수난과 부활 이야기와 함께 '북엔드bookend(세워놓은 책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해주는 것)'를 이룬다. 탄생 이야기는 예정되어 있는 유대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한편으로는 예수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가는 두 가지 행로를 갖추고 있다. 수난과 부활이라는 주제는 시작 부분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즉, 이교도에 대한 개방(시작 부분의 동방박사, 끝 부분의 백부장), 무구한 사람들의 고통(시작 부분의 어린아이들, 끝 부분의 예수), 적들로부터 겪게 되는 내키지 않는 시험(시작 부분의 헤롯, 끝 부분의 빌라도), 불길한 징조에 대한 꿈(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요셉의 꿈, 끝 부분에 등장하는 빌라도의 아내가 꾸는 꿈) 등이 그러하다."(99)


# 마태와 누가의 차이점

1. 마태 : 예수가 보여주는 (모세와 다윗 같은) 왕으로서의 메시아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다윗을 거쳐 내려오는) 예수의 계보를 아브라함에서부터 추적한다.

2. 누가 : 예수 탄생을 반긴 사람들이 보여준 성전 의식儀式을 강조하면서 성직자 예수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예수의 기원을 하나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한다.


"따로 전승된 요셉과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마태가 서투르게 결합했다는 사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동방박사들에게는 자신들을 안내하는 별이 있었다. 그들은 왜 여행을 잠시 멈추고 헤롯 왕에게 안내자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단순히 이집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의 도살자와 그 동방박사들을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어설픈 이야기 구조는 상징적은 중요성을 품고 있다. 이방인 박사들이 이교도의 배움에 근거해 그 아기를 찾으려 했지만, 신성한 글을 통해 베들레헴의 중요성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아기에게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어울리는 일인 것이다. 즉, 미래의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메시아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 예수에게로 인도될 것이다." "마태의 계획은 이처럼 경건한 기억들을 메시아의 유대교적 배경의 일부분으로서, 더 폭넓은 케리그마의 주제들과 연결시키려는 것이다."(115-6)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세례와 제자들의 첫 번째 모임에 대한 묘사 이후에, 예수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것들을 설명하는, 이 복음서에서 가장 긴 다섯 가지 설교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비록 기독교인들이 갖춰야 할 도덕성에 관한 개론 혹은 안내서에 가깝지만, 통상적으로 산상설교(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제목으로 책을 썼다)라 부른다." "기독교 성서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부분인 마태복음 5~7장에는, 팔복八福(the Beatitudes)과 주기도문 그리고 황금률이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유명한 말씀 중에서도) 소금과 빛, 들판의 백합화, 열매를 보아서 아는 나무, 모래가 아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은 말씀들이 담겨 있다." "모세의 계시는 일련의 금제禁制들로 제시되어 있다('너희는 ~을 하여서는 안 된다'). 반면, 예수는 괴로움 당하는 자, 방치된 자 혹은 박해받는 자들을 향해,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콘솔라시오consolatio(위안)라 불리던 위로의 말로 산상설교를 시작한다."(118-20)


# 팔복八福(the Beatitudes)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 스스로 가난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

2. 슬퍼하는 사람 :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고통과 상실을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3. 순종하는 사람 : 타인을 정복하는 식의 공격적인 태도를 거부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5.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다.

6. 마음 속이 깨끗한 사람 : 외형적인 의식儀式에 집착하지 않고, 내적인 순수함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

7. 평화를 이루는 사람 : 남들의 곤경을 살피고 의를 행함으로써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복이 있다.

8.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마태는 예수가 산꼭대기에서 제자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마무리한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28:18-20) 이것은 복음서들 중에서 최초로 명백하게 표명된 삼위일체의 기원祈願이며, 마태의 공동체가 의식을 거행할 때, 세례의 신앙고백으로 인용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마태는 복음서 저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그 이후로 지속된 기독교 시대를 관통하여, 그의 복음서가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서였으며, 기독교인들의 가르침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었으며, 정전으로 인정된 자료들 중에서 가장 앞자리에 위치한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161-2)


제3장 누가복음 : 예수의 조화시키는 몸


"오직 누가만이 착한 사마리아인, 돌아온 탕아, 착한 도둑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복음서 저자들 중에서 가장 인정 많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어머니뿐 아니라 나인의 과부, 예수의 발을 씻겨준 여인, 오랫동안 등이 굽어 있던 여자, 혈루증을 앓는 여인, 동전을 잃어버린 여인, 적은 돈을 헌금한 과부, 갈릴리로 가는 길에 동행했던 여인들과 골고다로 가던 중에 설교했던 여인들 등 여성들에게 특별한 감수성을 드러낸다. 또한 그는 평화주의자 혹은 세계주의자ecumenical로 불리며, 유대와 로마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그는 보다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수를 원하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단테는 누가에 대해 '그리스도의 상냥함을 표현한 사람'이라 했고, 에른스트 르낭은 누가복음을 '지금까지 존재한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했다."(168)


"누가는 (초기 공동체들이 창작한 노래와 전승에 의존해 기술한) 신성한 글 속에서 왕다운 예수보다는 성직자다운 예수의 면모를 드러내는 전승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의 이야기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수태 고지는 마태복음과는 달리 다윗왕의 혈통인 요셉 대신,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된 성직자 사가랴에게 전해진다. 성소에 들어선 사가랴는 애를 낳지 못하는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될 것이며, 그 아이는 요한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유대인의 혈통을 완벽하게 지키는 주님의 섭리는 전혀 임신을 할 수 없는 여인들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으로 종종 상징화된다─리브가(창 25:21), 라헬(창 29:31), 한나(삼상 1:2). 하지만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남편과 아내 두 사람 다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지난 경우는 오직 한 쌍의 부부밖에 없다. 그 부부는 이삭을 낳은(창 18:11) 아브라함과 사라이다."(172-3)


"누가가 메시아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인구 조사─실제로는 행해진 적이 없는─에 연결시키려고 했던 이유는 당시 예수와 똑같은 일을 겪고 있던 예수의 제자들이 처한 상황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70년에 있었던 성전 파괴 이후인 80년대 혹은 90년대에 복음서를 작성하고 있다. 유대전쟁이 끝나갈 무렵 팔레스타인에서 도망친 형제자매들은 자신들의 근거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누가는 믿는 사람들을 예루살렘과 성전에 다시 연결시켜 초기의 계보를 다시 정립하려 한 것이다." "누가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 자신의 공동체는 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펼쳐 보이는 탄생의 무대에는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었던 헤롯 왕의 살육과 같은 피로 얼룩진 장면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다윗이 목자였던 그 마을에서, 평화로운 목자들은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천사들로부터 듣게 된다."(182-3)


"마가와 마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했던 단 한마디의 말만을─버림받음에 대해 울부짖는─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와 요한은 각각 서로 중복되지 않는 세 마디의 말을 인용한다. 누가가 전하는 말들은 자신이 일관되게 그려온 예수의 모습과 어울리는, 화해를 당부하는 내용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책임져야 할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한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23:34).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따지고, 그것을 집행했던 자들을 응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예수 본인의 기도를 거부한다." "후대 역사의 비극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단순히 예수의 말을 잊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자신에게 저질러진 그 같은 가증스러운 행동을 용서하려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일부 필경사들이 이러한 내용들을 실제로 복음서에서 없애버렸다는 것이다."(220-1)


"누가의 복음서가 지닌 눈에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가 갈릴리를 예루살렘으로 변경하여 부활한 예수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복음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탄생 이야기로 시작되며, 예수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의 승천과 오순절 이야기로 끝이 난다. 누가가 복음서를 작성하기 최소한 10년 혹은 20년 전에 예루살렘이 파괴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사실은 중요하다. 바울과 함께 시작된 예수 운동의 모든 활동이 그때부터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것보다 더 많은 유대인들이 머물던 디아스포라에서 전개되었다." "예루살렘에 대한 거의 강박에 가까운 누가의 집착에는 기원起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일종의 보상 욕구가 담겨 있다. 그는 예수의 제자들이 유대의 뿌리를 잃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누가는 바울이 자신의 서신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자주 예루살렘에서 가르침을 받고 그곳으로 돌아왔다고 말한다."(223-4)


제4장 요한복음 : 예수의 신비한 몸


"요한복음의 세례자는 마태복음(3:7, 11)에 등장하는 성난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 마태복음의 세례자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 비난하며 그들의 죄를 태워 없애버릴 것이라고 약속한다('성령과 불에 의한 세례'). 누가복음의 세례자를 개량한 요한복음의 세례자는, 군인들에게 그들의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말도 하지 않으며(3:14), 예수가 불이 아닌 오직 성령만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절대로 예수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물로 세례를 받고 난 후에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공개적으로 선언된다. 요한복음의 세례자는 개인적인 계시를 간직하고 있다. 다른 세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은 후에야 그를 아들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본 그 순간 성령이 예수에게 내려오는 것을 세례 요한만이 보게 된다."(243-4)


"예수가 성전에서 환전상들을 어떻게 내쫓았는지 설명하는 대목을 보면 다른 세 복음서는 이 사건을 예수가 체포되기 직전인, 그의 공생애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여, 이 사건을 예수가 죽음을 맞게 되는 원인으로 만든다. 반면 요한은 이 사건이 예수가 사역을 시작할 때 일어난 것으로 배치한다." "예수가 성전의 희생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그가 요한의 복음서에서 거듭해서 펼쳐보이게 될 행동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복음서에서 예수는 믿음은 내면적인 마음의 문제이며, 자신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만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형식적이고 겉치레일 뿐인 순종을 거부한다." "이로써 사랑받은 제자의 공동체는 예수의 신비한 몸의 구성원들로서, 자신들이 바로 예수가 세워놓은 성전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바울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전 3:16)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인식이다."(247-51)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이야기는 예수의 수난 이야기 직전에 등장하여, 수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설명해준다.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는 행위는 예수가 자기 자신의 생명으로 대신 갚아야만 하는 그런 일이었다. 그러한 행위는 성전의 권위자들을 격노하게 만들었으며, 그들은 그 행위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했다(11:47-48).  이 이야기의 역할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고뇌하는 이야기가 공관복음서에서 담당하고 있는 역할과 동일하다. 즉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마주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가복음(14:33)은, 예수가 죽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매우 놀라고(ekthambeisthai) 괴로워했다고(ademonein) 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자기 친구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서면서 〈마음이 비통하여(enebrimesato) 괴로워했다(etaraxenheauton)〉."(272-3)


"최후의 만찬에서 주어진 가장 중요한 약속들 가운데 한 가지는 보혜사保惠師의 약속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14:15-17) '보혜사'는 문자 그대로 〈보호하기 위해 부름받다(para-kletos)〉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당신의 주장을 옹호해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왜 이것을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 대답은 사랑받은 제자의 무리가 남긴 또 다른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 자신이 이 제자들의 보혜사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기 제자들의 옹호자이다. 그는 지금 하나님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지만, 제자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와 하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머물게 될 보혜사를 보낼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떠나가기 전에 그렇게 제자들을 안심시키고 있는 것이다."(290-2)


"예수는 처음부터 목적지(telos)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예수는 그 목적지를 향해 완벽하게 다가섰다. 그의 사명은 죽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예수는 자신에게 정해져 있는 때(kairos)에 맞춰 이동했다." "이 죽음이 지니고 있는 유월절의 이미지를 보존하기 위해, 유월절 희생양의 뼈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뼈는 부러지지 않는다. 그 대신 병사 한 명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니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19:34)." "여기서 물과 피는 예수가 인류에게 가져온, 죽음으로부터 소생한 생명을 상징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가 포도나무이며, 포도나무는 가지를 통해 자양분을 내보낸다는 것에 주목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브를 창조하기 위해 첫 번째 아담의 옆구리를 열었던 것과, 그를 믿는 자들의 몸통인 '신부'를 창조하기 위해 두 번째 아담의 옆구리를 열었던 것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297-8)


맺는 말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왜 네 가지 복음서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삶과 메시지의 다양한 측면으로부터 가르침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신비한 몸의 구성원들로서 자신들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들에 대해 묵상하면서 서로 다른 네 가지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마가는 자신의 박해받는 구성원들에게 예수의 의미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한다. 마태는 일목요연한 방법으로 말씀들을 수집해놓는다. 누가는 예수의 사명이 지닌 치유하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의 신성을 언제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각각의 복음서가 강조하고 있는 특성들은 네 복음서 전체에 모두 다 드러나 있으며, 다만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는 것이 있을 뿐이다. 복음서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불가사의는 절대로 소멸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의미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이러한 시각들 모두가 필요하다."(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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