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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정치의 조건 - 미국 유일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서 배우는
조시 맥짐시 지음, 정미나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제1부 미국을 살린 뉴딜, 뉴딜을 지휘한 루스벨트
"1920년대에 등장한 다원주의는 사회가 여러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엘리트 권력에 의해 지배되기보다는 그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 등이 조화를 이뤄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보는 사상이다. 사회학자들의 이론에 따라 잘 정립된 다원주의는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가 고정적이고 위계적 방법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고 여기던 이전의 가정에서 탈피했다. 사회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고 역동적이어서 그런 식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원주의의 중심 가치관은 궁극적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결정과 행동의 연속적 과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전문적 지식의 역할을 경시하여 전문가의 위상을 지도자에서 남들이 더 나은 답을 얻도록 도와주는 사람으로 격하시켰다. 다원주의자들은 전문가들이 특정 원인에서 특정 결과를 예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또한 본질적으로 거대한 시스템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25)
"다원주의자들은 광범위한 진실이나 전체가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며, 특정 시기에 따라 고유한 모습을 취한다고 여겼다." "다원주의자들은 지역, 공동체, 공익, 연합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정부에게 정책에 대한 조정자의 역할을 요구했다. 즉, 정부는 다양한 시각을 규합하여 문제 해결을 촉진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하며, 주어진 상황의 다양한 특징들을 처리할 수 있는 전문가 팀이 될 것을 주장했다. 이런 다원주의의 주장에 의하면, 정부 정책은 너무 전반적이거나 중앙집권적이어서는 안 되고 너무 지령적이어서도 안 되었다. 또한 지역적 조건들을 존중하여 정부 정책의 목표가 지역민들, 즉 일반 대중에게 공통의 노력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다원주의자들은 사회조직이 번영하려면 이런 식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보았다. 루스벨트의 대통령 임기는 미국 정치사에서 이런 다원주의가 구현되는 시기였다."(26-7)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공의 자유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렇게 되면 공공의 자유는 더 이상 대중의 욕구의 합으로 규정되지 않고 공공 이익의 기본적 조화를 이끌어내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지도부에 의해 규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는 훌륭한 사회란 기능적 그룹들로 이루어진 사회이고, 각 개인에게는 주어진 역할이 있으며, 개인이 그 역할을 펼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사회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정부이며, 정부의 정책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전문적 지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사회적 지식에 따라 각 개인과 그룹의 기능이 정해지며,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이나 그룹의 사회제도 내에서의 가치도 정해진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그룹이 역할 수행 시에 합리적으로 행동하도록 촉구함으로써 사회제도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돕는다고 여겼다."(34)
"루스벨트의 기질 가운데 병으로 인해 가장 두드러지게 발휘된 부분은 내면의 용기였다. 그는 혼자 힘으로도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당장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이며, 그 어떤 시련도 자신을 흔들지 못한다고 여겼다." "조금 불확실한 견해지만 소아마비라는 병마가 루스벨트의 사회적 동정심을 키워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당시의 보편적인 사회적 관념에 길들여져 있었지만, 그것에 의지해 내면의 안정을 얻지는 않았다. 가령 흑인이 대체로 하인이 되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하인이 아닌 흑인을 보고 의아해하지는 않았다. 또 반유대주의적 언급을 묵인하고 즐기기조차 하면서도 유대인을 친구나 협력자로 삼길 꺼려하지도 않았다. 때때로 인격과 성격이 인종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국민성이라는 개념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올바른 국내 질서나 세계 질서에 대해 판단할 때 이런 개념을 잣대로 삼지는 않았다."(40-1)
제2부 민주적 다원주의의 새로운 세상을 열다
"루스벨트는 복잡한 정치적·개인적 경험을 거치는 와중에 인간관계란 본래 심리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35년 국가비상대책심의회와 국가의 경제 건전성을 판단하는 여러 가지 척도들에 대해 토론할 때도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최종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나는 1932년 이후로 이번에 미시시피 강 서부에 처음 와봤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얼굴이 아주 확연히 달라보였습니다. 그 달라진 모습은 기차 끝 쪽에 서서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번 알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 얼굴에 용기가 가득했고, 표정도 활기찼습니다. 그들은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지만 극복해낼 겁니다.〉 그것은 루스벨트가 육성하려고 애썼던 바로 그런 기운찬 용기였다. 루스벨트는 스스로도 자신에 찬 분위기를 풍겼고,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깊이 있고 심오한 품성에서 우러나오는 태도라고 믿었다."(213-4)
"(종종 잔인하거나 배려 없는 태도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히 있었지만) 루스벨트는 사람들을 국가의 도구로 삼았다. 그런 만큼 그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국가의 목적을 달성해내는 능력이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자질을 최대한 이용했다. 설계와 고안 능력을 발휘하고 목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면서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했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 헌신적인 이들을 모아서 그들의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했다. 이것은 공직에 몸담은 모든 사람들, 특히 중대한 책무를 맡은 사람들로서는 성공하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리처드 닉슨처럼) 개인의 안위를 공적 책임보다 더 중시할 경우에는 그로 인해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된다. 루스벨트에게 사람들은 자신의 책상에 놓여 있는 다양한 물건들과 같았다. 그 물건들은 그가 원할 때 조정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 것들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이용하더라도 서툴게 이용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잘 이용했다."(216-7)
"루스벨트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판단, 특히 자신의 타이밍 감각을 믿었다. 그는 고문들에게 때에 따라 대담한 모습과 소심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즉, 행동할 때가 됐다고 결정할 때는 대담했고,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는 소심했다. 그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하면 실패와 곤경의 위험 앞에서도 완강할 만큼 단호해졌다. 반면에 오랜 기간 좌절에 빠져서 행동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동안에는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이 중심에 서서 통제하고 있지 않으면 흥미를 잃었다." "그는 오랫동안 침착하거나 난처하거나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다가 갑자기 대담한 행동을 취하곤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취임 후 첫 100일' 중에는 연방 대법원 개혁 계획, 공화당원인 스팀슨과 녹스의 각료 임명, 무기대여법(Lend-Lease Bill), 무기한 국가비상사태 선언, 독일의 U보트에 대한 '목격 즉시 발사' 명령, 무조건 항복 원칙 같은 눈에 띄는 결과들을 내놓았다."(221-2)
"루스벨트가 한 다음의 말에서 그의 정치적 현실 감각이 잘 드러난다. 〈후보자는 유권자들을 놀라게 해도 되지만 충격을 주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자신의 프로그램에 내포된 이점을 교육시킬 수 있으나, 후보자는 국민의 편견을 받아들이고 그 편견이 좋은 방향으로 이용되도록 돌려야 한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은 정치적 자산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 자산을 너무 빨리 소비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진보주의적 정치인들은 동맹자로 신뢰할 수 없다는 신념도 있었다. 루스벨트의 눈에 비친 진보주의자들은 언제나 기꺼이 소속된 편에서 떠날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타협의 순간이 오면 자신들의 편에서 가능한 것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루스벨트는 민주당을 '자유주의'나 '진보주의'의 당으로 바꾸고 싶었지만, 진보주의자들의 지원에만 기대서는 그 바람을 달성할 수 없다고 믿었다."(224-5)
"루스벨트는 투표자들의 지지기반이 다양했다. 북부지역 백인 가톨릭교도와 남부지역 백인들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막론하고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투표에 무관심했던 유권자층을 투표하러 나오게 만든 일은 루스벨트의 정치적 기반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1928~1940년에 민주당이 새로 동원한 투표자 수가 자연적으로 증가한 유권자 수의 세 배 이상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 상당수의 시카고 노동자들, 특히 백인 소수민족 노동자들이 대거 투표를 하기 시작했다. 뉴딜 프로그램들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국가에 대해서나 복지와 안전보장을 제공해주는 방면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신뢰가 생겼던 것이다." "1936년에 루스벨트가 얻은 지지표 가운데 20퍼센트 정도는 통상적으로 공화당원을 자처하던 투표자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뉴딜정책이 정부의 기업 규제와 노조 결정 지지 쪽으로 진행되자 북부의 진보파 공화당원들이 민주당으로 이동했던 것이다."(240-3)
"루스벨트의 두 번째 정치적 기반은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당을 차지하게 된 민주당의 위상이었다. 의회 다수당의 위상은 루스벨트의 인기에 크게 힘입은 결과였다.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는 상당히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1920년대의 민주당원들은 압도적으로 '안전한' 민주당 표밭에 의존하면서 대체로 남부지역과 북부 도시 인근의 소수민 가톨릭교도 지역의 표에 기대야만 했었고, 공화당원들과의 경합에서 통상적으로 거둔 승률은 40퍼센트 이하였다. 그러나 1932년부터 1940년까지는 남부지역과 도시지역의 지지 기반을 유지하면서 '안전한' 의석을 추가로 확보하여 경합에서 57퍼센트의 승률을 거두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의회의 민주당 의원들은 당에 대한 충성심을 루스벨트에 대한 충성심과 결부시켰다. 대통령을 부인했다간 당의 힘을 약화시키고 공화당에 정권을 넘겨줄 위험이 있었다." "의회의 어떤 회기 중에도 민주당 의원들의 루스벨트 지지율이 70퍼센트 아래로 내려간 적은 없었다."(248-9)
"루스벨트는 첫 임기의 절반에 걸쳐 연방 대법원의 영향력을 제한하거나 무효화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심지어 연방 대법원의 반발을 북돋기 위한 일환으로서, 일부러 사건을 보내 반뉴딜 판결이 더 나오게 하라고 조장하기도 했다. '뭔가를 할' 적절한 방법을 찾는 일은 순조롭지 않았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뉴딜 법안을 수월하게 승인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방식을 제안했지만, 헌법 개정 절차가 너무 오래 걸리고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이 방식은 거절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지루한 토론이 이어진 끝에 근본 문제는 헌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판사들의 헌법 해석에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국가산업부흥국에 불리한 판결은 만장일치였으나, 그 외의 다른 판결들은 1~3표씩의 표차가 있었다. 다시 말해, 헌법을 바꾸는 대신 대법원의 판사 구성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였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여러 곳에서 의회를 통해 대법원의 판사 수를 늘리자는 제안이 나왔다."(292)
"그러나 대법원과의 투쟁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법원 재정비 안은 뉴딜의 그 어떤 경제 부문 입법보다 더 효과적으로 공화당원들을 단결시켰다. 반면에 민주당원들은 물론 양당의 진보파 개혁가들을 분열시켜놓았다. 또한 루스벨트도 패배할 수 있으며, 대통령의 인기가 어디에서나 탄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말았다. 게다가 루스벨트의 적대자들에게 공격할 결정적 수단을 제공해주었다. 이제 적대자들은 루스벨트에게 '독재자'를 꿈꾸고 있다는 이미지를 씌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이 활개치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기세를 떨치며, 라틴아메리카에서 파시스트 독재정권이 부상하고 있던 1930년대 말에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강력한 공격 수단이었다." "아울러 루스벨트가 간파하지 못한 점은 국민들은 '뭔가를 하라'고 요구하면서도 막상 하려는 일을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294)
제3부 더 강한 미국,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고립주의자들은 대부분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국제연맹이나 국제사법재판소 같은 국제협력기구를 불신했고, 방어를 위해 군사적 대비를 갖출 것을 주장했다. 1930년대에 고립주의자들은 루스벨트가 외교정책을 수립하여 유연성을 발휘하는 데 제한을 가할 만큼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들은 루스벨트의 국제연맹과의 협력 시도를 사사건건 비난했고, 군축을 위한 협력 시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전쟁 채무로 인해 채무불이행에 빠진 국가에 대출을 해주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미국이 교전 중인 국가를 지원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로 중립 법안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루스벨트가 다른 나라들과 관세율을 낮추는 협정을 맺으려 할 때도 반대했다. 이러한 협정은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위임하게 된다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주장이었다. 그들은 '호혜무역 협정' 법안이 나올 때마다 통과를 저지하다가 번번이 실패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그들의 단결력은 증대되어갔다."(317)
"사실 라인란트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세계 강대국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루스벨트만이 평화에 대한 히틀러의 위협을 정확히 헤아리고 있었고, 루스벨트만이 히틀러를 봉쇄하기 위해서 무력으로 위협을 저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져보면, 루스벨트의 적대자들은 미국 국민의 눈을 멀게 하여 세계질서가 서서히 파괴되고 있음을 보지 못하게 했고, 건설적인 정책을 개발하기보다는 루스벨트를 공격하기 좋아했다. 그리고 자국의 심리적·물질적 전쟁 대비를 방해했고, 대통령과의 싸움으로 자신들의 위신을 손상시켰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루스벨트의 외교정책이 평화 유지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36년 8월에 루스벨트는 전쟁을 혐오한다고 공표했으며,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외교정책 수립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1930년대 말의 세계 상황이 평화가 아닌 전쟁을 요구했다는 점이다."(318-20)
# 라인란트 사건 : 1936년 3월 히틀러의 군대가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로 진군한 사건
"루스벨트는 뉴딜정책 초창기 이후로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노변담화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설명했다. 이때의 이야기는 대체로 히틀러에 저항하는 이들을 원조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이 전쟁에 가담하지 않을 최선의 방법이라는 주장의 되풀이였다. 연설을 마무리할 즈음에는 특별히 더 긴박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일부 실업가들이 공장 생산능력의 확대가 현명한 처사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생산능력 확대가 추후에 국가의 과잉생산을 더 부추기기만 할 것을 우려했다. 루스벨트는 이런 우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새로운 방어시설이 요구되어 추가생산 능력이 필요해질 것이라고 말하며, 그렇게 생산 확대를 하지 않으면 위험성이 아주 높다고 강조했다. 또한 국가가 〈전쟁만큼이나 심각한 비상사태를 맞았다〉면서 교전 중일 때와 마찬가지의 헌신과 희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미국이 〈민주주의의 거대 병기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340-1)
"루스벨트는 강력한 행동을 정당화해줄 사건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보았다. 모겐소에게 말했듯이, 〈자진해서 전쟁에 나서기보다는 떠밀려 들어가고〉 싶어 했다. 주일 대사 조지프 그루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문제는 방어의 문제이니 엄중한 계획을 세울 수가 없네.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우리는 그 시점의 환경에 비추어보아 우리의 자원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이용할 수 있는 시기와 장소와 방법에 대해 결정해야 하네.〉 루스벨트가 당시 가장 의욕적으로 나섰던 일은 여론이 어떠한 사건이든 전쟁의 명분으로 인식할 만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1941년 5월 말로 접어들었을 때 그는 연설을 통해 히틀러가 세계 지배의 야심을 품고 있다고 비난하며, 미국의 방위 범위를 국경 너머까지 확대하는 한편 〈무기한의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어 더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겠다고 국민들을 안심시켰다."(348-9)
"루스벨트는 워싱턴 시각으로 오후 1시 직후에 진주만 폭격 소식을 들었다." "루스벨트의 오른팔인 해리 홉킨스는 그 소식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지만, 루스벨트는 덤덤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대꾸했다. 그는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각료 및 의원들과 논의를 시작하는 한편, 양원 합동회의에서 발표할 교서를 준비했다. 루스벨트는 현 상황에 대한 책임 소재를 따질 것이 아니라, 미국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본질적인 사실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양원 합동회의에 나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구했다. 루스벨트는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던 시절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위기에 처해서 자신의 리더십을 기꺼이 따르려는 국가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결국 몬태나 주의 평화주의자 재닛 란킨만이 루스벨트의 요구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 직후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이제 루스벨트의 대통령직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360)
"테헤란 회담은 그 급변성, 변환성, 즉흥성에도 불구하고 연합국 간의 외교술의 모범을 제시했다. 루스벨트는 세계 구조를 미국의 국내 정치에서 수용 가능한 방식으로 구상하려 애썼다. 그래서 고립주의의 저항을 경계하여 전후 평화유지 활동에 미군을 투입하는 방식을 회피했고, 대신 정치적 분산, 신탁통치, 4개 경찰국들에 의해 후원되는 국제기구를 통해 독일과 일본의 힘을 제한하는 식의 체제를 지지했다. 그는 소련의 전후 안보에 대한 요구가 미국의 반식민지주의 및 인종별 투표 경향과 균형을 맞추길 바랐고, 스탈린에게 소련이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데 있어 민의(民意)와 조화시키는 상징적 조치를 취하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군사적 의제를 설정하도록 허용함으로써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구슬렀다. 뿐만 아니라 양국의 협력관계를 굳히기 위해, 또다시 소련의 대일본전 참여를 요구하며 그 승리의 전리품을 분배받을 기회를 제시했다."(396)
"한편 루스벨트는 (최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목표를 군수품 생산량 증대로 설정하면서도) 미국 내의 전시 경제를 다루는 일도 착수했다. 그는 전쟁 개시 첫 해에만 500만 명 규모의 군대를 인가했다.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을 일터에서 끌어내 전장으로 보낸다는 것은, 군수품의 폭발적인 수요로 국가의 생산 능력이 무리하게 동원된 시기에 노동력 부족을 유발할 것이 분명했다." "말하자면 미국의 가장 절박한 문제는 전시 국가가 보편적으로 겪는 현상인 인플레이션이었다. 루스벨트는 이 문제에 대해 포괄적이고 통합된 접근법을 취하여, 전면적 세금 인상, 임금 및 물가 통제, 필수 물자의 소비제한, 전쟁공채 구매의 장려 등 7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의회에 제안했다. 프로그램에는 루스벨트의 신념인 전시에는 부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는 미국 국민 중에서 1년에 세금을 2만 5,000달러 이상 내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406)
"1943년에 들어서면서 3개월 동안 내리 물가가 무섭게 치솟아오르자, 루스벨트는 '현상유지' 명령을 내려 임금과 가격을 현 수준에서 동결했다. 루스벨트는 가격과 임금을 관리하는 주무기관들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 뒤에 물가관리국에서는 39개 상품의 가격을 내리고, 200개 도시의 약 1,000개 식료품에 대해 적정가격을 정했다." "또한 전시생산국에서 점점 더 많은 소비자 상품들에 대해 배급제를 인가해주었고, 마침내 배급제 상품이 소비자 물가지수 산출에 포함되는 품목의 20퍼센트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유연탄 광부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가자 루스벨트는 그 광산을 인계받았고, 결국 노조는 노동자들에게 일터로 돌아오라로 명령했다. 이처럼 가격 통제, 배급제, 정부의 인계가 어우러져서 큰 효과가 나타났다. 통제가 해제되었던 1943년 4월과 1946년 6월 사이에는 연 인플레이션율이 1.6퍼센트에 이르렀다."(411-2)
"미국은 (서반구의 다른 어느 국가보다 많은) 수천 명의 유대인 이민자들을 받아주었으나, 이 숫자는 종국에는 죽음을 맞게 될 수백만 명 가운데 극히 일부만 구해준 것에 불과했다." "루스벨트도 곤경에 처한 유대인들을 동정했지만, 으레 그렇듯 그는 우선 처리할 사항이나 운신 폭을 제한하는 정치적 압력들에 대해 (유대인 구출에 헌신하던) 엘리너 루스벨트보다 더 민감했다. 루스벨트는 이민자를 더 받아들이면 반대파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늘어나 전쟁 수행 노력에 위협이 가중될 것이라는 국무부의 우려에 공감했다. 국내 반대파들에게 포위되어 있다고 느끼던 백악관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루스벨트가 전쟁 수행에 매우 중요한 기술을 지닌 전문가들을 자유롭게 여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이민 절차를 파기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의회는 법이 바뀌면 이민자가 물밀듯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는 꼴이 된다면서 그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기까지 했다."(439-41)
"유대인을 구하는 문제에 이르면, 모든 사람들이 다른 급선무가 있었다. 전시난민위원회가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를 폭파시켜달라고 군에 호소했을 때, 군은 할애할 만한 전투기가 없다고 답했다. 또 유대인 피난민을 수송할 선박을 간청했다가 선박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 번에 수천 명씩 들어오는 비유대인의 수송은 이런 선박 부족 얘기가 나오지도 않았다. 일이 이렇게 이루어진 데는 동맹의 구축, 한 집단에 대한 '편애'의 회피, 적절한 절차와 문서를 내세운 변명, 관료주의적 실수 등 여러 사소한 원인들이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민주당원들은 뉴딜이 '주(Jew)딜'이나 다름없다는 비난에 자극받아 더 비난을 사지 않으려고 주저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 사회가 일종의 수동적 반유대주의에 물들어 있어서, 전국 각지에서 린치 가해자들과 인종차별자들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부여해주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해서였다."(442-3)
"행정학자 배리 D. 칼 교수가 통찰력 있게 간파했듯이, 루스벨트는 합리적 관리라는 척도에서는 점수가 낮은 편이지만, 참모와 각료를 정보 획득과 권한 양도의 방편으로 이용한 면에서는 칭찬을 받아왔다. 이런 접근법이 낳은 주된 결과는 복합적 기능에 이바지한 복합적 배치였다. 루스벨트는 프로그램들을 '조정'할 시스템을 세울 수는 없었지만, 이해관계의 균형을 맞추고 충돌을 중재할 만한 조직망을 만들 수 있었다. 결정권은 자신이 확보한 채로 말이다." "루스벨트에 대한 호의적이거나 비호의적인 평가 모두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의 아주 일관된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리더십에 대한 자신감이 강하며 루스벨트라는 인물 자체가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라는 이미지다. 루스벨트는 계속해서 세상의 이목을 끌면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그의 성공이나 실패는 그의 비전이나 정부 관리 측면에서의 취약성보다는 그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결과였다."(479-80)
"루스벨트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현대 복지국가를 위한 제도적 구조를 만들어낸 일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기관인 공공사업진흥국(WPA)을 비롯해 뉴딜정책 시행 기관들 대다수는 전시에 사라졌지만, 농산물 가격, 퇴직연금, 실업수당, 노사관계, 재무관리를 위한 프로그램들은 그대로 남았다.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업적은 그가 대통령에 재임하면서 정부가 시장의 변동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했던 심리적·정치적 장애물들을 제거한 것이었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덕분에 후임 대통령들은 정부를 창의적으로 이용하는 면에서 예전보다 더 자유로울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트루먼의 페어딜(Fair deal, 자유주의적 국내 개혁 정책), 케네디의 뉴프런티어(New Frontier, 신개척자 정신), 존슨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교육·의료 증진과 빈곤 퇴치를 내세운 국내 사회복지 정책) 정책이 가능해졌다. 로널드 레이건의 일자리 창출 입법은 WPA를 고스란히 본뜬 것이었다."(480-1)
"(뉴딜 프로그램이 경쟁적 이익과 공공복리 추구를 함께 추구했듯이) 루스벨트에게 민주주의란 더 많은 그룹을 정부의 인정과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공공의 장(場)으로 이끄는 것을 의미했다." "루스벨트는 결국 다원주의의 애매성과 복잡성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도시 당수들, 인종차별주의적 대농장주들, 요직 임명을 갈망하는 의원들, 영리에 집착하는 기업 임원들을 통해 복잡하게 성취를 이뤄나갔다. 그토록 애쓰고 바랐지만, 자신의 비전을 예상한 대로 확실하게 성취시킬 정치 행정 구조를 창출할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 재임 동안, 계속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책략 구사, 재정비, 비위 맞추기, 훈계하기, 고무시키기, 회피하기, 얼버무려 넘기기 따위를 거듭했다. 이렇듯 그의 행동은 다원주의적 비전의 특징을 그대로 따르면서 복잡하고 다양하며 칭찬받을 만한 면모와 비난받을 만한 면모를 모두 지녔다. 그러나 언제나 '네 가지 자유'에 대한 신념과 민주주의의 이상이 그 토대가 되었다."(492-3)
# 네 가지 자유(Four Freedoms)
1.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
2. 신앙의 자유
3. (경제적)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4. 공포로부터의 자유(전세계적 군비 축소)
"여러 중요한 방면에서 살펴볼 때, 루스벨트의 대통령 재임은 곧 엘리너의 대통령 재임이기도 했다. 엘리너는 루스벨트를 보완하는 역할을 맡아서 그가 착수하길 주저하는 문제들에 대해 결정을 내린 뒤에 그를 압박하여 자신의 주도를 따르게 했다." "루스벨트가 후대에 전해줄 프로그램들을 만들었다면, 엘리너는 후대들이 프로그램으로 전환할 수 있는 명분과 쟁점에 흥미를 보였다." "엘리너는 각종 의제에 흑인들 같은 그룹을 포함시킴으로써, 뉴딜의 다원주의적 목적의 명맥을 지켜나갔다. 또한 민권을 옹호함으로써, 전시에 진보주의를 경제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로도 재정의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1964년에 공민권법(인종·피부색·종교·출신국에 따른 차별을 철폐할 목적으로 제정된 연방법)이 제정되면서 마침내 1965년에 그녀의 사명이 성취되었지만, 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이 순간을 목격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494-6)
"폴 애플비의 이론에 의거하면, 민주적 제도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그 제도의 관료들은 협력적이었다. 또한 민주적 제도는 유권자들과 화합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상호작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점으로서, 민주적 제도는 공익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이었다. 애플비의 이론체계에는 다소 미해결의 문제가 있었다. 즉, 공익이란 것이 공개적이고 유연하며 상호작용적이고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제도의 필연적인 결과인지, 아니면 그 조직에서 공익이 목적임을 늘 염두에 둠으로써 비롯되는 결과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위대한 민주주의의 목적은 단순한 부분의 합을 뛰어넘는 전체라는 것이 애플비의 신념이었음은 분명하다. 애플비의 이론체계는 루스벨트가 행했던 다원주의적 행정과 정치에 대한 전형적인 이론체계였다. 말하자면, 루스벨트의 뉴딜정책과 전시 행정에 대한 지적 소산인 셈이다. 루스벨트가 남긴 교훈들 가운데 이 부분이야말로 최고의 가르침인 것 같다."(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