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 개정판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1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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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1장 감추어진 시간들


"네 개의 복음서 모두 예수의 사역의 시작을 세례 요한의 급진적인 개혁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찾고 있다. 예수는 동물 가죽으로 만든 거친 옷을 걸치고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누가 3:7)이라며 독설을 퍼붓는 거친 사람과 함께 행동했다." "예수가 에세네파의 영적인 은둔으로부터 벗어나 침례파(세례 요한)의 행동주의적인 선언으로 옮겨갔을 때, 그의 가족들은 더욱 심각한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마태와 누가의 복음서는 예수가 광야에서 체험한 일들이 갖는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특히 누가는 예수가 받았던 교육에 가장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난 이후에 예수가 겪었던 시험들을 묘사하고는 있지만, 서술방식은 광야에서 마주친 사탄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을 상징으로 삼아, 그가 사춘기와 청년기에 겪었던 정신적 탐구의 전 과정을 축약해놓았음이 분명하다."(50-1)


"광야에서의 유혹은, 아버지가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남들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다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위대한 인물들은 종종 매혹과 혐오 속에서 소명에 대해 번민하면서, 어렴풋하던 그것들을 명쾌하게 만들어가는 청년기를 겪곤 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위대한 인물의 형성에 나타나는 이러한 경향을 '후퇴와 복귀'로 일반화시켜 정의했다. 예수의 경우 보다 적절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선택된 땅을 향해 40년 동안 나아갔던 유대 민족이 황야에서 겪었던 시련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이 누가에 의해 예수의 40일간의 고난이라는 특별한 서술로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배고픔과 극기를 알게 해준 가장 중요한 영적 형성 과정을 거치고 난 후, 천사들은 비로소 더욱 강해지고 편안해진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준다.(마태 4:11)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막에서 만나를 먹었던 것과 같은 일이다."(60-1)


2장 사역을 시작하다


"(요한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사역에 나서기 시작한) 예수의 그 다음 행로는 분명 요한을 당혹스럽게 만들 것이었다. 실제로 예수는 초기 고행 수도로부터 멀어져 갔을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진 것처럼, 아주 빨리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속세의 사람들과 뒤섞였다. 그가 단순히 요한처럼 단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통적인 식사 관습마저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는 죄인들, 창녀들, 그리고 로마의 부역자들과 함께 식사했다." "예수에게 있어 먹보이며 술꾼이라 불리는 일은 결코 가벼운 비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레위의 율법에 근거한 비난이었다. 신명기 21장 20절에는 지파의 관습에 반항하는 아들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으며, 지파의 장로들 앞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처벌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예수가 그처럼 너무 급진적이었으므로 처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64-5)


"예수는 기적을 위한 기적은 일으키지 않았으며 그에게 기적을 일으켜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을 꾸짖었다.(마태 12:39, 16:4, 마가 8:12, 누가 11:16) 그의 기적들은 자신이 가져올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한 가지는 바로 사람들을 깨끗한 자와 부정한 자, 가치 있는 자와 가치 없는 자, 존경받는 자와 존경받지 못하는 자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예수가 일으킨 기적들 중 많은 것들이 유대인이 아닌 로마 백부장이나(누가 7:9) 튀루스(두로)의 여인(마가 7:29) 혹은 사마리아의 나병환자(누가 17:16) 등과 같은 아웃사이더들을 위해 행해졌다. 대부분의 기적들은 유대인들이 접촉조차 않으려고 하는 문둥병자, 창녀, 불구자, 천덕꾸러기, 이교도 혹은 병으로 인해 부정해진 자들(그로 인해 '귀신들린 것'이므로)과 같이, 부정한 자들과 관련하여 일어났다."(76-8)


3장 급진주의자, 예수


"복음서들은 부유함이 영혼의 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 권력에 대해, 특히 정신적인 권력에 대해서는 한층 더 강력하게 경고한다. 예수는 자기들끼리 혹은 남들을 넘어서는 권위를 갖추려 하는 제자들을 거듭해서 꾸짖는다.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크게 될 것인지를 묻자 예수는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마태 18:4-5)라고 대답했다. 제자들이 거듭 자신의 서열에 대해 논쟁할 때 예수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마가 9:35)라고 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지침으로 삼았던 규칙은 높은 자리를 피하라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낯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누가 14:11)"(96)


"예수는 급진적인 인류평등주의자였다. 남녀평등은 가부장 사회였던 예수의 시대에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어서 남자 제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가 그 여자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게다가 상대는 사마리아 여인이었던 것이다.(요한 4:27)" "예수를 대접하기 위해 부엌에서 일하고 있던 마르다를 돕는 대신, 예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이유로 칭찬을 받았던 마리아의 이야기는 아주 오랫동안 현실 생활과 대비하여 명상적인 생활이 더 훌륭하다는 근거로 이용되었다.(누가 10:38-42)" "하지만 웨스턴 신학대학의 제롬 너레이 교수는 예수 시대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철저한 연구 끝에, 예수가 당대에 허용된 공간을 벗어나 지식인의 세계로 들어서는 행동 때문에 (선생님의 발치에 앉아 있었다는 것으로 나타나는) 비난받을 수도 있는 여인을 옹호했던 것임을 밝혀냈다."(102)


4장 종교를 거부하다


"예수는 정결예식과 안식일이 지니고 있는 형식주의뿐만 아니라 동물을 희생제물로 쓰는 성전에서의 모든 제사를 비판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요한 9:13) 예수는 사무엘상 15장 22절의 〈순종에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제물로 쓸 짐승들을 팔고 사는 것과 그것들의 거래에 사용되던 금전을 성전 경내에서 내쫓았을 때, 짐승 제물을 비난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는 단지 장사꾼들이 '내 아버지의 집'(성전 그 자체)을 장사꾼의 장터(요한 2:16) 혹은 도적들의 소굴(마가 11:17)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만을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예수는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통해, 이미 타락했으며 썩어가고 있다고 여기던, 제물을 바치던 제도 자체를 통박했던 것이다."(122-4)


"제사장들과 예수 사이의 적대적인 반목을 생각해보면, 그의 제자들 중에 제사장이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네 개의 복음서나, 바울의 편지에서 '히에레우스'(hiereus, 제사장)라는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는 어느 누구도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바울 자신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고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그가 설립한 교회들 중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호칭으로 부른 사람은 없었다. 신약성서에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들을 13번 언급한다. 사도, 예언자, 교사, 기적을 행하는 사람, 병을 고치는 사람, 남을 도와주는 사람, 관리하는 사람, 여러가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12:27-28), 지혜로운 사람, 지혜를 해석하는 사람, 영혼을 분별하는 사람(12:8-10)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4:15) 등이다." "그것들은 모두 역할을 나타내는 것이지 직책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128-9)


"예수는 대제사장과 제사장 무리(사마리아 지역의 그리심 성전을 파괴했던 계급)가 피해 지나쳤던, 치명상을 입은 한 남자를 도와주었던 사마리아 여행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드러냈다.(누가 10:30-36) 부상을 당한 그 남자는 거의 죽게 될 지경이었지만 레위 법에서는 죽은 사람을 만지면 그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 문장에서 계율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이 '피하여 지나갔다(antiparelthon)'라며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중의 복합동사를 사용한 이유였다. 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단순히 구원자가 지닌 착한 심성을 보여주기 위해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유대 제사장들의 비인간적인 정결규례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 이야기는 바로 '종교'의 형식주의에 대한 예수의 비난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133)


5장 하나님의 나라


"신약성서의 초기 저작물들은 그리스도가 죽은 지 20년 후에 기독교 '교회들'에게 쓴 바울의 편지들이었다.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번역되는 그리스 단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 즉 '회중'이며, 이 단어는 단 하나의 복음서에만 등장한다(마태복음). 사도행전 19장 32절과 40절에서는 '군중'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바울이 편지를 보냈던 모임들은 전혀 계급적이지 않은 집단이었다. 그는 그 집단의 지도자에게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성직자가 없는 회중에게 보낸 것이다. 더 나아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교회 건물을 의미하는 교회도 없었다. 회중은 집에서 모임(oikoi)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바울이 기독교도들을 말할 때 '믿음의 식구들(oikeioi)'이라 부르는 것이 표준이었다.(갈라디아서 6:10)" "그러므로 사도로서의 베드로와 바울은 주님의 형제로서의 사도가 아닌, 예루살렘 회중의 '기둥들' 중 하나인 야고보와 대비하여, 단순히 안디옥에 모인 회중에 보내진 사절인 것이다."(142-3)


"만약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예수는 왜 왔던 것일까? 그는 처음부터 이 문제에 대해 거듭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온 것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마가 1:15, 누가 10:9-11) 여기서 '나라'(basileia)에 해당하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왕국'으로 번역되지만, 그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왕국은 어떤 장소나 정치적인 체제를 나타내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예수의 실존 그 자체인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주기도문에서 우리들에게 '나라가 임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라고 했으며, 그 나라는 종말Eschaton, 즉 세상이 완성될 때에만 완전하게 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예수는 또한 처음에는 설교와 치유, 그리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는 것으로 이미 그 나라가 임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창조의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 것이다."(150)


6장 지옥으로 내려가다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성전에서 제의를 훼방했던 일을 예수가 체포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는다. 광야에서의 시험을 예수의 사역의 시작으로 삼았던 누가처럼, 요한은 이 에피소드를 사역의 시작으로 꼽았으며, 이런 일화들이 예수의 공적인 사역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요한은 나사로를 살려낸 일을 예수가 체포된 원인으로 꼽는다. 예수가 마르다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이 사건은 메시아적인 행위였다. 이 사건은 예수를 생명의 주님으로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으며, 그러므로 그는 죽어야만 했다." "사실 이것은 생의 경계에서 격렬히 고뇌하던 예수가 자기 자신의 무덤 속으로 들어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베다니로 돌아가기를 주저하거나, 다가오는 어둠에 대해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의 영적인 격정과, 그가 보이는 눈물로 복음서에 나타나 있다."(165-6)


7장 하나님의 죽음


"만약 우리들이 예수의 피에 의해 구원받은 것이라면, 그의 피가 아버지에게 바치는 희생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예수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린 것이지, 성난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주獻酒로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방법이었다. 성서 속에서 예수의 희생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또 다른 구절들이 있다. 바울은 예수에 대해 '힐라스테리온(hilasterion)'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십계명에 새겨진 돌을 집어넣는) 법궤의 금으로 만든 덮개를 뜻하는 것으로(출애굽기 25:17) '자비의 좌(속죄제물)'로 알려져 있으며, 속죄의 날에 피가 흩뿌려졌던 곳이다." "즉, 예수는 새로운 속죄제물이며, 그곳에서 인간의 적들에 대항해 그 자신의 피가 뿌려져, 아버지와 결속되는 것이다."(202-3)


8장 하나님의 삶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앞으로 있을 식사를 위해 기도한다. 〈앞으로 있을(epiousios) 양식을 오늘도 우리에게 주십니다.〉 '앞으로 있을'에 해당하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형용사인 'epiousios'는 '현존하는' 혹은 '앞으로 닥쳐올'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들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 어원을 '현존하는'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그 문장을 즉시 먹을 수 있는 빵(일용할 양식)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기도문 전체의 내세론적인 맥락은 예수가 마지막 잔치를 기다리며 포도주를 아주 조금만 마시겠다고 했던 부분과 일맥상통한다. 예수가 했던 많은 말과 행동들은 마지막 잔치를 향하고 있다. 마지막 잔치의 특징은 궁극의 성취를 예시豫示하는 충만함과 풍부함이다." "예수가 현생에 있는 동안 베풀었던 성찬은 단지 현재의 배고픔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완전한 성취를 위해 하늘나라를 가져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예수는 훨씬 더 심한 목마름을 만족시키기 위해 온 것이다."(214-5)


맺는 말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성을 인간의 가장 숭고한 능력이라고 찬양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인 이상을 부인하기 위해, 적절한 때에 등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지닌 최고의 능력은 사랑, 즉 자기 자신을 비우는 예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다음과 같은 글을 쓸 때의 성 바울보다 예수의 뜻을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고린도전서 13:1, 13)"(2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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