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미래 - 새로운 불안에 맞서다
폴 콜리어 지음, 김홍식 옮김 / 까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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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위기


1장 새로운 불안


"지리적인 위치, 곧 대도시와 지방 간의 불평등 확대가 불만이 일어나는 새로운 차원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활발한 대도시 안에서도 이처럼 대단한 경제적 성취는 심하게 치우쳐 있다. 새롭게 성공을 구가하는 사람들은 자본가도 평범한 노동자도 아니다. 그들은 잘 교육받은 고학력자들로, 새로운 숙련 기능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학이 주관하는 회합에서 서로 만나고 능력으로 존중받는 새로운 정체성을 육성하여 그들끼리 공유하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다. 그들은 심지어 소수 민족이나 성적(性的) 지향과 같은 특징들을 피해자라는 집단 정체성으로 치켜세우는 독특한 윤리 규범도 만들어냈다. 피해자 집단들을 배려하는 그들의 남다른 관심사를 바탕으로 그들은 교육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지배 계급의 하나로 자리를 굳힌 이 고학력자들은 정부는 물론 그들 서로를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신뢰한다."(12-3)


"공리주의, 롤스주의, 자유 지상주의는 모두 개인을 강조했지, 공동체를 중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리주의 경제학자들과 롤스주의 법률가들은 모두 집단 간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전자는 소득을 기준으로, 후자는 불리한 처지를 기준으로 차이점을 부각했다. 두 이데올로기는 모두 사회민주주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두 이데올로기 모두 정상적인 윤리적 본능인 호혜와 응분(이를테면, 공정한 상벌)을 무시한 채, (서로 다르기는 해도) 가장 현명한 전위대가 강요하는 단 하나의 이성적 원리를 치켜세운다." "좌파와 우파의 새 이데올로기들은 서로 정면 대치하는 양상으로 등장했지만, 개인에 강조점을 두고 능력주의를 애호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둘의 대결은 윤리성의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엘리트와 생산성의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우파 엘리트의 경쟁이었다. 좌파 쪽 슈퍼스타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 되었고, 우파 쪽 슈퍼스타들은 아주 부자가 되었다."(29-31)


"우파가 새로 동원한 자유 지상주의는 생각 외로 큰 피해를 유발한 데다가 효율까지 떨어뜨렸음이 입증되었다. 그 덕분에 좌파가 다시 권좌로 복귀했지만, 그들은 공동체주의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번창하는 대도시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국가를 경영했으며, 그들이 가장 절박한 처지의 집단이라고 판단한 이른바 〈피해자들〉을 지원할 표적으로 정했다. 새로운 불안은 그러한 〈피해자〉의 자격 요건에 미달하는─그럼에도 더 인기를 누리는 피해자 집단보다 실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도 처지가 더 악화되고 있던─사람들을 타격하고 있었다. 〈피해자〉라는 지위에 따라다니는 부수적인 특권은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개 피해자의 지위는 백인 노동 계급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명백히 모두 평등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한 사람들이 존재한다."(33-4)


제2부 윤리의 회복


2장 윤리의 토대: 이기적 유전자에서 윤리적 집단으로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경제적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정육업자와 제빵업자들 단지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으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윤리적 동기를 가진 사람들로 생각했다. 컴퓨터는 경제적 인간의 행동을 예측할 때에 합리적 이기심의 공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는 정육업자와 제빵업자의 행동을 예측할 때에 우리 자신이 그들의 처지에 놓이는 상황을 상상한다. 이것은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이라고 알려져 있다. 스미스는 우리가 마음으로 어떤 사람을 바라봄으로써 그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을 배려하고 동시에 그의 윤리적 인격을 가늠하게 된다고 인식했다. 스미스는 이렇게 공감하고 판단하는 감정이야말로 윤리성의 토대이며, 그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의무' 사이에 쐐기를 박는 경계가 생긴다고 보았다. 윤리성은 우리의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지, 이성에서 나오지 않는다."(50)


"가장 강력한 의무는 친밀함에서 나온다. 이러한 의무는 우리의 아이들이나 가까운 친척에게 느끼는 가장 포괄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인데, 우리가 아는 사람들로도 확장된다. 가장 약한 의무는 어려운 처지에 처한 먼 관계의 사람들에 대해서 느끼는 '구조의 도리'이다." "친밀함과 구조의 도리 사이에 스미스가 같은 책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하는 감정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수치나 존중과 같은 감정인데, 이러한 감정들이 유발하는 온화한 압력 덕분에 우리는 의무를 교환한다. 즉, 〈당신이 도와주면 나도 도우리다〉라고 말하듯이 우리는 서로 의무를 주고받는다. 그에 필요한 신뢰를 뒷받침하는 것은 위반할 의욕을 억제하는 감정들이다. 사람들은 왜 그러한 감정을 느낄까? 그 답은 사람들을 더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말이 '사회적 인간(social man)'이라는 데에 있다." "사회적 인간은 합리적이다. 그 역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효용을 소비에서뿐만 아니라 존중에서도 얻는다."(50-1)


"이야기가 수행하는 세 가지 기능─즉 소속과 규범 그리고 인과(관계를 형성하는)─은 상호 보완적으로 조합되고, 그 결과 서로 얽히고설키는 호혜적 의무들의 관계망을 만든다. 규범에 관한 이야기는 공정과 의리의 가치를 불어넣어서 우리가 왜 호혜적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가를 일러준다. 소속감의 공유에 관한 이야기는 호혜적 의무에 누가 참여하는가를 일러준다. 서로 주고받기로 약속하는 호혜성은 당연히 그 의무를 수용하는 사람들로 정의되는 집단 내에서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인과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수행해야 할 행동이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가를 일러준다. 이 이야기들이 합쳐져서 '신념 체계'를 형성하여 우리의 행동을 바꾼다. 신념 체계는 무질서의 지옥을 공동체로 바꾸어놓고, 〈역겹고, 잔인하고, 단명한〉 삶을 〈만개하는〉 삶으로 바꾸어놓는다. 이야기는 현생 인류를 구분하는 독특한 특징이다. 우리는 그저 유인원이 아니다."(62-3)


"의견이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리기를 좋아하기 마련인데다가 개인의 선택으로 형성되는 인터넷상의 네트워크 집단은 순식간에 온라인 〈반향실(echo chamber)〉로 진화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네트워크 안에서 누가 말하면 다른 누가 맞장구치는 메아리만을 듣는다. 이야기들은 우리의 신념을 형성하는데, 이 반향실들이 바로 그 프로세스를 작동시킨다. 이것이 갈수록 더 생활하는 장소의 공유와 단절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적 단위(즉, 정치체)들은 여전히 우리가 생활하는 장소로 정의된다. 선거에서 우리가 행사하는 투표는 장소별로 집계되고, 우리의 정치 과정에서 생겨나는 공공 서비스와 정책도 장소별로 시행되고 전달된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규범이 크게 달라지는 사태가 서로 장소가 다른 정치체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인터넷의 디지털 연결성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규범이 크게 달라지는 사태가 정치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70)


"조직의 지휘부가 자신의 네트워크에 이야기를 활용한 아주 최근의 모범적인 사례가 〈이라크 시리아 이슬람 국가(ISIS)〉이다." "소속감을 창출하는 ISIS의 이야기들은 정체성이 서로 다른 청년들을 〈믿는 자들(The Faithful)〉이라는 단 하나의 새로운 공동 정체성으로 바꿔놓았다. 호혜적 의무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는 동료 존중의 압력으로 그들을 얽어매서 무자비한 행동으로 몰고 갔다. 새로운 진술들의 이야기로 퍼져나가며 그들의 험악한 행동을 〈칼리프 국가〉라는 중요한 목적과 연결했다. ISIS는 이 인과적 의미를 구축하여 구성원들의 준수에 목적을 부여했다." "하나의 신념체계로서 ISIS는 내적인 정합이 탄탄하고, 따라서 안정적이다. 그 신념 체계의 각 항목을 따로따로 보면 그 하나하나가 대단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들의 집단과 그밖의 모든 사람을 갈라놓지만, 그로 말미암은 그들 집단의 정체성은 오히려 강화된다. ISIS는 사회를 12세기로 돌려놓기 위해서 이야기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76-7)


3장 윤리적 국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한 대공황 탈출은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소속과 상호 의무의 이야기들을 매개로 이루어진 막대한 공동의 노력이었다. 그 과정에서 각 나라를 커다란 공동체, 즉 정체성을 공유하고 의무와 호혜성을 수용하는 의식이 탄탄한 사회로 바꿔놓는 커다란 유산이 생겼다." "(이 덕분에 국가의 역할을 크게 확장했던) 사회민주주의의 붕괴는 이중의 악재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호혜적 의무가 야금야금 무너지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구조의 변화로 타격을 받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니 호혜적 의무의 필요성은 오히려 더 절실해진 것이다. 이 기간의 극적인 경제 성장에 동반된 대가는 복잡성이 대단히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복잡성의 증대는 더 전문적인 숙련 기능을 요구했고, 그로 인해서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이 필요해졌다. 이것이 전례가 없을 만큼 고등 교육의 팽창을 촉진했다. 이 육중한 구조 변화의 물결이 사람들과 사회의 정체성에 충격을 초래했다."(88-9)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상황을 보면, 임금 불평등은 소소하고 나라의 위세와 품위도 높다. 그래서 최상위 고임금 노동자들조차 존중에서 얻는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일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나라를 으뜸 정체성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성이 증폭됨에 따라서 특출난 교육을 받고, 그에 상응하는 특출날 일자리를 얻으며, 높은 생산성에 상응하는 특출난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고숙련 집단의 최상층은 그들의 으뜸 정체성을 나라에서 그들의 숙련 기능으로 바꾼다." "이제 고숙련 집단이 국민 정체성에서 이탈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출발점에서보다 존중을 더 많이 획득한다. 반면에 국민 정체성을 으뜸 정체성으로 고수한 저숙련 집단은 존중을 상실한다. 가장 많이 존중받는 사람들이 국민 정체성을 으뜸으로 선택하는 집단에서 이탈한 탓에 이 집단에 소속함으로써 얻는 존중이 줄어들기 때문이다."(92-3)


"국민정체성이 인기를 잃으면서 가치를 중시하는 정체성의 세가 강해졌는데, 그 결과는 추악하다. 이른바 〈반향실〉 현상에 동반하여 의견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교류하기가 대단히 쉬워졌고, 그 덕분에 가치 중심 정체성의 세가 더욱 강해졌다. 이 가치 기반의 반향실들은 사회의 결속을 회복하는 길이 되기는커녕 구미권 사회를 갈가리 찢어놓고 있다." "결국 가치가 민족이나 종교와 다를 바 없이 공유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커다란 난관에 봉착한다면, 그밖에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장소에 대한 소속감이다." "2장에서 보았듯이, 이야기 덕분에 우리는 소속된 장소를 단지 현 상태의 순간적인 이미지만이 아니라, 진화의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지금이 모습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겪어온 겹겹의 변화를 이해할수록 장소에 대한 애착은 깊어진다. 이 기억은 그곳에서 성장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지식이고, 그곳 사람들의 공통 정체성을 보강해준다."(114-7)


"소속감을 공유하는 심리적 토대는 장소이지만, 이를 목적의식적인 행동으로 보완할 수 있다. 나라는 공공정책의 거반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단위인 만큼, 나라 차원의 공공정책을 통해서 추구하는 공통의 목적에서도 우리의 공유 정체성이 생긴다. 그러한 목적이 호혜적인 행복 증진의 행동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목적의식적인 행동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서로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면 어떻게 우리 모두의 후생이 점차 향상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서로에 대한 의무의 이행이 전제하는 바는 당연히 그러한 호혜성의 영역을 정의하는 공유 정체성의 수용이다." "그동안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적대적인 정체성을 가지도록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그러한 정체성들은 사회에 독소로 작용한다. 서로 적대적인 이해관계의 이야기들은 따로따로 보면 모두 옳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이 자꾸 누적되면 사회를 좀먹는 폐해가 너무 커져서 집단적인 행복을 퇴보시킨다."(119-20)


4장 윤리적 기업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본을 내놓은 사람들에게 기업의 소유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 배경의 원리는 위험을 떠안은 사람들이 기업을 통제할 필요를 가장 절실히 느낄 뿐만 아니라 경영자들을 꼼꼼이 따져볼 동기도 가장 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리는 점차 현실과 멀어지고, 갈수록 더 심하게 괴리되었다." "현대의 공급망에서는 기업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의존하기 때문에 한 회사가 파산하면 바이러스처럼 그 충격이 세계 경제 곳곳으로 전달된다." "따라서 기업은 자신의 장기적인 성과를 중시할 동기가 있는 사람에게 설명의 책임을 다해야 하고, 경영의 오류를 포착할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식 소유가 고도로 분산된 상황에서는 무임승차의 문제가 생긴다. 이는 산산이 흩어진 주주들 가운데 아무도 경영진의 장기 전략이 과연 훌륭한지 들여다보려는 동기가 별로 없다는 문제이다."(131-2)


"그동안 최고 경영자의 보수가 갈수록 단기 성과 지표에 더 긴밀하게 연동되는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대기업의 보상 위원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집단이다. 그러한 집단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그곳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이 점차 신념 체계를 형성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사회는 국민 정체성이 갈라지면서 숙련 기능 중심의 정체성들로 분열되었다. 이 커다란 과정의 축소판 중 하나가 최고 경영자의 동료 집단이 자사의 노동자들로부터 다른 회사의 최고 경영자들로 바뀐 것이다." "〈그는 500만 달러를 버는데, 나는 고작 400만 달러밖에 벌지 못한다. 이건 공정하지 않다.〉 이러한 인식의 핵심에는 탐욕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최고 경영자들의 다수는 쾌락주의자가 아니라 의욕이 넘치는 일 중독자들이다. 그 핵심은 정체성이 새롭게 정의됨에 따라서 그것에서 비롯되는 동료 존중의 근원도 달라졌다는 것이다."(134-5)


"(통상적으로 주주가 아닌) 장기근속 피고용자들과 고객들은 회사 이사회에 대표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집단 중 어느 쪽이든 그들을 이사회에 대표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가끔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한 회사를 〈상호 회사(mutuals)〉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이러한 구조를 갖춘 회사들이 많았지만, 이 구조에는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단 하나의 유혹이 있었다. 그것은 현재 시점에서 소유와 통제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회사의 존재 형태를 바꿀 법적인 권한을 누린다는 점이다. 즉, 그 권한으로 그들의 회사를 상호 회사로부터 소유주들이 금융 시장에서 회사 주식을 매매할 수 있는 상장 회사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회사의 형태를 그렇게 바꾸면, 현 세대의 〈소유주들〉은 미래의 수익을 모두 포괄하는 회사의 자본 가치를 통째로 획득한다. 따라서 앞으로 등장할 모든 후속 세대의 참여자들은 그로 인해서 소유와 통제권을 물려받을 기회를 영원히 박탈당한다."(143-4)


"호혜적 의무를 이행하는 기업 행동의 재구축은 정부가 이룩해야 할 막대한 공공재요, 공익이다. 우리는 최소 임계 규모에 도달하는 '윤리적 시민들'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윤리적 시민들은 기업의 목적을 이행하고 기업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러한 목적이 함축하는 규범을 인정하면서 존중과 불신의 두 가지 압력을 통해서 기업이 그러한 의무를 이행하도록 고무한다." "돌이켜보면, 1945-1970년 시기에 서구 대다수 정부의 정치 지도자들은 새로운 호혜적 의무를 많이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기억할 것으로, 그 시절의 최고 경영자들은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던 급여의 20배 만을 자기 급여로 챙겼다. 지금의 최고 경영자들은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는 급여의 231배를 자기 급여로 챙긴다. 윤리적 기업은 사라지고 흡혈 오징어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시대는 계속 변해왔다. 이제 다시 새로운 시대로 바뀌어야 한다."(162-5)


5장 윤리적 가족


"1945년의 윤리적 가족에서 중간 세대를 이루는 부부는 그들의 위아래로 부모와 아이들 두 세대를 돌보는 일을 호헤적인 의무로 수용했다. 이는 보통 상당히 큰 부담을 뜻했지만, 누구나 세 세대를 다 거치게 되므로 그것을 당면한 시기에 책임으로 수용해야 할 의무로 생각했다. 그러한 구조는 대단히 안정적인 신념 체계였다." "이제 대다수 고학력 가정에서는 예전의 이 규범이 부부가 개인적 성취를 통한 자아실현을 서로 격려해주는 새로운 규범으로 바뀌었다. 동거와 동류 교배(또는 동질혼) 덕분에 고학력자들은 서로 잘 어울리는 부부로 자리를 잡아갔고, 그 덕분에 그들의 이혼율은 낮아졌다. 성취도가 높은 부모들은 자신의 성공을 자식들에게도 물려주기를 열망했다. 그래서 예전의 양성 간 교육 불균등을 반영했던 성별 위계질서는 사라지고, 고학력층 부모 양쪽이 합세하여 자식의 조기 영재 교육에 달려드는 조류가 나타났다."(168-71)


"한편 경제적인 이유로 주로 하류층을 타격한 가족 해체 문제에 대처하고자 나선 가부장적 국가는 윤리적 가족이 뒷받침하던 아이들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어린이의 권리〉라는 명분으로 개입했다." "〈어린이의 권리〉를 위한 국가의 의무는 아이가 학대받고 있다고 볼 근거가 있으면 오히려 아이를 친부모로부터 격리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서 불가피하게 나타난 결과는 격리는 되었지만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불확실한 상태(limbo)〉의 아이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한 상태〉의 아이들을 돌보는 위탁 양육은 육아에 필요한 중요한 기준에서 모두 실패한다. 그처럼 아이와 맺어지는 관계는 상거래와 유사한 반면, 아이들에게는 분명한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한 관계는 임시적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데에 반해, 아이들에게는 영구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더욱이 그러한 관계는 아이들에게 소속감을 주지 못한다."(176-8)


"학력 수준이 낮은 인구층에서는 많은 가정이 빈 껍데기로 해체되고 있는 반면, 학력 수준이 높은 인구층에서는 왕조 가족이 번창하고 있다. 새로운 영재 교육 모형을 도입한 고학력자 가정에서는 부모가 양육에 들이는 공이 극적으로 늘어났다. 예전과는 판이하게 고학력자의 아이들은 부모가 분명한 목적의식하에 조성하는 집약적인 상호 작용의 혜택을 누린다." "로버트 퍼트넘은 인지 능력별로 아이들의 집단을 분류해서 대학교에 입학할 승산을 분석했다. 당연히 부모의 높은 인지 능력을 물려받을 공산이 큰 고학력 계급의 아이들이 대학교에 입학할 승산이 더 클 것이라고 예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퍼트넘은 인지 능력이 미국에서 '최하위 집단에 속하는' 고학력 계급 아이들의 대학 입학 승산이 인지 능력이 미국에서 '최상위 집단에 속하는' 저학력 계급 아이들보다 더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새로 자리잡은 조기 영재 교육은 전리품 아이뿐 아니라 〈위장된 바보〉도 길러낸다."(179-81)


6장 윤리적 세계


# 윤리적 세계의 핵심 원리

1. 호혜성과는 무관하게 다른 사회에 대한 의무를 인정한다. 이것은 구조의 도리에 해당하고, 난민, 대규모의 절망, 기초적인 사법질서를 결여한 사회에 대한 의무를 포함한다. (국제난민기구UNHCR, 세계식량계획WFP, 세계보건기구WHO 등)

2. 더 많이 공헌하고자 하는 나라들은 그들끼리 더 광범위한 호혜적 의무를 건설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3. 이렇게 건설되는 호혜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한 집단에 공동으로 소속한다는 인식을 형성하고, 목적을 의식하는 공동 행동을 통해서 각 참여자의 승화된 이기심을 고무한다.


제3장 포용적 사회의 회복


7장 지리적 분단: 번영하는 대도시, 망가진 도시


"전문화가 극도로 심화되면 서로 다른 전문가들이 가까이 있어야만 생산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래서 전문화가 심화될수록 서로 보완적인 전문가들이 밀집하는 더 커다란 군집체가 필요해지고, 그만큼 잠재적인 고객들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갖가지 전문 인력이 군집을 이루려면 뛰어난 연결성을 제공하는 대도시가 필요하다." "국제무역의 장벽이 제거됨에 따라서 잠재적 시장이 국내 시장에서 세계 시장에서 확대되었고, 그로 인해서 고도로 전문화된 인력의 군집 형성으로 얻는 이득이 한층 더 커졌다. 런던에 군집한 서비스들의 주된 시장은 예전에는 영국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이다." "따라서 대단한 고소득자들이 많이 상주하면서 이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서비스 시장이 생긴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서비스들이 생겨서 군집을 형성하므로 세계의 갑부들이 몰려드는 새로운 유입이 일어난다. 이것이 번영하는 대도시이다!"(215-6)


한편 1960년대의 셰필드처럼, 기업 군집체를 중심으로 한 (지역) 도시들은 세계화가 확산됨에 따라 노동 생산성과 임금 경쟁력이 우월한 타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하면서 도시 기반이 급속도로 무너져내렸다. "이런 도시들에 남은 경제 활동은 국지적 권역의 창고라든가, 부동산 비용이 아주 저렴한 조건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저생산성 제조업, 아니면 저렴한 부동산과 저임금, 비정규 노동에 의존하는 콜센터이다. 도시가 그러한 활동들로 채워짐에 따라서 부동산 가격과 임금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내 더 발전할 여지가 없는 막다른 길에 가로막힌다. 이러한 활동들은 숙련도가 낮고, 따라서 그 노동력은 복잡한 전문화에 의한 지속적인 생산성의 상승에 더는 참여하지 못한다. 대도시에 있는 슈퍼스타급 기업들은 계속 테크놀로지의 최전방을 달리고, 따라서 대도시 인구는 소득이 계속 상승하는 혜택을 누린다. 그러나 대도시의 테크놀로지와 소득은 망가진 도시로는 흘러내리지 않는다."(218-9)


"집적 이득에 대한 과세는 윤리성과 효율성, 두 가지 근거 모두에서 영리한 정책이다." "윤리성 측면에서 보면 소득(집적의 이득)과 응분(공과 분별) 사이의 괴리를 개선하는 방안이며, 효율성 측면에서 보면 (근로 소득으로 포장된) 경제적 지대 추구를 억제하는 방안이다." "집적 이득은 토지주와 고숙련 도시 노동자들에게 나뉘어 돌아간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합당한 출발점은 토지와 건물(토지에 부착된 지상의 모든 정착물 재산)의 가치 상승을 과세 대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토지의 가치와 건물의 가치에 대하여 일정 백분율의 세금을 해마다 부과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도시의 고숙련 집단이 획득하는 집적의 지대를 과세 표적으로 잡는 대도시 가산세가 따라붙는다. 고숙련자 중에서도 최상위 집단에게 돌아가는 집적의 이득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가산세는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누진적으로 높아져야 한다."(238-42)


"대도시에 과세하는 목적은 망가진 도시의 주민들을 위한 복지 급여 재원을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들을 생산적인 노동의 군집체로 복원하는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다. 어느 군집체가 해체되면 시장은 그것을 새로운 군집체로 바꿔놓지 않는다. 그 대신, 도시는 점차 생산성이 낮은 활동들로 채워진다. 그런데 시장의 작용은 왜 새 군집체를 창출하지 못할까?" "우선 다른 기업이 따라붙지 않으면 개척 기업은 파산할 공산이 크다. 게다가 다른 기업들이 따라붙더라도 개척자는 나중에 진입하는 기업들보다 불리한 여건에 놓인다. 개척 기업은 필요한 숙련 노동자를 구하려고 해도 마땅한 인력을 찾을 개연성이 낮다." "따라서 개척 기업은 다른 곳에서 숙련 노동자들을 데려와서 그들을 통해서 그 지역의 피고용자들을 점차 훈련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후발 기업은 필요한 숙련 노동자를 채용하기가 수월해질 것이다." "달리 말해서, 군집의 개척자는 이른바 선발주자의 불리에 직면한다."(243-9)


# '선발주자의 불리'를 보완하는 공공 대책

1. 군집체 구축에 투자하는 개발은행 제도 활용

2. 사회간접자본을 마련해주는 기업 단지 조성

3. 투자 유치에 적합한 산업들을 연구하는 투자진흥청 설립

4. 지식 군집을 마련할 지역 대학교와 전문 대학 지원


8장 계급 분단: 모든 것을 누리는 가정과 해체되는 가정


"앨리슨 올프 남작은 〈지금까지 알려진 인간 사회들 가운데 아무런 질서도 없는 난장판 성생활을 운영한 사회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와 반대로 모든 형태의 인간 사회는 두루 존중받는 결혼제도를 두었다······세월이 흐르며 사회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계속 유지된 규칙은 아이의 아버지가 그 아이의 어머니와 결혼하게끔 강제하려고 설계된 것들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러한 규칙을 두어야 할 근거는 충분하다." "텔로미어는 DNA 맨 끝에서 보호 역할을 하는 뚜껑인데, 그것의 길이가 짧을수록 세포가 손상을 더 많이 입고 건강도 나빠진다. 어머니가 불안정한 부부관계에 있으면, 그 어머니의 아이는 9세이 이를 시점에 텔로미어의 길이가 40퍼센트 짧아졌다. 이 파괴 작용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기 위해서 가족 소득의 두 배 향상이 아이의 텔로미어 길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자. 고작 5퍼센트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생활 참여가 결핍됨에 따른 피해는 다른 보상 요인으로 상쇄될 수 없을 만큼 크다."(260-1)


# 사회적 모성주의 접근법

1. 취학전 아동 돌봄 서비스 : 육아에 필요한 직접 자금 지원, 실업 충격을 완화해줄 취업 보조, 10대 부모의 정신건강 관리, 은퇴자를 활용한 돌봄 서비스 등

2. 학교 생활 지원책 : 학생간의 사회적 혼합을 높여 계층화 현상 완화, 신뢰할 만한 조언자 그룹이 열악한 사회 관계망을 보완, 학위보다 숙련 기능 육성 등

3. 장기적 안정성 : 노동자들이 미래 소득을 감안하여 사회적 책무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고용 안정성 확대, 애착과 소속감을 안겨주는 사회적 자본 확대 등

4. 사회적 불평등 억제 : 주거 수요보다 자본 소득에 민감한 주택 가격, 고소득 창출에만 초점을 맞춘 일자리(혁신적 재능의 낭비), 제로섬경쟁 제도 제한 등


"노동은 삶의 중추를 이루는 시기에 사람들에게 목적을 부여해야 한다. 지금, 형편이 좋은 사람들 중에는 노동에서 목적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못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을 얻을 기회가 너무 적은 직무에서 일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일에서 자부심을 얻을 만한 숙련 기능이 불충분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하는 일에 사회에 공헌한다는 자각에서 비롯되는 내면의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단지 급여 봉투의 격차가 아니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실패이다." "사회적 가부장주의에서는 고집스럽게 엇나가는 가정들을 국가가 감시하고 규율하지만, 사회적 모성주의에서는 국가가 실용적인 지원을 통해서 그러한 가정이 겪는 충격을 덜어준다."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 살든 자존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자본주의를 건설하려면, 그러한 접근이 상류층과 하류층 둘 다에 대해서 필요할 것이다."(319-20)


9장 세계적 분단: 승자와 뒤처진 자


"비교우위론에 따르면, 무역은 상호 이득을 가져오기 때문에 각 사회 내부의 '재분배를 통해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면' 모든 사람의 형편이 더 나아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전문가 집단으로서 우리 경제학자들은 이 올바른 진술을 명백히 잘못된 진술, 즉 사회 내의 모든 사람의 형편이 '나아진다'고 스리슬쩍 바꿔버렸다. 게다가 무역을 다루는 국제 경제학은 지금껏 사회 내부의 보상 메커니즘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무관심은 단순한 모형들이 무시하는 두 가지 특징적인 사실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하나는 무역에 따르는 손실이 대개 노동 시장을 통해서 파급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손실이 지리적으로 집중된다는 것이다. 셰필드가 흥성했던 철강 산업을 상실했을 때, 셰필드 실업자들의 소비 위축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영국의 다른 곳에서 소비가 증가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별 위안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322-3)


"무역과 노동자의 국제적 이동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한 가지 있다. 무역은 '비교우위'를 동력으로 작동하지만, 노동의 이동은 '절대우위'를 동력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물론 표준 교과서에 등장하는 가정들을 전제할 때에는 이민이 '세계적 차원'에서 효율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절대우위로 작동하는 이민이 이민자 유입국이나 유출국 모두에 이롭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이민에서 분명한 이득을 누리는 유일한 주체는 이민자들이다." "이민으로 집적의 지대가 늘어나면 대도시의 고숙련 일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내국인 시민들은 이득을 보지만, 대도시의 고숙련 일자리에서 밀려나는 시민들은 이민자들이 유입되지 않았다면 그들이 취득했을 지대를 상실할 것이다." "또다른 양상으로 이민이 초래하는 비용이 있다. 그것은 사회에 계속 축적되어온 호혜적 의무를 이민이 보통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이민자들은 그 사회의 공유 정체성과 호혜적 의무, 승화된 이기심의 이야기들을 알지 못한다."(327-31)


"이러한 문제들을 고려하면, 시장과 이기심이 주도하는 사적인 결정으로 유발되는 이민의 유입량이 사회적으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물론 이민자 본인뿐 아니라 이민 유입국과 유출국 모두에 이롭게 작용할 이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민 문제에서도 이데올로기는 잘못된 길로 나아간다. 좌파는 시장이 주도하는 프로세스에 본능적으로 회의적인데도 예외적으로 이민에는 찬성한다. 반면에 시장이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열광하는 우파가 예외적으로 이민에는 반대한다. 실용주의와 실용적 추론은 이데올로기보다 더 많은 뉘앙스를 고려한다. 즉, 어느 정도 규모의 이민이 사회에 이로울 것인가를 물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이민을 받아들일 것인가도 묻는다." "이민으로 손해를 보는 집단에게는 그 손실에 상응하는 보상을 공공정책이 마련해야 한다. 또한 쉽게 보상할 방법이 없는 재분배를 유발하는 요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는 공공정책이 억제해야 한다."(332-3)


제4부 포용적 정책의 부활


10장 극단을 파괴하기


"실용주의의 적(敵)은 (사회민주주의가 무너진 정치적 공백을 메운) 이데올로기와 대중 영합주의 두 가지인데, 그 각각이 자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좌우파의 이데올로기 모두 어떤 목적에라도 이용할 수 있는 만능의 분석을 활용함으로써 상황의 맥락, 신중한 접근, 실용적 추론을 전부 건너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만능의 분석으로부터 상황과 시대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에서나 타당한 진실이 술술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대중 영합주의는 다른 방식으로 건너뛰는 우회로를 제시한다. 그것은 금세 손에 잡힐 만큼 명백한 해결책을 훤히 알고 있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이다. 이데올로기와 대중 영합주의가 합쳐질 때도 많은데, 그렇게 되면 효과는 더욱 강력해진다. 한때 신뢰를 잃은 이데올로기들이 새로운 매혹적인 해결책을 팔러 다니는 열정적인 지도자들을 만나서 새롭게 단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지도자들에게 환호하는 함성이 인다."(338-9)


"공리주의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소비로부터 효용을 창출하고, 총효용 합산의 거창한 윤리적 산술에 동등하게 포함되는 독자적인 개인이라고 이해하지만, 이와 달리 현실의 사회를 형성하는 원자는 사람들끼리 맺는 인간관계이다. 사회적 가부장주의는 사이코패스와 다름없는 경제적 인간의 이기심을 플라톤적 수호자들이 통제해야 한다고 간주하지만, 이와 달리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인간관계가 의무를 낳는다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삶의 목적의식에 중요하다고 인식한다. 플라톤적 수호자와 경제적 인간을 짝짓는 결합이 그동안 공공정책을 장악했고, 그로 말미암은 불가항력의 독소 작용이 사람들에게서 윤리적 책임을 걷어내버렸다. 덩달아, 의무는 가부장적 국가로 넘어갔다. 이를 중세 종교에 빗댄 괴상한 풍자극으로 나타내면, 평범한 사람들은 죄인 역을 맡아서 특출난 사람들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351)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가가 획득한 책임은 국가의 능력을 넘어선다. 그것은 기업과 가족만이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 책임이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에 대한 의무감이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가부장적 국가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마련해주는 온갖 장치보다 월등하다. 그리고 훌륭한 기업은 피고용자들에 대한 의무감이 노사관계의 장기적인 호혜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가부장적 국가가 마련해주는 온갖 훈련 프로그램들보다 월등하다. 국가가 수행할 역할은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가정과 기업의 의무가 본연의 그 자리에서 이행되도록 복원해주는 정책의 정책(meta-policy)을 고안하는 것이다." "소속감의 공유로 실현되는 호혜적 의무를 촘촘하게 일구어가면 더 신뢰받고 따라서 더 효과적인 국가를 만들어갈 수 있다." "자발적으로 실현되는 호혜성은 공리주의적 가부장주의가 성취한 것보다 더 행복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351-3)


"앞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사람들이 정체성을 공유하면 아주 멀리까지 내다보는 호혜성의 토대가 갖춰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념 체계를 잘 구축하는 사회는 개인주의나 복고판 이데올로기들을 중시하는 사회보다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개인주의적 사회는 공공재라는 광대한 잠재력을 포기한다. 복고판 이데올로기들은 모두 사회의 다른 일부에 대한 증오를 저변에 깔고 있어서 갈등으로 치닫는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는 사람들이 호혜적 의무의 관계망을 수용하도록 길러진다. 삶이 잘 풀리는 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와준다. 성공적인 사람들이 이러한 의무에 부응하는 이유는 의무의 이행에서 생기는 자존감과 동료 존중으로 보상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소수에 대해서는 좀더 강제적인 힘을 사용해도 합당하다. 이것이 우리의 정치가 길잡이로 삼아야 할 윤리적 실용주의이다."(3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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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 모비딕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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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론


"쇼크 독트린의 전개방식은 대강 이렇다. 우선 쿠데타, 테러리스트의 공격, 시장 붕괴, 전쟁, 쓰나미, 허리케인 등의 재난이 국민들을 총체적으로 쇼크상태로 몰아넣는다. 쏟아지는 폭탄, 계속된 공포, 몰아치는 비바람은 사회를 약하게 만든다. 마치 고문실에서 시끄러운 음악과 구타가 죄수들을 약하게 만들 듯 말이다. 공포에 질린 죄수들은 동지의 이름을 대고 자신의 과거 신념을 비난한다. 마찬가지로 충격에 빠진 사회는 이전에 강력하게 보호했던 것들을 포기한다.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 구호소의 자마르 페리와 동료 재해민들은 공영주택 프로젝트와 공립학교를 포기해야만 했다. 쓰나미 이후 스리랑카의 어민들은 호텔리어들에게 자신들의 소중한 해변을 내주어야 했다. 모든 것들이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다면, 충격과 공포를 느낀 이라크인들은 석유매장지, 공기업, 주권에 대한 통제권을 미군기지와 그린존(Green Zone)에 넘겨주었을 것이다."(28-9)


1부 두 명의 쇼크요법 전문가: 연구개발자들


"미국의 심리학자 이언 캐머런은 환자들에게 올바르고 새로운 행동을 가르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마음 내부로 들어가 ‘오래된 병리적 패턴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첫 단계는 '기존 패턴 파괴'로, 마음을 초기 상태로 돌려 놓으려는 엄청난 목적을 띠고 있다. 캐머런은 두뇌의 정상적 기능을 방해하는 각종 조치(약물 주입, 전기 쇼크 등)를 취함으로써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도 단번에 즉각적으로 말이다. 요컨대 마음에 '충격과 공포'를 가하는 것이다." "1950년대 중반에 냉전의 병적 광란이 시작될 무렵, CIA 연구원들은 캐머런의 방법에 흥미를 가졌다. CIA는 '특별 심문기법' 연구라는 비밀 프로그램을 개시했다. 비망록에 따르면, 〈여러 특별 심문기법들을 검토하고 연구했다. 그 가운데는 심리적 모욕, 완전 고립, 약물이나 화학물질의 사용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처음엔 프로젝트 블루버드로 불렸다. 그 후 프로젝트 아티초크로 변경되었다가, 1953년에 MK울트라로 이름을 바꾸었다."(45-8)


"시카고학파가 가르치는 핵심은 공급, 수요, 인플레이션, 실업 등의 경제적 동인은 자연의 힘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고정적이고 바뀌지 않는다. 시카고학파의 교과서에서 상상하는 진정한 자유시장에서는 이러한 힘들이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달이 조류를 잡아끌듯, 공급이 수요와 의사소통을 한다.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어려워질 경우를 생각해보자. 프리드먼의 엄격한 통화주의 이론에 따르면, 그 원인은 시장 스스로 균형을 찾게 놔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방향을 잘못 잡은 정책 입안자들이 너무 많은 돈을 시장 시스템에 투입했기 때문이다. 생태계의 자기조절과 마찬가지로, 시장은 작동 기제에 모든 것을 그냥 맡겨놓으면 알아서 스스로 균형을 맞춘다. 적절한 가격에 적절한 물량의 상품이 생산된다. 그리고 물건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그런 물건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적절한 임금을 받는다. 한마디로 일자리가 넘쳐나고, 끝없는 창조성이 발휘되며, 인플레이션이 없는 에덴동산이다."(70)


"1940년대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자 돈 파틴킨은 이렇게 회상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많은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던 마르크스주의 요소와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시카고학파는 명쾌한 논리적 완결성과 간결함이 어우러졌으며, 급진주의와 이상주의가 혼합되어 있다.〉 즉 마르크스주의자가 노동자들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면 시카고학파는 기업가의 유토피아를 꿈꾼 셈이다. 두 사상 모두 자신의 방법대로만 한다면 완벽함과 균형이 따라온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시카고학파의 임무는 자본주의의 순수화였다. 그들은 시장에서 방해요소들을 제거해 자유경제를 번영시키려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시카고학파는 마르크스주의를 진짜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미국의 케인스학파 사상,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당시 제3세계라 불리던 지역의 발전주의였다. 이들은 혼합경제를 믿는 신도들이었다. 시카고학파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자본주의 개혁을 원했다."(73-4)


2부 첫 번째 테스트: 출산의 진통


"경제적 쇼크요법 이론은 인플레이션 과정을 좌우하는 기대(expectation)의 역할에 의지한다. 즉 인플레이션 통제는 통화정책만이 아니라 소비자, 고용주, 노동자의 행동을 바꾸어야 가능하다.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인 정책 전환은 대중에게 게임의 규칙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알리며 사람들의 기대를 교정할 수 있다. 그러면 가격과 임금은 더 이상 오르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인플레이션이 가라앉을 거라는 기대가 빠를수록 경기침체와 고통스런 고실업 기간도 짧아진다. 그러나 대중이 정치권을 신뢰하지 않는 국가의 경우엔 단호한 다량의 쇼크만이 국민들에게 가혹한 교훈을 '가르칠' 수 있다. 침체 또는 퇴행을 야기하는 정책은 극심하고 대대적인 빈곤을 불러오는 잔인한 발상이다. 그런 이유로 이 이론을 기꺼이 시험해보려는 정치 지도자는 이제까지 전혀 없었다. 「비즈니스위크」가 말한 '고의적으로 경기침체를 야기한 이상한 세상'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그러나 칠레의 피노체트는 정말로 그렇게 했다."(110)


"자유시장 치어리더들의 주장과 달리, 칠레는 결코 '순수한' 자유시장의 실험실이 아니었다. 소수 엘리트들이 짧은 시간에 부자에서 엄청난 부자로 올라선 국가일 뿐이었다. 빚을 지고 공공자금으로 보조금을 받는 식으로(나중에는 구제금융 형식으로) 고수익을 냈을 뿐이다. 경제 기적 이면에 숨겨진 사기와 판매상술이 드러났다. 결국 피노체트와 시카고 보이스가 장악한 칠레는 개방된 시장의 자본주의 국가가 아닌 조합주의 국가였다. 조합주의는 원래 사회의 세 권력원인 정부, 산업, 노조의 연맹체로, 경찰국가가 운영하는 무솔리니의 모델이었다.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해 모두 협력해야 한다. 칠레가 피노체트 아래에서 선구적으로 시도한 것은 바로 조합국가의 혁명이었다. 경찰국가와 대기업이 지원동맹을 맺은 뒤, 세 번째 권력인 노동자들과의 전쟁에 나선 나선 것이다." "쇼크요법은 말 그대로 쇼크를 주었다. 부를 상류층에 몰아준 반면 중산층은 아예 사라지게 만들었다."(114-5)


"국가가 공포를 조장하는 경우에 대부분 그러하듯, 표적 살해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먼저, 경제 프로젝트의 걸림돌이자 가장 저항이 심한 사람들을 제거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이러한 말썽꾼들의 실종은 저항을 염두에 둔 사람들에게 가장 확실한 경고가 된다. 따라서 미래의 걸림돌도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를 거두었다. 〈국민들은 당황하고 고뇌하고 온순해졌으며,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퇴행한 것이다. 그들은 의존적인 데다 두려움에 떨었다〉라고 칠레의 심리학자 마르코 안토니오 데 라 파라가 회상했다. 그래서 경제적 충격으로 물가가 치솟고 임금이 떨어져도, 칠레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거리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식료품 폭등이나 일반 파업도 전혀 없었다. 가족들은 자주 끼니를 거르고, 전통차로 아이의 배고픔을 달랬고,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동트기 전에 일터로 나서는 식으로 생계를 꾸렸다. 영양실조나 장티푸스로 사망한 사람들은 조용히 묻혔다."(147)


3부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민주주의: 법으로 만든 폭탄들


"리처드 닉슨이 1969년에 취임했을 때, 프리드먼은 뉴딜의 잔재에 맞서 반혁명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시카고 대학의 교수인 조지 슐츠는 프리드먼의 도움으로 닉슨 행정부에 임용된 사람이다. 또 다른 이로는 당시 서른일곱 살이었던 도널드 럼즈펠드가 있다." "그러나 1971년에 미국 경제는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했다. 실업률이 치솟고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높아졌다. 닉슨은 프리드먼의 자유방임주의 조언을 따를 경우, 수백만 명의 성난 시민들이 투표를 통해 자신을 물러나게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임대료나 기름값처럼 생활의 기반이 되는 가격들의 상한폭을 규제했다. 이에 프리드먼은 격노했다. 정부의 왜곡 조치들 가운데 가격 통제가 최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경제 시스템의 작동 기능을 파괴하는 암적 요소'라고 불렀다. 더욱 모욕적이게도, 케인스식의 정책을 실시한 것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이것은 프리드먼에게 가장 쓰라린 상처가 되었다."(175-6)


"닉슨의 통치는 프리드먼에게 분명한 교훈이 되었다. 시카고 대학의 교수는 자본주의와 자유가 같다는 전제하에서 시카고학파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 시민들은 그의 조언을 따르는 정치인을 선출하지 않았다. 더욱 좋지 않은 소식은 순수한 시장경제 독트린을 실행하려는 정부는 독재국가들뿐이라는 점이다. 시카고학파는 국내에서 당한 배신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리고 1970년대 내내 군부정권들과 손을 잡았다. 우익 군사독재가 권력을 잡은 곳이라면 거의 어디에서나 시카고 대학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하버거는 1976년 볼리비아 군부정권의 자문으로 일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대학들이 군부의 통제를 받고 있던 1979년에 아르헨티나 투쿠만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 더 멀리 나아가, 그는 인도네시아 수하르토와 버클리 마피아에게도 조언을 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시장경제로 전환할 때 경제자유화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었다."(176-7)


"1982년 4월 2일 시작된 포클랜드 전쟁은 역사적으로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서구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최초로 급진적 자본주의 개혁 프로그램을 실시할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영국의 대처는 포클랜드 승리와 광부들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바탕으로 급진적인 경제 논의로 넘어갔다. 1984~1988년 영국 정부는 텔레콤, 가스, 항공, 항공 통제시설, 철강을 민영화했다. 그리고 영국 석유공사의 지분을 매각했다. 2001년 9월 11일 일어난 사건은 인기 없는 한 대통령에게 대규모 민영화계획을 실시할 기회를 주었다(부시는 안보, 국방, 재건 분야를 민영화했다). 이와 비슷하게, 대처는 전쟁을 이용해 처음으로 대규모 민영화를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진짜 조합주의 작전이었다. 포클랜드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용한 대처는 시카고학파 프로그램을 펼치기 위해서 반드시 군사독재나 고문실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첫 번째 명확한 증거였다."(184)


"1985년, 볼리비아는 당시 하버드 경제학부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제프리 색스에게 인플레이션 대처 방안을 요청했다." "색스는 (급격한) 가격인상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종식시킨다고 예측했다. 그것은 정확한 지적이었다. 2년이 지나자 인플레이션은 10퍼센트로 떨어졌다. 어떤 기준에서 봐도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경제학자들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치명적인 것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인플레이션 조정은 상당한 고통이 수반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논쟁의 주안점은 신뢰할 만한 프로그램을 어떻게 달성할지, 과연 누가 그러한 고통을 참아내야 할지였다. 리카르도 그린스펀의 설명에 따르면, 케인스나 발전주의식 접근법은 주요 행위자인 정부, 노동자, 농부, 노조 간의 협상을 통해 부담을 나눈다. 또한 임금이나 물가처럼 수입 관련 정책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내면서, 동시에 안정화 조치를 실시한다. 〈반대로 시카고학파 정설은 쇼크요법을 통해 모든 사회적 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과한다.〉"(196-7)


"단지 가난한 국가에서 인플레이션을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색스가 칭송을 받는 건 아니다. 많은 이들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전쟁 없이 급진적 신자유주의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색스가 그러한 일을 해낸 것이다. 대처나 레이건이 시도한 것보다 더욱 전면적인 변화였다. 색스는 그러한 업적의 역사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생각으론 경제적 변혁과 민주적 개혁의 혼합은 볼리비아가 최초일 겁니다.〉 몇 년이 흘러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자유화와 민주주의가 경제 자유화와 혼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칠레보다는 볼리비아가 잘 보여주었습니다. 두 요소가 상호작용하며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이 중요한 교훈입니다.〉 칠레와의 비교는 우연이 아니었다. 10년 전에 프리드먼이 산티아고로 운명적인 여행을 떠난 이래, 쇼크요법은 늘 독재와 죽음의 캠프라는 악취를 풍겼다. 이제 색스 덕분에 그러한 악취를 떨칠 수 있게 되었다."(199-200)


"세계은행과 IMF는 제2차 세계대전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경제쇼크와 붕괴를 방지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두 기관은 보편적인 미래상에 부응하지 못했다." "1980년대 초반에 개도국은 매우 절박한 상태였다. 기세가 등등해진 IMF는 급진적인 자유시장에 대한 요구를 내놓았다. 위기에 처한 국가들이 채무탕감과 긴급 차관을 요청하자, IMF는 전면적인 쇼크요법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대니 로드릭은 (민영화와 자유무역이 핵심인) '구조조정' 전체를 하나의 뛰어난 마케팅 전략이라고 말한다. 〈세계은행은 구조조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성공적으로 마케팅했다.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적인 개혁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위기로부터 경제를 구하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과정인 구조조정은 마치 상품처럼 팔렸다. 각국 정부들은 구조조정이라는 패키지 상품을 구입했다. 때문에 외적 균형과 가격 안정을 위한 건전한 미시경제정책과 자유시장 같은 개방성을 강조하는 정책을 구별해내기가 힘들다.〉"(213-6)


4부 전환 과정에서 길을 잃다: 흐느끼고 전율하고 몸부림친 순간


"IMF와 미국 재무부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뒤의) 폴란드 문제를 쇼크 독트린의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았다. 경제 파탄과 심각한 재무 부담에다 갑작스런 체제 변화의 혼란까지 더해진 상황이었다. 즉 폴란드는 급진적인 쇼크요법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기 딱 좋은 취약한 상태가 된 것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걸려 있는 판돈은 남미보다 더 크다. 소비자 시장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동유럽은 서구 자본주의에서 비켜나 있었다. 때문에 가치 있는 자산들은 여전히 국가 소유여서, 민영화로 전환하기 가장 좋은 후보들이었다. 그것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서른네 살이었던 제프리 색스는 자유노조의 자문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단 하룻밤 사이에 가격 통제를 철폐하고 보조금을 대폭 삭감했다. 색스 플랜에 따르면, 국영 광산, 조선소, 공장들을 사기업에 매각해야 했다. 자유노조의 노동자 오너십 경제 프로그램과는 정반대였다."(232-3)


"1989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프리드먼의 이론을 과감히 새로운 영역으로 가져갔다. 〈정치 영역의 자유민주주의와 합쳐진 경제 영역의 규제 없는 시장은 인류의 역사적 진화에서 종착점을 의미한다. (중략) 한마디로 정부의 최종 형태다.〉 민주주의와 급진적 자본주의는 서로 함께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성, 진보, 개혁과도 융화되어 있다. 후쿠시마의 표현에 의하면, 이러한 융합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역사 속에 있는 사람이다." "1989년, 역사는 멋진 전환점을 맞이해 진정한 개방성과 가능성의 시대로 들어섰다. 국무부의 후쿠야마가 그 순간을 이용해 역사책을 닫고자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세계은행이나 IMF가 불안정한 시대를 골라 워싱턴 컨센서스를 드러낸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자유시장이론이 아닌 다른 경제사상에 관한 논쟁이나 토의는 모두 종식시키려는 시도였다. 즉 예기치 못하게 등장한 자기결정권을 미연에 처리하기 위해 고안된 민주주의 봉쇄 전략이었다."(241-2)


"후쿠야마는 민주주의 개혁과 자유시장 개혁은 분리할 수 없는 쌍둥이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담한 발언이 먼저 무너진 곳은 중국이었다." "프리드먼이 내린 자유의 정의에 따르면 규제 없는 교역의 자유에 비해 정치적 자유는 부수적인 것이다. 심지어는 불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 당국이 짜놓은 미래상과 잘 어울리는 주장이었다. 중국 당국은 사적 소유와 소비주의에 경제를 개방시키길 원하면서도, 정치권력은 그대로 쥐고 있으려 했다. 국가자산을 경매에 내놓을 때 당 간부들과 친척들에게 가장 좋은 거래를 넘겨 줄 계획이었다. 아마 가장 큰 이윤이 떨어지는 줄에 세울 게 분명했다. 이러한 전환의 구상에 따르면, 공산주의에서 국가를 통제하던 사람들은 자본주의로 바뀌어도 여전히 국가를 통제할 수 있다. 그것도 상당한 생활수준 향상을 누리면서 말이다. 중국 정부의 모델은 미국이 아니었다. 바로 권위주의적 정치통제와 결합한 자유시장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던 피노체트 체제였다."(242-3)


"만약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제3의 길이 있다면, 바로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지배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그 영원한 꿈을 현실로 만들 위치에 있었다. 한마디로 국가를 민주화하는 동시에 부를 재분배하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만델라에게 존경과 후원을 보냈다 게다가 반(反)아파르트헤이트 투쟁도 도움이 되었다. 1980년대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은 세계적인 대중운동이 되었다." "덕분에 ANC는 당시의 자유시장 교리를 거절할 기회를 얻었다. 아파르트헤이트 범죄에 기업들의 책임도 있다는 공통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심 경제 분야를 자유헌장의 요구대로 국유화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자리가 마련된 셈이다. 또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채무는 국민이 선출한 신정부에 적법하지 못한 부담이라는 점도 설명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독자적인 행동에 IMF, 미국 재무부, 유럽연합은 상당한 분노를 표했을 것이다."(258-9)


"아파르트헤이트를 끝내는 조건의 협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정치적인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자연히 대부분의 관심은 만델라와 국민당의 지도자 데 클레르크 간의 고위급 정치회담에 쏠렸다." "데 클레르크 정부는 협상에서 이중 전략을 취했다. 우선 경제를 운영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어버린 워싱턴 컨센서스에 의지했다. 그러면서 무역정책이나 중앙은행 같은 경제정책 입안의 핵심을 '기술적인' 또는 '행정적인' 문제로 표현했다. 또한 국제무역협정, 헌법변경, 구조조정 프로그램 같은 폭넓고 새로운 정책 도구들을 사용했다. 자칭 공정하다는 전문가, 경제학자, IMF 관리, 세계은행 관리, 관세무역일반협정(GATT) 그리고 국민당의 손아귀에 중요한 권력기관을 넘기기 위해서였다. ANC의 해방운동 전사들만 달랑 소위시킨 채 말이다. 한마디로 발칸화(서로 적대적이거나 비협조적인 여러 개의 지역으로 분열시키는 것) 전략이다. 지정학적 측면이 아니라 경제학적 측면에서 말이다."(260-1)


"토지를 재분배하고 싶은가?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마지막 순간에 협상가들이 신헌법에 모든 사적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토지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실직 노동자 수백만 명에게 일자리를 창출해주고 싶은가? 그것도 불가능하다. 수백 개의 공장들은 사실상 파산상태였다. ANC가 세계무역기구 WTO의 전신인 GATT에 서명한 탓에 자동차 공장과 직물 공장에 보조금을 주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 에이즈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흑인 거주지구에 무료로 에이즈 치료제를 나누어주고 싶은가? 그러면 WTO의 지적재산권 조항을 위반하게 된다. GATT의 연장인 WTO에는 국민과의 토론도 없이 가입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보다 넓은 주택들을 더 많이 짓고, 흑인 거주지구에 무료로 전기를 제공하고 싶은가? 불행히도 예산은 아파르트헤이트 정부가 남겨놓은 대규모 채무상환에 쓰이고 있다." "남아공은 자유로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포로로 잡힌 신세였다."(264-5)


"1991년 후반, 옐친은 의회에서 이례적인 제안을 했다. 1년 동안만 자신에게 특별권력 행사권을 부여해달라는 것이다. 즉 법안을 의회에서 상정해 통과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법령으로 발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경제 위기를 해결하고, 번영을 누리는 건전한 시스템으로 되돌리겠다고 말했다. 옐친이 요구한 것은 민주주의자가 아닌 독재자들이 누렸던 집행권이었다. 그러나 의회는 쿠데타 시도를 막아준 대통령에게 여전히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는 외국의 원조를 절실하게 원했다. 따라서 대답은 '예스'였다. 옐친은 러시아의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1년 동안 절대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즉각 경제학자들로 팀을 구성했다. 상당수는 공산주의 말년에 자유시장 독서클럽을 결성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시카고학파 사상가의 기본서를 읽고, 러시아에 어떤 식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 논의하곤 했었다. 프리드먼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들은 진짜 시카고 보이스들보다 더욱 철저했다."(288)


"러시아에서 쇼크요법 열의는 최고조에 달했다. 옐친은 민주주의를 닮은 건 뭐든지 가혹하게 파괴했다. 그런데도 서구는 그의 통치를 '민주주의 전환'의 일부로 보았다. 푸틴이 몇몇 과두재벌들의 불법적 활동을 처단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찬가지로 부시 행정부는 항상 이라크를 자유로 가는 여정에 있다고 표현했다. 공공연한 고문, 무법자 같은 죽음의 부대, 언론 검열이 만연하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데도 말이다. 한편 러시아의 경제 프로그램이 항상 '개혁'으로 묘사되었듯이, 이라크는 여전히 '재건' 중이라고 표현된다. 이라크의 폭력 사태가 급증하자 미국 계약업자들이 모두 내빼서 기반시설이 누더기 상태인데도 말이다. 러시아에서 1990년대 중반 '개혁가들'의 지혜에 감히 의문을 품는 자는 스탈리 시대에 대한 향수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이라크 점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사담 후세인 체제의 삶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는 비난을 수 년 동안 받아왔다."(310-1)


"아시아의 위기는 전형적인 공포의 악순환 때문이었다. 공포를 잡을 유일한 방안은 1994년 테킬라 위기 때 멕시코의 환율을 구했던 조치와 같았다. 간단히 말해 즉각 신속하고 단호하게 제공된 차관뿐이었다. 그러한 시기적절한 조치가 아시아의 앞날엔 없었다. 사실 위기가 닥치자마자 놀랍게도 영향력 있는 재정기관들은 단합된 목소리를 냈다. 요컨대 아시아를 돕지 말라는 것이었다." "1997년, 단기자본의 물결이 아시아에서 이탈한 것은 서구의 압력으로 합법화된 투기성 투자의 직접적 결과였다. 물론 월스트리트 최고의 투자 분석가들은 위기를 기회로 보았다. 아시아 시장을 보호하는 남은 장벽들을 단번에 제거할 기회 말이다. 모건스탠리의 전략가 펠로스키가 특히 그러한 생각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위기가 심해지도록 놔두면 아시아에서 외국 통화는 완전히 고갈될 것이다. 곧 아시아의 회사들은 문을 닫거나, 아니면 서구 회사들에 매각되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모건스탠리에게는 이득이다."(341-4)


"아시아의 붕괴를 거창한 용어로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호세 피녜라의 눈에 비친 위기는 1970년대 그와 동료 시카고 보이스들이 칠레에서 시작한 전쟁의 마지막 장이었다. '자유시장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 국가주의 사이에 제3의 길이 있다는 생각'의 붕괴라는 것이다." "앨런 그린스펀은 위기를 미국식 시장 시스템의 합의로 가는 극적인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현재의 위기 때문에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정부 주도 투자 시스템의 잔재를 제거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아시아의 관리된 경제가 파괴되는 과정은 바로 새로운 미국 스타일의 경제가 창출되는 과정과 같았다. 몇 년 후에 나온 더욱 폭력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아시아를 위한 출산의 고통이었다." "미셸 캉드쉬 IMF 총재의 흔치 않은 인터뷰에 따르면, 위기는 아시아가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롭게 태어날 기회였다. 〈경제적 모델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유용할 때도 있지만 낡아서 폐기해야 할 때도 오지요.〉"(344)


"1998년 이후부터 평화적 수단으로는 쇼크요법 스타일의 개조가 어려워졌다. 무역 정상회담에서 IMF의 괴롭힘이나 강압이 잘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남반구의 새로운 저항 분위기가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9년, 시애틀에서 WTO 회담이 실패했을 때, 많은 언론들은 대학생 연령의 시위자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진짜 반란은 회의센터 내부에서 일어났다. 개도국들은 서로 단결해서 의결권 블록을 형성했다. 유럽과 미국이 계속해서 자국 산업에 보조금을 주고 보호하는 한 더 많은 무역 양보를 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적수가 될 만한 사상이나 반대 세력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었던 자본주의의 독점 시기는 아주 짧았다. 1991년 소련의 붕괴부터 1999년 WTO 협상 결렬까지 겨우 8년 정도다. 그러나 반대 세력의 출현도 엄청난 이윤의 경제적 의제를 전개하려는 의지를 막지 못했다. 자유시장 지지자들은 전보다 더욱 큰 충격이 만들어낸 공포와 혼란의 흐름에 금세 올라탔다."(359)


5부 충격의 시기: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의 부상


"1990년대에 많은 회사들은 전통적으로 상품을 제조하고 안정적인 대규모 노동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키 모델로 알려진 방식을 수용한다. 공장도 없이 계약업자 및 하위 계약업자의 복잡한 망을 통해 물건을 생산한다. 그리고 본사는 디자인과 마케팅에 모든 자원을 쏟아 붓는다. 한편 다른 대안인 마이크로소프트 모델을 선택한 회사들도 있었다. 회사의 '핵심 경쟁분야'를 담당하는 직원들과 주주들이 치밀하게 짜인 통제센터를 유지한다. 대신에 우편물 처리부터 코드작성 등의 작업은 임시직에게 하청을 준다. 이렇게 재조직된 회사들을 '공동기업(hollow corporation)'이라고 부른다. 눈에 보이는 실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방장관 럼즈펠드 역시 대규모 정규군 대신에 핵심 인력을 선호했다. 이는 배후에서 예비군과 국가수비대 같은 싼 임시직 군인들이 지원해주는 시스템이다. 블랙워터와 핼리버튼 같은 계약업자들은 위험한 운전 업무, 죄수 심문, 물자 수송, 의료 서비스를 맡았다."(365)


"1990년대 무렵, (군대, 경찰, 교육 같은 국가의) 핵심 기능은 민영화 대상이 아니라는 금기를 깨뜨리려는 강력한 움직임이 있었다. 여러 면에서 봤을 때, 그것은 현상 유지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러시아의 석유매장지, 남미의 텔레콤, 아시아의 산업은 1990년대 주식시장에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그러한 경제적 역할을 미국 정부가 하고 있었다. 개도국 사이에 민영화와 자유무역에 대한 반발이 급격하게 퍼지는 바람에, 성장의 또 다른 수입원이 차단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쇼크 독트린을 자기중심적인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이제껏 재난과 위기는 급격한 민영화계획을 추진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재난을 창출하거나 그에 대처하는 힘을 가진 군대, CIA, 적십자사, 유엔, 재난 '응급대처' 기관들은 공공부문의 마지막 보루였다. 기업들은 이런 핵심 분야를 먹어치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연마해온 위기 이용방식을 지렛대로 삼아 민영화를 시도하려 했다."(369-70)


"1995년, 백악관에 클린턴 정부가 있을 당시 핼리버튼은 딕 체니를 새로운 사장으로 영입했다." "서비스 경제를 정부의 심장부로까지 확장시키는 것은 체니에겐 익숙한 일이다. 1990년대 후반, 그는 미군기지를 핼리버튼이 건설한 교외 지역처럼 바꾸어놓았다. 아내 린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방위계약업체 록히드마틴의 이사로 일하며 임금과 스톡옵션을 받고 있었다. 린은 1995~2001년 록히드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때는 회사의 중요한 전환기였다. 냉전 종식 후 방위비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회사들의 수입은 대개 정부와의 무기계약에서 나온다. 따라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했다. 마침내 록히드 같은 군수물자업체들은 새로운 업무를 공격적으로 추진할 전략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정부를 관리하고 비용을 받는 것이었다." "딕 체니가 해외에서 핼리버튼을 통해 군대 기반시설을 운영하는 동안 린은 국내에서 정부의 일상적 운영업무를 관리했다."(373-6)


"9·11 테러 사건의 안보 실패는 공공부문 축소의 의지를 흔들기는커녕, 오직 사기업만이 새로운 안보 난제에 맞는 지력과 혁신을 갖추었다는 이념적 (그리고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신념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백악관은 납세자들이 낸 막대한 세금을 경제부양에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분명 루스벨트 대통령의 모델은 아니었다. 부시의 뉴딜정책은 오직 미국 기업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한 해에 수천 억 달러의 공적자금이 사기업들에게 전해졌다. 많은 경우 은밀히 제의된 계약 형태였으며, 경쟁이나 감찰도 없었다. 관련 산업네트워크는 테크놀로지, 언론, 커뮤니케이션, 교도소사업, 엔지니어링, 교육, 의료 분야까지 점점 확대되었다. 돌이켜보면 테러로 대중이 정신을 못 차릴 때를 틈타 경제 쇼크요법이 미국 내에 실시된 것이다. 철저한 프리드먼 성향인 부시팀은 국가에 퍼진 공포를 즉각 이용해, 전투부터 재난 구조까지 모든 것을 영리 추구 사업으로 보는 공동 정부의 꿈을 추진했다."(381-2)


"부시팀은 9·11 테러로 안보 문제가 나타났는데도, 공공 인프라의 허점을 메울 전면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대신에 정부의 새로운 역할을 고안해냈다. 즉 정부가 안보 제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가격으로 안보를 구매하는 것이다." "국토안보부의 설립 문서는 〈오늘날의 테러리스트는 언제든지, 어디서나, 어떤 무기든 사용할 수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안보 서비스는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있을지 모를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한다." "테러와의 전쟁, 이슬람 급진파와의 전쟁, 이슬람파시즘에 대한 전쟁, 제3차 세계대전, 오래된 전쟁, 세대의 전쟁 등 명칭은 다양하게 바뀌어 왔다. 그러나 분쟁의 기본적 형태는 그대로다. 시간, 공간, 표적의 제한을 전혀 받지 않는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테러와의 전쟁은 확산되지만 실체가 없는 특성 때문에 이길 수 없는 계획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테러와의 전쟁은 천하무적의 전쟁이다. 글로벌 경제구조에 영원히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383-5)


6부 돌고 도는 악순환, 이라크: 과잉 쇼크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는 지식인들이 주로 제시하는 고상한 이유는 모델이론이다. 네오콘들은 테러리즘이 아랍과 무슬림 세계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이념에 눈이 먼 그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책이 곧 중동이 테러 양산 지역이 된 원인임을 깨닫지 못한다. 심지어 테러를 도발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다른 것을 원인으로 제시한다. 바로 중동의 자유시장 민주주의 부재가 이유라는 것이다." "이들 이론의 내부논리를 보면 테러리즘과의 전쟁, 개척지 자본주의의 확산, 선거 실시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하나의 프로젝트로 묶여 있다. 즉 중동에서 테러리스트를 없애고,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한 뒤, 사후 선거로 모든 것을 변경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라크 침공은 성공적이었지만, 점령 과정은 실패였다는 분석 결과가 종종 나온다. 그러나 이는 침공과 점령이 하나의 전략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 모델 국가를 그릴 캔버스를 깨끗히 하기 위해 먼저 폭격을 가한 것이었다."(418-23)


"전쟁이 시작되자 바그다드의 주민들은 감각 박탈을 당했다. 도시의 감각 투입이 하나씩 절단되었다. 제일 먼저 청각이 사라졌다." "많은 이라크인들은 전화 시스템 파괴가 공중 공습에서 심리적으로 가장 두려운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청각과 촉각의 폭탄이 온 사방에 투하되었다. 사랑하는 이들이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고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전화를 거는 일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겁에 질린 해외의 친척들을 안심시킬 수 없는 것도 엄청난 고문이었다." "그 다음 공격 대상은 시각이었다. 〈폭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초저녁 폭격 당시만 해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500만 시민들이 사는 도시 전체가 공포감을 주는 끝없는 밤으로 변했다.〉 「가디언」은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만이 유일하게 어둠을 밝혀주었다고 보도했다. 집 안에 갇힌 바그다드 주민들은 서로 얘기도 못하고, 듣지도, 밖을 보지도 못했다. CIA의 블랙사이트에 감금된 죄수처럼 도시 전체가 수갑을 차고 두건으로 가려진 셈이다."(427-8)


"사실 부시 내각은 (자신들의 공언과는 달리) 마셜플랜과 정반대인 반(反)마셜플랜을 선포했다. 처음부터 이라크의 쇠약한 산업 분야에 손해를 입히고 실업률을 치솟게 만들 계획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계획에 따르면, 허약해진 국가들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외국 회사의 투자를 금지했다. 그러나 이라크 계획에 따르면 미국 기업을 유치할 수 있는 방안은 뭐든지 가능했다." "빈약한 공적 분야와 활기찬 기업 분야는 부시 내각이 이라크의 재건을 완전히 아웃소싱된 공동 국가의 미래상을 실행하는 데 이용했다는 증거다. 이라크에서 계약업자에게 넘겨주지 못할 핵심적인 정부 기능은 하나도 없었다. 공화당에 재정적 공헌을 하거나 선거운동 기간에 기독교 보병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주로 계약업자가 된다. 이라크에서 외국 세력의 개입은 그것이 무엇이든 부시의 좌우명에 따라 진행되었다. 즉 사기업이 할 수 있는 임무라면 반드시 사기업에 맡기라는 것이다."(442-3)


"그린존에 경험 많은 공무원들이 부족한 것은 부주의한 탓이 아니었다. 이라크 점령은 처음부터 공동 정부를 만들려는 급진적 실험이었다. 싱크탱크 직원들이 바그다드에 도착했을 때쯤, 중요한 재건작업은 핼리버튼과 KPMG에 아웃소싱된 상태였다. 때문에 공무원으로 온 그들의 임무는 단지 현금 관리뿐으로, 수축포장된 100달러 지폐 다발을 이라크에서 계약업자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이라크인들을 재건계획에서 체계적으로 배제하면서 그들의 이중 기준은 극에 달했다. 제재와 침입으로 고통받은 이라크인들은 당연히 자국의 재건으로 혜택을 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최종 생산물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창출된 일자리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외국 계약업자들은 수만 명의 외국 노동자들을 데리고 이라크 국경선을 넘어왔다. 여전히 외국의 침입을 받는 것 같았다. 재건이 아니라 가면을 쓴 파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국가 산업을 완전히 말소시키는 행위로,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452-3)


"재건의 처참한 실패는 가장 치명적인 반격이었던 종파갈등과 종교적 근본주의와도 직접적 관련이 있다. 점령 당국이 치안 같은 기본적인 서비스도 제공하지 못하자, 사원과 민병대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젊은 시아파 성직자 무크타다 알사드르는 브레머가 추진한 민영화된 재건의 실패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바스라까지 시아파 빈민가에서 재건작업을 통해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 사원의 기부를 통해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나중엔 이란의 도움을 받아 재건센터를 차렸다. 전기나 전화선을 고치는 전기공을 파견하고, 혈액을 운반하고, 교통을 정리했다. 〈저는 공백을 발견했습니다. 누구도 메우지 않더군요.〉 알사드르가 점령 초기에 말했다. 또한 그는 브레머 치하의 이라크에서 직업도 희망도 찾지 못한 젊은이들을 데려와 검은색 옷을 입히고 러시아제 기관총으로 무장시켰다. 그 결과 마흐디(Mahdi)군이 창설되었다. 이러한 민병대들은 조합주의의 유산이다."(457-8)


"이라크의 산업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런데도 유일하게 호황을 누리는 산업이 있었다. 바로 납치산업이었다. 2006년 초반 석 달 반 동안, 거의 2만 명이 이라크에서 납치당했다. 국제 언론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서양인들이 납치당했을 경우뿐이다. 그러나 납치된 사람들 대부분은 이라크의 전문직 기술자들로, 일터를 오가다 납치되었다. 가족들은 몸값으로 수만 달러를 내든지 아니면 시체 공시소에서 시체를 확인해야 했다. 고문 또한 떠오르는 산업이 되었다. 인권단체는 이라크 경찰들이 죄수의 가족들에게 고문을 중지하는 대가로 수천 달러를 요구한 사건들을 문서화했다. 한마디로 이라크 버전의 재난 자본주의라 하겠다." "지금 이라크를 휩쓴 예기치 못한 폭력사태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쟁 입안자들이 만들 결과다. 순수하고 심지어 이상적이기까지 한 문구인 '새로운 중동을 위한 모델'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라크의 분열은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 백지상태을 요구했던 이념이 원인이었다."(476)


7부 이동 가능한 그린존: 완충지대와 높다란 장벽


"쓰나미 이전에 몰디브 정부는 리조트 섬들의 숫자를 늘려 더 큰 성공을 거두려고 했다. 그런데 늘 그렇듯 사람들이 걸림돌이었다. 생계형 어부들인 몰디브 사람들은 산호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전통마을에 산다. 그들의 생활방식도 문제를 일으킨다. 정부가 보기엔 손질된 고기들이 해변에 널려 있는 소박한 매력은 몰디브 풍경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쓰나미 이전에 가윰 정부는 주민들을 설득해 관광객들이 방문하지 않는 크고 인구가 많은 섬들로 이주시키려 했다. 지구온나화가 야기한 해수면 상승 때문에, 이러한 섬들은 보호조치가 필요한데도 말이다. 탄압정권이라 해도 수만 명을 대대로 살던 섬에서 쫓아내기는 힘들었다. 결국 '주민합병' 프로그램은 성공하지 못했다. 쓰나미가 닥친 후, 가윰 정부는 많은 섬들이 위험해서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즉각 발표했다. 이제 쓰나미 복구에 원조를 받고 싶은 사람은 국가에서 지정한 '안전한 섬' 다섯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508)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뉴올리언스에서 영리 추구의 기회는 모조리 이용되었다." "정부는 이라크에서처럼 인출과 예치 기능을 하는 현금인출기 역할을 했다. 기업들은 대규모 계약을 통해 자금을 인출해나갔다. 그 대가로 신뢰할 만한 업무 실적을 낸 게 아니라, 선거 후원금이나 다음 선거를 위한 충성스런 인력을 제공했다." "계약을 맺은 사기업에 들어간 수백억 달러와 세금 부족을 충당하기 위해, 2005년 11월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연방 예산에서 400억 달러를 삭감한다고 발표했다. 삭감한 프로그램들 가운데는 학생 대출, 의료 서비스 보조, 빈민 무료식사권 등이 있다. 다시 말해 가장 가난한 시민들은 계약업자들에게 노다지를 두 번이나 제공했다. 첫 번째는 카트리나 피해 구호 자금을 기업들에게 무한정 나누어주었을 때다. 두 번째로는 실업자들과 가난한 근로자들을 직접 지원하는 몇몇 프로그램들이 과잉 청구된 기업들이 계산서를 갚느라 사라졌다."(521-4)


"얼마 전만 해도 재난은 사회적 단합이 일어나는 시기로 여겨졌다. 즉 하나로 뭉친 지역사회가 구역을 따지지 않고 합심하는 보기 드문 순간이었다. 그러나 재난은 점차 정반대로 변하면서 계층이 나뉘어 있는 끔찍한 미래를 보여주었다. 경쟁과 돈으로 생존을 사는 세상 말이다. 그린존은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가 자리 잡은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날 수 있다. 바그다드의 그린존은 그러한 세계의 질서를 가장 잘 보여주었다. 그린존에는 독자적인 전기발전기, 전화, 상수도 시설, 자체적으로 석유를 공급하고 멋진 수술실을 갖춘 최신식 병원이 있다. 5미터의 두툼한 벽이 이런 시설들을 보호한다. 기이하게도 중무장한 카니발 크루즈가 폭력과 절망의 바다인 레드존의 한가운데 정박한 것 같다. 만약 당신이 배에 탑승한다면, 풀 가장자리에는 음료수가 놓여 있고 천박한 할리우드 영화와 운동시설도 즐길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선택받은 사람들에 끼지 못한다면, 그린존 벽 근처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총에 맞을 것이다."(524-5)


"1993년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오슬로 협정)이 실패한 요인들은 지겨울 정도로 연구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일방주의로 후퇴한 두 가지 요인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두 요인 모두 시카고학파의 자유시장운동이 이스라엘에 미친 영향과 관련이 있다. 하나는 러시아의 쇼크요법 실험 때문에 (100만 명에 달하는) 유대계 러시아인들이 이스라엘로 유입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수출 경제가 전통적인 상품과 최첨단 기술에 근거한 경제에서 반테러에 관련된 전문지식과 장비 판매에 치중한 경제로 바뀐 것이다. 두 요인 모두 오슬로 협정의 붕괴에 크게 작용했다. 러시아인들이 들어오면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노동력에 의지할 필요가 줄어들어 점령지를 봉쇄하게 되었다. 아울러 최첨단 안보경제의 급격한 확장으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분야에서 새로운 경향이 출현했다. 바로 평화를 포기하는 대신에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 즉 테러와의 전쟁을 택하려는 경향이었다."(546)


"1993년의 급작스러운 국경 봉쇄는 팔레스타인의 경제생활을 재앙으로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일하러 갈 수 없었으며, 장사꾼들은 물건을 팔지 못했고, 농부들은 밭에 가지 못했다. 1993년, 점령지역의 일인당 GDP는 30퍼센트 가까이 추락했다. 이듬해 팔레스타인의 빈곤은 33퍼센트 늘어났다. 로이는 1996년 국경 폐쇄의 경제적 영향력을 포괄적으로 기록했다.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66퍼센트가 실업상태이거나 불완전 취업상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오슬로 협정은' 시장의 평화'가 아니라 시장의 소멸, 일자리 상실, 자유 상실을 의미한다. 중요한 건, 이스라엘의 정착지가 확대되면서 토지가 부족해졌다는 사실이다. 점령지역이 화염에 휩싸인 연료통이 된 것도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2000년 9월 아리엘 샤론이 한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했을 때 두 번째 아랍 폭동이 일어났다. 무슬림들이 알 하림 알 샤리프라고 부르는 곳이었다(유대인들에겐 성전산으로 알려져 있다)."(550)


결론 쇼크 효과는 점차 누그러지다: 시민들의 재건 노력


"워싱턴은 항상 민주적 사회주의가 전제적 공산주의보다 더 큰 위협이라고 보았다. 전제적 공산주의는 쉽게 적으로 만들거나 비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60~1970년대 개발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가 인기를 얻자 워싱턴은 이를 못마땅해하며 스탈린주의와 동일시하는 수법을 썼다. 전혀 세계관이 다른 사상인데도, 일부러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CIA는 아옌데를 소비에트 스타일의 독재자로 선전하는 캠페인을 후원했다. 그러나 워싱턴이 아옌데의 선거 승리를 걱정한 진짜 이유는 1970년대 헨리 키신저가 닉슨에게 보낸 메모에 나타나 있다. 〈칠레에서 성공적으로 선출된 마르크스주의 정부는 선례가 되어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비슷한 현상이 곳곳에 모방되어 퍼진다면, 세계의 균형과 미국의 위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적 제3의 길이 확산되기 전에 아옌데를 제거해야 했다."(573)


"프리드먼의 사망 한 달 뒤인 2006년 12월, 남미의 지도자들은 볼리비아의 코차밤바에 모여 역사적 회담을 가졌다. 코차밤바는 여러 해 전에 수도 민영화에 반대하는 대중 폭동이 일어나 벡텔이 떠났던 곳이다.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는 남미의 드러난 혈관을 막겠다는 맹세와 함께 회담을 진행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책 『라틴아메리카의 드러난 혈관』을 언급한 것이다." "남미인들은 오래전에 잔인하게 중단된 그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와 비슷한 정책들이 나타났다. 핵심 경제 분야의 국유화와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교육, 문맹퇴치, 의료혜택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혁명적인 사상이 아니다. 그러나 아주 떳떳하게 평등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부에서, 이러한 사상은 분명 프리드먼이 1975년 피노체트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내 생각에, 가장 큰 실수는 다른 사람들의 돈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5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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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가 - 인간의 권리를 탐하는 거대 기업의 음모
톰 하트만 지음, 이시은 옮김 / 어마마마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서문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한 싸움


"미국의 헌법은 여러 가지 면에서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영국 관습법에 기반을 둔다. 관습법에는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이 있다. 여러분이나 나와 같은 '자연인natural person'과 정부, 교회, 기업을 포함한 '법인artificial person'이 그것이다. '법인'이란 범주가 따로 있었던 것은 정부, 교회(및 기타 비영리단체)와 영리기업에 법과 과세 제도의 효력을 미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범주가 따로 없다면 이들 기관이 계약에 참여하거나 법적인 책임을 지거나 무엇보다 세금을 납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대부분의 법에서는 '자연인'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정부, 교회, 기업에만 해당하는 법에서는 각각의 명칭이나 '법인'으로 통칭하여 해당 범주를 특정하곤 했다. 그러나 수정헌법 제14조에서는 '인간'이란 용어를 사용할 뿐 '자연인'인지 '법인'인지를 명시해놓지 않았다. 기업 변호사들이 이 점을 꼬투리 잡아 단순한 사업 조직 방식에 불과하던 기업을 오늘날과 같은 초국가적 초인으로 탈바꿈시켰다."(17-8)


# 수정헌법 제14조 제1항 

미국에서 출생 또는 귀화한 인간, 미국의 행정관할권 내에 있는 모든 인간은 미국 및 그 거주하는 주의 시민이다. 어떠한 주도 미국 시민의 특권과 면책권을 박탈하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시행할 수 없다. 어떠한 주도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인간으로부터도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할 수 없으며, 그 관할권 내에 있는 어떠한 인간에 대하여도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


# 1886년 5월, 〈산타클라라 카운티 대 서던퍼시픽철도 사건〉을 다루는 연방대법원 심리에서 철도회사의 변호인들이 제기한 주장


# '법인'이라는 용어 사용은 16세기 영국에서 동인도회사의 변호인들이 그 회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어떠한 인간도······ 해서는 안 된다〉라고 시작하는 영국의 형법에 따라 유죄를 선고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여기에 대응하여 입법부는 기업을 '법인'으로 규정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법인'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입법부가 기업을 규제하려 하면서도, 한편으론 기업이 인간과 공유하는 바가 있음을 인정하려 했기 때문이다. 기업도 세금을 내고, 법에 따르며, 소송 당사자가 될 수 있는 식으로 말이다. 147)


"사실, 건국의 아버지들은 (헌법 그 자체가 권리장전이라는 해밀턴의 의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오로지 인간만이 선천적으로 권리를 가진다는 데 전혀 이견이 없었다. 정부부터 교회와 회사에 이르는, 인간이 만든 모든 기관은 권리 대신 특권(특별한 권리가 아니라 지정된 특정 이익을 누릴 수 있는 법적 권리)을 갖고, 이것은 권리가 있는 인간을 대표하는 정부가 기업에 명시적으로 부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점차, 특히 19세기 초반의 〈다트머스 대학 이사회 대 우드워드 사건〉 판결 이래로 기업에 인권과 유사한 특권을 부여해왔다. 그리고 1886년을 기점으로 기업에도 권리장전을 명시적으로 적용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미국 정부의 어떤 산하기관도 지금껏 기업의 법인격의 '권리'를 공식적으로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국민도 기업의 그 권리에 대해 투표한 적이 없고, 어떤 입법부에서도 그 권리를 법으로 제정한 적이 없으며, 어떤 연방대법원 판결도 지금껏 그 권리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적이 없다."(22-3)


part 1: 기업의 점령


"1886년 5월 10일, 웨이트 연방대법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본 법정에서는 수정헌법 제14조의, 어떠한 주도 관할권 내에 있는 어떠한 인간에 대하여도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이런 법인에도 적용되는지 여부에 관한 변론은 청취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그 조항이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이 사건 조서에 법원 서기는 이렇게 적었다. 〈주는 관할권 내의 어떠한 인간에 대하여도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는 미국 수정헌법 제14조 1항의 취지에 따라, 이번 소송의 피고인 기업도 인간이다.〉 이 진술은 법정의 공식 판결이 아니라 단지 법원 서기가 연방대법원장의 말이라며 기록해놓은 내용에 불과했다. 결국 기업이 자연인과 동등하고 법인이 아니라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은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웨이트의 판결 이후부터 1910년까지 수정헌법 제14조와 연관된 연방대법원 사건 307건 중에서 288건이 자연인의 권리를 노리는 법인들이 제기한 소송이었다."(39-40)


"일단 물꼬가 트이자 기업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 얻은 권리에 수반되는 새로운 권한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① 수정헌법 제1조. 기업들은 언론의 자유에 대하여 수정헌법 제1조에서 보장하는 모든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며 정부에 대해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정치인 및 정치인 후보에 대한 기업의 매수와 로비를 금지한 법들을 폐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② 수정헌법 제4조. 이전 법에서는 기업이 설립 인가를 받는 조건으로 미국 정부에 모든 기록과 시설을 공개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기업들은 수정헌법 제4조의 사생활 보호권을 주장하는 소송을 벌여 그런 법들을 폐지하는 데 성공했다. ③ 수정헌법 제14조. 미국의 유명 백화점 체인 J.C. 페니는 플로리다 주에 맞서 수정헌법 제14조상의 평등한 보호를 요청한 소송에서 승리하여, 지역의 소규모 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현지 상점보다 외부 체인에 더 높은 사업 허가 수수료를 부과한 주 법률을 폐지시켰다."(67-8)


"남북전쟁 이후에 통과된 수정헌법 제14조는 모든 '인간'에게 정당한 법 절차를 보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조항의 초안이 작성되던 1866년에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수전 앤서니와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이 이 조항에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처음으로 헌법이나 수정헌법에 '남성male'이란 단어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수정헌법 제14조 초안은 2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 정당한 법 절차를 보장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원의원 할당 기준에 관한 것이었다. 바로 이 두 번째 조항에 〈그러한 남성 주민의 수가 그 주의 남성 주민의 총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이란 문구가 들어 있었다." "기업은 인간으로서 완전한 법적 실체와 헌법상의 권리를 보유하지만, 여성은 오로지 남편을 통해서만 이런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4조가 명시적으로 '인간'이라고 천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71-3)


"연방대법원에 수정헌법 제14조에 따라 인간으로 인정해달라고 청원한 두 번째 집단은 이 조항이 본래 보호하려던 주요 대상인 해방 노예와 그들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1896년 〈플래시 대 퍼거슨 사건〉 판결에서 흑인 피가 '8분의 1' 이상 섞인 모든 사람은 '인간'인 백인과 대등하게 교류할 법적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관 헨리 브라운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대중교통수단에서 흑백 분리를 인정하거나 요구하는 이 법(짐 크로우법)이,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유색인종 아이들에게 별도 학교를 요구하는 법이나 기타 그에 상응하면서도 합헌성 시비가 없는 주 법률에 비해 특별히 수정헌법 제14조에 더 위배된다고 볼 수는 없다.〉 대법원 공보관 뱅크로프트 데이비스는 판결요지문에서, 이 사건이 〈승객 플래시가 철도회사의 담당 직원이 정해준, 그가 속한 인종이 타야 할 열차 칸에 타지 않고 다른 인종이 타는 열차 칸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발생했다고 요약했다."(73-4)


part 2: 민주주의의 탄생부터 기업 법인격의 탄생까지


"사업은 수익을 내기도 하고 본전치기를 하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한다. 만일 개인회사나 (한 명 혹은 몇 명이 소유한) 조합에서 자산 가치보다 더 많은 손실이 발생한다면, 그 소유주나 투자자는 개인적으로 채무를 책임져야 하고, 채무액은 본래 투자액을 크게 초과할 수 있다." "하지만 투자액이 곧 '책임 한도'인 유한회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러분이 10,000달러를 투자한 유한회사가 50,000달러의 부채를 지고 파산하면, 초기 투자액인 10,000달러는 손해 보더라도 나머지 40,000달러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용은 누가 부담할까? 기업에게 돈을 빌려준 채권자나 환경이 파괴된 지역사회이다. 기업은 이들에게서 재화나 용역을 취하고, 비용도 지불하지 않은 채 청구서만 남기고 떠난다." "만약 기업이 파산을 선언하고 해산해버리면, 채권자는 책임을 물을 대상이 없어진다. 이것이 기업의 핵심적인 특징이다."(89)


"식민지 아메리카에는 월간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대한 차 시장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이 시장을 대부분 네덜란드 무역회사나 아메리카인 밀수업자들─동인도회사에 소속되지 않고 개인적으로 영업하던 사략선 선원들─이 헐값으로 차를 공급하며 지배하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보스턴 차 사건의 발단이 된 차 조례를 단순히 식민지 아메리카인의 차 세금을 인상한 법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차 조례는 본래 영국이 동인도회사에 아메리카 차 시장에 대한 무제한적 지배권을 부여하고, 아메리카에 수출한 차에 대해 영국 세금을 면제해줄 요량으로 도입되었다. 심지어 이 회사에서 판매하지 못해 재고로 남은 수백만 파운드의 차에 대해서는 세금을 환급해줄 정도였다. 차 조례의 목적은 동인도회사가 주주들에게 나눠줄 수익을 증대시키고, 식민지의 조무래기 경쟁자들을 일제히 문 닫게 만드는 것이었기에, 가뜩이나 동인도회사가 못마땅하여 독립을 원하던 식민지인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95)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인은 당시 식민지 주민들이 자신들에게 과세하는 법을 통과시킬 입법부를 직접 선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분개했다고 생각한다. 〈대표 없는 과세〉가 그들이 내세운 구호였던 것이다. 휴이스에 의하면 이런 이유도 있었지만, 식민지 주민들을 정말로 화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은 영국이 오로지 초국적 동인도회사의 이익을 위해 평범한 미국 노동자와 소상인을 희생시키는 세법을 통과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표 없는 과세〉란 일반 주민과 소상인에게는 과세를 늘려 타격을 가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막강한 기업에는 세금을 면제해주었다는 의미였다. 한마디로 정부가 오직 한 기업을 후원하기 위해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쳐준 셈이었다. 또한 식민지 주민들이 동인도회사와 영국 정부의 약탈에 거세게 저항할수록, (반동적이고 억압적으로 변해가던) 영국은 세금과 밀수금지법을 이용해 미국 소상인의 경쟁력을 사실상 원천 봉쇄했고, 1773년 차 조례는 그 결정타였다."(106-7)


"150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기업은 그 소유주와 설립 인가를 내준 주 의회의 인위적 창조물로 간주되었다. 기업은 주에서 인가를 받아야만 탄생하고 법에서 '법인'이라 지칭되는 인위적인 법적 실체였으므로 해당 주의 주민들, 즉 대의정부를 통해 의사를 표명하는 사람들에게 통제받는 것이 당연했다. 미국의 공화민주주의에서 정부의 역할은 국민의 생명, 자유, 행복 추구를 위협하는 국내외의 모든 포식자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섬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기업 활동의 통제도 그런 역할에 포함되었다. 1886년까지 기업은 상당 부분 오늘날과 유사하게 운영되었으나, 지방·주·연방 입법부는 미국 거대 기업들이 성가시게 여기던 규제를 선호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1815년에 매사추세츠 주 대법관 조지프 스토리는 〈테렛 대 테일러 사건〉 판결에서 이렇게 말했다. 〈법에 의해 탄생한 민간 기업은 주에서 부여한 독점사업권을 행사하지 않거나 남용할 경우 그 권리를 상실할 수 있다.〉"(126-7)


"남북전쟁기에 (전쟁 물자 운송을 담당했던) 철도회사들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기업들로 부상했다. 링컨은 이들의 〈거대한 사업〉과 이들이 주와 연방의 규제에 반발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전국적 갈등에 대해 언급했다." "철도회사의 입김이 점점 거세지면서, 법원과 의회는 이들의 사업에 거슬릴 만한 걸림돌을 하나둘씩 제거해나갔다. 의회는 1864년에 계약노동법을 통과시켜, 기업이 외국 노동자에게 미국으로의 이민과 뱃삯을 제공하는 대가로 1년간 저임금 또는 무상으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입법의 주된 취지와 효과는 노동력 풀을 확대하여 구직 경쟁을 가열시킴으로써 노동자 파업을 막고 인건비를 줄이는 것이었다. 법원은 기업 간의 계약이 파기된 경우에는 파기당한 기업이라도 이미 제공받은 재화나 서비스에 대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판결했으나, 인간과 기업 간의 계약노동법상 계약이 파기된 경우에는 기업이 노동자에게 그간의 노동에 대해 한 푼도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판결했다."(143-4)


"1889년 12월 4일 오하이오 주의 상원의원 존 셔먼은 상원 법안 제1호로 '거래와 생산을 제한하는 트러스트 및 기업결합 불법화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의 통과를 추진하면서, 셔먼은 국민이 〈이런 기업결합의 세력과 지배력을 인식하고 있고, 모든 입법부와 의회에 이런 폐단에 대한 시정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트러스트들은 정치인과 선거운동에 자금을 '기부'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공격에 대응했다. 이에 맞서 공화당 출신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6년 12월 3일 연두교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모든 기업이 어떤 정당에도 선거자금을 기부하지 못하게 금지하는 법을 권장합니다······. 개인은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기부하게 합시다. 그러나 기업은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도 직간접적으로 기부하지 못하도록 효과적으로 차단합시다.〉" "그 결과가 1907년의 틸만법으로, (매우 제한적으로) 기업 자금이 선거운동에 투입되지 못하도록 막은 최초의 법이었다."(162-3)


"루스벨트는 셔먼법을 공격적으로 시행하여 대통령 임기 동안 40개 이상의 거대 기업을 해체함으로써, '트러스트버스터trustbuster'라는 찬사를 받아가며 이 법을 추진했다. 1909년부터 1913년까지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존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 트러스트를 33개 기업으로 분할하고 아메리카 토바코도 강제로 분리함으로써 전임 대통령의 치적을 이어갔다." "그러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취임하던 해에 기업들은 노동조합을 불법화하는 데 바로 이 셔먼법을 끌어들임으로써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기업이 자사의 이익을 위해 공모하거나 독점을 형성하는 것이 불법이라면, 인간이 조합의 형태로 같은 행위를 하는 것 역시 불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이 과도한 기업 세력으로부터 일반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법의 정신을 거역하고 오히려 노동조합을 분쇄하는 데 셔먼법을 적용하자, 미국 의회는 1914년에 클레이튼 반독점법을 통과시켰으며, 연방거래위원회(FTC)의 설립을 명했다."(164)


"2000년 12월 12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기업 세력에 또 하나의 선물을 안겨주면서 미국 민주주의의 관에는 또 하나의 못을 때려 박았다." "(부시 진영은 재검표를 막기 위해) 플로리다주가 각 카운티마다 서로 다른 투표 체계와 기준으로 유권자의 의사를 파악하고 있으므로 무엇보다 법 앞의 평등한 보호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제14조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마침 연방대법원의 공화당 5인방이 기다리던 바였다. 이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면 연방의 모든 주가 헌법을 위반하는 셈이 되어 당장 전국적인 선거 기준을 도입해야 하는 논리상의 부담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공화당 5인방은 이 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다만 이것은 2000년 플로리다 주 대선의 '오직' 이 사건에만 적용될 뿐 판례를 구성하지는 '못한다'고 판결했다. 한술 더 떠서 공화당 5인방은 그들이 플로리다 주의 재검표를 중지시키지 못한다면, 조지 W. 부시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힐 것이므로 그렇게 판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205-6)


"2008년 예비선거 기간에 한 우익 단체는 힐러리 클린턴을 비방하는 90분 분량의 영상물을 제작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주에서 TV 방송으로 내보내려 했다. 연방선거관리위원회는 이러한 소위 '다큐멘터리'의 광고가 사실상 '선거 광고'에 해당되므로 메케인-페인골드법의 선거비용 제한 규정에 저촉된다며 광고 방송을 제재했다. 그러자 이 우익 단체 시민연합은 우파의 해결사이자 레이건 행정부의 법무차관 출신인 시어도어 올슨─〈부시 대 고어 사건〉에서 부시 측을 변론했다─을 수석 변호사로 내세워 연방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렇게 시작된 〈시민연합 대 연방선거관리위원회 사건〉은 대법원장 로버츠를 포함한 공화당 성향 대법관 5인이 다수를 점령한 연방대법원에 미국 정치사를 완전히 새로 쓸 절호의 기회─기업들의 무제한적인 선거 개입을 가로막는 모든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를 제공하였고, 결국 미국을 1907년 이전의 강도귀족 시대로 복귀시켰다."(222-3)


# 매케인-페인골드 법 : 2002년에 공화당 상원의원 존 매케인과 민주당 상원의원 러스 페인골드가 이전까지 액수, 경로, 사용처 등을 일체 규제받지 않던 정당 기부금(소프트머니)을 제한하여 선거자금과 이익집단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공동 발의하고 그 해에 바로 통과시킨 법으로, 공식 명칭은 초당적 선거개혁법Bipartisan Campaign Reform Act(BCRA)이다. 222)


"2010년 1월 21일에 공화당 성향의 대법관 5인방이 또다시 승리를 거둔 5대4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정치인, 선거 진영, 당에 직접 기부되는 자금이 아닌 한, 의회나 대통령이 기업의 정치자금 지원 '권리'를 규제하는 어떤 법도 통과시키거나 서명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관 케네디는 〈정부 권력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수정헌법 제1조는 특정한 대상이나 관점에 불이익을 주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분명히 못 박는다. 〈법원은 이렇게 기업이나 다른 단체의 정치적 발언이 단지 그들이 '자연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정헌법 제1조 하에서 다르게 취급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부인해왔다.〉 케네디는 기업과 그들의 동업자 단체가 1907년에 틸만법이 통과된 이래 100년 넘게 미국 의회로부터 얼마나 부당한 대접을 받아왔는지를 개탄하면서, 로버츠의 이 법정이 이 판결로 보호하려고 애쓰던 〈불이익을 받는〉 기업 '인간'들을 옹호했다."(229-30)


part 3: 불평등한 결과


"수정헌법 제4조는 본래 정부요원의 가택 난입과 부당한 압수수색을 막기 위해 제정되었으나, 기업들은 이 조항을 주로 정부기관의 규제를 피하는 데 이용해왔다. 연방대법원은 1967년과 1978년 사건에서, 기업도 인간으로서 부당한 수색에서 자유롭고 사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으므로 불시 점검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연방대법원은 1886년 〈산타클라라 사건〉의 판례를 기초로 1906년에 기업에게 수정헌법 제4조의 사생활 보호의 권리를 부여했다. 셔먼법이 통과된 지 불과 16년 만이었다." "수정헌법 제5조는 무엇보다 인간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거나 동일한 범행으로 재차 기소당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권력의 균형이 명백히 정부 쪽으로 기울어 있어 정부가 국민을 쉽게 처형할 수 있고, 또 실제 그러던 시기의 법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기업은 이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고도 여전히 정부의 범죄 수사를 회피하기 위해 법의 보호를 요청하고 있다."(251-2)


"규제에는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하는 이면이 있다. 예컨대 〈수은을 10ppm 이상 배출해서는 안 된다〉라는 규제가 생기면, 그때부터 10ppm 미만의 배출은 합법화된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단 1ppm만 배출하더라도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을 인근 주민, 다른 주, 심지어 연방 정부로부터의 소송을 각오했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이처럼 규제법은 본질적으로 기업 행위를 합법화하는 측면이 있다. 좋은 세상에서야 그래도 별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지금처럼 기업의 대리인들이 직접 법을 만드는 상황이라면 광범위한 역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 "공익을 해치는 행동도 규제를 통해 합법화된다. 레이건 정부 시절, 로버트 몽크스와 넬 미나우는 '규제 완화를 위한 대통령특별위원회'에서 일했다. 몽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기업의 대리인들이 끊임없이 규제 완화보다 규제 강화를 추구하고, 그들의 법적 책임이나 경쟁이 줄어들 때는 특히 더 그렇다는 것을 발견했다.〉"(253-4)


"1800년대 후반의 '설립 인가 장사' 시대에는 여전히 많은 주에서 주주, 고위급 관리, 이사, 경영진에게 그들이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기업의 행위와 파급효과에 대해 책임을 물었다. 당시 기업이 주에서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준수해야 하는 법은 주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이런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 변호사협회가 모범회사법(MBCA)이라는 표준 기업규제법을 제안했다." "이 법은 기업 주주들에게 그들이 소유한 기업의 행위나 채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다. 주주들은 법적 위험 없이, 오직 재무적 위험만 지고 투자할 수 있다. 투자액으로 기업이 무슨 범죄를 저지르건, 악의적인 의사 결정으로 어떤 죽음을 초래하건 간에, 주주는 투자액 자체는 손해 볼 수 있어도 법적으로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기업에 운영자금을 대는 사람들이 기업이 성공하면 그 수익을 나눠가지면서도 기업이 불법행위를 저지르거나 남에게 해를 끼칠 때는 아무 책임도 공유하지 않는 이 논리성에 의문을 제기한다."(261-2)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기 어린 킬러나 분노가 극에 달한 배우자의 손에 죽기보다는 기업 활동의 결과로 사망한다." "기업들은 인간의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로 거의 틀림없이 이득을 얻는다. 예를 들어 각종 발암물질이 포함된 플라스틱이나 농약을 판매하여 수익을 거두는 것이다. 반면에 이런 죽음의 비용은 해당 제품의 단위원가로 반영되지 않으므로, 기업으로선 독성이 적거나 무해한 대체제를 개발하거나 더 비싸고 안전한 다른 원료를 사용할 경제적 유인이 없다. 이것이 바로 〈이익은 내재화하고 비용은 외부화하는〉 과정이다. 기업은 유독성 물질을 생산해 이익을 챙길 뿐, 아프거나 죽어가는 노동자의 생산성 감소나 의료비 명목으로 암의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그런 가장 쉬운 방법 중 유독성 물질을 사용하거나 유발하는 공장 또는 공정을 환경보호법과 노동법이 미비한 나라로 이전하여 인건비를 절감하는 동시에 외부성 처리 비용을 거의 제로에 가깝게 낮추는 것이었다."(287-8)


# 그 외의 기업편향 조치들

1. 죄수를 고용하여 무보수에 가까운 노동시장을 창출한다.

2. 물이나 전기 같은 공공자원을 민영화하여 이윤을 창출한다.

3. 특허를 활용해 경쟁을 피하고 자산을 안전하게 가두어둔다.

4. (조세회피 등을 목적으로) 하루아침에 국적을 바꿀 수 있다.

5. 세금우대와 보조금을 받으면서 세부담은 사회에 전가한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현대의 민주국가에서 폭정이 실시된다면 그것은 다른 성격을 지니게 될 것 같다. 즉 보다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유연한 형태를 취할 것이다. 인간을 가혹하게 다루지는 않으면서 품위를 떨어뜨릴 것이다〉라고 썼다." "토크빌은 이어서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모두가 평등하고 동일한 군중의 생활 속에서 싫증이 나도록 겪게 되는 사소한 쾌락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각자는 서로 분리되어 생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들에게는 자녀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사람들이 전체 인류에 해당한다. 그 외의 다른 동료 시민에 대해서는 가까이서 생활은 하더라도 알지는 못하며, 접촉은 하더라도 피부로 느끼지는 못한다. 요컨대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해 있으며 혼자의 힘으로 생활하려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친척은 존재할 수 있어도 국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343-4)


"방송 전파는 미국 헌법과 건국의 아버지들이 생동하는 민주주의와 계몽된 시민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 언론의 자유의 일부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 내내 미디어기업들이 국가의 방송 전파가 더 이상 국민의 공유자산이어서는 안 된다는 성공적인 로비를 벌였다. 이들은 방송 전파와 채널을 지역과 주파수에 따라 분할하여 경매를 통해 매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국민들은 정말 그들의 요구대로 공동자산인 방송 주파수를 경매에 붙여, 이미 인간에 비해 가뜩이나 불평등한 혜택을 누리고 있던 기업의 손에 넘겨버렸다." "방송 주파수 경매에는 낙찰자가 거대 기업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이차적 문제가 있었다. 이 기업들은 국민이 방송 전파를 팔아치울 때 전파 사용에 참견할 권리까지 팔아치운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상황은 단순히 방송이 언로사 사주나 광고주의 비위를 맞춘다는 문제뿐 아니라 어떤 취재 내용이 전파를 타느냐하는 필터링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352-3)



part 4: 시민의 법인격 회복


"기업의 행위를 통제하는 것은 기업의 이사와 주주는 물론 시민에게도 중대한 사안으로, 앞서 셔먼 반독점법을 비롯한 여러 입법적 노력에서 보았듯이 기업이 법적으로 어떻게 정의되는가에 그 근간을 둔다. 1800년대 이래로 사실상 모든 입법 심의회에서 기업의 행위를 규제하거나 통제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있어왔다. 그 시초는 권리장전을 통해 인간을 〈독점기업〉으로부터 보호하려던 토머스 제퍼슨이었으나 그의 주장은 끝내 관철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시도의 대부분은 실패하거나 무산되었는데, 그 주된 원인은 기업의 법인격이라는 근원적인 이슈를 건드리지 못한 데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기업을 통제할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다. 정작 필요한 조치는 살아있는 인간과 '기업' 등의 살아있지 않은 법적 의제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설정하는 것이다. 기업이 자신을 인가한 주체, 즉 인간과 정부의 통제하에 다시 들어갈 때에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382-3)


"역사적으로 미국에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공공정책의 관점에서 근본적인 철학적 입장 차이가 있었다." "보수주의자는 정부의 공익 관련 개입이 경찰과 군대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대부분은 심지어 공립학교와 소방서까지 경계하며, 이런 기능을 기업에 위임하는 쪽을 선호한다. 반면 자유주의자는 공익에 경찰과 군대는 물론 의료서비스와 교육, 기아와 홈리스를 면할 권리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이 모든 기능이 정부의 의무에 속하므로 사기업보다는 정부가 직접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3의 길 정치학은 1980년대에 등장할 때부터 '모든' 정부 기능을─심지어 군대와 경찰까지도─정부보다는 사기업이 더 잘 수행할 수 있고, 정부는 본질적으로 어떤 선善도 제공할 수 없는 악한 세력이거나 최소한 어떤 일을 해도 비효율적이라는 특이한 신념을 내세웠다. 그러므로 우편사업도 민영화해야 했고, 사회보장제도, 메디케어, 공립학교도 마찬가지였다."(430-1)


"제3의 길 정치인들은 본질적으로 정부의 책임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시각이 옳다고 본다. 그러나 전통적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이들은 정부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민간 기업에서 실제 이런 모든 기능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제3의 길은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에 치명적이다. 그러나 선출직도 아닌 대법원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국민과 기업의 역사적 관계를 변화시켰는지를 감안할 때, 제3의 길은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이기기에 충분한 자금을 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무리 윤리적인 민주당원이라도 이 지독한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산타클라라 사건〉 판결을 무효화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고, 그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기업과 인간이 동일하지 않다고 명문화한 수정헌법을 꼽는 것이다. 인간은 '권리'가 있지만 기업은 오로지 우리 인간이 그들에게 부여하기로 결정한 '특권'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기업이 가질 수 '없는' 권리 중 하나가 바로 '언론의 자유'이다."(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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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의 전염 -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다
로버트 H. 프랭크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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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애덤 스미스는 흔히 경쟁적인 시장이 최대 다수에 최대 이득을 안겨준다는 주장을 지지한 인물로 인용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스미스의 입장이 아니었다. 그를 특징짓는 통찰은, 편협한 이기심이 흔히 사회적으로 이로운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생각들 간의 경쟁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좋은 생각은 대체로 승리를 거두지만, 생각들이 서로 다투는 시장이, 특히 단기적으로는 더 그렇지만, 공공선을 믿을 만하게 촉진한다고 추정하기는 어렵다. 내가 이 책에서 힘주어 강조하는 바는, 우리는 강력하고도 합법적인 공공 정책을 입안하는 데서 사회적으로 이로운 밈은 장려하고 해로운 밈은 저지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사회적 힘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정책이 왜 우리에게 이로운지 설명하고, 그러한 정책을 실시하는 데 실패하면 우리의 생존 자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12-3)


1부 도입: 논쟁의 개요


"간접흡연과 재정적 영향으로 초점을 좁히면 흡연자가 타인에게 입히는 피해를 턱없이 과소평가하기 쉽다. 흡연자가 되기로 한 누군가의 결정이 낳는 최대의 해악은 다른 사람들도 담배를 따라 피울 가능성을 높이는 데 따른 피해다. 누군가가 흡연자가 되면 그의 친구들은 모두 자신의 동료 집단에 흡연자가 한 사람 더 늘어나는 셈이다. 따라서 그 집단의 구성원은 모두 흡연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흡연 습관을 들인 이들은 다시 그들 동료 집단 구성원 모두의 흡연 가능성을 그만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과정이 계속 되풀이된다. 게다가 이 새로운 흡연자들은 저마다 다른 사람의 흡연 가능성을 높일 뿐 아니라, 비록 그보다 더 작은 정도이긴 하나 좌우지간 간접흡연으로 인한 진짜 피해도 키워준다. 한마디로 모종의 규제들이 누군가의 흡연을 막아준다 해도 그의 간접흡연 혹은 그가 정부의 의료 예산에 주는 부담으로 인해 타인에게 안기는 피해는 실제로 예방한 전체 피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24-5)


"사회심리학자들은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들이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남들이 하는 일을 설명할 때 우리가 흔히 성격이나 인성 같은 내적 요인은 과대평가하고, 외적(즉 상황적) 요인은 과소평가한다는 사실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기본적 귀인오류'라고 부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우리의 행동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더러는 더 좋은 쪽으로, 하지만 좀더 흔하게는 더 나쁜 쪽으로 말이다. 분별력 있는 식습관이나 규칙적 운동처럼 건강을 증진하는 행동은 대개 습득하기가 어렵다. 좌우간 이런 행동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드러나며, 인간 역시 대다수 동물과 마찬가지로 근시안적 경향성을 지닌다. 우리는 즉각적 보상과 처벌은 턱없이 강조하고, 적잖은 시간이 흐른 뒤 나타나는 보상과 처벌은 지나치게 등한시한다. 대다수 사람의 경우, 건강에 이로운 행동은 그러한 행동을 널리 행하는 공동체에서 훨씬 더 습득하기 쉽다."(27-8)


2부 행동 전염의 기원


"사회심리학자들은 사회적 영향력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우리의 일반적 경향성을 오래전부터 지적해왔지만, 정작 그런 경향성이 드러나는 까닭에 대해서는 그만큼 진지하게 따져보지 않았다. 이러한 불균형이 드러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대개 맥락적 요소보다 사람이 더욱 우리의 주목을 끌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생하다. 하지만 맥락적 요소는 따분하다. 적어도 사람과 비교해볼 때는 그렇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 같은 불균형이 드러나는 또 다른 이유는 사회적 힘을 비롯한 기타 맥락적 신호는 대개 부지불식간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지 메커니즘의 해부학적 복잡성 자체와 그것이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속도 때문에 그 메커니즘은 거의 전적으로 의식적인 인식의 영역 밖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사회적 힘을 비롯한 여러 맥락적 신호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못된다. 우리는 대체로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51)


"찰스 다윈이 분명하게 규명한 대로, 자연선택은 거친 도구다. 자연선택이 주조하는 인지 체계는 모든 환경에서 가장 정확하게 현실을 보여주는 도구라기보다 폭넓은 적응력을 지닌 장치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때로 착시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인지 체계의 결점이라기보다 거의 모든 공학적 디자인 문제에서 발생하는 까다로운 트레이드오프의 증거로서 바라보는 게 옳다." "한마디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평가는 사실상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준거 틀에 기댄다. 특히 중요한 한 가지 준거 틀은 우리가 평가하고자 시도하는 모든 자극의 절대적 수준이다. 마음과 물체의 관계를 규명하는 정신물리학에서 중요시하는 '베버의 법칙'에 따르면, 어떤 자극의 변화에 대한 우리의 인지는 원래 자극의 비율로 측정한 변화의 크기에 의존한다. 따라서 변화는 비교의 관점에서 클 때만 크게 느껴진다." "이는 우리가 거리, 온도, 소란도, 음 높이, 무게, 고통, 밝기, 숫자, 다른 수많은 신호 등 그 어떤 것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57-9)


"무리 행동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예는 주식 시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 기업의 주식을 소유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그 회사의 현재 및 미래 수입에 대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경제 이론은 공공 증권거래소에서 사고파는 한 기업의 주가는 그 기업의 현재 및 미래 이익에 대해 매긴 현재 가치에 비례해 오르내린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누구도 진정으로 어떤 기업의 미래 이익이 정확히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므로, 투자자들은 추정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추정치는 잘 추론된 시장 분석 결과에 크게 의존하는 게 보통이지만, 투자자들은 한 기업의 주가가 더러 전반적 낙관론이나 비관론 신호에 반응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과거에 말한 바와 같이, 증권 컨설턴트의 과제는 자신이 느끼기에 가장 실적이 좋을 것 같은 기업을 가려내는 작업이 아니라 다른 투자자들이 최고 실적을 낼 거라고 여기는 기업을 예측하는 작업이다."(77)


3부 행동 전염의 사례


"다른 사람들로부터 힌트를 얻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적응성 있는 전략이다. 과거 철학자들은 노예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느냐와 관련한 격정적 논쟁에 참가했지만, 오늘날 그런 논의의 세부 사항에 대해 잠깐이라도 생각해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잘못임은 거의 보편적으로 이미 해결된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은 그 역사적 해결책에 이르게 된 논쟁을 신중히 연구한 뒤 그러한 견해에 다다른 게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다 해결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는 거의 대다수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난날 그 문제에 기울인 상당한 에너지를 오늘날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다른 수많은 문제, 혹은 다른 좀더 유용한 일에 쏟아부을 수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그 자체는 신념 유형이 흔히 시공간에 따라 왜 그토록 변화무쌍한지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다."(95)


"동성 간 결혼이나 대마초 합법화에 대한 지지와 관련해 여론 궤도의 변화를 살펴보면 실질적 논쟁은 사실 장기적으로 중요하다는 관점에 더욱 힘이 실림을 알 수 있다. 동성 간 결혼에 대한 반대 근거는 주로 동성 커플은 오랫동안 결혼이 금지되어왔다는 사실이었다. 보수적인 철학자이자 정치인인 에드먼드 버크가 주장했을 법한 대로, 그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변화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상당한 입증 책임을 부여한다. 하지만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달리 제공해야 할 게 별로 없다. 특히 그들은 동성 간 결혼을 왜 금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신중한 논리를 담은 논쟁을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반면 동성 간 결혼 지지자들은 수고스럽게도 그런 결혼이 왜 공동체의 이익에 하등 위협을 가하지 않으며 실제로 수많은 긍정적 결과를 내놓는 데 기여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일단 사람들이 그러한 논의에 귀 기울이고 토론을 시작하게 되면서 동성 간 결혼 지지자들은 꾸준히 호응을 얻었다."(111)


"행동 전염과 전통적인 경제 유인이 서로를 강화해주는 현상을 '조세 순응(tax compliance)'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정책 영역은 없다. 사람들이 자국이 세법에 어느 정도 복종하는지 조명하는 전통적인 경제 모델은 거의 전적으로 협소하게 정의된 물질적인 유인에만 주목한다. 법과 규범의 집행은 이러한 모델 상황에서조차 중요하지만, 그 중요함의 정도는 우리가 행동 전염의 효과까지 고려할 때보다 훨씬 적다." "높은 수준의 조세 순응은, 대다수가 다른 사람이 정직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상대적으로 유지하기 쉽다. 이때 동료 영향을 무시하는 전통적인 모델들은 조세 집행을 완화하면 사람들이 부정행위를 해도 처벌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여기므로 탈세가 늘어날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느슨한 조세 집행의 간접적 영향은 그로 인한 직접적 영향을 압도할 가능성이 있다. 남들이 조세와 관련된 부정행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순식간에 폭발적인 피드백 과정이 뒤따른다."(150-3)


"행동 전염은 흡연, 과음, 불건전한 식습관, 낮은 조세 순응, 그리고 수많은 다른 문제의 원인이다. 하지만 이런 영역에서의 피해는 동료가 소비 패턴에 영향을 미친 데 따른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유시장 옹호자들은 사람이 정부 관료보다 좀더 세심하게 자신의 돈을 소비한다고 말하길 좋아한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사적인 소비 결정은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대체로 합리적이라고 인정하자. 하지만 개인적 합리성이 곧바로 집단적 합리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 잘 보려고 모두가 일어서면 다들 앉아서 편하게 볼 때보다 더 잘 보이지 않게 되는 결과를 낳는 경우처럼 말이다. 개인적 합리성과 집단적 합리성은 소비와 관련한 의사 결정에서도 그와 유사한 긴장감을 드러낸다. 동료 효과는 특정 영역에서 연속적인 상호 상쇄식 소비를 촉발하고, 그 결과 훨씬 더 필요한 다른 부분에 쏟아부어야 할 자원을 부족하게 만든다. 이런 왜곡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정책은 엄청난 이득을 낳을 것이다."(177-8)


"작고한 영국 경제학자 프레드 허시는 주로 절대적 특성보다 상대적 희소성으로 가치가 결정되는 재화를 기술하기 위해 위치재(positional goods)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내가 받은 교육의 가치는 내 직업 전선에 종사하는 선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는지에 의해 좌우된다〉고 적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범주에 속한 다른 재화들과의 상대적 비교에 거의 좌우되지 않는 재화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비위치재(nonpositional goods)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어떤 영역에서 다른영역보다 상대적 소비에 더욱 신경 쓰는 경향은 소비와 관련한 사람들의 의사결정을 왜곡한다. 그에 따라 내가 말한 이른바 위치재적 군비 경쟁(positional arms races), 즉 위치재에 중점을 둔 점증하는 소비 패턴을 초래한다. 이것이 낳는 역학은 군비 경쟁을 추동하는 역학과 매우 비슷하다. 양쪽의 경우에서 낭비적 소비가 발생하는 까닭은 일부 소비 범주가 다른 소비 범주보다 더 맥락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180-2)


"밀턴 프리드먼은 어떻게 소득과 안전 간의 트레이드오프를 따져볼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노동자들에게서 앗아간다며 안전 규정에 반대했다. 또 다른 사람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선수들에게서 자유를 박탈한다는 이유로 헬멧 착용 규정에 반대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는 둘 다 군축 협약이 각국으로부터 원하는 만큼 많은 무기르르 확보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는다고 투덜거리는 것과 같다. 이것이 정확히 그들의 논리다! 각국이 기꺼이 군축 협약에 서명하는 까닭은 그들이 무기와 관련해서 개별적으로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놔두면 결과적으로 무기에 쏟아붓는 지출이 과도해질 것임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업장의 안전 규정도 같은 이치다. 작업장의 안전에 관해 개별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존중하게 되면 그와 동일한 결정을 집단적으로 내리도록 해주는 법률을 지지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리는 부정당한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규정을 '위치재적 군축 협약'이라고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186)


"불평등의 증가는 우리가 목격한 소비 폭포 효과의 유일한 원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중앙값 소득자가 점점 더 살만해졌기 때문에 소비 폭포 효과가 일어난 게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미국 남성의 현재 시급 중앙값은 실제로 1980년보다 더 낮아졌다." "노역지수(toil index)는 중간 소득자가 그 그 목표를 이루기에 충분한 돈을 벌기 위해 매달 일해야 하는 시간을 나타낸다. 소득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모든 계층에서 대략 동일한 비율로 증가하고 있을 때, 노역지수는 거의 완전하다 할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중간 소득자는 중간 가격의 주택에 쓸 월세를 벌기 위해 매달 일주일 남짓만 일하면 됐다. 하지만 1970년 이후 중간 임금이 정체되기 시작하면서 소득 불평등이 극도로 심화했다." "워런과 티아기는 《맞벌이의 함정》에서 맞벌이 부부의 제2의 소득이 그저 수지의 균형을 맞추는 데 필요한 것이 되었음을 확인했는데,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198-200)


4부 행동 전염의 정책적 함의


"행동 전염에 기반한 규제를 반대하는 이들이 가장 크게 우려하는 점은 그러한 규제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약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유 의지에 대한 믿음을 위협하면 타인에게 피해 끼치는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일이 한층 어려워질 수 있다며 난색을 표시한다. 사람들의 행동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은행을 털었다고 강도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우려가 널리 퍼져 있음에도 그 우려의 논리적 기반은 취약하다. 자유 의지를 부정한다고 해서, 혹은 우리 행동이 외부 요인에 의해 영향받음을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이 있다는 것까지 부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그저 모든 행동은 원인이 낳은 결과라는 의미일 뿐이다." "우리의 선택이 흔히 외부적 힘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사회가 그러한 선택에 책임을 묻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게 정당하다는 믿음은 분명 양립 가능하다."(246-7)


"하지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 우리가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즉 규제자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 때문에 입는 피해를 무시해야 한다는 관점─을 채택한다고 가정해보자. 심지어 그런 관점조차 규제자가 행동 전염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행동 전염으로 인한 흡연은 새로운 흡연자 자신뿐 아니라 그 피해에서 벗어날 실질적 방도가 없는 수많은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다. 이 간단한 문장에는 사회과학자들이 오랫동안 견지해온 합의가 담겨 있다. 즉 우리는 성격이나 인성 같은 개인적 특성을 살펴보기보다 사회적 환경을 들여다봄으로써 누군가가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더욱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사회적 환경은 우리에게 매우 강력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공공 정책을 활용해 사회적 환경을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주조해야 할 만한 근거는 다분하다."(251-5)


"환경 오염에 대한 경제적 분석은, 사람이나 기업이 오염을 일으키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그저 깨끗한 생산·소비 방법이 더러운 생산·소비 방법보다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라는 관찰에서 비롯된다. 만약 깨끗한 생산·소비 방법이 더 싸다면 오염은 애당초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오염이 일어나는 과정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매력적이다. 오염원 배출에 따른 피해가 주로 남들에게 가기 때문이다. 영국 경제학자 아서 세실 피구는 환경 외부성을 억제하기 위한 과세 접근법을 최초로 도입한 선구자다. 그는 자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후생경제학》에서, 더러운 과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이 배출하는 오염에 과세함으로써 그 과정을 더욱 비싸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부과된 세금을 흔히 피구세(Pigouvian taxes, 혹은 Pigovian taxes)라고 표현한다."(265)


"행동 전염은 에너지 집약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경향성을 증폭시키므로, 이산화탄소세 채택은 그러한 선택을 한층 비싸게 만들어 에너지 집약적 행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강력한 사회적 피드백 효과를 창출하기도 한다. 부적(negative) 측면의 예로는 가령 SUV를 모는 일을 한층 비싸게 만들어 SUV 구매자 수를 점점 더 줄이고, 이것이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SUV를 훨씬 덜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정적(positive) 측면의 예로는 태양 전지판 설치로 인한 경제적 이득을 늘려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태양 전지판을 설치하도록 이끌고, 다시 다른 사람이 그 추세를 따르도록 유도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엄격한 이산화탄소세를 채택하는 데 따른 가장 큰 이득은 그 세금이 촉발한 기술적 혁신을 이루려는 추세에서 온다. 우리 행성이 계속 살아남을 것이냐 말 것이냐는 아마도 이러한 기술적 혁신의 출현에 달려 있을 것이다."(275-6)


"1942년 경제학자 어빙 피셔와 그의 형 허버트 피셔는 그들의 책 《건설적인 소득 과세─개혁을 위한 제안》에서 현재의 소득세 제도를 간단히 손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위치재를 대상으로 하는 이상적인 소비세 과세에 근접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들은 현재의 소비세를 각 가정의 연간 소비 지출에 대한 좀더 과감한 누진세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각 가정이 조세 당국에 소비 실태를 입증하기 위해 영수증 수천 개를 챙겨야 하는 곤혹스러운 장면이 떠오른다. 하지만 피셔 형제가 지적했다시피, 일단 우리가 한 가족의 총소득이 소비와 저축, 이렇게 두 가지 범주로 나뉠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그런 절차를 거쳐야 할 필요성은 사라진다. 따라서 그 가족의 전체 소비액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오직 연간 소득과 총저축액에 추가된 연간 저축애, 이 두 가지 수치만 알면 된다." "다만 저소득층 가정은 저축률이 낮은 경향이 있음을 인정해 상당 규모의 표준 공제액을 빼고 계산한다."(286-7)


"과세되는 소비에 대한 한계 세율은 낮게 시작될 것이다. 저소득층 가정이나 중산층 가정이 현행 소득세에서와 같거나 더 낮은 세금 고지서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 다음 한계 세율은 과세되는 소비가 증가함에 따라 꾸준히 올라갈 것이다." "누진 소비세를 처음에 이처럼 점진적으로 단계적으로 도입하면 고가품 소비의 증가율이 소폭 감소하고, 그에 따라 저축액이 증가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어 투자가 늘어나면 생산성이 증가한다." "누진 소비세가 꾸준히 소득세를 대체해가면, 국민소득에서 사적 소비에 쓰이던 몫은 점차 줄고, 민간과 공공 양자의 투자에 할애되는 몫은 늘어난다. 하지만 높아진 투자는 국민소득의 성장률을 끌어올리므로, 누진 소비세 아래서는 결국 절대적 소비 수준이 소득세에 기반한 과거 경제에서 볼 수 있던 절대적 소비 수준을 능가하게 된다. 따라서 누진 소비세로의 전환은 사실상 모든 이에게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을 동시에 안겨주는 정책적 변화다."(287-9)


"소득세를 누진 소비세로 대체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비 불평등이 줄어드는 바람직한 효과가 나타나겠지만, 더불어 부의 불평등은 되레 늘어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부자들은 누진 소비세 제도 아래서는 많은 재산을 남기고 사망하는데, 그 때문에 강력한 상속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다수 사람들은 생을 마무리할 때쯤 부자가 되어 있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만,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자신이 인생 말년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들은 직업 이력을 막 시작할 무렵 상속세에 대해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그에 따른 세수 덕에 가능해진 향상된 공공 서비스를 평생 누릴 것이다. 그들 혹은 그들의 상속인 가운데 거의 누구든 상속세를 한 푼도 내지 않을 것이다. 상속세를 낼 정도로 충분히 운 좋게 인생 말년을 맞은 극소수 사람들은 하등 불평할 이유가 없다. 소송에서 승리한 원고가 자신이 의뢰한 변호사에게 성공 보수를 지불하는 데 대해 불평할 까닭에 전혀 없는 것처럼 말이다."(290-1)


"의사소통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비슷한 환경에서 진척을 이루어온 전략을 찾아냈다. 이런 전략은 대부분 〈무슨 일인가 해보라(do something)〉고 듣는 이들을 설득하려는 시도는 가급적 피한다. 그들로 하여금 행동해야 한다고 스스로 결론 내리도록 해주는 대화를 시작하는 편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인간 대화의 내용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드러난 일관된 결과는 질문하기가 대화 파트너들이 공유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촉구하는 유일하게 강력한 도구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화에서 여러 상이한 유형의 질문이 많지만, 후속 질문은 유독 특별한 힘을 지니는 듯하다. 이 분야를 선도하는 하버드 경영대학의 앨리슨 우드 브룩스와 레슬리 존이 썼다시피 〈후속 질문은 대화 파트너에게 당신이 듣고 있으며 마음을 쓰고 있으며 더 알기를 원한다는 신호를 보낸다. 후속 질문을 많이 던지는 파트너와 상호 작용하는 사람은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자신을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는 경향이 있다〉."(320-4)


"물론 질문하기가 중요한 정책적 이슈에 관해 더욱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도록 촉구하는 유일한 전략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심리학자 매슈 볼드윈과 요리스 라메르스는 시간 프레이밍(temporal framing)이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상이한 환경 정책 옵션을 평가하는 방식에 극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작업은 보수주의자는 과거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유주의자는 미래에 더욱 주목하는 것 같다는 관측으로부터 시작한다. 과장되었지만 이러한 둘 간의 차이에 대한 이같은 특성 묘사가 시사하는 대로, 보수주의자는 현재가 과거보다 더 나쁘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 정책을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자유주의자는 미래가 현재보다 더 나쁠 것이기 때문에 현재 정책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보수주의자를 상대로 환경 보호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사람은 과거보다 현재 환경의 질이 더 나빠진 측면에 주목해야 함을 말해준다."(335-7)


"사람들은 본인의 성공이 순전히 자기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흔히 후대에도 비슷한 기회를 열어줄 수 있는 투자에 쓰일 세금을 지지하는 데 덜 적극적이 된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 운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려는 시도는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나는 순전히 우연찮게 이와 같은 장애물을 가장 빠르게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이 성공한 친구들에게 그들 역시 운이 좋았음을 상기시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그러는 대신 그저 정상에 이르기까지 본인이 누려온 행운의 예를 떠올려볼 수 있겠냐고 묻자, 그들은 전혀 화를 내거나 방어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도리어 눈을 반짝이면서 관련 사례를 찾아내기 위해 본인의 기억을 반추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예를 생각해내면 그것에 대해 신나게 들려주었다. 그 사례를 소개하는 과정은 흔히 또 다른 사례를 떠오르게 만들고, 그들은 역시 그것에 대해서도 열심히 들려주었다."(345-6)


"만약 당신의 시간 가운데 최소한 일부만이라도 당신과 모든 견해가 일치하지는 않는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면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가장 중요한 인지적 편견 가운데 하나를 나타내는 심리학 용어다. 훌륭한 과학자는 자신의 가정이 잘못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찾아 나서지만, 우리 대다수의 자연스러운 욕구는 우리가 애초에 가진 믿음을 확실하게 해주는 정보에 대해 더욱 수용적이다. 그와 모순되는 정보에 눈감는 경향은 당신이 어떤 아이디어를 믿어야 한다는 동기가 강할 때 특히 커진다. 그 아이디어를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제가 그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반면 그 아이디어가 잘못이길 바라는 사람은 〈제가 그것을 믿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 적어도 우리 시간의 일부만이라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투자한다면 우리가 확증 편향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한층 커질 것이다."(348)


맺음말


"나는 오랫동안 개인의 소비 결정만으로는 온난화 위협을 저지할 가망이 거의 없다는 월러스웰스의 견해를 공유해왔다. 우리에게는 공공 정책의 대담한 변화 역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행동 전염의 위력을 연구하면서 의식적인 소비도 내가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방식으로 정책 전선의 진보를 촉진할 수 있다고 수긍하게 되었다. 태양 전지판을 설치하는 행위, 전기 자동차를 구입하는 행위, 혹은 좀더 기후 친화적인 식이법을 선택하는 행위는 비단 다른 사람이 그와 비슷한 조치를 취하도록 만들 가능성만 키워주는 게 아니다. 그것들은 그 행위자의 기후 변화 옹호론자로서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해주기도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그 행위자가 강력한 기후 관련 입법에 찬성하는 후보들을 지지하고, 그들이 당선되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이웃을 설득하러 나서도록 이끌어준다. 온난화 저지는 대대적인 사회 운동이 없으면 정말이지 무망한 일이다."(361-2)


"그린 뉴딜 지지자들은 경제적 불평등과 기후 위기라는 가장 시급한 두 가지 당면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지 못하면 현재의 교착 상태를 뚫고 나가기 위한 폭넓은 정치 연합체를 꾸리기 어렵다고 주장해왔다. 그에 대한 반대자들은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다루는 것은 너무 감당하기 벅차고 돈도 많이 들기 때문에 두 영역 다에서 실패할 게 뻔하다며 반박한다. 여기에 불평등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필요한 누진세가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부유한 유권자에게 고통스러운 희생을 요구한다고 가정하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들이 유권자에게 높은 최고 세율을 부과해도 입찰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는 부자들의 상대적 능력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설명해준다면, 유권자 대다수는 아무런 실질적 희생도 따르지 않음을 이해할 것이다. 한마디로 양면전이 올바른 길이다. 경제 불평등을 가장 효과적으로 완화해주는 바로 그 같은 정책들이 동시에 탄소 중립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비용을 줄여줄 것이기 때문이다."(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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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문화 - 현대 경제의 지적 기원, 2025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조엘 모키르 지음, 김민주.이엽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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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진화, 문화 그리고 경제사


"나는 이 책에서 근대 성장의 문화적 토대를 마련한 1500~1700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근대적 성장을 가능케 한 문화적 토대는 이 시기의 정치 및 제도의 발전과 문화적 변화 속에서 생겨났지만 결코 경제 성장을 유도할 목적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제도와 경제성장의 우연한 관계는 이 책에서 반복해서 다루는 주제다." "기술 진보와 궁극적인 경제 성장을 이끈 원동력은 태도와 적성이다.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변 환경과 세계를 이해하는 의지와 에너지를 준다. 적성은 이렇게 얻은 지식을 더 높은 수준의 생산성과 삶의 질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책에서 나는 태도에 대해 논할 것이다. 여기서 제기하는 내 주장은 이런 태도로 인해 서양에서 폭발적 기술 진보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문화'는 자연 세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꿨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유용한 지식'의 축적과 확산을 촉진하고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고 가꾸었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기술에 영향을 끼쳤다."(26-7)


# 문화의 정의 : 문화는 유전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전달되며 사회의 다른 구성원이 공유하면서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신념, 가치, 선호의 집합체


"무엇보다 기술은 자연 현상과 자연 규칙을 탐구하고, 조작하고, 개척하려는 인류의 의지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런 의지는 축적된 지식의 양이 계속해서 증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이러한 지식을 습득하고 확산하고 활용하려는 의지와 능력은 그 자체로 문화의 일부며, 따라서 자연 현상에 대한 지식 탐구, 그러한 지식 탐구의 목적, 연구를 진행하는 사회의 제도, 지식 습득 방식과 습득한 지식의 진위를 확인하는 절차, 그 지식을 유효한 지식으로 사회에 수용하는 전통, 그리고 그 지식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확산시키는 것을 결정한다. 바로 여기서 근대적 경제 성장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18세기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이전의 '초기 근대 유럽', 즉 크로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항해를 시작하고 아이작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발표할 때의 시기 말이다. 유럽의 문화와 제도는 이 시기에 형성되었고, 궁극적으로 현대 경제학을 창출한 거대한 경제적 변화를 이끈 행위를 유발했다."(36-7)


"경제 성장을 추진하고 '기술의 미덕'에 대한 신념을 보완하는 중요한 문화적 신념은 진보, 특히 경제 성장에 대한 믿음이다. 이런 신념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실증적 요소는 물질적 진보가 가능하다는 신념, 즉 역사는 정지 상태뿐만 아니라 상향 추세라는 것과 이런 상향 추세가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걸 의미한다." "둘째, 규범적 요소는 경제 성장이 바람직하다는 명제를 받아들이고 부를 쌓거나 물질적 재화를 축적하는 것을 죄악시 또는 헛된 것이라고 치부하는 생각을 거부한다." "어찌 되었든 유럽에서 이런 사고방식은 깨졌고, 이는 궁극적으로 산업혁명과 근대적 경제 성장의 시작으로 이어졌다는게 중요하다. 셋째, 처방적 요소는 경제 성장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는 사상을 널리 수용한 후 장기적 경제 성장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도록 정책 수단과 제도 변화의 구체적 의제를 제안 및 공식화하고 실제로 이를 이행하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18세기에 눈에 띄게 구체화되었다."(44-5)


2부 16~17세기 문화적 사업가와 경제 변화


"문화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문화적 선택과 그 결과는 왜 사회마다 다를까? 그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은 있을까? 있다면 그 역할은 무엇일까? 그리프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은 문화적 선택을 할 때 다른 이들의 생각과 신념을 고려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예외가 있다. 로버트 훅이 말한 〈코르테스 군단〉과 같은 소수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선택지에서 문화적 특성을 선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문화적 특성을 추가할 수도 있다. '문화적 사업가'라고 일컫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문화가 일대다(一對多)로 전달되는 통로다." "이들은 대부분 큰 위험을 감수할 의지가 있고 강박적이기도 하며 근면적이기까지 하다. 카리스마도 갖췄고 물론 행운도 따른다. 기업가처럼 대부분의 문화적 사업가는 개인적으로 문화의 선택지에 미미한 변화만을 초래하지만 그중 소수는 문화의 선택지에 눈에 띄는 방식으로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요컨대 그들은 사회의 신념, 가치 그리고 선호를 바꾸어놓았다."(101-2)


"가장 성공한 문화적 사업가는 이전 세대에 살았던 거장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 마르크스는 당시 지배적인 사상이 더 이상 새로운 산업 현실과 도시 생활에 부합하지 않을 때 살았으며, 그의 생각과 글은 그때까지 여러 갈래로 나뉘었던 사회주의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등장했다. 그는 전통적인 정치경제학,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헤겔식 역사주의를 포함해 다양한 요소를 혼합함으로써 유물론적 역사관을 발전시켰다." "새로운 신념과 사상이 초점을 만들어내려면 널리 확산되어야 한다. 이런 신념과 사상이 확산되려면,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 역시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사상이 분산되지 않고 수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것에서 보듯 이런 분산은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는다. 따라서 문화적 사업가의 성공 여부는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수렴하도록 유도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107-8)


"문화적 사업가로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서양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고전주의자인 벤저민 패링턴은 베이컨의 진정한 업적은 귀납법을 개발하고 확산한 게 아니라, 지식은 생산 활동에 유용하게 쓰여야 하고 과학은 산업 현장에 적용해야 하며 사람들은 자신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는 사상을 전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올로 로시는 이와 조금 다른 접근법을 통해 베이컨의 철학은 〈진실〉과 〈효용성〉 사이의 상호 보완적 관계, 다시 말해 자연과학과 기계 기술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했다고 강조했다. 즉 베이컨은 과학 기술의 진보와 경제 발전은 기술 지식을 과학과 자연에 적용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봤다. 따라서 베이컨은 서양을 18세기에 활짝 핀 '베이컨 프로그램'의 세계로 진입시키는 준비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베이컨 프로그램'이란 명제적 지식과 처방적 지식을 통해 경제를 바꿀 수 있는 자기 강화적 피드백 고리를 만들어 물질적 진보를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117-8)


"재미있는 사실은 베이컨이 새로운 과학 이론을 창시하기는커녕 과학에 무지했다는 점이다. 베이컨은 수학을 전혀 몰랐으며 자신이 옹호하는 이론의 중요성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이나 길버트의 자석의 원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그리고 갈릴레오의 물리학 같은 시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과학 기술의 진보 대부분을 무시하거나 거부했다." "베이컨은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연구는 새로운 사실과 자연 규칙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대에 이미 발견했으되 후세의 학자에 의해 왜곡되고 잊힌 원시적 지헤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 한층 중요하다는 이른바 '아담의 지혜'를 믿었다." "그럼에도 1626년 사망한 이후 1세기 반 동안 지속된 유럽 과학에 대한 베이컨의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과학 연구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베이컨의 영향이 컸다."(119-21)


"베이컨은 실증적 사실을 의미 없이 쌓아두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신기관》에서 올바른 과학이 무엇인지 곤충학에 비유해 설명했다. 개미는 단순히 식량을 모으고 소비한다. 거미는 스스로 만든 재료만을 사용해 거미줄을 친다. 이에 비해 벌은 꽃에서 꿀을 모아 그보다 훨씬 좋은 것을 생산한다. 이 중 베이컨은 벌의 방식이 올바른 것이라고 보았다. 베이컨의 과학은 비교와 추측으로 데이터에서 실증적 규칙과 패턴을 유추하고, 여기서 나온 결과를 바탕으로 창조적 상상을 통해 자연과 실험 결과의 간극을 메우는 과학이다. 그는 과학이 사람과 자연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서 사실과 데이터를 만들어야만 설명적 이론을 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레셔는 〈이런 점을 완벽한 수준의 명확성으로 간파한 것은 베이컨이 최초였다는 점에서 그의 공적은 영원히 인정받을 것이다〉고 언급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베이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그가 당대와 사후에 끼친 영향이기 때문이다."(125)


"베이컨의 사상 가운데 프랑스 철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과학이 인류의 불행은 피할 수 없다는 치명적 신념에 반기를 든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역사관을 형성하는 데 열쇠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더욱이 계몽주의 사상가에게 진보의 열쇠는 소통과 더불어 사상 및 유용한 지식의 교환이었으며, 그들은 베이컨에게서 이런 관점을 최초로 설파한 선구자를 보았다." "길리스피가 말한 것처럼 〈과학의 힘을 빌린 기술은 사람이 물건을 만들고 살아가는 방식을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우리 모두의 노력을 품격 있게 만든다.〉 바로 이 점에서 문화적 사업가로서 베이컨의 정확한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누구보다도 베이컨은 계몽주의 지식인과 철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은 사회 진보의 열쇠로서 자연 탐구를 몸소 실천하고 보여준 베이컨을 존경했다. 베이컨의 기본 철학은 훗날 '휘그주의(Whiggish)'로 여겨지기도 했다. 다른 한편 좀더 현실주의적이었던 독일 철학자들은 베이컨의 철학에 그렇게까지 감명받지 않았다."(148-9)


"문화적 사업가로서 뉴턴의 역할은 베이컨과 다소 달랐다. 베이컨의 메시지가 지식에 기초한 사회 진보에 대한 희망이었다면, 사회 발전에 대한 뉴턴의 메시지는 한층 단언적이었다. 기술의 진보가 자연을 지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면 누군가는 자연의 규칙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뉴턴은 자연의 규칙이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뉴턴과학이 1800년 이전의 발명품에 직접적으로 적용된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즉, 뉴턴학파가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거나 반대로 경제 성장으로 인해 뉴턴학파가 등장할 수 있었다는 식의 인과관계는 적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제3의 요소가 뉴턴학파의 등장과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요소에는 유용한 지식의 성장과 확산이 물질적 진보의 핵심이라는 생각에 점차 동의하기 시작한 엘리트 문화의 등장이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의 확산은 경쟁이 치열한 제도화한 아이디어 시장에서 2세기 동안 진행된 열띤 토론의 직접적 결과물이었다."(151-2)


"뉴턴의 연구 업적은 현대 문화와 고전 문명의 투쟁에서 '현대인'이 '고대인'의 관에 박은 마지막 못이었다. 뉴턴의 물리학은 발표되자마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고대 우주론과 물리학을 무너뜨렸고, 고전 시대에 대한 당시의 열등감을 지우려 노력한 많은 지식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더욱이 그의 연구는 다른 과학 분야의 롤모델이 되었다. 다른 학문 분야는 뉴턴의 천체역학 같은 우아한 모형을 개발하려 노력하면서 그를 모방했다. 뉴턴의 연구는 농학, 의학, 화학, 전기과학, 재료과학 그리고 심지어 인문학 같은 분야도 이해하기 쉽고 우아한 법칙에 따라 축소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뉴턴의 통찰력은)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인간중심주의를 주장한 사람들이 반(反)계몽주의적 신념이자 미신으로 치부해온 과거의 신념을 극복하게 된 계기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뉴턴은 사물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 수학과 도구를 강조했다."(154-6)


"아마 산업계몽주의에 대한 뉴턴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수세기 동안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자연 현상의 규칙을 설명하는 이론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그의 이런 공헌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인류는 자연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고취시켰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이론이 세계를 구성하는 질서와 논리를 제공했다는 점뿐만이 아니다. 그와 더불어 《프린키피아》를 출간한 1687년 이후 관찰과 실험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베이컨학파의 이상이 좀더 현실화되었다." "다시 말해 뉴턴학파의 중요성은 그 이론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그 둘과 신의 관계라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있다. 이런 관계는 유용한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던 문화적 변화였으며, 이를 파악하지 않고는 그 이후부터 발생한 경제 성장을 이해할 수 없다."(169-70)


3부 16~17세기 유럽의 혁신, 경쟁 그리고 다원주의


"기술 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인적 자본에 대한 이론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과거의 젊은이들이 받은 교육에 실용적 가치나 경제적 가치가 내포되어 있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분명 예외가 있긴 했지만 노동자 계급을 위한 학교 교육은 기본적인 읽고 쓰기 능력만 가르쳤을 뿐 대부분의 커리큘럼은 종교에 집중되어 있었다. 상류층 자제들을 위한 교육은 이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했지만 이런 교육이 그 자체로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말은 아무리 좋게 봐도 제한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둘째, 현대의 일부 개발 경제학자는 교육에 대한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폭발'로 인한 경제 성장은 전혀 없거나 매우 적다는, 거의 이교도적인 생각을 드러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럽 기술의 리더이자 최초의 산업 국가였던 영국의 교육 수준은 평범했던 반면, 높은 문해력을 자랑한 프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라르스 산드베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19세기 말까지 〈빈곤한 똑똑이들〉이었다."(182-4)


"기술의 깊은 내면에는 '신의 놀이'를 하는 것, 다시 말하면 인간의 경제적 필요와 물질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의 본모습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포함된다." "어떤 활동이 허용 불가능한 수준의 '신의 놀이'인지 판단하는 문제는 분명 종교와 문화적 신념의 문제다. 다른 말로 하면, 문화는 단순히 사람 간의 교류 방식과 경계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자연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도 결정한다. 유대교-기독교의 종교적 신념에서 볼 수 있는 인간 중심 세계관은 자연을 조작하고 환경을 변화시킬 때 뒤따르는 인류의 죄책감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이런 종교적 믿음은 인류를 우주의 중심에 놓았고 자연은 창조주가 인간을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에서 창조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목표를 위해 자연을 사용하는 것은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합리적이고 기계적인 우주를 창조한 신의 지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반대였다."(195-6)


"또한 종교는 육체노동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육체노동과 관련해 중세 유럽에서 교회가 발전시킨 문화적 가치는 '노동이 곧 기도(laborara est orare)'라는 모토를 가졌던 베네딕트 수도회의 사례에 잘 나타나 있다. 생산 활동과 노동은 미덕이 되었고, 따라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노동에 직접 가담했다. 중세 시대에 노동은 교회의 많은 사람에게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호이카스와 벤츠는 물리적 노동은 훌륭한 일이며, 장인은 명예롭고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문화적 신념이 확산했다고 강조한다. 중세 유럽에서 일부 수도원과 수도승은 명제적 지식을 실제 기술에 적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수세기 동안 서유럽에서 이런 수도승은 기술 변화의 최첨단에 있었다. 중세 서양의 교회가 화이트의 주장대로 막중한 역사적 무게를 실제로 견뎌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당시의 기술적 창의성이 어떻게 발현되었는지에 대한 논의에서 종교적 기원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197)


"지식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몇몇 학자가 묘사한 것처럼 지식은 의식 있는 손부터 손재주 있는 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많은 문제점과 씨름하며 연속해서 만든 것임을 강조해야 한다. 최근 들어 이런 학자들은 우리가 기술·전문직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축적한 막대한 양의 지식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전문직에는 화가, 건축가, 시계 제작공, 식물 수집가 그리고 심지어 화재 분석 전문가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엄청난 양의 유용한 지식을 만들고 축적했다." "새롭고 개선된 유용한 지식의 상당 부분은 로버츠와 샤퍼가 말한 〈현장 기술 전문가들의 암묵적 지식〉이 만들어낸 〈지역 기술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었지만, 이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유럽이라는 더 큰 무대에서 아이디어와 기술을 수용하고 명성을 얻기 위해 경쟁할 수 있었던 일관된 문화적 맥락에서 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대부분의 학자는 어떤 면으로는 기술 전문가들이었다."(201-2)


"우리는 1500~1700년에 있었던 문화적 변화와 그로 인한 경제 발전을 어떻게 봐야 할까?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 시기에 종교적 신념은 큰 변화를 거치면서 어떤 면으로는 실험과학과 공존하거나, 심지어 이를 권장하기도 했다. 근대 초기 유럽의 기술 창의력이 성장하는 데 기여한 또 다른 중요한 문화적 요소는 외국의 사상을 흡수하고 활용하고자 하는 개방성과 의지였다. 물론 이런 개방성은 중세 유럽에서도 이미 두드러졌지만 십자군, 에스파냐와 이슬람 문화의 지적인 접촉 그리고 마르코 폴로 같은 여행자를 제외하면 1500년 이전의 유럽은 그 이후의 유럽과 비교할 때 외국의 사상에 그리 노출되지 않은 편이었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는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이국적인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 들어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처럼 항해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전 학문을 수호하려 애쓴 반계몽주의 학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벌인 '현대인'에게 강력한 무기였다."(207-12)


"다른 문화권에서 효율적이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특출 나지 않은 것처럼 들리지만, 1900년 이전 비서양 사회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제도나 상품만 고집하는 배타적 태도를 극복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여기서 완전히 벗어났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화는 비유럽인이나 비기독교인에 대한 계몽적 관용이 아니다. 외국인의 종교와 특성에 대한 불쾌한 시선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외국의 기술 및 지식을 구분해서 인정하는 유럽인의 실용적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높은 교육을 받은 유럽의 지식 엘리트들은 사람들의 국적과 종교를 지적 혁신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수준에서 (유럽의) 정체 체제는 끊임없이 경쟁해야만 했고 이로 인해 정치적으로 우호적이지 않은 경쟁자의 기술을 도입하고 모방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214-5)


"유럽에서 국가 간 경쟁이 최악의 실정을 방지하고 약화시키면서 오늘날과 같은 제도로 서서히 발전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제도 개혁은 종종 대규모 군사적 패배(예컨대 나폴레옹에게 패한 프러시아나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나 더 많은 조세 수입을 거두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일어났다. 에릭 존스는 〈유럽식 국가 체제는 경기 침체와 기술 침체에 대한 보험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경쟁의 혜택은 파괴적인 전쟁 및 군비 경쟁 같은 비싼 비용과 비교해야 한다. 실제로 1500년 이후 문화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종교는 분란의 명분이 되어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전쟁을 부추겼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면 (수많은 라이벌 국가들 간의 경쟁 속에서 지식과 상업이 가파르게 발전하면서) 국가 간 경쟁을 유익한 것으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국가 간 경쟁은 〈국가의 경제력을 강화하는〉 열쇠로 여겨졌으며 여기서 〈예술과 과학의 발전〉이 일어났다."(238-9)


"국가 간 경쟁은 문화의 변화에 두 가지를 의미했다. 첫째, 국가는 점성술사든, 화가든, 대장장이든, 항해사든, 음악가든, 무기 제작자든 상관없이 모든 분야의 최고 인재를 찾기 위해 서로 경쟁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 간 경쟁이 지적 혁신을 방해하려는 보수적인 기득권이 조정 실패(coordination failure, 여러 주체가 협업할 때, 집단적으로 우월한 선택을 할 이유가 없어 열등한 선택을 하는 상황)를 하는 주된 이유였다는 점이다. 이런 기득권 세력이 합심해서 지적 혁신을 방해하지 않는 이상 현명한 문화적 사업가는 여러 기득권 세력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거나 이간질을 하면서 살아남았다." "유럽에서 가장 강하고 꾸준한 반동 세력이던 예수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과 수학의 무한소(infinitesimal, 無限小) 개념 같은 새로운 사상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억압했다. 만약 예수회가 프랑스,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더 큰 세력을 결집했다면 유럽의 지적 혁명은 지연되었을 것이다."(239-40)


"근대 초기 유럽의 지적 커뮤니티는 다양한 학자와 지식인으로 구성된 초국가적 네트워크인 편지 공화국과 다중심적 정치 환경으로 이루어졌다. 이 커뮤니티의 중요성은 실로 엄청났다. 우선 이런 커뮤니티는 지적 혁신가들이 모국보다 지식을 확산할 수 있는 더 큰 시장이었으며, 정치적 분열에 의한 한계를 극복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통치자의 권력은 영토에 국한했지만 지식인들의 영향력은 정치적 영토를 개의치 않았다. 더욱이 편지 공화국에서 생산하는 지식은 지역적 특색이 스며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편성에 호소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지적 커뮤니티는 학계와 예술계의 '슈퍼스타'들을 고무하는 제도적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이런 지적 커뮤니티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서로 경쟁하는 시장뿐 아니라 동료들의 인정과 명성 그리고 후원을 얻고자 하는 아이디어 생산자에게도 공정한 시장이 되었다. 아이디어 시장은 학자들의 질투심이 지혜를 늘리는 건강한 질투라는 탈무드의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253-4)


"유럽 국가 체제에서 정치적 경쟁과 이른바 '공개 과학(open science)'으로 알려진 근대 초기 유럽에 등장한 지적 엘리트의 새로운 학문적 특징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통찰력을 얻은 학자들은 책이나 팸플릿, 편지, 학술지를 통해 자신의 학술적 발견을 공론화했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연구 결과를 알리고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지식의 비밀성을 줄이고 유용한 지식을 우리가 오늘날 '오픈소스(open-source)'라 일컫는 체계로 편입시키면서 유럽의 지식인은 정보의 접근 비용을 줄여주는 제도를 구축했다." "다만 공개 과학의 성장은 의식적인 노력으로 구축되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학술적 공개 과학은 학자들이 동료 사이에서 이름을 높이고 후원을 얻어 재정적 안정과 자유 그리고 방해 없이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 등 여러 이점을 획득하려는 노력의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258-9)


"편지 공화국의 정신은 로버트 머튼이 과학의 정신으로 정의한 특징을 공유했다. 즉 지적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데 가장 중요한 규칙은 새로운 지식이 창출되면 반드시 대중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제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재산권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실제로 집행하는 것이라면, 지적 혁신에 대해서는 우선권이 소유권과 동일한 개념이다. 발명가는 새로운 자연 규칙이나 자연 현상을 발견한 대가로 재산권을 받지만, 새로운 사상의 창시자들이 얻는 우선권에는 다른 사람이 그 사상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권리가 포함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다른 지식인으로부터 사상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얻는다. 성공한 지적 혁신가는 '보일의 법칙'과 '푸아송 과정'처럼 자신이 창시한 새로운 사상에 자기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비록 자신의 사상에 대해 재산권을 부여받지는 못하더라도 창시자로서 인정받고 명성을 높일 수 있었다."(281)


"경제학적 논리로 보면 치열한 경쟁과 통합된 시장은 글로벌 슈퍼스타가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을 이루고, 이들 중 몇몇은 문화적 사업가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슈퍼스타는 생산하는 지식이 볼록성(convexity)의 특징을 띠고 생산 비용이 시장 규모에 비례해 증가하지 않을 때 생겨날 수 있다. 이런 조건은 편지 공화국에서 충족되었다. 볼록성이란 한 명의 갈릴레오가 생산하는 지식이 2명의 평범한 과학자가 만들어내는 지식의 총량보다 2배 이상 크고 새로운 지식을 확산하는 한계 비용은 인쇄술의 발전과 정보 제공자, 번역가 그리고 견습생들에 의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의 슈퍼스타를 보고 자란 후배들의 연구가 비록 '정상 과학(normal science)'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회는 독특한 혜택을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슈퍼스타의 명성과 성공은 지적 혁신을 바람직하고 존경받을 만한 업적으로 만들면서 문화적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우상 편향의 원천이 되었다."(296-7)


4부 계몽주의의 서막


"영국 사회에서 청교도주의 문화가 성장한 것은 선택에 의한 사회적 학습의 역사적 사례다. 즉 청교도의 교리가 강렬했거나, 청교도의 리더가 경외심을 주었거나, 또는 청교도의 교리가 그들의 전통에 부합했기 때문에 영국인은 여러 종류의 청교도주의에 끌렸던 것이다. 사실 청교도가 과학 및 기술 발전에 헌신했다는 것 자체는 특이할 게 없다. 과학 및 기술 발전에 대한 관심과 헌신은 유럽의 공통적 현상이었고 영국의 청교도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가톨릭교도와 독일의 루터교도도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과학 발전의 가치가 일치하고 종교적 신념을 수행하는 매력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청교도는 과학이 〈신의 영광을 증명하고 인간의 이익을 증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관심을 가졌다." "중요한 것은 청교도가 실험철학에 깊이 끌렸다는 것이다. 청교도 사상은 실험과학이 기독교적 활동이라는 베이컨의 사상에 바탕을 두었다. 따라서 청교도주의와 과학은 경험주의와 실험주의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다."(316-9)


"찰스 웹스터는 청교도 세계 안에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달랐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런 종파에 상관없이 청교도주의는 베이컨에서 시작해 하르틀리프의 인맥과 '보이지 않는 대학'을 거쳐 결국에는 왕립학회로 귀결되는 지적 사회의 연쇄적 발전을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 고리였다. 영국의 산업 문화의 출현에 대한 합리적이고 정보에 근거한 판단으로 이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마거릿 제이컵은 왕정복고 시대에 〈청교도 과학〉이 〈성공회 과학〉으로 이어졌고, 아이작 뉴턴의 과학을 통해 성숙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청교도주의의 신념과 완전하게 겹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보일, 윌킨스 그리고 레이의 과학에 남아 있는 베이컨과 베이컨학파의 흔적에서 나타나는 영국의 문화적 변화는 18세기 영국 산업계몽주의의 터를 닦았다.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시작해 청교도 과학을 거쳐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곧지는 않을지언정 뚜렸했으며, 문화의 변화가 기술에 끼친 여전히 중요한 방식이었다."(330-1)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영국의 문화적 환경은 기술적 창의성에 더 유리하게 발전했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반국교회 종교였던 유니테리언은 특히 더 두드러졌다. 다시 말하지만 청교도는 대중의 종교가 아니라 엘리트적 현상이었다. 제이컵이 강조한 것처럼 이 종교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사회의 진보를 지지한 이성적이고 계몽적인 신을 믿은 종교로서 이 시대에 특히 더 적합했다. 성공회교는 안정과 조화를 강조했지만 고된 노동의 보상으로 번영과 물질적 부를 약속한 종교이기도 했다. 그리고 창의력은 미덕이자 도덕적이기까지 했다." "무신론 및 반교권주의와 거리가 멀었던 영국의 계몽주의적 종교는 베이컨과 그를 추종한 청교도의 발자취를 따라 기술을 형이상학적으로 발전시키는 전통을 이어갔고, 그에 따른 경제 성장을 미덕으로 여겼다. 청교도주의는 진보적 사회를 신의 의지가 실현된 것으로 보았고, 이런 관점에서 '베이컨 프로그램'의 자연스러운 연속이었다."(340-1)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1세기 전 진보에 대한 영국의 신념은 유럽 대륙보다 현실적이었으며 사회의 지식 계급과 최상류층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신 산업혁명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산업혁명을 이끈 교육받은 사업가, 문자를 읽고 쓸 줄 알았던 정비공, 훈련받은 기술자, 그리고 장인에게까지 확산되면서 사회의 더 깊은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유럽 대륙과 반대로 영국의 교육받는 엘리트는 기존 체제를 반대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도 굳게 지켰다. 영국에서 진보는 사회 혁명을 통해서만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 그리고 제도상의 현실적 개혁이 조금씩 쌓이면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진정한 계몽주의가 존재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18세기에 벌어진 지적 운동엔 단 하나의 프랑스 모형만 존재한다는 가정 아래서만 의미가 있다. 영국의 모형과 프랑스의 모형 사이에는 분명 차이점이 있지만, 오스만 제국과 중국의 지배적인 문화 요소보다는 훨씬 가까웠다."(364)


"낙관주의와 진보에 대한 관념은 18세기 아이디어 시장에서 경쟁한 유일한 문화적 신념은 아니었다. 다양한 유형의 비(非)진보적 사상도 영향력을 키웠다. 여기에는 소멸 직전의 무지몽매한 종교적 반동 세력의 절박한 절규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루소와 비코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단순하고 소박한 시대를 그리워하는 향수(원시주의로 알려진 정서)는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진보에 대한 이 같은 의구심은 틈새 사상에 머물렀다. 스파다포라는 당시 영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만족할 줄 모르는 자신감〉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했다. 지식은 진보의 열쇠였으며, 지식이 성장하는 한 인류의 물질적 조건 역시 성장할 터였다. 영국의 유명한 계몽주의 사상가 이래즈머스 다윈은 1784년 〈지식의 무더기는 ······ 이 지구상에 인간의 발자국이 존재하는 한 절대 멈추지 않고 축적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영국에서 국가 및 지역 단위의 '협회와 학회'를 설립한 목적이었다."(365-6)


"17세기의 아이디어 시장과 문화적 사업가들이 이끈 계몽주의는 복잡하고 이질적이며 종종 서로 상반되는 문화적 신념의 총합이었지만, 동시에 유럽이 경제적 근대성의 특별한 중심부가 될 수 있게끔 만든 문화적 대변화이기도 했다. 유럽 경제 발전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물어보는 경제학자들에게 유럽의 엘리트 문화는 항상 일관된 답을 알려준다. 요컨대 실용 기술의 발전을 중시하는 문화, 사회적 진보에 대한 신념 그리고 유용한 지식이 사회적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열쇠라는 신념이 유럽의 경제 발전을 촉진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신념을 보완한 계몽주의의 또 다른 문화적 요소에는 사회 계약으로서 정치권력, 행정부의 제한된 권력, 표현의 자유, 지적 경합, 종교적 관용, 법으로 인정하는 기본적 인권, 무역은 포지티브섬 게임(positive-sum game)이라는 생각, 경제 활동과 무역에 대한 미덕, 재산권의 신성함 그리고 국가를 사회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로 삼은 중상주의의 우매함이 있었다."(369-70)


"세계의 경제 성장을 이끌고 번영을 불러일으킨 기술 혁명은 장인의 독창성이나 과학적 방법 및 발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 둘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생겨난 결과다. 다시 말해, 이러한 통합이 산업계몽주의의 핵심이다. 유용한 지식을 적용하면서 과학적 원리를 실증적으로 검증하려 했지만, 과학은 기술력이 제공한 도구와 생산의 어려움 그리고 인간의 필요라는 어젠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오일러와 보르다 같은 계몽주의 수학자들은 더 효율적인 수차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르네 리오뮈르를 포함한 박물학자들은 곤충의 행동을 연구해 곤충이 농업에 끼치는 피해를 방지하는 데 기여했고, 위대한 박물학자 뷔퐁은 해군 선함 제조에 사용하는 목재에 대해 연구했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프란츠 에피누스는 전기의 성질을 연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과학과 생산 기술의 결합이 인류에 막대한 혜택을 가져다줄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실제 결과를 보기까지는 수세기를 기다려야 했다."(379-80)


"계몽주의는 데이터(data)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당시 증가하기 시작한 과학과 기술에 대한 연구는 표로 나타낸 자료와 조사, 검사 및 비교를 광범하게 사용했다. 18세기 후반 명제적 지식을 탐구하고 자신의 혁신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는 이들은 수량화와 수학 공식에 크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술을 연구하고 확산시키는 데 정밀하고 효과적인 소통 수단으로서 수학과 도식적 표현을 반겼다." "수학 공식과 수량화는 사실(facts)을 소통하는 데 효율적인 언어였으며, 수학은 (적어도 유용한 지식을 가공 및 적용하려는 지식인 커뮤니티 안에서는) 거의 보편적이었다. 과학적 논란과 그릇된 이론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난무했지만 계산과 수학 공식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더 명확하게 진실로 드러내면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지식의 타당성을 높이는 데 효율적이기에 반드시 필요했다. 이로써 그릇된 이론은 허위라는 게 쉽게 밝혀졌고, 따라서 과학이 만들어낸 지식은 더욱더 탄탄해졌다."(386)


"편지 공화국이 엘리트 현상이었던 것처럼 산업혁명의 기술적 추진력은 소규모 선택된 집단이 움직인 결과였다. 소수의 핵심 발명가들이 산업혁명을 손수 이끌다시피 했다는 칭송으로 가득한 터무니없는 빅토리아 시대의 위인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날의 몇몇 경제사학자들은 대부분의 인구가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기술 지식에 접근할 수 없었다면, 그리고 수준 높은 인적 자본이 풍부하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새로운 기술의 등장과 확산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정반대 주장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진실은 그 중간쯤에 있다. 산업혁명 시대의 기술 발전은 교과서에 나오는 소수의 대가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엘리트 현상이 아니라, 인적 자본의 최상위에 위치한 이런 발명가들이 설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준 수 천 명의 훈련받은 엔지니어, 능력 있는 기술자 그리고 손재주 좋은 장인이 함께 이끌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산업혁명 당시의 기술 발전은 분명 '그들만의 리그(minority affair)'였다."(391-2)


5부 동서양의 문화 변화


"지적 엘리트들의 선택에 의한 문화적 진화는 제도적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며, 그럼으로써 다시 이런 제도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다. 여기서 우리가 다뤄야할 질문은 〈왜 중국은 실패했는가?〉(중국은 실패하지 않았다)나 〈왜 중국은 더 많은 기술 발전을 이뤄내지 못했는가?〉(중국은 많은 기술 발전을 이뤄냈다)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근대 초기(1500~1700)로 알려진 시기에 유럽과 중국은 현대까지 지속된 기술과 경제의 커다란 격차가 생길 만큼 왜 달랐는가이다. 다시 말하지만, 중국이 잘못했다기보다 유럽에서만 계몽주의로 이어진 지적 변화라는 일련의 특이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유럽 계몽주의의 독특한 힘은 유럽뿐 아니라 지구상 모든 구석구석에 영향일 끼쳤다. 제임스 블로트나 잭 구디 같은 수정주의 학자들이 아무리 강하게 주장하더라도, 유럽과 중국의 이런 격차를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유럽중심주의라는 주장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407-8)


"유럽의 계몽주의는 근대인과 고대인의 싸움에서 그들 세대가 과거 세대보다 우월한 문화와 지식의 총체를 창출했고, 이것이 더 나은 세계로 이끄는 관문이라고 굳게 믿은 근대인이 거둔 승리의 결과였다. 이것과 비슷한 일이 동양에서도 일어났을까? 기독교 교회나 이슬람 정부 같은 강력한 종교 단체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고대인'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기원전 475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계속된 전국 시대에 중국은 공자를 비롯해 맹자와 순자 등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문화적 사업가를 배출했다. 그들의 유산은 중국 문화의 중심축이 되었다." "훌륭한 사적(史的)유물론자인 니덤은 중국 사회에 내재해 있던 자연 항상성(spontaneous homeostasis)은 무엇보다 농업과 대규모 관개 수로를 통제하고 이끌어야 할 필요성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이디어 시장에서 비롯된 어떤 결과와 마찬가지로 보수적 이념이 거둔 성공의 일부는 우연이었다고 봐야 한다."(409-10)


"지적 혁신은 성리학에 의해 큰 제약을 받았다. 성리학에 도전했던 학자들은 성리학이 관찰과 실험에서 도출된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고전적인 유교 사상과 부합하지 않을 때에만 논쟁을 했다." "명·청 시대에도 분명 아이디어 시장은 존재했다. 하지만 진입장벽이 높고 지적 혁신가의 경쟁은 기득권에 우호적으로 편향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게 종교 재판도 없고 유럽에서처럼 신성모독이나 독성죄도 없던 땅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제도가 근대 초기 유럽에서 급증한 것은 지적 기득권이 (정당하게) 스스로 위험에 처했음을 느꼈다는 반증이다. 중국에서 예수회의 활동은 황제의 의중에 따라 통제되고 제약을 받았다. 첸원위안은 조금 과장을 섞어 명·청 시대 중국 과학자들은 〈문헌적 및 고고학적 연구〉에 전적으로 매몰되었고, 중국인은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자신들의 과거에 집착했다고 주장했다."(411-2)


"명·청 시대의 중국 경제는 점차 비효율적으로 변한 정부로 인해 고통을 받기는 했어도 분명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장의 상업 경제를 권장한 상의하달식 행정 체계를 갖추었다. 아울러 행정부는 중앙 집권화한 제국의 관료 체제였지만 경제는 분산적인 시장 경제였다. 하지만 중국은 가장 능력 있는 인재와 군인을 발탁하기 위해 이웃 국가와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안정성과 평화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되는 가치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지적 안정성도 포함되었다. 12세기 주희의 성리학 해석이 들어간 사서는 중국의 엄격한 철학적 교리가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이단적·인습 타파적 지식인들이 16~17세기 초 유럽의 통념을 뒤엎은 라무스, 코페르니쿠스, 베이컨 등에 필적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유럽과 달리 중국에서는 이단적 지식인과 지적 혁신가가 경쟁적이고 개방적인 아아디어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이용할 정치적 다원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414)


"중국 사회에 만연한 보수주의는 결코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니다. 모든 사회는 공통적으로 과거의 지혜를 우러러봤으며, 따라서 이상한 것은 중국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효 기간이 끝난 오래된 아이디어를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유럽인의 사고 체계였다. 유럽에서 과거의 지혜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유럽의 경제·사회적 환경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많은 고대 사상이 근거와 논리의 시험대에 올라 사실이 아니거나 일관성이 없거나 아니면 증명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럽인이 관찰한 실험, 계산에 더 능숙해질수록 고대의 지식에 대한 권위는 더욱 떨어졌다. 유럽의 깊은 회의주의는 진보에 대한 신념의 뒷면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문화에도 이런 신념이 있었을까?" "니덤은 진보에 대한 중국인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명나라 시대 이전의 중국 문헌에서 찾았는데, 이런 신념은 유럽에서 서서히 등장해 승리할 무렵 중국에서는 시들어가고 있었다."(423-4)


"유용한 지식의 접근 비용을 현저하게 낮춰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할 목적으로 만든 유럽의 백과사전은 산업계몽주의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백과사전 같은 총서는 하나의 출판물에 많은 지식을 분류하고 체계적으로 담아 그걸 사용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배포하려는 열망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총서는 현재 기준으로 축적된 지식을 짤막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꾸준하게 최신 정보로 갱신하지 않으면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백과사전은 출간과 동시에 옛 지식이 되었고 재빠르게 새로운 지식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런 참고 도서가 고위 관리라는 협소한 집단에게만 한정되었다. 가령, 1313년 완성한 왕정의 《농서(農書)》는 유럽 계몽주의의 최고 저술들을 무색케 할 정도로 뛰어나다. 이 책에는 300여 개 넘는 도구와 농기계 삽화가 있는데, 그 삽화만 보고도 실제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매우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1530년경 《농서》는 중국 전역에 단 한 권만 남았다."(454-5)


"17~18세기의 계몽주의에 대응하는 중국의 학문적 운동으로 '근거에 의한 연구'인 고증학이 있었다. 고증학파는 타성적인 관념론과 도덕을 논쟁 대상에서 제외하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구체적 사실과 엄격한 증거를 토대로 실증적 학문을 연구했다. 이 시대 중국의 학풍은 〈본질적으로 과학 연구에 반감을 갖지 않았고 새로운 사상에 저항하지도 않았다.〉 고증학은 폭넓은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모든 주장에 근거와 증거를 요구하면서 맹목적 믿음과 근거 없는 추측을 피했다. 고증학은 매우 유망해 보였지만 결국은 유럽과 다른 결과로 이어졌다. 중국 학자들은 주로 문헌학과 언어학 그리고 역사학에 관심을 보이면서 〈고대의 현자들이 진실로 뜻한 바와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현세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갖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더욱이 유럽 계몽주의와 달리 중국의 고증학 운동은 대부분 물질적 발전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고위 관료이자 성리학자들에 의해 이뤄졌다."(441)


"만약 중국이 서양의 문화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장기적으로 중국의 유용한 지식이 어떻게 진화했을지 그리고 중국이 유럽의 산업계몽주의와 비교할 수 있는 물질적 문화를 창출했을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중국의 계몽주의─이것이 올바른 용어인지는 모르겠지만─가 유럽의 계몽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중국 학자들은 유용한 지식에 대한 연구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대신 (간단명료하게 말해서) 〈문화적 가치를 실천하면서 살았을 뿐〉이다." "중국의 학풍은 거의 대부분 과거 회고적이었다. 중국 지식인이 한 것처럼 옛 현자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들이 쓴 글에 주해를 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학문이지만, 세계 역사를 바꿀 만한 기술 발전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국의 경험을 '실패'라고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일은 예외적이고, 정말 특이한 사건이었다."(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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