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문화 - 현대 경제의 지적 기원
조엘 모키르 지음, 김민주.이엽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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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진화, 문화 그리고 경제사


"나는 이 책에서 근대 성장의 문화적 토대를 마련한 1500~1700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근대적 성장을 가능케 한 문화적 토대는 이 시기의 정치 및 제도의 발전과 문화적 변화 속에서 생겨났지만 결코 경제 성장을 유도할 목적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제도와 경제성장의 우연한 관계는 이 책에서 반복해서 다루는 주제다." "기술 진보와 궁극적인 경제 성장을 이끈 원동력은 태도와 적성이다.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변 환경과 세계를 이해하는 의지와 에너지를 준다. 적성은 이렇게 얻은 지식을 더 높은 수준의 생산성과 삶의 질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책에서 나는 태도에 대해 논할 것이다. 여기서 제기하는 내 주장은 이런 태도로 인해 서양에서 폭발적 기술 진보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문화'는 자연 세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꿨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유용한 지식'의 축적과 확산을 촉진하고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고 가꾸었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기술에 영향을 끼쳤다."(26-7)


# 문화의 정의 : 문화는 유전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전달되며 사회의 다른 구성원이 공유하면서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신념, 가치, 선호의 집합체


"무엇보다 기술은 자연 현상과 자연 규칙을 탐구하고, 조작하고, 개척하려는 인류의 의지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런 의지는 축적된 지식의 양이 계속해서 증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이러한 지식을 습득하고 확산하고 활용하려는 의지와 능력은 그 자체로 문화의 일부며, 따라서 자연 현상에 대한 지식 탐구, 그러한 지식 탐구의 목적, 연구를 진행하는 사회의 제도, 지식 습득 방식과 습득한 지식의 진위를 확인하는 절차, 그 지식을 유효한 지식으로 사회에 수용하는 전통, 그리고 그 지식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확산시키는 것을 결정한다. 바로 여기서 근대적 경제 성장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18세기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이전의 '초기 근대 유럽', 즉 크로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항해를 시작하고 아이작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발표할 때의 시기 말이다. 유럽의 문화와 제도는 이 시기에 형성되었고, 궁극적으로 현대 경제학을 창출한 거대한 경제적 변화를 이끈 행위를 유발했다."(36-7)


"경제 성장을 추진하고 '기술의 미덕'에 대한 신념을 보완하는 중요한 문화적 신념은 진보, 특히 경제 성장에 대한 믿음이다. 이런 신념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실증적 요소는 물질적 진보가 가능하다는 신념, 즉 역사는 정지 상태뿐만 아니라 상향 추세라는 것과 이런 상향 추세가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걸 의미한다." "둘째, 규범적 요소는 경제 성장이 바람직하다는 명제를 받아들이고 부를 쌓거나 물질적 재화를 축적하는 것을 죄악시 또는 헛된 것이라고 치부하는 생각을 거부한다." "어찌 되었든 유럽에서 이런 사고방식은 깨졌고, 이는 궁극적으로 산업혁명과 근대적 경제 성장의 시작으로 이어졌다는게 중요하다. 셋째, 처방적 요소는 경제 성장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는 사상을 널리 수용한 후 장기적 경제 성장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도록 정책 수단과 제도 변화의 구체적 의제를 제안 및 공식화하고 실제로 이를 이행하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18세기에 눈에 띄게 구체화되었다."(44-5)


2부 16~17세기 문화적 사업가와 경제 변화


"문화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문화적 선택과 그 결과는 왜 사회마다 다를까? 그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은 있을까? 있다면 그 역할은 무엇일까? 그리프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은 문화적 선택을 할 때 다른 이들의 생각과 신념을 고려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예외가 있다. 로버트 훅이 말한 〈코르테스 군단〉과 같은 소수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선택지에서 문화적 특성을 선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문화적 특성을 추가할 수도 있다. '문화적 사업가'라고 일컫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문화가 일대다(一對多)로 전달되는 통로다." "이들은 대부분 큰 위험을 감수할 의지가 있고 강박적이기도 하며 근면적이기까지 하다. 카리스마도 갖췄고 물론 행운도 따른다. 기업가처럼 대부분의 문화적 사업가는 개인적으로 문화의 선택지에 미미한 변화만을 초래하지만 그중 소수는 문화의 선택지에 눈에 띄는 방식으로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요컨대 그들은 사회의 신념, 가치 그리고 선호를 바꾸어놓았다."(101-2)


"가장 성공한 문화적 사업가는 이전 세대에 살았던 거장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 마르크스는 당시 지배적인 사상이 더 이상 새로운 산업 현실과 도시 생활에 부합하지 않을 때 살았으며, 그의 생각과 글은 그때까지 여러 갈래로 나뉘었던 사회주의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등장했다. 그는 전통적인 정치경제학,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헤겔식 역사주의를 포함해 다양한 요소를 혼합함으로써 유물론적 역사관을 발전시켰다." "새로운 신념과 사상이 초점을 만들어내려면 널리 확산되어야 한다. 이런 신념과 사상이 확산되려면,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 역시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사상이 분산되지 않고 수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것에서 보듯 이런 분산은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는다. 따라서 문화적 사업가의 성공 여부는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수렴하도록 유도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107-8)


"문화적 사업가로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서양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고전주의자인 벤저민 패링턴은 베이컨의 진정한 업적은 귀납법을 개발하고 확산한 게 아니라, 지식은 생산 활동에 유용하게 쓰여야 하고 과학은 산업 현장에 적용해야 하며 사람들은 자신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는 사상을 전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올로 로시는 이와 조금 다른 접근법을 통해 베이컨의 철학은 〈진실〉과 〈효용성〉 사이의 상호 보완적 관계, 다시 말해 자연과학과 기계 기술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했다고 강조했다. 즉 베이컨은 과학 기술의 진보와 경제 발전은 기술 지식을 과학과 자연에 적용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봤다. 따라서 베이컨은 서양을 18세기에 활짝 핀 '베이컨 프로그램'의 세계로 진입시키는 준비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베이컨 프로그램'이란 명제적 지식과 처방적 지식을 통해 경제를 바꿀 수 있는 자기 강화적 피드백 고리를 만들어 물질적 진보를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117-8)


"재미있는 사실은 베이컨이 새로운 과학 이론을 창시하기는커녕 과학에 무지했다는 점이다. 베이컨은 수학을 전혀 몰랐으며 자신이 옹호하는 이론의 중요성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이나 길버트의 자석의 원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그리고 갈릴레오의 물리학 같은 시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과학 기술의 진보 대부분을 무시하거나 거부했다." "베이컨은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연구는 새로운 사실과 자연 규칙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대에 이미 발견했으되 후세의 학자에 의해 왜곡되고 잊힌 원시적 지헤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 한층 중요하다는 이른바 '아담의 지혜'를 믿었다." "그럼에도 1626년 사망한 이후 1세기 반 동안 지속된 유럽 과학에 대한 베이컨의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과학 연구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베이컨의 영향이 컸다."(119-21)


"베이컨은 실증적 사실을 의미 없이 쌓아두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신기관》에서 올바른 과학이 무엇인지 곤충학에 비유해 설명했다. 개미는 단순히 식량을 모으고 소비한다. 거미는 스스로 만든 재료만을 사용해 거미줄을 친다. 이에 비해 벌은 꽃에서 꿀을 모아 그보다 훨씬 좋은 것을 생산한다. 이 중 베이컨은 벌의 방식이 올바른 것이라고 보았다. 베이컨의 과학은 비교와 추측으로 데이터에서 실증적 규칙과 패턴을 유추하고, 여기서 나온 결과를 바탕으로 창조적 상상을 통해 자연과 실험 결과의 간극을 메우는 과학이다. 그는 과학이 사람과 자연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서 사실과 데이터를 만들어야만 설명적 이론을 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레셔는 〈이런 점을 완벽한 수준의 명확성으로 간파한 것은 베이컨이 최초였다는 점에서 그의 공적은 영원히 인정받을 것이다〉고 언급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베이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그가 당대와 사후에 끼친 영향이기 때문이다."(125)


"베이컨의 사상 가운데 프랑스 철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과학이 인류의 불행은 피할 수 없다는 치명적 신념에 반기를 든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역사관을 형성하는 데 열쇠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더욱이 계몽주의 사상가에게 진보의 열쇠는 소통과 더불어 사상 및 유용한 지식의 교환이었으며, 그들은 베이컨에게서 이런 관점을 최초로 설파한 선구자를 보았다." "길리스피가 말한 것처럼 〈과학의 힘을 빌린 기술은 사람이 물건을 만들고 살아가는 방식을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우리 모두의 노력을 품격 있게 만든다.〉 바로 이 점에서 문화적 사업가로서 베이컨의 정확한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누구보다도 베이컨은 계몽주의 지식인과 철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은 사회 진보의 열쇠로서 자연 탐구를 몸소 실천하고 보여준 베이컨을 존경했다. 베이컨의 기본 철학은 훗날 '휘그주의(Whiggish)'로 여겨지기도 했다. 다른 한편 좀더 현실주의적이었던 독일 철학자들은 베이컨의 철학에 그렇게까지 감명받지 않았다."(148-9)


"문화적 사업가로서 뉴턴의 역할은 베이컨과 다소 달랐다. 베이컨의 메시지가 지식에 기초한 사회 진보에 대한 희망이었다면, 사회 발전에 대한 뉴턴의 메시지는 한층 단언적이었다. 기술의 진보가 자연을 지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면 누군가는 자연의 규칙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뉴턴은 자연의 규칙이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뉴턴과학이 1800년 이전의 발명품에 직접적으로 적용된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즉, 뉴턴학파가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거나 반대로 경제 성장으로 인해 뉴턴학파가 등장할 수 있었다는 식의 인과관계는 적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제3의 요소가 뉴턴학파의 등장과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요소에는 유용한 지식의 성장과 확산이 물질적 진보의 핵심이라는 생각에 점차 동의하기 시작한 엘리트 문화의 등장이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의 확산은 경쟁이 치열한 제도화한 아이디어 시장에서 2세기 동안 진행된 열띤 토론의 직접적 결과물이었다."(151-2)


"뉴턴의 연구 업적은 현대 문화와 고전 문명의 투쟁에서 '현대인'이 '고대인'의 관에 박은 마지막 못이었다. 뉴턴의 물리학은 발표되자마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고대 우주론과 물리학을 무너뜨렸고, 고전 시대에 대한 당시의 열등감을 지우려 노력한 많은 지식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더욱이 그의 연구는 다른 과학 분야의 롤모델이 되었다. 다른 학문 분야는 뉴턴의 천체역학 같은 우아한 모형을 개발하려 노력하면서 그를 모방했다. 뉴턴의 연구는 농학, 의학, 화학, 전기과학, 재료과학 그리고 심지어 인문학 같은 분야도 이해하기 쉽고 우아한 법칙에 따라 축소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뉴턴의 통찰력은)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인간중심주의를 주장한 사람들이 반(反)계몽주의적 신념이자 미신으로 치부해온 과거의 신념을 극복하게 된 계기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뉴턴은 사물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 수학과 도구를 강조했다."(154-6)


"아마 산업계몽주의에 대한 뉴턴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수세기 동안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자연 현상의 규칙을 설명하는 이론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그의 이런 공헌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인류는 자연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고취시켰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이론이 세계를 구성하는 질서와 논리를 제공했다는 점뿐만이 아니다. 그와 더불어 《프린키피아》를 출간한 1687년 이후 관찰과 실험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베이컨학파의 이상이 좀더 현실화되었다." "다시 말해 뉴턴학파의 중요성은 그 이론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그 둘과 신의 관계라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있다. 이런 관계는 유용한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던 문화적 변화였으며, 이를 파악하지 않고는 그 이후부터 발생한 경제 성장을 이해할 수 없다."(169-70)


3부 16~17세기 유럽의 혁신, 경쟁 그리고 다원주의


"기술 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인적 자본에 대한 이론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과거의 젊은이들이 받은 교육에 실용적 가치나 경제적 가치가 내포되어 있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분명 예외가 있긴 했지만 노동자 계급을 위한 학교 교육은 기본적인 읽고 쓰기 능력만 가르쳤을 뿐 대부분의 커리큘럼은 종교에 집중되어 있었다. 상류층 자제들을 위한 교육은 이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했지만 이런 교육이 그 자체로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말은 아무리 좋게 봐도 제한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둘째, 현대의 일부 개발 경제학자는 교육에 대한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폭발'로 인한 경제 성장은 전혀 없거나 매우 적다는, 거의 이교도적인 생각을 드러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럽 기술의 리더이자 최초의 산업 국가였던 영국의 교육 수준은 평범했던 반면, 높은 문해력을 자랑한 프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라르스 산드베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19세기 말까지 〈빈곤한 똑똑이들〉이었다."(182-4)


"기술의 깊은 내면에는 '신의 놀이'를 하는 것, 다시 말하면 인간의 경제적 필요와 물질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의 본모습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포함된다." "어떤 활동이 허용 불가능한 수준의 '신의 놀이'인지 판단하는 문제는 분명 종교와 문화적 신념의 문제다. 다른 말로 하면, 문화는 단순히 사람 간의 교류 방식과 경계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자연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도 결정한다. 유대교-기독교의 종교적 신념에서 볼 수 있는 인간 중심 세계관은 자연을 조작하고 환경을 변화시킬 때 뒤따르는 인류의 죄책감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이런 종교적 믿음은 인류를 우주의 중심에 놓았고 자연은 창조주가 인간을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에서 창조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목표를 위해 자연을 사용하는 것은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합리적이고 기계적인 우주를 창조한 신의 지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반대였다."(195-6)


"또한 종교는 육체노동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육체노동과 관련해 중세 유럽에서 교회가 발전시킨 문화적 가치는 '노동이 곧 기도(laborara est orare)'라는 모토를 가졌던 베네딕트 수도회의 사례에 잘 나타나 있다. 생산 활동과 노동은 미덕이 되었고, 따라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노동에 직접 가담했다. 중세 시대에 노동은 교회의 많은 사람에게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호이카스와 벤츠는 물리적 노동은 훌륭한 일이며, 장인은 명예롭고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문화적 신념이 확산했다고 강조한다. 중세 유럽에서 일부 수도원과 수도승은 명제적 지식을 실제 기술에 적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수세기 동안 서유럽에서 이런 수도승은 기술 변화의 최첨단에 있었다. 중세 서양의 교회가 화이트의 주장대로 막중한 역사적 무게를 실제로 견뎌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당시의 기술적 창의성이 어떻게 발현되었는지에 대한 논의에서 종교적 기원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197)


"지식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몇몇 학자가 묘사한 것처럼 지식은 의식 있는 손부터 손재주 있는 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많은 문제점과 씨름하며 연속해서 만든 것임을 강조해야 한다. 최근 들어 이런 학자들은 우리가 기술·전문직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축적한 막대한 양의 지식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전문직에는 화가, 건축가, 시계 제작공, 식물 수집가 그리고 심지어 화재 분석 전문가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엄청난 양의 유용한 지식을 만들고 축적했다." "새롭고 개선된 유용한 지식의 상당 부분은 로버츠와 샤퍼가 말한 〈현장 기술 전문가들의 암묵적 지식〉이 만들어낸 〈지역 기술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었지만, 이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유럽이라는 더 큰 무대에서 아이디어와 기술을 수용하고 명성을 얻기 위해 경쟁할 수 있었던 일관된 문화적 맥락에서 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대부분의 학자는 어떤 면으로는 기술 전문가들이었다."(201-2)


"우리는 1500~1700년에 있었던 문화적 변화와 그로 인한 경제 발전을 어떻게 봐야 할까?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 시기에 종교적 신념은 큰 변화를 거치면서 어떤 면으로는 실험과학과 공존하거나, 심지어 이를 권장하기도 했다. 근대 초기 유럽의 기술 창의력이 성장하는 데 기여한 또 다른 중요한 문화적 요소는 외국의 사상을 흡수하고 활용하고자 하는 개방성과 의지였다. 물론 이런 개방성은 중세 유럽에서도 이미 두드러졌지만 십자군, 에스파냐와 이슬람 문화의 지적인 접촉 그리고 마르코 폴로 같은 여행자를 제외하면 1500년 이전의 유럽은 그 이후의 유럽과 비교할 때 외국의 사상에 그리 노출되지 않은 편이었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는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이국적인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 들어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처럼 항해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전 학문을 수호하려 애쓴 반계몽주의 학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벌인 '현대인'에게 강력한 무기였다."(207-12)


"다른 문화권에서 효율적이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특출 나지 않은 것처럼 들리지만, 1900년 이전 비서양 사회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제도나 상품만 고집하는 배타적 태도를 극복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여기서 완전히 벗어났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화는 비유럽인이나 비기독교인에 대한 계몽적 관용이 아니다. 외국인의 종교와 특성에 대한 불쾌한 시선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외국의 기술 및 지식을 구분해서 인정하는 유럽인의 실용적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높은 교육을 받은 유럽의 지식 엘리트들은 사람들의 국적과 종교를 지적 혁신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수준에서 (유럽의) 정체 체제는 끊임없이 경쟁해야만 했고 이로 인해 정치적으로 우호적이지 않은 경쟁자의 기술을 도입하고 모방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214-5)


"유럽에서 국가 간 경쟁이 최악의 실정을 방지하고 약화시키면서 오늘날과 같은 제도로 서서히 발전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제도 개혁은 종종 대규모 군사적 패배(예컨대 나폴레옹에게 패한 프러시아나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나 더 많은 조세 수입을 거두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일어났다. 에릭 존스는 〈유럽식 국가 체제는 경기 침체와 기술 침체에 대한 보험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경쟁의 혜택은 파괴적인 전쟁 및 군비 경쟁 같은 비싼 비용과 비교해야 한다. 실제로 1500년 이후 문화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종교는 분란의 명분이 되어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전쟁을 부추겼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면 (수많은 라이벌 국가들 간의 경쟁 속에서 지식과 상업이 가파르게 발전하면서) 국가 간 경쟁을 유익한 것으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국가 간 경쟁은 〈국가의 경제력을 강화하는〉 열쇠로 여겨졌으며 여기서 〈예술과 과학의 발전〉이 일어났다."(238-9)


"국가 간 경쟁은 문화의 변화에 두 가지를 의미했다. 첫째, 국가는 점성술사든, 화가든, 대장장이든, 항해사든, 음악가든, 무기 제작자든 상관없이 모든 분야의 최고 인재를 찾기 위해 서로 경쟁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 간 경쟁이 지적 혁신을 방해하려는 보수적인 기득권이 조정 실패(coordination failure, 여러 주체가 협업할 때, 집단적으로 우월한 선택을 할 이유가 없어 열등한 선택을 하는 상황)를 하는 주된 이유였다는 점이다. 이런 기득권 세력이 합심해서 지적 혁신을 방해하지 않는 이상 현명한 문화적 사업가는 여러 기득권 세력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거나 이간질을 하면서 살아남았다." "유럽에서 가장 강하고 꾸준한 반동 세력이던 예수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과 수학의 무한소(infinitesimal, 無限小) 개념 같은 새로운 사상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억압했다. 만약 예수회가 프랑스,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더 큰 세력을 결집했다면 유럽의 지적 혁명은 지연되었을 것이다."(239-40)


"근대 초기 유럽의 지적 커뮤니티는 다양한 학자와 지식인으로 구성된 초국가적 네트워크인 편지 공화국과 다중심적 정치 환경으로 이루어졌다. 이 커뮤니티의 중요성은 실로 엄청났다. 우선 이런 커뮤니티는 지적 혁신가들이 모국보다 지식을 확산할 수 있는 더 큰 시장이었으며, 정치적 분열에 의한 한계를 극복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통치자의 권력은 영토에 국한했지만 지식인들의 영향력은 정치적 영토를 개의치 않았다. 더욱이 편지 공화국에서 생산하는 지식은 지역적 특색이 스며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편성에 호소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지적 커뮤니티는 학계와 예술계의 '슈퍼스타'들을 고무하는 제도적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이런 지적 커뮤니티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서로 경쟁하는 시장뿐 아니라 동료들의 인정과 명성 그리고 후원을 얻고자 하는 아이디어 생산자에게도 공정한 시장이 되었다. 아이디어 시장은 학자들의 질투심이 지혜를 늘리는 건강한 질투라는 탈무드의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253-4)


"유럽 국가 체제에서 정치적 경쟁과 이른바 '공개 과학(open science)'으로 알려진 근대 초기 유럽에 등장한 지적 엘리트의 새로운 학문적 특징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통찰력을 얻은 학자들은 책이나 팸플릿, 편지, 학술지를 통해 자신의 학술적 발견을 공론화했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연구 결과를 알리고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지식의 비밀성을 줄이고 유용한 지식을 우리가 오늘날 '오픈소스(open-source)'라 일컫는 체계로 편입시키면서 유럽의 지식인은 정보의 접근 비용을 줄여주는 제도를 구축했다." "다만 공개 과학의 성장은 의식적인 노력으로 구축되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학술적 공개 과학은 학자들이 동료 사이에서 이름을 높이고 후원을 얻어 재정적 안정과 자유 그리고 방해 없이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 등 여러 이점을 획득하려는 노력의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258-9)


"편지 공화국의 정신은 로버트 머튼이 과학의 정신으로 정의한 특징을 공유했다. 즉 지적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데 가장 중요한 규칙은 새로운 지식이 창출되면 반드시 대중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제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재산권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실제로 집행하는 것이라면, 지적 혁신에 대해서는 우선권이 소유권과 동일한 개념이다. 발명가는 새로운 자연 규칙이나 자연 현상을 발견한 대가로 재산권을 받지만, 새로운 사상의 창시자들이 얻는 우선권에는 다른 사람이 그 사상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권리가 포함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다른 지식인으로부터 사상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얻는다. 성공한 지적 혁신가는 '보일의 법칙'과 '푸아송 과정'처럼 자신이 창시한 새로운 사상에 자기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비록 자신의 사상에 대해 재산권을 부여받지는 못하더라도 창시자로서 인정받고 명성을 높일 수 있었다."(281)


"경제학적 논리로 보면 치열한 경쟁과 통합된 시장은 글로벌 슈퍼스타가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을 이루고, 이들 중 몇몇은 문화적 사업가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슈퍼스타는 생산하는 지식이 볼록성(convexity)의 특징을 띠고 생산 비용이 시장 규모에 비례해 증가하지 않을 때 생겨날 수 있다. 이런 조건은 편지 공화국에서 충족되었다. 볼록성이란 한 명의 갈릴레오가 생산하는 지식이 2명의 평범한 과학자가 만들어내는 지식의 총량보다 2배 이상 크고 새로운 지식을 확산하는 한계 비용은 인쇄술의 발전과 정보 제공자, 번역가 그리고 견습생들에 의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의 슈퍼스타를 보고 자란 후배들의 연구가 비록 '정상 과학(normal science)'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회는 독특한 혜택을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슈퍼스타의 명성과 성공은 지적 혁신을 바람직하고 존경받을 만한 업적으로 만들면서 문화적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우상 편향의 원천이 되었다."(296-7)


4부 계몽주의의 서막


"영국 사회에서 청교도주의 문화가 성장한 것은 선택에 의한 사회적 학습의 역사적 사례다. 즉 청교도의 교리가 강렬했거나, 청교도의 리더가 경외심을 주었거나, 또는 청교도의 교리가 그들의 전통에 부합했기 때문에 영국인은 여러 종류의 청교도주의에 끌렸던 것이다. 사실 청교도가 과학 및 기술 발전에 헌신했다는 것 자체는 특이할 게 없다. 과학 및 기술 발전에 대한 관심과 헌신은 유럽의 공통적 현상이었고 영국의 청교도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가톨릭교도와 독일의 루터교도도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과학 발전의 가치가 일치하고 종교적 신념을 수행하는 매력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청교도는 과학이 〈신의 영광을 증명하고 인간의 이익을 증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관심을 가졌다." "중요한 것은 청교도가 실험철학에 깊이 끌렸다는 것이다. 청교도 사상은 실험과학이 기독교적 활동이라는 베이컨의 사상에 바탕을 두었다. 따라서 청교도주의와 과학은 경험주의와 실험주의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다."(316-9)


"찰스 웹스터는 청교도 세계 안에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달랐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런 종파에 상관없이 청교도주의는 베이컨에서 시작해 하르틀리프의 인맥과 '보이지 않는 대학'을 거쳐 결국에는 왕립학회로 귀결되는 지적 사회의 연쇄적 발전을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 고리였다. 영국의 산업 문화의 출현에 대한 합리적이고 정보에 근거한 판단으로 이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마거릿 제이컵은 왕정복고 시대에 〈청교도 과학〉이 〈성공회 과학〉으로 이어졌고, 아이작 뉴턴의 과학을 통해 성숙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청교도주의의 신념과 완전하게 겹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보일, 윌킨스 그리고 레이의 과학에 남아 있는 베이컨과 베이컨학파의 흔적에서 나타나는 영국의 문화적 변화는 18세기 영국 산업계몽주의의 터를 닦았다.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시작해 청교도 과학을 거쳐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곧지는 않을지언정 뚜렸했으며, 문화의 변화가 기술에 끼친 여전히 중요한 방식이었다."(330-1)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영국의 문화적 환경은 기술적 창의성에 더 유리하게 발전했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반국교회 종교였던 유니테리언은 특히 더 두드러졌다. 다시 말하지만 청교도는 대중의 종교가 아니라 엘리트적 현상이었다. 제이컵이 강조한 것처럼 이 종교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사회의 진보를 지지한 이성적이고 계몽적인 신을 믿은 종교로서 이 시대에 특히 더 적합했다. 성공회교는 안정과 조화를 강조했지만 고된 노동의 보상으로 번영과 물질적 부를 약속한 종교이기도 했다. 그리고 창의력은 미덕이자 도덕적이기까지 했다." "무신론 및 반교권주의와 거리가 멀었던 영국의 계몽주의적 종교는 베이컨과 그를 추종한 청교도의 발자취를 따라 기술을 형이상학적으로 발전시키는 전통을 이어갔고, 그에 따른 경제 성장을 미덕으로 여겼다. 청교도주의는 진보적 사회를 신의 의지가 실현된 것으로 보았고, 이런 관점에서 '베이컨 프로그램'의 자연스러운 연속이었다."(340-1)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1세기 전 진보에 대한 영국의 신념은 유럽 대륙보다 현실적이었으며 사회의 지식 계급과 최상류층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신 산업혁명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산업혁명을 이끈 교육받은 사업가, 문자를 읽고 쓸 줄 알았던 정비공, 훈련받은 기술자, 그리고 장인에게까지 확산되면서 사회의 더 깊은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유럽 대륙과 반대로 영국의 교육받는 엘리트는 기존 체제를 반대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도 굳게 지켰다. 영국에서 진보는 사회 혁명을 통해서만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 그리고 제도상의 현실적 개혁이 조금씩 쌓이면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진정한 계몽주의가 존재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18세기에 벌어진 지적 운동엔 단 하나의 프랑스 모형만 존재한다는 가정 아래서만 의미가 있다. 영국의 모형과 프랑스의 모형 사이에는 분명 차이점이 있지만, 오스만 제국과 중국의 지배적인 문화 요소보다는 훨씬 가까웠다."(364)


"낙관주의와 진보에 대한 관념은 18세기 아이디어 시장에서 경쟁한 유일한 문화적 신념은 아니었다. 다양한 유형의 비(非)진보적 사상도 영향력을 키웠다. 여기에는 소멸 직전의 무지몽매한 종교적 반동 세력의 절박한 절규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루소와 비코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단순하고 소박한 시대를 그리워하는 향수(원시주의로 알려진 정서)는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진보에 대한 이 같은 의구심은 틈새 사상에 머물렀다. 스파다포라는 당시 영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만족할 줄 모르는 자신감〉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했다. 지식은 진보의 열쇠였으며, 지식이 성장하는 한 인류의 물질적 조건 역시 성장할 터였다. 영국의 유명한 계몽주의 사상가 이래즈머스 다윈은 1784년 〈지식의 무더기는 ······ 이 지구상에 인간의 발자국이 존재하는 한 절대 멈추지 않고 축적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영국에서 국가 및 지역 단위의 '협회와 학회'를 설립한 목적이었다."(365-6)


"17세기의 아이디어 시장과 문화적 사업가들이 이끈 계몽주의는 복잡하고 이질적이며 종종 서로 상반되는 문화적 신념의 총합이었지만, 동시에 유럽이 경제적 근대성의 특별한 중심부가 될 수 있게끔 만든 문화적 대변화이기도 했다. 유럽 경제 발전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물어보는 경제학자들에게 유럽의 엘리트 문화는 항상 일관된 답을 알려준다. 요컨대 실용 기술의 발전을 중시하는 문화, 사회적 진보에 대한 신념 그리고 유용한 지식이 사회적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열쇠라는 신념이 유럽의 경제 발전을 촉진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신념을 보완한 계몽주의의 또 다른 문화적 요소에는 사회 계약으로서 정치권력, 행정부의 제한된 권력, 표현의 자유, 지적 경합, 종교적 관용, 법으로 인정하는 기본적 인권, 무역은 포지티브섬 게임(positive-sum game)이라는 생각, 경제 활동과 무역에 대한 미덕, 재산권의 신성함 그리고 국가를 사회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로 삼은 중상주의의 우매함이 있었다."(369-70)


"세계의 경제 성장을 이끌고 번영을 불러일으킨 기술 혁명은 장인의 독창성이나 과학적 방법 및 발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 둘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생겨난 결과다. 다시 말해, 이러한 통합이 산업계몽주의의 핵심이다. 유용한 지식을 적용하면서 과학적 원리를 실증적으로 검증하려 했지만, 과학은 기술력이 제공한 도구와 생산의 어려움 그리고 인간의 필요라는 어젠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오일러와 보르다 같은 계몽주의 수학자들은 더 효율적인 수차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르네 리오뮈르를 포함한 박물학자들은 곤충의 행동을 연구해 곤충이 농업에 끼치는 피해를 방지하는 데 기여했고, 위대한 박물학자 뷔퐁은 해군 선함 제조에 사용하는 목재에 대해 연구했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프란츠 에피누스는 전기의 성질을 연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과학과 생산 기술의 결합이 인류에 막대한 혜택을 가져다줄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실제 결과를 보기까지는 수세기를 기다려야 했다."(379-80)


"계몽주의는 데이터(data)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당시 증가하기 시작한 과학과 기술에 대한 연구는 표로 나타낸 자료와 조사, 검사 및 비교를 광범하게 사용했다. 18세기 후반 명제적 지식을 탐구하고 자신의 혁신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는 이들은 수량화와 수학 공식에 크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술을 연구하고 확산시키는 데 정밀하고 효과적인 소통 수단으로서 수학과 도식적 표현을 반겼다." "수학 공식과 수량화는 사실(facts)을 소통하는 데 효율적인 언어였으며, 수학은 (적어도 유용한 지식을 가공 및 적용하려는 지식인 커뮤니티 안에서는) 거의 보편적이었다. 과학적 논란과 그릇된 이론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난무했지만 계산과 수학 공식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더 명확하게 진실로 드러내면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지식의 타당성을 높이는 데 효율적이기에 반드시 필요했다. 이로써 그릇된 이론은 허위라는 게 쉽게 밝혀졌고, 따라서 과학이 만들어낸 지식은 더욱더 탄탄해졌다."(386)


"편지 공화국이 엘리트 현상이었던 것처럼 산업혁명의 기술적 추진력은 소규모 선택된 집단이 움직인 결과였다. 소수의 핵심 발명가들이 산업혁명을 손수 이끌다시피 했다는 칭송으로 가득한 터무니없는 빅토리아 시대의 위인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날의 몇몇 경제사학자들은 대부분의 인구가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기술 지식에 접근할 수 없었다면, 그리고 수준 높은 인적 자본이 풍부하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새로운 기술의 등장과 확산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정반대 주장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진실은 그 중간쯤에 있다. 산업혁명 시대의 기술 발전은 교과서에 나오는 소수의 대가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엘리트 현상이 아니라, 인적 자본의 최상위에 위치한 이런 발명가들이 설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준 수 천 명의 훈련받은 엔지니어, 능력 있는 기술자 그리고 손재주 좋은 장인이 함께 이끌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산업혁명 당시의 기술 발전은 분명 '그들만의 리그(minority affair)'였다."(391-2)


5부 동서양의 문화 변화


"지적 엘리트들의 선택에 의한 문화적 진화는 제도적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며, 그럼으로써 다시 이런 제도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다. 여기서 우리가 다뤄야할 질문은 〈왜 중국은 실패했는가?〉(중국은 실패하지 않았다)나 〈왜 중국은 더 많은 기술 발전을 이뤄내지 못했는가?〉(중국은 많은 기술 발전을 이뤄냈다)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근대 초기(1500~1700)로 알려진 시기에 유럽과 중국은 현대까지 지속된 기술과 경제의 커다란 격차가 생길 만큼 왜 달랐는가이다. 다시 말하지만, 중국이 잘못했다기보다 유럽에서만 계몽주의로 이어진 지적 변화라는 일련의 특이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유럽 계몽주의의 독특한 힘은 유럽뿐 아니라 지구상 모든 구석구석에 영향일 끼쳤다. 제임스 블로트나 잭 구디 같은 수정주의 학자들이 아무리 강하게 주장하더라도, 유럽과 중국의 이런 격차를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유럽중심주의라는 주장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407-8)


"유럽의 계몽주의는 근대인과 고대인의 싸움에서 그들 세대가 과거 세대보다 우월한 문화와 지식의 총체를 창출했고, 이것이 더 나은 세계로 이끄는 관문이라고 굳게 믿은 근대인이 거둔 승리의 결과였다. 이것과 비슷한 일이 동양에서도 일어났을까? 기독교 교회나 이슬람 정부 같은 강력한 종교 단체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고대인'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기원전 475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계속된 전국 시대에 중국은 공자를 비롯해 맹자와 순자 등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문화적 사업가를 배출했다. 그들의 유산은 중국 문화의 중심축이 되었다." "훌륭한 사적(史的)유물론자인 니덤은 중국 사회에 내재해 있던 자연 항상성(spontaneous homeostasis)은 무엇보다 농업과 대규모 관개 수로를 통제하고 이끌어야 할 필요성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이디어 시장에서 비롯된 어떤 결과와 마찬가지로 보수적 이념이 거둔 성공의 일부는 우연이었다고 봐야 한다."(409-10)


"지적 혁신은 성리학에 의해 큰 제약을 받았다. 성리학에 도전했던 학자들은 성리학이 관찰과 실험에서 도출된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고전적인 유교 사상과 부합하지 않을 때에만 논쟁을 했다." "명·청 시대에도 분명 아이디어 시장은 존재했다. 하지만 진입장벽이 높고 지적 혁신가의 경쟁은 기득권에 우호적으로 편향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게 종교 재판도 없고 유럽에서처럼 신성모독이나 독성죄도 없던 땅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제도가 근대 초기 유럽에서 급증한 것은 지적 기득권이 (정당하게) 스스로 위험에 처했음을 느꼈다는 반증이다. 중국에서 예수회의 활동은 황제의 의중에 따라 통제되고 제약을 받았다. 첸원위안은 조금 과장을 섞어 명·청 시대 중국 과학자들은 〈문헌적 및 고고학적 연구〉에 전적으로 매몰되었고, 중국인은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자신들의 과거에 집착했다고 주장했다."(411-2)


"명·청 시대의 중국 경제는 점차 비효율적으로 변한 정부로 인해 고통을 받기는 했어도 분명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장의 상업 경제를 권장한 상의하달식 행정 체계를 갖추었다. 아울러 행정부는 중앙 집권화한 제국의 관료 체제였지만 경제는 분산적인 시장 경제였다. 하지만 중국은 가장 능력 있는 인재와 군인을 발탁하기 위해 이웃 국가와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안정성과 평화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되는 가치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지적 안정성도 포함되었다. 12세기 주희의 성리학 해석이 들어간 사서는 중국의 엄격한 철학적 교리가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이단적·인습 타파적 지식인들이 16~17세기 초 유럽의 통념을 뒤엎은 라무스, 코페르니쿠스, 베이컨 등에 필적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유럽과 달리 중국에서는 이단적 지식인과 지적 혁신가가 경쟁적이고 개방적인 아아디어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이용할 정치적 다원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414)


"중국 사회에 만연한 보수주의는 결코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니다. 모든 사회는 공통적으로 과거의 지혜를 우러러봤으며, 따라서 이상한 것은 중국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효 기간이 끝난 오래된 아이디어를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유럽인의 사고 체계였다. 유럽에서 과거의 지혜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유럽의 경제·사회적 환경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많은 고대 사상이 근거와 논리의 시험대에 올라 사실이 아니거나 일관성이 없거나 아니면 증명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럽인이 관찰한 실험, 계산에 더 능숙해질수록 고대의 지식에 대한 권위는 더욱 떨어졌다. 유럽의 깊은 회의주의는 진보에 대한 신념의 뒷면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문화에도 이런 신념이 있었을까?" "니덤은 진보에 대한 중국인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명나라 시대 이전의 중국 문헌에서 찾았는데, 이런 신념은 유럽에서 서서히 등장해 승리할 무렵 중국에서는 시들어가고 있었다."(423-4)


"유용한 지식의 접근 비용을 현저하게 낮춰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할 목적으로 만든 유럽의 백과사전은 산업계몽주의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백과사전 같은 총서는 하나의 출판물에 많은 지식을 분류하고 체계적으로 담아 그걸 사용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배포하려는 열망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총서는 현재 기준으로 축적된 지식을 짤막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꾸준하게 최신 정보로 갱신하지 않으면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백과사전은 출간과 동시에 옛 지식이 되었고 재빠르게 새로운 지식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런 참고 도서가 고위 관리라는 협소한 집단에게만 한정되었다. 가령, 1313년 완성한 왕정의 《농서(農書)》는 유럽 계몽주의의 최고 저술들을 무색케 할 정도로 뛰어나다. 이 책에는 300여 개 넘는 도구와 농기계 삽화가 있는데, 그 삽화만 보고도 실제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매우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1530년경 《농서》는 중국 전역에 단 한 권만 남았다."(454-5)


"17~18세기의 계몽주의에 대응하는 중국의 학문적 운동으로 '근거에 의한 연구'인 고증학이 있었다. 고증학파는 타성적인 관념론과 도덕을 논쟁 대상에서 제외하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구체적 사실과 엄격한 증거를 토대로 실증적 학문을 연구했다. 이 시대 중국의 학풍은 〈본질적으로 과학 연구에 반감을 갖지 않았고 새로운 사상에 저항하지도 않았다.〉 고증학은 폭넓은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모든 주장에 근거와 증거를 요구하면서 맹목적 믿음과 근거 없는 추측을 피했다. 고증학은 매우 유망해 보였지만 결국은 유럽과 다른 결과로 이어졌다. 중국 학자들은 주로 문헌학과 언어학 그리고 역사학에 관심을 보이면서 〈고대의 현자들이 진실로 뜻한 바와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현세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갖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더욱이 유럽 계몽주의와 달리 중국의 고증학 운동은 대부분 물질적 발전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고위 관료이자 성리학자들에 의해 이뤄졌다."(441)


"만약 중국이 서양의 문화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장기적으로 중국의 유용한 지식이 어떻게 진화했을지 그리고 중국이 유럽의 산업계몽주의와 비교할 수 있는 물질적 문화를 창출했을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중국의 계몽주의─이것이 올바른 용어인지는 모르겠지만─가 유럽의 계몽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중국 학자들은 유용한 지식에 대한 연구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대신 (간단명료하게 말해서) 〈문화적 가치를 실천하면서 살았을 뿐〉이다." "중국의 학풍은 거의 대부분 과거 회고적이었다. 중국 지식인이 한 것처럼 옛 현자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들이 쓴 글에 주해를 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학문이지만, 세계 역사를 바꿀 만한 기술 발전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국의 경험을 '실패'라고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일은 예외적이고, 정말 특이한 사건이었다."(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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