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 모비딕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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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쇼크 독트린의 전개방식은 대강 이렇다. 우선 쿠데타, 테러리스트의 공격, 시장 붕괴, 전쟁, 쓰나미, 허리케인 등의 재난이 국민들을 총체적으로 쇼크상태로 몰아넣는다. 쏟아지는 폭탄, 계속된 공포, 몰아치는 비바람은 사회를 약하게 만든다. 마치 고문실에서 시끄러운 음악과 구타가 죄수들을 약하게 만들 듯 말이다. 공포에 질린 죄수들은 동지의 이름을 대고 자신의 과거 신념을 비난한다. 마찬가지로 충격에 빠진 사회는 이전에 강력하게 보호했던 것들을 포기한다.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 구호소의 자마르 페리와 동료 재해민들은 공영주택 프로젝트와 공립학교를 포기해야만 했다. 쓰나미 이후 스리랑카의 어민들은 호텔리어들에게 자신들의 소중한 해변을 내주어야 했다. 모든 것들이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다면, 충격과 공포를 느낀 이라크인들은 석유매장지, 공기업, 주권에 대한 통제권을 미군기지와 그린존(Green Zone)에 넘겨주었을 것이다."(28-9)


1부 두 명의 쇼크요법 전문가: 연구개발자들


"미국의 심리학자 이언 캐머런은 환자들에게 올바르고 새로운 행동을 가르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마음 내부로 들어가 ‘오래된 병리적 패턴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첫 단계는 '기존 패턴 파괴'로, 마음을 초기 상태로 돌려 놓으려는 엄청난 목적을 띠고 있다. 캐머런은 두뇌의 정상적 기능을 방해하는 각종 조치(약물 주입, 전기 쇼크 등)를 취함으로써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도 단번에 즉각적으로 말이다. 요컨대 마음에 '충격과 공포'를 가하는 것이다." "1950년대 중반에 냉전의 병적 광란이 시작될 무렵, CIA 연구원들은 캐머런의 방법에 흥미를 가졌다. CIA는 '특별 심문기법' 연구라는 비밀 프로그램을 개시했다. 비망록에 따르면, 〈여러 특별 심문기법들을 검토하고 연구했다. 그 가운데는 심리적 모욕, 완전 고립, 약물이나 화학물질의 사용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처음엔 프로젝트 블루버드로 불렸다. 그 후 프로젝트 아티초크로 변경되었다가, 1953년에 MK울트라로 이름을 바꾸었다."(45-8)


"시카고학파가 가르치는 핵심은 공급, 수요, 인플레이션, 실업 등의 경제적 동인은 자연의 힘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고정적이고 바뀌지 않는다. 시카고학파의 교과서에서 상상하는 진정한 자유시장에서는 이러한 힘들이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달이 조류를 잡아끌듯, 공급이 수요와 의사소통을 한다.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어려워질 경우를 생각해보자. 프리드먼의 엄격한 통화주의 이론에 따르면, 그 원인은 시장 스스로 균형을 찾게 놔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방향을 잘못 잡은 정책 입안자들이 너무 많은 돈을 시장 시스템에 투입했기 때문이다. 생태계의 자기조절과 마찬가지로, 시장은 작동 기제에 모든 것을 그냥 맡겨놓으면 알아서 스스로 균형을 맞춘다. 적절한 가격에 적절한 물량의 상품이 생산된다. 그리고 물건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그런 물건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적절한 임금을 받는다. 한마디로 일자리가 넘쳐나고, 끝없는 창조성이 발휘되며, 인플레이션이 없는 에덴동산이다."(70)


"1940년대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자 돈 파틴킨은 이렇게 회상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많은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던 마르크스주의 요소와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시카고학파는 명쾌한 논리적 완결성과 간결함이 어우러졌으며, 급진주의와 이상주의가 혼합되어 있다.〉 즉 마르크스주의자가 노동자들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면 시카고학파는 기업가의 유토피아를 꿈꾼 셈이다. 두 사상 모두 자신의 방법대로만 한다면 완벽함과 균형이 따라온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시카고학파의 임무는 자본주의의 순수화였다. 그들은 시장에서 방해요소들을 제거해 자유경제를 번영시키려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시카고학파는 마르크스주의를 진짜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미국의 케인스학파 사상,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당시 제3세계라 불리던 지역의 발전주의였다. 이들은 혼합경제를 믿는 신도들이었다. 시카고학파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자본주의 개혁을 원했다."(73-4)


2부 첫 번째 테스트: 출산의 진통


"경제적 쇼크요법 이론은 인플레이션 과정을 좌우하는 기대(expectation)의 역할에 의지한다. 즉 인플레이션 통제는 통화정책만이 아니라 소비자, 고용주, 노동자의 행동을 바꾸어야 가능하다.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인 정책 전환은 대중에게 게임의 규칙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알리며 사람들의 기대를 교정할 수 있다. 그러면 가격과 임금은 더 이상 오르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인플레이션이 가라앉을 거라는 기대가 빠를수록 경기침체와 고통스런 고실업 기간도 짧아진다. 그러나 대중이 정치권을 신뢰하지 않는 국가의 경우엔 단호한 다량의 쇼크만이 국민들에게 가혹한 교훈을 '가르칠' 수 있다. 침체 또는 퇴행을 야기하는 정책은 극심하고 대대적인 빈곤을 불러오는 잔인한 발상이다. 그런 이유로 이 이론을 기꺼이 시험해보려는 정치 지도자는 이제까지 전혀 없었다. 「비즈니스위크」가 말한 '고의적으로 경기침체를 야기한 이상한 세상'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그러나 칠레의 피노체트는 정말로 그렇게 했다."(110)


"자유시장 치어리더들의 주장과 달리, 칠레는 결코 '순수한' 자유시장의 실험실이 아니었다. 소수 엘리트들이 짧은 시간에 부자에서 엄청난 부자로 올라선 국가일 뿐이었다. 빚을 지고 공공자금으로 보조금을 받는 식으로(나중에는 구제금융 형식으로) 고수익을 냈을 뿐이다. 경제 기적 이면에 숨겨진 사기와 판매상술이 드러났다. 결국 피노체트와 시카고 보이스가 장악한 칠레는 개방된 시장의 자본주의 국가가 아닌 조합주의 국가였다. 조합주의는 원래 사회의 세 권력원인 정부, 산업, 노조의 연맹체로, 경찰국가가 운영하는 무솔리니의 모델이었다.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해 모두 협력해야 한다. 칠레가 피노체트 아래에서 선구적으로 시도한 것은 바로 조합국가의 혁명이었다. 경찰국가와 대기업이 지원동맹을 맺은 뒤, 세 번째 권력인 노동자들과의 전쟁에 나선 나선 것이다." "쇼크요법은 말 그대로 쇼크를 주었다. 부를 상류층에 몰아준 반면 중산층은 아예 사라지게 만들었다."(114-5)


"국가가 공포를 조장하는 경우에 대부분 그러하듯, 표적 살해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먼저, 경제 프로젝트의 걸림돌이자 가장 저항이 심한 사람들을 제거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이러한 말썽꾼들의 실종은 저항을 염두에 둔 사람들에게 가장 확실한 경고가 된다. 따라서 미래의 걸림돌도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를 거두었다. 〈국민들은 당황하고 고뇌하고 온순해졌으며,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퇴행한 것이다. 그들은 의존적인 데다 두려움에 떨었다〉라고 칠레의 심리학자 마르코 안토니오 데 라 파라가 회상했다. 그래서 경제적 충격으로 물가가 치솟고 임금이 떨어져도, 칠레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거리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식료품 폭등이나 일반 파업도 전혀 없었다. 가족들은 자주 끼니를 거르고, 전통차로 아이의 배고픔을 달랬고,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동트기 전에 일터로 나서는 식으로 생계를 꾸렸다. 영양실조나 장티푸스로 사망한 사람들은 조용히 묻혔다."(147)


3부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민주주의: 법으로 만든 폭탄들


"리처드 닉슨이 1969년에 취임했을 때, 프리드먼은 뉴딜의 잔재에 맞서 반혁명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시카고 대학의 교수인 조지 슐츠는 프리드먼의 도움으로 닉슨 행정부에 임용된 사람이다. 또 다른 이로는 당시 서른일곱 살이었던 도널드 럼즈펠드가 있다." "그러나 1971년에 미국 경제는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했다. 실업률이 치솟고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높아졌다. 닉슨은 프리드먼의 자유방임주의 조언을 따를 경우, 수백만 명의 성난 시민들이 투표를 통해 자신을 물러나게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임대료나 기름값처럼 생활의 기반이 되는 가격들의 상한폭을 규제했다. 이에 프리드먼은 격노했다. 정부의 왜곡 조치들 가운데 가격 통제가 최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경제 시스템의 작동 기능을 파괴하는 암적 요소'라고 불렀다. 더욱 모욕적이게도, 케인스식의 정책을 실시한 것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이것은 프리드먼에게 가장 쓰라린 상처가 되었다."(175-6)


"닉슨의 통치는 프리드먼에게 분명한 교훈이 되었다. 시카고 대학의 교수는 자본주의와 자유가 같다는 전제하에서 시카고학파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 시민들은 그의 조언을 따르는 정치인을 선출하지 않았다. 더욱 좋지 않은 소식은 순수한 시장경제 독트린을 실행하려는 정부는 독재국가들뿐이라는 점이다. 시카고학파는 국내에서 당한 배신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리고 1970년대 내내 군부정권들과 손을 잡았다. 우익 군사독재가 권력을 잡은 곳이라면 거의 어디에서나 시카고 대학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하버거는 1976년 볼리비아 군부정권의 자문으로 일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대학들이 군부의 통제를 받고 있던 1979년에 아르헨티나 투쿠만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 더 멀리 나아가, 그는 인도네시아 수하르토와 버클리 마피아에게도 조언을 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시장경제로 전환할 때 경제자유화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었다."(176-7)


"1982년 4월 2일 시작된 포클랜드 전쟁은 역사적으로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서구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최초로 급진적 자본주의 개혁 프로그램을 실시할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영국의 대처는 포클랜드 승리와 광부들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바탕으로 급진적인 경제 논의로 넘어갔다. 1984~1988년 영국 정부는 텔레콤, 가스, 항공, 항공 통제시설, 철강을 민영화했다. 그리고 영국 석유공사의 지분을 매각했다. 2001년 9월 11일 일어난 사건은 인기 없는 한 대통령에게 대규모 민영화계획을 실시할 기회를 주었다(부시는 안보, 국방, 재건 분야를 민영화했다). 이와 비슷하게, 대처는 전쟁을 이용해 처음으로 대규모 민영화를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진짜 조합주의 작전이었다. 포클랜드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용한 대처는 시카고학파 프로그램을 펼치기 위해서 반드시 군사독재나 고문실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첫 번째 명확한 증거였다."(184)


"1985년, 볼리비아는 당시 하버드 경제학부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제프리 색스에게 인플레이션 대처 방안을 요청했다." "색스는 (급격한) 가격인상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종식시킨다고 예측했다. 그것은 정확한 지적이었다. 2년이 지나자 인플레이션은 10퍼센트로 떨어졌다. 어떤 기준에서 봐도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경제학자들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치명적인 것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인플레이션 조정은 상당한 고통이 수반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논쟁의 주안점은 신뢰할 만한 프로그램을 어떻게 달성할지, 과연 누가 그러한 고통을 참아내야 할지였다. 리카르도 그린스펀의 설명에 따르면, 케인스나 발전주의식 접근법은 주요 행위자인 정부, 노동자, 농부, 노조 간의 협상을 통해 부담을 나눈다. 또한 임금이나 물가처럼 수입 관련 정책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내면서, 동시에 안정화 조치를 실시한다. 〈반대로 시카고학파 정설은 쇼크요법을 통해 모든 사회적 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과한다.〉"(196-7)


"단지 가난한 국가에서 인플레이션을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색스가 칭송을 받는 건 아니다. 많은 이들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전쟁 없이 급진적 신자유주의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색스가 그러한 일을 해낸 것이다. 대처나 레이건이 시도한 것보다 더욱 전면적인 변화였다. 색스는 그러한 업적의 역사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생각으론 경제적 변혁과 민주적 개혁의 혼합은 볼리비아가 최초일 겁니다.〉 몇 년이 흘러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자유화와 민주주의가 경제 자유화와 혼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칠레보다는 볼리비아가 잘 보여주었습니다. 두 요소가 상호작용하며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이 중요한 교훈입니다.〉 칠레와의 비교는 우연이 아니었다. 10년 전에 프리드먼이 산티아고로 운명적인 여행을 떠난 이래, 쇼크요법은 늘 독재와 죽음의 캠프라는 악취를 풍겼다. 이제 색스 덕분에 그러한 악취를 떨칠 수 있게 되었다."(199-200)


"세계은행과 IMF는 제2차 세계대전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경제쇼크와 붕괴를 방지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두 기관은 보편적인 미래상에 부응하지 못했다." "1980년대 초반에 개도국은 매우 절박한 상태였다. 기세가 등등해진 IMF는 급진적인 자유시장에 대한 요구를 내놓았다. 위기에 처한 국가들이 채무탕감과 긴급 차관을 요청하자, IMF는 전면적인 쇼크요법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대니 로드릭은 (민영화와 자유무역이 핵심인) '구조조정' 전체를 하나의 뛰어난 마케팅 전략이라고 말한다. 〈세계은행은 구조조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성공적으로 마케팅했다.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적인 개혁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위기로부터 경제를 구하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과정인 구조조정은 마치 상품처럼 팔렸다. 각국 정부들은 구조조정이라는 패키지 상품을 구입했다. 때문에 외적 균형과 가격 안정을 위한 건전한 미시경제정책과 자유시장 같은 개방성을 강조하는 정책을 구별해내기가 힘들다.〉"(213-6)


4부 전환 과정에서 길을 잃다: 흐느끼고 전율하고 몸부림친 순간


"IMF와 미국 재무부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뒤의) 폴란드 문제를 쇼크 독트린의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았다. 경제 파탄과 심각한 재무 부담에다 갑작스런 체제 변화의 혼란까지 더해진 상황이었다. 즉 폴란드는 급진적인 쇼크요법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기 딱 좋은 취약한 상태가 된 것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걸려 있는 판돈은 남미보다 더 크다. 소비자 시장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동유럽은 서구 자본주의에서 비켜나 있었다. 때문에 가치 있는 자산들은 여전히 국가 소유여서, 민영화로 전환하기 가장 좋은 후보들이었다. 그것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서른네 살이었던 제프리 색스는 자유노조의 자문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단 하룻밤 사이에 가격 통제를 철폐하고 보조금을 대폭 삭감했다. 색스 플랜에 따르면, 국영 광산, 조선소, 공장들을 사기업에 매각해야 했다. 자유노조의 노동자 오너십 경제 프로그램과는 정반대였다."(232-3)


"1989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프리드먼의 이론을 과감히 새로운 영역으로 가져갔다. 〈정치 영역의 자유민주주의와 합쳐진 경제 영역의 규제 없는 시장은 인류의 역사적 진화에서 종착점을 의미한다. (중략) 한마디로 정부의 최종 형태다.〉 민주주의와 급진적 자본주의는 서로 함께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성, 진보, 개혁과도 융화되어 있다. 후쿠시마의 표현에 의하면, 이러한 융합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역사 속에 있는 사람이다." "1989년, 역사는 멋진 전환점을 맞이해 진정한 개방성과 가능성의 시대로 들어섰다. 국무부의 후쿠야마가 그 순간을 이용해 역사책을 닫고자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세계은행이나 IMF가 불안정한 시대를 골라 워싱턴 컨센서스를 드러낸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자유시장이론이 아닌 다른 경제사상에 관한 논쟁이나 토의는 모두 종식시키려는 시도였다. 즉 예기치 못하게 등장한 자기결정권을 미연에 처리하기 위해 고안된 민주주의 봉쇄 전략이었다."(241-2)


"후쿠야마는 민주주의 개혁과 자유시장 개혁은 분리할 수 없는 쌍둥이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담한 발언이 먼저 무너진 곳은 중국이었다." "프리드먼이 내린 자유의 정의에 따르면 규제 없는 교역의 자유에 비해 정치적 자유는 부수적인 것이다. 심지어는 불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 당국이 짜놓은 미래상과 잘 어울리는 주장이었다. 중국 당국은 사적 소유와 소비주의에 경제를 개방시키길 원하면서도, 정치권력은 그대로 쥐고 있으려 했다. 국가자산을 경매에 내놓을 때 당 간부들과 친척들에게 가장 좋은 거래를 넘겨 줄 계획이었다. 아마 가장 큰 이윤이 떨어지는 줄에 세울 게 분명했다. 이러한 전환의 구상에 따르면, 공산주의에서 국가를 통제하던 사람들은 자본주의로 바뀌어도 여전히 국가를 통제할 수 있다. 그것도 상당한 생활수준 향상을 누리면서 말이다. 중국 정부의 모델은 미국이 아니었다. 바로 권위주의적 정치통제와 결합한 자유시장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던 피노체트 체제였다."(242-3)


"만약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제3의 길이 있다면, 바로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지배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그 영원한 꿈을 현실로 만들 위치에 있었다. 한마디로 국가를 민주화하는 동시에 부를 재분배하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만델라에게 존경과 후원을 보냈다 게다가 반(反)아파르트헤이트 투쟁도 도움이 되었다. 1980년대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은 세계적인 대중운동이 되었다." "덕분에 ANC는 당시의 자유시장 교리를 거절할 기회를 얻었다. 아파르트헤이트 범죄에 기업들의 책임도 있다는 공통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심 경제 분야를 자유헌장의 요구대로 국유화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자리가 마련된 셈이다. 또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채무는 국민이 선출한 신정부에 적법하지 못한 부담이라는 점도 설명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독자적인 행동에 IMF, 미국 재무부, 유럽연합은 상당한 분노를 표했을 것이다."(258-9)


"아파르트헤이트를 끝내는 조건의 협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정치적인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자연히 대부분의 관심은 만델라와 국민당의 지도자 데 클레르크 간의 고위급 정치회담에 쏠렸다." "데 클레르크 정부는 협상에서 이중 전략을 취했다. 우선 경제를 운영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어버린 워싱턴 컨센서스에 의지했다. 그러면서 무역정책이나 중앙은행 같은 경제정책 입안의 핵심을 '기술적인' 또는 '행정적인' 문제로 표현했다. 또한 국제무역협정, 헌법변경, 구조조정 프로그램 같은 폭넓고 새로운 정책 도구들을 사용했다. 자칭 공정하다는 전문가, 경제학자, IMF 관리, 세계은행 관리, 관세무역일반협정(GATT) 그리고 국민당의 손아귀에 중요한 권력기관을 넘기기 위해서였다. ANC의 해방운동 전사들만 달랑 소위시킨 채 말이다. 한마디로 발칸화(서로 적대적이거나 비협조적인 여러 개의 지역으로 분열시키는 것) 전략이다. 지정학적 측면이 아니라 경제학적 측면에서 말이다."(260-1)


"토지를 재분배하고 싶은가?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마지막 순간에 협상가들이 신헌법에 모든 사적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토지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실직 노동자 수백만 명에게 일자리를 창출해주고 싶은가? 그것도 불가능하다. 수백 개의 공장들은 사실상 파산상태였다. ANC가 세계무역기구 WTO의 전신인 GATT에 서명한 탓에 자동차 공장과 직물 공장에 보조금을 주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 에이즈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흑인 거주지구에 무료로 에이즈 치료제를 나누어주고 싶은가? 그러면 WTO의 지적재산권 조항을 위반하게 된다. GATT의 연장인 WTO에는 국민과의 토론도 없이 가입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보다 넓은 주택들을 더 많이 짓고, 흑인 거주지구에 무료로 전기를 제공하고 싶은가? 불행히도 예산은 아파르트헤이트 정부가 남겨놓은 대규모 채무상환에 쓰이고 있다." "남아공은 자유로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포로로 잡힌 신세였다."(264-5)


"1991년 후반, 옐친은 의회에서 이례적인 제안을 했다. 1년 동안만 자신에게 특별권력 행사권을 부여해달라는 것이다. 즉 법안을 의회에서 상정해 통과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법령으로 발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경제 위기를 해결하고, 번영을 누리는 건전한 시스템으로 되돌리겠다고 말했다. 옐친이 요구한 것은 민주주의자가 아닌 독재자들이 누렸던 집행권이었다. 그러나 의회는 쿠데타 시도를 막아준 대통령에게 여전히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는 외국의 원조를 절실하게 원했다. 따라서 대답은 '예스'였다. 옐친은 러시아의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1년 동안 절대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즉각 경제학자들로 팀을 구성했다. 상당수는 공산주의 말년에 자유시장 독서클럽을 결성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시카고학파 사상가의 기본서를 읽고, 러시아에 어떤 식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 논의하곤 했었다. 프리드먼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들은 진짜 시카고 보이스들보다 더욱 철저했다."(288)


"러시아에서 쇼크요법 열의는 최고조에 달했다. 옐친은 민주주의를 닮은 건 뭐든지 가혹하게 파괴했다. 그런데도 서구는 그의 통치를 '민주주의 전환'의 일부로 보았다. 푸틴이 몇몇 과두재벌들의 불법적 활동을 처단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찬가지로 부시 행정부는 항상 이라크를 자유로 가는 여정에 있다고 표현했다. 공공연한 고문, 무법자 같은 죽음의 부대, 언론 검열이 만연하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데도 말이다. 한편 러시아의 경제 프로그램이 항상 '개혁'으로 묘사되었듯이, 이라크는 여전히 '재건' 중이라고 표현된다. 이라크의 폭력 사태가 급증하자 미국 계약업자들이 모두 내빼서 기반시설이 누더기 상태인데도 말이다. 러시아에서 1990년대 중반 '개혁가들'의 지혜에 감히 의문을 품는 자는 스탈리 시대에 대한 향수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이라크 점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사담 후세인 체제의 삶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는 비난을 수 년 동안 받아왔다."(310-1)


"아시아의 위기는 전형적인 공포의 악순환 때문이었다. 공포를 잡을 유일한 방안은 1994년 테킬라 위기 때 멕시코의 환율을 구했던 조치와 같았다. 간단히 말해 즉각 신속하고 단호하게 제공된 차관뿐이었다. 그러한 시기적절한 조치가 아시아의 앞날엔 없었다. 사실 위기가 닥치자마자 놀랍게도 영향력 있는 재정기관들은 단합된 목소리를 냈다. 요컨대 아시아를 돕지 말라는 것이었다." "1997년, 단기자본의 물결이 아시아에서 이탈한 것은 서구의 압력으로 합법화된 투기성 투자의 직접적 결과였다. 물론 월스트리트 최고의 투자 분석가들은 위기를 기회로 보았다. 아시아 시장을 보호하는 남은 장벽들을 단번에 제거할 기회 말이다. 모건스탠리의 전략가 펠로스키가 특히 그러한 생각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위기가 심해지도록 놔두면 아시아에서 외국 통화는 완전히 고갈될 것이다. 곧 아시아의 회사들은 문을 닫거나, 아니면 서구 회사들에 매각되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모건스탠리에게는 이득이다."(341-4)


"아시아의 붕괴를 거창한 용어로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호세 피녜라의 눈에 비친 위기는 1970년대 그와 동료 시카고 보이스들이 칠레에서 시작한 전쟁의 마지막 장이었다. '자유시장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 국가주의 사이에 제3의 길이 있다는 생각'의 붕괴라는 것이다." "앨런 그린스펀은 위기를 미국식 시장 시스템의 합의로 가는 극적인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현재의 위기 때문에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정부 주도 투자 시스템의 잔재를 제거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아시아의 관리된 경제가 파괴되는 과정은 바로 새로운 미국 스타일의 경제가 창출되는 과정과 같았다. 몇 년 후에 나온 더욱 폭력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아시아를 위한 출산의 고통이었다." "미셸 캉드쉬 IMF 총재의 흔치 않은 인터뷰에 따르면, 위기는 아시아가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롭게 태어날 기회였다. 〈경제적 모델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유용할 때도 있지만 낡아서 폐기해야 할 때도 오지요.〉"(344)


"1998년 이후부터 평화적 수단으로는 쇼크요법 스타일의 개조가 어려워졌다. 무역 정상회담에서 IMF의 괴롭힘이나 강압이 잘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남반구의 새로운 저항 분위기가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9년, 시애틀에서 WTO 회담이 실패했을 때, 많은 언론들은 대학생 연령의 시위자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진짜 반란은 회의센터 내부에서 일어났다. 개도국들은 서로 단결해서 의결권 블록을 형성했다. 유럽과 미국이 계속해서 자국 산업에 보조금을 주고 보호하는 한 더 많은 무역 양보를 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적수가 될 만한 사상이나 반대 세력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었던 자본주의의 독점 시기는 아주 짧았다. 1991년 소련의 붕괴부터 1999년 WTO 협상 결렬까지 겨우 8년 정도다. 그러나 반대 세력의 출현도 엄청난 이윤의 경제적 의제를 전개하려는 의지를 막지 못했다. 자유시장 지지자들은 전보다 더욱 큰 충격이 만들어낸 공포와 혼란의 흐름에 금세 올라탔다."(359)


5부 충격의 시기: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의 부상


"1990년대에 많은 회사들은 전통적으로 상품을 제조하고 안정적인 대규모 노동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키 모델로 알려진 방식을 수용한다. 공장도 없이 계약업자 및 하위 계약업자의 복잡한 망을 통해 물건을 생산한다. 그리고 본사는 디자인과 마케팅에 모든 자원을 쏟아 붓는다. 한편 다른 대안인 마이크로소프트 모델을 선택한 회사들도 있었다. 회사의 '핵심 경쟁분야'를 담당하는 직원들과 주주들이 치밀하게 짜인 통제센터를 유지한다. 대신에 우편물 처리부터 코드작성 등의 작업은 임시직에게 하청을 준다. 이렇게 재조직된 회사들을 '공동기업(hollow corporation)'이라고 부른다. 눈에 보이는 실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방장관 럼즈펠드 역시 대규모 정규군 대신에 핵심 인력을 선호했다. 이는 배후에서 예비군과 국가수비대 같은 싼 임시직 군인들이 지원해주는 시스템이다. 블랙워터와 핼리버튼 같은 계약업자들은 위험한 운전 업무, 죄수 심문, 물자 수송, 의료 서비스를 맡았다."(365)


"1990년대 무렵, (군대, 경찰, 교육 같은 국가의) 핵심 기능은 민영화 대상이 아니라는 금기를 깨뜨리려는 강력한 움직임이 있었다. 여러 면에서 봤을 때, 그것은 현상 유지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러시아의 석유매장지, 남미의 텔레콤, 아시아의 산업은 1990년대 주식시장에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그러한 경제적 역할을 미국 정부가 하고 있었다. 개도국 사이에 민영화와 자유무역에 대한 반발이 급격하게 퍼지는 바람에, 성장의 또 다른 수입원이 차단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쇼크 독트린을 자기중심적인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이제껏 재난과 위기는 급격한 민영화계획을 추진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재난을 창출하거나 그에 대처하는 힘을 가진 군대, CIA, 적십자사, 유엔, 재난 '응급대처' 기관들은 공공부문의 마지막 보루였다. 기업들은 이런 핵심 분야를 먹어치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연마해온 위기 이용방식을 지렛대로 삼아 민영화를 시도하려 했다."(369-70)


"1995년, 백악관에 클린턴 정부가 있을 당시 핼리버튼은 딕 체니를 새로운 사장으로 영입했다." "서비스 경제를 정부의 심장부로까지 확장시키는 것은 체니에겐 익숙한 일이다. 1990년대 후반, 그는 미군기지를 핼리버튼이 건설한 교외 지역처럼 바꾸어놓았다. 아내 린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방위계약업체 록히드마틴의 이사로 일하며 임금과 스톡옵션을 받고 있었다. 린은 1995~2001년 록히드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때는 회사의 중요한 전환기였다. 냉전 종식 후 방위비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회사들의 수입은 대개 정부와의 무기계약에서 나온다. 따라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했다. 마침내 록히드 같은 군수물자업체들은 새로운 업무를 공격적으로 추진할 전략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정부를 관리하고 비용을 받는 것이었다." "딕 체니가 해외에서 핼리버튼을 통해 군대 기반시설을 운영하는 동안 린은 국내에서 정부의 일상적 운영업무를 관리했다."(373-6)


"9·11 테러 사건의 안보 실패는 공공부문 축소의 의지를 흔들기는커녕, 오직 사기업만이 새로운 안보 난제에 맞는 지력과 혁신을 갖추었다는 이념적 (그리고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신념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백악관은 납세자들이 낸 막대한 세금을 경제부양에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분명 루스벨트 대통령의 모델은 아니었다. 부시의 뉴딜정책은 오직 미국 기업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한 해에 수천 억 달러의 공적자금이 사기업들에게 전해졌다. 많은 경우 은밀히 제의된 계약 형태였으며, 경쟁이나 감찰도 없었다. 관련 산업네트워크는 테크놀로지, 언론, 커뮤니케이션, 교도소사업, 엔지니어링, 교육, 의료 분야까지 점점 확대되었다. 돌이켜보면 테러로 대중이 정신을 못 차릴 때를 틈타 경제 쇼크요법이 미국 내에 실시된 것이다. 철저한 프리드먼 성향인 부시팀은 국가에 퍼진 공포를 즉각 이용해, 전투부터 재난 구조까지 모든 것을 영리 추구 사업으로 보는 공동 정부의 꿈을 추진했다."(381-2)


"부시팀은 9·11 테러로 안보 문제가 나타났는데도, 공공 인프라의 허점을 메울 전면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대신에 정부의 새로운 역할을 고안해냈다. 즉 정부가 안보 제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가격으로 안보를 구매하는 것이다." "국토안보부의 설립 문서는 〈오늘날의 테러리스트는 언제든지, 어디서나, 어떤 무기든 사용할 수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안보 서비스는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있을지 모를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한다." "테러와의 전쟁, 이슬람 급진파와의 전쟁, 이슬람파시즘에 대한 전쟁, 제3차 세계대전, 오래된 전쟁, 세대의 전쟁 등 명칭은 다양하게 바뀌어 왔다. 그러나 분쟁의 기본적 형태는 그대로다. 시간, 공간, 표적의 제한을 전혀 받지 않는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테러와의 전쟁은 확산되지만 실체가 없는 특성 때문에 이길 수 없는 계획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테러와의 전쟁은 천하무적의 전쟁이다. 글로벌 경제구조에 영원히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383-5)


6부 돌고 도는 악순환, 이라크: 과잉 쇼크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는 지식인들이 주로 제시하는 고상한 이유는 모델이론이다. 네오콘들은 테러리즘이 아랍과 무슬림 세계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이념에 눈이 먼 그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책이 곧 중동이 테러 양산 지역이 된 원인임을 깨닫지 못한다. 심지어 테러를 도발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다른 것을 원인으로 제시한다. 바로 중동의 자유시장 민주주의 부재가 이유라는 것이다." "이들 이론의 내부논리를 보면 테러리즘과의 전쟁, 개척지 자본주의의 확산, 선거 실시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하나의 프로젝트로 묶여 있다. 즉 중동에서 테러리스트를 없애고,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한 뒤, 사후 선거로 모든 것을 변경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라크 침공은 성공적이었지만, 점령 과정은 실패였다는 분석 결과가 종종 나온다. 그러나 이는 침공과 점령이 하나의 전략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 모델 국가를 그릴 캔버스를 깨끗히 하기 위해 먼저 폭격을 가한 것이었다."(418-23)


"전쟁이 시작되자 바그다드의 주민들은 감각 박탈을 당했다. 도시의 감각 투입이 하나씩 절단되었다. 제일 먼저 청각이 사라졌다." "많은 이라크인들은 전화 시스템 파괴가 공중 공습에서 심리적으로 가장 두려운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청각과 촉각의 폭탄이 온 사방에 투하되었다. 사랑하는 이들이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고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전화를 거는 일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겁에 질린 해외의 친척들을 안심시킬 수 없는 것도 엄청난 고문이었다." "그 다음 공격 대상은 시각이었다. 〈폭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초저녁 폭격 당시만 해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500만 시민들이 사는 도시 전체가 공포감을 주는 끝없는 밤으로 변했다.〉 「가디언」은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만이 유일하게 어둠을 밝혀주었다고 보도했다. 집 안에 갇힌 바그다드 주민들은 서로 얘기도 못하고, 듣지도, 밖을 보지도 못했다. CIA의 블랙사이트에 감금된 죄수처럼 도시 전체가 수갑을 차고 두건으로 가려진 셈이다."(427-8)


"사실 부시 내각은 (자신들의 공언과는 달리) 마셜플랜과 정반대인 반(反)마셜플랜을 선포했다. 처음부터 이라크의 쇠약한 산업 분야에 손해를 입히고 실업률을 치솟게 만들 계획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계획에 따르면, 허약해진 국가들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외국 회사의 투자를 금지했다. 그러나 이라크 계획에 따르면 미국 기업을 유치할 수 있는 방안은 뭐든지 가능했다." "빈약한 공적 분야와 활기찬 기업 분야는 부시 내각이 이라크의 재건을 완전히 아웃소싱된 공동 국가의 미래상을 실행하는 데 이용했다는 증거다. 이라크에서 계약업자에게 넘겨주지 못할 핵심적인 정부 기능은 하나도 없었다. 공화당에 재정적 공헌을 하거나 선거운동 기간에 기독교 보병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주로 계약업자가 된다. 이라크에서 외국 세력의 개입은 그것이 무엇이든 부시의 좌우명에 따라 진행되었다. 즉 사기업이 할 수 있는 임무라면 반드시 사기업에 맡기라는 것이다."(442-3)


"그린존에 경험 많은 공무원들이 부족한 것은 부주의한 탓이 아니었다. 이라크 점령은 처음부터 공동 정부를 만들려는 급진적 실험이었다. 싱크탱크 직원들이 바그다드에 도착했을 때쯤, 중요한 재건작업은 핼리버튼과 KPMG에 아웃소싱된 상태였다. 때문에 공무원으로 온 그들의 임무는 단지 현금 관리뿐으로, 수축포장된 100달러 지폐 다발을 이라크에서 계약업자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이라크인들을 재건계획에서 체계적으로 배제하면서 그들의 이중 기준은 극에 달했다. 제재와 침입으로 고통받은 이라크인들은 당연히 자국의 재건으로 혜택을 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최종 생산물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창출된 일자리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외국 계약업자들은 수만 명의 외국 노동자들을 데리고 이라크 국경선을 넘어왔다. 여전히 외국의 침입을 받는 것 같았다. 재건이 아니라 가면을 쓴 파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국가 산업을 완전히 말소시키는 행위로,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452-3)


"재건의 처참한 실패는 가장 치명적인 반격이었던 종파갈등과 종교적 근본주의와도 직접적 관련이 있다. 점령 당국이 치안 같은 기본적인 서비스도 제공하지 못하자, 사원과 민병대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젊은 시아파 성직자 무크타다 알사드르는 브레머가 추진한 민영화된 재건의 실패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바스라까지 시아파 빈민가에서 재건작업을 통해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 사원의 기부를 통해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나중엔 이란의 도움을 받아 재건센터를 차렸다. 전기나 전화선을 고치는 전기공을 파견하고, 혈액을 운반하고, 교통을 정리했다. 〈저는 공백을 발견했습니다. 누구도 메우지 않더군요.〉 알사드르가 점령 초기에 말했다. 또한 그는 브레머 치하의 이라크에서 직업도 희망도 찾지 못한 젊은이들을 데려와 검은색 옷을 입히고 러시아제 기관총으로 무장시켰다. 그 결과 마흐디(Mahdi)군이 창설되었다. 이러한 민병대들은 조합주의의 유산이다."(457-8)


"이라크의 산업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런데도 유일하게 호황을 누리는 산업이 있었다. 바로 납치산업이었다. 2006년 초반 석 달 반 동안, 거의 2만 명이 이라크에서 납치당했다. 국제 언론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서양인들이 납치당했을 경우뿐이다. 그러나 납치된 사람들 대부분은 이라크의 전문직 기술자들로, 일터를 오가다 납치되었다. 가족들은 몸값으로 수만 달러를 내든지 아니면 시체 공시소에서 시체를 확인해야 했다. 고문 또한 떠오르는 산업이 되었다. 인권단체는 이라크 경찰들이 죄수의 가족들에게 고문을 중지하는 대가로 수천 달러를 요구한 사건들을 문서화했다. 한마디로 이라크 버전의 재난 자본주의라 하겠다." "지금 이라크를 휩쓴 예기치 못한 폭력사태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쟁 입안자들이 만들 결과다. 순수하고 심지어 이상적이기까지 한 문구인 '새로운 중동을 위한 모델'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라크의 분열은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 백지상태을 요구했던 이념이 원인이었다."(476)


7부 이동 가능한 그린존: 완충지대와 높다란 장벽


"쓰나미 이전에 몰디브 정부는 리조트 섬들의 숫자를 늘려 더 큰 성공을 거두려고 했다. 그런데 늘 그렇듯 사람들이 걸림돌이었다. 생계형 어부들인 몰디브 사람들은 산호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전통마을에 산다. 그들의 생활방식도 문제를 일으킨다. 정부가 보기엔 손질된 고기들이 해변에 널려 있는 소박한 매력은 몰디브 풍경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쓰나미 이전에 가윰 정부는 주민들을 설득해 관광객들이 방문하지 않는 크고 인구가 많은 섬들로 이주시키려 했다. 지구온나화가 야기한 해수면 상승 때문에, 이러한 섬들은 보호조치가 필요한데도 말이다. 탄압정권이라 해도 수만 명을 대대로 살던 섬에서 쫓아내기는 힘들었다. 결국 '주민합병' 프로그램은 성공하지 못했다. 쓰나미가 닥친 후, 가윰 정부는 많은 섬들이 위험해서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즉각 발표했다. 이제 쓰나미 복구에 원조를 받고 싶은 사람은 국가에서 지정한 '안전한 섬' 다섯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508)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뉴올리언스에서 영리 추구의 기회는 모조리 이용되었다." "정부는 이라크에서처럼 인출과 예치 기능을 하는 현금인출기 역할을 했다. 기업들은 대규모 계약을 통해 자금을 인출해나갔다. 그 대가로 신뢰할 만한 업무 실적을 낸 게 아니라, 선거 후원금이나 다음 선거를 위한 충성스런 인력을 제공했다." "계약을 맺은 사기업에 들어간 수백억 달러와 세금 부족을 충당하기 위해, 2005년 11월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연방 예산에서 400억 달러를 삭감한다고 발표했다. 삭감한 프로그램들 가운데는 학생 대출, 의료 서비스 보조, 빈민 무료식사권 등이 있다. 다시 말해 가장 가난한 시민들은 계약업자들에게 노다지를 두 번이나 제공했다. 첫 번째는 카트리나 피해 구호 자금을 기업들에게 무한정 나누어주었을 때다. 두 번째로는 실업자들과 가난한 근로자들을 직접 지원하는 몇몇 프로그램들이 과잉 청구된 기업들이 계산서를 갚느라 사라졌다."(521-4)


"얼마 전만 해도 재난은 사회적 단합이 일어나는 시기로 여겨졌다. 즉 하나로 뭉친 지역사회가 구역을 따지지 않고 합심하는 보기 드문 순간이었다. 그러나 재난은 점차 정반대로 변하면서 계층이 나뉘어 있는 끔찍한 미래를 보여주었다. 경쟁과 돈으로 생존을 사는 세상 말이다. 그린존은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가 자리 잡은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날 수 있다. 바그다드의 그린존은 그러한 세계의 질서를 가장 잘 보여주었다. 그린존에는 독자적인 전기발전기, 전화, 상수도 시설, 자체적으로 석유를 공급하고 멋진 수술실을 갖춘 최신식 병원이 있다. 5미터의 두툼한 벽이 이런 시설들을 보호한다. 기이하게도 중무장한 카니발 크루즈가 폭력과 절망의 바다인 레드존의 한가운데 정박한 것 같다. 만약 당신이 배에 탑승한다면, 풀 가장자리에는 음료수가 놓여 있고 천박한 할리우드 영화와 운동시설도 즐길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선택받은 사람들에 끼지 못한다면, 그린존 벽 근처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총에 맞을 것이다."(524-5)


"1993년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오슬로 협정)이 실패한 요인들은 지겨울 정도로 연구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일방주의로 후퇴한 두 가지 요인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두 요인 모두 시카고학파의 자유시장운동이 이스라엘에 미친 영향과 관련이 있다. 하나는 러시아의 쇼크요법 실험 때문에 (100만 명에 달하는) 유대계 러시아인들이 이스라엘로 유입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수출 경제가 전통적인 상품과 최첨단 기술에 근거한 경제에서 반테러에 관련된 전문지식과 장비 판매에 치중한 경제로 바뀐 것이다. 두 요인 모두 오슬로 협정의 붕괴에 크게 작용했다. 러시아인들이 들어오면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노동력에 의지할 필요가 줄어들어 점령지를 봉쇄하게 되었다. 아울러 최첨단 안보경제의 급격한 확장으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분야에서 새로운 경향이 출현했다. 바로 평화를 포기하는 대신에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 즉 테러와의 전쟁을 택하려는 경향이었다."(546)


"1993년의 급작스러운 국경 봉쇄는 팔레스타인의 경제생활을 재앙으로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일하러 갈 수 없었으며, 장사꾼들은 물건을 팔지 못했고, 농부들은 밭에 가지 못했다. 1993년, 점령지역의 일인당 GDP는 30퍼센트 가까이 추락했다. 이듬해 팔레스타인의 빈곤은 33퍼센트 늘어났다. 로이는 1996년 국경 폐쇄의 경제적 영향력을 포괄적으로 기록했다.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66퍼센트가 실업상태이거나 불완전 취업상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오슬로 협정은' 시장의 평화'가 아니라 시장의 소멸, 일자리 상실, 자유 상실을 의미한다. 중요한 건, 이스라엘의 정착지가 확대되면서 토지가 부족해졌다는 사실이다. 점령지역이 화염에 휩싸인 연료통이 된 것도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2000년 9월 아리엘 샤론이 한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했을 때 두 번째 아랍 폭동이 일어났다. 무슬림들이 알 하림 알 샤리프라고 부르는 곳이었다(유대인들에겐 성전산으로 알려져 있다)."(550)


결론 쇼크 효과는 점차 누그러지다: 시민들의 재건 노력


"워싱턴은 항상 민주적 사회주의가 전제적 공산주의보다 더 큰 위협이라고 보았다. 전제적 공산주의는 쉽게 적으로 만들거나 비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60~1970년대 개발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가 인기를 얻자 워싱턴은 이를 못마땅해하며 스탈린주의와 동일시하는 수법을 썼다. 전혀 세계관이 다른 사상인데도, 일부러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CIA는 아옌데를 소비에트 스타일의 독재자로 선전하는 캠페인을 후원했다. 그러나 워싱턴이 아옌데의 선거 승리를 걱정한 진짜 이유는 1970년대 헨리 키신저가 닉슨에게 보낸 메모에 나타나 있다. 〈칠레에서 성공적으로 선출된 마르크스주의 정부는 선례가 되어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비슷한 현상이 곳곳에 모방되어 퍼진다면, 세계의 균형과 미국의 위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적 제3의 길이 확산되기 전에 아옌데를 제거해야 했다."(573)


"프리드먼의 사망 한 달 뒤인 2006년 12월, 남미의 지도자들은 볼리비아의 코차밤바에 모여 역사적 회담을 가졌다. 코차밤바는 여러 해 전에 수도 민영화에 반대하는 대중 폭동이 일어나 벡텔이 떠났던 곳이다.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는 남미의 드러난 혈관을 막겠다는 맹세와 함께 회담을 진행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책 『라틴아메리카의 드러난 혈관』을 언급한 것이다." "남미인들은 오래전에 잔인하게 중단된 그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와 비슷한 정책들이 나타났다. 핵심 경제 분야의 국유화와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교육, 문맹퇴치, 의료혜택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혁명적인 사상이 아니다. 그러나 아주 떳떳하게 평등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부에서, 이러한 사상은 분명 프리드먼이 1975년 피노체트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내 생각에, 가장 큰 실수는 다른 사람들의 돈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5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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