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와 애국 -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공공성
오구마 에이지 지음, 조성은 옮김 / 돌베개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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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오늘날 사람들은 종종 〈전후, 일본은 풍요로워졌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 전후란 어느 시대를 가리킬까? 전쟁의 피해 때문에 크게 하락했던 일본의 1인당 국민 총생산은 패전 후 10년이 지난 1955년에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다. 따라서 1954년까지를 전후라고 생각한다면, 〈전후, 일본은 가난해졌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대에는 〈전후 정치의 기본이었던 55년 체제〉와 같은 표현도 쓰인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55년 체제는 1955년에 성립되었다. 그리고 1956년 『경제 백서』經濟白書에는, 당시 유행어가 된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즉 1955년에 전후가 끝났다는 것이 당시의 인식이었다. 그 전후가 끝났을 때, 55년 체제와 고도 경제성장으로 상징되는 또 하나의 전후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앞의 전후를 '제1의 전후', 뒤의 전후를 '제2의 전후'라고 부르겠다. 당연히 〈전후, 일본은 풍요로워졌다〉라고 말할 때의 전후는 '제2의 전후'를 가리킨다."(19-20)


"제1의 전후와 제2의 전후에는, 똑같은 말도 울림이 달랐다. 즉 국가나 민족이라는 말의 울림도 두 시기에 다르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제1의 전후는 질서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현실은 바뀔 수 있다〉라는 말이 현실감 있게 울린 시대였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서 질서의 한 형태인 국가라는 말은 어떻게 울렸을까? 그것이 인간을 짓누르기 위해 주어진 체제가 아니라 변혁이 가능한 현실의 일부로서 이야기된 국면이,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애국이라는 말은 어떻게 울렸을까? 그리고 그것은 진부하게 취급되기 이전의 민주라는 말과 어떤 관계였을까? 오늘날에는 〈전후 민주주의는 애국심을 부정했다〉라고 종종 평가되는데, 민주와 애국의 관계는 정말로 그러했을까? 내셔널리즘에 관한 전후의 언설을 검증하는 것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것은 당연히 국가와 개인의 관계, 혹은 공과 사의 관계에 대한 전후의 언설을 재검증해 가는 작업이기도 하다."(21-2)


1부


1 윤리의 초토화─전쟁과 사회 상황


"미일 개전 때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전쟁을 찬미했다. 이는 절반의 사실에 불과하다. 그들이 직면한 현실은 공표된 문면과는 약간 달랐다. 지식인이나 작가들은 전쟁에 협력하는 작품을 쓰거나, 아니면 창작을 단념하고 군수 관련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처했다. 무엇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수감의 공포, 고문과 옥사의 공포였다. 탄압의 공포는 지식인들 사이에 고립감과 의심증을 낳았다. 시대에 편승해서 마지막까지 이익을 얻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많은 지식인들에게 전쟁은 실로 악몽이었다. 그것은 표면에서 숭고한 이념에 대한 찬미가 이루어지고, 뒷면에서는 공포와 보신, 의심증과 배반, 환멸과 허위를 하나로 뭉쳐 놓은 것이었다. 타자에 대한 신뢰와 자기 자신의 긍지가 뿌리째 뽑힌 그 체험은, 굴욕감과 자기혐오 없이는 좀처럼 회상할 수 없는, 서로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않은 상처로 봉인되었다. 그러나 이런 회한의 기억이 전후사상의 중요한 저류가 된다."(58-66)


"1943년 10월부터 문과계 대학생의 징병 유예가 없어지고, 이른바 학도 출진이 이루어졌다. 전쟁 후기에 입영은 죽음과 거의 같은 뜻이었다." "이런 가운데, 정부에 대한 비판적 심정은 정부가 그들에게 가르친 애국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즉 정부가 주창해 온 애국과는 다른 종류의 진정한 애국[전쟁 반대]이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 제도의 레이테Leyte섬에서 사망한 한 학도병은 〈과연 누가 진정한 애국자였는지는 역사가 결정해 줄 것입니다〉라고 썼고, 중국 대륙에서 전사한 학도병도 〈내 충절의 방법은 아마도 현재 군 수뇌부의 근본 방침과 어긋난다〉라고 말한다." "학도병들의 경험은 지식인 전쟁 체험의 한 축소판이었다. 그것은 대중에 대한 모순적인 감정을 품게 만든 굴욕의 경험이면서, 사상과 사회과학을 일본 사회의 변혁에 도움이 되게끔 만들 필요성을 통감케 한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은 전시기에 형성된 '진정한 애국'이라는 표현과 함께, 전후사상에 크게 반영된다."(66, 73-4)


"가치관의 붕괴나 윤리의 저하는 8월 15일에 급격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전시 중부터 진행된 사태였다. 정부가 내세운 이념이 허구로 가득했다는 점은, 이미 많은 인간들이 느끼고 있었다. 말하자면 패전은 최후의 일격에 불과했다." "많은 죽음과 추악함에 직면하고 기아와 빈곤으로 추락했던 사람들에게, 전쟁 지지에 대한 회한은 컸다." "허위와 보신, 무책임과 퇴폐, 면종복배의 이면에 만연했던 이기주의, 그곳에는 물리적인 패배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붕괴가 있었다." "허위와 무책임을 낳고, 대량의 죽음과 파괴를 가져온 황국 일본과 신민의 관계, 이것을 대신할 공과 사의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할까. 무너진 '국민 사이의 인간다운 연대'는, 어떤 새 원리로 다시 구상할 것인가.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일본을 창출하는 것이다.〉 전사한 학도병이 유고에 남긴 이 말은, 패전을 맞닥뜨린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마음이었다. 전후라고 불리는 시대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77, 81-3)


2 총력전과 민주주의─마루야마 마사오, 오쓰카 히사오


"일본에서는 프랑스나 한국 등과 달리, 패전 후에 해외 망명자들이 귀국해서 정권을 세우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후의 위정자와 지식인 대부분은 전쟁 전과 전시부터 활동해 온 사람들로, 사고의 전환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전후사상의 모색은 새로운 언어 체계를 외국에서 수입하기 이전에, 전시기의 언어 체계를 바꾸어 읽으며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시작했다. 여기서 전후 민주주의의 기반이 된 것은 총력전의 사상이었다." "예를 들어 훗날 수상이 되는 아시다 히토시는 전쟁 종결의 원인과 책임을 추궁하는 의견서에서 〈근대 총력전에서 우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에 책임을 느끼게 해야 한다. 국민들이 당면한 전쟁을 군부 및 정부의 전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근대전에서는 우선 이 점만으로도 패배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며, 통제 철폐와 언론 자유화를 주장하고 있다. 즉 아시다는 총력전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민주화를 주장했다."(87-8)


"패전 직후에 다수 등장한 이런 논조는, 모두 국민의 저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패전이라는 충격에 직면한 사람들이 취했던 일종의 심리적 방어 기제였다. 민주화에 대한 지향은 이런 내셔널리즘과 표리일체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내셔널리즘은, 전쟁으로 붕괴된 국민의 도의道義를 재건한다는 주장과도 연결되었다. 히가시쿠니나 이시와라, 고야마 등은 모두 전시 중의 암시장 경제나 관료의 무책임을 들어 전쟁에 패한 원인은 도의의 퇴폐에 있다고 주장하며, '1억 총참회를 하는 것이 우리나라 재건의 첫걸음'이라고 외친다. 이 1억 총참회라는 말은, 히가시쿠니 수상[쇼와 천황의 조카]이 1945년 8월 28일에 가진 기자 회견에서 발언한 뒤로 유명해졌다. 연합국과 아시아 국가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사죄한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패전의 굴욕감을 표현하기 위해, 패배 원인을 도의의 퇴폐에서 찾는 가운데 나온 말이었다."(89-90)


"1943년 10월, 29세의 마루야마 마사오는 게이오대의 『미타 신문』이 주최한 후쿠자와 유키치 특집에 「후쿠자와에서의 질서와 인간」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여기서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에 대한 당시의 분열된 평가에 대해 언급한다. 한 가지 평가는 후쿠자와를 서양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자로 보고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를 아시아 진출을 주장한 국가주의자로 찬미하는 것이었다." "마루야마는 개인과 국가를 대립시키는 개인주의적 국가관이 아니라, 주체적인 책임 의식을 가진 인간이 능동적으로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 즉 '개인주의자라는 점에서 실로 국가주의자'가 되는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마루야마의 주장은 아시다의 〈근대 총력전에서 우위를 획득하려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에 책임을 느끼게 해야 한다〉라는 말과 거의 같은 취지이기도 했다. 즉 마루야마의 사상은 특이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 공유되었던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95-7)


"마루야마는 1946년 5월에 발표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일본 사회에는 자유로운 주체적 의식을 지닌 개인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내발적內發的인 책임 의식이 없다고 보았다. 거기서는 권력자조차도 책임 의식을 결여한 '폐하의 하복' 혹은 하료下僚의 로봇일 수밖에 없다는 '무책임의 체계'가 지배한다. 그와 동시에 상위자가 가한 억압을 하위자에게 발산한다는 '억압 이양'이 사방에서 발생한다. 그것을 국제 관계에 투영한 것이, 구미 제국주의의 압박을 아시아 침략으로 해소하려 한 행위였다. 게다가 이런 일본 사회에는 근대적인 사私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公의 명확한 경계도 없다. 거기서 발생하는 것은 공의 이름에 따른 사생활에의 개입이며 공의 이름을 빌린 사적 이해의 추구다. 또한 근대적인 정교분리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최고 권력자인 천황이 동시에 윤리의 정점이 되며, 이런 '천황으로부터의 거리'가 정치적 지위인 동시에 윤리의 평가 기준이 되었다고 마루야마는 보았다."(108-9)


"이런 마루야마의 역할을 경제학의 언어로 행한 사람이 오쓰카 히사오였다. 오쓰카는 1944년 7월 「최고도 '자발성'의 발양」이라는 논고를 발표하여, 생산력 확충을 위해서는 노동자가 〈'자발성'과 '목적 합리성'〉을 내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자발성의 중시는 필연적으로 근대적 개인의 재평가까지 이어졌다. 근대적 개인의 재평가는 '근대의 초극론'과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이기적인 활동에 바탕을 둔 자유방임 경제를 계획적인 통제 경제로 넘어서야만 생산이 확충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런 의견에 대항해서 근대적 개인을 재평가하기 위해, 오쓰카는 그것이 질서 없는 이기주의가 아님을 밝혀야 했다. 즉 오쓰카는 마루야마와 같은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마루야마가 개인주의와 멸사봉공의 대립을 극복한 국민주의를 구상했듯, 오쓰카는 이기적 영리심과 멸사봉공의 대립을 넘어선 경제 윤리를 추구했다."(114-6)


"마루야마와 오쓰카가 근대라는 말로 설명한 것은, 서양 근대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것은 비참한 전쟁 체험의 반동으로서 꿈꾸게 된 이상적인 인간상을, 서양 사상의 언어로 빌려서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개個의 확립과 사회적 연대를 겸비하고 권위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내는 정신을, 그들은 주체성이라 이름 붙였다. 그런 주체성을 갖춘 인간상을 마루야마는 근대적 국민, 오쓰카는 근대적 인간 유형이라고 불렀다. 즉 주체성이란 전쟁과 패전의 굴욕으로부터 다시 일어서기 위해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말이었다.  그 주체성은 국내에서는 권위에 항거하는 '자아의 확립'으로, 국제 관계에서는 미소美蘇에 대한 자주독립이나 중립을 주창하는 내셔널리즘으로 각각 표현되었다. 마루야마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일신 독립하여 일국 독립한다〉라는 말을 사랑한 것은 그런 심정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마루야마와 오쓰카의 사상은 공통의 전쟁 체험을 가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125-6)


3 충성과 반역─패전 직후의 천황제


"패전 직후의 일본이 '절대 왕정 단계'라는 역사 인식을 토대로 공산당이 주장한 것은, 우선 천황제를 타도하는 시민 혁명을 목적으로 삼고, 그 후에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간다는 '2단계 혁명론'이었다. 이런 역사관의 상식은 왕정을 타도한 프랑스 혁명으로 신분과 지역을 초월한 근대 국민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천황제가 남아 있는 한 일본은 국민 국가가 아니며, 우선 국민 국가의 형성을 목표로 천황제를 타도해야 했다. 거기서는 봉건제의 잔재인 천황제와 근대적인 국민 혹은 민족이 대립하는 존재였다. 마루야마가 천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초국가주의와 근대적인 국민주의를 대비시킨 것에도, 이런 역사관이 깔려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국민이란 천황제에 지배당하는 신민臣民과 구별된, 자유롭고 평등한 근대적 인간이었다. 이노우에 기요시의 표현에 따르면 내셔널리즘과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국가인가, 천황의 국가인가〉라는 선택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156)


"이런 바른 애국심의 역사적 사례로 이따금 거론된 것이, 마루야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메이지의 자유 민권 운동이었다. 1946년 『역사가는 천황제를 어떻게 보는가』에서 이노우에는 자유 민권 운동의 활동가를 애국자들이라고 부르며 상찬했다." "패전 직후에는 이런 논조가 광범위하게 공유되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예를 들면 오다카 구니오는 〈일본인은 충군이기는 했지만 서양인에 비해서 특별히 애국적이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경제학자 오코우치 가즈오도 근대 유럽에서는 〈애국 운동은 항상 항상 서민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낡은 특권에 대립해서 새로운 질서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운동으로 등장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논조를 따라, 오다카 구니오도 구래舊來의 일본에서는 〈종적 일선을 거슬러 올라가 '위의 한 분'에게 충절을 다하는 것만이 문제이며, 횡적으로 제휴하고 횡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동포를 위해 헌신하는 일은 제2, 제3의 문제였다〉라고 말한다."(157-8)


"천황제와 대치된 것이 주체성이며, 연대와 단결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마루야마나 가토 슈이치가 근대적인 주체성의 확립을 부르짖으면서도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라던가 〈부끄러움을 알아라〉라는, 다소 고풍스러운 말을 빈번히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런 논조는 동시대의 다른 논자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민법학자 가이노 미치타카는 1948년 5월의 논고에서 천황제를 〈무책임을 긍정하는 제도〉, 〈'국민'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비판하면서 보수파를 향해 〈신헌법의 공포 앞에 할복이라도 해서······ 천황에 대해 '사죄'를 해야만 했을 터이다〉라고 말한다. 천황제를 폐지하라는 근대적 지향과 〈할복하라〉라는 무사도풍의 비난은 논리적으로는 모순될 터였다." "당시의 천황제란 단순히 군주가 존재하는 정치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굴욕적인 기억과 결합된 말이었다. 그런 천황제와 대치되는 주체성은, 한편으로는 근대적인 언어로 이야기되면서도, 동시에 무사도적인 언어로 표현되기도 했다."(167)


"천황제가 인간을 억압한다는 인식과 천황 개인에 대한 경애가 교차하는 데서 하나의 주장이 생겨났다. 쇼와 천황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천황제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천황제로부터 천황의 해방'이다. 전후의 신헌법하에서, 천황에게는 참정권도 없고, 신앙이나 언론 출판의 자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공산당에 들어가는 변」을 쓴 모리타 소헤이는 〈천황을 기요틴에 내거는 사태에 이른다 해도, 나는 공산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단호히 거기에 서명하지 않을 것을 여기 명언해 둔다. 이것은 내가 천황제의 폐지와 천황 일가를 어디까지나 개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사람들에게 굴욕을 강제했던 사회적, 심리적인 시스템으로서의 천황제의 폐지였으며, 꼭 천황 개인의 처단은 아니었다. 거기서 주장된 것이 새로운 내셔널리즘과 윤리의 재건이며, 민족 도덕의 확립이었다. 그리고 민족 도덕의 확립을 위해서는 천황이 어떤 형태로든 전쟁 책임을 밝힐 것이 요구되었다."(168-72)


4 헌법 애국주의─제9조와 내셔널리즘


"대부분의 전후 지식인들은 패전으로 황폐해진 일본을 재건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패전 직후에 우선 내세워진 것이 문화 국가나 평화 국가라는 표어였다." "이런 평화나 도의道義의 주장은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 패배한 일본에 남겨진 마지막 국가 정체성의 기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자 폭탄으로 상징되는 구미의 군사력에 대한 대항 의식과도 결합되어 있었다." "육군 중장 이시와라 간지도 그런 논리에 따라 비무장 평화주의를 주장하며 〈몸에 쇠붙이 하나 갖추지 않으면서 세계 평화와 인도를 위해 그 태도를 규탄하고 반성을 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평화주의의 논조가 1945년 8월 시점부터 존재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민주화의 목소리가 점령군의 지령 이전에, 총력전 시기의 언어 사용의 연장선상에서 출현한 것과 마찬가지로, 평화주의의 목소리는 도의 국가라는 슬로건의 연장으로서 출현했다. 헌법 제9조는 이런 토양 위에 등장한 것이다."(192-4)


"당초 점령군의 제안에 놀랐던 보수적인 정치가들이 헌법을 용인하게 된 큰 이유는 상징 천황을 인정한 제1조의 존재였다. 이 조항으로 말미암아 천황제 폐지의 위험이 없어졌다." "동시에 이 헌법은 패전으로 위기에 직면한 보수 정치가들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GHQ의 '공직추방령'에 내몰린 보수정치가들로서는 과감한 개혁안을 제시하는 길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실제로 신헌법 초안의 공표는 보수 정권의 위기를 구해 주는 꼴이 되었다. 3월 6일의 초안 요강 발표 이후로 이 초안을 지지하는 사회당과 천황제 타도를 외치며 초안에 반대하는 공산당이 대립한다. 그리고 정부는 초안 요강을 공표한 지 4일 뒤, 4월에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고시했다. 개혁의 기운을 선수 친 보수 정당은 지지를 모았고, 특히 요시다 시게루를 중심으로 한 자유당이 이 선거에서 약진하여 정권을 획득했다. 신헌법은 단순히 미국의 압력으로 밀어붙여졌다기보다는, 보수 정치가들의 생존책으로 수용되었다."(199-200)


"1946년 시점에서 헌법의 태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점령군과 대결할 각오를 요구하는 행위였기에, 결국 의회에서의 헌법 심의는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되었다. 그리고 제9조에는 국제 평화를 주창한 제1항과 전력 포기를 주창한 제2항 사이에,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라는 문구를 넣는 수정이 가해졌다. 이 수정은 이후의 재군비에서 국제 평화라는 목적을 해하지 않는다면 전력 보유가 가능하다는 헌법 해석을 낳는다. 패전 직후의 헌법 논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난바라 시게루를 비롯해 이후 호헌 세력이 되는 사람들이 신헌법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후에 개헌 세력이 되는 보수 정치가들은 헌법을 상찬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난바라가 헌법을 비판한 것은, 헌법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안이하게 헌법을 개정하는 정치 자세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점령군이 두려워서 헌법을 상찬했던 보수 정치가들도 미국이 방침을 전환한 1950년대 이후로 헌법 비판을 시작했다."(212)


5 좌익의 '민족', 보수의 '개인'─공산당·보수계 지식인


"1950년대 중반까지 공산당의 권위는 신과 같았다.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이 생겼을까. 첫 번째 이유는 고도 경제 성장 이전의 일본에 존재한 압도적인 빈부격차다. 도시와 농촌, 상층과 하층 간 격차는 컸으며 패전 후의 거리에는 고아와 전쟁 피해자가 넘쳐 났다. 이런 현실 앞에 공산당의 존재가 빛나보였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일본에서 전쟁에 반대한 유일한 정당이 공산당이었던 점이다. 전전의 비공산당계 무산 정당 및 노동 운동은 모두 전쟁에 협력한 과거가 있었다. 전후가 되어 비공산당계의 사회주의자들이 합동해서 일본사회당을 결성했지만, 전쟁 협력의 오점을 지니지 않은 점에서 공산당의 정신적 우위는 명백했다. 세 번째이자 가장 큰 이유는 지식인들의 회한이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패전 후의 지식인들을 〈회한 공동체〉라고 불렀는데, 이때의 회한이란,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결과의 문제보다도, 전시기 그들의 처신에 대한, 말하자면 윤리적인 문제였다."(220)


"패전 후의 논단에서 우익 국수주의자는 세력을 실추했다. 그 대신에 올드 리버럴리스트라고 통칭된 지식인들이 보수 논단을 형성했다." "그들에게는 사상적 상이함을 넘어선 일종의 공통성이 있었다. 하나는 그들 중 다수가 패전 시에 50대 이상으로, 다이쇼기에 청년 시대를 보낸 세대였던 점이며, 또 하나는 그들이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천황을 경애하는 문화인이면서 자유주의를 흠모했다는 점이었다." "전전의 지식인은 거의가 도시 거주의 중산층 이상에 속하여, 경제적으로도 교양으로도 일반 민중과 동떨어져 있었다. 1948년 조사에서 신문 정도의 읽고 쓰기가 완전히 가능한 자는 4.4퍼센트에 지나지 않았고, 군대에서 처음으로 하층민과 접촉한 학도병들은 대중에게 경악과 경멸의 감정을 품었다." "그런데 이런 격차를 축소시키는 단초가 된 사건이 전시 및 패전 후의 인플레이션이었다. 공습 때문에 도시 중산층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금융 상품이나 예금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도시 중산층의 몰락을 초래했다."(236-7)


"이렇게 과거의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 1950년대의 보수 논조는 평화주의를 공론空論, 미숙, 유치 등이라 비판하고 현실, 상식, 전통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많았다 나아가 고이즈미 신조나 다나카 미치타로 등은 재군비에 찬성하고 국방의 의무를 공공심公共心의 일환으로 상찬했다. 이런 주장은 그 후의 보수 논조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1950년대의 보수 논조는 고도성장 이후의 그것과 비교할 경우에 특징이 몇 가지 있었다. 그 하나는 전후의 민주화나 노동 운동 등을 군부 독재와 동일시하는 경향이었다." "특히 경제학자였던 고이즈미는 마르크스주의와 총력전 체제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이것이 자유주의 경제를 해쳤다고 주장했다." "또한 1950년대의 올드 리버럴리스트들은 개인의 자유를 열심히 강조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논조의 배경 역시 그들의 전쟁 체험이었댜.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개인의 자유란 빨갱이와 군부에 대항해 자기의 자유를 지킨다는 의미와 같았기 때문이다."(246-8)


"그렇다면 그들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공공심은 어떻게 공존했을까? 그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잡지 『고코로』의 좌담회에 등장하는 다케야마 미치오의 발언이다. 이 좌담회에는 〈인간이라는 것은 각자의 천분에 따라 각각의 역할을 맡는다〉라는 발언도 나왔는데, 이런 일종의 신분제적인 사고방식이 그들이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와 공공심의 양립을 지탱했다. 즉 대중이 근로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듯, 〈문화를 맡은 자〉인 자신들은 자유롭게 문화를 즐김으로써 일반 민중이 할 수 없는 형태로 사회에 공헌한다. 이런 질서는 전통적이고 자연스러우며 그 질서에 정치가 개입하면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라는 말도, 이들에게는 약간 독특한 의미로 쓰였다. 고이즈미 신조는 재군비와 미일 안보 조약에 찬성을 표하면서 〈민족 간에 평화가 바람직한 것과 마찬가지로 계급 간에도 평화가 바람직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천황이야말로 이런 평화, 즉 그들이 안정적인 지위를 누렸던 전쟁 전 시대의 상징이었다."(249)


6 민족과 시민─정치와 문학 논쟁


"1946년 후반부터 1947년 초에 걸쳐 〈혁명이 멀지 않았다〉라는 기운 속에서, 공산당은 1947년 2월 1일 자로 총파업을 기획했다. 그러나 이 2·1 파업은 점령군의 명령으로 중지되었고, 공산당은 전후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았다." "그 후 노동 운동에서 공산당의 장악력이 저하되면서 좌절한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은 내성內省의 시기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런 젊은 활동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긴다이분가쿠』를 비롯한 주체성론이었다." "오쓰카 히사오는 근대적 인간 유형의 확립이 선행되지 않는 한 제도적인 사회 개혁을 이루더라도 효과는 적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대해서 공산당계의 논자들은 인간의 의지는 경제적인 하부 구조로 규정되며 사회의 변혁 없이 의식의 변혁 같은 것은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공산당 측에서 보면 사회 변혁의 계획을 동반하지 않는 주체성의 주장 같은 것은 난센스에 지나지 않았으며, 청년층의 지지를 얻는 데 있어서 잠재적인 라이벌 사상과 다름없었다."(283)


"그러나 마루야마나 오쓰카가 말한 주체성은 공과 사 양 쪽 모두가 파괴된 전쟁 중의 반전反戰으로서 꿈꾸게 된, 권위로부터의 자립과 타자와의 연대를 겸비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우메모토 가쓰미 등이 주장한 주체성은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역사의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필연성 속에 해소되지 않는 자기를 표현했다. 후자는 개인을 넘어선 전쟁이라는 역사의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자기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품었던 심정이다. 즉 패전 후의 주체성이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체계적인 이론으로 회수되기 곤란한 심정을 표현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전쟁과 패전이라는 거대한 사회 변동에 농락당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납득시킬 설명을 찾아서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역사의 필연성을 믿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이론적인 설명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자기의 잔여물 중 일부가 다른 종류의 말을 찾는 원동력이 되었을 때, 그것이 주체성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287)


"당시에는 전시 중의 자기 자신에 회한을 갖지 않는 문학가는 거의 없었다. 전쟁을 투철하게 반대한 자도, 전쟁을 찬미한 글을 실천해서 옥쇄한 문학가도 극히 소수였다. 대부분의 문학가는 보신이나 편승으로 전쟁에 협력하고 자기의 내면을 배반했다는 회한을 품고 있었다. 논쟁 상대의 과거를 직접적으로 폭로하는 것은 꺼려졌지만, 전쟁이 가져온 상호 불신과 자기혐오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영화 〈라쇼몽〉에서 자기에게 형편이 좋은 허위 증언을 늘어 놓는 군상을 그린 것도 이런 시대 상황 아래서였다." "그러나 이런 회한으로부터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무장을 생각했을 때, 당시로서는 마르크스주의의 학습과 공산당 참가 이외의 방법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그리고 고바야시나 후쿠다가 정치로부터 나를 지킨다는 논리로 전쟁 책임 문제를 회피했다면, 많은 공산당원들은 정치의 권위로 나에 대한 비판을 지움으로써, 역시 전쟁 체험을 은폐했다."(298-9)


"당시의 공산당 주변에서 민족은 인민과 거의 동의어였고 근대적인 개인의 확립과도 모순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어찌되었든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족을 내세우는 논조는 전시를 떠올리게 했다. 이런 '민족'에 대항하여 아라 마사히토는 '시민'을 내세웠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하나 있는데, 당시에는 일반 명사로서 시민을 사용하는 것이, 다소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지식인의 기본 교양이었던 헤겔 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근대 시민 사회란 자본주의 사회이며 시민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서양 문화의 향유가 도시 중간층의 특권이었던 당시에 세계 시민은 자본가의 대명사이며 민족은 민중의 동의어라는 언설이 성립했던 것이다." "결국 정치와 문학의 분열을 넘어서고자 한 시도에서 만들어진 민족과 시민의 대립이라는 도식은, 전후의 언설 구조가 변천하는 과정을 보여준 하나의 지표가 되어 갔다."(300-2, 309)


2부


7 가난과 단일 민족─1950년대의 내셔널리즘


"1950년대 전반까지의 일본 사회에서는 (사회 전체가 빈곤에 시달리는 가운데) 지식인과 노동자, 도시와 농촌 사이에 압도적인 문화적 격차가 존재했고, 화제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말하자면 당시의 일본은 지역과 계층으로 사람들이 분단되어, 균질한 '일본인' 같은 생각이 거의 통용되지 않는 세계였다." "농촌 인구가 많았던 당시에 '시민'이라는 말은 도시 부르주아층의 대명사였다. 그런 반면 '민중'이나 '대중'은 지식인이나 도시 중산층을 포함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 언어 상황 속에서 도시 중산층과 농민을 모두 포함하는 집단을 표현하는 말은 '민족'이나 '국민'이 되기 쉬웠다. 또한 1950년대의 좌파 지식인들은 단일 불가분한 일본 민족, 단일한 민족 국가라는 말을 이따금 사용했다. 단일 불가분이라는 말은 프랑스 혁명 정권의 표어였던 '하나이며 불가분한 공화국'의 번역에서 파생한 것으로, 신분 및 지역의 분단을 극복하고 국민이 성립한 상태를 지향하는 말이었다."(316-20)


"원래 아시아 국가들의 내셔널리스트들은 당시의 일본 지식인과 유사한 문제를 다루었다. 그것은 서양 근대의 교양을 익힌 도시부의 지식인들과 농민으로 대표되는 일반 민중의 격차였다. 그런 까닭에 아시아 국가들의 내셔널리스트들은 이 격차를 식민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해소하고 하나의 국민으로서 연대를 만들어 낼 것을 주장했다. 특히 중국공산당이 도시 지식인들에게 중국 재래의 문화를 다시 보게 하고, 지방의 민중 속으로 들어가도록 설파한 점은, 일본에서도 지식인들의 주목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1950년대 전반에는 진보계 지식인이 서양 지향을 자기 비판하고 일본인으로의 회귀를 표명하는 것이 하나의 조류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계몽 활동을 대신하여 민중 지향의 다양한 활동이 모색되었다. 그 하나는 대중문화의 연구였고, 그것과 병행해서 민화나 민요가 급속히 재평가되고 민속학이 주목을 모았다. (민중에게 작문을 지도하는) 생활 기록 운동의 대두 역시 같은 움직임으로 들 수 있다."(331-3)


"1955년 7월, 공산당은 그때까지의 무장 투쟁 노선을 극좌모험주의라며 포기했다. 패전 후 공산당이 누린 정신적 권위의 원천은 옥중 비전향과 절대 무류無謬의 신화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전향을 거듭했던 전시에, 공산당만이 주체성을 유지했다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코민포름의 비판에 동요하고, 몇 번이고 방침을 전환하는 공산당의 모습은 그런 신화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당 전체는 코민포름에 종속되었으면서 하부 당원에게는 절대적인 권위로 군림하는 자세 역시, 천황제와 유사한 권위주의라는 인상을 주었다." "요시모토는 1958년의 「전향론」에서 옥중 비전향의 공산당 간부도 일본의 현실을 무시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묵수한 데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후쿠다 쓰네아리가 1947년에 유사한 의견을 말했을 때는 그를 지지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1958년 요시모토의 주장은 공산당에게 실망한 지식인과 학생, 그리고 신좌익(통칭 분트에서 유래한)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353-5)


"1955년에는 공산당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정계 개편이 진행되었다. 공산당이 육전협에서 무장 투쟁 노선을 포기한 것을 전후해, 재군비의 시비를 둘러싸고 분열했던 좌파사회당과 유파사회당이 합체해 일본사회당이 결성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보수 정당 측도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동해 자유민주당을 결성한다. 이른바 '55년 체제'라고 불리는 정당 지도가 이때 완성되었다. 그리고 1956년 『경제 백서』에는 이후 유행어가 된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전후'의 끝이며, 또 하나의 '전후'의 시작이었다. 이제 고도성장과 55년 체제로 상징되는 안정과 번영의 전후가 시작되려 했다. '전후 민주주의'라는 말도 이 시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패전 직후의 민주주의는 구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내걸린 변혁의 상징이었다. 그런 격동의 전후는 끝나고, 민주주의가 55년 체제로 형해화된 의회 정치의 관용구가 되어 가던 때에, 전후 민주주의라는 말이 태어났다."(356-7)


8 국민의 역사학 운동─이시모다 쇼, 이노우에 기요시, 아미노 요시히코 외


"전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계몽 활동 이외에 힘을 쏟은 실천 활동은 교과서 비판이었다. 1946년 10월에 마지막 국민학교 초등과(소학교)용 국정 국사 교과서가 된 『나라의 발걸음』이 발행되었다. 세계사의 견지 및 인민의 역사도 다룬 이 교과서는 교육 민주화의 상징으로 선전되었지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여기에 천황 숭배 교육의 잔재가 보인다든가 전쟁 책임에 대한 추궁이 없다든가 하는 점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교과서 비판은 실증주의에 입각해 정치적 편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실증주의를 비판하는 형태였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지금까지 역사 교육이 정책에 따라서 악용되었기 때문에, 이번의 역사 교과서가 정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문학에서는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예술 지상주의가 비판되었는데, 역사학에서는 실증주의가 그것에 해당했다. 실증주의는 최종적으로는 제국주의 측에 가담하는 부르주아 사상이라고 여겨졌다."(383)


"이시모다 쇼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정치에 참가해서 자기의 연구를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는 「촌락의 역사·공장의 역사」에서 민중 스스로가 창조한 역사를 소개하면서 〈강단 역사학의 좁음, 미천함은 이런 역사가 전국에서 나타나게 될 때 유감없이 폭로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글을 쓰지 못하는 노동자가 역사를 쓰기란 〈실제로는 곤란한 작업일 것〉이다. 거기서 〈역사의 전문가가 그 일을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때 역사학자의 역할은 〈높은 곳에서 민중에게 요청하지 않고, 겸손하게 함께 작업을 하는 그런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전문가도 인민으로부터 자기 학문의 좁음을 깨달으며, 함께 공부하고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이었다. 이시모다에게 이런 과정에 참가하는 것은 윤리감이나 책임의식으로 감내해야 할 고행이 아니라 일종의 쾌락이었다." "이런 역사학의 창조는 후에 국민적 역사학이라 불리며, 역사학의 혁명이라는 구호와 결합해서 많은 학생들을 매료시킨다."(390-1)


"그러나 국민적 역사학 운동은 1953년경부터 차츰 막다른 길에 부딪혔다. 운동을 담당했던 학생들은 진지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미숙했다. 우선 드러난 문제는 학생들 중에 민족이나 민중의 권위를 빌려서 타자를 공격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었다. '역사학의 혁명'을 내세운 그들은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는 학자나 교수들을 반혁명적, 근대주의 등이라 비난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공산당의 당내 투쟁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소감파와 국제파가 상호 비방을 확대하며 사문과 린치가 횡행하던 상황 속에서, 국민적 역사학 운동에의 찬반은 이윽고 정치적 입장의 시험지가 되었다." "공산당의 정치 방침에 따라, 서클이나 농촌 조사를 단순한 당세 확장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차례로 현저해졌다. 이시모다는 후에 〈서클을 단순히 새로운 형태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상, 혹은 서클의 수나 그 회원의 증감만이 보고되고, 무슨 내용을 이야기했는가가 조금도 토의되지 않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회상한다."(419-21)


"1951년 이시모다는 지식인의 대중 멸시를 비판하여 〈지식인에게 대중은 료쿄쿠와 통속 소설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속악俗惡을 의미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혁명 민화나 혁명 로쿄쿠를 민족 문화라 칭했던 점에서는 국민적 역사학 운동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즉 '민중 속으로'라는 이념 그 자체가 현실 민중에 대한 무지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실제로 현실 민중의 반응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역설적이게도 국민적 역사학 운동에 비판적이었던 이노우에 기요시 쪽이 석탄암을 깨는 일용직 노동자의 아들이었으며, 돌을 쪼개고 짚을 엮으며 대학까지 다닌 사람이었다. 이노우에는 국민적 역사학 운동이 끝난 뒤에 〈도련님 아가씨들이 농촌에 들어가서 인민의 빈곤에 놀라고, 봉건제의 뿌리 깊음에 깜짝 놀라, 크게 감격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도 좋은 공부가 되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정수라며 우쭐거리는 데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라고 말한다."(423)


9 전후 교육과 민족─교육학자·일교조


"교육 개혁에서도 점령군의 대응은 빨랐다. 1945년 12월까지 군국주의적인 교원을 추방하는 심사 기관의 설치, 공교육과 신토神道의 분리, 수신·일본사·지리 교육의 일시 정지 등을 명령했다." "1947년 3월 극동위원회가 교육에서 칙어 사용을 금지한 한편, 같은 달에 「교육 기본법」이 제정된다." "점령군의 지령으로 개혁이 진행되고 교원 자격 심사와 추방도 실시되었지만, 일본 측이 행한 심사는 느슨했으며, 추방된 자는 전 교원의 0.5퍼센트, 대학 교원 중에서는 0.3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교육 칙어」에 대해서도 극동위원회가 금지한 지 1년이 넘게 지난 1948년 6월이 되어서야 국회에서 무효 결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패전 후의 교육계에는, 변경된 제도와 변치 않는 교육자라는 모순된 상황이 생겼다. 그 결과는 어제까지 귀축미영과 천황 숭배를 설파하던 교사가 돌연히 미국과 민주주의를 찬미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학생들의 불신을 샀고, 전후 민주주의는 기만이라는 인상을 심었다."(431-2)


"사회 전체의 변혁이 없으면 개인의 행복도 없다는 논조는 고도성장 이전의 일본에서는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 변혁의 시점이 빠진 채로 개인의 중시를 주장하는 「교육 기본법」은 봉건제를 타파한다는 의미에서는 한걸음 나아갔다고 해도, 부유한 자의 승리를 정당화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불과했다." "나아가 비판은 사회 과목으로도 향했다. 역사와 지리를 폐지하고 설립된 사회 과목은 일본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박탈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역사·지리 교육의 부활이 주장되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야가와를 비롯한 공산당계 논자들은 소련과 중국을 모델로 삼아 개인주의와 근대주의를 비판했다. 그에 비해 가쓰다나 우에하라는 프랑스나 독일을 모델로 삼아 근대적 개인들이 뒷받침하는 내셔널리즘을 주창했다. 그런 차이는 있지만 애국심 교육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미국적인 전후 교육을 비판하는 경향은, 당시의 진보계 교육학자들에게 공통되었다고 할수 있다."(440-4)


"이렇게 전전과의 연속성이 발생한 배경에는 교육계에서 공직 추방이 거의 실행되지 않았다는 사정이 있었다. 전후의 많은 교원들은 전전부터 교육에 종사했거나, 혹은 전전의 교육으로 인격을 형성한 인간들이었다. 성전 완수가 민주주의로 바뀌어도, 애국심과 민족이 강조되는 사태가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연속성은 당시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존재한 경향이었다. 그러나 교육학 분야에는 전쟁에 협력했던 자가 역사학보다 많았으며, 전시와 전후 간에 말 사용의 연속성이 보다 현저했다. 예를 들어 야가와 도쿠미쓰는 전시에 대일본청소년단의 교양부장을 맡아 1942년에는 〈일본 민족이 오늘날 세계에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은, 세계를 진짜 세계답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1952년에 〈오늘날 우리의 대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평화 확보와 민족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리라. 그것은 우리 일본 민족의 위대한 사업이다〉라고 말했다."(460-3)


"1950년대 교육학자들에게는, 전쟁 전의 교육에 존재했던 국가 목표에 향수를 품고 그 대안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행동 양식의 연속성 속에 있는 한, 새로운 교육 이념을 모색하더라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얻어질 리 없었다. 그들이 어떤 이념을 찾아냈다고 해도, 그 행위가 국가 목표의 대용품을 찾는다는 의식에 기반을 두는 한, 그것이 대용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가 잠재적으로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패전 후의 교육론을 구속한 것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각인된 행동양식이었다. 황국 일본에서 주권 재민의 나라로 말이 바뀌어도, 공통어를 보급하고, 교사의 지도성을 부르짖고, 반미를 주창하고, 민족과 전통을 상찬하고, 국가 목표를 추구한다는 행동 양식이 실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사상적인 대립과는 대조적으로, 보수파와 상통하는 부분이 생긴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여기서 생긴 불신감은 전후에 교육 받은 아동들이 성인이 된 1960년대에 전후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의 배경을 이룬다."(474-5)


10 피로 물든 민족주의의 기억─다케우치 요시미


"다케우치 요시미는 「중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라는 논고에서, 중국과 일본의 차이는 〈궁극적으로는 고유의 문화를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差〉이다. 즉 〈중국의 문명은 만들어 낸 것이며, 일본처럼 남에게서 빌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제도든 사상이든, 유럽 문명이 낳은 결과만을 빌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혁을 실현하는 길은 내부로부터의 자기 개조를 관철하는 것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이런 근대 일본에서는 자유주의가 길이 막히면 전체주의, 전체주의가 패배하면 민주주의로, 위기 때마다 외국에서 사상을 수입해 올 것이 기대된다. 요약하자면 〈과거에 주어진, 지금도 주어진, 장래에도 주어질 것이라는, 주어지는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 온 심리 경향이 뿌리내렸다〉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진정한 절망이나 자기 혁신에 이르지 못하고 〈영구히 실패함으로써 영구히 성공한다. 무한한 반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보인 듯 생각된다〉라고 다케우치는 말한다."(510-1)


"다케우치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종종 주체성이나 현실, 혹은 정치 등을, 어딘가로 찾으러 가면 주어지는 완성품처럼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주어져야 할 '주체성'을 밖으로 찾으러 나가는〉 것이나 〈현실이라는 실체적인 것이 있어서 무한히 그것과 가까워지는 것〉이 시도된다. 이렇게 해서 자기를 찾으러 밖으로 나간다는 행위, 외부에서 구원을 찾는 기대가 노예의 상태를 고정시킨다." "이렇게 외부에서 문화를 이입해서 위기를 회피하는 것은 물론, 전통을 묵수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자기 보전이며 자기를 잃는 데 불과하다. 서양의 모방과 그 반동에 불과한 국수주의의 사이에서 흔들려 왔던 근대 일본은 〈자기라는 것을 거부하고 동시에 자기 이외의 것을 거부한다〉라고 다케우치는 말한다. 반면 루쉰은 과거의 자기에 머무르는 것도 외부의 힘에 기대서 자기를 포기하는 것도 거부하고 저항한다. 그 양쪽에 대한 거부는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동시에 노예의 주인이기도 거부〉하는 것이다."(512-3)


"다케우치의 사상은 실은 동시대의 사상과 연속되어 있다. 메이지부터 일본의 근대화를 다시 생각한다는 접근도, 주체성이라는 문제에 집착한 것도, 봉건제를 비판하고 국민적 기반의 성립을 지향한 것도, 거의 마루야마와 공통되었다." "그러나 마루야마가 근대를 기준으로 일본 사회를 비판한 데 비해서, 다케우치는 긍정해야 할 근대와 부정해야 할 근대를 나누어 일본의 근대화와 봉건제 쌍방을 비판했다. 다케우치가 일관되게 비판한 것은, 외부의 권위로부터 주어지는 우등생이나 열등생이라는 위치 짓기에 자기가 스스로 말려드는 노예근성이었다. 그런 노예근성을 일종의 자기 보전과 자기 동일성의 희구라고 간주하면, 그것에 근대라는 명칭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권위에의 예종을 봉건적이라고 간주하고 (서양 문화를 재빨리 이입한) 우등생과 (그러지 못한) 열등생의 분단 상태를 봉건사회의 길드와 같다고 논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 까닭에 다케우치에게는 근대 비판과 근대 지향이 모순되지 않았다."(522)


"다케우치는 「근대주의와 민족의 문제」라는 논고에서 〈근대주의란 바꾸어 말하면 민족을 사고의 통로에 포함하지 않는, 혹은 배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케우치가 이 논고에서 '피투성이 민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자기의 내부에 있는 암흑이며, 구체적으로는 전쟁 책임 문제였다." "대일본 제국이 외부의 힘으로 쓰러져도, 자기 안에 야만인 심리가 잠들어 있음을 깨달은 다케우치에게 〈악몽은 잊힐지도 모르지만 피는 씻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는 전후의 지식인들이 피투성이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민주화나 근대화라는 〈관념과 말의 권위에 기대어〉, 〈자기만은 빠져나간 것〉처럼 구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케우치는 이 논고에서 내셔널리즘과의 대결을 주장하며 〈더러움을 자기 손으로 씻지 않으면 안 된다〉, 〈오로지 용기로써 용기를 가지고 현실의 밑바닥을 뚫고 가라〉,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비겁하다〉 등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525-7)


11 자주독립과 비무장 중립─강화 문제에서 55년 체제까지


"1950년 6월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로 출동한 주일 미군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GHQ는 일본 정부에게 경찰예비대를 설립하도록 지시했다. 이것과 병행하여 미국은 미군의 점령을 종료하고 일본을 독립시켜서 반공 동맹국으로 육성하는 방침을 택했다." "그러나 미국은 점령 종료 후에도 극동의 출격 기지로서 일본을 확보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로 미군의 일본 주둔을 인정하는 미일 안전 보장 조약과 쌍을 이루는 형태로 1951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미군 주둔에 반발한 소련과 중국, 인도 등은 이 강화 회의에 불참했다. 이 강화 회의를 앞두고, 미국 주도의 강화 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을 긍정하는 '단독 강화론', 그리고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강화를 주장하는 '전면 강화론'이 대립했다. 이 전면 강화론을 주창한 것으로 잘 알려진 지식인 집단이 바로 '평화문제담화회'이며, 그런 논의 속에서 헌법 제9조도 주목받게 된다."(541)


"요시노 겐자부로는 1948년부터 평화문제담화회를 조직해 공산당으로부터 한발 떨어진 지점에서 평화 운동을 개시했다. 이 평화문제담화회는 1948년 7월에 유네스코에서 발표한 유럽의 사회 과학자 8인이 낸 평화 성명에 자극받아, 일본의 사회 과학자로서 평화 성명을 내고자 요시노가 조작했다." "그러나 (전쟁이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발생한다고 본) 공산당계 논자들은 냉담한 반응이었다. 유네스코의 헌장에는 〈전쟁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성명은 인간성을 중시하고 사회 과학을 '인간의 학學'이라고 규정했다. 요시노는 여기에서 기존의 사회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간의 이항 대립적인 도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인간이 이루어 가는 평화로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말하자면 유네스코의 성명은 오쓰카 히사오에게 베버가, 마루야마에게는 근대 국민 국가의 이념이 그랬듯이, 전쟁 체험에서 태어난 심정을 표현할 때의 자극 매체가 되었다."(562-3)


"〈미국의 행동을 심판할 척도가 우리 손 안에 있다〉라는 논리는 당초부터 평화문제담화회에 존재했다. 1948년 12월의 토의에서 의장 아베 요시시게는 〈극동 재판은 평화와 문명의 이름으로써 일본 국민을 재판한 것입니다〉, 〈연합국이 평화와 문명의 이름을 가지고 우리를 재판한 이상, 반드시 우리를 향해 평화와 문명을 보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연히 그런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한다. 아베의 이 주장은 1949년 1월의 성명에도 담긴다." "요시노 겐자부로는 당시를 회상하며 〈극동 재판에서 일본 국민을 그처럼 재판했던 상대가, 지금 다시 전쟁을 하려는 것이며, 거기에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불만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평화를 요구하는 것은 일본의 구질서와 현재의 동서 대립에 대한 양면적인 비판이 된다〉라고 말한다. 비무장 중립론과 호헌론은 미소라는 양 대국에 대한 자주독립의 의지 표시이자, 미국을 추종하며 부활을 꾀하는 일본의 구질서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569-70)


"전후 배상은 본래 평화의 문제와 불가분일 터였다. 그러나 패전 후의 궁핍한 경제 상태 속에서는 평화를 향한 바람이 우선시되고 배상 문제는 경시되기 쉬웠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에 가해진 가혹한 배상이 나치스가 대두하는 온상이 되었다는 역사도 존재했기에, 배상 청구가 억제된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전쟁 책임은 오로지 일본의 위정자가 일본 국민에게 끼친 피해를 묻는 것, 혹은 지식인의 처신 방법이나 주체성의 문제였다. 이처럼 전면 강화론자들 역시 솔직한 애국심에 의거했던 만큼, 대다수 '일본인'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결여하기 일쑤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발효로 자이니치 조선인 및 타이완인들의 일본 국적이 박탈되었지만, 그 문제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오키나와의 분리에 대해서는 지식인층에서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동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았지만, 일본 정부나 사회당은 오로지 영토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584-5)


"추방이 해제된 보수 정치가들이 대량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1953~1956년은 정치 제도가 전전으로 회귀할 위험이 가장 강했던 시기다. 개헌 준비뿐만 아니라 1954년에는 보안대가 자위대로 승격했고, 1956년에는 교육위원회의 공선제가 폐지되었다. 그 밖에 (남성 호주제 중심의) 가족 제도를 부활시키는 민법 개정이 계획되었고, 전후 개혁으로 해체된 내무성을 부활시키는 내정성內政省 설치 법안 등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이른바 '55년 체제'가 성립하면서 사회당의 좌파와 우파, 그리고 공산당 등은 양쪽 모두 1955년을 경계로 자기 당의 사회 구상을 보류함으로써 국민적인 호헌 운동에 참가했다. 이를 통해서 전전 체제로의 회귀를 저지했다는 의의는 분명히 컸다. 그러나 그 대가로 각자가 본래 지향했던 사회 구상을 서로 대결시켜 가는 역동성은 사라졌다. 그런 가운데 호헌, 평화, 민주주의라는 말이 보수 세력의 공세로부터 전후 개혁의 성과를 〈지킨다〉는 방위적인 슬로건이 뒤어 갔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592-4)


12 60년 안보 투쟁─전후의 분기점


"1951년 안보 조약에는 미국의 일본 방위 의무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미국에게 일본을 방위할 의무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안보 조약을 개정하는 지름길은, 일본이 헌법을 개정해서 재군비와 해외 파병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적어도 어떤 방법으로든 미국의 국제 전략에 공헌하지 않고서는 안보 조약을 보다 대등한 관계로 가져가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보수 정권의 생각이었다." "기시가 안보 조약 개정을 둘러싸고 미일 교섭을 추진했던 1958년은 내정에서도 충돌이 많은 해였다. 일교조 억압, 경관의 권한 대폭 확대 등을 둘러싼 일련의 충돌은 기시가 종래부터 개헌론자였던 점과 어우러져서, 안보 조약 개정과 전전 체제의 부활은 한 몸이라는 인상을 확대시켰다. 이제 안보 조약 개정은 단순한 외교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전후 일본의 거시적인 디자인을 둘러싼 대립이 되고 있었다. 그 대립은 1960년에 들어가서 큰 불을 뿜는다."(604-6)


"기시는 관료적인 권위주의, 미국에 대한 종속, 전쟁 책임의 망각, 그리고 비열함이라는, 전후사상이 혐오해 온 모든 것을 갖추었다. 쓰루미는 〈기시 수상만큼 멋지게, 쇼와 시대 일본의 지배자를 대표하는 자는 없다. 이보다 훌륭한 하나의 상징은 생각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일본에서 현재 벌어지는 일은 실질적으로는 패배 전에 일본을 지배했던 국가와 패배 후에 태어난 국가라는, 두 국가의 싸움이다〉라고 주장했다. 5월 19일의 안보 조약 강행 채결을 경계로 문제는 안보에 대한 찬반으로부터 '전전 일본'과 '전후 일본'이라는 '두 국가의 싸움'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기시에 대한 항의만큼 전후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공공연히 표명할 기회는 없었다." "그때 사람들은 전쟁의 기억을 상기하면서, 전후에 계속 품어 왔던 심정이 기시 노부스케라는 상징으로 응축되는 것을 느꼈다. 시미즈가 말했듯이 〈오랫동안 말로 표현되지 못했던 낡은 경험과 감정〉이 이제는 〈표현의 기회〉를 획득하려 했다."(615-7)


"안보 투쟁은 '시민'이라는 말이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정착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시민'이라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움직임이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있었지만, 시민을 프티 부르주아와 동의어로 보는 공산당 주변의 인식은 뿌리가 깊었고, 이 말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보 투쟁 속에서 공산당의 권위가 실추되고 노동자나 농민에 의존했던 기존 조직으로부터 독립된 운동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말로서 시민이 사용되어 갔다." "이런 시민은 내셔널리즘과 모순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후쿠다 간이치는 시민 정신을 상찬하면서 〈일본 국민이 처음으로 국민으로서의 책임에 나섰다〉, 〈실로 국민 국가 일본의 원리적 탄생을 예고한다〉라고 말했다. 역시 젊은 정치학자였던 사카모토 요시카즈는 좀 더 직접적으로 〈안보에 대한 도전이라는 형태로, 일본 역사에서 데모크라시와 내셔널리즘이 처음 손을 잡았다〉라고 주장했다."(630-2)


"5월 19일의 강행 채결에서 30일이 경과하면 참의원의 심의를 거치지 않아도 안보 조약은 자연 승인되었다. 그 기일인 6월 19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간바 미치코가 사망한 6월 15일, 아이젠하워의 도쿄 방문이 중지된 16일, 그리고 「폭력을 물리치고 의회주의를 지켜라」라는 신문의 공동 성명이 나온 17일, 국회는 연일 거대한 데모대로 포위되었지만, 기시 수상은 여전히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다." "운동 측에는 결정적인 한 수가 없었고, 사회당과 공산당을 비롯한 혁신 정당은 구체적인 방침을 표명하지 못했다." "6월 18일, 데모대는 밤새워 국회를 포위했지만 마침내 시간은 0시를 맞이하고 안보 조약은 자연 승인되었다." "다음날인 20일에 참의원의 자민당은 야당의 허를 찌르고 안보특별위원회와 본회의를 단독으로 열어, 안보 관계 법안을 일거에 통과시켰다. 22일에는 미국 상원이 신안보 조약을 승인하고, 23일에 가서 기시 수상은 외상 공저公邸에서 비준서를 교환한 뒤, 내각 총사직을 공표했다."(654-5)


"이런 결과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시미즈 이쿠타로는 안보 자연 승인의 밤, 패배감에 무너져 울었다. 대조적으로 마루야마 마사오는 투쟁 속에서 실현된 질서 의식과 연대감의 압도적인 인상에 비하면 〈'자연 승인'의 순간 같은 것은 나의 뇌리 속에 하잘 것 없는 장소밖에 차지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승패의 평가가 어찌되었든 간에 안보의 자연 승인과 기시 수상의 퇴진 이후, 데모의 물결은 급격히 시들어 갔다. 애초에 5월 19일 이후 운동의 성황은, 안보 그 자체에 대한 반대보다도 기시에 대한 반감과 전학련으로 대표되는 소박한 정의감으로 뒷받침되었다. 기시가 퇴진하고 안보가 자연 승인되면서 소박한 정의감에서 보면 패배가 명확해진 이상, 운동의 퇴조는 피할 수 없었다." "기시를 대신해서 수상이 된 이케다 하야토는 취임 직후에 「소득 배증 계획」을 발표했고, 본격적으로 고도 경제 성장의 막이 오르려 했다. 그리고 전후 일본의 민주와 애국을 둘러싼 언설도 변동의 시대로 들어간다."(655-7)


3부


13 대중 사회와 내셔널리즘─1960년대와 전공투


"고도 경제 성장의 진전, 1963년 OECD 가입, 1964년 도쿄올림픽 등의 현상과 병행해 발생한 것이 체계적인 사상을 갖추지 않은 무자각적 내셔널리즘의 확산이다." "정치학자 마쓰시타 게이이치에 따르면, 생산력과 대중 매체의 발전으로 인해 서방 선진국에서는 문화와 생활 양식의 균질화가 진행 중이며, 계급 사회에서 대중 사회로 이행되었다. 거기에서는 계급 대립을 전제로 한 사회주의 혁명이 성립되지 않으며, 정치에 무관심한 대중이 주류를 차지한다. 그리고 과거에 마르크스가 〈조국을 갖지 않는다〉라고 말한 프롤레타리아트도 〈사회의 '소시민화'〉와 〈대중 민주주의〉로 〈자본주의 국가의 '국민'으로 전화〉하여 대중 내셔널리즘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중에 '단일 민족'이라는 말의 용법도 변화했다. 이 말은 1950년대에는 형성되어야 할 목표로서 좌파가 주창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로는 고대 이래의 기성사실을 가리키는 말로 보수 측이 주창하게 된다."(665-8)


"고도 경제 성장과 병행하여 생긴 현상이 하나 더 있었다. 전쟁 체험의 풍화이다." "전쟁 체험의 부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의 등장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의 기억이 차츰 형해화하면서 동시에 미화의 대상이 된 점이었다." "전쟁을 미화하는 전기물이 용전감투勇戰敢鬪나 순수무잡純粹無雜을 강조한 반면, 전쟁의 비극을 전하고자 하는 전쟁 체험물은 비극과 노고를 정서적으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양쪽은 정치적 입장은 반대였지만, 전쟁을 감상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점과 전후사상의 가장 큰 계기였던 굴욕과 회환의 상처에 닿는 부분이 적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1956년 히다카 로쿠로가 말한 바에 따르면 전쟁을 모르는 세대뿐만 아니라 전쟁 체험 세대에서도 〈전쟁이 이미 각자의 체험과 실감을 넘어선 추상물이 되기 시작〉했다." "체험자들에게만 통하는 폐쇄적인 표현은 점차 정형화되어, 회한을 감상으로 은폐하는 미사여구가 되어 버리기 쉬웠다."(671-4)


"그리고 고도성장이 진행되면서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대두했다. 이런 비판은 평화로운 시대밖에 알지 못하고, 그런 상황에 권태를 느끼게 된 전후 세대의 공감을 불렀다. 전학련 주류파의 젊은이들과 친교가 있던 시미즈 이쿠타로는 1961년에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일정한 연령 이상의 인텔리는 전전 및 전시 중의 어두운 기억이 살아 있기 때문에, 평화와 민주주의가 전후의 양대 가치라는 점만으로도 제법 만족할 수 있지만, 젊은 녀석들은 매우 다르다. 전후에 소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양대 가치가 당연한 것, 평범한 것, 심지어는 지루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평화와 민주주의의 기만을 지적하는 젊은이들 중 많은 수가 1955년 이전에 다양한 헌법관과 평화관이 존재했다는 점을 몰랐다." "어쨌든 이 시기부터 패전 후에 존재했던 다양한 사상 조류와 개혁을 일괄해서 '전후 민주주의'라 총칭하는 방법이 급속하게 일반화되었다."(676-8)


"전후의 학제 개혁과 고도성장은 대학생의 급격한 대중화를 초래했다. 그에 더해 1960년대 중반부터 패전 후 베이비 붐 세대의 대학 진학이 이루어지면서, 진학률의 급상승과 더불어 수험 경쟁의 격화와 대학 설비의 부족이 일어났다. 그 결과로 출현한 것이 대학 입학 이전에는 입시 학원과 진학 학원의 증가이며, 대학 입학 후에는 대강당에서 마이크로 이루어지는 강의였다. 수험 전쟁, 메머드 대학, 매스 프로mass production(대량 생산) 교육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수험 전쟁을 뚫고 도달한 대학에 열악한 설비와 대량 생산화된 교육 내용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런 학생들에게 기대에 대한 큰 배신이었다. 또한 1960년을 경계로 대학 졸업자의 완전 취업 상태가 성립했지만, 대학 졸업생의 급격한 증가 때문에 취직 가능한 직업은 평범한 것으로 변했다." "이런 사태는 큰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들이 자신의 미래가 제한되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688-9)


"이런 배경 속에서 1960년대 후반에는 각지의 대학에서 분쟁이 이어졌다. 마침내 1968년에는 니혼대학과 도쿄대학에서 학생의 대학 점거가 일어나, 전 학교의 학생을 규합한 전학공투회의全學共鬪會議가 결성되어 '전공투'라고 약칭되었다. 1965년 한일 회담 반대 투쟁 이래로 학생운동은 일시적으로 정체되었는데, 1967~1968년 이후에는 한 번에 불타올랐다. 이 전공투의 대학 점거는 이윽고 전국 각지의 대학에 파급되어, 전공투 운동이라고 총칭되었다. 이 전공투 운동은 많은 경우에 혁명이나 소외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언어를 쓰며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배경이 된 것은 학생의 대량화와 기존 대학 조직 간의 불일치이며, 아키야마 등이 말하는 〈엘리트적 의식과 존재 사이의 결정적 결락〉이며, 대형화되는 대학과 사회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진실을 되찾고 싶다는 욕구〉였다. 이런 배경이 없었다면 전공투 운동이 일부 활동가의 범위를 넘어서 그토록 퍼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690-1)


"전공투 운동에 참가한 세대는 전쟁과 기아를 경험하지 않았다. 당시의 신좌익계 활동가 중 한 명은 〈데모에 가게 된 것은, 아무 고생도 하지 않고 자라나 세상 물정 모르고 도움도 안 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무엇이든지 하고 싶다는 '성실한' 기분과, 시대의 분위기에 빠르게 감응하며 유행을 좇는 패거리의 '비일상'에 대한 동경이 동거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라고 회상한다. 때문에 당시의 전공투계 학생들의 수기에는 매스mass, 일상, 질서 등에 대한 반역을 이야기하거나, 〈자기 부정〉, 〈일상의 부정〉, 〈예속의 평화보다 자유의 투쟁을!〉 등이라 호소하는 것이 많다. 도쿄대 전공투의 어느 학생은 〈전공투는 어떤 대학을 만들고 싶은 것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들은 싸움 그 자체를 바란다〉라고 답했다. 이런 전공투계의 학생들이 싫어한 말은, 민주주의, 평화, 근대 시민사회, 근대 합리주의, 협상 등이었다. 그들에게 그것들은 기존 사회를 지탱하는 논리이며 혁명을 말리는 개량주의였다."(693-4)


14 '공적인 것'의 해체─요시모토 다카아키


"1955년경부터 널리 사용된 전중파戰中派라는 말은, 훗날에는 전쟁 체험을 겪은 세대 전부를 총칭하게 되었지만, 당초에는 패전 시에 10대 후반에서 20대 전반의 청춘기였던 세대를 가리켰다. 보다 나이가 많은(패전 시에 30세 전후) 마루야마 마사오와 다케우치 요시미의 세대를 전전파戰前派, 보다 소년이었던(패전 시에 10세 전후) 에토 준과 오에 겐자부로 등의 세대를 전후파戰後派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전중파는 전시 중에 가장 중심적인 동원 대상이 되었고, 가장 사상자가 많았을 뿐 아니라, 중등·고등 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도 갖지 못했다. 또 그들의 유년기는 황국 교육이 격화된 시기였고, 게다가 극도의 언론 탄압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나 자유주의를 접할 수도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던 그들에게는,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사상을 가진 인간이 있다는 것도, 전쟁 이외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719-20)


"이런 까닭에 전중파 지식인들은 전쟁이야말로 정상이고 평화 쪽이 이상이라는 감각을 종종 이야기했다. 1956년 좌담회에서 무라카미 효에는 〈전쟁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감정으로 자라났다〉라고 말했고, 작가 미시마 유키오도 〈지금 쪽이 정상이 아닌abnormal 듯한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다〉, 〈끊임없이 '진짜가 아니다'라는 의식이 있다〉라고 응한다. 전후사상을 의제擬制라고 비파한 요시모토는 이런 세대에 속했다." "교양과 지식량에서 윗세대에 뒤지는 그들이 기댈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가혹한 부분을 경험했다는 자부심이었다." "또한 이 세대의 최대 무기가 된 것은, 전쟁에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했던 연장자들의 책임을 추궁하고, 그들을 비겁하다고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중파의 다수는 윗세대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면서도 자신의 전쟁 책임은 느끼지 않았다." "본래 전쟁에 비판적인 사상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전쟁에 항의할 용기가 없었다는 종류의 회한을 공유하지 않았다."(721-5)


"전중파 지식인들에게는 동세대 중에서도 특이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 가운데 전선에서 전투를 경험한 자가 적다는 사실이다. 사토 다다오는 소년 비행병으로, 시라토리 구니오는 해군경리학교생으로, 모두 군 부속 학교의 생도로 일본 내에서 패전을 맞이했다 무라카미 효에와 무라카이 이치로, 우메하라 다케시 등은 청년 장교 혹은 학도병이었지만, 전선에서 근무한 경험은 없으며 역시 일본에서 패전을 맞이했다. 그리고 전중파 지식인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는 미시마 유키오와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태평양 전쟁 중에 20세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병역을 경험하지 않았다." "또한 동세대 속에서도 순진한 전쟁관을 패전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 경험 없는 학생들이 중심이었다. 요시모토와 미시마처럼 징병 체험이 없는 자는 군대 내부의 부정과 린치, 전장에서의 학살 행위 등을 목격하는 일도 더더욱 없었고, 정부의 슬로건이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챌 기회도 없었다."(729-30)


"요시모토를 비롯한 많은 전중파 지식인들의 패전 묘사에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숭고한 이념에 불타 완전히 죽음을 믿었던 상태에서, 너무나 돌연하게 8월 15일을 맞이해서 국가에 대한 가치관이 격변했다는 것이 그 전형이다." "1955년경부터 전중파 지식인들이 이런 특권적인 패전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 이야기 방식은 전쟁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전후 민주주의의 위선을 공격했던 신좌익계의 젊은이들은 이런 전중파의 이야기를 환영했다. 이런 이야기가 민중의 전쟁 체험이었다면 진보적 지식인이 반전의식을 품었다는 것은 기만이며, 그들은 침략 전쟁에 협력한 과거를 은폐했거나 혹은 민중과 동떨어진 특권적인 엘리트에 지나지 않았음이 입증되기 때문이었다. 거기서는 전중파 세대의 향수와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의 비판의식이 전후 비판이라는 형태로 공범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729-33)


"1960년 안보 이전의 요시모토는 목숨을 걸고 싸워서 사상과 행동의 뒤틀림을 해소하고, 이 세상에서 피안으로 간 사자인 대중으로부터 그런 반질서를 찾았다. 그러나 1960년 이후의 요시모토는 같은 대중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전사자가 아니라 모든 '공'적 질서를 무화하는 '사'생활에서 찾아 갔다. 물론 그 사적인 존재는 마루야마가 주창한 바와 같은 근대적 책임 주체로서의 개인이나 시민은 아니었다." "요시모토가 주창하는 대중은 〈실로 국가 자체를 넘어 버린다〉. 그 대중이란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감성의 질서와 무관한 존재이며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적인 존재였다. 1963년의 평론 「묘사와 거울」에서 요시모토는 기존의 정치를 해체하는 것으로서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의 힘〉을 상찬한다. 그는 〈생산의 고도화가 촉진된 대중 사회의 힘〉이야말로 〈스탈린주의의 해체를 촉진〉했으며, 이것은 〈긍정적으로 다루어야 할 상징〉이라고 말한다."(774)


"요시모토의 저작은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았다. 그것은 고도성장 속에서 권위와 죄책감의 제약을 뿌리치고 자기 좋은 길을 걷는 것을 정당화해 줄 사상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자기 좋을 길을 걷는다는 그 바람은, 혹은 전공투 운동을 비롯해 권위에 반항하는 형태로, 혹은 죄책감을 벗어나 사생활에 몰두하는 형태로 각각 표현되었다. 요시모토의 사상은 그런 움직임을 촉진하는 촉매로 기능했다. 어떤 의미에서 요시모토 사상의 매력은 다양한 모순을 혼연히 포함한 점에 있다. 거기서는 철저 투쟁을 말하면서 사생활에 몰두하는 것이 궁극의 반질서로 여겨졌다. 〈대중의 원상原像을 투입하자〉라면서,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초월에 도달하는 것이 지향해야 할 〈자립〉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그런 혼돈 속에서 그때그때 자기의 바람에 응답해 주는 말을, 시를 읽듯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바람에 지지를 받으며 민주주의 신화를 비판한 요시모토는, 그 자신이 신화가 되어갔다."(784-5)


15 시취屍臭에 대한 동경─에토 준


"에토 준은 만주 사변 이듬해인 1932년에 태어났다. 소국민小國民 세대 등으로도 불리는 이 세대는 패전 시에 10세 전후에서 10대 초반이었다. 패전 시에 31세였던 마루야마 등의 전전파는 물론, 패전 시에 20세였던 요시모토 등의 전후파보다도, 더욱더 빈틈없이 전쟁과 황국 교육에 물들어서 자라난 것이 이 소국민 세대였다." "그러나 패전은 금세 찾아왔다. 전쟁에 헌신하는 것 이외의 가치관을 알지 못했던 소년 소녀들에게, 그것은 세계의 붕괴를 의미했다. 자기를 질타했던 교사가 변모하여 미국과 민주주의를 찬미하기 시작한 충격도 컸다." "때문에 이 소국민 세대는 전쟁으로 상처를 입었지만 전쟁 체험의 가혹함을 이야기한다는 판에 오르면, 자기들이 연장자보다 뒤처진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전쟁 체험에 집착하는 전중파에 대한 반발이 더해져서 자기들은 전쟁의 상처와는 무관한 전후파라고 강조하는 경향이 보였다."(789-95)


"전쟁의 상흔은 그들보다 윗세대인 전전파와 전중파의 경우, 회한이나 굴욕과 같은 사회적인 기억으로 새겨졌다. 그러나 패전 시에 10세 전후로, 자기의 체험을 위치 지을 사회적인 언어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던 소년 소녀들은 보다 추상적인, 표현되지 않는 억압감으로서 전쟁의 압력과 죽음의 공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소국민 세대의 소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병사로서 죽을 것을 교육받았다. 그것은 동경과 동시에 공포이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겉으로 드러내고 공언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의 내심으로 인정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그런 탓에 그들은 죽음의 공포를 무의식 중에 억압했다. 그리고 그들의 2차 성징기가 전쟁과 겹친 까닭도 있어서, 억압된 죽음의 공포는 종종 성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각인되는 형태가 되었다." "이런 죽음과 성의 이미지 결합은 체계적인 언어를 갖지 못했던 소국민 세대의 내부에서, 신화처럼 혼돈된 기호의 난무로 기억되었다."(802-3)


"패전 직후의 에토는 다자이 오사무에 심취했다. 사양족斜陽族이라는 유행어까지 낳은 다자이의 문학은 전쟁으로 절망과 몰락을 강요당한 청년층에게 인기를 모았다. 에토는 〈우리 집이 급속히 무너졌을 때, 다자이 오사무를 숙독했던 흔적은, 아마도 평생 사라질 것 같지 않다〉라고 회상한다." "또한 에토는 〈나는 그 무렵 다자이 오사무를 통해 일본 낭만파를 바라보며, 혹은 일본 낭만파만을 바라보았다〉고 말했다." "에토가 다자이에서 찾아낸 것은 일본 낭만파를 상징하는 죽음의 향기였다. 에토에게 그것은 그가 태어났고 자란 전쟁 시대에 가득 찼던 향기이며 잃어버린 유년 시절을 함께한 친어머니와 할머니들의 향기였다. 다자이로 상징되는 달콤한 시취는 유년 시절에 각인된 '물컹거리는 추악한 것'으로부터 떠도는 향기이며, 에토에게는 공포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취의 유혹을 거부하고 전후의 현실 생활에 맞서는 것이, 그에게는 〈어른이 된다〉라는 의미였다."(811-2)


"원래 에토는 이 세대의 젊은 지식인들이 으레 그랬듯이, 마루야마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천황제나 전중파 지식인, 그리고 안보 투쟁의 지도자 등을 비판할 때 마루야마의 〈무책임의 체계〉라는 말을 상용했다. 정치는 결과 책임의 문제이며, 동기의 순수함을 관계가 없다는 전학련 평가도 마루야마의 영향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런 마루야마가 자기가 기대했던 것 같은 견해를 보이지 않은 점에 에토는 분노를 보였다. 에토가 보기에 마루야마가 8월 15일(패전의 날)을 기준점으로 현상의 일본을 비판하면서 공적 관심의 재건을 호소한 것은, 관념에 기대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려는 자기 절대화였다. 에토에 따르면 〈'전후'에 정의의 실현을 본다는 사고방식〉은 〈전쟁에 어떤 도덕적 가치를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란 힘과 힘의 충돌에 불과하고, 전후 개혁도 미군에게 필요한 점령 정책에 불과했다. 평화 또한 신성한 가치 같은 것이 아니고 싸움을 회피하는 일상적 노력이라는 산문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834-5)


"전후사상에서 에토의 특징은, 구세대의 올드 리버럴리스트와는 달리 자기의 아이덴티티 문제에서 보수사상을 세워 간 점에 있었다. 올드 리버럴리스트들은 전쟁 전 중산 계층의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자기를 형성했고, 거기에서 길러진 가치관과 생활 감각을 기초로 하여 전후의 사회 변동을 비판했다. 그러나 에토는 올드 리버럴리스트들과 출신 계층은 겹치지만 소년기에 몰락을 경험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아이덴티티를 형성할 수 없었다. 전후 사회에 허구감을 품는 것이나 죽음과 국가에 대해 양가적 태도를 가진 것은 그 세대의 문학가들에게 적지 않은 현상이다. 그러나 에토의 특징은, 생모의 죽음이 전쟁의 개시와 겹쳤고 아버지와의 갈등이 패전과 겹쳤다는 우연에서, 이런 양가성과 거부감이 '집'의 문제와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에토는 패전의 아픔을 잊기 위해 전후 사회의 현실을 거부하고, 국가라는 백일몽을 쌓아 올리며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희구해 갔다."(856-7)


16 죽은 자의 월경─쓰루미 슌스케, 오다 마코토


"전쟁 전 지식인의 기본 교양은 헤겔이나 마르크스 등의 독일 철학이었고, 교토학파 등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난해한 철학 용어로 전쟁을 미화했다. 그러나 쓰루미 슌스케는 미국에서 익힌 논리 실증주의와 프래그머티즘, 기호론 등을 무기로 이런 부적 같은 언어의 비합리성을 철저히 비판했다." "쓰루미는 패전 후 철학의 역할로 비판, 지침指針, 동정同情의 세 가지를 든다. 이 가운데 비판과 지침은, 전시 중에 횡행한 비논리적인 기호 사용법을 비판하고 장래를 향한 합리적 지침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쓰루미 사상의 특징은 그가 철학의 세 번째 역할로 든 동정에 있다. 쓰루미가 여기서 말하는 동정은 타자에게 연민을 쏟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동정은, 타자가 자기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 위에서, 타자와 공감하고 연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근저에 있는 〈만인에게 공통되게 존재하는 부분의 인자들〉을 찾아냄으로써 공감과 연대의 기반을 포착하는 일이 철학의 임무라는 것이다."(878-80)


"동시에 미국에서 언어 심리학을 배운 바 있는 쓰루미는 일상적인 기본 언어에는 민족어의 다양성을 초월하여 인류 공통의 룰이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쓰루미의 보편 지향이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그의 대중 지향만이 아니라 내셔널리즘과도 대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양에서 배운 보편사상(이라고 칭하는 것)을 내세워서 대중을 계몽하려는 지식인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 사상을 벗겨 내고 내려가면 지식인들 역시 대중과 같은 일상어를 사용하며, 〈조상 이래의 민족문화로 만들어진 자신〉을 찾아낸다. 그것은 지식인과 대중이 계층 대립을 넘어 결합하는 '민족'의 장소다. 그러나 그 민족문화를 또한 벗겨 내고 내려가면 〈민족정신 밑바닥의 그 어떤 이름도 없는 부분〉이 얼굴을 내민다. 이렇게 해서 〈민족주의를 통한 인터내셔널리즘의 길〉이 열린다. 이런 근저에 있는 이름조차도 없는 부분을, 쓰루미는 〈민족주의와 무정부주의가 함께 태어나는 장소〉라고 부른다."(882-4)


"이런 근저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인 대중은 일본의 대중이면서 동시에 마이너리티를 배제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는 1959년 좌담회에서 〈일본 사회의 밑바닥을 꿰뚫고 나가면, 거기에 국제적인 시점이 열려 온다〉라고 말하며, 일본 사회의 '밑'에 존재하는 조선인, 부라쿠민, 창부들 등의 존재를 든다." "나아가 쓰루미의 경우에 이런 틀을 넘어선 근저의 지점은, 일종의 종교 감각과 이어졌다." "원래 영어에서 말하는 영매medium는 인간의 마음을 매개하는 '미디어'와 같은 말이며, 쓰루미는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 연구와 미디어 연구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또한 동정이라고 번역되는 sympathy는 정신 감응telepathy과 마찬가지로, 언어logos로는 표현 불가능한 심정pathos이 인간 개체 간의 경계를 넘어 공진synchronize을 일으키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 까닭에 sympathy는 배려, 연민 등과 함께 공감이나 교감 작용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쓰루미가 말하는 동정의 뉘앙스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885-7)


"오다 마코토가 받은 '치명적인 상처'란 1945년 8월 14일의 오사카 공습이었다." "전후에 오다는 소련 참전과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그 다음 날인 8월 10일에 일본 정부가 이미 포츠담 선언 수락을 고한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8월 14일에 오사카가 공습을 받은 것은, 일본 정부가 국체호지라는 조건을 명시적으로 담고자 하는 데에 집착해서 포츠담 선언 수락의 정식 표명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8월 14일 공습은 전혀 무의미한 살육이었다. 거기에는 기껏해야 항복 조건과 체면에 집착하며 망설이던 일본 정부와 거기에 압력을 가한 미국 정부 사이의 알력이 존재한 데 불과했다. 그들의 죽음은 '아시아 해방을 위해 순국한 영웅'이라는 우파의 사상으로도, '평화의 주춧돌이 된 비극'이라는 좌파의 사상으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다. 오다는 후에 〈거기서 죽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어린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의 '전후'는 시작되었다〉라고 말한다."(905-7)


"오다는 자기의 전쟁 체험으로부터 〈하나의 원리를 키워갔다〉라고 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모든 순간에 위대한 것은 아니다, 바른 것은 아니다, 성실한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며, 그러나 동시에 〈어떤 인간이라도 어느 때에는 위대할 수 있다, 올바를 수 있다, 성실할 수 있다, 아름다울 수 있다〉라는 원리였다. 이것은 아라 마사히토가 패전 후에 『긴다이분가쿠』에 발표한 논고인 「제2의 청춘」의 말미에 쓰인 〈진부하고 찬연한, 범속凡俗과 닮았으면서도 영웅적인, 추악으로 가득 찬, 그러면서도 한없이 화려한〉이라는 인간관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다가 오사카 공습에서 체험한 '뭐든지'를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의미 부여와 낭만주의를 거부하는 인간상을, 오다는 '보통'의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그 보통이란 이상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확산되어서 종잡을 길이 없는 뭐든지를 표현한 말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쓰루미 슌스케의 대중과도 겹쳐졌다."(923)


"1960년대에 전공투 운동과 함께 주목을 모은 것이 베헤렌이다. 베헤렌은 고정된 조직 형태를 취하지 않고 시민의 자유 참가라는 운동 방식을 내세워서 이후의 시민운동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베헤렌은 그 표면적인 무이론無理論적인 모습의 이면에서, 프래그머티스트 철학자(쓰루미 슌스케)와 고대 그리스를 공부한 작가(오다 마코토)가 창설 역을 맡은, 철학적인 요소가 짙은 운동이었다. 거기서 이루어진 것은 개인이 어떻게 타자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국가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자기를 묻는 질문이었다. 오다 마코토는 1992년에 출판된 『'베헤렌', 회고록이 아닌 회고』에서 〈문제는 자기 자신이었다〉라고 말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 우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어떤 성격일 수 있을까가 그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되묻는 과정에서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공적인 것의 바람직한 모습을 모색하는 한 궤적을 남겼다."(863, 951)


결론


"전후사상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은 그것이 전쟁 체험이라는 국민적인 경험에 의거했다는 것이다. 전쟁 체험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을 심어놓았다. 거기서부터 기존의 언어와 사상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많은 전후 지식인들의 경우, 전쟁 체험을 직접 이야기하는 일은 적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상처였을 뿐만 아니라, 언어로 용이하게 표현할 수 없는 체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체험을 직접 이야기하는 대산 많은 사상을 만들어 냈다. 동시에 미군의 점령이라는 식민지 상황과 미국 문화의 급격한 침투,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거대한 격차 등은 현대 제3세계의 지식인들이 직면한 상황과 유사하기도 했다. 서양 근대에서 모델을 찾는 데 대한 양가적인 태도와, 지식인이 민중을 어디까지 대변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1950년대의 일본에서는 절실한 과제였다."(955-60)


"그러나 이런 전후사상의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 우선 전후사상은 전쟁 체험이 만들어 낸 국민 공동체의식에 의거했기 때문에, 종종 오키나와나 조선 등이 시야에 들어 있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 있는 경우에도 오히려 일본 민족주의의 강화 요인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한 사례가 많았다. 이들은 전쟁 체험에 따른 국민 공동체 의식이 풍화되고, 대중 내셔널리즘이 이것을 대신한 1960년대 후반 이후에야 주목받게 된다. 또한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전후사상이 너무나도 남성적이었던 점도 부정할 수 없다. 무사도, 남자다움, 부끄러움을 알라, 팡팡 문화 등의 말이 빈출하는 것은, 좋든 나쁘든 전후사상의 한 특징이다." "전후 사상의 최대 약점은, 말로 이야기할 수 없는 전쟁 체험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 체험이 없는 세대와 공유할 수 있는 말을 만들지 못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전후사상은 근대나 주체성이라는 말의 배경이 된 전쟁의 기억을 공유하지 않은 세대에 대해서는 설득력을 잃어 갔다."(960-2)


"또한 동시에 전후사상의 붕괴 감각은, 질서가 안정된 고도성장기 이후에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갔다. 1955년을 경계로 혼란과 개혁의 시대였던 '제1의 전후'가 끝나고 안정과 성장의 시대인 '제2의 전후'가 시작되는 가운데, 이른바 55년 체제의 이름하에 보수와 혁신이라는 세력 도식이 고정화되었을 때, 전후사상의 최전성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리고 전후 태생의 좌파에게 전후 민주주의란 보수와 혁신의 형해화한 대립 도식 중 일부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과거 마루야마 마사오 등은 세계와 미래의 불안정함을 전제로 국가의 건설에 참가하는 국민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종종 전후 태생의 세대에게 기존 질서의 수중으로 들어간 '건설적'인 사상으로만 보이게 되었다. 또한 전쟁 체험 세대의 전쟁 기억도, 1960년대부터 급속히 풍화되어 갔다. 언어가 되지 않는 심정을 대신해서 나타난 것은, 굴욕의 상처를 은폐하고, 감상적인 이야기로 무해화된 전쟁 체험담이었다."(962)


"일본이 고도성장을 이룬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갖가지 설이 있지만, 냉전기 국제 조건의 호혜를 받았다는 것이 그중 하나다. 일본을 아시아에서의 중핵적인 반공 공업국으로 육성한다는 미국의 전략이 미국 및 동남아시아 시장을 일본에 가져 왔고,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특수를 주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제 냉전기에 차지했던 특권적인 국제적 위치를 잃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이 민주화를 이루었고, 냉전 후의 중국이 옛 서방 국가들과 활발히 경제 교류를 하게 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아시아 유일의 공업화된 자유 민주주의 국가였던 시대는 끝났다." "이런 국내적·국제적인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아시아에 대한 전쟁 책임 논의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비롯한 우파의 대두가 일어난 사실이, 제3의 전후에서 일본 내셔널리즘의 정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의들의 공통점은 전후에 대한 되묻기다."(979-80)


"일반적으로 전후 지식인은 권력 기구로서의 국가는 비판했지만 내셔널리즘에는 오히려 긍정적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국가라는 단위와는 별개의 내셔널리즘을 이야기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국가에 맞서는 시민이라는 표현도, 당초는 일종의 내셔널리즘으로서 나타난 것이며, 국가에 맞서는 내셔널리즘이었다. 물론 마루야마의 표현을 역전시키자면 〈그것도 내셔널리즘이라 불러야 할지는 각자의 자유〉지만, 어떤 형태로든 공동성과 공공성을 상정하는 한, 넓은 의미의 동포애를 전부 부정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물론 필자는 내셔널리즘이라 불리는 현상의 부정적인 면을 알고 있으므로, 그 말의 복권을 주창할 의지는 없다. 또한 본래의 내셔널리즘을 가정하고 그것으로부터 현재의 내셔널리즘을 일탈 등으로 비판할 생각도 없다. 단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내셔널리즘이 바꾸어 읽기로 변용되는 것은 꼭 특이하거나 신기한 현상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이다."(992-5)


"자기가 자기라는 사실을 감촉하면서, 타자와 공동共同하는 '이름이 없는' 상태를, 전후 지식인들은 혹은 민족이라고 혹은 국민이라고 불렀다. 그것을 내셔널리즘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무의미하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전후사상이 '민주'와 '애국'이라는 내셔널리즘의 말로써 표현하고자 시도해 온 이름 없는 것을, 말의 표면적인 상이점을 구별해서 받아들이고, 그것에 현대와 어울리는 형태를 부여하는 바꾸어 읽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달성될 때, 전후의 구속을 진정으로 넘어설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을 통독한 독자는 이미 그것을 위한 준비 작업을 마쳤다고 할 수 있다. 그때 그 이름 없는 것에 결과적으로 부여되는 것, 그 가령의 명칭이 무엇이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도 내셔널리즘이라 불려야 할지는 각자의 자유에 맡기자.〉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는 이 이름 없는 것을 과거에서 찾고, 현재에서도 찾고, 또한 미래에서도 찾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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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 광기의 시대와 역사에 휘말린 초라한 지도자의 초상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 페이퍼로드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제1장 충실한 신봉자


"1898년 9월, 히데키는 조호쿠심상중학교에 입학했다. 이 중학교는 매년 많은 학생을 도쿄육군유년학교에 입학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1학년 과정을 마치고 유년학교 수험자격을 획득하자 히데키는 즉시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이리하여 14세에 육군에 들어가 그곳의 공기밖에 알지 못한 채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다. 육군유년학교는 청일전쟁 후 군비확장의 일환으로 도쿄, 센다이,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구마모토 그리고 과거 진대鎭臺가 있던 곳에 설립되었다. 여섯 개 유년학교의 정원은 각각 50명, 총 300명. 2년 동안은 각 학교소재지에서 배우고, 3년째는 도쿄에서 교육을 받는다. 3년째 배우는 곳을 중앙유년학교라고 부른다. 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면 연대에 배속되며, 그 연대 이름을 짊어지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사관학교의 수업연한은 2년, 졸업 후에는 연대로 돌아온다. 그때 그들은 20세의 나이로 소위 계급장을 단다. 징병으로 입대한 신병과 나이는 같지만 신분상으로는 큰 차이가 난다."(42-3)


"1916년 8월 도조는 육군성 부관이 되었다. 육군성 부관으로서 도조는 사무적 직무에 어울리는 성격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주위에 보여주었다. 육군성에는 건군 이래의 관계 법규, 조례, 관행, 내규를 문서화한 두께가 20센티미터쯤 되는 「성규유집成規類集」이라는 서류철이 있다." "도조는 집무 중 「성규유집」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중요한 부분은 머릿속에 넣었다. 암기는 그의 '노력'을 대신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까지 「성규유집」만을 생각하는 장교는 육군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의 노력은 오로지 눈앞의 직무만을 위한 것이었고, 주어진 틀 안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최대의 무기가 되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야말로 우수한 무리들의 토양이자 이 나라의 부침浮沈을 틀어쥐고 있는 장소라 믿고 있었다." "성실한 중견 장교의 자기 연마, 군인 우위를 믿는 자의 편협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자기 단련이었다."(74-6)


"1919년 7월, '독일국 주재'를 명받고 유학길에 오른 도조는 베를린에서 만난 독일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육군 장교가 패전에도 굴하지 않고 육군 재흥을 위해 일하고 있는 모습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에 비해 베를린 시민의 시위나 파업은 국가 관념이 없는 경박한 무리들의 소동으로 비쳤다. 공화제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곳을 찾은 군인들의 평균적인 인상이었다. '이 패전은 독일 제국의 군대가 패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쟁을 싫어하는 국민적 분위기가 바로 패전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그것이 그들의 해석과 결론이었다. 도조 또한 그러했다. 독일 패전의 계기가 된 것은 서부전선이었는데 그런 분석도 이 시점에서 파악되었다. 독일 참모본부의 명령과 시달은 적확했지만 개개 전투부대가 그것을 충실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으며, 전투부대의 전의 상실은 국민의 염전厭戰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해했다. 도조 또한 그런 결론을 평생 바꾸지 않았다."(82)


"1931년 8월 1일, 도조는 참모본부 총무국 편성동원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곧이어 9월 18일, 이시하라 간지의 모략이 중심이 된 만주사변이 일어나고부터 참모본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해졌다. 현지군에 명령을 시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는 데 육군의 힘이 커졌고,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장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도 문제시되었다. 도조에 한정할 경우, 지금까지의 생각이나 궤적을 따져보면 이 사변에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대의 배치나 행동이 천황의 재가도 없이 제멋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을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대권 침범'을 용인하는 셈이 된다. 그런데 도조는 그런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도조의 행위는 참모본부 작전과장 이마무라 히토시(1886~1968) 등과 함께 육군대신 앞으로 의견서를 제출한 것이 전부였다. 그 내용은 '국가적 문제에 관한 한 정계의 움직임 따위에 개의치 않고 집요하게 소신을 팔방에 피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27-8)


"1935년 7월, 군 중앙에서는 새로운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야시 육군상과 마사키가 인사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청년 장교들은 마사키 편에 가담했다. 그들은 군 내부에 〈천황의 대권을 침범한 자는 나가타와 하야시〉라고 알렸고, 하야시는 나가타의 로봇이기 때문에 원흉은 나가타라고 공언했다. 7월 15일, 마사키의 파면이 결정되었고, 황도파 중진은 군 중앙에서 사라졌다. 청년 장교들의 분노는 정점에 달했고, 나가타의 주위에서는 테러 위험이 있으니 외유라도 떠나는 게 어떻겠느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8월 12일, 도조는 '나가타 육군성 군무국장 칼에 찔려 사망'이라는 호외를 접하게 된다. 사건 후 2주일쯤 지나 도조는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으로 부임하라는 비밀 명령은 받았다. 나가타의 참살에 충격을 받아 망연자실한 하야시는 〈내가 나가타를 죽인 것인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도조를 도쿄로 불렀다가는 나가타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만주로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152-4)


"나가타가 쓰러지던 날, 사건의 일부를 지켜보았던 무토는 도조에게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참살의 모습, 육군성과 참모본부 소속 장교들의 동향 등등. 무토는 (살해범인 황도파 중좌) 아이자와 사부로에게 붕대를 감아주면서 은밀히 격려한 국장이 있었다고 전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도조의 가슴에 확실히 새겨졌다. 그리고 오랫동안 벗이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아이자와를 호의적으로 변호했다는 말을 듣고 도조는 옛 친구에게 모멸의 말을 퍼부었다." "훗날 도조가 아카마쓰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무토와 함께 나가타의 유지遺志를 이어가기로 맹세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정신이 나간 놈이라 해도 대낮에 그것도 육군의 심장부에서 군무국장을 살해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건군 이래 유지해온 군기가 짓밟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철저하게 군의 기강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일은 우리의 손으로 단행할 수밖에 없다.〉"(155-6)


"당시 관동헌병대사령관은 관동국 경무부장을 겸임하여 만주 전역의 경찰권을 한손에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주국 정부와 철도경호대를 통제하는 권한도 부분적으로 갖고 있었다." "도조의 전임자들은 이 조직도를 애매모호하게 내버려두었다. 너무 분명하게 하면 만주가 일본의 괴뢰국가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조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항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군경일체화가 가장 바람직하다.〉 도조의 주장에 관동군 참모들이 화답했다." "이윽고 만주국 안에서 도조의 이름은 외경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만주국의 일본인 관리들과 관동군 참모들은 믿음직한 실천력을 갖춘 사령관을 외경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반면에 만철滿鐵이나 협화회協和會 그리고 본토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좌절하여 신천지를 찾아 만주로 온 지식인들은 공포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도조를 질서라는 이름을 빌린 강압의 장본인이라 하여 두려워했다."(158-60)


"군인으로 마감했을 도조의 경력은 2·26 사건 때문에 다시 씌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월 9일, 천황은 외무상 히로타 고키(1878~1948)에게 내각을 꾸리라는 명을 내린다. 육군상에는 일찍이 조슈벌의 영수였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장남 데라우치 히사이치(1879~1946)가 임명되었다." "천황의 뜻을 받은 데라우치는 군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군 내부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3월사건과 10월사건 당시의 관련자부터 황도파 장교에 동정적인 장교까지 총 3천 명에 이르는 숙군 인사를 단행했다. 그 결과 군 내부에는 파벌투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어떤 비합법 활동에도 가담하거나 공명한 일이 없는 충실한 군인만 남게 되었다." "2·26 사건 후에 진행된 일련의 개혁은 결과적으로 도조 같은 군인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었다. 게다가 도조에게는 또 하나의 요행이 있었다. 육군의 서열로 말하면 도조는 수십 번째 자리였는데 숙군 인사로 단숨에 10번대로 뛰어올랐던 것이다."(165-7)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충돌이 벌어진 후 중국에서는 장제스와 마오쩌둥 사이에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만주국에서도 중국인의 저항이 시작되었으며, 8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중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관동군은 더욱 확실한 강경론의 근거를 발견했다. 도조는 격문을 돌렸다. 〈이 사변의 주요 목적은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배일 정책의 쇄신, 둘째는 공산 세력 방비, 셋째는 북지의 경제 개발이다. 이 세 가지 목적을 완수하지 못하면 제국의 안전은 없다.〉 목표를 설정한 후에는 실행만 있을 뿐, 관동군은 독자적으로 '시국처리요강時局處理要綱'을 결정했다. 무력 발동의 철저화로 난징 정부 응징, 북상하는 중앙군 격멸 등 5개 방침을 내걸고, 결국은 〈지방정권을 수립하여 만주 접경 지역의 명랑화를 도모하고 대소전을 준비하기 위해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라 명기했다. 지난해 말 내몽골에 괴뢰정권을 만들려다 실패한 쑤이위안 사변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178)


# 쑤이위안 사변 : 1936년 11월, 내몽고의 독립지도자 덕왕(德王)이 관동군의 원조를 받아 쑤이위안 성에 침입했다가 중국군에게 격퇴당한 사건


"뻔질나게 소련 국경 시찰에 나서고 있던 도조에게 육군차관 취임 소식이 전달되었을 때 그의 표정은 일순 어두워졌다. 부관 이즈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물장사 교육은 받지 않았다. 육군사관학교 이래 전쟁 이외의 것은 배운 적이 없다.〉 '물장사'란 정치가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군인은 결단을 존중하고, 그다음에는 용맹하게 나아가 목표를 달성할 따름이다. 〈하지만 명령이라면 하는 수 없지.〉 도조는 한숨을 쉬었다." "1938년 5월 하순, 도조는 가족을 데리고 신징역에서 만철 특급 '아시아호'를 탔다. 이것은 군 중앙에서 쫓겨나 구루메로, 그리고 예비역으로 편입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으면서 관동군헌병대사령관과 관동군 참모장으로, 그때마다 육군의 정책을 충실하게 실행하여 되살아난 군인의 새로운 장을 향한 출발이었다. 그리고 이날 신징역에 몰려든 인파는 '도조가 만들어진 시대'에서 '도조가 만들어가는 시대'로 바뀌는 전환점을 지켜본 증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196-8)


제2장 낙백落魄 그리고 승룡承龍


"〈장제스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철회한 다음 1938년 안에 지나사변을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고노에 수상은 육군상 이타가키에게 중일전쟁의 조기 해결을 호소했다. 군사작전에서 정치적 해결로 전환해야 한다는 설득에 이타가키의 감정은 흔들렸다. 이타가키의 이런 태도가 도조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그는 그때마다 대신 집무실로 들어가 못을 박았다. 〈고노에 주변의 학자나 평론가라 칭하는 무리들이 육군성을 통하지 않고 육군에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정치가 통수를 침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군을 분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육군성의 의사란 중일전쟁을 처리하면서 국가총력전에 대비하여 군비확충을 도모하고, 대소련 전쟁과 남방에서의 대영미 전쟁에 대처한다는 것이었다. 영국과 미국에 대처한다는 것은, 일본이 중국에서 영미자본을 배척하고 있는 까닭에 언젠가 충돌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04-5)


"이타가키는 곤혹스러웠다. '저 사람은 폭탄과 같은 자다. 자기 주장을 고집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고집할 따름이다. 더구나 타협을 싫어하는 편협한 사내다'라는 생각으로 이타가키와 다다는 노골적으로 도조를 경원하기 시작했다. 11월 들어 참모본부와 육군성의 장교들은 '1938년 가을 이후 전쟁 지위에 관한 일반 방침'을 협의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참모본부 전쟁지휘반장 호리바 가즈오가 사변 해결을 위해 장제스의 입장을 애매하게 해두자고 말하자, 도조는 〈장제스를 즉시 하야시킬 것을 명문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소리쳤고, 이에 다다와 이타가키를 따르는 장교들은 격분했다." "이쯤 되자 고노에는 도조에 대해 불안감을 가졌다. 각료회의에서 태도를 바꾼 이타가키의 배후에 직정적인 차관이 있다, 이렇게 생각한 고노에는 도조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와 그 주변에 있는 지식인들이 도조를 사갈시하고, 도조도 그들을 경멸하게 되는 바탕이 이렇게 형성되고 있었다."(206-7)


"1940년 11월, 도조와 무토는 육군성 전비과장 오카다 기쿠사부로를 불러 일본과 미국의 전력을 대비하는 자료를 만들라고 명했다. 2개월 후, '남방 처리의 상정想定에 기초한 제국의 물적 국력 판정'이라는 제목의 문건이 도조 앞으로 배달되었다. 〈제국의 물적 국력은 대영미 장기전 수행을 고려할 때 불안함을 면하기 어렵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보고서에는 대영미 전쟁 3년째부터 물량 감소와 함께 선박문제의 중대화, 석탄 반출의 감소에 따른 모든 생산의 마비, 경공업 자원의 부족이 예상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것은 숫자일 뿐이며, 황군의 사기와 규율을 생각하면 한 마디로 패전할 것이라고 말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카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조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그렇다. 미국에는 나라의 중심이 없다. 반면 우리 제국에는 3천년에 이르는 국체가 있다.〉 도조는 이 보고서를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상층부에만 알렸다. 전력 비율만을 보고 정책 결정을 주저하지나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232-3)


"1940년 12월, 1941년 1월과 3월에 단행된 인사이동에서 도조는 노골적으로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요직에 측근을 데려다 앉혔다. 이시와라를 예비역으로 내쫓은 아나미는 차관 생활을 충분히 오래했다며 스스로 도조의 곁을 떠나 제11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조에게 실망한 나머지 쌀쌀한 태도로 돌아섰던 것이다. 그 자리에 기무라 헤이타로(1888~1948)가 앉았다. 도조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자신의 의견은 좀처럼 털어놓지 않는 남자였다. 헌병대를 직할하는 병무국장에 다나카 류키치, 인사국장에 도미나가 교지를 임명했다. 헌병과 인사 담당 자리를 도조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아첨꾼으로 채웠던 것이다. 군 내부와 군 외부의 정치적 절충, 정책 결정의 요지인 군무국에도 자신의 입김이 미치는 장교들을 들여보냈다." "육군상 취임 후 9개월째인 1941년 4월, 도조는 어렵사리 자신의 수족을 확보했다. 결국 육군성은 편협한 도조 인맥 집단으로 바뀌었다."(240-1)


"국책 결정의 최고기관은 어전회의다. 국책 결정 과정을 보면, 육군·해군·정부·외교당국이 토의를 거쳐 안을 만들면 그것을 대본영-정부 연락회의에서 승인한 후 어전회의에서 추인하는 절차를 밟는다. 현재 『스기야마 메모』를 통해 당시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데, 이 책의 행간을 잘 살펴보면 연락회의와 어전회의 모두 '자구字句 다듬기'에 대부분의 노력을 허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소전이 발발한 직후인 1941년 7월 2일 열린 어전회의에서는 '정세의 추이에 따른 제국 국책 요강'을 결정했다. 전문은 8백여 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용은 실로 중대했다. 이 요강은 남방진출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대영미전을 불사〉할 것이며, 북방에서는 〈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전시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여 북방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남진론과 북진론의 체면을 세워준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안이었고 자구를 둘러싼 해석도 다양했다."(267-8)


"당시 어느 나라에서나 외교와 군사 책임자 사이에는 항쟁과 대립이 있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최고지도자가 선택을 하고 국책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수상의 권한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작전에 관한 일체의 권한은 참모총장과 군령부총장이 장악하고 있었다. 정치 쪽의 최고지도자는 여기에 간섭할 수 없다. 그렇기는커녕 정보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참모총장과 군령부총장의 권한에도 제한이 있었다. 그들은 용병用兵에서는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편성, 장비, 병력수를 관할하는 것은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이었다. 그 구분이 애매해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통제하는 기구가 되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육군성과 참모본부 사이의 의견 충돌, 해군성과 군령부 사이의 의견 상극은 각각 같은 집단 내부의 다툼이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 가능했다. 그러나 육군과 해군 사이의 의견 대립은 역사적인 대결의식과 이해관계과 뒤얽혀 복잡했다."(295-6)


"이렇게 병립한 기관 위에 있는 것이 천황이었다. 천황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교육을 받았다. 국책의 최고결정권은 대본영-정부 연락회의와 어전회의에 있었지 천황에게도 수상에게도 결정권이 없었다. 더욱이 다수결로 정하는 것도 아니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의안議案을 철저하게 검토하기보다는 반대논리를 억압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결정의 내용보다도 불투명한 의견의 일치를 기꺼워했던 것이다. 이런 회의에서 수상의 임무란 출석자들을 납득시키는 것보다 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뭔가 정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일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정치형태였다. 국책의 결정이란 자구 다듬기 흥정에 지나지 않았고, 최대공약수적인 타협에 의해 무미건조한 작문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그런 애매함을 제거하는 것은 사태의 진전─여기서는 일미교섭의 최종 결렬─이었다. 이것이 전시하에서는 한층 명확해진다."(296)


"10월 17일, 입궐하라는 말을 전해 들은 도조는 얼굴을 찌푸리며 일미교섭 관련 자료와 중국 철병에 이의신청을 하는 상주문을 가방에 쑤셔 넣고 자동차에 올랐다. 〈상당히 엄한 질책이 있을 것 같군.〉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아카마쓰에게 말했다. 그러나 도조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대에게 내각 조직을 명한다. 헌법의 조규條規를 준수하도록 하라. 시국이 대단히 중대한 사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육해군은 한층 긴밀하게 협력하도록 유의하라. 잠시 후 해군대신을 불러 이 뜻을 말할 것이다.〉 천황은 눈길을 떨구고 있는 도조에게 이렇게 대명을 하달했다." "이 무렵 육군성에도 '도조에게 대명을 하달했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무토와 사토를 비롯한 장교들은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고, 천황이 전쟁을 결의한 것 아니냐며 긴장했다. 그러한 긴장과는 별도로 정책 결정집단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육군에 조각의 명을 내렸다는 것은 그들에게 얼마간 충족감을 주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307-8)


"육군성 중추인 도조와 무토가 진지하게 일미교섭에 임하고 있다는 소문이 육군 내부에 퍼지자 공공연하게 테러를 얘기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런 와중에 (전쟁) 강행론과 연기론이 팽팽하게 맞서자 도조는 세 가지 안을 제시했다. 제1안은 〈전쟁을 하지 않고 와신상담한다〉, 제2안은 〈즉각 개전을 결의하고 작전 준비를 진행하여 전쟁으로 해결한다〉, 제3안은 〈전쟁 결의 아래 작전 준비와 외교를 병행하되 외교를 성사시키도록 힘쓴다〉." "마침내 11월 2일, 16시간에 걸친 연락회의 끝에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낸 도조는 만족감을 숨기지 않았다. 〈일단 결론이 났다. 12월 1일까지 외교에 임한다. 물론 전쟁준비도 진행한다. 외교와 작전을 함께 진행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결론을 분석해보면 큰 틀은 9월 6일 어전회의 결정을 답습한 것에 불과했다. 세부사항에서만 일본 쪽이 양보했을 뿐이다. '이래도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는 정도의 양보에 도조는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322-34)


"16일부터 5일간의 예정으로 제77차 임시제국회의가 시작되었다. 외교 연설에 나선 외무상 도고 시게노리는 일미교섭 타결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연설 구석구석에는 자제한 흔적이 분명해 보이는 내용이 있었는데, 의회 내의 분위기는 그것을 연약하다고 비방할 정도로 격렬했다. 만장일치로 가결된 도조 내각을 격려하는 〈국책 수행에 관한 결의안〉에는 〈세계의 동란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여러 적성 국가들은 제국의 진의를 곡해하고 있으며 그 언동은 더욱 격앙되고 있다. 은인자중하는 데에도 한도가 있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 결의안의 제안 설명에 나선 정우회 소속 시마다 도시오(1877~1947)는 일미 개전을 권유하는 듯한 어조로, 〈국민의 기분은 억눌릴 대로 억눌려 있으며, 그들은 어떻게든 이 중압에서 벗어나 태양을 보아야만 하겠노라 다짐하고 있다. 정부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라며 사자후를 토했다. 몇 번이나 박수가 쏟아졌다."(340-1)


"11월 26일, 노무라와 구루스는 미국 측이 제시한 〈평화해결요강〉, 이른바 '헐 노트'를 읽어가면서 온몸을 떨었다. 10개조 항목 모두 반년에 걸친 일미교섭의 경위를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제3항과 제4항이 그러했다. 〈(3)일본국 정부는 중국 및 인도차이나에서 모든 육해군 병력 및 경찰력을 철수할 것, (4) 미국 정부 및 일본 정부는 임시 수도를 충칭에 둔 중화민국 국민정부 이외에 중국에서 그 어떤 정부 또는 정권도 군사적·정치적·경제적으로 지지하지 말 것.〉" "'헐 노트'를 본 도조의 감정은 상당히 격해졌다. 도조에게 가장 굴욕적인 것은 앞선 지도자들이 쌓아올린 빛나는 업적을 자신의 시대에 와해시켜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일을 자신의 시대에, 그것도 자신의 책임 아래 행하는 것을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28일에 열린 각료회의에서도 도고 외무상이 '헐 노트'의 전모를 소개하자 각료 전원이 격앙하여 개전도 부득이한 일이라고 말했다. 마치 이런 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349-51)


"12월 6일, 선전조서宣戰詔書를 채택하고 귀가한 도조는 심야에 홀로 남아 통곡을 쏟아냈다. 공식 절차를 마친 이 날, 그는 새삼 무거운 책임에 공포감을 가졌던 것이다. 2천 6백 년의 국체를 등에 짊어진 무거운 책임, 그는 화가 나 미국이 증오스럽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정당한 말〉을 부당하게 우롱하는 미국을 증오하겠노라고 생각했다. 군인의 투쟁심을 지탱하는 것은 적에 대한 증오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인데, 지금 그의 투쟁심은 한 점에 집중되었고 곧 구심작용을 일으켜 충성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도조의 사고는 혼란스러웠다. 특히 대명강하大命降下에 즈음하여 백지환원의 조건이 떠올랐고, 그것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이르자 그는 자성自省 능력을 잃고 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음의 빚이었다. 천황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지난 50일, 지금부터 이어질 장기전쟁은 그에게 부채를 청산할 싸움이 될 터였다. 충실한 신봉자는 결국 무작위無作爲의 모반자가 될 터였다."(359-60)


제3장 패배의 궤적


"도조가 의회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고 그 협력자들이 장소와 방식을 가리지 않고 잘못된 동아해방사상을 고취하기 시작하면서 지식인의 관심은 깊어졌다. 특히 인도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도조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공감의 폭은 훨씬 넓어졌다. 유럽의 아시아 지뱅의 상징인 인도 해방이 지식인의 감각에 어필했던 것이다. 종합잡지에서도 급속히 대동아공영권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1938년 4월에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문화인도 반강제적으로 징용되었는데, 그런 문화인이 남방전선에 종군하여 동아해방과 관련된 보고서를 보내왔다. 이 작품들의 모티프 중에서 인도가 상징적으로 언급된 것은 이런 필연성 때문이었다. 때마침 일본에 와 있던 인도의 독립운동가 라스 비하리 보스(1886~1945)도, 베를린에 망명해 있던 독립운동의 투사 수바스 찬드라 보스(1897~1945)도 그 호소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일본과 인도가 제휴하여 독립을 위해 전진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385)


"적자의 대표로서 그는 천황에게 올리는 중간보고와 결과보고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말을 각료들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이리하여 도조 내각은 상주가 많은 것으로 유명해졌다. 도조 자신도 '상주벽上奏癖'에 빠진 사람처럼 상주를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상주 방법도 이전 내각과 달랐다. 도조 이전의 내각은 결론만을 상주했지만 도조 내각의 관료는 그 과정도 함께 상주했다. 물론 원칙적으로 천황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잇달아 상주를 한 다음 천황의 표정을 살펴서 가부를 감지하고 생각을 가다듬어 다시 상주할 수가 있었다. 더욱이 도조는 짓궂게도 정서한 것을 천황에게 보인 것이 아니라 붉은 줄이 그어진 초고를 그대로 상주했다. 〈이렇게 중간보고를 하는 것이 상하가 진실로 하나라는 징표, 천황께서 친히 다스리신다는 징표이다. 만약 정서한 것을 보여드린다면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을 실천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391-2)


"도조는 1942년 4월에 치러질 선거에서 익찬정치체제협의회에서 추천한 의원이 다수 당선될 것이며, 그들이 전쟁협력을 위해 손발이 되어 움직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 현역 장관이 내무상으로서 선거를 담당하는 것은 군기를 파괴하는 일이라는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이 때문에 그는 표면에서 몸을 감추었다. 그 대신 도조의 뜻을 전해 들은 아베 노부유키가 총재로서 익찬정치체제협의회를 움직여 퇴역한 군인을 입후보자로 내보냈다." "4월 30일, 이러한 간섭 속에서 치러진 익찬선거에서 추천 후보자 467명 중 381명이 당선됨으로써 당선율은 80퍼센트를 넘었다. … 도조를 등에 업은 익찬정치회는 〈국체의 본의에 기초하여 거국적 정치력을 결집함으로써 대동아전쟁 완수에 매진할 것을 기약한다〉,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여 세계신질서 건설을 기약한다〉 등 4대 강령을 내걸었다." "도조는 의회를 마치 육군성 내부의 부과장회의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고 공갈을 일삼았다."(396-9)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유력자들은 도조에게 더욱 거세게 반발했다. 고노에는 히가시쿠니노미야를 찾아가 도조에 대한 생리적 반발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재계, 정계, 일반 사업계가 이 내각에 반대하고 있으며, 이 이상 도조 내각이 계속된다면 앞날을 낙관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도조를 비판하는 분위기는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확산되었다. 참모본부의 젊은 참모들 역시 도조의 육군상 겸임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세계의 뉴스는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 이래 일본의 대본영 발표를 일소에 부쳤지만 도조와 그 주위에서는 그런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인정하지 않는 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1943년 1월 하순에 열린 '결전의회'에서 도조는 일본이 진다면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육해군의 대립과 국민의 혼선, 특히 국민의 혼선이 걱정된다고 단언했다. 지도자의 책임을 전가하는 궤변이었다."(434-6)


"이제 전장의 주도권은 미국이 쥐고 있었다. 당시(1943년 7월) 선박의 할당량은 육군용 118만 3천 3백 톤, 해군용 167만 7천 1백 톤, 민수용 273만 9천 6백 톤이었다. 민수용은 국민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3백만 톤을 밑돌고 있었다. 그러나 육해군의 할당량은 종전에 비해 모자라지 않았는데, 이 사실은 일본이 국민생활을 무시하고 물량소모전에 휘말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의 작전이 실패하고 전투에 질 때마다 민수용 할당량은 줄어든다. 그리고 그것이 국민생활로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국무는 통수에 간섭할 수 없다는 원칙이 있는 한, 통수의 요구에 응하여 선박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양자의 대립은 머잖아 숨길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할 터였다. 게다가 통수의 책임자는 전황이 호전되지 않자 내심 초조해하면서도 국무 쪽으로부터 추궁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고, '통수권'이라는 방패 뒤에 몸을 숨긴 채 상세한 전황은 통수 사항에 관련된 것이라 하여 설명하지 않았다."(459-60)


"1944년 1월 21일부터 시작된 의회에서 행한 도조의 시정연설은 전황에 대한 자화자찬이 사라지고 형용구形容句만이 개미행렬처럼 이어진다. 〈한 사람이 능히 열 사람을 죽이고야 마는 황군 장병 앞에 불령하게도 도전해오는 미영군의 앞길은 암담하기 짝이 없으며,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다만 최후의 패배일 뿐입니다. 이러한 전선 장병의 용전감투勇戰敢鬪에 호응하여 일억 국민은 더욱 분기해야 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대동아전쟁에서 승리를 획득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말씀드릴 것까지도 없이 전쟁은 필경 의지와 의지의 싸움입니다. [······] 최후의 승리는 어디까지나 최후의 승리를 굳게 믿고 끝까지 투지를 잃지 않는 자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최후에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는 정말이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도조가 볼 때 제국에 패전이라는 말은 없었다. 의식과 육체가 소멸할 때까지 목전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셈이다."(485-6)


"2월 18일 밤, 트럭 섬의 수비대가 궤멸했다는 보고가 도조에게 전해졌다. 도조가 크나큰 충격에 몸을 떨고 있는 모습이 비서관들에게도 분명하게 보였다." "잠시 후 관저의 거실에 육군성 간부 세 사람이 모였다. 그들에게 도조의 결의가 전해졌고, 결의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사전 공작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전황의 약화는 통수의 실수 때문이고, 이래서는 정치가 통수에 휘둘리기밖에 더하겠는가. 항공기와 선박 증산에 힘을 쏟아도 그것을 잇달아 잃어버리는 것은 왜인가. 이러한 사태에 이른 이상 국무와 통수의 합체로 위기 상황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것은 헌법 공포 이래 일찍이 없었던 중대사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이런 조치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인격을 육군상 도조 히데키와 참모총장 도조 히데키로 구분하여 성의껏 집무에 몰두할 작정이다. 그렇게 하면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인격을 이분하는 것, 그것이 도조가 스스로를 납득시킨 논리였다."(487-9)


# 2월 21일, 참모총장 취임


"도조는 참모총장으로서 〈필리핀을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총결산 지역으로 삼아 육해군이 동시에 정면작전을 펼치고 또 항공기를 철저하게 집결·운용함으로써 공륙총합결전空陸總合決戰〉에 나선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다른 한편, 3월에서 4월에 걸쳐 육군은 제31군을 편성하여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지휘 아래 두고 캐롤라인, 마리아나 작전을 위해 대기하라고 명했다. 데라우치 히사이치 남방군 총사령관이 국가존망의 위기가 임박했다는 내용의 격문을 뿌렸는데, 말 그대로 긴박한 상황에서 배수의 진을 친 작전이기도 했다. 도조가 분주했던 것은 이 작전에 열중했기 때문이 아니다. 군수상軍需相으로서 잇따른 항공기와 선박의 손실을 채워 넣기 위해 증산에도 책임감을 가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마치 '도조 혼자 치르는 전쟁'이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전 계획, 항공기와 선박 생산, 국민 감시, 국내 전시체제 정비, 의회와의 절충 등 그의 일정은 분 단위로 나뉘어 있었다."(501)


"마침내 반反도조 세력이 거국일치 내각을 수립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기도를 통해 천황에게 상주하기로 했다는 정보를 접한 도조는 그에 앞서 사의를 고하기로 결심했다. 7월 18일, 도조는 사의 절차를 밟아 행동을 개시했는데, 거기에는 물러나겠다는 뜻을 들은 천황이 〈좀더 정권의 자리에 앉아 전쟁완수에 노력하라〉며 도조의 사의 번복을 촉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감춰져 있었다." "도조가 궁중에서 돌아와 호시노에게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이때 천황은 특별한 언급 없이 〈그래?〉라고 말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맞다면 천황도 도조의 사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천황을 향한 도조의 호소는 실패하고 말았다." "오전 11시 40분, 도조는 궁궐에 들어가 각료 전원의 사표를 제출했다. 이렇게 도조 내각은 무너졌다. 전쟁에서 이겨 국민의 환호 속에서 이 자리를 떠나기를 바랐던 그의 취임 이래의 꿈은 이 순간 허망하게 사라졌다. 이것이 2년 10개월에 걸친 재임 기간의 결말이었다."(543-4)


제4장 세뇌된 복역자


"1945년이 밝았다. 설날 특집으로 꾸며진 신문은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연두의 여론을 좇아 폐하께서 전선 장병에게 야전식량을 보내주시다〉, 〈오키나와를 맹공격한 특공대의 핵심 야마모토 비행대에 표창장을 수여해달라고 상주〉와 같은 기사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천황의 자비, 천황을 위한 죽음을 맹세하는 충절이 강조되었다." "1월 18일 열린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는 본토결전 즉응태세 확립과 전군의 특공대화化를 결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국민을 향한 허풍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고이소 구니아키 수상을 비롯한 일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세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그들이 믿고 있는 국체 2천 6백 년의 파괴자로서 굴욕을 감내하고 패전을 받아들일 것인가, 전황 악화를 뒤집을 무기를 생산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상황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대중요법으로 위기를 넘어설 것인가.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세 번째 길을 걷는 것이었고, 고이소는 이 길을 선택했다."(559-60)


"4월 5일 소련은 일소중립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통고해왔고, 이에 호응하여 미군의 공격은 한층 치열해졌다. 이날 고이소 내각은 국면을 타개할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총사직했다." "4월 7일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성립했는데, 이 내각은 성전을 완수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수상 추대를 위한 증산회의에서 도조에게 야멸찬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실제 정치 쪽에 서면 그들은 '성전완수'라는, 가장 무난하고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정책을 채택할 따름이었다. 상황의 흐름에 몸을 맡길 뿐 이 국면에서는 '치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책을 공공연히 채택할 용기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 대신 도조에 대한 증오를 부채질함으로써 그들은 어렵사리 자기를 만족시켰다. 그것은 육군에 대한 원한을 도조라는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565-8)


"(종전 후) 연합군은 요코하마에 임시청사를 두고 일본 통치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그런데 일본 측 공사 스즈키 다다카쓰(1895~1987)의 저서에 따르면 총사령부는 분명히 일본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전범 문제를 중시하고 있었다. 미국 국내의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그것은 필요한 사항이었다는 것이다." "'도조가 자결을 각오한 것 같다.' 어떤 루트를 통해서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이 소문은 육군성에까지 전해졌다. 물론 이 소문에는 도조 정도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자결해야 마땅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환영하는 목소리마저 있었다. 그러나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요직에 있는 자들은 이 소문을 불길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천황을 면책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공통의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9월 10일, 시모무라 사다무(1887~1968) 육군상이 관저 귀빈실로 도조를 불러 자결할 생각을 그만두라고 설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589-91)


"9월 11일, 미군 헌병대가 도조를 찾아왔다. 나중에 도조가 스가모구치소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소파에 앉아 왼손에 권총을 쥐고 동그라미 표시를 한 곳을 셔츠 사이로 확인한 다음 고가가 남긴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왼손잡이인데다 발사 순간에 권총이 위로 들리는 바람에 탄환은 심장을 빗겨갔다." "다음날부터 신문과 라디오에서는 도조의 자결 미수 소식을 냉담한 어조로 전했다. 여기에는 역시 이 무렵에 자살한 스기야마 겐 부부의 훌륭한 할복자살과 비교할 때 〈무사로서의 마음가짐이 없다〉거나 〈연극일 것이다〉라는 냉소, 무시, 조롱이 담겨 있었다. 도조의 주변에 있었던 자들은 도조가 평소에 〈물러날 때와 죽을 때가 가장 중요하다〉고 큰소리치는 것을 들어왔었다. 그들은 도조가 말만 그럴싸하게 했을 뿐 실제로는 의지가 약해 철저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행동의 규범을 갖지 못한 인간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실태失態로 간주했다."(595-9)


"1946년 2월, 검사 존 피헤리는 도조에게 진주만 공격에 대해서 심혈을 기울여 질문했다. 여기에는 일본의 기습공격 책임을 도조에게 떠안기려는 노골적인 의도가 있었다." "심문 과정에서 도조는 12월 8일자 일기에 쓴 '자계自戒'를 지켰다. 그는 천황의 권한을 묻는 질문이 나오면 완강하게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의 마음은 이미 체념한 상태였으며, 종교서를 읽으면서부터 머릿속에 '다른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황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도록 대답하는 것 그 자체에 새삼 도취되었고, 그것을 '다른 세계'와 현실을 연결하는 가교로 삼았다." "만약 구치소가 아니라 자택에 있었다면 도조는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1946년 봄 도조에 대한 증오는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상은 이렇다〉는 그때까지 감춰져 있던 전쟁 전과 전시 하의 사실을 반은 과장되게 전하면서, 군인이 악인이며 그 정점에 도조가 있다는 식으로 방송했다."(610-4)


"개인 변호가 이타가키에서 가야로 넘어갈 무렵, 수석검사 키난이 미국인 기자에게 천황에게는 전쟁 책임이 없다고 발언했다. 이 뉴스가 세계 각국에 타전되었고, 그것이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키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황 및 주요 실업가를 전범으로 간주하여 재판에 넘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장기간 조사할 결과 이런 의견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물론 이것은 키난의 의도적인 발언이었다. 법정이 시작된 후부터 키난은 자주 미국을 드나들며 본국 정부와 협의를 해오고 있었다. 뉘른베르크재판과 도쿄재판에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할 것과 미국 정부가 태평양전쟁 후 미소 냉전 구도 하에서 일본을 우산 아래 둘 것을 염두에 둔 협의였다. 미국 정부는 천황을 법정에 끌어들이거나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일본 국민을 자극할 것이라는 방침을 맥아더에게 전했고, 키난에게도 그런 방향에서 법정을 이끌 것을 요청했다. 키난은 그 방침에 따라 충실하게 움직였다."(633-4)


"도조 히데키를 포함해 교수형을 언도받은 A급 전범 7명의 사형이 집행된 다음날인 1948년 12월 23일, 연합군총사령부는 A급 전범용의자 19명을 석방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앞으로는 군사재판을 중지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다다와 혼다는 옥중에서 병사하고 17명이 스가모구치소에서 출소했다. 그들의 출소는 그렇게 놀라운 소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그들의 사회복귀가 앞서 7명의 처형과 교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신문과 라디오에서도 일곱 명의 처형 소식을 전했는데, 그들의 죽음으로 군국주의가 일소되었다는 식의 보도였다. 알리바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증오와 모멸에 가득 차 일곱 명을 비방하는 무절조無節操한 논의도 있었다. 일곱 명을 비방하는 것이 모든 것을 면죄하는 듯한 의도적 논조는 무반성적이고 무자각적인 국민심리를 배양할 따름이었다. 머잖아 일곱 명 중에서 도조만이 '보통명사'로 전화轉化하는 것은 그런 배양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681-2)


# 1978년 가을, 7명 모두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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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육군 -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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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쇼와 육군의 전사─건군에서 다이쇼 말기까지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지도부에 속한 군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육군대학교와 같은 육군의 교육기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적 지상주의가 팽배한 기관에서 기대에 상응하는 성적을 거두었지만, 실전 경험이 적다는 약점도 지니고 있었다. 이 세대는 1904년(메이지 37)과 1905년에 벌어진 러일전쟁 당시에 육군사관학교 생도였거나 아직 육균유년학교 생도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이 세대는 일본 육군 건군 이래 최초로 양성 시스템, 정신적 규범, 전략과 전술 지도가 낳은 군인이라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결국 근대 일본의 부국강병책에 충실한 지식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독창적인 식견이나 역사적인 선견지명을 가졌다기보다, 주어진 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내부를 지배하고 있던 '조슈벌長州閥'이 그들의 힘에 의해 타파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5-6)


"태평양전쟁을 떠맡은 군사 지도자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친독일, 반영미 사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일본 육군은 프랑스군을 모방하여 건군되었다. 그런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 프랑스군이 패퇴하자 이후 독일군을 따랐다. 메이지 10년대에는 독일군을 일본에 초청해 육군대학교에서 독일식 군사 교육과 정신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친영미 감정을 가진 자가 몹시 적었고 일반 중학교 출신은 줄곧 요직에서 배제되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쇼와 육군의 군사 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현저하게 결여돼 있었다. 인간을 철학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고,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하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구체적인 예를 들면, 끝까지 보병을 중시하는 육탄 공격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병사를 '무기질의 병기'로 육성하려 했다는 것, 보급과 병참에 대한 중요성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 등에 잘 나타나 있다."(16)


"1882년 1월 4일, 메이지 천황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군인훈계」를 간결하게 명문화한, 약 2700자에 이르는 「군인칙유」를 하사한다." "그리고 이 「군인칙유」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를 관통하는 일본 육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군인칙유」에서 〈군인은 충절을 다하는 것이 본분〉이라는 표현은 천황의 군대라는 점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의도이다. 반면 〈세론에 흔들리거나 정치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무렵의 반정부적 운동(예를 들면 자유민권운동과 같은 정치활동)에 장교가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군의 기강을 공고히 세우면서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처럼 본래는 정치적 중립을 의미하는 문구인데, 쇼와 초년대 국가 개조 운동을 추진한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정치나 세론이 어떠한 형태로든 육군 내부의 움직임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자가 많았다."(22-4)


"그 결과 육군이 일본제국 안에서 특별한 지위에 있고, 누구보다 우월한 사명을 천황에게서 부여받았다는 오만한 착각을 낳았다. 쇼와 육군의 군인들은 이 착각 속에서 국가 그 자체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더해 1875년 3월부터 약 3년 동안 공사관 소속 무관으로 독일에 주재했던 가쓰라 다로 소좌는 독일군을 예로 들며 육군성 내 부국 중 하나인 참모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야마가타에게 제안했다. 여기에는 군정軍政과 별도로 군사 작전이나 군사 행동에 관해 특별한 권한을 가진 조직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야마가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878년 12월 참모본부를 독립시켰다. 1893년 5월에는 해군의 군령부가 독립했는데, 참모본부와 군령부 부장은 천황의 대권을 대리하는 책임자라는 의미를 지녔다. 군인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넘어, 정신적 기반뿐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천황에 직결되는 특별한 기관이라는 우월의식이 이 무렵에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24-5)


"근대 일본의 군사 조직이 처음으로 국외에서 전투를 벌인 것은 1894~1895년에 걸친 청일전쟁이며, 이때 전쟁을 지도한 것이 대본영大本營이었다. 대본영은 1893년 5월 공포된 전시 대본영 조례에 기초하여 설치된 조직이다. 쇼와 육군도 이 조례를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실제로 전시 태세에 돌입했을 때 육해군이 작전 측면에서 통일된 방침을 갖고 행동한다는 목적에 따라 생겨났다. 물론 천황의 대권을 위임받은 육군의 참모본부와 해군의 군령부가 각각 대본영 육군부와 대본영 해군부로 일체화하여 천황에게 군사 작전과 행동의 내실을 알린다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대본영에 문관은 참가할 수 없게 했다는 점도 문제였다. 결국 전쟁 지도에는 군인만이 관여하고 문관(국무대신 등)은 군사에 관해 일절 알아서는 안 된다는 제약이 따랐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쟁을 순전히 군사 행동만으로 파악하여 정치적인 배려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9-30)


"1907년 4월에 작성된 「제국 국방 방침」의 주안점은 우선 〈제국의 국방은 공세를 본령으로 한다〉는 데 있었고, 줄곧 공세 계획을 골자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 다음 〈장래의 적으로 상정해야 할 나라는 러시아를 제일로 하고 미국·독일·프랑스가 그 뒤를 잇는다〉고 명시했다. 〈국방에 요구되는 제국군 병비의 표준은 용병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러시아와 미국의 압력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정도로 한다〉라고 했듯이, 러시아와 미국에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수준의 군비를 갖추는 것을 국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국방 방침에 따라 「제국군 용병 방침」 제1항에는 〈해군은 적에 대하여 힘써 기선을 제압하고 그 해상 세력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육군은 적보다 앞서 필요한 만큼의 병력을 속히 한 지방에 집합시킴으로써 선제공격의 이점을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작전을 펼친다〉고 적혀 있다. 모두 선제공격에 중점을 둔 작전을 고려한다는 게 특징이었다."(47)


"다이쇼 시대에 들어서 육군이 지나치게 많은 군사비를 요구해오자, 국가 재정을 우려한 정부는 조금씩 반격하기 시작했다." "1927년 6월에 열린 의회에서 정당 측은 집요하게 '군부대신현역무관제'에 반대했다. 야마모토 내각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대신과 차관(당시는 총무장관)의 임용 자격이 적힌 비고란에 〈대신 및 총무장관에 임용되는 자는 현역 무관으로 한다〉고 쓰여 있던 문구를 삭제했다. 이리하여 예비역도 육해군 대신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육군상 구스노세 유키히코는 자신의 권한을 점차 참모본부로 넘기는 방법으로 그 효과를 무력화했고, 이를 통해 '통수권 독립'이라는 명분을 지키면서 정치 쪽에서의 개입을 막을 수 있었다." "쇼와 육군이 고압적인 자세로 '통수권 독립'을 외치게 된 것은 이러한 경위에서 비롯됐다. 1936년의 2·26 사건 때 '군부대신현역무관제'가 부활하는데, 참모총장에게 권한을 넘긴 사실만은 그대로 남아 쇼와 10년대 참모본부에서는 이를 근거로 횡포를 부리게 되었다."(51-3)


"일본의 국가 재정이 두드러지게 피폐해진 원인은 물론 군사비 팽창에 있었다. 1919년에서 1921년까지 내리 3년 동안 국가 예산의 40~50퍼센트를 군사비로 할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시베리아 출병은 당연하게도 재정 압박의 요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증유의 호황을 누렸지만, 전쟁이 끝난 후 부풀어 올랐던 일본 경제는 순식간에 쪼그라들었고 그동안 쌓아놓았던 자금도 금세 써버리고 말았다. 1921년 11월 하라 다카시 수상이 암살되고, 이어서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이 탄생했다. 다카하시 수상은 긴축 재정을 내걸었다. 그런데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진재로 다시 한번 크게 타격을 입었다. 군사비 팽창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외압에 대해 육군 내부에서 대응한 사람이 육군상 우가키 가즈시게다. 그래서 이 시기의 삭감을 우가키 군축이라 부른다."(62-3)


"감축 대상이 된 이들은 우카기를 원망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군 내부의 장교들도 우가키에게 불만을 품었다. 우가키가 육군의 입장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자비하게 좌관급 장교까지 내몰았다는 것이 불만의 이유였다. 육군의 막료는 우가키를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태도로 대하면서 그 원한을 이어나갔다. 쇼와 10년대에 우가키는 수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육군은 끝까지 육군대신을 추천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가키 내각은 유산되고 만다. 그 정도로 원한이 깊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이쇼 말기의 군축 분위기는 일본의 서민들 사이에서도 확산되었다. 군사에 대한 혐오, 군인에 대한 모멸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예를 들면 군인은 제복을 입고 거리에 나가지 못했다. 서민들로부터 냉혹한 눈길을 받거나 싫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 육군은 가장 뿌리 깊은 집단사회여서 그 특이한 가족주의적 성향이 도시의 인텔리 계층에서는 혐오감을 자아내기도 했던 것이다."(64-7)


"다이쇼 시기에 일본은 본격적인 전쟁을 체험하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운 군사 집단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었다. 우가키 군축은, 우가키의 진의가 어떻든 그러한 시도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육성된 메이지 10년대 중반부터 20년대 전반에 태어난 제2세대 군인은 그러한 심리를 배척하는 것이 오히려 군인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어떻게 군 내부의 지도층에 들어갔을까? 먼저 지적할 것은 새로운 파벌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1921년 10월 27일 나가타 데쓰잔, 오카무라 야스지, 오바타 도시로 등이 바덴바덴에서 가진 회합이, 조슈벌의 횡행을 대체하여 육대벌陸大閥이 군 내부에서 주류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부터 전쟁은 국가총력전〉이라는 것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을 시찰한) 세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는 국가의 정치·경제·산업·문화·사회의 모든 것을 전시 체제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71-3)


제2부 쇼와 육군의 흥망


"쇼와 육군을 말할 때면 무엇보다 1928년 6월 4일에 일어난 '장쭤린 폭살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모토 다이사쿠는 이 사건의 중심인물이다. 동지들은 이 사건을 고모토의 애국적인 행위로 파악하고, 이전부터 중견 장교들이 활약했던 만몽 지역에 부동의 정치 권력을 수립한다는 계획이 육군 지도자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햇빛을 보지 못한 것에 분개했다." "고모토로부터 장쭤린 폭살 사건의 진상을 들은 후타바카이 회원들은 어떤 식으로든 고모토를 지킬 것을 맹세했고, 심정적으로는 '고모토를 따르리라'는 기개를 품었다. 어떤 장교는 고모토의 손을 잡고 〈우리가 당신의 뜻을 반드시 잇겠습니다〉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 중견 장교들은 시라카와 육군대신이 점차 관동군의 음모라는 것을 알아챈 듯한 발언을 하자 육군대신 집무실로 몰려가서는 〈관동군은 관련이 없다〉며 윽박질렀다. 쇼와 육군의 사실을 은폐하는 기질은 이미 이때부터 중견 장교들에 의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102-3)


# 후타바카이二葉會 : 다이쇼 말기에 육사 15기부터 18기에 이르는 좌관급 장교가 중심이 되어, 전쟁론, 만몽 개발론, 군 개혁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모임


"장쭤린 폭살 사건을 쇼와 육군이 범한 오류의 제1막이라 한다면 만주사변은 제2막이었다." "1931년 10월 2일에 열린 관동군 막료 회의에서 이시하라 간지는 시종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개전 후 한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에 군사적으로는 지린 성을 진압하고 나아가 하얼빈까지 장악 영역을 넓혔으며, 각 지방의 유력자들도 관동군의 의향을 받아들여 일본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기득권의 옹호와 같은 낡은 표어가 아니라 신만몽국 건설이라는 표어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족협화五族協和·왕도낙토王道樂土의 국가로 정하는 게 우리 생각이다.〉 막료 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동의했다. 모두가 〈이시와라의 말이 옳다〉며 맞장구쳤다. 군 중앙이나 정부가 이 방침에 반대하고 나설 경우 신만몽국을 독립시켜 대결 자세를 취해도 좋다는 것이 암묵적인 양해였다. 이때 이시와라 간지는 42세의 중좌로, 자신의 이념을 이 새로운 국가에 쏟아넣고 싶다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111-2)


"이시와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지구 전쟁의 시대라고 정의하고, 이 전쟁이 50년 정도 계속될 것이라 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 전쟁의 시대에 들어섰다면서, 결국 1965년 무렵이면 지구 전쟁은 결말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 지구 전쟁에서 결말이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서양 문명의 중심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일본은 동양 문명의 축이 되었다. 두 문명의 대결이 바로 인류 최후의 결전 전쟁이며, 그것은 대략 1985년 무렵에 결말이 난다. 이 결전 전쟁에서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신병기도 개발되어 한 방으로 도시를 궤멸시킬 수 있는 파괴 병기를 생산하게 될 것이며, 착륙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지구를 돌 수 있는 비행기도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결전 전쟁을 마친 뒤에는 세계가 통일되어 민족 협화의 시대로 들어선다는 것이다. 민족협화民族協和야말로 결전 전쟁 후의 세계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이시와라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121)


"1936년 2월 26일의 이른바 2·26 사건은 육군 내부에서 국가 개조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20여 명의 청년 장교와 그들의 지휘 아래 있던 부사관 및 병사 15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쿠데타였다." "2·26 사건에 가담한 청년 장교들은 물론 자신들의 궐기 행동을 쿠데타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유신이나 혁신과 같은 표현을 썼으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무라나카 다카지가 교묘하게도 〈우리는 유신의 전위전前衛戰을 벌인 것〉이라고 했듯이, 그들이 행동을 계기로 육군 당국이 새롭게 국내 체제 개혁을 위해 궐기하는 것으로 참된 '쇼와 유신'이 시작될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청년 장교들은, 쿠데타란 국체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대원수인 천황 폐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경질적일 만큼 쿠데타나 혁명이라는 말을 피했다. 하지만 청년 장교들의 주관적인 생각이 그랬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보면 이것은 쿠데타 이외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137-9)


"1933~1934년 무렵 육군 내부에서는 천황기관설을 신봉하고, 합법적으로 군부가 권력을 손에 넣은 다음 국가 총동원 체제를 갖추도록 하자고 주장하는 그룹을 통제파라고 불렀다. 교육총감 와타나베 조타로, 육군성 군무국장 나가타 데쓰잔 등이 중심이었다. 이에 대해 국체 명징운동에 적극적이고, 불법적으로라도 권력을 장악한 다음 천황 친정에 의한 국가를 목표로 삼은 그룹을 황도파라고 불렀다. 이 그룹은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를 받들었는데, 황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도 황도파였다." "「군인칙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그들은, 천황이 살아 있는 신이며 나를 버리고 신을 모시는 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배워온 세대다. 그들은 일본의 현실에 대해 살아 있는 신의 뜻을 따르는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이렇게 된 것은 천황 주변에 있는 측근이 국민의 뜻을 왜곡하여 천황에게 전하고 있는 체제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그런 측근들이야말로 '임금 곁의 간신'이라는 것이다."(144-5)


"2·26 사건은 쇼와 초년대의 여느 국가 개조운동과 크게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청년 장교가 부사관이나 병사에게 명을 내려 다수를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동원된 병사 중에는 이해 1월에 갓 징용되어 아직 무기를 취급하는 데조차 익숙하지 않은 이까지 있었다. 쇼와 초년대의 국가 개조운동에서는 실제로 병력을 움직일 많나 규모의 사건이 없었다. 게다가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천황의 대권임에도, 청년 장교들은 천황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뜻을 무시했다. 자신들의 행위는 큰 의미에서 천황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천황의 대권을 거스르는 행위도 허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을 '대선大善'이라 칭했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청년 장교들과 그들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이 요인을 습격하여 처참하게 살해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임금 곁의 간신'에 대한 그들의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살해 방법은 쇼와 초년대의 테러 사건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잔혹했다."(147)


"2·26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성공'했다는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청년 장교들의 궐기는 4일 만에 천황의 강한 반대와 그것을 지지한 육군 주류파(이를 통제파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들의 호소는 묵살되고 만다. 결국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2·26 사건 후의 정치 상황에서 육군 주류파는 〈이와 같은 불상사는 두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명분 아래 육군 내부의 청년 장교들이 맡고 있던 지도부의 일파(황도파라고 불러도 좋다)를 숙군인사肅軍人事라는 명목으로 몰아냈고, '군부대신현역무관제'라는 제도를 부활시켜 육군상을 경질하거나 후임 육군상을 추천하지 않는 방법을 동원하여 내각의 생사여탈권을 획득했다. 이리하여 언제라도 육군이 주도하는 내각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2·26 사건이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이유다. 물론 이 성공은 (쿠데타를 주도한) 청년 장교들의 주체적인 의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형태의 것이었다."(140)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소련군은 중국을 지원하면서 자국의 근대적 병기의 위력을 시험이라도 하듯 관동군을 견제했고, 관동군도 소련이 어느 정도 항일 의욕을 갖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도발하곤 했다. 그리하여 1937년에는 113회, 1938년에는 166회나 국경 분쟁이 일어난다. 그런 분쟁들은 점차 대규모 군사 충돌로 바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장고봉張鼓峯 산정에 소련군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관동군이 처음 알아차린 것도, 국경 침범에 이상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군의 보고를 받은 참모본부는 소련 측에 항의하는 게 좋겠다고 외무성에 제안했다. 외무성의 항의에 소련 측은 〈1886년 이후 이 지역은 소련 영토〉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이런 사태는 물론 참모본부의 막료들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오히려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소련군과 군사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했다."(234)


"그러나 일본군은 근대적 병기를 앞세운 소련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 제19사단의 참모장은 조선군 참모장 앞으로 전보를 보내 〈전선은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전선의 지휘관과 병사는 오로지 수비를 하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는 바, 전황이 '돌파구'를 찾기까지 외교 교섭을 통해 정전으로 나아갔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장고봉 사건은 결국 외교 교섭으로 결말이 지어졌다." "사단장의 독단과 참모본부의 중견 막료들의 책임을 따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제19사단의 장병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소련군 앞에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전사했다는 측면만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외교 교섭에서 소련이 뜻밖에도 일본군을 최종 단계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합의한 사실을 핑계로, 이것 역시 일본군의 철저한 저항 때문이라고 말하고, 소련군은 대일전에서 앞서지 못했다는 판단을 내리는 자료로 삼았다. 장고봉 사건은 책임도 묻지 않고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일본군의 육탄 공격을 예찬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246-7)


"쓰지 마사노부는 노몬한 사건을 언급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참모이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수석에 가까운 성적으로 졸업한 쓰지는 육군 내부에서 단연 주목받는 존재였다. 성적 지상주의의 조직 원리하에서 단지 육군대학의 성적이 좋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성격이나 언동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어디에 배속되든 강경론을 주장했고 때로는 상관의 눈에 띄는 화려한 언동을 선보이기도 했다. 신중론을 펼치는 상관을 험악하게 매도하기도 해서 군사령관이 일개 참모의 비위를 맞추느라 전전긍긍했다는 에피소드까지 전해온다. 1937년 11월 관동군 참모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줄곧 대소련전을 외쳤고, 그 때문에 일이 있을 때마다 소련군이나 몽골군의 국경 침범을 지적하면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고봉 사건에서 조선군이 소련 측에 철저하게 패한 것을 두고 〈저들은 조선군이어서 그렇다. 관동군이라면 절대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큰소리쳤다."(263-4)


"노몬한 사건의 발단은 장고봉 사건으로부터 8개월이 지난 후인 1939년 4월 관동군이 정리한 「만소 국경 분쟁 처리 요강」이었다. 이 요강은 관동군 사령관의 이름으로 시달되었는데, 실제로 이 요강을 기안한 사람은 쓰지였다. 일본의 판단만으로 국경선을 정하고 그곳에 소련군이나 몽골군이 들어오면 철저하게 응징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초원이나 강, 산 등에는 국경선이 명확하게 그어져 있지 않으므로 일방적으로 선을 긋고 상대방이 그곳에 진입해오면 〈주도면밀한 준비 아래 철저하게 응징하여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더욱이 이 요강에는 무시무시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방위사령관이 자주적으로 국경선을 인정하고 이를 제일선 부대에 명시〉해도 좋다는 것이다. 제멋대로 국경선을 그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대소 군사 충돌 대망론'은 장고봉 사건의 교훈이 전혀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264)


"1940년 9월, 일본군은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주해 들어간다. 프랑스의 식민지 제독에게 억지스러운 요구를 들이밀고서 무력을 발동하여 진주한 것이었다. 이때 외무성은 프랑스 외무성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고, 하노이에 있는 육군의 장제스 원조 물자 저지를 위한 감시단 위원장 니시하라 잇사쿠 소장과 프랑스 측의 교섭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참모본부 작전부장 도미나가 교지와 남지나방면군 참모부장 사토 겐료는 제5사단을 움직여 무력 진주를 강행했다." "이에 대해 이시이는 이렇게 말한다. 〈쇼와 육군에는 세 가지 하극상 사건, 이른바 군기를 따르지 않았던 전투가 있습니다. 이시와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만주사변, 쓰지 마사노부와 핫토리 다쿠시로의 노몬한 사건 그리고 도미나가 교지와 사토 겐료의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입니다. 이것은 쇼와 육군의 불명예 사건이며, 특히 이시와라의 만주사변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341)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의 국책은 단숨에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로 기울었다. 일본이 이곳에 진주하는 것은 자존·자위를 위한 '정당방위'이고, 이것은 미국이 평소에 영국을 원조하는 것을 '정당방위'라고 말한 것과 같은 논리로 앞뒤를 맞추었다. 해군성에서도 군무국 제2과장 이시카와 신고가 중심이 되어 강력하게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주장하고, 이것이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진다면 얼마든지 받아주자며 자신감을 보였다. 주독 대사 오시마 히로시는, 독일은 단기간에 소련을 제압하고 우크라이나, 발틱(발트 해 연안부), 벨라루스, 캅카스 등을 소국으로 분할하여 소련을 실질적으로 해체할 작정이니, 일본도 이에 응하여 극동소련군을 제압하고 독일의 방침에 즉시 호응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호소했다." "마침내 6월 24일 조정된 「제국 국책 요강」에서는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가 중심으로 바뀌어 있었다."(346)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에 대한 미국의 보복은 일본군 상륙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7월 25일 미국 내에 있는 일본 자산의 동결을 발령했고, 26일에는 영국, 27일에는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가 그 뒤를 따랐다. 28일에는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가 일본에 대한 석유 공급을 중단했다. 8월 1일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일본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른 것이었다." "육군성과 참모본부 안에서 대미전의 목소리가 급속히 높아졌다. 전쟁지도반의 『기밀 전쟁 일지』 8월 2일자 기록을 보면, 〈대미 전쟁은 백 년 전쟁이다. 제국은 이미 이를 피할 방법이 없다〉고 적혀 있다." "전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국 측은 이미 이 단계에서 일본 외무성 전보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는 군사적으로는 '무혈 점령'이라는 점에서 성공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쇼와 육군의 예상이 얼마나 안이했는지를 보여주었고, 그 점에서 실패했던 것이다."(352-5)


"이치키 지대는 1942년 8월 12일 트루크 섬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과다카날 상륙 작전을 준비했다. 이치키 지대는 1942년 8월 하순부터 1943년 2월까지 약 6개월의 시간을 과다카날에서 보낸 유일한 부대였다." "미군의 병력이나 병기와 비교하면 이치키 지대의 제1진은 5000 대 1 이상 차이가 있었음에도 대본영과 제17군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일단 군을 투입했다가 패퇴하면 오기가 생겨 잇달아 병력을 쪼개서 보내는, 이른바 체면을 건 싸움을 벌이는 것이 쇼와 육군의 나쁜 전통인데, 그것이 여기서도 고개를 쳐들었던 것이다. 1943년 2월 7일 최후의 부대가 철수하기까지 육군 약 3만 600명, 해군 약 4700명을 쏟아부었고, 이 가운데 육군 약 2만 800명, 해군 약 3800명이 전사했다.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보급 물자가 도착하지 않아 쇠약해져서 죽거나 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이치키 지대에 한정하면, 2500명이 조금 못 되는 병사 가운데 살아서 귀환한 이는 고작 1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493-4)


"이치키 지대와 (제2진으로 출병한) 가와구치 지대의 패전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래 육상전에서는 처음으로 맛보는 굴욕이었다. 전후에 기록된 당시 참모들의 수기나 회상록에서는 본래대로라면 이 단계에서 과연 과달카날이 전략적으로 그만큼 가치가 있는지 여부를 재검토해야 했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당시 참모본부와 제17군사령부의 분위기는 그다지 냉정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비행장을 탈환해야겠다는 체면 문제가 앞섰다. 군인들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재검토하자는 논의는 미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의견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참모본부 작전부장 다나카 신이치, 작전과장 핫토리 다쿠시로 그리고 작전과의 쓰지 마사노부 등에게 도조 히데키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과달카날을 포기하지 마라〉고 거듭 주의를 주었다. 참모본부는 그 말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작전과 자체가 개전 이래 연전연승이라는 '불패의 신화'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501-2)


"1943년 1월부터 2월까지 해군의 구축함이 라바울 기지에서 과달카날로 들어와 세 차례에 걸쳐 1만 명이 넘는 일본 병사를 철수시켰다." "2월 9일 오후 7시, 대본영 발표가 있었다. 1항과 2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2항 중반부터 과달카날에 대해 언급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서 작전 중인 부대는 작년 8월 이후 잇달아 상륙한 우세한 적군을 같은 섬 일각에서 압박하고 과감하게 격전을 치러 적의 전력을 분쇄해왔다. 이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2월 상순 이 섬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시종 적을 강하게 압박해 굴복시킨 결과 양 방면에서 엄호 부대의 전진轉進은 대단히 질서정연하고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적에게 입힌 손해는 인원 2만 5000명 이상(실제로는 전사 1000명, 부상 4200명), 우리 쪽 손해는 1만 6734명(실제로는 전사자와 아사자를 합쳐 2만 4600명)이라고 덧붙였다. 대본영 발표가 '과장'과 '허위'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525-6)


"쇼와 육군을 조사하다 보면 알 수 있지만, 참모본부 작전부에 배속되는 엘리트 관료에 관하여 은밀하게 내려오는 불문율이 있었다. 육군대학교 졸업자 50명(해마다 약간의 증감이 있다)은 쇼와 육군의 지도적인 지위를 보장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이 가운데 성적 우수자(상위 10퍼센트, 보통 5~6명)는 특히 군도쿠미軍刀組라 하여 참모본부 작전부에 배속되며, 그들의 집무실은 작전부원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벽에 걸린 남방 요역을 나타내는 대형 지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현지로부터의 전투 보고를 듣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또는 국책의 핵심이 되는 전쟁 방침을 정하고 그것을 해군의 군령부 작전부와 조정하여 가끔은 정부에 대본영의 의향이라며 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참모본부 작전부에서 현지 파견군에 내려지는 명령은 통수권을 책임진 천황의 명령 그 자체였다. 현지 파견군은 그 어떤 명령도 어길 수 없었다."(572-3)


"작전부 참모들은 정보부를 포함해 다른 부문의 참모들에게 강한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정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지도 않고, 정보부가 수집한 다양한 데이터도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이 생각하는 지식에 따라 작전 명령을 내렸다." "정보부의 엘리트 군인들이 전후에 펴낸 글에서 공통되게 드러나는 것은 태평양전쟁이 틀림없이 정보전이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전쟁을 계속했다는 자성自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전략폭격조사단은 일본이 왜 이렇게 정보를 경시했는지에 관하여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정밀한 정보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일본 침략군에 협력한 중국인이나 특수 기관〉에 의지하다 보니 정보 수집이나 해석을 시스템으로서 구축할 수 없었고, 수상한 정보원에게 기밀비를 지불하고 그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이용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573)


"1943년 4월 18일 오전,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탄 일식육상공격기가 격추되었고, 야마모토는 부관 및 군의장 등과 함께 전사했다." "야마모토의 전사는 일본 해군의 굴욕이었음에도 이 사실을 오히려 담담하게 전함으로써 국민의 충격을 완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발표와 달리 야마모토의 최후를 본 육해군 수색대의 병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전선으로 보내졌고 결국 전사를 강요당했다." "야마모토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제6사단 제23연대의 하스나 미쓰요시 소위가 지휘하는 수색대였다. 하스나를 포함하여 수색대 소속 병사 약 20명은 목격한 사실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을 금지당했고, 누설할 경우에는 〈군법 회의에 회부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이 병사들은 잇달아 전선으로 보내졌으며, 어떻게 해서든 살아 있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형태의 전속이 되풀이되었다."(580-1)


"태평양전쟁의 개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가장 많이 부족했던 것은 후방사상後方思想이었다. 후방사상이란 병참, 보급에 관한 사고방식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는데, 병력·무기·탄약·식량·의약품·의복 등을 전선의 병사에게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일본군 내부에서는 〈군수품을 나르는 이가 병사라면 나비와 잠자리도 새다〉라며, 치중輜重을 담당한 장교나 병사를 조롱하는 우스꽝스런 노래가 불리기도 했다. 러일전쟁 이전부터다. 치중이란 병참과 거의 같은 의미인데, 군대에 불가결한 식량·의복·무기·탄약 등을 총칭한다. 전투를 지원하는 후방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후방을 얕잡아보는 치명적인 결함은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의 교육에서도 여실하게 나타난다. 육군대학교에서도 병참이란 전선으로 식량과 무기, 탄약 등을 나르는 전술이라 하여 도상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심부름'과 같은 단계에 머물렀을 뿐 일관된 교육도, 그 이론도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638-9)


"일본군 안에서도 보기 드문 육군대학 출신 병참참모였던 이도 마쓰아키에 따르면,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은 독일군을 모방하기는 했지만 병참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규율도 엄격해서 약탈 등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점차 후방사상을 경시하게 되었다. 이도는 쇼와 시대에 들어 〈만주사변에서는 병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중일전쟁에서는 더욱 소홀하게 취급되었으며, 결국 대동아전쟁에서는 병참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일거에 만연하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병참 사상에는 전쟁 억지력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냉철하게 숫자를 분석하고 군사를 직시하면 병사를 인간으로 보게 됩니다. 그것이 일본에는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이도의 어조에는 병참을 작전이나 정보보다 상위에 두어야 한다는 확신이 배어 있었는데, 나는 태평양전쟁에서 그런 병참사상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했다."(639-40)


"「전진훈」은 1941년 1월 육군상 도조 히데키의 이름으로 군에 시달되었다. 원문을 작성한 사람은 시마자키 도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육군 막료들이 초안을 집요하게 손질하여 마무리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내용은 근대국가의 가치 기준을 모조리 부정한 것이었다. 「전진훈」의 '본훈 제1장 제1절 황국'은 〈대일본은 황국이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위에 계시며, 조국肇國의 황모皇謨를 계승하여 무궁하게 군림하신다. 황은皇恩은 만민에게 널리 미치며, 성덕聖德은 팔굉八紘에 고루 미친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사생관死生觀을 보면, 〈생사를 관통하는 것은 숭고한 헌신 봉공의 정신이다. 생사를 초월하여 오로지 임무를 완성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고, '이름을 아낀다'라는 항목에는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강하다. 늘 향당鄕黨과 가문의 면목을 생각하고 더욱 분려奮勵하여 그 기대에 응답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향토와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라는 것이다."(684)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에 의한 특공 작전이 처음으로 펼쳐진 것은 1944년 10월 25일이었다. '인간' 그 자체가 폭탄이 되는 이 작전은 태평양전쟁 기간을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 또 비참했다. 이 작전을 채택한 육해군 지도부의 책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이 작전으로 사망한 병사들은 '신'으로 되살아나리라 강요받은 존재로, 오늘날에도 계속 거론되어야만 한다. 10월 25일은 필리핀 앞바다 해전이 시작된 다음 날이다. 레이테 결전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필리핀 앞바다 해전이 발동되었고, 다바오 기지를 출발한 해군특공대 소속 비행대가 미 해군 항공모함을 목표로 고도 3500미터 높이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이날 필리핀 앞바다를 돌아다니고 있던 미 기동부대를 향하여 특공대는 수차례 육탄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육해군 특공대 2367대가 출격하게 된다. 이는 그 숫자만큼의 생명이 사라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764)


"이 작전을 처음 생각해낸 것은 해군 내부의 항공 관련 막료들이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밀고 나간 사람은 제1항공함대사령관 오니시 다키지로였다. 당초 오니시는 이 작전을 '통솔의 외도外道'라고 자조했지만, 이미 전력이 바닥난 일본 해군으로서는 일시적으로나마 이러한 작전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전과가 예상 밖으로 컸기 때문에 이 작전이야말로 유효하다는 양해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특공 조종사의 양성, 특공기 개발 등에 힘을 쏟게 되었다." "1945년에 들어서면서 쇼와 육군은 전군이 똘똘 뭉쳐 특공 작전을 외쳤다. 이것에 걸려든 이들은 주로 학도병이나 갓 소집된 신병들이었다. 다시 말해 군사 요원으로서 전력상 지위가 낮은 순으로 특공 작전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특공기 조종사들은 개개인의 능력이나 의사만으로 이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반드시 따져야만 하는 쇼와 육군의 체질이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 체질이 충분히 밝혀졌다고는 할 수 없다."(766, 781-2)


"1945년 3월, 고이소 내각은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국민의용대 조직에 관한 건」을 결의했다. 국민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6월 13일에는 각료회의에서 법적인 틀을 마련했다. 의용병역법으로 명명된 이 법률은 15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성,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여성에게 의용 병역을 부과한다는 내용으로, 말하자면 국민을 모조리 동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국민 전원이 병사가 되는 군사국가가 탄생했다. 이것이 국가총력전 구상의 귀결이었다." "이리하여 병사 수는 확보되었는데, 정부는 참모본부의 방침에 호응하여 본토 결전을 좀더 구체적으로 다지기 위해 국민의 사유재산에도 제한을 가하기로 했다. 3월 28일 공포된 「군사특별조치법」은 미군의 상륙에 대비해 진지를 구축할 때 국민의 모든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국민은 본토 결전에 대비해 어떤 항변도 허용되지 않았고, 참모본부나 군령부에서 명하는 대로 움직여야만 했다."(806)


제3부 쇼와 육군이 전후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GHQ 내부에서는 G2와 GS(민정국) 사이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G2는 군인이 중심이어서 철저한 반공 노선을 취했고, 여차하면 소련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추후 제정된 일본국헌법이 재군비를 금지한 것에 불만을 품었고, 가까운 시일 안에 재무장을 허용하여 반공의 보루로서 일본을 군사 대국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주도한 사람이 윌로비였다." "윌로비와 대립한 사람은 GS를 지휘하던 국장 휘트니였다. 그는 쇼와 육군의 완전한 해체를 주장했고, 일본에 민주적인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이 군사 조직을 최우선으로 배제해야 할 세력으로 간주했다. 윌로비와 휘트니는 맥아더를 지탱하는 두 축이었다. 윌로비는 휘트니 등의 민주적 개혁에 사사건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 그가 (원칙대로라면 전범으로 간주되었어야 할) 핫토리를 비롯한 과거의 막료들을 감싸고 돈 것은 일본의 재군비가 진행될 경우 그들을 지도부에 포진시키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978-9)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들 군인의 변절이 왜 이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졌느냐는 점이다. 작전참모의 졸렬한 작전 때문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장병을 생각하면 이들의 재빠른 변신을 다시금 검증할 필요가 있다." "핫토리는 작전과장으로서 실질적으로 참모본부의 작전 전반을 관장했다. 그 책임은 대단히 무겁다. 그럼에도 이러한 입장에 선 것은 핫토리 자신의 윤리관이 얼마나 엉성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맥아더의 전사를 집필하는 작업은 과거 일본군 군인들에게는 물론 알려지지 않았고 GHQ 내부에서도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1947년 5월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2년 반 후인 1950년 12월에 마무리되었다. 개전부터 패전까지 일본 측의 핫토리 그룹이 작성한 원고는 방대한 분량이었던 듯하지만, 구성원 개개인에게는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핫토리와 윌로비가 암암리에 이들이 작성한 원고를 수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987)


"1953년에 간행된 『대동아전사』(저자명 핫토리 다쿠시로)에는 맥아더의 『태평양전쟁사』 편찬 그룹에 속한 멤버의 이름이 보인다. 이 10명의 면면을 보면 패전 시 대좌 3명, 중좌 6명, 소좌 1명이다. 그러니까 참모들이 전쟁사 편찬의 주체로 참가했던 셈이다." "패배한 군대의 장수(그들은 물론 좌관급이었다)는 전황에 대해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전장에서 싸운 적이 없다. 단지 참모본부 깊숙이 자리한 방에서 지도를 보며 군대를 이리저리 움직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전시에 그들은 사이판의 방어진지가 맥없이 무너지자 이를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사단의 잘못으로 돌렸고, 레이테 섬에서 일본군이 패배했을 때도 일방적으로 전략을 변경한 뒤 작전이 실패하자 그것을 현지 군의 무능 탓으로 돌렸다. '절대 국방권' 구상이나 '첩호 작전' 등도 책상에서 마련하여 현장에 들이민 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본영의 참모는 어떻게든 전사를 바꿔 쓸 수 있다는 것이 『대동아전사』를 관통하는 논조다."(988-9)


"1953년 간행된 논문 「차기 대전과 일본방위론」에서 핫토리는 미일 전쟁의 발발을 미국의 도발과 일본 '중추부'의 개전 의사가 만나 벌어진 결과라고 보는 듯히다. 뿐만 아니라 이 논문 곳곳에서는 그의 자기변명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참모의 명령에 따라 사지로 달려간 200만여 명의 일본군 병사는 얼마나 한스러웠을까. 패전 후 8년, 전시 지도를 담당했던 장관將官은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총살을 당하거나 자결을 하거나 스가모 형무소에 갇혔으며, 사회에 나와서도 생활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부사관이나 병사는 시베리아에 억류되거나 남방에서 얻은 병을 치유하는 데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거나, 생활고와 싸우고 있었다. 많은 병사는 가혹한 전장 체험에 가위눌리면서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작전참모는 GHQ로부터 급여를 받으면서 '일본군 부활안'이라는 두렵고도 무책임한 문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전후사회에서 가장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할 '쇼와 육군 작전참모'의 처세술이었다."(995)


"쇼와 육군의 위계질서는 엘리트 군인과 병사 두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고 했거니와, 병사란 1전 5리(엽서 한 장 값, 즉 소집영장을 말한다)로 징용된 자이다. 일본은 징병령을 시행했기 때문에 만 20세가 되면 본적지에서 징병 검사를 받는다. 피검자는 신체 조건, 운동신경 등에 따라 갑을병정으로 등급이 나뉘는데, 평시라면 갑종은 2년에서 3년 동안 병역 의무를 져야 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시민의식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고, 자립적인 개인과 같은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그들이 싸우는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그저 상관의 명령에 따라 싸우다 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윤리라고 배웠을 따름이다. 쇼와 10년대에 들어설 무렵에는 학교 교육이 확대되면서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신들린 듯 신민 교육이 실시되었다. 전후 쇼와 육군이라는 조직은 해체되지만 그와 같은 일본적 공동체의 잔재는 전우회라는 모임을 통해 이어졌다."(1018-9)


"다수의 전우회에서는 사상적으로 대동아전쟁이 긍정되었고, 전장에서 싸운 병사들의 감정을 반영한 형태로 쇼와 육군의 군사 행위가 정당하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이처럼 일본군의 행위는 모두 옳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쇼와사의 전승傳承은 옛 병사들의 감정을 기초로 한 것이다. 전우회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월보를 발행하는 곳일수록 이러한 감정론이 활개를 친다.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인식과 다른 인식(예를 들면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론 등)은 대부분 도쿄전범재판사관이라 결론짓고, 선두에 서서 깃발을 휘두르는 역할을 하는 것은 교육과 저널리즘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런 주장은 쇼와 육군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전우회의 단골 메뉴다." "'다른 사람은 나쁘다'라는 이런 주장은 태평양전쟁을 선택한 당시 지도자의 이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라고 말해도 좋다. 역사 인식이 그 단계에 멈춰 있다는 얘기다."(1023-4)


"'영령'에 대한 애도와 추도는 전우회의 중요한 역할이다. 전우회원들이 침략 전쟁의 첨병으로 낙인찍힌다면 전사한 동료들에게 미안한 노릇이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행하는 추도와 위령은 쇼와 육군이 중심이 된 태평양전쟁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는데, 전장에서 싸운 병사의 심정은 도미오카의 말로 대표되듯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만나자'는 표어 아래 죽어간 전우에게 미안하다는 것, 그 하나로 수렴된다. 이것은 더 이상 이론이나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죽은 자는 두번 다시 의사표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설령 야스쿠니 신사에서 영령으로 모셔지는 것을 양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확인할 길이 없다. 전사 당시의 단계로 한정하여 추도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일본인의 '사생관'에 관련된 문제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는 전쟁으로 내몰린 세대의 사생관으로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는 그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1031)


# 전우회의 여러가지 활동

1. 쇼와 육군의 군사 행위 정당화

2. 전쟁사의 다양화에 대한 통제

3. 전장에서 있었던 행위의 공동 치유

4. 전후사회에서의 이해관계

5. '영령'에 대한 공양과 추도

6. 군인연금 지급 등의 명령서 전달


"1978년 3월 10일, 야스쿠니 신사는 A급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한 7명과 스가모 형무소 안에서 병사한 7명 등 총 14명을 합사했다. 이때 궁사였던 마쓰헤이 나가요시는 훗날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완전히 전투를 멈춘 것은 국제법상 1952년 4월 28일(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투 상태에 있을 때 열린 도쿄전범재판은 군사재판이고, 그 재판에 따라 처형된 사람들은 전투가 한창일 때 적에게 살해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전장에서 죽은 사람과 처형된 사람은 다르지 않다.〉 이것은 하나의 역사 인식 형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결국 태평양전쟁의 '전투'는 1945년 8월 15일에 끝났지만 '정치'는 1952년 4월 27일까지 이어졌다는 생각이다. 이 전투와 정치를 아울러 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야스쿠니 신사는 GHQ의 방침에 대항하여 싸운 사람들(국제주의자부터 사회주의자까지)의 영혼도 함께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1033)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 14명의 합사'는 국내에서도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매년 문제가 되고, 〈개인이냐 공인이냐〉는 기자의 질문도 이 합사 사실이 밝혀진 이후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된다. 이 문제를 다시 꺼내는 까닭은 가해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인지 고민해야 될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우회 중에서 도조가 합사되었다고 하여 야사쿠니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곳이 있다. 이 점에 관하여 나는 야스쿠니 신사는 과연 역사를 모두 팽개치고 성립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있으며, 적어도 도조 등을 합사함으로써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인의 사생관이라는 영역을 넘어 이를 정치 문제화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사는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애매모호하게 하고, '영령을 국가적으로 총동원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역사적으로는 과거의 침략 행위 비판에 정색하고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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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 - 태평양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
조너선 파셜.앤서니 털리 지음, 이승훈 옮김 / 일조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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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모든 면에서 1942년 6월 4일은 분수령이었다. 일본 입장에서 미드웨이 해전은 지난 6개월간 거두어 온 승리의 갑작스런 종막이었다. 태평양에서 공세를 개시할 수 있는 능력이 대부분 소멸된 것이다. 일본 해군의 최강 항공모함인 아카기, 가가, 히류, 소류의 손실은 전쟁의 문을 연 세계 정상급 해군항공대를 회복 불가 수준으로 망가뜨렸다." "미드웨이 해전이 일본의 야욕에 제동을 걸고 공세의 주력을 꺾었다면 미군에게는 정확히 그 반대를 예고한 사건이었다. 미군 지휘관들은 진주만의 굴욕 이래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격을 고려할수 있게 되었다. 미군이 미드웨이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또 하나의 중요한 결전장인 과다카날섬에서 싸울 물적·정신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이 입은 손실은 다음 해까지 솔로몬 제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입은 만큼의 피해는 아니었지만, 미드웨이 해전은 1942~1943년에 벌어진 지옥 같은 소모전의 문을 열어젖힌 사건이었다."(16-7)


제1부 서막


"미드웨이 작전과 알류샨 작전은 일본 군부, 특히 1942년 초 일본 해군이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 갈피를 못 잡은 결과였는데 넓게 보면 이 어려움의 원인은 전쟁 초 4개월 동안 일본이 거둔 예상외의 대승이었다." "1942년 3월경, 일본은 백인 식민세력을 모두 추방하고 새로운 태평양제국에 필요한 원유와 기타 전략자원을 즉시 조달할 수 있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남방 자원지대를 확보했다. 중국에서 이미 정복한 땅에 더해 일본은 북으로는 만주, 중국 중부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거쳐 남서쪽의 버마, 말라야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일본의 속령은 수마트라에서 동쪽으로 펼쳐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따라 라바울까지 닿았고, 일본 해군의 거점인 추크섬을 거쳐 북으로 쿠릴 열도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몇 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일본은 인류 역사상 광대한 제국들 중 하나를 만들어 냈다."(61-4)


"1942년 초, 일본 해군의 관점에서 보면 전략적 선택지가 여럿 있었다." "첫 번째 전략적 선택지는 공세에서 수세로의 태세 전환이었다. 나구모의 참모장 구사카 소장은 이 견해의 주요 지지자였다. 1942년 초에 일본은 많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얻은 것을 공고히 다지지는 못했다. 일본은 방어선 외곽을 강화하여 미국의 반격에 대비해야 했는데 외연을 확장하는 한 이를 달성할 수 없었다. 방어태세로 전환하면 이미 총력전에서 입은 피해가 완연한 항공모함부대는 함재기와 조종사들을 보충할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논점은 옳았으나 구사카는 이 계획을 대변하기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었다. 구사카와 상관 나구모는 진주만 기습계획에 반대했다. 그 결과 모순되게도 기동부대의 최고위 간부 두 사람은 연합함대에서 발언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접근은 일본 해군처럼 공격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조직의 지지를 받기에 너무 수동적으로 보였다."(70)


"두 번째 선택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침공이었다. 목표의 크기로 볼 때 터무니없는 제안으로 보였지만 몇 가지 매력적인 점도 있었다. 크기만 컸지 오스트레일리아는 인구밀도가 낮았고, 방어에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몇 개 사단 정도였다. 영토 크기로 인해 오스트레일리아군은 해안선 전체를 방어할 수 없었고 이는 일본이 '어딘가에는' 확실하게 상륙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육군은 작전 실행에 최소 10~12개 사단이 소요된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하여 이 제안에 재빨리 찬물을 끼얹었다. 육군에게 오스트레일리아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인력을 빨아들이는 수렁이었다. 따라서 육군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복에 몇몇 이점이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간단히 말해 필요한 병력과 수송수단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멀리 남쪽으로 작전을 확대하면 해상보급능력 밖에 있는 전역戰域을 추가하게 된다고 해군의 아픈 곳을 찔렀다."(71)


"미국 항공모함 격멸이 야마모토의 의중에서 과도한 상징성을 띠게 된 것은 당연했다. 쓸모가 있건 없건 항공모함의 존재는 일본이 벌인 전쟁에 내재된 모순 그 자체였다. 일본이 개전 초기에 거둔 승리는 눈부셨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의 산업 잠재력이 존재하는 한 결국 속빈 강정이었다." "눈에 보이는 출구전략이 없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 야마모토가 내놓은 '미 함대 격멸을 목표로 한 공세 지속'은 당연했으나 공허한 답이었다. 야마모토는 미국이 절대 포기하지 못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목표를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미국 항공모함을 유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야마모토는 하와이를 위협하는, 중간 어디쯤의 목표물을 공격한다면 미국이 격하게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 목표물이 하와이 주둔 항공전력의 작전범위 밖에 있어야만 하와이 주둔 미군기가 전투에 끼어들 여지를 줄일 수 있었다. 야마모토가 선택한 목표물은 '미드웨이 제도'였다."(78-9)


"4월 18일 아침, 나가노 군령부총장이 미드웨이 작전계획을 히로히토에게 상주한 지 불과 이틀 뒤, 미 육군 B-25 쌍발 중형폭격기 16기가 마법처럼 도쿄와 다섯 도시 상공에 나타났다. 육군항공대 제임스 둘리틀 중령의 지휘하에 폭격기들은 일본 해안에서 약 400해리(74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도달한 항공모함 호닛에서 발진했다." "직설적으로 말해 둘리틀 공습의 군사적 결과는 웃어넘길 정도로 미미했다. 몇몇 목표물이 눈먼 폭탄 몇 개를 맞았고 요코스카의 선대에서 개장 작업 중이던 항공모함 류호가 가벼운 손상을 입었을 뿐이다. 그러나 공습의 심리적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둘리틀 공습의 효과는 바늘에 찔린 정도였지만 야마모토가 중부태평양 작전에 대하여 육군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확고한 역할을 했다. 미 항공모함들이 확실하게 바다 밑에 가라앉지 않는 한 본토는 이런 공격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다. 따라서 4월 18일 이후 미국 항공모함 격멸이 연합함대, 군령부, 육군 공통의 절대 목표가 되었다."(90-1)


모든 것이 계획대로 풀린다면 미 함대는 일본군 상륙 후 미드웨이 수역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야마모토는 적 함대가 미드웨이 부근에서 여봐란 듯 움직일 곤도 부대를 습격하기 위해 오아후섬에서 서쪽으로 출격하여 북쪽으로 항해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연합함대는 미 해군이 항공모함뿐만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전함까지도 이 결전에 끌고 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더 나아가 연합함대는 미국 항공모함들이 전함 중심의 주력부대에서 떨어져 작전하며 서북서쪽에서 이들을 엄호할 것이라고 상정했다. … 그러나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이 노후 전함을 빠른 항공모함과 같이 운용한다는 개념을 폐기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 일본 해군은 잠수함 공격과 항공모함의 공습으로 약회된 미 함대를 마지막에 전함들이 포착하여 격멸할 것으로 기대했다. 어떤 의미에서 야마모토의 계획은 함포 위주 철학으로의 회귀였다. 여기에서 나구모 부대 항공모함의 역할은 결전 전에 적의 전력을 소모하는 역할로 격하되었다. 102-3)


"쓸데없이 교묘하고 복잡한 작전은 전전戰前 일본 해군 작전의 전매특허였다. 일본 해군의 함대 연습은 대개 일본 측의 정교하게 짜인 함대 기동에 편리하게 맞춰 미숙한 미국 해군이 서투른 기동으로 맞대응하다가 언제나 결국 전멸당하는 판에 박힌 공식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전략적 꿈나라에 빠진) 야마모토는 함선 22척만으로 작전의 핵심인 미드웨이 무력화를 수행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본의 수적 우위를 무위로 돌리는 어리석은 작전을 폈다. 22척은 야마모토가 다양한 작전목표로 태평양 전역에 뿌려 놓으려 한 함선 수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알류샨 작전은 일본 해군이 경솔하게 정한 목표들의 정점에 있다. 어떤 기준으로도 더치하버 공습은 50여 척에 이르는 함선을 보내기에 좋은 구실이 아니었다. 알류샨 작전이 양동작전으로조차 고려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귀한 전략자산을 이렇게 비전략적 목적에 쏟아부은 결정을 이해하기가 어렵다."(104)


"그러나 1942년의 일본은 극히 제한적으로 미국의 전력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 해군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전력이 상대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해전을 벌인 경우가 많았다. 일본 해군은 전투를 피하는 적을 공격하는 데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후 4개월 동안 일본군의 이러한 자아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적대관계가 시작된 이래 연합군은 끝없는 패배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연합군 장병 개개인의 용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연합군의 장비, 교리, 훈련 등 많은 부분에서 일본보다 뒤쳐졌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미국의 사기가 완전히 무너진 적은 없었으나 그때까지 미군의 군사적 능력에 뭔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껏 미 해군이 겪은 패배를 볼 때 일본 해군이 당연히 미 해군이 원양에서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105)


"많은 전후 연구자들은 야마모토가 나구모 부대와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위치에 주력부대를 배치한 결정을 비판해 왔다." "나구모 부대가 전함의 포격지원이 필요했다면 주력부대를 분리해서 유지하되 나구모 부대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운용하는 방법이 더 이치에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상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사실 나구모 부대 지원은 주력부대의 목표인 미 함대 격멸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부차적이었다. 야마모토 계획의 핵심은 격멸이었다. 만약 미 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진주만 밖으로 유인해야 한다면 일본군 총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도록 적을 기만함과 동시에 상호지원이 가능하게 함대를 배치할 길은 없다. 이 두 목표는 양립할 수 없다. 야마모토는 자신이 두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없음을 알았고 따라서 필요하다고 여긴 은폐를 위해 상호지원을 기꺼이 희생했다. 사실 적을 속여서 꾀어낼 수 있다고 본 전제가 처음부터 작전계획을 망쳐 놓았다."(108-9)


"모든 합리적 기준으로 봤을 때, 나구모 부대가 미드웨이에서 물량 우세를 유지하려면 5항전이 반드시 필요했다. 실제로 미드웨이 작전의 실행 가능성은 포트모르즈비 공략작전에서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보유한) 5항전이 심각한 손해를 입느냐 입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 도박은 큰 실수였는데 두 작전 중 더 중요한 작전이 덜 중요한 작전의 인질로 잡힌 모양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깨닫지 못했던 것은 '효용 극대화'와 전력 분산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력을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면 더 신속한 세력 확장을 기대할 수도 있으나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하다. 국지적으로 우세한 적이 작게 나뉜 아군 전력을 각개 격파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일본이 점유한 항공모함 전력의 우위는 예상보다 빨리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일본 해군은 한 번 수적 우위를 잃으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112-3)


"도상연습 종료 이틀 후인 1942년 5월 8일, 제4함대의 이노우에와 5항전으로부터 산호해에서 미 항공모함 2척과 교전을 치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첫 상황보고의 내용은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정규 항공모함들과 떨어져 단독 작전 중이던 경항공모함 쇼호가 공습을 받아 격침당했고, 후속 교전에서 일본 함대는 요크타운과 새러토가라고 여긴 미국 항공모함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이들을 침몰 직전 상태로 만들었다고 믿었으나 확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일본이 새러토가로 잘못 본 렉싱턴이 격침되었고 요크타운은 큰 손상을 입었으나 무사히 도망쳤다." "일본군이 생각했듯이 산호해에서 미 항공모함 2척이 모두 격침되었다고 가정해도 미 해군은 태평양에서 가용한 항공모함 3척─엔터프라이즈, 호닛, 와스프─을 아직 보유하고 있었다." "미군이 최대 3척의 항공모함을 가지고 있고 미드웨이 기지항공대가 다가오는 전투에 투입된다면 기동부대는 더 이상 물량 우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119-21)


"일본 해군 교리의 기본 원칙은 미국의 수적 우위 상쇄였다. 수적 열세를 극복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는 통합·집중된 화력 사용의 원칙을 신이 정한 법의 차원으로 격상한 전술교리라는 결과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일본 해군은 강력한 무기로 보다 먼 거리에서 먼저 공격하는 방법을 미국의 수적 우세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으로 보았다." "그러나 한 가지 임무에 과도하게 편중된 일본 해군의 교리는 왜곡되었다. 교리는 한 종류의 전투만 비현실적으로 강조했고 제해권 확립, 수륙양용 세력투사, 통상보호 같은 다른 열강 해군들이 수행하던 전통적 임무를 깡그리 무시했다. 그 결과 1930년대 말에 일본 해군의 전술 교리는 기형적으로 공격 원리에만 집중된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이 교리에는 전쟁 전반기에 실전에서 유용하게 활용된 부분이 많았으나(예를 들어 뛰어난 야간전투 능력)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있어 진정한 지적 기반은 되지 못했다."(147-8)


"일본 해군이 받은 압박은 무기체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어떤 의미에서 전투함과 비행기는 교리의 물질적 형태이다. 따라서 무기체계는 해군 전체의 전투 방법에 맞추어 작동하도록 설계되어야 의미가 있다." "일본 함선은 속력과 화력을 강조했는데 이는 일본 해군이 변함없이 추구한 전술적 통일성에 잘 맞는 요소였다. 항공기에도 해군의 항속거리, 화력, 기동성 선호라는 교리 일반이 반영되었다. 반면 일본 함선 설계에서는 구조강성, 항해안정성, 방어력, 손상통제가 경시되었다. 마찬가지로 일본 항공기들은 공격력을 갖추었으나 그만큼 공격받을 때 버텨내기가 어려웠으며, 잘 훈련된 조종사가 조종하면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었으나 조종사를 보호하는 기능은 뒷전이었다. 일본 함선과 항공기는 인명손실이 덜 치명적인 요소인 단기 해상분쟁에 적합했으며, 장기전이 가능한 진정 저력 있는 해군이 의지할 비장의 카드는 아니었다."(148-9)


제2부 전투일지


"6월 4일 오전 7시~8시 사이, 일본군이 도모나가 공격대 108기를 띄우는 데 고작 7분이 걸린 반면, 호닛과 엔터프라이즈는 고작 9기가 더 많은 공격대를 발진시키는 데 거의 한 시간 동안 고전했다. 미군 공격대는 전투기 20기, 급강하폭격기 68기, 뇌격기 29기로 총 117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호닛과 엔터프라이즈는 연합 공격대를 편성하는 대신 2개 비행단을 3개 방향에서 접근시켰다. 나중에 같이 발함한 공격대 일부는 잠시 후 따로 떨어져 나가 목표를 향해 각자 비행했고, 그 결과 전력이 더욱 분산되었다. 따라서 미군 비행기들이 일본 함대에 어찌어찌 도착했더라도 요크타운 공격대를 제외하고는 비행대 단위로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08시경에는 나구모와 기동부대의 운명이 어느 정도 정해진 상태였다. 미군은 일본군의 위치를 파악했고 확실하게 큰 타격을 입힐 전력을 상공에 띄울 수 있었다. 이제 적을 만나기만 하면 되었다."(265)


"이 사실은 나구모의 선택을 둘러싼 질문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만든다." "가장 속력이 느린 일본군 함상기인 97식 함상공격기의 순항속력은 138노트(255킬로미터)였다. 따라서 일본군 공격대가 미 기동함대까지의 거리인 200해리(370킬로미터)를 가려면 약 한 시간 반이 소요된다. 그러나 최선의 상황에서도 08시 38분에야 겨우 공격대 발진을 개시한 요크타운을 공격하려면 나구모는 07시 15분에는 공격대를 띄워야 선제공격이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구모는 적어도 06시 30분에는 공격대 배치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더 나아가 엔터프라이즈와 호닛이 공격대를 발진시키기 전에 공격하려면 늦어도 05시 30분에는 공격대를 발진시켜야 했다. 따라서 나구모가 관련 정보를 가지고 참모들과 토론하던 07시 45분~08시에는 미군의 선제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날 아침의 사건들을 되돌리기 위해 나구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266)


"이 상황을 야기한 진짜 중요한 정찰 실패 책임은 지쿠마 1호기에 있었다. 지쿠마 1호기는 나구모에게 제시간에 필요한 정보를 가져다줄 수 있었던 유일한 정찰기였다. 이 정찰기가 정확하게 항로를 따라 수면에 더 가까이 붙어 비행했더라면 06시 15분에서 30분 사이에 미 기동함대를 발견했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나마 결정적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시간대였다. 지쿠마 1호기의 정찰 실패로 나구모는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한 시간 이상 잃었다. 도네 4호기의 지각 발함이 아니라 지쿠마 1호기의 정찰 실패가 전술적으로 부정적 효과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러나 지쿠마 1호기의 실수는 더 큰 실패의 일부일 뿐이다. 아침 정찰에 쥐꼬리만 한 수의 비행기를 투입한 것이야말로 나구모의 성공 가능성을 해친 원인이다." "일본군은 정찰에 좀 더 많은 비행기를 투입했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군의 교리와 공격 위주의 가치관이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266-7)


"08시 00분~09시 17분, 공중에서 난타전이 벌어지던 당시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사건의 전후관계를 재구성하려는 후세의 역사가들에게나 당시 아키기의 함교에 있던 이들에게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미군은 물리적으로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끊임없이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 결과 불행히도 기동부대는 자신의 박자에 맞춰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적에게 끌려 다녔다. 설상가상으로 적의 공격에 대한 기동부대의 여러 반응 가운데 최소한 함대방공만큼은 중앙통제를 거의 받지 못했다. 08시 00분경 직위전력이 급격히 감소한 데 대해 각 항공모함의 비행장은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응해 직위전력을 보강했다.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며 필요한 일을 파악하고 교통정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상황이 조금 잠잠해지나 싶으면 공습경보가 또 울렸다. 일본군은 미군 공격대들이 계속 밀려들자 거의 반사적으로 대응했고 되는대로 찔끔찔끔 직위기들을 올려 보냈다."(282)


"레이더는 다가오는 위협을 미리 보여 주고 대책을 세울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이 장면은 일본군이 사전에 적기 내습을 경고해줄 레이더가 없어서 전투에서 이길 기회를 상실했음을 보여 준다." "아울러 레이더가 없었기 때문에 직위기와 미군기의 교전 가능한 유효거리가 짧아졌다. 일본군의 조기경보는 진형 외곽에 있는 순양함과 구축함이 담당했다. 조기경보를 맡은 순양함과 구축함은 항공모함에서 보이는 거리까지만 대형 바깥쪽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 결과 직위기들은 자주 항공모함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미군기와 교전했다. 제로센은 아군 함대 상공을 가로질러 도망치는 미군기를 추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그 자체로도 위험한 행동일뿐더러 직위대가 효율적으로 작전하기에 필요한 공간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좀 더 먼 거리에서 적기를 탐지할 수 있었다면 미군 공격대의 상당수는 일본 함대에 도달하기 전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282-3)


"10시 00분 경, 지금까지 연이은 미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적에 대한 일본군의 태도가 경멸로 변했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일본군은 B-17을 제외하고 내습한 모든 미군 공격대를 분쇄했다. 고위 지휘관들 사이에 자만심이 만연했을 것이다. 공격대 발진이 지연되어 다소 짜증이 났을지도 모르나 고급 간부들의 증언 어디에도 이때 진심으로 전투의 최종결과를 걱정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월드론과 린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자 겐다는 공습으로부터 함대를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는 작전 초기의 우려가 사라졌다고 언급했다. 미군의 공격이 성가셨고, 심지어 미드웨이 공습이 지연될까 봐 우려한 것도 사실이나 진정으로 절박함을 느낀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만약 실제로 그러했다면 이는 기동부대 수뇌부가 적의 능력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계점에 다다른 함대방공 체계의 취약점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다."(319)


"기동부대의 일부 조종사들은 상황이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미군은 쉴 틈 없이 공격해 왔으며 이제 전방위에서 기동부대에 도달했다. 직위대는 원거리에서 적을 탐지할 방법이 없었고 모함의 관제유도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적이 공격해 오는 '위험 방향' 단 하나만을 방어할 수가 없었다. 조종사들은 거의 모든 방향에서 닥쳐올지도 모르는 위협에 계속 눈을 부릅떠야 했다. 따라서 직위기대는 대형 곳곳에 분산되어 대공경계를 맡은 함선이 내는 시각신호에 주의를 기울이며 모함 근처에서 작은 소대 단위로 비행하다가 자신의 구역으로 날아오는 적기를 덮치기 위해 흩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전투기의 탄약 소진은 함대방공이 한계점에 다다랐다는 위험신호였다. 특히 방금 적을 격퇴했다면 더 그랬다. 결론적으로 조종사와 비행장은 나구모의 참모 누구보다도 현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이해했을 것이다."(320)


"10시 02분과 03분 각각에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 공격대에 포착된 일본 기동부대는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 이전에는 제병통합의 이점이나 전투기 지원도 없이 단독 행동한 비행대들(해병항공대의 VMSB-241, 해군항공대의 VT-6, VT-8 및 육군항공대 소속대 등)이 진입해 와서 다시 둘로 나뉘어 일본 항공모함 1척을 양면에서 공격했다. 이번에는 3개 폭격비행대와 1개 뇌격비행대가 동시에 공격했다. 미군 비행단 2개[엔터프라이즈, 요크타운]가 2개 축선으로 접근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했는데 게다가 우연의 일치로 이들은 같은 시간에 목표물 상공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두 비행단의 3개 비행대[VS-6, VB-6, VB-3]는 고고도에서, 1개 비행대[VT-3]는 비교적 저고도에서 다가왔고 추가로 전투기[VF-6]까지 투입되었다. 이번 공격은 이날 아침 일본군이 마주친 공격 중 가장 위험했다. 그리고 일본군 함대방공은 이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지게 된다. (항공모함 3척의 대파로 이어지는) 파멸적 실패였다."(324)


"제2차 세계대전기의 군함은 놀랍도록 화재에 취약했다. 윤활유, 용제, 가솔린, 수천 톤의 연료 등의 형태로 실린 석유 제품에서 풍기는 강한 냄새가 함선에 배어 있었다." "무엇보다 항공모함에서 가장 큰 위험은 항공유[경질유] 급유체계였다. 항공모함에서는 격납고 안이나 비행갑판에서 비행기에 급유할 수 있었다." "전·후방 항공유 탱크는 수직으로 설치된 항공유 주관主管들로 수평배관(고옥탄 항공유와 일반유용 하나씩)과 연결되었고, 수평배관은 격납고 갑판 전체를 둘러 설치되었다. 비행갑판 주변의 움푹 들어간 곳에 설치된 항공유 공급장치는 수직배관으로 연료를 공급받았다. 따라서 모든 항공모함은 항공유 공급배관으로 촘촘히 둘러싸여 있고 항공작전 중에 모든 배관은 가연성이 높은 항공유로 가득 찼다. 더구나 모든 배관이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한쪽에 문제가 생기면 연료배관을 타고 멀쩡한 부분까지 영향을 받아 결국 항공유 탱크까지 문제가 퍼질 소지가 있었다."(361-2)


"일본 항공모함 설계와 운용의 두 번째 문제점은 항공병장의 이송과 보관이었다. 충실한 화염방지 설비 및 바베트barbette와 주포탑의 장갑으로 탄약이송 시설을 보호하던 전함이나 순양함과 달리 항공모함, 특히 일본 항공모함의 보호설비는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항공병장의 반출은 전함의 포탄 반출보다 더 위험했다. 범용 고폭탄과 대함용 철갑탄은 장갑 관통을 위한 탄체에 대부분의 무게가 실린 전함 철갑탄보다 작약량이 많았다. 범용 고폭탄은 무게의 약 50퍼센트를 작약이 차지했고 경장갑 목표에 투하했을 때 같은 무게의 포탄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불행한 점은, 폭탄이 아군 항공모함의 내부에서 터져도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 항공모함 폭탄고의 장갑방어 수준은 최소한도였다. 이러한 설비는 평시 운용조건에도 간신히 적합한 수준이었으며 만약 격납고 갑판에서 큰 화재가 발생한다면 대참사로 이어질 터였다."(362-3)


"자랑스러운 아카기는 제1항공함대 창설 이래 14개월 동안 나구모의 기함이었다. 나구모는 이제 아카기 (그리고 가가와 소류) 없이 항공모함(히류) 1척과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5척으로 이기든 지든 싸워야 했다." "나구모의 항공전력이 항공모함 1척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히류의 비행기들이 반격 중이었으므로 승리할 가능성을 조금 더 높일 수 있었다. 일본군이 미군 뇌격비행대가 엄청난 손실을 입었음을 알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뇌격기 없이 미군이 나구모의 전함들을 격침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전함은 항공모함보다 급강하폭격기의 폭탄을 훨씬 잘 견딜 수 있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3전대의 하루나와 기리시마, 그리고 빠른 속도의 강력한 어뢰를 갖춘 8전대의 도네와 지쿠마가 공습을 뚫고 적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만했다. 만약 히류 공격대가 단 1척이라도 적 항공모함을 무력화한다면 이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392-4)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자면) 적의 전력이 확실히 압도적이었으므로 히류 혼자서 전투의 향배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영리하게 싸워야 했다. 히류를 곤란한 상황에서 끄집어내려면 히류가 적 항공기의 행동반경 한계점에 있어야 적절한 기회가 왔을 때 후퇴시킬 수 있었다. 나구모나 야마구치가 이런 방책을 떠올렸다 해도 이대로 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둘 다 당연히 싸우고 싶어 했고 싸움은 공격을 뜻했다. 그러나 이대로 공격하는 것은 적의 배만 불려 주고 귀중한 전력을 낭비하는 행위였을 뿐이다. 사실 두 사람 다 비난받을 부분이 있다. 나구모는 히류의 운용과 관련해 직접명령을 등한시함으로써 야마구치가 히류를 직접 운용하게 만들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나구모는 수뢰전 지휘관으로 퇴행해 버리고 말았다. 나구모는 일본군 전체 전력에서 가장 중요한 단 1척의 함선[히류]의 운명에 신경 쓰는 대신 자신이 하려는 수상전투에만 온 정신을 쏟았다."(396-7)


"히류가 동쪽으로 돌격하는 동안 공격당한 세 동료는 극단적 상황으로 내몰렸다. 아카기, 가가, 소류에 화재가 발생한 지 여러 시간이 지나자 영구적 구조 손상이 일어났다. 엘리베이터 통로가 추락한 아카기와 가가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는데, 엘리베이터 통로가 일종의 연통 역할을 하면서 위로 연기를 뿜어내고 아래로 외부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양 함 내부는 일종의 용광로가 되었다. 고온으로 장시간 가열된 강철 구조물들이 붉게 달아올라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변형되고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13시 38분, 아오키 함장은 현실을 인정하고 어진영御眞影[덴노의 초상 또는 사진]을 노와키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어진영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명정에 실려 노와키로 이동했다. 이제 덴노에 대한 막중한 책임에서 벗어난 아오키 함장에게는 배와 운명을 같이하는 일만 남았다. 아카기는 음울한 선회를 계속했다."(436)


"야마구치는 나름의 이유로 미국 항공모함 2척을 대파시켰다고 믿었고(실제로는 요크타운 1척), 이제 세 번째 항공모함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손에 쥔 것이 거의 없었다." "히류의 마지막 시련이 닥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혼성 급강하폭격대가 거의 근접했다." "17시 01분~17시 10분, 이제 히류는 가가와 마찬가지로 폭탄세례를 맞게 되었다. 히류는 왼쪽으로만 선회했고 적이 너무 많은 데 반해 대공화기가 너무 적었다. 엄호하는 제로센 조종사들은 용감했으나 SBD에 비하면 수가 턱없이 모자랐다." "첫 명중탄은 셤웨이가 올린 것으로 보이며 이어서 세 발이 연속으로 명중했다. 모두 1,000파운드짜리였고 전방 엘리베이터 앞에 명중했다. 흥미롭게도 나중에 미군 조종사들은 히류의 비행갑판 앞부분에 칠해진 식별용 히노마루를 편리한 조준점으로 이용했다고 증언했다. 일본군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결과는 없었다."(467-71)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전시 공보 역사의 큰 전환점이었다. 그때까지 중국 및 남방전선의 전황과 관련하여 일본 언론은 관례적으로 불편한 세부상황을 빼고 여과된 소식만을 전했지만 철면피한 날조 보도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 대중에게 미드웨이 해전은 대승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6월 11일자 『재팬타임스 앤드 애드버타이저』 지는 〈해군 다시 역사적 대첩!〉이라는 제호하에 일본 해군이 미국 항공모함 두 척을 격침했다고 대서특필했다. 며칠 후 전과에 미군 중순양함 1척과 잠수함 1척이 추가되었다. 언론 보도에서 일본군의 손실은 애매하게 표현되었으나 6월 11일, 유명한 해군기자이자 군사평론가인 이토 마사노리가 한 방송에서 일본이 항공모함 2척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토는 미드웨이에서 거둔 〈상상을 초월한〉 성과에 비해 미미한 대가를 치렀을 뿐이라고 언급했다. 〈상상을 초월한〉은 사실이었으나 이토가 원래 의도한 바와는 다른 의미였다."(555-6)


"대다수의 부상병들은 비밀 환자로 분류되어 특별병동에 따로 수용되어 다른 환자, 수병, 가족들과 완전히 격리되었다. 기동부대의 파멸에 대해 어떤 말도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도 이등국민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간부 대다수는 격오지로 발령 받았다. 수병들은 남태평양에서 전투 중인 부대들의 보충병력으로 지정되어 가급적 신속히 배치되었다. 생존자들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작별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남태평양의 최전방으로 보내져 최후를 맞았다. 일본 해군은 아군조차도 모욕적으로 처우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실수를 더 악화시킨 것이다." "반면 이 참사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연합함대 지휘부와 참모진에는 부상자들이 겪은 불명예스러운 조치가 내려지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여전히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다. 나구모는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중심으로 새로 편성된 항공모함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555-7)


제3부 결산


"일본 해군이 경험에서 적절한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한 이유는 1905년 쓰시마 해전의 승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쓰시마 해전에 승리한 후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에서 결정적 패배의 원인이 될 세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이 세 가지 전훈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대결할 가능성이 대두됨에 따라 불건전한 방향으로 일본 해군의 사고방식에 뿌리 내렸다. 미국과의 분쟁은 압도적 산업생산량으로 계속 양적 우위를 누릴 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양 대 양으로 싸울 수 없었던 일본 해군은 우월한 기술과 '야마토 다마시大和魂'[일본민족의 고유한 정신]가 결합하면 질로써 양을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 근본적 믿음에서 모든 교리와 함선설계 사상이 탄생했다. 그 결과 일본 해군에게는 열강 해군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온 역할들, 예를 들면 교역로 보호, 통상 파괴, 상륙 지원 등은 부차적 위치에 머물렀다. 일본 해군에게는 오로지 속도, 거리, 화력이 전부였다."(575-6)


# 쓰시마 해전(1905)이 일본 해군 교리에 미친 영향

1. 분쟁을 국지화하고 제한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 해군력이 분쟁의 범위를 설정하고 이를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 지리적 길목만 수호하면 되었던 러일전쟁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은 광대한 태평양 전체가 활동영역이었다.

2. 주력함대 사이의 결전에서 승리해야만 완전한 제해권을 획득할 수 있다. → 미국 같은 거대한 나라는 아무리 크게 패배하더라도 단 한번의 결전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 즉, 전쟁의 향배를 결정할 결전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3. 방어보다 공격이 우선한다. 적절한 거리에서 적보다 큰 화력을 동원하면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 → 전략적 차원에서 보면 일본해군의 일선 전력은 막강하지만, 어쩔 수 없이 뛰어든 장기전을 치를 만한 특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가장 중요한 학습 실패는 태평양전쟁의 첫 5개월간의 경험에서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관념과 정반대로, 적에 대한 일본군의 물량우세가 미드웨이 직전까지 대승을 거둘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원인이 승리병이건 전훈에 대한 대한 무관심이건 간에 결과적으로 1942년 상반기에 일본 해군에서는 치열한 지적 고민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항공모함 집중운용의 이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면 작전을 적게 수행하되 항공모함을 한꺼번에 많이 투입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정확하게 그와 반대로 행동했다.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해군이 지나치게 많은 목표를 한 번에 달성하려 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전력을 분산함으로써 지금까지 거둔 승리의 공식을 버렸다. 이 과정에서 일본 해군은 자신보다 약한 적이 일시적으로 전력을 집중해 수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곳에 밀어 넣음으로써 불필요한 위험성을 높였다."(577-8)


"학습 실패 다음은 예측 실패이다. 코언과 구치가 지적하듯이 〈예측 실패의 핵심은 원래 알 수 없는 미래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지한 위험에 대해 적절한 예방책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학습 실패에 이어 명백히 예측 실패까지 범했다." "야마모토가 놓친 부분들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작전계획에서 예상한 시간보다 미군이 더 일찍 현장에 와 있을 상황을 대비하지 않은 것이었다. 미군은 이미 패배했으며, 미군을 유인해야만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야마모토의 믿음이 여기에 한몫 했다. 야마모토는 미군이 미리 와서 매복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야마모토의 가장 큰 실책은 적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적의 의도에 맞추어 작전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적이 패했고, 적을 유인해야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작전을 세운 결과 야마모토는 적을 눈앞에 두고 전력 분산을 결정하는 실책을 저질렀다."(581-2)


"마지막으로 일본군이 저지른 (현재 상황에 대한) 적응 실패는 신줏단지 모시듯 작전계획에 집착했다는 것이다. 적당한 용어를 쓰자면 '계획 타성'이 일본 해군의 사고방식에 만연했는데 이것은 여러 (문화적) 요소가 작용한 결과다." "개전 초기에 일본 육해군은 계획에 집착한 데 대한 보상을 받았다. 진주만 기습 시 일본 해군이 보여준 능숙함이 좋은 예다." "그러나 일본군은 자신의 계획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여 한 번 공식화된 계획을 결코 바꾸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드웨이 작전을 연기하지 않음으로써 야마모토는 5항전의 항공모함들을 전열에 추가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구모는 미드웨이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미군과 동등한 입장에서 싸우게 되었다." "작전수행 차원에서 계획 타성은 전투 전이나 전투 중에 상황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금언인 〈적과 접촉함과 동시에 계획의 수명은 끝난다〉를 귀담아들을 사람은 일본 해군에 없었던 것 같다."(585-6)


"종합적으로 전투 경과를 상세히 살펴본 후 나온 불가피한 결론은, 일본군의 패배가 계획의 중요한 부분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승리병 때문도, 몇몇 지휘관의 실책 때문도 아니었다. 일본군의 패배는 전투의 모든 측면, 즉 전략, 작전, 전술에 퍼진 실패들이 복잡하게 얽힌 총체적 난국으로 인한 결과였다. 모든 부분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었다. 표면상 드러난 문제의 근저에 있는 원인은 수많은 개개인이 저지른 실수의 총합일 수도 있다. 그중에는 중대한 실수도 있으나 대다수는 일본 군부와 일본 해군의 문화, 교리, 그리고 선호한 전투방법에 내재된 더 큰 문제점이 일으킨 병의 증상에 불과하다. 이 모든 실패는 과거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배우지 않고, 미래를 위해 견실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며, 계획에 결함이 있음을 인지하고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조직의 최종 산물이다. 이 모든 문제의 씨앗은 일본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인 쓰시마 해전 이후에 뿌려졌다."(589)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초창기 연구들은 흔히 항공모함 4척이 격침되면서 일본 해군 최정예 비행사들도 크게 손실되어 일본의 세력 확장이 저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탑승원 121명의 전사, 실종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자체가 재앙은 아니다." "미드웨이 해전으로 인해 개전 전에 항공모함 발착함이 가능한 비행기 탑승원 2,000명을 보유한 일본 해군 항공대의 전반적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지는 않았다. 미드웨이 해전이 아니라 솔로몬 제도에서 벌어진 지독한 소모전을 겪으며 일본 해군 항공대의 전력은 급전직하했으며 산타크루스 해전을 거치며 전쟁 전의 정예 탑승원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존 프라도스는 여기에 더해 정예 정비원과 기술인력의 손실을 지적한다.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한 일본 항공모함의 정비기술 인력 중 721명이 전사했는데 이는 승선 인원의 40퍼센트에 해당한다. 미국보다 덜 산업화된 일본 사회를 생각해 보면 대체하기 어려운 손실이었다."(592-3)


"탑승원, 기술인력, 조직 지식의 상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42년에 일본 입장에서 비행기는 귀중한 자산이었으며 인적, 조직적, 전술적 자원의 총체적 가치 역시 이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중요한 자원을 자주 낭비했다. 그러나 항공모함 손실의 중요성에 비하면 앞서 말한 자원의 손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행기와 조종사를 싣고 전장으로 갈 항공모함 없이는 해군항공전의 혁명도 의미가 없다. 근본적으로 '세력투사Power Projection'란 투사될 전력이 발진할 기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동기지는 전체 시스템에서 가장 비싸고 소중한 요소이다." "개전 당시 미 해군은 일본 해군의 6척에 상응하는 정규 항공모함 5척─렉싱턴, 새러토가,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와스프─을 보유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 직후 양군의 전력차는 4척[엔터프라이즈, 호닛, 와스프, 새러토가] 대 2척[쇼카쿠, 즈이카쿠]으로 미군에게 극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반전되었다."(593-5)


"일본 해군은 1944년 11월 시나노가 준공된 후에야 미드웨이에서 잃은 4척을 채울 수 있었다. 항공모함 4척을 상실함으로써 일본 기동부대의 전술적 균일성은 사라졌다. 특성이 비슷한 함들을 함께 운용한다는 생각은 도입될 때부터 일본 해군의 건함 준칙이었으며 쓰시마 해전 때부터 미드웨이 해전 때까지 잘 활용되어 왔다. 진주만을 기습한 기동부대는 견실한 1항전, 재빠른 2항전, 미숙하나 잠재력 있는 5항전으로 구성된 균형 잡힌 함대였다. 각 항전은 속력, 항속거리, 탑재기 구성 면에서 잘 어울리는 항공모함 한 쌍으로 이루어졌다. 비슷한 성능의 함선들을 한 부대로 기용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전투를 벌이는 중에 함선마다 성능이 다르다면 그렇잖아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복잡한 요소 하나를 추가하게 된다. 통일성은 지휘 통제 시 생기는 불필요한 마찰을 줄여 주는 역할을 한다. 1, 2항전의 상실은 일본 기동부대의 놀라운 균형과 통일성을 완전히 무너뜨렸다."(597)


"단기적으로 보면 미드웨이 해전은 미군이 거둔 승리로 인해 미일 양국 항공모함 수가 균형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으며, 이로써 전쟁의 진행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전투의 전략적 중요성은 이보다 덜했다. 기동부대가 미드웨이에서 살아남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본군이 1943년 말쯤에 바란 최선의 상황은 실제처럼 완전히 절망적이지 않고 근소하게 열세한 상황에서 교전하는 것이었다. 진주만을 기습한 항공모함 6척이 모두 살아남아 1943년에 길버트 제도에서 미군을 상대했더라도 전투는 일본군의 대참패로 끝났을 것이다. 미드웨이에서 패배하지 않았더라도 낙관적으로 보아 일본군이 전략적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기간은 18개월 정도였을 것이다. 일본군은 항공모함 4척을 손실하여 이 18개월을 잃은 셈이다. 미드웨이의 승패와 상관없이 미국의 거대한 산업생산력은 태평양전쟁에서 미 해군이 절대적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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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
M. T. 앤더슨 지음, 장호연 옮김 / 돌베개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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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세계가 나치의 폭력에 속절없이 무너지던 어느 화창한 여름 아침에 미국 대리인과 소련 대리인이 만났다." "우리가 아는 것은 논의를 마치고 나서 소련 측이 미국인에게 나무 상자 하나를 건넸고, 미국인이 상자를 들고 건물을 나갔다는 것이다. 상자 안에는 마이크로필름이 들어 있었다. 필름을 다 펼치면 길이가 30미터나 되었고, 거기에 글은 거의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선들과 점들과 옛 수도원에서 사용하던 상징들이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그것이 전쟁의 판세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마이크로필름에는 신경과민의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악보 252페이지가 들어 있었다. 첫 페이지에는 〈레닌그라드에 바친다〉고 쓰여 있었다. 거기 적힌 암호와 상징들은 백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에 의해 소리로 바뀌어 라디오 앞에 앉은 수백만 사람들에게 방송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곡이 담고 있는 은밀한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있다."(9-14)


1부


"쇼스타코비치는 1919년에 음악원에 입학했다. 내전으로 러시아 전역이 아직도 몸살을 앓는 중이었으므로 음식도 난방도 충분치 않았지만, 미챠(드미트리의 '애칭')는 음악으로 힘을 얻었다." "러시아인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항상 시와 음악을 좋아했다. 1920년대 초에 정부는 이 같은 열정을 촉진하려고 애썼다. 볼셰비키 정부는 음악과 다른 예술들이 더 이상 부유한 자들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전 노동자에게 교육을 확산하는 일을 맡은 계몽위원회가 공장 근처에 음악학교를 마련하여 연령과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든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법을 배우도록 했다. 음악원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내보내 인민을 위해 음악을 만들도록 했다. 부르주아 가정에 있던 피아노가 끌려 나와 트럭에 실렸다. 성악가, 첼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가 트럭 뒤에 올라타고 시골을 돌며 쉬고 있는 붉은 군대와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공연을 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야외 현장과 식당에서 공연했다."(50-2)


"예술의 도시 페트로그라드에 열광적인 실험의 분위기가 휩쓸었다. 〈거리가 우리의 붓이고, 광장이 우리의 팔레트다.〉 러시아 미래파 시인이자 화가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는 이렇게 선언했다." "10월 혁명 기념일을 맞아 1만 명이 동원되어 〈차르의 겨울궁전 급습〉을 공연했고,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를 보며 경외하고 감동하고 즐거워했다. 실험적인 극단들이 시골을 돌며 새로운 이야기, 우스꽝스러운 광대극, 에스에프 드라마를 공연했다. 미래주의자 마야콥스키는 〈미스테리야-부프〉 같은 기괴한 선전물 연극을 만들었다. 성서의 대홍수에서 용케 살아남은 몇몇 노동자들이 천국과 지옥을 거쳐, 마침내 영광의 새 러시아가 전기와 제조업으로 힘차게 일어서는 새로운 공산주의 유토피아─기계 세상!─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페트로그라드에는 입체-미래파, 신-원시주의, 구성주의, 절대주의, 광선주의, 생산주의 등 새로운 미술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52-6)


"작곡가들도 러시아의 새로운 현대성을 찬양하고자 했다. 최전선에 선 이들은 이제 어둡고 뒤엉긴 화음이 난무하고 천둥처럼 요란한 곡을 쓰거나 크리스털 조각 같은 음악, 그러니까 급격하게 돌출하다가 눈부신 표면이 이어지는 날카롭고 딱딱한 구조의 곡들을 썼다. 미래파에 열광했던 이들은 기계 장치의 굉음과 반복을 특징적으로 묘사하는 곡들도 쏟아냈다. 이름에서부터 잔혹한 기계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모솔로프의 〈주물 공장〉(마지막에 가서는 타악기 주자들이 거대한 금속 조각을 요란하게 내리쳐서 혼을 빼놓는다), 프로코피예프의 《강철의 춤》, 데셰보프의 《철도》, 오른스테인의 《비행기에서의 자살》 같은 곡들이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가 협회는 〈오케스트라는 공장처럼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음악을 평균적인 산업 노동자에게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페트로그라드의 한 제조공장에서는 공장의 경적과 터빈 돌아가는 소리로 '교향곡'을 빵빵거렸다."(57)


"1922년 2월, 폐렴으로 아버지를 잃은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애도를 담은 자료를 우리에게 남겼다. 바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이다." "열다섯 살의 작곡가가 쓴 음악치고 뛰어나다. 그와 마리아는 살롱에 모인 음악가들 앞에서 이 곡을 연주하여 아버지에게 바쳤다. 모음곡 가운데 한 곡, 환상적인 춤곡은 조야를 위한 곡일 수 있다. 그녀는 댄서가 되고 싶어 했다(화가, 가수를 꿈꾸기도 했다). 드미트리는 종종 여동생을 위해 괴상한 춤곡들을 썼는데, 곡을 듣고 있노라면 그녀의 무릎과 뾰족한 팔꿈치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러나 이 밝은 춤곡, 조야의 장난을 나타내는 이 곡에서도 애도의 종소리가 메아리친다. 모음곡에서 가장 뭉클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분위기가 어떻든 간에 다급한 종소리가 가끔 끼어든다. 죽음을 겪고 나서 멍한 순간에 우리가 다른 뭔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슬픔이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낚아채는 것처럼 말이다."(64)


"1926년 5월 12일은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제2의 탄생'이라고 불렀던 날이다. 그는 평생 이날을 축하했다. 바로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의해 초연된 날이다. 그의 나이 불과 열아홉 살이었다." "음악원을 졸업한 뒤에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의 초超현대주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부 극단주의자들만큼 멀리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이후 몇 년간 그의 음악은 보다 넓은 예술적 혁명의 요소들을 많이 보였다. 각진 구성의 묘미, 깜짝 효과가 주는 재미, 그로테스크함에 대한 집착, 아이러니와 빈정거림과 풍자, 밝은 색채와 평평하고 딱딱한 구조의 강조가 그런 예들이다. 글을 쓰는 친구들과 지인들은 기계화된 세상의 동화 같은 에스에프 오락물, 방향과 논점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교훈 없는 우화들을 내놓았다. 말 없는 음악에 '등장인물'이라는 것이 있다면, 쇼스타코비치의 인물들은 작가 친구들의 부조리한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슷하다."(75-9)


"1930년대 초반 소련에 불어 닥친 음울한 기운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쇼스타코비치가 세상이 실제로 돌아가는 상황을 얼마나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에 그는 자신이 작곡가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말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술가는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시키도록 할까 항상 고민하며, 여기에 실패하면 내 잘못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쇼스타코비치가 무슨 뜻으로 위의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의 옆 소파에는 미국인 인터뷰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정부의 공식 통역자도 있었고, 미심쩍은 것은 무엇이든 상관에게 보고했을 소비에트 언론 담당관도 자리에 함께했다. 쇼스타코비치를 연구한 한 학자의 말대로 자유롭게 생각들을 터놓고 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103-4)


"발레곡 〈볼트〉(1931)나 〈맑은 시냇물〉(1935)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소비에트 러시아 예술계를 휩쓸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요구에 충실했다. 훗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불리게 되는 양식이다. '리얼리즘'이라고 해서 딱히 사실적이지는 않다. 아무튼 작가들과 작곡가, 화가들은 더 이상 20년대처럼 꿈, 동화, 부조리, 에스에프적 상상물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을 묘사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소비에트의 현실이 보편적인 완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소비에트 작곡가 연맹은 1934년 아래와 같은 지침을 내렸다. 〈소비에트 작곡가들은 무엇보다 현실이 승리를 향해 진보한다는 원칙, 영웅적이고 밝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 쇼스타코비치가 〈맑은 시냇물〉을 작곡했을 때 그는 집단 농장에서 벌어지고 있던 불안, 굶주림, 필사적으로 곡식을 숨기려는 노력을 묘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소비에트 리얼리즘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현실이었다."(106)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초연은 1934년 1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두 극장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19세기 단편 소살이 원작으로 줄거리는 낡았지만, 음악은 강렬하고 대담하고 단도직입적이었다. 살인을 저지르는 여주인공에 감동적인 숭고함과 깊은 슬픔이 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쇼스타코비치는 계몽인민위원을 리허설에 초대했고, 공연을 보고 나서 정부는 《맥베스 부인》이 〈소비에트 오페라의 창조성이 찬란하게 꽃피는 출발점〉이었다고 선언했다. 오페라는 곧바로 성공을 거두었다. 첫 공연이 열리고 관객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해서 쇼스타코비치는 막이 끝나고도 무대에 올라가서 인사를 해야 했다. 동료 작곡가들은 〈비범하고 깊이 있고 관현악 편곡이 뛰어난 작품〉, 〈쇼스타코비치의 창조력의 정점〉이라고 말했다. 레닌그라드 신문들은 오페라가 곧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작품〉 대열에 오를 것이라고 흥분했다."(113)


"맥베스 부인이 무대에서 연인과 함께 남편의 목을 졸라 죽인 바로 그해인 1834년 말, 레닌그라드의 공산당 총수 세르게이 키로프가 당 본부의 복도를 걷던 중에 암살범이 경호원들을 용케 피해 꺼내 든 권총에 목을 맞았다. 키로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는 크렘린의 스탈린 방에서 묵기도 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스탈린은 장례식에서 그의 관을 들었다. 독재자는 친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신속하게 찾아내어 처벌하도록 했다. 키로프가 암살된 12월 1일, 국가에 대한 테러로 체포된 사람들은 열흘 이내에 재판에 넘겨지고 유죄로 판명되면 항소 없이 즉각 처형되도록 하는 긴급명령이 통과되었다. 훗날 '대공포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1935년 4월 7일, 스탈린은 아이가 열두 살만 되어도 어른처럼 재판을 받고 처형될 수 있다고 알렸다. 아이들의 목숨만은 살리고 싶은 부모는 반역자와 공모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야 했다."(114-6)


# 실제로는 스탈린 본인이 키로프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1월 28일, 쇼스타코비치는 『프라우다』를 한 부 샀다. 페이지를 훑어보다가 자신에 대한 기사가 난 것을 보았다. 「음악은 없고 혼란 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하여」라는 표제의 기사였다." "스탈린은 왜 젊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고발하려고 했을까? 그것도 2년 가까이 공연되면서 큰 사랑을 받았고 소비에트 오페라의 희망으로 여겨졌던 《맥베스 부인》을 보고 나서 말이다. 확실한 대답은 모르겠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세계적 명성이 스탈린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에 묘사된 성적 분출에 스탈린이 혐오를 느꼈을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스탈린이 쇼스타코비치를 본보기로 삼아 〈진정한 예술, 진정한 과학, 진정한 문학〉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소비에트 연방의 문화 지도자들 전체를 꾸짖고 괴롭히려 한 것 같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정권의 무한한 권력을 휘두르고, 그들에게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123-5)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인민의 적이 작곡한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특히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은 기이했다. 거대하고 요란하고 성난 작품이다. 전체적인 구조가 이리저리 뻗어가고 모호한데, 한 가지는 확실하다. 교향곡이 작아지고 대화의 분위기로 접어들 때면 여지없이 거대하고 섬뜩한 뭔가가 치고 올라온다." "결국 결정적인 타격이 찾아왔다. 쇼스타코비치는 강압에 못 이겨 초연을 취소해야 했다. 『소비에트 예술』 잡지에 이런 안내문이 올라왔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자신의 《교향곡 4번》 공연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다. 창조적 확신이 없고 길고 낡은 국면으로 여겨진다는 이유에서다.〉" "잔혹하면서 복잡하게 얽힌 《교향곡 4번》은 쇼스타코비치의 가장 매혹적이고 독창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이지만, 공포에 재갈이 물려 대중과 만나기까지 사반세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142-4)


"곡조의 변형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의 《4번》 같은 교향곡들은 특정 사건을 전혀 묘사하지 않고도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 예컨대 1악장에서 더듬거리고 덜컹대고 무력해 보였던 여러 주제들이 교향곡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여 쾌활한 거리 무용처럼 연주된다. 그런 다음에 그것들은 짓눌리고 침묵에 던져진다. 뭔가 극적인 것을 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마지막에 요동치는 악마적 송가에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오이디푸스 왕》의 한 구절이 들어 있다. 오페라에서 왕비에게 환호하는 합창단이 노래하는 대목이다. 그들은 왕과 왕비가 벌인 죄 때문에 자신들에게 역병이 내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전의 교향곡에서라면 노동자들이 볼셰비키에게 바치는 찬가를 넣었을 바로 그 대목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이런 구절을 사용했다는 데에 아이러니가 있다. 그의 갈채는 병들어 죽어가면서 역병의 책임이 있는 지도자에게 환호하는 도시에서 가져왔다."(146-7)


"쇼스타코비치는 무엇이라도 세상에 내놓아야 했다. 조만간 그의 침묵도 주위에서 벌어지는 문화 혁명에 대한 논평으로 읽힐 터였다. 침묵은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는 봄에 《교향곡 5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937년 11월 21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D단조 작품번호 47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모두가 중요한 순간임을 알았다.〉 한 전기 작가의 말이다." "피날레가 결말을 향해 치달을 때 청중들은 무아지경에 빠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수는 그칠 줄 몰랐다. 다들 히스테리 같은 흥분에 빠졌다." "청중에게 이 교향곡의 승리는 단순히 쇼스타코비치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날 밤 공연장에 모인 모두가 생존자였다. 모두가 작곡가가 겪었던 고통을 나름의 방식으로 겪었다. 그들은 이제 막 애도할 기회를 얻었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함께 슬퍼할 기회를."(175-81)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체포를 피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국제적 명성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대공포 소식이 서방으로 새어나갔지만, 스탈린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은폐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상황에서 소비에트의 가장 유명한 시민이 실종된다면 전 세계가 의심할 게 뻔했다. 그러는 동안 NKVD는 작곡가를 기소할 수 있는 사건을 꾸미려고 자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그들은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을 것이다." "나데즈다 만델시탐은 이렇게 썼다. 〈공포의 공기를 들이마신 사람은 명목상으로는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파멸한 것이다. 모두가 희생자이다. 죽은 사람뿐만 아니라 살인자들, 이데올로기 신봉자들, 눈을 감거나 손을 씻은 공범과 아첨꾼들도, 밤에 몰래 후회에 시달린다 해도 그렇다. 전 부문에 걸쳐 모두가 공포로 인한 혹독한 병에 시달렸고, 지금까지 아무도 회복하거나 일상적인 시민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195)


2부


"소비에트 연방 시민들은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나치에 협력한 시민들을 무참하게 죽였던 소비에트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나치를 비판하면 투옥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쇼스타코비치와 어울리던 사람들에서 보자면,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시테인과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얼마 전에 〈알렉산드르 넵스키〉라는 걸작을 완성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야만적인 독일 기사단과 전투를 벌여 기념비적 승리를 거둔 중세 러시아 영웅의 이야기다." "1938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영화가 개봉했을 때 스탈린은 영화의 친러시아적, 반독일적 정서를 찬양하며 흡족함을 드러냈다. 영화는 곧 소비에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학생들은 영화에 나오는 합창곡을 노래하고 다녔다. 이것은 1938년의 일이다. 1939년에 독일이 동맹국이 되자 뿔 달린 튜턴족 기사들이 침략자로 나오는 영화는 상영관에서 사라졌다. 영화는 나중에 다시 상영되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207)


"전쟁이 발발하자 쇼스타코비치는 군부대를 위한 음악을 만들었다. 그는 부대를 돌아다니며 사기를 진작하는 소규모 앙상블이 연주할 수 있도록 노래와 클래식 곡을 단순하게 편곡했다." "소비에트는 슬라브 문화를 열등하고 심지어 인간 이하라고 여기는 적과 싸우는 중이었다. 나치는 특히나 러시아의 문화유산들을 업신여겼다. 마치 러시아의 위대한 사상가, 시인, 음악가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작가 안톤 체호프의 집을 엉망으로 더럽히고, 레프 톨스토이의 육필원고로 불을 붙였다. 박물관을 약탈했다. 위대한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살았던 마을을 차지했을 때는 그의 집을 모터바이크 차고로 만들었다." "음악 공연단들이 붉은 군대 해군, 공군, 지방의용군을 찾아다니며 연구하도록 한 목적은 침략군에 의해 더럽혀진 러시아 문화의 힘과 정통성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레닌그라드 음악단은 시민들과 병사들을 위해 매달 평균 160회의 공연을 했다."(241-3)


"1941년 7월 18일, 시 관료들은 배급카드를 나눠주었고 빵과 버터 같은 생필품을 구입하려면 카드를 제시하도록 했다. 하지만 가게에는 여전히 값비싼 물품들이 있었다. 아무도 굶주림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공식 신문들은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식량이 부족해지는 일은 없을 터이고, 독일군은 결코 그곳까지 오지 않는다며 안심시켰다. 이런 거짓말에 시 정부도 넘어갔다. 포위되었을 때 사용하라고 소비에트 상공장관이 레닌그라드에 생필품을 실은 거대한 차량을 보냈을 때, 보로실로프 원수와 레닌그라드 공산당 총수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시 정부가 물품을 받으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창고에 공간이 부족〉하다면서 수송된 물품을 거절했다. 훗날 레닌그라드가 굶주림에 허덕이며 1년을 보내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7월 19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로 향하고 있을 때,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교향곡 7번》 서두를 써 내려갔다. 훗날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고 불리게 될 작품이었다."(257-8)


"〈나는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아주 빠르게 썼다.〉 쇼스타코비치의 회상이다.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이 전쟁이었다. 나는 인민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궁지에 몰린 조국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음악에 새기고 싶었다.〉 말 그대로 그의 사방이 전쟁이었다. 도시 북쪽에는 핀란드군이 있었다. 서쪽은 핀란드만이었는데 부유기뢰가 떠다니는 죽음의 바다였다. 동쪽에는 라도가 호수가 있었고, 독일군이 호수 남쪽 연안에서 폭격을 가했다. 남쪽은 독일군이 쫙 깔린 전선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세 갈래가 악마의 쇠스랑처럼 러시아의 살갗에 깊게 박혔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했다. 남부집단군은 키예프를 포위했고, 소비에트 네 개 부대를 함정에 몰아넣었다. 중부집단군은 스탈린과 국가방위위원회가 두려움에 떨며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는 수도 모스크바에서 이제 불과 32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275-7)


"9월 8일,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2악장 작곡을 시작했다. 레닌그라드가 보다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기분으로 작곡된 조심스러운 춤곡 악장이다. 그는 여기에 '회상' 또는 '꿈'이라는 제목을 붙일까 생각했다. 전날 거센 폭격이 있었지만, 기분 좋은 간주곡의 우아한 첫 마디에는 그런 공포의 기색이 전혀 없다. 대대적이고 잘 조직된 독일 공군 폭격기들이 레닌그라드로 쳐들어오는 것을 못 본 체 무시하고, 쇼스타코비치는 책상 앞에 앉아 묵묵히 음표를 그렸다." "가볍게 흔들리는 춤곡 악장이 중간쯤에 이르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를 비웃는 패러디가 된다. 중간에 폭발하는 대목은 9월 8일 폭탄이 터졌을 때 그가 작곡했을 법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회상'의 주제를 전개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작곡가의 경험과 그가 작곡하는 음악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 미묘한지 보여주는 예이다. 이것은 지옥의 한가운데서 작곡된 온화한 음악이었다."(278-82)


"《교향곡 7번》의 3악장은 느리고 긴 명상으로, 간간이 삭막한 팡파르가 반복되고 변형되어 끼어든다. 원래 그는 여기에 '조국의 광야'라는 제목을 붙였다. 아마도 러시아의 광활함, 시베리아의 타이가 삼림지대, 외로운 자작나무 숲, 찰싹거리는 라도가 호수 연안, 풍요로운 우크라이나 들판에 대한 자부심을 담으려 했던 것 같다. 북쪽으로는 툰드라, 동쪽으로는 사막, 남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록빛 언덕이 닿은 땅, 갈망으로 가득한 곡이다. 지독하게 여린 음악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최종적으로는 악장에 붙인 제목들을 지웠다." "어떤 사랑은 너무도 강력해서 결국에는 슬픔을 항상 속에 묻어야 한다. 그 안에 암호로 새겨진 것은 언젠가는 사랑이 끝나리라는 깨달음이다. 이것은 폭격기들이 레닌그라드를 화염과 먼지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울음으로 채웠을 때 쇼스타코비치가 쓴 음악이다." "쇼스타코비치는 9월 29일에 교향곡 3악장 아다지오를 마무리했다."(318-9)


"전세는 1941년 12월 둘째 주에 역전되었다. 소비에트가 모스크바 근처에서 독일의 3개 기갑사단을 모두 물리친 것이다. 거의 500대의 전차를 파괴하여 독일 중부집단군을 흩어지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히틀러의 육군이 진격을 멈추었다. 엄청난 소식이었다. 소비에트 정보국은 며칠째 승리를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13일 마침내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을 실었다. 〈모스크바를 포위하고 접수하려던 독일의 계획이 무너지다: 독일군 패배.〉 (쿠이비셰프로 피난해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어쩌면 이 소식을 듣고 교향곡 작곡을 재개하여 승리의 피날레를 쓰고자 생각했을 것이다." "니콜라이 소콜로프의 회상에 따르면 〈파시스트들이 모스크바 외곽에서 박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쇼스타코비치는] 자리에 앉아 활기차게 신이 나서 작곡을 했다.〉" "잠깐 동안 세계는 낙관적인 쇼스타코비치를 얻었다." "그리고 12월 27일, 쇼스타코비치는 조용히 말했다. 〈오늘 《교향곡 7번》을 마침내 끝냈소.〉"(358-64)


"오랫동안 러시아인들과 미국인들은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5개년 계획과 대공포 시대의 참상을 제대로 아는 미국인은 드물었어도 스탈린과 공산당에 대해 깊이 불신할 만큼은 다들 알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미국의 도를 넘는 자본주의를 경멸했다." "그래서 소비에트 정부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것은 전쟁에 관한 곡으로 소비에트 시민의 삶과 독일 침공의 공포, 다가올 영광의 승리를 묘사했다. 작곡가는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국제적 유명세를 가진 인물이었다. 이 곡으로 서구인들에게 러시아인이 볼셰비키 야만인이 아님을 보란 듯이 말해줄 수 있었다. 그들은 포위된 와중에도 교향곡을 쓰고 있었다. 미국의 전차와 비행기, 통조림 고기들이 독일 잠수함 유보트가 돌아다니는 바다와 독일 공군이 정찰하는 하늘을 넘어 러시아로 전달되는 동안, 러시아 외교관들은 교향곡 악보를 서방으로 보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397-401)


"이 작품 덕분에 실질적으로 원조가 늘었을까? 교향곡은 스탈린이 그토록 바랐던 제2의 전선을 만들지는 못했다. 1942년 여름에 동맹국은 유럽으로 치고 들어가 독일을 공격할 생각을 할 만큼 두터운 전열을 갖추지 못했다. 스탈린은 격노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1944년에 가서야 제2의 전선을 펴게 된다. 하지만 비행기, 전차, 무기, 의료품, 식량 형식으로 러시아에 보내는 원조는 가파르게 늘었다. 덕분에 소련이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런 원조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은 전쟁에서 절망적으로 내몰린 러시아를 돕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대중을 설득하는 캠페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였다. 1943년 1월의 여론 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90퍼센트가 설사 자국의 식량을 줄여서라도 러시아에 더 많은 식량을 원조해야 한다고 믿었다. 불과 1년 반 전만 하더라도 소련은 적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430-1)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의 레닌그라드 초연은 1942년 8월 9일에 열렸다. 의도적인 도발의 제스처로 선택한 날짜였다. 1년 전 히틀러가 아스토리아 호텔 무도회장에서 축배를 들겠다고 떠벌렸던 바로 그날이었다."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많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의미했다. 많은 미국인들에게는 강력한 연대감과 우정을 심어주었다. 많은 러시아인들에게는 승리의 희망을 꿈꾸게 했다. 일부 독일인들에게는 슬라브족을 인간 이하의 사람이라고 경멸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주민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들렸다. 하나 된 일체감을 갖도록 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감정으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이 음악을 와서 들으려고 이 순간까지 살아남은 것이니까요.〉 그날 밤 공연장에 있었던 한 여성의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겪은 진짜 교향곡이었습니다. 우리의 교향곡, 레닌그라드 주민들의 교향곡입니다.〉"(444-50)


3부


"이야기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진다. 역사는 완벽한 마무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교향곡 7번》을 연주한 것은 공세를 전환시킨 계기였다고 지금 기억되지만,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전세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그것은 기억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포위는 이후로도 1년 반이나 더 이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점차적으로 레닌그라드 주민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되찾았다. 이미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라도가 호수를 건너 도시로 수백 톤의 물자를 실어 나르는 전함, 화물선, 바지선들이 줄을 이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호수 아래로 파이프가 설치되어 레닌그라드는 겨울이 와도 연료가 부족하지 않게 되었다." "1943년 1월 18일, 마침내 도시를 에워싼 독일의 포위망에 균열을 냈다. 도시 안쪽 군인들과 봉쇄 고리 바깥쪽 군인들이 서로 얽혀 기쁨의 포옹을 나누었다. 포위는 이어졌지만 봉쇄는 끝났다."(457-8)


# 1944년 1월 27일, 고보로프 원수가 공식적으로 해방 선언


"전쟁이 끝나고 소련과 다른 연합국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렸다. 소련 내에서 서구의 자본주의 정권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제 무엇이든 위험했다. 이미 전쟁 말년부터 NKVD는 미국의 과학기술을 칭찬하는 것을 범죄로 취급했다. 이제 서구 영화, 서구 소설, 서구 음악이 또다시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러시아 민족주의가 활개를 쳤다. 프랑스의 바게트 빵은 '도시 빵'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렸다. 정부는 다른 나라와 혈통으로 연결된 〈뿌리 없는 세계인〉에 대해 비난하고 나섰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유대인을 뜻하는 말임이 곧 드러났다. 쇼스타코비치는 서구에서 칭송을 받았다. 『타임』 표지에 등장했다. 기사들은 그가 '부르주아'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레닌그라드의 작가들이 또다시 공격을 받는 것을 보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전쟁을 도우려고 애쓴 노력이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공격이 다가오고 있었다."(472-3)


"1948년 2월, 레닌그라드 공산당 총수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명망 있는 음악가, 작곡가, 음악학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소비에트 음악에 대해 논의하고 그들에게 법령 하나를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현대 음악의 〈형식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 같은 〈반인민〉 작곡가들의 음악이 〈도로를 뚫는 드릴 소리나 음악적 가스실〉처럼 들린다고 불평했다. 1936년의 공격과 「음악은 없고 혼란뿐」 논란의 재현이었다." "《교향곡 7번》의 성공은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다시 그를 공격하고 나선 당의 입장에 자기도 완전히 동의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들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부르주아, 퇴폐적 서구에 영합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심지어 러시아가 전쟁에서 지고 있을 때 그는 승리의 《7번》을 작곡했고, 전세가 역전되어 러시아가 승기를 잡았을 때는 우울하고 절망적인 《8번》을 작곡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473-4)


"1948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금지되었다. 그해 가을에 그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모아둔 돈이 떨어지자 그는 스탈린을 칭송하는 영화들의 음악을 작곡하며 돈을 벌었다." "1953년 3월 1일 이른 아침, 공산당 서기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침대에서 쓰러졌다." "스탈린 동지는 다시는 의식을 찾지 못했다. 그는 3월5일에 죽었다." "감옥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이자 유대인인) 바인베르크는 간수들이 갑자기 공손해진 것을 알아챘다. 그는 곧 서류에 서명하고 풀려났다. 이제 더 이상 숙청은 없을 터였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10번》을 작곡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자신의 이니셜로 만든 음악 모노그램─DSCH─을 선율 속에 은밀히, 하지만 반항적으로 끼워 넣은 곡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불안하게 부르지만 교향곡의 후반부로 가면 위풍당당하게 돌아온다. 마치 〈나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다! 나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다!〉 하고 소리치는 듯하다."(477-80)


"쇼스타코비치는 남은 세월 동안 교향곡을 계속해서 써서(총 15곡을 작곡했다) 연민과 저항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동시에 현악 4중주곡도 잇달아 썼다." "죽음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느린 《현악 4중주 15번》을 어떻게 연주하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파리가 공중에서 죽은 채로 떨어지도록, 청중들이 그냥 지루해서 연주회장을 떠나도록 그렇게 연주하시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였다. 마지막 악장에 보면 그가 50년도 더 전인 열다섯 살 때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에 썼던 다급하게 울리는 조종 소리의 흔적이 들린다. 당시에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했다. 지금은 조용히 무시무시하게 자신의 죽음을 위한 종을 울린다. 선율은 점차 흐릿해지고 약해지고 아마도 온화해지다가 마침내 알쏭달쏭한 수평선으로 사라진다. 쇼스타코비치는 1975년 8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교향곡 7번》이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되었던 바로 그날이었다."(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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