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은 어떻게 정통에 맞서왔는가 - 주술제의적 정통성 비판
후지타 쇼조 지음, 윤인로 옮김 / 삼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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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철학'상의 논쟁이, 가장 현세적이고 매우 '특수주의'적인 정치적 항쟁과 상호 이행하여 서로의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는, 이 패러독시컬한 동적인 상태는, 생각해보면 반드시 부조리한 현상인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일정한 관련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 '사상'은 스스로를 올바른 사상이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그것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하려는 '사도使徙'를 낳는다. 그 '사도'의 '전도'는 당연히 기존에 있어왔던 관습이나 다른 종류의 '사회의 신념체계' 사이에 얼마간의 모순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하여 '사상'은 사회적 레벨의 존재가 되고 동시에 사회적 다툼의 원인이 된다." "둘째, 정치적 통합자는 물리적인 지배만으로는 오래도록 정치적 통합을 재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일정한 사회적 신념체계에 의거하고 그것에 의해 '정당한 정치지배'로 '승인'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베버가 말하는 '지배의 정당성 근거'가 모든 정치적 지배·지도·통합에서 필요해지는 것이다."(29)


제1장 이단의 유형들


# 이단이 출현하는 사회의 문화적 유형

1. 주술로부터의 해방(Entzauberung) : 초월적 종교에서 주술적 요소를 걷어내고 합리적인 제도를 형성하려는 사회(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논쟁)

2. 주술 (그 자체의) 합리화 : 합리화된 주술 제의로서 사회 통합을 수행하려는 자연적 사회(일본의 천황제)

3. (신이 아닌 이 세상) 질서의 합리주의 : 정치사회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는 사회(중국의 유교)


"아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하여, '아들'은 아들인 이상 '태어난 것'이고 '태어난 것'인 한에서 그 존재에는 '시작점'이 있고, 그 존재에 '시작'이 있는 것은 논리적 필연으로 '비非존재'였던 때가 있었음을 뜻하며 따라서 그것은 '영원'한 신과 같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논리가 한번 신도들의 '심리적' 레벨에서 작용하기 시작할 때면 '신의 아들' 예수를 다만 역사적 존재로 함몰시켜버리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 경우에 예수는 고작 거대한 정신사적 변혁을 이룩하는 역사적 지도자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만다. '대大정치가'이고 교회 전체의 통일성에 마음을 쓰고 있던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그런 논리에 반대해 '아버지와 아들'의 일체성을 확보하려고 분투했다. 그 결과 겨우 한 글자 차이로 '삼위일체'의 교의가 확립되었다고 말해진다. 'homoousios(동일성)'와 'homoiousios(유사성)의 차이가 그 문제의 한 글자를 확보하려고 분투했다."(38-9)


"왜 그러한 '고안'으로 이 정도의 아슬아슬한 칼부림을 하기까지 '삼위일체설'은 보호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혹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통일성이 그 3자 사이의 어딘가에서 한치라도 깨지게 된다면, (1) 교회는 아버지인 신과의 연속성을 잃고 이 세상 속 인간 예수를 교조로 하는 오직 세속적인 집단이 되어버리거나, (2) 신도 중 누군가가 함부로 '신' 혹은 '신과 예수'에 자기를 동일화하는 것을 허가하게 되거나, (3) 교회에 깃든 '영靈'이 '성령'이라는 보증을 잃게 됨으로써 각 지역을 배회하는 숱한 주술적 정령들과의 구별 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어 결국 토착적이고 특수적인 각종의 주술제의적 신앙이 교회로 흘러들어가 '악령'이 거꾸로 교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한 세 가지 예의 귀결은 교회의 해체와 다를 바 없다. 또한 교회가 혹여 해체되지는 않더라도 현세로부터의 초월이라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그리스도교회 자체로부터 사라지게 될 것이다."(41-3)


"'수육성受肉性'을 상실한 교회가 '이 세상'의 권력정치적 상황에서 자기를 유지하려면 그 스스로도 또한 군사력에 기대는 정치집단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일본 고대의 진호국가불교鎭護國家佛敎에서 '절'은 그렇게 해서 '승병'을 가졌고 일대 권력집단이 되어버렸다." "그보다 '삼위일체'의 해체가 훨씬 성가신 것은 교회의 내부 제도 그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육受肉'에 의해서만 현세에 존재하는 것인 까닭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육肉' 그 자체로 될 위험을 내부에 지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칫 '수육' 속의 '육성肉性'을 거부하려는 순수 '정신주의'를 낳음으로써 현세를 조직화하는 제도임을 그만두려는 경향을 갖는 것이다. 말하자면 '육화'의 위험[신성을 완전히 잃을 위험]과 '육에 있어 육에 작용하는 것을 그만둘' 위험[세속성을 완전히 거부할 위험]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사회 속의 정통·이단 문제란 '수육성'이 가진 내적 갈등의 전개와 다름없다."(43-4)


# 수육성受肉性 :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신, 인간의 몸을 받아 입은 신, 성육신의 신이 세속으로 내려옴을 뜻한다.


"그리하여 종교적 공의회의 개최는 말하자면 '필연'이었다. 아타나시우스·아리우스 논쟁은 정신적 체계의 내적위기를 극복하여 그 정신체계를 동시에 적극적(실정적實定的)인 '이 세상' 제도로 확립하기 위해 요구된 논쟁이었다. '승리'를 얻은 사상체계가 '승리자'의 거스를 수 없는 인간적 타락으로부터 본래의 자기 면모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자기에게 부과한 규율의 체계를 찾아내려 했던 논쟁이 4세기의 교의 논쟁이었던 것이다. '도그마'란 본래 그러한 목적을 위해 형성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삼위일체'란 단지 광신적인 망상가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비합리적' 교설이 아니라 '주술제의로부터의 해방'을 감행하고 '물신숭배'를 타파했던 초월적 보편종교가 자기를 포지티브한[실정적인] 형태로 사회적으로 정착시키고('수육受肉') 복고적 반동과 인간의 자연적 타락으로부터 자신의 정신적 존재를 지켜나가기 위해 불가결했던 교의였다. '삼위일체'가 교회 제도에서 사활의 문제였던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48-9)


제2장 일본 사회에서의 이단의 '원형'


"일본 사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사회'와 같이 제1형에 속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신'을 향한 신앙을 '올바로' 지키기 위한 교의적 규범에 입각하여 사회가 구성된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질서의 합리주의 체제'와 같이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 교의적인 규범을 필요로 했던 것은 일본사회 전체의 규모에서는 도쿠가와 시대뿐이었다. 오히려 혈통 '원리'(?)를 체현하고 있는 천황제의 면면한 존속에서 상징되고 있는 것처럼 일본 사회 전체를 덮어씌우고 있는 의식 형태로는 압도적으로 제2형태의 자연적 사회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확실히 이 사회에도 '신'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고 지금도 '신사神社'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신에 만인·만물이 귀의하는 것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인上代人은 그 신앙하는 신들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신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천황의 신성성神聖性을 드러내기 위해서만 그 근원으로서의 신들을, 따라서 '신대사神代史'를 이야기했던 것이다.〉"(71-2)


"천황의 '신성성'은 개인적 실재로서의 절대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혈통적 '배후에' 신들이 있음으로부터 도출되고 있는 것에지나지 않는다. 곧 천황은 신들의 '후예'인 것에 의해서만 '신성화'되지만 정작 그 신들은 천황의 '신성화'를 위한 배경=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적 '신들'의 상대성과 그 수단성이라는 특징은, 파고들어 추적해보면 결국 신들의 '부정성不定性[한정되지 않음]'과 나아가 '아득한 저쪽으로의 신의 증발[disappear]'이라는 특질에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그 '신'의 존재의 증발 과정이 명확해지면서 거꾸로 주술적 제의의 구체적인 존재성이 점점 더 현실화해가는 것이다. 제祭의 대상은 사라져 없어지고 제를 지내는 일과 그 일을 행하는 구체적 인격만이 분명한 윤곽으로 드러난다. '영靈'이 한정 없는 것이 되어감으로써 영매 행위와 영매자만이 강한 존재성을 띠어간다. 신들과 '신대사'가 천황과 천황 제의의 단순한 배경적 수단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72-3)


"이와 같이 천황제의 주술적 제의 아래서는 상대가 부정不定으로 막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 상대에 대한 관계의 방식을 원리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제의의 존재방식의 '옳고 그름'이 체계적으로 문제시 되는 일이 없다. 이 경우에 '취해야 할 태도'로서 일반성을 가지고 언명할 수 있는 가르침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삿된 마음이 아니라 곧은 마음을 가지고 제의·점술에 접하라'는 주관적 심정의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것이라면 상대가 무엇이든 막론하고 타당한 가르침이다. 심정의 곧음만을 가르치는 교설은 객관적인 양식의 옳고 그름에 대한 사색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전자는 태도의 자연스러움만을 요구하고 후자는 무엇보다도 '진리에' 합치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문제 삼는다. 이리하여 천황제의 의식구조에서는 신 곁에 보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예배하는 자의 자연적 심정 곁에 보편적 상태가 요구된다. 전통적 '청명심淸明心'의 교설은 그에 따른 결과이다."(80-1)


"따라서 매우 역설적이지만 정치사회의 통합에서 제의 이상의 규칙 체계가 필요해지자마자, 그것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세계적 사상의 여러 체계가 아주 간단히 수용된다. '치국평천하'의 가르침인 유교는 물론 불교와 같은 현세 부정적인 세계종교조차 그런 관점에서는 수용이 허락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국체國體[고쿠다이]의 무한포옹성'과 세계적 사상체계들의 '잡거성雜居性'(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의 사상』)이 여기 일본 사회의 특징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수용된 사상체계가 한번 제사공동체로서의 국민적 통일을 때려 부술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자마자 그것은 즉각 '가이쿄外敎[외래적 종교·가르침]', '아다시카미他神[다른 신]'으로 이단시된다." "이리하여 고전적인 천황제의 의식형태 아래서 일어날 수 있는 이단이란 주술제의적 통합체계의 중심을 점하고 있는 '공적 주술제의'의 권위성을 위협하는 것, 곧 구체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공적 주술제의'의 권위를 폄하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82-4)


# 불교, 소라이학(유학), 기리시탄(가톨릭),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모두 위의 조건하에서 이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제3장 근대 일본에서의 이단의 여러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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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의 사상사적 연구 논형 일본학 8
후지타 쇼조 지음, 최종길 옮김 / 논형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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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쇼와 8년의 전향 상황(1933)


"전향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하나의 단어로써가 아니라 그 사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등장한 것은 다이쇼大正 시대 말기, 프롤레타리아운동의 '방향 전환'이 논의되는 과정에서였다." "'후쿠모토주의'에서 전향은 완전히 주체적인 개념으로서 고안되었다. 상황 속에 파고들어 상황 자체를 목적의식적으로 바꿔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상황 속에 내재해 있는 '전화轉化의 법칙'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객관 세계의 법칙' 외에 상황과 변혁 주체와의 관계를 가능한 한 〈법칙적〉으로 정확히 파악하여, 그것에 의해 주체적인 원칙을 만들고 그 원칙에 의해 상황에 대처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른바 운동의 주체를 법칙화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의 법칙은 '객관세계'의 법칙과 대응해서 변증법의 정식에 적합해야만 한다. 무법칙의 운동에서 법칙적 운동을 향해 법칙적으로 전화하려는 능동적인 행동이 '전향'인 것이다. 따라서 후쿠모토는 전향을 자주 '자기지양止揚'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13-4)


"후쿠모토주의에서 비롯한 전향에 대한 사고방식은 국가권력 또는 일본의 지배체제에 의해 역이용되었다. 국가권력은 일본의 체제에 알맞은正堂 국민철학을 잊어버리고 실현 불가능한 〈완전히 가상이라고 불러야만 할······ 외국의 사상에 현혹된〉 자가 자기비판을 하고 다시금 체제에 의해 인정받은 국민사상의 소유자로 복귀하는 것을 '전향'이라고 부르면서, 현대 일본 사상사에 특수한 기초 범주의 하나로서 전향이 생겨난 것이다." "1933년(쇼와 8년)의 사노·나베야마의 전향이 이러한 전향 개념을 성립시킨 계기가 되었지만, 그때 양자의 성명문은 '일본 프롤레타리아 자각분자自覺分子의 의견'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전향이라는 것이 원래 어떠한 경우에도 주체적인 정신태도의 존재를 하나의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러한 정신태도를 현대 일본에 우선 발생시키고, 그것에 의해 현대 일본의 사상사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것은 분명히 생산성·비생산성의 전부를 포함한 공산주의였던 것이다."(15-7)


"공감sympathy이란 주체의 능동적인 움직임인데, 타인을 사랑하려는 의지로 타인의 감정을 감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 설은 유럽에서 고안되었기에 유럽 시민의 '공감의 존재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의 '공감'구조는 실로 그것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다야마 가타이가 간파한 것처럼 일본 사회에서 공감은 명확히 규칙화되지 않은 의식이지, 주체의 의지에 의해 매개된 감정의 움직임이 아니다. 희로애락을 함께 해야 할 때와 장소에서도 세상의 관습에 의해 공감은 사전에 정해진다. 게다가 규율로서의 관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운치 않은 무규율의 관습에 의한다." "천황제 파시즘이 잇달아 작은 전쟁을 일으키고 대외적 위기를 양성하면서, 공동체 국가관을 강화시켜 나가는 과정은 국가를 지배메커니즘이라 파악하는 국가기구적 사고방식을 점차 분해·흡수해 가는 과정이고, 동시에 감성의 개별성을 말살하여 일본적 공감을 확대 재생산하는 과정이었다. 전향은 여기서 발생한다."(32-3)


"더구나 도쿄대학 출신자 모두에게 오늘날까지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엘리트주의는 그들로 하여금 한순간도 국민적 지도자(반드시 국가적이지는 않다)의 지위에서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하였으며, 따라서 자신이 운동에서 지도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보다 단 한발 앞선 위치에서 보조를 맞추게 된 것이다. 그들이 항상 국민적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한 결코 일본적 공감에 대해 반항할 수 없다. 게다가 항상 국민적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한 눈앞의 잇속이 보이는 상황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이른바 일본의 큰 상황 속에 몰입하면서 작은 상황에서 초월에 그것을 조작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많은 경우 자신의 공감매몰성은 의식되지 않고 자신의 상황조작성만이 과도하게 의식된다. 따라서 근본적인 자기비판은 어떤 방향에서도 불가능하고 전향의 자각 역시 미약하다." "이러한 전향 노선의 결과 일본인의 진보관과 자유관이 크게 왜곡되어 근본적인 부분에서 전투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33-4)


"사노·나베야마는 일본 사회의 사상 구조의 전향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전위당의 입장에서 용인하고자 했다. 〈황실을 민족적 통일의 중심으로 느끼는 사회적 감정이 노동자 대중의 마음속에 있다. 우리는 이 실감實感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출한 그들은 여전히 〈과거와 동일하게 조금도 변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긍지를 가지고 죽음에 임하〉려 한 것이라고 스스로 선언했다. 아카마쓰와 아소는 일본 국내에서 자기 자신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자각을 상황에 따라서 바꾸고, 야스다 등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물리쳤으며, 고바야시형 중간 리더sub-leader는 자기 자신의 사상적 입장에 대한 자각을 전환시켜 일본적 공감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사노·나베야마는 그들의 전향 자체가 전위당前衛黨이 취해야만 하는 올바른 노선이라고 생각한 점에서 그들의 전향은 단순한 개인의 사상 전향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공산당이 공산당으로서 전향하려고 하는 노선이 제출된 것이다."(47)


"그러나 그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상적 도정道程 속에서 정당하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사노·나베야마의 전향 과정에서 우리가 지적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하나는 인터내셔널한 운동 속에서 발생하는 대국주의의 역기능에 관한 것이다." "국제적 연대운동이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는 동안에는 각국 운동단체 간의 국제적 평등이 제법 잘 지켜지지만, 한 나라가 지배력을 장악하고 그 나라가 강대국이 되어 다른 종류의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경우에는 그 새로운 권력은 세계 운동의 보루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한편 그로 인해 운동단체들 사이에서 많은 특권을 획득한다. 그 결과 각국 운동단체는 새로운 권력의 국가이성에 바탕하는 국제정치상의 다양한 술책조차 종종 술책으로서가 아니라 운동이념으로써 지지해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한다. 나베야마 등은 옥중에서 이 점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48-50)


"이러한 관찰은 날카롭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서 사노·나베야마 성명서의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단순한 길이 아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공산당이 운동에서 자주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코민테른에서 이탈해 〈일본의 조건에 입각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노선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일본의 민족적 특수조건이란 〈어느 나라에도 없는 국체〉관이 강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대중들 속에서는 그렇다. 따라서 '군주타도론'에 열광하는 것은 소부르주아적인 자유주의 혹은 아나키즘의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나베야마는 천황제 사회주의야 말로 대중 노선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그들은 서로 분열된 이중의 대중관을 가질 수가 없었다. 따라서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존재하는 한' 눈앞에 있는 대중의 '건전한 정치적 관심으로' 되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 성명서의 〈우리는 대중이 본능적으로 보여준 민족의식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는 테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전쟁을 승인하는 것이 되었다."(50-2)


"그들은 실체적인 대중주의자였기에 소부르주아 배제주의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흐름 속에 보이는 하나의 특징은 '소부르주아 급진주의'라든가 '대중주의' 등을 작은 틈도 없이 딱 맞는 형태로 사회적 계층으로서의 소시민과 대중에 결합시켜버리는 경향이다. 사상은 개인의 신념과 판단 그리고 행동 태도가 뒤섞여진 것이기에, 그처럼 뚜렷하게 사회적 계층과 유착될 리는 없다. 사상 형성 상황으로서의 계급 관계가 커다란 영향력을 지님으로써 특정 계급에 공통되는 사상 경향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중첩되지 않고 어긋나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는 점을 그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처럼 '사상파악의 부동성浮動性을 이해하지 않으면 나쁜 의미에서의 이론 마키아벨리즘이 발생한다. 여러 가지 사상적 입장을 자의적으로 고정하여 하고 싶은 대로 절대가치를 부여하고 추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노·나베야마는 '이론주의'에서 '대중본능 존중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이 이론 조작을 적용한다."(53-4)


"근대 일본에서 상황에 대해 일관적인 원리를 가진 사상 체계는 마르크스주의가 유일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운동단체의 패배는 동시에 원리 일반의 패배를 의미하기 쉽고, 여기서 발생하는 허무주의도 하나의 원리적 상실감을 모든 원리의 상실감으로 즉시 치환하는 것이었기에, 첫사랑에 실패했다고 연애 자체를 부인하는 것 같은 안이함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상황의 추이에 대한 저항성을 갖지 않고 질질 끌려 그만두는 성질을 갖는다." "따라서 주의에서 해방된 곳에서 발생하는 '자유주의'는 다양한 주의를 자유로이 조종하는 것에 의해 정치권력의 팽창 경향을 저지하면서 역으로 사회 내의 자유를 확대해가려는 유동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이념을 찾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계속해서 존재하는 천황제 이념을─이것은 동시에 비이념이기도 한 대용물이지만, 그만큼 한층 더─부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것을 천황제적 허무·자유주의라고 부른다."(55-6)


2장 쇼와 15년의 전향 상황(1940)


"1933년 6월의 전향에서 사노 등은 공산주의자 개인으로서 대외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을 대표하는 지도자 다시 말해 초인격적인 집단의 전체 인격성을 체현하는 자로서 당에 전향을 요구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의 전향과 당의 전향을 동일시하는 지도의 병리현상을 드러냈다. 이 병리는 개인적인 집단, 특히 공동체적 모임과 카리스마·교조에 이끌리는 집단에서는 병리로서가 아니라 극히 일반적인 보통의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조직을 비인격적인impersonal 것으로 파악하는 고전·근대적古典近代的인 사고의 바탕에는 지도는 특정한 지도자에게 속하는 기능이 아닌 우연히 특정한 지도자가 품고 있던 지도 방침·지도 강령·지도 정신이 완수되는 활동이다. 따라서 그것은 특정 인간에게 전체적으로 얽혀있지 않다는 점에서 객관적, 또는 추상적인 것이기도 하므로 위의 병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병리로서 자각된다."(96-7)


"절차의 실제적, 또는 사상적 의미를 자각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근대 조직 속에서 살아가는 에토스ethos다. 앞서 말한 조직의 근대적 유형도 구성원의 그러한 에토스를 전제조건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노 등은 그들 자신이 형성 확립하고자 노력했던 조직의 에토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그들 개인의 전향 자체는 그들의 자유지만, 전향의 방법과 전향 형태는 지금까지 그들이 서 있었던 공식적 입장에서 제약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무자각적이었던 자들은 사노·나베야마만이 아니다. 그들의 전향을 '배신'이라 하여 격렬하게 비난했던 비전향 공산주의자들 또한 무자각했다고 본다. 만약 그들이 공산당의 '미덕'이 지도자 교체에서 객관적 원리를 고수하는 데 있다는 점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사노 등의 전향 자체를 공격하기보다는 오히려, 때로는 그 공격과 동시에 사노 등의 절차에 대한 오류를 보다 격렬하게 공격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98-100)


"이리하여 공산당은 자신들의 자랑스러워해야 할 지도자 교체의 원리성에 대한 자각이 전全당을 통틀어서 없었던 것이 된다." "'규약'의 체계적 해석에 대한 논쟁이 어쩌면 한 번도 없었을 것이라 추정될 정도로 적다는 것은 그러한 절차 정신의 결여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절차정신, 바꿔 말하면 규칙의 구체화 감각이 전향을 둘러싼 대립 속에서 서로 결여되어 있다고 하는 연관이 사노 등의 전향을 계기로 집단 전향의 형태를 취하게 한 하나의 중요한 이유였다. 물론 이 경우 사실상 집단 전향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사노·나베야마 자신의 전향 방식이 그 형태를 취하였고 그들이 그것을 원했을 뿐, 사실상 그들의 영향 하에서 괴멸적 타격을 받으면서도 공산당 집단이 비전향을 관철하게 된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이 전향의 경우가 그 이후 익찬 시대로의 진행시기에 사실상 광범하게 전개된 집단 전향의 사상사적 맹아로 보이는 것이다."(102-3)


"일본 전역에 걸쳐 사회의 각 영역을 망라한 집단 전향의 분출은 전향이 '시대적 요구'가 되었을 때, 일본 내에 있는 모든 요소가 방향 전환을 강요받았을 때, 따라서 전향이 '표어'가 되었을 때 일어났다. 그 '때'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고도국방과 총력전의 요구가 사회 만물의 활동 형태를 결정지어야 했을 때, 모든 입장은 목표를 부여받고 그 목표를 향해 전진轉進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렇게 해서 전향은 이전처럼 단순히 마르크스주의·반국체주의·혁명운동'에서의' 전향일 수만은 없게 되어, 총력전이 부여하는 목표'로의' 전향이 되었다." "'적극적'인 '보국報國' 행동이 요구되는 한 '무위'도 '제멋대로'도 '망상'도 허용되지 않는다. 방관주의, 자유주의, 관념적 태도에서 특정한 행동 그 자체로의 전향이 촉구됐던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여기서는 만인이 그들의 일상에서 항상 전향의 과제 앞에 서 있는 것이 된다."(106-7)


"따라서 전향이 시대의 '표어'가 되고 '국민적 보편윤리'화 되는 것이다. 독일의 총력전 국가에서의 '유대인'은 우리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에서는 '전향 전의 사람'이고, 그러한 까닭에 전향이라는 말은 일본 파시즘 국가체제를 기동시키고 재 기동시키는 주제어의 하나였다. 부단한 '반성'과 '실천'에 대한 분발이 그것을 지렛대로 삼아 발생하는 것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전향 행동은 부단하고 무한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 '~에서의 전향'에서 '~로의 전향'으로 전향 개념 그 자체를 전향시킨 전향사에서의 전기는 1937년 12월 '인민전선파', '노농파' 400여 명의 검거와 일본 무산당 및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결사금지였다. 이들 '합법 좌익'은 공산주의로부터의 질적인 거리에 의해 존재허가증이 부여될 때까지는 한계선상이기는 했지만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역점은 비합법 좌익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국책國策에의 실질적인 접근거리에 놓이는 것이다."(107-8)


"국민 전체의 전향을 요구하는 시기에 맞춰 지배체제가 기대한 것은 이전의 사회주의 집단, 노동조합, 자유주의 정당 등이 그대로 산업보국운동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집단의 해체를 거쳐 개인이 '완전 전향'한 뒤에 다시금 산업보국운동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집단 전향의 그늘에서 (이전부터 내려오는 정신을 간직한) 개인은 비전향인 채로 있을 수 있다. 물론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집단 전향에 찬성한 이상 완전한 비전향일 수는 없지만, 일본 집단에서는 구성원의 적극적 토론 속에서 전환방침이 생겨나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간부가 정한 방향을 말없이 인정하는 것은 적극적인 전향의 의미를 거의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일종의 위장 전향임에는 틀림없지만, 전향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스스로 자신을 위장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가장 쉬운 위장 전향인 것이다. 가만 있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위장할 수 있다. 부작위不作爲 위장 전향이 성립하는 셈이다."(130)


"위장 전향은 보통사람은 성공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부작위 위장 전향이 성립한다고 한다면,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다시 말해 주변 사회의 변화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실행할 것이다. 어떤 조건만 정비하면 일본 전체가 위장 전향을 할지도 모른다. 위장 전향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1937년 탄압의 결과로 산보운동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저절로 성공 가능한 위장 전향이 대량으로 출현한 것은 놀랄만한 악순환이 아닌가." "그리하여 갑작스럽게 전향성명을 내놓은 자들의 애매한 전향 정책을 수용함으로써 사회주의자의 완전 전향을 추진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협조회·산보연맹 자신이 위험한 변환을 내포하는 황혼 정책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지탄받는다. 위장 전향에 대한 공포는 집단 전향을 통해서 점차 확대되어 간다. 그래서 파쇼집단 자신이 공격받게 되는 것이다. 익찬회는 공산주의의 소굴이라는 유명한 비난도 이 계열의 결말로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131-2)


"익찬 체제는 엉성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집단 전향의 합류체였던 탓에 그 이데올로기 상황은 굉장히 유동적이었다. 예를 들면 '일진월보日進月步를 의미하는' 단어로서의 '혁신'은 '정당정치 타파'의 '혁신' 및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혁신'과 서로 유동하는 애매한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유동적인 상황에 대한 개인의 대처방법은 무한에 가까운 다수로 존재한다. 공공연한 반천황주의자·반국가주의자, 공공연한 공산주의자로서 완전한 비전향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거의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사는 삶의 방식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지만, 그러한 전략적 상징을 제외한 행동양식의 전술적 차원에 대해서는 대단히 넓은 궁리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유동적 상황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원래 다각적인 것이다." "따라서 익찬 시대는 아마도 근대 일본사 중에서 가장 많은 사상 형태가 은밀한 유형으로 내포되어 있는 시대의 하나가 아닐까."(140-1)


3장 쇼와 20, 27년의 전향 상황(1945, 1952)


"전후 전향에 대한 연구는 특수한 어려움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전후 전향이 일정한 상신서로 국가권력에 대해 서약한다는 전전의 전형적인 '옥중 전향'처럼, 누가 봐도 확실한 객관적 규격성을 가지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전후 '민주주의'는 전향까지도 '자유'롭게 하였는데 여기서의 '자유로운 전향'은 종종 전향자 자신에게조차 그 궤적을 확정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전향 자체의 객관적 규준을 잃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벌린은 자유의 개념을 '나'에 대한 무간섭을 욕망하는 소극적 자유 개념과 '내'가 '나' 자신의 지배자임을 욕망하는 적극적 자유 개념 두 가지로 나눈다." "일본 현대사에서 전제專制는 오로지 군국주의·천황제 파시즘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제와 '강압'은 전부 군국주의나 천황제와의 관계 속에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자유라고 하면 사적이고 소비적인 자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소극적 자유 개념이 그 본래의 상대성에 대한 자각을 상실하고 실체화 되어버린 것이다."(165-7)


"이러한 상황에서의 전향 궤적은 그때마다의 의견을 어떤 형태로든 발표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적 자유의 세계 속에 녹아들어가 불분명한 것이 된다. 그때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전후 전향은 여전히─제2의─현재진행형이다." "이리하여 전후 전향은 전전과 비교할 경우 상대적으로 '자유스런 전향'이라는 이유로─제3의 조건이지만─권력에 대한 '굴복'이기보다는 오히려 '막다른 상황의 타개'이기도 하고, '환멸'이나 '좌절', 혹은 '성장'이기도 하다." "아울러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전향'은 전향이라는 개념 그 자체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용' 위에서 이루어지고, 반대로 '자유로운 사용'을 촉진한다─이것이 제4의 조건이 되지만─. 그러므로 이전의 명확한 일의성一義性을 지닌 전향 개념을 염두에 둔 사람(하야시 겐타로 같은)은 전후의 전향을 따옴표가 붙은 '전향'으로 부른다. 거기에는 자신의 사상 이동은 전향이 아니라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168-9)


"전후에 전개된 전전 전향의 반성reflection은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 그 중 하나는 이전의 전향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다시 한 번 전향 이전의 입장으로 돌아가 사상의 단련을 꾀하고 이로써 새로운 시대를 비전향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33년에 '옥중 전향'을 하면서 이미 그 직후부터 재기의 노력을 거듭하고 이후 전중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비전향의 반군국주의자를 고수한 모리야 후미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공산당원이면서 본의 아니게 적에게 굴복하여 자신의 인간성에 먹칠을 했습니다. 나는 이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자기를 재 단련하는 것에 자신의 노력을 한정하고 집중하려 했습니다.〉" "이것을 '자기' 개인의 내면적 훈련 규율이라 하여 만약 윤리를 엄밀한 의미에서의 내적 자율성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윤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리야에게 계급주의자인 것과 윤리적 개인주의자인 것이 어떻게 해서 양립하고 있는 것일까."(172-4)


"계급의식은 마르크스의 이론적 규칙定則에 따라서 훈련하면 자신 속에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하여 자신 속에 만든 계급의식은 단순히 직업이나 국가의 차이를 초월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뿐이라면, 계급의식이 아닌 계급 자체가 완수할 것이다. 계급의식은 계급 자체를 넘어서는 힘을 가진다. 물론 이론적으로 사색하는 경우의 의식만을 프롤레타리아적이라 하고 행동과 생활 의식을 생태적 계급에 속하게 하는 식의 기만을 마르크스주의는 허용하지 않는다. 계급의식이 육체 전체를 관통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태 그대로의 계급을 넘어서기에 이르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윤리학이 여기서 생겨나고 마르크스주의자의 자기 훈련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이론적 학습에 의한 새로운 계급의식의 획득과 획득한 의식의 육체화라는 이 관련이 마르크스주의의 한 측면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모리야 등은 마르크스주의 속에서 '개성의 발전-인간적 성장'의 길을 찾아냈을 것이다."(176)


"과잉된 자기단련 과정의 바닥에는 아마도 전향 경험의 반성이 당 중앙부의 비전향자에 대한 인간적 속죄 의식과 연결되어 있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또한 국가권력이라는 외적 상황의 힘에 굴복하여 '탈당'한 것을 두고 통렬히 반성하게 하면 할수록 결코 다시는 '탈당'하지 않겠다는 의욕이 생겨서 거기서 제명되거나 탈당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가능성이 포함된 길을 피해가는 행동방침이 생겨나는 것이리라. '전전형 탈당' 중에서 반공화反共化하지 않는 유형의 하나는 이러한 특징을 갖는다. 즉, '탈당' 경험이 역으로 당에 대한 동일화(심리적 결합)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 태도는 심리학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것 때문에 전후 일본 공산당이 '성숙한' 당원에게서 '간쟁'을 받을 기회를 잃고 있는 것고 간과할 수 없다. 그러한 상태가 일상화常態化되면 '간쟁'의 기회를 내부에 지니지 않는 것이 '단결'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179)


"지금 논한 제1의 입장에서의 '전향' 개념은 대단히 명석한 일의성을 가진다. 그것은 〈본의 아니게 적에게 굴복한〉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그 극복도 역시 영구의 일의적 과제가 된다." "그러나 모든 전향 경험자와 전향론자가 '전향' 개념의 이렇듯 명석한 일의적 의미를 계속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혹한 고전적 '전향 시대'가 막을 내림으로써 쥐어진 논의의 자유는 전향 경험의 다각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그뿐 아니라 사실로써도 이전의 전향에서 탄압에 대한 '굴복'과 함께 '자유로운' 전향까지도 동시에 병행한 전향 경험자도 있었다. 이러한 경험의 다의성은 당연히 전향론에서의 다각적인 해석 태도를 가져와, 동시에 '전향' 개념에 다의적(애매한) 의미를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 입장에서 비로소 제1의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전향 상황의 어떤 의미가 파헤쳐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 전후 최초의 전형적인 예로 가메이 가쓰이치로의 전향론 「죄의식」이 있다."(181-2)


"가메이의 전향 의식 속에는 '굴복=배신'과 결합되어 '회심回心'과 '복귀' 등이 복잡한 교향곡이 되어 울려 퍼지고 있다." "원래 자신은 '공산주의자'여서는 안 될 사람이었으나, 상황의 힘은 자신에게 '본연'의 천성을 자각시키지 않았고, 따라서 공산주의자다운 '정치적 자세pose'를 취하는 가운데 자신의 미적 반역 정신의 실현을 위한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가메이가 '감옥과 죽음 앞에서' 굴복했을 때 단순히 공산주의자로서 굴복한 것만은 아니다. 공산주의자로서 행동하고 있던 자신의 발밑에서 이미 자기 본래의 사상이 굴복당하고 있음을 동시에 발견한 것이다. 현재의 굴복이 과거의 굴복을 자각시켰다. 오늘 굴복당한 것이 어제까지는 굴복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굴복시킨 것은 '절대 확실한' 물리적 권력이고 그로 인해 굴복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어제까지 자신의 '정신'을 바쳤떤 이데올로기가 억압에 지나지 않았던 것임을 이해한 것이다. 여기서 이른바 '배신' 사관이 성립한다."(183)


"당연히 현세 초월적 '종교'의 세계가 이곳에 열린다. 모든 현세를 초월한 종교의 관점에 설 때 현세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동질적으로 보인다." "초월 종교의 세계에서 현세를 볼 때에는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평등한 죄성罪性을 띤다. 그러한 관련은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에서 종교의 일면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일면에 관심을 가질 때 현세 속의 '죄인'은 더할 나위 없는 구원을 얻는다. 자신의 죄는 인간 일반의 원죄와 연결된다.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구원의 토대로써의 시련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괴로워하는 개인에게 타인과의 공통성을 부여해 안정된 지속성을 갖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러한 측면만 주목할 때에는 원래 현세 사회 속에서 자기에게만 속할 것 같은 성질의 죄까지도 원죄로 해소해버리는 개인으로서의 책임회피를 낳는다. 그렇게 된다면 원죄 관념을 갖는다는 것만으로 이미 구원되고 만다. 현세 속에서 살아가면서 구원되는 셈이다."(184-5)


"우리는 '전향 시대'의 다각적 반성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주어진 전향 개념이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상황에 서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전향 사실을 애매모호하게 하고 개인의 사상적 무책임을 낳는 경향을 가짐과 동시에 공산주의자의 국가권력에 대한 굴복·배신이라는 부동의 일의적 의미를 통과하는 경우보다 넓은 시야로 전향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후자의 이점을 살려서 봤을 때, 우선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2차 세계대전 후의 천황제 국가 및 그 '국민' 자체의 '전향'과, 국가 이데올로기를 직접 담당했던 '제도인'의 '전향'이다. 물리적·사회적 권력으로 전향을 강제한 당사자가 권력을 잃었을 때, 하나의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어떻게 행동했는가. 또한 새로운 승리자의 권력에 의해 강제되었을 때 지배되는 무권력자로서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것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현대 일본에서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사상적 실력을 비로소 평등한 조건하에서 비교할 수 있다."(208)


"8·15조서는 일본 제국의 최고 지배자가 항복의 결단을 내렸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8·15의 '항복' 조서에 가장 긴요한 '항복'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사상 문제를 포함한다." "결단은 이해나 인식의 차원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다면성이 있을 수 없다.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굳이 스스로의 행동을 한정시키려는 것, 그것이 결단이다. 따라서 결단 자체는 명석한 것이다. 결단한 행동의 내용이 합리적으로 정당하므로 증명할 수 있다든가,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명석한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비합리적일 수 있고, 사실 '결단주의'는 종종 자기 행동의 '정당함'을 검증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비합리주의로서 출현했다." "전형적인 결단과 그 정신이란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완곡한 심정 토로로 결단을 알리려고 한 8·15조서는 반대로 가장 결단답지 않은 결단이 될 것이다."(209-10)


"게다가 이 조서에서 빠진 것은 결단의 정신만이 아니다. '전시국면이 반드시 호전되는 것은 아니며' 등의 어법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에게 불리한 현실을 즉물적卽物的, sachlich으로 직시하여 그것을 지체하지 않고 표현하고자 하려는 정신이 없다.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이 정신이야말로 인식에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조서 속에는 현대 일본의 지배자에게 엿보이는 정신적 리얼리즘의 결여가 집중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리얼리즘에는 한편으로 아무런 목적 없이 현세적 이익의 기회만을 추구하는 무이념주의 유형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고한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의욕을 보유하면서 그에 반하는 자신의 현실을 가차 없이 직시하는 내적 긴장으로 충만한 역동적인 유형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리얼리즘의 정신은 후자 속에서만 방법적 자각에 다다른다. 이런 생각으로 이 조서 내용을 살펴보면 과연 거기에는 초주관적 의욕이 전혀 없다."(210-1)


"힘에서의 패배가 곧바로 이념의 자발적 포기를 야기하는 일본적 전향의 전형은 좌익이 아닌 오히려 천황제의 최상층군에서야말로 고유한 것이었다." "'종전의 공로자'들이 그 노고와 공적을 제아무리 자랑하더라도 거기서 사상적 의미는 무엇 하나 생산되지 못했다. 그것은 오로지 사상과 외계外界의 동일화 구조 때문이었다." "좌익 마르크스주의자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힘에서 패한 결과로 '본의 아니게' 전향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전향 과정에는 '독립의 이념'과 '힘에 의해 좌우되는 생명' 사이의 선택을 둘러싼 내적 긴장이 충만해 있었고, 전향 후에도 이 양자의 관련을 계속해서 사색한 경우가 많다. 천황제 상층부는 그러한 내적 긴장을 가지지 않은 까닭에 밋밋하게 선한 사람의 얼굴을 유지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끊임없이 전향한다. 따라서 전향을 스스로 문제시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문제시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한 '일관성一系性'이기 때문에 '경사스러울' 뿐이다."(212-3)


"여기에는 (여전히 무기력했던) 전후 일본의 자유를 둘러싼 삼중의 역설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외국의 군사권력에 의한 '혁명적 독재'라는 역설이다. '진정한' 인민의 의지가 경험적 인민을 넘어서 지배의 지위를 점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적극적 자유 개념'이 일본 전후 사회에서 실현되었을 때, 그 담당자는 인민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국의 국가 권력, 특히 그 속에 있는 물리적 강제력을 대표하는 군사 권력이었다. 두 번째 역설은 일본 정치지도자의 추수追隨적 주체성이라는 자주성의 특수 구조다. 즉, 정복자의 의향을 '선취'한다는 점에서 '자주적'인, 그러한 역설적 '자립'인 것이다. 제3의 역설은 국민의 소비적 향수享受의 자유(사적 자유) 경향이다. 이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향수하는 사물로서의 자유를 스스로 생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후 정치제도의 생산·재생산 조건에 대한 무관심을 낳는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유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자유주의가 될 가능성을 지닌다."(220-1)


"그리하여 자주적인 민주화운동이라면 어떤 자와도 '주의'를 초월하여 손을 잡으려고 했던 당초의 방침은 우선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권력의 공백에 의한 주체적 인간으로서는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서 있었으면서도 자주적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지 못했다는 사정─이것에 대한 책임은 자유로운 인간을 무능력하게 만든 천황제 국가에 있음은 물론이지만─거기에 점령군이 국가권력의 군대인 채로 일본 민주화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어버렸다는 사정, 나아가 그에 더하여 일본 사회의 지도층이 가지는 권력에 대한 자주성이란 반대의 권력에 대한 자주적 추종, 그것들이 국제정세에 대한 저항력을 없애고 결국은 GHQ 자체까지도 단순한 반공, 반동으로 빠지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점에서 전후 일본인의 동향은 둘로 나뉘게 되는데 반동화한 권력에 저항하여 그야말로 자주적인 민주화운동을 새롭게 이어나가는 것과, 권력의 경향과 함께 다시 크게 전향하는 쪽으로 양분된다."(229)


"국가와 사회는 별개라는 사고방식이 전통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국가'는 '국민'과도 항상 궤를 같이 한다. 국가기구의 붕괴는 국민 공동체의 붕괴이기도 했다. 이 패배한 국가에는 국민이 없다. 존재하는 것은 산하와 자연인뿐이다. 말하자면 자연적 자연과 자연적 인간만이 생활무대로 나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천황의 신성성은 중세 이래 교토의 폐쇄 사회 속에서 소중하게 온존되어 온 것이다. 여기에는 '비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신앙이 붕괴해버리는 것과 같은 신앙으로서의 약점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 신앙을 타도하려는 강력한 반감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일본의 '국민사회' 일반은 천황 비판의 자유화 아래 적극적인 천황 신앙에서 이탈하여 소극적으로 천황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이런 태도는 명료한 전향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또한 비전향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저 지배자의 대응형식과 서로 닮은 부분적 전향이면서 동시에 부분적 비전향이다."(243-4)


"그 애처로운 비자주적 상황에서 피어오른 노력이 아직 충분하게 결실을 맺기도 전에 점령군은 '혁명적 독재'에서 '반혁명적 독재'로 180도 전향했다. 전후 혁명운동이 실은 협력운동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러한 자신의 약점을 자각하고 우선 자주화를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자만에 빠져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그저 인민공화국이 가까워 졌노라 굳게 믿고 전진하는 사이에 점령 권력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때 비로소 전후 민주화운동은 권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발로 서서 자신의 손만으로 운동을 끌어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물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운동일 터이다. 그때, 다시 말해 자주적 운동이 필요하게 되자마자 운동전선은 즉시 분해와 내부 항쟁을 개시한 것이다. 그 집중적 표현이 일본 공산당의 50년 문제다. 집중적 표현이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운동 전체 속에 같은 성격이 분산된 형태로 두드러지지 않은 채 애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다."(263-4)


"이 커다란 혼란 속에서 사상의 주체화를 목표로 해서 노력하고, 점령군의 제국주의 권력과 일본의 국가권력에 대해 당내 '가산관료제'의 제약을 넘어선 인민적 사고를 어쨌든 획득한 자의 예로는 이노우에 미쓰하루가 있다." "〈신앙만을 위한 인간이 인간이 되지 마라. 신앙을 가진 노동자여야 하고, 신을 믿는 농부, 또는 상인, 또는 직공, 또는 뱃사람이어야 한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신앙을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마라. 세상을 위험하게 하고 불건전한 오늘날의 전도사라는 직업과 같은 것은 있어서는 안 되고, 신앙밖에 모르는 사람은 일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단편적인 사람이다. 나는 성서와 신앙 외에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자를 크게 꺼린다〉. 그리스도교를 믿고 더욱이 전도하는 것을 생애의 업으로 삼았던 우치무라 간조는 이러한 말을 했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만을 위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노우에는 이를 알고 있었다."(26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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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 논형 일본학 16
후지타 쇼조 지음, 김석근 옮김 / 논형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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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천황제란 무엇인가


"근대 일본의 지배체제 그 자체였던 천황제는, 종종 서유럽 데모크라시와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천황제는 기본적인 점에서 서유럽의 고전적 절대주의와 두 가지 대비를 통해 성립되었다. 첫째, 근세 유럽의 절대왕정이 교황-교회와의 격렬한 투쟁을 거쳐 종교적 '권위'로부터 왕의 정치적 '권력'이 분리 독립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따라서 거기에 독자적인 의미의 '정치'를 낳게 된 것과는 정반대로, 천황제는 종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권위를 이용함으로써만, 이른바 '권위적 권력'으로서만 성립할 수 있었다. 둘째, 최대의 봉건영주가 다른 대부분의 영주들을 압도하고 정복하여, 민족적 규모로 그 지배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왕권을 대내적으로 확립해간 고전적인 절대주의absolutism와는 달리, 일본의 천황제는 봉건적 권위인 천황이 자신과는 관련 없는 정치적 제 요소의 상황 변화에 따라, 권력의 주체로 전화轉化된 것이므로, 정치적 투쟁을 거쳐 도태된 본래의 절대주의 군주의 정치력을 끝내 갖출 수 없었다."(27)


2 /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


"상징으로서의 '천황'은, 혹은 '신神'으로서의 종교적 윤리 영역으로 올라가서 가치의 절대적 실체로서 우뚝 초월했으며, 혹은 또 온정에 넘치는 최대·최고의 '가부장'으로서 인간생활의 정서 세계에 내재해서, 일상적인 친밀함을 가지고서 군림한다. 그러나 또한 그들 사이에서, '천황'은 정치적 주권자로서 만능의 '군권'을 의미하고 있었다. 따라서 앞의 두 가지 점에서는, '천황' 지배체제regime는 정치 외적인 영역을 기초로 한 '신국神國'이 되거나 혹은 '가족국가'가 되지만, 후자에서는 체제는 최고 권력자에 의해 통합되는 '정치국가' 그 자체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 같은 다양한 체제 관념이 동일화해감으로써, 적나라한 권력행사는, 한편으로는 신의 명령으로 절대화至大化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눈물의 꾸지람, 사랑의 채찍'으로 온정과 인자함의 소산으로 여겨져, 권력은 권력으로서의 자신의 존재이유를 주장하는 근대국가 이성을 잃어버리고, 거기서 권력의 무제약적인 확대擴大를 낳게 되었다."(36-7)


"천황제의 권력상황은, 국가의 구성 원리로 보자면 분명히 이질적인 두 원리의 대항·유착의 발전관계로 파악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는 국가를 정치권력의 장치Apparat 내지 특수한 정치적인 제도로서 구성하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를 공동체에 기초 지워진 일상적 생활공동체Lebensgemeinschaft 그 자체 내지는 그것과 동일화identify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하려는 원리다. 전자에서는 국내에서의 사회적 대립은 당연히 존재해야 할 것으로 전제되고 그 위에서 정치적 통합이 문제가 되지만, 후자에서는 국내 대립은 본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메이지유신 이래의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체제 저변에 존재하는 촌락공동체Gemeinde의 질서원리가 국가에 제도화되면서, 권력국가와 공동체 국가라는, 천황제에 고유한 양극적인 이원적 구성이 자각적으로 성립했으며 거기서 천황제 지배의 역학관계dynamics를 결정하는 내부의 두 계기가 형성되었다."(39-40)


"'향당사회'의 '덕의德義'에서, 국내 정치사회에서의 이해대립의 조화를 구하는 원리와 조응하여, 대외정치의 천황제적 특수양식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일본 사회가 해외 국가들가 그 취지를 달리하여 일종의 특질을 갖는 것〉을 향당적 일본 사회의 도덕적 원소에서 찾는 한, 국제정치 상황에 대한 대응원리는 인간 일반의 윤리ethos와 특수국가 권력kratos의 내면적 갈등을 내포하는 근대적 국가 이성에 기초 지워진 것일 수는 없게 된다. 거꾸로 일본이 도덕을 독점함으로써 해외 국가들을 도덕 바깥의 국가들로 만들어, 국제관계는, 도덕국가=일본과 비非도덕세계의 교섭으로 파악되기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이후 적극적으로 세계교화='천황의 교화皇化에 의한 팔굉일우'와, 소극적으로는 '교화 바깥化外의 국가'에 대한 말살이 천황제 일본의 세계관이 되어가는 논리적 핵核, kernel이 있었다. 그래서 어떠한 대외적 폭력도 허용되어 권력의 방자는 국내를 넘어서 세계에 미치게 된다."(45-6)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완전한 공동체적 질서는, 전통적 일계성一系性과 가부장제적 일체성을 구성 원리로 하는 전근대적인 '이에家'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해체의 위기를 경험한 공동체의 재건에는, 언제나 '이에'를 모델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메이지 30년대 이후, 공동체 원리는 가족주의에 의해서만 기초지워지게 된다. 여기서는 공동체 국가도 '이에'가 기초 지워주며 공동체가 '이에'를 국가에 일의적一義的으로 매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정치운동이 '정욕에 사역당하는' 그런 상황에서는 정치집단이 사적인 심정에 의해서 결합하는 집단으로 변하기 때문에, 거기에 일본의 정당政黨이 도당徒黨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 있었다. 따라서 또, 국가의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치운동의 자유를 극소화하고, 오로지 국가 관료에 의해서 정치는 독점되어야 하는 것으로 된다. 정당정치가 일본에서 자라날 수 없었던 한편, 관료주의가 보편적으로 성립한 유래 역시 여기에 존재하고 있었다."(48)


"일반적으로 근대국가의 역사에서 권력의 초월화에 의해 일상사회에 대한 자기의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은 절대주의의 원리이며, 규범을 동질의 이성적 개인의 경험으로까지 원시화 함으로써 사회의 내면에서부터 국가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원리였지만, 일본 근대국가는 교육칙어에 의해서 도덕영역에 국가를 구축함으로써, 한편으로 천황에서 이성을 초월한 절대성을 형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를 '향당적 사회'의 일상 도덕 속에 원시화 시킨다는 특이한 근대국가를 산출해냈다. 그리하여 칙어가 모든 이성적 주관으로부터 초월하는데서 그야말로 그 해석의 무한한 다양성이 가능하게 되어, 자의적인, 복잡하고 뒤얽힌 충돌도 가져다주게 된다." "그 관계야말로, '향당사회'가 '상량商量'의 대립을 '정의情義'에 의해 완화시키기 위해서 거꾸로 모든 이익대립을 '심정'적으로 절대화하게 된다고 언급했던 자기모순 연관을, 국가적 영역에서 거기에 맞게 표현한 것이었다."(60)


# 교육칙어敎育勅語 : 정의情義를 중시하는 향당사회의 도덕적 원소라는 공동체 원리와, '천자'의 절대화와 계층적·연쇄적 성격만을 강조한 유교적 사유를 결합하여, 이를 국가원리로 보편화한 것


"관료는 명령의 대변자인 절대주의 관료의 본래의 경향에서 벗어나, 피치자에 대해서는 도덕적 가치의 독점자='윗분'으로서 윤리적 폭군이 되고, 상급관료에 대해서는 신분적 하층='부하子分' 내지 '동생弟分'으로서 순진무구한 정신적 유아로 변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거기서는 하급 관료는 상급자에게 인간적으로 '헌신'해서 그 이익merit을 보증함으로써, 장래 비슷한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확보하고자 한다(중간층!). 그래서 관료기구의 수직적인 계층성이, 객관적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격적, 직접적으로 구성되면서, 기구 내부의 계통적 분파는 필연적으로 도당徒黨, clique이 되며, 그들 사이의 상하관계는, 절대적 윤리적 의사의 독점을 둘러싸고서 심각한 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그럴 경우, 천황이 의사의 표백表白을 스스로 행할 수 없는 무의사적 군덕자君德者에 머물러 있기 대문에, 그의 의사를 독점하는 것은, 해석의 독점으로서의 자의恣意의 관철 그 자체로 되므로, 항쟁은 조정불가능하게 절대화된다."(67-8)


"그리하여 절대주의 천황제의 체제regime 내부에서는 모든 체제의 행위자가 주관적 절대자가 되고, 그로 인해 거꾸로 객관적으로는 절대자를 소멸시키게 된다. 천황은 도덕적 가치의 실체이면서 1차적으로 절대 권력자가 아니기 때문에, 윤리적 의사의 구체적 명령을 행할 수 없는 상대적 절대자가 되며, 따라서 신민 일반은 모두 해석 조작에 의해서 자신의 자의를 절대화하며, 그것 또한 상대적 절대자가 된다. 여기서 절대자의 상대화는 상대적 절대자의 보편화다. 그래서 천황제 절대주의는 권력 절대주의를 관철하지 않음으로써, 자의와 절대적 행동양식을 체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시키며, 따라서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비할 데 없는 견고한 절대주의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방대한 비인격적 기구로서의 관료제의, 방대한 인격지배의 연쇄체계로의 매몰, 객관적 권한의 주관적 자의에의 동일화, '선의의 오직汚職'과 '성실한 전횡專橫', 그리하여 천황제 관료제는 근대적인 그것에서 완전히 일탈해간다."(68-9)


"세계정치 상황의 압력과 국내적 절대주의의 미성숙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급속한 근대국가의 형성이 이루어져야만 했던 사정은, 한편으로 시종 권력적 절대자의 등장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절대주의로서의 다양한 특이성을 낳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① (정치기술자로서의) statesmen의 다원성, ② 권력집중의 대극對極으로서의 수평화와는 반대로, 수평화가 촉진되는 기능적 결과로서의 집중에 대한 기대(따라서 수평화는 공의公議 등용, 인재 흡수로 끝나서 의사화擬似化하게 된다), ③ 절대권력자의 성립에 매개되지 않는 기구지배 원리의 조숙, ④ 국가 관념에서의 (대내적 통치기술이 아닌) 대외공동태共同態의 계기의 불균형적인 고양이었다. 그리하여 이 같은 점들이 시급한 국가형성에 수반해서 진행되었으며, 봉건적 권력의 절대군주에 의한 국내적 수탈이 불철저한 그대로 남게 되면, 그만큼 봉건적 분파주의를 내면화 시키게 되어 도리어 결과적으로 모순을 확대재생산하게 되었다."(99)


3 / 천황제와 파시즘


"일본에서 향토鄕土는 국가의 향토이기도 했다. 향토를 떠난 개인도 없지만 향토를 떠난 국가도 없었다." "그와 같은 곳에서 거대화된 도시와 기계와 사회의 기구화라는 병폐에 대한 지각력知覺力과 반발은, 그 자체 병리적인 조숙한 발육을 이루게 된다." "일본에서 기계화는 '서구적 유물론화'이며, 국가의 심정에 반하는 것이다. 인간 일반과 '정신의 위기'의 자각(발레리P. Valery)이 아닌, 자연과 전통에 의해 생활하고 있는 '일촌일가'의 향토와 그 심정이 기계에 대한 반항의 담지자인 것이다. 역사의 역동성dynamics은 인간의 심층에 이르지 않으며, 그 때문에 도리어 안이하게 얼핏 보기에 일찍이 나타나게 된다. 향토주의는, 그래서 일본의 대외적 긴장이 증대되고, 자본주의 공황의 타격이 농촌에서 심각해짐과 더불어, 조국=향토의 적을 공격하면서 떠오르게 된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극단화ultra와 '국가개조國家改造'의 심정적 주장이, 사회생활의 획일적인 기구화, 도시의 무습속성無習俗性에 반발한다."(159-61)


"그러므로 행동의 전문가가 필요하다. '파괴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노우에 닛쇼 일파처럼, 〈우리는 파괴를 받아들여서 쓰러질 각오로 지내고 있으므로, 건설하는 생각까지 연구하자는 분위기가 없었다〉고 하여, '벌閥' 타도에 열광하는 우익 '급진 파시즘' 운동의 하나의 유형이 그것이었다. 그들 운동가들은 향토에 틀어박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떠나서 '동분서주'한다. 그들은, 향토와 농민을 위해서 '천황친정'을 실현해야 하며, 비일상적인 세계에 활약하는 '지사志士'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또한 그들의 행동 그 자체는 무뢰한outlaws의 그것이지만, 정신 형식에서는 천황에 대한 철저한 충의자忠義者들이었다. 오히려 역설적이지만, 충의자라는 것에 의해서 무뢰한이 되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행동규범도 인정하지 않는 허무주의자nihilist가 아니라, 최고 가치에 대한 헌신으로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162)


"막연한 가치관에서 나온 '지극한 정'의 결과는, 정확한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다. 거기서는 가치판단의 분명한 척도 그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조국을 껴안기만 하면 그것으로 가치와 행동은 모순 없이 이어진다. 어떠한 행동도 지극한 정에서 나오는 한, 그 자신에게는 정당하다." "게다가 그것은 어버이와 자식의 온정溫情관계와 밀접하게 연속된다. 바로 '생물 자연의 욕구' 체계다. 천황제 정신의 실체는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욕망 자연주의 아래서는 어떠한 행동도 모두 당연한 것으로 담기게 된다. 일상생활의 합리화나 사회과학 연구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같은 정신구조야말로 일본 파시즘의 '국가개조'를 단락없이 행하게 한 바탕이었다. 천황제 내부에 존재하는 근대국가로서의 합리적 기구화와 전근대적 공동태共同態로서의 전통적 심정의 가치화라는, 두 개의 경향이 낳게 되는 심각한 모순을, 다시금 매개하고 봉합하는 것은 그 같은 정신 이외에 다름 아니었다."(166-7)


"일본에서 파시즘은, 특정 사회계층(농촌 재지중간층)을 운동의 기초적인 힘으로 출발했으며, 농촌 향토의 조직화에 의해 체제편성의 단위를 만들고 그 원형하에 국가의 전체 조직화를 행하려고 한 데 대해서, 나치즘은 결코 특정한 사회계층을 운동의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 "나치즘은 유동流動을 전제로 하며, 일본은 향토에의 정착을 전제로 한다. 저쪽은 인위적 수렴을 결말로 하며, 일본은 정착자의 확대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저쪽은 유대인 배격을 통해서 독일인의 수렴을 가져오며, 세계 부정을 계획해서 체제의 재생산을 기도한다. 그리고 일본 파쇼화의 과정은, 향토에의 복귀의 확대로서 '전향轉向'을 가져오며, 천황제 국가로의 '귀화歸化'로서 '팔굉일우'의 전쟁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들 두 개의 과정은 병행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행되었다." "'전향'은 '추상이론에서 구체적 상황의 직접적 감각적 체험으로'라는 방향을 걸었다. '삶Leben으로'의 복귀였다. 그래서 그 과정은 '솔직'할 수 있었다."(180-2)


"객관적 인식이라는 외줄기 창의 비균형적 사상은, 바야흐로 구체적 체험이라는 외줄기 창의 비균형적 실감實感으로 전환하는데, 그 경우 많은 전향자들이 가족과 향토의 온정으로 순진하게 되돌아갔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학교의 성적도 좋고, 진지했던 자가 많았던〉 좌익운동가는, 지금은 그 '방향의 잘못'을 바로잡아서, 다시금 무라村에서는 모범 인물이 된다. 농촌의 '사표儀表'이며, '조직인'이다. 그것은 앞 절에서 향토파시즘이 요구하고 있던 '중견인물'에 다름 아니다. 농촌에 정착할 수 있었던 전향자는, 그렇게 해서, '혁신운동'의 조직자organizer가 된 자들이 많다." "순진한 향토로의 복귀는 순진한 문학으로의 복귀와 평행적이다. 농본주의와 문학 세계에서의 일본 낭만주의는 대응한다. 전자가 '혁신자'라면, 후자 역시 하나의 '유행에 대한 도전'이다." "다만 후자는, 어디까지나 미적 감각체험─그 자체가 추상세계 속에 있다─의 세계를 떠나지 않았을 뿐이다."(182-3)


"일본에서, 총력전 국가원리의 발현을 상징하는 것은 '인적 자원의 동원·배치'가 모든 국가정책을 형성하는 데 근본적인 발상의 축이 되었다는 점이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인적 자원'이라는 말이 전근대적인 천황제로부터 생겨난 것처럼 생각되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그 말의 등장은 일본에서 점차 근대 국가(사회가 아닌)의 원리가 완전히 관철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할 것도 없이 마키아벨리 이래의 근대정치의 원칙은, 슈미트의 말을 빌자면, 인간을 '인적 자원Menschenmaterial'으로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많은 사람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조직해서 통합하는 인간 처리의 기술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씩씩한 정치 관념은,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당초의 기도 다카요시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존재한 이래 어떠한 지배자에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바야흐로 총력전이 요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 원리의 관철에 다름 아니었다."(190)


"그래서 총력전 국가는, 태평양전쟁의 격화에 의해서, 내몰린 상황에 처해진 경우에,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현실화되기에 이르렀다. '전업과 폐업' '징용'은 '인적 자원'의 합리적 재편성의 구체적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원리는, 인간을 그 물리적 단위량에서 취급하므로, 말할 것도 없이 그 현실 단위는 노동력으로서의 '개인'이다. 그래서 그런 원리가 관철되는 곳, 일본의 향토는 완전히 산산히 분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쟁이라는 지상명령至上命令이 그것을 강행시키려고 했다. 그것은 결코 흔쾌하게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지배자 자신의 '이에家'와 '향토'에 대한 신뢰는, 총력전의 논리를 논리적으로 관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이에家를 파괴하는' 부인 징용은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만약 질서에 대한 내적인 자각에 의해 일본의 국가가 구성되어 있었다면, 합리적 재편성은 국민의 합리적 선택과 자발적 복종을 수반해서 그야말로 '원활'하게 영위되었을 것이다."(193)


"징용과 전업 및 폐업이 수동적으로 강행됨으로써, 총력전 체제는 비로소 성립했는데, 그것은 곧바로 일본사회의 전면적인 붕괴를 의미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직업Beruf 모럴의 발효지醱酵地로서의 '가업'은 그렇게 분산되었다. 이미 노동은 어떠한 내면적 사명감에 의해서도 떠받쳐지지 않았다. 다만 끌려서 가고, 명령에 따라서, 감시하에, 규정시간 만큼 규정대로 움직이게 된다. 생활의 기조는 사적인 충동이며, 행동의 틀은 물리적 기구이지 자주적 떠받침을 갖는 제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제도의 붕괴가 제도화되고 있었다. 여기서 징용공의 '비능률'과 '불량화' 문제가 발생했다. 징용공만이 아니었다. '동원된 학생들'에게도, 이어서 정착한 숙련노동자에게도, '직장'은 이미 자기의 직장이 아니었다." "총력전 국가는 획일적 강제 이외의 정치수단을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거꾸로 복잡한 현실 앞에서 완전히 파탄된다. 거기에 남은 것은 공허한 권력기구와 제도를 갖지 못한 '대중' 아닌가."(194-6)


4 / 천황제의 파시즘화와 그 논리구조


"총력전 국가가 요구하는 정치원리는 한 마디로 말하면 지배의 비인격화다. 다만 그 지배의 비인격화는 일견 모순된 두 개의 의미를 포함한다.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적인 연계에 의해 지배가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체제mechanism가 지배하는 것이다, 라는 지배관이 강한 형태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보통의 구체적 인격을 훨씬 넘어서는 능력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비인격적인 강력한 지배인격을 요구했던 것이다." "논리는 추상적 보편적인 '무인격적 진리'이지만 정치는 영원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조직화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계적인mechanical 합칙성合則性으로 사회관계를 규제하려 하더라도 거기에 인간적 결단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메커니즘이 인간을 조직화하는 운동을 시작하며, 그 출발점에 결단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커니즘이 전체 사회를 뒤덮게 되면 될수록, 바꾸어 말하면 거대해지면 질수록 결단의 의미도 거대해진다."(204-5)


"거기서는 당연히 거대한 인격의 존재가 요구된다. 게다가 전체적 메커니즘은 사회 각 영역에서 대·중·소의 메커니즘의 통체統體로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그것에 대응해서 결단 인격의 계층제hierarchy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경우 전체 메커니즘의 결단자는 소小메커니즘 결단자의 결단능력에 대해서 기하급수적으로 큰 결단 능력을 요구당하는 것이다. 디모크 식으로 말하면, 그는 보편자가 아니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거의 신神에 가까운 것이다. 정치지배를 기구화 한다는 근대화의 시도가 떠오르게 되자, 초월자와 경험적 인격과의 동일화가 요구된다는 역설이 정치의 논리인 것이다. 일본의 경우 일찍이 한 번도 초월자와 인격이 절단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역설은 역설로서 발현되지 못하고 전통적 지배원리의 존속과 병행해서 메커니즘 지배의 원리가 점차적으로 강해지게 된다는 식의 경로를 걷게 된다. 다만 그들 양자는 원만하게 공존하는 것은 아니다."(205)


"만주사변 이래 그 기운을 길러서 특히 2·26사건 이후 히로다 내각 때에 지배적으로 되었던 '고도 국방국가' 요구에서 '국민총동원'에 이르는 과정은, 소/중/대의 각종 천황에 의한 인격적personal 지배관계의 축적에 의해서 정치사회를 구성해가는 심정적 화합의 원리를 무너뜨리고, 군사적인 관점에서, 목적의식을 축으로 하는 계획성으로 사회관계를 규제하려는 것이었다. 고도 '국방'이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군사부문의 확충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근대 국방은 그 범위가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예술 등의 정신적 및 물질적 양 방면에서 모든 국민생활의 각 부문에 이르기까지 확장하는 것이며, 국방은 단순히 군비를 충실히 하고 무력전 준비를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국민생활의 전 부문에 걸친 국방의 충실이란, 인간관계에서의 물질적 및 정신적인 모든 영역의 운행을 일정한 군사목적에 맞추어 정합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을 의도하고 있었다."(207)


"이러한 '고도 국방국가' 이미지가 일본 국민의 '근대화'에 대한 여망을 짊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이미지의 실체적 기초를 이루는 국가의 정책 다시 말해서 전쟁준비, 중국 침략정책 속에서 '근대'를 찾아냈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 비밀의 절반은 확실히 일본의 메이지 이래의 숙명인 세계정세 추수주의追隨主義에 있으며, 그 무렵 세계 최고 형태였던 통제국가의 경향에 일찌감치 가까이 가려는 것이 가장 모던하다고 생각하는 정신적 풍토가, 고도 국방국가론에 강력한 매력을 안겨주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메이지 이래의 일본은 자신이 근대가 아니며 게다가 근대 세계의 일각에 자리 잡아 근대 국가들에 나란히 서려고 했으며, 또한 어느 정도 나란히 서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으로부터, 국가 그 자체의 감성 깊이 심리적인 근대주의를 지니고 있었다." "근대가 아닌 것이 사람들 앞에서는 '근대'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 차이을 메우려는 성급한 심리적 충동이 일본 국가의 근대주의일 뿐이었다."(208-9)


"근대국방국가 건설론의, 논論으로서의 진행은 현실정치 속에서 하나의 경향의 진행과 서로 수반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사유私有 공용共用(혹은 공영公營)의 원리'이다." "그 원리하에서는 국가는 사적인 것의 존재를 인용하고, 그 위에서 사적인 것을 공적인 관점에서 운영·조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상적 입장은, 일본에서 기존의 그것으로는 거의 마르크스주의뿐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공과 사의 단순한 준별이 아니라, 양자의 그야말로 '분리' 위의 '결합'을 찾아내는 것이 일관되게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사고하는 경험을 거치지 않으면, 그런 원리를 생각해낼 수도 없을 것이며, 또 현실에 적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고도 국방국가론의 중핵원리를 만든 것은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방법이다, 라는 실로 근사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일본 사상사의 거꾸로 선 성격을 그만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달리 없다."(214-6)


"여기까지 오게 되면, 이미 사유 공용의 원리인 인적인 담당자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분명한 이미지가 떠오르게 된다. 한 마디로 혁신관료라 불리는 그들은 거의 대부분 다이쇼시대 말기에 제국대학을 나온 수재들이었으며, 적어도 그 학생시대에 마르크스주의의 교양을 몸에 갖추고 있었다." "그들 중심 그룹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학생시대의 주변 상황에서 상당부분 자연스럽게 큰 의도적 노력 없이 머리에 들어온 것이었으며, 또한 그 정도였다. 머리에 들어와 정착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사회를 파악하는 방식, 다시 말해서 전체 기구적인 파악 방식이며, 따라서 또 세계관을 존중하는 자세였다. 그것은 일본에서는 실로 참신한 사고방식이었다." "그에 따르면, 사회는 결국 구체적 인간에서 독립한 인간의 관계 그 자체이므로, 그 관계의 구조 즉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그것을 움직이는 것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다, 라는 사고방식이 '전기구적 파악주의全機構的把握主義'에서 나오게 된다."(218-9)


"고도 국방국가론은 그 논리의 세계에서는, 명석한 정의의 한정이라는 형태로, 결단의 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실현과정에서는, 현실의 결단자를 결여하고 있었다. 혁신관료는 자신이 만든 계획이면서도, 자신이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겸허하게도 지도자를 다른 데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래의 지배자들은, 누구도 자신이 천황의 권한을 넘어서는 강력자가 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자 이상으로 겸허했다. 천황은 지금 우리가 밤낮으로 눈앞에서 검증하고 있듯이, 그렇게 강력한 지배자일 수 있는 자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각이나 그 안의 5상 회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천황에 가장 가까운 입장에 있는 자들 중에서 지혜로운 자에게, 강력함을 구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은 동시에 메이지 이래의 일본의 국가구조의 난점을 어떻게 해서든 호도하려는 괴로운 방책이기도 했다. 그것은 결국 강력자의 대용품에 다름 아니었다."(224-5)


"도조 수상이 〈기요미즈淸水의 탑에서 뛰어내리는 기분으로〉 전쟁을 시작했던, 그 자살적인 심정은, 결단 능력이 없는 자가 최대의 결단자답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의 고뇌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 무렵의 군부 지도자가 전후가 된 후에도 자신의 전쟁책임을 통감하지 않는 것은, 주관적인 심정으로는 이해 가능한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체면상 결단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보여주지 않으면 수습되지 않는 장면이 된 이후에 개전開戰했을 뿐이다. 그야말로 〈우리도 역시 전쟁은 싫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의 정신구조 안에 있는 '결단' 유형이 드러난다. 결단이란 체면을 동기로 하는 그야말로 자살행위, 그것에 다름 아니다. 합리적 추론을 거의 끝까지 밀고나간 결과, 당면한 상황하에서 불투명한 부분을 최소한으로까지 줄이고, 그 위에서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행하는 능동적인 결단이 아니다. 따라서 다의적多義的인 현실에 다시금 압도되어 현실상황 앞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226-7)


5 / '료안'의 사회적 구조


# 료안 : 천황이 입는 상喪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 혹은 천자의, 부모의 상喪을 입는'服' 기간.


"쇼와 원년은 주지하듯이 일주일에 지나지 않는다. 일주일이 1년으로 계산되는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천황 개인의 사망으로 시간이 구분되며, 그 시간의 척도가 전 국민의 생활에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구분을 통용시키려면, 국가기구와 교육기관과 강제장치와 보도수단을 완전히 가동해서, 첫째로 세간의 표면적인 행동양식이라는 점에서 '료안' '천조踐祚(즉위)'를 의례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둘째로 '교훈'과 '선전宣傳'과 '의례적 행위가 가져다주는 내면에의 조건반사'에 의해서, 국민의식의 표층에 그 구분을 심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 일주간'의 신문을 보면, 큰 초호初號 활자로 '심장이 쇠약해지시다御心臟御衰弱', '맥이 불규칙해지시다御脈御結代'로 시작해서, 매일매일 '어御'자가 우르르 붙은 기묘한 일본어로, 천황의 병상과 죽음과 새 천황의 '훌륭한 모습御英姿', '뛰어난 능력御萬能', '타고난 재능御天才' 등이 공식적으로 보도되었다."(231-2)


"'료안'에 대해서는 '군대'에서의 '요배식', 각 학교(대학까지 포함해서)에서의 '추도식追悼式', '감옥'에서의 '사면免役' 등이 행해졌다. 아마도 거의 완전에 가까운 근신, 다시 말해서 일종의 사회적 행동의 정지가 행해질 수 있었던 것은, 궁내성宮內省즉, 천황 일가의 가정관家政官들과 군대 내부와 경찰서 내부와 감옥 내부뿐이었으리라. 바꾸어 말하면 먹는 것을 자발적이든 어쩔 수 없어서든, 아무튼 국가에 의해 보증되고 보통의 사회생활에서 격리된 세계에서, 천황 교체의 '의례儀禮'는 거의 완전하게 실행되었다. 그 속에는, 궁내성이나 경찰이나 군대의 지휘관들처럼, 그 의례의 실시에 '의해 먹고 사는 자들'과 죄수들처럼 그 실시를 '위해서 먹이고 있는 자들'이라는 양극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쨌든 천황제의 순수형태가 내정-경찰, 군대-감옥이라는 종적인 근간으로 수도파이프처럼, 일본 사회를 '천상天上'에서 '지하地下'까지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234)


# 요배식遙拜式 : 멀리서 연고가 있는 쪽을 향하여 절하는 의식


"내정-경찰-군대-감옥을 중심으로 하고, 거기에 관공서와 학교를 덧붙인 사회적 수용소를 제외하면, 일반 사회에서는 료안·천조에 수반되는 근신은 국가의 의례로서 의례적으로 행해졌지만, 사회생활을 완전히 규정하는 형태로 행해질 수는 없었다." "일례를 들면, 료안의 세계와 정계의 사회라는 양안兩岸을 건너뛰고 있는 것이 '연미복' 차림의 정치인들이었다. 그야말로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처럼 입고 있는 연미복은, 일단 공실로 옮아가면, 일변해서 '훌륭하게'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연미복은 '번쩍번쩍한 모습'이 되어 춤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상복이 장례식 정면에서 애도의 상징이면서 그 뒷면에서는 서로 맵시를 다투는 멋진 복장이 되는 것은 잘 차려 입는 상류계급 사이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것인지도 모르지만, 여기서는 '애도'에 아무런 인간적 실감도 수반하지 않는 국가의 의례 제도인 만큼 정면과 뒷면의 감각적 거리는 크며, 상복의 기능 전환은 그만큼 선명하다."(235-9)


"료안의 가운데 정치인들이 권력의 이해타산에 전념했다고 한다면, 부르주아 쪽은 금전의 이해타산에 열중하고 있었다. 부르주아 사회의 의욕의 동향을 (이성적인 것보다는)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주식시장'은 12월 27일에 이미 〈쇼와 벽두의 좋은 인기, 도쿄 시장 물이 오르다〉 〈희망에 가득차 앙등昻騰〉 〈활기를 띠다, 모든 주가 일제히 높다〉는 상태였다." "주지하듯이, 천황의 죽음은 동시에 새 천황의 즉위를 가져온다. 즉위식은 아직 행해지지 않았으므로 정식으로 축하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료안의 이면에는 언제나 천조와 개원이 있다. 자본주의의 번화가는, 그런 새 천황의 천조를 축하하며, 새 원호의 '새 시대'를 미리 축하해서 화려한 입회와 환성과 박수식을 드러냈다, 라고 한다. 료안의 취지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료안의 뒷면에 있는 천조와 개원을 축하할 뿐이다. 역시 도박사의 세계는 동전의 안과 밖을 가르는 기세 전환의 빠름을 갖는다. 일본 자본주의의 점술사는 이렇게 천황제의 미래를 축복한다."(240-2)


"국가의 활동적 부분을 담당했던 자들의 료안에 대한 태도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빠져나갈 구멍 찾기'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정치인들의 서술에서 '대기실', 주식시장 서술에서의 강림신화의 '빗댐' 등은 그런 방법의 은유暗喩였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지만 빠져나갈 구멍의 존재를 모른다면 빠져나갈 구멍 찾기란 불가능하다. 의례를 포함한 국가제도의 내부에 정통한 자에게만 그런 교활함이 허용된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거리의 소상인들은 연말·연시의 '한 몫 잡는' 시기를 앞두고서 그때 쓸 물품을 산지에서 그들로서는 대량으로 사들인다. 그 양의 여하는 계절마다 반복해온 경험으로 산정된다. 그런데 갑자기 회식이나 연회를 모두 금지하는 료안의 '근신조치'가 내려온다. 그들의 계획은 파산에 이르게 된다. 사회의 움직임 내에 깃든 변동'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외적인 사고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인간사회의 경험이 파산시킨 것이다."(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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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시대경험
후지따 쇼오조오 지음 / 창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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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 오늘의 경험


"사물(혹은 사태)은 원래 사람 쪽의 자의적인 의도를 넘어선 독립적인 타자인데, 현대의 '선험주의'는 사물의 그러한 타자성을 아예 인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나타나는 문제는 모두 사전에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물건이나 일에 대한 가공할 만한 전체주의!)이므로 그러한 의식의 틀 내에서는 사물과의 사이에 경이에 찬 그리고 고통을 수반하는 상호교섭이 일어날 여지가 없다. 그러한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미지의 통제 불가능한 것과의 만남 그 자체가 예측 능력의 부족을 나타내는 부끄러운 사태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능 계측기'를 지향하는 태도에서는 경험의 기회 그 자체를 자진해서 거부하며 경험을 쌓는 것을 적극적으로 회피하고 그 대신 경험보다 뛰어난 것으로 간주된 완전합리적인 '상정(想定)'이나 '프로젝트' 제작으로만 몰려가는 경향이 생겨난다. 거기에는 설계된 '경험의 대용품' 쪽이 경험 그 자체보다도 더 비싸게 매겨지는 이상하고 불손한 가치관이 존재한다."(20)


"그러나 선험적인 '설계도'의 완벽한 합리적 체계성을 뽐내려 하면 할수록 그 '설계도'가 사물과의 접촉에 의해 부딪쳐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이 작용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 경험회피를 향한 동력을 획득한다. 그 능동적 회피의 귀결은 소속기관의 보육기화를 점차 '주체적'으로 촉진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사물의 위협을 받지 않고 '계측능력'이 높음을 계속해서 뽐내며 이를 통해 허위의 자기확인을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안정과 조그만 풍요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상태는 어떤 사회학자가 말한 '안락에의 자발적 예속' 바로 그것이다(R. 세네트).인류가 걸어온 갖가지 예속정신의 역사 속에서 노예주라든가 기타 인간적 대립자와의 관계를 통하지 않고,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현재의 안락상황에 대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예속을 행하는 것은 미증유의 새로운 형태의 예종(隸從)이다. 그러한 상태는 사회적으로 혈색 좋게 죽어있는 상태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20-1)


"이에 반해, 자신을 초월한 절대적인 타자인 사물과 대면하여 고통을 수반하는 그것과의 교섭을 기피하지 않는 정신은 지배성이나 영략감(領略感) 및 침략성과는 반대되는 '자유'의 튼튼한 기초가 된다. 자유의 근본적인 성질은 자신이 시인하지 않는 사고방식의 존재를 수용하는 데 있겠지만, 자신을 원초적인 혼돈 속으로 되돌려놓는 절대적인 타자와의 상호교섭조차도 꺼려하지 않는 태도가 그같은 상대적 타자에 대한 자유로 귀결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유가 동요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그때 자유의 정신이 거기서 스스로를 확복하고 재생산하는 기지는 절대적 타자인 사물과의 상호교류의 장이다. 다시 말하면 양보할 수 없는 대항 상황에 처해 있을 경우에도 그 상황 자체를 경험할 필요가 있는 하나의 사태로 간주하는 안목을 버리지 않는다면 전면대립을 거쳤을 때 초래되기 쉬운 경직된 후유증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22-3)


"이처럼, 경험의 중시와 자유의 정신은 떼어내기 어려운 하나의 정신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경험을 해나가면서 생기는 것은 자유의 정신만이 아니다. 인간존재의 기본적 특질인 역사성의 인지 또한 거기서 생겨난다. 추상적인 자의가 사물과의 만남과 교류를 거치면서 의도대로 통하지 않게 될 때, 바로 그 의도와 결과의 차이에서 '역사의 간지(奸智)'가 구체성을 띠면서 발견된다. 이리하여 만사가 예측대로 움직이는 것이 정상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고장으로 간주하는 기계의 세계와 인간행위의 세계 사이의 질적인 차이가 여기서 비로소 충분히 의식된다. 기계나 기구로 화한 세계에는 자동적인 회전이 있을 뿐 역사는 없다. 거기서는 낡아지는 것은 있어도(다시 말해서 비능률화는 있어도), 의도와 결과의 차이라는 사극(史劇)을 통해서 끊임없이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내부로부터 가치를 재생해나가는 갱신(更新)의 경험은 있을 수 없다."(23)


▶ 나르씨시즘으로부터의 탈각


"현존하는 자아를 의문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방법서설』이 일찍이 논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학교'나 지배적 사회로부터 '내가 받아들인 것'들에 의해 내 속에 스며들어 있는 일체의 허위나 편견을 의심과 사고를 통해 '제거하고자' 하는 행위를 의미하였다. 그 결과, 아니 오히려 그러한 행위 자체로서 이미 그 자아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즉물적(卽物的)으로 식별하는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를 의문의 도마 위에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아는 정신의 드라마의 핵심이며 거기서 발생하는 '사물에 입각한' 식별행위는 허위를 듬뿍 품은 현존세계로부터 허위를 하나하나 벗겨내고 사물의 자연스럽고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어 드디어는 '자연학'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은 돌다리를 두드려 건너듯 천천히 진행되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 진행이 완만했던 만큼 단번에 이루어지는 폭발적인 속단과는 달리 한층 더 근본적인 세계상의 전환을 가져왔던 것이다."(28-9)


"그러나 '대중적 규모에서의 자아의 시대'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의 '문명사회'에서 일반적인 자아에의 수렴은, 그와 같은, 세계의 재구성을 향한 정신의 드라마를 내포하지 않는다. 거기 있는 것은 의문의 대상으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있는 자아이며, '허위를 내포한 자아를 부정하는 자아'가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자아를 소중히 여겨 그대로 긍정하면서 가능하다면 어디까지나 그것을 연장시켜가려는 자아인 것이다. 허위에 가득 찬 자아를 무의 상태로 환원함으로써 '자연이성'의 자아를 확립해가는 대화적인 자아가 아니라 오로지 기존의 자아를 진위가 한데 얽혀 있는 그대로 소중히 보존할 수만 있다면 그 형태를 유지한 채로 조금이라도 더 확장시키기를 바라는 그런 자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욕구의 충족을 일삼는 심리학적 자아이며 거기서 작용하는 '이성'이란 주로 충족 면의 손익을 산정하는 계산이다. 손익계산서가 오늘날의 '이성'이란 말인가!"(29)


▶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


"오늘날의 사회는 불쾌감을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정면에서 대결하려 하지 않고, 불쾌감의 근원 그 자체를 추방하려 한 결과 불쾌감이 없는 상태로서의 '안락', 다시 말해서 어디까진 괄호 속에 든, 단지 일면적인 '안락'을 우선적인 가치로 추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불쾌감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생명체 내에서 불쾌감과 공존하고 있는 쾌락이나 평안과는 전혀 이질적인, 불쾌감의 결여태인 것이다." "이 능동적인 '안락에의 예속'은 ('안락' 상실에 대한) '초조한 불안'을  뗄 수 없이 내포한 채 오늘날의 특징적인 정신상태를 만들어냈다. '평안을 상실한 안락'이라는 미증유의 역설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니힐리즘'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심연과 같은 포용력으로 타자를 참고 받아들이는 평정스런 허무정신과는 반대로 다른 모든 가치를 자신의 수하에 지배하면서 일종의 자연반응 '결여상태'를 끝없이 추구한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종류의 '능동적 니힐리즘'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37-8)


"필요한 물건의 획득이나 과제 또는 목표의 달성 등을 위해서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길이 있는 것이고 그 길을 걷는 과정은 많든 적든 불쾌하거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과 같은 시련을 포함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어느 정도의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시련을 견디고 극복하여 그 과정을 벗어났을 때, 그때 획득한 그것은 단순한 물건에 그치지 않고 성취의 '기쁨'까지 수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물건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한 어떤 관계를 지닌 것으로서 자각된다. 다시 말하면 상호교섭 상대로서 경험을 갖게 하는 물질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단지 한 가지 효용만을 위해 사용되는 경우의 물질은 평면적이고 단일한 모습과 단 한 가지 성질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데 불과하다." "그것과 상호교섭을 가질 여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완성된 제품에 의해 영위되는 생활권이 경험을 낳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성격에 연유한다 하겠다."(38-9)


"모든 불쾌감의 근원을 무차별적으로 말살시켜버리려 하는 현대사회는 이렇게 하여 '안락에의 예속'을 낳고 안락 상실에 대한 불안을 낳고 분절된 찰나적 향수의 무한연쇄를 낳고 그리고 그 결과 '기쁨'이라는 감정의 전형적인 부분을 상실케 하였다. 그러한 인생 도정은 산과 골짜기를 잃어버린 평평한 시간의 경과일 뿐이다. 그 '기쁨'이 사물의 성취에 이르기까지의 우여곡절을 극복하는 데서 생기는 감정인 이상, 그것의 소멸은 단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극복과정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일정한 '인내', 갖가지 '궁리', 그리고 우여곡절을 뛰어넘은 '지속' 등과 같은 몇가지 덕목이 한꺼번에 상실되는 것이다. 극복의 '기쁨'이 정신생활 속에서 중시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이와 같은 제반 덕성을 내포하는 종합적인 감정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쁨'의 소멸은 복합적 통합태로서의 정신, 다시 말해서 정신구조의 해체와 무산(霧散)을 가리키는 것이다."(40-1)


▶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 전체주의의 세 가지 형태

1. 전쟁 형태의 전체주의 : 전쟁의 종말 형식

2. 정치지배 형태의 전체주의 : 정치의 종말 형식

3. 생활양식에서의 전체주의 : 생활양식의 종말 형식


"칼 폴라니가 '의제상품'이라고 명명한 세 가지 요소, 즉 화폐와 토지 그리고 '생산'적으로 움직이는 인간(노동) 등 판매 목적을 위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들이 중심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는 상품세계가 오늘날의 '시장경제'다. 존재와 기능은 완전히 분리되고, 끊임없이 진행되는 매매에 의해 '대상의 분할' 또는 '성격의 소멸'에 그치지 않고 대상과 성격 자체까지 모두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지금의 달러가 한 시간 뒤에는 엔이 되어 있으며, 조금 전의 달러는 빵이 될 예정이었는데 지금의 엔은 파찡코 게임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소비물이 무수히 많고 소비자 또한 무수히 많을 경우 무엇이 무엇에 상당하는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거기에 유일하게 실재하는 현상은 끊임없는 변화와 무궁한 변동뿐이다. 이는 무한(endless) 그 자체이며 그 무한궤도를 조금이라도 움직여보려고 하는 것이 화폐의 매매, 노동력의 흡수·방출, 그리고 토지 매매였다."(73-4)


"특히 현대의 '시장 경제 사회'에서는 직접적인 화폐이익에 대한 일의적인 집착이 모든 것을 움직이고 있다. 부는 다른 무엇으로도 체현되지 않는다. 유동(유통)을 존재의 근본형식으로 하는(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역설인가!) 화폐(currency)에 모든 '부'가 직접적으로 집중된다. 유동 그 자체가 모든 가치물, 모든 부를 대표한다는 것은 전체주의의 특질 바로 그것 아닌가? 운동이 곧 기구이고 제도이며, 또 바로 불안정을 존재를 위한 불가결의 기초로 삼은 것이 다름아닌 1930년대(정치지배 형태의) 전체주의의 특질이었다. 이렇게 하여 전체주의의 특질을 추출해보면, 그것은 격렬하고 끊임없는 유통·유동이 모든 형태, 대상, 사물을 삼켜버리는 세계이며 그와 같은 특질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한 그 사회는, 외견적인 깃발이 무엇이든지간에 파국의 1930년대를 '창립기'로 하는, '창조적'인 고전적 전체주의와는 차원과 형식을 달리 하는 새로운 전체주의가 아닐까?"(74-5)


"일본의 전체주의화의 특징은, 한마디로 말하면 '장대하고 새로운 것은 좋은 것'이라는 태도로 사상 최신의 악까지도 선으로 생각해 추구·모방·가공하거나 '고능률화'함으로써 자기 사회 속에 전체주의를 구축했다는 점에 있다. 그 결과 일본 전체주의는 제3형태의 현대 전체주의에서 마침내 세계 최첨단이며 유력한 것, 즉 전형적인 것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전체란 여러 부분의 상호관계의 전국면을 가리키며 또 '상호관계의 전국면'을 하나의 물건이나 제도, 인물, 집단 등으로 대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분에는 부분 나름의 불가침의 존재근거가 있고 상호성은 어디까지나 상호성으로서, 관계는 어디까지나 몇몇간의 관계로서, 단일화될 수 없는 채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전국면'은 영구히 탐구과정 그 자체로서 남는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부분은 부분이다'라는 이 간단한 상식을 망각하는 데에 전체주의 시대의 최악의 질병이 잠복하고 있을 것이다."(77-80)


▶ 현대 일본의 정신


"개인으로서의 자기애라면 그것은 에고이즘이 되며 따라서 자각이 있지만 일본사회의 특징은 자신의 자기애를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헌신이라는 형태로 나타낸다. 따라서 본인의 자각 수준에서는 자신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헌신의 대상이 국가일 때 국가주의가 생겨나고 회사일 때는 회사인간이 태어나며 그것이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나르씨시즘이며 자기비판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착각된 자기애, 나르씨시즘의 집단적 변형태로서, 소속집단 없이 그 자기애를 사람들 앞에 내놓을 만큼의 윤리적 배짱은 없다. 정말 기묘한 상태다. 흔히 외국의 비평가가 일본인은 집단주의라고 말하는데, 일본인의 집단주의는 상호관계체로서의 집단, 다시 말해서 사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을 극도로 사랑하며, 이를 지나치게 사랑함으로써 자기애를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근본적인 자기기만이 있는 것이다."(82-3)


"일본사회는 압도적으로 동질성이 강해서 동질적인 것을 선호하고 이질적인 것을 싫어한다. 이 점이, 일본인이 이웃이나 소수인 또는 자연을 대수롭지 않게 파괴해버리는 근본적인 동기 중의 하나다. 이질적인 것, 타자를 싫어한다는 것은 자신 이외의 것을 알려고 하는 의욕이 결여되어 있음을 말한다." "일본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면 처음에는 다수결만이었다. 그후 점차 다수결만으로는 곤란하다는 사실을 일본의 정치학자들도 알게 되어 소수를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바뀌어왔다." "일본 국내에서 말하자면, 그 대표는 재일 한국·조선인이며, 그 다음으로는 일본의 역사적 책임이 걸린 것으로, 극소수가 되어버린 아이누 사람들이며 그 다음으로 외국인 노동자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오늘날의 '풀뿌리 배타주의'는 바깥에 쫓아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밑으로 처박아넣는다. 최하층 노동의 장으로 밀어넣고 거기에 벽을 쌓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풀뿌리 배타주의의 실상이다."(95-7)


2 / 천황제


▶ 천황제


# 천황제의 다의성(多意性)

1. 단순히 군주로서 천황이 존재한다는 의미

2. 근대 일본의 정치구조, 곧 레짐(regime)을 의미

3. 천황제 지배양식의 특징을 갖춘 특정한 사회적 현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경우


"천황제 성립의 특질을 살펴보면, 첫째, 근세 유럽의 절대왕제가 법왕·교회와의 격렬한 투쟁을 거쳐서 종교적 '권위'로부터 왕의 정치적 '권력'이 분리 독립함으로써 성립하였고 따라서 거기서 독자적인 의미에서의 '정치'가 생겨난 것과는 정반대로, 천황제는 종래 자기가 가지고 있던 권위를 이용함으로써 이른바 '권위적 권력'으로써만 성립할 수 있었다. 둘째, 최대의 봉건영주가 다른 많은 영주들을 압도·정복하여 민족적 규모로 그 지배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왕권을 대내적으로 확립한 고전적 절대왕제와 달리, 일본의 천황제는 봉건적 권위인 천황이 자신과 관계없는 정치적 제반 요소의 상황변화에 의해 권력주체로 전화당한 것이므로 정치적 투쟁을 거쳐 도야된 본래적인 절대주의 군주의 정치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천황이 고대에 권위와 권력을 한 몸에 가진 전제군주였다는 역사적 사정은 천황의 전신(轉身)을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118-9)


"이후 천황제는 제반 정세에 변화에 극단적으로 순응하면서 지배형태의 분식을 거듭해왔다. 자유민권 바람이 불 때는 입헌군주의 외관(schein)을 입고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들어서고자 할 때는 법치국가의 외모를 갖추며 하부구조에 있어서도 반노농제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를 최고도로까지 육성하였다. 천황제 파시즘도 이렇게 하여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 동시에 정치적으로 무력한 '인간 천황'이기 때문에, '천황 친정(親政)'이라는 슬로건 자체가 실질과 내용 사이에 엄청난 괴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혁명운동을 제외한 모든 정치적 분쟁은 언제나 적대자에 대해서는 '반국체(反國體)'라는 욕설로, 자신에 대해서는 '천황 친정'이라는 미화를 통해 전개되어 지배기구를 관통하는 파벌성은 한층 강해진다. 본래 대외·대내적 위기에 대처할 필요성에서 성립된 절대주의적 집권이 거꾸로 권력작용의 능률적 집중을 방해하는 역설적인 기현상이 천황제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120)


▶ '쇼와'란 무엇인가


"'쇼와'가 '50년'이나 된 것은 '전후'의 처리 방법의 결과에 불과하다. 전후 처리는 해부되어야 할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하나의 사건인데 '쇼와 50년' 쪽은 그 자체 속에 아무런 활력도 포함하지 않은 타성으로서의 현실에 불과하다. 그것은 30년 전에 없어졌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정신사적 '부재'인 것이다. 그 정신사적 부재를 역사적 타성으로서 지속시키는 바탕이 된 전후 처리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 해답은 천황제를 폐지할 수 없었다는 점, 또 하나는 현 천황을 퇴위시킬 수 없었다는 점 두 가지로 집약된다. '부재'의 존재이유는 이 둘 중의 어느 경우에도 '할 수 없었다'는 부정형의 사실 속에 있었다. 천황제 폐지라는 과제가 실현되었더라면 '쇼와'가 없어졌을 것임은 물론 '원호' 자체가 일본 달력에서 사라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퇴위라는 과제가 실현되었더라도 '원호'를 남길 것인지 없앨 것인지가 적어도 문제시되었을 것이고, 남겼다 하더라도, '원호'가 바뀌어 '쇼와'가 없어졌을 것임은 확실하다."(153)


"그런데 메이지 이후 천황제가 천황이라는 칭호는 그대로 둔 채 새로운 형태의 제도로 개조되고 이른바 '특수하게 근대화'되어 '1대(代) 1원호'화함으로써 사태에 대한 '원호 감각'은 천황제 지배자 속에서 먼저 없어졌다. 원호는 통치체제 상징의 하나라는 측면이 없어지고 현행 천황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신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교통신호와 같은 존명(存命)신호가 온 일본 속에 오직 유일하게 하나 성립됨으로써 한 사람의 존명신호에 의해 전국민의 달력과 그리고 시간감각이 결정되게 되었던 것이다. '천황은 국민의 상징'이라는 명제가 '전후'에 남겨진 사회 사실적 전제는 이렇게 하여 형성되었던 것이다. 천황제의 일각을 이루어온 '원호'를 존명신호화함으로써 살아 있는 천황만이 '일본'이라는 '국호'와 동일시되게 되었던 것이다. 원호는 여기서는 현존 천황 개인의 '성(姓)'처럼 되어버렸다. 이리하여 새 천황 즉위 이외에, 독자적인 '개원'은 있을 수 없게 되어버렸던 것이다."(157-8)


"습관 그 자체는 사회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핵심적 요소인데, 어떤 습관이 습관으로서 정착되는가는 그 사회의 정신구조를 결정하는 최대의 계기가 된다. 일본에서의 시간 척도로서의 '쇼와'는 원호이기는 하면서도 좋든 나쁘든 과거의 원호가 지니고 있던 사물에 대한 교감적 대응을 포기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무기적 신호로 화하면서 게다가 무기물이 지니는 건조한 물리성에 철저하지도 않고 마치 원호 감각의 '살아있는 전통' 속에 있기나 한 것 같은 겉모습을 가지고 '실증주의'적 시간척도가 지니는 각박함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은밀하고도 부단히 수행해내고 있다." "우리들은 '쇼와'에 관해서도 일상적으로는 나라의 습관에 따라도 조금도 지장이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매일 사용하고 있는 사이에 인습이 되고 인습이 사물을 자명한 것으로 만듦에 따라 어느덧 인습의 근본적인 성질을 성찰의 울타리 밖에 두고 잊어버리고 마는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164)


3 / 전후 논의의 전제


▶ 전후 논의의 전제


"전후 사고(思考)의 전제는 경험이었다. 어디까지나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와같이 경험을 한 당사자에게서조차 경험이 유리되어 하나의 '물질'로서 인간 밖에 존재하게 되었을 때 도리어 그것은 하나의 범주로서 자립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는 법이다. 사물과 인간 간의 상호교섭으로서의 경험으로부터 인간의 요소도 사물의 요소도 모두 사라져버리고 교섭 결과만이 다른 '물질'이 되어 남았을 때 그 소외태에는 체취나 비린내가 제거되고 물적 소재로서의 성질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자의적으로 미화하는 것도 가능하고 폄하하는 것도 가능한 '허위의식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인식(과 이해의 상상력)이 자기 위신을 걸고 전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이런 때인 것이다. 경험이 소외태가 되어 '이용의 소재'가 되어 있을 때, 그때에 '태고의 화석'으로서의 소외태 가운데서 태고의 살아 있는 모습을 재형성하는 것이 인식에 부여된 영광스런 임무인 것이다."(169)


"전후 경험의 첫째는 국가(기구)의 몰락이 묘하게도 밝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그런데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전후의 밝음은 결코 단순한 밝음이 아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비참과 결핍과 불안이, 일일이 서술할 필요도 없이 갖가지 형태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이다. 집이 불타버린 참상 가운데서 어딘가 종잡을 수 없는 원시적인 텅 빈 자유가 느껴지는 것처럼 모든 면에서 비참함이 그 어떤 전향적인 확산을 내포하고, 결핍이 도리어 공상의 리얼리티를 촉진하며 불안정한 혼돈이 거꾸로 코스모스(질서)의 상상력을 안으로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후 경험의 제2의 핵심은 모든 것이 양의성(兩義性)의 부피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었다. 하나의 요약만을 말한다면, 사실로서의 상황이 혼돈 그 자체일 때 거기서 발상(發想)되는 질서는 모두 유토피아로서의 성격을 지니며, 그 유토피아성이 밝음을 보증하고 있었던 것이다."(170-1)


"전후의 혼돈이 낳은 유토피아는 그럼 어떤 규준에 따라 조형된 것일까?" "전후의 경험을 사고를 통해 조형할 때 거의 대부분의 영향을 미친 것은 '또하나의 전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또하나의 전전'이 잇따라 모습을 나타내고 하나씩 하나씩 발견되어가는 과정이 전후사(戰後史)였던 것이다. 과거에 대한 발견이 현재를 모양짓고 미래의 존재형식을 구상하게 한다는 동적인 시간감각의 존재와 작용이 거기에 있었다. 거기서 과거는 단순히 기존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새삼스럽게 발견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영위이며, 내일에도 또한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미래이기도 하였다. '또하나의'라는 말의 의미가 거기에 있으며 복합적인 시간의식과 '미래를 포함한 역사의식'이 거기서 약동하고 있었다. 이 시간의 양의성과 가역(可逆)관계가 전후 경험의 또하나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두말할 나위 없이 그와 같은 시간감각은 오늘날의 일상생활 속에는 이미 없다."(172)


4 / '논단'에서의 지적 퇴폐


▶ 일본의 두 가지 회의


"이 나라에서는 결정을 만들어가는 '살아 있는 회의'는 사실은 '방과후'에 이루어지고 공식 '회의'는 그와 같은 '기능을 하는 회의'를 만들기 위한 조건으로서 설정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실정적인 의회제도는 그 자체로서는 실효성을 갖지 못하지만 그러나 제도 속에 내포되어 있는 비제도적인 회의에 실효성을 부여할 기회로서만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기(機=chance)이지 법이 아니며, 불교철학 속에서 교의(敎義)화되어 있는 것처럼 오히려 법에 대립하는 것이다." "더욱이 법의 지배에 대한 원리적인 반대물에 해당하는 명령의 지배도 아님은, 위에서 말한  '쉬는 시간의 의논'에 의해 결정이 이루어지고, 그 결정이 사전에 양해되며 따라서 결정은 명령자의 책임하에 이루어지는 '결단'도 아니고 각자가 유보조건을 가진 채 이루어지는 타협도 아니면서 그것이 처음으로 '공식화'되는 순간에는 이미 전체의 것이 되어있거나 최소한 당파 전체의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212)


"이 '휴식시간의 의논'이야말로 일본사회를 규정하는 것이며 그것은 본래의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일본어'에 의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거기서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영력(靈力)이 배어 있다'는 철학이 그대로 운영원리가 되어 있어서 '의논'은 말 그대로 '의논'일 뿐 문자나 그밖의 객관적 기호로 공적으로 표현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속기를 하게 하지도 않으며 의사록 같은 것을 남겨서도 안된다. 의사록이 없는 것은 귀찮아서나 태만해서가 아니라 '의논'이기 때문이다. 문서로 남기면 그것은 '의논'이 아니라 공식적인 지상(誌上) 토론이 되어 버린다. 무릇 영력이 내재하는 말이란 무형식으로 번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의논'은 소리이니 형상화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의논'으로 실질적인 결정이 이루어진다면 정식 회의는 단순히 그것을 확인·공표하는 의식이 된다. 물론 이러한 구조는 의회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다. 대립하는 의견과 입장을 객관적인 경로에 올린다는 이념이 전무하기 때문이다."(212-3)


▶ 현대에서의 '이성'의 회복


"이데올로기가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진다는 것은 이데올로기 이전에 사람이 사람으로서 서 있는 지점이 존재함을 예상케 한다. 그러한 지점이 없이는 애당초 자주적 선택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란 그 지점을 규범적으로 확보하는 운동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이데올로기와 제도관이 자유로운 경쟁하에 놓이는 것이 사실상 보장되며, 또 자유로운 경쟁하에 놓여야 한다는 규범의식이 사회적으로 정착되었을 때에는 이에 대한 권력의 개입이 엄격히 차단된다. 설사 그 권력이 '관리'라는 이름 아래 전개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재량'의 형태를 띠고 발동되는 경우라도 이 규범의식이 확고할 때에는 개입이 성공할 수 없다." "민주주의가 이데올로기의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려 하는 것은 그리함으로써 좀더 나은 자기규제 체계를 권력에 부과하기 위해서다. 즉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갖는 권력에 대한 충동 제어 기능을 항구적으로 진화시켜나가기 위해서인 것이다."(223-4)


"그럼 '인권'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당사자 우위의 원칙이다. 그것은 일본에서는 때때로 '사권'(프라이버시)과 동일시되지만 양자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프라이버시는 자유주의와 관용의 원리이며 인권은 민주주의의 원리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부단한 조화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상호모순되는 지점에 도달하곤 한다. 그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하기로 결정하든지 간에 내적 갈등의식과 부단한 통합에의 의욕을 잃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양자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한쪽이 완전히 없어져버린 상황에서는 다른 한쪽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인'의 자유로운 판단이 허용되지 않을 때 어떻게 그 개인이 그 당사자로서의 보편적 권리와 책임을 자주적으로 파악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인권의 규범의식이 없는 데서 사인의 자유는 '국가'의 틀을 넘기 어렵고 거의가 국가에 의해 '주어진 생활'의 자유로운 향수(생활의 생산이 아니라 소비)에 머물게 될 것이다."(234)


▶ '논단'에서의 지적 퇴폐


"현대 일본에는 기묘한 '전문가'가 있다. 그는 언제 어느 때라도 모든 문제에 대해 즉각 '해설'을 곁들인 '의견'을 발표한다. 마치 하나님과 같은 존재다. 어쩌면 하나님 이상 가는 존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무리 이쪽에서 요구해도 때로는 대답을 '보류'하여 발표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묘한 '전문가'인 '유식자'는 어떤 경우에는 '대학교수'의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하도 어떤 경우에는 '평론가'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문학자'의 명함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의 기묘한 '전문가'는 일편단심 궁리의 결과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도 아니고 보고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고 예술도 아닌, 그 어떤 종류의 '리뷰'를 되풀이함으로써 이 세상의 표층(表層)에 떠오르고 또 그 떠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 '리뷰'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리뷰'에서는 절대로 자진해서 발을 빼는 일이 없다."(243-5)


"이러한 기묘한 '전문가'는 지금 일본사회의 좁은 표층에 넘쳐흐르는데, 그는 '논단'이라는 가공의 단을 마치 실재하는 것인 양 좇고, 현실에 대해서는 하등의 긴장감도 없는 말만 산더미처럼 모으고, 서로 손을 맞잡으며, 얼마 안되는 숫자의 세력이라도 나타나면 진심을 다하는 태도를 취하며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그런 주제에 사회주의 국가의 관료주의나 개인숭배라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또 일본 민주주의자들의 저항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친다. '숫자'만 갖추면 머리를 숙이는 그들에게 어찌 그런 자격이 있겠는가? 사실에 대한 긴장을 결여한 '낱말의 집합'을,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그건 없는 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현실에 대해 아무런 적극적인 (방법적) 기능조차 가지지 않으므로 그것은 비(非)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이 '유식자'는 그의 언론이 비존재라고 하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위에 떠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245-6)


5 / 신품문화


▶ 신품문화


"'이성 없는 합리화'는 인간의 이성이 조직규약이라는 형태의 실체가 되어 사회활동 전영역을 관료제화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필수품이 제품이라는 형태의 합리적 물체가 되고 모든 생활영역까지도 콘크리트화가 완료된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 이성이 인간 속에 있을 때에만 유지되는 이성 고유의 제반 특징은 소실된다. 다시 말하면 '아직 형태를 취하지 않은' 풍부함(그것을 원초적 추상성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지 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그것은 탄력적 복원력과 조형적 변형력의 양극에 걸친 확산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의 폭넓음으로 확보된 보편성, 비합리적 감정에 대해서도 통찰을 통해 그것과 양립하며 더 나아가 결합까지도 할 수 있는 관대함 등의 고유한 특징이 지금은 이성 자체로부터 박탈당해 이성은 하나의 고체적인 형태로 특수화되고 그와 같은 콘크리트화를 통해 '물적 장치'와 제품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것은 이성의 폐문이며 감금이다."(293)


"경험이란 물질(혹은 사태)과 인간 간의 상호 교섭이므로 상대인 물질의 재질이나 형태, 장소적 환경 등의 여하에 따라 이쪽에서 사전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제멋대로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면 인간은 이를 재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그럴 경우에는 물질로부터의 저항이나 물질에의 접근에 있어서의 우회 등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즉 '매개'를 반드시 경과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은 고안과 설계와 주형(鑄型)에 따라 일방적으로 제작하는 과정과는 전혀 다르다. 일방적 제작은 그 직선성(直線性)에서 관료제와 닮았고 군사적 처치와 통한다. 이에 대해, 경험의 결정(結晶)은 사물과의 교섭의 개별적인 형태에 따라 생겨나는 일회적 고유성을 어딘가에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상호성의 흔적이며 사회적인 것의 씨앗이다. 무수한 복제 부품을 무수한 직선의 복합적 배선으로 합성하는 오늘날의 신품에는 그러한 상호교섭의 흔적이 없다."(295)


6 / 그 자세


▶ 이론인의 형성


"전향이라는 말이 사상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나타난 것은 1920년대 중반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방향전환'이 논의되는 과정에서였다. 이때는 전향이라는 말이 입장을 바꾸어서 지배권력의 동향에 굴복한다든가 입장을 변경하여 동조하게 된다든가 하는 의미로 쓰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이때의 전향은 전적으로 주체적인 개념이다. 즉, '객관세계의 법칙' 외에 상황과 변혁주체 간의 관계를 가능한 한 정확히 법칙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주체적인 원칙을 만들고 그 원칙을 가지고 상황을 변화시켜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운동 자체를 법칙화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운동법칙은 '객관세계'의 법칙과 대응하여 변증법의 정식에 맞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노력을 실행할 때 전향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무법칙적 운동으로부터 법칙적 운동으로 법칙적으로 전화하려고 하는 능동적인 행동이다."(305-6)


"후쿠모토 카즈오(1894~1983, 일본공산주의운동의 이론적 지도자)가 '전향'이라는 기호로써 '역사의 보편법칙'에서의 변증법적 '전화(轉化)'의 원리에 능동적 주체가 자신을 적극적으로 적합화시켜가는 행동을 표현했을 때 '후쿠모토주의'라는 말은 하나의 범주로 성립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후쿠모토주의에서 형성된 전향의 사고방식이 국가권력 또는 일본의 지배체제에 의해 거꾸로 이용되어, 일본의 체제에서 정통적인 국민철학을 잊어버리고 실현불가능한 〈순 공상이라고나 해야 할···외국 사상에 현혹된〉(1928년 6월 27일 공산당 검거에 관해 하라 原 법무상이 행한 담화) 자가 자기비판을 하고 다시 체제에서 인정받는 국민사상의 소유자로 복귀하는 것을 '전향'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때, 현대 일본사상사에 특수한 기초범주의 하나로서 전향이 생겨났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비국민적 행동'(1928년 하라 법무상의 말)을 그만두고 천황제 일본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따르게 된 것을 의미한다."(306-7)


▶ 맑스주의의 대차대조표


"악을 받아들이면서도 꼭 나쁘지만은 않은 사람, 다시 말해서 무관심의 공모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적은 최악의 경우에도 너를 죽일 뿐이다. 친구는 최악의 경우에도 너를 배신할 뿐이다. 무관심이 밑받침하고 있는 것에 말려들면 학살과 배신이 횡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적 불행의 해결은 노력, 그것도 모두가 함께하는 사회적 행동으로서의 노력이라고밖에는 말로 정의가 안된다. 그러나 해결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경향이 맑스주의 역사 속에서 강해져갔습니다. 일종의 변질이지요. 사회주의의 비정통적인 산물로서 전체주의(totalitarianism)적인 것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일종의 돌연변이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부모를 전혀 안 닮았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깊이 잘 들여다보면 닮았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이것이 시작되었는가는 큰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럼 처음에는 다 좋았던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맑스 자신도 어떤 과정 속에 있는 것이므로 말입니다."(365)


"칼 뢰비트는 『근세철학의 세계개념』이라는 책의 첫머리에서 '애초에 예수가 나타나서 그가 모든 가치를 독점하는 순간에 이 세계는 무가치한 단순한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적인 태도는 그 순간에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므로 데카르트가 등장하는 것이 늦은 것뿐이다'라고 말합니다. 매우 과감한 말이기는 하지만 경청할 만한 의견입니다. 가치의 독점자가 나타나면 그 이외의 것은 단순한 물체로 화합니다. 다시 말해서 조작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철학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옮겨서 생각하면 이는 단순히 경제체제에 있어서의 중앙집권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독점의 문제입니다. 발레리의 말처럼, 데카르트의 최대 공적은 자신을 의문의 존재로 간주하고 스스로를 도마 위에 올려놓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적) 절대주의로 가서 그것이 정치체제가 되면 독재가 생겨날 수 있으니까요. 자기를 내쳐 도마 위에 올린 것은 획기적인 일입니다."(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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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한길그레이트북스 22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김석근 옮김 / 한길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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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1부 현대 일본정치의 정신상황


제1장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일본 국가주의가 '초'(超)라든가 '극단'(極端)과 같은 형용사를 앞에 달고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근대국가는 국민국가(nation state)로 불리고 있듯이, 내셔널리즘은 오히려 그 본질적 속성이었다. 그처럼 일반적으로 근대국가에 공통된 내셔널리즘과 '극단적인' 그것과는 어떻게 구별될 것인가. 사람들은 곧바로 제국주의 내지 군국주의적 경향을 들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라면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초기의 절대주의 국가는 예외없이 노골적인 대외적 침략전쟁을 행하고 있으며, 이른바 19세기 말의 제국주의 시대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력적인 팽창 경향은 끊임없이 내셔널리즘의 내재적 충동을 이루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의 국가주의는 단순히 그러한 동기가 '더' 강력하였고, 발현된 방식이 '더' 노골적이었다는 것 이상으로 대외팽창 내지 대내적 억압의 정신적 원동력에서 질적 차이를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 의해서 비로소 참된 울트라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47)


"유럽의 근대국가는 종교개혁에 뒤이어 16, 17세기에 벌어진 종교전쟁의 한가운데서 성장했다. 그리하여 형식과 내용, 외부와 내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라는 형태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고, 사상·신앙·도덕의 문제는 '사적인 일'로서 그 주관적 내면성이 보증되고, 공권력은 기술적인 성격을 지닌 법 체계 속에 흡수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메이지 이후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그와 같은 국가주권의 기술적·중립적 성격을 표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의 국가주의는 내용적 가치의 '실체'라는 것에 어디까지나 자신의 지배근거를 두려고 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주권국가는 쇼오군과 기타의 다른 봉건적 권력의 다원적 지배가 천황을 향하여 일원화되고 집중화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정령(政令)의 귀일(歸一)'이라든지 '정형일도(政刑一途)'로 불리는 그같은 과정에서 권위는 권력과 일치하였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내면적 세계의 지배를 주장하는 교회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47-8)


"국가가 국체에서 진선미(眞善美)의 내용적 가치를 점유하는 곳에는, 학문도 예술도 그러한 가치적 실체에 의존하는 길 외에 달리 존립할 수 없다. 게다가 그런 의존은 결코 외부적 의존이 아니라 내면적인 그것이다. 국가를 위한 예술, 국가를 위한 학문이라는 주장의 의미는 단순히 예술이나 학문 나름의 국가적 실용성의 요청만은 아니다. 무엇이 국가를 위한 것인가 하는 내용적인 결정을 '천황 폐하와 천황 폐하의 정부에 대해서' 충성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관리가 내린다는 점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내면적으로 자유이며, 주관 속에 그 정재(定在, Dasein)를 가지고 있는 것은 법률 속에 들어와서는 안된다〉(헤겔)는 주관적 내면성의 존중과는 반대로, 국법이 절대가치인 국체로부터 흘러나오는 한, 자신의 타당성의 근거를 내용적 정당성에 기초지움으로써 어떠한 정신영역에도 자유자재로 침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일본에서는 사적인 것이 '단적으로' 사적인 것으로 승인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50)


"이러한 입장은 또 윤리와 권력의 상호이입으로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주권이 윤리성과 실력성의 궁극적 원천이며 양자의 즉자적 통일인 곳에서는 윤리의 내면화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끊임없이 권력화로의 충동을 지니고 있다. 윤리는 개성의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곧바로 외적인 운동으로 다가오게 된다. 국민정신총동원과 같은 것이 거기서의 정신운동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더욱이 윤리가 권력화됨과 동시에 권력 역시 끊임없이 윤리적인 것에 의해서 중화되면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조심스러운 내면성도 없으며, 노골적인 권력성도 없다. 모두가 시끌시끌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소심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토오죠오 히데키(1884~1948)는 일본적 정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권력의 이른바 왜소화는 정치적 권력에 머물지 않으며, 무릇 국가를 배경으로 한 모든 권력적 지배를 특징짓고 있다."(53-5)


제2장 일본파시즘의 사상과 운동


"일본의 파시즘 이데올로기에서 특히 강조되는 점은, 첫째로 가족주의적 경향입니다. 가족주의가 특히 국가 구성의 원리로서 높이 내세워지고 있다는 것, 일본의 국가구조의 근본적인 특질이 언제나 가족의 연장체로서, 즉 구체적으로는 가장(家長)으로서의 국민의 '총본가'(總本家)로서의 황실과 그 '적자'(赤子)에 의해 구성된 가족국가로 표상(表象)된다는 것, 게다가 그럴 경우 예를 들면 사회유기체설처럼 단순히 비유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실체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다는 것, 단순히 이데아로서 추상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에 역사적 사실로서 일본국가가 고대의 혈족사회의 구성을 그대로 보존·유지하고 있다는 식으로 주장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특히 일본 파시즘 운동의 이데올로기에서의 커다란 특질입니다. 이같이 가족국가라는 생각,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충효(忠孝) 일치의 사상은 일찍이 메이지 이후의 절대국가의 공권적 이데올로기였습니다."(78-9)


"다음으로 일본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특질로서 농본주의적 사상이 대단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본래 파시즘에 내재되어 있는 경향인 국가권력 강화와 중앙집권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산업·문화·사상 등 모든 면에서 강력한 통제를 가하게 되는 그러한 것들이, 거꾸로 지방 농촌의 자치에 주안점을 두어 도시의 공업적 생산력의 신장을 억누르려는 움직임에 의해 저지당하는 결과가 되어버리는데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특색입니다."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이 시종일관 농업부문의 희생 하에 이루어졌으며, 또 국권과 결부된 특혜 자본을 추축으로 하여 신장되어왔기 때문에, 공업의 발전도 현저하게 파행적인 것으로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메이지 이후 그런 급격한 중앙의 발전에 뒤떨어진 지방적 이해를 대표한 사상이 끊임없이 위로부터의 근대화에 대한 반발로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전통이 파시즘 사상에도 흘러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80-4)


"일본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세번째 특질로서는, 이른바 대아시아주의(大亞細亞主義)에 기초한 아시아 제 민족의 해방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 파시즘 속에는 자유민권운동 시대로부터의 과제인 아시아민족의 해방, 동아시아를 유럽의 압력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동향이 강하게 흘러들어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거의 불가피하게 일본이 유럽 제국주의에 대신하여 아시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사상과 서로 얽혀버리게 된 것입니다(동아협동체론(東亞協同體論)에서 동아신질서론(東亞新秩序論)으로의 전개를 보라). 일본이 어쨌든 간에 동양에서 최초로 근대국가를 완성하고 '유럽의 동점(東漸)'을 막아낸 국가라는 역사적 지위로 인해, 일본의 대륙발전 이데올로기에는 시종일관 동아시아해방이라는 측면이 붙어다니고 있습니다. 물론 세월이 흐를수록 그런 측면은 제국주의 전쟁의 단순한 분식(粉飾)이라는 의미를 강화해가게 됩니다."(95-6)


"다음으로 일본의 파시즘 운동의 운동형태에 어떠한 특질이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일본의 파시즘이 군부 및 관료라는 '기존의 국가기구 내부'의 정치세력을 주요한 추진력으로 하여 진행되었다는 것, 이른바 민간의 우익세력은 그것 자체의 힘으로 신장되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2기에 이르러 군부 내지 관료세력과 연결되면서 비로소 일본정치의 유력한 인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탈리아의 파쇼나 독일의 나치스가 물론, 각기 그 국가의 군부의 지원은 받았지만 어쨌든 간에 국가기구의 '바깥으로부터', 주로 민간적인 힘의 동원에 의해서 국가기구를 점거했던 것과 현저하게 다릅니다." "일본의 파시즘 운동은 대중을 조직화하는 데 큰 열의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소수의 '지사'(志士) 운동으로 시종일관했습니다. 하나의 영웅주의, 즉 '지사' 의식이 그 운동의 대중화를 억제했던 것입니다."(96-7)


제3장 군국지배자의 정신형태


"히틀러는 1939년 8월 22일, 바로 폴란드 침공 결행을 앞두고 군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여기서 선전가들을 위해서 전쟁을 개시하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그것이 지당한 논의인지 아닌지는 관계가 없다. 승자는 훗날 우리가 진실을 말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질문을 받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개시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정의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요는 승리에 있는 것이다.〉 참으로 가차없는 단정이다. 이같은 단정적인 언사는 일본의 어떠한 군국주의자도 감히 입에 담지 못했다. '이기면 관군(官軍)'이라는 생각이 아무리 마음을 차지하고 있어도, 그것을 공공연하게 자신의 결단의 원칙으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는 없었다. 도리어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은폐하고 도덕화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일본의 무력에 의한 다른 민족 억압은 언제나 황도(皇道)의 선포이며, 다른 민족에 대한 '자혜로운 행위'로 생각된다."(139-40)


"일본 지배층을 특징짓는 이같은 왜소함을 가장 노골적으로 세계에 보여준 것은 전범자들의 한결같은 전쟁책임 부정이었다. 키난 검찰관의 최종 논고를 보자. 〈전직 수상, 각료, 고위의 외교관, 선전관, 육군의 장군, 원수(元帥), 해군 제독 및 궁내대신들로 구성된 현재 25명의 피고 전원으로부터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들 중의 누구 한 사람도 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14년이란 기간에 걸쳐서 숨쉴 틈도 없이 일어난 일련의 침략행위인 만주사변, 이어서 일어난 중국전쟁 및 태평양전쟁의 어느 경우에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맡고 있던 지위의 권위, 권력 및 책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또 그것 때문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로 그들 침략전쟁을 계속하고 확대해온 정책에 동의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노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합니다.〉"(146-7)


"피고들의 자기변호가 지닌 두 가지 논리적 광맥 중 하나는 기정 사실에 대한 굴복이며, 다른 하나는 권한으로의 도피다." "기정 사실에 대한 굴복이란, 이미 현실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결국에는 시인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피고들의 답변에 공통되고 있는 것은, 이미 결정된 정책에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은 이미 시작된 전쟁은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논거이다." "만주사변 이래의 정치적 사건이나 국제협정에 거의 반대했던 취지를 말하고 있는 피고들이 구술서를 읽어보면, 실로 그러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천재지변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여기서 '현실'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 혹은 만들어져가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서, '만들어져버린 것',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어디선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현실은 언제나 미래에의 주체적 형성으로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흘러온 맹목적인 필연성으로 파악된다."(150-3)


"토오쿄오 재판의 전범자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자신의 무책임을 주장하는 제2의 논거는 소추(訴追)되어 있는 사항이 관제상의 형식적 권한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고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면 언제라도 법규에 규정되어 있는 엄밀한 직무권한에 따라서 행동하는 전문관리(Fachbeamte)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토오가 군무국의 역할에 대해 한 다음의 말은 실로 함축성으로 가득 차 있다. 〈육군대신은 각의에서 결정한 사항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적 사무기관이 필요합니다. 군무국은 바로 그런 정치적 사무를 담당하는 기관입니다. 군무국이 하는 것은, 그런 정치적 사무이지 정치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것이 무토오의 군무국장으로서의 바람직한 정치적 활약의 정당화 근거이다. 그의 일은 '정치적' 사무이기 때문에 정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정치적 '사무'이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160-4)


제5장 일본에서의 내셔널리즘


"동양 국가들에서의 소박한 민족감정은 어디서나 우선적으로는 바깥으로부터 밀려오는 유럽 세력의 압력에 대한 반작용의 형태로 일어났다." "이 제1단계에서의 내셔널리즘을 근대적 내셔널리즘과 구별하여 '전기적'(前期的) 내셔널리즘이라 부른다면, 그 전형적인 표현이 곧 '양이'(攘夷) 사상이었다." "양이 사상의 특징은 살펴보면, 첫째로는 그것이 지배계급에 의해 그들의 신분적 특권유지 욕구와 떼놓을 수 없게 결부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거기서는 국민적인 연대의식이라는 것이 희박하고, 오히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서민의 소외, 아니 적대시를 수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거기서는 국제관계에서의 대등함이라는 의식이 없으며, 오히려 국내적인 계층적 지배의 눈으로 국제관계를 보기 때문에 이쪽이 상대방을 정복 내지 병탄(倂呑)하느냐, 아니면 상대방에 당하느냐, 문제는 처음부터 양자택일이다. 따라서 어제까지의 소극적 방어의식이 갑자기 내일은 무제한의 팽창주의로 변하게 된다."(201-2)


"여타 아시아 국가의 내셔널리즘이 구지배구조와 제국주의의 유착에 맞선 내셔널리즘과 사회 혁명의 내면적 결합이라면,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일찍부터 국민적 해방의 원리와는 결별하고, 거꾸로 그것을 국가적 통일이라는 이름 하에 억눌렀다." "자아의 감정적 투사로서의 일본제국의 팽창은 그대로 자아의 확대로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시민적 자유의 협애함과 경제생활의 궁핍함에서 비롯되는 실의(失意)는 국가의 대외적 발전 속에서 심리적 보상을 찾아냈다. 끊임없이 대외적 위기감을 고취시키면서 지배층은 역사상 보기드문 교묘한 국가 술수에 의해서 그런 국민감정의 동원에 성공했으며, 사회적 분열의 모든 조짐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조직적 동원을 통해 주입된 국가의식은 정치적 책임의 주체적인 담당자로서의 근대적 공민(公民, Citoyen) 대신에 모든 것을 '위쪽'에 맡겨서 선택의 방향을 오로지 권위의 결단에 기대는, 충실하지만 비열한 종복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204-9)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 동양의 '정신문명'과 서양의 '기술·물질문명'을 종합하고, 거기에 일본 고유의 '상무'(尙武)문화를 덧붙임으로써 실로 전형적인 전체적 사명감을 발전시켜 나갔다. '국체'는 그런 모든 가치의 통합체에 다름아니었다. 만약 부분적 사명감이라면 그것이 심리적인 좌절이나 좌초를 경험하더라도 또 다른 영역에서의 사명감으로 전환하여 다시 시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사명감은 전체적인 것이었던 만큼 그것의 붕괴가 가져다주는 정신적 진공상태는 컸다. 전쟁 이후 새 헌법의 제정과 더불어 '평화문화국가'라는 사명 관념이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등장하여 다양한 '이론적인 뒷받침'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에 대한 견인력은 거의 갖지 못했으며, 또 패배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슬로건이라는 식의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구일본제국의 사명감의 전체성을 무엇보다도 잘 설명해주고 있다."(211-2)


제6장 '현실'주의의 함정


"지식인 특유의 약점을 언급해보자면, 지식인은 어설픈 이론을 가지고 있는 만큼 흔히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현실'의 진전에 대해서도 어느 틈인가 그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이치를 만들어내서 양심을 만족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러한 사실에 대한 굴복이 '굴복으로' 의식되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은 괜찮습니다. 그런 한에서 자신의 입장과 이미 그러한 사실 사이의 '긴장관계'는 존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기가 약한 지식인은 바야흐로 그런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그런 갭을 '자기 쪽에서' 다가감으로써 메워가려고 합니다. 거기서 자신이 지닌 사상이나 학문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끝없는 자기기만의 힘에 의해서 그런 실질적인 굴복은 결코 굴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자신의 본래 입장이 '발전'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유연하게 어제의 자신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한 번은 비극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다시 지식인들이 그런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이미 어릿광대짓일 뿐입니다."(226)


"현실이란 본래 한편으로는 '주어진 것'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루 하루 만들어져가는 것'인데, 보통 '현실'이라고 할 때에는 오로지 앞의 계기만이 전면에 나서서 현실의 만들어가는(plastic) 측면은 무시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현실이란 이 나라(일본)에서는 단적으로 '이미 그러한 사실'과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의 눈앞에 있는 재군비 문제에서도 이렇게 선수를 치는 식의 위험한 생각이 일찌감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문제는 이미 현재의 예비대가 헌법 제9조의 '전력'(戰力)에 해당하는가 아닌가 하는 그런 '스콜라적' 논의의 단계가 아니라, 이루어지게 될 재군비에서 어떻게 해서 구(舊)제국군대의 재현을 방지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해서 문관우위제(civilian supremacy)의 원칙을 확립할 것인가에 있다는 것과 같은 주장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직 반드시 지배적이지 않은 동향에 대해서 대폭적으로 진지(陣地)를 건네주는 결과밖에 가져다주지 않습니다."(218-27)


제7장 전전(戰前)에 있어서 일본의 우익운동


"국체가 그야말로 일본제국의 신념체계였다는 사실은 '우익단체'에 의한 그 이데올로기적 독점을 불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중적인 방식으로 그들이 정치운동에 중요한 제약을 부과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첫째로 국체는 단순한 천황 숭배의 관념이 아니라 일정한 통치구조로서의 측면도 지니고 있었다(이른바 天皇制)." "따라서 우익세력에 의한 국가개조의 주장은 일정한 단계에 이르게 되면 필연적으로 하나의 딜레마─위와 같은 국체의 측면을 어디까지나 존중함으로써 통치기구에 대한 정면으로부터의 도전을 단념하고 기껏해야 상층부를 '격려'하는 역할에 만족하든가 아니면 자주적인 대중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계속 유지해감으로써, '빨갱이'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타 잇키나 2·26사건의 청년 장교들의 비극은 그런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우익 운동이 걸은 길은 물론 전자 쪽이었다."(239)


"더구나 '우익단체'의 운동으로서의 급진성은 일본 국체의 또 하나의 전통적 측면에 의해 견제되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구체적인 '적' 또는 '대랍자'를 전제로 하여 비로소 성립된다. 따라서 운동이 그런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도될 때, 그것은 전체 상황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일본의 '국체' 관념은 예로부터 모든 정치적 대립의 피안에 있는 '화'(和)의 공동체라는 신화적 표상과 강하게 결부되어왔다. 그것은 모든 대립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절대무한'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일본 국가는 대문자로 쓰여진(즉 확대된) 가족 혹은 부락공동체이며, 거꾸로 후자는 소문자로 쓰여진(즉 축소된) '국체'인 것이다." "그런 연유로 '신체제'라는 이름 하에 장단을 맞춰서 발족한 일본의 '전체주의'가 국내적인 편성에 관한 한, 기성 세력이나 집단을 거의 그대로 포함하는 '포용주의'로 끝나고 말았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다."(239-40)


제2부 이데올로기의 정치학


제3장 파시즘의 제 문제


"파시스트가 사회민주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존재에 대해 어디까지 '관용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물론 이데올로기적·원리적 문제가 아니라 혁명의 '한계 상황'의 문제이다. 사회민주주의나 자유주의가 '혁명의 온상'으로 판단되는 한에서 그것은 배제되거나 통제(Gleichschaltung)되며, 그것이 거꾸로 혁명의 방파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한에서는 방임되거나 심지어 지지를 받기도 한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런 사회민주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존재 내지 활동이 허용되어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는, 그 국가의 지배권력이 '파쇼화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며,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런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일정한 상황에서의 구체적인 행동양식에 있는 것이다. 생생한 현실 문제에 정치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자유주의자나 반공(反共)이 유일한 간판이 사회민주주의자까지 박해하는 것은 '권력의 경제'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무의미하기 때문이다."(300)


"물론 파시즘이 혁명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발현 형태를 취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며, 그 발생이나 진행의 템포나 형태에는 일정한 정치적 법칙성이 있다. 파시즘이 어떤 한 국가에서 노골적인 형태로 출현하는 것은 그 국가 또는 그 국가의 '세력범위'에서의 혁명적 상황의 긴박성이 어느 정도로까지 높아진 때이다. 혁명과 반혁명의 대항관계가 있어도, 그것이 구래의 지배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할 정도로 성숙해 있지 않으며 파시즘은 발생하지 않거나 발생하더라도 거의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 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넓은 의미'의 부르주아 반동이다. 다만 여기서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혁명적 상황이 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할 정도로 고도화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단순히 객관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의식의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파시즘의 발전은 혁명적 상황의 '긴박성'과 반드시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 것이다."(302-3)


"파시즘은 어떤 하나의 새로운 사회체제가 아니며 또 그것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적극적인' 목표나 일관된 정책이 없다. 거기에 있는 유일한 목표를 찾아보면 반혁명이라는 것뿐이다. 그들의 주장은 대부분 부정(否定)의 형태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추상적·이론적으로 말하면 반혁명의 '전체적인' 조직화 과정은 사회의 강제적인 시멘트화에 의해 모든 이질 분자들─가능하고 현실적인 현체제의 반대세력─이 일소될 때 완료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반대세력의 출현은 기저에 있는 혁명적 상황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므로, 사회혁명의 세계사적 진행 자체가 정지되지 않는 한, 그런 동질화가 완료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영원히 '미완성'인 것이며, 그것은 그렇게 해서 '반혁명의 전체적인 조직화로 향하는 이른바 무한한 운동'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근대적 사회에서의 '능동적 니힐리즘'의 궁긍적인 숙명인 것이다."(316-7)


제4장 내셔널리즘·군국주의·파시즘


"내셔널리즘은 어떤 네이션(nation)의 통일·독립·발전을 지향하여 밀고나가는 이데올로기 및 운동이다. 따라서 내셔널리즘 개념의 다양성은 네이션이라는 범주의 다양성 내지 애매함과 서로 얽혀져 있다. 그러나 내셔널리즘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네이션의 '주체적' 계기라고도 불리고 있는 민족의식에 다름아니다. 내셔널리즘은 이렇게 민족의식이 일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 단순한 문화적 단계로부터 정치적인─따라서 '적'(敵)을 예상하는 의식과 행동으로까지 고양될 때 비로소 출현하게 된다. 내셔널리즘의 최초의 목표가 어디서나 네이션 내부의 '정치적' 통일(공통의 정부 수립) 및 타국에 대한 '정치적' 독립(국제사회에서의 주권의 획득)으로 표현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보편적 규범에 의해 결속된 '국제사회'는 먼저 유럽에서 성립했으며, 거기서부터 전세계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근대 내셔널리즘이 사상으로도 현실의 운동으로서도 19세기 유럽에 그 원형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323)


"내셔널리즘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세 개의 계기로 구성되어 있다. ① 국민적 전통(tradition), ② 국민적 이익(interest), ③ 국민적 사명(mission)이 그것이다. 전통은 네이션을 과거와 이어주며, 이익은 그것을 현재에, 사명은 그것을 미래와 이어준다. 이 세 가지가 합성되어 국민적 개성 관념(national character)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내셔널리즘 운동은 다른 정치력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일반적으로 높고, 또한 대부분은 독립된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자유주의, 사회주의, 군국주의, 파시즘과 같은 이데올로기 내지 운동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그것도 국민적 통일과 독립이 아직 순전히 장래의 목표인 동안에는 내셔널리즘 운동은 비교적 그것 자체로서 정리된 형태를 가지며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일단 근대국가를 수립한 후의 내셔널리즘 운동이나 강대국의 권력정치의 와중에 휘말리게 된 지역의 내셔널리즘 운동에는 거의 언제나 다른 정치력이나 운동이 복잡하게 개입된다."(331-4)


"내셔널리즘이나 파시즘의 개념이 불명확성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현저한 운동 내지 정치체제로서 역사적으로 발현되고 있는 데 비하여, 군국주의의 경우는 한층 더 애매하고 '이즘'(ism)으로서의 특성이 희박하다." "시험적인(tentative) 의미에서 군국주의를 정의한다면, 그것은 〈한 국가나 한 사회에서 전쟁 또는 전쟁 준비를 위한 배려와 제도가 반영구적으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국민생활의 다른 모든 영역을 군사적 가치에 종속시키는 그런 사상 내지 행동양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 "군국주의적 특성은 사회의 각 층에 침투해 있는 특정한 사고양식으로 측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사회경제적 구성체가 아님은 물론 민주주의처럼 정치체제 전체를 감싸는 개념도 아니다. 즉 '주의'(主義)라기보다는 다양한 정치체제와 결합되어 존재해온 하나의 경향성으로서, 어떤 사회는 '보다' 많이 또는 '보다' 적게 군국주의적인 것이다."(334-5)


"군국주의는 수단으로서의 군사력과 군대정신 그 자체가 목적화된다는 데에 그 현저한 특성이 있다. 그런 수단의 자기목적화는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본질적인 모순을 가져다주었다. 몰트케는 일찍이 〈전쟁이야말로 신의 세계의 질서를 가진 거대한 횃불이다. ······ 전쟁이 없었더라면 세계는 물질주의에 빠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모든 군국주의에 공통된 이런 '정신주의'는 거기에 내재하는 모순에 의해 그야말로 그 반사물(反射物)로 전환되는 숙명을 지닌다. 즉 군인정신의 고양은 군의 규격성, 획일성의 요청에 직면하여 가장 몰정신적이고 비개성적인 '인원수'로 환원되고, 희화화된 형태에서는 일본의 '황군'(皇軍)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계급장·견장·각반의 착용방식이나 담요의 정돈 등에 대한 아주 하찮은 '형식주의'로 발현된다. 나아가서는 군국주의가 선전하는 국가적·국민적 특수성은 군사력이 우월성의 규준이 됨으로써, 완전히 질적인 규정을 잃어버리고 병력량의 차이로 귀착된다."(339-40)


"파시즘의 제1목표는 혁명의 전위조직의 파괴이며, 그것은 직접적인 테러나 국가권력에 의한 탄압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혁명세력의 억압은 다소라도 모든 지배계급이 실행해온 것이며, 파시즘의 특질은 단순히 그런 탄압의 양적인 규모의 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의 질적인 특이함'에 있다. 파시즘은 혁명세력의 직접적 억압에 머물지 않고서, 혁명세력이 성장하는 모든 사회적 노선이나 채널 자체를 폐쇄시키려 한다. 그 때문에 파시즘은 소극적으로는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그런 민중의 크고 작은 모든 자주적 집단의 형성을 위협과 폭력으로 방해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는 매스 미디어를 대규모로 구사하여 파시즘이 '정통'으로 삼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대중을 획일화하는 것이다. 파쇼화 과정이란 요컨대 그런 이질적인 것의 배제를 통한 강제적 시멘트화(나치의 이른바 획일화(Gleichschaltung))의 과정에 다름아니다."(346)


"파시즘의 강제적 동질화와 시멘트화의 기능은 언제나 테러와 폭력에 의한 협박을 수반하며, 스파이·밀고제도·충성심사 등 직접·간접의 모든 방법에 의한 '공포의 독재'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파시즘은 현대의 가장 발달된 테크놀러지와 매스 미디어를 최대한으로 구사하며, 선전·교육·대집회로 〈대중의 사상과 감정을 계통적으로 변화시켜라〉(히틀러)라는 이른바 내면으로부터의 획일화를 밀고 나간다는 점에 큰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중의 불만을 한편으로는 특정한 속죄양(공산주의자·유태인·흑인·가상적국)에 집중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만을 스포츠·영화·오락·집단여행 등에 의해 무산시킨다." "파시즘에 대한 저항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폭력과 잔학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강제적 시멘트화를 그야말로 비이성적인 격정을 동원하여 민주적인 외형 하에서 수행하고, '합의에 의한 지배'라는 근대적 원리를 어느 틈인가 '획일성에 의한 지배'로 슬쩍 대체한 점에 있는 것이다."(348-9)


제3부 '정치적인 것'과 그 한계


제1장 과학으로서의 정치학


"정치학은 정치의 과학으로서, 구체적인 정치적 현실에 의해서 매개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그것이 무언가 구체적인 정치세력에 직접 결부되어 정치적 투쟁의 수단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서의 정치투쟁은 주지하듯이 사상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국제적인 전쟁에서도 국내 정당간의 투쟁에서도 이데올로기적 무장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럴 경우 학자들의 정치이론이 서로 경쟁하는 어느 당파의 무기로 동원되고 이용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경향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같은 이용가치를 전혀 가지지 못한 그런 이론은, 실질적으로 공허한, 이론으로서도 가치가 낮은 것이라고 할 수조차 있다. 그러나 학자가 현실의 정치적 사상(事象)이나 현존하는 다양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고찰의 소재로 삼을 경우에도, 그를 내면적으로 이끄는 것은 언제나 '진리가치'가 아니면 안된다. 정치가가 이론의 가치를 통상 그 대중동원의 효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말이다."(402)


"이처럼 정치학을 특정 정당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예속으로부터 지켜내는 것만이라면 문제는 비교적 간단하겠지만, 정치적 사상(事象)을 인식함에 있어서 언제나 모든 주관적인 가치판단의 개입을 배제한다는 것은 말하기보다 실천이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가 원래 인간의 격정이나 본능을 깊은 곳으로부터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정치적 현실을 인식할 때에는 자기의 비합리적인 호의에 뿌리를 둔 억지견해가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끼여들어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정치인의 사유에서는 오히려 그런 가치지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정치적 사유의 특질, 정치에서 이론과 실천이라는 문제에 어쩔 수 없이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실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을 과학으로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런 어려움(aporia)을 피할 수 없다."(403)


"정치학자는 자신의 학문에서 이같은 인식과 대상의 상호규정 관계의 존재를 먼저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정치적 사유의 존재구속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치적 세계에서는 배우가 아닌 관객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는 '엄정중립' 역시 하나의 정치적 입장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학자가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 어떤 이론을 구성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실천에 다름아니다. 이같은 의미에서의 실천을 통해서 학자도 역시 정치적 현실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이런 불가피한 사실에 눈을 감는 것은 자기기만일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조차 하다. 그런 태도는 흔히 '이기면 충신'이라는 식의 기회주의를 '객관적' 태도라는 이름으로 마구 퍼뜨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세계관적인 정치적 투쟁에 대해서는 단순한 방관자로 자처하는 자는 그것만으로 이미 정치의 과학자로서 자격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406-7)


제2장 인간과 정치


"정치의 본질적인 계기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통제를 조직화하는 것이다. 통제든 조직화든 어느 것이나 인간을 현실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며, 인간이 외부적으로 실현시킨 행위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정치가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는 어떻든 간에 인간 존재의 메커니즘을 전체적으로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정치의 작동은 이성이건, 정서건, 욕망이건 인간성의 어떠한 영역이건 간에 필요에 따라 동원하게 된다. 요컨대 현실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정치에서는 작동의 고유한 통로가 없다. 종교도, 학문도, 경제도, 그것이 정치 대상을 움직이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언제나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용한다." "정치가 무언가 불결한 것과 본래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정치가 인간을 현실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어떤 결과를 확보하려 하기 때문이다. 실은 정치가 더러운 것이라기보다 현실의 인간 그 자체가 공교롭게도 천사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다."(411-3)


"이때 정치가 전제로 하는 성악(性惡)이라는 의미를 보다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악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정확한 표현이 아니며, 카를 슈미트도 말하고 있듯이, 인간이 '문제가 있는'(problematisch)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에 다름아니다. 효과적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조직화한다는 것, 그것을 어디까지나 외부적 결과로서 확보해가는 것에 정치의 생명이 있다고 한다면, 정치는 일단 그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인간을 '취급주의' 품목으로 여기고 거기에 접근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악이라는 것은 이런 취급주의의 꼬리표이다. 만약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악한'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오히려 간단하고 본래의 정치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선한 쪽으로도 악한 쪽으로도 바뀌며 상황에 따라서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하는 데에 기술(art)로서의 정치가 발생할 수 있는 지반이 있는 것이다."(415)


"어떠한 정치권력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정치권력인 한 인간의 양심의 자유로운 판단을 짓밟고 가치의 다원성을 평준화시키고, 게다가 강제적인 편성을 들이댈 위험성으로부터 완전히 면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권력이 구사하는 기술적 수단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인격적 통일성을 해체해서 그것을 단순히 메커니즘의 기능화로 만들어버릴 위험성 역시 커진다. 권력에 대한 낙관주의는 인간에 대한 그것보다도 몇 배나 위험하다." "따라서 오늘날은 내면성에 의거하는 입장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적 조직화에 대항하여 자주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또 자신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패러독스에 직면해 있다. 그때 정치적인 것의 전형적인 틀에 어느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내 몸을 끼워넣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런 연옥을 두려워하여 모든 정치적 동향으로부터 무차별적으로 도망가려고 하면, 도리어 최악의 정치적 지배를 자신의 머리 위에 불러오는 결과가 될 것이다."(424-5)


제4장 권력과 도덕


"원시사회에서 정치단체의 기원은 대체로, 한편으로는 사제자적 권력,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적 권력 양자가 합류하는 곳에서 성립되었던 것으로, 정치권력이라는 것은 이미 그 단초에 에토스(ethos)와 파토스(pathos)의 통일이라는 성격을 운명적으로 타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통치영역이 광대해지고 권력의 하부 행정기구가 법적으로 정비될수록, (권력과 도덕의 직접적인 통일이라는) 이데일로기와 실재의 거리는 커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권력과 도덕의 원시적인 통일에 현실적으로 쐐기를 박게 된 커다란 계기는 어디에서도 정치권력에서의 '법체계의 형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법 역시 습속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법인 한, 그것은 역시 최소한도로 목적의식적인 산물인 데(관습법도 역시 관습과는 다르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해서, 도덕은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형성이 아니라는 데에 그 규범력의 기초가 있기 때문이다."(451-2)


"그러나 권력과 도덕의 직접적 통일의 현실적 해체는, 반드시 곧바로 양자의 원리적인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동방제국과 같은 강력한 군주의 단독지배 대신에 민주정을 고전적으로 완성시킨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지하듯이 그리스 시민에게 자유라는 것은 폴리스에의 참여를 의미하며,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 그의 생명과 신체는 모두 폴리스에 속하고 있으며, 도덕의 체계는 폴리스에 대한 충성으로 통일되며, 신앙은 폴리스의 종교에 대한 신앙이며, 교육은 폴리스의 공민에 대한 교육에 다름아니었다. 소크라테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야말로 그 비극이 확증해주고 있듯이 '합법성'과 '정당성'은 아직 완전히 분열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리스인들에게도 개인도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폴리스의 덕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리스의 정치적 통일 자체가 붕괴하고 사람들이 현세로부터의 이탈 때문에 그런 덕을 추구하게 된 시대였다."(453-4)


"중세 카톨리시즘은 정치권력의 도덕적 제약에 관해서 후세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사상을 발전시켰다. 말할 것도 없이 자연법 사상이 그것이다. 스토아에서 출발하는 자연법 사상이 어떻게 중세 세계에 수용되었고, 어떻게 체계화되었으며, 또 어떠한 기능을 했는가 하는 것은 법사상사의 서술에 맡겨야 하겠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교권(敎權)─교권 역시 하나의 권력이었다─의 속권(俗權)에 대한 우월과 통제를 합리화하는 역할을 했으며, 전체로서 중세적 정치체계의 이데올로기적 지주가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그것은 법적·정치적 질서에 대한 복종이 결코 무제한의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윤리적 의무라는 명제(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경우의 결정을 개인적 판단이 아니라 공적인 권위에 맡겼던 것이지만)를 포함시킴으로써 근세의 혁명권 내지 저항권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455-6)


"근세 초기에는 왕권신수설 같은 것이 절대군주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이론으로 이용되었지만, 그것은 과도적인 현상이었으며, 게다가 신권설(神權說) 그 자체도 점차로 내적인 변질을 겪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왕은 신성하기 때문에 최고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거꾸로 최고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성한 것으로 되었다. 루이 14세가 '짐은 곧 국가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동시에 그가 '신의 아들'도 아니며 '조국의 아버지'(Pater Patriae)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가권력은 종교적·도덕적·습속적 제약─한마디로 말하면 정치외적 제약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고유한 존재근거와 행동원리를 자각했다. 그것이 곧 근세에서의 국가이성(國家理性)의 이데올로기였다. 종교개혁이 교권의 세속적 지배에 저항하여 기독교적 신앙의 피안성(彼岸性)과 내면성을 강조한 당시의 결과는 세속권력의 공공연한 자기주장으로 나타났던 것이다."(457)


"절대적인 국가주권과 빼앗을 수 없는 개인의 기본적인 인권, 이 두 가지의 대립적 통일은 무릇 근대국가의 숙명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국가이성의 사상과 근세 자연법 사상의 상극으로 나타나게 된다." "(자연법 사상이 우위를 차지한) 영국과 미국에서는 국가권력은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결코 무제한이 아니라 그것이 일정한 법적 제한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그 법의 구속력은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윤리적·종교적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그런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이에 비해 (국가이성 사상이 성숙한) 독일에서는 국가는 최고의 가치이며, 그 존립의 필요를 위해서는 국제법이나 개인도덕적 규준도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사상이 헤겔로부터 비스마르크, 트라이치케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흔히 독일이 악명높은 군국주의적·권력국가적 전통의 사상적 반영으로 지적되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459)


제5장 지배와 복종


"교사-학생관계와 주인-노예관계를 비교할 때, 가장 현저한 대척점은 바로 '이익지향의 동일성'과 '대립성'이다. 교사는 학생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교사에게는 학생이 모든 정신적 수준에서 자신에 가까이오고, 마침내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교육의 이상이다. 교사의 제재는 그런 방향을 추구하는 한에서만, 교사의 제재일 수 있다. 주인과 노예는 그야말로 모든 점에서 반대 관계에 서게 된다. 주인은 본래 가능한 만큼 노예를 사역시키려고 하고, 노예는 본래 가능한 한 그 사역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한다. 주인은 노예와 공동의 목표를 가지지 않으며, 공동의 운명에 서지 않는다." "현실의 사회적 종속관계는 이런 양극 사이의 광대한 영역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두번째 유형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지배관계로서의 성격을 짙게 지니게 되며, 첫번째 유형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지배관계와 대립되는 의미에서의' (정신적) 권위관계라는 양상을 띠게 된다."(469-70)


"노예의 주인에 대한 복종에서는, 복종의 자발성이 제로 혹은 제로에 가까운 정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본래 복종행위(Unterwerfungsakt)가 있다기보다도 복종이라는 사실상태(Unterworfenheit)가 있는 데 그칠 뿐이다." "정치적 사회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그와 같은 긴장관계밖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피지배자를 억압하기 위해서 지배자가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권력기구는 쓸데없이 거대하기만 할 뿐 아니라 대내관계와 더불어 모든 정치적 사회의 존재근거인 대외적 방어라는 면에서 현저한 취약성과 위험성을 배태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모든 통치관계는 한편으로는 권력·부·명예·지식·기술 등의 가치를 다양한 정도와 양식으로 피지배자들에게 분배해줌으로써 본래의 지배관계를 중화시키도록 하는 물적 기구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를 피지배자의 심정 속에 내면화함으로써 복종의 자발성을 불러일으키려는 정신적인 장치도 발전시켜온 것이다."(472-3)


"오늘날에는 피지배자는 헌법에 명기된 제도적 보장에 의해서 지배자의 권력에 참여하며, 그 '의견'은 수치로 측정되어 정부의 교체를 가능하게 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투표라는 '객관적' 형태로) 민의(民意)가 흘러나오는 명확한 도랑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거꾸로 지배자에 의한 민의의 조종도 용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피지배자가 사회적 가치에 대한 참여와 정치적 복종의 자발성을 자각적으로 조직화해 나가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확실히 문자 그대로 민중의 정치적·사회적·시민적 권리의 획득과 그 주체적 의식의 향상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그런 물적·정신적 장치가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적 역할, 즉 현실의 정치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지배관계를 정련하고, 추상화하고, 그 실태를 피지배자의 눈으로부터 가린다는 역할을 지배자가 점점 분명하게 의식하고, 그런 목적의식에 기초하여 대규모로 그 장치를 구사하게 된 역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474-5)


"특히 현대에서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즐겨 쓰는 것은 집합개념으로서의 '인민'에게 지배의 주체를 이양함으로써 소수의 다수에 대한 지배라는 모든 지배에 공통된 본질을 은폐시키는 방식이다. 지배의 '비인격화'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그것은 '법의 지배'라는 것이다." "물론 그 이념이 수행한 역사적 역할은 크고, 오늘에도 그것이 상실되지 않았지만 그 이념은 현실적으로 법을 해석·적용하는 것이 언제나 인간이며 추상적인 법규범으로부터 자동적으로 일정한 구체적 판결이 나올 리도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간과했으며, 국가권력의 현실의 행사가 지배관계를 기초로, 그것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방위한다는 지상목표에 의해서 제약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및 법의 중립적 성격을 참칭(僭稱)함으로써 흔히 반동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여기에 국민공동체 이념이나 이른바 국가법인설과 같은 것도, 역시 지배의 비인격화 카테고리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476-7)


제6장 정치권력의 제 문제


"권력을 인간 또는 인간집단이 '소유'하는 것(사물)으로 보는 입장, 즉 구체적인 권력행사의 제 양태 배후에 이른바 일정불변의 권력 그 자체라는 실체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실체개념으로서의 권력이라 부른다면, 그것에 대해서 권력을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인간(혹은 집단)의 상호작용 관계에서 파악하는 사고방식을 관계 개념 혹은 함수 개념으로서의 권력이라 부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체제가 고정적이고 계급적이거나 혹은 사회적 유동성(mobility)을 결여한 국가 내지 시대에는 실체적인 권력개념이 지배적이고, 또 이데올로기로서는 (정치권력의 전제성專制性이나 폭력성을 강조하는) 실체적인 권력개념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정치권력에 의한 사회적 가치의 독점성이 상대적으로 낮고, 커뮤니케이션의 제 형태가 발전해 있으며, 사회집단의 자발적 형성과 그들 사이(또 국가와 제 사화집단 사이)의 복잡한 상호견제 작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그런 국가 내지 시대에는 관계적·함수적 권력 개념이 발흥하게 된다."(481-2)


"실체적 권력 개념의 강점은, 인간의 행동양식이 사회화됨으로써 단순한 개인적인 상호작용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일정한 객관적 형태로까지 연결되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조직화된 권력의 징표는 ① 권력 행사의 양태 및 피행사자의 행동양식의 범위를 다소라도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법칙(rule)의 존재, ② 권력의 다양한 기능을 분담하는 기관(organ) 내지 장치(apparatus)의 정비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런 법칙(법)이나 장치라는 것은 장기화될수록 그리고 규모가 커질수록 물신화(物神化)하는 경향을 띠게 되므로, 그런 의미에서도 권력은 '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지니게 된다." "그들 기구가 아무리 민주화되어도 거기서의 권력관계는 개별적인 상호작용 관계로부터 추상되고 응고화되는 끊임없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측면을 무시한 관계 개념은 그만큼 허위의식으로 전환되며, (현실을 은폐한다는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482-3)


"권력을 인격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는 이점의 하나는, 널리 인간관계가 권력관계로 '이행'하는 다이내믹스를 분명하게 해줄 수 있다는 점이다." "라스웰(H. Lasswell)은 가치 종류의 조합을 통해서 권력 형태를 상세하게 분류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가 권력의 기저가치(base value)와 권력 자체의 가치를 구별하고 있는 것은, 강대한 노동조합이 스스로 '부'(富)를 소유하지 않고서 부에 대한(특히 배분에 대한) 권력을 가지며, 스폰서나 연출자가 스스로 명성을 지니지 않고서도 타인의 명성을 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 등 어느 것이나 현대의 복잡다기한 사회적 권력상황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정부 권력(governmental power)의 행사에 대한 이른바 입헌제 제한의 강화가 곧바로 인간의 자유 일반의 확대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도리어 '부'에 기초한 권력관계를 표면화하는 결과가 된 것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487-9)


"가치의 획득이나 증대는 집단협력에 의하는 쪽이 개인적으로 하는 것보다 일반적으로 유효하다. 그래서 가치를 둘러싼 분쟁은 그 가치가 희소하며,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강할수록 강한 집단응집력을 갖는다. 그런데 권력 자체도 역시 가치이며, 게다가 그것은 타인(집단)의 제 가치의 박탈을 포함하는 인간관계의 통제이므로, 권력은 다른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 기반(base)으로서도 유효도(有效度)가 높다. 그래서 관계자들 간에 중대한 가치를 둘러싼 분쟁은 집단 상호간에서도, 그리고 집단 내부에서도 그만큼 빨리 권력관계로 이행하기 쉬운 것이다. 또한 그로부터 권력적 통제에 의한 인간관계의 조직화는 끊임없이 규모를 확대하고 권력관계의 피라미드를 점차로 자체 내에 포섭해나가려는 내재적 경향을 띠고 있다. 홉스는 〈꼭 알맞은 권력에 인간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보다 많은 권력을 얻지 않으면 현재 가지고 있는 권력도 확보할 수 없다〉는 말로 권력 특유의 다이내미즘을 예리하게 통찰했다."(489-90)


제7장 현대에서의 태도결정


"우리는 단순히 공식적인 제도에 입각한 형태만이 아니라, 모든 직장이나 모임에서, 명확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또 누가 하고 있는가 하는 주체도 분명하지 않은 형태로 사방팔방으로 끊임없이 사상조사나 충성심사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조용히 지켜본다는 것, 즉 부작위라는 것도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 혹은 지역사회에서 무릇 사회적으로 시끄러운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런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의견의 표명이라든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그런 곳에서는, 그런 적극적인 태도표명을 하는 것이, 특히 첨예하게, 정치적인 개입(commitment)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거꾸로 또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떤 방향에서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고 있는 그런 지역 혹은 집단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지배적인 가운데에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 움직이지 않는 것, 그것 자체가 이번에는 첨예하게 어떤 하나의 정치적인 커미트먼트로서 두드러지게 됩니다."(505-7)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이들 문제에 대해서 좋건 싫건 간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것에 의해 좋건 싫건 간에 일정한 동향에 개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한한 과정입니다. 얼핏 보기에 지극히 간단한 사안처럼 보이는 사회사상(事象)이나 정치문제를 보더라도, 그 모든 구성요소를 끄집어내어 사면팔방으로 조명하고 분석하며, 나아가 그 동태의 모든 가능성을 다 궁구한다는 것은 거의 영원(永遠)의 과제가 됩니다. 그것만 생각해보아도 아무리 완벽하게 보이는 이론이나 학설이라 하더라도, 그것 자체 완결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문적인 분석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결적이지 않은 것에 학문의 진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가설과 검증의 무한한 되풀이의 과정이기 때문에, 의심한다는 것, 자신의 사고방식, 자신의 학설, 자신의 이론에 대한 부단한 회의(懷疑)의 정신이라는 것이, 학문에는 불가결합니다."(508-9)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런 무한한 인식과정을 어느 시점에서 문자 그대로 단절하는 것입니다. 단절함으로써만이 결단이, 따라서 행동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결단하고 선택한 결과 그 자체는 다시 인식과정 속에 되돌아가고, 그리하여 한층 더 인식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만, 결단의 그 시점시점에서는, 보다 완전한 보다 풍부한 인식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는 영원히 모순 혹은 배반이 있습니다. 인식이라는 것은 가능한 한 다면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만, 결단은 이른바 그것을 일면적으로 잘라서 취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를 들면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는 그런 문제에 대한 결단은, 단순히 불완전한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일면적일 뿐만 아니라, 가치판단으로서 일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식의 차원에서 한편으로 최소한의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쪽으로 가담하지 않는다면, 결단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509)


"괴테는 〈행동하는 사람은 언제나 비양심적이다〉하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라는 것은, 우리의 수없이 많은 행동의 그물망이라고 합니다만, 행동의 조합으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사회가 그리하여 우리의 관련된 행동으로 성립되는 한에서, 우리의 행동 혹은 비행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즉 사회에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순수하게 '관찰한다'는 입장, 괴테가 말하는 의미에서 완전히 양심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완전히 무책임한 입장이라는 것으로 됩니다. 따라서 그런 점에서도 신만이, 완전히 무책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식한다는 것과 결단한다는 것의 모순 속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이 아닌 인간의 숙명입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그런 숙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결과의 책임을 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숙명을 자각할 필요성은 관련된 행동이 비정상으로 복잡하게 된 현대에 점점 더 통절한 것으로 되고 있습니다."(509-10)


제8장 현대에서의 인간과 정치


"일반적으로 경계로부터 발하는 말과 행동은 중심부로부터는 '무책임한 비판'으로 간주되고, 완전히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거꾸로 안쪽에 공감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 쉽다." "무릇 벽의 안쪽에 머무는 한, 어떠한 변경에서도 그 활동은, 어떤 의미에서 안쪽의 규칙이나 제 관계에 개입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바깥으로부터의 이데올로기적 비판이 설령 아무리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바깥으로부터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안쪽에 사는 사람들의 실감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 이미지를 바꾸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 "지식인의 어려운, 그러나 영광스러운 현대적인 과제는 그런 딜레마를 회피하지 않고, 완전히 개입하는 것과 전혀 '무책임'한 것의 틈새에 서면서, 안을 통해서 안을 넘어서는 전망을 추구하는 그런 곳에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지성의 기능이란 요컨대 타자를 어디까지나 타자로서 생각하면서도, 그 타자를 '다른 곳에서' 이해하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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