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 로꼬꼬, 고전주의, 낭만주의,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 이성에 대한 확신과 계몽에 대한 열망은 마침내 혁명을 불러왔다. 하지만 혁명은 새로운 사회와 제도 그리고 인간상에 대한 목적의식과 동경은 있을지언정, 그것들을 구현하기 위한 물질적 토대와 구체적인 전범을 갖고 있지 못하였고, 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깊은 간극에서 초래된 혼란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인 살육과 환멸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낭만주의는 이처럼 더 이상 균질하지도 않고 안정적이지도 않은 ‘집단의 해체’라는 사회상 속에서 과거에 의존할 수도 없고 미래에 안심할 수도 없는 한 개인이, 현재의 불투명성에 손을 대면 댈수록 커지는 불안과 두려움을 표현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신에 가득 차 달려가던 계몽주의의 마차는 거대한 바위에 부딪쳐 이미 산산조각 나버렸다.

따라서 낭만주의의 정신은 외부에 대한 폐쇄성을 특징으로 하며, 외적 실천이나 교육을 통해서 도달할 수 없는 오로지 천재적인 직관과 도약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근접 가능한 이상에 대한 동경을 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이기에 낭만주의자는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국외추방자”처럼 영원히 떠도는 신세이다.

낭만주의는 목적지가 없는 방랑이면서 동시에 고향을 향한 여정이며, 찾을 수 없지만 찾아야만 하는 보물섬이다. 설사 그곳에 도달하더라도 평온이 아니라 거기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는 고독과 불안의 근원이며,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인 무한성이다. 신앙을 깨뜨리고 나온 이성이 혼란에 빠졌을 때 돌아갈 곳은 다시 믿음이었다.

물론 이때의 믿음은 더 이상 인격화 된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천국은 신앙의 견고함과는 상관없이 갈 수 없는 장소이다. 이 믿음은 숙명적으로 파멸을 향한 믿음이며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믿음이다. 낭만주의는 철저하게 비극적이며 퇴폐적이다. 낭만주의는 자신과 타인 간의 이질감을 먹고 자라나는 나무이며 해체의 몸부림이다.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의 불합치와 이성과 비합리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는 딜레마에서 오는 갈등은 현대인의 삶의 전제조건이다. 오로지 신앙만으로 지탱하거나 물질만으로 삶을 추동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현대인일 뿐이다. 이 분열된 심연의 한가운데에서 걸어나오는 이가 바로 프로이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 르네쌍스, 매너리즘, 바로끄,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예술가들이 길드의 수공업자로 등록되어, 교회나 궁정의 엄격한 주문 양식을 따르며, 자아 인식이라는 것이 희박하던 시절에는 ‘창작의 고뇌’라는 관념도 부재했다. 이러한 상황은 ‘별을 보며 길을 찾던 시대가 얼마나 행복했는가’라고 노래한 루카치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 고전문화의 재발견으로 대표되는 르네상스는 예술가가 한 개인으로 설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자유의 공기를 호흡하게 되었다는 해방감과 광야에 홀로 선 존재라는 막막함을 동시에 안겨주었으니, 이제는 별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길을 찾아야 하는 시절이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갑작스럽게 도래한 것은 아니며, 상업의 발달과 시민계급의 출현으로 서서히 유럽인들의 내면에 스며들던 자본주의적 제도가 탐미주의와 화학적 융합을 이뤄낼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예술가는 더 이상 작품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만으로 가치를 부여 받았다.

자유는 언제나 방종을 넘어서지 않는 절제를 요구한다. 예술가는 더 이상 수요자에 의도에 좌우되는 작품 제작에 얽매이지 않는 듯 보였지만, 자신의 심미안을 투영한 작품들이 무가치하게 버림 받는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면의 목소리만 따르기에는 현실이 핍진했던 것이다.

이는 곧 르네상스를 통해 그리스의 고전 문화가 부활한 이면에는 그리스 비극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인 Pathei Mathos(고통을 통해 진리에 이른다)의 격언이 함께 깨어나게 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이제 자신의 얼굴에 괴짜와 정신병, 기인의 이미지를 덧칠하였다.

16세기 이후로 예술은 인문비평가들이 펼치는 수사의 향연장에서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정착되어 갔으며, 소위 말하는 ‘교양’의 그늘 안에서 안식을 찾아갔다. 예술은 아무나 할 수 없고, 아무나 볼 수 없고, 그리고 아무나 느낄 수 없는 고상한 ‘ART’로 탈바꿈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과 ‘예술’과 ‘사회’의 3가지 주제 중에서 저자가 방점을 찍고 있는 부분은 바로 ‘사회’史이다. 저자의 의도는 ‘문학’과 ‘예술’의 변천과 전개 양상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닮은 듯 다른 렌즈에 비친 시대별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그려내는 것이다. 일반적인 예술 관련 책들과 달리 도판이 거의 실려 있지 않다는 점도 이런 저자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사회사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역설의 미학이다. 과거에 전개됐던 과정들이 기시감처럼 반복되고,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이 한 사회가 가꾼 토양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새싹들이 옛 제도와 관습을 해체한 후 새로운 사회의 기반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렇게 부단히 요동치는 역설의 파도가 인간의 창조력을 자극하고 예술을 잉태한다.

예술은 종교적 의식(儀式, 意識)에서 비롯했지만, 작가의 자의식이 깨어났을 때 종교의 기반을 잠식한 것은 바로 예술적 창조력이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귀족정의 폐단을 속속들이 체험한 귀족들에 의해 수립됐지만, 민주적 절차에 따라 자신의 설계자를 추방했다. 부르주아 혁명의 최대 맞수였던 절대 왕정을 키워낸 것은, 부르주아들이 보급한 화폐 경제였다.

선악(혹은 미추)는 천사의 날개 속과 악마의 뿔 위에서만 선명하게 나뉘어 숨쉰다. 인간은 그저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갈대일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운명에 엮인 한 개인(또는 가문)이 극적인 슬픔을 겪어내는 과정을 통해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주력한 두 선배와 달리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의 비극에 전통을 회의하기 시작한 당대의 진단 세 가지를 덧붙였다.

아아,
인간의 종족도 신들을 저주할 수 있다면!
(힙폴뤼토스 1414행)

1) 호메로스 서사시부터 비극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의 뜻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벗어난 영역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는 방종을 일삼고 인간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신들을 향한 신뢰와 복종을 거두어들인다. 신은 더 이상 경배의 대상만은 아니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는지 나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 격분이 내 이성보다 더 강력하니,
격분이야말로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을 안겨주는 법.
(메데이아 1078행)

2) 따라서 격정에 휩싸인 인간의 행동은 신과 무관하다. 오이디푸스 왕은 결국 신이 쳐 놓은 운명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극적인 항의의 몸짓을 보였지만, 메데이아의 복수극은 신의 눈길을 벗어나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여정이다.

그래요, 군중은 무서운 재앙이지요.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1359행)

3)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중무장 보병으로 전쟁에 참전한 대다수 시민계급의 활발한 참여로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전성기는 곧 쇠퇴기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제국의 영광에 도취된 민주주의는 합리성을 상실하고 중우정치로 변질되어 갔다.

아이스퀼로스는 비극을 설계했다. 소포클레스는 비극을 완성했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을 의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운명은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행운과 불행은 돌고 돈다는 점을 생각하시고.
고통의 바깥에 있는 자는 위험을 보아야 하며,
잘나가는 자일수록 인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오.
방심하는 사이에 느닷없이 파멸이 닥치지 않도록.
(필록테테스 502행)

흔히 동양의 사유는 음양의 조화, 화복(禍福)이 순환하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격언으로 대표된다. 반면 서양의 사유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엄격함, 절대자 앞에 선 단독자라는 관념이 굳게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타자를 재단할 때 수시로 이분법의 잣대를 활용하지만, 현실은 경계가 불분명하거나 양자가 융합된 상황이 대부분이다.

아후라 마즈다와 아흐리만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치열하게 싸우지만 생명체의 마음에 담긴 본성의 일부이며 사이코패스의 뇌만 떼어내 진공관에서 배양하는 매트릭스의 세계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우리가 서양의 사유라고 콕 집어 말하는 직선적 세계관은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헬레니즘적 세계관은 이와 사뭇 달랐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운명의 무게를 체감하고 행복과 불행이 동전의 앞뒷면과 같음을 놓치지 않았다. 이들이 중국적 사유와 다른 점은 인간을 닮은 신의 섭리를 긍정했으며, 그 뜻에 부합하여 살 것을 주장한 대목이다. 동양 사유의 ‘천(天)’에도 인격적 신의 개념이 일부 들어있지만, 세상의 질서나 운행 원리라는 형이상학적 속성이 더 짙게 배어 있다.

그리스 비극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을 풀기 위해 신의 개입-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라는 다소 허술한 요소를 도입한 것도 바로 꼬일대로 꼬인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는 수단을 이러한 신적인 힘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가 깔려 있었기에 자신과 닮지 않은 그리스도교와의 기나긴 동거를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어온 것이다.

이 사람에게는 오늘, 저 사람에게는 내일
즐거움이 쓰라림으로, 그러다가 다시 사랑으로
변하니까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608행)

처음과 마지막을 예비해주는 신의 음성과, 삶의 희로애락을 주관해주는 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던 시대는 행복했었다. 과학이 진리의 동의어가 될수록 가속화되는 자아의 분열은 신을 갈구하면서 역설적으로 신의 음성이 지워진 시대를 조립해냈다. 완전한 긍정의 끝에서 내달린 길은 완전한 부정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머무를 자리는 기나긴 사잇길의 어딘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