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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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같은 양의 태양빛과 물을 가지고 가장 많은 유기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빽빽하게 들어선 친구들이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내뿜는 호흡을 견뎌낼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을 갖고 있다. 나는 공장형 축사의 소나 돼지처럼 밀집된 환경의 긴장을 극복하고 더 많은 알곡을 품는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들이 듬뿍 뿌려주는 질소 비료의 덕도 적지 않다. 나는 화학적으로 합성된 질소를 맛없다고 외면하는 녀석들과 달리 주어진 양식을 기꺼이 즐긴다. 나는 아프리카의 커피나무나 카리브해의 사탕수수보다 더 화려하게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했다. 나는 세계로 나아간다.

나는 인간 개체수에 비해 너무 많이 생산된다. 하지만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나는 껍질부터 씨눈까지 몸 전부를 자르고 빻고 분해하고 합성해서 다양한 모습으로 부활한다. 나는 납작한 콘푸레이크로 만들어져서 여물 대신 소를 먹여 살린다. 내 씨눈에서 흐르는 기름은 식물성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통에 담겨 판매된다. 내 몸의 대부분을 이루는 복합 탄수화물 분자는 하나하나 분리되었다가 재결합되어 전분이 되고 설탕이 되고 알코올로 바뀐다. 나는 생물만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무생물도 먹여 살린다. 나는 석유를 태운 열에 의해 에탄올로 분해되어 자동차를 굴린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차고 넘친다. 유기체가 먹을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다. 글로벌 외식업계는 나의 눈부신 성장력을 질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회사에 쌓이는 이익도 차고 넘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사람들이 더 비싼 돈을 내고 음식을 사거나 아니면 더 많이 먹어야 한다. 나는 그들의 두 가지 꿈을 모두 현실로 만들어줬다. 나는 고과당옥수수시럽(HFCS)로 바뀌어 청량음료 시장을 점령했다. 나는 복합 가공 식품에 거의 대부분 들어간다. 나는 곡물이지만 소고기이기도 하고 맥도날드 햄버거이기도 하다. 나는 소만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살찌운다. 나는 옥수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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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서 철학으로
F. M. 콘퍼드 지음, 남경희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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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로부터 비롯되는 고대 희랍의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들의 언명은 과거와의 단절이나 새로움의 도약에서 발생한 경이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4원소로 표상한 ‘자연’은 지금의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외부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다. 이 때의 ‘자연’은 형이상학적 존재이며, 신적인 영혼을 간직한 자연이다. 자연의 구성요소는 ‘생명’과 ‘운동’이지 ‘정지’와 ‘죽음’이 아니다.

탈레스에 이어 등장하는 아낙시만드로스에게 4원소는 태초로부터 고유의 분할된 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상태이다. 질서란 각 원소들이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느 한 원소가 자신에게 할당된 영역을 벗어나 다양한 개별자들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은 혼란과 침입이며, 불의와 약탈이다. 이 침범은 한계에 대한 도전이기에 즉각적으로 네메시스(인과응보)를 유발한다.

인간들만이 아니라 신들도 이 한계를 함부로 넘나들 수 없다. 제우스와 포세이돈, 하데스는 각자에게 부여된 영역에 머무를 의무가 있다. 그것은 불사의 신의 행동마저 제어하는 우주의 근본 질서이다. 모이라(Moira, 운명)는 이처럼 영역의 (조화로운) 할당을 표상하며, 이 작업은 어디까지나 비목적적이이서 선험적인 설계도 없이 진행된다. 모이라는 의도가 없는 ‘자연선택’의 고대어이다.

자연은 올림포스의 신들보다 더 원초적인 세계 질서의 표상이다. 자연은 고대인들과 한 몸으로 연결된 동일체였으며 이 집단 의식은 대기처럼 그들의 지성에 스며들어, 독자적인 판단 이전의 모든 의식활동을 불가항력으로 제한한다. 주술의 시대가 양자간의 완전한 합일의 경지였다면 종교의 시대는 자연의 본성과 자연을 모방한 개인의 본성간의 차이를 자각하면서 비로소 펼쳐진다.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면 물질 입자들 사이를 운행하던 신적인 영혼들마저 사라진다. 퓌시스라는 표현은 남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성장’과 ‘생명’의 개념은 상실된다. 자연은 이제 불변하는 원자들의 이합집산의 결과물로 전락했고 신성은 심연 너머의 천상으로 날아가버렸다. 인간의 영혼은 별에서 추락하여 신체라는 감옥에 갇힌, 속죄와 정화를 거쳐야 하는 불완전한 상태로 가라앉는다.

이 추락을 직시한 피타고라스는 신성에 대한 관조와 동일시의 체험을 ‘이성적 진리’에 대한 냉정한 관조로 재해석했다. 그는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신비주의 의식을 ‘지혜를 향한 추구’로 변환시켰다. 이제 죽음은 더러운 육신과 정서와 욕망의 소멸을 뜻한다. 죽음은 해체가 아니라 재생이며 재건이 된다. 지성이 해방됨으로써 인간의 영혼은 가장 높은 하늘에 올라 진리를 바라보게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란 이처럼 지상과 유리된 집단의식, 신적인 영혼, 자연의 본성이며, 더 이상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은 외면의 유사성이 아니라 내적인 퓌시스에 참여하여, 핵심을 전수받고, 마침내 자신 안에 현재하는 ‘종교적’ 체험을 따라간다. 철학은 이 황홀경에 이르려는 시도이며, 모방(미메시스)으로 사유마저 넘어서려는 자기부정이며, 마침내 지복(至福)을 얻고자하는 애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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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널드 케이건 지음, 허승일.박재욱 옮김 / 까치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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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신의 품 안에 있을 때면 ‘정해진 수순’이자 ‘불변의 절차’이지만, 시간의 막을 거쳐 인간 앞에 내려오면 ‘불시에 들이닥치는 변덕스러움’으로 뒤바뀐다. 최초의 민주주의, 위대한 비극 공연들, 논리와 이성을 확신한 소피스트들의 향연장이었던 그리스 아테네의 운명은 영광과 찬미의 황금으로 새겨져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미다스의 손처럼 불행의 씨앗을 품은 찬란함이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놀라운 업적을 자신들의 능력과 결부지어 생각했다. 거기에 깃든 다시 찾아오기 힘든 행운과 신중한 사색의 몫을 고려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전쟁의 위대한 승리는 아테네를 올림푸스 산까지 팝콘처럼 튀어올렸고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그곳에서 내려오기를 거부하며 투표권을 행사했다. 사태가 최악을 넘어서 몰락에 이를 때까지도 말이다.

집단은 개인의 합집합이지만 개인의 결정과 판단력, 선함의 총합은 아니다. 개인은 가끔 마음을 바꾸고 체면을 중시하지만 집단은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수시로 결정된 상황에 구속당하며, 명예-설사 그것이 불명예스럽다 할지라도-외의 덕목을 폐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익과 명분을 모두 추구하는 대중의 함성은 지도자들이 어느 길로 들어서더라도 열광하거나 비난할 준비가 되어있다.

민주주의는 이처럼 허술하고 시끄러우며 분쟁이 끊이질 않고 더디게 나아간다. 자신들이 쌓아올린 성과물에 쉽게 취하고, 평화로움의 권태를 이기지 못하며, 상대방에 대한 인내보다는 억압의 유혹에 자주 마음을 빼앗긴다. 민주주의는 의식하지 않는 공기와 같아서 나무를 심고, 폐기물을 줄이는 등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어느 순간 스모그로 돌변해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한다.

“한동안 사람들은 시칠리아에서 탈출한 병사들의 설명을 듣고서도 그 재난의 규모를 의심했다. 결국 진실을 받아들인 후, 분노와 공포에 휩싸인 아테네인들은 “마치 자신들은 원정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처럼”(8.1.1) 시칠리아 원정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 정치가들에게, 그리고 성공을 예언했던 점술가들에게 분노를 쏟아부었다.” 385

신민(臣民)은 태어남으로써 완성되지만, 시민(市民)은 교육함으로써 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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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
톰 홀랜드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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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의 빈자리를 역사적 상상력으로 채우는 저자의 글쓰기 방식은 베리 스트라우스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구사한 것과 흡사하다. 두 사람의 차이점은 베리 스트라우스가 ‘상상력’에 의존한 반면, 저자는 ‘역사적’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측면이다. 이 섬세한 접근법은 페르시아 전쟁의 생동감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연적인 사실성을 안고 독자의 가슴에 와닿게 해준다.

아울러 분량의 2/3 가량을 페르시아와 스파르타, 아테네의 변천사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함으로써 왜 이들이 동서 문명의 충돌로 일컬어지는 페르시아 전쟁을 벌일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일관성 있게 묘사한다. 이 서술 구조는 헤로도토스의 저술 목적과 내용 배분을 그대로 차용하면서 주제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어서 先代의 실패한 기획을 보완하겠다는 저자의 야심찬 오마주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재구성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3국의 발전 과정 또한 여타 역사서보다 뛰어난 솜씨로 간결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어 고대사 전반에 대한 개괄서로도 유용한 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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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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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침>
양쪽 모두가 원대한 포부를 품고 전쟁에 전력을 쏟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할 때는 누구나 열성을 다하는 법인데다, 당시에는 펠로폰네소스에도 아테나이에도 전쟁이 뭔지 몰라 전쟁이 싫지 않은 젊은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47p

<점 심>
사람들은 행위를 평가하는 데 통상적으로 쓰던 말의 뜻을 임의로 바꾸었다. 그래서 만용은 충성심으로 간주되고, 신중함은 비겁한 자의 핑계가 되었다. 절제는 남자답지 못함의 다른 말이 되고, 문제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엇 하나 실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하게 되었다. 충동적인 열의는 남자다움의 징표가 되고, 등 뒤에서 적에게 음모를 꾸미는 것은 정당방위가 되었다. 287p

<저 녁>
아테나이인들은 모든 전선에서 완패했고, 그들의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들은 보병이며 함대며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그 많던 자들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온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상이 시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650p

무려 2500년 전에 그리스의 두 제국이 전쟁을 벌였다(중국은 춘추시대 말기였고, 한반도에 철기가 들어오기 전이었다). 스파르타는 날로 강대해지는 아테나이에게 두려움을 품었고, 아테나이는 지배자로 올라선 자신의 지위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일념에 모든 것을 걸었다. 스파르타는 극강의 군국주의 국가였고, 아테나이는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였다.

전쟁은 시작하기 전에는 희망과 열정의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일단 시작하고 난 뒤에는 피로와 후회의 연속이었으며, 마침내 끝났을 때에는 침묵과 폐허만을 남겼다. 20세기의 초입에서 인류는 제국주의의 기치 아래 본 과정을 무서우리만큼 정확하게 반복 경험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다시금 정념의 에로스에 도취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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