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서 철학으로
F. M. 콘퍼드 지음, 남경희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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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로부터 비롯되는 고대 희랍의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들의 언명은 과거와의 단절이나 새로움의 도약에서 발생한 경이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4원소로 표상한 ‘자연’은 지금의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외부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다. 이 때의 ‘자연’은 형이상학적 존재이며, 신적인 영혼을 간직한 자연이다. 자연의 구성요소는 ‘생명’과 ‘운동’이지 ‘정지’와 ‘죽음’이 아니다.

탈레스에 이어 등장하는 아낙시만드로스에게 4원소는 태초로부터 고유의 분할된 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상태이다. 질서란 각 원소들이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느 한 원소가 자신에게 할당된 영역을 벗어나 다양한 개별자들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은 혼란과 침입이며, 불의와 약탈이다. 이 침범은 한계에 대한 도전이기에 즉각적으로 네메시스(인과응보)를 유발한다.

인간들만이 아니라 신들도 이 한계를 함부로 넘나들 수 없다. 제우스와 포세이돈, 하데스는 각자에게 부여된 영역에 머무를 의무가 있다. 그것은 불사의 신의 행동마저 제어하는 우주의 근본 질서이다. 모이라(Moira, 운명)는 이처럼 영역의 (조화로운) 할당을 표상하며, 이 작업은 어디까지나 비목적적이이서 선험적인 설계도 없이 진행된다. 모이라는 의도가 없는 ‘자연선택’의 고대어이다.

자연은 올림포스의 신들보다 더 원초적인 세계 질서의 표상이다. 자연은 고대인들과 한 몸으로 연결된 동일체였으며 이 집단 의식은 대기처럼 그들의 지성에 스며들어, 독자적인 판단 이전의 모든 의식활동을 불가항력으로 제한한다. 주술의 시대가 양자간의 완전한 합일의 경지였다면 종교의 시대는 자연의 본성과 자연을 모방한 개인의 본성간의 차이를 자각하면서 비로소 펼쳐진다.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면 물질 입자들 사이를 운행하던 신적인 영혼들마저 사라진다. 퓌시스라는 표현은 남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성장’과 ‘생명’의 개념은 상실된다. 자연은 이제 불변하는 원자들의 이합집산의 결과물로 전락했고 신성은 심연 너머의 천상으로 날아가버렸다. 인간의 영혼은 별에서 추락하여 신체라는 감옥에 갇힌, 속죄와 정화를 거쳐야 하는 불완전한 상태로 가라앉는다.

이 추락을 직시한 피타고라스는 신성에 대한 관조와 동일시의 체험을 ‘이성적 진리’에 대한 냉정한 관조로 재해석했다. 그는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신비주의 의식을 ‘지혜를 향한 추구’로 변환시켰다. 이제 죽음은 더러운 육신과 정서와 욕망의 소멸을 뜻한다. 죽음은 해체가 아니라 재생이며 재건이 된다. 지성이 해방됨으로써 인간의 영혼은 가장 높은 하늘에 올라 진리를 바라보게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란 이처럼 지상과 유리된 집단의식, 신적인 영혼, 자연의 본성이며, 더 이상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은 외면의 유사성이 아니라 내적인 퓌시스에 참여하여, 핵심을 전수받고, 마침내 자신 안에 현재하는 ‘종교적’ 체험을 따라간다. 철학은 이 황홀경에 이르려는 시도이며, 모방(미메시스)으로 사유마저 넘어서려는 자기부정이며, 마침내 지복(至福)을 얻고자하는 애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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