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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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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윽고, 갈채가 가라앉고, 사람들이 다시 자리에 앉자 체코 학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감사합니다, 친구들이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는 허리 굽혀 절하고 나서 자기 자리로 간다. 그는 자신이 지금 인생의 가장 위대한 순간을, 영광의 순간, 그렇다, 영광, 어째서 이 말을 못 쓸까보냐, 그런 순간을 맞고 있음을 알며, 자신을 위대하고, 아름답게 느끼며, 자신이 유명하다고 느끼며 그리하여 의자를 향한 이 행진이 장구하고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갈망한다. 78)
즐거움은 언제나 더 즐거울 것을 요구한다. 더 즐겁지 않다면, 더 즐거울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즐거움은 단순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권태와 허탈함으로 변질된다.
그렇다면 "즐거움을 피하는 것이 바른 길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여기서 쿤데라의 말은 '느림'이다. 즐거움은 그 속성상 빠르고, 강렬함을 추구하기 마련이지만.
'느림'은 정해진 결말을 의도적으로 늦추는 지연의 수사학이 아니다. '빠름'이 건너뛰고 지나간 무수한 즐거움을 재발견하는 일이며, 아예 즐거움을 재정의하는 일이다.
'느림'을 속도계에서 빼내어보면 쟁점은 방향이 아니라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직선상에서 한 지점을 보고 서 있을때, '느림'은 둥근 원으로 자신의 길을 구현한다.
원은 제자리를 떠나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그 자리가 다름을 알고 다시 떠나는 공간이다. 반복이 아니라 순환이고, 회귀가 아니라 재생이다. 삶과 죽음이 한 가지에 있다.
즐거움을, 피하거나 억누르려 애쓰지 않는다. 갈증은 물 한잔을 생명수로 명하고, 허기는 빵 한 조각을 만찬으로 칭한다. 자아와의 만남은 언제나 느리고, 더딘 일이다.